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2)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고대 그리스인의 사랑

 

1. 우주론적 에로스(2)

우주를 생성하는 힘으로서의 에로스는 수많은 수수께끼를 안고 있는 오르페우스교에서도 발견된다. 빌라모비츠(Wilamowitz-Moellendorff)처럼 신비주의 일체를 혐오하는 사람들은 오르페우스교가 그리스인들의 생활에 미친 의의마저도 부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물론 오르페우스(Orpheus)는 변방 트라키아의 신이고 또 그와 관련한 문헌들에는 후대에 자의적으로 덧붙여진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가 주목하는 오르페우스교 역시 구제 신앙과 정화의 방법을 공유하고 있는 당대의 여러 유사 교파들 중 하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오르페우스교는 그러한 오르페우스 관련 여러 교파들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고 그것이 갖고 있는 몇 개의 근본적인 특징들은 멀리 아르카익기(die archaische Zeit)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서 세계의 생성을 다루고 있는 책으로는「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Rhapsodia Theogonia)」라는 시편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 작품은 물론 로마 제정기까지는 가지 않더라도 거의 헬레니즘기에 쓰여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 시 속에는 그 시기 훨씬 이전에 쓰여진 것들을 수록하고 있고 그것을 입증하는 주목할 만한 증거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의 작품에서도 발견된다.

아리스토파네스 (출처:www.historyforkids.org)

 

기원전 414년 즉, 오르페우스교가 민간의세속적인 기복제사로 변질되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던 시대에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의 작품들 중 가장 완성된 모습을 갖추고 있는 희극 「새(Ornithes)」를 상연했다. 이 작품의 파라바시스(parabasis: 코러스가 작가의 이름으로 관객을 향해 말하는 부분)에는 흥미롭게도 새로이 세계의 지배자가 된 새들의 코러스가 인간들에게 새의 기원을 가르치면서 새가 신들 보다도 오래된 존재라고 노래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게다가 코러스는 인간을 프로메테우스가 흙으로 만든 한갓 작은 인형이나 그림자와도 같은 무상한 족속으로 그리고 있다. 그 작품의 693-99행을 보자.(천병희 역 참고)

태초에 카오스와 밤과 검은 에레보스와

넓은 타르타로스가 있었고, 대지도 하늘도 없었소. 에레보스의

끝없이 넓은 품속에서 검은 날개의 밤(Nyx)이 최초의 무정란을 낳자

거기에서 세월이 흐르면서 그리움을 일깨우는(potheinos) 에로스가 나오니

등은 황금날개로 빛나고 빠르기가 회오리바람처럼 빨랐지요

에로스가 날개달린 카오스와 밤에 동침해 넓은 타르타로스에서

우리들 새 종족을 부화하여 처음으로 햇빛 속으로 데리고

올라왔지요. 에로스가 모든 것을 섞기 전에는 불사신의 종족은

없었소. 상이한 것들이 서로 섞이자 하늘과 오케아노스와

대지와 온갖 축복받은 신들의 종족이 생겨났지요. 이렇듯

우리는 모든 불사신들보다 훨씬 연장자들이라오. 우리가

에로스의 자손이라는 것은 많은 증거에 의해 명백하오(693-704)

여기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오르페우스교의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를 거의 그대로 인용하고 있다. 이 점은 「라프소디아·테오고니아」에 실린 신들의 계보가 아리스토파네스가 살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의 것임을 보여준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작품 속에 얼버무려지듯 포함된 오르페우스교의 시는 헤시오도스의 것과 매우 유사하다. 그러나 세계가 하나의 알에서부터 생겨났다고 하는 오래된 오르페우스교의 관념은 헤시오도스에서는 발견되지 않는 새로운 것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또 바로 그 알에서 에로스가 나왔고 그 에로스가 세계 생성의 주된 원천으로서 카오스와 만나 이 후의 모든 생식을 이끄는 근원적인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극 중에서 새들이 이 신들의 계보를 왜곡해서 자기들의 근원으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은 아리스토파네스의 대담한 착상이다. 그러나 새들이 세련된 방식으로 에로스에 가까운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매우 눈여겨 볼만한 부분이다. 새는 에로스와 같이 하늘을 날아 에로스가 그러하듯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기를 좋아한다. 사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성인 남성들이 매력적인 소년을 손에 넣기 위해 프로포즈를 하면서 작은 새를 선물로 주었다. 그 시절의 도자기 그림에서도 그러한 모습은 많이 발견된다. 결국 형태가 없는 카오스조차 새들의 어머니로서 기능할 수 있도록 날개를 가진 모습으로 그려진 것이다.

이로부터 훨씬 뒷시대인 기원전 3세기 어쩌면 그 이후의 시대에 쓰여진 오르페우스교 관련 문헌으로 「오르페우스 찬가(Orphei hymni)」가 있다. 이것은 소아시아의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이 예배용으로 사용하고 있는 경전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그 중 여섯 번째 노래는 오르페우스교 신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는 프로토고노스(Protogonos: 최초에 태어난 사람)에게 바쳐지고 있다. 여기에서도 또 세계의 기원으로서 알이 나오고 프로토고노스도 그 알에서 부화된 것으로 그려지고 있다.

(프로토고노스는)…

황금의 날개를 자랑하며

숫소의 소리를 갖고 태어났다

신들과 인간들의 기원

오르페우스교 신도들은 이 프로토고노스에게 다양한 신격을 부여했는데 위의 싯귀 몇 줄 뒤에는 프로토고노스가 다름 아닌 에로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것은 우리가 이제까지 논의한 에로스의 우주론적 지위를 더듬어 보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에로스를 노래하고 있는 그 책의 58번째 찬가를 보면 이미 우리의 귀에 익숙한 울림이 들려오고, 그 속에서도 에로스신의 우주론적 성격이 쉽게 발견된다.

이른바 신화적 사유를 넘어 자연학과 철학의 시대가 열리면서 만물의 아르케로 떠오를 지수화풍이 이미 그 에로스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불멸의 신들도 사멸하는 인간들도 갖고 노는 자….

세계 생성의 열쇠를 쥐고 있는 자,

하늘의, 바다의, 땅의,

그리고 세상 모든 것을 낳는 바람의

(3 이하)

이와 같은 에로스의 우주론적인 관념은 신화의 시대에서 자연학의 시대를 거쳐 이후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오랜 기간 남아 있었다. 기원전 2세기 루키아노스(Lukianos)는 무용을 예찬하는 「춤에 대해서(Peri och?se?s)」라는 책에서 별들의 윤무(Reigen)에 작용하는 춤의 여신을 이야기하면서 그 여신이 태초의 우주 생성기에 태고의 에로스와 동시에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것은 대략 900년을 거슬러 올라가 에로스에 대한 헤시오도스적인 관념이 그대로 이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또 여러 종류의 그리스·이집트의 마술관련 문서(Zauberpapyri)들에서도 시대도 출처도 다양한 여러 가지 내용들이 뒤섞여 있긴 하지만 그곳 역시 여기에서 나타난 것과 동일한 성격의 에로스가 등장하고 있다.(Preisendanz 교정본, IV 1748) 그곳에서도 에로스는 “세상 모든 것의 생식을 주관하는 자”, “우주를 만들어내는 자”, “빛을 가져오는 자”로 그려지고 있고 무엇보다도 “바다로부터 오는 자”라는 의미를 가진 Pelagios라는 이름도 붙여져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 모든 사물이나 신들이 바다로부터 발생했다고 하는 관념이 여전히 이어져 오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제 에로스의 우주론적 성격에 관한 우리의 짧은 논의를 괴테의 「파우스트(Faust)」 제2부 “고대 발푸르기스의 밤(klassischen Walpurgisnacht)” 끝부분에 나오는 세이렌(Seir?nes)의 노래 한 구절로 마무리하도록 하자. 그리스 신화에서 세이렌은 아름다운 노래로 선원을 유혹해 배를 난파시키는 여자의 얼굴을 한 새로 나온다.

세상 모든 것들의 시작 에로스, 그 에로스가 지배하도록

– So herrsche denn Eros, der alles begonnen.

 

(2. 아프로디테. 다음에 계속)

가족의 종말! 그리고 그 이후는? 2-① [4人4色 책읽기]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연구교수)

 

삼식이의 비애
어느 저녁나절, 5, 60 대로 보이는 여성들 몇 명이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소곤거린다.
“000은 삼식이 때문에 못 나온대. 그냥 우리끼리 갑시다.”
“아휴. 삼식이가 있대? 쯧쯧. 그래, 우리끼리 가요.”
삼식이? 나는 그저 삼식이가 누구 집 아들의 이름이겠거니 했다. 소곤거리던 여자들의 나이로 보아 아마도 늦둥이를 두어서 저녁 나들이가 여의치 않은 가보다 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러다 얼마 후 우연히 다른 자리에서 삼식이가 ‘삼식(三食)이’ 인줄을 알고 나서는 배꼽이 빠지게 한참을 웃었다. 삼식(三食)이, 집에서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 먹는 중년 남자를 일컫는 말이라니.
전통 사회에서 가족을 중요시했던 이유 중에 하나는 가족을 통해 일용평상(日用平常)의 도를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가족이란 생활 자료의 생산이라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기본 공동체로 간주되었다. “남자는 밭 갈고, 여자는 길쌈하고” 라는 유가 경전의 언급이나, 선악과를 따먹은 죄로 남자는 평생토록 일하고 여자는 아이를 낳는 수고를 해야 하는 벌을 내리는 야훼의 말에서처럼 남자와 여자가 분업을 함으로써 서로의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아주 오랫동안 불문율처럼 간직되어 온 바깥일을 맡은 남편과 집안일을 맡은 아내, 뭐 이 정도 구도쯤은 되어야 그래도 평등할 수 있다는 게 일반 사람들의 생각이다. 그런데 바깥일에만 종사하던 남편은 은퇴한 이후 더 이상 나갈 ‘바깥’이 없다. 그러니 집에 들어앉아서 꼬박꼬박 세 끼 밥만 챙겨 먹을 수밖에. 그렇다고 은퇴한 것만으로도 서러운데 여자 일인 집안일까지 할 수도 없다. 너무나 자존심이 상하니까. 그래서 점점 더 간 큰 남자만 되어 가고, 뭇 여자들의 비아냥거림, 불만은 커져만 간다.
금융위기를 맞고 경제성장이 둔화된 최근, 이러한 상황은 자꾸만 늘어가고, 전통적인 가족 안에서 누렸던 가장의 권위에 대한 향수는 짙어만 간다. 세상이 변했으면 그만큼 가족에도 가족의 일에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변해도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그런 실체로서의 가족, 남녀가 각기 맡아야 할 역할 분담이란 것이 있는 것일까? 삼식이의 비애, 그 끝은 어디일까?

가족 = 보금자리?
“집안이 화목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진다.” “거칠고 삭막한 사회로부터의 안식처, 지친 몸과 마음에 위안을 줄 수 있는 보금자리” 와 같은 전통적인 가족의 이미지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얼마만큼 어필될 수 있는 말일까? 신문, TV, 라디오 할 것 없이 온갖 미디어들은 가족이 아닌 가족의 모습을 보도한다. 뺏고 때리고 내쫒는 노인 학대부터 술 마시고 발로 차고 때려 부수는 아동 학대, 방임, 아내 구타에 이르기까지 온갖 폭력성이 난무하는 장소로서의 가족의 모습들이 방송꺼리로 이용된다.
<바람난 가족>, <결혼은 미친 짓이다>, 우리 삶을 이루어 가는 것들 중 지극히 당연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이런 단어들에 해괴해 보이기까지 하는 수식어가 붙고도 그리 낯설지 않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미 우리가 가족이나 결혼을 전통적 의미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결혼, 가족, 출산, 양육 등으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가족제도는 서서히 물러나고, 결혼도 출산도 혈연 가족을 이루는 것도 모두 오랫동안 숙고해야 할 것으로 되었다. 결혼하고 아이 낳고 가족을 꾸리는 일은 이제 자연스럽거나 당연한 일이 아니다. 꼼꼼히 계산기를 두드려봐야 하고 타협하고 협상을 거쳐야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이제 “애? 너나 많이 낳으세요”라고 당돌하게 말하면서, 결혼했지만 아이를 낳지 않는 딩크족이 되기도 하고, 결혼 자체를 회피하는 싱글족이 되기도 한다.
결혼을 선택하더라도 결혼을 일생일대의 계획이며 그래서 한 번 결정하면 되돌릴 수 없는 그런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검은 머리 파뿌리’ 라든가 ‘애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참고 산다’는 등의 말들의 실효성이 사라진 지 이미 오래 전 일이고, ‘황혼 이혼’ 이란 말도 전혀 거부감이 들지 않는다.
이혼 보험이 필요한 일본 사회
가족 사회학자인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현대 사회의 이런 세태 속에서 이미 엄청나게 변해버린 일본 가족의 모습을 진단하고 있다. ‘이젠 가족도 구조조정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그는 현재 일본에서 일어나고 있는 여러 가지 민법개정안들이, 변화한 일본 가족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 이해한다. 페미니즘의 영향, 애정의 고도성장에 대한 경제의 저성장이 가져 온 이혼률 증가 등은 가족 내에서의 구조 조정을 필연적으로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경제대국이 된 일본, 거기에는 일본 특유의 가족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가족’이라는 제도가 국가와 기업의 질서를 보강하는 데 크게 작용했기 때문이다. 부부 중심의 가족을 이루고, 이렇게 성별 분업의 형태를 이룬 부부 중심의 가족이 경제가 고도로 성장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경제가 저성장기로 접어든 현재, 일본에서는 가족 구성원은 물론 가족의 의미들이 점점 변화되어 간다. 결혼하지 않는 싱글이 늘어나고 별거 5년이면 이혼 사유가 정당화될 수 있고 폭력이나 외도 등의 한 쪽 배우자의 잘못이 아니라 사랑하는 감정이 사라진 것만으로 이혼 사유가 되는 사회로 변화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마다 마사히로 교수는 다소 엉뚱한 아이디어를 선보인다. 이혼 보험이 상품화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다. 보험이란 것이 어떤 사태로 인해 경제적 손실이 난 것에 대해 손해를 보상하는 것이라면, 이혼을 통해 손실이 난 경우에도 보험 상품이 성립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야마다 교수가 궁리해 본 이혼 상품의 내용은 이러하다. 이혼한 여성은 그 동안 남편이 벌어들이던 급여를 더 이상 손에 넣지 못하게 된다. 그러니 그것을 손실 이익으로 보고 이에 상응하는 보험금을 받는 것이다. 자녀나 남편의 경우도 보험금을 받을 수 있다.
이혼율이 증가하는 세태를 반영해보면 이것처럼 적절한 보험이 없을 듯싶다. 물론 야마다 교수는 이혼 보험이 성사되기 어려울 것이라 전망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이혼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를 전제로 해도 보험금을 노린 위장결혼과 이혼 등의 보험사기 사건을 막을 수는 없고 보험회사에서 위장이혼인지 아닌지를 가려내기란 매우 어려울 것이라 보기 때문이다.

