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있음과 없음’의 시간과 공간[철학을다시 쓴다]-⑪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대체로 마르크스 이래로 서구 스콜라철학을 형이상학으로 보아서 형이상학에 대한 비판이 유행하는데, 형이상학에도 여러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존재론과 우주 삼라만상을 이루는, 가장 작은 것에서부터 가장 큰 것까지 일관해서 꿰뚫어보려고 하는 노력에서부터 원인학(aitiology), 왜 왜 하고 끊임없이 물어보는 학문의 전통이 생기는데 이것도 형이상학의 한 갈래입니다.

제가 전에 ‘테트락티스’(tetraktys)라고 해서 10을 완전수라고 보았던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대해서 잠깐 언급을 했죠? 피타고라스 전통에 따르면 한계가 하나인 것을 점이라고 보고 한계가 둘이 있는 것을 선이라고 봤죠. 그리고 한계가 세 개가 있는 것을 면이라고 그러고. 가장 작은 수의 한계선을 가지고 구현할 수 있는 면이 삼각형이죠, 그 다음에 네 개가 있는 것은 입체, 정사면체, 이렇게 1+2+3+4=10인데, 우주 삼라만상은 한계가 하나가 있거나, 둘이 있거나, 셋이 있거나, 넷이 있거나 한 것으로 전부 구성이 되어 있다, 이런 이야기를 피타고라스학파들이 했죠.

“여기서 하나 물어보겠습니다. 있는 것은 한계가 몇 개입니까?”

“…….”

“하나입니다. 끝이 하나인 것은 보입니까, 안 보입니까?”

“보여요.”

“보여요? 보이는 것은 면 아니면 안 보입니다. 선도 안 보입니다. 안 보이죠? 가장 큰 하나도 안 보이고 가장 작은 하나도 안 보인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있음’은 안 보인다. 왜냐? 한계가 하나이기 때문에. 그러면 없음은 어떻습니까? 한계가 없으니까 안 보입니다. 한계가 하나인 것도 안 보이고, 한계가 없는 것도 안 보입니다.

그래서 헤겔은 <대논리학> 같은 책에서 ‘있음’(임석진이 ‘순수유’로 번역한 das reine Sein을 우리말로 하면 그냥 ‘있음’입니다.)과 ‘없음’(이것도 임석진이 ‘순수무’로 옮긴 das reine Nichts의 우리말 표현이지요.)은 개념으로만 있지, 가시적이지 않고 정의를 받아들이지도 않는 점에서 똑같은 것이다, 차이가 없다라고 이야기했는데, 바로 이런 특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있음’과 ‘없음’에 대해서는 말하지 말아라, 그러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냐, ‘있는 것’과 ‘없는 것’인데 그것은 개별화된 존재, 개별화된 무, 이런 것들,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존재’와 여럿으로 흩어져 있는 ‘무’를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있는 것도 있음의 성격에 참여하는 한, 하나로 있게 되고, 따라서 그것은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되고, 없는 것은 없음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한, 끝이, 한계가 없기 때문에 규정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게 된다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보고 만지고 귀로 듣고 오감을 통해서 파악할 수 있는 이 세계는 가시적인, 볼 수 있는 세계인데, 시각정보가 우리에게 전해지는 삶의 정보 가운데 80% 이상을 차지한다, 그러죠? 그런데 우리가 입체를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오성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고요, 감각 수준에서는 입체를 인지하지 못합니다.”

“그렇죠, 그것입니다. 우리 시각은 감각 기관이니까, 통각의 능력은 따로 빼고 우리 시각은 평면만 볼 수 있을 뿐이다, 겉만. 한계, 갓, 끝만 볼 수 있을 뿐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에서 최소 한계는 셋이다, 끝이 세 개인 경우, 삼각형으로 이 우주를 모두 구성할 수 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모든 것이 인식의 영역 속에 들어올 수 있다는 가설이 생기는 겁니다. 알 수 없는 것은 하나도 없게 된다, 모든 걸 알 수 있게 된다, 말하자면 우주 삼라만상에 대한 측정 가능성이 열리는 것입니다. 피타고라스학파한테 큰 재난이 무엇이었습니까? 루트2(√)의 발견이었죠? 피타고라스학파에서 이것은 무규정성이 드러나는 측면인데, 무규정성은 피타고라스학파에서 가장 큰 재난이어서 극구 추방해야 할 것이고, 우주 삼라만상이 수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전부 규정할 수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실제로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것이 밝혀지는 것은 기본을 이루고 있는 세계관을 허물어뜨리는 사태였기 때문에 오랫동안 비밀로 감추려고 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동그라미는 제가 엊그제 봤던 달입니다. 요즘 달이 큰데, 이것을 가시적인 원 비슷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가시적인 원이라고 생각하십시오. 우리가 원을 볼 수 있습니까? 못 보죠? 원 비슷한 특수한 형태는 시각화해서 볼 수 있지만 원 그 자체는 볼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원을 어떻게 해서 알 수 있을까요? 한 점으로부터 같은 거리에 있는, 서로 무한하게 이어져 있는 점들을 원이라고 합니다. 현대 수학자들이 원주율을 계산을 하는데 몇 조 단위까지 계산을 해냈다, 나는 암산으로 해냈다, 나는 슈퍼컴퓨터로 해냈다, 하는 이런 수치 모음을 책으로 내면 숫자만 계속해서 기록한 책이 수천, 수만 권이 될 것입니다. 왜 이 짓을 하고 있죠?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서로 유명한 수학자라고 뽐내고 그러죠? 미분/적분을 대수학 영역이라 그럽니까? 해석학! 뉴턴이 무한의 영역을 수학적으로 극복하겠다고 나서서 미분/적분을 개발했죠. 그런데 미분/적분은 어떻습니까? 전부 한정된 수치의 영역으로 무한의 영역을 수렴해낼 수 있다는 그런 생각이었죠. 그런데 정작 수렴이 되나요? 수렴이 안 된다는 게 ‘파이(π)’ 계산에서 나타나죠?

실제로 유한의 영역과 무한의 영역은 우리의 삶 속에 끊임없이 공존을 하고 있는데, 무한의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다 보면 수리체계에서부터 재는 것과 연관되는, 말하자면 ‘매트릭스’로 표현할 수 있는 영역이 한정되고, 그에 따라 우리의 인지 영역은 그만큼 좁아집니다. (여러분 매트릭스가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시죠? 잰다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좌, 우, 아래, 위로 행렬지어지는 것, 재는 거죠?)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에 살고 있죠? 그런데 운동은 디지털 세계에서가 아니고, 아날로그 세계에서 일어납니다. 무규정성이 전제되어야 운동이 제대로 이해됩니다. 아까 제가 두 당구알을 가지고 이야기했는데 두 당구알이 접촉을 할 때, 그 사이에 접촉면을 매개하고 있는 점이라는 것은 빨간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하얀 당구알에도 속해 있지 않고, 늘 왔다갔다 요동치고, 진동한다, 이 ‘바이브레이션’(vibration)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한 개념입니다. 베르그송에서도 중요한 개념이고 들뢰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우선 플라톤 이야기를 다시 합시다. 플라톤에서는 우주를 구성하는 요소가 셋입니다. demiourgos라고 하는 우주를 빚어내는 신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주를 폐쇄된 공간으로 만들 때 본떠야 하는 이데아(idea), ‘형상’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기그노메논’(gignomenon),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휠레’(hyle), ‘질료’라고 그럽니다만, 이 기그노메논이라는 말은 ‘된다’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재해석을 한다면 데미우르고스는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은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순수 형상’이라 하기도 하고,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kinoun akineton), ‘원동자’(原動者), 그렇게 재정리가 됩니다만, ‘휠레’는 그리스에서 목재를 가리키는 말이었습니다. 배도 만들고, 집도 만들려고 켜놓은 나무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이것을 우리나라 철학책에서 ‘질료’라고 번역해 놓았습니다.(끔직한 번역이죠.)

이제 우리가 보고 있는 삼라만상은 ‘질료’와 ‘형상’의 결합이고,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표면에 나타난 형상이라는데, 플라톤에 따르면 형상은 우리가 가시적으로 파악할 수가 없습니다. 형상의 세계는 우리가 볼 수 없는 허무로 둘러싸인 다른 곳에 가 있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부 형상을 본뜬 가상들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삼각형 그 자체는 볼 수가 없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특수하게 그려진 몇 센티미터, 둔각이라든지 예각이라든지 등변 삼각형이라든지 이런 삼각형의 특수형태인 것과 마찬가지로 형상 그 자체는 볼 수 없고, 형상이 투영된 것들만 볼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삼각형으로 만듭니다.

근대물리학자나 현대 물리학자들이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서 면으로 나타나는 ‘끝’을 늘리고, 우주 자체를 삼각형으로 분할하여 입체를 평면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우주 삼라만상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해서 끝없는 환원작업에 몰두하고 있는데, 이들로 하여금 이렇게 끊임없는 ‘분석’과 ‘분해’를 하도록 부추긴 사람이 바로 플라톤입니다. 평면으로 우주를 구성했으니까, 해체하면 다시 평면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다, 정사면체, 정육면체, 정십이면체, 정이십면체 이렇게 점점 원에 가깝게……. 뉴턴에 따르면 미적분을 통해 조그만 삼각형들을 계속해서 무한히 더해감으로써 원주율 계산에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한 원동력이 바로 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나옵니다.

그렇게 해서 여러 종류의 환원론이 나오는데 데미우르고스가 맡은 역할이 무엇이냐면, 삼각형을 수학적으로, ‘산술중항’과, ‘조화중항’이라는 것을, 어떤 띠는 산술중항을 중심으로 만들고, 어떤 띠는 조화중항을 중심으로 만들어서 밖에는 정지의 띠를 두르고, 안에는 운동하는 띠를 둘러서 이 우주를 구성해 낸다, 우주의 겉은 정지의 띠를 가지고 만들었기 때문에 변하지 않고, 안에는 끊임없이 운동이 이루어지는 천체가 있다, 거기에는 항성이 있고, 행성이 있고, 우주의 바깥 띠에서 가장 먼 중심에는 지구가 있다고 플라톤은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지구는 불변하는 띠에서부터 가장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우주 중심에 있다는 것은 불변하는 ‘형상’과 불변하는 띠에서 가장 먼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세계 이해와는 완전히 거꾸로입니다. 지구는 플라톤에 따르면, 데미우르고스의 힘이 가장 적게 미치는 곳이다, 그리고 형상의 세계에서부터도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가장 불완전한 곳이다, 가장 변화가 다양하고, 가장 불완전한 천체다라는 가정을 깔고 나갑니다. 인간을 예로 들 때 인간의 신체부위 가운데 가장 완전한 것이 뭡니까? 옛날부터 인도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원을 완전한 세계의 시각적인 표현이라고 보았습니다. 입체로 보면 구(球)가 가장 완전한 것이고, 사람에게 구와 가장 닮은 곳이 있다면 머리다, 사람에게 머리만 있으면 그나마 완전한 세계를 더 직관으로 파악할 수 있고, 훨씬 더 좋겠죠. 요즘에도 신체의 다른 부위는 다 절단해 버리고 머리만 남겨서 세계를 지배하는 인물이 영화에 나오고 하죠.

실제로 플라톤은 참 재미있는 예를 듭니다. 머리가 굴러다니면서 운동을 하게 되면 가장 완벽한 운동을 할 수 있을 텐데 왜 머리만 있지 않고 손과 발, 몸 같은 것이 생겨나는가? 플라톤은 이 지구가 불완전하게 생겨먹은 것이어서 완전한 구가 아니고 더러운 구덩이도 있기 때문에, 굴러다니다가 구덩이에 빠지면 다시 나올 길이 없다, 그래서 손발을 달아서 기어 나오도록 만들었는데 이것이 완전한 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되었다, 그러니까 육체노동, 몸을 움직여서 무엇을 하는 것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이 우화 비슷한 형태로 드러나는 겁니다. 피타고라스학파도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요?

어쨌든 이렇게 해서 세 개의 요소가 다 있는데 ‘기그노메논’(됨)에 Demiourgos가 숫자들을 부여해서 질서를 줍니다. 질서를 부여하는데 스스로 질서를 주는 게 아니라 ‘이데아’들을 보고, 그 ‘이데아’를 본떠서 ‘됨’의 운동이 아무렇게나 제멋대로 되지 않도록 이끌어 삼라만상을 구성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해서 완전히 폐쇄된 세계가 나타납니다. 우주 자체는 ‘하나’이고 불변하는 것인데, 우주 내부에서만 변화들이 있게 되는 세계로 상정하고 맨 위에는 전체로서 ‘하나’로 가장 큰 ‘있음’이 있고, ‘있음’의 중심에는 ‘없음’에 가장 가까운 혼란스럽고 변화무쌍한 지구가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플라톤의 세계관은 대체로 보아 비관적인 세계관입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이 ‘거대이론’이 근대 물리학을 거쳐 현대 물리학으로 오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위장된 형태로 나타납니다. 통일된 우주가 빅뱅에 의해 터지면 무한 공간으로 흩어져나갈 건데 그러지 못하도록 하는 장치로 블랙홀을 상정하는 것입니다. 천체의 순환이 반복되듯이 펑 터지고, 다시 수렴되고 하는 일이 주기적으로 반복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전부 가설이지요. 그리고 이 가설체계는 인간 정신의 산물입니다. 인간이 모든 우주 삼라만상의 변화를 두뇌 속에서 단순한 운동, 등질적인 공간운동과 시간운동으로 환원시키면서 드러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의 두뇌는 서로 닮는다고 그랬죠? 인간의 두뇌가 이론적으로 그럴 듯한 가설들을 판박이 하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우주를 그럴 듯하게 머리 속에서 빚어내면 다른 사람들이 그럴싸하게 여겨 그 가설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유클리드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아니면 리만 기하학을 대전제로 깔고 나가느냐, 그 밖의 여러 경우에 따라 인간의 두뇌가 그 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는 지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등질적인 공간, 등질적인 시간이 실재하는 공간이고 실재하는 시간이냐? 풀잎한테 물어보고 지렁이에게 물어봐야 할지도 모릅니다.

