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여성의 관점에서 차이의 경제와 대안도시를 생각한다[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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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재(서울시립대학교 도시인문학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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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오늘의 문예비평』 2012 여름 85호에 실었던 논문 「페미니즘 정치경제학의 새로운 가능성 탐색」의 제목을 변경하고 문장을 약간 다듬은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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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에 따르면 자본주의 경제는 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거래, 임금이 지불되는 노동, 잉여노동을 자본가가 취하는 자본주의적 기업에만 제한적으로 사용될 수 있는 제한적인 개념이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우리의 일상에서 수행되는 경제활동 중 하나일 뿐이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를 이렇게 제한적으로 규정하게 되면 우리는 자본주의 외부에 존재하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발견하게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순수 자본주의적인 사회에서 살고 있다고 착각하지만 사실상 우리 사회에는 수많은 대안적 시장이나 비시장적 거래가 존재하며, 대안적 지급이나 미지급으로 노동을 수행하는 경우도 많다. 대안적 기업이나 비자본주의적 기업 등과 같은 비자본주의적 기업들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아래 두 칸에 나열된 다양하고 풍부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보라. 깁슨-그래함에 의하면 시장거래가 아닌 윤리적 공정 거래나 협동조합 방식의 교환, 개인적 선물이나 국가적 배분과 같은 비-시장적 유통은 비자본주의적 경제이다. 화폐교환이나 임노동과 관계없는 품앗이나 자원봉사 혹은 대안적 지불 형태도 자본주의 경제를 벗어난 경제적 활동이다. 그리고 사회적 기업이나 공동체 사업 그리고 자영업 역시 생산된 잉여가치의 분배에 있어서 자본주의와는 다른 원칙을 갖는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기업이다. 이들은 자본주의적이라기보다 봉건적, 노예적, 독립적 혹은 공동체적 원리에 따라 작동하며 이 원리는 또한 성, 인종, 제도 여타의 규범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이지 않다고 해서 경제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경제형식들일 뿐이다,

깁슨-그래함의 모델에 따라 앞서 제시한 조씨와 같은 여성의 활동을 분석해 보면 그녀가 다층적인 차원에서 경제활동을 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삶은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들로 점철되어 있다. 봉건적 가족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녀의 가사노동, 친인척 돌보기는 비지불 노동이지만 사용가치를 생산한다. 그녀는 봉건적 가족 관계 내에서만 경제활동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는 공동체적 관계 안에서 학교에 봉사활동을 하며, 아이 돌봐준 이웃의 아이들에게 과외지도를 한다. 이러한 봉사활동, 품앗이, 호혜적 노동은 교환가치를 생산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다. 그녀는 사적인 관계 내에서 순수 비자본주의적인 경제활동만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녀가 일주일에 네 번 정도 하는 프랑스어 과외지도는 화폐를 통해 매개되는 임금노동이라는 점에서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적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노동이 순수 자본주의적인 것은 아니다. 그녀는 지하시장에서 노동하며 자영업자로서 자신의 잉여노동을 자신에게 배분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에도 연루되어 있다.

이로써 분명해 지는 것은 조씨가 경제와 분리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풍부한 경제적 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 활동은 한 가지 혹은 두 가지의 본질적 경제체제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경제형식들과 다층적으로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특히 그녀는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에 참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 풀어야할 문제는 그녀가 수행하는 경제적 활동이 어떻게 대안적 잠재성을 갖는가이다. 만약 우리가 기존의 맑스주의 정치경제학자들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를 강력한 경제형식으로, 비자본주의를 나약한 경제형식으로 간주한다면,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언젠가 자본주의에 의해 침투되고 식민화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깁슨-그래함은 어떤 전략에 따라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긍정적 가능성을 주장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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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적 차이의 담론과 중층결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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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http://left21.com/article/12757