가족, 그것이 사라진 이후에는 무엇이 올까?
이미 불확실하고 불안정하게 된 가족이 붕괴되는 것에 대해 매우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 해체, 이 말은 근대 사회에 들어서면서부터 지금까지 가족을 둘러싸고 불안감과 공포감을 조성해왔던 말이다. 대가족이 붕괴되고 핵가족이 산출되는 시점에도 많은 사람들은 가족이 해체되는 상황을 불안해했고 지금 다시 혈연 가족이 붕괴되어 가는 상황에 대해 초조해 한다.
<불량 가족>, <가족의 탄생>, 이런 드라마나 영화가 등장하는 것 자체가 불편하게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이면 부모와 미혼 자녀로 이루어져야 하는데, 왜 그런 관계가 아닌 사람들의 관계가 자꾸 거론되고 있는가에서 오는 불편함이다. 그들은 남인데, 왜 가족이란 이름으로 그들을 묶을 수 있다고 하는가가, 이런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불펴한 사람들이 갖는 생각이다.
그런데 영화나 드라마 제목이 주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가 지금 해체하려는 가족은 혈연 가족이다. 가족이라는 단어가 주는 친밀성을 떠올려 보면 가족은 ‘친근한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집단’ 이라 재정의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보면 가족이란 단지 혈연관계의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아니라 친근한 감정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를 일컫는 개념이 될 것이다.
가족이 사라진 그 이후에 무엇이 올까? 그것은 아마도 전통적 의미의 가족이 아니라, 구조조정이 된, 다시 새롭게 정의된 ‘가족’일 것이다. 결혼과 출산을 통해서 이루어진, 부부와 미혼자녀로 이루어진 형태 뿐만 아니라, 장애자 가족, 한 부모 가족, 동성애 가족 등을 모두 포함한 열린 의미의 ‘가족’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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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차마 하지 못한 이야기들, 가족과 결혼 2-② [4人4色 책읽기]

조주영 (서울시립대 철학과 박사과정)

 

결혼, 꼭 해야 합니까?
언제부턴가 가족 친지들이 모이는 자리가 꺼려진다. “아직도 학교에 더 다녀야 하는 거니?”로 시작해서 “그래서 졸업은 언젠데?”로 이어지는 질문들. “논문을 써야 졸업을 하죠.” 우물쭈물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올해는 제발 그 질문 좀 안 했으면 했던 바로 그 질문이 날아온다.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건데?”
그렇다. 앞서의 모든 질문들은 마지막 질문을 던지기 전의 전초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서른이 넘은 딸, 조카에게 어른들이 궁금했던 건 내가 어떤 공부를 어떤 관심에서 어떻게 하고 있는지도 아니고, 결혼을 할 생각이 있는지 없는지도 아니다. 남들 다하는 결혼을 도대체 왜!!! 안 하고 있는 건지가 궁금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시집을 가도 벌써 갔을 나이인데…….” 라며 말끝을 흐릴 때,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꾹 삼켜낸 그 말은 안 들어도 뻔하다. “너는 왜 그 모양이냐?”라고 하고 싶으셨겠지.
어른들의 걱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장성한 자식을 시집장가 보내는 것까지를 자신들의 의무로 여기고 계심이 분명하고, 무엇보다 ‘나이가 차면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린다’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살 수도 있다는 걸 요만큼도 상상하기 힘들이 때문이리라. 어른들의 질문 세례는 일단 논문부터 쓰고 결혼은 남자친구가 생기면 그 때 가서 생각해 보겠다고 하면서 어물쩍 넘겼지만,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다.
“결혼을 꼭 해야만 합니까? 나이 차면 결혼하는 게 정말 당연한 걸까요?” 물론 나는 독신주의자는 아니다. 결혼을 꼭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의문은 갖고 있지만, 절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은 아니다. 하게 되면 하고, 안 하게 되면 뭐 그런대로 살자는 입장이랄까?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의 조사에 따르면, 25∼29세 여성의 미혼율이 1975년에는 11.8%였으나 2005년에는 59.1%로 높아졌다고 한다. 이와 관련하여 “결혼기피 심각. 적령기女 미혼율 60%”라는 타이틀로 보도가 되기도 했다.(2010년 7월 28일 연합뉴스 기사 참조) 기사에 따르면, 미혼자의 28.3%가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다는 입장을 보였다고 하니, 결혼에 대해 “하게 되면 하고, 아니면 말고”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비단 나뿐만은 아닌가보다. 한편, 기사에 따르면, 결혼을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미혼자는 46.4%라고 한다. 어쨌든 결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보다는 결혼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다면 미혼율이 증가하고 있는 것은 결혼을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어떤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실제로 미혼남녀가 결혼을 하지 않는 이유는 ‘아직 결혼하기에는 이른 나이’, ‘교육을 더 받고 싶어서’, ‘자아 성취와 자기 개발을 위해’ 등 가치관과 관련된 이유가 54.9%로 가장 많았고, ‘소득이 적어서’, 또는 ‘결혼 비용이 마련되지 않아’, ‘실업이나 고용상태 불안’ 등 경제적 이유가 31.9%로 그다음이었다고 한다.
통계청의 ?인구통계연보?에 따르면, 2008년 평균 초혼 연령이 남자는 31.4세, 여자는 28.3세라고 한다. 1990년에는 평균 초혼 연령이 각각 27.8세, 24.8세였다고 하니, 근 20년 동안 초혼 연령이 꾸준히 상승한 셈이다. 20대 중 후반 여성의 미혼율의 급증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미혼율의 급증, 초혼 연령의 상승은 저출산 문제로 이어진다. 이 기사는 “저출산의 원인은 교육기간과 취업준비기간이 늘어나는 데 따른 초혼 연령의 증가 등 만혼화와 이에 따른 자녀 출산시기 지연 때문으로 요약된다”며 “초혼연령을 낮추는 정책방안이 강구돼야 한다.”는 한국보건사회연구원 변용찬 선임연구위원의 말로 마무리를 지었다. 이제 결혼 문제는 국가의 문제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옆 나라 일본의 상황도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야마다 마사히로는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 오늘날 일본 가족의 재구조화>에서 일본 가족 구조의 변화를 사회 구조의 변화, 특히 경제 변화와 연관지어 분석했다. 가족 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 즉 가족 내 이혼, 미혼화, 저출산, 자녀 양육과 노인 보호 문제 등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양상이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모습과 매우 유사하다. 그렇다면, 일본 가족 구조 문제에 비추어 우리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지 않을까?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사회 구조, 특히 경제 구조가 변하면 그에 따라 가족 구조도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 야마다 마사히로의 주장이다. 그의 분석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가족의 표준 모델인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은 전후 경제 부흥기에 알맞은 모델로, 경제 침체가 장기화 되면 흔들릴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경제 부흥기에 일본 기업은 연공서열-종신고용 제도를 고수했다. 따라서 남자들은 직장에서 성과가 낮다고 해도 해고될 염려가 없었고, 경력이 쌓이면 임금은 저절로 올라간다. 여자들은 결혼을 할 경우, 남편의 임금만으로도 중산층의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밖에서 일하기보다 집에서 가사일을 하는 쪽을 택한다. 실제로 대부분의 일본인들이 ‘샐러리맨-전업주부’를 이상적인 가족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고도의 경제 성장 덕분에 그런 형태의 가족생활이 가능했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성장이 둔화되고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표준 가족 모델은 흔들리게 된다. 우선 기업에서 연공서열-종신고용을 보장하지 않기 때문에, 남편이 실직할 경우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떨어지게 될 것이다. 따라서 아내들은 남편의 임금만으로 중산층의 생활수준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된다.
한편 자녀들도 자신들의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들은 자신의 아버지와 비슷한 수준의 경제력, 혹은 더 높은 수준의 경제력을 가진 남자와 결혼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장기화 되면서 연공서열과 종신고용이 보장되지 않기 때문에 자녀 세대는 부모 세대와는 달리 안정된 가족 수입을 기대할 수 없다.

표준 가족 모델을 유지하고자 할 경우, 여성의 경우에는 부모의 경제력이 높을수록, 남성의 경우에는 자신의 경제력이 낮을수록 결혼하기가 힘들어진다. 특히 여성의 경우는 직업이 있든 직업이 없든 부모와 같이 살 경우 중산층 생활을 유지할 수 있으므로 자신의 생활에 대한 만족도가 높기 때문에 굳이 결혼하려 하지 않는다.
일본 가족에 감돌고 있는 정체 분위기이 원인은 남편의 수입이 가족생활 수준을 결정한다는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이 뿌리 깊다는 점, 성인 자녀가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보낸다는 현상에 있다. 원흉은 여성 차별적인 직장 환경과 성인 자녀를 집에서 내보내지 않는 부모의 태도인 것이다.(228쪽)
부모와 동거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하는 성인 자녀들을 저자는 ‘기생적 싱글’이라고 부른다. 이 기생적 싱글들의 증가가 저출산의 원인이다. 즉 결혼한 여성들이 아이를 적게 낳는 것이 아니라, 결혼을 하지 않고 있는 여성들이 증가하고 있기 때문에 가임 여성 한 명당 출생률인 합계출생률이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 상황이 달라졌음에도 표준 가족 모델을 고수하는 것은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기생적 싱글들의 결혼난을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88만원 세대의 결혼, 가족
우리의 상황으로 돌아와 보자. 청년실업 몇 만 명, 사오정(45세 정년이라는 뜻), 오륙도(56세까지 직장에 다니면 도둑놈 소리를 듣는다는 뜻), 88만원 세대……. IMF 이후 경기 침체 속에 유행처럼 번진 말들이다. 특히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보여주듯이, 2000년대 이후 사회에 진출한 젊은이들은 부모 세대만큼의 안정적인 직장과 소득을 기대할 수 없다. 또한 이들은 부모로부터 풍족한 지원을 받으며 부모 세대가 받은 것 이상의 교육을 받았다.
OECD 통계에 따르면, 2010년 세대별 고등교육 이수 비율(전체 인구 중 고등교육 인구 비율)이 25~34세는 55.5%, 55~64세는 10.9%라고 한다.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2008년 현재 중학교와 고등학교 진학률은 99.9%, 99.7%로 집계됐으며,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비율도 83.8%에 이른다고 한다. 이는 부모 세대와 우리 세대 간 학력 격차는 크지만, 우리 세대와 우리 자녀 세대 간 학력 격차는 그리 크지 않으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는 우리 부모들이 우리에게 해 주었던 것처럼, 우리 자녀들에게 자신이 받은 것 이상으로 지원을 해 주는 것이 그만큼 어려워졌다는 것을 뜻한다. 일본의 상황이나 우리의 상황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이다.
실질 임금의 하락하면 중산층 생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맞벌이 부부가 증가한다. 그러나 직장에서의 차별, 가사와 출산?양육에 대한 책임과 부담은 여성으로 하여금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더 쉽게 선택하게끔 한다. 여성 노동력은 일종의 상비군과도 같아서, 여성의 사회 진출은 사회의 필요에 따라 좌우되기도 한다. 실례로, 조금 멀리 떨어진 얘기일 수도 있지만,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을 보도록 하자.
전쟁이 끝나자, 군인들은 다시 돌아와서 그동안 여자들이 다니고 있던 직장이나 대학교로 다시 복귀했다. 그래서 얼마동안은 남녀 사이에 경쟁이 늘었고, 케케묵은 여성에 대한 반감이 되살아나 여자들이 직장을 구하거나 승진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이런 점이 확실히 여성들에게 다시 결혼과 가정으로 돌아가게 했다. (중략) 전시에는 여자들의 능력, 그들(남자들)과의 경쟁은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전후에 여성들은 비록 정중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남자들에게서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를 받았다. 그러므로 여자들에게는 사랑을 하거나 사랑받는 것이 더 쉬웠고, 그러기 위해서 남자들과 경쟁하지 않겠다는 변명도 쉽게 할 수 있었다.(베티 프리단, 김현우 옮김(2005), <여성의 신비>, 이매진 펴냄, 320~321쪽)
여성의 사회 진출이 페미니즘의 성과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애석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의 상황은 60년대 초 미국의 상황과는 분명 다르다. 그러나 우리 사회 곳곳에서 “정중하지만 철옹성 같은 정도의 적의”가 암암리에 나타나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경기가 호황이라 일자리가 넘쳐날 경우에는 그나마 덜 하지만, 일자리가 부족할 경우 경계 대상 1순위는 여성이다. 어느 분야든 여성이 부각될 경우 이슈가 된다. 공무원 시험에 여성 합격률이 남성 합격률보다 높다거나, 사법고시 고득점자 가운데 여성 비율이 증가하고 있다거나, 초등학교 교사 중 여성의 비율이 높다거나 등등. 정당한 경쟁의 결과임에도 간호사나 유치원 교사 등 특정 분야를 제외하고는 여성 비율의 증가는 매번 도마 위에 오른다. 상황이 이러하니 직장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느니 차라리 집에서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하는 여성들이 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정리해보자. 6~70년대 경제 성장을 이끈 부모 밑에서 자란 우리 세대는 부모의 아낌없는 지원을 받으며 풍족하게 자랐다. 2000년대 이후 지속되고 있는 경기 침체로 인해 우리 세대는 안정된 높은 수입을 기대하기 힘들다. 중산층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결혼을 한 후에도 맞벌이를 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 불황은 역으로 여성들에게 “집으로 돌아갈” 것을 암암리에 부추긴다. 어찌어찌 결혼해서 아이를 낳더라도 부모가 해준 것만큼 내 자녀에게 해줄 수 없을 것 같다. 에라, 그냥 부모님 곁에서 될 수 있는 한 오래 살아보자. 결혼을 해도 상황이 좋아질 때까지 아이는 낳지 말자. 이렇게 된 것은 아닐까?