‘니네 그렇게 어리석니? 사람은 머리가 좋아서 이렇게 모든 것을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환원해서 해석하는데 너희들 눈에는 안 보이고 너희들 머리로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 니네들은 지렁이고 니네들은 풀잎이지?’
이렇게 물으면 지렁이나 풀잎의 입에서는 어떤 말이 나올까요?

의사소통은 없다! +와 -만 존재할 뿐! [철학자의 서재]

노르베르트 볼츠의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철학자의 서재]

 

박영욱 (숙명여대 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구텐베르크-은하계라는 다소 식상한 제목이 암시하는 바는?

2000년대 이후 우리나라 인문학계에서 매체이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구텐베르크 은하계 혹은 인쇄 매체, 선형적 문자 매체 등의 용어가 더 이상 생소하지만은 않다. 이미 마셜 맥루언이나 월터 옹의 매체이론이 널리 알려진 터라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라는 책 제목이 심지어 식상하게 느껴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책에 그러한 면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의 결론만 놓고 보자면 분명 뉴미디어가 과거의 인쇄 매체에 바탕을 둔 구텐베르크-은하계를 벗어나서 새로운 형세를 창출하고 있다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의 특징은 이러한 새로운 형세의 출현 과정을 철학적인 담론을 통해서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현란하면서도 현학적으로 사유하고 있다는 점이다. 매체이론과 관련하여 국내의 많은 학자들이 볼츠를 언급하고는 있지만, 정작 뉴미디어의 일반적 특성과 관련한 피상적인 언급만 발견될 뿐이다. 심지어 매체철학 혹은 매체미학에 대해서 글을 쓰는 사람들조차도 볼츠의 책에 전제된 철학적 담론들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
 

▲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노르베르트 볼츠 지음, 윤종석 옮김, 문학과지성사 펴냄). ⓒ문학과지성사


 
저자가 직접 쓴 한국어판 서문만 잘 읽어보더라도 이 책을 관통하는 커다란 사상적 실타래가 단순히 맥루언이나 옹처럼 뉴미디어의 특성을 분석하는 것에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의 첫 부분부터 이 책에 깔린 기본적인 사상적 체계를 위르겐 하버마스의 커뮤니케이션 이론과 니클라스 루만의 체계이론의 대립으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가 일관성 있게 고수하는 입장은 하버마스에 대한 거부감과 루만의 체계이론에 대한 우호감이다. 따라서 이러한 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는다면 이 책에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을 전혀 간파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이 제목에서 암시하는 바의 다소 진부한 내용으로 채워질 것이라고 예상하여 사람들이 관심을 받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구텐베르크-은하계의 끝에서>의 밑바탕에 깔린 혹은 명시적으로 언급되는 철학적 담론들을 간파하지 못한 채 피상적으로 볼츠만을 언급한 이른바 매체철학 연구자들의 잘못도 있을 것이다.
 

하버마스를 등지고 루만을 선택한 이유는? ? 대화란 세상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버마스 사상의 핵심이 커뮤니케이션, 즉 의사소통이라는 점에는 이의의 여지가 없다. 비판이론의 계승자인 하버마스에 따르면 개선된 사회란 개방적이고도 자유로운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회이며, 이는 달리 말해서 열린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한 사회를 의미한다. 따라서 하버마스에게 대화란 단순히 사적인 영역이 아닌 공적인 영역이며 이상적인 사회를 이루는 기초이다. 이러한 그의 주장에는 다음과 같은 믿음이 깔려있다.

현실 사회에서 대화는 얼마든지 왜곡되고 비이성적인 형태로 발생할 수 있지만, 그러한 왜곡과 비이성은 인위적인 산물이다. 비록 현실에서 이러한 왜곡이 완전히 제거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모든 대화는 이러한 왜곡과 비이성이 제거된 이상적인 대화 상태를 준거점으로 전제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버마스는 이러한 이상적인 대화의 모델을 바탕으로 보편적인 화용론을 제시하고자 한다.

볼츠가 보기에 하버마스의 이러한 주장은 이상적이라기보다는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적인 것이며 비현실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버마스의 이론적 준거점인 이상적인 대화 상태가 애초에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다. 대화에 참여하는 두 사람이 대화를 통해서 일치에 도달한다는 것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의 경험을 잘 숙고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서로에 대해서 가장 잘 알고 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있는 가족이나 배우자에게서 대화 자체가 불가능한 벽을 느끼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서로 대화하고 이해하며 자신의 생각을 서로 주고받으며 소통한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자신의 방식대로 이해하고 있을 뿐이다. 또한 상대방도 자기가 이해한 방식대로 이해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어디까지나 믿음일 뿐이다. 하버마스의 이상적인 대화 상황이란 이러한 믿음을 추상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하버마스와 달리 루만에게 대화란 오히려 대화의 불가능성 때문에 만들어진 가교에 불과하다. 원초적으로 사람들 사이에 의사소통이란 불가능하다. 다른 어느 누구도 나의 마음을 알 수 없으며, 내가 아무리 그것을 구체적으로 전달하고자 할지라도 자기 방식대로 해석할 뿐이다. 따라서 루만이 보기에 커뮤니케이션의 과정 자체는 블랙박스와도 같이 알 수가 없는 것이다. 대화란 서로 알 수 없는 참여자들 간에 블랙박스 과정에서 일어나는 행위일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소통을 해야 하는 이유는 소통 없이는 살 수 없기 때문이다. 소통은 인간이 살기 위한 하나의 체계에 불과하다. 루만이 보기에 이성적인 주체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 대화이자 소통이라는 하버마스의 생각은 착각에 불과하다. 가령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나 선생과 학생의 대화는 대화의 체계에 앞서서 존재하는 두 이성적 주체 사이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버지와 아들 혹은 선생과 학생이란 가족이란 소통 체계와 학교 제도라는 소통 체계의 산물이며 그 체계를 형성하는 두 항일 뿐이다. 따라서 루만에 의하면 커뮤니케이션이란 그에 앞서 주어진 주체들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커뮤니케이션 그 자체의 산물일 뿐이다. 말하자면 인간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케이션이 커뮤니케이션할 따름이다.
 

이성 혹은 부정성이란 한갓 디지털의 이진법에 불과

 
비판이론 2세대인 하버마스는 1세대인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와 달리 미디어에 대해서 일방적으로 적대적인 태도를 취하지는 않았다. 호르크하이머나 아도르노는 계몽주의 이후 이성이 오히려 도구화되었으며 20세기 이후 이러한 이성의 도구화는 대중매체를 통해서 극으로 치닫게 된다고 비판하였다. 이에 반해서 하버마스는 1세대 비판이론가들이 그렇게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근대 사회에서 오히려 이성의 힘이 공론장을 형성하는 형태로 긍정적인 모습을 취한다고 보았다. 그는 인간의 가장 자연스러운 일상의 세계인 생활세계의 영역에서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나 체계성이 배제될 경우 공론장을 형성하는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볼츠에 따르면 1세대로부터 2세대에 이르기까지 비판이론을 관통하는 이성의 ‘부정성’이라는 것 자체가 위대한 인간의 능력이라기보다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존재에 불과하다. 헤겔의 변증법을 계승한 비판이론에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긍하지 않고 부정하는 힘이야말로 이성의 위대함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이러한 부정은 사실상 있음에 대한 없음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표식에 지나지 않으며 어떤 것에 대한 긍정이나 지시를 나타낸다. 가령 정신분석학에서 피분석자가 의사(분석가)의 질문에 ‘아니오’라고 답하는 경우 그것은 진짜 부정이 아닌 무의식적인 증상을 은폐하고자 하는 행위이며 궁극적으로 의사에게 그것은 무의식의 징후이자 지시이다. 어쩌면 부정은 레비스트로스가 문화를 탄생시킨 기저를 ‘양항대립’으로 보았던 것처럼 있음에 대한 없음과 같은 이진법의 코드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메커니즘에 불과한 것일지도 모른다.
 

학생들에게 강의하고 있는 1960년의 하버마스. 출처: http://blog.ohmynews.com/booking/176852


 
이렇게 보자면 하버마스가 계승하고 있는 그 위대한 전통인 부정이라는 사유의 힘은 궁극적으로 +와 ?라는 양항을 만들어내는 소통체계를 가능하게 하는 가장 단순한 원리일지도 모른다. 선천적으로 이성적 판단능력이라는 잠재력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에 대한 믿음과 부정적 사유의 위대함은 볼츠의 이 책에서 그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내는 가장 단순한 원리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사실상 ?라는 것이 ?가 아닌 +에 대한 대립적 기호이며 동일한 것을 지칭한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역설적인 체계야말로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적인 특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커뮤니케이션이란 원래부터 소통 불가능한 것을 소통하게 하는 모순적인 체계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볼츠는 화폐라는 것 자체도 소통을 위한 하나의 중립적인 미디어일 뿐 비판이론가들의 주장처럼 이성을 왜곡시키고 생활세계를 뒤틀리게 만드는 악의 화신으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에 따르면 화폐 또한 다른 소통체계와 마찬가지로 그저 모순적인 구조를 지닌 소통체계에 불과하다. 볼츠는 화폐란 재화를 잉여와 희소성이라는 모순적인 체계, 즉 잉여라는 +와 희소성이라는 ? 기호에 의한 소통체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재화가 잉여상태에 있지 않다면 화폐란 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적인 잉여상태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결핍을 느끼지 않는다면 화폐의 필요성은 제기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모순적인 소통의 체계를 만드는 것이 화폐이다. 화폐란 미디어로서 하나의 소통체계를 암시할 뿐이다. 그러한 소통체계에서 어느 항은 구매자가 되며 다른 항은 판매자가 될 것이며, 어느 항은 자본을 소유한 자본가가 되며 다른 항은 노동자가 될 것이다. 자본가와 노동자가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화폐가 소통할 뿐이다.
 

디지털의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다

 

러시아의 화가 카시미르 말레비치의 회화는 슈프레마티즘(suprematism)이라고 일컬어진다. 이 말은 흔히 절대주의라고도 번역되는데 이것이 암시하는 의미는 어떤 한정된 대상이 아닌 절대적인 대상을 추구한다는 것이다. 말레비치의 절대주의 회화를 대표하는 것은 ‘흰 배경 위의 사각형’이다.

이 고도로 추상화된 화면은 매우 역설적인 상황을 묘사하고 있다. 먼저 흰 배경에 사각형을 그린 것은 말레비치가 자신의 그림에서 어떠한 구체적인 대상도 묘사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왜냐하면 어떤 현실적인 대상을 묘사할 경우 그것은 궁극적으로 현실에 대한 왜곡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각형은 대상의 말소, 즉 부정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대상 자체가 없다면 그것은 절대적인 무일 것이다. 이러한 절대적인 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사각형은 어떠한 대상으로도 치환될 수 있는, 그러나 현실 대상의 단순한 묘사가 아닌 그러한 대상이다. 따라서 이는 현실에 대한 구속으로부터 벗어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제 사각형이라는 대상은 현실의 재현이 아닌 구성된 대상이며, 말레비치의 캔버스는 구성되고 기획된 세계를 암시한다.

볼츠는 말레비치의 캔버스를 정확하게 디지털의 세계에 대한 은유로 읽는다. 디지털 미디어는 +와 ?라는 전기신호를 0과 1이라는 기호로 대체함으로써 수많은 소통의 체계를 만들어낸다. 이를 통해서 이미지를 만들어낼 수도 있으며 음을 만들 수도 있다. 말하자면 이제 기호는 현실의 재현이라는 도상적 제한으로부터 해방된 것이며, 디지털 세계는 말레비치의 캔버스처럼 투사되고 기획된 세계이다. 더군다나 이미지나 문자, 소리와 같은 모든 정보가 궁극적으로는 디지털 단위의 알고리즘으로 창출되기 때문에 이 상이한 기호들 간의 인터페이스조차 가능하다. 말하자면 소리신호를 형태로 바꾼다든지 워드 작업된 문서 파일을 소리로 재생하는 것은 이론상으로 얼마든지 가능하다. 워드로 시를 쓰면 그것이 동시에 음악으로 연주되는 것이 가능하다. 구체시를 추구했던 아폴리네르의 꿈은 오래지 않아 한갓 놀이에 불과한 것이 될 수도 있다.

뉴미디어의 세계는 이렇게 세계의 재현이라는 인쇄 매체의 패러다임, 즉 구텐베르크의 은하계로부터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방이 새로운 세계에 대한 창조인지 혹은 세계의 상실인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길이 없다. 볼츠 역시 이 책에서 이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1프로에게 퍼주는 대한민국: 송기균이 쓴『고환율의 음모』[보고 듣고 생각하기]

1프로에게 퍼주는 대한민국

송기균이 쓴 『고환율의 음모』[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나는 왜 이 책을 읽고 공부하는가?

