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보씨 무상급식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오세훈은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다. 그럼 구보씨도 정신 연령이 다섯 살 인가? 뭐, 꼭 그렇게 볼 필요는 없다. 안철수도 구보씨랑 나이가 비슷하지만, 그렇다고 구보씨가 안철수처럼 머리가 좋은 건 아니지 않은가. 동년배라는 건 그저 살아온 시절과 나날이 같고 그래서 동질감을 느끼기 쉬운 조건이 하나 마련되어 있다는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구보씨는 오세훈과 동질감을 느끼기 참 힘들다. 차라리 오세훈보다는 같은 오씨고 나이도 비슷한 오바마가 낫다.

구보씨도 때로 한 똥고집 하는 편이지만, 오세훈의 똥고집에는 욕이 절로 나온다. 지가 시장이면 모든 시정(市政)이 제 뜻대로 흘러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자신의 견해와 판단에 확신에 있다 해도 시의회의 결정을 거슬러서까지 끝내 자기 생각을 고집하려 하는 건 시정이 아닌 다른 목적을 위한 것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그런 식의 태도로는 온갖 쇼를 다 동원해봐야 그 다른 목적마저 이룰 수 없을 게 뻔하다.

구보씨는 물론 그 따위 주민투표에 참여하지 않는다. 불행히도 구보씨가 서울시민이 아닌 관계로, 불참한다고 내세울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렇지만 이 일은 서울시민만의 문제가 아니다. 무상급식 논란은 그 사안 하나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이 사회를 어떻게 운영해나가야 할 것인가 하는 방향과 직결되어 있다.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의 흐름에 대한 철학적 이해와도 무관하지 않다.

구보씨는 도시락 세대다. 알루미늄으로 된 사각형 도시락(그걸 당시엔 보통 ‘벤또’ 또는 ‘변또’라고 했다. 일본어 べんとう에서 온 말이다.)을 가방에 넣어 들고 다녔다. 겨울이면 그 도시락을 조개탄 난로 위에 겹겹이 얹어놓고 데워 먹었다. 반찬이라야 시큼한 김치와 콩나물, (역시 일본말로 ‘뎀뿌라’라고 하던) 어묵 조각 정도였고, 달걀부침이라도 하나 얹어져 있으면 진수성찬인 격이었다. 도시락 통에서 반찬 국물이 흘러 책이며 노트가 젖는 일도 더러 있었다.

그래도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즐거웠다. 중고등학교 때는 대부분 점심시간 전 쉬는 시간에 까먹어 버리곤 했지만… 보통 두셋이 모여서 먹었는데 반찬이야 먼저 먹는 사람이 임자고, 때로 남의 도시락을 몰래 홀랑 먹어버리는 일도 있었다. 도시락에서 드러나는 빈부격차, 그런 게 없진 않았겠지만 심각하게 의식하지는 못했다. 다들 고만고만하게 못 살았으므로. 때로 도시락을 못 싸온 친구들이 있으면 나눠 먹었다. 국가적으로 쌀을 아끼느라 보리밥 혼식을 장려했고 그것 때문에 도시락 검사를 하기도 했던 시절 얘기다.

그러니 구보씨는 무상급식뿐 아니라 학교급식이라는 걸 경험해 보지 못했다. 오세훈도 그랬을 것이다. 그래서 무상급식이 못마땅한가. 하지만 오세훈말고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제가 경험하지 못한 일을 받아들일 줄 안다. 그렇지 못해서야 무슨 성장과 무슨 발전이 있겠는가. 오세훈이 보수의 아이콘을 자처하는 것도 웃기는 일이지만, 그렇게 발전을 거부하는 것이 보수라면 그 보수의 운명이 몰락이라는 건 보리밥 먹은 날 방귀가 잦다는 사실보다 더 명확한 일이다.

학교급식이 일반화하려면 경제의 뒷받침이 있어야 한다. 그건 맞다. 구보씨가 지나온 시절을 돌아봐도 그렇다. 그런데 우리사회에 학교급식이 일반화한 지는 이미 오래다. 물론 그 전에도 단체 급식이 이루어진 곳은 있었다. 대표적인 곳이 군대다. 하지만 이것이 무상급식이었다고 할 수는 없다. 군인들은 징병된 군인이건 자원한 군인이건 군인으로서 근무를 하는 것이고, 그래서 많건 적건 보수를 받는다. 군대의 급식은 근무의 필요 때문에 주어진 것이며, 따라서 공짜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럼, 학생들은 어떤가? 학생들이야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니 이들에게 공짜로 밥을 줄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게 문제다. 사실 이런 생각이 낡은 것이고, 극복해야 할 잔재다. 그럼 어떻게 보는 것이 옳은가? 학생들은 미래의 잠재적 일꾼이고 배운다는 건 일을 하기 위한 준비니까 그 준비 기간 동안 사회가 이들을 부양할 필요가 있다고 해야 할까? 그게 맞는 얘길까? 아니다. 얼핏 그럴 듯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이것도 아니다. 역시 낡은 생각이다.

이런 생각들에는 일하는 자만이 먹을 수 있다는 발상이 깔려 있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거다. 물론 이런 생각이 적합하고 진보적인 때도 있었다. 시민계급과 노동계급이 성장하고 노동의 중요성이 한껏 부각되던 시절, 봉건 귀족계급을 떨어내어야 할 기생충으로 취급하던 시절이 그랬다. 알다시피 초기자본주의는 노동의 가치를 앞세우며 성장했다. 그러나 부르주아의 패권이 확립되면서 자본이 노동을 압도하는 가치의 근원으로 등장하게 된다. 돈이 돈을 낳는 사회가 정당화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노동의 가치를 전면에 내세워야 하는 것 아닐까? 노동이야말로 경제적 가치의 근원이고 노동하는 사람들이야말로 진정한 주체라는 점을 다시 부각시켜야 되는 것 아닐까?

그런데, 그게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노동이 여전히 중요한 인간 활동이라는 건 분명하지만, 노동의 양태가 변하고 있고 기존의 노동에 대한 수요가 줄고 있는 까닭이다. 이미 진부해진 ‘노동의 종말’에 대한 논의를 다시 들먹일 필요도 없이,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문제로 부각되고 있는 것은 일자리 부족이다. 자동화와 정보화 와중에서 줄어드는 일자리를 상쇄할 만큼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여기서 생겨나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 일을 하고 싶어도 일자리가 없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그리고 사실, 모든 사람이 예전처럼 오래 일할 필요도 없다. 이건 크게 보면 좋은 일이다. 인간 사회를 꾸려가는 데 필요한 전체 노동시간이 줄어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일자리와 노동시간을 제대로 나눈다면 누구나 조금만 일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릴 수 있을 법하다. 맑스가 꿈꾼 공산사회가 생각나지 않는가. 그러나 불행히도 실제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생산적인 자리는 소수가 차지하고 많은 사람들이 잉여 취급을 당한다. 짐스럽거나 없어도 되는 존재로 전락할 위기에 놓이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안정된 일자리가 줄어들고 있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생겨나는 또 하나 심각한 문제는 세대 간 갈등이다. 지속적 일자리가 늘기는커녕 줄고 있으니 새로 커 나오는 세대에게 돌아갈 몫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나마 있는 자리는 기성세대가 차고 앉아 내놓질 않는다. 젊은 세대는 예전보다 더 심한 경쟁에 내몰리지만 그렇게 시달린 이들 가운데 극소수만이 상대적으로나마 안정된 직장을 가질 수 있다. 우리나라에 이른바 대기업 일자리는 모두 합쳐 200만이 채 안 되고 공무원은 100만 정도다. 이 가운데 매년 새로 나오는 일자리가 얼마나 되겠는가?

구보씨는 요즘 TV에서 유행하는 오디션 프로들을 볼 때도 영 마음이 편치 않다.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는 듯해서다. 연예인이나 스포츠 선수는 각광받는 소수와 그늘에 묻힌 다수의 대비가 전형적인 영역이다. 이것이 우리사회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고 있지는 않은가? 매번 다수의 탈락자를 만들어내는 이런 구조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조만간 이른바 88만원 세대의 혁명적 반발이 불가피하지 않겠는가?

“어휴, 답답해. 구보야, 그런 거랑 무상급식이 무슨 상관이니? 너도 오세훈처럼 갈피를 못잡고 옆으로 새는 거 아냐?”

“이크, Y야, 너 그럴 줄 알았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되는데…”

“어수선하게 새롭지도 않은 얘기 늘어놓지 말고 그냥 핵심만 얘기하면 안 돼?”

“모든 일엔 다 준비가 필요한 거야. 핵심을 건드리기 위해선 충분한 전희가 필요하잖아.”

“너 그렇게 까불다 혼난다. 오세훈만 욕하지 말고 너도 나이 값 좀 해라.”

“쩝… 어쨌든 내 얘기의 요점은 이제 노동만을 내세워 삶의 경제적 가치를 정당화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는 거야. 노동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극적이고 당당하게 자신들의 삶을 보장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거지. 보편적 복지의 정신이라는 것이 바로 그런 거라구.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하고 그걸 권리로서 주장할 수 있어야 하며, 사회는 마땅히 그걸 보장해 줘야 한다는 얘기야. 시혜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말이지. 그래야 1등 시민과 2등 시민, 생산적 인간과 잉여적 인간 따위의 차별이 생겨나고 확대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구.”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가능하면, 놀고먹는 사람한테두. 내가 아까 말했잖아. 일하고 싶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구. 그리고 일을 안 하는 사람이 남들보다 더 풍요를 누리는 건 곤란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구나 당당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어야 해. 무엇보다 일에 대한 협소한 개념을 바꿔야 한다구. 자기가 좋아하고 보람을 느끼는 활동을 한다면 그게 다 일이잖아. 가령 노래를 부른다든지 그림을 그린다든지 연극을 한다든지 하는 것 말이야. 이런 활동을 통해 꼭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결과를 생산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가 좋아하는 활동을 하는 사람이 기본적인 물질적 삶을 영위할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는 거야.”

“구보야, 그거 너무 나간 거 아냐? 아직 우리 사회가 그 정도 기반은 없잖아?”

“뭐, 그렇긴 해. 그러니까 그런 걸 준비하면서 교육 영역에서부터 생각을 바꿔나가자는 거야. 아이들이 누구나 차별 없이 밥을 먹을 수 있게 한다는 건, 이 사회에 사는 사람은 당연히 인간으로서의 기본 조건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체험하게 하는 거라구. 그러니까 이건 단순히 무상급식에 얼마가 들어가느냐 하는 식의 비용의 문제만이 아니야.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떤 방향으로 끌고 나가느냐 하는 철학의 문제라구. 오세훈은 이런 문제에 대한 철학이 없거나 잘못된 거야. 전혀 미래 지향적이지 못한 거지. 그런 면에서 오세훈은 꼴보수가 맞아.”

“잠깐, 구보야. 넌 오세훈이랑 같이 도시락 세대, ‘변또’ 세대라며? 무상급식은커녕 아예 학교급식도 못 받아봤다고 했잖아. 그런 환경에서 학교를 다녔으면 너도 낡은 제도와 관념의 세례를 받았을 거 아냐. 그런데 넌 어쩌면 그렇게 시대를 앞서가는 척, 진보적인 척 할 수가 있어?”

“하하, 그게 바로 철학의 힘이라구. 믿거나 말거나 말이야.”

[월례발표회 참관기] 조영준 선생의 논문 ?주체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2011년 8월 월례발표회]

 

논문 제목: 주체로서의 자연 -셸링 자연철학의 생태학적 함의
발표자: 조영준(경북대)

 

조영준 선생의 논문 ?주체로서의 자연?에 관하여

후기: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1.

한국에서 철학자 셸링은 영 찬밥이다. 발표자 조영준 선생이 아마도 한국에서 유일한 셸링 연구자가 아닐까 한다. 지금까지 한국에서 독일 고전철학자 가운데 칸트와 헤겔만이 주로 언급되어 왔다. 이것은 일본에서 셸링이 주로 언급되는 것과 비교해 보면 무척 흥미롭다. 하여튼 그러다 보니 독일 고전철학은 한국에서 무척 심심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독일고전철학의 핵심적인 문제가 그저 형이상학적인 문제로 취급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는 셸링이 끼어들면서 극적으로 반전된다. 여기에 비극적인 시인 횔덜린의 삶까지 엮어놓으면 이제 사람들은 독일고전철학이 수 세기에 걸쳐서 철학자들 심성을 왜 그렇게 자극했는지 이해할 것이다.

칸트와 자유, 튀빙엔 신학대학에서의 자유의 나무, 천재 셸링, 사랑에 빠진 셸링의 도피와 은거, 『정신현상학』에서 헤겔의 분노, 횔덜린의 혁명 음모와 체포, 학생운동의 발상지 예나대학, 나폴레옹의 침략과 독일낭만주의의 변절, 프러시아의 개혁, 헤겔과 베를린 대학, 시인 횔덜린의 비극 적 파멸, 베를린 대학에 등장한 말년의 셸링 등등. 이 많은 사건들은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가 한 민족의 운명과 직결된 드라마였음을 드러내 보인다. 여기에 헤겔 이후 헤겔좌파의 역사까지 보태면, 1793년 칸트의 『한갓된 이성의 한계 내에서의 종교』로부터 시작하여 1847년 마르크스의 『독일 이데올로기』에 이르는 거의 50년에 걸친 철학의 역사는 세계사적인 획기를 이루어낸 엄청난 드라마였다.

필자는 『헤겔 정신현상학』 ?서론?을 주석(『영혼의 길을 모순에게 묻다』)하면서 이 세기의 드라마를 풀어보려 하였으나 아직은 역부족이었다.

필자가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 철학의 역사가 오늘날 한국에서 다시 한 번 변주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한국에서 사회주의 사상과 포스트모더니즘, 라캉과 들뢰즈, 그리고 한국좌파 운동에서의 분열을 셸링과 헤겔의 대결이라는 모델 속에서 이해한다.

다행이 셸링 연구자가 한국에 출현했으니 이를 계기로 다시 한 번 독일 고전철학의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그러니 필자로서는 이번 발표에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오래 존경해마지 않는 선배님을 모시고 술을 먹다가 뛰쳐나와 발표회장에 이르렀다. 이 자리를 빌려 필자의 건방짐에 대해 선배님께 용서를 빈다.

2.

조 선생의 발표를 듣다가 필자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 또 한 사람 철학에 미친 사람이 있구나 하고 말이다. 다행히 교사로 근무한다니 먹고는 사는 것 같다. 하지만 발표하는 그의 목소리에 넘치는 힘은 언제라도 철학이라는 모험의 바다에 뛰어들기 위해 그 자신의 삶을 벗어던지고 말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선배 한 분이 생각난다. 우면동 산 속 비닐하우스에서 기거했던 분, 끝까지 철학을 사랑하여 철학을 시로 승화시킨 분, 결국 벌레가 척수에 기어들어와 쓰러지기까지 자기를 돌보지 않았던 분.

