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소도시에서 벌어지는 의무급식이야기[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이수진(학부모)

 

같은 동네에 사는 젊은 새댁으로부터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언니! 올해는 우리 아이가 무상급식이 안된다는 데요, 얘기 들으셨어요?”

“아니, 왜? 작년엔 받았잖아. 학교에서 별소리 못 들었는데”

“유치원하고 중등은 지원이 없구, 초등만 준다는데요. 지역신문에 났어요.”

 
ⓒ오마이뉴스학교에서 학부모 운영위원을 하고 있고 지역에서 <참교육을위한전국학부모회> 일을 하다 보니 종종 학교 문제에 관한 문의 전화를 받곤 한다. 느닷없는 전화를 끊고 이래저래 알아보니 참 어이없는 일이 벌어졌다.

작년에 3개월간(9월-12월) 유치원 만5세가 경기도교육청 예산 지원으로 의무급식(무상급식)의 혜택을 받았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경기도 교육청에서 급식비를 100% 지원해주었으나 올해는 예산 부족으로 지자체에서 40%(약 1억 8천만 원)을 부담하고 경기도 교육청이 60%(약 2억7천만 원)을 분담하여 의무(무상)급식을 실시하자고 하였다. 그런데 우리시에서는 예산부족이라는 이유로 대응자금을 전혀 준비하지 않았다고 한다(예산편성안함). 해당 교육청에 알아보니 교육청 담당 장학사가 여러 차례 시장을 찾아 갔으나 거절하였다고 한다.

우리시가 예산부족으로 내세운 대응투자금 40%는 정확히 1억 8천 6십 8만 8천 원으로 우리시 전체예산의 0.04%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이다. 그 돈이 없어서 2억 7천 만원을 날려버리고 급식비를 내고 밥을 먹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은 중학교에도 똑같이 적용 돼서 중학교에도 우리시만 급식비 지원이 되지 않고 있다.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것은 이런 사실을 주민의 의사를 묻는 공청회나 의견수렴의 절차 없이 시가 일방적으로 진행했다는 점이다.

지역신문 귀퉁이에 난 기사를 보지 못했다면 영문도 모르고 당할 일이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이 아줌마들 사이에서 오가고 난 후 유치원 학부모들이 주축이 돼서 시청에 문의 전화를 하고 민원을 내기로 했다. 다른 시에서는 경기도교육청의 보조를 받아 무상급식을 실시한다는 데 왜 우리시만 못한다고 하는지 민원을 내니 돌아 온 답변 은 더욱 가관이다. “예산이 부족하다”, “일방적인 도교육청의 밀어붙이기 행정이었다”며 수요예측이 가능했던 무상급식 예산을 편성하지도 않은 채, 학부모들에게는 변명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3월말에 추경예산을 잡는 시의회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학부모들이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유치원은 공립과 병설 유치원 학부모들이 연락을 해서 까페를 만들고 시청 앞에서 무상급식을 요구하는 집회를 갖고 기자회견을 열기로 하고, 중학교 학부모들은 학부모회 회장들이나 학부모운영위원이 긴급하게 연락을 해서 회의를 열고 ‘의무(무상)급식을 바라는 학부모임’을 만들어 서명 작업과 일인시위를 하기로 했다.

이렇게 신속하게 모임을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지역이 워낙 좁은 까닭도 있지만 그동안 학부모들 사이에 네트워크가 어느 정도는 마련되어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인구 20만이 되지 않는 경기도의 작은 중소도시이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지역이였다가 일명 신도시가 들어오면서부터 도농복합지역으로 바뀐 곳이다. 그렇다보니 신도시로 이주한 입주민과 기존 지역민과의 의식차도 있고 생활차이도 있다. 수도권이라고 하지만 농촌지역에 가까워 시청에 들어가면 지역 토박이 성씨(姓氏)를 쓰는 공무원들이 대부분일 정도였고 공무원들이 어찌나 권위적이던지 민원을 넣으러온 시민들에게 불친절은 기본이고 고압적 자세로 업무를 봐주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서울에서 이주해 온 이주민들은 수시로 민원을 내고 전화를 걸어 공무원과 싸우는 일이 잦았고 시를 상대로 소송을 재기하는 경우도 많았다. 그러다보니 자연히 시민의 목소리를 내는 시민단체들이 생겨나게 됐고 많지는 않지만 지역공동체 일을 하시는 분들이 생겨났다.

지역에서 일을 하다보면 답이 없는 사람들을 많이 만난다. 워낙 보수성이 강한 지역이라 국회의원이나 시의원이 거의 대부분 보수당 당원들이고 이들은 자기의 생각 없이 무조건 당의 입장으로 말한다. 무상급식만 하더라도 인터넷에서나 올라오는 말들이 서슴없이 시의원입에서 튀어 나온다.

예를 들면 ‘무상급식 하느라 예산이 전부 애들 밥먹는데 들어가서 시에 돈이 없다. 그래서 아직 도로를 못 만든다’라고 아파트 대표자들을 불러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야기 한다. 참고로 그 도로는 10년째 공사 중인 곳이다. 무상급식은 작년부터 이루어 졌는데 그전에는 왜 그 도로를 완성하지 못했느냐고 물으면 ‘너무 예민하신 것 아니냐, 뭐 그렇다는 얘기지 어떻게 그걸 일일이 말할 수 있겠느냐?“고 한다. 또 어떤 시의원은 ”무상급식하면서 급식질이 떨어져서 아이들이 맛이 없어 밥을 못 먹는다고 하더라“란 이야기도 한다. 학부모회 일을 하기 때문에 급식실 영양교사들을 만날 일이 있어 그 분들에게 물어보면 ”의무(무상)급식을 하고 나서는 예산이 안정화 돼서 오히려 급식질이 좋아졌다’고 한다. 무상급식을 하기 전에는 급식비를 못내는 아이들이 있기 때문에 그만큼 예산이 불안정하고 급식비를 못낸 아이들까지 먹여야 하므로 예산이 늘 부족했었다고 했다.

의무(무상)급식을 놓고 헛된 곳에 돈을 쓴다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 대부분은 현장의 이야기를 한 번도 제대로 듣지 않은 사람이 분명하다.

각자 자기가 사는 곳에서 서명 작업을 받기로 하고 헤어진 중학교 학부모회 회장님들은 그 후 다시 모이질 않았다. 학교 측에서 정치적 문제가 개입된 것 같으니 학부모들에게 그 모임에 관여하지 말라고 하였단다. 아이들을 생각하는 순수한 행동이 아니라 무상복지, 무상급식이라는 정치적 문제라나 뭐라나.

그렇다고 의무(무상)급식을 바라는 학부모 모임이 소극적인 모습을 보이거나 위축되지는 않았다. 뜻있는 학부모들이 계속 활동하기로 해서 일인릴레이시위도 계획대로 진행됐고 서명 작업도 받아서 제출했다.