 

이 땅에서 경제민주화와 복지정책이 펼쳐지려면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한미자유무역협정)이 폐기되어야만 한다. 그런데도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하라! 외침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1프로에게 저항해야할 사람들이 1프로에게 세뇌되어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1프로에게 저항해야할 사람들 의지와 끈질김이 약해서 그렇다는 생각이 든다. 99프로 가운데 다수가 삼성에게 일하고 싶을 것이다. 돈 많이 벌 수 있으니 그럴 것이다. 갈 길이 멀다. 나도 삼성에서 일하고 싶다. 내 자식들이 삼성에서 정규직으로 일하면 좋겠다. 내 바램이다. 사실이다. 그러니 문제 풀기 힘들다. 삼성을 비판하면서도 삼성에 안기고 싶어 하는 나를 포함한 99프로 서민들의 이중적인 심리상태가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이 땅에서 1프로가 지닌 힘을 알고 싶다. 이 나라가 99프로가 아니라 1프로를 위해서 봉사하는 나라임을 알고 싶다. 이 땅에서 대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들보다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훨씬 더 많다. 국가가 중소기업 우선 정책을 펼쳐야 되는 데 대기업 우선정책을 펼치고 있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은 한국과 미국 1프로에게 퍼주는 정책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고 공부한다. 독자 여러분도 이 책을 읽고 공부하시길 부탁드린다. 모르고 당하는 것 보다 알고 당하는 게 더 고통스럽다. 그러나 내가 1프로에게 고통스러움을 당한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아야 1프로와 싸울 힘을 갖게 된다.

송기균,, 21세기북스, 2013

?
엄마의 마음

엄마에게 자식이 둘 있다. 삼성과 서민이란 자식 둘이 있다. 삼성은 금고에 산처럼 많은 돈을 쌓아놓고 산다. 서민은 한 달 벌어 한 달 살아간다. 특히 비정규직 노동자는 2년 뒤를 두려워하며 산다. 무릇 엄마라면 서민에게 도움을 주려 할 것이다. 국가란 엄마처럼 해야 할 것이다. 복지국가를 꿈꾸는 국가라면 당연히 그리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정반대로 행동했다. 박근혜 정부도 이명박 정부와 똑같이 행동한다.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샴쌍둥이이다. 둘은 1프로 삼성에게 퍼 준다. 서민에게 고통을 준다.

고환율이란 무엇인가?

고환율이란 달러와 원화가 서로 교환 될 때 달러를 높게 쳐주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1달러에 1천 원이면 고환율이다. 1달러에 5백 원이면 저환율이다. 달러가 주인이고 원화는 비교대상이다. 1달러에 몇 원 하지 1천원에 몇 달러 라고 말하지 않는다. 국가가 저환율 정책을 펴면 한국 소비자가 이득이다. 원유 사 들여오는 값이 떨어져 자동차 기름 값이 떨어진다. 수입 물가가 떨어져 소비자가 득을 본다. 국가가 고환율 정책을 펴면 수출 대기업이 이득이다. 수출해서 벌어들인 달러를 외환시장에서 팔아 큰 돈을 번다.

박근혜 정부는 거짓말을 한다.

박근혜 후보는 18대 대선에서 중산층을 70프로 만들겠다는 공약을 발표했다. 참 대단한 배짱이다. 대낮에 두 눈 뜨고 거짓말을 해대다니 대단한 배짱이다. 그래도 이 말 믿는 사람들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산층을 70프로 만들려면 여러 가지 정책을 펼쳐야 한다.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을 폐기해야 한다. 비정규직 노동자 비율을 확 줄여야 한다. 저환율 정책을 펴야 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하는 게 없다. 계속 고환율 정책을 펴고 있다. 그러면서도 ‘국민을 위하여’ 란 말을 함부로 한다.

삼성은 고환율 정책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삼성은 대한민국 최고 기업이다. 세계에 내놔도 큰 기업이다. 18년 독재한 박정희 정부 때 큰 도움을 받았다. 거의 무이자에 가까운 대출을 받았다. 당시에 일반인들은 두 자리 숫자 이자를 내고 돈을 빌려 썼다. 삼성은 국가가 국산품 애용을 장려해서 국내매출에 큰 도움을 받았다. 국가가 수출장려정책을 펴서 큰 도움을 받았다. 삼성 이건희가 제 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사회로부터 받은 빚을 사회에 돌려줘야 한다. 하지만 이건희가 하는 짓을 보면 열불이 난다. 어이가 없다. 아직도 무노조 삼성을 상식으로 생각한다. 삼성반도체 노동자가 일하다 백혈병에 걸려 돌아가셔도 산업재해 인정하지 않는다. 죄를 짓고도 이건희가 이런 말을 했다.

“거짓말 없는 세상이 되기를 바란다. 모든 국민들이 정직했으면 좋겠다.”

괴기스럽다. 이런 이건희에게 박근혜 정부는 이명박 정부처럼 계속 퍼주고 있다. 수입 물가를 올려서 99프로에게 손해를 끼치면서도 수출대기업 삼성에게 퍼주고 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삼성전자든 다른 수출 대기업이든 환율 상승으로 누리는 이익이 모두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환율이 비정상적인 수준에서 이제 막 제자리를 찾기 시작하는데, 그래서 국민들의 주머니에서 빠져나가던 돈이 조금이나마 줄어들 상황인데, 기업들이 견디기 어려우니 환율 하락을 막아야 된다고 하는 것은 뻔뻔함의 극치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135쪽)

‘서민들 입장에서 보면 고환율정책은 174조 원의 손실만 입히고 돌려주는 것은 거의 없는 지독하게 나쁜 정책이었다. 상황이 이처럼 분명한데도 수많은 경제학 교수들과 보수 언론들은 마치 고장 난 녹음기처럼 ‘고환율 찬양론’만 되풀이하고 있다.‘(178, 179쪽)

키코사태는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중소기업 보다는 대기업에게 퍼주고 있음을 확실히 그리고 정확히 보여주는 보기이다.

’2007년 하반기‘… ’당시 국내외 경제정책연구소와 금융기관들은 모두 2008년 평균 환율을 900원 내외로 전망했다.

이런 상황에서 수출 기업들은 환율의 추가 하락에 따른 환차손을 피할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는데, 그중 하나가 키코 거래였다.

키코란‘ … ’어느 수출기업이 환율이 950원일 때 상한(knock-In)환율 1000원, 하한(knock-Out)환율 900원인 조건으로 50만 달러의 키코 거래를 체결했다고 하자. 수출대금을 받는 시점의 환율이 900?950원이면 기업은 상대 은행에 950원에 50만달러를 팔고, 환율이 950?1000원이면 그 환율에 50만 달러를 판다. 따라서 환율이 900?1000원이면 유리한 가격에 달러를 팔 수 있으므로 기업에 이익이 된다.

그러나 거기에는 분명 대가가 따른다. 환율이 1000원 이상 오르면 수출 기업이 은행에 100만 달러를 950원에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 손실은 환율이 오를수록 더 커진다.‘(58, 59쪽) ’2009년 9월 30일 농형경제연구소가이란 자료를 발표했다. 거기에는‘ …’47개 기업의 손실총액이 평가손실을 포함하여 4조 5000억 원에 달했다“라는 엄청난 분석 결과가 담겨 있다.‘(60쪽)

환율이 올라 삼성 등 수출 대기업은 이익을 보고 중소기업은 쪽박을 찼다.

지식인은 세상이 어려움에 처할 때 등대 역할을 해야 한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 행동하는 대학교수가 있다. 이명박이 4대강 사업을 억지로 밀어붙일 때도 많은 대학교수들이 4대강 사업을 두둔했다. 대학교수 신세돈은 강만수가 저지른 고환율정책을 옹호했다.

1997년 아시아 국가들의 통화를 공격하여 외환위기를 일으킨 주범은 미국과 유럽의 헤지펀드와 투자은행, 즉 금융기관들이었다. 헤지펀드가 투기를 주도하고 투자은행은 자금을 댔다. 그런데 2008년 금융위기 때는 그들이 모두 엄청난 투자 손실을 입어 자금이 바닥난 상태였다. 그들에게 돈을 빌려줄 금융기관들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투기 세력이 어느 국가의 통화를 공격하여 환율이 폭등했다는 뉴스를 접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이었는데도 왜 유독 한국만 투기 세력의 공격을 받았을까? 얼마나 매력적인 먹이를 발견했기에 자금 부족에 시달리던 투기 세력들이 한국의 환율에만 몰려들었을까?

투자의 기본 원칙인 ‘고위험 고수익(High Risk High Return)’이 투기에도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만약 어느 누가 “투기가 잘못되어도 손실이 발생하지 않도록 보장하겠다”라고 하면 어떨까? 투기꾼들은 고리의 사채를 빌려서라도 덤벼들 것이다. 더구나 그 말을 한 사람이 국가의 경제 정책을 책임진 자라면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99쪽)

당시의 한국 상황이 그랬다. MB정부 집권 초기 경제 정책을 쥐고 흔들던 사람들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원화 환율이 지나치게 낫다” “환율이 올라야 한다”라고 외쳐댔다. 그들은 자신들의 발언을 실행에 옮길 권력도 쥐고 있었다.

투기 세력들로서는 호기를 맞은 셈이었다.(100쪽)

어느 대학교수(서평자 주: 신세돈교수)가 KBS 아침 방송에 나와 강연을 한다. 2010년 2월 가정주부들이 주로 시청하는 프로그램에서 진행하는 경제특강이다. 노무현 정부에서 환율을 너무 떨어뜨리고 외환보유고를 엉터리로 관리해서 경제가 위기에 처하게 됐다는 말을 장황하게 늘어놓은 뒤 이런 말이 어이진다.

“다행히 재작년에 전설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셨죠. 강만수 장관이라고. 들어오시자마자 환율을 올렸죠.”(86쪽)

‘게다가 어이없게도 “물가가 오르면 아파트를 사기 위해 대출받은 빚의 부담이 줄어드니까 주부들에게 득이 된다”라는 궤변으로 MB정부의 무책임한 고물가정책을 칭송해 마지않았다.’(87쪽)

서민으로 살기 팍팍한 세상이다.

서민들이 경제 공부를 해야 한다.

1프로에게 두 눈 뜨고 당하지 않으려면 경제공부 해야 한다.

이 책을 99프로 분들께 권한다.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⑩

 

타자의 얼굴과 환대의 윤리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레비나스⑩

 

강사 :문성원(부산대 철학과 교수)
후기 : 진보성(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금, 철학의 이미지와 레비나스의 철학

 

“과학에 있어서의 철학은 섹스에 있어서의 포르노그래피와 같습니다. 더 싸고, 더 쉽고, 어떤 사람들은 더 좋아하기는 하죠.” 스티브 존스(제레미 스탱룸 편, 김미선 역, 『세계의 과학자 12인, 과학과 세상을 말하다』, 지호, 26~27쪽.)

“멀쩡한 사람도 누구나 삶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묻는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대체로 정신병자밖에 없다. 누구나 이런 질문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질문을 진심으로 중대하게 여기는 사람은 정신병자로, 그는 언제나 신념체계를 세우는 사람이다.” 대리언 리더(대리언 리더 저, 배성민 역, 『광기』, 까치, 97쪽.)

철학은 무엇일까? 과학에 있어서 철학은, 비유하자면 실제 섹스를 따라가지 못하는 포르노그래피와 같아서 비록 가짜이지만 그 힘든 과학적 발견에 앞서서 세계와 사회의 현상을 풀어주고 설명하는데 도움을 준다. 하지만 현대의 과학자들은 과학 이전에 철학이 과연 필요한지 의문을 제기하는 경우가 많다. 한편 철학자들이 평가절하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데 자기 나름의 일관성을 가지고 완벽한 세계에 대한 이해를 도모하려는 자세가 정신병자와 같은 기준에 서 있다는 점이다. 현실과 부딪힌 충격을 극복하기 위해 철학을 도모하고 세계를 남김없이 설명하려는 철학자들의 일관성은 흡사 정신병자들이 가지는 트라우마 때문이기도 하다.

현대철학은 이런 비판과 맞닿아 있다. 서양에서 근대까지 철학자들은 단순하고 일관적인 원리를 가지고 세계를 설명하려 하였다. 철학자들이 제시하던 세련된 근대적 세계관은 일방적이며 일관적으로 세계를 장악하려했던 시도들로 점철되었다. 서양인들이 이른바 제3세계를 식민지화하려했던 역사의 이면에는 서양인들의 전체성과 인간과 자연을 조작 가능한 것으로 봤던 이성주의에 대한 무비판적 신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리 눈으로 본 서양현대철학사 2] 열 번째 시간에는 레비나스(Emmanuel Levinas, 1906~1995)의 철학을 통해 근대적 세계관과 그 이해의 연장선에서 발생하는 억압되는 타자, 그리고 타자를 장악하는 나의 관계를 살펴보았다. 나와 타자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이런 현상은 신자유주의의 심화와 함께 우리 사회에 일반화된 모습들이다. 얼마 전 『해체와 윤리 – 변화와 책임의 사회철학』(그린비, 2012.03)을 펴낸 부산대 철학과 문성원 교수는 이 책에서 추상적 원리만 남고 우리 삶의 구체적 현실은 논외가 되어버린 철학이 과연 정체된 현실과 퇴색된 가치를 뛰어넘어 우리 문화와 사회 전반에 변화를 제시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타진하면서 신자유주의 극복의 실마리를 레비나스의 철학에서 찾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번 레비나스 철학 강좌를 통해 레비나스의 ‘환대’라는 개념이 우리사회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 면모를 명확히 하는 시간을 가졌다.