깁슨-그래함이 사용하는 전략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녀들은 비자본주의뿐 아니라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함으로써 본질로서의 자본주의가 가졌던 막강한 힘을 탈각시킨다. 이것이 바로 본질주의에서 경제적 차이로의 전회이다. 다른 한 편으로 그녀들은 이러한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바탕으로 중층결정론을 주장한다. 다양한 경제 형식들 중 어떤 하나가 본질로 설정될 수 없으므로 이제 경제는 다양한 형식들이 상호교차하는 가운데 중층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우선 첫 번째의 전략부터 살펴보자. 앞서 설명했듯이 깁슨-그래함은 기존의 이론과 달리 우리 사회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으며 이것은 전체 경제형식의 50%이상에 달한다고 주장했다. 이것은 이미 자본주의가 지배적인 경제양식이라고 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그러나 깁슨-그래함은 이에서 머물지 않는다. 깁슨-그래함은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재소환하는 것을 넘어서 자본주의마저도 복수화시킨다. 그녀들은 여성주의적 관점을 한 발 더 밀고나가 여성 정체성이 다양하다면 남성 정체성 역시 다양하게 이해될 때 대칭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이 있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형식 역시 다양하다고 주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깁슨-그래함은 자본주의 역시 하나의 통일된 형태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논증한다. 자본주의는 하나의 형태학으로 파악될 수 있는 통일된 형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들에 따르면 실제로 우리가 전형적으로 자본주의적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금융부문도 전적으로 자본주의적이지 않다. 가령 개인투자관리사와 같은 자영업자는 자신의 잉여노동을 스스로 전유한다는 점에서 비자본주의적인 특성과 절합되어 있고, 자유로운 사업대출 분야의 성장은 많은 비자본주의적 기업 특히 자영업 활동의 신장에 기여했다. 그녀들에 따르면 주어진 정의를 매끈하게 따르는 그런 순수한 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생각보다 적다. 자본주의는 우리가 말해왔던 것처럼 매끈하거나 통일적이지 않다.

이렇게 자본주의마저 복수화하는 전략은 깁슨-그래함의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급진화시킨다. 이제 그녀들의 정치 경제학 내에서 모든 요소들을 관통하거나 지배하는 통일된 단일자로서의 본질은 없다. 알튀세르의 말처럼 모든 사건은 그 순간에 존재하는 모든 조건들에 의해 구성되는 것이지 하나의 본질에 의해 규정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깁슨-그래함의 두 번째 전략이다. 이 전략에 따르면 자본주의는 본질로서의 위상을 잃게 됨에 따라 그 강력한 힘도 잃게 된다. 그것은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괴물이 아니라 여러 가지 경제형식 중 하나일 뿐이다. 이로써 경제 영역은 다양한 경제 형식들이 절합하고 혼종되는 장소가 되며, 여기서 다양한 차이들의 성격과 방향을 총체적으로 규정하는 중심은 없다. 새로운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더 이상 강력하거나 통일적인 영웅 혹은 최후의 승리자가 아니다. 경제적 차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의 절합 속에서 끊임없이 변화해 온 하나의 경제형식일 뿐이다.

