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9)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3)

횔더린의 디오티마 슈세테 곤타르트아리스토파네스와 소크라테스의 연설 사이에는 아가톤의 연설이 놓여 있다. 아가톤은 고르기아스의 수사학적 기법을 이용하여 에로스를 신들 가운데 가장 아름답고 선한 신으로, 게다가 정의와 절도, 용기와 지혜까지 겸비한 신으로 찬양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비아냥조의 몇 마디 형식적인 칭찬을 던진 후 곧바로 그의 연설을 논파해버린다. 아가톤이 향연을 주관한 당사자이고 향연 또한 그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것을 감안하면 아가톤의 연설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무시에 가까운 비판은 매우 도발적이다. 실재와 상관없이 미사여구로만 가득한 아가톤의 찬양은 이미 그 자체로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논박의 방식이 바로 아가톤이 그토록 따랐던 소피스트들의 방법이었다는 점은 그 모멸을 더욱 극대화한다. 이제 소크라테스가 연설할 차례이다. 그런데 여기서 약간 당혹스런 장면이 벌어진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이 직접 연설하는 형식이 아니라 다른 사람 그것도 디오티마(Diotima)라는 어떤 이방인 여성의 발언을 보고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티네이아의 디오티마가 역사상의 인물이었는지 아니면 완전히 플라톤의 창작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디오티마는 이미 불멸의 존재가 되었다. 19세기 초 독일의 유명한 서정시인 횔더린( Friedrich H?lderlin)은 자신의 애인 슈세테 곤타르트(Susette Gontardt)를 디오티마라고 부르고 휘페리온(같은 이름의 소설의 주인공)의 애인에게도 같은 이름을 붙여 주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지금 에로스에 대한 지고의 비밀을 알고 있는 한 명의 여성이 남성들만의 향연에 그것도 좌장격인 소크라테스를 이끄는 사람으로 등장한다는 기묘함에 직면해있다.

디오티마 상 Victor Wager 작

보통은 소크라테스가 대화 상대의 무지를 일깨워가며 대화를 이끌지만, 이곳에서는 소크라테스가 경외에 찬 눈으로 그녀의 가르침에 따라 참된 인식에로 이끌린다. 소크라테스가 아가톤의 주장을 비판한 것과 똑같이 디오티마는 에로스가 아름다움을 욕구하는 이상 결코 그 자체 아름다운 것일 수 없으며, 나아가 에로스는 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신과 달리 완전함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디오티마는 에로스를 신적인 것과 가사적인 것 사이의 중간적 존재, 즉 위대한 신령으로 말한다. 초기 그리스어에서 신(theos)과 신령(Daim?n)을 구별하기란 거의 불가능하지만 플라톤은 디오티마의 입을 통해 다이몬을 신과 인간들 사이를 이어주는 힘이자 서로 대립하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으로서 아주 명확하게 규정하고 있다. 차츰 밝혀지겠지만 디오티마가 말하는 에로스는 중간에서 결핍에 시달리며 어정쩡하게 고민하는 어떤 실체가 아니라 마치 연어가 끊임없이 몸부림치며 강을 차고 오르듯이 무지의 저항을 뚫고 아름다움과 좋은 것을 향해 치열하게 스스로의 본질을 구현하는 역동적인 힘이다. 존재론적으로 표현하자면 에로스는 존재와 무(無) 사이의 무규정적(apeiron) 현실에서 무로부터 연원하는 궤멸과 허무를 부정하고 끝없이 존재로 치닫는 치열한 자기보존적 운동성 즉 생명력인 것이다. 플라톤의 형이상학이 정지의 형이상학으로 단순하게 환원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에로스의 이러한 중간자적 성격은 <향연>에서 신화적인 우화로 표현된다. 신들이 아프로디테의 생일잔치에 모였을 때 그곳에는 늘 풍족함에 이르게 하는 계책을 가진 메티스의 아들 포로스(Poros:방도)도 있었다. 그런데 페니아(Penia:곤궁)가 그 잔치에 구걸을 하러 왔다가 넥타르를 많이 마셔 취해 있는 포로스를 발견하고, 아무런 대책 없이 살아가는 자신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기대에 포로스의 아이를 가지려고 그를 유혹하여 동침한다. 이 어울리지 않는 커플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가 에로스이다. 자식의 됨됨이는 부모의 됨됨이를 닮는다. 곤궁의 자식인 에로스는 늘 가난하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섬섬하고 아름다운 것과는 거리가 멀고 오히려 피부도 거칠고 맨발에 집도 없고 늘 땅바닥에서 문가와 길섶에서 하늘을 지붕 삼아 잠을 잔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또 아버지를 닮아서 늘 계책을 가지고 아름다운 것과 좋은 것을 추구하는 담차고 맹렬한 자이고 늘 뭔가 수를 짜내는 능란한 사냥꾼이자, 사리분별을 욕망하고 전 생애에 걸쳐 지혜를 사랑하는 마법사요 주술사요 소피스트(여기서는 말뜻 그대로 ‘지혜로운 자’의 뜻)이다.(203d) 이러한 에로스의 묘사에서 우리는 금방 아테네의 거친 현실에서 치열하게 구도자적인 삶을 산 소크라테스의 모습을 떠올린다.

플라톤은 이제 앎을 향한 에로스의 마지막 오름길에 앞서 중간 단계를 두고 있는데 그곳에서는 그리스인의 전통적 행복관이 생식의 비유를 통해 제시된다. 행복이란 좋은 것이 잠시가 아니라 늘 자신에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이와 같이 좋은 것들이 늘 자신에게 있기를 욕망한다. 그러나 가사적인 인간에게 좋은 것이 늘 함께 있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에로스는 생식(genesis)을 통해 자신과 같은 아이를 낳음으로써 불사적인 것이 되기를 욕망한다. 출산이야말로 가사자인 생물 안에 들어있는 불사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늘 아름답고 좋은 것을 출산하려고 하는 한, 생식은 아름다운 것들, 좋은 것들 사이에서의 생식이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이러한 육체적인 생식은 인간의 영혼에서 일어나는 정신적인 생식보다 훨씬 열등한 것이다. 아름다움을 자신 속에 갖추고 있는 사람은 아름다운 자와 접촉하여 그와 사귐으로써 자기가 오랫동안 임신(남녀 불문 좋은 생각을 품은 것을 임신으로 표현하고 있다)해 온 것들을 낳아(전수 또는 교육을 의미) 그의 영혼 가운데 아름다운 생각이 잉태하게 만든다. 이러한 임신(ky?sis)과 출산(tokos)의 지고의 성취는 바로 영적인 정신적인 에로스로부터 생긴다. 예술 영역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도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 뤼쿠르고스와 솔론은 불후의 이름을 남길 정도의 위대한 출산의 산 증인들이다.

이런 연후 디오티마는 엘레우시스의 종교적 입문과 상승을 연상시키는 비의적(秘儀的) 표현을 빌려 에로스가 추구하는 최고 목표(telos)에 이르는 단계적인 행로를 이야기한다. 마치 사다리를 오르는 듯 입문(myein)에서 최고비의(epoptika)에 이르는 이러한 에로스의 단계적 상승은 종종 <국가> 제7권의 동굴의 비유에서 혼의 등정(anodos)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단계적인 상승은 흥미롭게도 한 개인이 어떤 하나의 몸(soma)에 속한 아름다움에 이끌리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이내 그는 그처럼 개인적으로 파악된 아름다움이 모든 몸들에 속한 아름다움과 하나이자 같은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아름다운 몸들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 하나의 몸에 대한 열정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른다. 이에 따라 그는 몸에 있는 아름다움보다 영혼들에 있는 아름다움이 더 귀중하다고 여기게 되어 누군가 미미한 아름다움의 꽃을 갖고 있더라도 영혼이 훌륭하다면 그러한 젊은이들을 사랑하게 되고 나아가 몸보다는 사람들의 행실과 법들에 있는 아름다움을 바라보게 되며 다음으로 앎들의 아름다움을 볼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그의 오름길은 아름다움의 큰 바다로 향하게 되고 그것을 관조함으로써 아낌없이 지혜를 사랑하는 가운데 많은 아름답고 웅장한 이야기들과 사유들을 산출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거기서 힘을 얻고 자라나서 에로스 관련 일들에 대해 끝점에 도달하게 되면 갑자기 본성상 아름다운 어떤 놀라운 것을 직관하게 된다. 그것이 곧 앞서의 모든 노고들의 최종 목표로서 단일한 앎(epist?m?)이자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이다. 바로 이어지는 단일한 앎에 대한 플라톤의 부연설명은 플라톤의 대화편 중 이데아에 대한 가장 간명한 설명 중 하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그것은 “늘 있는 것이고, 생성되지도 소멸하지도 않고, 증가하지도 감소하지도 않는 것이고, 그래서 어떤 면에서 아름다운데 다른 면에서 추한 것도 아니고 어떤 것과의 관계에서는 아름다운 것인데 다른 것과의 관계에서는 추한 것도 아니며, 어떤 자들에게는 아름다운데 다른 자들에게는 추한 것이어서 여기서는 아름다운데 저기서는 추한, 그런 것도 아니다. 또한 그 아름다운 것은 그에게 어떤 얼굴이나 손이나 그 밖에 몸이 관여하는 그 어떤 것과 비슷한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고 어떤 이야기나 어떤 앎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며, 어디엔가 어떤 다른 것 안에, 이를테면 동물 안에 혹은 땅에 혹은 하늘에 혹은 다른 어떤 것 안에 있는 것으로 나타나지도 않을 것이다. 오히려 그것은 그것 자체가 그것 자체로 그것 자체만으로 늘 단일 형상으로 있는 것(monoeides aei on)이며, 다른 모든 아름다운 것들은 다음과 같은 어떤 방식 즉 다른 것들이 생성하거나 소멸할 때 바로 저것은 조금도 많아지거나 적어지지 않으며 아무 영향도 받지 않는 방식으로 바로 저것에 관여한다.”(211a-b) 이로써 우리는 마침내 이른바 플라톤이 말하는 그 절대적인 영역 이데아의 세계에까지 도달한 것이다. 끊임없는 생동력으로 무지와 타성의 저항을 뚫고 목표를 인지하고 그곳을 향해 무시무시한 힘으로 돌진해가는 에로스가 그 길을 이끈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플라톤에게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 곧 철학은 모름지기 에로스일 수밖에 없다. 에로스는 무지를 뚫고 모든 사물과 사태에 대한 전면적이고 총체적인 앎을 향해 스스로를 고양시켜 삶의 진정한 가치를 완성하는 가장 치열하고도 진지한 열정이자 모색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잠간 에로스에 대한 추가적인 이해를 위해 에로스에 관한 플라톤의 또 다른 대화편 <파이드로스>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다층구조로 이루어진 이 대화편의 상당 부분은 올바른 수사법에 관한 논의에 할애되어 있지만 그곳에는 비록 모티브는 상이하면서도 <향연>과 같이 에로스를 다루고 있는 우화가 포함되어 있다. 물론 그곳에서는 에로스가 무엇인가 신적인 것으로 나타나 있어 <향연>에서의 언급과 차이가 있긴 하지만 플라톤 자신 신화의 전승을 자유자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점에서 크게 주의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곳에는 두 개의 모티브가 그 우화를 결정하고 있다. 즉, 그 두 개의 모티브란 하나는 종류가 다른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이며 또 하나는 날개이다. 영혼은 이전에는 어떤 신을 수행하여 천체를 왕래하면서 이 천구 주위를 영원히 돌아가는 천체의 신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인간의 몸에 영혼이 들어섰음은 이미 영혼의 전락을 의미한다. 우리는 여기서 오르페우스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영혼이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어떤 길을 취하느냐에 따라 윤회 전생하는 영혼의 운명이 결정된다. <파이드로스>에서 영혼의 형태를 비유한 마차를 이끄는 두 마리 말은 이른바 ‘욕망(epithymia)’과 ‘튀모스’(thymos)이다. 튀모스는 여기서 “의지, 노력”이라고 번역할 수 있을 것이다. 충동적 욕망으로서 에피튀미아는 큰 동력이지만 혼자 내버려두면 스스로나 모두에게 위험이자 장해이다. 이 난폭하게 구는 말을 길들여 궤도를 걷게 하고 마차가 이 말에 이끌려 깊은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마부의 사명이다.(마부와 두 말은 <국가>편에서 그려지고 있는 영혼의 세부분 즉 이성(to logistikon), 기개(to thymoeides), 욕구(to epithymetikon)에 각각 상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능력에 따라 마부가 영원의 것에 대한 관조(the?rein)에 이르는 정도가 결정된다. 그런데 높은 곳으로 부양시키는 날개를 생겨나게 하고 그 힘을 좌우하는 것이 곧 에로스이고 그러한 에로스의 본질이 theia mania 즉 ‘신적인 광기’이다. ( <파이드로스> 256b)인간들에게 가장 좋은 것을 가져다주는 이 신적인 광기의 형태는 다종다양하다. 예언가나 비의적인 정화의식의 집행자도, 뮤즈 여신들의 총애를 받는 시인이나 가수도 이 신적인 광기로 가득 차 있다. 하지만 신적인 광기 중에서도 최고의 광기는 그 무엇보다도 영혼을 신적인 것에 대한 관조로 이끄는 힘, 영혼에 날개를 생겨나게 하는 광기 바로 에로스인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크세노폰도 한편의 <향연(symposion)>을 썼고 그 역시 소크라테스에게 에로스에 관한 연설을 하게하고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향연>은 플라톤의 <향연>보다 훨씬 뒤에 쓰여 졌음이 거의 확실하다.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플라톤과 크세노폰의 견해 차이는 끊임없이 반복 되는 학문적 논쟁거리 중 하나이지만, 일반적으로 플라톤에 비해 크세노폰의 견해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어왔다. 그런데 하르트무트 에릅세(Hartmut Erbse)가 발표한 연구는 우리가 그처럼 경솔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게 만든다. 크세노폰의 <향연>에 나타나는 소크라테스는 결연히 남성끼리의 육체관계를 비난하면서 에로스의 시종들(thias?tai) 중에서,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로부터 사랑받고 있는 니케라토스(Nikeratos)의 삶을 행복한 삶으로 칭송하고 있다. 이 책의 끝부분의 이야기는 더욱 시사적이다. 크세노폰은 어떤 향연에서 판토마임의 배우가 디오뉘소스와 아리아드네의 사랑을 매우 매력적이고도 선정적으로 연기하자 그 향연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향연이 끝나기가 무섭게 모두 서둘러 집으로 돌아갔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 공연에 자극받아 기혼자는 조금이라도 빨리 아내를 안고 싶어 했고 미혼의 젊은이들도 결혼하고픈 욕망에 휩싸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모두 동성 간의 소년사랑을 중심으로 정신적인 에로스가 강조되고 있는 플라톤의 <향연>이나 <파이드로스>와 매우 동떨어진 분위기를 자아낸다. 이것은 무슨 까닭일까. 크세노폰이 소크라테스를 소시민의 수준으로 까지 격하시켜 그를 소년사랑의 열광적인 비판자로 내세워 그로 하여금 부부사이 또는 이성간의 사랑을 칭송하게 한 것일까. 그렇지 않으면 위의 두 대화편이 담고 있는 ‘영혼을 이데아로 이끄는 에로스’는 플라톤이라는 대철학자의 완전히 독자적인 창조물일 뿐이고 크세노폰이 <향연>에서 그리는 소크라테스상이야말로 오히려 역사적 사실에 가깝고, 따라서 에릅세가 추측하듯이 크세노폰이 “플라톤에 의해서 왜곡된 스승 소크라테스의 상을 여기서 수정하기를 바란다는 것이 분명하다”고 말해야 할 것 인가? 이러한 물음에 확실하게 답을 하기는 매우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에릅세의 견해를 결코 과소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랑을 둘러싼 두 개의 대화편에서 정신적으로 고양된 에로스를 곧바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로 생각하는 것이나, 플라톤을 마치 소크라테스의 분신 같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만 묘사하는 단순 전달자로 치부해 버리는 것이나 모두 무리가 따른다. 물론 기계적인 소거법(Subtraktionsverfahren)으로 모든 것이 해결하는 것은 아니지만. 플라톤적인 에로스를 모두 플라톤에게 돌린다고 하면 에릅세가 추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상도 반드시 틀렸다고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경우이건 간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모두 비록 이성애와 동성애에 상관없이 정신적 사랑을 침이 마를 정도로 강조한 것은 진실이지만, 그렇다고 이성간의 육체적 사랑까지 기피했거나 혐오했다는 증거 또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아스파시아 집에서 알키비아데스를 끌어내는 소크라테스 Jean-L?on G?r?me 작 (1861)

