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영의 간도답사여행기[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의 간도답사여행기[보고 듣고 생각하기]

 

나태영(한철연 회원)

 

 

나는 1997년 8월 31일 결혼했다. 인도네시아 발리로 신혼여행 갔다. 발리 사람들은 종교가 생활 속에 깊이 들어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리 사람들이 전통 옷 입는 것 보고 큰 감명 받았다. 그 영향으로 나는 7년간 생활한복 입고 출퇴근 했다. 4계절 열 세벌 생활한복 입고 출퇴근 했다. 아내와 약속 했었다. 결혼 10주년에 쿠바 여행 가자고 약속 했었다. 밥벌이에 허덕이다가 그리 못 했다. 결혼 한 지도 벌써 16년이 되었다. 그 뒤 해외여행을 못했다.

그러다가 얼숲(페이스북) 김갑수 작가 담벼락에서 정보를 보게 되었다. 성서중학교 2학년 딸 쌍둥이 나은진, 나은성과 함께 여행 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감수성이 예민한 때 독립운동하신 선열 발자취를 밟아가며 생각하며 깨닫는 좋은 기회가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들이 고구려 기상을 배우길 기대했다. 중국여행 경험 있는 아내에게도 큰 기쁨이 되리란 생각에 생명보험 약관대출 받아서 길벗투어에 네 사람 여행 신청했다. 내가 실수했다. 당사자 세 사람한테 물어보지 않고 여행 신청했다. 당연히 세 사람이 좋아하리란 생각에 그리 했다.

은성이가 그런다. “아빠 행동은 가부장제 모습이야! 민주주의 방식으로 의논을 먼저 했어야지!” ‘여든 살 노인도 세 살짜리한테 배울 것이 있다’는 속담이 맞다. 내가 딸한테 한 수 배웠다. 결국 나 혼자 중국 간도답사여행 다녀왔다.

?나태영

2013년 7월 19일부터 21일까지 여행했다. 광개토태왕 비는 작았다. 당신이 일찍 돌아가셔서 크게 짓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광개토태왕 아들 장수왕 비는 크고 우람했다. 당신이 오래 사셔서 시간과 공을 더 들여서 크고 우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두울 때 봐서 그 모습을 온전히 볼 수 없었던 게 아쉬웠다. 광개토태왕비에 절을 했다. 중국 공안이 뭐라고 말하며 화를 냈다. 어이가 없었다.

“아니 내가 내 조상한테 절을 올리는 데 왜? 화를 내지?”

지금 중국이 억지로 밀어붙이는 하상주단대공정, 동북공정 한계를 절실히 느끼게 하는 경험이었다. ‘공정’ 이란 두 글자에는 이미 ‘거짓으로 꾸며댄다’는 뜻이 들어있다. 아침에 호텔 로비에서 김갑수 작가한테 물었다.

“우리가 간도 땅을 되찾아야 하지 않나요?”

김갑수 작가가 답했다.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지요!”

21세기 대한민국에 서희 장군이 없다. 앞으로 이 땅에서 서희 장군이 나와야 한다. 전쟁으로 간도 땅을 되찾는 것은 우리에게도 중국에게도 재앙이다. 간도답사 여행은 흥청망청 여행이 아니었다. 공부가 곁들인 여행이었다. 김갑수 작가는 한국 근현대사 전문가이다. 한홍구 교수와 견줄만한 전문가이다. 나는 한국독립운동사에 대해 어는 정도 안다고 생각했다. 한홍구 교수 책을 읽었기에 그리 생각했다. 김갑수 작가 강연을 듣고 내 생각이 틀렸음을 정확히 알았다. 내가 모르는 게 너무도 많음을 깨달았다.

김일성은 대단했다. 체 게바라도 김일성을 극구 칭찬했다.

“우리는 날씨도 좋고 먹을 것이 풍부하고 지원도 많이 받았소. 당신들은 추운 날씨에 먹을 것도 없고 지원도 받지 못한 환경에서 싸웠으니 당신이 나보다 더 뛰어납니다.”

당시 만주에 일본군이 75만명 있었다. 그런 악 조건 속에서 김일성은 대단한 전과를 올렸다. 김일성이 ‘신출귀몰’했다는 평을 들은 게 헛말은 아니다. 보천보전투에 대해서는 한홍구 교수 글을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다. 언론에서도 자주 다뤄서 잘 알고 있다. 김일성이 이끄는 유격대가 국내로 들어와서 일본군을 쳐부순 전투였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기운 빠진 독립군이 힘을 냈다.

간삼봉전투는 아는 사람이 드물다. 나도 김갑수 작가를 통해서 처음 알았다. 일본군 시체가 산을 이룬 전투였다. 일본군이 시체를 리어커에 싣고 갔다. 지나가던 사람이 거 뭐요? 물으니 일본군이 갑오자(호박)요 말했다

왜? 너무도 부끄러워서!

소덕수, 대덕수 전투에 대해서도 나는 처음 배웠다. 중고등학교 국사 시간에 배우지 못했다. 일본군이 김일성 유격대를 양쪽에서 공격했다. 김일성 유격대가 살금 살금 빠져나갔다. 일본군끼리 서로에게 총질했다. 일본군 피가 바다를 이루었다. 남북통일이 이루어지길 고대한다.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체게바라보다 김일성이 더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넬슨 만델라보다 김대중이 이 땅에서 전 세계에서 더 인정받는 날이 오기를 고대한다.

갈 길이 멀다.
그래도 길을 찾아 걸어가야지!

뚜벅 뚜벅!

?나태영

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 씨, 철학을 생각하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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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구보 씨는 최근 수강생들이 써 놓은 강의 평을 보고 약간 충격을 받았다. 스스로 강의를 잘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적어도 엉터리는 아니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자만심에 금이 간 셈이다. 짤막짤막하게 한두 줄씩 써 놓은 강의 평을 훑어보다가 구보 씨의 눈이 멎은 곳은 다음과 같은 글귀에서였다.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

아니, 이럴 수가… 이건 이전부터 익히 들어왔던 평가와 좀 다르다. 어렵다는 얘기보다, 졸린다는 얘기보다 더 충격적이다. 물론 어렵다거나 졸린다는 평도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선 나름의 변명거리가 있다. 우선, 어렵다는 거야, 원래 철학이 어려운 학문이 아닌가. 아직 분명한 해답이 없는 문제에 대해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철학이니, 어렵고 골치 아픈 건 철학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생각하기 싫어해서는 철학을 잘 할 수 없다. 또 설사 생각하기 싫다고 해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몰리지 않는다면 철학을 시작할 수조차 없다. 그러니 철학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러분은 골치 아플 각오를 해야 한다. 대신, 철학자들의 사유를 따라 평상시 깊게 따져보지 못했던 문제들을 들추고 파헤치다 보면 세상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야가 열릴지 모른다. 구보 씨는 처음부터 이렇게 수강생들에게 당부를 하곤 했다.

강의가 졸린다는 점에 대해서는 책임을 다른 곳에 돌리기가 쉽지 않다. 워낙 말이 좀 느린 편에다 밋밋한 어투이고 보니, 잠깐 내용을 놓치면 목소리가 졸음을 부르는 알파파의 리듬과 맞아 들어가기 십상이다. 때로 억지로 목소리를 높이려 해 보지만 괜히 어색하기만 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구보 씨는 아예 졸리는 목소리라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좋게 생각하면 편안함을 주는 목소리라는 것 아닌가. 조분조분하고 느릿느릿하며 모가 나지 않은 부드러운 음색의 목소리. 어쩌면 심야 음악방송에 어울릴 법한 목소리.

“불면증 있는 분들은 제 강의를 녹음해 가서 잠 안 올 때 들으세요. 효과는 확실히 보장할 수 있어요. 정말이에요. 저도 잠 안 올 땐 혼잣말을 한답니다.”

구보 씨가 강의 때 곧잘 써먹는 자못 애처로운 유머다. 그렇다고 구보 씨의 강의실에는 조는 수강생들 투성이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집에서는 졸되, 강의실에서는 졸지 말라고 구보 씨는 매번 부탁을 한다. 그래도 조는 사람이 있으면 다가가 깨운다. 졸린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졸지 않는다는 데 철학을 향한 여러분의 의지가 있습니다. 목소리의 외피에 가려진 각성(覺醒)의 알맹이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그래도 다시 졸려는 사람이 있으면 이런 슬라이드를 띄우기도 한다.

김어준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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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투(苦鬪)를 해 가면서라도 구보 씨가 살리려는 것은 강의의 내용이다. 무엇보다 철학적 문제의식과 개념들이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이고 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설명하는 데 중점을 둔다. 어려운 내용을 가능한 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려고 나름 애를 쓰는 것이다. 그런데 쉬운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한다니…맥 빠지는 평이 아닐 수 없다.

익명(匿名)의 지적 하나에 그렇게 괘념할 필요가 있나 싶지만, 막상 신경이 쓰이는 것을 보면 구보 씨 스스로도 내심 미심쩍은 구석이 있었나 보다. 어쩌면 구보 씨 강의만이 아니고 철학 자체의 처지가 마음에 걸렸는지도 모른다.

근래 대학에선 철학과가 폐지되거나 다른 과와 통폐합되는 일이 드물지 않다. 한남대와 경남대의 경우에는 철학과를 없애겠다는 결정을 내려져, 여기에 항의하는 교수와 학생들이 대학 당국과 맞서고 있다. 졸업생의 취업률이 떨어지고 입학생도 줄고 있다는 것이 주된 이유다. 이런 일은 국내에만 그치지 않는다. 대표적인 예로, 영국의 미들섹스 대학의 철학과는 그 명성이 상당했는데도 최근 폐지되고 말았다. 아직 항의하는 운동이 그치지 않고 있지만, 역시 돈의 논리에 밀린 이 사태를 쉽게 되돌릴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철학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불필요한 학문이라고 대놓고 말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오히려 우리 사회는 철학적 기초가 부족해서 문제라거나, 우리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는 인문학과 철학적 사유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몇몇 상업적 기획물이 아니면 철학적 저작들은 잘 팔리지 않는다. 중요한 고전이 번역되어 나와도 초판 천부를 넘기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너희 철학자들이 더 정신 차려야 한다는 거야. 철학자들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 안 된다구. 쉬운 얘길 어렵게 한다는 평은 내가 보기엔 정곡을 찌른 거 같아.”