반대로 비자본주의는 더 이상 무력한 경제형식이 아니다. 깁슨-그래함에 따르면 비자본주의는 생각보다 우리의 일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고유의 힘을 통해 자본주의를 변형시키고 탈구시키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정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무력한 혹은 낡은 경제가 아니다. 오히려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은 우리가 자본주의라고 부르는 세계에서조차 자본주의적 경제형식 이상으로 존재해 왔으며, 유령처럼 늘 자본주의의 주변을 맴도는, 결코 제거되지 않는 힘들이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기존의 언어 속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겁을 먹거나 분노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늘 우리 곁에 있었던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키고 그 힘을 최대화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지금껏 말해왔던 방식의” 자본주의에 종말을 고하는 여성주의적 정치경제학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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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대안적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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깁슨-그래함의 차이의 경제학 속에서 조씨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은 사소하지 않다. 그녀의 가부장적, 공동체적 경제활동은 자본주의적 경제에 의해 먹혀들어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앞에 떨지 않아도 된다. 자본주의는 이제 괴물이 아니라 다양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과 절합되는 하나의 경제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깁슨-그래함의 청사진은 객관주의자들의 강한 저항에 부딪히곤 하였다. 정치경제학이 대상으로 해야 하는 것은 객관적 사실이며, 강력한 자본주의는 객관적 사실이라고 믿는 객관주의자들은 담론을 달리한다고 해서 객관적 세계가 변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반론에 대해 깁슨-그래함은 두 가지의 방식으로 대응한다. 한 편으로는 그녀들은 여전히 강력한 힘을 발휘하고 있는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의 사례들을 발굴하고자 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이러한 비자본주의적 경제형식들을 확장시키려는 실천을 통해 담론이 세계를 구성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가령 깁슨-그래함은 호주 탄광촌의 광부 부인들의 사례를 통해 여성들이 어떻게 가부장적 착취에 대응하면서 동시에 자본주의의 논리에 대항했는지를 보여주었다. 그 사례에 따르면 탄광회사는 광부들에게 더 많은 임금을 주는 조건으로 불규칙적인 교대근무의 조건을 제시했는데 광부의 부인들은 그러한 조건이 가내의 착취를 더욱 심화시킨다는 이유로 그 제안을 거절했다. 가내의 생산적 노동자로서 광부의 부인들은 자신의 봉건적 착취에 대항했을 뿐 아니라 그러한 힘을 바탕으로 자본주의적 논리의 확대에도 저항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밖에도 깁슨-그래함은 잉여의 공동 분배를 지향하는 협동조합 활동이나 상호 호혜적 노동이 만들어 내는 공동체 경제의 형성에도 주목하면서 이러한 경제형식들을 적극적으로 발전시킬 필요가 있음을 역설하였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에서 깁슨-그래함이 제시하는 사례들이 발견될 수 있는가? 오래 동안 우리는 사회의 전체 영역에 자본주의가 침투하고 있다는 각본에 매달려 왔다. 많은 비판이론들은 자본주의의 폐해를 보여주는 데 열중해왔다. 그러나 비판이 강하게 고조될수록 자본주의는 괴물과도 같은 형상을 드러냈으며 그 괴물은 어떤 저항에 의해서도 극복될 수 없는 것처럼 여겨졌다. 여성의 경제활동은 침범되고 강간될 수밖에 없는 나약한 것으로만 그려졌다는 것이다. 이제 관점을 바꾸어 깁슨-그래함의 언어 속에서 여성의 경제활동을 다시 보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가?

우리 역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이 가진 잠재력을 발굴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미국 쇠고기 수입반대를 위해 많은 여성들이 거리로 나섰던 사건을 생각해 보자. 그들은 가족들의 밥상을 위해 신자유주의적 논리의 확산에 저항했다. 그들의 저항은 가족 내에서의 그녀의 생산적 경제활동에 기반하여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여러 지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품앗이의 사례들도 주목할 만하다. 과천에서 만들어진 지역 공동체에서 수행되고 있는 대부분의 품앗이 활동은 여성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그녀들은 한 시간 단위로 자신의 노동을 책정하고 서로의 노동을 교환한다. 내 아이를 한 시간 맡기는 대신 머리 염색을 한 시간 해주거나 과외지도를 한 시간 해 주는 식이다. 여기서 노동의 가치는 자본주의적 시장의 가치체계에 따르지 않는다. 모든 노동은 공평하며 돈이 없어도 일상의 많은 생활이 가능하다.