우리 한국의 철학계에는 이런 분들이 많다. 철학을 마치 종교적인 구도의 길을 가는 듯이 연구하는 분들이다. 그들은 먹고사는 삶에 조금도 연연하는 법이 없이 지금도 구도로서 철학의 길을 걷고 있다.

조 선생을 보면 이런 구도자로서의 철학자라는 삶의 모습을 다시 엿볼 수 있어 너무 기쁘다.

3.

조영준 선생의 논문 제목은 ?주체로서의 자연?이다. 부제는 ‘생태학적인 함의’이다. 제목은 금방 이 논문의 내용을 보지 않고서도 거의 짐작하게 만들어 준다.

우선 간단하게나마 조 선생의 논문의 요지를 들어보자. 논문의 의도는 생태학적인 위기에 처해서, 단순히 인간의 자연에 대한 윤리적 태도만을 문제 삼아서는 안 된다는 데 있다. 자연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되지 않겠는가? 조 선생은 이렇게 질문하면서 이런 자연 개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단서를 셸링의 자연철학에서 찾으려는 것 같다.

자연에 대한 이해의 전환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조 선생은 오늘날 생태철학의 입장과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보겠다. 이런 의도에는 어떻게 보면 반세기 전 하이데거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이데거 역시 현대의 과학기술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존재론적인 전환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런 전환은 이미 김지하 선생이 생명철학에서 시도하여 왔다. 아마도 조영준 선생의 의도가 제대로 실현된다면 이런 생태철학의 흐름이 더욱 풍부한 근거를 가질 것으로 기대된다.

4.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그렇다면 셸링이 이해하는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 조 선생은 셸링의 자연철학을 3기로 나누어, 초기 피히테의 절대적 자아 개념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절과 중기 그의 독자적인 자연철학이 제시된 시기(1798-1800), 그리고 180-1806 사이의 동일철학의 시기로 나눈다.

그런데 조 선생이 논문에서 강조하려는 것은 바로 중기의 입장이다. 특히 조 선생은 이 시기에 셸링이 제시한 생산성 개념을 강조한다. 이 생산성 개념은 거슬러 올라가면 스피노자의 자연 개념에서 유래한다. 그것은 곧 자연의 역능, 잠재성의 개념이다. 조 선생의 역점은 스피노자의 사후 잊혔던 생산성 개념을 다시 부활한 사람이 바로 셸링이라는 데 있다.

조 선생은 여기서 관념론적인 자연 설명과 실재론적인 설명을 구분한다. 피히테에서처럼 자아가 정립하는 것으로서 자연 개념은 관념론적이다. 반면 역능 개념은 실재론적인데, 조 선생은 이렇게 구분함으로써 독일 고전철학 속에서 셸링의 철학의 위치를 분명하게 하려 한 것으로 보인다. 조 선생은 자연 개념의 이런 실재론적인 성격 때문에 셸링의 철학은 마르크스로 이어지는 유물론의 선구가 된다고 본다.

그런데 조 선생의 논문에는 왜 이것이 실재론적인가가 충분히 설명되지 않아서 유감이었다. 또 무엇을 실재론적이라고 하는가도 설명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발표 이후 이 문제에 대한 많은 토론이 이루어졌던 것 같다.

이 점에 관해 사실 조 선생은 ‘역동적인’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암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 관해 필자가 약간 부연 설명을 하자면, POTENZ 즉 역능 잠재성 개념은 수학에서 미분의 힘에서 연상되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미분함수의 전개는 발생론적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또는 생산적이라고도 한다. 조 선생은 바로 이런 발생론적 생산적인 과정을 일컬어 실재론적인 자연 설명이라고 본 것이 아닐까 한다.

5.

조 선생은 논문의 4절에 이르러 ‘주체로서의 자연’ 개념을 제시한다. 아마 이것이 논문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라고 보인다. 그런데 사실 이 부분은 좀 애매하다. 왜냐하면 철학에서 주체라고 한다면 항상 데카르트 이래로 자기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사유의 활동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미 그런 활동은 관념론적인 것이라고 해서 셸링이 비판했던 것이 아닌가? 그래서 만일 자연을 주체로서 파악한다면, 이것은 피히테의 입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닌가? 조 선생의 논문에 대해 많은 토론자들은 이렇게 질문했다.

조 선생의 답변은 논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조 선생은 여기서 두 가지 주체 개념이 존재한다고 본다. 둘 다 자기를 대상으로 정립하는 활동이라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하나는 그 활동의 산물인 대상과 자아가 대립되는 것이다. 반면 다른 하나는 오히려 활동의 산물인 대상과 자아가 일치하는 경우이다. 전자가 피히테적인 주체라면 후자가 바로 셸링적인 주체이라고 조 선생은 말한다.

조 선생은 이 구분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전자의 자아는 ‘경험’적이고 후자의 자아는 ‘선험적’이라고 말한다. 이런 구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런 차이에 대하여 조 선생이 충분하게 설명하지 않으므로 필자가 나름대로 덧붙여 설명하자면 이렇다. 즉 예를 들어서 자아가 주관적인 목적을 대상으로 정립하면 그것은 결국 객관적인 실재의 반격에 부딪힌다. 그러나 자아가 자연의 진정한 내재적인 목적을 정립한다면, 그 대상은 객관적 실재와 일치하게 된다.

결국 셸링의 ‘주체로서의 자연’ 개념은 주관이 자의적인 원리가 아니라, 자연의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하여 그것을 자아의 활동성을 통하여 대상으로 정립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해될 수 있다. 여기서 방점은 자연의 내재적 원리에 대한 인식에 주어진다. 셸링에 있어서 자연의 내재적 원리는 곧 자연을 발생시키는 생산성이다.

그렇다면 굳이 주체의 활동성을 말할 이유는 없지 않을까? 아니다. 셸링의 경우 활동성은 피히테적인 주체의 활동성과도 구분된다. 여기서 주체의 활동성이란 자연에 원리를 부여하는 활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연의 원리를 드러내는 활동이다. 이런 생각은 마치 미켈란젤로가 조각가란 돌 속에 내재하는 형상을 쪼아내어 드러내는 자라고 말한 것과 서로 통한다.

약간의 사변을 덧붙이자면, 어쩌면 자연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 자신을 드러내도록 시키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인간은 자연의 반성하는 매개자가 아닐까?

당연히 셸링의 철학이 윤리학적인 칸트, 피히테의 성격과 구분되어서 미학적이고 예술적인 성격을 지니는 이유가 여기서 이해된다. 자연에 관한 이런 미학적인 개념이 자연에 대한 생태학적인 개념과 직결된다.

조 선생이 논문의 결론에서 설명한 바, 주체로서 자연이라는 셸링적인 개념을 생태학적인 함의는 그렇다면 무엇이 될까? 이렇게 되지 않을까? 인간의 활동은 자연의 내재하는 생명을 드러내는 활동이어야 한다고. 이런 생각은 김지하가 인간의 삶이 신명을 드러내는 활동이라고 규정한 것과 맥락이 통하지 않을까?

6.

헤겔은 셸링의 철학을 비판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자연의 내재적 원리에 대한 인식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헤겔의 물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직관인가? 그렇다면 그것은 자의와 어떻게 구분되는 것인가? 자신의 자의를 직관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닐까?

당시 낭만주의자들은 중세의 기사제에서 개인의 자유와 전체와의 조화가 일치하는 삶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중세 신성로마제국에서 독일통일의 환상을 보았다. 헤겔의 분노는 이런 낭만주의자들이 직관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환상을 정당화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헤겔은 자연의 내재하는 원리를 인식해야 한다는 셸링의 정당한 입장은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그렇다면 그 원리를 어떻게 인식할 것인가? 그 물음을 수행한 자가 바로 철학자 헤겔이다. 그런데 셸링의 관점에 서 있는 조 선생은 헤겔의 이런 비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할까 궁금하다.

7.

알려진 바에 따르면 셸링은 베르그송에게 영향을 주었고, 베르그송은 다시 들뢰즈에게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오늘날 들뢰즈의 많은 생각들, 특히 자연과 역사를 역능 개념을 통해 체계화하려는 들뢰즈의 시도는 셸링에게서 유래한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한다.

셸링의 철학에 대해서는 이미 헤겔 이후 많은 비판이 주어져 왔다. 어떻게 본다면 헤겔의 철학은 셸링에 대한 비판에 기초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들뢰즈 철학이 지니는 한계를 헤겔의 철학을 통해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닐까? 사실 이것이 필자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져왔던 문제이고, 앞으로 많은 논의가 있기를 바라는 주제이기도 하다.

끝으로 철학의 정열을 잃지 않는 조 선생에게 다시 한 번 뜨거운 연대를 느낀다. 세상으로부터 소외된 고독한 철학자들, 그러나 민족의 운명을 철학으로 개척하고자 하는 성스러운 철학자들의 연대에 있는 모든 동지들 곧 한철연의 이름으로 환영한다.

사랑, 그 고통의 여정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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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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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내 안의 타자

요시코가 마쓰시타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마음에 걸린 것은 그가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라는 것과 대학 졸업반이라는 사실이었다. 지방의 작은 도시에서는 비밀이란 게 없었다. 어머니의 염려가 깊어지자 요시코는 마쓰시타를 피해 다녔지만, 마쓰시타는 일 년이라는 시간을 변함없이 그녀의 곁에서 맴돌았다.

마쓰시타의 관심이 싫지 않았지만, 그가 본국으로 돌아가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불안감이 그녀를 더 움츠려 들게 했다. 이런 요시코의 마음은 아랑 곳 없이 마쓰시타는 틈만 나면 부산으로 왔다. 교문을 나서면 마쓰시타가 기다리고 있는 날이 많아지고, 어느 순간 그녀도 마쓰시타를 기다리게 되었다.

반복되던 일들이 어느 날 중단되면 일상이 낯설게 느껴지듯이 마쓰시타가 보이지 않는 날은 발길을 쉽게 떼지 못하고 교문 앞에서 서성이는 자신을 발견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요시코는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이상하게 시간이 지날수록 그녀의 마음은 온통 마쓰시타에게로 기울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자주 해운대에 갔다. 전철 안은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붐볐지만, 둘 이외의 다른 사람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넓은 해운대 백사장에는 데이트를 나온 젊은이들이 간간이 눈에 띌 뿐, 그 어느 누구도 두 사람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그 넓은 백사장은 마치 두 사람만을 위해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랑의 힘이 외부의 장애는 장막으로 가려주지만, 세상의 잡다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지는 못한다. 요시코와 마쓰시타가 만난 시점은 일제 강점기가 마지막에 다다른 때이다. 일본의 힘은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하더라도 자신의 민족을 강제 점령하고 있는 국가의 국민을 사랑한다는 데 따른 심리적인 고통은 피하기 어려웠다.

마쓰시타에 대한 마음이 깊어갈수록 요시코의 고민도 깊어갔다.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겄노. 맨 날 마음은 지 멋대로인 기라. 만나고 온 날은 내가 미쳤제 싶다가도 자고 나면 보고 싶은 기라.” 자신의 마음을 자기 스스로 조절할 수 없는 날들이 많아지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는 만남에 불안감도 커져갔다.

 

사랑, 고통의 시작

일본 본토에서는 학생들에 대한 징용이 심해졌기 때문에 마쓰시타는 부모의 뜻에 따라 울산에 계속 머물렀다. 마쓰시타가 본국으로 돌아가지 않고 머물고 있었기에 두 사람에 대한 소문은 마을을 돌고 돌았다. 온 마을 사람들이 요시코만 보고 요시코 이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어머니의 한숨은 나날이 늘어 갔다.

자신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벌어지는 전쟁 때문에 현실의 삶은 고단했다. 일본인과 한국인 사이의 적대감정은 상상을 초월하였다. 자신들의 삶 자체가 위협받는 한국인들의 분노와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는 일본인들의 집념은 크고 작은 사건을 만들었고, 그때마다 요시코는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두 사람의 사랑은 단단해져갔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로부터 사랑받는다는 의식은 때때로 초월적인 힘을 발휘하여 무모한 용기를 준다. 주변의 염려와 위협적인 시선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매일 만나서 둘만의 장소를 찾아 헤매었다.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시간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날 문득 요시코는 자신의 몸에 이상이 생겼음을 직감했다. 축하받고 자랑스러워해야 할 일이었지만, 드러낼 수 없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우리 자신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외부의 힘을 만났을 때 초월적인 의지력으로 헤쳐 나가기도 하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경우를 만나기도 한다. 당시의 요시코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보이지 않았다.

사랑이 깊어질수록 두 사람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달마다 있던 것이 없자 어머니는 졸도할 지경에 이르고, 요시코는 아침만 되면 집을 나섰다. 신산한 마음을 어찌할 수 없어 뒷산에 가면 언제나 마쓰시타가 있었다. 둘은 점점 말을 잃어갔고, 마쓰시타는 요시코가 안쓰러워 어찌 할 바를 몰랐다.

오늘도 마쓰시타와 둘이서

남 모르는 고통을 안고

조용히 산과 들로 걸어가면

근심걱정에 싸여

눈에는 이슬이 맺혀

단풍잎만 바람에 휘날려도

눈물이 쏟아진다.

 

마쓰시타, 포켓에서

손수건 꺼내어 내 눈물을 닦아 주며

서로가 위로하고

정을 주며 정을 받고

둘이가 양손 굳게 잡고

우리의 따뜻한 깊은 사랑

변치 말자고 맹세하며 다짐하며

이 세상 끝까지 같이 가리라는

 

옛 추억이 다시금 떠오르네.

<첫사랑 2> 중에서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었기에 60여 년을 가슴에 모아 둔 이야기를 시로 읊조리는 동안 병마가 지나간 흔적을 고스란히 지닌 얼굴이 회한으로 일그러졌다. 눈가에 맺히는 눈물이 지난 세월의 고통을 말해주고 있었다. 잊어야 할 것을 잊지 못하고 기억을 지닌 채 살아야 하는 사람의 고통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어쩌면 지난 60년의 세월 속에서 요시코는 마쓰시타에게 잊혀진 존재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재의 할머니에게는 요시코가 그대로 살아 있어 그때의 고통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었다. 잊지 못하기에 기억 속에 갇혀 있던 고통이 지금 내 앞에서 한 편의 시로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사랑, 멈춰버린 시간

<이 여자 이숙의>의 이숙의는 남편 박종근이 빨치산 토벌군에 의해 사망했음을 알았고, 죽은 남편 때문에 간첩사건에 연루되어 미결수가 되기도 했으며, 경찰서로 불러 다니는 고초를 겪었다. 그럼에도 그녀의 삶은 의연했고, 말없이 그 고통을 삼켰다. 그녀가 의연할 수 있었고 교사로서 충실하게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었던 것은 남편의 사망을 확인했기에 가능했다고 본다.