우리시에서 의무(무상)급식은 아직도 예산편성을 기다리는 중이나 유치원생은 곧 편성이 돼서 의무급식을 먹게 될 것 같고, 중학생은 좀 더 시위가 필요할 듯하다.

3월이라 해도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는 날,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지하철역 앞에서 일인시위에 참여하게 된 나는 지나가시면서 ‘수고하십니다’ 한마디 해주시는 아저씨들이 있어 가슴이 따뜻했고, 일인시위 한다고 아침부터 일부러 지하철역까지 나와 준 아줌마들이 있어 어깨가 으쓱했다. 세상은 아직 살만하다.

 

(참고로 12년 2월 현재 경기도교육청 소속 30개 시군교육청 가운데 14개시(대부분 경기외곽지역)에서 대응투자을 하지 않아 의무급식을 하고 있지 않으며 4월까지 몇 개의 시가 대응투자 예산을 세워 이후 집행할 계획이라고 한다.)

연구자 양성 프로그램-철학세미나 1기 모집[ⓔ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과 함께하는 철학 세미나 1기 수강생 모집

– 철학근력향상 프로그램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는 기초체력이 필요합니다. 철학 공부에도 기본 근력과 같은 것이 필요합니다. 여기 철학 공부를 위한 근력 향상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이하 한철연)는 제도권 대학원에서의 철학 세미나가 갖는 장점을 수용하면서도 전문적인 학문 연구의 길에 들어선 사람들을 위한 기초 연구 능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어 철학 세미나를 마련했습니다. 철학 세미나는 철학 원전을 토대로 동·서양 철학사, 형이상학 그리고 사회철학의 주요 저작을 전체적으로 조망하는 2년여의 대장정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1기 세미나에서는 희랍 철학 세미나, 서양 근대 철학 세미나, 독일어 문법 학습과 원전 강독이 진행됩니다. 2기에서는 동양 철학 원전 강독, 서양 현대 존재론과 정치철학, 예술철학, 그리고 과학철학 세미나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헬쓰장에만 몸짱 트레이너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철학 원전에 대한 깊이 있는 시선과 저항적 시선이 공존하는 세미나를 한철연에서 모신 철학 근력짱인 선생님들과 함께 만들어 가지 않겠습니까?

 

과목 소개

독일어 원전 강독 연습 : 독일어 문법 학습 + 마르크스, 엥겔스의 <독일 이데올로기>강독

강사: 서유석 (호원대 교수)

기간: 4월 21일 ~ 9월 29일 (24주) 토요일 오전 10-1시

 

희랍철학 고전 읽기

플라톤 – 크리톤, 국가, 아리스토텔레스 – 형이상학, 니코마코스 윤리학 발췌 세미나

강사: 김인곤, 김재홍, 김주일, 김진성, 이기백 (정암학당 연구원)

기간: 4월 21일 ~ 7월 7일 (12주) 토요일 오후 2-5시

 

서양 근대 철학 고전 읽기 : 이성 비판으로부터 정신현상학으로

칸트 – 순수이성비판, 헤겔 – 정신 현상학 발췌 강독 세미나

강사: 이병창 (전 동아대 교수)

기간: 7월 14일 ~ 9월 29일 (12주) 토요일 오후 2-5시

 

대 상: 대학원 재학생 및 수료생, 학부 3-4학년

(철학을 토대로 연구자의 길을 걷고자 하는 사람)

수업 방식: 원전 발췌 강독 세미나 (학생들은 번역본을 참조할 수 있음)

신청 방식: 메일 (yhseo2001@naver.com)로 자기소개서를 보내주세요.

(자기소개서 다운로드: 한철연 홈페이지 hanphil.or.kr)

수 강 료 : 없음 (과목당 최대 수강 인원 10명, 최소 수강인원 3명, 3명 미만 시 폐강)

문 의: 02-332-4301, yhseo2001@naver.com

시 간: 2012년 4월 중순~ 9월 중순, 토요일 오전 10시~오후 5시

장 소: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세미나 1, 2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세상의 어머니여! 모든 아이들을 보호할 것인가, 우리 아이를 위험에 내놓을 것인가

김 경 원(문정중학교 교사)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대립과 세계 기아 문제가 해결되기 전에는 아기를 낳지 않는다 했던 여자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아 자연 번식(?)에도 성공하였다. 중고등 시절, 선생님의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며 딴 짓과 자습 빼먹기를 밥 먹듯이 하던 여자는 먹고 살 방도를 위해 젊은 시절을 헤매다 양심도 없이 뒤늦게 교사가 되었다.

그렇게 나는 대한민국의 유부녀 여교사가 된 것이다. IMF 시절에는 먹고 사는 문제로 소심해질 대로 소심해진 국민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던 적도 있었지만 요즘 내 주변의 사람들은 부쩍 나를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지난 달에 부산에서 만났던 초면의 남편 선배는 요즘 구독하는 신문에서 보니 학교가 정말 심각하다며 나를 딱하다는 듯이 쳐다보았고 최근 만난 큰시누이는 내 손을 두 손으로 움켜잡으며 힘들어서 어떻게 사냐고 했다. 뭐 그냥 그 자리에서 울어야 할 분위기였는데 안타깝게도 눈물은 나지 않았다.

물론 내 주위에도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에 어울리는 여러 가지 심란한 에피소드는 많다. 내 주변의 소심한 동료는 수업이 끝나면 교무실에 돌아와 한참을 넋나간 표정으로 앉아 있는다. 그 선생님은 말 안 듣는 악동들의 교실에서 벗어난 충격(?)으로 점심시간이 지나는 것도 잊고 (정말 나로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리 앉아 있는 것인데 그러한 모습을 여러 번 목격했다. 어떤 선생님은 자다가도 수업 시간에 힘들었던 장면이 생각나 벌떡 일어나 당시에 억울하게 당했던(?) 장면을 떠올리며 분노하기도 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주변 학교의 즐거우신(?) 학생들의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 활약상도 우리 학생들을 통해 종종 나의 귀에 들어오기도 한다. 킥복싱을 배운 학생과 학부모 혹은 자해하는 학생에 의해 위협을 당한 교사의 이야기는 같은 교사로서 학생들 앞에서 듣기에 민망한 경우가 많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본인도 교직 생활 10여년 동안 무협의 세계에서 생활하며 나름대로 몇 가지 어려웠던 에피소드는 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나의 이야기를 쉽게 털어놓을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냥 들으면 매우 버릇없고 나쁜 인간 말종들의 이야기로만 들리기 때문이다. 혹은 학생 장악력에 문제가 있는 여교사의 하소연으로 들릴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섬세하게 그 상황의 뒷면까지 보면 어려운 가정 형편에, 가족의 해체에, 잘못된 입시 위주 경쟁 교육에, 믿고 의지할 데 없는 외로움에, 권위적인 교사 및 학부모들이라는 원인이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면 우회 도로로 해결 방법을 찾게 되기도 한다. 최근 언론 지면에는 학교에 학생들을 장악할 남교사가 너무 없었다거나, 가해 학생에게 너무 처벌이 미약했다거나, 학교 문제라고 해서 외부 경찰이 소극적으로 대응했다거나 사회적으로 교사들이 체벌 등 강제적으로 학생을 장악할 방법이 없었다는 반성들이 들끓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남교사를 확충하자거나 가해 학생에게 강력하게 처벌하자거나 경찰의 적극 개입을 인정하거나 교사들에게 강력한 제제 주단을 주자는 등의 의견이 대두되고 있다. 하지만 그 조치에 경쟁 위주의 교육 제도 시정이나 가족 복지에 대한 배려는 들어 있지 않다.