새로운 가족의 탄생
야마다 마사히로는 직장에서의 성 차별을 없애는 것 못지않게 ‘샐러리맨-전업주부’ 가족 모델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하다고 주장한다. 가정에서 남편과 아내의 역할은 각각 이러이러해야 한다, 자녀들은 이러이러한 방식으로 보살펴야 한다, 바람직한 가족의 모습은 이러이러한 것이다 등등 가족은 이러이러해야 한다는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가족 이데올로기에 얽매여 개인의 감정을 억누르고 문제를 키우기보다, 개인의 감정을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관계로 가족이 구성될 때 오늘날 일본 가족이 직면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가족은 영원불변한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사회가 변하면 가족도 변한다.
동성애 커플이든, 이성애 커플이든, 사랑하는 사람과 가족을 이룰 수 있어야 한다. 꼭 혈연관계로만 이루어질 필요도 없다. 몇 년 전에 개봉했던 “가족의 탄생”이라는 영화는 미라(문소리 역)를 통해 가족임을 느끼게 해 주는 결정적 요소는 그 외양이나 틀이 아니라, 구성원들 사이의 애정과 친밀도임을 보여준다. 미라는 남동생이 부인이랍시고 데려 온 엄마뻘의 여자 무신(고두심 역), 무신을 찾아 온 여자 아이―심지어 이 아이는 무신의 전 남편의 전 부인의 딸이다.―과 어쩔 수 없이 동거하게 된다. 처음에는 어색하고 불편하고 이상했지만 이들은 결국 서로를 가족으로 인정하게 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이 모여 가족을 이룬 것이다. 가족은 결혼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결혼을 해야 할지, 하지 말아야 할 지, 할 수 있을지, 할 수 없을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그러나 미라처럼 가족을 만들 수는 있을 것 같다. 서로의 애정을 확인하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관계를 그 형태에 관계없이 가족으로 인정하는 날이 올까? 다음 명절에는 어른들께 말씀드려야겠다. 저는 결혼을 꼭 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가족은 만들고 싶어요,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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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가족 이데올로기’에서 ‘삶의 가족’으로 2-③ [4人4色 책읽기]

이현숙 (자유기고가)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추스르는 사람의 일관된 표정을 보면 서늘하게 압도당하고 만다. 최근 엄청난 재난을 당하고도 그보다 몇 배 더 엄청난 자제력을 보여준 일본이 그런 유형이다. 반면, 그 와중에 ‘독도’발언을 하며 챙길 것은 끝까지 다 챙기는 그들을 보면, 외국인에게 ‘국화’와 ‘칼’을 양손에 쥐고 있는 모습으로 비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질서정연하고 차분한 일본인에게 이유 없는 도심 살해의 광기가 빈번하게 번득이는 양면성은 왜 생겼을까? 의문에 대한 일말의 답을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그린비 펴냄)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경제 성장과 맞물린 가족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적

부제 ‘오늘날 일본가족의 재구조화’는 저자가 강력히 주장하는 ‘가족 구조조정’의 목적이다. 저자가 맺음말에서 밝혔듯이 “현재의 ‘가족 양상’이 개인에게나 사회에게나 ‘자유.공정성.효율성’이라는 관점에 비추어 보아 불합리하다고 판단되기 때문”에 현대 일본의 가족 구조조정은 필수불가결하다는 것이다. 대공황 시대에 케인스(Keynes,John Maynard, 1883-1946)가 경제영역에 적용했던 ‘자유를 존중하면서도 자유에 의한 폐해를 최소화하는 방법’을 가족의 새로운 양상 연구에 도입했다는 것이 저자의 고백이다.

가족이라는 최소 단위의 사적인 조직에도 경제학 이론을 적용시켜 ‘자유.공정성.효율성’을 따져야 한다니, 얼핏 신자유주의의 덫에 빠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덜컥 들었다. 그러나 뒤를 이은 저자의 ‘가족 이데올로기’ 주장을 통해 나의 예단이 자본주의시대에 사는 소시민의 과민 반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저자는 ‘어떤 상황에나 적용되는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전형적인 가족의 이상 모델을 찾고자 했던 독자들의 섣부른 기대를 저버리면서도 끝까지 현실로 드러나 있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한계를 지적하고 그것을 가족 사회학의 범주에서 다양하게 분석해나가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 저자의 의지가 나타나는 부분이다.

저자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해 경직되어 있는 사회의 최소단위 ‘가족’이 이제는 개인의 자유와 공정한 법적용, 일방의 희생을 담보로 하지 않는 효율성의 기준 위에서 재편성되고, 새롭게 구조화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위해 전후 일본 사회에 형성된 ‘표준가구모델’이 경제 성장의 굴곡과 산업화에 얼마나 효과적으로 적절하게 기여했는가를 제시한다. ‘샐러리맨 남편과 전업주부 아내’의 전형적인 가족 구조가 고도경제성장기의 일본을 구축하는데 있어서 샐러리맨 남편의 집중된 생산력과 노동력을 창출했고, 보장된 미래를 꿈꾸는 전업주부의 전폭적인 내조를 이끌어냄으로써 사회의 안전과 질서유지를 가능케 했다. 이 시기에 결혼은 남녀 모두에게 삶의 질적인 향상과 안정을 보장해주는 것이었고, 연애결혼과 계획출산 등으로 ‘가정’의 내실은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남녀 모두에게 신분상승과도 같은 장밋빛 ‘가족 이데올로기’는 저성장시대로 접어들면서 경제와 가족의 구조전환을 야기했고, 어두운 그늘과 후유증을 낳기에 이른다. 1973년 석유파동이후 전 세계적인 불황을 일본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을 유지하는 선에서 뚫고 나간다. 중년 남성의 고용을 보장하고, 수출증대를 꾀하며, 전업주부들이 시간제 취업을 하며 불황의 공백을 미온적으로 메워나가는 방식으로 타개해 나간 것이다. 이로 인해 연공 서열이 높은 기득권과 손해를 감수하는 젊은 세대가 공존하면서 ‘미혼화’와 ‘저출산’이라는 사회 현상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IMF구조조정의 치명타를 맞으며 20세기 말을 휘청대며 겨우 지탱해온 우리나라의 현실과는 차이점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집집마다 자식 돌 반지까지 꺼내 놓게 한 국가적 위기감 조성과 실직 가장, 가정의 해체, 전업주부의 저임금 노동시장 진출, 비정규직이라는 차별적 직급 등장 등 가족과 국민 개개인의 파탄을 오랜 후유증으로 치러내야 했던 암담했던 그 시절이 다시 떠오른다. 평생직장 이란 개념은 그때 이미 사라져버렸고, 생계의 고통은 당시 20세기 말에 실직한 가장으로부터 취업난에 시달리는 21세기 자녀에게까지 이어지며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다. 선진국 일본에 비해 한국은 ‘가족 이데올로기’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의 끈끈한 관계로부터 훨씬 자유롭지 못하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가족, 감정 표현의 자유와 생활이 보장되어야

저자는 ‘가족 이데올로기’와 경제체제, 도덕성(가치관)의 지배관계에 대해서도 매우 진지한 성찰을 보여준다. 가족 불확실성의 시대가 도래 했는데도 ‘가족 원리주의’에 입각한 사회의 억압이 어떻게 개인을 지배하고 있는가를 법과 규범의 안팎에서 조망하고 있는 것이다. 1996년 일본 국회에 상정되지 못한 채 끝나 논란의 여지를 남긴 ‘결혼 및 이혼에 관한 민법개정안’은 1)선택적 부부 別性제 도입 2)결혼 최저 연령 만 16세->만 18세로 조정 3)여성 재혼 금지 기간 180일->100일로 조정 4)5년 이상 별거는 이혼으로 인정 5)혼외자녀의 법정 상속분 평등화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부부 별성제 도입’과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부분이 큰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부부 별성’을 인정하면 부부관계가 방종하게 되어 도덕성을 위협하고, 이혼이 증가할 것이며 결국 가족이 붕괴할 것이라는 반론이 강하게 일어난 것이다. 저자는 경제가 정체될수록 도덕성을 강조하여 역행할 수 없는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자유를 봉쇄하고 차별을 정당화한다며 ‘가족 이데올로기’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또 이전의 가족 틀 안에서는 수용되지 않았던 ‘감정 표현의 자유화’가 ‘5년 이상 별거의 이혼 인정’으로 드러났음을 인식하고, ‘싫다’는 비효율적인 감정을 구조 조정하여 효율적인 가족으로 재편하는 것이 옳다고 책 서두에서 짚고 있다. 이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를 존중하는 자유주의의 귀결이기도 하지만 ‘가정 내 이혼’이라는 별거상태가 지속된 관계에서 사람을 좋아하도록 강제할 수 없다는 점에서 부부관계의 규제완화라고 해석한다. 저자는 ‘느끼는 것’과 ‘느껴야만 하는 것’의 감정 사회학적 관점을 피력하고 있는데, ‘이혼하면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싫어지면 안 된다’는 감정적 압력이 연애결혼 이데올로기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법과 관습, 도덕에 묶여 이미 부부가 아닌 삶을 피상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다수 일본인의 불행한 현실을 타개해 나가고자 하는 저자는 자본주의에 매몰된 현대의 남녀 모두에게 다음과 같이 날카롭게 제안한다.

“남녀 모두가 자립할 수 있는 상황, 즉 여성도 직업을 갖고 남성도 가사와 육아를 부담하는 사회적 환경으로 정비되는 것이 중요하다. 남녀 모두 경제적으로나 생활면에서 자립하게 된다면 ‘좋아 한다’ ‘싫어 한다’는 자유로운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절대적으로 증가할 것이기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가족이데올로기 별거하라!

가족 불확실성 시대에 대처하는 결혼전략으로 ‘결혼 후에도 직업을 유지하라’, ‘친정과의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라’는 저자의 조언은 전업주부가 사라져가는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신 전업주부’는 거품경제도 끝났고, 좋은 일자리도 없으니 고생스럽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며 살 수 있게 해주는 남자만 찾는 일본 미혼여성들의 새로운 트렌드이다. 저자가 현대 일본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지적한 ‘미혼화’ ‘저출산’ ‘고령화’는 우리나라에서도 낯설지 않은 단어들이다. 이 세 가지 중에서도 특히 미혼여성이 부모와 함께 살며 독신생활을 즐기기 때문에 ‘미혼화’가 심각해지고 있고, 이 문제의 가장 큰 책임은 미혼여성을 붙잡아두고 있는 부모에게 있다고 집중 공격했다. 남녀평등의 관점을 일관되게 견지해온 저자의 논점에서 본다면, 이 부분의 해석은 고생하기 싫어하는 철없는 미혼여성과 그들 부모의 안일함에 ‘미혼화’의 전적인 책임을 묻는 듯해 지나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뿐만 아니라 현대의 미혼남성은 개인주의와 소극적인 인간관계, 경제적 문제 등으로 적극적인 결혼 의지를 드러내지 않는 사례가 적지 않기 때문이다.

‘저출산’ 문제는 우리나라의 경우, 국가적 차원에서 심각성을 대대적으로 홍보하고 있지만 대안으로 제시되는 것들은 매우 피상적이고 단견에 머물러 있다. 아이를 낳도록 아무리 부추겨봐야 근본적인 육아환경과 직장 내 성차별적 환경이 개선되지 않으면 맞벌이부부, 특히 여성은 절대 출산을 하지 않으려 할 것이다. 저출산의 열쇠는 ‘여성노동의 정당한 평가와 처우’에 있다는 저자의 혜안은 이런 점에서 탁월하다.

결혼 후 맞벌이로 힘겹게 생계를 유지해야 하고, 육아 스트레스와 고용의 불안까지 떠안아야 한다면 어떤 미혼여성이 자유롭고 독립적인 독신을 포기하고 애써 결혼을 선택하겠는가?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불가피한 선택으로 이루어진다면 미혼남성의 미혼화는 현실의 악조건으로 인해 반강제적으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농어촌 미혼남성들만 결혼 기피 대상이 되어 노총각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 경제력에 의해 ‘결혼 시장’에서 낙오되는 도시 미혼남성들도 급증하고 있는 시대이다.

결혼을 하기 위해서 남자는 월등한 경제력을, 여자는 미모와 전문 직업을 갖추어야 하는 세상이 되고 말았다. 저자는 일본 미혼여성의 ‘미혼화’가 종신고용과 연공서열의 혜택을 입어 경제력을 갖춘 부모들이 자녀를 독립시키지 않고, 사치스런 개인의 삶을 향유하게 한 데 중대한 원인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를 점하는 서민층에 해당되는 해석은 아니라고 본다. 백수인 20대 자녀와 50대인 실직한 남편, 비정규직 아내로 이루어진 서민 가족이 고통스럽게 생계를 이어나가는 한국의 현실과는 동떨어져 보인다. 오히려 빈부의 양극화가 극명한 한국에서는 부유층 자녀들끼리의 중매결혼, 결혼 정보업체를 통한 수준(경제)별 결혼이 성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고령화’의 문제도 일방적으로 여성들이 고령자의 ‘개호(간병)’를 전담해온 사회적, 관습적 행태에 집중되어 있는데, 이와 다르게 한국의 고령화는 ‘독거노인’과 ‘가족의 해체’ ‘의료시스템의 문제’와 연계되어 있다고 본다. 전반적으로 부동산 경기는 침체하고, 도심의 전세난은 가중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인 간병사업과 고급실버타운은 확산되고 있는 현실을 감안한다면 우리나라의 고령화는 자본주의와 가족 이데올로기, 빈부의 양극화를 첨예하게 드러내는 거울이 아닌가 싶다.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가족의 희망을 품다

<윤리 21>에서 가라타니 고진(Karatani Kojin, 1941~ )은 고베 시 중학생 사건을 다루면서 ‘사회’라는 강력한 힘의 유래를 ‘마을 공동체’에서 찾고 있다. 사회 구성원은 고립을 두려워해서 사이좋게 지내는 것일 뿐, 중심은 ‘사회’이고 ‘자기’는 없는 것이라고 했다. ‘자기’가 없는 구성체에서 인간은 과연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고 체제를 존속시키기 위한 기본 단위로 존재해 온 ‘우리가 알던 가족’은 과연 종말을 향해 가고 있는가?
제도와 이데올로기에 의해 불편함의 본질을 모른 채 동거해온 가족이 비로소 구조적인 해체 작업을 시도하고 새롭게 재편성되고 있다면 그것을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오히려 ‘자기’를 망각하고 가족을 위한 삶을 구성해온 전업주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은 인간의 존엄성 회복을 위해서도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그렇지만 도구화, 파편화되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의 개인을 가족의 보호막에서조차 밀어내 버린다면 미래는 황량하기 이를 데 없다. 일방의 희생으로 연명하는 가족의 구조에서 구성원 모두의 자유와 삶이 존중되는 이해와 협력의 구조로 재편된다면 그것이 또한 인간의 오래된 미래와 희망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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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사회를 보는 프리즘, 가족 2-④ [4人4色 책읽기]

주승일 (도서출판 그린비 편집자)

가족의 불확실성이 커진 시대다. 혼자 생활하는 싱글과 결혼하고 싶어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기는 어렵지 않다. 명절 때나 되어야 가족이 간신히 한자리에 모이면 화제는 단연 ‘결혼’이다. 결혼적령기는 해가 갈수록 늦춰지고 있고, 사회의 만혼화?미혼화 역시 증가하는 추세이다. 그렇다고 결혼 생활이 솔로 생활보다 더 나을 것이라고 단정하기도 어렵다. ‘솔천커지’(솔로 천국, 커플 지옥)에 공감하는 이들이 늘고 있고,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말은 더 이상 미친 소리가 아니다. ‘이혼’은 TV 등 대중매체의 단골손님 아니던가. 이제 가족은 영원한 동반자이고 가정은 안정된 공간이라는 생각은 무너지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원제와 같이 ‘가족의 구조조정’ 시대가 도래한 것일까?
일본의 가족은 어디로 가는가?

