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 속의 이름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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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유년의 이름, 그 따뜻함

내가 배우처럼 세상을 살 수 있다면 이 세상을 놀이터로 여기고 즐길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이때 이름은 묘한 힘을 지닌다. 우리는 전통적으로 이름에 쓰이는 문자의 뜻에 의해 삶의 방향이 결정되기도 하고, 내가 나아가고자 하는 지향에 의해 이름이 새로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믿음을 은연 중에 가지고 있다. 더러는 이름을 바꾸면 미래가 변할 수 있다고 믿기도 한다.

내가 어릴 적에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나를 “리야”라고 불렀다. 정말 나는 내 이름이 ‘리야’라고 믿었으므로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을 마치고 교실에서 선생님께서 “김성리”를 부를 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꿋꿋하게 내 이름이 호명되기를 기다렸다. 출석부가 접히고 ‘탁’ 소리를 내며 교탁 위에 내려지는 순간, 놀랍게도 한 남자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큰 소리로 말했다.

“리야 이름 안 불렀는데예”

바닷가 작은 마을에서 특이한 병 치례와 아버지의 사회적 지위로 인하여 나는 꽤 알려진 아이였기 때문에 처음 만난 선생님과 많은 아이들은 남자 아이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거의 동시에 나를 바라보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에 나는 당황했고, 내가 호명되지 않았다는 사실에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키가 크고 마른 몸집을 하셨던 선생님께서는 천천히 나에게로 와서 “네 이름은 김성리다. 잘 기억해라”하시며 머리를 만져 주었다. 집으로 오는 내내 아이들은 비실비실 웃었고, 용감했던 그 남자 아이는 신기한 듯 나를 쳐다보았다. 내 머릿속은 뒤죽박죽 헝클어져 있었고, 대문 앞에서 할머니가 “리야”라고 부르는 소리에 대답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망설이게 되었다.

그날 오후에 아버지의 직장 때문에 거제도 내의 다른 지역에 계시던 아버지와 어머니가 동생을 데리고 오셨다. 나는 심각하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 했지만, 모든 가족들은 큰 소리로 웃기만 하고 그 어떤 설명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만은 그 자리에 내가 없는 것 같은 착각에 내 머릿속은 더 어지러웠다.

어둑해지는 데도 불구하고 나는 뒷마당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슬프고 외롭고 뭔가 분하고 억울했다. 아버지가 내 앞에 앉아 막대기를 집어 흙 위에 글자 세 개를 적어서 내게 보여 주셨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글자를 하나하나 짚어 가며 읽었다. “김, 성, 리, 네 이름이다. 리야는 우리가 너를 이뻐해서 부르는 이름이고”

그날 이후 지금까지 “리야”라는 이름은 나에게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한 기억이 되었다. 나를 “리야”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모두 나의 어린 시절을 알고 있다. 내가 어디에서 태어났으며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의 성격이 어떠했으며 어떤 병을 앓았는지 안다. 심지어 내가 한글을 언제 읽고 쓰게 되었는지까지 안다. ‘리야’라는 이름 속에는 내 유년의 시간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놓아버릴 수 없는 유년의 기억

‘이숙자’라는 이름에는 할머니의 유년이 들어 있다. 할머니에게는 언니가 두 명, 오빠가 한 명 있었다. 오빠와 언니들은 할머니가 중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이미 타지에서 학교에 다니거나 직장에 다니고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고향에 남겨졌던 여동생을 수소문하여 연락이 닿았음을 볼 때, 할머니는 부모형제의 사랑을 받은 막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오빠와 언니들은 일본에서 살고 있었다. 해방이 되고 일본에서의 터전을 미처 정리하지 못해 귀국을 미루는 사이 국교는 단절되어 어린 동생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할머니는 현실적으로 형제를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잊다시피 살았지만, 오빠와 언니들은 막내를 포기하지 않고 할머니를 찾았다.

“오빠는 안 만날라쿠데. 언니가….둘이 나한테 편지가 왔데….”

“오빠가 실망이 컸다 아이가. 언니도 실망하고….”

“실망 안 하겄나. 실망했제. 마이 실망했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오빠는 병든 여동생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시작했다. 때로는 끼니 잇기가 힘에 겨운 생활이었기에 오빠가 정기적으로 보내 주는 돈은 유용했다. 언니들은 간헐적인 도움을 주는 대신 잦은 전화로 동생의 안부를 챙겼다. 오빠는 세상을 하직하는 순간까지 여동생을 내버려둔 세월과 고향 사람들과 세상을 용서하지 않았다.

“몇 해 전에 올케라는 사람이 왔다갔다. 오빠가 죽었다카더라. 일본 여자데. 오빠가 너무 마음 아파했다고….보고 싶어 했다고….”

“그래서 자기가 왔다고 하더라. 올케가 오빠 대신 나 보고 가서 말해 주겠다고. 흐응…. 내가 어찌 살고 있는지, 내가 어떤 모습인지 말해 주몬 죽은 오빠가 아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마치 고요한 마당을 스쳐 지나가는 바람처럼 주위의 사람이 죽어서 가마니에 둘둘 싸여 갈 때도 할머니는 슬픔을 느끼지 않았다. 아니 느낄 수 없었다.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죽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빠의 죽음은 다르게 다가왔다. 자기의 유년의 한 켠에 구멍이 뚫리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고 어리게만 여겼던 막내 여동생의 고단한 삶은 뒤늦게 오빠의 한이 되었고, 그런 오빠에게서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 사랑을 느꼈다. 끝까지 여동생을 만나지 않은 것은 오빠의 가슴 아픈 배려가 아니었을까. 매달 오던 돈은 오빠 사후에도 한 동안 보내져 왔다. 올케의 말에 의하면 오빠의 부탁이 있었다고 한다.

“인자 돈이 안 온다. 올케도 죽었는지 아니면 어디 요양원에서 쓸쓸하게 있는지. 지 살아 있는 동안에는 돈 보낸다고 하데. 오빠가 죽기 전에 신신당부하고 부탁했다 카데.”

어린 시절의 기억은 그 자체가 에너지가 되어 현재까지 지속된다.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어린 시절을 되돌아보면, 유년기의 행?불행을 떠나 언제나 부모님의 사랑과 형제들과 함께 했던 시간이 기억 속에서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내가 ‘리야’라는 이름만으로도 외롭지 않듯이 ‘숙자’라는 이름에는 이제는 할머니만이 알 수 있는 관심의 시간들이 살아 있는 것이다.

 

내려놓을 수 없기에 고통이 되어버린 과거의 이름

숙자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일 년 동안 집에서 놀았다. 조신하게 살림살이를 배우고 친구들과 어울려 수다를 나누는 생활에 싫증이 나면서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마침 집안에 서울에 가서 학교를 다니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여고에 진학하고 싶은 생각은 더 간절했다. 일찍 객지에 나가 자기 앞가림을 하는 오빠와 언니들의 영향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집안이 좀 괜찮았다. 그래도 울산에는 학교가 없는 기라.”

집안 살림살이가 괜찮은 덕에 숙자의 여고 진학은 쉽게 결정이 났고, 숙자는 시험을 쳐서 부산공여에 진학했다. 부산에 하숙집을 정해 놓고 토요일이 되면 울산 집에서 지내다 일요일에 다시 부산으로 돌아오는 일상이 반복되었지만, 숙자의 자긍심은 나날이 높아갔다. 일제 강점기에 여고를 다니는 여성이 많지 않았기에 교복을 입고 기차를 타면 한복을 입은 또래 여성들의 부러운 마음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많은 시간이 흐른 후 숙자는 할머니의 기억 속에 교복 입은 여고생의 이미지로 남아 있다. 1940년대의 여고생, 단발머리를 하고 책가방을 든 얌전한 여고생의 이미지는 어쩌면 할머니의 영혼에 남아있는 또 다른 상처일지 모른다. 할머니는 ‘단발머리’를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했다.

“그때는 전부 단발이라. 단발머리하고 있으모 공여생인기라.”

“하모. 단발머리하고 교복입고 기차 타 봐라.”

한 때는 단발머리가 억압과 획일화된 교육의 실체로 지목되어 지탄을 받은 적이 있다. 그런 현실적인 시간 속에서도 할머니 기억 속의 단발머리는 꿈 많던 공여생인 숙자와 동일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숙자는 이제는 절대로 되돌아 갈 수 없는 기억 너머의 지층 깊숙한 곳에 홀로 남겨져 있다.

숙자로부터 60년도 더 되는 시간이 흘러갔고 많은 사건들이 지나갔다. 한 여인의 곁으로 셀 수 없는 바람과 흙이 마치 먼지처럼 날아갔다. 얼마나 많은 꽃들이 피고 지고 또 피었으며, 이름을 알 수 없는 풀들도 태어나고 죽기를 수없이 반복했던가. 그러한 시간 동안 숙자는 할머니의 무의식 깊숙한 곳에서 숨죽이며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의식적으로 회피하고 부정하는 것은 그것을 알고 있다는 증거가 된다. 할머니가 숙자를 기억 속에 묻어 놓고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것은 유년의 기억이 현재는 고통으로 재현되기 때문이다. 숙자가 꾸었던 그 많던 꿈들은 자기 의지와 관계없이 소멸되었고, 숙자는 바로 할머니의 유년기와 동일시되기 때문이다. 숙자는 할머니의 타자였던 것이다.

 

저 푸른 하늘 밑에는

내 고향 내 살던 집이 있겠지.

 

집옆에서는 올해에도 살구나무에

활짝 핀 살구꽃이 피었겠지

마당 뒤에 있는 감나무에서

감꽃이 떨어지면

바가지로 주워담아

실로 꿰어서 목에 걸던

그 어린 시절이 그립구나

– <고향> 부분 –

숙자가 살던 집에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숙자는 하얀 감꽃을 주워 실에 꿰어 목걸이로 만들어 목에 걸었다. 어린 적 우리 집 뒷마당에도 감나무가 있었다. 나무가 크지 않아 감꽃이 많이 열리지 않아서 나는 이웃집 마당에 떨어져 있는 하얀 감꽃을 주워 목걸이로 만들었다. 감꽃은 금방 시들었지만, 그 향기는 오랫동안 코끝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가 병든 몸으로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고향>)”고 있다. 병은 숙자와 할머니의 연결 고리를 끊어 버렸고, 숙자는 기억 속에 묻히게 된 것이다.

 

과거를 말해주는 흔적, ‘숙자’.

숙자라는 이름을 부르지는 않았으나 할머니는 숙자로 살았던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시로 대신 풀어 나갔다.

 

삽짝거리로 나와서

돌다리를 건너

사랑하는 모교에 가고 싶구나

칠계단을 올라가면

우편에는 벚꽃나무와

좌편에도 벚꽃나무가

엉겨 붙어서 봄이 되면

벚꽃이 장관이더라.

(……)

친구들과 사진 찍던

그 추억이 떠오르며

선생님과 기념촬영도 했건만

모교가 잊혀지지 않고

사무치도록, 꿈속에서도 그리워지네.

 

언제나 가보리

언제나 보고 싶어

먼 산만 바라보네.

– <고향> 부분 –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숙자는 결코 지워진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언제나 그리웠고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지만, ‘내가 숙자’라고 말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먼 산만 바라보’듯이 그렇게 숙자를 가슴 깊이 묻었던 것이다. 한 사람에게는 지금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그 과거의 과거가 함께 있지만, 누군가는 살아가기 위해 자신의 과거를 기억 깊숙이 묻어버리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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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프란츠 파농 『검은 피부 하얀 가면』[청춘의 서재]

김 범 수(한국철학사상 연구회 회원)

 

며칠 전 머리를 하러 갔다. 동네 미용실이란 원래 아줌마들의 수다 공간이다. 나는 남자인 관계로 그 수다에 끼지 않는다. 단지 구경만 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네 미용실을 갈 때면 사람이 없는 시간에 주로 간다. 그런데 이날은 이미 손님으로 두 명의 아줌마가 있었다.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마냥 구석에 앉아 있었다. 무려 한 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책을 보는 척하면서 귀는 아줌마들 수다에 향해 있었다. 그렇지만 별로 유익한 정보는 없었다. 드라마 얘기. 학원 선생님 얘기. 아이 잘 키우기 위한 수다도 있었지만 드라마에서 잘 생긴 사람 얘기는 왜 저렇게 하는지… 수다를 듣느니 차라리 여성 잡지를 보는 것이 나을 것도 같았지만, 뭐 자리가 자리인지라 여성 잡지 보기도 민망한 상태였다. 그저 가지고 다니는 책의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아줌마들이 가고 내 차례가 되자 미용사는 나 역시 수다의 대열에 합류시키려고 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수다에 끼고 싶지가 않았다. 가오가 안서지 않는가? 아저씨가 아줌마 수다에 동참하다니… 눈치를 살피던 미용사는 친근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책 많이 읽으시는 것 같은데 가실 때 제가 읽을 수 있는 책 좀 추천해 주세요.”

에고. 또 골치 아프게 됐군. 책 추천을 안 하자니 그렇고 하자니 그렇고. 참 거시기한 상황이다. 내가 아는 책은 어려운 책인데 그런 책을 추천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안 하면 매우 불친절한 사람처럼 보이고. 그 여자는 분명 의도하지 않았지만 사교 언어의 진수를 보여 주었다. 형식적인 얘기를 넘어서 진정성마저 느껴지는 그 한 마디가 나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도대체 무슨 책을 추천해야 하지? ‘차라리 영화를 추천하라고 하지. 왜 하필 책이야?’ 속으로 뇌까렸다.

영화 <방가방가>가 생각이 낫다. 왜일까? 그리고 조금 오래 된 영화지만 <바리케이트>라는 영화도. 두 영화 모두 외국인 노동자가 출현한다. 그 외에 공통점은 없는 듯하다. 오히려 선명하게 차이점이 부각된다. 이런 저러한 생각을 하다가 정작 미용사의 요구에는 어떤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 여자랑 수다를 떨어줘야 예의일 것 같다는 생각만 했다. 그렇지만 책 얘기는 싫었다. 이럴 때 화제 전환이 최고다. ‘밥 먹었어요?’

