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스타 싸이? ‘세계정신’은 이들이 최초![청춘의 고전 시즌3] -②

헤겔과 베토벤

 

강사 : 이관형(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정리 : 박태근(알라딘 인문 MD)???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출판사 알렙이 기획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 시즌 3 두 번째 강좌.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외래교수 이관형이 강연자로 나서 근대 철학과 근대 음악의 거장으로 꼽히는 헤겔과 베토벤을 겹쳐보며 철학과 예술을 통한 인간 정신의 자유가 어떻게 가능한지 살펴본다.

이날 강연은 바이올리니스트 최윤정, 피아니스트 최규진이 함께 연주한 베토벤의 <로망스>로 시작했는데, 정작 강연 안에는 음악이 흐르지 않았다. 하지만 소리만 없을 뿐 인간 정신의 자유가 만들어내는 화음은 어느 음악 못지않게 매혹적이었다. 헤겔이 전하는 묵직한 철학의 사유, 베토벤이 전하는 감각적인 음악의 사유에 들어가 보자. <편집자>

 

ⓒ알렙(조영남)

공교롭게도 베토벤과 헤겔은 1770년 같은 해에 태어났습니다. 서로 알고는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건 헤겔이 베토벤에 전혀 우호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살아서 로시니, 죽어서 베토벤’이란 말이 있는데 로시니는 생전에 각광을 받았고, 베토벤은 그렇지 못했거든요. 그래서 빈 고전파를 띄우기 위해 베토벤 영웅 만들기를 시도한 게 아니냐는 평가도 있습니다. 어쨌거나 전문적인 음악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도 베토벤 그리고 ‘짜자자잔’ 하는 <운명>은 다들 알고 있잖습니까. 오늘 강의에서는 베토벤과 헤겔을 차례로 살펴보면서 당대의 지적 배경과 의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세계의 세계화’는 근대의 산물이다

한동안 ‘글로벌’이 유행했지요. 그런데 요즘 글로벌이라고 하면 글로벌 금융 위기밖에는 없습니다. 글로벌, 그러니까 세계화라는 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데, 과거를 돌아보면 교류가 있었다고 해도 ‘세계가 하나다’라는 인식은 없었을 겁니다. 근대화가 되면서 그런 의식이 생겨난 거지요. 근대의 핵심은 상공업에 있는데, 농업에 기초한 이전 시대에서 벗어나 획기적인 삶의 변화가 생긴 겁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농업 사회에서 상공업 사회로 바뀐 거지요. 이 과정은 혹독했습니다. 산업혁명 초기에 어린이와 여성의 노동 참여가 그랬지요. 물론 이를 통해 여성이 참정권을 얻기도 했지만요. 세계화와 관련해, 당시를 지배한 제국주의를 생각할 수 있을 텐데요. 서양이 동양에 올 때 배에 태우는 세 부류가 있습니다. 선교사, 상인, 군인이지요. 이게 바로 근대의 표상인데요. 기독교와 자본주의와 폭력입니다. 무력과 상품과 종교를 매개로 유럽이 전 세계를 유린한 겁니다. 지금도 유럽의 평화 뒤에는 아프리카의 고통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많은 걸 보면, 우리는 여전히 그 세계를 벗어나지 못한 걸로 보입니다. 우리도 근대화에 성공한 국가죠. 그 증거가 바로 이 자리입니다. 우리가 지금의 생활 수준에 이르지 못했다면 베토벤이나 음악 이야기를 할 수 없었겠지요.

제가 왜 근대화, 세계화 이야기를 먼저 꺼냈느냐 하면, 바로 ‘세계정신’이란 표현을 헤겔과 베토벤에게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각각 철학과 음악에 세계정신을 담아낸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근대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중세에는 신이 주인이고 주어입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서면 인간이 주인이 됩니다. 인간이 주체가 되는 거지요. ‘신은 죽었다’는 표현도 근대에 들어서야 등장한 겁니다. 그런데 이때 신만 죽은 게 아닙니다. 자연도 죽습니다. 이성을 지니지 못한 존재는 곧 죽은 겁니다. 그래서 자연이 죽은 거지요. 이제 인간의 이성만 남았는데, 이런 생각을 시작한 데카르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물은 사유하지 않고, 정신적 세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동물은 기계와 똑같은 순수 메커니즘일 뿐이다. 누군가 동물을 때리면 그 동물은 곧 울부짖는다. 이것은 누군가가 피아노의 건반을 누르기만 하면 즉시 소리가 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자연은 인간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김춘수의 시에도 이런 말이 나오지요. “내가 그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데카르트의 이야기와 일맥상통하는 표현입니다.

앞서 말씀드린 제국주의를 통해 이런 근대정신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는데, 이 영향으로 사람들이 마주한 새로운 삶의 양식이 바로 근대입니다. 과거 로마나 몽골이 큰 영토를 장악했다고 해도, 사람들의 삶의 양식을 바꿔놓지는 못했기 때문에 세계화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근대에 이르러서야 ‘세계적’이라는 말이 가능한 거지요. 근대에 들어서면 그 사람이 유럽에 살든지 동아시아에 살든지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가잖아요. 물론 문화적 차이야 있겠지만요.