“그래? 어째서?”

“철학자라는 사람들은 대개 텍스트에 갇혀 살잖아. 그러다 보니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이런저런 개념을 통해서 하려고 하고 그 덕택에 얘기가 쓸데없이 어려워지는 거라구. 구보, 네가 좀 심하긴 하지만, 너만 그런 건 아닐 거야.”

“Y야, 개념적 사고란 중요한 거야. 개념은 말하자면, 생각의 다발을 엮는 얼개 같은 거거든. 왜, 우린 분명한 생각의 줄기가 없이 말하는 사람을 두고 흔히 ‘그 사람 개념이 없다’고 하잖아. 철학적 개념은 그런 개념들 가운데서도 아주 근본적인 것들이니까, 보기에 따라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지. 근데 그건 우리가 일상적으론 근본적 사유를 잘 하지 않는다는 반증 아닐까.”

“푸… 구보야, 문제는 니들이 말하는 그 근본적이라는 게 대부분 낡고 비현실적이라는 거야. 대체 뭐가 근본적인데? 옛날에 근본적으로 여겨졌던 게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하는 게 니들의 병폐라구. 그거 내가 보기엔 아무래도 직업병 같애.”

“직업병?”

“그래, 철학자라는 오래된 직업 때문에 생기는 직업병. 철학의 역사가 길고 훌륭한 철학자가 많은 건 자랑거리겠지만, 니들은 그 역사와 전통에 따라야 깊이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같아. 그래서 결국 너네가 하는 게 뭐야? 헤겔이니, 칸트니, 플라톤이니, 공자니, 주자니 하는 사람들의 생각 속에서 헤매는 게 주 업무잖아. 그런데 그 사람들 생각이 오늘날에도 그렇게 중요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거 모르고도 잘 지내고, 그런 거랑 상관없이 생각하고 고민한다구.”

“Y야, 그건 오해야. 그렇게 따지자면, 우린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나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를 몰라도 그런대로 잘 지내고 그런 거 없이도 그럭저럭 생각하고 살거든. 게다가 철학자들이 옛날 개념에만 빠져 있는 건 아니야. 오히려 우리 시대에 맞는 적절한 개념들을 찾아내려거나 만들려고 노력한다구.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서 그렇지…그래서 더더욱 옛 개념들을 참조하는 게 중요한 거야…”

“혹시 너무 많이 참조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괜히 어려워지지. 그러다가 제 풀에 지쳐서 그런 참조 자체가 가치로운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고…”

어쩌면 Y 말이 맞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앞의 것만 보아서야 눈앞의 것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법이다. 때로는 돌아가는 것이 가장 빠른 길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실 자체가 다면적이고 다층적이며 다양한 잠재성을 안고 있는 것인데, 어떻게 거기에 적합한 문제의식이나 개념이 단번에 나올 수가 있는가. 야구선수가 안타나 홈런을 치기 위해서는 무수한 연습과 헛방망이질이 있어야 하지 않는가.

물론 오늘의 현실은 옛날과 같지 않다. 과거에 중요하게 여겨졌던 철학적 문제들 가운데는 이미 해결되었거나 그 탐구 영역이 다른 분야로 넘겨진 것들도 많다. 이를테면, 우주의 본성이나 됨됨이에 관한 문제들은 이제 천체 물리학이나 미립자 물리학이 다루고 있고, 근세의 중요한 철학적 주제였던 인식론적 문제들의 많은 부분은 이제 심리학과 생리학의 소관 사항이 되었다. 인간 사유의 본성에 관한 문제들조차 오늘날은 진화심리학이나 뇌생리학 등에서 다루어 많은 성과를 내고 있다.

철학에 남은 것은 이제 사실의 문제들이 아니라 가치의 문제, 규범의 문제들이라고 할 만하다. 사고의 규범을 다루는 논리학, 행위의 규범을 다루는 윤리학이 아직 철학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아 있다. 그것마저도 규범적 사고의 현상, 규범적 행위의 현상이 문제될 때면 그것들을 데이터로서 다루는 심리학이나 사회학 따위의 대상이 되고 만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철학은 결국 사유의 내적 연결을 문제 삼는 도구적 학문이라거나, 사회역사적 상황에 따른 규범적 행위양식과 가치체계를 정당화하거나 비판하는 이데올로기적 분야라는 규정이 나오기도 한다.

그렇지만 철학의 어깨가 마냥 가벼워지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치의 문제는 의미의 문제와 엮이어 오랜 숙제처럼 철학을 겨냥한다. 모름지기 철학자란 여전히 삶의 의미나 세상의 존재 의미 같은 거창한 문제에 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듯이 말이다. 이런 면에서 철학은 예술이나 종교와 같은 전선에 선다. 물론 예술이나 종교의 무기가 감성이나 신앙인 것과는 달리, 철학의 무기는 사유다. 이전에는 이 사유가 종교적 믿음이나 과학의 성과에 기대어 의미를 길어 올렸다면, 오늘날은 예술적 감성을 가까운 파트너로 삼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구보 씨가 구보 씨가 된 것도 사실 그런 탓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구보 씨는 원래, 박태원의 구보 씨에서부터 최인훈의 구보 씨, 주인석의 구보 씨에 이르기까지 소설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철학자 구보 씨라는 뒤떨어진 변용(變容)이 등장하게 된 것은 알게 모르게 문학이나 예술에 대한 철학의 친화적 쏠림이 작용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구보야, 너 또 얼버무리려고 하는구나. 네가 구보씨가 된 건 그저 개인적인 빌붙음 때문 아냐? 그걸 어떤 추세나 경향 탓으로 돌리려 하면 곤란하지.”

“하하, Y야, 꼭 그런 건 아냐. 말하자면 그와 같은 면도 있다는 거지. 그리고 그게 철학의 현황이나 궁지를 보여준다는 얘기고.”

“글쎄, 내 생각에 그건 별로 당당하지 못한 태도 같아. 현황이니 궁지니 하면서 그 뒤로 숨으려는 것처럼 보여. 언제 철학이나 인문학의 처지가 어렵지 않은 때가 있었니? 진짜 철학자라면 거기에 당당하게 맞서야 하지 않을까?”

“허…진짜 철학자라…그런데, 그게…”

“왜, 자신 없어?”

“Y야, 그렇게 윽박지를 일은 아니라고 봐. 모든 사람이 전사(戰士)가 될 수는 없는 일 아냐? 나도 나름대로 노력 중이라구. 어설프고 부족해 보이겠지만, 이 구보 씨 이야기도 그 일환이고 말이야. 기왕이면 좀 너그럽게 봐 주라.”

“….”

“안 돼?”

“구보야, 되고 안 되고가 어딨니? 네 말대로 다양한 게 세상산데… 어쨌든 이제 네 얘기에서 나는 그만 빼 줘.”

“어, 그럼 곤란해. 네가 빠지면 사람들이 그나마 무슨 재미로 이걸 보겠냐.”

“그거야 구보 네 사정이고…”

“Y야, 그렇게 말하지 마. 네 사정이 곧 내 사정이지. 네가 정 그렇게 나온다면 나도 당분간 쉬는 수밖에…사실, 나도 그럴까 생각 중이었어. 쉬면서 다른 가능성을 생각해 볼께. 이를테면 구보씨의 철학 강의 같은 거 어때? 역사철학이나 문화철학 같은 거. 조분조분한 목소리로 하는 도저히 졸 수 없는 강의, 쉬운 얘기를 어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는 강의…그게 언제부터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여튼 그런 거 시작할 때면 너도 다시 도와줄 거지?”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은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시대와 철학]

예외상태와 합리성의 신화적 퇴행 : 한국 사회의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하여

 

?한상원(베를린 대학)

 

예외상태의 일상화. 벤야민과 슈미트를 이어받아 아감벤이 사용한 개념이다. 아감벤은 일상, 즉 규칙이 되어버린 예외상태 속에서 법의 지배가 실현된다고 주장한다. 나는 이 개념이 한국사회만큼 잘 적용되는 곳도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정치적 영역부터 사적 영역까지 우리의 사고를 규정하는 건 일상이 아니라 일상이 되어버린 예외상태가 아닐까? 현직 국회의원이 간첩이었고 내란을 준비하고 있었다고 선동하면, 국정원이 선거에 개입하고 호남인들을 죽이자고 선동해도 정상참작이 된다. 일상이 예외를 규정하는 게 아니라 예외가 일상을 지배한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일상이 된 예외상태의 사례는 분단이다. 한국은 70년 가까이 남북간 준전시상황이고, 성인 남성은 2년간 전쟁훈련을 받으며, 실제로 북한정권은 핵무기 쏘겠다고 툭하면 협박해온다. 이러한 일상적 위기를 계기로 삼아 국가권력은 아래로부터의 힘으로 쟁취한 형식적 민주주의의 원칙에 대해 공격을 감행한다. 2010년 북한이 연평도에 미사일 공격을 하자, 이 패닉상태 속에서 여당은 과감하게 예산안 날치기를 감행한 바 있다. 국정원의 대선 개입 비판이 일자, 여당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NLL 포기발언을 했다면서 쟁점 전환을 시도했다. 툭 하면 등장하는 맹목적인 ‘종북’ 여론몰이를 보면, 이러한 낯선 타자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자기반성적 이성의 목소리를 요구하는 것 자체가 무리인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북한 트위터 계정을 리트윗했다는 이유로 누군가가 몇 년간 구속과 압수수색 그리고 재판에 시달려야 하는 이 상황은 온라인 매체까지 스며든 일상화된 예외상태의 사례다.