이와 달리 할머니가 아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마쓰시타가 자신을 잊었는지 아니면 아직 살아 있는지, 현해탄 너머 일본 땅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은 어떻게 자랐는지 등 알아야 할 사실들에 대해 아는 게 없었기에 과거의 기억 속에서 나올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할머니는 ‘시’라는 출구를 통해 요시코로부터 벗어나고자 한다.

자신의 삶을 지배했던 과거의 시간에 사로잡혀 있는 게 어떤 것인지를 말해주는 동화가 있다. <말하는 나무의자와 두 사람의 이이다>란 책에서 나무의자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지던 날 “곧 돌아올게”라는 말을 남기고 할아버지의 손을 잡고 아침에 집을 나간 어린 이이다를 20년 동안 기다린다. 나무의자는 할아버지가 이이다를 위해 만들어준 이후 언제나 이이다와 함께 했다.

20년이 지난 어느 날, 나무의자는 우연히 오래 된 폐허 같은 집을 발견하고 들어간 4살의 유우꼬를 보고 이이다가 외출에서 돌아 왔다고 여긴다. 마치 아침에 나갔다가 오후에 돌아온 이이다를 맞이하듯이 나무의자는 유우꼬와 이야기를 나눈다. 어린 유우꼬는 예전의 이이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나무의자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나무의자와 소꿉놀이도 하고 그림도 그리며 논다. 오후가 되면 마당의 분수가 있는 연못 가에 둘이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하면서.

어느 날부터 유우꼬는 마치 자기가 이이다인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이러한 유우꼬를 염려한 오빠 나오끼는 나무의자에게 유우고는 이이다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나무의자는 나오끼에게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유우꼬를 깊이 감추려고 한다. 유우꼬를 위해 나오끼는 이이다를 찾다가 리쯔꼬를 만난다. 진짜 이이다가 분명한 리쯔꼬는 그러나 이이다란 어린 소녀에 대한 기억이 없다.

나오끼에 의해 유우꼬가 자신이 기다리던 이이다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의자는 부서지고 만다. 의자에 대한 아픈 기억을 안고 할머니의 집을 떠나 온 어느 날, 나오끼와 유우꼬는 리쯔꼬로부터 편지를 받는다. 리쯔꼬는 자기가 이이다였으며, 원폭에 의해 할아버지를 잃고 그 충격으로 기억을 상실한 상태에서 양부모에게 발견되어 리쯔꼬로 살고 있었으나 이제는 기억이 돌아왔노라고 했다.

리쯔꼬는 부서진 의자를 들고 와 할아버지가 만들어 주었던 그 의자로 다시 만들어 자신의 침대 옆에 놓아두고 “내가 이이다야. 알겠니? 너에게 조그만 엉덩이를 얹고 앉았던 이이다란 말이야.”라고 매일 말을 건네고 있지만 의자는 침묵만 지킨다고 편지로 알려 왔다. 아침에 나간 이이다가 곧 돌아 올 것이라는 믿음 때문에 나무의자는 2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기억 속으로 홀로 묻혀버린 그 이름, 이숙자

기억은 자기 자신에 대한 앎의 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내가 무엇을 기억하는가’는 ‘내가 어떤 일을 경험했는가’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기억 속에 존재하는 요시코는 마쓰시타와 연관될 때 자신의 실존에 대한 문제를 지닌다. 할머니의 80여 년의 생애 중에서 요시코의 기억을 제외한다면, 남는 것은 한센병을 앓는 이숙자라는 여인만 남는 것이다.

이숙자, 할머니의 법적인 이름이다. 무슨 내용인지 알 수 없으니 봐 달라고 부탁하신 공과금 고지서에 찍힌 이름이다.

“이숙자라고 되어 있어요.”

“그기, 그기 그란께 해방되고 고칠 때 제대로 안 고쳐서…”

그날 이후 할머니는 한 번도 이숙자라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다. 그 이름에는 마쓰시타를 처음 만났던 시간이 들어 있기 때문에 영원히 기억 속에만 간직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한센병 이전의 할머니의 고운 모습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아이가 태어나면 가장 먼저 고민하는 것이 이름 짓는 일이다. 이름을 단순히 한 사람을 호명하는 도구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생애와 연관 지어 생각한다. 작명소가 있으며, 아이의 이름을 지을 때 학식이 있는 사람을 찾거나 돈을 들이는 데는 호명 이외의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이다.

이름은 존재를 의미한다. 내가 누군가를 부를 때에는 이름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부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름을 쉽게 알려주지 않거나 타인의 이름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 간혹 유명인들의 이름을 알더라도 그 사람 자체는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때의 이름은 한 사람의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상징적 호명의 도구일 뿐이다.

마쓰시타는 할머니를 ‘숙자’가 아닌 ‘요시코’로 불렀다. 마쓰시타가 알고 사랑했던 여인은 요시코였지 숙자가 아니었다. 할머니가 감추고자 하는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여러 가지 경험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유복했던 어린 시절, 울산에서 부산으로 다녔던 고녀 시절, 마쓰시타와의 첫 만남 등 할머니의 생애에서 다시는 돌아 올 수 없는 시간들이 이숙자라는 이름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이숙자’라는 이름을 거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이 한센병에 걸리기 전의 모습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그 이름을 거부하고 요시코라고 스스로 부를 때 밝아지는 얼굴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채 2년이 되지 않는 사랑의 기억이 나머지 자신의 생애와 견주어서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일까. 그리고 나에게 말한 ‘이말란’이라는 또 다른 이름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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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잠재적 귀족들의 사회 : 귀족사회 지향하는 대한민국에 대한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현재 한국사회의 많은 병리적 현상 가운데 가장 중심에 위치하는 것은 양극화문제이다. 대통령 선거나 지방선거 때마다 선거입후보자들이 지역균형발전이라는 양극화 해소용 백신을 공약으로 내걸지만 아직까지 이런 공약이 별 효과는 없는 것 같다. 그만큼 꽤 오랜 시간 동안 우리사회를 괴롭힌 문제다. 양극화란, 말 그대로 ‘자본’의 편향 문제이다. 자본이 한쪽으로 치우치면 소수의 풍족함과 대다수의 빈곤으로 양분되고 거기에 따른 대다수 사람들의 상대적 박탈감은 사회 분위기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지역적 관점에서 서울은 양극화의 전형적인 모델이다. 자본가들의 주 밀집지역인 강남권과 강남을 제외한 비주류 지역인 非강남권으로 나누게 된다. 사회통념상 동일한 행정권 아래 이렇게 양분된 도시모델을 찾기는 아마 힘들 것이다. 한마디로 두 개의 서울이 있는 셈이다. 대한민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서울에 모여 사는 서울시민들의 정서에 ‘지방’이라는 말은 이미 서울을 제외한 비주류 지역을 지칭하는 말이 된지 오래지만 이제는 강남을 ‘서울 대표시민구’(서초?강남?송파)라는 호칭으로, 강북은 ‘강북 지방’으로 서울의 지역성을 다시 정의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남들 보다 상대적으로 월등하거나 풍족한 자본의 여유를 가지고 자신들의 구역을 특정화시키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이 선망하는 귀족주의이고 구별짓기 행위이다.

최근 언론매체의 보도에 간간히 귀족들의 구별짓기가 구체적으로 목격된다. 서울 남산 3호터널 인근의 스테이트타워 펜트하우스에는 영국이나 홍콩 등지에서 운영되는 고급 비즈니스 클럽을 표방한 이른바 ‘젠틀맨스클럽’이 성행중이다. 사회 상위 0.01% 고객을 대상으로 연회비가 1천만 원이 넘는다. IMF이후 부익부빈익빈의 양극화 현상이 본격화되면서 오히려 귀족마케팅으로 VIP고객을 획득한 백화점, 은행, 호텔, 명품 숍 등 소비중심 서비스업체들은 쏠쏠한 재미를 봤고 고급 비즈니스 클럽은 귀족마케팅의 정점에 와있는 느낌이다. 서비스업체 뿐 아니라 문화관련 업계에도 이런 마케팅은 존재한다. 고급화로 차별화된 문화공연을 제공하는 강남구 삼성동의 마리아칼라스홀은 대기업관련 부유층이나 의사, 약사, 법조인등의 고소득 전문직 종사자들을 주요 고객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곳 역시 VIP들의 사교모임 장소로 활용되며 대관 요청 시 내부 심사를 통해 대관 요청자나 요청단체의 권위나 지명도가 자격요건에 맞지 않을 경우 대관이 불가능하다. 이런 예에서 우리 사회의 새로운 상류층들은 과거의 경제적 자본에 의존하던 방식과는 다르게 문화자본과 사회자본 소유의 문제가 중요함을 알 수 있다. 또 자본주의에서 문화산업의 소비패턴이 어떻게 상류층과 일반계층을 차별하는지도 구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앞에서 언급한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 주거지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아파트 부녀회의 가격 담합, 집값 올리기 등은 부의 재창출 및 외부적 응집력의 강화를 통해 외부인들이 강남권에 진입하는 것을 원천 차단한다. 강남권 주택 지구에서 살다가 한번 나가면 다시 들어오기 힘들다는 말이 그것이다. 말을 만들어보자면 ‘一落不入’이라고나 할까? 구별짓기는 이뿐만 아니다. 결혼정보회사에서 ‘좋은 상품’을 구분하는 기준의 차이는 좋은 집안끼리의 혼인을 장려한다. 경제적으로 풍족한 집안이나 강남지역에서 서울대 진학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사실을 두고 보면 한국사회에서 서울대 출신의 사회적 장악력을 가늠할 수 있고 대대로 그 출신성분을 유지하려는 욕구인 학벌지상주의는 한국에서 강력한 신분구조를 만들어내는 주요 요인 중에 하나이다.

그런데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는 이러한 중심주의 신화를 지향하는 사고와 행동, 그리고 이에 말미암은 구성원들의 갈등 유발현상은 단지 유력 지역구에 사는 사람들에게만 혐의를 둘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비주류 지역에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러한 사회적 병폐는 한결같이 비판하면서 정작 자신도 언젠가는 상류지역?계층에 편입하고 진입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신분상승의 꿈이다. 앞서의 1차적 문제는 신흥귀족들이 배타적인 현 상황을 지속시키고 세습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실행에 옮기고 있는 점이지만 그들의 노력에 중산층은 물론 현 정권에서 확실히 규정한 서민층까지 암묵적으로 동의한다. 꽤 지난일이지만 2008년 18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 서민이미지의 진보신당 노회찬이 귀족이미지의 한나라당 홍정욱에게 노원구에서 패배한 것과, 같은 시기 도봉구에서 민주당의 김근태가 보수우파 정치인 신지호에게 지역구를 내준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물론 ‘우리지역도 한번 잘살아 볼까(?)’라는 생각은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너무 단도직입적이고 무엇인가 진지한 사유와 성찰이 결여되어 있다. 누구나 사회적으로 부유한 삶을 누리려는 욕망은 있고 존중되어야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가 계속해서 강자에게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는 이런 비현실적인 결과가 꾸준히 나오고 있다. 대선이나 지방선거만 되면 가까운 동네나 시장거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보통 이런 문제를 체제의 문제로 보거나 도덕의 문제로 보는 시각이 있지만 좀 더 근원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대한민국의 근대와 현대의 역사적 접점이 정확히 맞물리지 못한 상황에서 시민사회를 경험할 여유 없이 엉겁결에 수용하게 된 민주주의제도와 자본주의체제를 아직까지도 충분히 소화하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대한민국 사회가 잘못 전수된 전통적 정치체제와 사회의 통념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해방 이후 근대 국민국가 건설운동이 한국전쟁으로 무산되고 전후 이데올로기적 사회구조가 지속되면서 미군정의 지배를 통해 일제강점기의 유산이 고스란히 전수되었다. 물론 그 이후 경자유전?농자본위(耕者有田?農者本位)의 원칙 아래 토지개혁이 진행되었고 봉건적 신분질서를 실질적으로 극복하는 듯 했지만 이승만 이후 반공이데올로기의 대두는 사회운동을 통한 평등질서를 자리매김하는데 걸림돌이었다. 전제군주제-일제강점기-미군정-이승만 정권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지배체제는 대다수의 국민들을 절대 권력자가 백성들에게 내려주는 은혜로운 베풂의 수혜자 입장에서 벗어나기 어렵게 만들었다고 본다. 이후 국민이 정치상황에 참여하지 못했던 군부독재 시대의 성과주의, 성장위주, 업적정치는 부정적인 측면으로 우리의 정치사 현실에 그 잔상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다보니 우리 국민은 자본의 공세에 대해 반성적, 비판적으로 대처할 힘이 부족했고 IMF이후 신자유주의 국면을 맞이하면서 오로지 자본을 위한 나라가 되었다.

현재 우리사회가 누구나 귀족적인 신분상승의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연유에 있어서 문화적인 면에서 조선시대 이른바 지배귀족계층의 주류문화였던 양반(兩班)문화에 대한 관념도 어느 정도 작용하지 않았을까. 원래 조선 초기에 사회신분은 양인(良人)신분과 천인(賤人)신분이 법제적 기준이었지만 이후 양반과 非양반의 신분구분이 더 중요시 되었고 양반?중인?양인?천인의 네 신분으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양반이란 말은 원래 관료체계에서 비롯된 말이고 양반은 사적 토지를 소유한 지배신분계층이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일반 양인들이 과거에 응시하는데 어떠한 제약도 명시하지 않았지만 일반 양인들의 경제력은 양반들의 경제력과 그에 따른 교육환경을 따라갈 수 없었다. 결국 조선은 지식엘리트 집단인 양반지식인층에 의해 통치되었고 조선왕조 500년은 이런 보수적 유교정치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양반계층의 신분적 우월성은 혈연에 의한 특권과 차별적 대우가 세습되는 인간집단을 의미한다. 신분은 세습되는 것이고 자기와 자파의 이익을 위해 자신의 신분이 적용되는 외연을 끊임없이 확대한다. 양반이란 신분은 이미 과거 선망의 대상이었고 입신양명(立身揚名)을 통한 세력의 확대는 조선시대 상위층의 구별짓기 방법이었다. 1894년 신분제가 폐지되면서 양반이라는 신분은 없어졌지만 긴 시간동안 우리의 관념 속에 자리 잡고 있던 신분제의 기억은 그대로 우리의 문화의식 속 심층구조에 자리 잡고 있다. 일제강점기와 근대화를 거치면서 양반이란 개념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지니게 되었지만 과거 권력에 대한 독점권을 포섭하기 위한 방법과 그 형태는 현대 신흥 귀족들과 그 귀족사회를 꿈꾸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의식과 별반 다름없다.