오늘도 인터넷에는 단골 기사인 학교 폭력 관련 기사가 새로 올라와 있다. 10만원 때문에 친구를 죽인 혐의로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으면서도 태연히 헤드폰으로 음악을 들었다는 고등학생의 이야기가 우리의 흥미를 자극한다. “요즘 애들은 쯧쯧쯧…….”, “이런 애들은 콱 죽을 때까지 콩밥을 먹여야지.”, “이게 인간이야? 괴물이지!” 등등 강력한 대응이 자신의 도덕성을 입증하는 양 우리는 한 두 마디씩 어찌 이럴 수 있느냐고 성토하곤 한다. 그러면 우리는 깨끗하다. 이러한 괴물을 낳은 사회의 일원이지만 우리는 분명 깨끗할 것이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이 아이의 아버지는 일찍이 도박에 빠져 집을 나가고 엄마가 홀로 일을 하여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과거에는 가정폭력에 시달렸고, 현재는 폭력적인 가난 앞에 노출되어 있던 이 아이의 엄마는 분명 비정규직이었을 것이고 늦게까지 일하느라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었을 거라고 말하면 그것은 세상을 너무 비관적으로만 보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하면 학교 폭력을 없앨 수 있을 것인가? 더 정확히 말하면 우리 아이들을 학교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것인가? 엄마로서는 눈물 나는 일이지만, 솔직히 말하면 교사인 나조차도 학교 폭력으로부터 내 아이를 완전하게 보호할 수 없다. 단지 운 좋게도 친절한 담임 선생님과 좋은 단짝 친구와 너그러운 일진을 만나길 기도할 뿐……. 혹은 매트릭스의 네오처럼 총알도 피하는 유연성이 우리 아들에게 허용되길 바랄 뿐이다.

이기적인 엄마들 입장에선 우리 아이만 이 혼란한 세상에서 쏙 빼서 보호할 수 있은 방법이 있으면 좋으련만 세상은 쉽지 않아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까지 안전하고 행복해야 비로소 나의 아이까지 행복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정말 절실하게 나의 아이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와 그 친구의 친구의 안위까지도 내 아이의 안위를 걱정하듯 걱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친구의 친구의 친구의 무한한 친구의 친구의 가정이 어떠한지 아버지는 도박을 끊으셨는지 어머니는 정규직으로 전환되셨는지가 진심으로 궁금하고 걱정이 되는 것이다.

“신이 세상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만들었다”는 듣는 엄마들 부담스러운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여자들은 결코 자신의 자식만을 보호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든 아이들을 보호하든지 아니면 자신의 자식을 위험 속에 내놓든지 둘 중 하나다.

자거라투스트라, 영화 ‘토리노의 말’을 보다[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편집자문위원)

니체 아부지, 울긴 왜 울었어요?

울다니, 내가 언제?

참 아부지도! 그 일이 너무나도 널리 알려져서, 이번에 영화로도 나왔던데요. 왜, 토리노를 여행하시다가, 가혹하게 얻어맞는 말의 말머리를 껴안고 울었다면서요? 왜 우셨어요?

아, 그거 말이냐, 어디 말이 불쌍해서 울었겠냐? 내 처지가 말하고 같아서, 그랬지. 왜 동병상린이라는 말도 있지 않니? 그런데 그게 영화하고 무슨 상관이냐? 내가 영화의 주인공이 됐단 말이냐?

헝가리 영화 감독 벨라 타르가 자신의 마지막 영화로 ‘토리노의 말’이라는 영화를 만들었대요. 그래서 저도 보고 왔어요. 물론 아부지를 주인공으로 만든 것은 아니고요. 아버지의 토리노 에피소드에서 감독이 착상을 얻었던 모양이에요. 그렇게 얻어맞는 말과 유사하게 가혹한 삶을 살아가는 어떤 부녀에 관한 이야기이죠. 영화는 시작하면서 이 부녀의 삶을 암시라도 하는 듯이, 마차를 끌고 가는 말의 모습을 오랫동안 비추어 주죠. 비루먹어서 정말 가련하게 보이지만, 마부가 때리는 채찍에도 불구하고 그야말로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짐승처럼 마차를 끌고 달리는데, 카메라는 말 머리에 바짝 붙어서 말의 모습을 클로즈업해요. 이 장면이 너무나 오래 동안 지속되어서 지루해질 것 같기도 한데, 이상하게도 우리 관객의 시선을 압도하면서 매혹하죠. 관객은 서서히 그런 말의 비루먹고, 짐승 같은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인 것처럼 느끼게 돼요. 그런데 아부지, 동병상린이라면 아부지도 누군가에게 가혹하게 얻어맞았다는 말인가요?
그런 셈이지. 그런데 나를 때린 게 어떤 사람이 아니고, 바로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신이었지.

그런데 아부지, 아부지는 신이 죽었다고 선언했다던데, 웬 신이 아직 살아서 아부지를 지배하고 조종한다는 말이에요?

글쎄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야, 채찍에 얻어맞는 말의 모습을 보니, 꼭 신이 우리를 그렇게 처벌하는 것만 같아서 말이야. 물론 신이란 것은 없겠지. 그런데도 우리는 신이라는 관념에 사로잡혀 살아왔어. 그 관념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해 왔던 것이지. 너도 알겠지만, 난 한 평생 그런 신에 대한 관념과 싸웠지. 그런 신에 대한 관념 때문에 우리는 한 번도 이 세상에 살면서 제대로 행복하게 웃어보지도 못했던 것이 아니니? 행복이란 것은 없었어. 그저 잠시의 휴식이 있었을 뿐, 우리의 짐승 같은 삶은 여전히 지속되었지. 그래서 마침내 나는 선언했던 거야. 신은 죽었다고. 그러면 이제 신이란 관념이 우리를 괴롭히지 못할 줄 알았어. 하지만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신은 이미 죽어도 골백번 더 죽었지만, 인간은 신이란 관념을 버릴 수가 없었어.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결국 내 인생도 그런 신의 관념에 잡아먹히고 말았지. 토리노에서 말이 얻어맞는 것을 보니, 나 니체조차, 신이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아는 이 니체조차도 신의 관념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에 의해 조종되고 지배되었다는 것이 한순간 너무 명확하게 자각되었던 거야. 주요한 것은 신은 관념만으로도 마치 실재하는 것과 동일한 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이야. 신의 관념에는 존재의 관념이 포함된다고 하지 않니? 그러므로 관념만 있으면 존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래서 아부지가 스스로 바보였다고 말한 거예요? “어머니 나는 바보였어요” 이렇게 일기에 적었다면서요? 그럼 아부지는 결국 신의 관념과 싸우다가 패배한 것을 자인한 셈이네요.
그런가, 나도 모르겠어. 그 순간 나는 내가 꼭 바보였다는 느낌이 들었어. 신의 관념이라는 허깨비 앞에서 내가 졌다고 생각되었어. 그래서 그 뒤로 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았어. 그저 짐승처럼 아무 생각도 없이 아픈 줄도 기쁜 줄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려 했지. 사람들은 내가 이제 진짜로 미쳤다고 하지만, 내가 미친 게 아니야. 나는 오히려 알았던 거지. 우리가 그저 짐승일 뿐이라는 것을 말이야. 그래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던 거야. 어느 날 아침 침대에서 다시 깨어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 때와 똑 같았어.

