올가 토카르추크 『방랑자들』 (4) – 날뛰는 여인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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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가 토카르추크의 소설 방랑자들은 여러 단편이 모인 작품이다. 이야기, 논문, 콩트 등이 결합한 이 작품은 프리드리히 슐레겔의 낭만 문학의 이념인 보편 문학의 개념에 가장 적절한 예가 될 수 있겠다.

이 작품 속에 포함된 많은 단편 가운데 가장 핵심은 아마도 책의 제목을 따온 것으로 보이는 ‘방랑자들’이라는 단편이다. 이 단편의 주인공은 아누쉬카이다. 그녀는 모스크바에 살고 있다. 그녀가 모스크바 지하철 입구, 케르베로스의 개(즉 지옥의 문을 지키는 개)가 지키는 입구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아누쉬카의 아들은 유전적 질병으로 거동할 수 없는 병을 앓고 있다. 이 질병은 아누쉬카와 그의 남편이 체르노바에서 방사선을 쏘였기 때문에 얻은 질병이다. 그녀는 아들과 함께 정신적 고통을 겪는 남편을 돌본다.

그녀의 남편은 감옥에 갔다 온 모양이다. 아들 병의 원인에 대해 입을 잘못 놀렸던 모양이다. 그 뒤 남편 역시 침대에 누워 매일 술로 세월을 보낸다. 국가에서 주는 보조금으로 살아가는 데 큰 지장은 없다. 단편의 서두는 이렇게 시작한다.

“밤이 되면 세상 위로 지옥이 떠오른다.”

모든 것이 밤에는 “형태를 읽어버린 몸뚱이처럼 이전에 과연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 짐작조차 하기 힘든 상태가 된다.” 이런 밤에 아누쉬카는 꿈을 꾼다. “목을 자른다든지, 사랑하는 이의 몸을 핏물에 담근다든지…”하는 꿈이다. 아누쉬카에게 이것이 세상의 진면목이다.

작가의 관심은 아들이나 남편, 사회에 있지 않지만, 사회적 문제가 이 단편 전체에 절망적인 분위기로 깔려있다. 작가는 오직 아누쉬카의 내면에만 주목한다.

2)

아누쉬카는 일주일에 하루는 휴가를 얻는다. 그 하루는 그녀의 시어머니가 자기의 아들과 손자를 돌본다. 아누쉬카는 그 하루에 약국에 들르거나 음식물을 사거나 하는데, 그날 그녀가 어기지 않고 하는 한 가지 일이 있다. 그것은 마음껏 우는 일이다.

그녀는 대개 대성당에 가서 기도하면서 운다. 그녀는 꼭 아버지같이 인자한 모습을 지닌 성상 앞에서 운다. 그녀가 울기 위해서는 주변이 고즈넉해야 하지만 성상의 눈이 그녀를 반드시 지켜보아야 한다.

그날도 휴가를 얻어 평소 가던 대성당에 갔지만, 그날따라 관광객이 많아서 아누쉬카는 울음을 터뜨릴 기회를 잡지 못했다. 아누쉬카는 도시 주변에 사람이 거의 없는 작은 성당으로 갔다. 이번에는 성상의 모습이 “물에 빠진 사람의 얼굴” 같았기에 도대체 울음이 나오지 않았다. 아누쉬카는 이렇게 생각한다. “신이 약하며 패배자라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

성상을 올려보던 아누쉬카는 성상의 모습에 충격을 받는다. 성상의 시선이 그녀의 정수리에 꽂히면서 그녀의 먼 곳의 천둥소리를 듣는다. “마치 뭔가를 체험한 듯했고, 무언가 그녀를 관통하고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이 느낌은 충격이었지만 어두운 절망적 느낌이 아니었다. 이 느낌을 작가는 “몸에서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는 어떤 맑은소리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고” 서술한다. 아누쉬카에게 어떤 근본적 전회가 일어난 것이다.