분단 문제는 한국인들의 일상 속에 숨어든 병리적 심리항태의 사례 중 하나다. 외부의 적(북한)에 대한 공포와 이로 인한 내부의 적(우리 안의 간첩)에 대한 광기 외에도, 양적 경제성장에 대한 비이성적 집착, 외적인 국가적 상징(한류, 김치, IT 등)에 대한 과도한 우월의식 등, 한국인들의 심리상태는 그야말로 병적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 야당을 지지하는 정치적 경향의 사람들은 흔히 ‘상식이 통하는 사회’라는 모토를 즐겨 사용한다. 이 용어는 한국 사회를 상식(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이 아니라 비상식(부패, 학벌, 권위주의, 지역감정 등)이 지배한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여기서 ‘상식’이라는 단어는 철학적으로 볼 때 ‘합리성’이라는 단어와 조응하는 듯하다. 즉 이성적인 견지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합리성이 아닌 비합리성에 의해 지배된다는 비판이다. 이런 비판이 겨냥하는 궁극적 목표는 따라서 ‘합리성이 그 순수한 형태로 관철되는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자본주의’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이 놓치고 있는 점은,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비상식’, 즉 ‘비합리성’이 실은 그 대립물인 ‘합리성’의 산물이라는 점에 있다. 한국 사회에 있어서 합리성의 기획, 근대적 계몽의 기획은 매우 늦게 추진될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5?16 쿠데타 이후 등장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에 의해서였다. 여기서 말하는 합리성이란 물론 르네상스적 인문적 의미의 계몽주의와도, 유럽에서 시민사회와 보편선거권 이후 도입된 정치적 의미와도 구분되는, 산업혁명 이후 유럽을 지배한 경제적, 양적 합리성과 유사한 개념이다. 다시 말 해, 군부정권이 추진한 ‘위로부터의’ 합리성 기획은 합리성 개념이 포괄하는 다양한 맥락을 추상해버리고, 오로지 양적 성장을 지상과제로 설정한 일면적인 합리성인 셈이다.

4?19 혁명의 주요한 요구 중 하나는 ‘자립경제 건설’ 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의 원조에 종속된 국가를 근대적 자주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요구를 반영한다. 쿠데타 이후 집권한 박정희와 군부세력은 이승만의 자유당도, 4?19혁명 이후 정권을 잡은 민주당도 수행하지 못한 급속한 근대화를 추진하여 원조경제에서 탈출하고, 자립적인 근대적 산업국가를 만든다. 이 점에서 5?16은 4?19의 계승이라는 우파들의 역사관은 일부나마 타당성을 인정받는다. (물론 그것이 5?16과 독재를 정당화하지 않는다는 점은 이 글에서 논하지 않겠다.) 이 점에서 박정희는 한국 사회에서 유럽의 17~18세기 절대왕정 내지 계몽군주에 상응하는 위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일종의 합리성 기획이라고 볼 수 있는 박정희의 근대화 프로젝트는 동시에 한국사회의 병리적 퇴행을 낳는 원인이기도 했다. 양적 성장에 대한 집착과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결과론적 규범론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성장에 이바지하지 못하는 모든 것은 쓸모없는 것으로 배척당한다. 민주주의와 인권의 담론은 성장의 논리 속에서 사라져버렸다. 오늘날 국정원이 대선에 개입했으며, 이를 무마하고 여당 후보에게 유리한 국면을 조성하기 위해 경찰 수뇌부가 수사를 방해했다는 증거와 증언들이 등장함에도 박근혜 정부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도 멀리 보면 이러한 한국 근대화의 실패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한국 사회의 ‘계몽군주’ 박정희는 ‘신화'(일인숭배, 딸로 권력세습)로 퇴행했다. 이 퇴행은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에 등장하는 ‘신화가 된 계몽’ 개념과 놀라울 정도로 부합한다. 합리성(자본축적과 경제성장)은 비합리(박정희 신화와 독재 정당화)로 변증법적으로 전화된다. 이러한 설명도식은, 한국사회의 비합리적, 병리적 심리상태를 설명해줄 수 있는 여러 각도의 이론적 설명 중 하나로 자리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나는 한국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적 병리상태를 “비합리성으로 전도된 합리성”으로 규정하고 그 배경에 1. 일상화된 예외상태로서 분단, 2. 지난 세기 이뤄진 합리성 프로젝트의 실패가 있다고 규정한다. 이를 개념규정하기 위해 나는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을 차용하였다. 그런데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비판이 지적하는 급진적인 핵심은 합리성이 양적이고 도구적인 성격으로 후퇴하는 것이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합리성 프로젝트(계몽)의 필연적 귀결이라는 점에 있다. 교환원칙과 이윤축적 원칙에 기반을 둔 근대 자본주의 사회는 합리성이 지닌 여러가지 잠재력을 하나의 것 ? 경제적, 양적, 도구적 이성 ? 으로 환원하는 근본적 배경이다. 위로부터의 근대화라는 합리성 기획이 신화로 퇴행한 것은 애초에 합리성을 하나의 축을 중심으로만 사고하게 만든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의 메커니즘이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의 특수한 심리적 병리상태에 대한 진단은 교환원칙과 이윤축적이라는 보편적 구조에 대한 변화와 결부되어 있음은 자명하다. 그러나 보편적 구조의 근본적 변화가 당장 실현될 수 있는 과제가 아닌 한에서, 어떻게 제한된 조건 하에서 한국 사회의 특수한 병적 상태들이 치유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물음은 여전히 우리를 무거운 고민 속으로 이끌고 있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④-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국가폭력의 완성 ?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이원혁(한철연 회원)

 

국정원 선거개입 사건에 대해 연일 계속되는 각계각층의 시국선언이나 촛불집회에도 불구하고 전·현직 정보당국의 책임자들과 또 그 연계가 의심되는 전·현직 대통령들은 그 어떤 책임 있는 행동이나 발언 없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오히려 여당은 대선불복이니 국론분열이니 하면서 적반하장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뻔뻔함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들을 지지하는 소위 콘크리트지지층에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고 있는 국가권력의 강고함에서 기인하는 것 같다. 국가라는 이름과 힘에 의해서라면 그 어떠한 행위도 정당화될 수 있으며 또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는 믿음이 그들의 행동과 언행을 가능하게 하는 것 같다. 이것이 이번 사건이 유신시대를 연상시킨다고 말하는 이유기도 하다. 국가에 의해 진행되는 강압과 음모에 대해 그것을 행한 이들이 도덕적, 양심적 가책을 받지 않고 카메라와 국민 앞에서 저토록 당당한 것은 국가권력은 그래도 되고 그럴 힘이 있으며 그 힘이 자신을 보호해 줄 것이라는 믿음 덕분에 가능하다. 이는 과거 권위주의시대의 권력층의 전형적인 모습이며 민주주의 정치와 가장 동떨어진 의식이다.

근대 사회계약론의 환상과는 달리 국가는 사람들의 합의로 구성,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국가 자신의 거대한 폭력성에 의해 국민을 구성하고 포섭하여 국가의 체계를 유지시켜온 것은 자명해 보인다. 그러나 지난 세월 지난한 민주주의 투쟁은 이러한 국가 폭력을 견제해 왔으며 이를 통해 사회 공동체의 붕괴를 막아왔다. 근대 이후의 국가는 사회와 국민에 대한 수많은 폭력과 강제를 진행해왔지만 민주주의 본질에 대해서는 감히 범하지 못했다. 설령 범하는 국가권력이 있었더라도 패망하는 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그 국가권력이었다는 점은 역사가 명백히 보여줘 왔다. 즉 국가권력과 그것에 심취한 권력자는 전제적 권력을 완성하기 위해 국민을 넘어 민주주의에 대한 공격까지 진행하지만 그것의 말로는 손에 잡히는 역사책 한권만 펼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지금 여당과 청와대는 부정선거 발언이나 대선불복은 금도를 넘은 것이라 말하지만 정작 금도를 넘은 것은 정보기관을 통해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근간인 보통선거의 근간을 흔든 권력이다. 이번 사건은 여당의 표현대로 금도를 넘은 사건이며 사회적 금기의 파기는 묻혀 질래야 묻혀질 수 없는 것이다. 무능한 야당의 무능한 대응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파장이 날이 갈수록 더욱 커져가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또 책임 당사자의 뻔뻔함이 이대로 계속간다면 뿌리가 흔들리던 민주주의는 오히려 들풀처럼 일어나 뻔뻔하게 흔들던 손을 날카롭게 베어버릴 것이다.

 

평생 ‘을’인 운명, 우리는 벌레다![철학자의 서재]

?카프카의 <변신>[철학자의 서재]

 

윤지선 (한철연 회원·프랑스 파리8대학 철학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갑을관계 속, 을의 퇴행 관찰기

 

2013년 남양유업 사태를 시발점으로 하여 불평등하고 위압적이던 갑을관계에 대한 폭로와 비판이 대한민국 사회의 뜨거운 논쟁점으로 부각되었다. 약육강식의 논리가 팽배한 갑의 공화국, 대한민국을 비롯한 자본주의 사회는 전근대 불평등한 신분 사회로부터 얼마만큼 나아갔는가? 갑을관계란 본래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자율적인 두 계약 주체의 관계를 일컫는 말이었는데, 이들 사이를 규정짓는 힘의 관계가 출발선에서부터 절대 강자와 절대 약자의 구도로 불평등하게 설정됨으로써 거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이익과 권리의 배분 또한 불합리한 방식으로 한쪽에만 편중되는 현상을 낳았다. 대한민국의 갑을관계 논쟁은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나타난 상하종속의 위압적이고 불공정한 권력 구도 관계에 대한 충격적인 폭로로서, 과연 대한민국은 과거 전근대 신분 사회의 불평등을 갑을관계란 자본주의적 프레임을 통해 또 다른 방식으로 재생산·재편성하고 있진 않는지 심각히 되물어야 할 것이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변신>은 폭력적 갑을관계 속에서 고군분투하던 노동자, 을-외판원 그레고르 잠자의 퇴행 관찰일지에 해당된다. 프란츠 카프카는 생전에 노동자 상해 보험회사에서 보험담당관으로 일하며 노동자들의 육체적·심적 고통을 생생히 목도해 왔으며 상해를 입은 그들이 망치를 들고 가서 회사에 항의하는 대신 오히려 회사 측에 감사를 표하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고 한다. 자본주의라는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자의 존엄성을 지키기 위한 그 어떠한 사회적 안전장치도 보장되지 않을 때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날까? 카프카는 노동 소외와 관료주의의 폐해를 신랄하게 비판하며 자신의 작품들을 통해 사회경제적 약자들의 생지옥을 발현하며 현대 자본주의의 묵시록을 써내려간 예언자이기도 하다.