아! 그런데 여기에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여기서는 화제 전환도 되지 않는다. 그냥 노골적으로 책에 관한 이야기를 해야 한다. 젊은이가 젊은이에게 책을 소개한다. 괜히 낯간지러운 짓하는 것 같다. 그래서 두 편의 영화와도 관련되면서 불쑥 떠오른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요즘은 할 수 없지만 하릴없을 때 흔히 하는 놀이가 있다. 먼저 tv 앞에 앉는다. 리모컨으로 tv를 켠다. 리모컨으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린다. 한 바퀴, 두 바퀴. 이렇게 놀다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된다. 어느 날인가 여느 때와 같이 TV를 켰다. 채널 돌리기 놀이를 하다가 채널을 고정한 곳은 다큐멘터리. 남아메리카 원주민의 일상을 소개하고 있다. 최소한의 가릴 곳도 제대로 가리지 않은 그들의 일상이 재밌게 다가왔다. 늘어진 여성의 가슴도 여과 없이 들어왔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게 됐다. ‘아니 공중파에서 여성의 가슴이 노출되어도 되는 거야?’ 만일 저 모습이 서양 여성이었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도 난리 났을 법도 하다. 여성에 대한 시각만 그럴까?

몇 해 전부터 한국계 외국인, 정확하게 보자면 서양인의 피와 섞은 남자 배우들이 인기가 좋다. 다니엘 헤니, 데니스 오, 줄리엔 강 등. 키도 크고 잘 생겼다. 여성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하다. 이들이 혹시 적당히 벗고 나와 준다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드라마에서 이들의 샤워 신이라도 있다면, 완전 계 탄 날이 될 것이다. 그렇지만 왜 원주민은 안 되는 것일까?

여기에는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 우리가 바라보는 백인과 유색인에 대한 상상적 이미지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각은 우리의 심층 속에 자리잡고 있다. 너무도 당연하게 느끼는 것을 보니.

이런 얘기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 있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이 그것이다. 이 책은 흔히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책이라고 한다. 말이 어렵다. 탈식민지주의라고 말해야 할까? 그런데 이 말도 어렵다. 우리가 식민지가 아니기에 무슨 해괴한 소리인지.

먼저 프란츠 파농에 대한 얘기를 해보자. 프란츠 파농은 서인도 제도의 한 섬에서 태어났다. 프랑스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이후 알제리로 이동해서 여기서 정신과 의사로 활동하면서 알제리 독립 운동에 가담하기도 했다. 파농은 알제리가 독립하기 전에 세상을 떠났다. 알다시피 알제리는 프랑스의 식민지 통치를 받아왔다. 전세계에서 프랑스만큼 자유를 추구하는 나라가 얼마나 있을까? 그럼에도 프랑스의 지식인들도 알제리의 독립에 대해서는 반대하거나 침묵했다.

파농의 입장에서 보자면 알제리 독립에 침묵하던 프랑스 지식인들의 모습이 싫었을 것도 같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는 것은 흑인들의 사고방식이다. 일종의 식민주의 심리학이 팽배해 있었던 때문이다. 피부색과 관련한 열등 콤플렉스가 집단적으로 발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너무도 심각해서 하나의 신화가 된 상황 앞에서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현상을 분석하고 내면화하는 것이리라.

언젠가 빈민운동은 빈민과 싸워야 하고, 여성운동은 여성과 싸워야 한다는 말을 들을 적이 있다. 빈민이 갖고 있는 패배의식, 도저히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는 좌절감. 이런 의식으로 팽배해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희망도 사치에 불과할지 모른다. 가난이란 경쟁 자본주의에서 어쩔 수 없는 장식일지도 모른다. 그 의식을 꺾지 못하면 어떤 노력도 허망할 수밖에 없다. 파농도 식민지에서 벗어나야 하지만 일차적인 상대는 프랑스가 아니라 검은 피부의 인간들이었을 것이다. 흑인도 열등감에서 벗어나서 백인들(프랑스인들)과 동등한 위치에 있고 싶어도 뼛속까지 침투해 있는 콤플렉스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파농이 느꼈던 이런 감정은 한류 열풍의 중심지에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달된다. ‘우리 것은 좋은 것이야’ 한류의 열풍으로 자긍심을 갖고 있는 것과 상관없다. 말하자면 우리에게는 콤플렉스를 치유할 수 있는 자긍심이 있다고 해도 소용 없다. 의식 깊숙한 곳에는 상상과 실재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는 콤플렉스가 있다. 경제적 잣대로 사람마저도 나누는, 그래서 백인에 대한 호감을 넘어서 성적 지향성마저도 편중되는 현상. 외모에 대한 기준마저도 서구로 변해버린 세상.

영화에서도 비슷한 감정이 느껴진다. 외국인 노동자는 한국인과 동등한 위치에 놓일 수 없다. 심지어는 다문화 정책에 대한 비판도 서슴없이 나오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들의 취업이 늘면서 정작 내국인의 취업이 줄어들고 있다고 한다. 심지어 외국인 노동자의 범죄 사실을 통해서 그들을 추방시켜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생각해보자. 우리에게 노동력이 아니라 자본을 갈취하는 이들은 누구인가? 투자라는 미명 하에 국내 자본을 잠식하는 세력은 누구인가? 왜 같은 피해를 입히는데 누구는 미워하고 누구는 좋아하는 것인가?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을 읽으면 우리 의식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콤플렉스, 어렵게 말하면 옥시덴탈리즘의 가면을 발견하게 된다. 이 책의 문제를 우리 의식의 문제로 확대해서 읽어본다면 상상 속에서 날조된 우리의 모습을 반성할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을 짊어진 어머니 이소선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강 지 은(건국대학교 강사)

 

“엄마 배고파”

열 두 살 우리 딸이 학교에 다녀와서 제일 먼저 나에게 하는 말이다. 일 때문에 나가야 할 땐, 아이가 하교하는 시간이 되면 듣지 않아도 들리는 듯 귓가에 맴도는 소리이기도 하다. 가끔 바쁘거나 온 몸이 귀차니즘으로 가득한 마흔 한 살의 엄마는 천 원 짜리 한 두 장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런데 왜 맨날 나보고 배고프다고 하지? 그건 말하나 마나 내가 엄마이기 때문이다.
영화 ‘어머니’ 포스터“엄마 배고프다 …” 이소선은 아들의 마지막 말을 듣고 기도 차지 않았다고 한다. 그 말이 얼마나 가슴을 쥐어뜯던지 이소선은 정신을 잃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 재단사로 일하던 아들 전태일이 열악한 노동현실을 바꿔야한다 외치며 불꽃으로 산화한 그 날, 병원에서 이소선은 배고픈 아들을 그렇게 보냈다.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아들의 부탁과 함께 살아온 이소선은 2011년 9월 3일 영면하였다. “캄캄한 암흑 속에서 연약한 시다들이 배고픈데, 이 암흑 속에서 일을 시키는데, 이 사람들은 좀 더 가면 전부 결핵 환자가 되고, 눈도 병신 되고 육신도 제대로 살아남지 못하게 되요. 이걸 보다가 나는 못 견뎌서, 해보려고 해도 안 되어서 내가 죽는 거예요. 내가 죽으면 좁쌀만한 구멍이라도 캄캄한데 뜷리면, 그걸 보고 학생하고 노동자하고 같이 끝까지 싸워서 구멍을 조금씩 넓혀서 그 연약한 노동자들이 자기 할 일을, 자기 권리를 찾을 수 있는 길을 엄마가 만들어야 해요.”(『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오도엽 씀, 후마니타스, 83-84) 그토록 자상한 아들, 그토록 어여쁜 아들이 불타 익어 숨이 넘어가면서 한 부탁을 이루어내려고 어머니는 평생 뒤도 안 돌아보고 살았다.

열 서너 살 시다들이 종일 굶고 일하는 것이 안타까워 버스비로 풀빵을 사먹이던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은 아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마흔 한 해 동안 세상의 어머니이기를 자처했다. 중앙정보부와 평화시장 사업주들이 돈다발을 들이밀었어도 거절한 건 아들 때문이었다. 내 식구 배부르게 할 수는 있지만 그건 아들이 바라는 세상은 아니었다. 모든 회유책에서 끈질기게 벗어난 이소선은 근로기준법 적용 범위를 16인 이상 고용업체까지 확대할 것이며, 근로기준법을 위반할 때 내리는 벌칙도 강화하겠다는 약속과 전태일이 항거하며 요구한 사항을 들어주겠다는 합의서를 받고 아들의 장례식을 치렀다.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

배고픈 노동자들의 어머니가 되기를 자처한 이소선은 시내에 빌딩을 살 수 있는 돈 대신 노동조합을 선택한다. 전태일이 분신 항거한 지 2주일 만에 청계피복노동조합은 만들어졌지만 얼마 못가 사업주와 정부의 탄압에 온몸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형사들과 몸싸움도 해야했고 수없이 유치장 신세를 졌으며 징역을 살았다. 독재정권과 경찰들에겐 ‘빨갱이 년’이었다. 도대체 이 땅에서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길을 어머니는 걸었다. 이소선은 헌옷 장사를 했다. 전태일이 죽기 전에는 전태일을 위해서, 아들이 죽고 나서는 새로 생긴 아들들을 위해서 헌옷을 모아 팔았다. 다른 이들은 재수 없다며 거들떠보지도 않는 죽은 사람 옷도 영안실에서 구해왔다. 이렇게 돈이 생기면 이소선은 조합으로 달려가 끼니 거른 조합 간부들에게 줄 라면을 끓였다. 평화시장 옥상에다 큰 들통을 걸어 놓고 나무를 지폈다. 새벽 두시부터 국숫집에 가 줄을 서서 싸게 사온 ‘파지 국수’로 만든 우거지 죽으로 조합원들의 끼니를 챙겼다.

철거반이 부술 때마다 전태일이 다시 짓곤 했던 블록집 쌍문동 208번지에서 어머니와 함께 전태일을 닮은 청년들이 전태일의 꿈을 꾸었다. 그런데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땅에 민주주의가 뿌리 내려야 했다. 박정희 정권의 독재는 결코 노동조합을 성장하게 두지 않았다. 박정희가 79년 10월 26일 죽고 새날이 올 줄 알았던 사람들은 얼굴만 바뀐 군사 독재에 또 다시 부딪혀야 했다. 전두환 정권 역시 노동조합을 수없이 탄압했다. 독재자들에 대한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던 시절을 이소선은 온몸으로 부딪혀 싸웠다. 때로는 수배자들을 보호했으며, 때로는 자신이 수배자가 되었다. 전두환 정권에 의해 강제 폐쇄되었던 청계노동조합은 1984년 3월에 청계피복노동조합복구위원회의 이름을 다시 걸었다. 이는 다시금 노동조합과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 후로도 숫한 파업의 현장과 집회를 누비며 노동자들의 단결을 외쳤던 이소선은 전두환 독재정권의 폭압에 분신항거하는 또 다른 전태일들을 가슴으로 묻었다. 1986년 3월 17일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한 신흥정밀 박영진의 마지막 유언을 받으며, 1987년 8월 22일 경찰이 쏜 최루탄에 심장을 맞아 죽은 이석규의 시신을 지키며 이 땅에서 힘없고 배고픈 사람들의 피와 눈물을 받아냈다.

 

억울한 죽음은 다시 없게

전두환 정권 아래에서 숱한 이들이 죽음으로 항거했지만 이들의 죽음이 제대로 밝혀지지는 못했다. 유족들은 자식들이 왜 죽었는지도 모른 채 주변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았다. 평범한 시민이 권력에 홀로 맞서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유가족들은 이소선을 찾아왔다. 노동조합의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지만 이소선은 전태일과 같은 죽음을 막기 위해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를 출범시키고 초대 회장을 맡았다. 배운 것 없어 회장같은 일은 나서서 하지 않은 이소선이지만 전두환 정권에 목숨 걸고 싸워야 하는 거친 길을 떠안았다. 이소선은 쇠사슬에 묶인 노동자의 어머니이자 민주주의의 어머니가 되었다. “독재의 똥개들아! 나도 잡아서 죽여라. 나도 방패로 찍어 죽여라!”(『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45) 서슬퍼런 군사 정권에 목숨걸고 이렇게 외칠 수 있는 이는 자식을 지키고자 하는 어머니 뿐이다. 어머니의 외침에 유가협 부모들은 두려울 것이 없었다.

 

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이 글의 자료는 전적으로 오도엽이 꼬박 5백일 동안 이소선과 나눈 이야기를 담은 책『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에 전적으로 의존했다. 2008년 12월에 출판된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도엽은 이소선에게 마지막으로 이리저리 하고 싶은 말을 묻는다. 『전태일 평전』의 인세를 고스란히 이소선의 활동에 쓰라고 준 조영래 변호사, 군홧발 무섭던 1980년 남산에 잡혀갔을 때 동상 걸린 발에 약을 사다 발라주던 젊은이, 수배당해 도망다니며 얻은 결핵을 제대로 치료도 못할 때 자기 집에 숨겨주고 주사 놔주었던 간호사, 자기보다 나이 어린 이소선에게 어머니라 부르며 존경하고 도왔던 문익환 목사님, 전쟁 끝나고 오갈 데 없는 이소선의 식구들에게 처마밑을 내 주었던 집주인, 청계 조합원들… 그 모든 이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했다. 그리고 아들의 원을 풀어야 했기 때문에 제대로 돌보지 못했던 자식들, 독재 때보다 못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는 미안함을 전했다.

 

어머니는 가셨지만…

척박한 이 땅에 전태일이 노동조합의 씨를 뿌렸다면 이소선 어머니는 물을 주고 잡초를 뽑았다. 노동자들이 전태일의 꿈을 따라 노동조합을 만들었고 민주노총이 건설되었다. 어머니는 민주노총이 만들어질 때 제일 기뻤고 다음으로 기쁜 게 민주노동당이 국회의원 만든 것이라 했다. “잘난 척하지 말고 소외받은 사람 곁으로 내려가서, 고통받는 노동자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차별 없는 세상 만드는 데 힘써야지. 욕심부리지 말고 차근차근 국민 지지받아 국회도 많이 가고, 그래서 나중에는 대통령도 하면 좋지 않겠냐”『지겹도록 고마운 사람들아』, 283). 이론에서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마흔 한 해 아들이 꿈꾸는 세상을 만들어 가면서 터득한 진리이다. 이런 어머니를 위한 훈장 추서가 기각되었다. 민주인사들에게 수여하는 이 훈장이 기각된 이유는 다른 민주인사들과 비교 검토할 수가 없어서란다. 지금의 비정규직 노동자가 노예처럼 사는 현실을 두고 어머니는 국가가 주는 훈장을 가슴에 달지 않을 것 같다. 어머니가 바라는 것은 명예도 아니고 돈도 아니지 않았던가.