 

현상학적 전통과 레비나스의 ‘환대’

 

레비나스는 서양철학이 가지고 있는 전체성이라는 거대한 폭력적 성향과 인간의 이성이 인간과 자연의 모든 것을 관장하고 조작할 수 있다는 이성주의의 폐단을 지적한다. 이런 레비나스 시각의 배후에는 현상학적 전통이 자리 잡고 있다.

현상학이라는 철학 운동의 시발점에 서 있는 후설(Edmund Husserl, 1859~1938)은 자연과학적 세계관의 무비판성을 문제시 하며 현상의 근원성과 본질을 탐구한 철학자이다. 특히 인간의 의식과 관련하여 무엇인가 새롭게 재구성하려는 지향적 의식의 구성 작용에 주목했다. 그리고 하이데거는 존재와 관련하여 존재자와 존재 차이의 문제를 제기하면서 존재자에 매몰되어 있던 서양의 전통을 근원적으로 반성해보려는 시도를 한다. 문성원 교수에 의하면 레비나스에게는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영향력이 가장 컸을 것이라고 한다.

레비나스 보다는 나이가 어리지만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다. 레비나스는 후설과 하이데거를 비판하기도 하는데 데리다는 1964년 “폭력과 형이상학”(『글쓰기와 차이』)이라는 글을 통해 레비나스의 철학을 소개하면서 비판한다. 후설과 하이데거의 견지에서 역으로 레비나스의 후설, 하이데거 비판을 반(反)비판하는 작업이었다. 물론 데리다 역시 하이데거의 영향력이 굉장히 강했다.

잠시 데리다의 ‘해체주의(deconstruction)’를 살펴보면 하나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해체를 통해보면 어떤 철학도 내부 모순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분석하다보면 그 체계는 다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되면 곧 어떤 하나의 개념체계를 가지고 세계를 일관되게 설명한다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게 된다. 문제는 이런 해체 뒤에 뭘 어떻게 하자는 것인가? 해체주의는 무엇을 얘기하려는 것인가? 이런 과제가 남게 되는데, 이 대목에서 데리다는 ‘환대’라는 개념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다. ‘환대(hospitality)’, 즉 ‘기꺼이 받아들이다’


‘환대’라는 개념 뒤에는 근대적 이성주의, 이 세계를 인간이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근대적 사고방식에 대한 반성이 있다. 먼저 근대 계몽주의의 계보를 살펴보면 세상을 인간이 합리적으로, 마음대로 만들 수 있다는 노동 모델을 중심으로 근대를 이끌어 왔다고 할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농부 철학자로 유명한 변산공동체의 윤구병 선생이 주장하는 대로 인간의 역사에는 ‘기르는 문명’과 ‘만드는 문명’이 있다고 할 수 있는데 ‘기르는 문명’에서는 인간이 자연에 의존적이었고 자연은 숭상의 대상(신격화)이었다가, 인간이 머리가 깨고, 기술이 발전(산업혁명)하면서 인간이 세상을 만들어간다는 의식이 지금까지 연장되고 있다. 이 근대에 들어서 인간이 세계의 주인이라는 시건방진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생각이 인간을 서로 싸우게 만들고 자연까지 망가뜨리는 주된 이유가 되었다고 한다.

또 한편으로 자본가와 노동자의 대립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으로 많은 철학자들이 사회주의 모델을 제시했는데 80년대 후반 소련을 위시로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그 기반이었던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회의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났다. 이 시기 팽배해진 기존 철학의 불완전성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하고 그 대안을 제시했던 철학자가 레비나스이다.

 

윤리를 제1철학으로, 타자의 호소에 응답하라

 

레비나스는 철학에서 ‘제1의 과제’는 ‘존재’가 아니고 ‘윤리’라고 말한다. 여기서 핵심적인 주장은 “죽이지 말라”이다. 1?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인간들은 죽음의 강을 건너왔다. 실제로 레비나스는 전쟁의 상흔을 가진 인물로써 리투아니아에서 유태인 부모 아래 3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2차 세계대전 때 두 동생을 나치에 의해 잃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있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우리(나)는 유한자이고 그러면서 스스로 대단한 능력이 있다고 여기지만 우리가 알고 있고, 할 수 있는 것은 사실 제한되어 있어서 우리가 느끼는 것 이상으로 우리 바깥의 세계는 넓고 높고 심오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바깥을 마음대로 죽일 수 없다. ‘타자’는 바깥이고 우리 세계가 포섭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 삶은 ‘타자’에 근거해 있는 것이지 ‘타자’가 우리 삶에 종속되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이어서 레비나스는 더 적극적으로 “타자가 우리에게 ‘호소(appeal)’한다면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 세계의 기준으로 보면 ‘타자’는 약하고 부족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것은 우리(나)의 기준이다. 만약 ‘타자’가 약자의 얼굴로 호소해 온다면 우리는 거기에 응답해야할 ‘무한한 책임’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

이 때 주체는 지배하는 주체가 아니라 ‘응답하는 주체’이다. ‘호소’하는 자에게 ‘응답’하고 호소하는 자로서의 ‘타자’와 관계하는 주체이고 더 나아가 ‘타자’에 의해 형성된 주체이다. 그러므로 하이데거가 말하는 ‘존재의 소리를 듣는다’고 할 때의 중립성을 내세우는 ‘존재’를 철학의 기본적 카테고리로 삼아서는 우리 삶을 제대로 읽어 나갈 수 없다. 자기중심적이고 계산적인 전체론적 사고방식은 서양의 근대적 발상에서 기원한 사회의 기본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런 입장에서 레비나스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사고방식과 통하는 면이 있다. 다른 점은 보다 적극적으로 ‘타자’의 우선성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

 

레비나스는 나와 타자를 ‘동일자(the same)’와 ‘타자(the other)’로 나누어 설명한다. ‘동일자’는 자기는 물론 자기 근처의 남들도 자기와 같아야 한다는 ‘동일성’을 지향한다. 이 ‘동일성’은 사실 여러 다채로운 군상들이 살아가는 세상살이에서 가장 편하게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이기는 하다. 똑같은 것을 대한다는 것은 예전의 방식을 현재의 사고와 행위에 있어서도 그대로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회적으로는 규범까지 ‘동일화’ 시켜 그 안에서 살아간다. 자연과학적 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에 적용시킨다. 질서정연한 사회다. 세상의 법칙을 안다는 것은 세상을 구성하는 ‘동일성의 배열’을 잘 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의 지식으로 대상을 분절시키고 배열해서 규정하는 것이 인간관계에서 통하는가?

근대인들은 대체로 ‘동일성을 강요’하는 것 속에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 속에서 그 규칙을 따르면 자유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 틀에 맞지 않으면 제외시키고 소멸시킨다. 유럽이 문명과 비문명을 나누어 아프리카나 아시아를 대하던 식민지정책의 태도가 바로 동일자가 지향하는 동일화의 길이다. 서구의 근대적 사고에서 ‘인격적 개인’이라는 것은 합리적인 ‘이성’을 가지고서 ‘이성적으로 합의’할 수 있는 ‘똑같은 권리’를 가지고 있는 개인이다. 이들이 합의를 도출하여 균형을 맞추면 서로 행복할 수 있다. 이것이 서양의 정치철학이다. 그러나 이 틀에 맞지 않는 존재는 다 내쳐진다. 이런 문제의 대상은 광기, 정신병자, 소수자 등이며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언급은 서구 문명에 대한 자기비판이었다.

여기서 벗어나는 길을 찾다 보니 주요하게 부각되는 개념이 ‘타자’이다. ‘타자’는 ‘동일자’의 틀에 잘 안 들어오는, 내 뜻대로 할 수 없는 대상이다. 이 ‘타자’는 서구의 근대적 입장에서 자유를 확보하는데 지장이 있는 타자로써 매우 불편한 존재이다. ‘타자’의 영역은 내가 지배할 수 있는 영역을 넘어서면 보인다. 그래서 ‘동일화’의 세계는 ‘유한의 세계’이다. 테두리를 벗어나면 ‘타자’의 영역이고 ‘무한으로서의 타자’의 세계이다. 무한은 끝이 없다. ‘타자’의 특성은 ‘무한’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 타자의 특성

 

레비나스가 얘기하는 타자의 정의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 설명해보면 다음과 같다.

? 무한으로서의 타자 :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의 한계와 틀을 넘어서는 무한하고 ‘초월(transcendence)’적인 것이라고 했다. 레비나스는 처음에 이 ‘초월’이라는 말이 신을 떠올리게 하니까 ‘외월(外越, exscendence)’이라는 말로 바꿔 쓰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다시 ‘초월’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우리와 같은 선상에서 보면 안 되며 우리보다 높이 봐야한다고 했다.

? 비(非)지배(non-dominance) : 지배자는 동일적인 것이고 ‘타자’는 내가 잘 모르는 다른 면모, 새로운 것을 가지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안정된 상황을 목적으로 하는 테두리 안으로 예상 못하게 다른 것이 넘어온다. 이 때 넘어오는 것을 레비나스에 의하면 막을 수 없다고 한다. 자본과 파워가 있어도 테두리는 언젠가는 무너진다. 유한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타자’는 ‘호소’하고 ‘명령’한다고 한다. 이것은 결코 타자가 지배한다는 뜻이 아니다. 타자의 호소와 명령은 안 들을 수는 있지만 도망갈 수 없는 것으로서 이것은 마치 ‘죽음에서 도망갈 수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타자’를 극복하려 하지만 ‘타자’는 이미 내 틀을 벗어나있기 때문에 실제로 ‘타자’를 극복하지 못한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예수의 생애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어찌 보면 이런 이율배반적인 결합은 우리에게 이미 호소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 종교라는 의미의 라틴어 ‘religio’(영어→‘religion’) : ‘religio’는 관계 맺는다는 뜻이다. 종교는 나와 같은 ‘동일자(the same)’끼리와의 관계가 아니고 ‘타자(the other)’와의 관계이다.

? 무차별하지 않음(non-in-difference) : ‘타자’는 나와 다르지만 무관심하게 방치하지 않고 무관심하지 않은 관계가 설정된다. 다르지만 관계 맺지 않을 수가 없다.

? 비대칭성 : ‘타자’와의 관계는 ‘상호성’을 넘어선다. 상호성은 장사와 무역에서 거래의 핵심이다. 근대 질서에서 상업성이라는 행위는 동등한 가치의 상품 교환을 기초로 한다. 상호성이 정치로 가면 너와 나는 ‘같은 권리소유자’라는 것을 기반으로 하여 서로를 합리적 거래를 통해 이해한다. ‘사회계약’이 그것이다. 사회계약은 상품거래자들의 상호적 거래를 정치질서로 정착시킨 것이다. 그런데 이런 정신 상태에서 인간은 같은 동일자들의 세계만 끌어안는다. 그리고 이 속에서 싸움(전쟁)과 경쟁은 끊이지 않게 된다. 정작 ‘give & take’라는 거래는 확실하지 않다. 이 속에서 인간과 인간 사이의 ‘비대칭성’은 더 확실해진다.

 

타자의 나타남과 타자의 얼굴

 

그렇다면 ‘타자’와 비대칭적이거나 무관심하지 않으면서 ‘타자’는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나와의 관계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인간의 활동 영역에서 ‘본다는 행위(시각)’는 가장 중요한 것으로 여겨진다. 우리에게는 일본을 거쳐서 중역된 말이기는 하지만, 철학의 ‘철(哲)’자가 의미하는 것처럼 밝게 해서 환하게 비추면 뭔가를 알게 된다. 그러면 훤히 보이는 대상을 ‘지배’하고 자유롭게 된다는 것이 근대 서구인들의 생각이었다. 전쟁에서 높은 고지를 ‘점령’하는 이유는 뭘까? 내 눈앞의 것을 모두 발밑에 두고 낱낱이 알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이다. 첨단을 자랑하는 미국의 고공정찰기나 인공위성은 근대의 판옵티콘이 현대화된 것으로 ‘모든 것을 보는 눈’으로써 미국 제국주의 최전선에서 근무하는 첨병이다.

그러나 레비나스는 ‘청각’을 강조한다. 기존에 강조하던 ‘시각’은 ‘지배’와 ‘점령’의 가장 중요한 기능이었지만 타자와 같은 불확실한 것을 파악하는 데는 좌표를 직시하는 ‘시각’보다 ‘청각’이 더 필요할 수 있다. 공자나 석가, 예수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 바로 그렇다. 불확실한 청자의 다양함을 전제하는 방법이다. 세상이 무한하고 ‘타자’도 무한하니 이에 대응하고 책임지는 방식도 다양해 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청각’의 영역과 관계한다.