 

‘세계정신’ 탄생의 역설

 

그럼 베토벤과 헤겔이 활동한 독일의 근대화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괴테는 독일문학을 세계문학으로, 헤겔은 독일철학을 세계

▲ 베토벤. ⓒko.wikipedia.org

철학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베토벤에게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표현인데요. 베토벤도 독일음악을 세계음악으로 만든 사람이니까요. 그런데 왜 이들에게 ‘세계적’이란 표현을 쓰느냐 하면, 이들이 근대정신의 총아이기 때문입니다. 앞서 근대화와 세계화의 연관성에 대해 말씀드린 걸 떠올려보면 이해가 될 겁니다.

당시 독일은 유럽에서 후진국에 속했습니다. 독일이라는 하나의 국가도 형성하지 못한 상태였지요. 이런 후진국에서 각 분야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거장이 동시에 출현한 건 역사의 아이러니 아닐까요. 영국은 명예혁명과 산업혁명을 주도한 나라고, 프랑스는 풍요로운 농업 자원에 시민혁명이 더해져서 현실에서의 자유국가를 실현하는 상황이었는데, 독일은 시민이란 계급을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 혁명을 주도할 세력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계몽’에 집중한 거지요. 시민을 키워내야 했으니까요. 물론 당시 유럽 전역이 계몽주의의 열풍이었지만, 독일은 혁명의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여기에 더 집중을 한 겁니다. 이런 분위기에 현실에서의 자유국가 형성에서도 어려움을 겪으니 ‘사유의 자유’에 더욱 힘을 쏟은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프랑스 혁명이 터졌을 때, 유럽의 지식인들이 열광을 했지요. 자유, 평등, 사랑의 정신에 입각한 정치 제도를 만들 수 있겠다고 생각한 겁니다. 그런데 혁명의 성공 이후 공포정치가 나타났지요. 로베스피에르 같은 사람이 꿈꾼 건 절대적 자유와 평등인데 ‘절대적’이라는 게 현실에서 가능할 리가 없잖습니까. 여기에서 이탈한 사람들을 가차 없이 죽이기 시작하는데, 결국 그 자신도 교수대에서 목숨을 잃게 된 거지요. 이런 상황을 보고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시작합니다. ‘절대 자유는 현실에 없는 게 아닐까?’ 이런 의문을 품으면서 사상에서의 자유를 꿈꾸게 된 겁니다.

당시 나폴레옹이 자기네 나라를 쳐들어올 때 지식인 사회는 이를 크게 반겼는데, 프랑스 혁명을 자기 나라에 전파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오죽하면 헤겔이 <정신현상학>을 쓰다가 나폴레옹 군대가 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서는 “저기를 보라, 말을 탄 세계정신이 지나간다.”고 말하기까지 했겠습니까. 베토벤은 어떻습니까. ‘보나파르트’라는 곡을 만들어 헌정하려고도 했지요. 그런데 아시다시피 어떻게 됐습니까. ‘보나파르트’라는 곡이 <영웅>으로 바뀌지 않았습니까. 혁명이 현실에서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거지요. 이런 답답함이 사유와 내면에 집중하게 된 결과를 낳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독일에서 비슷한 시기에 대문호, 대철학자, 대음악가가 나온 거지요.

 

헤겔의 자유; 예술, 철학, 종교

 

이제 헤겔과 베토벤이 자유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헤겔은 독일에서 분열을 봤습니다. 분열된 국가 그리고 분열의 소산인

▲ 헤겔. ⓒgreenbee.co.kr

근대, 두 가지 분열을 동시에 본 겁니다. 근대는 세분화되어 각각 독자적 발전을 추구하거든요. 정치권력 분권, 경제적 분업, 분과 학문이 그 모습이지요. 한편 근대는 통합이기도 합니다. 시장 원리로의 통합 말입니다. 그러니까 돈 없으면 살 수 없는 세상이 된 거지요. 돈은 많아졌는데 돈에 대한 면역 체계는 떨어졌다고 하겠습니다. 이렇듯 근대는 분열과 통합이 동시에 일어나는 과정인데, 헤겔은 여기에서 분열을 본 겁니다. 무슨 분열을 봤느냐. 바로 주관과 객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자연과 정신, 이론과 실천, 진리와 도덕, 자유와 필연의 분열과 대립입니다.

근대 이전까지는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삶이었지요. 그런데 근대 문명의 발달이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소원하게, 서로 소외시키게 만들었습니다. 이제 자연은 인간 앞에 놓인 대상이 된 겁니다. 이런 주인과 대상 간의 분열을 철학에서는 주관과 객관의 분열이라고 합니다. 자연과 정신이 나뉘는 거지요. 이때부터 인간의 사유는 무한을 지향하기 시작합니다. 자연을 한계로 보고 그걸 넘어서려 하는 겁니다. 여기서부터 자연과 정신의 조화는 없습니다. 근대 자체가 이 조화를 깨뜨리고 나온 거니까요. 자연과 조화롭게 산다는 건 동물적 삶이겠지요. 그런데 인간은 이미 선악과를 따먹은 겁니다. 문명화의 길에 들어선 거지요.