 

속. 상. 해. 하. 지. 마.

고령과 지병으로 더 이상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를 어머니를 담으려고 했던 영화가 올해 말 개봉을 앞두고 있다. 영화의 개봉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실 줄은 아마 제작진도 몰랐을 것이다. 이제 어머니는 없다. 한국의 아픈 근대사와 싸우고 보듬었던 시대의 어머니는 마흔 한 살에 아들을 보내고 마흔 한 해를 살다가 지난 달 잠들었다. 어머니의 영화도 참 힘든 길을 가고 있다. 상업영화가 아니니 후원도 필요하다(http://sosun.tistory.com/). 어머니의 길을 오롯이 남기진 못하겠지만 최소한 그를 기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속.상.해.하.지.마. 어머니가 아들의 죽음 앞에서 사람들에게 말한 것처럼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남기고 싶었던 말이었을 것 같다. 속상해 하지 않으련다. 대신 꿈꿀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어머니를 기리며 어머니의 꿈을 함께 그리는 것이 아닐까.

 

사족 한 마디

이제 곧 대한민국은 서울시장 보궐선거를 시작으로 총선, 대선을 치러야 한다. 서울시장 보궐선거에도 여성 후보들이 등장했지만 앞으로 다가올 선거들에서도 여성 정치인의 약진이 펼쳐질 것이다. 정말 한 마디만 하자. 함부로 어머니의 마음가짐으로 정치에 나왔다는 말을 하지 말자. 채 한 줌도 안 되는 일부 고위층을 위하여 출마하는 여성정치인은 정말 어머니, 엄마를 입에 담지 말자. 우리에게 필요한 어머니, 엄마는 이 땅의 아픈 손가락들을 보듬을 수 있어야 한다. 앞에서 하는 말과 뒤로 챙기는 욕심이 따로 있어서는 안 된다. 정말 한 마디만 더 하자. 이소선 어머니의 마음으로 정치할 수 있는 여성 정치인이 많이 배출될 수 있도록 우리가 손을 보태자.

구보씨 뱀파이어를 생각하다 [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철학)

 

“여우가 닭 잡아먹는 게 죄냐?”

 

이건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2009)에 나오는 대사다. 뱀파이어가 된 태주(김옥빈 분)가 자신을 책망하는 상현(송강호 분)에게 내뱉는 말이다. 상현도 뱀파이어다. 그는 가톨릭 신부였는데, 수혈을 받고 뜻하지 않게 뱀파이어가 되었다. 인간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처지지만,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식물인간이 된 환자의 피나 자살하는 사람의 피를 받아먹는다.

반면, 태주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고 당당하다. 그녀는 신선한 피를 위해 거리낌 없이 인간을 죽인다. 그녀는 뱀파이어고, 뱀파이어는 “인간을 잡아먹는” 존재다. 그렇다면 그녀가 인간을 죽이는 것이 무슨 잘못인가? 태주는 상현의 어정쩡한 태도를 비웃는다.

“너는 남의 피로 연명하면서 네 피 한 방울 나눠주는 건 그렇게 아깝냐?”

이것도 <박쥐>에 나오는 대사다. 눈 먼 노(老)신부(박인환 분)가 자길 뱀파이어로 만들어주길 거부하는 상현에게 하는 말이다. 그는 뱀파이어가 되어서라도 다시 이 세상을 보고 싶어 한다.

“그렇게도 보고 싶으세요? 이 캄캄한 세상이?” 상현은 그러한 욕망을 용납하지 못한다. 그는 자신의 피를 탐하는 노신부를 찔러 죽인다. “가서 쉬세요.” 그러면서 상현은 그가 죽인 노신부의 심장에서 솟아나는 피를 빨아먹는다.

상현은 스스로의 욕망을 쉽게 저버리지 못하면서도 그런 욕망의 탐닉을 막으려 든다. 그는 뱀파이어지만, 윤리적이고자 하는 뱀파이어다. 그러나 뱀파이어가 정녕 윤리적일 수 있는가? 상현의 말과 행동이 블랙 코미디가 되는 바탕은 여기에 있다. 그는 비닐 팩에 피를 담아 냉장고에 두고 마시며, 이렇게 말한다. “조금 빨아먹다 버리는 건 일종의 인명경시가 아닐까?”

그런데 이런 블랙 코미디의 무대는 영화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가 뱀파이어 세상이라고 말하는 건 틀림없는 과장이겠지만, 돈을 탐하며 돈의 순환에 생명을 거는 인간들의 모습은 확실히 뱀파이어와 닮았다.

게다가 돈은 뱀파이어와 같은 초인적인 힘을 발휘하게 하지 않는가? 그것은 물질적 지배와 안락만이 아니라 깨끗한 피부와 성형의 아름다움까지 만들어낸다. 돈의 위력을 가진 이들은 이제 인간 세상의 한 부류로 자리 잡는다. <트와일라이트> 시리즈의 뱀파이어가 어둠과 경계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인간 사회에 당당히 모습을 드러내는 점도 예사롭지 않다.

닭을 잡아먹는 여우가 동네에 내려와 닭들과 동거하며 닭들을 관리하기에 이른 짝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닭이 아닌 여우가 되고자 한다. 기왕이면 멋지고 매력적인 뱀파이어가 되고 싶어 한다. “뱀파이어면 어때?” 사람들은 피를 탐하는 <박쥐>의 노신부처럼 되뇐다.
영화 ‘박쥐’의 한 장면구보씨가 DVD로 영화를 여기저기 돌려보아 가며 여기까지 얼기설기 썼을 때다. 어느 틈엔가 옆에 와 있던 Y가 끼어든다.

“구보야, 너는 어떻게 영화를 봐도 그렇게 기괴한 영화만 보니? 그 박쥔지 생쥔지 하는 영화는 벌써 몇 번째 틀고 앉았는지 모르겠다. 참 취미도 괴상하다, 너.”

“어, 미안. 시끄럽다면 헤드폰 끼고 볼께. 난 곧 이 영화로 강의도 하고 글도 써야 하거든. 이제 겨우 한 페이지 썼어. 강의 노트는 아직 시작도 못했고… 근데, 그게 아니더라도 이 영화 진짜 볼 만한 영화야. 박찬욱의 대표작이라고 해도 좋다구.”

“글쎄, 난 박찬욱 좋은지 모르겠더라. 그 사람 영환 어딘지 좀 구겨진 것 같애.”

“하하…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지. 근데, 어딘가 구겨진 마음이 없다면 영화건 문학이건 불가능하지 않겠어? 구겨진 주름에 세상이 이렇게 또 저렇게 담기고, 그걸 풀어내는 데서 예술이 만들어지는 것 아닐까?”

“치, 그럼, 주름 많은 사람은 다 예술가겠네? 박찬욱은 그것도 아니고 이제 쉰이 다 된 얼굴이 뺀질 통통하던데?”

“유심히도 봤다. Y, 너 은근히 박찬욱 좋아하는 건 아냐?”

“아니라니까. 난 잔인하고 기괴한 장면들 싫어해. 그런 걸 왜 우리가 영화에서도 봐야 하니?”

“외면한다고 그런 면이 우리 삶에서 사라지는 것도 아니잖아. 오히려 그런 걸 극적으로 제시해서 우릴 자극하고 정화(淨化)하는 게 필요한지도 몰라. 거기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탄생하는 것이고 말이야.”

“기껏 뱀파이어가 그런 거야? 덜떨어진 서양 귀신이 피 빨아먹는 게?”

“Y야, 그게 꼭 그렇진 않다구. 뱀파이어를 이 시대의 상징으로 볼 수도 있어. 흡혈하는 기생적 존재, 어둡지만 창백한 힘과 매력을 지닌 존재. 이런 걸 자본으로 볼 수도, 자연에 대한 인간 자체로 볼 수도 있잖아. 게다가 원래 뱀파이어는 경계적 존재였어. 이런 존재에게는 정상적 존재에게선 찾기 힘든 갈등과 문제가 있다구. 생각해 봐. 뱀파이어는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라구 할 순 없어. 그렇다구 신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네 말대로 귀신인 것도 아냐. 분명히 몸뚱이를 가진 생명체라구. 그러나 짐승이라고 할 수도 없어. 말하자면 일종의 괴물인 거지. 경계적 괴물. 그래서 이걸 어디에서부터 어느 각도에서 보느냐에 따라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올 수 있는 거야. 박쥐라는 동물도 원래 경계적 존재잖아. 그런 점에서 이 영환 우리말 제목이 영어 제목보다 나아.”

“영어 제목은 뭔데?”

“Thirst. 갈증… 너무 평면적이지. 하긴 뭐, 저주스런 갈증, 그런 정도의 뜻이고 이미지겠지만.”

“저주스런 갈증? 거기 저주는 왜 붙어?”

“Y야, 이거 뱀파이어 영화라구. 뱀파이어는 피를 마셔야 살잖아. Y 네가 뱀파이어가 됐다고 생각해 봐. 피를 빨아먹는 게 기꺼운 일이겠어? 근데 이걸 욕망 일반으로 해석할 수 있거든. 욕망이라는 게 대부분 희소성이 있는 대상을 향하는 거고, 그래서 누군가를 밀쳐내야 충족될 수 있으니까. 때론 억압하고 착취하고 해서 말이지. 그거 일종의 피 빨아 먹는 거라고 할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살고 있고 또 만일 그렇게밖에 살 수 없다면 저주스런 거지. 저주스런 욕망, 저주스런 갈증.”

“구보야, 그건 정말 난센스고 오버센스야. 네 말은 우리 모두가 일종의 뱀파이어란 말이잖아. 그게 말이 돼?”

“내 참, Y야, 그건 내가 좀 전에도 했던 말이야. 넌 대체 내 말을 듣고 있기나 한 거니? 내가 그랬잖아, 뱀파이어를 자연에 대한 인간의 모습으로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해 봐. 우리가 다른 생물들을 어떻게 취급하는지를. 꼭 사슴피를 받아먹고 곰의 쓸개즙을 빼내먹는 인간들만 뱀파이어가 아니라구. 인간이 동물을 사육하고 도살해 먹어치우는 방식은 정말 잔인한 거야. 뱀파이어가 차라리 고상할 정도지. 입가에 피 안 묻히고 점잖은 척 포크와 나이프로 식사를 한다고 해서 잔인하지 않은 건 아니야. 당하는 동물 입장에서는 더 기가 막힐 노릇 아닐까. 사람들이 사는 부근엔 사육당하는 동물 이외엔 대형 동물들이 남아나질 않아. 특히 육식 동물들은 거의 멸종이야. 경쟁자가 없는 뱀파이어가 인간인 거지. 그뿐만 아니라구. 인간은 인간도 사육하고 착취하잖아.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려고 말이지. 서로가 서로 피를 빨아먹는 거야. 그렇게 볼 수도 있잖아? 아닌 게 아니라, 이 박쥐라는 영화에는 서로 피를 빨아먹는 장면이 있어. 상현이 제 피를 태주에게 먹이면서 태주의 피를 빨아먹는 장면 말이야. 실은, 박찬욱이 이 영화를 처음 구상할 때 머리 속에 그려뒀던 장면이 바로 그거라는 거야. 그걸 중심으로 해서 영화가 만들어졌다는 거지. 재밌잖아?”

“재밌다구? 구보야, 넌 정말 이상해. 잔인하다고 하더니 재밌다는 건 또 뭐니? 잔인한 게 재밌다는 거잖아. 도대체 그게 정상적인 사람이 할 소리야? 박찬욱이나 너나 괜한 과장을 해서 잔인한 면을 만들어내고는 그걸 재밌다고 즐기는 거 아냐? 그건 가학 취미라구. 니들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세상이 그렇게 보이는 거구, 다른 사람들도 그렇다고 여기는 거야. 니들이야말로 뱀파이어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니까, 괜히 다른 사람들한테도 뒤집어씌우는 거 아니겠어? 안 그런 척 하는 너희들도 다 뱀파이어다, 이렇게 세상에 대구 외치는 거잖아. 그거 꼬리 잘린 여우 심정인 거야.”

“아니, Y야, 난 가학적인 걸 즐기는 게 아니라, 그저 그런 욕망의 굴레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는 거야. 박찬욱은 그런 걸 영화로 표현해 보는 거고… 박쥐의 상현을 봐. 그는 자신의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구. 어쩔 수 없이 욕망의 수렁에 말려들어가면서도 거기에서 끊임없이 벗어나려 하지. 그가 악을 행하는 건 다른 악을 막기 위해서야. 가령 뱀파이어가 되려는 신부를 죽인다든가, 태주를 학대한다고 생각하고 강우를 죽인다든가 하는 일이 그래. 그리고 그런 게 더 큰 악을, 파국을 낳을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닫자 태주와 함께 목숨을 버리는 쪽을 택하지. 물론 내 얘긴 그런 결말이 좋다거나 필연적이라는 건 아냐. 중요한 건 그렇게 벗어나려는 자세와 시도가 있다는 거지. 그게 일종의 희망 아닐까. 저주받은 갈증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희망 같은 거…”

“구보야, 내가 보기엔 욕망을 적대시하는 네 생각이 애초부터 잘못된 거야. 구원은 무슨 구원이니? 그건 병주고 약주는 것일 뿐야. 옛날부터 사람들을 죄인으로 몰아가는 작자들이 해 온 짓이라구. 욕망이 있으면 잘 충족시킬 길을 찾아야지, 억지로 억누르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면 그게 없어지니? 사실은 그렇게 해놓고 뒷구멍으로 지들만 즐기는 놈들이 따로 있잖아. 구보, 너 같이 정신 못 차리는 철학자나 괜히 구원이니 뭐니 하며 헛물켜는 종교인들이 거기 들러리를 서고 말이야. 그러니까 결국 사람이 구겨지는 거야. 박찬욱도 철학과 출신이지? 그것도 가톨릭 계통 학교를 다녔잖아.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지 못한 것 아닐까?”