▲ <변신·시골의사>(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민음사 펴냄). ⓒ민음사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고용주와 노동자, 임대주와 세입자, 남성과 여성, 프랜차이즈 대기업과 대리점주들 간의 비대칭적 권력관계는 탐욕스러운 속도로 강자는 더 강하게 약자는 더 약하게 진화시킨다. 이러한 의미에서 카프카의 <변신>은 약자, 을들의 도태·퇴화관찰지인 동시에 강자, 갑들의 괴물적인 몸 불리기에 관한 이면의 기록서이기도 하다. 매일 이른 새벽 출장시간을 맞추기 위해 선잠을 설치며 깨어난 외판원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로 변신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갑의 갖은 감시와 억압, 부당한 권력행위로 인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의 무게마저 초경량화되어 취급되는 을의 처지가 점차 퇴화되고 도태되는 벌레로의 퇴행으로 그려지고 있다. 재벌 대기업들의 비대한 문어발식 확장과 가진 자들의 폭식증적 몸 불리기와는 반대로 뼈와 살이 노골노골해질 정도로 착취당하는 약자들에겐 뼈와 살이 한 겹으로 녹아든 것 같은 딱딱한 껍질만으로 이루어진 벌레로의 진화만이 남은 것인가? 일하는 벌레, 돈 버는 벌레, 착취당하는 벌레로의 고단한 삶에 두 눈을 꿈벅이며 곪은 상처를 핥으며 ‘억울하면 갑이 되어라’라는 문구에 세뇌되어 사회구조적 불평등을 다만 나약한 자기 탓-못 배운 탓, 못 가진 탓, 못난 탓-으로 여기며 자기분노를 되삼키게 하는, 이 멋진 자본주의 정글에서의 약자 수난기가 우화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것이 카프카의 <변신>이다.

사회경제적 생존게임에서 착취되고 도태된 약자가 유일하게 돌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은 자신의 방이며 가정이다. 자기 방 안에 유폐되어 일체의 사회적 관계로부터 고립된 히키코모리도 카프카적 의미의 벌레로의 퇴행의 한 형태이다.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 잠자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영역인 자신의 방은 취업준비생, 비정규직 아르바이트생, 명예퇴직자, 장애인, 노인들의 쉼터인 동시에 외부 활동 영역이 철저히 제한된 감옥으로서 기능한다. 벌레가 되어 피할 도리 없이 가족 구조 내에 산재한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 그레고르 잠자의 위기는 곧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 자신의 위기와도 맥을 같이한다.
 
 

가계부채의 덫, 가족구성원의 무덤

 

“부모님이 지고 있는 빚만 갚아드릴 수 있는 돈만 모아진다면, 아마도 5~6년쯤 지나야 될 일이지만, 그렇게만 된다면 나는 반드시 (직장을 그만두는 것을) 결행할 것이다! 그것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겠지? 그건 그렇다 치고, 지금은 일어나야만 한다. 기차가 5시에 출발하니까” (<변신·심판-세계명작131>(유한준 옮김, 대일출판사 펴냄) 16쪽)

벌레로 변하여 거동조차 불편한 그레고르 잠자의 고뇌에 찬 되뇌임을 읽으며 마치 현재 대한민국의 소시민의 걱정거리를 듣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국내 가계부채가 1000조를 육박하고 있는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부채를 권하는 사회, 부채가 필수악인 된 사회이다. 자녀 사교육을 위해, 대학 등록금을 위해, 내집 마련을 위해, 장가를 가기 위해, 노후 대책을 위한 사업을 하기 위해… 이른바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간답게 살아남기 위해’, 영원한 약자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오늘도 우리는 대출을 감행한다. 그레고르 잠자의 출근을 채근하러 온 지배인의 가정방문에 온 집안 식구들은 잠자의 결근으로 인해 행여 그가 해고를 당하여, 사장에게 진 부채를 갚지 못해 모두가 괴롭힘을 당하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부채의 도식은 포식자의 덫의 도식과도 유사하다. 포식자, 가진 자가 던져놓은 미끼인 고리대금을 자신을 위한 달콤한 미래의 양식으로 착각하여 다가오는 피식자, 못 가진 자들의 헛된 희망은 단시간 내 죽음과도 같은 깊은 절망으로 바뀐다.
 

프란츠 카프카(1883~1924)/ 출처: louisien.com


 

그레고르 잠자는 부채의 덫에서 온 가족을 살려내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앙상한 다리들과 더듬이로 이루어진 낯선 몸뚱이를 이끌며, 가장으로서의 책임감과 직원으로서의 사명감에 대한 자기변호를 쉴새 없이 읊조리며 자기 방문을 열고 지배인과 가족들 앞에 출몰한다. 더 이상 쓸모 없게된 앙상한 벌레로 퇴화한 그의 출몰에 지배인은 아연실색하여 도망치고 가족들은 힘겹게 기어 나온 그를 다시 방 안으로 쫓아버린다. 그는 하루 아침에 한 집안의 가장에서 일할 수 없는 불구자로 바뀌어 방 안에 감금되어 버리고 만다. 벌레로서의 낯선 사지조차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그레고르에게 과연 어떠한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우리는 모두 다 퇴화한다. 그러나 복지 사각지대는 오롯이 가족이 책임진다?

 
‘인간은 항상 진화하고 성장하며 소통하는 존재’라는 믿음은 환상에 불과하다. 인간은 25세를 기점으로 노화를 시작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신체적·정신적으로 퇴화하며 그렇게 서서히 소멸의 시점으로 다가간다. 젊은이로 사는 것보다 노인으로 인생을 사는 시기가 훨씬 길어진 인간에게 육체적·지적인 퇴행은 명백한 자연의 이치이다. 소위 ‘정상인’으로 판명된 자들에게 신체적 운동 능력이 둔화되고 지적인 활성화가 더뎌지는 퇴행의 시기가 도래한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대한민국은 더디게 진화하는 자들에게 유난히 혹독한 나라이다. 장애인들, 노인들, 무직자들, 알츠하이머 환자들은 우리사회에서 철저히 비가시화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방 안에만 숨어산다.

타인들과 소통하는 언어를 잃고 소위 ‘정상인’의 습성들을 망각해나가는 벌레로 퇴행한 그레고르 잠자는 현대 사회가 소외시키고 있는, 진화의 속도에서 이탈된 사람들의 처지를 빗대고 있다. 그레고르의 누이와 어머니는 벌레로 변한 그레고르가 방의 벽과 천장을 기어 다니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기위해 방안의 모든 가구들을 들어내는데, 그레고르는 필사적으로 초상화 액자 하나만은 사수하고자 고군분투한다. 비록 모든 사회적 소통 수단-상호 대화와 자기 실현 가능성을 잃고 직립보행에서 기어 다니는 처지로 바뀐 그이지만, 문화를 향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그가 가진 존엄성의 마지막 보루로서 포기하지 않으려고 애쓰다가 그만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등을 가격당하고 만다. 진화의 속도를 거스르는 이들에게 허락된 것은 오로지 주는 먹이를 먹고 조용히 순응하는 밥벌레로서 충실한 것이다.

절대적 사회적 약자인 그들은 이렇게 일체의 사회적 삶에서 유리된 채 복지 사각지대에 내던져 진다. 오로지 가족 구성원의 희생과 조력 없이는 생존마저 위협받는 장애인들과 알츠하이머 환자, 노인들은 가족들과의 소통에서도 철저히 제외된 채 방목과 사육을 당한다. 그레고르의 늙은 아비는 수위로 재취업하고 눈이 어두운 어머니는 바느질삯으로 가정을 돕고 어린 누이는 학업을 이어나가지 않고 가게 점원으로 취직을 해서 빚을 갚고 가정 생계를 꾸려 나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동시에 벌레가 된 그레고르를 돌보야만 한다. 방 안에 유폐된 그레고르가 누이의 바이올린 연주에 홀린 듯 기어 나와 거실에서 음악을 향유하다가 집 안의 하숙인들에게 발각되었을 때, 벼랑끝으로 내몰린 가족들은 그레고르의 존재 자체가 가족 공동의 평안과 미래를 좀먹는 위협 요소임을 절실히 깨닫는다. 예전에 아버지가 던진 사과가 그레고르의 등에 박혀 곪고 부패하여 그가 숨을 거두게 되었을 때, 온가족은 오랜만에 나들이를 떠나고 한결 가벼워진 미래를 향해 기지개를 키는 것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한 사회가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안위와 복지에 무관심하고 방관자적 입장을 취할 때 사회적 약자들의 마지막 보루인 가족은 그들과 함께 몰락하고 만다. 끝내는 가족조차 서로가 서로를 증오하고 몰락하게 만드는 사회를 그린 카프카의 작품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묵시록과도 같다. 약육강식의 사회, 가계 부채의 덫, 복지 사각지대의 유일한 보루로서의 가족의 희생, 사회적 약자들의 도태 등과 같은 화두는 탐욕스런 자본주의 사회를 관통하는 문제들이기에, 카프카의 <변신>은 오늘도 여전히 현대적이다.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함과 됨’의 차이[철학을다시 쓴다]-⑧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번 강의 주제는 ‘함과 됨’입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질문이 한 개인의 자각으로부터 싹트는 것은 도시사회에서입니다. 농경사회에서나 유목사회에서는 이런 질문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것은 농경사회에서는 노인들이 결정해주고, 유목사회에서는 유목민들을 이끌고 목초지를 찾아서 앞장서는 사람들이 결정해 줍니다. 도시사회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한 개인에게 이 질문이 구체적으로 떠오릅니다. ‘뭘 할까?’ 레닌의 책으로 유명해진 질문이지요. ‘무엇을 할 것인가?’

‘함과 됨’은 둘 다 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우리는 어떤 때 ‘한다’ 하고, 어떤 때 ‘된다’고 하지요? ‘함’과 ‘됨’이 운동의 서로 다른 두 가지 형태라는 것은 분명하죠. 사람이 하는 것이든, 아니면 다른 것이 하는 것이든, 또 무엇이 어떻게 되든 ‘하는 것’, ‘되는 것’은 모두 운동을 나타내는데 이 가운데 하나는 능동성이 크고, 하나는 수동성이 큰 운동 형태입니다. 베르그송 같은 사람들은 ‘태초에 운동이 있었다’고 이야기하는데, 운동이 뭡니까?”

“시간과 공간에서 뭔가 바뀌는 것이요.”