이렇듯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채택하게 되면 여성의 경제활동은 나약하거나 사소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대안으로 나타난다. 앞서 제시했던 조씨의 경제활동은 봉건적 혹은 자본주의적 착취에 무력한 부정적 활동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잉태하는 공동체적 활동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신은 어떤 시각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 자본주의를 경제의 유일하고도 막강한 형식으로 보면서 여성의 비자본주의적 경제활동을 폄하할 것인가, 아니면 경제적 차이의 담론을 받아들이고 이와 함께 비자본주의적 경제의 실천을 의식적으로 감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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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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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2. 삶-정치의 대안들: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 연계하기, 투명성 요구하기, 인권주장하기/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한 경쟁으로 형성된 현재의 경제적 결과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과 맞물리는 산업혁명을 근간으로 한다. 산업혁명 전후의 자본가는 청교도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엮어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루터나 캘빈의 소명론을 직업 소명론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촉발시키는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출발점을 지닌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발상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신의 소명’으로서 직업 소명은 어떤 경제 활동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무조건 부를 축적하고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의 순수한 노동 행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 격차 문제는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이 만민 평등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부르짖은 개념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점을 상기해도 이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자유와 평등만을 부르짖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박애’라는 용어도 동시에 작동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들이 중인 계급들이었고, 그들은 중인 계급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라는 발상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동체를 배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통해 빈부 격차가 생겨도 ‘박애’를 통해 ‘공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이미 프랑스 혁명에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중인 계급들이 결국 초기 자본가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야기하지만, 그 근간을 만든 초기 자본가들이 ‘박애’를 인간다움의 기본 개념으로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자.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처럼, 삶의 공동체로서 경제 공동체의 가능성, 공존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규모 집단의 행위를 통해 보편화하자는 발상은 역사적 문맥을 지닌다.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세계경제는 공동체적 삶, 공존의 삶을 거부하지만, 그 출발점에서 원래는 공존의 삶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 측면들이 희석되고 망각된 채 여기까지 흘러왔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세계 경제의 방향은 그런 발상들과 배치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빈부 격차가 어떤 상황으로까지 이어질까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경제가 악화된다면, 민주주의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찍부터 이것을 통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그의 정언명령의 근간인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말이 현실에서 철저히 관철되기를 바랐던 철학자이다. 그런데 당시에 펼쳐지는 상인 자본주의를 목도하면서, 그의 정언명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칸트는, 비록 어떤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이어도, 경제적 빈곤이 심하면 동시에 인간다움이 파괴된다는 점도 간파한다. 민주적 요소가 파괴되어도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며, 민주적 요소를 실현해도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을 철저히 고민한다. 그래서 칸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정치 역할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칸트는 공존하는 경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사회로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는 왜 자신이 그런 대안을 설정하는지를 역사철학 관련 글들(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을 참고하라.)에서 보여준다. 경제를 끌고 나가는 개인 하나하나의 본성을 살펴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본성을 ‘공존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유도할 수는 있다. 물론 그 유도는 인간 이전에 이미 자연이 그렇게 인간을 조직했지만,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면 정치적 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연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고진이 칸트로부터 이어받아서 ‘세계공화국’으로 발전시킨다. 고진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위기 가운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이다. 판매자와 생산자가 일치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고진은, 이런 대안은 자본주의가 없는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태도로는 이런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션은 고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준 칸트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중세 교회가 지니는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근대 도시 국가에서는 ‘자유 도시’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파리 꼬뮌, 즉 꼬뮌 같은 정치 공동체 형태로 논의되다가, 근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직업단체로 변형된다. 칸트와 헤겔의 어소시에이션은 협동조합 내지 직업단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루동이나 마르크스에게서도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나타난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존 공동체’라는 발상을 가지고서 철학사를 거슬러가면, ‘어소시에이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경제와 정치의 연결’이며, 그런 연결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경제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며,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이렇듯 고진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소시에이션의 주도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민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규모 공동체이다.

현재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세계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이론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론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인터넷 세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사이버 공간은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경제 문제 속에서 생겨나는 반 민주주의적 행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들, 정치적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에서 야기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공존 공동체의 유형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에 적용하려고 했던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특수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80년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여파로 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다양하게 형성된다. 여러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때 형성된 많은 NGO들은 한국 사회의 삶을 공존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웃과 연계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실현하는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뒤 끝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후세들이 양산되었다. 사실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고, 공권력이 우리네 삶을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압박감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노동 구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은 널뛰기를 하며, 불행 지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쏟고, 경제에 더 매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곧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 정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 스스로 이미 반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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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철학자의 착상은?-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1. 세계 경제의 위기와 민주주의의 위기

 

 

21세기 우리네 한국인들의 삶을 떠올리면, 어떤 이미지, 어떤 단어가 금새 생각날까? 언론에서도 일상적 대화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경제 위기, 지하경제 활성화와 같은 말일 게다. 비록 현 정부가 지금은 크게 부각시키지는 않지만, 대선 기간에는 복지 정책을 강조하고 통합진보당이 이슈화한 ‘서민들을 위한 복지정책과 경제 활성화’를 부각시켰었다. 여야 모두가 그때는 복지 이슈를 선점하려고 했었음을 누구나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화두는 경제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 볼 수 있다. 도대체 경제가 얼마나 중요하기에? 경제가 우리의 삶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인가? 경제만 잘 되면 모든 일이 잘 된다고 할 수 있는가? 경제 문제 이외에 다른 중요한 문제가 없는가? 다른 문제가 해결되면, 경제 문제도 해결되고, 우리 모두가 잘 사는 사회가 될 수도 있는가?