저는 근대 이후 둘의 화합은 불가능하다고 보는데, 인류가 파멸로 간다는 세간의 말이 어쩌면 맞을지도 모릅니다. 헤겔이 말한 분열이 바로 이겁니다. 그는 여기에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말하는데, 예술, 종교, 철학(학문)이 인간 정신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라고 본 겁니다. 자연 세계는 법칙에 따라 움직입니다. 돌이나 인간이나 중력의 법칙에 따라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건 매한가지잖아요. 이에 비해 인간의 사유는 법칙에 구속받지 않고 여러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자유의 가능성은 결국 정신에 있는 것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 헤겔이 볼 때는 그게 바로 예술, 종교, 철학이라는 겁니다. 절대정신이 실현되는 영역이 이 셋이라는 거지요.

오늘은 예술에 대해 얘기해볼 텐데요. 헤겔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하찮게 봤습니다. 특이하죠? 우리 상식에는 자연이 예술보다 아름답지 않습니까? 칸트도 우리처럼 생각했거든요. 예술은 자연의 모방일 뿐이라고요. 그런데 헤겔은 알프스를 보고도 ‘무한하게 반복되는 무미건조한 형식의 나열’이라는 재미없는 말만 했거든요. (웃음) 자연이 아름답다는 건 기껏해야 ‘조화롭다’ 정도라는 겁니다. 헤겔은 인간의 정신을 훨씬 높이 평가했습니다. 흙에서 나온 인간이 흙을 사유하게 되었다는 데서 의미를 찾은 거지요. 이걸 가능하게 해준 게 바로 정신이니까요. 그래서 헤겔이야말로 진정한 근대주의자라고 불리는 겁니다.

헤겔은 예술이 가장 발전한 시대를 고대 그리스 시대로 꼽습니다. 헤겔은 예술이 상징적 예술 형식, 고전적 예술 형식, 낭만적 예술 형식으로 발전해왔다고 보는데, 상징적 예술 형식의 단계에서는 인간의 의식 수준이 자연의 풍요로움을 따라가지 못한 상황이라고 보고, 고전적 예술 형식의 단계에서는 인간과 자연이 가장 잘 조화를 이루던 때라고 보는데, 이걸 잘 드러낸 게 그리스 건축이라는 겁니다. 마지막 낭만적 예술 형식에 이르면 무한한 인간 정신이 유한한 자연을 압도하기 때문에 예술의 아름다움은 더 이상 발견될 수 없는 거지요. 예술을 통해서는 정신의 자유가 드러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종교와 철학을 이보다 높은 단계로 보고, 철학을 통해서만 인간 정신의 자유가 드러날 수 있다고 한 겁니다. 이제 그림이 그려지시죠?

정리하면 헤겔이 보기에는 철학을 통해 세계에 대한 개념적 파악을 하는 게 인간이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자유인 겁니다. 그런데 제가 해보니까 전혀 자유롭지 않더라고요. 매일 책만 읽는다고 아내에게 구박을 받습니다. (웃음) 개념적 파악과 현실적 상황의 괴리 때문이겠지요. (웃음) 어쨌든 헤겔은 이렇게 봤다는 거죠. 제가 농담처럼 말씀드렸지만, 어떤 면에서는 헤겔에 동의하는 부분이 있어요. 철학 공부를 하다 깨닫는 희열이 있거든요. 그런데 정말 예술, 종교, 철학 빼고 자유로울 수 있는 게 있을까요? 저도 찾아보려 노력했지만 현실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습니다. 헤겔이 유효한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베토벤의 음악; 정신적인 생명을 감각적인 생명으로

이제 베토벤을 살펴볼까요. 그런데 헤겔은 베토벤에 대해서는 입도 뻥긋 안 합니다. 모차르트나 로시니에 대해서는 극찬을 하면서도 베토벤에 대해서는 말을 안 했거든요. 헤겔 전집에 베토벤이라는 이름이 아예 나오질 않습니다. 왜일까요. 이번에는 베토벤이 말하는 자유가 무엇인지 살펴봅시다. 베토벤은 형편이 좋지 못했고, 그래서 음악을 하는 과정을 보면 생계를 위한 모습도 종종 보입니다. 그 삶을 살펴보면 베토벤이 공부를 깊이 있게 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그런데 로맹 롤랑의 <괴테와 베토벤>(웅진닷컴, 2000)을 보면, 베토벤이 “음악은 정신적인 생명을 감각적인 생명으로 옮겨주는 행위”라고 했다는 부분이 나옵니다. 헤겔과 똑같은 말인데요. 예술이라는 건 인간 안의 정신을 감각화시키는 거라는 말인데, 헤겔을 지지하는 사람들이야 이렇게 생각하지만 보통은 이렇게 어렵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술이라는 건 아름답게 꾸민다거나 인간의 정서에 도움을 준다거나, 이렇게 생각을 하겠지요.