그런데 아부지, 이 영화의 내용도 유사해요. 점차 죽음과 파멸이 다가오죠. 영화는 6일 동안 지속되는데 계속해서 카메라는 어느 황량한 벌판에 사는 두 부녀의 삶을 냉혹하게 지켜보죠. 그 벌판은 메말라 있고 그 위에는 쉼도 없이 돌풍이 몰아치고 있어요. 그 돌풍은 관객인 우리조차 지겨워하게 만들 정도이에요. 그 돌풍 앞에서 두 사람이 살고 있는 오두막집은 비록 돌 벽으로 되었지만, 이미 곳곳에 무너지고 있어 더 이상 견디지 못할 것 같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죠. 서서히 그들의 삶이 파괴되어 가요. 이튿날부터 말이 더 이상 마차를 끌기를 거부하죠. 나흘 째 유일한 우물의 물이 말라 버리고. 그날 두 부녀는 집을 버리고 탈출을 시도합니다. 그러나 들판은 텅 비어 있지만 그렇게 비어 있음 때문에 어디에로도 갈 수 없어요. 다시 두 부녀는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리고 닷새째 집안의 등불이 꺼지죠. 마지막 엿새째 암흑 속에서 두 부녀는 이제 모든 것이 죽음과 파멸에 이르렀다는 것을 깨닫는 것 같아요.

그럼 자거라투스트라야, 이 영화는 자연주의적인 영화이냐? 김동인의 감자처럼, 결국 주변의 환경 때문에 인간이 무너지고 만다는 거냐?

니체 아부지, 사실 저도 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아마 모파상의 작품인 것 같은데, 제가 지금 분명치 않습니다만, 눈보라 속에서 산장을 지키던 사람이 마침내 미쳐버리는 얘기가 떠올라서, 이 영화를 보면서 언젠가 두 사람이 미치지 않을까 내심 기다렸지만 영화는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어요.

그럼 어떻게 끝났단 말이냐?

감독의 태도는 독특합니다. 이렇게 가혹한 삶 속에서 두 부녀는 마치 기계처럼 똑 같은 일을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반복해요. 그들은 깨어나면 한 잔의 술을 마십니다. 그것은 어떤 즐거움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일처럼 보여요. 독일의 고지대에서 사람들도 깨어나면 맥주 한잔을 마신다고 해요. 그래야 머리가 부팅된다나요. 또 아버지는 한 쪽 팔을 쓰지 못해 딸이 아버지가 옷을 입고 벗는 것을 도와주는데, 돌풍을 막기 위해 걸쳐 입은 여러 겹의 옷을 하나하나 벗고 다시 입죠. 그것은 마치 신성한 의식을 거행하는 것 같아요. 두 부녀는 어떤 말도 서로 건네지 않습니다. 오직 “먹자, 자자” 라는 간단한 말만 오가는데, 그 말은 아마 항가리어이겠지만, 우리 귀에는 거의 날카로운 금속성 소리와 같이 들렸어요. 두 부녀의 삶은 진부하지만 신성하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뭐라고 할까요. 어떤 인간의 자유의지의 힘이 강하게 느껴지는 삶입니다. 어떤 가혹한 압박이나 굴욕조차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는 인간의 힘 말이에요.

자유의지라, 그러면 그들이 초인이란 말이냐?

사실 저는 그렇게 보았습니다. 그들은 장작을 패고, 옷을 깁고 하는 생존에 긴요한 일 외에는 창문 앞에 세워둔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몰아치고 있는 돌풍을 응시할 뿐입니다. 그들의 응시를 보면서 저는 들뢰즈가 말한 ‘시청각적 상황’이라는 개념이 떠올랐어요. 들뢰즈는 인간이 도저히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에 부딪히면 사유할 수 없는 것을 강제로 사유하게 만든다고 합니다. 그런 사유가 바로 응시라는 거죠.

자거라투스투라야, 거 참 그 영화 어디서 하냐? 나도 꼭 봐야 하겠는 걸. 아주 마음에 든다. 내 철학의 정수이구나.
그래요, 사실 감독 벨라 타르도 사회주의 항가리 출신이지만 니체 아부지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말해요. 저는 사실 그 감독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어요. 나중에 이 감독이 만든 영화들 ‘파멸’이라든가 ‘사탄탱고’ 등을 보아야 하겠어요.

그런데 아부지, 니체 아부지. 이 영화는 엿새 동안 진행되는 데 이튿날과 사흗날 외부에서 손님들이 찾아오죠. 이튿날은 동네의 이웃이 찾아옵니다. 그는 사실 술꾼이에요. 그러나 말로는 결코 굴복하지 말자고 다짐합니다. 주인공은 그의 말은 믿지만 그의 행위는 믿지 않는 듯 술 한 병을 주어서 쫓아 보내고 말죠.

굴복이라니, 누구한테 굴복한다는 말이냐?

니체 아부지, 그게 사실 이 영화를 해석하는데 걸리는 가장 큰 문제에요. 저는 그 이웃 손님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의 대상이 신이라고 생각해요. 이 영화에는 보이지 않지만 신이 등장하죠. 끝없는 돌풍이나, 우물이 마르거나, 불이 꺼지는 것 등은 단순한 자연적인 사건은 아닌 것 같아요. 어떤 신의 힘이 여기서 작용한다는 것을 볼 수 있어요. 그래서 이 영화를 저는 꼭 욥기와 같은 맥락이 아닌가 생각했어요. 성경의 욥기에서도 욥의 신앙을 시험하기 위해 하느님은 욥을 파멸과 죽음으로 밀어 넣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욥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아요. 그런데 이 영화는 같은 맥락이지만 대답은 욥과는 반대이죠. 즉 주인공은 신이 인간에게 가하는 가혹한 시련 앞에 처해 있어요. 그러나 그는 결코 신에게 굴복하지 않죠. 그 시련 앞에서 그는 오연하게 나는 인간이고 자유로운 의지를 지닌 인간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듯해요. 그래서 이 영화를 보고 있으면 저절로 그들의 엄숙한 선언이 마치 해방의 선언처럼 울려 퍼지는 것 같아요.