질문을 던지는 바로 이 순간에도, 이번 강좌의 전체 제목이 떠오른다. 역시 경제이다! 공존 경제를 위하여! 물론 여기에서 강조점은 경제가 아니라 ‘공존 경제’이다. 그러므로 ‘공존’을 화두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언제부터인가 한국 사회는 경제가 모든 것의 척도가 되었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경제 문제에 집착해 왔다. IMF 때문이기도 하고, WTO 여파로 이어지는 신자유주의, 철저한 경제 개방인 FTA를 단행하는 가운데서 세계화를, 신자유주의를, FTA를, 중도 실용주의를 순차적으로 진행시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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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와중에 전 세계를 뒤흔드는 금융 사건을 겪게 되었으니, 바로 모기지론이다. 미국인도 어엿한 자기 소유의 집을 마련한다는 꿈을 실현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세일즈 맨의 죽음’이라는 소설 내지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자기 집을 마련하려고 은행 융자를 평생 동안 갚아 나간다. 그러나 마지막 빚을 갚기가 어려워지자, 자살을 하고 그 보험금으로 빚을 완전히 갚으면서 집은 그의 소유가 된다. 그 부인은 주인공의 무덤가에서 혼자 넋두리를 한다. ‘이제 빚을 다 갚아서 우리 집이 되었는데, 그 집에 살 사람이 없네!’

소설의 결말은 슬프지만, 현대인 모두가 일생을 그렇게 죽음으로 마감하지는 않는다. 집을 마련하기 위해 은행 융자를 받고, 몇 십 년에 걸쳐서 갚아나가는 방법으로 손쉽게 집을 마련하는 사람도 있다. 심지어 이것을 악용하여, 한 사람이 여러 채의 집을 구입하고, 집값이 오르면 다시 되팔아서 순식간에 부자가 되는 경우도 있다.

이런 일은 미국에서나 한국에서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금융권에 문제가 생기면서 융자 금리가 오르고, 집 한 채도 건지지 못하고 길거리로 나앉는 소박한 소비자들도 있다. 소위 한국에서 유행하는 깡통 전세라는 말도 이와 연관이 있다. 은행 융자를 악용하여 여러 채의 집을 장만하는 사람들도 모기지론 사태에서 파장을 일으켰다.

여기에서 여러 채의 집을 융자로 장만하는 사람들의 욕심을 비난할 생각은 없다. 모기지론을 언급한 것은 비난보다는 금융 상품의 허구성, 소위 버블(bubble), 거품이 어떻게 인간을 망치는가를 지적하고 싶어서이다.

모기지론과 관련하여, 융자를 받은 시민들이 이자를 끊임없이 갚아나가면 금융권에 돈이 쌓이게 된다. 그러면 금융권은 쌓인 돈을 활용하여 금융 상품을 만든다. 금융 상품을 파는 과정에서 은행들 간에, 국가와 국가들 간에 파생 상품이 생겨난다. 금융 상품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 기반이 된다. 그러므로 모기지론은 집장만을 위한 융자 차원에서 끝나지 않고, 금융 상품 내지 금융 파생 상품의 역학 고리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은행과 은행의 관계로, 은행과 타국가의 관계로, 국가와 국가의 관계로 전개되면서 전 세계 금융권에 영향을 미치고, 전 세계 경제 활동에 파급 효과를 낳는 시스템이다.

모기지론 때문에, 미국 금융권이 흔들렸고, 그래서 미국 경제에 악영향을 주었는데, 이것이 역학 구조로 작용하면서 한국에도 그 여파가 있었다. 오마바 집권 초기, 이명박 정권 초기에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알았다. 세계 경제가 흔들리고, 우리 네 삶은 자꾸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했다.