어쨌든 헤겔과 베토벤이 이 부분에서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헤겔도 예술이 자유의 영역인 이유는 인간 정신을 감각적인 형태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라고 말했거든요. 달을 가리키는데 달을 봐야지 왜 손가락을 보냐는 이야기가 있지요. 헤겔의 예술관은 손가락을 보는 겁니다. 예술 작품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입니다. 예술 작품 속에 진리가 들어있고, 예술 작품은 진리가 감각화되어서 나타났다는 의미입니다. 물론 헤겔처럼 진리를 찾기 위해 음악을 듣는다면 너무 피곤하겠지요. (웃음) 예술 작품이 주는 미라는 건 진리가 던지는 미가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거든요. 그러니까 얼마나 진리를 잘 드러내느냐에 따라 좋은 작품과 나쁜 작품이 가려지는 겁니다. 헤겔 미학은 그의 철학과 함께 헤겔 사후 현대 사상에서 많은 공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과연 예술이라는 게 정신을 감각화시킨 것인지, 예술이라는 게 과연 진리를 가리키는 손가락인지. 이 부분에서 헤겔과 베토벤의 생각이 겹치는 겁니다. 헤겔과 베토벤은 다른 영역에서 활동했지만, 각자의 영역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세계와 정신의 진리를 철학과 음악을 통해 나타내고자 했다는 거지요. 헤겔이 베토벤에 대해 언급하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둘 사이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고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그럼 구체적으로 베토벤의 음악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지요. 오카다 아케오의 <상식으로 꼭 알아야 할 서양 음악사>(삼양미디어, 2009)에 나온 내용을 간략히 정리해보았는데요.

“고전주의 이전의 음악은 귀족들의 전유물이었다. 18세기 중엽 시민계급의 성장과 계몽주의의 전개와 함께 고전주의가 출현하였으며 이로부터 근대 시민을 위한 음악이 시작된다. 그렇지만 음악적으로 귀족 세계와 연을 끊게 되는 것은 고전주의(빈 고전주의)의 3대 거장 중에서도 베토벤에 이르러서다.”

▲(오카다 아케오 지음, 이진주 옮김, 삼양미디어 펴냄). ⓒ삼양미디어

그러니까 베토벤 역시 귀족의 후원으로 연명을 했지만 귀족 세계를 드러내는 음악의 형식을 처음으로 거부했다는 겁니다.

“교향곡을 예로 들면 하이든과 모차르트의 경우 제3악장은 반드시 미뉴에트를 쓴다. 그리고 미뉴에트의 중간에는 민중적인 성격트리오가 들어간다. 귀족의 만찬에 농민들도 초대하여 양자가 어우러짐을 상징하기 위해서이다. 그렇지만 이런 화해는 귀족의 덕과 포용력에 의한, 즉 귀족의 우위에서 이루어지는 일시적인 화해, 위장된 화해에 불과하다. 베토벤은 여기에 교향곡 제1번 제3악장에서 보듯 제목은 미뉴에트이지만 실제로는 스케르초를 집어넣는다. 미뉴에트에서와 같은 화해는 더 이상 없다.”

그래서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정말 시민을 위한 음악이 시작되었다고 하는 겁니다. 보통 빈 고전주의를 시민 음악의 시작으로 보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귀족 세력과의 결별은 베토벤에 와서야 가능했다는 거지요. 또한 마지막 악장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대개 4악장은 해피엔딩으로 끝나거든요. 그런데 베토벤의 6번 전원 교향곡을 보면 마지막 악장에서도 계속해서 상승합니다. 타협을 하지 않는 거지요. 베토벤 9번 합창 교향곡도 특이한데, 이 합창에는 천 명, 만 명이 참여할 수 있거든요. 모차르트의 음악에는 이런 참여가 불가능합니다. 귀족적이고 선이 가늘기 때문이지요. 이런 면에서 베토벤에 이르러서야 근대 시민의 음악이 비로소 시작되었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베토벤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지요.

이처럼 베토벤과 헤겔은 사유와 정신의 자유를 보여주는데, 제 생각에는 인류사가 지속하는 한 두 사람은 거의 불멸의 존재로 남을 거라고 봅니다. 두 사람이 다룬 주관과 객관, 정신과 자연의 분열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은 문제이고, 둘 사이에서 나름의 자유를 보여준 두 사람의 철학과 음악의 수준을 우리는 여전히 뛰어넘지 못한 걸로 보이거든요. 현대 철학에서는 여전히 헤겔 죽이기가 과제인데, 이는 그만큼 헤겔이 쉽게 죽지 않는다는 방증이기도 하니까요.

전통적으로 진선미란 세 가지 정신적 가치가 있는데, 진리를 모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듣고, 선이 없으면 나쁜 놈 소리를 듣기 쉽습니다. 그리고 미의식이 결여되면 센스가 없다는 평가를 받지요. 사실 선이 없는 게 제일 안 좋은 거죠. 물론 사회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 진리를 모르는 것도 치명적이겠지만요. 그나마 제일 문제가 덜 되는 게 미적 감각입니다. 그런데 사회가 바뀌면서 경제적인 소외나 복지뿐 아니라 문화적 소외, 문화적 복지를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제 미의식에서 있는 자와 없는 자가 나뉘는 겁니다. 그래서 요즘 젊은 친구들은 미의식이 결여된 걸 창피한 일로 여깁니다. 어쩌면 오늘 헤겔과 베토벤을 불러내 인간의 자유를 철학과 예술에서 찾아본 까닭도 여기에 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근대에 대한 평가는 각자 다를 수 있겠지만, 근대에 드러난 이 ‘세계정신’은 여전히 눈여겨봐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오늘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소리가 나오지 않는 음악, 진짜 음악이다?[청춘의고전3]- ①