그리고 어떤 표현이 그 사람을 드러내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렇듯 ‘타자’는 말로 나타난다. 화가가 표현하는 방식은 그 화가의 표현 중 하나이지 그것이 화가 전부를 대변할 수는 없다. 무수히 다른 그림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그 표현 하나하나에 그 화가의 정신이 들어가 있다. 그것을 ‘참가(attendance ≠ participation)’라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레비나스는 ‘타자’가 우리에게 ‘얼굴’로 다가온다고 했다. 사진과 같은 어떤 형태의 시각적 현상이 아니라 ‘나타남’이다. 또한 얼굴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라 우리에게 ‘호소’하고 메시지를 주고 느낌을 전달한다. 레비나스는 ‘벌거벗은 얼굴’이라는 표현을 쓰는데, 얼굴을 통해 직접적으로 ‘타자’와 가리지 않고 만난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말로 옮기면 ‘현현(顯現, manifestation?epiphany)’이라할 수 있겠다. 낯선 자가 매개 없이 직접적으로 내개 다가와 호소하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동일자와 타자, 그리고 향유

 

앞에서도 언급했던 ‘동일자’와 ‘타자’라는 개념어는 『전체성과 무한』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동일자’는 ‘유한자’가 되고 ‘무한자’는 ‘타자’가 된다. 레비나스는 동일자는 항상 테두리 바깥의 타자를 향한 형이상학적 욕망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 때 형이상학적 욕망은 대문자 ‘D’를 써서 ‘Desire’로 표기한다. 욕구(need)로써의 ‘욕망(desire)’과 구별한다. 당장의 결핍을 전제하지 않고서 하는 욕망으로, 예를 들어 높고 멋진 산악의 풍경이나 경외감이 드는 광경을 목격할 때 드는 인간의 감정 상태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동일자의 속성인 유한은 무한에서 ‘분리(seperation)’된 것이다. 이 때 말하는 분리는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여서 전체에서 부분이 떨어져 나온 것이 아니다. 문성원 교수는 “마치 불교의 설명처럼, 눈을 감거나 우리가 살다 죽으면 경험하는 그 세계가 사라지는 것과 같이, 내가 경험하는 세계, 전체화 할 수 있는 세계가 분리이다.”라고 한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하면, 전체는 ‘유한자’에게서만 만들어지는 것으로 ‘동일자’들이 모든 것을 ‘동일화’ 시키는 것을 두고 전체화 했다고 이해하기 쉽지만 레비나스의 시각에서는 ‘동일자’의 성립 자체가 분리를 의미하기 때문에 안과 밖을 구분했을 때 동일화된 테두리가 전체가 되어 동일화 되지 않은 밖을 분리시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역으로 무한이 전체이고 부분이 유한자라는 이해도 성립하지 않는다. 다시 말해 전체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유한이 있어서 무한을 분리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무한은 전체라는 개념이 있을 수도 없다. 굳이 말하자면 ‘무한’이 있음으로 해서 ‘유한’과 ‘무한’이 생겨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의 분리이다. 그것이 레비나스에게 있어 ‘안과 밖(interiority & exteriority)’의 성립이다. 안은 항상 밖을 전제하고 밖과 더불어서 성립하는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은 분리된 상태로 어떻게 살아나가는지에 대해 설명해 나간다. 그 첫 번째로 제시하는 개념이 ‘즐김(jouissance)’이다. 하이데거의 경우 ‘불안’ 또는 ‘죽음을 향한 존재’ 등의 얘기를 하는데 레비나스는 하이데거가 인간의 존재 의미를 한계 짓고 규정하려 한다고 하면서 대단히 부정적인 출발이라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인간은 불안에서 출발하지 않고 즐김에서 시작한다. 향유이다. 그리고 인간은 어떠한 현실적 상황에 있건 간에 우리의 주위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공기, 물, 기본적 먹거리 등)에 대한 ‘향유’로 귀결된다고 한다.

문제는 ‘자연적 향유’의 영역이 항상 ‘불안정성’을 안고 있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운명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테두리 치고, 재화를 수집하고, 집이 생겨나고, 소유, 노동의 개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를 통해 동일성을 확보한다. 그래서 내 ‘집’, 내 ‘영역’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문성원 교수는 이것을 레비나스 고유의 주장이라고만 볼 수 없다고 한다. 하이데거도 이런 얘기를 먼저 했었기 때문이다. 단, 레비나스는 ‘타자’와 관련짓기 위해 앞서의 언급을 재해석 하는 것이다. 이렇게 레비나스는 기존 서양철학의 제 문제를 재해석 하여 근사하게 풀어내고 있다.

 

응답과 환대

 

레비나스에 의하면 ‘타자’는 내 테두리 밖에 있는 존재이기에 ‘낯선 자’이지만 내 옆에 붙어 있고 항상 나에게 다가오기 때문에 ‘이웃’이다. 어찌 보면 같은 한 테두리 안에 있는 이웃들 중에도 나에게는 낯선 부분이 분명 있어서 사실 ‘이웃’과 ‘낯선 자’는 다르다고 볼 수도 없다.

문성원 교수는 레비나스가 항상 ‘호소에 대한 응답(response)’은 곧 ‘책임(responsibility)’과 관계 지었다고 한다. ‘나는 내가 무언가를 소유하고 나의 혹은 우리의 테두리가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면 ‘타자’와의 관계는 끊기고 자신은 테두리 안에 매몰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삶이 아니라 죽은 삶이다. 이에 유일한 소통은 ‘응답’하는 것이다. 내 집 밖의 타자를 내 집에 맞아들임, 이것이 ‘환대(hospitality)’이다. ‘환대’야 말로 우리 삶의 근본적인 자세라고 『전체성과 무한』에서 강조한다.

그런데 이런 주장의 약점은 언제나 내 집의 테두리라는 것이 전제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레비나스는 나중에 이것을 잘 언급 하지 않는다. 이후 레비나스는 누군가 내 것을 따지기 이전에 ‘타자’는 이미 나한테 와 있다고 설명한다. 그래서 내 집이라는 생각과 내 테두리를 고수하려는 생각을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한다.

레비나스의 환대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환대’와는 다른 점이 있다. 먼저 계몽주의자의 연결 선상에 있는 칸트는 환대를 ‘상호적 관계’에서 말한다. 칸트의 환대는 상호적인 관계이다. 남이 나의 집에 오면 ‘환대’하듯이 나도 남의 집에 가면 ‘환대’받을 권리가 있다는 ‘권리의 측면’에서 말한다. 입장 바꿔 생각해보자는 거다. 내 의지의 주장이 입법의 원리에 의해 보편적으로 타당하다는 것. 역지사지로 네가 환대 받고 싶으면 네가 먼저 환대하라는 말이다. 이것은 ‘조건적 환대’이다. 가장 현실적이고 승률이 높은 태도이다. ‘give & take’ 전략이랄까.

그럼 ‘무조건적 환대’는? 레비나스는 칸트의 방법만 가지고는 삶에 비전이 없다고 생각했다. 레비나스는 ‘무조건적 환대’가 더 근본적이라고 한다. 마치 부모가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과 같다고 볼 수 있다. 문성원 교수는 물론 자연과학자들이나 진화론자 중에는 무조건적 환대도 ‘give & take’의 일부분이라 말한다고 하지만 레비나스는 현상학적인 견지에서 볼 때 내 입장에서 내 삶의 유의미한 입장은 ‘무조건적인 환대’라고 보았다. 그래서 무조건적인 환대가 조건적인 환대와 결합해야 제대로 된 ‘환대’로서 작동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와 관련하여 데리다의 『환대에 대하여』가 있다.

레비나스는 ‘타자’를 ‘환대’해야 하는 근거 중 하나는 내가 태어나 이 세상의 테두리 안에서 내 집이 나를 받아주는 것처럼 안락함으로 받아주는 세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듯이 타인을 받아주어야 한다. 레비나스는 그것과 관련하여 받아들이는 것을 ‘여성성’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존재와 달리, 존재성을 넘어서

 

‘존재’에는 이해 ‘타산적(inter-esse)’인 속성이 있다. 우리가 ‘존재’에 집착하게 되면 내 것을 지키려하고, 규정하려하면 다툼과 전쟁을 피할 수 없다. 내가 내 집을 차지하면 내 집을 차지하지 못한 사람은 그 영역에서 밀려난다. 이것이 ‘존재’의 ‘점령’하며 ‘독점’하려는 속성이다.

레비나스는 우리가 ‘독점’한 자리를 말하면서 “태양 아래 나의 자리(Pascal)”에 대해 묻는다. 이 자리는 다른 사람이 내가 거기에 있음으로 해서 밀려난 자리이다. 내가 정규직이 되면 다른 사람은 비정규직이 된다. 이것은 곧 “내가 존재할 권리가 있는가?”라는 물음으로 연결된다. 내가 내 자리를 가지고 존재하는 것이 일종의 ‘찬탈’이라는 것이다. 레비나스에게 있어서 영역을 차지하고 점령하고 밀어내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은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다. ‘존재와 달리’ 살아야 한다. ‘존재성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존재와 달리’하는 방법은 자신이 차지하는 곳에 대해 버겁게 생각하고 타자에 대해 공경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조금 극단적으로 나간 부분이 분명 있다고 한다. 그래서 레비나스의 책을 읽어 본 사람들은 레비나스의 주장을 거부할 수도 없는 것이지만 또한 실행하기도 어려운 것 아니냐고 한다. 방향은 있는데 따르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레비나스가 말한 ‘존재와 달리 사는 지평’이 가능한지의 여부가 레비나스 철학이 우리에게 남긴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쨌든 여기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철학을다시 쓴다]-⑩

‘함과 됨’, ‘있음과 없음’의 연관성[철학을다시 쓴다]-⑩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대단히 어려운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는데, 먼저 유클리드 기하학과, 리만(Riemann) 기하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공간의 성격에 연관되는 것인데, 닫힌 공간이냐 열린 공간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열린 공간에 대해서 맨 처음 이야기한 사람은 원자론자들이었습니다. 로이키푸스에서부터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 루크레티우스를 잇는 원자론자들이 열린 공간을 생각했고, 이 사람들은 이 우주는 공간과 원자로 이루어져 있다, 원자는 그 안에 빈 틈, 공간이 하나도 있지 않으므로,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 ‘아토마’(atoma)이다, (템네인(temnein)이라는 그리스어가 있는데, 그것은 가른다, 쪼갠다라는 말입니다.) 아토마의 ‘아’는 부정사로서 ‘아톰’(atom)은 쪼갤 수 없는 것,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것은 ‘있음’의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 또는 ‘있는 것’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까 ‘있음’과 ‘있는 것’이 갈라지는 지점이 있는데, 그것이 지닌 성격을 원자론자들은 원자라고 불렀다.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것이다로 이해하면 됩니다.

파르메니데스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요. ‘있는 것’ 또는 ‘있음’(einai)을 구(球)처럼 생겼고, 모든 것이 달라붙어서 하나로 되어 있고, 분할 불가능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 이것을 파르메니데스는 ‘있는 것은 하나’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하나’를 무한히 작은 것들로 쪼개서 무한한 공간 속에서 흩뿌려놓은 사람들이 원자론자들입니다. 그리고 원자론자들은 그렇게 이야기하죠. 이 우주 속에서 원자의 수도 무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무한하고, 공간도 무한하다. 그런데 고대 원자론자들의 원자와 공간의 성격은 각각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성격을 그대로 지니고 있습니다.

지난번에 제가 ‘함’과 ‘됨’이 어떻게 다르냐고 이야기 했을 때 한분이 그런 말씀을 하셨죠. 함은 능동성이 강조되는 말이고, 됨은 수동성이 강조되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됨’은 수용성, 받아들임, 외부에서 어떤 작용이 있을 때, 거기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지 않고 그 작용을 받아들이는 측면입니다. ‘함’은 작용을 하는 측면이죠. 여기에서 이런 문제를 먼저 짚고 넘어갑시다. 우리가 ‘대상’이라고 부를 때, 불란서말로 ‘오브제’(objet), 영어로 ‘오브젝트’(object), 독일로 ‘게겐슈탄트’(Gegenstand)라고 그러는데, ‘오브제’, ‘오브젝트’라는 말은 ‘오브’(ob) ‘이케레’(icere)라는 라틴어에서 나왔습니다. ‘가로막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게겐슈탄트’라는 독일말은 라틴어가 어원인 불어와 영어의 독일식 직역입니다. ‘맞서 있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맞서 있는 것은 어떤 작용에 대해서 반작용을 합니다. 그러니까 세상이라는 것은, 이 세상에 있는 저 학생은 내 시선을 가로막아서 저하고 맞서 있고 버티고 서 있는, 내 시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됩니다. 저는 이 학생 뒤에 있는 다른 학생을 보고 싶은데 말이죠. 이렇게 장애물이 되는 것, 제 시선에 대해서 반작용을 하는 것이죠.

“반작용의 능력을 무화시키는 방식이 있습니다. 지금 제가 보고 있는 이 책상 표면만 보면 원목처럼 보이는데, 이것이 진짜 원목인지 아닌지를 구별하는 여러 방법이 있겠죠. 두들겨서 소리를 듣는 방법도 있고, 옆과 앞을 살펴보는 방법도 있습니다. 이렇게 해도 이것이 원목인지 아닌지 확인이 안 되면 어떻게 해야겠습니까?”

“잘라 봐요.”

“네, 잘라 봐야죠. 그런데 자르려는데 이 책상이 반항을 한다, 그럼 어떻게 하죠?”

“자를 수 없죠.”