우리는 앞서 고대 그리스의 소년사랑을 논의하면서 서로 모순되는 양극의 견해까지 확대하여 살핀 적이 있다. 그래서 이번에는 플라톤이 견지한 소년사랑에 대한 태도를 최대한 균형 있게 살펴 평가해보기로 하자. 관건이 되는 사항은 플라톤이 동성간의 정신적인 성격의 에로스로부터 관능적이고 육체적인 것에로의 일탈을 어느 정도 관용을 가지고 보았는가에 대한 평가일 것이다. 노년의 플라톤은 <법률>(636c. 835c, 842a)에서 동성 간의 성행위를 자연에 반하는 음란한 행위로 아주 명백한 어조로 비난하고 있다. <향연>에서는 비록 그 자신이 아닌 소크라테스와 관련한 언급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특히 마지막 부분에 가면 어느 정도 플라톤 나름의 견해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음을 알아차릴 수 있다. <향연>의 마지막 부분에 가면 술에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향연 자리에 나타난다. 처음에 그는 소크라테스가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소크라테스와 아가톤의 사이에 자리를 차지한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이내 소크라테스를 발견하고 움츠려 든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크라테스는 여전히 알키비아데스가 사랑하고 있는 동시에 영원한 스승이자 마음속의 가시처럼 두려워하는 남자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소크라테스에 대한 그의 연설에서는 그에 대한 사랑과 경탄이 가득 뿜어져 나온다. 이 연설은 에로스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설에 이어지는 것으로 스승 소크라테스의 에로스적 특징을 드러냄으로써 작품 전체의 클라이맥스를 형성하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보기 흉한 실레노스 조각상과의 놀랄만한 비교 – 실레노스 조각상의 겉은 볼품없지만 그 안쪽에는 황금 신상이 들어 있다-가 나타나 있는 곳도 이곳이다. 게다가 그곳에서 알키비아데스는 자신이 그에게 온몸으로 육체적인 사랑을 구했음에도 소크라테스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음을 고백하고 있다. 알키비아데스는 말하길 그 밤에 이 “참으로 신령스럽고 놀라운 이분에게 두 팔을 둘렀고 그렇게 온밤을 누워 있었네….그런데 이분은 내 꽃다운 청춘을 그토록 능가했고 무시했고 비웃었으며, 그것에 관한 한은 내가 뭔가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그것에 대해서조차 이분은 방자함을 부렸네…신들에게 맹세코 여신들에게 맹세코 나는 아버지나 형과 함께 잤던 때에 비해 전혀 별스럽지 않은 밤을 소크라테스 선생님과 더불어 보낸 상태에서 아침에 일어나게 되었다네”(219c,d) 이것은 크세노폰의 <향연>에서 남자끼리의 육체적인 사랑을 단호히 비난한 그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결코 다른 모습이 아니다. 이와 같은 알키비아데스의 연설은 플라톤적인 에로스의 영적 정신적인 성격을 드러내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 수가 있다. 물론 플라톤은 소년사랑과 관련하여 비록 전체 대화편을 통해 노년기의 작품 <법률>에서 보이는 정도까지의 엄격함을 드러내고 있지는 않지만 <파이드로스> 가운데 한 부분(256b,c)을 보면 소년사랑의 관능적 측면에 대한 그의 태도는 여전히 역사적 소크라테스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즉 그곳에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입을 통해 자기 자신을 억제하고 절도를 지켜 육체적 욕망을 이겨내는 것이 올림피아 레슬링 경기에서 승리하는 것 이상의 훌륭한 승리로 칭송하고 있다. 이미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눈에는 사회적으로 육체적 관계가 용인된 소년사랑에서 조차도 사랑하는 남자(erast?s)와 사랑받는 소년(er?menos)의 순수한 정신적인 관계만이 철학에 의해서 규정되는 생활에 어울리는 것이다.

라파엘이 그린부분화 .군복을 한 사람(왼쪽) 또는 소크라테스(오른쪽) 옆에 있는 젊은이(가운데)가 알키비아데스라고 하지만 이설도 많다.

 

(플라톤의 에로스(4) 다음에 계속)

 

 

 

 

‘양키들보다 상전들이 더 문제구나’ ? 끝없는 주한미군범죄에 대하여[썩은 뿌리 자르기]

진보성(대진대학교 강사)

“전대미문의 만행 – 오천년 문화민족으로서 처음 당하는 천인이 공노한 미군인의 조선부녀능욕사건”(「동아일보」, 47. 1. 11), “호남선차중에서 일어난 사건은 미국이 아모리 연합국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엄중한 항의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일 연합군의 조선주둔 목적이 조선 민주과업 완수지도에만 있을진대 질적으로 가장 우수한 소수의 자격자만 남겨놓고 그 외의 제 군인은 급속히 총 철퇴를 단행하라”(「경향신문」, 47. 1. 14)

1947년 1월 7일 호남선 열차 안에서 벌어진 미군의 부녀자 강간사건의 보도이다. 이 사건은 공식적으로 미군범죄가 언론에 구체적으로 보도된 첫 사례이다. 이 사건은 같은 해 2월 18일 서울 대법원법정에서 피해자들이 직접 증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증거불충분으로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결하였다.

이 최초의 판결 이후 6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한미군범죄에 대한 판결은 관대하다. 미군의 범죄는 대부분 대국민 강력 범죄이고 미군기지 부근 지역주민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주기 때문에 미군범죄에 대한 국민들의 시선은 민감하다. 그 동안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와 같은 단체의 지속적인 감시와 노력으로 미군과 미군범죄에 대한 국민 의식이 많이 성장했다. 그러나 성장한 국민 의식에 비해 한미 간 ‘SOFA : 주한미군지위협정’은 대미종속의 굴욕을 그대로 보여준다. 미군들이 안심하고(?) 범죄를 행하도록 방조하는 꼴이다.

1995년 일본 오키나와에서 12세 소녀가 주일미군 3명에게 윤간 당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오키나와 지역은 물론 일본 전역에서 대중들이 폭발했다. 결국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이 사과를 했고 SOFA 협의를 개선하여 ‘살인ㆍ강도ㆍ강간ㆍ방화ㆍ마약 등 중대 범죄를 저지른 미군에 대해 기소 전 미군이 일본 경찰에 신병 인도를 호의적으로 고려한다는 합의가 도출됐다. 그러나 현재 우리의 한미 SOFA 규정에 따르면 중범죄를 저지른 미군 피의자라 하더라도 검찰 기소 이후에 한국이 미군으로부터 신병을 인도받을 수 있다. 한국 경찰은 미군에 대한 구속수사를 선점하지 못 한다.

지난 5년간 1,463명의 미군 범죄자 가운데 SOFA가 규정하는 12대 중대 범죄에 속하는 살인, 강간, 강도 등의 흉악범이 101명에 달했으나 경찰이 구속수사 의견을 낸 것은 단 4명에 불과했다. 한국 경찰은 매번 주어져 있는 수사권조차 제대로 행사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얼마 전 동두천과 마포에서 야간에 주거침입 10대 소녀를 성폭행한 사건에 대해 김성환 외교통상부 장관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미 국무부 부장관과 차관보가 사과의 뜻을 표했고 미2사단장도 사과했다”며 “오키나와 사건과 이번 사건은 다르다. SOFA가 불평등 하다고 하지만 일본, 독일에 비해 절대 불평등 하지 않다”며 “이번 사건으로 SOFA 개정을 거론하기는 힘들다”고 답변했다.(「문화저널21」, 11. 11. 9) 이런 발언은 우리나라에서 장관직을 수행하는 자의 발언이 될 수 없다. 뭔가 정신이 온전한 상태인지 의심될 정도다.

2002년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후 한동안 ‘악법’의 개정을 촉구하는 요구가 있었지만 근본적인 개정은 이루어 지지 않고 있다. 동두천과 마포에서 발생한 10대 소녀 성폭행 사건으로 미군은 다시 병사들의 야간통행금지를 실시했으나 사실 미군들의 야간통행금지는 최초 9?11테러 이후 미군의 안전을 위한 조치였다. 이번 사례도 자군의 보호 차원에서 실시된 것이지 한국인의 안전과 인권에 대한 고려는 한 번도 없었다. 주둔군을 위한 정책만 있고 주둔지 주민의 안전과 인권은 무시했다.

주한미군문제는 언제나 우리 국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존재였지만 당국의 무관심?묵살 때문에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오른 지는 10년이 조금 넘는다. 그 동안 반공주의와 국가안보주의에 의해 주한미군 범죄에 대한 대책과 존립여부에 대한 문제제기는 금기시되었고 일종 성역화 되어 있었다. 웃기는 일이다. 친미=반공=반북=안보가 되고 반미=친공=종북좌파=국가전복세력이 된다. 이 논리가 곧 바뀔 수 있다는 여론이 10년 전 얘기였다. 하지만 광복절에 태극기 대신 성조기를 들고 흔드는 미국빠들이 여전히 등장하는 상황을 두고 볼 때 웃고 넘길 일 만은 아닌 것이다.

주한미군의 범죄는 지금까지 소수 문제 사병들의 잘못된 행동이라고 미군 당국과 한국 정부는 주장해 왔다. 매번 재발방지를 약속했지만 사건은 끊이지 않고 발생한다. 주한미군은 안전 대책으로 ‘버디 시스템’과 ‘컴벳 윙맨’과 같은 규정을 두는데 이는 외출할 때 미군 병사 혼자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규정이다. 그러나 오히려 역으로 미군 여럿이 함께 범죄를 저지르는 경우가 더 많다. 미군 범죄의 재발을 막기 위해 주한미군 당국에는 더 이상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애초부터 이런 기대는 하지 말았어야 한다.

주한미군이 미군범죄의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친미수구세력의 순진한 바램이다. 주한미군은 사실상 점령군이다. 점령군은 점령지 주민들의 안정과 평화, 행복에는 별 관심 없다. 얼마나 더 적은 비용과 행위로 자기들의 이익을 최대화하느냐가 초미의 관심사다. 1980년 5·18광주민주화운동 이후 미군의 점령군적 지위를 인식하면서 주한미군 철수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지만 우리 정부는 항상 미군이 한국에 주둔함으로서 국가안보가 확립되고 동북아 평화유지에 필수라는 주장을 반복한다.

하지만 MB의 말을 빌려, 이거 다~ 거짓말인거,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미국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실질적인 이유를 오도하는 것도 문제지만 국가의 이익을 위해 자국민의 희생을 감수하면서, 국민 개개인이 고통을 감내해야 안보가 지켜진다는 주장은 국가가 일방적으로 독점하는 안보주의의 한계이다. 오히려 일상을 살아가는 한국인들과 미군부대 주변 사람들에게 일상적 안보의 허점을 노출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과거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군대가 구원군이란 명목으로 조선에 들어왔을 때 명나라 군대의 모습도 지금 미군의 모습과 똑같이 닮아 있고 지금 정부의 대응과 과거 조정의 대응도 닮아있다. 전쟁 후 외상 스트레스에 의한 명군들의 횡포는 말도 못했다. 거주민들의 가옥을 차지하고 약탈과 부녀자 희롱은 물론이고 심지어 비협조적인 지역관료의 목을 끈으로 묶고 끌고 다니면서 폭행하여 목숨을 빼앗는 경우도 있었다. 군기해이로 인한 사건 뿐 아니라 명군의 군량 공급에 막대한 돈을 들이면서 조선민의 고통은 막심했다. 당시 명군 지휘부는 병사들의 작폐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비호하거나 문책하지 않았다. 조선 조정에서는 백성들의 탄원을 듣고도 명나라가 베푼 ‘재조지은(再造之恩)’에 감사하기에도 겨를이 없어야 할 처지에 “어느 벌레 같은 백성이 감히 이런 짓을 했느냐”고 대응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울 용산에는 미군부대가 주둔해 있었다. 용산 지역은 우리역사에서 외세가 침략한 흔적을 고스란히 안고 증언하는 땅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왜군이 지금의 효창원 부근에 보급기지를 설치하고 명나라 군대와 강화조약을 체결했으며 1882년 임오군란 때 청나라 군대가 용산에 주둔하였다. 1884년 청일전쟁 때는 일본 군대가 주둔하였다가 1885년 을미사변 때 민비 시해에 개입하였다. 또 일제는 1908년 조선군 사령부를 용산에 세워 동북아 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1945년 해방 이후부터 미군이 주둔했고 이제 다른 곳으로 이전하는 오늘의 상황에 이르고 있다.(「국민일보」, 04. 4. 22)

외세침탈의 역사를 겪으면서 동족은 외세가 돼버렸고 외세는 과거 존명(尊明) 사대주의를 뛰어넘어 항상 고마워하고 감사해야할 아버지(국부 이승만)의 아버지 나라쯤으로 여긴다. 과거 ‘재조지은’과 ‘자유주의의 은인’이라는 상징은 오버랩 된다. 이런 오버랩이 너무 남발되었기 때문인지, 우리는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그리고 국가주의적 안보유지라는 미명 아래에서 정작 미군의 범죄를 우리 현실에서 일상과는 아주 먼 얘기로 인식해 온 듯하다.

문제가 생길 때만 반짝 관심을 가지고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하지 못한다. 미군문제와 관련하여 항상 정치적 구호와 같은 큰 얘기만 한다. 그리고 작은 이야기, 실제 삶의 목소리는 일단 제쳐둔다. 「주한미군범죄에 대한 이해와 대책」에서 김혜순은 주한미군 관련지역 이외의 대다수 사람들에게 미군은 “군사적, 추상적으로만 존재해 온 듯하다.”고 말한다. 미군의 존재는 관련 연구자, 기지촌 경험자들, 활동가들에게만 존재한다. 사건이 발생하면 여론이 들끓다가 식으면서 구체적 미군의 존재는 다시 잊혀지고 미군철수논란, 남북문제 속에서 미군은 다시 군사적, 추상적 존재로만 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우리의 안보문제를 추상적으로 생각해 왔다. 한미동맹은 무엇을 위한 동맹이고 국가안보는 무엇을 위한 안보인지 근본적으로 생각해볼 필요도 없이 미군범죄 사안 자체는 한미 양국의 관계가 치우쳐 편향되었고 잘못되었다는 것을 자명하게 알려주는 사실이다. 2000년에 매향리 주민들이 미공군사격장 폐쇄를 주장하며, 초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한 정부에 대해 “대한민국 국민인 것이 부끄럽다”며 주민등록증을 반납하던 일을 상기해 보자. 국가가 주장하던 국가안보가 구체적인 안보대상을 모호하게 만들면서 자국민에게 오히려 피해와 고통을 준다면 그 안보는 허상이고 국가폭력이다. 허상에 충성하도록 국가가 폭력을 남용한다면 국민 역시 그 국가의 상황을 그대로 보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다.