그러면 그들이 프로메테우스란 말이냐?

에, 정말 감독은 그들의 모습을 마치 희랍의 신화에 나오는 인물처럼 그려놓았어요. 거인 또는 영웅들이 모습이죠. 저는 이 영화에 사흘째 날에 등장하는 집시의 모습에서 감독의 이런 생각을 잘 읽을 수 있다고 봅니다. 집시들이 다가왔을 때 주인공 부녀들은 그들을 쫒아내죠. 집시들은 떠나면서 딸에게 책을 하나 전해 줍니다. 그 책을 딸이 나중에 읽는데, 거기에는 성소가 더럽혀졌고 너희가 저지르는 죄 때문에 이런 고난을 받는다는 식으로 말이 적혀 있어요. 이것이 바로 기독교적인 죄의식이죠. 집시가 전해주는 이 책은 바로 신에게 저항하는 이 영웅들을 신에게 굴복시키려는 달콤한 죄의식의 말이었던 셈이죠. 물론 집시 자신은 신의 율법에 따라 살지는 않아요. 집시들은 그런 죄의식 때문에 차라리 신의 명령을 포기한 삶 즉 욕망의 삶을 살지만 죄의식을 버릴 수는 없죠. 반면 이 영화의 주인공 두 부녀는 이런 신이 인간에게 부과하는 죄의식 자체를 거부합니다.

자거라투스투라야, 이제 알겠니?, 내가 왜 나를 바보라고 생각했다는 것을. 인간이 어떻게 신의 힘을 이길 수 있다는 말이냐? 결국 스스로 파멸에 이를 뿐이야.

니체 아부지, 신에 저항하는 유일한 길이 있지 않을까요?

그게 무어지? 넌 아직도 모르겠냐? 신에 저항할 수 없다는 것을.

주인공 두 부녀는 마침내 마지막 날 모든 희망이 사라졌을 때 그 스스로 먹기를 거부합니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인간에게 허용되는 최후의 자유의지가 아닐까요? 먼저 딸이 먹기를 거부하죠. 그리고 마지막까지 안간힘을 쓰면서 감자를 으깨어 먹으려던 아버지조차 마침내 손을 내려놓습니다. 분노에 가득한 눈으로 그들은 서로 마주보죠. 그리고 영화는 페이드아웃 됩니다.

 

 

 

 

 

3월 월례발표회에 많은 참석부탁드립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한철연 3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3월 월례발표회는 신입회원의 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자 김은하 선생님은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칸트의 매체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한철연의 ‘변증법과 해체론’ 분과에서 활동중입니다. 이번 월례발표회에서는 박사학위논문의 주요 내용을 발표합니다. 관심 있으신 분들은 참석하셔서 새로운 연구 주제에 관해 함께 토론 해주십시오.

발표자: 김은하(건국대)

제목: <직관-기호-개념: 사유의 체계론적 관점에서 본 기호의 위치>

시간: 3월 23일 오후 5시

장소: 한철연 제1 세미나실

다음은 발표자의 간단한 논문 소개입니다.

“순수이성비판 A98-103에 해당하는 칸트 체계론(Systematik)은 정신활동의 순수·논리적인 기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 기능은 크게 필연적으로 “직관-구상-개념”의 3중적 종합체계로 이루어진 것이다.

먼저 직관 속에서 이루어지는 종합이란 한 대상에 대한 다양한 정보들을 병합적인 질서와 순차적인 질서로 이해하는 것이다. 개념을 통한 종합이란 대상의 다양들을 규칙성있게 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어떤 한 대상을 생각할 때에는 그 대상을 직관 속에서 잃어버리지 않고 통일적으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서 기호가 매개된 연속적인 구상이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식은 기호에 의한 하나의 삼중구조(triplex genesis e natura mentis) 형태를 띤다.”

 

구보씨 다시 뱀파이어를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Y가 비아냥거린 대로 구보씨가 말이 많아진 걸까? 아니, 그럴 리 없어, 하고 구보씨는 고개를 젓는다. 하루 종일 말 한 마디 없이 지낼 때도 있는 걸. 그래도 별로 불편한 줄 모르겠던데…어쨌든 나는 쓸데없이 떠들어 대는 그런 부류는 아니라구. 오히려 어쩔 수 없어서 한 동안 말을 계속하고 나면 금세 목이 쉬거나 잠겨 버린다니까. Y야말로 말이 많지. 아무 때나 끼어들어 말을 시키고 말이야.

그런 주제에 나보고 말꼼수라구? 쳇… 이 구보를 어떻게 보고 하는 소린가. 난 꼼수라는 걸 생각해 본 적도 없어. 꼼수 아닌 수를 생각하기에도 벅차고 힘든 처진데 말이야. 게다가 생각해보지도 않은 걸 무슨 수로 말하느냔 말이지. 하긴, 철학자들은 예로부터 그런 오해를 받아왔잖아. 기껏 생각한 것을 풀어놓으면, 생각하기 싫어하는 치들은 그걸 궤변이나 꼼수로 여긴다니까. 근데 내가 이런 말을 할라치면, Y는 이것도 또 꼼수라고 할 거 아냐. 그게 아니라고 변명을 시작하면, 그것도 또 꼼수에 대한 꼼수라고 할 거고. 그런데 어떻게 말을 하냐. 야, 안 돼!

그리고 말을 하는 것과 꼼수 부리는 것은 구별해야 한다구. <나는 꼼수다>의 ‘나’는 어디까지나 가카지, <나는 꼼수다>의 멤버들이 아니거든. <복수는 나의 것이다>에서 ‘나’는 구약의 여호와지, 그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이 아닌 것처럼. 그러고 보니, <나는 꼼수다>의 박찬욱 버전은 <꼼수는 나의 것이다>가 되겠군. 꼼수는 나만의 것이니 너희 어린 백성들은 감히 꼼수를 부릴 생각은 말아라, 이렇게 가카께서 하교(下敎)하신다는 말이 될 테니까.

여기까지 혼자 너스레를 떨다 구보씨는 아차 하고 생각을 가다듬었다.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경망하게 굴어서 되겠는가 싶어서였다. 어쩌면 이게 다 Y에게 전염된 탓인지 몰라. Y는 내가 옆에 있을 때에도 가끔 <개그 콘서트>를 보면서 깔깔대고 웃거나, <나꼼수>를 듣다가 키득거리기도 하니까 말이야. 매스 미디어의 전염성, 이것이야말로 수평적으로 확산하는 뱀파이어적 전염의 한 전형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Y에게 목덜미를 여기저기 가볍게 물린 것일 수도 있어.