이 문제의 원인을 진단하고 해결책을 강구하는 과정에서, 미국 경제 이론가들은 서로 상반되는 지점을 보여준다. 미국에 만연해 있는 자유주의, 자유지상주의가 이런 문제를 야기했다고 하면서, 자유 규제, 금융 규제를 강화하라는 목소리가 한동안은 높았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미국의 기존 정조를 깨는 것이라서, 시장 구조뿐만 아니라 경제 구조를 포함하여 삶의 구조 모두가 궤도 전환을 해야 한다.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규제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여러 얘기들을 할 수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것은 금융 파생 상품 문제이다. 우리가 자본, 즉 돈을 가지고 공장을 건설하면, 거기에서 ‘유형의 상품’이 만들어진다. 이 상품이 어떤 유통 경로를 통해 팔리는지에 대해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벌어들이는 돈을 금융권에 투자하여 신용 상품이 만들어지면, 금융 파생 상품을 낳는데, 파생 상품은 또 다른 파생 상품을 낳는 과정으로 이어지며, 공장을 짓는 돈과 동일한 흐름이라 해도 이 과정을 파악하기는 힘들다. 금융 상품으로 전환된 돈의 흐름은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다. 돈이 돈을 낳는 일들이 일어나지만, 어디에서 어떻게 통제를 하여 원활한 순환 구조를 만들어내야 할지를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냥 앉아서도 돈이 돈을 벌어서,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부자가 되기도 했다가, 그냥 앉아서 수천 억 돈을 날리기도 한다. 공장을 지어서 물건을 만들면, 부도가 나도 그 물건은 남는다. 그러나 금융 상품은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경우가 흔하다.

이러한 경제 흐름, 자본 흐름, 금융 상품 흐름은 경제인들 스스로도 완벽하게 파악하기가 힘들기 때문에, 국가가 그 흐름을 규제하는 데도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가의 통제 아래 경제가 움직인다기보다는 경제가 국가로부터 독립하여 자체 연결고리를 만들어서 독자적으로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신자유주의, FTA, 등은 국가 간의 장벽을 약화시키다 못해, 국가 간의 경계를 해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국가를 넘나드는 경제 활동을 가능케 한다. 비록 그 사업체의 출발점은 뉴욕 내지 미국이라고 해도, 경계를 넘나드는 활동 때문에, 그 사업체의 소속이 어디인지를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생긴다. 전 세계에 문어발식으로 확장되는 경제는 정부가 통제하기에는 힘들 만큼 연결망을 가지고 있다. 전 세계에 걸친 네트워크를 형성함으로써, 특정 국가가 그 사업체를 완벽하게 통제하거나, 완벽하게 규제하거나, 완벽하게 미국 내 사업체로 흡수할 수 없는 상황이 펼쳐진다.

오늘날 경제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경제 권력이 국가 권력이 되고, 경제가 국가 권력을 능가한다고들 한다. 경제가 곧 국가라는 착각까지 일으킨다. 자본은 팽창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산업 혁명을 통해 한 나라 안에서 팽창을 시도하였다. 한 나라 안에서 할 수 있는 팽창이 한계에 도달하게 되자, 다른 나라로 팽창을 시도했고, 이것이 제국주의 행태를 낳았다. 그 팽창이 유형의 물건을 만들어내는 데 국한된다면 팽창은 한계에 부딪치게 된다. 그래서 고안해낸 것이 금융 상품이다. 무형의 상품으로서 금융 상품은 유형의 상품과 달리 파생 상품을 연속해서 만들어낼 가능성을 지닌다.

경제 팽창은 결과적으로 여러 문제를 야기했는데, 처음에는 ‘빈부 격차’로서 ‘빈익빈 부익부’가 대두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80 대 20 사회’가 한 시대를 풍미하는 말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88만원 세대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정규직이 점차 줄어들고, 비정규직이 활성화되더니, 이제 파트 타임, 단순 아르바이트가 일상 유행어가 되었다. 예전에는 ‘투잡’, ‘쓰리잡’이 익숙했는데, 이제 ‘알바천국’이라는 광고가 익숙하다.

우리네 경제적 삶의 구조는 계속 악화된다고 느끼는데, 각 국가들은, 각 국가의 정부들은 도대체 무얼 하고 있는가? 손을 놓고 있는가? 경제 문제를 회복하기 위해 어떤 정책들을 펼치고 있는가? 어떤 국가이든, 노력하지 않는 국가 내지 정부는 없다. 그럼에도 상황은 개선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이들은 이제 경제가 중심이며, 국가는 자립성이 없는 상황, 즉 국가가 경제에 예속되는 구조라고 말한다. 팽창하는 속성을 지니는 자본의 흐름에 종속되고, 자본을 도와주는 국가로서 역할을 바꾸게 될 것이라고도 한다.