“어, Y야, 그거 인신공격이야. 그리고 근거 없는 얘기라구. 박찬욱이 철학 공부를 열심히 했다는 얘긴 들어본 적이 없지만, 그래도 철학과를 나와서 영화에 조금이라도 더 깊이가 있는 걸 거야. 박찬욱 영화는 생각보다 치밀하고 섬세하다구. 예를 들어 여기 이 장면도 봐. 장면 배치나 소도구 하나까지도 예사롭지 않아. 동양과 서양, 근대와 현대 따위를 섞어놓으려고 애를 많이 썼다구. 인간의 본성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까지 경계적인 면을 찾아 표현하려 한 거야. 한 오분만 봐도 금방 알 수 있어. 자, 이걸 좀 볼래…”

“됐거든. 구보야, 나 바쁘거든. 그리고 그 영화엔 볼만한 남자 배우 하나 없이 다 구보 너처럼 칙칙한 애들만 나와서 관심 없거든. 그러니 너나 열심히 보셔.”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2)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

이병창(MEGA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1.

자거라투스트라는 난감한 가운데서도 요즈음은 각 시, 군에서 자기 고장 관광지도를 만들어 배포하니까 혹시 거기에 표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우선 휴게소를 찾아야 하는데, 보통 거기에서 관광지도를 배포하니까.

차는 순천 시내를 지나 금방 벌교의 벌판에 이른다. 광활한 논에는 파랗게 자란 벼들이 바람에 일렁거렸다. 바람은 순천만의 바다에서 불어오는 듯하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마음속으로는 순천만의 갈대 숲 사이로 흐르는 은빛 강물을 그려보고, 혀로는 오늘 점심으로 먹을 예정인 순천만 꼬막 맛을 느끼며, 눈으로는 도로 옆의 휴게소를 찾는데 여념이 없었다. 손과 발은 스스로 움직이면서 자동차를 운전하고 있었으니, 모든 감각이 각기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기묘한 환각상태에 빠져들었다. 들뢰즈가 말했다는 파편화된 감각이란 것이 이런 상태를 의미하지 않을까? 이 상태가 어쩐지 환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차는 마치 꿈속을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피카소의 몽타주 그림이 떠올랐다. 옆자리의 선배님은 깊은 침묵 속에서 아마도 나철 선생의 사상을 의미하는 것 같다. 우리는 서로 다른 세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교감한다. 공감각에 의한 공동의 세계가 차안에 넘치고 있었다.

드디어 벌교읍에 들어가기 직전 도로 옆에서 자동차 휴게소를 발견했다. 마침 벌교읍 관광지도가 마침 한 장 남아있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급히 지도를 펼쳐 눈으로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다. 야호! 정말로 나철 선생의 생가가 표시되어 있었다. 게다가 지도에는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의 무대가 친절하게 표시되어 있는 게 아닌가? 이건 예상치도 않던 횡재이었다. 벌교에 오면서도 벌교가 바로 태백산맥의 무대였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태백산맥』을 생각하면 광활한 벌교의 벌판을 다시 보니, 이렇게 넓은 들판이라면 얼마나 많은 소작인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관광지도에 대해 느꼈던 고마움 때문에 관광지도에 드리워져 있는 절망의 그림자를 예감하지 못했다.

관광지도란 것은 한 장 속에 모든 관광지를 표시해야 하니까, 실제 지형을 상당히 왜곡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자거라투스트라는 그 순간 이 평범한 진리를 잊어버렸다. 벌교를 찾아오는 거의 전부는 『태백산맥』의 흔적을 찾는다. 이 흔적은 시내 한 가운데 있는 부용산의 오른편에 위치한다. 거기에는 김범우의 집이며, 소화의 집, 그리고 읍내홍교가 표시되어 있다. 관광객들을 위해 이 부분은 확대되어 그려졌다. 반면 나철 선생의 생가는 부용산 왼편에 위치한다. 그런데 지도는 이 부분을 축소시켜서 나철 선생의 생가가 마치 읍내의 왼편 부분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 사이의 거리는 얼마 되지 않아 걸어 다닐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나중에 안 것이지만 시내 가운데 그려진 부용산은 남북으로 길게 뻗은 산이다. 실제 나철 선생의 부용산 왼편에 있지만 무려 15키로 정도 떨어져 있다.

이 관광지도 때문에 자거라투스트라와 선배님은 부용산 자락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그리고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돌면서 여러 번 돌아다녔지만, 생가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러면 혹시 부용산 산허리 어디에 있을까 하여 부용산을 걸어 올라 갔다. 부용산은 정말 이름 그대로 무척이나 예쁜 산이다. 『태백산맥』에서는 이 산에서 봉화가 오르는데, 그러면 정말 꽃봉오리처럼 보일 것 같다. 높이는 한 400미터 정도이다. 그런데 이 부용산을 거의 다 올라가도 유적지라는 것이 없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나철 선생에 대해 전혀 모른다. 혹 아는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도 실상은 알지 못했다. 그들의 부정확한 정보 때문에 10분이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은 나철 선생의 생가를 찾는데 무려 두 시간이 걸렸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포기하려고 할 무렵, 마지막으로 지도상에 표시된 나철 선생 생가 가까이 있는 벌교 소방서를 GPS 기계에 넣어보았다. 나철 선생에 관해서는 일자무식이던 GPS는 벌교 소방서는 단숨에 알아보았다. 소방서를 찾으면 바로 거기에서 나철선생 생가를 찾을 수 있는데,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리하여 다시 기계에 몸을 맡기고 소방서를 찾아가보니 부용산 자락을 왼쪽으로 돌아서 무려 15 키로 이상을 돌아가서야 나철 선생의 생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렇게 두 시간 동안 헤매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떤 깊은 절망감에 사로 잡혔다. 프랑스의 어떤 늙은 여배우는 혼자서 살다가, 접시를 깨뜨리자 절망감 때문에 자살했다고 한다. 자거라투스트라는 그때 여배우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될 것 같았다.

 

2.

동네에 들어가자, 나철 선생의 유적지 표시가 보인다. 무슨 유적지인가 했더니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나철 선생의 생가는 동네 한 가운데 있다. 이제 비로소 나철 선생의 이름이 알려진 듯 생가는 새로 조성 중에 있었다.
나철 선생을 기리는 비석이다. 1990년 3월 1일에 세웠다고 한다. 사진을 확대하면 대개 어떤 말인지 짐작될 것이다.전국 어디서나 위인들의 생가는 다 똑같다. 삼간 기와집, 나철 선생의 생가도 꼭 마찬가지이다. 우리나라 위인 생가의 기본 설계도가 있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철 생가는 새로 지은 기와집 외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미처 공사가 마무리 안 된 듯 땅 바닥에는 아직도 시뻘건 황토가 내팽겨져 있었다. 물론 안내인도, 찾아오는 사람도 없었다. 마을 개들이 낯선 사람을 보고도 짖지 않으니 아마도 가끔씩 찾아오는 사람이 있는 모양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후일을 위해 사진을 찍어 두고 선배님은 방에 모셔져 있는 나철 선생의 영정에 절을 한다. 짱구가 튀어나온 나철 선생의 인상은 단호하기가 겨울날의 얼음처럼 느껴진다.
선배님의 나철 선생에 대한 존경심은 지극하다.결국 찾아냈다는 뿌듯한 마음으로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점심 먹으러 가자고 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읍내에 들어가서 『태백산맥』의 무대를 밟아보고 다시 순천만 쪽으로 가서 꼬막 맛도 볼 생각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선배님이 거기서 강진 다산초당이 얼마나 먼지를 물어본다. 어림대중으로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을 거라 하니, 그러면 그리 가자고 한다. 이까지 왔으니 다산초당은 꼭 보고 가고 싶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우리나라에서 화엄사와 다산초당을 가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해보며 그 소수에 선배님이 속한다는 사실을 알고 놀란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아침을 늦게 먹었으니 점심 겸 저녁을 거기 가서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한다. 순천만의 꼬막만 꼬막일까, 강진만의 꼬막도 꼬막이지. 이렇게 생각하면서 보성을 지나 강진만을 향해 출발했다. 길은 사차선 자동차 전용 국도, 호남지방의 도로가 다 그렇듯이 여기도 텅 비어 있다. 차를 몰면서 자거라투스트라는 물었다.

형, 대종교는 요새도 신도가 있어요?

그저 단군할아버지를 조상신으로 모시고 있는 종교, 민족주의적인 정신을 고취시키기 위한 종교, 고조선 시대가 실재한다고 믿는 종교, 그러나 실상은 조상숭배의 일종인 종교, 그것이 자거라투스트라가 알고 있는 대종교이다. 요새 누가 이런 구닥다리 종교를 믿겠는가?

대종교는 만주에서 독립운동의 가장 주요한 단체를 이끌었지. 청산리 대첩을 이끌어낸 북로군정서가 바로 그건데, 알지? 그런데 이런 독립운동 때문에 오히려 대종교의 종교성이 사상적으로 간과되고 그저 국조 숭배운동으로만 격하되고 말았어.

그러면 대종교의 종교성은 어디에 있어요?

글쎄 나도 깊이 연구해 보지 않아서 잘 모르는데, 흥미로운 특징이 있어. 대종교는 3분법을 중요시해. 대개 모든 사상은 이분법이잖아. 유교가 그렇거든. 태극, 무극, 음양, 4괘 등. 서구 구조주의도 이항 대립을 기본 골격으로 삼는다 하더라. 그런데 여기는 3분법이야. 대종교의 가장 주요 저서가 『삼일신고』인데, 셋이 하나이라는 주장이 그 핵심이라서 책 제목이 ‘삼일신고’이거든.

셋이 하나라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삼신(三神)일체라는 뜻이지. 한배검(신)은 곧 환임(인), 환웅, 환검(단군)이라는 거야. 이 신들은 역사적으로 등장한 순서에 따라 나열된 신들의 계보가 아니야. 이 신들은 하나의 신 즉 한배검의 세 가지 위격이지. 환임은 조화의 신이고, 환웅은 교화의 신, 한검은 치화의 신이지.

뭐, 기독교의 삼위일체설하고 비슷하네요. 성령과 성신과 성자.

그러게 말이야.

기독교의 영향이라 보아야 하나요?

글쎄, 대종교 자신은 상고 시대의 종교의 부활이라 하지만, 사실은 20세기 초에 발생한 종교로 보이는데, 그러니 기독교 영향을 배제할 수가 없겠지. 마치 동학처럼 말이야. 그런데 왜 굳이 삼위일체설을 빌려 올 생각을 했을까? 그게 멋있어서였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까?

형도 아시겠지만,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은 그리스도가 인간이면서 신이라는 이중성을 주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교리이잖아요. 삼위일체설 때문에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신적인 지배 질서를 보존할 수 있었죠. 결국 기독교는 종교이면서도 인간의 자유의지를 인정하는 유일한 종교가 된 거예요. 헤겔은 그래서 기독교가 중세에 인간의 자유라는 개념을 사상적으로 보존해 왔다고 주장하죠. 이렇게 자유의지와 신의 질서를 종합하면, 세계의 타락과 신의 정의도 통일될 수 있죠. 전자는 인간의 자유의지로 인한 타락이고, 후자는 신적인 질서의 관철이죠.

교주가 신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 종교는 많지 않나? 하지만 그런 종교가 삼위일체설을 주장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신의 아들이라는 주장과 인간이면서 신인 그리스도라는 개념과는 좀 다르지 않아요? 신의 아들이란 자신의 신성을 가정하는데, 그것은 인간 속에 있지만 인성과는 독립된 본성이죠. 이 인성은 언젠가는 신성에 의해 사라져야 할 것이죠. 예를 들어 중세 기독교에 영향을 많이 끼친 배화교가 그렇지요. 그런데 기독교의 삼위일체설에서는 인성이 그 자체가 신성이라는 주장이 됩니다. 이것은 엄청난 혁명적인 주장이죠. 예를 들어 육체적 욕망이 그 자체로서 신의 뜻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건 잘 모르겠는걸. 그런 주장은 불교에서 평상심이 곧 도심이라는 주장과도 비슷하네. 동학이 사람이 곧 하늘이라고 하는 주장도 그렇고. 그런데 삼위일체설에 대한 그런 해석은 기독교를 너무 극단적으로 해석하는 것이 아닐까?

글쎄요. 사실 기독교는 신성과 인성의 분리와 통일, 배화교와 삼위일체설 사이를 오가죠. 그 사이 어느 지점에 기독교의 제 분파들이 존재하는 것 같아요. 신교는 신성의 분리 쪽으로 더 다가가고, 반면 구교는 신성과 인성의 통일 쪽으로 더 다가가죠.

그렇구나. 하여튼 대종교에서 이런 삼분법이 마치 만화경 속에서처럼 계속 확대재생산 되거든. 인간을 설명할 때가 특히 그래. 인간은 3眞과 3忘과 3途를 가지고 있어. 3진이란, 다시 셋으로 나누어지는데, 곧 성, 명, 정으로 이루어지지. 그것들은 자체 내에 어떤 대립을 가지지 않는 것들이야. 이 각각이 내부에서 구별을 가지면, 이제 3망이 되지. 그래서 성이 선, 악으로 나누어지면 心이야. 명이 청, 탁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기이고, 다시 정이 厚, 薄으로 나누어지면 그게 身이야. 이 3망이 도착적으로 되면, 그게 感, 息, 觸인데 그 각각은 모두 6가지로 이루어져 있어. 그 외에도 모든 교리에 3이 기본 단위가 되어서 항상 그 배수로 진행되거든. 마치 3이라는 숫자가 대종교에서 자기 증식을 하는 것 같아.

그거 참 신기하네요.

예를 들어 성이란 선도 악도 아니야. 이것은 본질태이지. 그런데 이 성의 현상태가 마음이야. 그런데 이 마음은 선, 악으로 나누어지거든, 그러면 깨달음의 논리가 이렇게 전개되지. 우선 우리는 수련을 통해 악한 마음에서 선한 마음으로 나아가야지. 그런데 그것만으로 부족해. 선하다, 악하다는 것조차 넘어서야만 비로소 그 마음의 본성에 도달하지. 이런 설명은 불교의 공론에서 주장한 것과 같다. 유에서 무로, 그리고 유도 무도 아닌 것으로 나아가는 논리가 공론이잖아.