다만 사회체제가 다를 뿐 구조적인 문제는 동일하다. 성호(星湖) 이익(李瀷)이 조선후기 지배층의 무능력과 벌열(閥閱)숭상을 비판한 내용과 마찬가지로 현재 신흥 귀족세력은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국가는 이를 방치한다. 상대적으로 생존권과 행복권을 박탈당하고 있는 많은 중소계층에게 무한경쟁의 논리를 강요하면서 희망이 있는 것처럼 쇼를 하고 있다. 그러나 희망은 찾기 힘들다. 노력의 보상이라고 하는 명문대 입학은 경제적 지원이 없으면 실현하기 어렵다. 신분전환의 유일한 기재였던 교육은 자본에 포섭된 지 오래이다. 재벌가와 사회지배층의 지배력 확대에 대한 계속되는 합리화는 우리의 성찰을 무디게 만들고 거기에 동조하게 한다. 무의식으로 쫒아 가게 만들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조장한다.

역사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나 세습적 신분제를 유지하려는 인간의 모습은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얼기설기 혼란스러웠던 우리의 근현대는 성찰을 통한 과거 극복에 실패했고 그 폐단이 고스란히 현재화된 문제점이 있다. 역사의 발전과 더불어 의식의 개진이 전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의 자화상은 엄마의 젖가슴만 인식한 채 성인이 되어서도 부분으로 전체를 이해하는 페티시즘을 안고 살아가는 형상이다. 자신의 생존과 자본의 연결을 인간 삶의 전부라고 생각하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자신이 그 중심에 서있어야 안정된다. 오늘 우리가 항상 느끼는 불안과 공포는 사실 외부에서부터 왔다기보다는 내부적으로 형성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시대적인 아픔도 분명 존재하고 억울한 면도 있겠지만 현실의 시대착오적 발상은 결국 우리 안에서 돌파해야 한다. 이미 사회의 중심 권력의 자리는 선점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중심화의 신화는 서로가 실현 불가능한 사안임을 인식해야 한다. 시간이 갈수록 중심의 배타성은 심각해질 것이다. 작은 부분부터 사회적 공동체의식을 확립시켜야 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생적인 공동체문화의 태동이 중요하다. 공동체적 국가가 아닌 지배력에 의존하는 국가체제가 상존하는 한 고대 동양의 정치철학을 대변하는『서경(書經)』의 “한쪽과 한 당파에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탕탕(蕩蕩:사악함이 없이 관대하고 큼)하며, 한 당파와 한쪽에 치우침이 없으면 왕의 도가 평평(平平)하며…(無偏無黨王道蕩蕩, 無黨無偏王道平平…)”라는 공평의 통치철학에도 근접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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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국대학강사노동조합에서 국민대분회장을 맡고 있던 황효일씨가 2011년 가을학기에 부당하게 해고되었지만 국민대 교내에서 시위를 열고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제소하여 부당해고에 맞서왔다. 국민대 학생들은 ‘황효일 교수님 해고를 반대하는 모임’을 결성하여 항의하는 뜻을 펼쳐왔고 결국 대학본부는 2011년 7월 8일 부당해고를 철회했다.” 최근의 이 사건은 대학사회가 얼마나 경직되고 배타적인 사회인지를 증명함과 동시에 상대적으로 사회적 약자들의 연대와 노력이 현실 문제 개선에 큰 힘이 됨을 증명했다. 반대로 상위계층인 교수와 비정규직 하위계층인 강사의 현실적 차이와 자본의 위력은 강사들이 노조를 외면하고 대학 측의 입장에 고분거리는 ‘어찌할 수 없는’ 이유인 현실을 반영한다.

한국 비자(visa)계급을 말하다 [썩은 뿌리 자르기]

강경표(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원곡동 이야기

지하철 4호선을 타고 한참을 가다보면 안산역에 도착한다. 안산역을 나와 지하도를 건너서 잘 보이지도 않는 2번 출구를 찾아 나오면 그 곳에 원곡동이 있다.

지금은 꼭 그렇지만도 않지만 예전에는 외국인 거리라고 하면 이태원을 먼저 떠올렸다. 코쟁이 백인들이 돌아다니는 곳, 백인이 아닐라치면 미국인이 활보하던 곳, 우리나라를 지켜준다던 미군이 놀던 곳 이태원은 그런 동네였다.

원곡동에도 외국인이 있다. 알록달록한 얼굴들만큼 많은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곳, 노동자의 쉼터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토요일 저녁 해질 무렵이면 우즈벡 식당 노천 테이블에 앉아 음식을 먹으며 수다를 떠는 중앙아시아 아저씨들부터 팔뚝만한 꽈배기를 몇 개씩 사가는 중국 아줌마, 식당 유리창에 붉은 글씨로 개 구(狗)자를 멋지게 써놓은 조선족 동포들, 카레 냄새가 향기로운 인도 식당과 먹기 힘들만큼 원래 맛을 고집하는 베트남 식당, 너무나 당당하게 차려입은 짧은 치마가 민망해 쳐다보기도 힘든 동남아 언니들까지 그들의 삶이 있는 그곳이 바로 원곡동이다.

힘들고 허전한 하루를 위로받기 위해 모국에 있는 가족과의 짧은 통화를 기다리며 슈퍼 앞에 차려둔 국제 통화용 전화기 앞에 길게 줄을 서서 고향 이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까지… 주말의 원곡동은 그렇게 활기차 보일 수가 없다.

그러나 새벽녘 입김을 불며 나가본 안산역 옆 공터 주차장 인력 시장은 사정이 다르다. 어슴푸레 비치는 가로등 불빛 사이로 칼날처럼 나누어진 구획. 한국인, 우리의 동포인 조선족과 고려인, 그리고 외국인들. 인력시장으로 불어오는 매서운 칼바람, 누군가 구획을 넘어 오갈라치면 느껴지는 싸늘한 시선들. 일용직 노동자의 경쟁은 그때부터 시작된다.

하루 품삯이 한국 사람은 일당 7만원, 동포들은 5만원, 나머지 외국인들은 3만원으로 정해지고 비싼 한국 사람보다는 말 통하는 동포들이 우대를 받는 곳, “저 힘든 일 좋아합니다, 잘 합니다”라는 색다른 억양의 큰 목소리가 몇 번 들리고 나면 봉고차들의 부르릉거림과 함께 거리는 금방 한산해 진다. 오늘도 조선족 때문에 힘센 중앙아시아인들 때문에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 한국 사람들은 무거운 어깨를 뒤로하고 조선족을 욕하며 자리를 뜬다. “새끼들 그냥 짱깨 땅에나 있지…”

– 비자계급

살인미수 혐의의 재미교포는 14년 동안 강남에서 학원장을 할 수 있지만 재중동포인 김산(본명 장지락)의 외손자는 7년 전부터 대한민국에서 목수로 일한다. 행정상의 착오일까? 행정상의 착오라기 하기에는 그 시간이 너무나 길다.

지난 해 황유복 교수(베이징중앙민족대 교수)는 “해외 거주 한인을 싸잡아 재외동포라고 부르는 것은 크기와 색상, 재질을 구분하지 않고 구슬을 손에 잡히는 대로 꿰는 격”이라며 아예 동포와 교포를 구분해서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다(연합뉴스 2010.10.04). 황교수는 다른 나라에서 한시적으로 거주하는 한국인은 ‘재외국민’, 거주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한 경우는 ‘재외교포’,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거주국의 시민권을 취득한 경우는 ‘재외동포’라고 부른다. 사전적인 정의 따르면 ‘동포’란 ‘같은 나라 또는 같은 민족의 사람을 다정하게 이르는 말’이라고 되어 있고 ‘교포’란 ‘다른 나라에 아예 정착하여 그 나라 국민으로 살고 있는 동포’를 지칭하는 말로 동포의 외연이 교포 보다는 크다. 사실 동포와 교포라는 단어는 병행해서 사용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교수가 동포와 교포를 구분하자고 주장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재미동포 재일동포라는 말은 사용해도 재중동포, 재러동포라는 말은 잘 사용하지 않는다. 조선족 고려인이 그들의 이름이다. 동포라는 사실은 인지하고 있지만 그들을 동포로 대하는 이는 거의 없다. 우리 정부 또한 “재외동포 참정권”이라는 말을 쓰면서도 실제로는 재외동포를 국적에 따라 차별할 뿐만 아니라 지원에서도 많은 차별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비자 문제만 해도 재중동포?재러동포와 재미동포?재일동포가 비자를 받는 방식이 다르다. 법이 완화되었다고는 하나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동포는 대한민국에 들어오기조차 힘들다. 재미동포와 재일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는 단순노무를 하는 사람에게는 발급되지 않지만 이 비자 취득자는 가족을 동반할 수 있다. 재중동포나 재러동포가 받는 H-2비자는 3D 직종에 근무하는 방문취업비자로 가족을 동반할 수도 없다. 더 황당한 사실은 F-4비자를 받는 사람들은 한국어를 못해도 되지만 H-2비자를 받는 사람들은 실무 한국어 시험을 치러야 할뿐만 아니라 쿼터제로 비자가 나온다는 것이다.

물론 H-2비자는 대상 국가의 경제적 수준을 고려하여 정해진다. 결혼을 해서 한국 국적을 취득할 수 없다면 재중동포와 재러동포뿐만 아니라 원곡동에 거주하는 약 57개 나라의 사람들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비자가 H-2비자다. 그나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C-3비자(관광이나 친지 방문)로 들어와 불법으로 체류하며 이상한 기획사를 통해 E-6비자(수익이 따르는 예술 활동 및 전문 방송 연기자)를 받아 강제로 몸을 팔거나, 외국 학생 유치라는 명목으로 판매되는 유학프로그램을 통해 D-2비자(유학생)를 이용해 들어와 노동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한국 사람은 모르는 한국비자의 종류는 9종 94개다. 즉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는 재외교포 포함 외국인들을 94 가지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이다. 비자 취득 자격을 살펴보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나누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 민족계급론

국적에 따른 국가의 차별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 바로 우리들 자신이 재외동포를 바라보는 눈이 그것이다. 스스로 질문을 해보자. 당신은 재미동포나 재일동포를 바라보는 눈과 재중동포 또는 재러동포를 바라보는 시선이 다르지는 않은가? 또는 백인과 황인, 흑인을 보는 눈이 다르지는 않은가?

생태학의 선구자쯤으로 알려진 에른스트 헤켈은 1905년 그의 저서에서 인종과 민족을 4단계로 분류하고 있다. 1)원시 민족 또는 미개인, 2)야만족 또는 반(半)미개인, 3)문명민족, 4) 문화민족이 그것이다. 또 다른 분류인 <인종과 민족의 계통수>라는 1902년 분류표를 보면 한국계도 그 표에 포함이 되어 있다. 혹시 여러분들은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는가? 우리는 몽고인종에서 분리되어 한국?일본계열이 되며 일본인 보다는 열등한 민족으로 표시가 되어 있다. 중국은 몽고인종에서 분리된 인도차이나계열로 우리와는 계열이 다르지만 약간은 더 높은 위치에 있다. 물론 우리보다 더 낮은 위치에 있는 민족들도 많다. 이러한 분류는 우생학과 사회진화론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리고 1900년대 초 당시 일본과 독일간의 친분관계와 우리나라의 사회상황을 생각해 보면 일본인 아래에 우리가 놓여 있는 것은 일견 당연해 보이기도 한다.

현대에도 민족에 대한 이러한 차별적 분류 기준을 적용한다면 어떨까?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분노할 것이다. 이런 차별적인 대우가 우리에게 가해진다면? 더욱더 크게 분노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가 차별적이다. 백인을 보는 눈과 흑인을 보는 눈이 다르며, 같은 동양인이라고 해도 일본인과 동남아시아인을 보는 눈이 다르다. 물론 재미동포와 재중동포를 보는 눈도 다르다.

‘다문화 가정’ 또한 사정이 다르지 않다. 외국인이 한국에 들어와서 외국인들끼리 살면 외국인 가정일 뿐이다. 우리가 지칭하는 ‘다문화 가정’이란 한국인과 결혼한 외국인에 한정된다. 그러나 백인 여자와 결혼한 한국인은 그럴듯해 보이고, 동남아시아인과 결혼한 한국인은 없어 보인다. 한국 여성이 동남아시아 남자와 결혼하면 따가운 시선은 배로 가해진다.

‘다문화 가정’에 다문화는 없고, 언어?생김새?풍습은 다르지만 우리 문화에 동화되어 가는 외국인들만이 칭송을 받는다. 다양한 문화를 수용하고 이해해야 하는 주체가 우리 자신이면서도 다문화 가정을 꾸린 외국인들에게 한국 문화를 수용할 것을 교육하며, TV에 나오는 외국인들이 한국 것을 좋아하지 않으면 싸늘한 눈초리로 그들을 바라본다.

우리는 스스로 계급을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에 사는 한민족이 일등시민이다. 나머지는 국적과 피부색, 한민족과의 연관성, 한국 문화에 대한 선호도에 따라 계급이 나누어진다. 일등시민이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비자를 발급받는 순간부터 계급이 생긴다. 그 계급은 안산의 원곡동이라는 작은 동네에서조차 임금 차이를 만들어 내고 있다.

– 다시 원곡동 이야기로…

대학 초년 뭣 모르고 운동권 선배들을 따라 다니던 시절 이문열의 <구로 아리랑>이라는 책을 읽었다. 지금 생각하면 치졸하기 짝이 없는 그 글이 생각나는 것은 ‘구로’라는 동네 배경과 공순이라 불리던 언니들 때문일 것이다. 소위 공순이라고 불리던 순박한 언니들의 삶을 생각해 본 것도, 내가 누리는 경제적 혜택이 대기업들의 회장 덕분이 아니라 밤낮으로 고생하며 일한 언니들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도 이 때쯤이다.