85호 크레인 위의 외침과 집단적 책임의 문제[썩은 뿌리 자르기]

조현진(숭실대 강사)

독일 출신의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2차 세계대전 직후 열린 나찌 전범재판을 참관하고 난 후, 그 과정과 함께 전범재판에 대한 소회를 기록한 책인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펴냅니다. 평범한 가장이요 자상한 남편인 나찌의 간부들이 상명하달의 조직체계 안에서 어떻게 야만적인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는 이 책에서, 아렌트는 ‘집단적 책임’이라는 새로운 개념을 제시합니다. 원래 서양철학 전통에서 ‘책임’이란 철저히 개인적인 차원에서만 물을 수 있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어떤 행동에 대해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그 행동이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라는 동기의 확인이 필요한데, 집단적인 행위에 대해서는 그런 확인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집단의 규모가 커질수록 그러한 동기의 확인은 더욱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국가의 구성원이나 거대조직의 구성원 전체에게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합리할 뿐만 아니라 불공정한 것으로 간주됐던 것이지요.

그러나 아렌트 이후 이런 인식은 바뀌게 됩니다. 나찌의 유대인 학살이나 정신분열증환자 및 정신지체아에 대한 안락사는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이루어졌습니다. 그런 범죄행위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런 법안을 통과시키는 의원들을 국민들이 뽑지 않았다면 그러한 야만적인 학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처럼 야만적인 해악을 예방하는 어떤 일을 함께 할 수 있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에 대한 책임을 물을 때 비로소 집단적 책임 개념은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한진 중공업 경영진의 집단적 책임감의 실종

한진중공업 해고노동자이자 민주노총 지도위원인 김진숙 씨가 4인의 동료 노동자들과 함께 영도조선소의 85호 크레인 위에서 정리해고 철회를 요구하는 농성은 390일간 지속되었습니다. 회사 측은 수주경쟁력의 저하, 매출액의 현저한 감소, 경영실적 악화 등을 들어 정리해고의 불가피성을 역설하고 있지만, 회사 측이 정리해고 발표 다음날 대주주들에게 174억을 배당하고, 이사들의 연봉을 1억원씩 올리기로 결정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당시 상황이 회사 측이 내세운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또, 당시 경영상황이 긴박했다는 회사 측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해도, 그런 사실로부터 정리해고가 자동적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습니다. 경영진 역시 수주경쟁력의 저하와 같은 문제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한진중공업의 경영진들은 한진중공업 노동자들이 정리해고라는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리게 된 데 대해 집단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집단적 책임을 망각한 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전가하는 행위는 정당화될 수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노동없는 민주주의의 현실과 세대간 부정의에 대한 집단적 책임의식의 필요

그러나 경영진들의 이러한 집단적인 무책임은 보다 광범위한 집단적 무책임에서 비롯된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보다 광범위한 집단적 무책임이란 바로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현실에 대한 우리 모두의 집단적 무책임을 말합니다. 대한민국이 누리고 있는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라는 명예나 OECD 가입국이라는 지위는 다수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과 삶의 질 하락을 댓가로 한 것이었습니다. OECD 최장 노동시간(평균치보다 600시간 이상 차이)과 OECD 최하의 최저임금 수준이라는 통계자료는 이런 주장이 근거없는 것이 아님을 명백하게 보여줍니다. 하지만 이런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하기 위한 노동자들의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 조직율이나 단체교섭적용률은 OECD 가입 이후 꼴찌 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우리나라는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이중적인 노동통제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실시함으로써 OECD 가입국 가운데 가장 노사관계가 불공평한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 OECD에 가입한 지 15년이 지났지만 적어도 노동분야에 관한 한 민주화는 정체되거나 오히려 후퇴한 상태에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같은 기간 동안 이루어졌던 역동적인 정치 민주화 과정과 묘한 대비를 이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정치적 민주주주의와 노동의 민주주의 간의 이러한 불균형을 낳은 주원인 중 하나로 국민들의 반노동적 관점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러한 반노동적인 관점은 노동자의 노동조건 개선 요구를 이념이라는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반공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받은 것이지만, 반공이데올로기라는 요인과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노동자와 고용주간에 이해관계의 충돌이 발생할 때 고용주의 입장에서만 모든 것을 생각하고 해결하려는 관점이 많은 사람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발상이 두 가지 명백한 사실을 망각할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반노동적 관점은 노사관계가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망각할 때만 정당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본주의 경제에서 기업의 소유자는 생산과 투자에 대한 지휘권을 갖고, 이를 통해 국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노동자에게 사회적으로 중대한 권력을 행사합니다. 오늘날 마치 상식처럼 되어버린 ‘고용없는 성장’이라는 말은 아이러니하게도 정규직의 비정규직화 같은 생산에 대한 지휘권과 국내공장의 해외이전 같은 투자에 대한 지휘권이 국가 경제정책에 영향을 끼칠 정도로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반노동적 관점의 또 다른 자양분은 노동상품 가정입니다. 이는 노동자가 기업주에게 파는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우리가 사고 싶을 때 사고 또한 팔고 싶을 때 파는 여타의 상품과 다를 바 없다는 오해에서 비롯된 가정입니다. 이로 인해 불평등한 권력 관계로 인해 기업주에게 노동력을 팔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이루어지는 준강제적인 노동계약은 자발적인 계약으로 포장되며, 실업은 낮은 임금의 노동을 거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노동귀족’의 불평으로 폄하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경제 하에서는 심각한 수준의 실업이 발생되는 경향이 있다는 점에서, 이런 관점은 실업의 책임을 노동자들에게 일방적으로 전가하는 궤변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노동적 관점이 이처럼 기업 소유자가 생산과 투자에 대한 과도한 지휘권을 갖고 있다는 사실과, 노동자들이 불공정한 노동계약을 체결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망각할 때만 성립할 수 있다면, 또 이런 반노동적 관점이 노동의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주요인이라면, 노동의 민주주의를 위한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인식의 전환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식의 전환은 정리해고나 정규직의 비정규직화로 인해 일어나고 있고 또한 앞으로 예상되는 피해에 대해 우리가 집단적인 책임을 진다는 의미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88만원 세대보다도 더 열악한 조건에 처할지도 모를 후속 세대가 출현하는 것을 막는다는 의미 역시 갖고 있습니다. 미래 세대의 고용기회와 고용의 질을 희생시키면서 현재 세대의 이익을 얻으려는 시도는 어떤 의미로도 정당성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즘 헌법 119조 2항의 경제민주화 조항과 민주주의 관련 조항이 때아닌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경제민주화와 민주주의가 시대적 화두로 자리를 잡아 가고 있음을 방증한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비정규직과 정리해고라는 이중적인 불공정 노동의 족쇄가 작동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을 볼 때 노동없는 민주주의 문제만큼 시급한 경제 민주화의 과제는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85호 크레인 위의 고공농성은 일단락되었지만 너무나도 긴급한 시대적 과제의 해결을 여전히 우리 모두에게 촉구하고 있습니다.

– 가톨릭뉴스 <지금 여기에> 칼럼에 게재되었던 글임을 밝혀 둡니다. –

구보씨 뱀파이어를 만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 생각]

문성원(부산대)

구보씨는 비록 내세울 것 없는 철학자지만 그 나름의 줏대가 있어 세간의 유행이나 풍조 따위엔 쉽게 흔들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며 지낸다. 생각 없이 이리저리 휩쓸려 다니는 건 정말 철학자가 할 짓이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그렇다고 요즘 말하는 트렌드에 하릴없이 뒤지기만 할 순 없다. 세태에 휩쓸리지는 않아도 그 물결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무감해선 곤란한 까닭이다. 그래서 구보씨에게는 오늘날처럼 트렌드를 말하는 것이 트렌드가 되어버린 상황이 오히려 궁구의 대상이다.

다소 뜬금없이 들릴지 모르지만,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런 사태와 무관하지 않다. 하긴 요샌 뱀파이어도 트렌드의 하나가 되어버렸다. 혹자는 오늘날 뱀파이어 영화나 뱀파이어 드라마가 ‘뜨는’ 것과 세계적인 불황 사이에 연관성을 찾기도 한다. 불안한 시대일수록 그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초인간적인 영생의 힘을 갖춘 존재가 각광을 받는다는 것이다. 게다가 최근의 뱀파이어는 <트와일라잇>에서처럼 꽃미남으로도 등장하지 않는가.

하지만 철학자 구보씨가 이렇게 피상적인 연관만으로 뱀파이어에 눈을 돌릴 리는 없다.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주목한 건 꽃미남 뱀파이어나 검사 뱀파이어가 등장하기 전부터다. 그리고 그렇게 된 사정에는 이십세기 후반의 한 유명한 철학자가 관련되어 있다.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질 들뢰즈가 그 사람이다. 그렇다면 들뢰즈와 뱀파이어, 이 둘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다는 말인가? 혹 구보씨는 들뢰즈가 사실은 뱀파이어였다는 파격적이고 선정적인 주장을 하려는 것인가? 아니면 들뢰즈의 인상이 뱀파이어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는 점을 새삼스레 지적하려는 것인가?

 

그럴 리 없다. 철학자 구보씨는 그렇게 황당무계한 주장을 할 사람도, 또 겉보기의 유사성에 그렇게 쉽게 현혹될 사람도 아니다. 비록 얄팍함과 꼼수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도 구보씨는 절대 그럴 사람이 아니다. 구보씨가 들뢰즈와 뱀파이어를 관련짓는 것은 들뢰즈가 자신의 저서(정확히 말하면 가타리와 함께 쓴 저작들)에서 뱀파이어를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지, 세간에 횡행하는 거짓말과 속임수에 의해서가 아니다. 들뢰즈는 뱀파이어를 철학적 논의에 끼워 넣은 보기 드문 철학자고, 구보씨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는 후대(後代)의 성실한 철학자일 뿐이다.

그런데 무릇 성실함은 혼자 힘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뱀파이어와 들뢰즈가 구보씨와 엮이는 데는 페이스북으로 친구의 친구가 다시 친구가 되듯 매개 역할을 한 이들이 있었다. 사실 구보씨는 원래 뱀파이어나 들뢰즈에 별 관심이 없었고, 그닥 호의적이지도 않았다. 몇 년 전, K가 소주잔을 기울이며 카프카와 뱀파이어와 들뢰즈에 대해 열변을 토하는 걸 듣기 전까지는 그랬다. 그러니까 뱀파이어는 카프카와 들뢰즈와 K를 거치는 인연을 통해(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땅 속의 감자 줄기와 같은 리좀적 연결을 통해) 구보씨에게 이른 셈이다.

“카프카는 스물아홉에 펠리체를 처음 만났어. 친구 막스 브로트의 집에서 말이지. 그리고 그때부터 그녀에게 편지를 쓰기 시작한 거야. 거의 매일 같이. 그리고 매번 답장을 요구했지. 당시 편지는 카프카가 살아나가는 힘이었어.”

“대단하군. 굉장한 여성이었나 보지?”

“글쎄… 사람은 보기에 따라선 누구나 다 굉장하지 않아? 펠리체 바우어의 사진이 남아 있긴 한데, 그 사진을 보면 미인이라고 하긴 어려워. 들뢰즈는 카프카가 오히려 펠리체의 근육질 팔과 육식동물 같은 큰 이빨에 매혹되었다고 하지. 카프카는 채식주의자였는데 말이야.”

 

“들뢰즈라면, 철학자 들뢰즈 말이야?”

“맞아, 그 들뢰즈가 가타리와 함께 <카프카>라는 책을 썼잖아. 거기 나오는 얘기야.”

“어, 그래? 나도 그 책은 대충 봤는데, 그런 건 기억이 안 나.”

“니네 철학자들은 워낙 감성적인 디테일에 약하잖아. 하지만 나 같은 문학쟁이들한테는 그런 게 먼저 다가온다구. 매력이나 감흥은 논리 이전이고 또 논리 이상의 것이거든. 그런데 들뢰즈에게는 그런 게 있어. 하긴 들뢰즈는 이런 디테일을 흡혈이라는 개념과 연결시키지만 말이야.”

“흡혈이라구? 흡혈이 개념이야?”

K는 구보씨를 잠시 쳐다보다, 반쯤 남은 소주잔을 마저 들이켰다.

“때로는 음주도 개념인 거야. 그게 현실에 대한 어떤 관계를 얽어매준다면 말이야. 술 마신다는 건 현실을 대하고 현실과 접촉하는 한 방식이잖아. 그런 점에서 음주는 오히려 살아 있는 개념인 거지.”

“그래, 들뢰즈도 술에 대해 얘기하긴 하지. 정확히 말하면, 알콜 중독에 대해서… 근데, 그건 좋은 거라고 하긴 어려워… 그건 시간을 멈춰 자신을 딱딱한 껍질 안에 가두는 거고, 기껏 그 안에서 안온한 추억의 반복에 빠지는 것이거든. 들뢰즈 자신이 알콜 중독자였던 적이 있으니까 이런 상태를 그럴듯하게 표현하기도 했던 거지. 뭐, 그걸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몰라…하지만 흡혈이라…그게 어떻게 개념이 되지?”

“아니, 알콜 중독 말고 그냥 술 마시는 거 말야. 알콜 중독이야 일종의 도피지만, 일반적으로 술 마시는 건 그런 것만은 아니거든. 대개 우린 혼자 마시지 않고 이렇게 같이 마시잖아. 그건 세상을 담고 넘어서는 방편일 수 있어. 현실을 견디고 극복할 에너지를 주니까 말이야. 흡혈은 조금 더 처절하지. 에너지를 얻기 위한 공포가 더 커. 술 마시는 데도 두려움이 있잖아. 우리는 사실 크고 작은 두려움 때문에 술을 마신다구. 술과 술자리가 주는 쾌감은 확실히 두려움을 상쇄하는 효과가 있지.

그러나 흡혈은 극단적인 두려움을, 공포를 수반해. 사람들은 드라큘라나 뱀파이어를 공포스럽다고 여기지만, 실은 그런 존재가 세상에 있어서 공포스러워지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세상에 대해 공포심을 갖기 때문에 그런 존재가 있게 되는 거야. 그렇잖아? 이런 건 너희들이 말하는 이데올로기적 체험의 전형적인 효과거든. 아무튼 그래서 뱀파이어는 공포와 한 몸이야. 그들은 세상을 두려워하지. 빛을, 십자가를, 마늘을 두려워 해. 현재의 세상을 지배하는 질서를, 제도를, 처방을 두려워하는 거야. 그리고 그들은 항상 비루먹었지. 살찐 뱀파이어를 본 적이 있어? 살찐다는 건 흡혈의 개념에 어긋나는 거야. 흡혈은 공포의 산물이니까 말이야.”