그것 참 흥미롭군요. 어떻게 수행하는지 아세요?

몰라. 주요한 것은 대종교 속에 인간을 설명하는 어떤 새로움이 있다는 거지. 아직까지 아무도 연구해 보지 않았는데, 나도 지금 연구 중이야.

김지하 선생은 한국의 사상의 특징이 3박자라고 해요. 서양음악의 기초는 2박인데, 한국음악의 기초는 3박이라는 거죠. 이런 3박에 맞추어 한국사상도 전개되었다 해요. 그런 3박의 개념이 대종교에도 나타나는 것이 아닐까요?

글쎄, 하여튼 대종교가 특이하기는 해.
대종교의 주요 경전인 천부경이 새겨져 있는데, 자거라투스트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이렇게 차 안에서 토론 하는 사이, 차는 마침내 강진만에 도착했다. 다산초당 앞에 펼쳐진 강진만은 푸른 들판과 어울려서 싱싱한 생명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국 법치에 대한 단상 [썩은 뿌리 자르기]

오상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상지대 강사)

얼마 전, 진보진영의 버팀목이셨던 이소선 어머니께서 향년 8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셨다. 한(恨) 많은 그분의 마지막 길에는 ‘살아남은 자’들의 애도가 이어졌다. 바람처럼 떠나버린 아들, 태일을 가슴에 묻고 살아온 40여년의 세월, 그 슬픔과 고통의 무게를 우리가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이제 사람이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곳에서 편히 잠드시길 기원한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이십대 초반의 한 청년의 절규가 있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는 짧지만 깊은 울림을 전하고는 스스로의 몸에 불을 지폈다. 그가 전태일이다. 유명무실했던 ‘법’ 앞에서 참담하고 무력했던 젊은 혈기는 자기를 태워 세상을 비추고자 했다. 법을 지켜달라는 소박한 바람은 재가 되어 모란공원에 잠들었다.

며칠 전, 학부 4학년 후배에게 ‘한국 사회의 법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그 녀석 머뭇거림도 없이 짧게 되물었다. “유전무죄 아닌가요?” 부와 권력을 누리는 이들에게는 솜방망이 처벌을 하면서도 생활고에 못 이겨 범죄를 저지를 이들에게는 가혹하리만큼 엄격한 것이 한국 사회의 법치가 아니냐고. 취업 전선에 내몰려야 하는 예비 사회인의 대답이라 더욱 가슴에 남는다.

2010년 봄,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인 PD수첩에서는 이른바 ‘스폰서 검사’편이 방송되었다. 제보자 스스로가 ‘다수의 전현직 검사들에게 지속적으로 금전 · 향응 · 성상납 등의 스폰서 행위를 해왔다고 밝힌 문서를 토대로 진행된 취재의 결과물이었다. 제보자와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하여 세밀한 부분까지 사실에 가까운 보도를 위해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기에 순식간의 세간의 관심이 주목된 사건이었다. 당시 사건에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들은 과연 어떤 처벌을 받았을까?

지난 7월 6일 연합뉴스에는 ‘스폰서 검사’ 의혹 사건의 중심인물 중에 한 사람인 한승철 전 대검찰청 감찰부장에 대한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됐다가 1ㆍ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법무부장관을 상대로 면직처분 취소청구 소송을 냈고 이에 대한 판결이 기사의 내용을 이루고 있었다. 예상(?)대로 재판부는 원고의 손을 들어주었다. 다시 말해서 ‘스폰서 검사’ 사건으로 인해 면직처분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정씨로부터 향응을 제공받은 부분은 인정되지만 그 금액이 100만원 정도에 불과해 징계 종류로 면직을 선택한 것은 재량권을 일탈·남용한 것으로 취소돼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득 이 사건의 중심에 서 있는 ‘검사(檢事)’라는 집단의 사전적 의미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이든 잘 모르겠다면 사전부터 뒤져보자. 그러면 실마리가 보이는 법이니까. ‘검사’를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일반 행정공무원과는 달리 각자가 단독으로 검찰사무를 처리하는 단독관청으로서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는 준사법기관으로서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물론 ‘오로지 진실과 정의에 따라야 할 의무를 가지고 계신 분들’께서 향응을 제공받은 것은 인정되지만 그게 고작(?) 100만원 정도라면 별 문제 없다는 것이다. 법적으로 말이다.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는 처분이 내려진다지만 어딘가 좀 수상한 법이 또 하나 있다. ‘병역법’이 그것이다. 병역법이 대한민국 모든 청년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고 믿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사회 지도층’이라 통칭되는 그룹, 다시 말해 정치인이나 재벌들의 2세가 군에 입대하는 비율은 일반 청년들이 입대하는 비율에 비하면 이상하리만큼 적다. 현 정부 고위 관료들을 보아도 그 흔한 군필자를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법은 왜 권력을 지닌 자들과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동등하게 적용되지 않을까? 이 순진한 물음에 대한 해결의 실마리가 동아시아 사상사에 있다. 특히 고대 제자백가 중의 하나인 법가(法家)의 내용을 살펴보면 앞서 제기한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법가는 모두가 인정할 만한 창시자가 없다. 따라서 사승관계도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법가로 분류되는 학자들은 하나의 공통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것은 인간을 본래적으로 이익(利)을 추구하는 집단으로 여긴다는 점이다. 많이 알려진 바와 같이 법가는 진(秦)의 시황제가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면서 통치기반으로 삼은 사상이었다. 시황제는 법가 사상가인 이사(李斯)의 도움으로 통일제국의 기틀을 마련했다.

법가의 연원이라 할 수 있는 대표적인 사상가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상군서(商君書)』의 저자로 알려진 상앙(商?, ?~BC 338)이다. 그는 ‘법(法)’을 중시하며 이를 통해 국가를 다스리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다음으로는 ‘술(術)’을 군주의 중요한 덕목으로 꼽은 신불해(申不害, ?~BC 337?)다. ‘술’은 군주가 신하를 다루는 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술책(術策)이나 술수(術數)처럼 계략(計略)이나 수단으로써의 기술을 의미한다. 마지막 인물은 신도(愼到, BC 395~BC 315)다. 그는 ‘세(勢)’를 중요하게 여겼다. ‘세’는 용례로 쉽게 그 의미를 짐작할 수 있는데, 기세(氣勢)아 권세(權勢) 혹은 형세(形勢)처럼 물리적 힘을 의미하는 말이다. 군주가 ‘세’가 없다면 법이나 술도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다.

대중들에게는 낯선 학자들을 셋이나 등장시켰던 이유는 법가 이론을 집대성한 것으로 평가받는 한비자(韓非, BC 280?∼BC 233)를 언급하기 위해서다. 한비자는 앞서 언급한 ‘법’, ‘술’, ‘세’를 조화롭게 사용하여 국가 지배체제를 공고히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비자는 이사와 더불어 순자(荀子) 아래에서 배운 인물로 인간의 본성을 악함으로 규정했던 순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인간을 ‘이익을 좋아하고 해악을 싫어하는 존재’로 보았다.

인간을 ‘손해 보는 것을 싫어하고 이익만을 추구하는 존재’로 규정하는 순간, 백성은 국가가 ‘위해야 할 존재’가 아니라 ‘통제해야 할 존재’로 전락하게 된다. 이 때문에 법은 절대 권력과 그 언저리에 있는 자들이 일반 백성들을 통제하기 위한 수단으로써만 의미를 갖게 된다. 요컨대 힘깨나 있는 사람들은 법 위에 군림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법의 지배를 받게 되는 것이다. 동아시아 사상사에서 법가의 속내는 사실 이런 것이었다.

『법가, 절대권력의 기술』이란 책의 역자는 그의 서문에서 동아시아의 법의 역사에 대해 이런 소회를 담았다. “민주주의를 위해서 역자는 법가적 전제 정치를 우선 박멸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래서 법가를 연구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로 한 걸음 다가서려면 말이다.” 박멸까지 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정책(政策)으로 이끌고 형벌로 다스리고자 한다면 백성들은 (단지 법적으로) 면하려고만 한 뿐, 부끄러움을 모른다. 그러나 덕으로 이끌고 예로 다스리면 부끄러워할 줄도 알고 또 올바름에 이르게 된다.”( 子曰 道之以政, 齊之以刑, 民免而無恥, 道之以德, 齊之以禮, 有恥且格., 『論語』, 「爲政」)

“옳지 않음에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다.”(無羞惡之心 非人也, 『孟子』「公孫丑上」)

위의 두 문장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부끄러움(恥, 羞)’이다. 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지만 않으면 무슨 일을 하든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공자는 “부끄러움도 모르는 놈”이라고 나무란다. 맹자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부끄러움이 없다면 사람도 아니다”라고 꾸짖는다. 맹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을 ‘의(義)’의 단서라고 했다. 의(義)란 ‘바름’이나 ‘의로움’으로 풀이되는데 최근 우리 사회의 화두였던 ‘정의(正義)’가 바로 그것이다.

대한민국에서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그토록 경쟁적으로 읽혀졌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제 우리 사회에서 ‘정의’는 책으로 보고 배워야만 알 수 있는 화석화된 개념이 되었다는 것일까? 그게 아니라면 국민 위에 군림하는 권력자들이 내걸고 있는 ‘정의’와 국민들이 생각하는 ‘정의’가 상당한 거리가 있어서 진짜 ‘정의’가 궁금했던 것일까?

법은 빈부와 귀천에 상관없이 일관되게 적용되어야만 한다. 법을 만들고 집행하는 사람들도 예외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이 진짜 ‘정의 사회’를 구현하는 길이다. 물론 이런 사회가 오기 위해서는 반드시 선행되어야만 하는 일이 있다.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이 권력을 쥐는 것.

소금꽃나무, 상처 그리고 치유 [배운년 나쁜년 미친년]

연 효 숙(연세대)

 

1. 소금꽃나무들

 

유난히도 비가 많이 와서 그다지 덥지 않았던 2011년 여름. 요즘 9월 들어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그래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제법 가을 냄새가 난다. 그러나 부산 한진중공업의 85호 크레인에서 250여일을 지내며 아직도 내려오지 못하는 여자가 있다. 좁은 크레인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자지도 못하고… 얼마 전에는 위를 다쳐 죽으로 연명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 왔다.

김진숙,52세 비혼(非婚).2011년 들어서 더 유명해진 그녀! 그녀가 남자였다면 뒷바라지하는 아내나 가족들이 있었을 터인데, 그녀는 혼자이다. 물론 85호 크레인 바로 아래에는 그녀를 지키는 한진중공업 해직 동료 노동자들이 있고, 많은 이들이 그녀의 길고 끈질긴 투쟁에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 있다.

솔직히 내가 그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불과 얼마 되지 않는다. 1차 희망버스에 오를 희망자들을 구한다는 메일을 열어 보고서 그제서야 김진숙이 눈에 들어 왔다. 물론 그 전에도 그녀 이름은 들었지만 나는 모른 채 했었던 것 같다. 나를 위시한 우리 이웃들이 그녀에게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았을 때조차, 그녀는 칼바람의 겨울부터 봄을 지낸 후, 뜨거운 여름을 지내고 가을바람이 서늘하게 부는 요즘까지 85호 크레인에서 요지부동 내려오지 않고 있다.

희망버스가 4차까지 떠났다. 그래도 나는 이 희망버스에 한 번도 오르지 못하고, 그저 뒷켠에서 여전히 망설이고 있다. 아무런 응원도 격려도 희망의 메시지도 보내지 못하고, 그냥 살기 바빠서…. 라는 핑계만 만들고 있을 뿐이다. 무기력과 자괴감이 슬며시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인에게서 들은 그녀가 쓴 책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녀가 쓴 책, 『소금꽃나무』라는 제목을 들었을 때, 응? 소금꽃나무라고? 세상에 그런 꽃나무가 있나? 뭐지? 궁금했다. 책을 봤다. 아! 소금꽃나무는 노동자들이 흘린 땀이 소금이 되어 등짝에 달라붙어 마치 허옇게 핀 소금꽃나무처럼 되었다는 것이다. 소금꽃을 피워내는 노동자들이 바로 소금꽃나무인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달밤에 하얀 소금을 뿌린 듯 피어 있는 메밀꽃의 서정보다 더 진한 꽃이다.

우리 사회에는 이처럼 소금꽃을 피워내는 많은 소금꽃나무들이 있다. 이들이 땀흘려 배출한 소금 결정체인 소금꽃나무들이 여기저기에서 많은 피눈물을 쏟아내고 있다. 2009년 봄 77일간의 기나긴 쌍용자동차 파업은 경찰의 잔인한 진압으로 마무리되었다. 이 동안에 쌍용자동차 파업 노동자들은 극한의 투쟁을 벌였고, 진압 과정에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치유되기에는 너무나 엄청난 상처들이 이 후에 남겨진 것이다.

 

2. 상처받은 자들의 절규

 

김진숙, 그녀는 매우 강한 여성이다. 통일문제연구소장인 백기완 선생은 그녀를 80평생 만난 여자 중 최고의 여자라고 했다. 그만큼 속이 단단하고 인내심이 강한 여성이다. 고공 크레인에서 250여일을 넘겨가며 버티는 일은 세계적으로도 아마 유래가 없을 것이다. 김진숙은 강한 여성이니 그정도 시련은 견뎌낼 것이다, 라고 그녀를 믿고 방치하는 것은 정말 괜찮은 일일까?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왜 그녀라고 상처를 받지 않겠는가. 철의 여인이라 잘 버텨 낼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고 모질고 독한 년(?)이라고 이를 가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입었을 상처를 인간적으로 깊이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그녀가 입은 상처와 상흔은 한진중공업 사태가 해결되고, 그녀가 크레인에서 내려 올 때 비로소 헤아려 질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꿋꿋하게 버티고 있지만, 그녀도 꽃을 보면 감동하고 마음이 설레는 평범한 여성이 아니겠는가. 부디 상처를 덜 입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소금꽃나무』에 보면 그녀의 가족사를 언급한 ‘상처’의 부분이 있다. 나도 읽다가 고통이 와 닿아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슬그머니 책을 덮어 버리게 된다. 노숙자로 전전하다가 10여년 만에 경찰서로부터 변사체로 발견되었다고 소식이 날라 온 남동생의 비참한 죽음! 그 딸인 채 스무살이 안된 조카가 가출 2년 만에 몸이고 마음이고 간에 만신창이가 되어 미쳐 버린 채 돌아오고…… 그래도 애써 태연한 척 그녀는 그 상처들을 담담하게 적고 있다.