이런 가족의 위기는 우리만의 현상은 아닐 것이다. <우리가 알던 가족의 종말>(도서출판 그린비 펴냄)이 이를 잘 보여 준다. 이 책은 전후(戰後) 고도성장기를 거치면서 정착된 ‘남편-샐러리맨’과 ‘아내-전업주부’를 골격으로 하는 일본의 핵가족 구조가 경제 거품이 꺼진 후 해체되어 가는 모습을 분석해 주고 있다. 우리가 성공회대 동아시아연구소와 함께 이 책을 기획한 것은 이러한 일본의 가족 구조 변화를 살펴보고, 이러한 현상을 우리의 시각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을지 우리의 가족 구조와 비교하며 분석할 수 있는 논점을 제공하기 위해서이다(큰 틀에서 보자면 동아시아의 각종 문화 현상, 역사적 문제를 공유하고 서로 간에 교류를 더 넓히고자 하는 의도를 갖고 있다).
일본의 가족은 1990년대 이후 급격한 노령화와 이혼율의 증가, 미혼화, 저출산 등에 시달리고 있다. 젊은 사람들은 부모를 모시는 걸 점점 꺼려하고,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지 않는 관계 또한 꺼려한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어나면서 배우자 외에 친밀한 관계를 형성할 기회도 늘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싫어진 배우자와 이혼하는 건수도 늘고 있다. 경제적 욕구로 결혼 상태를 마지못해 유지하는 ‘가정 내 이혼’ 빈도까지 고려하면 부부관계부터가 위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가족의 성립을 가져오는 결혼을 보자면, 그 연령이 점점 높아지고 있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균 초혼연령 추이를 보면 전후 이래 점차 상승해 90년대 말에는 남성 28.6세, 여성 26.7세에 다다랐다. 이 책은 결혼이 늦춰지는 이유로 저성장으로 인해 젊은 세대의 경제력이 부모 세대만 못하게 되어 경제력 높은 부모를 가진 여성 및 경제력 낮은 남성은 결혼하기 어렵게 된 점, 그리고 결혼 상대를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넓어지게 되어 인기 있는 사람은 결혼 시기를 늦추고 인기 없는 사람은 상대를 만나기 어려운 점을 들고 있다. 그리고 경제력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의 고령화를 시스템을 통해 해소하지 못하고 여전히 가정 내 부양 책임에 의존한다는 점도 결혼 기피 현상을 부추기고 있다고 진단한다.
결혼 기피와 맞물린 저출산의 문제 역시 ‘경제력’과 무관하지 않다. 대졸 미혼여성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그 심리적 동인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이가 철이 들 때까지는 일을 쉬고, 아이가 크면 다시 일을 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해요.” “아이 셋을 키우려면 남편의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쪼들려요.” “내 아이니까 직접 키우고 싶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생활비 때문에 가능하다면 계속 일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해요.” 젊은이들은 경제력이 윗세대만 못하기 때문에 취업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렵다는 것인데, 자연히 아이를 많이(혹은 아예) 낳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느는 추세다.
현대 일본사회의 기본단위가 되어 주었던 ‘가족’은 1990년대를 기점으로 이렇게 위기에 봉착해 있다. 그리고 이 위기의 주범으로 이 책은 ‘경제의 저성장’을 들고 있다. 그러나 단순히 ‘저성장’으로 포괄하기보다는 거시경제와 사회구조가 맞물린 문제라는 점, 특히 경제와 고용의 문제가 부각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핵심은 경제와 고용의 문제

일본에서 경제 불황의 여파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있다. 그것은 1994년경에 있었던 일본의 유명 항공사가 스튜어디스를 계약직으로 채용한 사건이다. 스튜어디스는 지성과 미모를 겸비해야 가능한 직업이었기에 젊은 여성들에게는 동경하는 직업 중 하나였고, 스튜어디스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신분 상승의 효과가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기업에서조차 급여와 대우가 한참이나 열악한 비정규직을 둔 것이니 일본인들의 충격이 컸던 것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에 따라 정리해고와 비정규직이 크게 늘면서 ‘종신고용, 연공서열’ 등 일본 노동계의 상징이 무너진 것이다. 위 사건과 같은 직장 내 하청(사내하도급), 그리고 하청에 하청을 주는 등의 악성 고용 방식이 나타나 이른바 ‘유연하게’ 노동자들을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노동자들 간에도 위계가 뚜렷이 구분되어 갈등의 불씨를 안게 되었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할 것 없이 고용 불안, 심하면 실업 공포의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정규직은 정규직대로 더 이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고, 비정규직은 상대적인 박탈감과 재계약하지 않을 수 있다는 불안감에 시달려야 한다. 일본인들이 갖고 있던 평생직장 개념이 한순간에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린 것이다.

청년들 역시 높아진 취업 장벽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일본에서는 “1996년 이래 취직 빙하기의 파도가 바뀌지 않고 취직이 정해지지 않아서 우왕좌왕하는 학생, 취직 재수를 하겠다고 결의하는 학생 등이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젊은 여성들이 ‘취집’(전업주부로서의 삶)을 꿈꾸기도 하지만, 경제력 있는 젊은 남성들이 줄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쉬운 길이 아니다. 취업의 길이 어렵다 보니 일본에서는 기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 급속히 증가하고 있다. 뚜렷한 직업 없이 아르바이트로 전전하는 ‘프리터’(free+arbeiter)나 독립하지 않고 부모에게 빌붙어 사는 ‘기생적 싱글’(parasite single), 그리고 (직접적 원인은 아닐 수 있지만) 사회생활을 회피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사는 ‘히키코모리’(引きこもり) 등 기존에는 볼 수 없었던 인간형이 90년대 이후 일본 사회에 큰 문제로 부각될 정도로 늘고 있다는 것이다.
비정규직과 청년실업 문제는 현재 우리 사회에서도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비정규직은 이미 전체 노동자 중 1/3 이상(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약 35%)을 차지할 정도인데 이는 일본과 비슷한 수치이며(2010년에 34%), ‘88만원 세대’로 상징되는 청년들의 실업 문제는 일본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때문에 현재 우리 사회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정규직 전환을 위해, 불법파견과 무단해고(정규직과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있지만 사내 하청 노동자들은 훨씬 자르기 쉬운 상황이다)에 항의하기 위해 회사에서, 거리에서 싸우고 있다. 이런 힘조차도 없는 이들은 (‘비정규직 보호법’에 보호받기는커녕) 해마다 자리를 옮겨야 하고, 하청에 하청을 거듭하면서 고강도 노동과 낮은 임금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들은 취직을 위한 일(공부)에 학창 시절의 대부분을 보내면서도 취업이라는 바늘구멍 뚫기가 여의치 않은 상황이다. 청년들은 경쟁사회에 내몰려 있고 극소수의 선택받은 ‘자식’들만이 좋은 위치로 등극하고 있다. 빈부의 격차만큼이나 빈부의 되물림이 심화되는 상황임을 고려하면, 지나친 경쟁의 피로감에 지친 청년 세대에서 일본과 마찬가지의 기형적 생활인이 탄생하여 사회문제로 부각될 날이 멀지 않은 것 같다.

따로 또 같이 행복할 수 있는 가족을 꿈꾸며

가족의 위기는 사회의 위기이다. 역으로, 사회 문제가 가족의 위기를 불러 왔다. 기존 가족 구조의 붕괴는 구성원들 개인의 태도와 심리에 국한할 수 없다. 이 책은 주로 ‘불황’을 문제 삼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사회 기저에 흐르는 구조적 모순이 문제임을 지적하고 있다. 지은이 야마다 마사히로는 다른 책에서 일본의 지나친 경쟁과 그 속에서 패배한 이들이 다시 일어서기 힘든 구조적 모순, 다른 꿈조차 꾸기 힘든 하류인을 양산하는 문제를 지적한 바 있다. 그가 연구하는 가족사회학은 ‘가족’만큼이나 ‘사회’ 전체에 초점을 두고 있는 셈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이 제안하는 사회학적 처방은 가족 구성원들의 마음가짐이나 상대에 대한 태도 같은 것을 포함하면서도 근대사회가 지향하는 합리성과 효율성, 제도적 정비와 방안을 강조하고 있다. 성별 역할의 분담이나 풍족한 생활에 대한 꿈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부부가 “커뮤니케이션을 기반으로 한 애정으로 결합하고, 직장이나 자원봉사, 취미 등 좋아하는 영역에서 각자의 꿈을 추구해야 하고”, 자녀에게는 압력을 가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한다.

사회적으로는 생활의 보장, 노동력의 재생산, 가족의 경제생활 보장, 성차별적인 노동환경 개선, 약자 보호, 여성 노동에 대한 정당한 평가, 육아와 일을 병행할 수 있는 환경 개선 등의 관점에 기반하여 제도적인 근본 대책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 ‘가족은 이래야 한다’라는 걸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삶의 보람을 느끼며 ‘더 좋은 가족의 모습’을 찾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끝을 맺고 있다.

이 책은 일본의 가족을 거시적 안목과 경제적 관점에서 분석하고 (원리적인 수준이지만) 대안을 제시한 사회학 저서이다. 이제 이를 이어받아 가족과 연동된 질문들(예컨대 고용과 세대와 관련한 문제들)을 첨예하게 벼릴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 자체를 좀 다른 관점에서 사유할 수 있을 것이다. 예컨대 ‘함께 사는 사람들’이나 ‘공동체’의 관점에서, 혹은 밥을 같이 먹는 사람들이라는 식구(食口)의 관점에서, 아직은 생소하지만, 가능한 가족의 형태를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에서 나타나는 맹목성, 외부로 드러나지 않는 은폐된 폭력, 장애인이나 성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같은 문제가 기존 가족 관념의 그림자는 아닐까 하는 생각을 더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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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두번째 책은, 야마다 마사히로 지음, <우리가 아는 가족의 종말>(장화경 옮김, 그린비 펴냄)으로 김세서리아(성신여대 연구교수), 조주영(서울시립대 박사과정), 이현숙(자유기고가), 주승일(그린비 편집자)의 글을 실었습니다.

우리는 권력의 시선에서 자유로울까?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장윤성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매일 두 번 이상 엘리베이터를 타며 오르내린다. 엘리베이터를 낯선 이와 함께 타면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곤란하다. 아마 상대방도 나와 마찬가지인가 보다. 나와 상대방은 각각 다른 곳을 응시하며 한 평 남짓한 엘리베이터 안을 어색한 침묵에 잠기게 한다. 상대방이 엘리베이터 안에서 내린 후 비로서 내 시선은 자유로워진다.

거울을 보면서 옷매무새를 고치거나 얼굴을 살핀다. 나를 쳐다보는 눈길이 없기 때문에 내 시선도 행동도 자유롭다. 내가 아닌 남이 나를 쳐다보는 것은 어색하다. 심지어 불쾌하기도 하다. 작가는 그 이유를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우리는 타인의 시선에서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당혹감과 모욕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가 남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의사가 환자의 눈을 바라보는 것처럼 생물학적 양태에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타인의 눈을 바라보는 것은 시선과 시선의 마주침이다.

이런 시선의 관계에는 지배 관계가 따른다. 바라보는 자는 시선이고 바라보여 지는 자는 눈이다. 바라보는 자의 시선은 바라보여지는 자의 눈을 지배한다. 그 시선에서 자유로울 수 없어 타인은 내게 지옥이 된다. 그래서 뒷모습을 보일 때 더 안절부절 해진다.

면접을 보게 되는 상황도 한가지이다. 면접관의 객관적인 냉혹한 시선 안에서 나는 하나 둘 옷이 벗겨지는 듯하다. 면접관은 나에게 어떤 위해도 가하지 않았지만 나는 두려움에 긴장한다. 면접관이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보다 면접관의 눈을 응시하며 말해야 되는 상황에 식은땀을 흘린다. 면접관의 바라보는 시선과 나의 바라보는 눈 사이에 지배와 종속관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시선에도 권력은 존재한다.

17세기까지만 하더라도 잔인한 처형은 공개된 처형이었다. 17세기말 아비뇽의 판례를 보면 사람들이 모인 광장에서 죄수를 처형했다. 형리는 처형된 죄수의 몸을 내장부터 하나하나 꺼내 분해한다. 시체에 가혹행위를 하는 까닭은 군주가 가진 힘을 드러내기 위함이었다. 지배자인 군주의 절대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처벌은 잔혹했으며 이 처벌을 고스란히 민중들에게 보여줬다. 공개처형은 이 장면을 바라보는 민중들에게 두려움을 갖게 하여 군주의 권력을 굳건하게 만드는 통치수단이었다.

 
근대에 이르러 공개처형은 사라지고 은밀하게 진행된다. 18세기부터 19세기 개혁론자들은 공개처형이 민중을 위협하는 수단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것은 표면적 이유이다. 공개처형을 보면서 민중은 처벌받는 사람과 동질감을 느꼈다. 민중은 죄수가 당하는 잔인한 처형을 보면서 불안감을 느낀다. 이 불안감에서 저항의지가 시작되었다.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한 후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핍박했다.

크리스트교 신자들을 원형 경기장에 넣어 굶주린 사자의 밥이 되게 했다. 끔찍하고 처연한 크리스트교 신자들의 죽음에 로마시민 중 일부는 크리스트교인이 되기도 했다. 구경거리가 된 죽음 앞에 크리스트교인들의 종교적 신념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로마는 크리스트교를 공인했다. 공개처형은 그 역할을 해내지 못해 폐지된 것이다. 푸코는 공개처형제도의 폐지가 죄수에 대한 인권신장이 아니라 한계에 부딪친 권력 기술의 전환이라고 했다.

국가는 권력유지를 위해 다른 방법을 찾아낸다. 바로 ‘감시’이다. 공개된 처형 대신 폐쇄된 공간 속에서 죄수들을 몰아넣고 엄격한 감시와 꼼꼼한 일과표로 통제한다. 1797년부터 죄수들은 네 부류로 나뉘었다. 네가지 부류로 나눈 기준은 죄수들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라 감시되는 개인의 잠재적인 위험이 근거였다. 죄수들은 일과표에 따라 식사, 노동, 운동, 학습 등을 철저히 수행한다. 이 규범의 수행여부는 감시를 통해 확인한다.