“뭐, 정말 말이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흥미로운 면이 없진 않군. 문학적인 개념도 개념이니까 말이야. 게다가 들뢰즈가 이미지를 활용하는 데 능한 철학자라는 점도 쉽게 인정할 수 있어. 그런데 카프카는 뭘 두려워했다는 거야? 들뢰즈와 가타리는 카프카를 오이디푸스적으로 해석하는 데 반대하잖아. 하지만 실제로 카프카의 아버지가 억압적이었던 건 사실 아냐?”

“그건 그렇지. 하지만 펠리체와의 관계에서 카프카가 두려워 한 건 무엇보다 결혼이었을 거야. 그리고 어쩌면 육욕의 관계고. 카프카는 펠리체에게 천 통에 가까운 편지를 썼어. 그러나 정작 만난 건 몇 번 뿐이라구. 그리고 두 번이나 약혼을 했다가 파혼을 하거든. 나는 들뢰즈가 카프카의 편지를 흡혈과 관련지은 건 탁월하다고 생각해. 육식 동물에 대한 채식주의자의 흡혈. 이건 세상에 대한 카프카의 관계를 잘 형상화하고 있거든. 카프카는 세상의 살을 뜯어 삼킬 수가 없었던 거야. 그러기에는 이 현실이 너무 탐욕적이고 맹목적이며 공포스러웠던 거지. 그래서 그는 항상 출구를 꿈꾸면서 외설적 세상의 피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흡혈을 하는 방식을 택했던 셈이지.

너 혹시 우리가 어렸을 때 추송웅이 공연했던 <빨간 피터의 고백>이라는 연극을 기억해? 최근 홍상수의 <생활의 발견>에 나온 추상미가 그 딸이라구. 뭐, 몰라? 하여튼 너는 디테일에 문제가 있어. 어쨌든 그 <빨간 피터의 고백>의 원작이 카프카의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잖아. 거기서 카프카는 원숭이의 입을 빌어 말하지. 그 대산 알지? ‘저는 자유를 원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출구를 찾았을 뿐입니다.’ 카프카가 흡혈의 에너지로 연명하려 한 건 자기의 존재를 고수하기 위해서가 아니야. 들뢰즈 식으로 얘기하면 탈주하기 위해서라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레메디오스 바로) 물론 구보씨가 그 때 안주삼아 들었던 K의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 있는 인간이어서, 비록 술에는 취했어도 다른 사람의 견해에까지 쉽게 취하는 인물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맨 정신으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허다한 꼼수들이 판치는 세상에 산다고 해도, 구보씨는 절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더구나 K는 석 달이 멀다 하고 주종(酒種)과 화제와 애인을 바꾸는, 줏대 없는, 또는 줏대가 여럿인 친구가 아니던가.

그래도 그 이후로 구보씨가 뱀파이어에 관련된 사안을 그냥 흘려보지 않게 된 것은 사실이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두지 않았을 뱀파이어 영화도 기회가 닿으면 챙겨 보고, 자기도 모르게 흡혈이라는 틀로 세상사를 해석해 보다 혼자 멋쩍어 하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전에 보지 못했던 ‘디테일’이 눈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다. 무엇보다, 주변에 뱀파이어를 닮은 인간들이 의외로 많다는 점에 구보씨는 가끔 놀란다. 그들은 탐욕스런 현실에 대한 공포와 선망을 모순적으로 품고, 두려움이 배인 웃음을 때로 수줍게 흘리지만, 그 웃음 사이로 깊게 감춰진 갈구(渴求)의 송곳니를 일순 번뜩이기도 하는 것이다.

게다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뱀파이어적 현상이 증식하는 방식이다. 사실 이것이 뱀파이어와 트렌드 사이의 중요한 관계다. 뱀파이어는 자연적이거나 계통적으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라 전염에 의해 늘어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점을 <천 개의 고원>이라는 책에서도 지적하고 있다.) 뱀파이어는 부모가 뱀파이어라서 뱀파이어인 것이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존재를 수직적으로 긍정하지 못하는 까닭에 자식을 낳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를 절멸시킬 수 없는 흡혈의 욕망은 수평적으로 번져나간다. 뱀파이어는 생식세포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신경세포의 혈류를 타고 확산된다. 이들의 번식은 신경을 급속히 외장(外藏)하고 있는 오늘날의 문명을 배양액으로 삼는다.

고전적으로는 뱀파이어에게 물리면 뱀파이어가 된다. 오늘날 뱀파이어의 이빨은 기술적으로 세련되어서, 사람들의 눈망울이 공포와 욕망으로 번뜩이는 순간 미세한 빨대처럼 그들의 목덜미에 파고든다. 인터넷은 그 좋은 매개체다. 카프카가 오늘에 살고 있다면, 그는 자못 심각한 <나꼼수>와 같은 이-메일을 매일 밤 수많은 펠리체의 목덜미에 박아 넣고 있을지 모른다. K, 그도 위험하다. 그는 능히 뱀파이어의 그런 방식에 전염됐음직한 인물이다. 그러나 구보씨는 다르다. 구보씨는 나름 줏대가 있는 철학자라서, 결코 그런 일에 휩쓸릴 사람이 아닌 것이다. 알겠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 절대 아니다.

진실을 말하고, 자유를 얻다-영화 ‘헬프’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조주영(서울시립대학교 철학과 박사 수료)

그런 때가 있다. 잠은 벌써 깼는데 일어나기가 너무 싫어서 이불 속에서 꼼지락대다 해가 중천일 즈음, ‘그래도 하루를 이렇게 보내면 안 되지!’ 하는 생각에 슬금슬금 일어나면서 속으로 걱정한다. 반나절 밖에 남지 않은 시간동안 뭐부터 해야 하나, 할 일은 많은데 왜 이렇게 아무 것도 하기 싫은 걸까. 오늘 하루도 그냥 이렇게 흘려보내면 안 되는데. 공부는 해서 뭐하나. 남 줄 것도 아닌데. 아, 아니다. 남 주려고 공부하는 거였지. 그래도 하면 뭐하나. 글 좀 끄적거린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결국 나는 왜 이러고 사나 하는 생각에 다달아 나오는 건 한숨뿐인, 그런. 요즘이 딱 그런 시기인 것 같다. 공부는 안 되고, 안 되니까 하기 싫고, 하기 싫으니까 잡생각만 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도 아니야, 그렇다고 연애를 하기를 하나, 모아둔 돈이 있기를 하나, 아~ 인생 참 꿀꿀하다, 정말.

– <헬프>, 누구도 묻지 않던 질문을 제기하다-

때는 1960년대. 노예제도는 철폐되었지만 인종차별이 여전히 심했던 미국 미시시피 주 잭슨 마을이 이 영화의 배경이다. 스키터는 대학을 갓 졸업하고 고향에 돌아와 신문사에 들어간다. 장차 작가나 저널리스트가 되는 것이 꿈인 그녀에게 주어진 첫 번째 일은 바로 일간지에 실릴 칼럼을 쓰는 것! 칼럼의 주제는 양파 다듬을 때 눈물이 안 나는 방법이랄지, 와이셔츠 깃을 하얗고 빳빳하게 다릴 수 있는 방법 등 온갖 집안일의 팁을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집안일이라고는 해본 적 없는 이 백인 아가씨가 그 방법을 알 리 없고, 해서 스키터는 친구네 집에서 일하는 흑인 가정부 에이블린에게 도움을 받기로 한다.

힐리(브라이스 달라스 하워드 역)는 가정부와 스스럼없이 지내는 스키터가 못마땅하다. 가정부는 꼭 필요한 존재이기는 하지만, 힐리는 가정부와 같은 화장실을 쓰거나 같은 식기를 쓰거나 같은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수는 없다. “그들과 같은 화장실을 쓸 수는 없어. 흑인들한테는 병균이 있대. 내 아이에게 병균이 옮으면 안 되잖아? 내 아이의 건강은 내가 지키겠어!”

가정부한테 자신의 아이를 돌보게 하고, 가정부가 해 주는 음식을 먹고, 가정부가 청소해주는 집에 살면서 화장실은 같이 쓸 수 없다니!

“그렇게 하는 게 그들에게도 좋을 거야. 개인 화장실을 갖게 되니 좋지요, 에이블린?”

스키터 역시 흑인 가정부의 손에 자랐다. 그런데 고향에 돌아왔을 때, 자신을 키워 준 가정부는 이미 해고된 후였다. 자신에게 가장 친밀한 존재였는데, 한 마디 말도 없이 해고해버리다니! “화장실을 따로 쓰게 하는 법안” 제출에 여념이 없는 힐리도, 긴 세월 함께 해 온 가정부를 단번에 해고해버린 어머니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했던 스키터는 흑인 가정부의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다. 바로 그들의 입장에서!

스키터는 어느 누구도, 당사자들조차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삶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에이블린,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당신의 삶은 어땠나요? 처음부터 가정부가 되리란 걸 알고 있었나요? 다른 삶을 꿈꾸었던 적은 없나요? 당신의 아이 대신 백인의 아이를 키우는 심정은 어떤가요?”

처음부터 가정부로 살게 될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머니도 가정부였고, 할머니는 노예였다. 다른 삶은 생각해보기 힘들었다. 아들이 하나 있었다.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어느 날 높은 곳에서 떨어졌다. 그 위를 트럭이 밟고 지나갔다고 했다. 백인들은 다친 아들을 가축처럼 트럭에 실어 흑인들만 다니는 병원 문 앞에 던져놓고 경적만 한 번 울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병원에서도 손 쓸 방도가 없어 집으로 돌려보냈고 아들은 내 눈 앞에서 죽었다.

책을 쓰는 일이 스키터에게는 처음에는 단순한 호기심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혹은 왠지 모를 미안한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에이블린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그 일은 꼭 해야만 하는 어떤 일이 되어버렸다. 에이블린에게도 스키터의 제안이 처음에는 탐탁치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느 때처럼 길을 가다가 백인이 쏜 총에 맞아 죽게 된다 해도 이상할 게 없던 시절이었다. 백인과 어울렸다는 이유만으로도 어떤 일을 당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되면서 책을 쓰는 일은 자신과 아들의 삶을 세상에 알리는 일이 되었다. 나는 이렇게 살아왔노라고, 여기 이렇게 살다 죽은 생명도 있노라고.

잭슨 마을의 가정부들 사이에 스키터와 에이블린이 하는 일이 은밀히 알려지고, 그들의 작업에 참여하고자 하는 흑인 가정부들이 하나 둘 늘어간다. 그렇게 책은 출판되었지만 마을의 문제는 여전하다. 흑인 여성들은 여전히 백인 가정의 가정부로 일하고, 그들에 대한 차별도 여전하다. 스키터의 남자친구는 괜한 문제를 건드렸다며 화를 낸다.

“아무도 그들의 일에 관심 갖지 않아! 지금 이대로 좋은데 왜 문제를 만들려고 해?!”

하지만 스키터는 안다. 드러나지 않았을 뿐,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그들 역시 지금의 삶에 만족 할 것이라는 건 우리 생각일 뿐이다.

-공감의 힘-

스키터가 책을 쓸 수 있었던 건 그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깊은 공감으로부터 우러나온 진심이 흑인 가정부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 줄 용기를 갖게 만든 것이다.

특히 기억에 남는 장면이 있다. 하나는 백인 고용주 셀리아(제시카 차스테인 역)와 흑인 가정부 미니(옥타비아 스펜서)의 관계가 점차 변화해 나간 것, 다른 하나는 스키터의 어머니가 스키터에게 가정부를 해고하던 날 있었던 일을 들려주는 장면이었다.

미니는 힐리의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지만, 집안에 있는 화장실을 썼다는 이유로 해고되었다. 힐리는 마을 사람들에게 미니가 도둑질을 해서 해고한 것이라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미니는 한동안 일을 하지 못하게 된다. 일을 하지 못하는 동안 미니는 집에서 남편의 폭력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러던 중 에이블린의 소개로 마을 외곽에 있는 세일라의 집에서 일하게 된다. 세일라는 마을 여자들에게 따돌림을 받아 미니에 대한 소문을 듣지 못한 것이다. 힐리에게 호되게 당한 경험이 있는 미니는 백인 여자들과 거리를 두기로 결심하고 세일라에게 거리를 두려 하지만, 그녀가 임신한 아이를 유산하고 괴로워 할 때 그 곁을 지켜주며 마음을 열게 된다. 세일라 역시 미니에게 위로를 받으며 그녀에게 의지하게 되고, 미니가 남편에게 맞아 눈에 상처가 난 걸 보고는 “당신은 맞서 싸울 힘이 있는 사람인데 왜 맞고만 있나요? 나라면 후라이팬으로 뒤통수를 날려버리겠어요.”라며 위로해준다. 용기를 얻은 미니는 결국 아이들을 데리고 집을 나온다.

스키터의 어머니도 가정부와 사이가 좋았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손님들이 있을 때 가정부의 딸이 어머니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손님들은 흑인 가정부의 딸이 백인 주인집의 거실에 들어오는 게 못마땅했는지, 스키터의 어머니에게 여자를 당장 내쫓고 가정부도 해고해야 한다고 말한다. 눈치를 보던 스키터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가정부를 해고한다.

진실에 눈뜨게 하는 관계가 있는가 하면, 진실에 눈멀게 하는 관계가 있다.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던 미니는 셀리아와의 관계에서 용기를 얻어 남편을 떠날 수 있었고, 아이를 잃고 우울증에 시달리던 셀리아는 미니와의 관계를 통해 우울증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어떤 관계는 한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킨다. 반면에 스키터의 어머니는 집에 왔던 손님들보다도 가정부와, 그리고 그녀의 딸과 더 친밀한 관계였음에도 손님들의 눈 밖에 나는 것이 두려워 자신과 가정부와의 관계가 어떠했는지를 밝히는 대신 가정부를 해고하는 쪽을 택한다. 어떤 관계는 한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은 어떤 관계일까? 삶을 변화시킬 힘을 주는 관계일까 상처를 주는 관계일까?

영화의 마지막에 에이블린은 이렇게 말했다. “누가 내 삶에 대해 묻기 전에는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내 삶을 뒤돌아보면서 내가 누구인지 알게 됐고, 내가 누구인지 알고 난 후 이웃들을 더 잘 보살필 수 있게 되었다. 진실을 말한 뒤 자유를 얻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다른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었으며, 지금도 있고, 앞으로도 있을 것이다. ‘공부는 해서 뭐하나. 이까짓 글 좀 끄적거린다고 세상이 달라지나.’ 하는 한탄은 이제 그만 해야겠다. 이 여성들이 보여 준 연대는 정말 소소한 일상적인 것―화장실 쓰는 문제―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지 않은가? 내가 감지하고 있지 못할 뿐이지, 변화는 이미 시작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한탄은 이제 접고, 진실에 눈멀게 하는 관계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 나로 인해 관계들이 잘못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봐야겠다. 그리고 나의 글쓰기가 세상을 바꾸는 작은 첫걸음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련다.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 [청춘의 서재]

박민철(건국대학교 강사)

개인적으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 3세와 몇 일간 함께 할 기회가 있었다. 그때 나는 재일조선인을 나와는 조금 다른 삶을 사는 ‘같은 민족의 동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여러 이야기 끝에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 서경식의 책을 통해 이 질문이 무지했음을, 아니 참으로 무례했음을 깨달았다.