“원자론에서는 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이를테면 고대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과 현대 물리학자들이 이야기하는 운동은 어떻게 다릅니까? 조금 더 쉬운 문제부터 접근을 할까요? 고대원자론자들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고대원자론자들 전통이 로이키푸스(Leucippus)에서 시작해서 데모크리토스(Democritus), 에피쿠로스(Epicuros), 루크레티우스(Lucretius)……이렇게 이어져 내려오는데, 이 사람들이 밑에 깔고 있는 가장 큰 가정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은 원자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겁니다. 그 외에는 없다, 원자는 수적으로 무한하고 공간은 외연으로 무한하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운동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죠?”

“원자들의 충돌로.”

“예, 충돌과 반동으로 이 세상이 생겨났다 그러는데, 그러면 원자들이 왜 충돌하게 됐는가? 원자에 무게가 있습니까? 있지요? 그런데 무게가 있는 것들은 현상계에서 모두 수직 하강 운동을 하고 있잖아요. 그렇죠?

우리가 현상적으로 보면 원자는 무게가 있고 무게가 있는 것은 외부의 간섭이 없으면 수직하강운동을 한다, 그런데 무한한 공간 어디에 앞, 뒤, 좌, 우가 있느냐? 그 질문에는 어떻게 대답을 하죠?”

“사방으로 낙하한다.”

“사방으로 낙하한다는 거, 제 갈 길이 있어서 뿔뿔이 흩어지게 되면 거기서 충돌을 하게 되나요?”

“빨리 떨어지게 되면…….”

“저 친구는 지금 갈릴레오 이전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질의 물리학은 갈릴레오가 피사의 사탑에서 실험한 뒤로 다 사라졌습니다. 지금 말씀하신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질의 물리학인데, 현상계를 이루는 중요한 것들에는 저마다 제 자리가 있다, 불은 위로 올라가는 상승운동을 하고, 돌이나 흙은 밑으로 떨어지는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 이유는 그 운동체의 본성상 그렇게 되어 있다고 질로 설명을 하는데, 갈릴레오의 실험이 있은 뒤로 그게 다 사라져 버립니다.”

말하자면 등질적인 운동이 나타나면서 이른바 ‘고전물리학’이 자리 잡게 됩니다. 뉴턴(Newton)이 앞장섰고 라플라스(Laplace)가 철학이론으로 뒷받침을 하죠. 등질적인 운동을 뒷받침하기 위한 전제가 뭡니까? 등질적인 공간과 등질적인 시간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에 등질적인 것이 어디 있습니까? 시공을 통틀어 꼭 같은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최초로 우주 공간을 등질적으로 보고 원자를 등질적인 실체로 본 것은 고대원자론자들입니다. 대단히 큰 혁명입니다.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어떻게 확보되는가? 그리고 정말 자연계에 등질적인 시간과 등질적인 공간이 실재하는가? 혹시 우리 의식에만 있는 시간과 공간은 아닌가?

아이작 뉴턴(1642~1727) / 출처: www.bbc.co.uk

데모크리토스 같은 사람은 원자들이 이합집산을 해서 이 우주가 생성된다고 이야기할 때 우연히 그 가운데 하나가 충돌을 하게 되면서, 여러 놈이 그에 대한 반작용을 하여 복합체들이 생겨났다, 없어졌다 하게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중요한 발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원자가 운동의 주체다 하는 말이 겉보기엔 가장 무책임한 이야기 같고 어쩌다 그렇게 됐다는 말도 무책임한 말 같지만, ‘우연’이라는 것을 끌어들인 것은 서구 ‘운동’ 이론을 뒷받침하는 주춧돌을 놓은 것이라고 보아도 됩니다. 처음에 제가 여러분들에게 설명하려다가 곧 포기하고 말았는데, ‘컨틴젠시’(contingency)라는 말 생각나요? 당구공을 예로 들어서 얘기했죠. 원자론도 로이키푸스에서 데모크리토스, 에피쿠로스에서 루크레티우스로 오는 동안 그 나름대로 진화를 합니다. 이 이론이 날이 갈수록 세련된 모습을 띠는데, 루크레티우스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De Rerum Natura)》(로마의 시인이자 유물론 철학자인 루크레티우스의 철학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우리가 현상계에서 바람 없는 날 빗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보듯이 원자가 위에서 아래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정해지지 않은 시간에 정해지지 않은 곳에서 경사운동을 한다, 무수히 많은 원자가 무한한 공간 속에서 수직 하강운동을 하는데 그중에 한 놈이 살짝 휜다, 그렇게 해서 충돌이 일어난다고 이야기합니다. 그 결과로 이 우주 삼라만상이 모두 충돌과 반동을 일으켜서 형성되고 해체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주 복잡한 증명들을 합니다. 우주공간이 무한하고 원자가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결론이 나오느냐, 우주공간이 유한하고 원자가 무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 우주공간과 원자가 둘 다 유한하다고 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느냐에 대해 질문하고 그런 경우에는 이런 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이야기합니다. 서양 철학의 전통이 그리스 철학에 기원을 두고 있고, 그리스 철학은 인도철학과 중국철학과는 다릅니다. 물론 인도철학과 중국철학에도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증명하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대체로 동양철학의 전통은 증명에 약하고, 또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큽니다.

그러나 서양철학에서는 자기가 하는 말에 대해서 책임지고 증명을 해서 다른 사람이 수긍을 해야 그 다음 단계로 진행을 합니다.

정지해 있는 것은 정지해 있는 것이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운동하고 있는 것이다, 외부에서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해 있는 것은 영원히 정지해 있고, 운동하고 있는 것은 그대로 운동한다, 그 운동은 등질적인 수평운동이다, 수직으로 하는 중력에 의한 운동은 가속이 붙지요. 이 운동 관념이 교과서에 나오는 거의 의심할 수 없는 진리로 우리 머리 속에 박혀 있는 운동 관념인데, 운동과 정지는 다르고 운동하는 것은 정지하지 않고 정지하는 것은 외부 힘이 가해지지 않는 한 정지한다는 식입니다. 여러분 공간은 운동을 해요, 안 해요? (대답 없음) 공간이 운동하지 않는다는 것이 사실인가요? 여러분들 여기서 수학이나 자연과학, 물리학 하는 분 계십니까? 없어요? 실제로 등질적인 공간이란 측면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대부분의 공간관념이란 것은 유클리드기하학 공간입니다. 이를테면 삼각형을 내각의 합이 180도인 세 직선으로 이루어진 폐쇄된 평면공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 유클리드 기하학 공간을 받아들이고 있는 셈입니다.

양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Q 선생의 閑談]

서영화의 하이데거론

 

이규성(웹진편집위원장, 이대교수)

 

최근(2013년 2월) 서울대 철학과에서 박사학위 논문으로 [하이데거의 존재론적 차이와 무의 관계에 대한 연구](서영화)가 나왔다. 이 논문은 학위논문의 성격이 요구하는 대로 국내외의 주요한 1, 2차 자료를 넓게 활용하여 연구자의 논제를 일관되게 다루고 있으며, 자신의 차후의 연구 과제를 언급하고 있다. 학위 논문의 성격상 자신의 과감한 비판적 논의를 전개하지 않는 것 또한 후일의 기회를 갖고자 하는 것으로 짐작된다.

평자(評者)가 여기서 논의하고자 하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하이데거의 주제이자 서영화의 주제인 존재와 무의 문제를 논의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저자가 잠시 미루고 있는 하이데거에 대한 비판적 해명에 관한 것이다. 이 두 가지 문제는 1945년 해방 이전부터 특히 박종홍, 고형곤, 신남철, 박치우, 조가경과 같은 초창기 철학 연구자들의 논의의 범위 안에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박종홍은 존재의 문제를 역사철학적으로 발전시킨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歷運) 개념을 ‘우리의 철학’으로 편입시키기 위해 천명(天命) 개념과 연관하여 재해석하고자 했다. 박종홍은 존재의 극치에서 만나는 무(無)를 이학의 무극(無極) 개념 그리고 불가와 도가의 공(空)과 무(無)의 개념과 연관하여 해석하고자 했다. 이 맥락에서 박종홍은 ‘무의 형이상학’을 20세기 주요 철학적 과제로 간주하고, <무>를 통과해서 존재의 역운에 동참하고자 했다. 한편 박종홍은 전통적 선비의 현실참여 방식을 계승하면서도 시대의 요구를 물질적이고 문화적인 빈곤을 극복하는 강력한 국가의 형성을 위한 실천적 개입으로 보았기 때문에 야스퍼스의 존재(포괄자) 개념을 포함하여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말하는 인간론을 무기력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신남철, 박치우는 현실 문제를 둘러싼 정치사상적 주제를 주요 과제로 설정했기 때문에 하이데거를 매력 있고 심오한 철학으로 보면서도 본격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여력을 갖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도 존재론이 갖고 있는 초탈적인 비역사적 성격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고형곤은 구체적인 사회적 연관들을 제거하고 존재론을 선불교의 마음의 현전(現前, 현전은 마음이 지금 이 자리에서 앞에 드러난다는 선종의 용어)과 연관하여 현상학적 해명을 하는 데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그의 작업은, 서양의 현상학적 운동이 과학기술적 객관성이 지배하는 시대를 극복하고자하는 활력을 갖고 있었던 것에 비해, 긴장을 상실한 도인의 수양론이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나 동아시아의 선종을 고립된 실체로 다루는 정태적 태도에 빠져 있었으며, 이러한 전통은 그 후 하이데거 연구자들 가운데 불교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에게서도 나타난다. 이는 고통스러운 생명 현실의 존재[有]와 이에 대한 부정인 무(無)의 엄중한 차이를 관찰하라는 붓다의 단호한 태도([아함경],[가전연경])를 무색하게 하고, 고난과 참회가 갖는 수양론적 의의를 무시했다.