<장자>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강사 : 전호근(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정리 : 박태근(알라딘 인문 MD)

 

 

?* 본 기사는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함을 알려드립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프레시안>, 출판사 알렙이 기획한 ‘교양 대한민국, 청춘의 고전’ 시즌 3가 지난 1월 문을 열었다. ‘청춘의 고전’은 지난 두 해 영화와 미술을 고전과 함께 읽어가며 젊음의 공간 홍대 앞에 철학의 열기를 불어넣었다. 이번 시즌 3는 정독 도서관으로 자리를 옮겨 음악의 선율과 철학 고전의 만남을 시도한다. 1월 9일 첫 강을 시작으로 6월 30일까지, 매월 둘째, 넷째 주 수요일 오후 7시부터 9시까지 총 12강으로 진행된다.??

국악과 오페라, 재즈와 힙합, 비틀즈와 싸이까지, 각양각색의 음악들이 어떤 고전을 만나 새로운 화음을 만들어낼지 기대가 된다. 첫 강좌는 침묵의 음악으로 불리는 존 케이지의 ‘4분 33초’와 <장자>의 음악론을 겹쳐 읽으며 음악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지난 1월 9일, 뜬금없는 성덕대왕신종 타종 소리로 시작된 전호근 교수(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의 강의로 들어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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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들었던 하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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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들려드린 소리는 에밀레종으로 알려진 신라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입니다. 왜 이 소리로 강연을 시작했는지를 염두에 두시고 오늘 강의를 따라와 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 들어볼 음악은 음악의 근본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는 음악입니다. 장자는 음악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을 던진 사람입니다. 그는 전국시대 사람인데, 그때는 말 그대로 전쟁의 시대였습니다. 그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게 바로 맹자와 장자입니다. 맹자가 활동했던 무대는 천하입니다. 천하를 다스리려고 하는 거지요. 장자는 반대로 천하를 다스리지 말아야 한다는 쪽입니다. 그래서 장자의 활동 무대는 강호입니다. 강호는 강과 호수입니다. 강과 호수에서 자유로운 존재는 물고기입니다. 물고기가 강과 호수에서 자유로운 것처럼 사람도 자유롭게 살아야 한다, 이게 장자의 도입니다. 지향이 다른 거죠.?

그래서 맹자와 장자가 지향하는 음악도 다릅니다. 우선 공자는 고전파 음악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공자는 엄격한 양식을 추구했기 때문에 클래식이 아니면 쳐주질 않았는데, 맹자는 클래식과 유행가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유행가라 하더라도 백성들과 함께 즐기면 높은 정치적 이상을 품은 것이기 때문에 높이 평가했고, 클래식이라 하더라도 여민동락(與民同樂)하지 않으면 가치가 없다고 봤습니다. 공자와 비교하면 대중지향적인 음악가라고 봐야겠지요. 어떻게 하면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음악을 들을까, 이걸 중요하게 생각했던 겁니다.?

그런데 장자는 공맹과 또 다릅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음악론은 천뢰(天?)입니다. 하늘 천(天)은 자연을 뜻합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신성한 것이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고대 사회에서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다 신성한 존재였습니다. 이런 신성한 존재의 대표가 바로 천입니다. 초월의 영역에 있는 거죠. 유가는 천명지위성(天命之謂性)이라고 하여 이를 내면으로 끌어들였는데, 장자는 이를 자기 내면으로 끌어들이기보다는 자기가 자유로 나가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물론 장자는 연주를 하진 않았으니 그 음악론은 텍스트로만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장자의 음악론과 일치하는 오늘의 음악을 찾은 겁니다. 바로 존 케이지(John Cage)의 ‘4분 33초’입니다. 우리는 근대에 태어났기 때문에 이 음악을 듣는 거지, 아마 장자 시대였다면 4분 33초가 아니라 훨씬 길었을 겁니다. 다행입니다.(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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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음악을 넘어서려는 시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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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케이지의 음악을 듣기 전에 생각해볼 게 있습니다. 아까 천뢰 가운데 천이 자연이라고 말씀드렸는데, 그렇다면 자연을 잘 표현한 음악, 뭐가 있을까요? 비발디의 ‘사계’, 슈만의 ‘봄’,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 이외에도 셀 수 없이 많은 작품들이 있을 겁니다. 이런 자연에 대한 모사는 우리를 감탄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마치 ~ 같다’, ‘마치 ~처럼’이라는 겁니다. 장자와 존 케이지는 여기에 질문을 던지는 겁니다. 이따 들어볼 올리비에 메시앙(Olivier Messiaen)도 마찬가지고요. 우선 베토벤의 ‘전원 교향곡’을 들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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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토벤, ‘전원 교향곡’, 4악장 폭풍, 5악장 폭풍이 지나간 후의 평화(강연장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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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반부에 팀파니를 세게 치는 소리는 천둥과 번개를 뜻하고, 현이 떠는 소리는 비바람이겠지요. 바이올린 고음으로 빗소리를 표현하기도 하고요. 5악장에서는 목동의 풀피리 소리도 들리고, 바순으로 묘사한 새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듣는 게 작곡가의 의도에도 맞고 적당한 방법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런 음악에 나온 새소리가 정말 제대로 된 새소리인가 의문을 제기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바로 올리비에 메시앙입니다. 메시앙이 ‘새의 카탈로그’라고 하는 작품을 남겼거든요. 그중에서 꾀꼬리를 들어보겠습니다. 피아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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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비에 메시앙, ‘새의 카탈로그'(강연장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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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앙은 우리가 꾀꼬리 소리가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우리 입장에서 마음대로 묘사하는 거라고 말합니다. 인간들이 만들어낸 허무맹랑한 소리라고 하면서, 정말 새 입장에서 새소리를 표현하면 어떻게 되느냐는 관점에서 만들어낸 게 이 작품입니다. 새가 듣는 새소리와 우리가 듣는 새소리가 다르다는 말이지요. 같을 리가 있겠습니까. 같을 리가 없지요. 우리가 흔히 프랜시스 베이컨을 이야기하면서 종족의 이돌라(idola, 우상)를 이야기하는데, 이게 바로 종족의 이돌라입니다.?