“옛날에 탄광의 갱부들은 갱내 일산화탄소 농도를 알기 위해서 카나리아 새장을 들고 갱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카나리아는 사람보다 먼저 고통을 느끼고 죽음으로써 위험을 알린다. 식민지배의 역사 때문에 일본 사회에 태어난 재일조선인은 말하자면 ‘탄광의 카나리아’와도 같다. 위기에 처했을 때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고 경고하는 역할을 역사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다. 비유컨대 나의 저술은 질식해가는 카나리아의 비명과도 같은 것이다.” -서문에서-

서경식의 『난민과 국민 사이 ?재일조선인 서경식의 사유와 성찰-』은 그의 소개를 빌리자면 재일조선인론, 일본의 역사인식문제, 국가와 민족론 등에 대한, 한국인들이 읽었으면 싶은 평론 형식의 글을 모은 책이다. 서경식은 1951년 일본 쿄토시에서 태어나서 그곳에서 자라온, 자신의 규정대로 하면 ‘재일조선인 2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자신의 입장을 카나리아에 비유하며 재일조선인의 체험적 고통과 일본사회의 우경화에 대한 경고의 비명을 지르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경고는 공격적이거나 선동적이지 않다. 오히려 타자에 대한 동정과 공감, 성실한 내부 성찰과 자기비판을 뿌리로 삼아 진지하고 담담한 언어로 표현한다. 그래서 따뜻하다. 그리고 한편으로 카나리아의 비명처럼 애절하다. 그의 글에서 느껴진 깊은 아픔과 좌절에 비하면 당시의 내 질문은 진정 무례했다. 이 책에는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가 펼쳐져 있다. 그 중 두 편의 짤막한 글을 소개하면서,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재일조선인인 그에게 그리고 스스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다.

–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

이 책에서는 ‘재일조선인’이 경험한 민족적 차별, 생생한 억압과 핍박, 처참한 아픔 등이 ‘이야기’되고 있다. 담담하게 고백하듯 서술된 서경식의 글은, 말과 글로는 설명될 수 없는 어떤 감정을 읽는 이로 하여금 가지게 만든다. 또한 우리로 하여금 재일조선인이 겪었던 아픔과 고통에 대한 깊은 공감과 더불어, 그들의 아픔을 잊고 있었다는 반성을 생겨나게 만든다. 어쩌면 그도 동일하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철저하게 겪었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조선에서는 19세기 말의 침략과 식민지배의 역사, 이어서 남북의 분단과 대립, 그리고 냉전의 와중에 디아스포라가 생겨났고 식민지배의 직접적 산물로서 재일조선인이 ‘반난민’의 상태로 살고 있습니다.”

서경식은 재일조선인을 ‘일제 식민지배의 역사적 결과로 구종주국인 일본에 거주하게 된 조선인과 그 자손’이라 규정한다. 하지만 뒤이어 그는 이 단순한 몇 마디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는 재일조선인의 규정을 개인적인 가족사를 통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일본의 패망 후 외국인등록령(조선인을 외국인으로 간주)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조선인의 일본국적 상실) 등과 함께 ‘조선’의 국적을 가지게 된 재일조선인의 국적취득 과정이 있었다. 당시 스스로를 국민으로서 귀속시킬 국가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들은 ‘조선’이라는 민족적 태생을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자신들이 귀속될 수 있는 국가, 즉 조선이 존재하지 않았던 재일조선인은 곧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로부터 내몰릴 위협에 시달리는’ 난민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들은 취업과 같은 사회 여러 부문에서 차별을 겪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편 여러 설문조사를 통해 재일조선인의 일반적인 경향은 모국, 조국에 대한에 대한 애착이 희박해지고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이 널리 공유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서경식은 피차별자가 피차별의 체험을 표명하는 것은 쉽지 않으며 피차별자에게는 자기방어로 차별의 기억을 회피하려는 성향이 있다고 반문한다. 나아가 누구나 자기가 태어나고 자란 지역, 입에 맞는 음식, 친근한 벗에 대한 애착이 있기에 과연 이와 같은 것들이 ‘정말로’ 일본에 대한 애착일 수 있는지 묻는다.

그가 던진 질문, ‘난민으로서의 재일조선인’과 ‘일본 사회에 대한 애착’은 어쩌면 전자는 우리가 의식적으로 외면했던, 후자는 우리가 편하게 믿고 싶었던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은 단순히 ‘민단계 재일조선인’과 ‘총련계 재일조선인’이라는 남과 북의 구분선에서만 존재했던 것 같다. 아니 ‘우리’라고는 말할 수 없어도 특히 ‘나’에게는 그러했다.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의 규정에 따라 ‘재일조선인’을 ‘남한 쪽의 민단계’와 ‘북한 쪽의 총련계’로 구분했다. 이 어처구니없는 형식적 구분이 얼마나 우둔했으며 무례한 것이었던지를 서경식은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식민지배를 통해 그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일본식민’이라 분류된 재일조선인을, 패망 후 일본은 재차 외국인으로 분류했다. 일본이 조선인들에게 주었던 억압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과 함께 부정해버렸다. 이것에 대해선 굳이 더 얘기할 필요가 없을 듯하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우리 역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을 단순히 남과 북으로 분류했으며, 그것과 함께 재일조선인의 아픔을 의식적으로 잊고자 했다는 것이다. 재일조선인이 생생하게 경험한 일제 식민지의 고통과 일본에서의 억압과 차별을 국가라는 형식적이고 단순한 틀 속에 묻어버리고 말았다. 일본이 재일조선인의 차별과 고통을 ‘외국인’이라는 규정으로 부정했다면, 우리 역시 ‘남한’과 ‘북한’이라는 구분 속에서 부정해버렸다. 설령 의식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더라도 결과적으로 그러했다. 그 결과, 우리에게 재일조선인의 아픔은 단순히 탄광노동자, 징집병, 위안부 등과 같은 특수화된 이미지로밖에 남아있지 않다. 현실의 아픔은 없어지고 고통의 이미지만 남았다.

현재 재일조선인은 연평균 5,500여명에 이르는 귀화로 꾸준히 그 수가 줄어들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일본의 식민지배 역사 그리고 남북의 분단과 대립이라는 역사적 과정과 함께 생겨난 재일조선인은 결코 사라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들은 단순한 ‘국가’라는 범주로 구분할 수 없는 생생한 역사적 존재이다. 특히나 역사 속에서 그들은 국가로부터 쫓겨난 경험이 있고, 여전히 국가가 보장하는 책임과 권리에서 차별과 외면을 당할 위협이 있는 존재인 셈이다. 재일조선인은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다.

그렇다면 ‘난민으로서 재일조선인’이 돌아갈 조국은 어떤 곳일까? ‘국민화’라는 구분 속에서 차별과 억압을 받았던 이들에게 돌아갈 ‘국가’를 다시금 묻는 다는 것이 어쩌면 가당치않은 질문이라고 할지라도, 무례를 무릅쓰고 묻고 싶은 질문이다. 서경식은 “‘조국’이란 어떤 영역, 토지, 혈통, 혹은 고유의 문화나 전통이라기보다 오히려 모든 정치적 조건들 아래서 선택되는, 미래를 향한 태도의 결정”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즉 조선반도라는 토지, 혈통, 문화, 전통과 분리된 존재인 재일조선인에게 ‘조국’은, 과거 고통의 역사가 되풀이 되어선 안 되는 곳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조국은 ‘한국’, ‘북한’, ‘일본’, ‘기타’와 같이 현재적인 의미에서 어떤 국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미래 지향적인 조국의 모습으로 규정된다. 이건 어쩌면 재일조선인이 필연적으로 도착할 수밖에 없었던 조국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동안 우리는 재일조선인의 조국을 어떻게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있었을까? 혹 그들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우리들 마음대로 조국을 그들에게 부여하지 않았던가? 재일조선인들에게 국가라는 범주적 도식 속에서 조국을 부여하고, 어떤 억압적인 족쇄를 생각없이 채웠던 것은 아닐까? 잔인하게 반성하자면 ‘국민화’라는 또 다른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서 말이다. 이젠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을 현재 존재하고 있는 국가로의 범주화된 도식으로 내몰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미래의 모습으로 함께 나아가야 한다.

– ‘어머니를 모욕하지 말라’

제 1부 어느 편에 나오는 송신도 할머니는 1993년 일본에 거주하는 前 위안부로서는 처음으로 도쿄 지방법원에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송신도 할머니와 저자의 어머니는 동향同鄕에다가 동갑이라는 공통성을 갖는다. 또한 식민지배의 억압과 핍박 그리고 전후 일본에서의 민족차별과 성차별을 공통적으로 경험했다. 서경식은 송신도 할머니를 통해 자신의 어머니를 회상하면서 그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한 고통을 가슴 시리게 보여준다. 활자를 뛰어넘어 즉각적으로 느껴지는 감각으로서 말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에게 송신도 할머니는 또 다른 어머니이다.

이 부분의 글을 읽으면 나도 모르는 눈물이 비쳐 나온다. 한편으론 그들이 겪었을 참혹한 고통에 대한 동정과 공감, 다른 한편으론 그동안 위안부의 존재를 머리로만 알고 넘어갔던 스스로에 대한 반성과 죄스러움 때문이다. 그녀들이 당한 행위에 대한 저자의 분노, 회한, 슬픔, 미안함 등은 그의 글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그녀들의 고통과 아픔을 비슷하게 경험한 재일조선인이기에, 서경식의 글은 그녀들의 감정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 70여명을 상대해야만 했던 열 여섯의 송신도 할머니에게 가해진 처참한 폭력과, 일본인 가정의 허드렛일을 맡아 하면서 여덟 살의 저자의 어머니에게 가해진 민족적 차별과 억압에 대한 서경식의 글은 단순히 ‘가슴아프다’라는 단편적 동정심을 넘어서게 해준다. 처참한 고통은 커다란 보편성,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는 보편적 동질감을 부여해준다. 같은 핏줄이어서, 같은 문화라서, 같은 언어를 씀으로서 갖는 동질감이 아니다. 아마도 극심한 고통에 대한 반발로서, 즉 고통받았던 이들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게 될 보편적 연대감과 같은 말일 것이다. 같은 민족이란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면서 그 고통에서 해방되기를 지향함으로써 서로 연대하는 집단”을 의미한다는 서경식의 말은 따라서, 송신도 할머니는 이 글을 쓰는 지금 나의 또 다른 어머니임을 자각하게 해준다.

우리가 쉽게 사용한 재일조선인이란 말을 일본인들은 가장 차별적으로 사용해왔다. 모욕당하고, 버림받고, 얼굴을 가리고 피해갈 만큼 외면당해왔던 사람들을 ‘재일조선인’이란 공식적 명칭 속에서 은폐시켜버렸다. 아니 고통과 고뇌를 공유하기는커녕, 불편한 진실처럼 그리고 남의 일인 양 쉽사리 외면해왔다. 비단 일본의 우경화를 여기서 다시금 얘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우리들 역시 가장 차별적인 그 단어를 ‘같은 동포’라는 무감각적 언어와 등치시켰다. 머릿속에만 존재하는 그들로서 박제화시켜버렸다. 어쩌면 우리들은 차별적 언어를 사용한 그들의 논리에 나도 모르게 포섭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앞서 얘기한 “어렸을 적에 일본인 학생들과 많이 싸웠겠네요?”라는 질문은 정말 무례한 질문이었다. 특히 나 스스로에게 절대적으로 그러했다.

“어머니를 향해 던져진 돌멩이를 이 몸으로 받으면서 ‘공식적 역사’가 묵살하고 은폐해온 어머니들의 역사를 위해, 어머니들과 함께 또 어머니들을 대신해, 자식인 내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렇다. 자식인 우리가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카나리아의 비명을 질러야 한다. 이 책 3부의 제목처럼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의지’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그리고 동시에 ‘끊임없이 진실을 말하려는 스스로의 반성’이 필요하다. 서경식의 이 책은 나에게 그걸 말해주고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3)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마침내 다산초당 입구에 이르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90년대 초에 학생들과 함께 이곳에 온 적이 있었다. 그때는 돈이 없어 감히 관광버스를 빌릴 생각도 하지 못하고 시골버스를 타고 포장도 안 된 시골길을 툴툴거리며 돌아다녔다. 학생들은 ‘철학기행’이라는 티셔츠를 만들어 입고 등 뒤에다가는 “실학사상을 찾아서”라는 구호를 적었다. 그때 버스를 기다리던 동네 사람들이 참 신기하다는 듯이 아니면 먹고 사는 게 빠듯한데 저런 놈들도 다 있네 하는 식으로 바라보던 것이 기억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그때의 추억에 빠졌다. 버스를 기다리면서 길바닥에 퍼질러 앉아서 학생들과 막걸리를 먹던 생각이 너무나도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때 학생들은 정말 노래를 많이 불렀다. 어디에서나, 어느 틈에서나 시간만 나면 학생들은 노래를 불렀다. 무슨 바위 덩어리나 돌멩이처럼 살자 라는 노래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기억이 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지금도 의문이다. 왜 그때 학생들은 그렇게 노래를 불렀을까? 2000년대 들어 어느 덧 운동권 학생들이라는 개념이 사라질 무렵부터 이상하게도 학생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물론 그들도 노래를 불렀지만 항상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 앞에 나서서 그러나 혼자서 불렀을 뿐이지 길거리에서 합창하는 것을 본 적은 없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다산초당 입구에 내려 산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다산초당이 나왔다고 기억했다. 그래서 선배님에게 점심 먹기 전에 먼저 잠시 둘러보고 가자고 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다산초당 입구에서 걸어 올라가는데 아무리 올라가도 다산초당은 보이지 않는다. 다산초당은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 산을 4분의 3정도 올라가서야 나타났다. 그때는 금방 올라갔는데…그게 벌써 이십년 전 자거라투스트라가 아직 젊었을 때의 일이니 착각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 씁쓸해 한다.

다산은 왜 이곳에 초당을 지었을까?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런 의문을 풀어보려고 다산초당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려 본다. 유배되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강진읍 내에 있었다 하니까 굳이 이 외진 구석, 이름 없는 산 중턱까지 와야 했을 필요는 없었을 텐데? 물론 산에서 흐르는 물이 찻물로 좋기도 하겠지만 어디 좋은 물이 여기뿐이었을까? 다산초당을 오른 쪽으로 조금 돌아가면, 다산이 아마도 강진만의 푸른 들판과 은빛 갯벌을 동시에 바라보았을 장소가 있어 지금 거기에 누각을 하나 만들어 놓았으니 다산은 강진만을 보기 위해 여기 머물렀을까? 아니면 다산에게 다도를 가르쳤다는 초의선사가 다산초당이 있는 산 오른 쪽 중턱에 있는 작은 절(백련사)의 주지로 잠시 있었다니 서로 교유하기 위해 여기 머물렀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산의 부인의 친정이 해남(해남윤씨)에 있었으니 그쪽 집안에서 소유하고 있는 땅이 거기 있어서 그리 갔지 않았을까?