빈곤의 상징이었던 구로동과 가리봉동은 구로디지털단지와 가산디지털 단지로 변신했다. 그 많던 공순이 언니들은 우리의 엄마 아빠가 되어 살아간다. 그렇다면 그 많은 공장을 돌리던 일손은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

원곡동, 안산 원곡동에는 우리의 언니 오빠들을 대신해 공장을 돌리는 사람들이 있다. 대한민국의 국위 선양을 위해 일하는 근로자는 아니지만 우리를 대신해 대한민국의 경제가 돌아가도록 묵묵히 일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돈을 버는 목적은 각자 달라도, 사용하는 말과 생김새?국적은 다를지 몰라도, 그들이 우리 경제의 바닥을 지탱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방가? 방가!’라는 영화가 있다. 취업을 하지 못한 한국인이 부탄 사람으로 공장에 위장 취업을 해 겪는 에피소드가 나오는 영화다. 그리고 이 영화의 배경이 바로 원곡동이다. 이 영화는 재미있지만 슬프다. 하지만 그 속에 중요한 메시지가 있다. 노동자에게는 민족이 없다. 노동을 통해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그래서 노동자는 언제나 평등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우리의 비자 발급 제도는 계급을 만든다. 아니 이미 계급을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제도다. 거기에 우리의 차별 섞인 눈빛까지 더해진다. 원곡동이라는 국경 없는 마을에도 계급을 가르는 비자가 있다.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너희가 힙합을 아느냐 (2) [무세이온의 올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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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미(동국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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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순간순간을 아파하며 민감하게 느끼고 고민하고 있는 힙합 정신에서 미래를 본다. 모든 사람들이 물질을 추구하고 물질에 안주하고 물질을 위해서 오늘을 달리고 있을 때, 지하철 어느 모퉁이를 연습장 삼아 춤추었던 사람들, 비 새는 공동 작업실에서 물을 퍼내가면서 음악 작업을 하는 사람들, 이들의 젊음과 열정이 ‘돈 벌어 먹고 살기의 쇠 창살’에 갇힌 인간에게 희망이라는 진실을 느낄 수 있게 하리라고 생각한다. 여기, 키비라는 한 힙합 음악가와의 인터뷰를 통해 우리 시대 ‘젊은 예술가의 초상’을 함께하기 바란다.

– 젊은 예술가의 초상-키비(kebee)를 만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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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비( 2007년 앨범)힙합 인디 레이블의 아이콘인 ‘소울 컴퍼니’의 사장이자 힙합 뮤지션인 키비를 만난 건 2011년 2월 25일 저녁 6시 10분이었다.

‘소울 컴퍼니’ 위치를 설명하기 곤란했는지, ‘상상마당’ 앞에서 보기로 했다. ‘상상마당’은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너는 홍대 앞에서 클럽 가지? 나는 홍대 앞에서 철학한다!’라는 모토로 철학 강좌를 연 홍대 앞 문화 공간이다. 키비는 상상마당에 미리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초면이지만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키비의 단정하고 반듯한 미소가 반짝였다. 처음엔 뭐라 말해야 할지 많이 걱정하고 갔는데, 환대받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무엇이든 물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상마당에서 소울 컴퍼니로 가는 200여 미터의 짧은 거리 동안, 그 잠시도 놓치지 않고 몇 가지를 물었다. 대뜸 ‘어찌 그리 단정하냐?’고 물었다. 웃으며, ‘그래서 자신들의 힙합 공연에 아이들을 데리고 온 부모들께서 힙합 공연에 아이들만 보내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시더라’ 한다. 은희경 작가의 작품 『소년을 위로해 줘』를 쓰기 전에 키비를 벌써 만났던 거냐와 주인공 소년이 키비를 모델로 했던 거냐를 물었더니, 그건 아니고 은희경씨가 소설을 쓰면서 고민을 하는 글을 읽고 키비가 먼저 연락을 했다고 한다. 뭔가 도움이 되고 싶었다고. 그리고 지금은 정신적 스승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얘기를 나누며 잠시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어떤 여학생 둘이 내게 묻는다. 혹시 저분 키비 아니냐고. 맞다고 했더니 “꺄~” 소리를 지르며 키비에게 자기들을 소개해 달라고 한다. 불과 이들보다 1분 앞서 만난 내가 키비에 대한 기득권이 있는 기분이 드는 순간이었고, 함께 사진을 찍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지금 만나고 있는 키비의 유명함에 내 어깨가 으쓱해졌다.

뮤직 비디오 화면만으로 보던 키비의 사무실, ‘소울 컴퍼니’는 가운데 넓은 공간의 사무실과, 내부의 작업실들로 구성된 공간이었다. 네모난 사무실인데 난 그 공간이 둥글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누는 이야기가 둥글었던 것 같다.

가장 먼저 꺼낸 질문은 ‘힙합을 청년 문화라고 생각하는데, 생각보다 힙합을 많은 청소년이 듣지는 않더라’는 것이었다. 키비는 이를 인정했다. ‘오버 그라운드든 언더 그라운드든 클럽에 찾아와 듣고,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언더 그라운드 음악을 찾아 듣는 건 소수’라는 것이다. 찾아들을 수 있을 정도의 취미 시간이 허락되지 않은 청소년들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단도직입적으로 키비에게 ‘오버에 못 올라갔나, 안 올라갔나’를 물었다. 키비는 이렇게 답했다.

키비: ‘그걸 정해놓고 하는 건 아니다. 음악하는 사람의 목표 지점은 각자 다르다. 유명해지는 것이 좋은 사람도 있고, 자기 음악을 제시하고 싶은 사람도 있고 등이다. 나는 음악을 하는 것 자체가 동기였다. 자기가 음악 생산에 다 관여할 때 하고 싶은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음악을 하려는 사람에게 열린 길 중에는 기획사에 들어가는 식의 오버 그라운드 방식도 있지만, 이 중에서 기회를 스스로 만드는 사람들이 생겨났고, 그것이 곧 언더 그라운드이고, 그게 인디 음악이다. 시장을 스스로 만들어내고 청중을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장이라는 표현을 쓴다’라고 물었다. ‘그리고 현실의 무엇이 키비에게 시장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언더를 하게 했나?’라고도 물었다. 키비는 답했다.

키비: ‘22세에 창업했다. 형동생 하는 친구들이 회사를 만들어 7년 왔다. 기획사에 들어가 오디션을 보거나 데모 시디 갖고 다니던 친구들도 있었고, 스스로 만들어봤던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그 중 자기 길 가는 사람도 있고 음악을 안 하는 사람도 생겼다. 음악의 유일한 길이 기획사 가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들이 입증하는 거다. 기획사 가면 자기 음악보다 기호에 맞는 음악만 억지로 하게 된다. 같이 음악 시작했던 사람 중에 자기 색 잃고, 그렇다고 상업적 성공을 하지도 못한 친구를 보았다. 나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자 동시에 생활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음악을 구입해주는 사람이 있어야 내 삶이 유지되니까. 나는 취미로 음악을 하는 게 아니고 그게 내 삶이니까 그걸 통해 살기도 하고, 그러면서 내가 존립하는 거다.’

‘음악을 하게 된 시점’을 물었을 때 키비는 중학생 시절을 기점으로 꼽았다.

키비: ‘중학교 방송반 하며 힙합을 점심시간마다 틀었다. 미국 본류 힙합. 궁금해 하다, 따라 듣다, 졸업하고 나서 고교 가기 직전, 클럽 가서 너무 충격적이고 즐거웠다. 프리스타일 랩. 비트에 맞춰 하는 즉흥랩을 보며 멋있고 놀라웠다. 지금 성격도 까불지 않는데 그 때는 더 조용했다. 말하고 싶고 억눌린 것이 있었는데 그 장이 모두에게 주어져 있었다. 뮤지션과 관객 모두에게. 나를 데리고 간 친구가 랩을 하더라. 나는 처음이어서 안 올라갔지만, 이 때 랩이라는 음악이 가슴에 들어왔다.’

‘음악을 만들기 시작한 것은?’

키비: ‘가사 쓴 건 고2때부터인데, 첫 작품은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당시 노트는 있다. 힙합은 가사량이 많고, 많을 수 있다. 메시지가 많을 수 있다.’

‘비트나 비보잉 등을 중시하는 힙합퍼도 있을 텐데. 키비는 가사에 집중하나?’를 물었다.

키비: ‘나는 처음에 힙합 문화는 몰랐고 랩이 좋았다. 랩하고 가사 쓰고 프리스타일하면서 힙합 문화를 이해하고 좋아하게 되었다. 반대 경우도 있다. 힙합 문화에서 출발하는 사람들도 있다.’

‘랩에서 라임이 중요하다, 아니다에 대해 논쟁하며, 네 라임은 1차원적이라는 둥 서로를 극단적으로 비방하며 하는 논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키비: ‘나는 논쟁 자체가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뭐가 옳든 그르든 한 현상에 대해 이야기를 할 만큼의 에너지가 오간다는 게 중요하다. 사실 정답이 없다. 음악에서 스타일을 만들어내고 하다보면 정답이라는 게 무의미하다. 누군가 정답을 만드는 순간, 그것에 대한 대안이 만들어지니 정의내리는 게 시간낭비이다. 하지만 누구든 답을 만들고 싶어 하고, 그 과정에 동참하는 사람이 힙합씬을 활발하게 만들고 있으니 답을 모색하는 과정 자체가 의미 있지 않은가?’

‘미국 힙합씬에서 배틀하다 죽이기, 디스하기, 분쟁 등의 사례가 있다. 한국 힙합씬에서는 이런 게 어떻게 드러나나?’

키비: ‘한국에서는 뮤지션, 매니아, 힙합 범주 밖에서 보는 사람들 모두 조금 오해하는 게 있다. 여기는 미국이 아니며 우리 힙합은 우리 문화 속에서 하는 거다. 흑인 문화가 그대로 우리 삶 속에 들어올 수는 없는 거다. 우리 문화와 사회적 흐름 안에 어울리는 형태로 힙합이 발전하는 거고 나라마다 다르게 발전한다. 미국 문화를 보면서 가사에 그런 분쟁 써야 해 라는 생각을 하는 친구도 있는데 그건 그들의 철학이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 문화와 다른 문화 토양 속에 있는데, 그런 걸 그대로 가져오는 건 이율배반 아닌가 싶다. 우리 풍토와 상황에 어울리는, 내 스스로가 편한 마음으로 음악을 하고 싶다. 나는 서정적인 랩으로 표현하는 것을 추구한다. 우리 문화 안에서, 우리의 흐름 안에서 형성된 내 성격에 따라 나는 음악을 해가고 있다.’

‘요즘 들어서 키비의 음악 스타일 달라졌다는 평도 있더라.’

키비: ‘그건 신경 안 쓴다. 그때그때 하려는 게 있고 앨범에서 성취하려는 것 있다. 10년 여 음악을 해왔다. 그동안 어떤 굴곡을 가졌다고 내 음악에 결론을 낸 게 아니다. 앞으로 성취해야 할 음악이 훨씬 많기 때문에 변했다는 평은 나를 흔들지 못한다.’

‘그렇게 붙들려고 하는 힙합, 힙합의 본질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코어는 무엇이라 생각하는가?’

키비: ‘삶이다. 무슨 얘기냐면, 힙합은 다른 장르에 비해 훨씬 더 말에 가깝다. 더 날것이다. 정제되지 않은, 익히지 않은 날고기 같은 것. 힙합 음악에 내 삶을 그대로 투영할 수 있고, 삶을 그대로 담아낼 수 있다. 그래서 더 자유로운 것 같다. 물론 록도 자유다. 음악의 정신은 동일하다고 생각한다. 힙합 음악 속에 담긴 자유는 겪은 삶이 있고, 겪은 삶을 삶 그대로 풀어낼 수 있는 음악이라는 의미에서 자유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서 자유를 만끽하는 거다. 힙합은 다른 음악 장르보다 훨씬 더 말에 가깝다. 그래서 정제해서 만들지 않아도 분출해낼 수 있는 특성이 있다.’

‘이런 생각 형성에서 가장 영향을 받은 것은 무엇인가, 혹은 사람은 누구인가?’

키비: ‘가리온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 한국 사회, 한국의 말에 가장 맞는 힙합 음악을 추구하는 정신을 배웠다. 가리온의 메타 형은 불혹으로 나와 띠동갑이다. 2011년 2월 23일에 있었던 ‘제8회 한국대중음악상’ 시상식에서 가리온이 ‘올해의 음반’, ‘최우수 힙합 앨범’, ‘최우수 힙합 노래’ 등 3관왕의 쾌거를 이뤘다. 굉장한 사건이 아닌가?’

‘키비의 영향을 받은 사람은?’

키비: ‘지금 가르치는 사람은 있지만 내 음악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영향을 받았다는 사람 생기지 않겠나?’

‘음악을 만들어내고 창조하는 사람. 이전에 없었던 걸 창조하는 사람을 보면 경외의 마음을 느낀다. 글을 몇 자 쓰는 사람으로서, 글 쓰는 건 재배열의 성격도 있는 것 같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는 거니까. 그러나 음악을 창작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 느끼는 창작의 고뇌는 무엇인가?’

키비: ‘나도 무에서 나오는 건 없다고 생각한다. 살지 않고는 무엇이 안 나온다. 경험했기에 음악이 나온다. 창조하는 사람은 관찰하는 능력이 뛰어난 듯하다. 모두가 많은 걸 겪으며 사는데, 그것을 관찰해내고 기록해내고 남기는 사람이 예술가라고 생각한다. 자기와 맞닿아 있는 걸 접하고 느끼면 좋아하는 사람이 예술가인 것 같다. 삶이 없는 예술은 없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내 삶의 궤적이 더 다양해져야 한다고 느낀다. 대학을 다닐 때에는 친구들과 내가 공감하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점차 나는 음악하고, 다른 친구들은 직장 혹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 보니, 서로 나눌 얘기가 없어지는 것을 느꼈다. 요즘은 예술 범주 아닌 사람들과 만날 기회가 적어지니, 서로 공감할 것이 결국 사랑밖에 안 남지 않았나 싶다. 옛날에는 사랑 얘기 질색했는데, 이제 건드릴 주제가 사랑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얼마나 삶을 살고, 겪어서 음악을 풀어낼까 하는 게 과제인데, 연애하다 상실하고, 일 안 풀려 술 먹으며, 그래 이것이 가사 소재가 되네 하며 그런 식으로라도 위안한다. 현재 창작의 고뇌라면 바로 이것이다. 다른 사람의 삶과 조우할 지평을 넓혀야 하겠다는 것. 쉽지 않겠지만 말이다.’

‘유네스코 예술가 정의가 자기를 예술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경제는 먹고 살기, 정치는 공존의 문제 등 삶과 절박한 연관을 갖고 끊임없는 분쟁과 갈등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있다. 경제와 정치는 잘 못되면 누군가를 파멸시킬 수도 있다. 하지만 타인에게 고통이나 피해 유발하지 않는 무해한 방식으로, 인간이 바라는 것,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면서도 예술은 고통 속에서 태어난다. 키비는 어떤 의미에서 예술가인가? 그리고 예술가로서의 키비의 고통은?’