“자를 수가 없죠. 그렇죠? 색은 원목색인데 금강석이다, 그래서 이걸 자를 수가 없다, 그러면 이것이 나무인지 금강석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물질에는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죠. 모든 물질들은 저항하는 임계점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물리학자들은 계속해서 쪼개고, 쪼개고 쪼개서 원자 이하인 아원자 수준으로 계속해서 쪼개서 소립자, 그것도 쪼개서 그 결을 보고 이것이 어떤 물질인지, 어떤 특성을 가졌는지, 어떤 운동을 하는지를 알아내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쪼개면 당장에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이 사물을 어떻게 인식을 합니까? 이 사물의 겉을 보고 우리가 인식을 합니다. 갓, 겉, 끝, 어원으로 보면 전부 같은 말입니다. 이 사물과 사물이 아닌 것이 만나는 지점에서 이 사물을 우리가 이해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앞을 보고, 옆을 보고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되도록 많은 겉을, 표면적을 살핀다는 소리죠. 그런데도 잘 알 수가 없어, 가르고 쪼갠다는 게 무슨 말입니까? 안에 숨어 있는 새로운 겉을 들어낸다는 것이죠? 자꾸 쪼개서 표면적을 늘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삼차원 세계를 이차원으로 전부 환원할 수 있다면 모든 결들이 자명하게 드러날 수 있다, 내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깊이 있는 사물을 깊이 없는 것으로, 삼차원 공간을 이차원 공간으로 환원시키게 되면, 이 모든 물리 현상을 이해할 수 있고, 물리현상이 이해된다면 화학, 생물학, 사회, 역사, 인간현상까지도 전부 단순한, 이런저런 것들의 복합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거기에서 출발을 합니다.

이 출발 지점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그리스철학에 있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이러한 방식으로 엮어낸 우주론은 둘로 갈라집니다. 그 주인공 가운데 하나는 원자론자들, 또 하나는 플라톤입니다. 원자론자들이 열린 우주, 개방된 공간을 그렸다면, 플라톤은 닫힌 우주, 폐쇄된 공간을 그립니다. 이것이 현대물리학에 이르기까지 조금도 바뀌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두 가지 ‘거대이론’(Grand Theory)입니다. 이 우주를 열렸다고 보느냐 닫혔다고 보느냐죠. 유클리드는 원자론자적인 전통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열린 공간, 등질적인 공간을 상정하고 기하학 이론을 전개합니다.

그렇지만 로바쳅스키(Lobachevskii)나 리만의 경우는 공간을 달리 봅니다. 휜 공간, 그것이 조금 성격이 다르지만 닫힌 공간으로 보느냐, 아니면 닫힌 것인지 열린 것인지 구별하기는 힘들어도 공간 자체가 휘어 있는 것으로 보이냐, 평행으로 보이느냐 하는 점에서 유클리드와 견해가 다릅니다. 그런데 대단히 이상하지 않습니까? 공간은 ‘없는 것’에서 나오는 건데, 이것이 휘어있다는 말이 무슨 말이죠? ‘없는 것’은 ‘휘어있다’? 공간은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 아닙니까? 어떤 것에도 저항하지 않고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없는 것’뿐이지요? ‘있는 것’은 대상이 됩니다. 맞서고, 저항을 합니다. ‘없는 것’만이 어떤 작용에도 반작용하지 않고 순수 수동성을 띠게 됩니다. 공간이 원자한테 저항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간의 특성이 ‘없는 것’에서 생겨난 것이라는 뜻입니다. ‘공간’은 ‘없는 것’의 다른 이름이다, 그러면 ‘있는 것’은 뭐냐? ‘원자’만 있다, 데모크리토스에 의하면 그렇습니다.

 

로바쳅스키(Lobachevskii, 1792~1856) 초상화 , 레프 크류코프 작(1843)


 

‘있는 것’을 상정하고, ‘없는 것’을 상정하게 될 때, 거기서 운동이 나올 수 있는지 없는지 한번 살펴봅시다. ‘함’이 됐든 ‘됨’이 됐든 한쪽은 능동적인 운동의 양태이고, 한쪽은 수동적인 운동의 양태인데 ‘있는 것’과 ‘없는 것’ 안에 운동을 포함할 수 있는 여지가 있는지 없는지를 한번 살펴봅시다.

*있음 (있는 것)
*없음 (없는 것)

운동은 변하죠. 바뀌는 것을 뜻하죠? 변하는데, 이 ‘바뀜’을 두 가지로 갈라볼 수 있겠죠, 한쪽은 없는 것에서 무언가 새로 생겨나서 있게 되는 것, 또 한쪽은 있는 것이 사라져서 없어지는 것, 보통 상식으로 이 두 가지 운동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데 운동이 ‘없음’에 맞닥뜨리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하강운동을 ‘없음’ 아래로도 할 수 있을까요? 없죠. 말하자면 ‘없음’은 운동도 없는 정지지점을 나타내는 거죠. 거긴 운동이고 뭐고 다 없다, 우리가 ‘운동’과 ‘정지’로 어떤 변화를 규정하자면 없는 것에 이르러서 하강운동은 멈춘다, 상승운동은?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갈 수 있습니까? 없죠. 있는 것 이상으로 올라간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있는 것의 한계를 넘어서서 없는 것으로 돌아선다는 것이죠.

‘있음’과 ‘없음’, 또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두 한계지점입니다. 이 한계 안에서 운동이 이루어집니다. 지난번에 제가 당구공을 예로 들어 이야기했던 것을 상기하시기 바랍니다. 여기에 ‘있음’이 여럿으로 있다면, 여럿의 최소 단위가 뭐라 그랬죠? 둘, 둘이 여럿의 최소 단위죠. 만일에 ‘있는 것’이 둘로 있다고 치자. 그럼 이것을 ‘있는 것 기역’(ㄱ), ‘있는 것 니은’(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여기에서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둘을 나누는 경계선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런데 이 경계선이 ‘있는 것’이냐 ‘없는 것’이냐 하고 물었을 때, ‘있는 것’이라 하면 ‘있는 것 기역’(ㄱ)과 ‘있는 것 니은’(ㄴ)은 달라붙는다, ‘없는 것’이라고 보면 ‘없는 것’은 그 자체 규정상 없으므로 ‘ㄱ’과 ‘ㄴ’은 하나로 달라붙을 수밖에 없죠. 그래서 ‘있는 것’은 ‘하나’라고 이야기했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있는 것이 없다’고 ‘있는 것’이 부정돼버리면, 부분 부분 부정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도 없다’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랬죠. 통째로 부정이 돼서 ‘있는 것은 하나다.’, 그때 제가 여러분들한테 동의를 얻어 이 이야기를 했습니다.(일동 웃음.)

‘있는 것’은 ‘하나’이기 때문에 다(多)와 운동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설명하려면 ‘있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 ‘있는 것’ 하나만 놓고 가버리면 ‘없는 것’이 다 사라져 버린다. ‘원자’와 ‘공간’으로 나누든 ‘질료’와 ‘형상’으로 놓든 어떤 방식으로든지 두 개를 놓고 나가야 하는데, 최초의 두 개는 뭐냐? ‘있음’과 ‘없음.’ 이게 최초의 두 개인데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있어요, 없어요? 없습니다. 있음과 없음이 서로 관계 맺을 필연적인 이유가 없기 때문에 있음과 없음이 접촉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다, 있음과 없음이 접촉할 이유가 조금도 없다, 왜 이 우주에 원자가 있어야 하고, 거기에 대응해서 또 공간이 있어야 되는지 아무도 거기에 대해서는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그냥 우연히 그렇게 되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원자론이 데모크리토스에 이르는 기간 동안 왜 ‘있음’과 ‘없음’이, ‘원자’와 ‘공간’이 우주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설정되었느냐, 동시에 공존하게 되느냐 물었을 때 그 대답은 ‘우연’이다, ‘필연’이다, 어쩔 수 없다, 설명할 수가 없다, 이렇게 이야기가 헛돌고 말문이 막히는 것입니다.

제1편,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자본론강독]⑨

제1편, 제3장 화폐 또는 상품유통

?

?

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 신재길

?

이제부터의 논의에서 금은 화폐상품으로 간주한다.

금은 모든 상품에 대해 질적으로 동일하고 양적으로 비교 가능한 가치표현의 재료로 즉 가치의 일반적인 척도로 기능한다. 하지만 여기서 주의할 것은 단위 측정의 근거가 금이 화폐라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주지하고 있는 사실, 모든 상품에 내재한 공통적 속성 ?상품에 대상화된 인간노동-으로부터 비롯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금이라는 하나의 특수한 상품이 대표적인, 공통적인 가치척도인 화폐로 전환 될 수 있는 것이며, 우리는 가치척도로의 화폐를 가치척도의 필연적인 현상 형태로 생각해야 한다.?

?

사진 http://www.silverdoctors.com

화폐가 가치척도로 기능함에 따라 늘어서 있던 상품의 행렬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금이라는 화폐와 상품의 비교만이 남는다. 그러므로 일반적인 상대적 가치형태는 단순한 또는 개별적인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을 띠고 전개되며, 상대적 가치표현은 화폐상품의 독특한 상대적 가치형태의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 가치형태의 모습은 ‘상품의 가격’이라는 형태로 사회에 출현한다. 다만, 화폐에는 가격을 매길 수 없다. 화폐가 다른 상품들을 상대로 통일적인 상대적 가치형태가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등가물로 삼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는 동어반복적 관계일 뿐이다.

?

이제 화폐와 가격의 문제에 대해 고려해 본다. 중요한 것은 상품의 가격 또는 화페 형태는 상품의 가치형태 일반과 마찬가지로 현실에 물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관념적이고 개념적인 형태로 존재하는 것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지점이다. 가치는 상품에 내재하며, 그것을 가치척도로 재고자 할 때 관념적인 금과의 상상된 관계에 의해 표현된다. 상품의 주인이 자신의 상품가치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한다 할지라도, 아직 그의 상품이 금으로 전환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

이제 상품의 가치는 여러 크기의 상상적 금량이라는 동일한 명칭의 양으로 전환된다. 다만 상품의 가치를 배제한 채, 척도로의 가격이라는 사회적 형태만을 고려한다면 가격의 문제는 “화폐 재료”로부터 비롯한다. 즉, 특정상품의 가치는 동일한 양의 노동량을 포함하는 상상 속의 화폐상품의 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유통되는 화폐상품의 재질이 복수일 수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하나의 상품만이 가치척도로의 지위를 유지한다.

?

이중의 가치척도가 가치척도의 기능과 모순된다는 것이다. 이제 금이 가치척도로의 견고한 사회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금량을 가치들의 도량 단위로 삼을 필요가 있다. 나아가 도량 단위는 세부적으로 분할된 도량표준으로 발전한다.

?

결국, 지금까지 고찰한 화폐의 기능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인간노동의 사회적 화신으로 가치를 측정하는 가치척도로의 기능이며 또 하나는 고정된 무게라는 속성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금의 양을 측정하는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이다. 맑스가 보기에 화폐 형태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이 두 기능을 분리해서 사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

화폐가 도량표준으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도량을 고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지만 노동생산물로의 금 역시 잠재적으로 가변적인데 이는 금이 가치척도가 되는데 있어서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금의 가치가 변동하더라도(가치가 전환된 형태인) 여러 가치의 금량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동일하기 때문이다. 상품가격이 오른다면, 그것은 나머지 요소들은 고정된 상태에서 상품가치가 올랐거나 화폐 가치가 떨어진 것이고 상품가격이 떨어진다면 그것은 상품가치가 내렸거나 화폐가치가 오른 것이다.

?

금의 가치가 변해도 도량표준으로의 기능을 수행하는데 문제는 없는 셈이다. 한 가지 고려할 것은 문화적, 관습적 요소들에 의해서 화폐의 명칭이 그 무게 명칭으로부터 분리되는 경우가 빈번하다는 것이다. 결국 도량표준의 화폐명칭은 실제 무게와 동일하지 않더라도 그러한 이름을 획득하고 법률에 의해 규제된다. 이제 1쿼터의 밀은 1온수의 금과 가치가 같다“고 표현하지 않고 ”3파운드 17실링“의 가치가 있다고 표현하게 된다.

?

그렇다면 “3파운드 17실링”이란 것은 그러한 가격을 가진 상품에 대해 무엇을 말해주는가? 사물의 명칭은 사물의 성질과 관련성을 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화폐의 명칭들에서 우리는 상품의 가치 관계의 흔적들을 찾을 수 있다.

?

가격은 상품에 대상화되어 있는 노동의 화폐명칭이기는 하지만 그 외현된 이름으로부터 가치관계의 논의를 시작할 수는 없다. 나아가 화폐 형태와 상품 사이의 관계를 단순한 상대적 가치형태와 그것의 등가형태의 표현으로 간주하기도 어렵다. 즉, 가격이라는 형태는 상품의 가치와 더불어 수요/공급 등의 사회적 조건들에 의해 변화되어 출현하기에 상품가치량의 지표로의 가격은 상품과 화폐 교환비율의 지표이나 그 역의 관계는 성립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생산성이 동일한 이상 사회적 노동시간이 동일하다면 그 상품의 가치량은 동일하게 상품에 내재할 것이다. 그렇지만 이것이 가격으로 사회적으로 외화된 형태로 출현할 때는 사회적 조건이 그 거울 관계를 왜곡시킨다. 결국, 가격과 가치량 사이의 양적 불일치의 가능성은 필연적으로 가격 형태에 내재하는 것으로 이 질적 모순은 거의 언제나 존재한다. 가격형태만을 가지지 가치가 없는 것(양심, 명예), 상상적 가격형태(미개간지) 등은 이를 더욱 분명하게 보여준다.

?

결과적으로 상품이 그 가치를 고려할 때, 현실의 물질적 형태에서 벗어나 상상의 금과 비교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때의 금은 관념적인, 상상적인 금이지만, 주인이 상품에 가격이라는 형태를 부여하길 원한다면, 상품이 등가물로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상상의 금은 실제의 금으로 대체되어 출현해야 한다. 사실상 관념적 가치 척도에는 hard cash가 숨겨져 있는 것이다. 그리고 상상의 금이 현실의 금으로 전환되는 순간, 노동생산물이라는 가치 형태가 그것이 그대로 반영되기 보다 필연적으로 변형되어 ‘가격’이라는 모습을 가진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

?