자거라투스트라가 그런 물음을 선배님에게 묻자, 선배님의 대답은 간단하다. 그거야 문화유산을 답사하는 유흥준 교수가 고민할 문제라는 것이다. 내일 할 수 있는 일을 오늘 고민하지 말라 했는데, 남이 고민해 줄 문제를 우리 철학자가 굳이 고민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언젠가 가까이 지내던 어느 교수가 한 말이 생각났다. 그분의 주장은 굳이 스스로 공부할 필요고, 열심히 공부하는 사람과 술친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가 알면 나도 아는 것이니 말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국민관광지’ 다산 초당을 휑하니 둘러보고 시끄러움을 피해 다산이 강진만을 바라보았던 곳에 가서 강진만을 바라본다. 그리고 유배라는 형벌이 제법 괜찮은 벌이라고 생각했다. 그걸 오늘에 되살리면 어떨까? 그래서 주로 학자나 예술가들에게 특별 형으로 부과하면, 좋지 않을까? 물론 국가가 밥과 잠자리는 제공해야 하겠지. 그러면 전국의 많은 시간강사들이 유배 형을 받기 위해 이를 악물고 시대의 금기에 도전할 것이니 학문과 예술의 발전에 얼마나 기여하겠는가?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갯벌을 바라보다가 자거라투스트라는 잠시 몽롱한 오수에 빠졌다.
다산 초당에서 본 강진만의 모습, 비가 오려 흐려 은빛으로 빛나는 강진만의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2

다산 초당을 둘러본지 두 시간째 어느새 오후 세시나 되었다. 이제 점심 겸 저녁을 먹을 차례인데, 기대해왔던 꼬막은 어디서 파는지, 바닷가를 차로 실실 돌아도 눈에 띠지 않았다. 그럼 강진 시내에 들어가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면서 무작정 강진시내로 들어갔다. 그런데 갯벌이 있다고 다 꼬막이 나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강진 시내에서도 꼬막집을 발견할 수 없어, 하는 수 없이 꽃게탕을 한다는 집에 들어 배를 채웠다.

그런데 강진 시내를 돌아다니는 중 시인 김영랑이 살았던 집이라는 표시가 있어 밥을 먹고 바로 찾아가 보기로 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새로운 발견을 한다는데, 김영랑이 여기 살았다는 것을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영랑의 집을 지나칠 수는 없지 않는가?

찾아가보니 영랑의 집도 국민관광지가 된 것이 틀림없다. 다 똑같이 만들어진 한옥이 이제 너무 식상하다. 국민관광지의 한 가지 특징이 있는 것 같다. 한옥에 두 종류가 있는데, 초가3간이 있고 기와3간이 있다. 약간 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기와 3칸으로 반면 약간 비엘리트적인 느낌이 드는 인물은 초가 3간이 배정된다. 중요도에 따라서 3칸 4칸 5간정도 크기가 조절된다. 나철 선생은 초가3간이다. 반면 영랑은 초가 5간이다. 실제 시인이었던 김영랑의 집이 5간이나 되는 너른 집(현대식으로는 약 40평정도)이었을까 의심스럽다. 이것을 통해 국민들이 역사적 인물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단적으로 드러난다.

영랑의 집구석에 감나무가 있고 그 밑에는 장독대가 있었다. 실제 영랑의 시대부터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조경임에는 틀림없다. 아직 가을이 아니라 유감스럽게 장독대에 떨어지는 단풍잎을 볼 수 없었다. 세상에는 친화성이 존재하는 것 같다. 화학적 친화성과 같이 이미지의 친화성도 있지 않을까? 얼음에는 팥을 쳐야지 콩가루를 칠 수야 없지 않는가? 마찬가지로 감나무 잎이 단풍이 된다면, 그게 마루에 떨어질 수도 없고, 부엌에 떨어질 수도 없으니, 오직 장독대 외에는 다른 곳이 없지 않을까? 이런 장독대의 이미지는 자연스럽게 누이라는 이미지로 이어지지 않을까? 영랑이 “오매 단풍들겠네” 라고 탄식할 때, 아마 그의 누이가 그 장독대를 닦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기에 저 산의 골짜기에서 시작한 단풍의 붉은 빛(골불)이 감나무를 거쳐서 마침내 장독대에서 일하던 누이의 발그랗게 상기된 얼굴에까지 번졌을 것이다.
모란과 감나무, 장독대가 어우러진 영랑의 생가의 마당

영랑의 집 앞에 비석처럼 생긴 바위에 그의 대표적인 시 ‘모란이 피기까지’가 새겨져 있다. 그리고 마당에는 모란이 심어져 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고등학교 국어 선생님이 이 시를 민족주의적인 시로 해석하는 것을 기억했다. 차라리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설명했더라면 더 아름다웠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사실을 알아야만 한다. 장미과에 속하는 모든 꽃들은 꽃이 떨어질 때 마치 목이 벤 듯 통째로 떨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장미도 무궁화도 그리고 동백도 꽃이 떨어질 때는 그처럼 목이 벤 듯이 떨어져 후드득 떨어진 꽃들을 보고 있으면 정말 처참하여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듯하다. 그 점을 기억하면 모란이 피기까지에서 영랑이 이렇게 읊었던 이미지가 눈에 떠오를 것이다.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 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 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인터넷으로 확인해 본 해학 이기의 생가, 국민관광양식 초가 4간이다. 나철 선생 생가-초가 3칸-보다 한 등급 높다.

3.

식사를 하고, 영랑의 집까지 구경하니 벌써 다섯 시이다. 이제는 더 늦출 수 없다. 서울까지 가려면 여기서 대 여섯 시간은 가야 하니까 말이다. 드디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돌려 서울을 향해 올라가기 시작한다.

그런데 차 안에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오늘 아침 해학 이기의 절명시를 선배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속도로 운전은 단조롭고 지루하기 때문에 감기는 눈을 깨워야 하기 때문이다.

형, 해학 이기의 고향은 어디에요.

글쎄 전라도 김제 어디라고 듣기는 했는데, 정확히는 몰라.

그러면 가는 길인데, 김제에 들렀다 갈까요? 근데 김제 어딘지 알아요?

몰라. 또 거기 가면 알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시간이 되나?

 

글쎄요. 빨리 가면 해 지기 전에 김제까지 가지 않을까요? 형, 나철 선생과 해학 이기는 서로 친했어요?

매천 황현이나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의 제자이고 낮은 벼슬이나마 중앙의 무대에 출사를 했으니 서로 가까웠을 것으로 짐작돼. 그런데 해학 이기는 김제에서 공부하다가 28세 되는 때 과거 시험을 포기하지. 게다가 상처도 하고 부친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먹을 것도 없어 전국을 유리걸식하거든. 물론 선비니까 이 집 저 집 사랑방에 떠돌았겠지. 이때 그는 기왕의 유교와 선비라는 제도적인 틀을 벗어던지게 되지.

그래서요?

그때 대구에도 갔다가 천주교 신부하고 논쟁하면서 ?천주6변?이라는 글을 작성하기도 했지. 그때가 44세 즉 1891년이야. 그런 가운데 나름대로 개혁사상을 정립하는데, 1892년 45세 때 순창에 머무르면서 ?질제고?라는 책을 쓰지. 질제란 그의 호야. 그 다음 해 46세 1893년에 황현을 만나. 황현이 그를 구례로 초청한 거지. 아마 그때 왕석보의 제자들 틈에 끼어 있었으니, 나철도 만나지 않았을까 짐작되는데, 그때만 해도 세상에 절망해서 은둔해 버릴 요량으로 호를 남악거사라고 바꾸어 버렸어. 남악이란 곧 지리산이 아닐까 해.

형, 그의 개혁사상의 핵심은 무엇이에요?

그게 참 재미있어. 이어지는 해 1894년에 알다시피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잖아. 이기는 이 혁명 앞에서 은둔해 버리려던 결심을 깨고 거꾸로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가담해서 처음 단순히 부패청산을 목표로 한 이 혁명을 그야말로 진정한 제도적인 혁명으로 바꾸기를 기도했지. 그래서 전주에 입성한 동학농민혁명의 지도자 전봉준을 만나러 전주에 간 거야. 그래서 자기의 개혁사상을 토로했지. 그 핵심은 바로 토지개혁이야. 토지를 가난한 농민에게 나누어주자는 주장이야. 그 방식은 공전제라고 하는데, 요새 말로 한다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라는 주장이지.

와 그때 그런 주장을 했단 말이에요? 대단한데…

그의 토지개혁론은 그가 실학 사상가 정약용의 여전제나 유형원의 한전론 등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자기 나름대로 제시한 이론이지. 실제로 그 후 60년 뒤에 이승만 시대 토지개혁이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으니, 그가 얼마나 시대를 앞섰던 가를 짐작하지. 그는 부르주아 혁명이라는 개념을 몰랐지만 토지개혁이 부르주아 혁명의 핵심이라면 그가 바로 부르주아 혁명가이지. 그는 동학농민혁명의 힘으로 그 부르주아 혁명을 수행하려 했던 거지.

어마어마한데요. 소위 갑신정변도 꿈꾸지 못했던 혁명이잖아요.

그렇지. 그래서 해학 이기를 다시 보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아. 그런데 전봉준이 만약 또 다른 동학농민군의 지도자 김개남이 동의한다면 자기는 이기의 주장에 동의한다고 했던 모양이야. 그래서 김개남을 만나러 남원에 가는데, 이상하게도 더욱 혁명적이라고 알려진 김개남이 이기를 만나주지도 않고 체포하려 하지. 그래서 그는 간신히 탈출해서 도망하고 동학농민혁명 운동에 대해 실망하게 되었어.

김개남이 반대한 이유는 무엇이에요?

그건 몰라. 연구를 좀 더 해야 하는데… 하여튼 그러고 나서 동학혁명 실패 후 일본군의 강압에 의한 정부 개혁에서 무언가 기대하고 자신의 주장을 펼쳐보려 했지만, 한계를 깨닫고 3년 후 1898년 구례로 다시 내려와. 이때 그는 다시 황현 등과 어울리지. 1902년에는 ?급무8제의?라는 글을 써서 요긴한 개혁의 핵심을 고종에 건의하지만 동시에 시를 통해 고종의 무능과 대신의 비행을 비판했다가 수난을 당하지. 이때가 말하자면 재야 비판가로서의 활동이지.

그래서요?

그는 개혁운동에 점차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거든. 1904년2월 일제가 약간의 차관을 대가로 해서 항무지 개간권을 달라고 했어. 그때 황무지가 국토의 4분의 1정도니 엄청난 국토가 일제에 넘겨지는 거지. 이때 그가 나철과 더불어 보안회를 조직해서 반대하면서 일대 군중운동을 일으켰어. 그러자 정부는 이 보안회를 강제해산시키기도 했는데 어떻든 군중운동의 힘으로 일제의 간계를 막아냈어. 이 보안회가 나중에 대한자강회, 그리고 신민회의 핵심세력이 되고 독립운동의 중추가 되니까 그의 역할이 짐작되지?

사상적으로 그는 입각점이 어디에 있어요? 여전히 유학자였나요? 실학 아니면 양명학?

그는 유학에서 잠시 묵자 쪽을 기웃거렸다가, 바로 양계초의 신민사상 쪽으로 넘어간 것 같아. 그 점에서 당시 개혁주의자들의 대세를 따른 셈이지.

 

4.

형 그러면 대종교와는 어떤 관계가 있어요?

그것도 아주 재미있는데, 이 보안회 이후부터 그는 나철과 아주 밀접하게 연관되어 활동하기 시작해. 1905년 을사조약 전에는 일본에 건너가 언론을 통해 비판운동을 하기도 하지만 을사조약이 맺어지자, 1907년에는 을사오적을 처단하는 조직 즉 자신회를 만들었어. 하지만 거사가 실패해서 주모자로서 그는 7년 형을 받았지만 고종이 감동받았던지 7개월 만에 풀려났어.

그런데요.

1908년 그는 ?일부벽파론?을 발표했지. 도끼를 들고 제도개혁을 주장한 거야. 그 도끼는 물론 내가 잘못이면 내 목을 도끼로 베라는 그런 의미이지.

정말 단호하군요.

그래 단호한 개혁사상가로서 그는 나철 선생 이상이야. 그러다가 1909년 나철과 더불어 민족종교인 단군교를 창립하지. 그런데 1910년 나철 선생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자 그는 단학회를 발기하고 그 경전이 되는 ?진교 태백경?을 완성해. 그러고 나서 1909년 7월 1일 10 여 일간의 폐문절식으로 자진하고 말았다 해.

그게 좀 이상하네요. 왜 태백경을 지은 거죠?

글쎄 그건 좀 이상한데, 사상적 차이 때문이 아닐까 하거든. 최근 『환단고기』라는 책이 있잖아. 그건 고조선의 역사를 기록한 역사책에 가까운 것인데, 환인, 환웅, 단군의 시대가 역사적으로 실재했다는 주장이지. 그 책이 최근에 발간되는 데는 복잡한 연원이 있는데 결국 거슬러 올라가보면 그 책의 주요 내용은 해학 이기가 지었던 것으로 보여. 그렇게 본다면 대종교는 단군을 신앙화하는데 목적이 있었다면 이기는 단군을 역사적 영웅으로 만들려 했던 것이 아닐까 해. 둘 다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시도였지만 종교와 역사라는 차이가 있었던 것이지. 사상가 해학 이기로서는 종교에 부담을 느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보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야.

이렇게 선배님의 강의를 듣는 동안 어둠은 깊어갔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 도저히 김제에서 해학 이기 선생의 생가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서울로 돌아오기로 했다. 서울에 도착하니 10시, 피곤이 온 몸을 급습한다. 종교와 역사, 머릿속에는 이런 개념들이 마치 헬리콥터가 돌아가는 소리처럼 소리치면서 맴돈다.

혼란의 시간 속에서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보이지 않는 벽을 느끼다

무엇인가를 기억한다는 것은 인식함을 의미한다. 현실의 시간은 순차적으로 지나가지만, 과거의 시간은 오히려 거꾸로 돌아온다. 되돌아 온 과거의 시간과 기억은 현재의 나를 성찰하게 하고, 그 성찰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행복했던 시간과 기억이 현재의 나에게 슬픔을 주더라도 비극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결코 과거를 떠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과거를 회피하거나 부정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할머니를 정기적으로 만나고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할머니의 이러한 태도는 나에게 혼란을 주었다. 너무나 담담하게 전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에 어느 순간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이다.

엄청 난 고통의 시간을 지나왔고, 현재도 산다는 것 자체가 고통인 사람이 자신의 과거를 진실 되게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요시코와 마쓰시타와의 이야기도 사춘기 때의 상상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지어낸 것은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왜 숙자와 관련된 이야기는 하지 않는 걸까? 의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차마 내색하지 못하고 갈등의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 할머니로부터 처음으로 전화가 걸려 왔다. “김선생이가? 나가 마이 아푸다. 이번 주는 오지 마래이.” 전화선을 통해 힘없는 할머니의 소리가 들려 왔다. 뭐라도 물어볼 틈도 없이 전화는 끊겼다. 나는 급하게 할머니 집을 찾아 갔다. 마을은 여전히 고요했고, 이제 낯이 익었는지 동네 개들은 짖는 대신 꼬리를 흔들었다.

마을 가장 안쪽, 마을 입구에서 보면 지붕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낮게 자리 잡은 할머니의 집은 마을보다 더 고요했다. 대문도 없는 할머니의 집 마당에 들어서자 일찍 핀 코스모스 두 송이가 눈에 띄었다. 주인이 없는 방은 외롭고 쓸쓸해 보였다. 잘 정리된 방을 생경하게 보다가 길을 사이에 두고 있는 앞집 아주머니께 갔다.

“큰일 날 뻔 했제. 어데로 간다고 혼자 휠체어를 탔을꼬. 중심을 못 잡아서 휠체어하고 같이 요 밑으로 굴렀다 아이가. 이장이 병원 차 불러서 싣고 갔다. 그래도 김선생 헛걸음 한다고 전화하대. 참 두 사람 얄궂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온 몸에 힘이 빠져서 겨우 걸음을 떼어 할머니 방 앞에 있는 작은 툇마루에 앉으니, 눈물이 핑 돌았다.