키비: ‘사실 나는 음악을 택했다고 생각하지 않고 음악이 내게 주어졌다고 생각했다. 하고 싶은 일을 통해 경제 생활도 하고 이걸 통해 세상에 내 존재 증명을 하게 되었다는 생각이다. 나는 아무리 봐도 내가 음악을 선택했다고 생각이 들지 않는다. 선택을 했다면 이것저것 중에 고민해서 이 길로 결정하는 것이었을 텐데, 나는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항상 나는 음반을 내고 있으면서도 내가 과연 음악을 할 수 있나 물었었다. 예술가라는 자의식은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힘겹게 형성되었다. 나는 가수라는 직업을 가졌고 노래를 하니까 가수야가 아니라, 항상 음악에 대해 고민하고 삶을 살다보니 어느새 받아들여진 것이다. 지금까지 낸 음반이 네 장이 된다. 앞으로 더 하겠지만. 근원적으로는 소외감이 있다. 나 이외의 모든 것들이 내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고립되어 있다는 감정들. 그건 어릴 때부터 느꼈고, 그건 모든 사람이 그렇다. 고독. 모든 사람이 다 그럴 것 같다. 다 가지고 있는 고독. 예술을 하기 때문이 아니라 살기 때문에. 예술처럼 무해한 영역이 또 없고, 예술은 인간의 정신을 풍요롭게 만든다. 음악을 통해 무엇이 전달된다. 나 혼자에게서 끝나지 않고 누군가에게 가치가 전달되었다. 그런 의식을 하면서 예술가로서 자아를 찾게 되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쓰고 있는 것, 만드는 음악이 누군가에게 들려지니까 어떤 대상을 두고서 쓰는 게 아니라 근본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해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 직업이니까 어쩔 수 없이 쓰는 가사가 아니라 나를 통과했기에 흘러나오는 것이 나의 가사이다. 이렇듯 자기에게 온전하고 충실하고 자기를 다 벗겨 놓을 수 있는 작품이어야만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작품을 통해 내가 위로를 받아야 그 감동이 남에게 갈 수 있다. 누가 들으면 안 된다거나, 누구에겐 불편할 수 있다고 하는 검열 장치를 만들기 시작하고, 그런 장치 때문에 내게 감동을 주지 못하면 그건 다른 누구에게도 감동을 못 준다.’

‘정말 잘 위로 받은 느낌이 드는 가장 좋았던 곡은?’

키비: ‘‘소년을 위로해줘’이다. 20대로 넘어오며 강요된 남성성에 대한 문제제기였다. 내 고민을 그대로 드러냈고, 비슷하게 고민한 사람에게 전달되었고, 대표곡이 되었고 인기를 누렸다. 인기를 위해 장치를 만든 게 아니라 고민을 그대로 얹어놓았다.’

‘또 있나?’

키비: ‘2집의 ‘백설공주’를 들 수 있겠다. 동화 ?백설공주?로 스토리텔링했다. 음반이 나온 해는 2007년인데, 아이디어는 2003년에 떠오른 걸 묵혀놨다 발표했다. 나이 드는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여자에게 나이가 든다는 것의 의미가 궁금했다. 이 곡은 왕비가 주인공이다. 왕의 사랑을 받다가 백설공주가 나타나 사랑을 빼앗긴 그녀도 과거엔 사랑스러운 사람이었을 텐데. 어린 소녀로 인한 그녀의 상실감에 대해 풀었다. ‘거울아, 거울아, 누가 가장 예쁘니?’를 물은 게 왜 거울이었을까? 거울이 ‘백설공주’라고 대답하는데, 사실 거울은 자기다.’

대화를 하는 내내 키비의 사색의 깊이가 느껴졌다. 사색하는 뮤지션의 초상을 보았다. 끝으로 『한국 힙합-열정의 발자취』라는 책에서 ‘소울 컴퍼니’의 ‘소울’이 ‘疏鬱’, 즉 ‘답답함을 풀어헤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키비’의 뜻을 물었다. 그의 대답은 의외였고 유쾌했다. ‘나중에 막 의미를 붙였는데, 그러다보니 내가 없더라. 사실은 스타크래프트 아이디를 만들다 옆에 있는 공룡 그림 보고 친 건데 그렇게 말하긴 뭐해 의미를 막 붙였었다. 그런데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냥 솔직히 말한다. 우발성의 계획(contingency plan).’

키비와 소울 컴퍼니와 힙합인에게 존경의 마음을 품게 한 잔잔한 대화였다.

– 끝으로, 지은에게

『어린왕자』에는 어른들은 새로 사귄 친구 얘기를 하면 ‘무슨 놀이를 좋아하나’와 같이 중요한 건 묻지 않고 ‘그 애의 나이는? 몸무게는?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나?’ 등 숫자에 얽힌 질문만 한다고 투덜거리는 대목이 나온다.

어느덧 과거의 내가 이상하게 여긴 어른의 모습대로 나의 아들들에게 질문하고 있다. 아니, 오히려 훨씬 심하다. 때론 아이들이 예술가가 된다고 할까봐,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고 할까봐 전전긍긍하기도 한다. 예술을 좋아하는 공학도나, 철학에 조예가 깊은 회사원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철학을 공부하는 것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는 그 고통이 없길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글을 적으며 생각한다. 고통이 없는 삶이 어디 있단 말인가. 고통이 있고, 고통에 대한 표현이 있고, 고통에 대한 위로가 있는 것이다.

키비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소년을 위로해 줘’로 승화되었다. 지은의 고통과 그 고통에 대한 위로가 그녀의 글로 승화되었다. 그리고 우리 곁에 무수한 비명과 위로가 맴돈다. 예술과 철학을 하는 사람이 내지르는 비명이 저렇게 노래로, 작품으로 승화되어 교호하고 있다. 아들의 MP3에 담긴 곡들은 그의 비명이자, 그의 존재의 외침이다. 내 마음에도 울려 퍼지는 공감의 박동은 기성세대가 되지 않으려는 나의 몸부림이다.

자, 지은. 래퍼로서 따라해.

 

눈이 부시게 온 눈을 보고

화가 나는 우리~

눈과 같던 하얀 마음

지금은 녹슨 구리~

지친 마음 위로하며

상처를 나눠 둘이~

아픈 비명 달래어 주는

노래 불러 주리~ (작사 박민미, 작곡 누구나, 노래 우리들)

자거라투스트라, 역사법칙에 내기를 걸다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너 이놈, 자거라투스트라야, 감히 내기를 걸다니?

아, 니체 아부지, 어떻게 아셨어요?

이놈아, 니가 어제 밤 술 먹고 들어와서 중얼거리지 않았더냐? 박근혜가 대통령되면 니가 백만 원 따게 되었다고 히히닥거렸지.

아, 그랬나요? 맞아요. 어떤 후배의 농간(?)에 넘어가서 그만 내기를 걸고 말았죠? 박근혜 떨어지면 그 백만 원 가지고 잔치 벌리죠 뭐.

아이고, 이 멍청한 놈, 그런 내기는 일종의 패배주의를 선동하는 것이 아니겠니? 그게 진짜 죄악이지. 근데 자거라투스트라야, 박근혜가 된다는 근거라도 확실하냐?

니체 아부지, 제가 철학을 했지 어디 점술을 배웠겠어요? 그러니 그걸 어찌 제가 알겠어요. 다만 거꾸로 생각한 거죠. 지금 박근혜의 대항마로 나오는 사람들이 너무 한심해서 말이죠.

자거라투스트라, 너보다야 더 한심하겠니?

저야 공부하는 사람인데 비교가 되나요? 하지만 그들은 어떤 정치적 비전을 보이지 않는 것 같아요. 그게 너무 한심해서 제가 그런 내기를 한 거죠.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도대체 정치란 무엇입니까?

야, 이놈, 내가 공자님이냐. 그리고 니가 무식한 자로(子路)이냐? 그런 식으로 묻게? 하지만 내가 생각해 본 것이 있는 데… 말하면 니가 알까?

제가 서자이지만 그래도 아부지 아들 아닙니까? 말씀 해보세요.

니도 알겠지만 다윈 선생한테 내가 배웠지만, 진화란 일종의 자연선택이 아니냐. 자연은 다양한 변이를 만들어. 상황이 변화하면 거기 맞는 변이를 선택해 지속하려 한다면서? 나머지 변이는 더 이상 쓸 데 없으니 진화의 시궁창이 속으로 내 던져지고 말지. 마찬가지 아닐까? 정치라는 것도? 정치가들도 다양한 변이를 미래의 프로그램으로 준비하고 있겠지. 그런데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그 중의 하나가 선택될 거야. 그러면 나머지는 정치인들은 전부 역사의 불구덩이에 내던져지고 말지. 정치가들은 자신이 선택될지를 모른 채 하나의 변이를 준비해야 한다는 거야. 그리고 역사가 선택하지 않는다면, 역사의 불쏘시개에 불과한 비참한 존재가 되고 말겠지. 그게 정치가의 ‘운명’이 아닐까? 정치가는 그런 운명을 짊어지는 운명애적 존재가 아닐까? ‘아모르 파띠’, 그게 내가 늘 부르짖던 것이잖아.

아부지 말씀은 꼭 헤겔이 역사이성과 영웅과의 관계에 대해 말한 것과 같네요. ‘이성의 간지’라는 말씀이죠? 하지만 정치와 자연이 어떻게 같을 수 있겠어요. 마르크스 선생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에 우여곡절과 전전반측이 있지만 어떤 큰 흐름이 있는 게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는 이런 큰 흐름을 미리 예측하고 바로 그 흐름 앞에 서야 하지 않을까요? 소위 역사의 전위라는 말이죠. 그런 예측적인 선택을 정치가의 ‘모럴’이라 말하는 것이 아닐까요? 그러니 정치가의 패배는 운명이 아니라 잘못된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그 자신이 책임을 져야 하겠죠.

정치는 모럴이 아니야, 운명이라는 거지. 자거라투스트라야, 니는 아직도 역사의 법칙이란 게 아직도 있다고 믿느냐? 마르크스의 법칙이란 19세기 역사를 통해 포착한 것이지. 그때는 소위 세계라는 것이 없었어. 그저 민족국가만이 있었지. 자본주의의 민족국가적인 발전 단계였던 거지. 그런데 오늘날 21세기, 전 지구적 차원에서 자본주의가 형성되어 있는 이 단계에서, 이제 그런 역사법칙이란 의미 없지 않을까?

세계사가 성립한다고 역사법칙에 의미가 없어진다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네요.

거 봐라. 니가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 않았더냐.

아, 아부지, 저도 그 정도는 이미 생각해 보았어요. 아부지 말이 이런 거죠? 제가 설명해 볼게요. 국제자본은 일국의 자본주의를 넘어선 국제적 차원의 구조를 지니고 있다는 거죠. 이런 구조 속에는 자본주의 체제를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지구적 차원에서 분산되어 있다는 거죠. 그래서 한쪽이 문제되면 다른 쪽에서 문제를 풀어가면서 전체적으로는 국제자본이 자신을 지속적으로 확장시킨다는 거죠? 월러스타인의 세계체제론에 가까운 주장이시죠?

내가 뭐 그렇게 어려운 주장을 한 것은 아니고, 하여튼 그런 거야 IMF를 겪은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니냐? 그런 단계에서 역사법칙 운운하다니 자거라투스트라야, 어는 어느 시대 사람이냐? 나보고 19세기라 하는데, 니야 말로 19세기가 아니냐?

아부지, 곰이 롤러코스트를 타고 재주를 피운다더라도 언젠가 떨어진다는 것은 틀림없는 일이 아니에요? 그건 필연적인 사건이죠. 마찬가지로 국제자본이 두 손으로 5개의 공을 돌리는 저글링을 하더라도 언젠가 하나는 놓치고 말죠. 5개 돌리다가 4개를 돌리더라도 국제자본이 돌아야 가겠지만, 한 개 떨어뜨린 공은 어떻게 되나요? 거기서는 혁명이 일어날 수 있는 거 아닐까요? 저는 지난번 중동에서 일어난 자스민 혁명이 바로 그런 거라고 보아요. 그 중동이란 것이 국제 자본이 돌리던 공 중의 하나였는데, 그만 떨어뜨렸던 거죠. 그 사이에 혁명이 터졌구요.

글쎄다, 그게 무슨 혁명인지 모르겠는데, 자스민 혁명이 성공한 이집트에는 지금 군부가 시위 군중을 무차별 사살한다 하더라.

아부지, 저는 그저 그런 가능성이 열려 있다고 한 거지, 반드시 성공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잖아요.

자거라투스트라야, 역사법칙이란 구시대 유물을 고집하려고 너무 어려운 논리를 구사하는 것이 아니냐? 그냥 역사에 법칙이 없다고 보면 아주 단순하잖아. 그리고 모든 이론이란 것이 단순한 거구. 역사에 법칙이 없다면 나쁠 게 무엇이 있니? 니들 철학자들이 먹고 살게 없어서 좀 안 되긴 했지만, 니들 철학자들을 먹여 살리려고 우리가 머리가 아파야 하겠니?

아부지, 역사법칙이 없다면, 세상에는 아무 희망이 없다는 것이 아닐까요? 역사법칙이 없다면, 무엇이 역사를 지배하겠어요? 결국 힘이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에요? 힘이 정의죠. 그래도 사람들이 살아갈 희망이 있을까요? 언젠가 이 고통이 사라질 것이라는 희망이 있기에 사람들이 그래도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요?

자거라투스트라야, 그게 바로 종말론이라는 거야. 니들이 역사가 심판해 줄 거라는 거지. 이 세상의 부정의와 고통과 학살을 신 대신 역사가 심판한다는 주장이 바로 ‘역사법칙론’이라는 주장의 실질적인 의미가 아니냐? 역사에 종말은 없어. 그걸 모르겠니? 그건 기독교가 뿌려놓은 아편이지. 신이 아편이 아니야. 종말이 온다는 믿음이 아편이지.

아부지, 니체 아부지, 아부지가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아편이 아닐까요? 아부지의 말씀은 절망이죠. 우리 모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절망이라는 아편이죠. 아부지, 사르트르는 잠들기 가장 좋은 방법은 잠 든 척 하는 거라고 말했대요. 실제로 잠 든 척하다보면 잠 들 거라는 거죠. 우울증 환자는 세상을 우울하게 보기 때문에 더욱 더 우울하게 된다고 하죠. 실제로 그는 세상을 극복하기 위해 아무 노력을 하지 않으니까요. 마찬가지 아닐까요? 역사에도 법칙이 있다고 우리가 믿는 다면 실제로 역사에 법칙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요? 믿음이 존재를 만다는 것이 아닐까요?

이, 놈아, 그런 놈이 왜 진다는 내기를 했단 말이냐? 진다고 믿는다면 결국 지게 될 거 아니냐? 그러니 니가 패배주의를 선동했다 하는 거야. 알겠니?