죄수들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 규율적 권력이다. 규율적 권력은 공개처형에서 보여준 과시적 권력보다 훨씬 더 무서운 권력이다. 과시적 권력은 민중들에게 저항의지를 심어주기도 한다. 규율적 권력은 저항 의지 자체를 갖지 못하게 만든다. 규율적 권력은 민중이 스스로 권력에 복종하도록 한다. 죄수가 아니더라도 거의 대부분 사람들은 권력에 순종하는 인간이 된다.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우리는 많은 규율에 시달린다. 내가 경험한 규율중 가장 심각했던 규율은 중, 고등학교 시절 두발 단속이었다. 용모단정이라는 미명하에 머리카락 길이는 귀밑 5cm로 정해졌다. 선생님들은 자를 들고 다니시며 5cm가 넘는 머리카락을 가위로 무자비하게 자르셨다. 싹둑 잘려나가는 내 머리카락 속에서 나는 내 의지도 함께 잘려나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군대에 다녀와야 남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군대에서 받는 훈련들로 ‘극기’를 하여 강한 남자로 개선된다고 한다. 이는 심각한 착각이다.

우리는 군에서 받는 반복되는 훈련들로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되어 간다. 정치력을 가진 정치인, 경제력을 가진 재벌들은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자식들도 종종 군대에 가지 않는다. 그들은 복종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그들이 가진 권력으로 복종을 받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힘든 훈련을 통해 순종하는 인간으로 개량할 필요가 없다. 순종하는 인간으로 만드는 규율적 권력은 감시를 통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감시는 바로 시선에서 나온다.

나는 감시당하고 있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벤담은 완벽한 감시 장치, ‘판옵티콘’을 구상한다. 그의 책 제목이기도 한 ‘판옵티콘’은 하나의 시선만으로도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감옥건물이다. 건축가도 아닌 정치 사상가였던 벤담이 감옥 건축을 구상한 까닭은 감옥이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있는 이상적인 실험공간이기 때문이다. 판옵티콘의 원리는 시선의 불균형, 시선의 비대칭성이다. 반지모양의 원형건물 안 중앙의 탑에는 감시인을 둔다. 중앙 탑은 빛이 차단되어 수감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반면 수감자의 독방에는 항상 빛이 통과되게 한다. 이 빛은 감시자의 시선이 죄수들을 더 잘 파악하게 만들어준다.

벤담이 구상한 판옵티콘의 원리인 시선의 불균형, 비대칭성은 오늘날 경찰서 심문실에서 이용되고 있다. 용의자가 있는 심문실은 거울처럼 보이는 창이 있다. 용의자는 그 창을 통해 다른 방에 있는 검사와 경관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검사와 경관은 그 창을 통해 용의자를 관찰한다. 판옵티콘의 죄수들이나 경찰서 심문실의 용의자는 감시인을 확인하지 못한다. 확인하지는 못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인식하고 있다. 이 시선 때문에 그들의 행동은 제약이 따른다.

벤담의 판옵티콘은 구상으로만 끝나버린 채 건축되지 못했다. 판옵티콘 이라는 건물은 존재하지 않으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는 변형된 판옵티콘들이 존재한다. 그 변형된 판옵티콘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학생들은 시험으로 학습능력을 감시당하고 교사들은 교원평가제로 교수능력을 감시당한다. 소비자들은 신용카드로 물건을 구입하면서 기업에게 소비행태를 감시받는다. 보유율 90%가 넘는 휴대폰도 훌륭한 감시도구이다. 휴대전화 통화기록으로 감시당하고 GPS와 결합하여 위치도 추적당한다. 나의 언행이 나도 모르게 휴대전화로 찍히기도 한다.

인터넷 상에서 회원가입을 하면서도 감시받는다. 내가 기록한 구체적 신상정보가 유출되어 불이익도 받는다. 건강보험제도로 내 질병의 사항들이 보험회사 등에 의해 감시받는다. 나는 기억조차 못하는 내 질병을 보험회사는 아주 자세히 알고 있다. 곳곳의 폐쇄회로 TV는 우리를 범죄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 준다는 구실로 유용하게 우리를 감시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 감시하는 시선에서 자유로울지 알 수 없다. 행정안전부는 2013년부터 주민등록증에 IC칩을 내장한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겠다고 한다.

정부가 전자주민증이 필요하다고 내세우는 이유 중 하나는 응급치료 상황시 필요한 혈액형 정보를 넣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와 같은 이유는 어불성설이다. 아무리 응급상황시라도 수혈을 하기 전 혈액형검사는 하기 때문이다. 환자가 알려준 혈액형이나 주민증에 기재된 혈액형으로 수혈하는 의사는 없다. 그대로 수혈하기에는 위험성이 크다는 것은 의사라면 숙지하고 있는 기본 의학상식이다. 정부가 근거없는 이유를 내세워 국민을 기만하면서까지 전자주민증으로 변경하려는 목적은 감시이다. 좀 더 효율적으로 국민을 감시하려는 것이다.

나는 트루먼이다

십여 년 전에 섬뜩한 영화를 관람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이다. 트루먼 쇼는 트루먼이라는 남자의 일상을 24시간 숨겨진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전 세계에 내 보내는 인기 프로그램이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은 이 트루먼 쇼에 열광한다. 평범한 남자의 일상생활에 푹 빠진 이유는 엿보기의 심리 때문이다. 시청자들은 트루먼의 사생활을 엿보며 쾌감을 느낀다. 실제로 트루먼 쇼 같은 인간의 엿보기 심리를 이용한 프로그램은 다양하다.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란 장르로 방영되고 있다. 리얼리티 프로그램 중 이혼위기에 처한 여러 쌍의 부부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프로그램이 있다. 이 프로그램의 전개되는 내용을 시청자들도 대충 짐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청하는 이유는 가상이 아닌 실제 부부생활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트루먼 쇼를 관람한 후 다른 사람을 내가 엿볼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군가가 나도 엿볼 수 있다는 확연한 진실을 깨닫고 등골이 오싹해졌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현금인출기 앞에서, 주차장에서 나는 트루먼이다. 어디를 가든지 카메라가 나를 감시하고 있다. 나는 트루먼처럼 나를 촬영하는 폐쇄회로 TV를 의식하지 못한다. 물론 폐쇄회로 TV가 나를 촬영하고 있는 사실은 알고 있다. 그러나 내 의식의 세계는 그 사실을 감지하지 못한다. 내 의식은 나를 감시하는 시선에 길들여져 있어서 편안하게 익숙해졌다. 자연스러운 그 익숙함은 감시받는 시선에서 탈출하려는 의지를 지니지 못하게 한다. 설령 그 의지를 갖게 되더라도 무사히 탈출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이다.

섬을 탈출한 트루먼은 과연 시선에서 탈출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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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둘째 글로서 <시선은 권력이다>(박정자 지음, 기파랑 펴냄)을 다룬 글입니다.

우리 아이들이 차라리 탈선했으면 싶다! [책익는 마을 책읽는 소리]

원진호 (보령 책익는 마을 회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

이 책은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이라는 시민단체가 ‘등대지기 학교’라는 시민교육 프로그램을 09년 4-5월에 <시사IN>에 중계한 내용을 단행본으로 정리하여 출간한 것이다. 이 책은 교육 평론가 이범,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 이우학교 교감 이수광, 사이버대학교 상담학부 교수 신을진,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조기숙, 인고 서원 대표 허아람, ‘사교육걱정없는세상’ 공동대표 송인수 등 총 일곱 명의 전문가가 참여한 강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고, 강의식 문체를 사용하며 현장의 반응도 기록하고 있어 독자가 마치 청중이 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 만큼 이 책은 주제에 비해 생동감 있고 비교적 이해하기 쉽게 구성되어 있다.

서문에서 밝힌 바 ‘아이들을 스스로 공부하는 창의적 인간으로 길러내는 동시에 사교육 부담을 가져오는 입시전쟁을 끝장내자’는 취지에서 기획되었다. 이남수, 신을진, 허아람의 강의는 주로 전자의 취지에 초점을 맞췄다면, 이범, 이수광, 조기숙의 강의는 주로 후자에 초점을 맞춘 강의였다. 마지막으로 <사교육 걱정 없는 세상>의 공동대표인 송인수의 강의는 이 운동의 존재가치와 구체적인 실천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공부 못하는 나라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러웠다. 왜냐면 바로 내가 무지막지한 사교육을 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공교육을 벗어난 학습을 사교육이라 정의한다면 외국 학교에 보내 아이를 공부시키는 것만큼 확실한 사교육이 있겠는가? 내가 바로 자식들을 외국에 보내 교육을 시키고 있는 장본인이다. 이 글을 읽는 내내 송구스럽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송인수 대표의 세상을 바꾸는 순서에 나는 제1영역, 제4영역에 속하는 부류인데, 이 부류는 현 교육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새로운 정책을 갈망하면서 개인의 피해를 최소화하려고 자구책을 세우는 경우로 현실주의자라 칭한다. 이 부분에서 발가벗은 임금님이 된 것 같아 부끄러웠다.

또한 읽는 내내 답답하였다. 조기숙 교수의 강의에 밝힌 바, 최다 수업시간, 최고의 사교육비, 공교육비가 GDP의 4.5%, 사교육비가 GDP의 10%임에도 국가경쟁력, 대학경쟁력, 국민의 행복지수가 모두 낮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한 해 200명이상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자살을 하며, 자살이 10대 사망 원인 중 교통사고에 이어 2위를 차지한다는 현실이다. 또한 현 정부의 공교육 강화정책이 사교육과 경쟁하고, 결국에 가서는 사교육을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것이다. 내가 사는 시골의 대표 고등학교가 서울의 유명 영어강사를 초빙하여 특강을 하고 결국 학생들의 영어성적이 늘었다는 것이 공교육의 사교육화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방과 후 수업과 활동이 사교육비 비용을 줄였다고는 하나 사교육의 필요성을 더 느끼게 했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방과 후 수업을 경험하고 그것만으로는 안 된다고 느낀 부모가 64%나 된다지 않나. 또한 돈 있는 집안의 학생들은 아예 방과 후 수업에 참여하지도 않는다. 이러한 경험은 사회, 경제문제를 도외시 한 채 교육문제만 따로 떼어 정책과 제도적 접근만을 하는 것으로 한계가 있음을 절실히 느끼게 한다.

 

도시와 부자에게 날개 달아주는 사교육

이렇듯 부끄럽고 답답한 마음으로 읽어나가면서 이 분들이 제시하는 핵심은 두 가지 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교육문제의 핵심은 대학입시에 있고 대학입시문제의 핵심은 한국의 사회경제모순과 철저히 연동되어 있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교육은 학벌사회, 대학서열주의, 그리고 유교적 과거제의 전통 등이 결국 대학입시에 집중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인생이 바뀐다는 신화 이면에는 일등주의, 획일주의, 물질만능주의라는 가치가 내재화 되어 있다. 사회양극화, 경제불평등, 공정치 못한 사회라는 블랙홀 같은 존재가 학생과 학부모를 더욱 경쟁으로 내 몰고 있는 것이다.

이런 경쟁구도 하에서는 시골은 도시에, 빈자는 부자에게 패할 수밖에 없다. 사교육이 도시와 부자들에게 날개를 달아주고 있는 꼴이다. 이 책에서 강사들은 현실을 분석하고 다양한 정책과 제도적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꼼꼼히 그것들을 읽다보면 그래도 현 수준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눈에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아니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 다른 하나는 이런 현실에서 우리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에 대한 것이다. 강사들은 특히 아이의 적성을 파악 못 하고 스스로의 가치부재 혹은 혼란으로 우왕좌왕하는 부모의 모습을 지적한다. ‘엄마표’ 영어교육 전문가 이남수는 알파맘과 베타맘 사이에 끼어있는 주변맘의 혼란스러움을 분석하였다. 이우학교 교감이신 이수광은 부모의 여섯 가지 유형을 예로 들면서 위로는 탈주형, 질주형이 있고, 좋은 방향으로 역방형, 유목형이 있는데 문제는 그 사이에 낀 동화형, 순응형이 우리의 대다수 모습이라 지적한다.

나는 이 부분이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아이들보다 부모가 더 문제고 교육자체보다 사회가 더 문제라는 사실이다. 부모가 평생 공부할 자세가 안 되었다면? 부모가 성찰하고 분투하고, 연대하고 소통하지 않는 삶을 사는데 어떻게 아이들에게 올바른 공부를 지도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안 되면 아무리 공교육이 기가 막히게 잘 되어 있어도 우리의 아이는 제대로 성장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런 사고를 끝까지 밀고 나가면 단선적 사고방식의 오류에 빠지고, ‘그래서 어쩌라구?’ 라는 반발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사교육의 문제는 결국 부모와 어른, 사회의 문제라는 의식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사교육과 공교육, 연대는 불가능할까?

나는 사실 사교육과 공교육의 대결구도가 악과 선의 구도로 가는 것은 반대한다. 일등주의, 하나의 가치만 중시하는 획일주의를 조장하는 체계가 잘못된 것이라 인정한다면 사교육이나 공교육은 똑같은 선상에서 평가될 대상일 뿐이다. 잘못된 가치를 조장하는 사교육이 나쁘다면 그런 사교육을 닮아가는 공교육도 나쁘다. 공교육에서 채워주지 못하는 학생 개개인의 특성을 키워주는 사교육은 다안성 측면에서 옳다. 공교육의 고유한 영역인 바른 품성을 갖는 인성과 인권교육을 중시하는 것은 옳다. 그런 측면에서 사교육과 공교육은 반목하고 경쟁할 수 있는 존재지만 연대의 가능성도 있다고 생각한다. 문제는 이런 연대가 주류가 될 가능성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망은 하지 말자. 정상을 향해 일렬로 빽빽하게 서 있는 주류의 시스템은 그 사이와 경계에서 휘젓고 다니는 소수의 연대세력에 의해 부조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정상을 향해 서 있는 모든 이가 어느 순간 뒤로 돌아 자신들 앞에 펼쳐진 드넓은 대양을 보게 된다면 정상에서 온갖 폼을 다 재고 있던 그 허무한 이데올로기는 바로 깃발을 내리지 않겠는가! 너무 낭만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이 책의 여는 글에서는 그런 자신감이 묻어나있다. 또한 이 책의 저자인 일곱 분의 강사들 면면이 참으로 뛰어난 사교육 전문가들이다. 그들은 또한 진정한 공교육의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 그렇다면 벌써 저자들 속에 모종의 연대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분들이 있기에 각성된 대중이 모이고 이들이 세상을 개혁하는 소수가 될 것이라 확신해 본다.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특히, 인디고서점 허아람 대표의 글은 나에게 매우 인상적이었다. 강의 속에 소개된 책들을 모두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여 책장에 꽂아놓고 저걸 언제 읽어야지 노려볼 정도로 감명을 받았다. 책을 통해 세상을 변혁시키는 방법이 인디고서점의 활동에 녹아있음을 느꼈다고나 할까.