 

어둠이 내려앉는 마당에서

천천히 걸어도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 30분이 걸리지 않는다. 그 마을 내에서 이동할 때에도 할머니는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할머니의 뭉툭한 발로는 중심을 잡고 걸을 수 없다. 할머니의 발은 언제나 붕대가 감겨 있었다. 방안에서도 할머니는 서지 않는다. 엉덩이로 움직인다.

마을 입구에 있는 교회에 갈 때나, 병원에 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방안에서 생활한다. 교회에 갈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야 한다. 그래도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잠시라도 서서 움직여야 할 텐데 그때 미끄러지면 어쩌나 싶어서 발바닥에 미끄럼 방지 돌기가 있는 꽃무늬 양말을 몇 켤레 사 드린 적이 있다.

내 손으로 신겨 드리고 싶었지만, 할머니는 한사코 싫다고 했다. 방바닥 한 쪽에 그때 사드렸던 양말 중의 하나가 놓여 있었다. 새 양말을 신고 어디로 갈려고 했던 것일까? 지난 번에 왔을 때, “조금씩 운동을 하는 게 어떨까요?”했던 내 말이 너무 방정맞았던 것일까? 그 손으로 양말을 제대로 신기나 했을까? 줄줄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없이 나는 그저 그렇게 앉아 있었다.

마당은 어둑해지고, 나는 조금씩 밀려오는 알 수 없는 불안에 휩싸였다. 네 살 때였던가. 어머니를 따라 시장에 다녀오던 길이었다. 어머니는 골목 입구에 있던 어떤 집에 들어가서 한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 사이 호기심으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골목길은 신기했다.

그때 어느 집에서 개가 짖었고, 나는 겁에 질려 소리 지르며 뛰다가 엎어졌다. 금방이라도 큰 개가 나를 덮칠 것 같은 공포에 숨도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그때 한 아이가 뛰어와서 돌멩이를 던져 개를 쫓아내고 나를 일으켜 주었다. 그리고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무릎에 난 피를 닦아 주고 있을 때, 그 애의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더니 나를 알아보았다.

그 애는 내 손을 꼭 잡고 꼬불꼬불한 골목길을 돌아서 우리 집 앞까지 나를 데려다 주었다. 집에서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고, 대문 앞에 퍼질러 앉아 있던 할머니 손에 끌려 그 애는 우리 집으로 들어왔다. 아버지는 양 손에 두 꼬마 아이의 손을 잡고 그 집에 가서 고마움을 전했고, 그 애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같은 나이였지만, 그 애는 나에게 언제나 든든한 보호막이었다. 그 애와 함께 있으면 두렵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내가 전학을 가기 전까지 우리는 매일 아침에 만나서 저녁에 헤어졌다. 그리고 정확히 14년 후, 남포동 골목길에서 “리야”를 큰 소리로 반복해서 부르고 있는 그 애를 만났다.

나를 부둥켜안고 팔짝거리는 그 애와 달리 나는 뭔가 어색했다. 그 날, 그 옛날처럼 그 애의 손에 이끌려 그 애의 집으로 갔을 때, 온 식구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저녁을 먹고 우리 둘이 만났을 때의 이야기가 꽃을 피웠지만, 정작 나는 즐겁지도 않았고 유쾌하지도 않았다. 또 반갑지도 않았다.

다만, 부끄러웠다. 같은 나이의 친구에게 보호를 받아야했던 나약했던 유년의 그 기억이 부끄러웠다. 바보같이 다 아는 동네의 길도 모르고, 나보다 훨씬 작은 개에게 놀라 겁쟁이처럼 엎어져서 일어설 줄도 모른 채 울기만 했던 내 유년의 시간을 누군가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당혹스러웠고, 현재의 내 모습을 신기해하는 그 분들이 좋게 다가오지 않았다.

할머니의 마당에 내려앉는 어둠을 보면서, 왜 할머니가 숙자와 연관된 기억을 말하려 하지 않는지, 요시코에만 머물러 있으려 하는지 알 것 같았다. 누구에게나 감추고 싶은 기억이 있다. 내가 어린 시절의 단짝과 함께 했던 시간이 부끄러워 감추고 싶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감추고 싶은 기억인 것이다.

마주 보고 앉아서 함께 숙자의 시간으로 돌아가기에는 할머니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기억의 강이 흐르고 있었다. 할머니와 내가 나란히 앉아 함께 바라볼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나는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야기만이 할머니와 나 사이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인 게다.

 

할머니를 다시 보다

할머니가 처음 구술한 시가 생각났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밤 > 전문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전부를 바친 임’이다. 평생을 홀로 그리워하던 사람이고, 그 그리움 때문에 죄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고요한 밤이 되면 풀벌레 소리에도 생각나고, 초승달만 보아도 보고 싶어서 눈물 흐르게 하는 사람이 마쓰시타이다. 그에 대한 그리움은 마쓰시타를 만난 19살부터 80세를 넘기는 현재까지 할머니의 영혼을 기억 속에 가두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몸부림 치’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할머니에게 왜 ‘숙자는 말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할머니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공간 곳곳에서 기쁨보다 슬픔을 먼저 느끼며 살고 있다. 나는 할머니의 슬픔을 나의 관점에서 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시 할머니의 방문을 열어 보았다. 여러 번 본 방인데도 다르게 느껴졌다. 낡고 오래된 가구가 지키고 있는 방은 정갈했다. 새삼스럽게 할머니가 자기 주변을 매우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부엌에도 처음으로 들어갔다. 역시 깔끔하고 허투르게 놓인 그릇 하나 없었다. 보일러실 겸 세탁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사용하는 사람 없이 오랫동안 그렇게 있었던 것처럼.

하다못해 벗어 던져 놓은 옷가지 하나 보이지 않았다. 내가 사 드린 양말만 한 구석에 없는 듯이 있을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할머니는 옷차림도 유난히 정갈했다. 여름에도 그 작은 방에서는 시골 방에서 흔히 나는 냄새조차 없었다. 그것들이 할머니가 품위를 지키고 자존심을 잃지 않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나의 어리석음이여!

지금까지 할머니는 자신의 감정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으나, 나는 텅 빈 공간에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정리하고 있다는 것을 감지했다. 할머니가 다쳤다는 말에 예상하지 못했던 나의 반응들, 온 몸으로 느꼈던 허탈함과 정신적인 공허감은 지금껏 내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할머니와의 이별 예감을 몸으로 느낀 것이다.

할머니는 이제 자신의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이별의 시간을 위하여 주변을 정리하는 것일 게다. 풀벌레의 울음을 아름다운 멜로디라고 말하면서도, 그 아름다운 멜로디에서 심장을 울리는 슬픔을 느끼는 할머니의 마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마쓰시타가 옛 ‘추억의 첫사랑’임을 알면서 시를 통해 현재의 시간 속에 나타내는 것도 정리의 하나일 것이다.

인간은 과거 시간 속의 자신과 현재의 자기를 비교할 수 있다. 숙자와 현재의 할머니를 비교할 때 숙자는 행복과 슬픔의 경계선에 있는 인물이다. 한센 병이 찾아 온 이후 어머니와 잠시 함께 했던 시간 외의 그 많은 시간을 할머니는 홀로 현실을 버텨냈다. 남편이 옆에 있었지만, 내밀한 속내를 털어 놓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할머니의 정신은 언제나 갇혀 있었다.

천형이라는 표현 외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병을 평생 몸에 지니고 있으면서 몸과 마음의 상처를 혼자 다스려야 하는 삶은 고통의 연속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할머니의 세상 바깥에서 오빠와 언니들이 애타게 찾았던 동생은 숙자였다. 현재의 할머니는 아니었던 것이다. 회상만으로도 따뜻하고 포근해야 할 기억이 현실과 연결되지 못할 때 그 기억은 슬픔이 된다.

내가 어린 시절 친구와의 기억을 누구와 공유하고 싶지 않듯이 할머니에게는 숙자가 공유하고 싶지 않은 기억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도 숙자에 대한 호기심을 내 마음 속에서 지워야 하지 않을까. 숙자를 의식하지 않아야 할머니의 마음에 좀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야 할머니도 삶의 짐을 조금은 가볍게 내 앞에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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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과학, 그 불완전한 확실성 8-② [色 다른 책읽기]

손산 (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사례 1.

사건 번호: 04cv2688.

키츠밀러 대 도버 교육청(Kitzmiller vs Dover Area School District)

담당 법원 및 판사: 펜실베니아 중부 지방 법원, 존스(John E. Jones III) 판사

사건 개요:

2004년 11월 19일, 도버 교육청(피고)은 고등학교 과정 ‘생물’ 교과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보도 자료를 배포하고, 이를 이듬해 1월부터 시행하기로 한다. 간략하게 추려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다윈의 이론은 하나의 이론일 뿐이며, 따라서 새로운 증거가 발견될 때마다 그 진위를 판단해야 한다. 다윈의 이론은 사실(fact)이 아니다. 다윈의 이론에 있는 틈새들은 그에 합당한 어떠한 증거도 찾을 수 없었기에 존재한다. 이론은 광범위한 관찰들을 통합하는, 잘-다듬어진(well-tested) 설명으로 정의된다. 지적 설계론은 다윈의 견해와는 다르게 생명의 기원을 설명한다. …… 학생들은 어떠한 이론이던지 간에 열린 마음으로 대할 것이 권장된다.’ 따라서, 도버 교육청은 2005년부터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다윈의 진화론과 지적 설계론을 동등한 지위에서 가르치도록 결정한다. 도버 교육청의 이러한 결정에 반발하여 키츠밀러를 위시한 학부모들(원고)은 교육청의 결정은 미국 수정 헌법 1조(미연방은 국교를 수립할 수 없다) 및 14조(법률에 따른 평등한 보호)를 위배하고 있기에, 그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소를 제기한다.

판결 및 그 이유: 존스 판사는 139쪽에 이르는 판결문을 통해, ‘지적 설계론’을 교과 과정에 넣은 교육청의 행위는 레몬 대 쿠르츠만(Lemon vs Kurtzman 403 U.S. 602 (1971)) 판결이 제시한 일련의 기준 (레몬 테스트라 알려져 있다: 정부의 행위는 세속적인secular 입법 목적을 가져야 하며, 종교를 장려하거나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종교와 ‘과도하게 얽혀있지’ 않아야 한다)을 통과하지 못했기에 미국 수정 헌법 1조 및 14조를 위배하고 있다고 판시한다.

사례 2.

1975년 어느 가을, 183명의 과학자들(18명의 노벨상 수상자 포함)이 바트 복(Bart Bok 천문학자), 로렌스 제롬(Lawrence Jerome 과학 작가), 그리고 폴 쿠르츠(Paul Kurtz 철학자)가 작성한 성명서에 서명을 한다. 이 성명서를 통해 이들은 ‘점증하는 점성학(astrology)의 영향력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점성학은 ‘신비적 세계관’의 산물로, 별들의 힘이 우리에게 미치기에는 ‘우리와 별들과의 거리가 너무 멀고’, 그 영향력은 ‘극히 미미하기에,’ 별들이 ‘우리의 운명에 영향을 준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 중 상당수는 사례 1과 2를 통해,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과학’에 대한 생각을 아마도 재확인하지 않았나 한다. ‘그래, 우리가 생각하는 과학은 이런 거야!’ 하는 안도감과 함께. 러셀의 종교와 과학을 읽고 난 사람들의 감상도 아마도 마찬가지이지 싶다. 선명하게 대비시켜 배열된 종교와 과학 사이의 ‘투쟁사’는 깔끔한 그의 문장처럼 아주 명료하게 정리되어 있다. 하지만 그게 전부일까? 우리는 그렇게 ‘계몽’되기만 하면 되는 것일까? 사례 1과 2를 이용해, 러셀이 주장하는 종교와 과학 사이의 ‘투쟁’을 조금 더 깊숙이 파고 들어보자.

 

과학이란 무엇인가?

러셀은 과학을 ‘관찰과 그것에 기반을 둔 추론을 통해 우선은 세계에 관한 특정한 사실을, 그 다음은 그런 사실들을 상호 연결해주고 (운이 좋으면) 미래의 현상들까지 예측 가능하게 해주는 법칙들을 발견’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다 (9쪽).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과학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과학의 정의가 사례 1과 2에도 적용될 수 있을까? 사례 1에서 등장하는 ‘지적 설계론’은 우리가 ‘관찰할 수 없는 순간 (생명의 기원)’을 탐구의 대상으로 삼고 있기에, 우리는 큰 어려움 없이 지적 설계론을 과학으로부터 추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학의 대상을 ‘관찰할 수 있는 그 무엇’으로 한정할 수 있는가? 사례 2의 경우는 ‘별들’과 ‘인간들’을 그 관찰의 대상으로 삼기에 일단 과학의 테두리 안에 들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점성학은 별들과 인간을 이어주는 ‘경험적 법칙’을 발견하고자 노력하며, 이를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고자 한다. 때에 따라 점성학자의 예측은 성공하기도 하지만 ‘운이 없어’ 실패하기도 한다. 앞의 성명서에서 언급된 점성학의 ‘신비적 기원’ 또한 문제시 되지 않는다. 만일 그 기원이 문제가 된다면 우리는 연금술에 기원을 둔 화학 또한 그 과학의 지위를 박탈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점성학을 과학으로 받아들여야 하나? 나아가 ‘관찰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연구 대상으로 삼고 있는 과학자들을 도처에서 발견할 수 있는 현실 앞에서 (예를 들어 이론 물리학자들), 우리는 그들에게 교황이 호킹(S. Hawking)에게 했던, ‘빅뱅 이후의 우주의 진화를 연구하는 것은 괜찮지만, 빅뱅 그 자체 및 그 넘어는 연구하지 말라’는 충고를 되풀이해야만 하는 것일까? 아니면 러셀을 따라, ‘정확한 실험적 지식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철학적 불확실성의 영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98쪽)라고 선언해야 하는 것일까?

 

세속의 탄생: 시간의 흐름 속에서

다시 사례 1로 되돌아가 보자. 필자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재판의 결과보다도, 미국의 입법가들이 그리고 존스 판사가 의식했건 의식하지 못했던 간에 사용하고 있는 ‘세속적이어야’ 한다는 문장이었다.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다시피, ‘세속적’이라는 표현은 ‘성스럽다(holy)’라는 표현과 대비되어 사용된다. 하지만 이 낱말들의 어원이 ‘전체로 완전함‘을 뜻하는 15세기 독일말 heil과 ’나이 먹음‘을 뜻하는 라틴말 saeculum에서 왔다는 것을 기억해낸다면 우리는 이야기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풀어 낼 수 있다.