하여튼 대중적 전염의 문제는 그 수평성이 자칫 초래할 수 있는 일차원성에 있지, 하고 구보씨는 목덜미를 한 손으로 쓸어내리며 생각해 본다. 그것을 극복하여 운동의 평면에 굴곡과 회절(回折)을 도입하고, 나아가 도약과 초월을 받아들이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진정성에 어울리는 일일 것이다. 물론 이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짐짓 고투(苦鬪)를 수반하는 까닭이다. 그것도 어떤 승리나 구원이 보장되어 있지 않은 고투를.

고투라니…장난스럽게 말을 시작해서 갑자기 너무 심각하고 비장(悲壯)해지는 것 아닐까. 하지만 우리 삶이 원래 그렇지 않은가. 삶의 다양성이란 유형(類型)의 평면적 수다성(數多性)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여러 차원을 넘나드는 깊이의 요동(搖動)과 착종(錯綜)을 뜻하기도 하는 것이다. 제대로 된 문화적 고안물은 이런 점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뱀파이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아니, 뱀파이어야말로 그런 점을 잘 보여줄 수 있기에 주목할 만한 것이 아닌가.

이런 점에서 구보씨는 박찬욱의 <박쥐>가 뛰어난 영화라고 여긴다. 알려진 대로 <박쥐>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을 토대로 했다. 줄거리와 사건뿐 아니라 인물의 이름까지 빌려왔다. 김옥빈이 연기한 태주는 테레즈, 신하균이 맡은 병약한 남편인 강우는 까미유, 눈동자 연기가 인상적인 김해숙의 라여사는 라캥 ? 이렇게 노골적으로 차음(借音)을 할 정도로 원작에 진 신세를 분명히 한다. 그러나 정작 <박쥐>의 강점은 다른 데 있다.

에밀 졸라는 27살이던 1867년에 이 소설을 내놓았고, 그 때문에 도덕적인 논란도 겪었다. 당시로서는 치정 살인을 살인자의 견지에서 묘사한 소설을 받아들이는 것이 자못 껄끄러운 일이었나 보다. 그래서 작가는 이 소설을 도덕적이거나 윤리적인 잣대에서 읽지 말고 인간에 대한 ‘자연주의적’ 탐구로 읽으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견지에서 이 소설은 그다지 충격적이지도 신선하지도 않다. 졸라 식의 자연주의적 평면은 이미 진부해져서일까.

영화 <박쥐>가 <테레즈 라캥>을 빌려와서 거둔 눈에 띄는 성과는 아마 칸느에서 얻은 점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우리라 하더라도 외국감독이 예를 들어 <장화홍련전>을 차용해서 만든 영화를 들고 온다면 아무래도 점수를 더 주게 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 경우에조차 차용을 빛나게 하는 것은 단순한 차용 자체일 수 없다. 빌려오지 않은 요소가 빌려옴에 생명력을 준다. <박쥐>에서 그것은 뱀파이어 신부의 설정이다.

사실 <테레즈 라캥>과 <박쥐>에서 현저하게 큰 차이를 보이는 인물은 송강호가 분(扮)한 상현이다. 졸라의 소설에서는 테레즈와 애정 행각을 벌이고 그 남편 까미유를 살해하는 로랑이 지극히 세속적이고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그려진다. 반면에 <박쥐>에서 상현은 그것과 정반대의 캐릭터라고 할 만하다. (이름도 전혀 다르다. 로랑과 상현, 두 이름엔 유사성이 없다.)

상현은 자신의 목숨마저 희생하여 구원을 찾으려는 젊은 사제다. 그가 읊조리는 기도 말은 기복적(祈福的) 자기중심성의 반대 극으로 비친다. 너무 극단적이어서 섬뜩할 정도다. 이 기도는 배경으로 깔리는 바흐의 칸타타 <이히 하베 게누크>(저는 만족하나이다)의 선율과 어울려 비현실적인 종교적 분위기를 자아낸다.

박찬욱 감독은 이 영화에 코멘트를 달면서 그러한 희생과 자기 파괴를 추구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오만함이라고 말한다. 인간으로서는 이룰 수 없는 경지를 희구하는 것, 일종의 비상을 꿈꾸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세계는 나의 것이 아니다. 희생은 고통스럽고 회피하기 어려운 선택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 파괴로 살 수 있는 피안(彼岸)의 입장권 같은 것이 아니다. 우리가 가질 수 없는 것을 가지려면, 우리는 우리가 아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그러려고 하는 존재다.

뱀파이어는 가질 수 없는 것의 한 귀퉁이를 훔친 괴물의 모습, 말하자면 욕망과 초월의 키메라다. 영화 <박쥐>에서는 오만함의 대가다. 우리가 살아있는 한, 욕망을 떠날 수가 없음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장치다. 죽음을 무릅쓴 희생이 꼭 성자(聖者)를 낳는 것은 아니다. 성자의 외양(外樣) 속에도 욕망이 숨어 있을 수 있고, 그것은 이렇게도 저렇게도 비틀릴 수 있다. 그 비틀림을 증폭시켜 보여주는 것이 뱀파이어의 힘, 뱀파이어가 가진 초능력이다. 욕망에 갇혀 타락한 초월의 열망, 상승의 반대급부인 추락의 깊이.

뱀파이어가 된 상현은 욕망에 휘둘리면서도 초월을 향한 열망을 버리지 못한다. 그는 욕망을 제어하고자 하며, 착한 뱀파이어가 되고자 한다. 착한 뱀파이어, 타인을 배려하는 흡혈? 전에도 말한 것처럼 이것이 이 영화를 코미디로 만드는 아이러니의 기본 구조다. 모두가 욕망을 쫓아 뱀파이어의 힘을 탐하는 세상에서 상현은 선과 악의 구분을 놓지 않는다. 그것이 태주와 함께 욕망을 쫓던 상현을 다시 파멸로 이끈다. 또 그것이 상현을 단순한 코미디의 대상이 아니라 비극의 주인공이 되게 한다. 헤겔의 말처럼, 가치로운 것의 몰락이 비극을 이룬다.

“태주씨랑 오래오래 살고 싶었는데… 지옥에서 만나요.”

“죽으면 끝. 그 동안 즐거웠어요, 신부님.”

상현과 태주의 생각은 파멸의 순간에서도 다르다. 욕망이 지배하는 수평적 공간이 태주의 세계라면, 가치가 만드는 상승과 하강의 깊이가 상현의 무대다. 내재(內在)와 초월(超越)은 부딪혀 얽히지만, 끝내 하나가 되지 못하고 발산(發散)한다. 어느 것이 좋고 어느 것이 나쁜가의 문제는 아니다. 카르페 디엠(carpe diem)의 쾌락과 영원성의 약속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욕망의 허망함과 이데올로기의 속박 가운데 어떤 것을 택할 것인가.

박찬욱이 내놓는 답은 진부할지 모르지만 여전히 아름답다. 그것은 낡은 구두의 이미지로 잘 드러나는 사랑이다. 질식할 것 같은 답답함을 못 이겨 ‘행복 의상실’ 앞 밤거리를 속옷 바람으로 달리던 맨발의 태주에게 벗어준 상현의 구두, 그 구두를 태주는 마지막 순간에 꺼내 신는다. 동트는 햇빛에 까맣게 타버린 두 몸뚱이는 재로 부서지고, 그렇게 얽혔던 사랑의 자취가 떨어져 남는다. 달리 어찌 하겠는가.