이러한 의미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은 하이데거에 입문하거나 평가해보려는 사람들에게 유익한 논제들을 던져줄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대학시절 실존주의라는 이름 아래 알려진 하이데거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었으나, 대체 존재론적 차이가 무엇이며, 전기와 후기의 차이는 무엇이고, 해석학적 해명이란 무엇인지가 애매모호한 채로 군사독재 시절을 보냈다. 그 후 나이가 먹어가면서 동서양의 형이상학적 맥락에서 인간의 이상적 모습이 무엇인가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 모습은 궁극적으로는 자유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의 궁극적 관심을 동양철학, 가톨릭 신비주의나 카발라철학, 셀링을 비롯한 사변철학적 작품들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도교의 연금술적 자기변형의 기술, 심지어 도교와 불교에 바탕한 안토냉 아르또(Antonin Artaud)의 연극론에서 말하는 ‘기관 없는 신체’도 새로이 변형된 신체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주와의 일치에서 오는 자유 즉 신체 내 각 기관들의 속박에서 벗어난 연금술적 해방이다. 말(로고스)로 다하는 그리스적 전통의 예술이 아닌 동양의 연극이 보여주듯 행위의 상징을 통한 새로운 인간성의 형성이 예술의 과제라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하이데거의 철학도 비록 그가 가치론이나 윤리의 문제가 아닌 것처럼 말하고 있으나, 근본적으로는 비본래적 단계에 처해 있는 전락한 삶의 양식으로부터 본래적 실존을 통과하여 생성의 유희로서의 존재를 향유하는 삶 즉 자유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제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자유는 파르메니데스와 헤라클레이토스에서 혹은 신들이 있었던 태고적에 나타났다가 상실된 과거의 사상이면서도 결단을 통해 접근해야하는 미래적 가치이다. 이 점에서 결단의 순간은 신약성서의 구도처럼 결정적 시간(chronos)이며, 이 시간을 통해 선구적 삶을 살게 된다. 자유와 시간, 존재와 시간의 문제는 분리될 수 없다. 존재와의 합치를 새로운 방향으로 제시하려는 문맥에서 하이데거는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 즉 존재 그 자체를 상실해 간 과정으로서의 서양 철학사를 비판하게 되었다. 존재자의 근거인 존재를 마치 존재자의 원인인 것처럼 보는 전통 형이상학, 특히 유대 기독교 전통과도 연관된 제일 원인으로서의 신의 위상을 갖고 있는 것을 근거로 제시하는 철학, 심지어 유물론적 아르케(원인)를 근원으로 제시하는 자연철학도 어느 특정한 존재자를 존재로 오해하는 존재 망각의 사유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하이데거가 저녁의 나라(Abendsland) 서양의 자연과학을 전통 형이상학의 완성으로 보고, 존재자를 물리적 객관으로 환원하여 객관성을 존재로 생각하는 습관을 비판적으로 본 것은 흥미로운 과학론으로 보인다. 형이상학의 완성태인 과학이 지배하는 시대는 철학의 종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서영화가 존재와 존재자의 존재론적 차이를 중심으로 하이데거의 전 후기를 일관되게 바라보는 시야를 갖고자 하고, 헤겔, 니체, 들뢰즈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생성의 문제에 접근하고자 한 것은 하이데거의 중심 논제에 육박해간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생성을 생과 죽음이 일어나는 과정으로 보아 생만을 강조하고 죽음이 없는 생명성에 집착하는 니체나 들뢰즈를 극복하려는 관점에서 하이데거의 무(無)에 접근하려는 태도는 인상적이다. 평자의 관점에서는 하이데거 철학의 이러한 측면은 영국 학자 매기(Bryan Magee)의 언급처럼 쇼펜하우어의 관점과 공통된 것이다(The Philosophy of Schopenhauer, 1983). 개별적 존재자의 죽음을 수용하고, 전체로서의 존재자의 무에 대한 긍정을 통해 존재와 무의 통일성을 사유한다는 사상은 존재와 무의 합일을 추구하는 동양적 사고나 서양 신비주의 전통에 접근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영화에 의하면 이러한 통일에서 존재와 존재자가 원인과 결과라는 신학적 혹은 과학적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존재를 존재자에게 줌(Didonai, Lassen) 혹은 허여(Zugeben)의 관계가 이루어진다고 한다. 그러나 평자가 보기에는 하이데거의 견해가 고대 그리스적 연원을 갖는다하더라도 그래서 신학적 구도를 떠나있다 하더라도, 그가 결정적 결단의 시간을 중시한 것과 함께 줌이라는 말 자체는 쉽게 또 다시 신학적 은총의 관계와 연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하이데거의 존재의 역운은 인간 현존재의 능력의 범위를 무한히 넘어서기에 인간은 단지 동경과 기다림의 상태에 있게 되는 기독교 종말론적 구원사의 성격을 갖게 된다. 이와 연관하여 데리다의 연구(Jacqes Derrida, [정신에 대하여], 박찬국 옮김, 동문선, 2005)가 보여주듯 서양 역사를 구원사적 관점에서 해석한 헤겔처럼 하이데거도 기독교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정신’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신의 주저에서 사용함으로써 사고의 불일치를 보인다는 것이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서영화는 여러 군데에서 암시적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해와 해석에 치중한 저자는 그것을 본격적으로 다루지는 않고 있다.

또한 저자는 존재론적 (차이) 문제가 전 후기를 관통하는 하이데거의 관심임을 분명히 하는 가운데, 세계와 인간이 맺는 관계의 현실적 국면을 해명하려는 데에 관심을 보이는 전기와 본격적으로 존재론적 문제에 개입하는 후기의 차이를 ‘명백하게’ 구분하지 않음으로써 세계를 해명하는 하이데거의 문제의식의 발전사적 차이가 보다 분명하게 드러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존재와 연관하여 세계의 문제를 둘러싼 여러 전문 연구가들의 입장을 소개하고 그들에 대한 간략한 비판을 통해 (전기의 인간관이 근대적 주체성이 아닌 현존재의 유한한 실존의 무력성과 절박성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슐츠와 헤르만의 입장을 지지하면서)자신의 견해를 주장하려는 저자의 자기의식적 태도는 연구자의 기본을 준수한 것으로 보인다.

평자가 서영화의 논문을 읽는 가운데 가장 흥미로운 관심을 일으킨 것은 저자가 제시하는 하이데거의 ‘양심(Gewissen)’ 개념이었다. ‘죽음 앞에서의 불안을 견디고’ ‘양심을 가지려는 의지’는 ‘스스로를 단독화하는’ 의지이다. 이러한 의지는 존재에 귀의하는 진정한 삶의 양식으로 살기로 결의하는 키에르케고르적인 독자적 의지일 것이다. 저자는 하이데거의 이러한 견해가 ‘유아론적 세계’(한나 아렌트)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양심 개념이 시회적 소통성을 무시한 원자적 개인은 아니라고 한다. 양심은 세인(Das Man)의 관심(도구적 삶)을 초월하여 본래적 자기로 회귀하는 실존적 결의를 가진, 그래서 현존재 자신을 목적으로 결단하는 자기성이다. 진정한 가능성을 향한 자기가 양심이다. 이러한 하이데거의 견해를 서영화는 변호하고 있다. 평자 역시 하이데거의 이 견해는 현대인이 상실한 최대의 가치라고 본다. 진정한 본래적 소통적 사회성은 고독한 자기 관심에의 열정을 통해 성취될 수 있을 것이다. 위대한 초인들은 언제나 텅 빈 광야로부터 왔다.

그러나 저자도 주석에서 소개하듯이 한나 아렌트의 비판 즉 하이데거가 유아론적 관점에 빠짐으로써 동료와의 분리를 추구한 결과 전체주의적 국가 사회주의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은 주목해야 할 부분이라고 판단된다. 이 문맥에서 평자는 양심의 정의를 칸트나 하이데거와는 달리 해야 하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를 위해 평자는 하이데거와 인도의 우파니샤드(Upanishad) 철학을 비교하여 인도인의 관점을 취하는 것이 좋다고 판단했다. 하이데거는 데리다도 비판하듯 동물을 세계 개시성이 없는 본능적 충동에 의거해서 사는, 그래서 인간과는 단적으로 구분된다는 ‘인간 중심주의적’ 착상을 하고 있다. 하이데거는 동물학을 싫어하는 기독교적 습성을 가지고 당시의 동물학적 정보를 이용하여 나방과 같은 곤충들이 충동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과학적 사실로 언급한다. 그러나 현대 동물학은 동물의 인지 구조에 대한 풍부한 전보를 제공하고 있으며, 동물도 환경 세계를 갖는다는 것을 증거하고 있다. 우주 중심주의적 사고를 중시하는 하이데거가 그러한 편견을 고집하고, 나아가 동물과의 연속적 유대성을 무시한 양심 개념을 자명한 전제처럼 주장하는 것은 놀라운 역설이다. 그리고 존재 중심의 역사철학은 절대정신처럼 역사에 대한 숨 막히는 지배력을 갖고 세계를 누르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이에 비해 우파니샤드 철학은 광물, 식물, 동물, 인간, 천상의 존재들은 전체로서의 우주와 하나임을 자각한 초인적 존재가 자신의 우주를 단계적으로 상실하여 가장 작은 세계를 갖게 된 존재가 광물과 같은 존재라는 관념을 전제하고 있다. 동물은 인간 보다는 협소한 세계를 갖지만 세계를 인간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인간과 같을 뿐만 아니라 우주를 최대한 광대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초인의 관점을 근본적이고 무의식적인 희망으로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는 자유를 원한다. 이러한 관념은 태고적 영웅시대의 잔혹한 투쟁사를 겪고 만유의 우주적 유대를 최상의 진리로 깨닫게 된 전사 계급의 자각의 결과였다. 불교의 만유 불성론은 여기에 기원한다.