딸바보, 그 가부장성에 대하여 [배운년, 미친년, 나쁜년]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딸바보’라는 신조어가 있다. 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한 아버지를 일컫는 말이란다. 어떤 연예인은 ‘딸바보의 원조’라 하고 또 다른 연예인은 ‘딸바보의 종결자’라 불리운단다. 주변의 남자 선후배들 역시 딸바보 임을 자처하는 이가 많아졌다. 핸드폰 단축번호 1번을 딸아이의 핸드폰 번호로 저장하기도 하고 컴퓨터, 핸드폰의 바탕화면을 딸아이의 사진으로 장식하기도 한다. 게다가 딸 아이 사진을 서슴없이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며 자랑까지 한다. 이처럼 아버지와 딸 관계가 남달라지고 ‘딸바보’라는 용어가 새로운 남성상을 대변하게 된 세태를 두고 가부장제가 그만큼 약화된 것을 증명하는 것일까? 이제는 어머니-자녀의 관계, 모성이 강조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자녀의 관계, 부성이 강조되는 시대가 이르게 된 것이라 말해도 좋을까?

-모성과 가부장제의 변주곡

가부장제와 모성이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 모성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것이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라는 것은 거의 일반화된 논의다. 모성을 여성의 본질적 특성으로 규정하고 여성 일반에게 강요하는 것은 확실히 가부장제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과 부합하며 이러한 생각에서 많은 여성주의자들이 모성을 여성억압의 원천으로 간주한다. 지나온 역사 속에서 모성과 가부장제가 상호 긴밀하게 연관되고 모성이데올로기가 가부장제에 봉사하였던 사례는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바처럼 가부장제가 모성 강조에 언제나 협조적인 것은 아니다. 그 둘의 관계 양상은 생각보다 복잡하다. 모성과 가부장제는 긴밀한 관계에 놓여 있지만 종종 갈등하고 모순 관계에 놓인다. 그래서 가부장제 질서를 위하여 모성이 포기되거나 모성의 강조가 가부장제 질서를 무너뜨리는 상황을 산출하기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은 출산-태교-자녀교육의 과정으로 이어지면서 여성들의 중요한 규범적 책무로 되었으며 현대 사회에서는 그런 모성이 사라진 것이라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적으로 다 맞는 것은 아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모성이 강조되는 궁극적인 목적은 가부장 질서를 유지하고 공고화 하는 데 있었고 따라서 어머니-자녀의 직접적이고 친밀한 관계 보다는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오는 정서(모성)를 다른 사람들에게로 얼마나 잘 확장하였는가가 더 중요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자녀에 대한 사랑과 보살핌보다 부모 봉양이나 조상의 제사가 더 우선시되는 전통 유교의 정서는 이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전통 유교 사회에서 출산과 자녀 교육의 의미는 그 자체보다는 그것을 통하여 부모와 조상에 대한 효,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가부장제 질서를 공고히 하는 것에 있다. 때문에 자녀와의 친밀한 정서보다는 자녀를 기르는데 부지런히 애쓰고 그 성공을 바라는 것의 목적이 가문을 이어가며 죽은 사람을 잘 보내고 살아있는 사람을 잘 봉양하려는 것에 두어져 있다.

열녀 이 씨의 이름은 아무개로 선비 김 아무개의 아내이다. 나이 스물 하나에 그 남편이 병들어 죽자 바로 머리를 풀고 짚자리를 깔고 방에 틀어박혀 지냈다. 입관한 뒤에 관에 기대 곡을 하고 말했다. “장례가 끝나면 따라 가겠습니다.” 달을 넘기면서 임신한 것을 알게 되자 졸곡(삼우제 뒤에 지내는 제사) 때 곡을 하며 말했다. “홀몸이 아니니 감히 당신의 자식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일 년 뒤에 따라 가겠습니다.” 해산을 해서 아들을 낳았으나 아들로 여기지 않고 여종을 골라 그에게 젖을 먹이게 하였다….“제가 복이 없어서 남편이 일찍 세상을 떠났으니 아내로서 마땅히 따라가야 합니다. 이제 저 어린 아이로 핑계를 대고 남편이 제게 말한 것을 어찌 감히 지키지 않겠습니까?” 아이를 불러 이마를 세 번 어루만지고 방으로 들어가려 하니 유모와 종들이 그를 엄하게 지켰다. ··· 여종이 자리를 정돈하고 베개를 편히 하자 손을 바로 해서 배에 얹고 눈을 감고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정려를 내렸다. (이옥李鈺, 「열녀이씨전烈女李氏傳」)

“당신은 이 미망인을 염려하지 마시고 편안히 지하로 돌아가십시오. 저는 당신이 죽으면서 남긴 부탁 때문에 차마 바로 죽지 못합니다. 당신의 상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면 아이의 나이가 5살이 되고 그때는 아이가 혼자서도 보전할 수 있겠지요. 그날이 되면 당신을 따르겠습니다.”·····탈상이 다가왔는데 딸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다.······시부모는 그가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눈치 채고 여종에게 지켜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하루는 여종을 시켜 딸의 약을 구해오게 하고는 지니고 있던 남편의 작은 띠로 들보에 목을 매고 죽었다. (황용한黃龍漢, 「열부함양박씨전烈婦咸陽朴氏傳」)

이와 같이 가부장제 이념이 우선하는 사회에서 모성이데올로기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이기는 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 모성 강조는 가부장제에 도전하는 것이었고 그래서 모성은 무시되어야 했다. 따라서 가부장제를 강조하는 만큼 모성이 강조되는 구도를 지니지만, 또한 가부장제 강화와 부계혈통을 잇는 목적의식이 강한 그만큼 어머니-자녀 관계에서 나타나는 친밀한 정서는 은폐되거나 축소되었다. 모든 여성에게 부과되는 모성이라는 본질적 의미로서의 정체성과 가족 구조의 재생산을 위해 부과되는 규범적 의미로서의 정체성은 가부장제 안에서 통합되는 상보적이고 필수불가결한 요소이지만, 이 둘은 종종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다. 또 가부장제 이념과 정서적 모성이 상충했을 때에는 가부장제 이념이 더 우선한다.

-어머니/딸, 아버지-딸, 그리고 가부장제

전통 사회는 현대 사회보다 훨씬 더 가부장제적이라고 여겨지고, 그래서 모성도 더 강하게 부추겨졌다고 간주된다. 분명 이념과 질서, 가문의 영화와 존속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으로 이해되었던 전통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강조된다. 하지만 그 관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현대 가족에서만큼 어머니-자녀의 친밀감과 정서적 유대가 강조되지는 않는다. 즉 현대 가족이 모성에 근거한 자녀의 복지를 최우선으로 하고 그만큼 어머니의 직접적인 보살핌을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는 것에 비하면, 전통 가족에서의 어머니 역할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하다고 할 수 있다.

전통 사회에서 모성의 핵심은 어머니-자녀 관계가 남성 혹은 가부장제에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에 달려 있었고, “가부장적인 친족체계 하에서 여성은 남성의 자녀를 갖는 자이며 여기서 중요한 것은 씨(seed)라는 개념”이었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모성을 강조하는 목적 자체가 가부장제 옹호와 부계혈통 강화에 있었으므로, 아이를 남성의 소유로 계승시키기 위해서는 아이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의 존재는 가능한 은폐되거나 축소되어야 한다. 따라서 가부장제 사회에서 어머니-자녀의 관계는 한편으로는 강조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강력하게 무시되어야 한다. 출산이라는 여성의 일을 본성으로 규정하면서 그에 수반하는 여러 가지 보살핌의 실천과 심리들을 통해 거대한 모성 이데올로기를 산출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출산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면서 철저하게 모성을 무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전통 유교 사회의 씨받이 같은 제도는 가부장제를 유지하고 공고화하기 위하여 출산과 연관한 모성을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모성을 무시하는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프로이드의 정신분석학에서는 딸들이 어머니에 대하여 분노를 느끼는 것은 자신에게 남근을 주지 않아서라고 본다. 또 어머니-아들의 관계는 어머니 자신의 낮은 지위와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 아들을 통해 성취될 수 있다는 기대로 설명된다. 때문에 어머니-딸의 관계와는 다른 위치에 놓인다. 아들을 위해 딸을 희생시키는 어머니는 딸들의 분노를 자아내는 위치에 있다. 이에 반해 어머니를 대신하는 자상한 아버지는 남성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다.

때때로 “나는 여성보다는 남성과 친하고 남성에게서 동료애를 더 느끼며 남성에게서 더 많은 도움을 받는다.”고 말하는 소위 사회적으로 성공하였다고 일컬어지는 여성들을 만난다. 그들의 말은 틀리지 않다. 그 어느 누구라도 자신을 도와주고 힘을 북돋는 사람에 대해서는 감사와 호의의 마음을 갖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구도 자체가 여성들의 지위를 상승시키거나 혹은 가부장제를 약화시키거나 남성과 여성의 화해 무드로 나아가게 하지는 않는다. 딸이 아버지와 친하게 되는 상황에는 여전히 아버지의 힘이 자리하고 있으며, 딸은 아버지 자신의 지위를 위협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이 반영되어 있다. 이 때문에 많은 남성들은 자기 아내에게는 주지 않을 도움, 사랑을 딸들에게는 아낌없이 준다. 이렇게 보면 아빠들의 딸바보 행진은 가부장을 넘어서는 길목이 아니라 가부장제의 또 다른 단면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지?

『불과 얼음』 [청춘의 서재]

이찬희(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오늘의 청춘이 가장 애타게 바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따스한 위로가 아닐까. 88만원 세대의 한없이 작아진 꿈을 위해 감당하기 어려운 현실에 맞서 몸부림치는 그들은 상처투성이에 일어설 힘조차 없어 보인다. 오늘의 청춘은 사회와 가족의 보호망이 해체되고 개인주의가 만연한 가운데 무거운 자신의 삶을 단지 혼자서 감당해야 할 뿐이다. 그러한 외로움과 고통 가운데 어떤 이는 생활전선을 위한 노동과 적금 통장에, 어떤 이는 미래를 위한 수험서와 처세서에 온 마음을 쏟아 붓는다. 야망을 위해 싸우던 기성세대들에 비해 자신이 쉴만한 빈 자리를 위해 싸우는 오늘의 청춘들의 모습에는 서글픔이 어려 있다.

다시 용기를 내어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드는 세상에 용감히 맞서기 위해 인문ㆍ사회 서적들을 들추어보기도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나 자신은 그만 더욱 작아지고 만다. 위안과 자신감이 필요한 청년에게 “세상을 알아라! 이렇게 싸워라! 용기를 내라!”고 말하지만 마치 ‘긍정의 힘’을 갈파하는 목사님과 무슨 다른 말을 하는지 솔직히 분간이 잘 가지 않는다. 긍정적인 사고를 가지라는 진심어린 충고가 우울한 이를 더욱 우울하게 만드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위축된 청춘에게 필요한 것은 선택지 가운데서 올바른 선택을 가르쳐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함께 ‘곁에 있어’ 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청춘은 너무 힘겨워 자신의 삶을 결단해나갈 기력조차 없으며, 자신의 어려움을 말할 힘조차도 없다.

그들이 ‘스스로’ 말할 수 있도록 위로할 방법은 없을까? 자신의 아픔을 말하는 것에서 나아가 자신의 기쁨을, 희망을, 자신의 소중함을, 자신 안에 보물이 간직되어 있음을 확신하고 자신하게 만들어줄 방법은 없을까? 그래서 나는 청춘에게 시를 권한다. 그 가운데서도 청춘의 생명을 테두리지어 압박하지 않고 청춘 곁에 한 걸음 뒤로 머물러, 바라보고, 어루만지고, 기다려주는 시를 말이다.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생존을 위한 대비의 몸부림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는 청춘에게 넉넉한 여백과 여운으로 다가서는 시 한 편은 삶에 작은 빈 자리를, 작은 마음의 여유와 안식처를 마련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불과 얼음』의 첫 시는 「목장」이라는 제목을 달고 전원적 풍경으로부터 시작한다.

 

샘 치러 나가 볼까 합니다;

그저 물 위의 나뭇잎이나 건져 내려구요

(물이 맑아지는 걸 지켜볼는지도 모르겠어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엄마소 옆에 있는 어린

송아지를 데리러 가려구 해요. 너무 어려서

엄마소가 핥으면 비틀거리지요.

오래 안 걸릴 거예요. 같이 가시지요.

 

이 시는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까. 무엇을 말하려 하면서도 아마 아무 것도 말하려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저(only)’ 말할 뿐일 것이다. 여기서 잠시 『불과 얼음』 마지막의 해설을 훔쳐보면 프로스트의 다음과 같은 말이 인용되어 있다. “시는 …… 반드시 대단한 해명이 아니라 혼란과 맞선 잠정적 머무름에서 끝나는 것이다.” 우리들의 인생살이란 스스로의 결정이나 결정당함 혹은 확정적인 해명에 둘러싸여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프로스트의 말처럼, 삶의 평온이란 해명과 선택을 강요받지 않고 가벼운 망설임과 혼란 가운데, 기대 가운데 머물러 있음 속에서 빈 자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첫 번째 시 「목장」 또한 저자의 대단한 해명을 기대해서도 안 되고, 기대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시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에 대해 집요하게 파고들고 집착하기보다는 아무런 기대 없이, 들려오는 시의 울림에서 느껴지는 분위기 가운데 그 색채들 가운데 고요히 쉴 것을 권유한다. 이 시를 읽으며 상상 속에서 그저 기분 속에서만이라도 나뭇잎이나 건져 내는 한가로운 여유를, 오래 걸리지 않는 동행을, 비틀거리는 어린 송아지의 가냘픔을 경험할 수 있도록 말이다.

 

「걸어 보지 못한 길」

 

단풍 든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더군요,

몸이 하나니 두 길을 다 가 볼 수는 없어

나는 서운한 마음으로 한참 서서

잣나무 숲속으로 접어든 한쪽 길을

끝간 데까지 바라보았습니다.

……

 

이 시의 생략된 뒷 부분에서 주인공은 결국 하나의 길을 택하고 그 이유는 사람이 덜 밟은 길이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한숨지으며 이야기한다. 여러 갈래의 길에서 고뇌하는 꿈이 많은 청춘에게 이 시는 참으로 많은 공감을 전해줄 것이다. 어쩌면 수많은 갈래 길들을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포기한 청춘에게 이 시가 동병상련의 위로가 될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두 갈래 길 가운데 어느 길이 맞는 길인지 주저하고 불안해하고 무서워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의미를 던져줄 수 있을 것 같다. 비록 사람이 덜 밟은 길을 택했지만 주인공의 한숨은 이 시를 읽는 독자에게 결코 꿈을 위한 용기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현실적인 선택이든 이상적인 선택이든 그 무엇도 우리에게 그것이 올바른 선택임을 말해 주지는 않는다. 단지 시인은 이 시를 읽는 사람과 함께 그 길을 곁에서 같이 걸어가 줄 뿐이다. 단지 곁에 함께 걸어가 주는 것… 불안하고 방황하는 우리들에게 과연 곁에서 기다려주고 고독한 시간을 함께 나눠줄 친구가 있는 것일까.