알겠지만, 이 사랑은 문제를 없애거나 해결해주지 못한다. 그러나 또한 이 사랑은 내재의 허망함으로 녹아 버리지도 않고 초월의 기만으로 휘발해 버리지도 않는다. 사랑은 이 둘의 얽힘 속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며 그렇게 끊어지듯 지속한다. 사랑은 고투(苦鬪)하고, 또 고투한다.

물론 이런 고투에는 여러 버전이 있다. 박찬욱의 <박쥐>가 초월에 대한 열망의 과도함을 냉소(冷笑)하면서도 그 열망을 떨쳐내지 못하고 짐짓 거기에 굴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면, 또 하나 주목할 만한 뱀파이어 영화인 <렛미인>은 현실의 제약을 뛰어넘는 강렬한 사랑을 제시하는 듯하지만 그 이면에서 작용하는 거래의 세속적 효과를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엔 이 정도로 하자. 구보씨가 속절없이 또 이렇게 많은 말을 늘어놓게 된 것은 지난번에 Y가 느닷없이 말을 자른 데다가 말꼼수 운운하고 끝났던 여운이 영 개운치 않았기 때문이다. 개운치 않다는 건 뭔가 켕기는 게 있다는 뜻 아니니? Y라면 틀림없이 또 이렇게 물고 늘어졌을 것이다. 사실, 그녀는 나이에 비해 이가 튼튼한 편이다. 다른 건 몰라도 구보씨를 비웃을 때조차 살짝 드러나는 그녀의 가지런하고 하얀 이는 매력적이다. 그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합치하지는 않는다는 유력한 증거다.

오늘 세상을 뒤덮은 하얀 눈과 같은 차가운 아름다움, 그것은 이면의 온갖 것들을 가린다. 그 미봉적(彌縫的) 차폐(遮蔽)가 아름다운 것은 아마 그것 또한 세상이 우리를 유혹하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누구라서 그러한 아름다움을 겉치레고 허식이라며 마다할 것인가. 하얗게 내려 쌓이는 눈, 그것이 주는 모든 불편에도 불구하고 또 그것이 숨기는 모든 지저분함과 위험에도 불구하고, 눈은 여전히 아름답다. 그리고 모든 아름다움은 삶의 유혹이다. 그러한 한, 뱀파이어는 이곳에도 파고든다. 순백의 눈 위로 스미는 혈흔, 그 뚜렷한 색채의 대비?<렛미인>(2008)을 보라.

신입회원 교육강좌를 시작합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 시대와 철학 > 알림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는 신입회원 재생산을 위한 교육강좌를 3월 25일 시작한다. 학회 설립 이래 대학원생만을 대상으로 하던 신입회원 교육강좌가 일반인을 포함한 공개강좌로 전환되고 3번째를 맞는다. 진보적 삶에 관심이 있는 시민이라면 누구나 교육강좌를 이수하고 소정의 절차를 거쳐 학회의 회원이 될 수 있다. 이번 교육강좌는 동양과 서양, 고전과 현대, 여성과 문화를 아우르며 한국사회에서 필요한 가치가 무엇이며 무엇이어야 하는지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될 것이다. 6월 17일까지 매주 일요일 개최되는 교육강좌는 참가자 모두에게 뜻깊은 자리가 될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2012년 한철연 교육부 철학강좌를 안내해드립니다.

철학에 관심있는 시민, 전공자 그리고 한철연 회원들의 많은 성원 바랍니다.

2012년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철학 강좌

열세 번의 데이트; 길가에 선 철학
한국 사회의 진보적 가치의 정착을 위해 성찰해 온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한철연)에서 2012년 철학 강좌를 엽니다. 이번 강좌는 일상에서 부딪히는 구체적 문제들을 철학적 관점에서 다루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이론과 지식을 전달하는 강좌는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 속에서 어떻게 접점을 이룰 수 있는지 고민하게 해주는 강의는 적었습니다. 한철연은 이러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책상 위 철학’을 ‘한반도의 길거리’로 불러내보고자 합니다. 함께 열세 번의 데이트를 즐겨볼 분 어디 없습니까?

1강 (3/25) 들뢰즈의 행복론; 행복한 인생의 조건(강사: 이성백 서울시립대 교수)

2강 (4/01) 착취의 공범; 돈벌이가 시원치 않은 마르크스(강사: 이재유 건국대 외래교수)

3강 (4/08) 안산의 헤겔; 이방인과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강사: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4강 (4/15) 안산의 공맹(孔孟); 친친(親親)의 역설을 통한 이방인과의 소통, 이해 그리고 연대

(강사: 김세서리아 성신여대 연구교수)

5강 (4/22) 요가하는 노장; ‘폼 나는’ 생태적 삶을 넘어서(강사: 송종서 전 민족의학연구원 상임연구원)

6강 (4/29) ‘간지 쩌는’ 푸코; 자기의 테크놀로지와 정치적 실천(강사: 김성우 상지대 겸임교수)

7강 (5/06) 복지제도의 철학적 정당화; 가난뱅이만 얻어먹기?(강사: 곽노완 서울시립대 HK교수)

8강 (5/13) 판문점에 선 철학; 상처와 화해의 철학(강사: 이병수 건국대 HK교수)

9강 (5/20) 여성주의적 근본주의를 넘어서(강사: 강지은 건국대 외래교수)

10강 (5/27) 신성한 사적 소유?; 사적 소유의 마법에서 깨어나기(강사: 박종성 방송대 외래교수)

11강 (6/03) 골치 아픈 현대미술; 근대 이후의 아름다움(강사: 이병창 전 동아대 교수)

12강 (6/10) 스마트하게 혁명을?; 6월 항쟁과 촛불에 대한 철학적 성찰(강사: 박영균 건국대 HK교수)

13강 (6/17) 연대의 철학을 위하여(강사: 서유석 호원대 교수)

일정 : 3/25(일)~6/17(일) 매주 일요일 2시(첫 날은 오리엔테이션 때문에 30분 일찍 시작)

장소: 서울 마포구 서교동 481-2 태복빌딩 202호 강당(문턱 없는 밥집 2층)

대상: 진보적 삶의 가치에 관심 있는 시민, 대학생 이상(선착순 50명)

수강료: 경제적 약자 6만원, 그 외 12만원 (한철연 회원 무료)

※ 상상마당 아카데미 강좌 수강생은 50% 할인

문의: 02-332-4301, hanphil@jinbo.net, 010-2205-9434(교육부장: 한길석)

접수: 메일(hanphil@jinbo.net) 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오시는 길
지하철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로 나와 뒤돌아보면 빵집과 자동차 정비센터 사이로 샛길이 있습니다.
그 길로 8분 정도 걸어오면 왕복 4차선 도로가 나옵니다.
거기서 오른쪽으로 30미터 지점에 태복빌딩(1층 ‘기분 좋은 가게’ ‘문턱 없는 밥집’)이 있습니다.
그 건물 2층입니다. 주차공간이 부족하므로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해주십시오.