우리 기억 속의 인간들은 그들이 이 땅에서 보낸 시간의 양 만큼 그들을 둘러 싼 세상에 대해서도 알고 싶어 했다. 종교 또한 이러한 인간의 열망 속에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으며, 그리고 성장한다. 역사 속에서 ‘종교’는 다른 어떤 분야보다도 이 땅에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을 이어주는, 믿음의 체계’로 자신을 발전시켜 나아왔다. 종교의 ‘영성 체험,’ 또한 ‘약물’을 사용하던 ‘세계 종교(world religion)’에서 약물 사용이 필요 없는 종교로 통합 발전해 왔다. 이러한 발전 과정의 연장선 위에서 우리는 ’종교의 세계 이해‘를 파악해야 하지 않을까? 예를 들어, 기독교에서 정결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을 나누는 (레위기 11장, 신명기 14장) 구분은 메리 더글라스(M. Douglas)의 지적처럼 ’완전한 것을 따라서 성스러운 것을 추구하던‘ 고대 유대인들이 ‘그들의 생물 구분법’의 경계선상에 있는 동물들을 ‘부정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더글라스는 고대 유대인들이 비늘 없는 물고기를 ‘완전한’ 물고기로, 날지 못하는 새를 ‘완전한’ 새로 볼 수 없었을 것이라 지적하며, 만일 중동에 펭귄이 살고 있었으면 틀림없이 펭귄 또한 부정한 짐승의 목록에 들어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이러한 종교의 이해가 받아들여진다면, 우리는 종교에서, ‘완전한’ 그들의 신관(神觀)과 ‘공존하는 그들의 세계 이해’를 구분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즉, 우리는 성스러운 것으로부터 나이를 먹는, 따라서 변화하는, 덕분에 ‘세속적인’ 우리의 세계 이해를 구출해 낼 수 있을 것이다.

 

과학: 경험 속의 완전함의 추구에서 불완전한 확실성의 추구로

‘실체substance는 통사론에서 나온 개념이며, 통사론은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구조를 결정한 원시 종족들의 다소 무의식적인 형이상학에서 나왔다. 문장은 주어와 술어로 나뉘는데, 어떤 단어들은 주어 혹은 술어로서 존재하는 반면, 오직 주어로만 (매우 엄밀한 의미에서는 아니라 할지라도) 존재하는 단어들도 있는 것 같았다. 바로 이런 단어들 – 고유 명사가 가장 좋은 예인데 – 이 ’실체‘를 의미한다.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는 일상적인 단어는 ’물체thing’ – 인간에게 적용될 때는 ‘인격체person’ – 이다. 실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은 어떤 물체나 인격체가 의미하는 바에 정확성을 부여하기 위한 시도일 뿐이다’ (102쪽). 이제 우리는, 다소 두서없이 등장한 러셀의 이러한 지적을 그의 ‘종교와 과학’ 안에 등장하는 수많은 갈등의 예들과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종교와 과학 사이의 갈등을 ‘경험 속의 완전함의 추구 (성과 속의 일치)’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성으로부터 속을 분리해 냄으로써 갈등의 해소 또한 간단하게(?)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간단함이 인간 지식의 역사라고, ‘불완전한 확실성’을 향해 나아가는 인간의 ‘세속적인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이 무리 있는 표현은 아닐 것이다. 덕분에 ‘우리는 사실 오류라는 영원한 희극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103쪽)라는 러셀의 표현은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온다.

부언:

참고로 미국 수정 헌법 1조 (국교 수립의 금지)와 관련된 판례들 중, 멕레안 판례(McLean vs Arkansas Board of Education 1982)가 처음으로 ‘과학’에 대한 전문가 증언을 ‘비’ 과학자인 마이클 루스(Michael Ruse)로 부터 구했다 (그는 과학 철학자이다). 점성학과 마찬가지로 과학자들 사이에서 과학이 아니라는 평가를 받는 미국 ‘초능력 협회’ 또한 미국 과학 진흥 협회(American Association for the Advancement of Science, 협회는 황우석 사건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SCIENCE’라는 학술지를 펴내고 있다)의 준회원 기구로 아직까지(2011년 현재) 남아 있다.

참고 문헌

메리 더글라스 (1997 [1966]) 순수와 위험. 유제분, 이훈상 옮김. 서울: 현대미학사.

버트런드 러셀 (2011 [1935]). 종교와 과학. 김 이선 옮김. 파주: 동녘.

Bok, Bart J., Jerome, Lawrence E., and Kurtz, Paul (1975). “Objections to Astrology”. The Humanist. (September) 4-6. available at http://psychicinvestigator.com/demo/AstroSkc2.htm

Tammy Kitzmiller, et al vs Dover Area School District (400 F. Supp. 2d 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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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덟 번째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와 과학>(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으로, 이한오(성공회 신부), 손산(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오상현(상지대 강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

 

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을 그리며 8-③ [色 다른 책읽기]

오상현 (상지대 강사 /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우리 집 종교의 역사는 좀 화려한 편이다. 아버지는 결혼 전에 한동안 남묘호랑게교(SGI)에 심취하셨고, 어머니도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흔치 않은 종교인이셨단다. 그런 두 분이 만나 결혼을 하셨고 그리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종교의 은혜(?)로 말미암아 나를 얻으셨다. 얼마 전까지도 이모 한 분의 종교는 대순진리교였고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지만 작은아버지의 가족들은 원불교도시다. 다양한 종교인을 친인척으로 두었던 과거 때문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포부도 당당했던 철학과 신입생 시절에 내 관심은 온통 ‘종교철학’에 있었다.

 

종교와 과학, 그 진부한(?) 이야기

아직도 서점에 가보면 ‘종교와 과학’에 관한 신간들이 종종 눈에 띈다. 대개 종교와 과학을 대립적 구도로 나누고,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 승리를 안겨주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이다. 과학이 발달함에 따라 ‘진화론’ 연구도 상당히 ‘진화’했다. 이에 응전하기 위해 종교도 ‘창조론’에서 ‘지적 설계론’ 등의 대항마를 만들어 전쟁을 치렀지만 대부분의 승리는 과학의 몫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과학적 성향은 신중하고 잠정적이고 점진적이다. 자기가 획득한 최고의 지식조차도 전적으로 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모든 이론은 머지않아 수정되어야 하며, 이 필연적인 수정 과정에는 연구와 토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것을 안다. (219p.)

‘종교’와 ‘과학’은 사실 서구 사회를 이룬 두 가지 핵심 축이라 할 수 있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의 다른 이름이다.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헤브라이즘’은 신 중심적이고 초월적인 기독교 사상을 말하고 ‘헬레니즘’은 고대 그리스에 기원을 둔 인간 중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일컫는다. 러셀도 이런 관점에 동의하고 있다. <종교와 과학>에서 그는 ‘종교’를 기독교에 한정하고 있으며 ‘과학’을 합리적 토론과 자유로운 연구를 통해 언제든 수정 가능한 것으로 간주한다. 요컨대, 종교와 헤브라이즘, 과학과 헬레니즘은 치환이 가능한 것이다.

길에서 두 사람이 대화를 하고 있다고 가정하자.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중국인과 중국어를 전혀 모르는 일본인이 대화의 두 주인공이다. 만약 이들이 특정한 주제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하고 있노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쉽게 믿기 어려울 것이다. 의미 있는 논쟁이 오고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이 통해야 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진부한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삶은 늘 ‘판단’의 연속이다. “지난 주 ‘나는 가수다’의 1위는 박정현이야.”라는 식의 판단은 ‘다시 보기’를 통해 참이냐 거짓이냐를 가려낼 수 있는 것으로 우리는 이것을 ‘사실판단’이라고 한다. 반면에 “대한민국에서 제일 예쁜 여배우는 송혜교야.”라는 판단은 그야말로 자기 주관적 호불호(好不好)에 의해 내려지는 판단으로 우리는 이것을 ‘가치판단’이라고 한다.

‘가치’의 문제는 과학의 영역을 넘어 전적으로 지식의 영역 밖에 놓여 있다. 다시 말해, 이것 혹은 저것에 ‘가치’가 있다고 주장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지, 개인적인 감정에 상관없이 언제나 참인 어떤 사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204p.)

러셀의 주장대로 ‘가치’의 영역은 과학이 추구하는 ‘사실’의 영역과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 앞서 종교와 과학의 논쟁을 진부하다고 혹평한 까닭은 두 주장이 실은 전혀 다른 영역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쟁하려 애쓰는 모습이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을 이해할 수도 없으면서 합의점을 찾으려는 우격다짐과 흡사하기 때문이다.

논쟁이란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들이 각자의 주장을 말이나 글로 펼치면서 다투는 것’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논쟁의 당사자는 상대의 합리적 이성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그래야만 ‘논쟁’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논쟁’은 합리적이어야 하며 러셀의 표현처럼 ‘과학적 성향’이 필요한 영역이다. 종교가 늘 과학과의 논쟁에서 지는 까닭은 싸움의 규칙 자체가 과학의 편에 서 있기 때문이다.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무장한 근대 이후의 사람들에게 ‘가치판단’의 문제를 설득하려는 시도는 애초부터 무모한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러셀이 이 책을 쓴 진짜 이유

서양 근대의 합리주의는 데카르트에서 비롯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명제로 유명한 그는 『방법서설』에서 “학문에서 어떤 확고부동한 것을 이룩하려고 한다면 지금까지 믿어왔던 모든 견해를 벗어나 아주 기초부터 새로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껏 믿어왔던 경험적 사실들을 모두 부정하고 명석하고 판명한 진리를 추구하는 것이 지식인의 임무라는 것이다.

과학적인 방법을 제외하고는 진리에 도달하는 어떤 다른 방법도 인정할 수 없다. 그러나 감정의 영역에서 종교의 근원을 이루는 경험의 가치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경험은 잘못된 믿음과 결함하여 선뿐만 아니라 많은 악을 낳았다. 그런 결함에서 풀려난다면, 바라건대 오직 선만이 남을 수 있을지 모른다. (166p)

러셀은 종교와 과학의 논쟁이 단지 무의미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물론 그가 데카르트의 전통 위에 서 있는 인물이었고 그로 인하여 <종교와 과학>의 대부분에서 과학의 손을 들어주고 있기는 하지만 종교 자체가 의미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이다. 다만 종교가 잘못된 믿음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많은 악에 대한 우려가 있었을 뿐.

러셀은 초기에는 수학이나 논리학, 과학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이와 관련한 많은 책들을 집필했다. 또한 철학사가로서 오늘날에도 널리 읽히고 있는 <서양철학사>를 남기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윤리학이나 정치?사회?교육 등의 분야에도 전문서적을 펴냈으며 급기야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러셀이 오늘날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것은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거나 학문에 대한 욕심과 노력이 남달랐음에 있지 않다. 그의 삶이 던지는 묵직한 메아리는 그가 단지 배우고 익히는 것에서 머무르지 않고 반드시 실천으로 옮기려한 지식인이었다는 것에 있다.

<종교와 과학>이 의미 있는 까닭은 러셀이 단순히 종교와 과학의 다툼을 나열하고 과학의 승리를 언명하고자 함에 목적을 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종교와 과학>에는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가 담겨있다. 핵무장을 반대하는 운동에 참여했던 평화주의자였고 옳지 못한 국가권력에 맞서 ‘불복종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던 그의 실천적 행위는 그 내면에 자리했던 ‘인류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필연적이고 자연스럽게 표현된 것이다.

오늘날의 위협은 정부로부터의 위협이다. 혼돈과 무질서라는 현대적 위험 요소 때문에, 오늘날 정부는 이전에는 교회의 권위에 부여됐던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았다. 그러므로 낡은 형태의 박해가 사라졌다는 것에 만족하며 자축하기보다는 새로운 형태의 박해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과학자를 비롯하여 과학적 지식을 가치 있게 여기는 모든 이들의 명백한 의무라고 할 수 있다. (223p.)

새로운 진리는 종종 불편하다.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더욱이 그렇다. 그러나 새로운 진리야말로 잔인함과 편협함으로 얼룩진 기나긴 역사 속에서도, 총명하면서도 방종한 우리 인류가 이루어낸 가장 중요한 성과물이다. (224p.)

러셀은 ‘신성불가침의 특성을 이어받은 새 권력들’을 ‘신흥종교’라고 불렀다. 러셀이 비유한 ‘신흥종교’는 오늘날 ‘국가 권력’이나 ‘자본 권력’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러셀은 이런 ‘신흥종교’가 자행하는 수많은 악행에 저항하는 것이야말로 합리적 이성을 추구하는 인간의 과제라고 생각했다.

자기계발서가 넘쳐나고 있는 요즘 누군가 말했다. “누가 이 좋은 말들을 몰라서 이러냐? 실천하기 어려워서 그러지.”라고. ‘앎’이 진정한 ‘앎’이기 위해서는 반드시 ‘행동’이 수반되어야 한다. 이 간단하면서도 울림이 강한 진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많은 현자(賢者)들에 의해 회자되었다. 그러나 실천은 늘 어려운 법?!

 

반성이 없다면 미래도 없다.

공자님 말씀을 들어보자.

제나라 경공이 공자에게 정치(政)에 대해 물었다. 공자가 답하길 “군주는 군주다워야 하고, 신하는 신하다워야 하고, 아버지는 아버지다워야 하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합니다.” (『논어』, 「안연」)

위에서 공자가 강조한 것은 ‘자기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라’는 것이다. 각자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에 비로소 정치가 바르게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른바 공자의 ‘정명(正名)’이다. 나는 종교와 과학의 미래도 ‘정명하는 것’에 그 운명이 달려 있다고 본다.

예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사랑’이다. 그것도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종교를 이유로 자행된 전쟁들과 그로 인해 희생된 수많은 죄 없는 사람들을 우리는 역사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예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신다면 당신의 이름을 들먹이며 잘못된 ‘이웃사랑’을 펼쳤던 그들을 칭찬하실 수 있을까? ‘종교’란 삶에 지쳐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주며 권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잊지 않고 따스한 온정을 베푸는 사회의 정화장치가 아니던가?

과학은 인간의 수고를 덜기 위해 발전해왔다. 그것도 선택받은 소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이로움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 더운 여름을 시원하게 해 준 것도 과학의 힘이고, 짧은 시간에 멀리 데려다주는 것도 과학의 힘이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도 과학의 힘이고 방사능물질 오염도 또한 과학의 힘이다. 오늘날 과학은 이처럼 인간을 위하던 초심을 잃고 자본이나 권력의 노예로 전락하기도 했다.

종교가 신성하고 고귀한 겉옷을 벗고 낮은 데에 임하는 것, 다툼이 있는 곳에 사랑을 전하고 아픔이 있는 곳에 위로를 건네는 것, 그것이 종교다운 것이며 종교가 지향해야 하는 길이다. 과학도 이제 권력과 자본의 노예에서 벗어나 ‘돈 되는 일’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선택 받은 사람들’이 아니라 ‘인류 모두’를 위해서 말이다.

종교건 과학이건 무턱대고 믿는다는 것처럼 위험한 것은 없다. 인간이 인간다울 수 있는 까닭이 ‘사유함’에 있다면 자기가 믿는 바―그것이 종교건 과학이건―가 혹 저지를지도 모르는 잘못을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종교가 종교답고 과학이 과학다운 세상은 아직도 멀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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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시대와 철학>이 기획하여 진행하는 책읽기 코너입니다. 한 권의 책에 대하여 저자 혹은 역자, 학자와 전문가, 일반 독자와 편집자가 한 권의 책에 대해 다양한 시각의 책 읽기, 세상 읽기를 보여주는 기획입니다. <色 다른 책읽기>의 여덟 번째 책은 버트란드 러셀의 <종교와 과학>(김이선 옮김, 동녘 펴냄)으로, 이한오(성공회 신부), 손산(숭실대 정보사회학과 강사), 오상현(상지대 강사)님의 글을 실었습니다. 기존의 ‘4인 4색의 책읽기’의 변화된 기획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