많은 문제들이 있지만, 여기에서 두 가지를 생각해 보자. 경제 팽창 속에서 국가 역할이 약화되고 경제에 종속되는 행보를 계속할 것인가? 동등한 기회와 자유 경쟁을 인정하는 자유시장주의 구조에서 평등 또는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국가는 경제와 별개로 독립된 영역을 구축하고, 경제를 통제하고 재조정하는 역할을 하고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것이 경제에 의해 재편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럼에도 국가 역할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근에 가라타니 고진이 ‘자본=네이션=국가’라는 삼박자 도식(가라타니 고진의 [정치를 말한다], [세계공화국으로]와 같은 책들을 보라.)을 통해 국가는 자본보다 더 오래된 기원을 지니며, 자본으로부터 독립된 고유 기능이 있어 왔다고 강조했다. 한 나라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단지 경제 문제나 자본주의 팽창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간 이해관계가 우선적으로 작용하며, 국가의 이해관계가 경제 상황을 재편하는 모습도 지닌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국가와 경제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국가와 경제는 서로 독립된 항이면서 동시에 상호 작용하면서 변수들을 만들어낸다.

국가 대 국가의 관계에서 펼쳐지는 경제 문제를 타개하기 위해 정치 문제와 경제 문제를 같이 아우르는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 이 고민은 다음 질문과도 연결된다. 즉 자유시장주의에서 기회 균등, 평등, 민주주의는 제대로 실현되고 있는가?

‘빈익빈 부익부’나 ‘80 대 20 사회’ 같은 말이 풍미하는 상황에서 부를 획득한 사람들 모두가 기회가 불균등하게 주어진 상황에서 특혜를 받거나 불공정 거래를 주도했기 때문에, 거부가 된 것은 아니다. 자유시장주의가 주장하는 것 또한 기회는 균등하게 주어지고, 그 속에서 자유롭게 경쟁하는 가운데서 경쟁력을 갖춘 사람이 부를 획득한 것이라서, 현 경제적 상황이 기회 균등이나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단지 경쟁에서 이기거나 진 것이며, ‘무한경쟁’ 구조로 진행되면서 발생한 일들이라는 것이다. 무한경쟁 자체가, 아니면 팽창하는 자본의 속성 자체가 평등과 민주주의를 침해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설령 이 주장이 틀린 것은 아니라고 해도, 문제는 그런 구조에서는 ‘공존’이 힘들다는 것이다. 자본이 팽창하는 속성을 지닌다고 할 때, 자본이 만들어낸 상품은 – 유형의 상품이든, 무형의 금융 상품이든 – 그 상품을 사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현재 구조로 진행된다면 판매자는 있는데, 구매자는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한국 사회에서 신드롬을 일으킨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지속적으로 강조하듯이, 정당한 경쟁을 통해 부를 획득했어도, 자신이 속한 사회에 사회적 부담 내지 책임을 지려는 가치관이 필요하다. 자유지상주의 내지 자유시장주의를 택하는 미국 안에서도 분배정의를 위해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주장을 당연하게, 낯설지 않게 강조하는 내용이다.

세계경제의 위기 상황에서 가라타니 고진은 경제와 국가는 서로 독립된 항이며, 국가가 경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가 그런 역할을 하지 않고 있다면, 정치 차원에서 펼쳐지는 대안이 필요하다.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대안 개념으로, 고진은 어소시에이션 공동체를 주장한다.

마이클 샌들은 그런 것을 야기하는 도덕적 차원과 종교적 가치에 대한 주목을 요구한다.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적 사회에서도 공동체를 돌아볼 수 있는 가치의 중요성을 천명하고, 공동체를 위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덕 이론, 미덕의 중요성을 부각시킨다.

자유 경쟁, 무한 경쟁이 철저히 기회 균등, 개인의 능력 계발에 따른 공정 경쟁으로 나아간다고 해도, 악화일로에 있는 빈부 문제를 방치한다면, 인간다운 삶과 권리를 누릴 수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고, 궁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침해하게 될 것이다. 위기의식을 독려하면서 그들 나름대로 ‘공존’을 위한 대안들을 ‘공동체’ 안에서 마련하려고 한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