그럼 이제 오늘의 주인공, 존 케이지 이야기를 들어보겠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어디를 가든 우리 귀에 들리는 대부분은 소음이다.” 방금 들은 꾀꼬리 소리가 사실 소음에 가깝지요. 우리가 전통적 음악에 익숙해져 있으니까 편안한 마음으로 듣기가 힘든 겁니다. 한 시간이 넘는 베토벤의 음악은 들어도, 메시앙의 8분 남짓한 꾀꼬리 소리는 듣기가 힘든 겁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 귀에 들리는 대부분은 소음입니다. “우리가 소음을 귀찮아하면 소음은 우리를 괴롭힌다.” 어떤 사람에게 음악이 다른 사람에게는 소음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주의 깊게 들으려 한다면 마침내 소음이 얼마나 환상적인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소음이야말로 경이로운 음악이다. 가장 자연스러운.”?

이제 ‘4분 33초’ 연주 영상을 함께 보실 텐데요. “음악이라고 하는 것은 음과 침묵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이 둘로 작곡을 하는 것이다.” 소리가 나는 게 있으면 안 나는 것도 있는 겁니다. 배경에 흐르는 음악과 앞쪽에 나오는 음악의 주파수가 같으면 우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습니다. 고요함이라는, 정적이라는 게 없으면 음악이 들릴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두 가지를 조합해서 작곡을 한다는 겁니다. “아무 것도 말하지 않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지금 티비를 통해서 이 공연을 보는 분들은 티비의 음량을 줄이고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그리고 끝나고 나면 또 자막이 나옵니다. 이 공연에 피아노 연주자로 나온 데이비드 튜더(David Tudor)의 이야기인데 “이 곡을 처음 연주할 때, 상당히 많은 예술가들이 와 있었습니다. 고함을 치고 대소동이 일어났지요.” 이게 4분 33초의 악보입니다. 무려 3악장으로 나뉩니다.(웃음) 이걸 악보로 만들어서 팔아먹었어요. 대단하지요.(웃음) 그럼 감상해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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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케이지 ‘4분 33초’ 악보.

어떠십니까? 공연 당시에는 난리가 났답니다. 왜냐하면 입장료가 있었거든요.(웃음) 데이비드 튜더는 뛰어난 피아노 연주자였는데, 저 사람도 4분 33초 동안 시계만 보다가 일어선 겁니다. 일종의 사건인데요. 오늘은 여러분들은 이 곡이 어떤 건지 알고 보셨기 때문에 사건이 되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겠지만, 만약 이런 걸 처음 경험했다면 그건 사건이었겠지요. 얼마나 황당했겠습니까. 연주자가 피아노 앞에 앉아서 기다릴 때의 정적, 기침 소리, 기대감, 설렘이 있을 테고요. 그렇게 긴장하고 기다리는데 아무 소리도 안 나고 연주도 시작되지 않으면 처음에는 갸우뚱하겠지요. 그러다가 웃음소리도 날 것이고, 화를 내기도 할 것이고, 걱정하기도 하겠지요. 이런 다양한 상황이 존 케이지가 의도한 겁니다. 소란이 크면 클수록 음량이 큰 음악이 되는 거지요. 이런 식으로 소음을 음악 속으로 끌어온 사람이 또 있습니다. 함께 들어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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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아이브스(Charles Ives), 고가 사다리 차의 종소리(강연장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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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곡에는 조가 없습니다. 장조나 단조가 없는 정말 다른 음악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소음이라고 했습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사람들이 다 놀랐지요. 그런데 아이브스는 우리가 실제 듣는 소리는 이렇다고 말하는 겁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고, 인간이 인위적으로 만든 소리에만 귀를 기울였다는 거죠. 만약 영화를 만들 때 우리 일상을 그대로 담아서 스크린에 올리면 깜짝 놀랄 겁니다. 실제 그런 영화가 있기도 하고요. 바로 그런 식의 음악인데, 그래서인지 1901년 즈음에 이 음악을 작곡했는데 50년이 지나서야 처음 연주가 됩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은 거지요. 차례로 들어본 이런 음악들이 음악의 근본에 대해 물음을 던진 사람들의 작품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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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음악, 대지의 음악, 하늘의 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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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이제 텍스트 속에서 이런 내용을 찾아보겠습니다. 장자의 음악론에 관한 대목을 해설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제물론(齊物論) 제1장인데요, 하늘의 음악은 소리가 없다는 제목을 붙였습니다. 정말 소리가 없거든요. 존 케이지 식으로 하면 소음일 수도 있겠고요. 앞에서 들은 음악을 통해서 소리가 없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짐작을 하실 수 있을 텐데요. 소리 없는 것을 어떻게 소리가 나게 할 것인가, 보이지 않는 것을 어떻게 보이게 하고 들리지 않는 것을 어떻게 들리게 할 것인가, 이게 존 케이지가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장자가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하고, 신라 사람들이 고민했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까 성덕대왕 신종 소리를 들려드린 겁니다. 같은 발상입니다.?