어디 그녀의 피붙이 가족들만이 그녀에게 상처가 되었으랴! 한진중공업에서 파업 철회 투쟁을 하다, 불의의 객이 되어버린 적지 않은 가장들, 그 소금꽃나무들의 죽음이 새긴 상처. 그 상처가 분노가 되어 한여름엔 지글지글 끓는 크레인의 철골 위에서, 한겨울엔 살을 에이는 듯한 찬바람의 서슬 속에서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지금껏 250여일 가까이 김진숙은 내려오지 않고 있다. 85호 거대한 크레인보다도 더 강한 그녀이지만, 예쁜 꽃과 같은 감성을 지닌 그녀 안에 또아리를 틀고 있을 상처는 누가 언제 어떻게 보듬어 줄 것인가.

얼마 전 쌍용자동차 정리해고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의 상처를 보여준, KBS스페셜, “심리치유, 8주의 기록, 함께 살자!”를 시청했다. 정신과 전문의 정혜신 박사와 마인드프리즘 팀에서 이들의 상처받은 몸과 마음을 짧은 8주 동안 치료하면서 살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겪고 있는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죽음에 대한 긴장감이 사라진다. 베란다에 서면 자살 충동이 일어난다. 늘 가까이 있는 죽음의 유혹, 끝없는 무력감과 고통스러운 기억들의 반복, 시시때때로 솟구치는 분노와 사람들에 대한 깊은 불신. 그들의 삶과 마음은 바로 불지옥이었다.

정혜신 박사는 이들이 77일간 쌍용자동차 파업 기간에 겪은 고통, 폭압적인 진압, 경찰에 의한 체포 등에서 입은 상흔을 원자폭탄에 피폭된 상태에 비견했다. 그만큼 엄청난 영혼의 손상을 입은 것이다. 이 영혼의 손상은 한 개인의 영혼만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아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정리해고 후, 삶은 철저히 무너졌다. 자살과 심근경색 등으로 인한 사망률이 평균 3배 이상이 되었다.

한 정리해고자의 “내가 무슨 지독한 죄를 지었기에 이런 끔찍한 대우를 받는지…..”라는 가슴을 후펴파는 절망스러운 목소리가 귀전에 남아 있다. 그들은 살기 위해 쌍용자동차에 취업했고, 또 정리해고 후에도 여전히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정리해고 철회를 위한 생존의 투쟁을 했을 뿐인데, 그들에게 돌아왔던 건 무자비한 폭력과 상처 뿐이었다.

이러한 상처들에 겹쳐지는 얼굴들, 청년 실업의 문제! 강의실에서 만나는 학생들의 얼굴들이 대체로 어둡다. 기운이 없고 패기가 없다. 무슨 죄를 지은 양, 어깨가 축 처져 있고 눈동자에 슬픔과 암울함이 비친다. 기운이 하늘을 찌른다 해도 모자랄 20대 청춘들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언제 폭발할지 모를 상처들이 가슴 속 깊이 또아리를 틀고 있다. 왜 우리 세대만 이런가? 우리는 왜 이렇게 저주받고 있는가? 청춘들의 좌절과 분노와 절망에 대해 우리 사회는 냉담으로 초지일관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언제까지 이러한 상처 내기를 되풀이할 것인가? 국민을 위한 국가는 진정 없는 것인가? 이 국가는 도대체 어떤 국가라는 말인가? 그래, 이 국가는 특권층을 위한, 강한 자를 위한 국가가 아니었던가? 힘과 권력으로 상징화된 강한 남성의, 강한 아버지의 국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상징화된, 폭력과 압제의 코드가 교묘하게 숨겨진 아버지의 국가, 상징계의 국가였던 것이다. 아버지의 이름, 그 위력에 우리는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약한 아버지, 약한 남성, 약한 여성, 약한 청소년들은 극한으로 내몰리고 있다. 이 상처받은 영혼들을 언제까지 이대로 방치할 것인가?

 

3. 트라우마는 치유 가능할까?

 

우리 사회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너무도 깊은 상처를 입고 있다. 그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왜 그 생채기가 났는가를 아는 것인데, 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저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어떻게 바꿔볼 도리가 없는 것 아니냐 하는 패배의식이 우리를 더 병들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상처를 제대로 치유하기 위해서는 상처를 응급처치하고 대증적인 요법만으로 땜질해서는 곤란하다. 상처의 원인을 찾아 그 병원균을 없애야 할 것이다. 우리는 이미 병원균이 무엇인지는 암묵적으로 다 알고 있다. 병원균이 천하무적이어서 어쩔 도리가 없고, 그저 그 속에서 꼼짝없이 죽은 듯이 살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도 모르게 체득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러나 상처는 계속 나고 곪아 터져 우리의 삶을 파괴시킨다. 그래서 상처를 직시하고 그 병원균을 처치할 새로운 치료제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지점에서 아버지의 이름에 맞서는 여성주의가 개입할 여지가 생긴다.

그 중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보살핌의 윤리’다. 보살핌의 윤리를 우리는 좀 더 적극적으로 변형시켜야 하지 않을까? 이 윤리를 그저 여성들의 자애롭고 따뜻한, 자칫 한가한 덕목으로만 쓸 것이 아니라, 진짜 상처 치유를 위한 적극적인 방식으로 활용할 때가 왔다. 우리 사회와 같이 온통 상처투성이인 사람들에게는 ‘보살핌의 윤리’가 ‘치유의 윤리’로 거듭날 필요가 있다. 여성주의적 보살핌의 윤리가 치유의 윤리로 버전업되어 우리 사회에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 바로 지금이 아닌가.

그런데 치유의 방법과 길은 그다지 간단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치유를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정신과 전문의나 상담 치료소 등이 그 몫을 해낼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향을, 어떤 대안을, 어떤 희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여성주의자들이 이 치유에 동참하고 연대할 수 있는 부분적인 몫이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를 들면 우리 사회와는 상당히 다른 환경이지만, 프랑스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테바가 『시적 언어의 혁명』에서 말한 기호계가 떠오른다. 기호계란 무엇인가? 폭력적인 아버지의 이름인 상징계를 거부하고 맞서면서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적 질서이다. 이 기호계가 상징계의 폭력으로부터 입은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새로운 탈출구가 될 수도 있다.

상징계가 유일하다고 믿는 그 맹신을 던져 버려야 할 것이다. 세상은 다양한 질서로 짜여 있으며, 우리도 새로운 질서를 다양하게 만들어갈 수 있다. 상처투성이의 삶으로부터 탈출하여 자유롭게 횡단하고 질주할 수 있는 새로운 삶의 주체가 되려면, 먼저 트라우마를 치유해야 할 것이다. 그 치유의 길은 생각보다 구체적으로 우리 가까이에 있다. 하드한 혁명보다 마음 속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소프트한 혁명이 우리에게 더 절실하다. 여성주의자들도 이들의 치유에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믿음에 대하여』- 지젝 [청춘의 서재]

김종곤(건국대학교 강사)

신혼여행 가는 길이었다. 비행기를 타려고 대합실에서 지친 몸을 의자에 기대고 있는데 아내가 주변을 둘러보더니 나에게 주변 사람들을 보란다. 우리의 목적지가 신혼 여행지로 인기가 있는 곳 중 하나이기에 많은 신혼부부들이 그 비행기를 타려고 기다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모두가 우리가 같은 신혼부부로만 보였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서 어떤 특이점을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러자 아내는 한명한명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그들이 들고 있는 가방과 손목에 차고 있는 시계와 같은 ‘물건’들을 설명해준다. 아내의 설명 요점은 그것들이 모두 고가의 ‘명품’이라는 것이다. 그때까지는 아내의 설명이 지닌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할 때 난 비로소 아내가 하려는 말이 ‘신혼여행=명품소비 여행’이라는 것을 알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게이트 앞에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무엇인가를 사고 있었다. 나도 기념이 될 만한 물건이 있으면 골라봐야지라는 생각으로 아내의 손을 이끌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이 공항 외부 면세점에서 구입한 물건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임을 알았다.

몇 백 만원에서 몇 천 만원까지 하는 가방, 시계와 물건은 또 다른 몇몇 가지의 물질을 가공한 구성물이다. 그것은 나름의 실용성에 바탕을 둔 가치를 가진다. 하지만 명품 소비는 그 실용성을 욕망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왜냐하면 잡동사니를 담는 물건, 시간을 측정하는 물건에 그렇게 열광할 이유는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소비는 그것을 넘어 ‘다른 무엇’을 욕망하는 듯 보인다. 지젝은 이러한 소비의 형태를 자신의 책 『믿음에 대하여』(최생열 역, 동문선)에서 ‘잉여 향유’(plus de jouir)라 부른다. 즉, 오늘날의 소비에 있어 우리의 욕망을 사로잡은 것은 물건에 달라붙어 있는 ‘더 이상의 어떤 것’이라는 것이다. 지젝의 말에 따르면 오늘날의 소비주체는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작용하는 그릇된 상상의 잉여”(37)를 향유하고 있는 것이 된다.

잉여는 환상적 이미지와 같은 것이다. 한 자동차 광고를 보자. 길거리에서 만난 친구가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게 어떻게 지냈냐고 물어본다. 그러자 그 친구는 ‘육체’를 통해 나오는 음성 대신 옆에 세워져 있던 고급 세단을 향해 리모컨을 누른다. ‘비육체’적인 검은색 자동차는 “뽕뽕”하고 비언어적 소리를 낸다. 그런데 신비롭게도 이 광고를 보고 있는 우리는 자동차의 비언어를 이해하면서 리모컨을 눌렀던 친구의 대답을 듣는다. 그 대답 속에는 그 친구의 지난 과거와 현재가 담겨있다. 고급 세단을 살 만큼의 화폐를 축적했으며 그래서 지금 세단의 평가등급 만큼과 같은 사회적 지위를 가지고 있다고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맑스가 말하는 물신숭배(fetishism)를 발견한다. 비육체적인 물질과 교환되는 화폐량이 곧 그것의 가치 전부를 대변하면서 육체(생명)들 간의 사회적 관계는 물질과 물질 간의 관계라는 환상적 형태를 취하게 된다. 맑스는 이것이 노동생산물이 상품으로 생산되는 순간 달라붙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면 소비주체가 소비하고자 욕망하는 것은 노동생산물에 달라붙어 있는 바로 ‘잉여’가 아니겠는가? 지젝이 그러한 것처럼 충동의 목적(goal)과 목표(aim)를 구분해서 보자면(101), 여기서 충동의 목적은 자동차를 소유하는 것이지만, 목표는 그것을 통해 얻는 쾌락이다. 그것은 타인과의 차이를 확인하는 것일 수 있겠지만, 본질적으로는 외설적 초자아(superego)의 부름에 부흥한 안도감이면서 기쁨이다. 이것의 의미는 오늘날의 소비 사회를 진단하는 지젝의 말을 단초로 해서 찾아진다.

“‘소비 사회’에 해당하는 후기 자본주의는 더 이상 영웅적 행위를 통해 한계를 뛰어넘도록 요구하는 방식으로 유지되는 질서가 아니다. 후기 자본주의의 일반화된 잉여에서 위반 자체가 권장되었고, 우리는 매일 우리로 하여금 남용을 일삼게 할 뿐 아니라 새로운 잉여를 직접적으로 장려하고 유혹하는 발명품들과 사회 형태들에 의해 세계를 받는다.”(28)

초자아는 이드(id)의 충동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법, 도덕 기능을 한다. 하지만 소비사회에서 초자아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형제들을 잡아먹은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 법적 질서와 도덕적 규범을 위반하는 외설적 아버지이다. 오늘날 소비사회는 죽음에 맞서 자신의 충동에 충실한 안티고네를 넘어서, 제우스가 죽인 자신의 외설적인 아버지 크로노스를 되살리고 있다. 아이폰 광고에서 우리는 그러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아버지의 말씀에 따르면 아이폰을 가지지 않는 것은 남들이 하는 이것저것을 할 수 없는 ‘바보’가 된다. 그것은 마치 옆 집 아이는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엄친아인데 너는 왜 그러냐는 식의 꾸지람과 같다. 이제 필요에 따른 소비 혹은 절제된 소비는 외설적 초자아 앞에서 ‘우둔함’이 된다. ‘미덕’은 경계 없는 소비이면서 다시 순환해서 돌아오는 소비이다.

그런데 이 외설적 아버지는 어디로부터 귀환했는가? 죽은 자를 다시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 안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잉여향락이 가져다주는 짜릿함은 ‘자본의 욕망’이 우리 안으로 파고들어오도록 허락한다. 그리고 우리를 뚫고 들어온 그것은 우리의 몸 속에서 기생하며 우리의 몸을 지배한다. 마치 영화에서 괴물이 사람들의 몸에 들어가 그들을 지배하듯이 말이다. 이제 이 기이한 괴물은 인간이 먹는 것을 받아먹는다. 인간은 아무리 먹어도 배가 채워지지 않고 허기진다. 굶주린 인간은 좀비와 같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찾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인간에게 남는 것은 단지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왔을 때 느끼는 잠시 동안의 즐거움, 텅비어있는 기표의 소비뿐이다. 그래서 우리의 소비욕망은 라캉이 말한 것처럼 자신의 욕망이 아닌 타인의 욕망이다.