이 시를 읽으면 내가 겪었던 작은 방황의 경험이 생각난다. 대학생 시절 선후배 몇 명과 함께 하는 소규모 공부 모임에 속해 있었는데, 처음으로 후배를 맞이하면서 그 모임의 운영자 자리를 맡게 되었다. 비록 몇 명만이 모인 자리이지만 회의를 진행하고 주도하는 자리를 처음 맡았던 터라 그 부담감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정도였다. 회의 자리에서 정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고, 아무 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으며, 부끄러움과 열등감으로 인한 위축감에 극도로 시달렸다. 그래서 회의를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도망치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2학년 선배가 되어서 공부로나 인생의 문제에 있어서나 내가 선배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생각에 너무나 힘들었던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가 힘들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과연 학생으로서 내가 택했던 꿈을 이룰 수 있는지, 이루기 위한 준비는 아무것도 못하고 귀중한 시간만 낭비한 건 아닌지, 이러다 졸업 후 자기 앞가림도 못하게 되지나 않을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불안감으로 생각이 멈추고, 말을 못하고, 말을 더듬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매일 나를 지진아나 바보라고 자학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그래서 당시 우울증과 대인기피의 모습까지 보였던 내게 친구들과 선배들이 진심어린 조언과 충고를 해 주었지만 그 말을 듣는 그 순간만 나의 문제가 해결되는 듯 느껴질 뿐 돌아서면 다시 원점의 불안으로 돌아오고 마는 것이었다. 그나마 친한 친구가 곁에서 놀아주려 하고, 같이 밥 먹고, 집에 놀러와 같이 자고 할 때면 그 순간만은 마음의 불안이 진정되곤 하였다.

우스울지 모르겠지만 이런 괴로움을 극복한 결정적인 계기가 된 장소는 학교 화장실 변기 위였다. 나의 책임으로부터 도망치고, 선후배들로부터 도망치고, 학교라는 공간에서, 세상에서 도망쳐 피신한 곳은 고요한 화장실 안이었다.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아픈 머리를 감싸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였는데, 그 공간은 그야말로 나 혼자만을 위한 공간이었다. 지금 그 때를 돌이켜 보면 신입생 시절부터 밖으로만 배울 것을 찾아다니고, 하고 싶은 일을 찾아다니고, 선배들과 친구들을 찾아다녔지만 이때의 화장실 안에서의 기억처럼 오로지 안으로 나 자신을 향해 스스로 찾아 나섰던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다 생각하다 괴로워하다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던 순간 보았던 번뜩이는 섬광은 그 동안의 불안과 우울함을 벗어나는 순간이었다. 그것은 나의 문제와 불안과 망설임을 해결하는 어떠한 방법으로서 ‘무엇’을 알려주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경험 이후부터 지금까지 나는 내 스스로 그 ‘무엇’을 하나하나 찾아낼 수 있는 용기와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그 경험은 바로. 말하자면. 나 ‘스스로’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에 자신하는 것이었다. 내가 그냥 그대로, 생긴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경험이었다. 나는 오직 있을 뿐이지 내가 어때야 하고 어떻게 비춰질 지에 대해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힘들어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경험했던 그것이 어쩌면 바로 실존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실존은 책에서도, 선배들의 조언에서도, 친한 친구의 위로 가운데서도 발견되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 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화장실 안 혼자만의 불안과 고독 가운데서 발견할 수 있었다. 나의 모습대로 있는 것을 두려워하던 시간의 나는, 내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 나에게 어떤 충고와, 어떤 길이 정말 맞는지에만 의존하던, 아니 억눌려만 있던 나였다. 내가 태어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세상의 가르침들과 수능 문제를 풀어 대학에 들어가면서까지 나에게 부과되었던 5지선다의 ‘무엇’은 바로 나의 있는 그대로의 ‘있음’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 ‘무엇’들은 당시의 어린 나에게 그 이후부터도 미래의 자신의 삶의 길이라는 모습으로 계속해서 따라올 것이었지만, 적어도 ‘스스로 있을’ 수 있는 자신감을 발견한 나는 포기하지 않고 세상 가운데 쓰러지지 않으려는 용기를 가질 수 있었다.

선택지를 강요하는 명령과 심문은 청춘을 더욱 아프게 한다. 청춘의 슬픔은 아무 것도 없는 가운데서, 스스로의 슬픔을 돌볼 빈 자리 가운데서 스스로 구원될 수 있다. 그 빈 자리는 청춘의 말을 조용히 들어주고 그 빈 자리에서 청춘은 스스로 모두 말할 수 있다. 넉넉한 삶의 여백 가운데 청춘은 자신의 본래적인 온 모습을 대면하고,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고, 자신을 스스로 창조할 기회와 용기를 얻는다. 그리하여 자신의 살아 있음은 자라날 수 있고, 살아 있음의 기쁨이 춤출 무대가 마련될 수 있다. 늦은 밤 어둠을 바라보며 입에 문 담배 연기의 적막한 시간처럼. 청춘이여! 시의 여백 속에서 삶의 여백 속에서. 한순간만이라도 나의 위안을, 나의 용기와 꿈을 되찾아보자! 그리고 시를 써보자.

섬세한 삶의 감각을 찾는 연습 7-② [色 다른 책읽기]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두툼해도 단숨에 읽히는 책이 읽는가 하면, 얄팍해도 읽는 도중 읽기를 멈추어 가며 생각에 잠기게 되는 책이 있다. <무미 예찬>을 만들고 있을 때에는 교정지를 보고 있다가도 문득 눈을 들어 허공을 보는 일이 많았다. 그렇다고 특별히 구체적인 생각을 몰아간 것은 아니었다. 교정지에서도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느슨한 행간과 넉넉한 여백, 전체적으로 건조하면서도 색이 적은 담채화처럼 적당한 물기가 있던 프랑수아 줄리앙의 사유가 내 눈길도 어떤 ‘생각 사이의 여백’으로 향하도록 했던 것이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 다섯 번째 책인 <무미 예찬>은 그런 책이었다.

사실 산책자의 에쎄 시리즈는, 학부 졸업 정도의 교양 수준에다 당시 책을 만들기 시작한 지 1년이 조금 넘은 초보편집자에게는 제법 어려운 텍스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래도 <무미 예찬>은 그보다 묵직하고 사회적인 에쎄들, 지그문트 바우만의 <유동하는 공포>와, 장 보드리야르의 <아메리카>를 만든 후에 시작한 책으로 앞의 책들보다는 미학적이고, 지식보다는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책이었다. 즉 편집자로서의 나와 독자로서의 나 양쪽에게 가장 가까이 다가와 주었던 책이다.

‘에쎄essais’ 시리즈를 담당하고 있기 때문에 에쎄에 대해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다양한 에쎄가 존재하지만 누군가에게 에쎄 시리즈에 대해서 설명할 때 제목부터가 ‘에쎄Les Essais’인 몽테뉴의 <수상록>이나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슬픈 열대>를 예로 들곤 한다. 어느 인류학 연구 논문 못지않은 학술적 성과를 담고 있는 <슬픈 열대>는 “내가 이 일을 결심하기까지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라는 지극히 내밀한 어조의 수필 문체로 시작된다. 자신의 감정, 지식, 경험들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로운 문체로 서술했기에 담고 있는 내용들이 논문이나 보고서만큼이나 단단하게 쌓아올려지는 지적인 에세이, 그것이 에쎄라고 설명하곤 한다.

하지만 한국인들에게 ‘에세이’라고 하면 인생사나 감상을 주로 표현한 부드럽고 감성적인 글들(또 다른 수필의 분류로 따지자면 ‘미셀러니’ 정도의 글)을 떠올리기 때문에 ‘에쎄’라는 단어도 종종 그런 선상에서 이해되는 것 같다. 그래서 ‘에쎄 시리즈’라고 해서 읽기 편한 수위의 책으로 생각하고 골랐는데 왜 이렇게 학술적인가라는 독자의 불만을 간혹 듣곤 한다. 글의 형식에 대한 개념이란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기에 그런 불만도 물론 있을 수 있지만, 편집자로서 간단히 웃어넘기기는 어려운 일이다. 어쨌든 그런 불만을 감안하고 보았을 때, <무미 예찬>은 약간 유화되어있는 한국 독자의 ‘에세이’ 개념에도 제법 들어맞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 문화에 대한 참신한 시선을 보여주는 프랑수아 줄리앙을 소개할 때 ‘푸른 눈을 가진 동양학자 중 가장 독보적인 학자’라는 표현을 쓴다. 서양인이 동양에 대한 책을 썼다고 생각하면, 오리엔탈리즘이 가미된 편견이나 열광이 아니면 정말이지 성실하고 딱딱한 학술 연구 외에 무엇이 있을까하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책 이후에는 그런 생각을 차츰 버리게 되었다.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았으면서 어떻게 알 수 있겠나’ 라는 생각보다는 ‘동양 문화에 속하지 않은 눈으로 보니 우리는 미처 의식하지 못한 것들을 본다’ 는 생각이 강해진 것이다. 사실 동양 문화에 속해있다고 해도 속도감 넘치고 자극이 가득한 현대를 사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그저 의식만 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 굉장히 새롭게 다가오는 중국 문화의 면면들이 던져준다. 현대인이 너무도 당연시 하는 것, 개성과 특별함을 추구하는 것을 비판하는 대목이 특히 그렇다. 누구나 알 수 있고 실천할 수 있는 ‘진부한 덕’, 즉 ‘중용’을 담백한 삶의 태도라는 형태라고 해석해낸 대목은 중용이라는 개념을 머리로 이해하는 것 이상의 깨달음을 준다.

불어로는 ‘맛없음,싱거움fadeur’ 으로 번역되는 ‘담淡’의 개념은 불어에서 딱 들어맞는 표현이 없어 저런 대체어를 썼을 정도로 서양에서는 낯선 개념이었을 테지만, 프랑수아 줄리앙은 그 개념을 ‘한번 의식하기 시작하면 어디서든 찾을 수 있다’고 말한다. 무미, 담백함의 풍경은 정말로 모든 곳에서 찾을 수 있었다. 아주 먼 옛날부터 아주 가까운 현대에 이르기까지 가장 고급스러우면서도 가장 소박한 모든 풍경 속에 ‘담’이 있다.

나로서는 이 책에 종종 등장하는 ‘물 맛’이니 ‘흰 돌을 삶아 먹는’ 중국 선인들의 이미지에서 담담하고 산뜻한 흰색에 대한 여러 가지 글들이 떠오른다. 일단 박완서가 <개성사람 이야기>에서 쓴 흰색에 대한 글. “어머니는 버선만 보고도 어디 사람이라는 걸 알 수 있다면서 개성사람 버선은 옥시설처럼 희고, 서울사람 버선은 푸르뎅뎅하게 희고, 일산·금촌사람 버선은 불그죽죽하게 희다고 했다. 옥시설은 어머니가 완벽한 흰색에 바치는 최고의 찬사인데,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일제강점기 소설가인 강경애도 손빨래를 하며 흰 옷을 더욱 희게 빨아내는 데 크나큰 희열을 느낀다는 글을 쓴 적이 있다. 그러다보면 흰색을 넘어 담백한 심상에 대한 글들도 떠오른다. ‘슴슴한’ 국수를 사랑한 백석의 시, “수필의 빛은 비둘기빛이거나 진주빛이다. 수필이 비단이라면, 번쩍거리지 않는 바탕에 약간의 무늬가 있는 것이다. 무늬는 사람 얼굴에 미소를 띠게 한다”고 하는 피천득의 <수필>로 생각이 이어진다.

현대의 풍경을 둘러보아도 ‘담’을 느낄 수 있다. 아파트에 질린 현대인들은 흰 문종이로 들어오는 햇빛과 문살의 그림자가 가장 큰 인테리어 요소이며 가구로 가득차지 않아 아름다운 한옥의 아름다움에 다시 집중하곤 한다. ‘슈퍼 노멀’이라는 표현이 있을 정도로 가장 표준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이 탁월하다는 것 역시 의식하고 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가 가장 단순한 스타일과 옅은 화장을 고수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가?

이 책의 원제 Eloge de la fadeur를 거의 그대로 옮긴 <무미 예찬>이 큰 고심 없이 자연스럽게 가제에서 최종 제목으로 결정된 것도 알려 두고 싶다. 문화적인 사안이든 정치적인 사안이든, 시쳇말로 ‘까는’ 행위가 ‘쿨한’ 트렌드가 되어버린 시대에 무언가를 예찬하고 있는 책을 만나는 것도 즐거운 일이다. 제목에 ‘예찬’이라는 단어가 붙은 책이 제법 많다. 미셸 투르니에의 <예찬>부터 다비드 르 브르통의 <걷기예찬>, 알랭 바디우의 <사랑 예찬>, 프란츠 카프카의 <여행자 예찬>에 이르기까지 멋진 책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 <무미 예찬>과 함께 읽으면 좋은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책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음예예찬陰?禮讚>인데, 한국판은 <그늘에 대하여(눌와, 2005)>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일본 문화가 곳곳에서 그림자와 그늘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활용했다는 것을 해석한 글이 있는 책으로, 일본 문화에 대한 수준 높은 미학을 맛볼 수 있는 ‘동양의 에쎄’ 라 할 만하다.

<무미 예찬>은 중국 문화에 대한 책이지만 담백한 취향과 삶에 관한 포괄적인 책으로 더 다가온다. 싱거움이나 비어 있음을 강조하지만 이 모든 자극을 단호히 떨쳐버리라거나 세상으로부터 단절되라는 방햐으로 전개되지는 않는다. 가장 감지하기 어려운 맛을 감지할 수 있도록 하기에, 가장 미묘하고 섬세한 감각들을 일깨우는 책이라고 소개하고 싶다. 음식에서 배어나오는 미묘한 맛을 즐기는 사람을 미식가라고 한다. 자극적인 맛만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둔하다는 의미이다. 마찬가지로, 지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금방 파악할 수 있는 뚜렷한 자극만 추구하는 둔한 사람을 진정한 삶의 향유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가장 넓게 퍼져 있는 동시에 가장 미세하게만 느낄 수 있는 맛, 가장 까다로우면도 가장 폭넓은 삶의 취향을 찾는 감각을 이 책을 통해 연습해볼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이 책을 읽으며 문득 허공을 바라보게 되는 사람이 많았으면 한다.

박혜정 (산책자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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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일곱 번째 책은 프랑수와 줄리앙의 <무미예찬>(최애리 옮김, 산책자 펴냄)으로, 김익균(동국대 국문과 박사과정), 안세환(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박혜정(산책자 편집자)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