쇼펜하우어는 이에 의거하여 ‘양심 불안(Gewissensangst)’([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V 1 ,65장, 1818)을 다른 생명체를 식용으로 삼는 인간이 무의식적으로 인지하게 된 죄의식에 연원하는 것으로 본다. 이 죄의식이 우주와의 분리를 불안의 근거로 보는 철학을 창조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 우주적 불안의 극복은 우주와의 합치에서 오는 ‘평정(Gelassenheit, 방하放下)’에서 이루어진다. 우주적 연대성의 상실에 인간의 근본 불안이 놓여 있는 것이 아닐까. 이 불안을 감지하고 다시 우주적 유대를 회복하려는 의지가 양심이 아닐까. 그리고 이 양심을 사회 정치적 평등의 이념으로 전개는 것이 동서양의 신비가들의 희망이었다는 사실은 수많은 그들의 언행에 관한 서적들이 증언하고 있다. 프란시스코 수도회 소속인 둔스 스코투스도 성인 프란시스코의 정신에 따라 고독과 우주적 유대를 결합하는 자각을 사랑으로 보았다. 하이데거의 절박하고 강렬한 본래적 실존은 바로 이와 같은 평등의 유대와 결합했을 때 정치적 잔혹성을 벗어나는 것은 물론, 자신을 달달볶는 개신교적 내면성이 갖는 불건강성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평자는 동양의 지혜를 정치사상적 문맥에서 발전시키려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다. 그러다보니 하이데거 철학의 절박한 성실성을 매력 있는 것으로 수용하면서도 그가 갖고 있는 어두운 측면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서영화의 [하이데거론]을 유심히 읽었으며, 평자의 생각을 정돈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저자는 논문의 후반에서 무의 문제와도 연관된 생성의 문제를 후속 연구과제로 제시하고 있다. 이 문제는 인류의 오랜 숙제로서 생의 방향을 설정하는 윤리적 의미도 갖고 있다. 오늘 날 군산 복합체의 기술과학 권력과 정치가들과 결탁한 화폐 권력은 생사의 의미를 움켜쥐고 있으며, 자신을 호위하는 많은 과학적 철학과 언어규칙 철학을 생산하는 배경이 되고 있다. 그러나 진정한 생사의 의미를 추구하고 양심에 의거하는 생성의 철학은 이러한 권력의 철학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가는 동시에, 귀부인이 넘보는 돌쇠의 유혹에도 눈길 하나 주지 않듯 고고한 자태를 유지할 것이다.

 

2013, 8, 23.

 

 

 

경제 위기와 민주주의의 역할 ? 철학자의 착상은?[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②

2. 삶-정치의 대안들:

네트워크 정치, 이웃과 연계하기, 투명성 요구하기, 인권주장하기/12강

 

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한 경쟁으로 형성된 현재의 경제적 결과물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인간 존엄성 차원에서 인정하는 프랑스 혁명과 맞물리는 산업혁명을 근간으로 한다. 산업혁명 전후의 자본가는 청교도적 성실성에 기초하여 프로테스탄트적 노동 윤리를 가지고 있었다. 막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의 노동 윤리와 자본주의 노동 윤리를 엮어서 설명한다. 그 과정에서 루터나 캘빈의 소명론을 직업 소명론으로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촉발시키는 자본주의는 자유와 평등, 인권의 실현이라는 민주주의와 연결되는 출발점을 지닌다. 신 앞에서 모두가 평등하다는 루터의 발상이나, 그 속에서 형성된 ‘신의 소명’으로서 직업 소명은 어떤 경제 활동이든지 간에 신 앞에서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정신적 기반이 된다.

무조건 부를 축적하고 착복하는 것이 아니라, 신 앞에서 부끄럽지 않은 자기의 순수한 노동 행위를 이루어 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서 생겨나는 빈부 격차 문제는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를 통해 서로 나누게 된다.

일찍이 프랑스 혁명이 만민 평등을 정치적으로 보편화하기 위해 부르짖은 개념이 ‘자유, 평등, 박애’라는 점을 상기해도 이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이 자유와 평등만을 부르짖은 것처럼 보이지만, 거기에는 ‘박애’라는 용어도 동시에 작동한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집단들이 중인 계급들이었고, 그들은 중인 계급의 공동체를 교회 공동체 같은 삶의 공동체라는 발상에서 접근해 들어간다. 같은 집단에 속한 사람들의 삶을 더불어 이해하고 배려하는 ‘공존’의 공동체를 배태하고 있다.

그러므로 자유 경쟁을 통해 빈부 격차가 생겨도 ‘박애’를 통해 ‘공존 공동체’를 만들어낸다는 발상이 이미 프랑스 혁명에 담겨 있다.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중인 계급들이 결국 초기 자본가로 탈바꿈하며, 오늘날에까지 이어지는 팽창하는 자본주의를 야기하지만, 그 근간을 만든 초기 자본가들이 ‘박애’를 인간다움의 기본 개념으로 지녔다는 점을 상기하자.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처럼, 삶의 공동체로서 경제 공동체의 가능성, 공존 공동체의 가능성을 소규모 집단의 행위를 통해 보편화하자는 발상은 역사적 문맥을 지닌다. 오늘날 자본주의, 신자유주의로 이어지는 세계경제는 공동체적 삶, 공존의 삶을 거부하지만, 그 출발점에서 원래는 공존의 삶을 근간으로 한다. 그런 측면들이 희석되고 망각된 채 여기까지 흘러왔기 때문에, 자본주의가 계속 문제를 야기하는 것이다.

실제로 진행되는 세계 경제의 방향은 그런 발상들과 배치되는 길을 걸었고, 그 결과에 순응하는 삶을 살게 된다면, 빈부 격차가 어떤 상황으로까지 이어질까를 생각해 보자. 이렇게 계속해서 경제가 악화된다면, 민주주의도 무기력해질 가능성이 높다. 개인의 존엄성과 인권조차 유린당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도 있다.

자본주의 초기에 일찍부터 이것을 통찰한 사람 중의 하나가 철학자 칸트이다. 칸트는 그의 정언명령의 근간인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지 말고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말이 현실에서 철저히 관철되기를 바랐던 철학자이다. 그런데 당시에 펼쳐지는 상인 자본주의를 목도하면서, 그의 정언명령에 철저히 위배되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임을 알게 된다. 달리 말하면 자본주의는 인간을 수단으로 대우하는 속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자본주의가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고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게 되리라 예측했다.

물론 이와 더불어 칸트는, 비록 어떤 사회가 아무리 민주적이어도, 경제적 빈곤이 심하면 동시에 인간다움이 파괴된다는 점도 간파한다. 민주적 요소가 파괴되어도 인간 존엄성이 침해되며, 민주적 요소를 실현해도 경제적 빈곤이 심화되면 인간 존엄성이 침해된다는 것을 철저히 고민한다. 그래서 칸트는 경제 문제를 해결하려면 정치적 노력이 동시에 필요하며, 정치 역할이 경제 민주화를 이루는 데도 결정적으로 필요하다고 본다. 칸트는 공존하는 경제적 삶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시민사회로서 국가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자 한다.

칸트는 왜 자신이 그런 대안을 설정하는지를 역사철학 관련 글들(임마누엘 칸트, [칸트의 역사철학]을 참고하라.)에서 보여준다. 경제를 끌고 나가는 개인 하나하나의 본성을 살펴보면, 인간은 기본적으로 이기적이다. 이기심은 어쩔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성을 제어하고 통제하는 장치가 필요하다. 인간의 이기적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지만, 이기적 본성을 ‘공존하는 삶’에 도움이 되는 형태로 유도할 수는 있다. 물론 그 유도는 인간 이전에 이미 자연이 그렇게 인간을 조직했지만, 조직화된 프로그램을 실현하려면 정치적 노력으로서 ‘국가’의 역할, 국가들 간의 관계를 규제하는 ‘국제연합’ 그리고 ‘세계시민사회’와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런 발상을 고진이 칸트로부터 이어받아서 ‘세계공화국’으로 발전시킨다. 고진은 팽창하는 세계경제의 위기 가운데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소시에이션’을 대안으로 제시한다. 즉, 정치와 경제의 문제를 동시에 아우르는 경제 공동체이다. 판매자와 생산자가 일치하는 구조이다. 그런데 고진은, 이런 대안은 자본주의가 없는 공간에서는 불가능하다고 한다. 그렇다고 해도 자본주의에 편승하는 태도로는 이런 대안이 생겨날 수 없다.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대안 공동체이어야 한다.

그런데 어소시에이션은 고진 고유의 것이라기보다는 그에게 영향을 준 칸트에게서 이미 나타난다. 중세 교회가 지니는 삶의 공동체로서 교회 공동체는 근대 도시 국가에서는 ‘자유 도시’로 나타난다. 프랑스 혁명을 거치면서 파리 꼬뮌, 즉 꼬뮌 같은 정치 공동체 형태로 논의되다가, 근현대의 협동조합이나 직업단체로 변형된다. 칸트와 헤겔의 어소시에이션은 협동조합 내지 직업단체와 유사한 개념으로 접근할 수 있다. 프루동이나 마르크스에게서도 고진의 어소시에이션, ‘어소시에이션의 어소시에이션’이 나타난다.

현재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존 공동체’라는 발상을 가지고서 철학사를 거슬러가면, ‘어소시에이션’을 만날 수 있다. 물론 여기에서 포인트는 ‘경제와 정치의 연결’이며, 그런 연결을 통해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경제 문제는 전적으로 경제로만 해결할 수 없다. 정치적 역할이 필요하며, 그래서 국가의 역할을 재고해야 한다. 이렇듯 고진이 주장하는 방향으로 간다면, 어소시에이션의 주도자는 국가가 아니라 개인, 민간, 그들이 만들어내는 소규모 공동체이다.

현재 우리네 삶을 돌아보면, 세계경제의 위기를 해결하기 위해 과거 이론가들이 주장한 방식으로만 나아가는 것은 아니다. 과거 이론가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그리고 상상하지 못했던 인터넷 세상이 생겼고, 그로 인해 펼쳐지는 사이버 공간은 새로운 경제 활동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기존의 경제 문제 속에서 생겨나는 반 민주주의적 행태들을 극복할 수 있는 여지도 만들어내고 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새로운 정치적 대안들, 정치적 삶의 공동체를 만들고, 정치적 네트워크를 현실 공간과 가상 공간 모두에서 야기하는 새로움을 보여준다.

지금까지 공존 공동체의 유형은 전 세계에 보편적으로 확산되는 자본주의에 적용하려고 했던 대안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를 염두에 두면서, 특수성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앞서 학자들이 제시한 대안들은 보편적이기 때문에, 한국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가라는 의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 1980년 이래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 사회의 변화 양상을 간단하게 훑어보자. 1980년대에 민주화 운동이 활성화되고, 그 여파로 1990년대에 각 분야에서 시민단체가 다양하게 형성된다. 여러 유형의 시민 공동체가 만들어진다. 그때 형성된 많은 NGO들은 한국 사회의 삶을 공존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이웃과 연계하면서 자유, 평등, 박애를 실현하고, 인간 존엄성과 인권을 실현하는 장치들을 만들어냈다.