시골에 사는 나는 줄곧 이런 생각을 해 왔다. ‘강남의 아이들처럼 따라 하면 우린 백전백패다. 우린 뭔가 다른 모습으로 그들과 경쟁해야 하는데….’. 이런 생각의 근거는 처지와 환경이 다른 우리가 강남의 부모들의 가치관대로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된다. 어떻게 우리 시골아이들을 창의력 있고 리더쉽이 뛰어난 아이로 키울 수 있을까? 나는 책에 그 답이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에 읽은 이지성의 <리딩으로 리드하라>에는 이런 말이 있다. ‘인류 역사를 보면 항상 두 개의 계급이 존재했다. 지배하는 계급과 지배받는 계급. 전자는 후자에게 많은 것들을 금지했는데, 대표적인 것이 인문고전 독서였다.’ 내가 속해 있는 ‘책익는마을’도 사교육 좀 했으면 싶다. 그야말로 사회적 사교육!, 아이들에게 책 사주고 읽으라고만 하는 사교육이 아니라 우리가 독서가가 되고 멘토가 되어 그들과 같이 해 줄 수 있는, 친구이며 스승이며 선배가 되면 어떨까 생각해 보았다. 지배계급이 되어 자기 삶에 매몰되지 말고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어 그들과 맞장을 뜰 수 있는 힘과 지혜를 키워주는 것 말이다.

그런 아이들은 어떤 아이들일까? 이수광 교감의 강의에서 요즘 아이들 유형이라는 내용이 있다. 제도적 학습능력과 지적 호기심이라는 변수에 따라 체제순응형인 똑똑이, 체제동의형인 엄친아, 그리고 체제무감각인 잠돌이, 그리고 제도권 공부는 못 하지만 지적호기심은 왕성한 탈선아가 있단다. 이에 근거해서 우리 아이들이 탈선아가 되었으면 한다. 또한 그것을 보장하는 부모의 역할, 사회의 역할이 있었으면 한다. ‘책익는 마을’의 사회적 기여도 이런 맥락에서 설계되었으면 한다.

‘세상의 변화는 중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주변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중심을 무너뜨린다. 우리 시골아이들에게 중심으로 가라는 것은 맨주먹인 채 전쟁터로 내모는 것과 같다. 주변에서 놀게 하자. 그야말로 탈선하게 하자. 물론 이 말은 내말이 아니다. 이우학교 이수광교감의 인용글이다.

‘줄을 벗어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이 말은 비단 아이들에게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들, 나, 바로 어른들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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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글은 <e시대와철학>과 <책익는 마을>의 공동기획 연재물입니다. 책과 더불어 건전한 시민문화를 만들어가는 보령 책익는 마을 주민들의 다양한 세상살이, 세상보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오늘은 그 첫째 글로서 <굿바이 사교육>(이범 외 지음, 시사 IN 펴냄)에 관한 글이었습니다.

핀란드식 희망 교실은 어떻게 가능한가? 1-① [4人4色 책읽기]

윤영돈 (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핀란드의 교육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차라 그런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을 읽으면서 한국의 교육 현실을 반추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읽는 과정에서 핀란드의 초?중학교 교실 현장에 대한 원저자(후쿠타 세이지)의 생생한 묘사가 돋보였으며,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매 항목마다 한국의 교육현장과 비교?해설하는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거리가 떠올랐다. 왜 우리는 핀란드의 교육에 주목해야 하는 것일까? 핀란드식 교육이 무한 경쟁 시대에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핀란드식 교육이 학생의 개별성을 최대한 존중하면서 그 가능성을 최대한 실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일까? 핀란드의 교육적 성취가 과연 한국적 현실에서 제도적 개선 없이 교실로부터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일까?

책 제목을 풀어 쓴 “세계 최고 학력을 낳은 핀란드 교육, 교실에서부터 시작된다!”라는 말이 왠지 “한국의 공교육은 붕괴되고 있으나 사교육에서 핀란드식 교실혁명이 가능하다!”라고 읽히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아무래도 책을 읽어간 순서대로 이야기 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에 피어난 전인 교육의 가치

한국 사회는 숨 막히는 성적 경쟁을 촉발하는 시험사회이다. 그런데 핀란드의 교실에서는 학생들 간의 성적 경쟁이 없다고 한다. 경쟁이 없이 성적이 향상될 수 있을까. 경쟁이 없으면 성적이 향상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제고사와 같은 각종 시험을 적극 환영할 것이다. 그러나 학생마다 서로 다른 사회적?경제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타고난 능력과 소질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학교 간 그리고 학생 간 경쟁을 부추기는 표준화된 시험의 효과에 대해 회의적일 것이다.

어떤 면에서 시험과 같은 동일한 척도로 개별성과 다양성을 지닌 학생들을 상대 평가한다는 것은 매우 위험한 발상일 수 있다. “개인의 차이는 비교대상이 아니라 배려대상”으로 간주하는 핀란드에서는 의무교육 기간에 해당하는 중학교 3학년(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를 치르지 않는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들 간의 학력 격차가 크기 않으면서,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학력을 지닐 수 있다. 한마디로 교육의 평등성과 수월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에서 교육에 의한 사회적?경제적 신분의 상승이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말은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교육에 의한 계급 재생산이 가속화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좋은 가정의 자녀가 그렇지 못한 가정의 자녀보다 성적도 뛰어나고, 명문대 진학률도 높으며, 나아가 보다 우월한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획득하고 있다.

이에 반해 핀란드에서는 학생의 사회적?경제적 배경이 성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한다. 이는 핀란드의 핵심적인 교육과제가 공부를 못하는 학생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하위권 학생들을 끌어 올리되, 상위권은 제한 없이 개방한다. 특히 문제가 있는 학생을 위해서는 사회복지사, 심리전문가, 상담전문가, 특수교사 등에 의한 다각적인 교육지원이 이루어진다. 개인별 맞춤형 수업이 공교육 교실현장에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은 공교육보다는 사교육의 전유물이 되고 있는 현실이 암담하게 보인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어떻게 가능했나

핀란드의 교실혁명이 가능한 요인에는 다양한 수준의 여건이 성숙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육 문제에 대한 사회적 합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90년대 전반 핀란드는 사회민주주의를 토대로 규제완화와 분권화의 흐름 속에서 교육 시스템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가이드라인 정도를 제시하는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 장학관제도나 교과서 검정 제도 폐지, 표준화된 평가 지양, 학급당 학생수 조정(20명 이하).

이와 함께 교육의 권한이 학교 현장과 교사의 손에 맡겨졌다. ‘경쟁’과 ‘효율성’을 키워드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교육흐름과는 사뭇 다른 독자노선이다. 더 놀라운 것은 핀란드는 학력사회가 아니라서 명문대학을 졸업해야 사회적으로 유리하다는 인식자체가 없다고 한다. 한국 사회에서 불고 있는 선행학습 열풍은 중학생은 물론이고 초등학생에게까지 미치고 있다. 소위 명문대 진학을 위해서는 초등학교 때부터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명문대에 가고자 하는 이유는 학문적 성취보다는 좋은 직장을 갖기 위한 간판 따기라는 것이 솔직한 답이 아닐까.

복지와 평등이라는 핀란드의 사회적 분위기는 학교 문화에도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 그래서 배려와 존중과 협동의 가치가 교실이라는 미시적 차원에도 꽃피고 있다. 학생의 개별성과 자발성의 가치가 개인별 맞춤형 수업에서 드러난다. 더 나아가 교사와 학생 간 그리고 학생 상호 간의 상호작용을 통해 지식의 구성 과정을 체험할 수 있는 사회 구성주의적 교육관이 실현되고 있다. 한국 교육계 역시 7차 교육과정 이래로 구성주의적 교육관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를 교수?학습과정에 구현하고자 하는 선생님들의 노력도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명문대를 들어가기 위한 입시풍토와 표준화된 평가 시스템의 위력 앞에서는 그 힘을 발휘하기가 쉽지는 않은 것 같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은 사회적?제도적 성숙과 함께 탁월한 교사의 수업전문성에서 그 성공 요인을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교사의 수업전문성을 발휘하기 위한 중요한 조건으로 학급당 학생 규모를 들 수 있다. 학급정원의 상한성은 초등학교는 25명, 중학교는 18명인데, 현장에서는 초등학교는 20명 미만, 중학교는 10명 남짓 되는 소규모 학급으로 운영된다. 이러한 여건과 함께 교과과정의 편성과 운영에 있어서 절대적인 재량권을 교사에게 부여하고 있다는 점 역시 교사의 수업전문성 발휘를 위한 중요한 여건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러한 여건에서 교사들은 학생의 자율성과 개별성을 최대한 옹호하면서, 개인별 맞춤형 수업을 진행하고, 학생의 성장을 위한 개별 평가를 실시한다. 교사의 수업전문성은 슐만(L. S. Shulman)이 언급한 바 있듯이 교과를 구성하는 학문의 내용을 학생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가르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수업전문성은 ‘내용지식과 교수법의 합성물’로서 ‘교수학적 내용지식(Pedagogical Content Knowledge)’을 의미한다.

핀란드 교사들이 석사학위 소지자로서 수업전문성이 뛰어나다는 점을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한국의 교사들은 그 정도의 수준에 미치지 못하다는 평가에는 선뜻 동의하기가 힘들다. 왜냐하면 한국의 교사들 중에 석사학위뿐 아니라 박사학위를 취득한 분도 적지 않고, 현장에서 열과 성을 다해 교사의 책무를 감당하는 분들도 많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 입학 자체가 힘든 현실에서 치열한 임용고시 경쟁을 뚫고 합격한 교사들의 실력을 결코 과소평가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필자 또한 대학에서 임용고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하지만 3차에 걸쳐 진행되는 임용고시의 수준은 일반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높다. 그런데 학교 현장에 첫발을 내딛은 교사들의 교육적 사랑과 열정이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 한국 사회에서 전인 교육은 순전히 교실만의 문제일까? 필자는 사회적?제도적 여건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가능한 것은 아닐지라도 아스팔트에서 꽃 피기를 기대하는 것으로 본다.

 

한국 교육의 희망이 교실에서 꽃피기 위해

핀란드 못지않게 한국의 교육 역시 3년마다 시행되는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에서 분야별로 2, 3위를 차지할 정도로 수준이 높다. 문제는 그러한 학력 수준이 순수하게 공교육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사교육의 비중이 매우 크다는 데 있다. 한국은 사교육비 규모가 연간 20조원이 넘는 사교육 1위 국가이다. 학업성취도는 단연 세계 최상위 국가에 속하지만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업에 대한 흥미도가 떨어지고, 과열된 경쟁과 입시 부담으로 인해 창의적 사고나 새로운 상황에 대한 문제해결 능력이나 리더십은 매우 떨어지는 편이다.

“2007, 대한민국에서 초딩으로 산다는 것”(지식 채널e)을 보며 한 참을 운 적이 있다. 학교에 가기 싫다는 학생들이 10명 중 7명이었는데, 학교 수업내용을 학원에서 이미 배웠기 때문이란다. 설문에 참여한 학생들 중 절반 이상이 가출 충동을 느껴보았고, 상당 부분 자살도 생각한 적이 있단다. 성적 때문에. 한 학생은 자신의 가장 큰 결점으로 ‘공부를 못 한다’고 말한다. 학습 부담으로 힘들어 하던 한 초등학생은 “나도 물고기처럼 자유롭게 날고 싶다”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학교에서는 내가 원하는 음악을 무시해 (…) 음악을 하고 싶은 우리들은 어디에서 배워야 하나 (…) 왜 우리는 다 다른데 같은 것을 배우며 같은 길을 가게 하나, 왜 음악을 잘 하는데, 다른 것을 배우며 다른 길을 가게 하나요(…)” ?음악시간?(이승기) 가사의 일부이다. 표준화된 시험과 입시전형으로 인해 학생들 대다수는 자신의 강점 지능을 발휘할 기회를 상실한다. 대학수학능력 시험은 대체로 언어지능과 논리?수학지능에 강점을 보이는 학생에게 유리하다. 그와 다른 지능에 강점을 지닌 학생들에게는 공정하지 못한 시험일 수 있다. 음악 지능도 그 중의 하나이다.

하워드 가드너(H. Gardner) 하바드대 교수는 경험적으로 입증된 최소 8개의 지능을 다중지능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바 있다. 수업시간에 떠드는 학생은 신체운동 지능이 뛰어날 가능성이 크다. 그런 경우 수업과 관련된 내용을 몸으로 표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어야 한다. 학교공부는 서툴지만 자기를 싫어하는 친구를 오히려 좋은 친구로 바꿀 수 있는 학생도 있다. 이러한 학생은 인간친화지능이 뛰어나다. 같은 수업 내용이라도 학생마다 그것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양하고, 이해한 것을 표현하는 방식 역시 다양하다. 핀란드의 교실혁명에서 보여주고 있는 수업 방식은 어떤 면에서 가드너의 다중지능 이론에 근거한 수업 모형과도 유사하다.

한국 사회에도 핀란드식 교실혁명을 일구어 가는 교사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한국적 현실에서 전인교육의 이상을 교실로부터 구현하고 있는 영웅적인 교사가 존재한다. 그러나 사회적?제도적 변화 없이 모든 교사에게 핀란드식 교실수업을 실시하도록 요구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교사 일반에게 요구되는 의무(duty)를 상회하는 초과의무(supererogation)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교실현장에서 초과의무를 수행하는 교사들에게 눈물 어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핀란드식 희망 수업이 우리 사회에서 꽃피기 위해서는 성과주의에 연연하지 않는 일관되고 지속적인 국가 수준의 교육정책을 펼칠 필요가 있고, 학급정원도 OECD 평균수준(21.5명, 2006년 기준)까지 줄여야 하며, 불필요한 행정 업무로부터 교사를 해방시켜 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 삼류대학 출신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역량이 뛰어나다면 기업체에서 기꺼이 고용하는 기업 문화와 소위 명문대라는 간판보다는 사람됨과 재능이 부각되는 사회적 풍토가 조성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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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핀란드 교실, 왜 보여주기만 해요? 1-② [4人4色 책읽기]

김윤희 (서울상도중학교 교사)
학교의 모습을 바꿀 수는 없을까

사실 난 이 책을 이미 2년 전에 읽었다. 당시 난 몇몇 뜻이 맞는 동료교사와 더불어 한 달에 한두 번 책을 읽고 토론하는 모임을 가졌다. 당시 상황이 우리가 모여 무언가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학교가 척박해졌기 때문이다. 영국과 미국식의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의 바람이 우리나라에까지 불어왔던 것이다. 게다가 IMF 이후 경제적 안정이 중시되면서 교사의 지위가 상대적으로 올라갔고 정년보장 62세, 철밥통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교사는 전 국민의 주적(主敵)이 되다시피 했다.