지하철 6호선 망원역 1번 출구에서 왼쪽으로 3분 정도 직진해서
건널목을 건넌 후 좌측으로 4분 정도 직진하면 ‘기분 좋은 가게’ 건물이 나옵니다.
그 건물 2층입니다.

추운 계절의 끝에서 [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치유될 수 없는 과거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는 가슴 깊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들어 앉았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6살이 많았던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20살의 아내는 남편의 정성마저도 싫었다. “진짜 정 안 주어지더라. 내 때문에 저거 아버지도 참말로 죽고 싶다했다. 내내 울고, 달래도 울고, 아침 저녁으로 내내 울었다.” 먹지도 않고 제대로 지자도 않으면서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내 간다 이러면, 보따리 싸가 간다, 그리 하면” “아이고 가보지 어디가 몇 발 못가가 붙잡히지. 이 안에 법이 없는 줄 아냐, 당신 마음대로 하냐, 가 봐라.”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아랑 곳 없이 그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옆을 지키면서 달래고 또 달래도 스스로에 대한 서러움과 속았다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머물러야 할 곳은 울산 바닷가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바닷가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할머니는 집단촌에서 주는 약을 거부했다. 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끼니마저 거르자 병의 속도는 빨라졌다.

“한 번은 저 바닷물에 빠져 죽을라 했다. 그것도 그만 들켜서 안 됐제. 근데 헤엄을 치몬 도망 갈 수 있겠는 기라. 그리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쫓아 올낀데 가다 잡혀서 두들겨 맞으모 우야노, 몽디 갖꼬 두들겨 맞으면 우야노, 겁이 나 얼마나 벌벌 떨어댄 줄 아나.” 그래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공부도 좀 했다 쿠고, 공부 많이 한 처자가 저기 있다 소문이 어디까지 나가지고,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기라. 영감도 공부는 좀 했더라꼬.”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에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식으로 한센인 집단촌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기억 속의 젊은 남편은 미남이었다. “얼굴도 뽀얗고 모리고 보면 진짜 의사 같앴다. 인상도 참 괜찮았다. 마음도 좋았제. 얼매나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20살 할머니의 눈에 그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그 절망감은 20살의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약 묵고 죽을라꼬 치료약을 한 서른 개 묵었다. 서른 개 먹으니 죽지는 안 하고 토하기만 토하고 얼굴이 새파래지고 굿이 났지. 그거 묵고 나니 잠이 안 오데. 밤낮으로 잠이 안 오데.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게 놔두라 하고, 간 크게 어디 약을 그리 지 마음대로 먹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약병을 단디 안 놔놓고 뭐했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동네 굿이 안 났더나.”

 

새로운 탄생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뜬 눈으로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운명에 순응했다. 삶은 팍팍했다.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동냥을 다녔다. 운이 좋으면 쌀도 얻고 이삼일 지낼 수 있는 반찬거리도 얻었지만, 쫓겨 다니기도 수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싶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잤다.

“이 사람이 현재 내캉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맘속으로 자꾸 다짐했제. 안 그래야 될 낀데 자꾸 지난 기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다녔다. 그러다 집단촌에 배급이 시작되었다. “땡보리가 나오더라고. 쌀은 없었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은 위에서 가로채 갔다. 나머지 힘 없는 사람들은 맷돌로 갈아서 보리 수제비를 해먹었다. 거친 보리 수제비지만 동냥을 다니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동안 몇 번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떠나라고 난리를 치면 입은 옷 그대로 보따리만 들고 떠나야 했다. 집단촌은 울산을 떠나 부산으로 옮겨졌다. 세월의 무심함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변해서 세월이 무심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나 24살 때 딸을 낳았다. 30살에 아이를 본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방긋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커져 갔다. 어디를 가든지 정부에서 나오는 배급품은 한센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좋은 것은 전부 힘 있는 관리나 하다못해 집단촌 이장까지 팔아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생활은 항상 궁핍했지만, 딸은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은 방안은 서늘했다. 낡은 집의 창틈으로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 추워서, 겨울이 되니까 영감에 대한 시를 하나 지어 볼라꼬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생각이 안 나.” “추운데 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세요?” “내가 겨울에 영감을 만났거든. 참 마이 추웠다. 눈도 마이 오고……. 하아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감기 기운은 낫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열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감기가 자꾸 걸리는 기라.” 할머니는 혀를 찼다. 깊은 산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고목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할머니에게서는 하나 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고목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텅 빈 삶

딸아이가 젖을 뗄 무렵,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다시 약을 먹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의 울음인지 승팔이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됐다. 이제는 됐다.’라는 안도의 물결만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참말로 징하다. 어찌 그리 독하노. 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허무함이 묻어났다.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남편은 한 동안 말문을 닫았다.

“밥 먹자 하면 먹고, 일하러 가자 하면 가고, 이거 하자 하면 이거 하고, 저거 하자 하면 저거 하고, 별 그거 없고 그래 지내는 사람인데 내 영감은… 이거는 만나 놓으면 어렵거든. 법적으로 이래 이렇게 그거는 없고” 할머니는 띄엄띄엄 간격을 두며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어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 딸도 승팔이도, 영감도, 아무 죄 없는 기라. 죄는 나한테 있는 기라. 그러니 죽을 수밖에.”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고 죽는 것이 속죄하는 일이라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태어나서 병들어 사는 것이 죄라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죄’라는 단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저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삶이 죄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할아버지와 딸에 대한 시를 짓고 싶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떠 올랐다.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불러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있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황동규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부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찬 바람 부는 언 들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이에게 괴로움과 기쁨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은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들판과 다를 바 없었을 게다. 그런 사람에게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리라.

 

계절의 끝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으로 모두에게 외치는 한 생명의 탄생이 어떤 이에게는 살아보기 위해 애써 누르며 외면하고자 했던 상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에게 딸의 탄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아내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오지 마라고 폴을 휘둘렀지.”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은 아내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영감은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했다. 지 연애 했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만약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은 참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 좋아졌제. 무엇이든 나누었다.”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남편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랑은 싹 트지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떠나보낸 아이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일 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움과 연민은 불쑥불쑥 튀어 나와 가슴을 텅 비워 놓았다. 그때마다 어미는 어린 딸의 얼굴을 외면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더 매달렸다.

‘이렇게 병들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들판에 홀로 서서 칼바람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할머니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드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죽음에 대한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죽는 것도 내 기 아이라. 내 거는 아무 것도 없는 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괴로움도 기쁨도 고통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뿐이리라. 할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찬 바람이 불어도, 그 찬 바람은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지켜야 하는 딸이 있고, 할머니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할머니에게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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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진 : 상단 나무 / 하단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