그런 노력의 뒤 끝에,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기울이는 후세들이 양산되었다. 사실 1980년대 이래로 진행된 많은 정치적 노력으로, 한국의 인권이 개선되고, 공권력이 우리네 삶을 마음대로 흔들 수 없는 장치들도 마련되었다. 그에 반해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진행되면서, 무한 경쟁이라는 압박감을 낳았다. 경제적으로 부강한 나라가 되었다지만,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불안한 노동 구조 때문에 개개인의 삶은 널뛰기를 하며, 불행 지수는 예전보다 훨씬 더 높아졌다.

사람들은 정치보다는 경제에 더 관심을 쏟고, 경제에 더 매달리고 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기만 하면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사람들처럼 보인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우면, 정치적으로도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정도이다.

그러나 그런 가치관이 만연한 것처럼 보이는 우리 사회에서 왜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신드롬을 일으켰을까? 그것이 곧 한국의 특수한 상황을 보여주는 것이다. 경제 문제에 매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도덕적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사회 정의가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국민들 스스로 이미 반증하고 있다.

<끝>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릴레이 시국선언③-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장물 취득 정권의 탄생

 

유현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대다수의 국민들은 국정원이 어떤 기관인지는 알아도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하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우리 모두 분명히 알고 있는 점은 박정희 정권의 중앙정보부 시절부터 그들은 막강한 권한을 국민도 모르게 행사해 왔다는 것이다. 심지어 국회조차도 그 예산 집행 내역을 알 수가 없는 집단이다. 그러면서 그들이 사용한 권력은 한국 민주주의를 유린하는 일에도 동원되었다는 점도 일부 밝혀진 바 있다.

이번 대선 정국에서 드러난 국정원 댓글 사건은 그들이 우리의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집단이 될 수 있음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다. 댓글 작업에 동원된 것으로 알려진 직원은 종북 세력을 견제하기 위함이었다고까지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북을 이롭게 하는 것이 종북이라면 그들은 가장 위험한 종북 세력임에 틀림없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북을 가장 이롭게 하는 것은 남한 사회의 국론 분열과 민주주의의 퇴행일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대선과정에서 이루어진 국정원의 행위는 그 어떤 공작 정치보다도 유치한 면모를 보이고 있다. 막대한 세금을 들여 무엇을 하나 했더니 초등학생들도 할 수 있는 댓글 작업이었다. 마치 값비싼 다이아 반지 사주었더니 집안 유리나 자르고 있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울러 박근혜 정부 역시 이번 국정원 댓글 사건의 피해자임도 드러났다. 왜냐하면 박근혜 정부가 처음부터 정통성을 잃은 실패한 정권일 수밖에 없는 운명을 안고 출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법상 장물 취득죄는 미필적 인식의 성립만으로도 적용가능하다.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 시절부터 불거진 이 문제에 대해 적어도 미필적 인식의 차원에 있었음은 분명하다. 따라서 박근혜 정부는 국정원이 훔친 민심이라고 하는 장물을 취득한 정권이다.

박근혜 정부와 여당이 이번 문제에 대해 미봉적으로 대할수록 국민들은 그들의 인지 가능성에 대한 더욱 가능한 확신을 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가장 상식적인 국민들의 판단은 구린 구석이 없으면 도대체 무엇을 숨기려고 하는가 하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분명하다. 박근혜 정부는 이 문제를 정치적으로 덮으려 하지 말고 진상을 명백히 밝히고 국민 앞에 사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국정원과 같은 권력 기관이 더이상 민심을 우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반역적 행동을 하지 않도록 철저한 개혁안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정보기관의 특수성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서 그들의 범죄가 더 이상 용인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실패한 정권 혹은 성공한 정권은 정권초기에 나올 말이 아니라 정권을 내려놓은 이후에 나와야 할 평가인 것이다.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⑦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학생들은 모처럼 귀 기울여 들을 만한 이야기를 시작하나 싶더니 중동무이를 하고 마는 나에게 못내 불만스럽고 서운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모르는 척하고 하던 이야기를 계속했습니다.

“변화의 필요는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는 상황에서 생겨납니다. 더 이야기를 진행하기 전에 왜 때매김이 미래로 되어 있는 있을 것이라는(또 없을 것이라는) 말이 있어야 할 것(없어야 할 것)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지 간단하게나마 밝혀 놓는 게 좋을 듯하군요. 지금 있는 것, 곧 현재는 그 자체만으로 볼 때는 텅 비어 있습니다. 지금 있는 것은 하나의 특성을 지니고 있고 이 하나는 모든 관계에서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크기가 없는 것, 따라서 지속도 변화도 보장해 주지 못하는 것입니다. 헤겔의 말마따나 지금 있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존재)은 지금 없는 것(헤겔 식으로 말하면 순수 무)이나 마찬가지로 아무 내용도 없는 공허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명체의 처지에서 보면 지속이냐 변화냐는 살아남느냐 죽느냐를 판가름하는 선택의 기로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해 왔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이러저러한 변화를 거쳐 왔다는 기억 내용만으로서는 삶에 도움이 되는 지침이 될지 모르나 삶의 보장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과거의 기억은 걸러진 것, 곧 규정된 정보로 이루어져 있는데, 아직 없는 것인 미래는 규정되지 않은 것,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에서 현재까지 지속된 것, 또는 과거에서 현재까지 변화된 것을 구체적인 자료〔data〕를 통하여 파악하고 있었던 것이 있다, 있었던 것이 없다, 없었던 것이 있다, 없었던 것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그 판단을 기초 삼아 정보 철을 만들지만 그 기억된 정보의 사용 가치는 미래의 상황이 결정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억에 저장된 정보 철을 뒤지는 인간의 의식이 따르는 통상 경로가 있습니다. 원칙은 간단합니다. ‘간단한 것에서 먼 것으로’ ‘구체적인 것에서 추상적인 것으로’라는 원칙을 세워 놓고 자료들을 뒤져 나갑니다. 생명 유지는 시간 축을 따라 이루어지니까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과거가 일차 탐색의 대상 영역입니다. 시간 축에 따라 현재로부터 더 먼 과거와 더 가까운 과거 사이에는 이런 대응 관계가 성립합니다.

 


 

가장 가까운 과거의 시점에서 보면 현재는 있을 것(없을 것)의 영역입니다. 그러니까 생명체의 지속과 변화를 통한 생명 유지의 처지에서 살피면 늘 있을 것(없을 것)을 중심으로 있는 것(없는 것)에 대한 정보를 기억에 저장하고 정보 철을 만들고 찾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있을 것(생명 유지에 필요한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생명 유지에 장애가 되는 것)이 다 없다면 생명의 유지는 자동적으로 이루어질 테니까 기억도 정보도 필요 없는 생명의 순수 지속만 있었을 것입니다. 생명체가 생명 유지를 위해 지속이냐 변화냐를 상황에 따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데에는 이 세상이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그런 세상이 아니라, 있을 것이 없기도 하고, 없을 것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있을 것이 없고 없을 것이 있는, 결핍과 위협이 때로는 간헐적으로 번갈아 들기도 하고 때로는 집중적으로 한꺼번에 몰아닥치기도 하는 세상이라는 까닭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믿는 것과는 달리 생명체에게, 그리고 특히 본능으로 전화한 생체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생명체들과는 달리 의식에 주어진 외부 세계의 기억에 의존해서 살 길을 찾는 인간에게 가치 판단이 사실 판단에 앞선다는 것은 이런 사정을 반영합니다.”

이쯤 해서 물의가 일어나리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과연 예상한 대로였습니다.

“아니, 선생님, 그렇다면 미래가 현재보다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까?”

윤구병 도서출판 보리 대표. 출처:http://news.kyobobook.co.kr/

“그렇지요. 생명체에게는 그렇습니다. 생명체에게 현재란 무엇입니까? 살아 있음 아닙니까? 이 살아 있음이 이어지느냐, 끊어지느냐, 다시 말해서 목숨이 앞으로도 붙어 있을 것이냐, 떨어질 것이냐가 문제지 우리가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 무슨 주의를 기울여요? 지금 여기 살아 있음에만 주의를 집중할 수 있다면 과거의 기억이나 미래의 예측 다 부질없어져요. 우리가 왜 하나에다 존칭을 덧붙여 하나님〔唯一神〕이라고 해요? 지금 여기 있음이 바로 하나이고, 그 자리에 영원히 머물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은 과거도, 미래도, 시간도, 공간도, 다 여의고 자기 자신에게만 주목하는 자라는 뜻에서, 불교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번뇌 망상을 벗어던졌다는 뜻에서 하나님, 유일신, 부처님 뭐 이렇게 부르는 거예요. 그리고 그런 경지는 존재론의 탐구 영역을 벗어나요. 그런 경지에 이르면 학문이고 철학이고 다 필요 없어요. 그야말로 똥 친 막대기만도 못하지요.

이런 말을 하면 지나치다고 나무랄지 모르지만 사실 판단이 가치 판단에 앞선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가 보기에는 모두 하나님이나 부처님 경지에 있거나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모르는 멍청이들이에요.”

제 말이 지나쳤나요? 아마 지나쳤을 겁니다. 그러나 온 세상이 지금 ‘있을 것이 없다.’(이 말은 곧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라는 것은 여러 차례 말씀드렸습니다.)고 아우성인데, 점점 심화되는 결핍감이 끝간 데 모를 탐욕으로 전화되는 판에 지금 있는 것에만 주목하자는 말이 당키나 하나요?

또 다른 한편으로는 ‘없을 것이 있다.’는 게 세 살배기 아이도 알 만큼 산더미를 이루고 있어서 물질세계에만 국한하더라도 온갖 산업 쓰레기가 온 세상을 뒤덮고 있는 판에 ‘없는 것이 없는’ 세상이 좋은 세상이라고 하여 이른바 선진되었다는 나라에서 국가 정책으로 복제 인간까지 만들어 내려는 꿍꿍이셈을 품고 있는데 나 몰라라 하고 지금 여기 있는 것에만 넋을 팔고 있다는 게 말이나 돼요?

어느 시대에 누가 맨 먼저 그 말을 썼는지 모르겠으되,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는 말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울리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