당시 교사에게 서열을 매겨 점수가 낮은 교사는 가차 없이 잘라내겠다는 협박처럼 느껴지는 분위기는 교사들을 위축시켰다. 사회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학생들이 교사를 대하는 태도도 존경은 고사하고 신뢰조차 갖기 어려워지는 듯 했다. 학생들 대부분은 밤늦게까지 학원에 끌려다니며 學(학)은 했을지언정 習(습)은 할 시간 여유가 없었고, 마음속에는 보이지 않는 분노가 쌓이는 듯했다. 학생이건 교사건 마치 건드리면 터질 듯한 그런 상태처럼 보이기만 했다.

그렇게 자신의 상처를 돌볼 틈도 없는 학생들에게 남에 대한 배려를 이야기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처럼 생각됐다. 한편으로는 버릇없고 이기적인 학생들에게 화가 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나 안쓰럽기도 했다. 교사로서 할 수 있는 게 하나 없다는 자괴감과 모멸감, 저마다 혼자서 끙끙거리며 끝없는 자기 환멸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신자유주의라는 거대한 물결은 바꿀 수 없을지라도 단위학교에서나마 학교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바꿔가야 하지 않을까 고민하면서 모임을 만들게 된 것이다.

교육철학과 교육사에 대한 책에서 시작해 대안교육, 학급경영 등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실행방법 등을 배울 수 있는 책으로 옮겨갔는데, 그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핀란드 교실혁명>(비아북 펴냄)이다. 이 책은 후쿠다 세이지 교수가 핀란드 교육에 관심을 갖고, 수십 여 차례 핀란드를 방문하고 연구한 결과를 정리한 책인데, 역자인 비상교육연구소장 박재원 씨가 한국교육의 실정에 맞게 전문가의 해설을 덧붙여 펴냈다. 각 장의 끝에서는 전문가 해설, 한국에서 적용가능성, 우리교육의 문제점과 희망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하고 있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비밀, ‘차별 없는 교육’

기초교육에 해당하는 16세까지 상대적인 학력평가도 없고, 공부는 자신을 위해 하는 것이며, 교사는 학생을 돕고 정부는 지원하고 부모는 협력하는 나라, 핀란드! 개인의 능력발달이 가정이나 지역의 환경조건의 영향을 비교적 덜 받아 학교 내의 격차는 있지만 학교간의 격차는 작은 나라. 잘 하는 아이와 못 하는 아이를 구분하지 않고 모든 학생들에게 똑같이 투자하고 똑같은 교육여건을 제공하면 최선의 결과가 나온다고 믿는 나라. 게다가 모든 권한을 단위학교에 위임하고 기회균등이야말로 능력을 키우는 최고의 방법임을 강조하는 나라. 이런 환상의 나라가 있다니, 책을 읽으면서 도무지 믿기지가 않았다.

우리나라가 다양한 차이를 제도화하여 경쟁을 통해 탈락자 또는 패배자를 가급적 일찍 걸러내는 시스템이라면, 핀란드는 차이를 최소화 해 개개인의 불리함을 만회할 수 있도록 돕는 맞춤식 교육을 시행하고 있다고 한다. 학교간의 격차를 없애고, 언제 어디서든 차별 없이 공부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학급 안에서는 학력의 차이에 따라 개별지도가 가능한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결과적으로 전체적인 평균학력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특히 내 눈에 인상적인 것은, 한 학급 안에서 두 학년에 걸친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아이의 능력에 맞는 수업이 가능하도록 복식학급을 일반화한 커리큘럼이었다. 긴 안목으로 보면 모든 아이가 성장하게 되어있다는 전제 아래, 같은 학생이라도 과목이나 분야에 따라 적성과 능력이 다르므로, 모두 똑같은 과제를 부여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여유! 이 여유가 우리에겐 전혀 없음이 안타까웠다.

앞머리를 길게 늘어뜨려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창원이’(가명)가 떠오른다! 수업시간에 늘 멍 때리고 손가락이 망가질 정도로 손톱을 물어뜯는 창원이도 핀란드에서라면 즐겁게 학교생활을 하지 않았을까? 의지가 없는지 능력이 없는지 모르겠지만 체육시간을 제외하곤 창원이가관심 갖는 수업시간은 없다. 도무지 따라잡을 기회를 얻지 못한 것이다. 사고의 과정이나 지식의 활용이 중요한 것이지 양이나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우리교육은 깨달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실의 자율성보다 제도적 개선이 먼저

핀란드 교육은 학교와 교사의 자율권을 보장하여 학교가 모든 것을 결정할 권한과 책임을 갖고 있다. 교사가 수업에만 전념할 수 있게 지원하는 환경이야말로 학생들의 학습을 향상시키는 밑바탕임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이다. 역자도 ‘단위학교로의 권한과 책임의 이양’이 중요함을 인식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의 실현을 위한 제도적 개선을 주장하지 않고, 교사 개개인이 교실에서 자율적으로 우리교육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아쉬웠다. 역자가 공교육종사자가 아니다보니 아무리 현장교사의 말을 귀담아 듣고 자문을 구했다고는 해도 학교 현장과의 괴리감이 있을 수밖에!

모두에게 묻고 싶다! 교사 개개인의 노력이 학생의 의욕증진과 동기부여를 불러오고, 그것이 공교육의 신뢰를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는가? 교사 개개인의 노력으로 극심할 뿐만 아니라 공정하지도 않은 이 무한경쟁을 바꾸고 피폐해진 우리 아이들의 영혼을 살릴 수 있다고 보는가?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이 답답했다. 우리 교육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깊이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 이 책을 읽는다면, 공교육과 교사에 대한 불신을 일으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 책을 읽고 난 후 오히려 우리 교육의 현주소가 선명해져 절망감이 들었다. 우리와는 너무 다른 교육여건과 환경을 가진 핀란드식 교육이 우리에게 과연 현실적으로 효과가 있을까 라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특히 한국식 경쟁교육의 문제점과 그 해결책이 핀란드식 교육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핀란드 교육에서 주목해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무엇보다, “모든 학생들에게 차별 없이 질 높은 교육을 제공하겠다.”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이다. 이러한 철학은 세계 어느 나라이든 모두가 실현시키고 싶은 희망임에는 분명하다. 그러나 진실로 중요한 것은, 다른 나라는 단지 희망하기에만 머물렀다는 것이고, 핀란드는 그것을 실천하고 실현하고자 했다는 것이 큰 차이점이 아닌가 싶다.

 

핀란드 교육, 왜 따라하지 않고 보여주기만 해?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며 중학교 2학년 아들 녀석이 한마디 한다.

“핀란드 교육에 대해 텔레비전에서도 학교에서도 여러 번 봤는데, 왜 따라할 생각을 안 하는 거야? 좋으니까 보여주었을 거 아냐? 한 학급에 학생은 15명, 보조교사 선생님도 두 명이나 되던데! 왜 보여주기만 하는 거지?”

참 할 말이 없었다. 그냥 웃음만 나올 뿐. 결국 문제는 공교육에 대한 관점과 철학의 부재가 아닐까? 교육을 위한 기본 인프라는 구축해 놓지도 않고 불합리한 승진제도에 목매는 교사가 우대받는 상황에서 모든 책임을 교사와 학생에게 뒤집어 씌우는 것이 대한민국 교육의 현실이다. 모든 아이는 성장한다는 바탕 아래 개인차를 인정하고, 그래도 뒤처지는 학생에게는 특별 팀을 만들어 도움을 주고 끝까지 한 명의 낙오자도 생기지 않도록 지원하는 핀란드 교육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우리 교육의 현실은 30명이 넘는 아이들을 한 교실에 몰아넣고, “따라올 테면 따라와 봐!” 하는 식의 수업을 하고 정착된 지식의 양으로 ‘잘 한다, 못 한다’를 판단한 뒤, 뒤떨어지는 학생들은 하루라도 빨리 낙오자를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모두가 실패와 좌절을 맛보게 하는 체제와 다름없다. 핀란드처럼 교사에게 많은 재량권을 주는 것은 바라지도 않거니와 보조교사는 언감생심 꿈도 꾸지 않는다. 다만 학급당 학생 수를 25명 이하로 감축시킨다면 제대로 된 공교육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2010년 이후 변화가 있기는 했다. 먼저 교육청이 교육지원청으로 바뀌고, 교원평가라는 서슬퍼런 칼날도 누그러졌다. 게다가 ‘학업성취도 검사’가 ‘문화예술 체험학습의 날’로 바뀌고, 경기도에서 시작한 혁신학교운동이 서울에도 불기 시작했다. 입시제도 한 쪽으로만 쏠려 있던 우리 교육이 다각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봐도 될까? 무한경쟁 교육의 문제점이 극대화되면서 혁신학교가 하나의 대안으로 나왔고, 그 혁신학교 이론과 성공 가능성을 <핀란드 교실혁명>이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생각에 이 책을 다시 들춰보게 되었다.

 

학생 하나 하나와 눈 마주치며 수업할 수만 있다면

얼마 전 교육과학기술부는 ‘예비교원 해외진출’과 교원자격증 소지자 가운데 ‘학습보조 인턴교사’ 1만 명을 채용해 새 학기부터 전국 초·중·고교에 배치하겠다고 밝혔다. 기존 교사들의 업무 부담을 덜고, 학생들의 학력신장 효과도 얻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학교에는 비정규직 교사가 너무 많고, 비정규직이라는 불안정한 신분은 교육에 전념하기 어렵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또 언어적 문화적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예비교사 수출 역시 제고했으면 하는 생각이다. 아직 우리 교육에서 해결해야 할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장 시급한 것은 교육 인프라의 확충이라고 본다. 즉 교육여건과 질을 높일 수 있도록 정규교사를 대폭 늘려서 학급당 학생수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이 아닐까 싶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들면 학습 부진아를 줄이는데도 가장 효과적이리라 생각한다. 수업시간에 30명이 넘는 아이들 눈 한 번 마주하기도 어려운데 어떻게 그 학생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겠는가?

핀란드 교육이 가진 강점 중 다른 것은 놓아두더라도 학급당 학생 수 축소, 이것 하나만이라도 시행한다면 공교육의 문제점 중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핀란드 교실혁명>의 역자는 핀란드 교육의 성공 사례와 견줄만한 일을 우리나라 방과 후 학교로 들었는데, 그 성공 이유 또한 학생 수가 적었기에 다양한 시도와 개인별 맞춤지도가 가능하고 획일적인 주입식 교육에서 탈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2년 전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보다 지금의 교육현장에 희망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른바 혁신학교들이 선두에서 우리 공교육의 문제점을 바로잡고, 바람직한 새 교육모델을 만들어 적용시키고자 다양하게 모색하고 있으며, 교사들도 그 움직임에 동참하려는 기운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움직임의 중심에 후쿠다 세이지의 <핀란드 교실혁명>과 사토 마나부의 <수업이 바뀌면 학교가 바뀐다>라는 책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교육에서 평등성과 효율성은 결코 모순되지 않음을 깨닫고, 우리 교육의 올바른 방향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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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4인4색의 책읽기’의 첫번째 책은 후쿠다 세이지 지음, <핀란드 교실 혁명>(비아북)으로, 윤영돈(인천대 윤리교육과 교수), 김윤희(서울 상도중학교 교사), 김세연(인천 도림초등학교 교사), 박재원(기획 및 번역자)의 글을 게재합니다.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건축학 개론 』/이지영 [보고 듣고 생각하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잔혹한 복수극 판타지 영화『건축학 개론 』

 

글: 이지영 (홍익대학교 강사)

 

친구와 ‘건축학 개론’을 보았다. 재미있었다. 깔깔거릴 수 있는 에피소드들, 재미난 캐릭터(남자 주인공의 재수생 친구), 대학 1학년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깔끔한 편집, 당시에 20대를 보냈던 나에겐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간 듯 추억 속 여행을 하게 하기에 충분한 영화였다. 지루하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두 시간 남짓을 아주 재미나게 보았다. (나이를 먹으면서 여자주인공은 너무 눈이 커졌고, 남자 주인공은 머리가 너무 커졌구나! 눈이 저렇게 두 배로 커졌으니 남자주인공이 첫사랑을 못 알아볼 법도 하겠다는 따위의 쓸데없는 생각과 함께.. )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시절 그 공간으로 돌아간 듯 추억 속을 헤매이고 있었고, 그 추억 속 여행은 문득 문득 당시의 풋풋하고 어린 나의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그런데 솔직히 그뿐이었다. 영화를 보기 전 많은 사람들의 감상평 ‘8월의 크리스마스와 번지점프를 하다를 잇는 오래도록 마음을 울릴 멜로 영화’도, ‘지나간 첫사랑을 떠올리며 술을 마시고 싶게 하는 가슴 찡한 감동의 영화’도 아니었다. ‘기억의 습작’을 듣는 건 좋았다. 원래 좋아하는 노래였으니까. 그런데 그뿐. 난 궁금했다. 왜 난 재미만 느낄 뿐 감동을 받지 못했을까?

▲ 영화 건축학 개론

함께 영화를 본 친구와 밥을 먹으며 이야기했다. 우리의 결론은 ‘첫사랑에 대한 남자들의 모든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모자람 없는 영화다, 그러니 평소 멜로 안 보던 남자 관객들의 입소문을 타고 그리 흥행했지’였다. 뭐 여성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는 영화나 드라마도 많으니, 남자들의 첫사랑 판타지를 충족시켜주는 것이 뭐가 나쁜가. (수많은 드라마에서 남편에게 구박받다가 이혼하고 나면, 출세를 하면서 연하의 꽃미남 재벌 2세 실장님들의 구애를 받는 여자 주인공들이 몇 년간 브라운관을 휩쓸지 않았던가. 그런 드라마 보면서 리얼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드라마니까 라고 접고 넘어가지 않는가.) 이렇게 가끔 판타지가 충족이라도 되면 즐거운 거지. 솔직히 나 역시 매일 매일 눈 부릅뜨고 직시해야 하는 현실이 버거워 영화를 보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영화를 통해 판타지를 충족하는 걸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하는 이야기는 이 영화가 꼭 나쁘고 후지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저 영화가 함축하는 ‘팩트’를 지적하는 것뿐이다.
15년 만에 만난 남자 주인공 승민은 첫사랑 수연을 첫눈에 알아보지도 못한다. 뭐 가끔 떠올리며 살았겠지만, 첫사랑에 목매달고 살지 않고 나름 쿨하게 살았음을 보여주는 첫 장면이다. 나름 쿨하게 살아온 듯 보이는 그도 사실 과거엔 쿨하지 않았다. (솔직히 어디 그리 쿨한 인간이 많으랴. 희망사항일 뿐, 대부분의 인간들은 ‘쿨하지 못해 미안해’하며 살지 않나.) 건축학 개론 시간에 뛰어 들어온 수연에게 첫눈에 이미 호감을 느낀 승민은 같은 버스를 타고 통학하며, 숙제를 함께 하면서 수연과 가까워진다. 외모는 청순하나 성격은 나름 호탕하고 쿨한 수연은 승민과 친구와 애인의 경계선에서의 풋풋하고 파르스름한 시간들을 보낸다. 하지만 승민은 수연이 건축과 선배(돈 많고, 잘 생기고, 키 큰 바람둥이- 그 당시 자가용을 몰고 다니는 대학생)를 좋아하고 있다고 굳게 믿게 되고, 혼자 가슴앓이를 하며 어찌 고백을 하나, 어떻게 하면 수연의 마음을 얻을까를 재수생 친구와 의논하기도 하고, 연습하기도 하며 사랑을 키워간다. 하지만 문제의 종강 날이 왔다. 그는 수연의 자취방 앞에서 팩소주를 들이키며 수연이 나중에 살고 싶다고 그려줬던 2층집을 모형으로 만들어와 고백을 준비하고 있었고, 수연은 종강날 나타나지 않은 그에게 삐삐를 치며 기다리다가, 선배의 권유로 술을 마시게 되어 떡실신이 된 채 선배와 함께 자취방에 도착한다. 떡실신 직전의 수연에게 선배는 키스를 시도하지만 수연은 얼굴을 피했고, 몸도 제대로 못 가누는 수연을 선배는 자취방으로 데리고 들어간다. 그 장면을 목격한 그는 분노에 떨며 수연을 “썅년”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한참 후 그를 찾아온 수연에게 “꺼져줄래”라는 엄청 센 말을 날리고는 표표히 사라진다.