남곽자기라는 사람이 있는데 <장자>에서 도를 아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성곽 남쪽에 사는 사람인데, <장자>에는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도를 아는 사람으로 나옵니다. 이처럼 <장자>에서는 우리가 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고 비정상이라고 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나옵니다.?

안성자유가 앞에서 모시고 서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어찌된 일입니까? 사람의 몸뚱이는 참으로 말라버린 나무와 같아질 수 있으며 마음은 참으로 불 꺼진 재와 같아질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 안석에 기대있는 사람은 전에 안석에 기대 있던 사람이 아니십니다.”?

남곽자기가 현실의 세계가 아닌 도의 세계에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완전히 달라 보이는 거죠. 그 도의 세계를 음악에 빗대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음악에 빠져있을 때 상태는 다르잖아요. 그걸 얘기하는 대목입니다. 다음은 남곽자기의 대답입니다.?

“연아, 너의 질문이 참으로 좋구나! 지금 나는 나를 잃어버렸는데, 네가 그것을 알아차렸구나! 너는 사람의 음악은 들었을지라도 아직 대지의 음악은 듣지 못했을 것이며 대지의 음악은 들었어도 아직 하늘의 음악은 듣지 못했을 것이다.”?

음악을 들으면서 자기를 완전히 잃어버린 겁니다. 남곽자기가 도의 세계에 들어갔다가 나왔는데 그걸 음악을 통해서 말하는 겁니다. 우리가 음악을 감상하는 행위를 낮춰 보면 안 됩니다. 우리가 베토벤 음악을 듣고 감동했다는 이야기는 우리가 베토벤이랑 동일한 수준에 갔다는 말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인뢰(人?), 인간의 음악을 이해하시면 됩니다. 그럼 지뢰(地?), 대지의 음악은 무엇일까요. 글을 다시 보겠습니다. 사람의 음악, 대지의 음악, 하늘의 음악에 대해 묻는 부분입니다. 남곽자기의 대답을 잘 들어보면 음악에서 어떤 것이 표현되는지를 충분히 알 수 있습니다.?

안성자유가 묻습니다. “감히 그 이치를 여쭙습니다.”?

“대지가 숨을 쉬면 그것을 바람이라고 하지. 이 바람은 일어나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일단 일어나면 온갖 구멍이 소리를 내. 너는 저 멀리서 울리는 바람소리를 듣지 못했는가. 높은 산 깊은 숲 속에서 둘레가 백 아름이 넘는 커다란 나무의 구멍이, 어떤 것은 콧구멍 같고, 어떤 것은 입 같고, 어떤 것은 귀 같고, 어떤 것은 가로 나무 같고, 어떤 것은 나무 그릇 같고, 어떤 것은 절구통 같고, 어떤 것은 깊은 웅덩이 같고, 어떤 것은 얕은 웅덩이 같은데, 거기서 물이 급히 부딪치는 소리, 화살이 아는 소리, 꾸짖는 소리, ‘헉헉’ 들이마시는 소리, 외치는 소리, 볼멘소리, 웃는 소리, 아양 떠는 소리가 나지. 앞의 바람이 우우하고 불면 뒤의 바람이 따라서 웅웅 소리를 내. 가벼운 바람이 불면 가볍게 화답하고, 거센 회오리바람이 불면 크게 화답을 하는데, 사나운 사람이 지나가면 바로 모든 구멍이 텅 비어서 고요해지지. 너도 바람이 지나간 위에 나뭇가지들이 흔들흔들 살랑살랑 대는 모습을 본 적이 있겠지.”?

이게 바로 장자의 지뢰입니다. 흔히 자연의 음악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대대로 문장가들이 이 부분을 흉내 내어 글을 짓습니다. 박지원은 시골 사람 코 고는 소리를 이런 식으로 표현하기도 했는데요. 정말 대단합니다. 코 고는 소리를 물 끓는 소리, 톱질 하는 소리, 새끼 돼지가 새근대는 것 같다며 다채롭게 묘사하거든요. 아마 올리비에 메시앙이나 찰스 아이브스 같은 사람이 박지원을 만났으면 아주 좋아했을 겁니다. 자기처럼 소리를 들을 줄 안다고요. 우리는 그렇게 귀가 열려 있지를 않지요. 듣고 싶은 소리만 들으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상대방이 어떤 이야기를 해도 나를 변화시키지 못하는 겁니다.?