입으로 들어간 것이 있으면 밖으로 나오는 것이 분명 있다. 그것은 우리의 몸으로 배출하는 것이지만 사실 우리의 몸속에 있는 괴물의 배설물이다. 배설물은 입으로 들어갈 때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서 일그러지고 혐오스럽다. 그 “외부화된 배설물은 인간 몸체를 식민화하는 이방적 괴물에 정확히 상응”(69)한다. 그것은 항문적 대상으로서 똥이기에 누군가가 보기 전에 변기에 물을 내리듯이 감추어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이 괴물의 배설물이라는 것, 나의 욕망이 타인의 욕망이라는 점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설적으로 자신의 소비행위가 자신의 자율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만약 당신이 그것을 원한다면 A를 누르고, 원하지 않는다면 B를 누른다. 역설은 우리가 선택의 욕구를 끊임없이 분출하고 성적 욕구나 민족 정체성과 같은 ‘자연적’ 특성들이 선택의 문제로서 경험되는 전통 사회 이후의 ‘반사적 사회’에서는, 그간 철저히 배제되었던 요소들이 근본적이고 진정한 선택으로 간주된다는 점에 있다.”(37)

이는 라캉의 믿음 공식, 즉 이데올로기와 관련된다. 지젝은 그것을 그의 다른 책(『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등)에서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설명한다. ①고급 세단이 나의 사회적 지위를 표현해준다고 믿는다. ②하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③‘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는다. ①의 믿음은 ②에 의해 부정된다. 지젝은 이를 냉소적 이성에 따른 결과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①의 믿음이 극복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잉여항략이 ①의 믿음을 ③의 믿음과 같이 전복시켜 버린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믿음은 나의 믿음이 아니다. 그것은 외설적 초자아의 기대에 형성된 타인의 믿음이다. 타인의 믿음을 믿음으로 해서 우리의 소비선택은 나의 자율적 행위라는 환상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이렇듯 외설성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 외설성은 자신의 타율성을 우리의 자율성으로, 타인의 욕망을 나의 욕망으로 믿게끔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소비사회의 생명은 ‘살아 있는 죽음’이다. 여기서 벗어나 하나의 생명으로 살아나는 방법은 외설적 초자아를 몰아내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찾기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어떻게’라는 또다른 과제를 남긴다. 그것은 어쩌면 오늘날 새 역사를 준비하는 청춘의 몫이 아닐까 싶다.

자거라투스트라, 벌교에 가다(1) [자거라투스트라 시장에 가다]

이병창(MEGA 사업단 공동대표, e 시대와 철학 자문위원)

자거라투스트라는 오래 전 선배님과의 한 술자리에서 전남 보성 벌교읍에 가보자고 약속했다. 선배님 말씀으로 거기엔 홍암 나철 선생의 생가가 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처음에 시원스럽게 약속했지만, 사실 꼭 가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도대체 벌교라면 저 멀리 남쪽 바다 끝이 아닌가? 거기서 조금 더 가면 ‘땅 끝’이라지? 다행히 선배님이 술자리에서의 약속이라 생각하신 듯 독촉하지 않으니 자거라투스트라도 그런 약속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여름방학도 끝나갈 무렵, 선배님과 우연히 다시 술을 먹는데, 나철 선생 이야기가 또 나왔다. 선배님이 최근 ‘한국현대사상사’를 쓰셨는데 거기 나철 선생도 포함되어있다는 것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나철 선생을 계룡산의 신흥종교의 어떤 교주 중의 하나 정도로 생각하는데, 선배님의 말씀 가운데는 은근한 존경심이 감추어져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방학 동안 꼬박 집에만 붙어 있었던 것을 생각하고 핑계 삼아 시원한 바다 바람이나 쏘이자 싶어, 그럼 바로 떠나가자고 했다. 선배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앞 뒤 말을 자르고 그러자고 하는 바람에 마침내 자거라투스트라는 벌교까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약속한 날 아침에 자거라투스트라는 세미나가 있어 그걸 다 마치고 떠나려니 벌써 오후 3시였다. 서두르면 순천 근처 갯벌까지 갈 수 있겠지? 거기는 꼬막 천지인데, 꼬막안주에 소주 한잔이면 그까지 간 보람도 있겠네. 이렇게 생각하니 자거라투스트라는 어릴 때 소풍 떠나는 심정으로 되돌아 간 듯했다.

떠나자마자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께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형, 나철 선생은 왜 자결했대요?

자기의 숨을 스스로 막는 선도의 수행법이 있는데 폐기법이라 해. 나철선생은 그렇게 돌아가셨어. 구월산에서 돌아가시기 전에 국문학자 김두봉을 비롯한 제자들을 데리고 함께 수행했는데, 드디어 1916년 8월 14일이 되었지. 그날 선생은 앞으로 사흘간 혼자서 수행할 것이니 누구든지 들어오지 말라 하셨지. 사흘이 되어도 아무 기척이 없자, 제자들이 문을 열고 들어가니 이미 자진 하셨지.

그러면 유서는 없었어요?

있지. 순명시를 남기셨어. 동포의 참혹한 고통 보면서 “이들의 죄를 대신 받겠다.”고 기록하셨지. 즉 원래 죽어야 할 자, 즉 일제겠지. 일제를 대신해서 죽으니, 한을 조금이라도 풀라는 뜻이지. 동포들 보고 나의 몸뚱아리를 씹어 먹으며 자신들의 분을 풀라는 것이지. 기가 막힌 자살시이지?

한을 풀라는 것이에요? 아니면 내가 죽었으니, 너희도 죽음을 무릅쓰라는 거예요?

흠, 그런데 대종교는 1909년 음력 1월 15일 중광절에 창시되거든. 처음에는 단군교라 했는데, 일부 세력이 오히려 친일 쪽으로 빠지면서, 1910년 8월 5일에 들어 대종교로 이름을 바꾸지. 그러다가 1914년 5월 13일 만주 화룡현 청파호에 본부를 옮겨. 그는 이미 일제의 대종교 탄압을 예상한 듯해. 정말로 1915년 일제는 종교통제안을 발표해서 대종교는 종교가 아니라 위장된 독립운동단체라면서 탄압하기 시작했지. 1916년 나철 선생의 자진은 일제의 이런 종교 탄압에 대한 항의로 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여튼 그러면서 예언시도 남겼는데, 앞으로 북방의 이리와 남방의 원숭이가 싸울 것이고, 그 때문에 세상이 혼란스러울 것이라고 예언하셨대.

북방의 이리나, 남방의 원숭이가 무엇을 의미해요?

글쎄, 어떤 사람은 소련과 미국을 의미하고, 그래서 남북전쟁을 예언했다고도 보지. 순 억지지. 남방의 원숭이라면 당장 일본을 생각해야 할 게 아닐까? 그러면 러일 전쟁 또는 소일 전쟁을 예견한 것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이렇게 선배님과 차안에서 대화하는 동안 자거라투스트라는 자기도 모르게 대화에 빠져 길을 놓쳐 버렸다. 허둥지둥 길을 다시 찾아 고속도로에 들어서니 고속도로에 들어가는데 그만 모든 진이 빠져 버렸다. 게다가 서울 천안 사이의 길은 항상 그렇듯이 지체와 정체를 거듭했다. 자거라투스트라는 차를 몰면서도 생각에 골몰했다. 그의 생각은 자진한 나철 선생의 운명과는 거리가 지극히 먼 생활상의 긴박한 문제였다. 본래 순천 갯벌에서 한잔 하려던 기획은 시간상 불가능하다. 그러면 오늘은 어디에? 자거라투스트라의 머리에 갑자기 지리산이 떠올랐다.

형, 온천해 볼래요? 시간상 오늘은 구례까지 밖에 못가요. 내일 아침 거기서 바로 순천으로 가는 고속화도로가 있으니까 벌교엔 내일 갑시다. 또 온천 랜드 가면 멋진 찜질방이 있어요. 제가 지리산 갔다가 내려와서 잤던 적이 있거든요.

찜질방에 잔다는 것에 대해 선배님은 거부 반응이 없어 보인다. 값이 싸기는 하지만, 찜질방에는 코고는 놈, 잠꼬대 하는 놈, 이가는 놈들이 많아 여간 시끄러운 것이 아닌데….

천안에서 전주 쪽으로 빠지자 도로는 갑자기 텅 빈 듯했다. 이걸 차별이라 해야 하나, 아니면 축복이라 해야 하나? 자거라투스트라는 애매함을 느끼면서도 텅 빈 도로 위에서 엑셀레이터를 밟기 시작했다. 이미 8월 말, 날은 차의 속도만큼이나 빨리 저물어 갔고 날이 저무는 만큼 차도 빨리 달려갔다. 어느새 구례 그리고 지리산 온천 랜드이다. 거의 동물적인 감각으로 찜질방을 찾아 갔다. 찜질 방 옆에 자그마한 주막이 있어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과 막걸리를 굽고 삼겹살을 비웠다. 주막의 주모가 이 한 여름에 온천을 찾아온 우리들을 이상한 듯 쳐다본다. 정말 온천 랜드는 텅 비어 있었다. 아울러 찜질방도 거의 선방 수준이다. 자거라투스트라는 한없는 고요를 배게 삼아 꿈도 없는 잠을 달게 잤다. 새벽에 깨어나 보니 어렴풋한 새벽 빛 속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소리가 들린다.

선배님이 구례 화엄사를 본 적이 없다 하기에 거기 홍매화가 있는데, 딴 것은 볼 것이 없고 그 매화는 꼭 보아야 한다고 우기면서 선배님을 모시고 갔다. 화엄사 앞에서 아침을 먹는데, 식당 주인이 관광지도를 전해 준다. 선배님이 그 지도를 보더니 갑자기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생겼단다. 매천사라는 곳이다. 한말 선비 매천 황현이 순국하신 곳이다. 선배님은 밥을 먹다 말고 이 기막힌 우연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한다.

매천 황현, 그리고 홍암 나철은 모두 왕석보라는 선비의 제자였어. 왕석보가 바로 구례 출신이야. 우리가 우연히 들른 이 근처 어디일꺼야. 그러데 왕석보의 제자로 또 한 분이 있지. 그 분이 바로 해학 이기라는 분이야. 매천은 광양 사람이고, 해학은 김제 사람이지. 그리고 나철은 벌교 사람이고, 모두 이 구례를 중심으로 흩어져 있어. 이 지리산 자락의 구례가 그들의 정신적 고향인 셈이지.

형, 왜 하필이면 구례인가요?

글쎄, 그걸 몰라. 이 근처에는 무언가가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뭔가가 있는 것은 틀림없어.

그렇네요. 화순에 운주사라는 곳이 있는데 좀 신비해요. 이 근처는 미륵의 전설이 얽힌 곳이 많아요. 김제 금산사도 그렇구요. 소위 장소라는 개념으로 이 동네를 좀 연구할 필요가 있겠네요.

그런데 세 사람은 정치적으로 보면 다 달라. 매천은 전통 성리학을 고집하신 분이지만 양명 쪽도 가까이 하신 것 같아. 나철은 개혁주의자 반계 유형원을 사숙하고, 김윤식의 문하에서 활동했으니까, 실학 쪽을 계승한다 보아야겠지. 그런데 이기는 폭이 넓었어. 나중에는 진화론을 수용하여 신민론자 또는 자강주의자가 되지. 그런데 셋 다 자결했다는 데 공통적이야. 해학이 가장 일찍이 1909년 곡기를 끊고 자결하고, 이어서 매천이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아편을 먹고 자결하고, 마지막으로 나철이 1916년 숨을 막아 자결했어.

거참 형, 같은 선생의 제자들이 모두 자결했다니, 놀랍군요. 스승이 철학을 자결 연습으로 가르치신 게 아닙니까? 소크라테스처럼 말이에요. 그런데 자결할 때 남긴 말도 비슷한가요?

매천 역시 절명시를 남겼어. 그런데 핵심은 인간 세상이 지식이 살아가기 힘들다는 것이었지. 약간 지식인의 책임감을 보이기는 하지만 절명시 치고는 좀 신세타령 투야.

해학 이기의 유언에 대해 묻기 전에 아침 식사가 끝났다. 우리는 곧바로 화엄사의 홍매화를 찾아갔다. 화엄사의 분위기와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잘 어울렸다. 꽃이 진 홍매화는 각황전 옆에 서 있었지만, 아무도 눈여겨 보지 않고 그 스스로도 그런 고독을 즐기는 듯했다.
각황전의 돌사자 석등 오른 쪽 뒤편에 보이는 나무가 화엄사 홍매화이다. 봄이 되면 눈부신 매화가 피어난다.화엄사를 나와 자거라투스트라는 매천사로 가보았다. 다행히 GPS덕분에 힘들지 않고 찾을 수 있었으나, 이 시대 누가 매천을 찾으리. 매천사의 문은 두꺼운 열쇠로 잠겨 있었다. 사당 문이 열리면 순국하신 선생님께 절이나 하고 돌아갈까 하여 안내인을 찾으나 안내인도 보이지 않는다.
매천사의 사당을 담장을 넘어 찍어 보았다.

하는 수 없이 자거라투스트라는 서둘러 나와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벌교로 간다. 일사천리로 간다는 말이 정말로 실감난다. 텅 빈 거리는 속도 제한도 없어 정말 달리기 좋다. 차는 곧 순천을 벌교에 다다른다. 벌교 근처에 이르러 비로소 자거라투스트라는 선배님에게 물었다.

나철 선생의 고향이 벌교읍 어디쯤인지 알아요?

선배님은 태연하게 말한다.

벌교읍에 가면 알 수 있다 했어.

아니 이럴 수가 아뿔싸. 자거라투스트라는 후회가 막급이다. 선배님만 믿고 나철 선생에 관해 전혀 아무런 조사도 하지 않고 떠났던 것이다. 급하게 GPS를 누르는데 나철, 홍암, 대종교 그리고 심지어 자결 등 아무리 집어넣어도 GPS는 묵묵부답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탐험 (8)

이정호(방송통신대 교수)
주제 1: 그리스인의 사랑

 

4. 플라톤의 에로스(2)

아리스토파네스(기원전 445-385?) 상

플라톤이 「향연」에서 그리고 있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한마디로 인간의 근원적 고통을 치유(iasis)하는 능력이다. 그렇다면 치유 받아야 할 근원적 고통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된 신들의 심판과 그에 따른 본래 모습의 상실이다. 에로스는 그 상실의 고통을 치유하는 신이다. 그러나 서두에서 펼쳐지는 인류의 본래 모습에 관한 우화적 기원을 들여다보면 내용의 심각성에도 불구하고 일단 아리스토파네스 특유의 희화적인 파토스(페이소스, pathos)가 – 비록 어디까지가 플라톤의 창작인지 불확실하더라도 – 흘러넘친다. 그 우화의 개요는 이렇다.