자… 이제 그의 첫사랑을 다시 되짚어 볼까? 사랑하는 여자가 떡실신 일보직전에 바람둥이 뺀질이 선배에게 겁탈을 당할지도 모르는(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졌는지 아닌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 모른다. 그런 나쁜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매우 큰 순간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순간을 목도한 그는 선배를 욕하며 그 상황을 막는 대신 비겁하게 피하고 나서는, 그녀를 “썅년”으로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충분히 그 상황을 막을 수 있었음에도 그는 그러지 않았다. (선배가 수연에게 키스를 시도했으나 몇 번이나 수연이 그것을 거부하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연히 수연이 그를 원하지 않는 것이고 특별한 관계가 아닌 그냥 친구라도 수연을 곤경에서 구해줘야 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든다.) 못 한 건지 안한 건지 하여간, 승민은 자신의 비겁함은 온데간데없이 그녀를 “썅년”으로 취급해버린다. 그리고는 방학 내내 연락하고 기다려온 그녀에게 “꺼져줄래”라고 쿨한 척하며 한마디를 날리지만, 이건 쿨한게 아니라 자신의 비겁함에 눈감으며 저지르는 싸가지 없는 행동이라 생각한다. 왜? 최소한 애인이 아닌 친구 사이라 하더라도 갑작스런 결별에는 이유를 말하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 아닐까? 그 예의조차 갖추지 못할 만큼 승민은 화가 났던 거다. 그런데 무엇에? 수연에게도 화가 났겠지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화가 상당 부분 차지하지 않았을까? 그런데 승민은 그 두 가지의 화를 잘 구분하지 못했고 자신의 찌질함은 잊고 모든 사태의 책임을 수연에게 돌렸다. 그러니 수연을 ‘썅년’이라고 삼십대 중반까지도 호명하지 않았을까? 그 나이까지도 그렇게 자신의 찌질함에 대한 반성 능력이 없는 건 사실 좀 심각해 보였다.

여하튼 아마도 대부분의 남자들은 첫사랑이 떠나간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꺼져줄래”라는 말 대신 오히려 네가 어떻게 그럴 수 있나며 떠나가는 첫사랑을 붙들고 징징거렸든, 아니면 혼자 징징거렸을 가능성이 더 크다. 마치 과거에 첫사랑에게 차였던 남자들의 대리 복수라도 해주듯 “꺼져줄래”라는 대사는 남자들의 판타지에 정확히 내다꽂혔을 것이다. 그리고 15년 만에 만난 첫사랑을 못 알아보는 것으로까지 복수는 제법 잘 이루어지고 있다. (만일 그들이 차이지 않았다면 그것은 첫사랑으로 기억되지 않을 수도 있다. 자신이 간절히 원했으나 실패한 사랑의 기억이 첫사랑으로 남으니까.. 자신이 싫다고 거절한 여자는 그저 잠깐 만났다거나 뭐 별거 아닌 기억으로 남지, 첫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남을 일은 아마 별로 없을 것 같다.)

수연을 보며 나는 안타까웠고 불쌍했다. 하지만 영화는 수연을 잔혹하게 밀어붙였다. 수연의 첫사랑은 실제로는 주인공 승민이었으나, 승민은 수연이 돈 많은 남자를 좋아한다고 오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수연의 캐릭터는 돈 많은 의사 남편 만나 결혼했으나, 3년 만에 버티다가 이혼당하고 혼자 사는, 즉 순수한 그의 첫사랑을 짓밟은 죄 값을 톡톡히 치른, (어릴 때보다 눈은 커졌지만) 성취한 것도 없는 이혼녀일 뿐이다. 왜? 과거에 “썅년”이었으니까. 지금은 술 마시고 자신의 처지에 대해 ‘쌍욕’을 하며 한탄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 것이다. 어때 복수가 이 정도면 충분한 걸까? 아니 아직이다.

일반적으로 남자들은 첫사랑을 못 잊고, 여자들은 그렇지 않다고들 그런다. 뭐 나를 비롯하여 주변을 봐도 맞는 말 같다. 가끔 생각나는 일이 있긴 하지만, 전혀 첫사랑에 목을 매거나 그리워하거나 그러지들 않는다. 사실 냉정히 말하면, 기억도 잘 안 난다. 아마 그립다면, 그리움의 대상은 그 시절의 젊음과 나의 감정이지 과거의 누군가는 아닌 듯하다. 그런데 수연은 승민을 지난 15년간 마음에 품고 그가 버리고 간 집 모형을 아직도 간직하고, 수소문해서 그를 찾아오기 까지 했다. 판타지를 충족시켜 주기에 딱 좋은 설정이다. 게다가 수연은 나이를 먹었으나 눈에 확 띄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나타났다. 판타지의 절정은 아마 이 부분일 것이다. 솔직히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푹 퍼진 아줌마가 되어 있을까봐 무서워서 찾지 못하는 경우도 종종 있지 않은가. 판타지에 금 갈까봐. 충분히 이해가는 상황이다. 현재의 수연은 남자들의 판타지 로망에 너무나도 적합한 상대가 되어 나타났다.

그런데 그녀가 아직까지 미혼이라면 곧 결혼을 해야 하는 그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설정일 것이다. 혹은 그녀가 유부녀라면 그녀를 만나는 것 자체가 법적, 도덕적 부담을 져야 하는 일이 된다. 하지만 그녀는 돌싱, 즉 이혼녀이다. 심하게 말하자면, 잠깐 다시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원나잇 스탠드를 하기에 아무 부담 없는 상대로 나타나 주었다. 와. 기가 막힌 판타지 아닌가. 더구나 그녀의 집을 완성해준 그는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는 상황이다. 미국으로 가버리게 되면 그녀 쪽에서는 그를 찾을 수 없다. 이혼녀 첫사랑이 다시 만나자고 매달리기라도 한다면 얼마나 복잡하고 불편한 상황이 되겠는가. 게다가 첫사랑 못지않게 아름다우며, 같은 분야에 종사하는 능력자에, 부모님마저 부유한 약혼녀와 외모와 추억 이외에는 아무것도 볼 것 없는 첫사랑 사이에서 갈등을 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 말이다. 승민은 지난 15년간의 수연의 마음을 확인하고, 격한 키스를 나눈 후(키스 이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제주도 외딴 집에 둘만 남아있던 밤 시간에 벌어진 상황이니 뭐 대략 짐작 가능하다.) 미국으로 ‘깨끗이’ 떠난다. 하지만 그녀는 그가 지어준 집에 병든 아버지를 모시며 정착했다. 게다가 그 곳은 제주도. 조선시대의 유배지였던 그곳은 살기에는 좋은 자연 환경이지만, 정말 거기에만 산다면 죽을 때까지 외롭게 혼자 살아야 할 가능성이 99%로 보인다. 게다가 수연은 제주도에 사는 걸 싫어했었고, 서울로 탈출하기 위해 무지하게 노력했던 소녀였는데 말이다. 와….정말 처절한 응징이다!!! 후덜덜. 이혼녀로도 모자라 사회적 무능력자로 패배자를 만들고, 심지어 외딴 섬에 유배까지 시켜 버렸다. 아무리 새로 지은 집이 예쁘면 무엇 하나. 거기서 평생 혼자 아버지 병간호나 하고 살면. 첫사랑 그를 못 잊는 수연의 집을 우리의 주인공 그는 주소와 위치를 너무나도 정확히 알고 있다. 언제든 사실 맘만 먹으면 올 수도 있다. 이거 뭔가. 지금 조선 시대인가? 마음 내키면 한 번씩 찾을 수도 있는 첩실(?) 같은 분위기마저 난 느껴졌다. 너무 처절한 복수의 판타지 아닌가. 이 정도만으로도 복수는 처절하다.

그러나 복수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 자신의 주소조차 없이 보낸 택배 상자에는 첫눈 오는 날 그를 기다리던 수연이 약속장소에 놓고 갔던 전람회 씨디가 들어있다. 그나마 간직하고 있던 자신의 기억조차 깔끔하게 털고 가는 듯 보였다. (뭐 좋게 해석해 주자면 자신도 그곳에 갔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해 볼 수도 있지만, 그 정도 오해의 해소를 위해서라면 굳이 그 씨디를 보내지 않았을 수도 있다. 키스하던 그날 밤 말했어도 충분한 일이다. 그러니 씨디를 보내는 그의 행동은 과거와 수연을 모두 털어내는 일종의 이별식으로 보인다.) 마지막 장면에서 승민이 보낸 ‘기억의 습작’ 씨디를 듣는 수연의 얼굴은 어떠한가. 허전함? 아쉬움? 아니, 수연의 얼굴은 아련한 추억에 잠겨드는 모습으로 엔딩! 와우! 이거 쿨한거라고 할 수 있어? 첫사랑에서 상처 좀 받았다고, 첫사랑 수연에게 이렇게까지 복수와 응징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들이 들어서인지, 감성이 풍부하기론 남부럽지 않고, 평소 멜로 영화를 좋아하는 나에게조차 이 영화는 그닥 멜로스럽게 감성에 다가오질 않았다.나를 잇는 감성멜로? 아니, 아니! 그보단 오히려 잔혹하고 처절한 복수극 판타지였다. 복수를 대놓고 하게 되면, 복수하는 자의 품격을 손상시키기 쉽고 또 다른 복수를 불러올 수도 있으니 말이다. 그러니 복수를 하려면 감쪽같이 상대방으로 하여금 복수를 당하는지조차 모르게 처리하는 것이 여러모로 경제적이다. 이 영화의 복수극은 바로 이렇게 교묘하고 깔끔하게 이루어졌다. 이러한 점을 고려했을 때, 영화의 광고 카피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이렇게 바뀌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에 대한 ‘썅년/놈’이었다. (사실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말은 말이 안 되는 말이다. 사실 첫사랑의 대상은 예쁘고 잘생긴 소수에게 몰려 있었던 것이 현실 아니던가. 사실 누구의 첫사랑도 아니었던 사람들도 허다하다고 본다. 뭐 여하튼 우리를 첫사랑을 하던 시절로 불러내는 데에는 성공적으로 작동했던 카피임은 인정한다. 그 카피를 보고 내가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던 시절과 그 시절에 대한 기억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얼굴들이 있었으니 말이다.)

평소 낭만적이고 감성이 매우 풍부한 인물로 평가받는 필자로 하여금 감동이 아닌 재미만을 느끼게 했던 이 영화에 대해 매우 불편한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 인터넷과 영화 잡지를 뒤져 보아도 필자처럼 이 영화를 읽고 투덜거리는 영화평을 단 하나도 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치 요즈음은 첫사랑 떠올리기 열풍이라도 불고 있는 듯하다. 다들 정릉의 골목길, 710번 버스 노선 등 당시의 추억에 빠져 이 잔혹한 복수극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관심이 없어 보이니 말이다. 그래서 필자만 뭔가 삐딱하고 곱지 않은 심성의 소유자가 되어 버린 듯한 이 분위기. 그래서 이런 의견을 말하는 것이 뭔가 눈치가 보이는 듯한 상황임을 느끼고 있는 나의 이 동요하고 있는 마음상태가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문제적 지점인 듯도 싶다. 나의, 즉 개인적인 추억과 관련되는 것이면, 특히나 첫사랑처럼 아련하고 가슴시린 기억들과 관련되어 있다면, 그에 대해서는 어떠한 객관적인 반성적 사고나 비판적 시선조차 용납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분위기 말이다. 아무리 아름답고 아련했다 하여도, 찌질한 것은 찌질한 것이고, 비겁한 것은 비겁한 것이고, 제대로 자신의 못남을 맞닥뜨리지 못했었다면 시간이 지나도 찌질하고 비겁한 태도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아련한 추억으로 포장만 하지 말고 생각도 좀 하면 좋겠다는 바람이 들었다.

과 관련하여 가장 감동적이었던 순간은, 영화 보기 전 전람회 CD를 꺼내어 ‘기억의 습작’을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바로 그 순간이었다. 김동률의 마성의 저음이 울려 퍼지던 2012년 어느 봄날 오전,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그때로 돌아가 있었고 오랜만에 다시 들었던 그 노래의 감동은 쉬이 잊히지 않을 것 같다.

PS. 사실 영화에 대해 이런 식의 영화평을 쓰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방식도 옳다고 생각하는 방식도 아니다. 그저 줄거리, 캐릭터 설정에 대한 분석만 가지고 영화를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비영화적인 사고방식이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면서도, 나의 글에 대한 아쉬움과에 대한 미안함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밝히고 싶다. 이 영화에는 장점도 상당히 있다. 과거와 현재가 동시에 펼쳐지는 것 같은 구성방식도 아주 깔끔하고 효과적이었으며, 첫사랑의 판타지가 과도한 낭만주의나 비현실적인 판타지로 촌스럽게 가지 않고, 상당히 세련되고 깨끗하게 처리되었다는 점에서 이 영화의 힘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랬기 때문에 이 영화의 처절한 복수극이 더욱 교묘한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만일 촌스럽고 후진 멜로 영화였다면 비판도 할 필요 없었을 것 같다. 그만큼 잘 만들어진 장르 영화였기 때문에 비판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