안성자유가 이렇게 말했다. “대지의 음악은 여러 구멍에서 나는 소리이고, 사람의 음악은 피리에서 나오는 소리인 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하늘의 음악이란 무엇을 말씀하시는 건지요?” 남곽자기가 이렇게 대답했다. “불어대는 소리는 만 가지로 같지 않지만 그 소리는 각자 자신의 구멍으로부터 말미암는데 모두가 다 그 스스로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여기지. 그렇다면 그 구멍들이 성난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은 누구일까.”?

각자 자기 소리를 내는데, 그 소리를 내게 하는 존재가 따로 있느냐 하는 게 문제가 됩니다. 남곽자기의 말에 따르면 이게 바로 천뢰(天?)인 겁니다. 남곽자기는 불어대는 소리가 만 가지로 같지 않다고 했는데 구멍의 생김새에 따라 소리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자가 자기의 소리를 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멍들로 하여금 각자의 소리를 내게 하는 존재는 그 스스로 소리를 내지 않습니다. 이런 생각은 <노자>에도 나오는데요. ‘태음(大音)’이라는 겁니다. 노자에는 태음과 비슷한 층위에 있는 것들이 여러 개 나오는데, 그중 하나가 대방무우(大方無隅)입니다.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없습니다. 우리가 네모를 네모라고 부르는 건 네 개의 모퉁이가 있기 때문에 그런 거잖아요. 그런데 가장 커다란 네모는 모퉁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 변의 길이가 무한이면 모퉁이가 없겠지요. 이게 대방무우입니다. ‘태음희성(大音希聲)’이 같은 이야기인데, 가장 큰 소리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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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소리를 담아낸 성덕대왕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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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들었던 성덕대왕신종의 소리를 다시 떠올려보지요. 성덕대왕신종은 그 아들 경덕왕이 아버지 성덕왕을 기리기 위해 주조를 시작해서 다시 그 아들에 이르러서야 완성이 됩니다. 이 종에는 이런 내용이 새겨져 있는데요.?

지극한 도는 형상 밖의 것을 포함하고 있다. 지극한 도는 보이는 것을 포함할 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도 포함한다. 그것을 살펴보아도 그 근원을 볼 수가 없다. 커다란 소리가 천지 사이에 진동하고 있다. 그렇지만 아무리 들으려 해도 그 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소리가 나는 종인데, 거기에 새겨진 글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신라인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을 소리로 만든 게 되겠지요. 장자가 이야기한 천뢰나 노자가 이야기한 태음을 신라인들이 작곡한 게 성덕대왕신종인 겁니다. 자기 아버지 성덕왕의 훌륭한 덕이 후대 사람들에게 전해지라는 마음을 담았기 때문에, 종소리의 여운이 길게 남도록 주조한 겁니다. 이게 신라 사람들의 들리지 않는 소리에 대한 해석입니다.?

다시 장자로 돌아가면 하늘의 음악은 사람의 음악과 대지의 음악 각각이 소리 나게 하지만 자기는 소리가 나지 않는 것입니다. 연주하지 않는 음악이지요. 존 케이지의 발상과 같습니다. 소문이라고 하는 뛰어난 연주자가 있었는데, 장자는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면 한 곡만 연주하는 것이고,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으면 모든 곡을 연주하는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어떤 연주회에 가서 베토벤의 교향곡을 들었다고 하면 그 한 곡을 듣고 온 겁니다. 그런데 어떤 연주에 가서 존 케이지의 음악을 들었다고 하면 수많은 음악을 듣고 온 거지요. 같은 말입니다.?

이처럼 장자와 노자가 말한 음악을 현대 음악에서는 존 케이지나 올리비에 메시앙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신라인들로 치면 성덕대왕신종의 소리입니다. 제가 들려드린 소리는 1964년에 녹음된 소리입니다. 아마 이런 음악들을 한 번에 연주한 연주회는 없었을 겁니다.?

장자는 자기 논리의 탑을 엄청나게 쌓아올리고 나서 다시 그걸 무너뜨립니다. 멋진 해결책을 내놓는 게 멋진 철학이냐, 아닙니다. 해결될 수 없는 문제를 내놓는 게 철학입니다. 우리가 오늘날 <장자>를 읽는다는 건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해결책이 중요해서 그걸 읽는 게 아니라 던진 질문이 유효하다는 말인 겁니다. 아마도 오늘 강의의 질문도 명쾌한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겁니다. 그래서 우리 삶이 어떤 점에서는 유용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도 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던지고 직접 마주하는 것. 그게 바로 아이브스의 음악이나 장자의 음악론이 던진 질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좀더 치열하게 이런 작품들에 대한 관심을 갖고 감상을 하신다면 더 많은 감동과 음악에 대한 견해를 가질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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