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

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

?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

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

사진 : http://left21.com/article/12757

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

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

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

-끝-

?

?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13강-①

?

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

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

1. 경제언어가 지워버린 여성의 삶

?

“조씨는 매일 새벽같이 일어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아이를 학교까지 차로 데려다 준다. 그녀는 결혼 후 남편과 함께 박사학위를 받기 위해 외국유학을 갔었지만 경제적 어려움과 양육의 문제로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귀국 후에는 전업주부로 가사와 양육을 도맡고 있지만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학생들에게 프랑스어 과외지도를 하기도 한다. 그밖에도 아이의 학교에서 급식을 나누어주는 자원봉사도 한다. 남편은 박사학위를 받고 귀국했지만 아직 형편이 어려운 시간강사이다. 일하러 갈 때면 그녀는 이웃에 아이를 맡긴다. 대신 이웃의 아이들에게 영어나 프랑스어를 가르쳐 준다. 부모/시부모가 아플 때 간병을 담당하는 것은 항상 그녀이다.”

?

이러한 조씨의 이야기는 결코 특별한 사례가 아니다. 주의를 둘러보면 조씨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흔하게 발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여성들의 활동은 주류 경제학자들의 관심 대상이 아니다. 공식적인 통계에도 잡히지 않는다. GDP든 GNP든 어떤 경제적 용어도 조씨가 수행하는 종류의 노동을 생산 활동으로 고려하지 않는다. 통상 그녀가 수행하는 대부분의 활동은 화폐의 거래나 공식적 시장과는 상관이 없기에 노동이나 경제활동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것은 사적인 행위일 뿐이다. 화폐교환이 이루어지는 과외지도 역시 공식적 시장거래가 아니라는 점에서 통계에 잡히지 않는다. 그렇다면 조씨가 수행하는 가사노동과 양육, 과외지도, 자원봉사, 품앗이, 간병은 생산 노동이라고, 경제활동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인가?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아무런 사회적 의미도 갖지 못하는 사적인 활동일 뿐인가? 조씨의 노동을 경제와 관계없는 사적인 활동일 뿐이라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은 어디에서 유래하는가?

?

2.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

?

아마도 그것은 근대 자본주의의 형성과 함께 굳어진 공/사 구분법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 같다. 많은 사회학자들은 근대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 경제적 영역과 비경제적 영역이 더욱 분명하게 구분되었다고 주장해왔다. 이들에 따르면 봉건시대에 가정은 사회적 신분과 유산이 계승되는 장소라는 점에서 경제활동의 공간이었으며 여기서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성립과 더불어 경제는 자본주의적 시장 중심의 임노동 영역으로, 가정은 시장중심의 경제관계 밖에 존재하는 친밀성, 인간관계, 사랑의 영역으로, 즉 사적인 영역으로 분리되었다. 이제 자본주의의 사회에서 개인의 경제관계는 친밀관계로부터 분리된다. 경제적 활동은 오직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노동을 사고파는 행위와만 연관되며, 가정은 경제활동이나 이해관계와는 동떨어진 숭고한 친밀성의 영역이 된다. 즉 가정에서의 활동은 노동이기보다 사랑의 표현이며, 가족, 이웃의 관계는 이해관계 중심의 경제적 관계이기보다는 규범적 태도가 중시되는 인간관계로 간주된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이분법적 사고방식은 자본주의를 비판했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 담론에도 고스란히 나타난다. 가령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의 논의를 살펴보자. 한편으로 그들은 강력한 자본주의가 여성의 가내 노동 및 친밀관계를 자기존립의 기반으로 이용하고 있음을 비판하였다. 그들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은 시장 노동력을 재생산하는 기반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가정 내에서의 여성의 활동은 강력한 자본주의의 논리에 종속된 것으로 혹은 자본주의를 유지시키는 지지물로 파악될 수 있다고 보았다. 다른 한 편으로 맑스주의적 페미니스트들은 가정을 소비의 공간으로 분석함으로써 어떻게 가정이 자본주의에 의해 식민화되는지를 분석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러한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비판적 분석은 강력한 자본주의 경제가 어떻게 사적인 인간관계 나아가 사회적인 것을 송두리째 집어삼키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 모든 비판의 근저에는 가정 내에서의 활동이 공식적인 경제활동과는 분리된 사적인 것이라는 전제가 여전히 깔려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의 담론에는 가정에서의 활동이 생산 활동이라기보다는 생산 활동을 보조하는 재생산 혹은 소비활동이며, 이 활동마저도 자본주의라는 강력한 경제 원리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수동적인 것이라는 전제를 포함한다.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은 결국 이러한 전제들로 인해 자본주의적 시장 밖에 존재하는 여성의 정체성을 독자적으로 파악할 수 없게 된다. 사적인 관계에서 노동을 수행하는 여성들은 경제적 생산자로서의 지위를 갖지 않는 수동적 대상이기에 그녀들의 정체성은 공식적 자본주의 시장에서 맺고 있는 남편의 계급과 관련하여 정의되곤 하였다.

만약 이분법을 전제로 하는 맑스주의 페미니스트들의 논리를 조씨의 사례를 분석하는 데 적용해 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우선 조씨의 다양한 활동은 경제적 활동이라기보다는 친밀성의 표현이다. 그녀는 사랑의 이름으로, 친밀성의 이름으로, 아이를 위해, 남편을 위해, 부모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적인 관계에서의 이러한 희생의 결과는 결국 자본주의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이바지 한다. 그녀의 애정 어린 봉사와 희생으로 남편의 노동력은 재생산되며, 아이는 미래의 노동력이 된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경제적 생산자가 아니다. 그녀가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노동력의 재생산자로서 혹은 소비자로서일 뿐이다. 그녀는 경제적 주체가 아니기 때문에 자본주의 경제에 대항할 어떠한 대안적 생산의 힘도 갖지 못한다. 그녀는 자본주의에 의해 이용되고 침탈되는 수동적 대상일 뿐이다.

결국 공/사, 경제/비경제의 이분법은 조씨와 같은 여성을 경제의 언어에서 지우거나 경제에 종속된 수동적 존재로 강등시킨다. 이분법을 고수한 채 여성을 사적인 영역으로, 비경제의 영역으로 감금하는 한, 여성이 일상적으로 수행하는 활동은 비존재처럼 취급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친밀 관계 내에서의 여성 활동은 비경제적 활동으로 간주될 수밖에 없었는가? 이분법 안에서 경제는 어떻게 정의되기에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노동으로, 경제활동으로 규정해 줄 수 없었던 것인가?

?

3. 자본주의적 경제활동만 있는 것이 아니다.

?

사진 : http://blog.daum.net/yyy8525/124

여기서 우리는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경제에 대한 관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흥미롭게도 좌파에게든 우파에게든 경제체제란 곧 자본주의를 일컫는 말이었다. 깁슨-그래함(Gibson-Graham)이 분명하게 지적했듯 주류 경제학자들뿐 아니라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에게도 경제적 분석의 대상은 곧 자본주의였고 이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경제의 유일한 그리고 본질적인 형식이었다는 것이다. 그렇다. 바로 이러한 자본중심적 경제일원론으로 인해 여성의 일상적 활동은 경제 언어에서 지워져버린 것이다.

이러한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처음으로 간파했던 것은 바로 사회주의 여성주의자 크리스틴 델피(Christine Delphy)였다. 델피는 논문 「주요한 적」(1980)에서 결혼 내에서 가사노동은 남편의 임금과 함께 가족 생존에 기여하는 중요한 요소인데도 불구하고 잉여가치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혹은 상품생산과 관계없다는 이유로 “비생산적”인 것으로 혹은 “가치가 없는 것으로” 취급되었다고 진단한다.(Christine Delphy, “The Main Enemy”, in Feminist Issues, Summer 1980, p. 26.) 가사 노동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 모두를 생산함에도 불구하고 가족 개개인의 고유한 필요를 만족시키는 개인적인 것으로만 여겨지기 때문에 그 노동에 대한 지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따라서 델피는 레오나드와 함께 저술한 1992년의 논문 「가족적 착취: 현대 서구 사회에서의 결혼에 대한 새로운 분석」에서 가내 생산을 하나의 독자적인 생산양식으로 이론화하고 이를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 모델로 제시함으로써 경제 일원주의에 도전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즉 델피는 “이중 체제론(dual systems theory)”으로 알려진 입장을 개진하면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이외에도 가부장적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가내 생산 양식(domestic mode of production)”(Christine Delphy and D. Leonard, “Familiar Exploitation: a new analysis of marriage”, in Contemporary Western Societies, Cambridge: Polity Press, 1992를 참고하시오.)이 있음을 분명히 했던 것이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가사노동은 단순히 자본주의적 노동자를 “재생산”하는 부차적인 체제가 아니라 독자적 관계 즉 가부장적 관계에 따르는 “생산” 양식이다. 이제 사회는 자본주의에 의해서만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적어도 두 가지의 경제적인 것에 영향을 받는 전체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델피의 이중 체제론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의 사례를 분석해 보자. 분명한 것은 조씨의 가정 내 노동을 순수 사적인 것 혹은 비경제적인 것으로 이해하는 방식이 여기서 폐기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조씨의 노동은 생산노동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것은 자본주의적 시장에서의 거래를 전제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것은 아니지만 엄연히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또 하나의 생산 활동이다. 조씨가 가족을 위해서 수행하는 가사노동은 사용가치를 생산하며, 아이를 돌봐주는 대가로 이웃의 아이들에게 수행하는 영어,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교환가치를 생산한다. 따라서 그녀는 가내 생산자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의식하는 한 자신의 노동이 착취될 때 저항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제 그녀는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나아가 자신의 잉여노동을 착취당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의 모순 때문인 것으로 파악하고 이 모순에 저항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중 체제론”은 여전히 문제점을 안고 있다. 우선 델피는 가부장적 생산관계와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사이에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 양자는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를 설명하지 못했다. 만약 델피가 자본주의를 여전히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고 있다면, 어떻게 가부장적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으로부터 자율적일 수 있는가? 어떻게 가내생산양식은 자본주의에 의한 식민화를 벗어날 수 있는가? 뿐만 아니라 델피는 경제 이원론의 언어를 끝까지 밀고 나가지 못한 것처럼 보인다. 가령 당시 자본중심적 경제학에 정향된 경제 일원론자들은 여전히 가내 생산양식을 자본 연관적 이론형식을 통해 설명할 것을 그녀에게 요구했는데 그러한 요구 앞에서 델피는 어려움을 가졌다. 예를 들어 그녀는 가내 생산양식 역시 자본의 생산양식과 마찬가지로 위기의 경향을 갖는 경제시스템으로 설명해야한다는 요구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즉 그녀는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이 있다는 생각에는 도달하였지만 이 다른 형식을 표현할 수 있는 적극적인 언어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비판가들의 반론에 효과적으로 대답할 수 없었다.

?

4.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의 소환

?

그렇다면 이제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자본주의적 경제형식과는 다른 경제형식들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이 형식들이 자본주의와는 다른 언어를 갖는다는 것을 분명히 해 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러한 경제형식들이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해 식민화되지 않을 수 있을 만큼의 내재적 힘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일상에서의 여성의 활동을 생산적 경제활동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만들어야하며 여성의 경제활동이 가지고 있는 생산적, 대안적 힘의 가능성을 제시해야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러한 가능성을 이론화할 것인가?

여기서 필자는 J. K. 깁슨-그래함(Gibson-Graham, 깁슨ㅡ그래함은 캐서린 깁슨(Katherin Gibson)과 줄리 그래함(Julie Graham)이 함께 만든 공동의 필명이다.)이 제안하는 새로운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깁슨-그래함은 그 누구보다도 경제일원론의 문제점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녀들은 자본주의를 유일한 경제형식으로 전제하는 정치경제학 이론들이 가정경제와 같은 자본주의와 다른 경제형식들을 이론의 전면에서 배제하고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였다. 남근중심적(phallocentric) 담론이 남근을 인간을 대표하는 유일한 기표로 간주하면서 남근과 다른 모든 것들을 타자로, 결핍으로 배제해왔듯이 말이다. 따라서 그녀들은 이제 타자로 배제되어왔던 여성의 관점에서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를 만들어내고자 한다. 그녀들은 새로운 정치경제학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이론화하고자 할 뿐 아니라 이러한 활동이 갖고 있는 긍정적 잠재력을 발굴하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의 이러한 작업은 델피의 이중 체제론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는 일에서부터 시작된다. 한 편으로 그녀들은 델피가 가내 생산양식과 같은 자본주의와는 다른 경제형식에 주목했다는 사실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그녀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델피가 또 다른 본질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지적한다. 델피의 모델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은 자본주의 혹은 가부장제라는 두 개의 체제로 환원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가령 자본주의 밖에 존재하는 한 여성은 가내 생산양식이라는 또 하나의 본질에 따라 파악된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이 보기에 여성들은 가족 관계 뿐 아니라 여러 가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관계들에 연루되어 있다. 여성들은 전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계 안에 있기도 하다. 이런 점에서 깁슨-그래함은 여성을 가부장적 관계 안에서 하나의 통일된 정체성을 갖는 존재로 보는 델피의 방식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여성주의가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여성은 통일체로서의 “대문자 여성(Woman)”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깁슨-그래함이 “여성”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하는지를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여성의 타자성은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이다. 즉 여성의 타자성은 항상 복수이다. 버틀러가 분명하게 주지시켰다시피, “여성”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수행성의 결과일 뿐이지 그 자체가 어떤 하나의 본질에 의해 정의될 수 있는 통일적 실체가 아니다. 이리가레가 여성을 “두 입술”로 비유했던 것도 여성이 단 하나의 매끈한 형태를 갖는 남근과는 다른, 그 자체의 내적 차이를 갖는 여성들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여성은 어떤 내용적 동일성을 갖는 하나의 타자가 아니라 타자들 그 자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여성주의적 관점은 단수로서의 여성을 넘어 다양한 타자들의 관점에서 기존의 이론을 재구성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깁슨-그래함은 복수적 타자의 관점을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핵심으로 삼고자 한다. 깁슨-그래함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여성을 가내 생산 양식과 같은 어떤 하나의 타자성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관련하여 다층적으로 분석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아래의 <표1>을 통해 그녀들이 제시하고 있는 다양한 경제형식들을 살펴보자(ibid. p. xiii. 이 표는 가로가 아니라, 세로줄 아래위로 읽는 것이다. 예컨대 비자본주의적 활동도 시장지향적일 수 있다.)