“인간들은 원래 성(性)이 셋이었다. 지금처럼 남성과 여성만 있는 게 아니라 남성과 여성을 함께 가진 셋째 성이 더 있었다. 형태 또한 지금과 달리 등과 옆구리가 원형을 이룬 구형의 몸체에다 위로는 얼굴이 양쪽에 붙은 원통형 머리가, 옆으로는 두 쌍의 팔이, 아래로는 두 쌍의 다리가 달려 있었다. 마치 지금의 모습을 가진 두 사람이 서로 꼭 안고 하나의 몸이 된 것 같은 모습이되, 얼굴과 팔다리가 각각 반대쪽을 향해 있고 생식기가 엉덩이 쪽에 붙은 형상이었다. 이 태초의 인간들은 행동도 민첩하여 어느 쪽으로든 원하는 대로 움직였고 힘이나 활력 또한 엄청나 늘 자신들을 대단하게 생각하였고(phron?mata megala) 급기야 그 오만함이 도를 넘어 신들에게까지 대들게 되었다. 이에 신들이 노하여 이들을 없애 버리려고 하였으나 신들 또한 이들로부터 숭배와 제사가 필요한 만큼 아주 없앨 수도 없어, 결국 제우스의 제안에 따라 그들을 모두 반쪽으로 잘라 힘을 약하게 만들어 방종치 못하게 하되, 숫자는 늘려 신들에게 더 쓸모 있게 만들기로 하였다. 그래서 신들은 이들을 각기 둘로 나누고 자른 면을 마치 돈주머니를 졸라매듯 배 한가운데로 묶어 배꼽을 만들고 서로의 자른 면들을 보면서 더 질서 있는 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얼굴을 비틀어 돌려놓았고 팔다리도 반대쪽을 향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잘라진 이 반쪽 인간들은 나머지 반쪽을 그리워해 서로 부둥켜안고 한시도 떨어져 있지 않은 채 아무 것도 하려 들지 않아 급기야 굶어 죽는 일도 생기면서 서서히 멸망해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우화 속 인간의 본래 모습

그러자 제우스는 이를 가엾이 여겨 그들의 생식기를 안쪽으로 옮겨놓아 남성과 여성이 만나 한데 뒤엉킴이 일어 날 때 임신을 하게 하여 그 종족이 계속 생겨나게 하였고, 동시에 남성이 같은 남성을 만날 때도 어쨌거나 함께 함에서 오는 포만감을 느끼게 하여 막간에 한숨을 돌리고 다시 일로 돌아가 여타의 삶을 돌보게 만들었다. 이때 반쪽으로 잘라지기 이전의 남성은 해의 자손이고 여성은 땅의 자손, 두 가지 성을 모두 가진 사람은 달의 자손인 까닭에, 순수 남성반쪽이 다른 순수 남성반쪽을 그리워하는 사랑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사랑이자 그들이야말로 나중에 국가의 일에 종사할 만한 사람들로 여겨졌다(189d-192b)”

인간의 본래 모습과 지금의 인간들이 생겨난 근원에 대한 이와 같은 아리스토파네스의 이야기는 지금의 인간자체가 상실과 결핍의 존재임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 상실과 결핍이 가져다 준 가장 심대한 고통은 자신이 반쪽에 불과하다는 것 그래서 다른 나머지 반쪽과 하나로 함께 있지 못하다는 사실 그 자체이다. 그래서 지금의 인간이 추구하는 가장 큰 소망은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 온전함을 회복하는 것이 고통에 대한 궁극적인 치유이자 가장 큰 행복이다.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에로스란 바로 이와 같은 상실과 결핍을 치유하는 능력이자 그 태생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욕망 그 자체이다. 그래서 에로스는 인간이 신들에게 경건함을 보여 줄 때 인간을 옛 본성으로 되돌려 주고 치유하여 복 받고 행복한 자들로 만들어 주는 희망이 된다.(193a, d)

다소 우스꽝스러운 우화로 시작하는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내용으로 들어가면 들어 갈수록 겉으로 드러난 희화적인 측면과 달리 인간 실존에 대한 비참성과 심각성은 물론 에로스를 통해 그것을 이겨내려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을 크게 부각시키고 있다. 사실 이야기 서두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에로스를 인간에게 가장 우호적인 신으로 소개하고 있으나, 그 이후의 이야기 어디에서도 에로스가 신처럼 여겨지거나 신으로 표현되는 문맥은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에로스는 신들의 편에 서 있기 보다는 인간의 실존 한 가운데 자리하면서 인간의 본래 모습을 회복시키는 힘이자 능력으로서 실질적으로는 인간의 내적 욕망자체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본래적인 것에로의 회복은 맹목적이다. 물론 반쪽의 인간은 원래 모습으로 회복하기를 원하고 그렇게 돌아가는 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원래의 상태는 앞에서 보았듯이 신에게 대들 정도의 오만의 상태이고 자기 보존의 효율만 있을 뿐 그 어떤 가치지향도 없다.

그럼에도 그들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그리움과 열망은 그들 모두에게 실재하는 욕망이고 제한적이고 일시적이지만 행복하게 해주는 유일한 단초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떨어져 있는 상태에서 영위되는 사회공동체 생활 속에서 그들은 늘 서로의 보존을 위해 서로를 아끼고 보살피려할 것이고 그들의 그러한 열망은 사회공동체 자체의 보존에 기여하게 될 것이다. 특히 해의 자손이 남성 반쪽들의 다른 반쪽 남성에 대한 열망은 서로가 하나가 되려는 열망 중에서 가장 강한 열망이어서 사회공동체의 측면에서 가장 바람직하고 권장할 만한 사랑으로 여겨진다.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의 사랑 또한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열망이기는 하나 상대적으로 저급한 사랑이며 다만 그러한 사랑의 가치는 출산을 통한 자손의 번식에 있을 뿐이다. 그리고 반쪽끼리 결합하는 경우의 수는 여성반쪽과 다른 여성반쪽의 경우도 있으므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는 남성 동성애와 이성애는 물론 여성들 간의 동성애도 인간의 본래적인 욕망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것은 고대 문헌에서 여성 동성애의 본래성을 인정하는 최초의 사례로 꼽힌다.

요컨대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본래 상태에서 훼손된 자신의 반쪽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pothein)이다. 밤이고 낮이고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최대한 함께 같은 곳에 있으려는 열망이자 욕망(epithymia)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파네스는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켜준다면 누구도 그것들 원하지 않을 자가 없다고 말한다. 즉 자기가 사랑하는 자와 한데 모여 융합되어 하나가 되는 것이 인간 삶의 최대 목표이다. 그 이유는 바로 그러한 모습이 온전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에로스는 그 온전함에 대한 욕망과 추구에 붙여진 이름(tou holou oun t? epithymia kai di?ksei er?s onoma)”이다.(193a)

그러나 헤파이스토스가 그 둘을 융합 용접시킨다 해도 이미 신이 갈라놓은 그 반쪽의 상태가 하나가 될 수는 없다. 심판은 있지만 다시 하나가 되는 구원의 길은 없다. 굳이 구원이 있다면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둘이 부둥켜안고 하나가 된 것 같은 감정을 가지고 서로를 위로하고 즐거워하며 기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에로스는 완전한 회복의 능력이 아니라 일시적인 치유의 능력일 뿐이다. 완전하게 회복시켜줄 수 있는 능력은 그들을 갈라놓은 신들에게만 있다.

물론 신들에게 경건한 자들의 경우 에로스의 능력을 통해 온전한 옛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는 희망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희망이 실현되는 이야기는 그 어느 곳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대부분의 인간은 희망은커녕 신들에게 잘못 보일 경우 다시 또 반쪽의 반쪽이 될 수밖에 없는 숙명을 안고 두려움(phobos)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에로스는 다만 그러한 숙명적인 제약 속에서 그들 스스로가 안고 있는 원초적 상처를 치유하는 능력이고, 그러한 에로스를 통한 치유가 인간이 누려야 할 최고의 만족감이자 행복이다. 그것도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신을 잘 받들고 섬기는 소수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다 소년 사랑을 누릴 수 없는 까닭도 그러한 이유에서 이다. 이런 점에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 역시 일정하게 고대 그리스인 특유의 비장한 운명애(amor fati)를 포함하고 있다. 심판은 있지만 구원의 길은 두절되어 있고 오히려 인간은 상존하는 공포 속에서 다만 끝없이 하나가 되고자 하는 운명적인 몸부림 그 자체를 행복으로 간주하며 살아가야 한다.

이러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이전의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와 여러 가지 점에서 다르다. 우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에뤽시마코스나 파이드로스, 파우사니아스의 에로스처럼 우주에 편만해 있지도 않고 인간성 바깥에 초월적으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에로스는 오로지 원래 하나였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자 인간성 내부에 자리한 본원적인 열망이다. 이러한 사랑은 우주에 대한 사랑도 인간일반에 대한 사랑도 아니다. 그것은 개별적인 한 인간, 구체적인 나머지 반쪽에 대한 사랑이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원천적으로 덕과 윤리와 무관하다. 파이드로스가 말하는 좋은 것의 원인이라고 말할 수도 없고 그리고 파우사니아스나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처럼 좋은 에로스와 나쁜 에로스로 나누어지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오로지 그것이 잘났건 못났건, 성품이 좋건 나쁘건, 소양을 갖추었건 갖추지 않았건 자신의 나머지 반쪽에 대한 열렬한 그리움이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1

이렇듯 에로스는 동성애이건 이성애이건 모든 형태의 반쪽에 대한 열렬한 사랑 모두에 관계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에서 이성애건 동성애건 간에 성적 결합 또는 성적 쾌락에 대한 욕망은 부차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저 남성반쪽과 여성반쪽이 하나가 되려는 욕망에 한데 뒤엉키면서 부차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생식이고 성적 결합이다. 그 조차도 부둥켜안고 떨어져 있지 않아 종의 보존이 어렵게 되자 신들이 생식기를 안쪽으로 돌려놓아 가능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성적 결합자체는 아리스토파네스에게 있어서 인간의 욕망이 아니라 오히려 신들의 필요에 따라 생겨난 것이다.

아마도 이러한 생각은 남성 동성애 즉 소년 사랑의 우월성을 염두에 두고 나온 것일 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하는 관계가 반드시 성적 열망을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님을 시사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견해는 소년 사랑이 가지고 있는 교육적 동성애로서의 성격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어떠한 가치지향과도 상관없이 무조건 처음의 온전한 본성에 따라 끊임없이 함께 같이 있으려는 욕망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파이드로스나 파우사니아스처럼 에로스가 덕과 좋은 것의 원인이어서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의 모습에 대한 열망 때문에 다른 반쪽을 찾는 것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의 온전한 본성을 찾는 것이자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이것은 앞으로 전개될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차이를 예고한다.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이 좋은 이유는 본래의 자기상태로 돌아가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지만 소크라테스는 본래의 자기상태가 나쁜 것이라면 그것으로 돌아가는 것 역시 나쁜 것이라고 여긴다. 본래적인 것이라고 무조건 좋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는 이러한 소크라테스의 비판에 소크라테스의 이야기가 끝난 후 뭔가를 말하려고 하지만 알키비아데스가 들어오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는 못한다.(211c) 아마도 아리스토파네스는 본래의 자기이기 때문에 돌아갈 뿐만 아니라 그것이 온전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돌아가는 것이라고 말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그 점에 대해서도 이미 한계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가 좋다고 말한 그 온전한 상태란 반쪽이 되기 이전의 상태로서 이미 앞에서도 살폈듯이 신에 대해 오만함을 가지고 있는, 온전하지도 좋은 상태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상태로 돌아가는 것 역시 결코 행복한 상태일 수 없다. 그것은 또다시 반쪽으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는 애초 상태로의 복귀에 불과하다. 이런 점에서 보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가치지향적인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 과거 회귀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예전의 반쪽을 찾아서 같은 자리에 머물려는 열망, 다시 말해 본래의 태생적 상태로 돌아가려는 생물학적 본능일 뿐이다. 이에 비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감각적 충동을 이겨내고 궁극적인 아름다움과 “늘 단일형상인 것”(monoeides aei on, 211b) 그 자체를 향해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열망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가 에로스를 목표를 향한 격렬한 욕구로 규정하고 있는 점은 소크라테스와 일맥상통한다. 사실 파우사니아스와 파이드로스, 에뤽시마코스의 에로스에는 격렬함 보다는 덕과 조화가 강조되고 있다. 그리고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는 비록 처음에는 신으로 나오지만, 인간적 욕구의 형태로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고 본래적인 온전함에로의 회복에 대한 희망을 부여하려는 열망이라는 점에서 실제적으로는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이런 점 역시 에로스를 신과 인간의 중간자로서 ‘신령’(daimon, 202e)으로 상정하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과 상통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에는 앞에서 연설한 사람들의 에로스에 대한 견해가 비판적으로 일정부분 수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고대 아테네 향연의 한 장면 2

그러나 아리스토파네스와 비교해서는 결정적으로 그 격렬한 욕구가 지향하는 목표가 정반대라는 점에서 오히려 그러한 유사점은 그들의 에로스론이 전적으로 대립되어 있음을 보다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칭축의 역할을 한다. 그것은 마치 거울상이 언뜻 실상과 모든 면에서 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 대칭면을 통해 모든 것이 정반대인 것과 같다. 소크라테스의 에로스론은 비록 로고스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궁극적으로는 질서와 조화, 신에 대한 경건함, 단일형상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아폴론(Apoll?n)적이다. 이에 비해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은 오로지 본래적인 모습을 향한 본능적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러한 몸부림이 덕과 진리라는 보편적인 가치를 향한 것이 아니라 순전히 자기만의 고유하고도 구체적이고도 개별적인 다른 반쪽을 향한 몸부림이라는 점에서 디오뉘소스(Dionysos)적인 성격을 갖는다. 고대 그리스 고전학에 밝았던 니체(F. Nietzsche)가 「향연」을 탐독한 것은 익히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니체 또한 아리스토파네스의 에로스론을 음미하면서 분명 인간의 태생적인 운명애의 한 단면을 들여다보았을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가 말하는 에로스는 마치 유전자처럼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살아있다. 불같은 욕정에 휩싸인 청춘기의 관능적 사랑에서부터 따사로운 동반의 정을 나누는 노년기의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들에게 공통으로 흐르고 있는 에로스는 여전히 “할 수 있는 한 많이 서로와 같은 곳에 있기”(192d)를 바라거나 그러한 짝을 찾고자 하는 열망이다. 마치 그것이 최선의 구원이자 행복인 양 여기면서.

(다음에 “플라톤의 에로스(3)”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