끝내 울음을 울지 못한 아누쉬카는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서 집 앞에 도착했지만 돌연 멈추어 선다. 다시 집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또 앞으로 걸어간다. 이러기를 몇 번 반복하다, 그녀는 이윽고 발걸음을 돌려 지하철로 돌아간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것처럼, 그녀는 울음을 울지 못한 상태에 시달리며 마침내 현실을 떠난다. 그녀는 그때부터 지하철의 지하 세계에 산다. 매일 이런저런 지하철 노선을 갈아타면서 끝없이 움직인다. 아누쉬카는 노숙자, 아니 방랑자가 된 것이다.

3)

물에 빠진 자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공포로 악을 쓰는 파랗게 질린 얼굴이 아닐까? 성상의 얼굴이 아누쉬카에게 왜 그런 모습으로 비추어졌을까?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성철 스님이 10년 면벽 수도 끝에 깨달았다. 그때 그의 눈에 비친 세상은 피투성이의 세계였다고 한다. 아누시카 역시 어떤 깨달음을 얻었는지 모르겠다. 이 세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아무런 “생각도, 근심도, 기대도, 희망도 없었기에, 그것은 안락한 느낌이었다.”

아누쉬카가 지하철 노숙자의 세계에서 만난 여인이 날뛰는 여인이다. 그녀는 덕지덕지 옷을 껴입고 있다. 머리는 수건과 모자로 둘러싸고 지하철역 앞에서 8자를 맴돌면서 입으로는 욕을 쏟아낸다. 누구도 듣지 않지만 아누쉬카는 날뛰는 여인에게 다가가 밤이면 함께 머무른다.

그리고 어느 날(몇 달이 지났는지를 작가는 말하지 않는다) 지하철역에 청년들이 모이고 그 가운데는 말을 몰고 온 처녀도 있다. 이 청년들을 보면서 아누쉬카는 마침내 울음을 터트리게 된다. 그들이 그의 아들 피에티아[‘피에타’와 같은 말로 보인다)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바위처럼 무겁고 고통스럽다. 그녀의 안에서 피에티아가 부풀어 오르고 점점 자라났다. 아마 다시 그를 출산해야 할 것 같았다. … 피에티아가 어느 틈에 그녀의 폐에 달라붙고 목구멍까지 솟았다. 흐니느는 것 말고 다른 방법으로는 도저히 그를 꺼낼 수 없을 것이다.”

아누쉬카가 지켜보던 중, 무리 속의 한 처녀가 말이 도망치려 하자, 채찍으로 등을 내리친다. 그것을 보고 아누쉬카와 날뛰는 여인이 달려간다. 그리고 짓눌린 목구멍을 짜내어 소리친다. “(말을) 내버려 두라고!!”

이것은 니체의 일화를 연상시킨다. 니체는 토리노 시장에서 채찍을 얻어맞는 나귀를 껴안고 울었다고 한다. 그 이후로 니체는 정신적 어둠 속에 살았다고 한다.

4)

청년들과 싸움을 벌인 덕분에 경찰서에 끌려갔으나 곧 방면된 아누쉬카는 마침내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 이야기는 이것으로 그치지만 이어지는 단편에서 날뛰는 여인이 무슨 욕을 했는지가 나온다. 날뛰는 여인의 말이다.

“몸을 흔들어, 움직여, 움직이라고, 그래야만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어. 이 세상을 다스리는 존재에겐 움직임을 지배할 능력은 없어. 우리의 몸은 움직일 때 비로소 신성하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어. 움직여야만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는 거야.”

세상의 지배자와 싸우는 힘은 움직임에 있다. 작가가 소설 방랑자에서 말하려는 것이 그것이다. 이 말을 통해 아누쉬카가 집과 아들과 남편을 모두 떠나 지하의 세계로 간 이유가 설명된다. 밤의 세계, 지옥의 지배자, 케르베로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아누쉬카로 하여금 다시 집으로 돌아가게 했다. 그건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말에게 채찍질하는 것과 울음의 터뜨리는 것 사이의 연관이 무엇일까? 주인공에게 마침내 때가 다가온 것인가? 때 즉 카이로스 말이다.

올가 토르카추크의 신비한 철학이 시종 나의 뇌리에 떠나지 않는다. 아뉘시카는 울음을 터뜨릴 때를 얻었지만 나는 철학의 때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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