거래

노동

기업

시장

임금

자본주의

대안적 시장

공공재의 판매

윤리적 “공정무역” 시장

지역유통체계

대안 통화

지하시장

협동조합형 교환

물물교환

비공식시장

대안적 지급

자영업

협동조합

기식노동

호혜적 노동

현물지급

복지급여형 노동

?

?

대안적 자본주의 기업

국영기업

녹색자본가

사회적 책임 기업

비영리

?

?

?

?

비시장

가계 흐름

선물

토착적인 교환

국가 할당

국가 전유

이삭줍기

수렵, 어업, 채취

절도, 밀렵

미지급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

마을 노동

자원활동

자기재충전형 노동

노예노동

?

?

비자본주의적

공동체적

독립적

봉건적

노예

?

?

?

?

?

?-다음에 계속-

애인을 사랑하는가? yes도 no도 아닌 진동 상태! [철학자의 서재]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철학자의 서재]

 

정성훈 (서울시립대 도시인문학연구소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세대론도 멘토링도 힐링도 아닌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한 이후 21세기의 청춘이 처한 처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중년층 학자들의 술자리에선 요즘의 20대가 자기들의 청춘 시절보다 힘들게 사는가 아닌가, 희망이 있는가 없는가 등등의 주제로 격론이 벌어지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의 힘든 처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어주는 이들이 멘토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

나 역시 그런 술자리 논쟁에서 청춘의 편을 들어주는 편이고 철학이라는 힘든 길을 가려는 학생들에게 세태에 흔들리지 말라는 멘토링을 해주곤 한다. 하지만 그때마다 내게 떠오르는 두 가지 의문은 “내가 가르쳐온 20대를 과연 하나의 세대로 묶을 수 있는가?”와 “내가 저들의 처지와 다른 것은 무엇인가? 나의 조언은 내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가?”였다.

오늘날의 청춘의 삶에 대해 관심이 많지만 나는 왠지 그 멘토라는 사람들이 쓴 책들을 읽어보기는 싫었다. 그들이 아무리 따뜻한 시선을 가졌고 그들이 아무리 진보적이라 하더라도 이른바 성공한 사람 혹은 성숙한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성공과 성장을 강요받는 청춘에게 의도하지 않은 기죽이기 효과를 갖는 것 같았다.
 

▲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 ⓒ푸른숲


 
세대론이나 멘토들이 쓴 책들을 외면해오다가 뭔가 다른 느낌을 주는 것 같아서 구입한 책이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엄기호 지음, 푸른숲 펴냄)이다. 일단 저자 엄기호가 요즘 청춘들을 기죽이는 전설의 시대인 80년대 학번이 아니라 ‘낀 세대’라 불리는 90년대 학번이라는 점, 게다가 의사도 변호사도 교수도 아닌 박사과정 수료의 시간강사라는 점에 끌렸다. 수업 보고서를 통해 이 책을 함께 쓴 덕성여대와 연세대 원주캠퍼스의 학생들이 이 선생에게 기죽거나 혹은 선생을 과도하게 존경하거나 하지는 않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의 기대대로 저자는 ‘들어가는 글’에서부터 이 책이 세대론에 대한 책이 아니며, 20대에 관한(about) 책도, 20대에게(to) 쓰는 책도 아님을 밝힌다. 저자는 이 책이 “지난 2년간 대학에서 학생들이 어떤 언어로 세상을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 그들과 함께 나누었던 지적 대화의 기록”이라고, 학생들은 선생과 ‘with’의 관계에 있는 “시대에 대한 앎의 지적 파트너”라고 말한다(20쪽).

그렇다면 이 책은 혹시 요새 유행하는 대화를 통한 힐링을 목표로 하는 서적은 아닐까? 하지만 학생들의 글과 선생의 분석 혹은 비평이 이어지는 글들을 읽으면서, 나는 이 선생과의 대화를 통해 학생들의 마음이 크게 치유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잉여’라고 ‘한심하다’고 자조하는 그들의 태도는 별로 바뀌지 않는다. 선생도 이들에게 자기긍정을 요구하거나 잉여의 조건을 변혁하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역설

 
이 책에서 내가 주목한 것은 이 책을 함께 만든 지적 파트너들 사이의 거리, 불일치 등이 곳곳에서 드러난다는 것이며, 그것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선생의 시선을 역설에 이르게 한다. 선생은 중고등학교의 폭력과 억압을 부정적으로 보여준 후 “폭력적이지 않은 교육이 가능한가”라는 도발적인 질문을 던진다. 약력을 보면 그는 대안학교 선생도 했지만 “대안학교의 교육은 사랑이라는 주장에 학생들은 냉소하고 지겨워 한다”는 고백도 한다. 그리고 폭력적 교육과 비폭력적 교육의 구별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116~121쪽).

또한 그는 서사적 사랑을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찬양하면서도 동시에 그런 사랑을 할 수 없는 조건에 처해 있는 청춘을 위해 “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은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고 되묻는다(163쪽). 몸을 최고의 아이템으로 여기고 다이어트에 몰두하는 세태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서술하는 동시에 성적 상품화에 대한 인권 관점에서의 비판에 대해 “그들의 귀에는 참기 어려울 정도로 지겹고 고리타분한, 후지고 하나 마나한 말씀이 된 것뿐”이라고 냉소하기도 한다(185쪽). 그래서 책 제목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저자의 답은 ‘아니오’로도 읽을 수 있고 ‘예’로도 읽을 수 있다.

역설적 상태란 이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이 아니라는 것을 뜻하고 이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이것을 뜻하는 진동 상태이다. 사랑을 예로 들자면, 모든 파트너는 서로 사랑한다는 규정과 함께 더 이상 서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규정을 동시에 내릴 수 있다. 연애 기간이라 불리는 시간 동안 한시도 의심의 여지없이 열정을 불태운 커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럼에도 이 기간 내내 서로를 연인이라 부르는 것은 탈역설화를 위한 노력, 즉 ‘사랑하지 않는다’ 혹은 ‘헤어지자’라는 말을 되도록 내뱉지 않으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니클라스 루만에 따르면,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유가 엄청나게 높아진 시대인 ‘현대(modern)’에는 아무리 권위적인 규범이나 질서라 하더라도 결코 역설적 상태를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현대 사회에서 놀라울 정도로 견고한 질서 – 화폐경제, 법의 지배, 대의제 민주주의, 일반 교육 등등 – 가 유지되어온 이유는 진리, 권력, 화폐, 법, 인권 등의 가치가 탈역설화 메커니즘을 잘 발달시켜왔고 그것이 학문, 정치, 경제, 법 등 각 고유 영역에 따라 잘 분화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 저자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선생과 학생들의 글 속에서, 특히 각 장의 마지막에 선생이 던지는 의문을 읽으면서, 더 이상 탈역설화가 쉽지 않은 시대 상황을 읽어내었다. 민주주의의 정당성, 인권의 정당성, 가족의 소중함, 사랑의 숭고함 등이 전면적으로 부정되지는 않지만 의문에 처해지는 것, 돈과 사랑의 경계, 진리와 돈의 경계 등이 희미해져버리는 것 등이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청춘의 변화이다. 아니 세대론을 넘어서서 본다면 우리 시대의 변화이다. 사실 중년층이 청춘에 대해 비난하는 내용의 상당수는 고스란히 더 이상 20대의 자신처럼 살고 있지 않는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것들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를 부정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옛날로 돌아가자고 주장하거나 이것이야말로 대안이라고 큰 소리로 주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 변화를 어느 정도는 감수하는 태도 혹은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태도를 보여준다. 어쩌면 모호한 듯 보이는 이러한 태도가 우리 시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의 솔직한 태도일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내뱉은 정치적 주장이나 도덕적 판단에 대해 수시로 이차 관찰을 하면서 역설적 상태 속에서 진동하는 경우가 많으니 말이다.
 

현대성의 위기

 
현대 사회는 그 이전 시대의 사회들과 비교해 너무나 비개연적인 일들을 달성해내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평생 서로 사랑하며 살겠다고 맹세하는 일, 전혀 다른 수준의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부모로부터 격리되어 같은 종류의 학교에 다니면서 출신 성분을 알 수 없는 선생으로부터 함께 배우는 일, 출신 가문과 무관하게 학교를 통해 쌓은 경력에 기초해 조직에서 역할을 부여받는 일, 권력의 정점에 있는 자라도 진리의 영역이나 예술의 영역에서는 평범한 문외한으로 취급받는 일 등이 그러하다. 그런데 이 모든 일들은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가능성, 비판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인쇄 매체를 기반으로 달성된 것들이며, 그래서 쉽게 다시 역설에 처할 수 있다. 현대성은 그 현대성 자체를 가능하게 한 논리의 귀결로 위기에 이르게 된다.

사랑을 예로 이 위기를 짚어보자. 루만의 <열정으로서의 사랑>(권기돈 외 옮김, 새물결 펴냄)을 읽어보면, 사랑의 코드화의 출발점은 18세기 프랑스에서 여성들에게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자유가 부여되었을 때이다. 즉 두 파트너 모두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더 이상 덕(virtue)이나 아름다움이 사랑을 보장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오직 사랑만이 사랑을 가능하게 하고 ‘사랑한다’가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부정의 가능성을 열어놓았을 때, 현대적 연애가 성립한다. 그리고 사랑은 성애와 결혼을 함축하되 그것들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또한 사랑은 돈, 권력, 진리 등과 무관해짐으로써 독자적인 영역으로 자리 잡는다, 이런 부정의 가능성들 덕분에 엄기호가 “가장 강렬한 성장의 드라마”라고 말하는 사랑의 서사가 가능해진다. 고백하고 거절당하고 다시 도전하고 맺어지고 헤어지고 다시 만나고 등등이 이어질 수 있으며, 이 서사에서 사랑 바깥의 요인들은 원인으로 간주되어선 안 된다.

이렇듯 부정의 가능성 위에 성립했던 사랑은 이제 사랑 그 자체를 부정하는 도전에 처하게 된다. 사랑 혹은 친밀성이 어차피 거래라는 분석, 그런 거래를 주선하는 정보업체의 등장, 서사적으로 사랑할 수 없기에(결혼에 이르기 어렵기에) 즉각적 성애를 추구하는 경향, 자기서사가 불가능한 인격들의 등장 등이 그러하다. 임시적인 사랑은 왜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엄기호의 질문도 그런 도전의 하나이다.

그렇다면 이런 도전에 대응하는 태도에는 정답이 있는가? 이런 도전을 순수한 사랑의 훼손이라고 도덕의 타락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고리타분한 자, 낭만적 사랑의 환상에 매달리는 자, 영원한 사랑이라는 사기극으로 여성을 억압하는 자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반면에 이런 도전을 그대로 수용하는 자는 속물, 인격성의 포기 등이라는 비난을 받을 것이다. 두 극단 사이에서 뭔가 합리적인 대안을 제시하려는 노력도 할 수 있지만 그런 대안들 중 보편화 가능한 것은 별로 없다. 그래서 사랑이 거래라는 도전 앞에서, 임시적 사랑도 사랑이라는 도전 앞에서, 나는 ‘예’라고도 ‘아니오’라고도 답할 수 없는 역설에 처한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이 책을 현대의 역설 혹은 현대성의 위기의 징후로 읽는다면, 이 책은 요즘의 20대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랑의 서사를 추억으로 간직한 40대도 지금 사랑의 역설로 괴로워하며 살 수 있으며 임시적 사랑으로 서사적 사랑의 관념에 도전하며 살 수도 있다. 또한 퇴직당한 후 알바를 하며 살아가는 노인들은 이 책에 나오는 대학생들처럼 자신들을 ‘잉여’라고 부를지 모른다. 지그문트 바우만에 따르면, 견고한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액체 현대”는 이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 한국적 맥락에서는 87년에 성립된 현대를 위협하고 있다. 아주 쉽게 ‘탈현대’를 말하는 이들도 있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라는 물음 앞에서 역설에 처한다. 인권, 민주주의, 사랑, 일반 교육 같은 것들을 나는 고루하게 고수할 수도 없고 부정할 수도 없다. 그리고 요즘의 20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논평하는 중년층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당신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