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주체성과 자율성[철학을다시 쓴다]-⑮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자유’를 이야기하면 ‘사회주의자인 줄 알았는데 자유주의자네?’ 이렇게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거예요. 자유에는 결이 여럿입니다. 노예소유주의 자유 개념이 있고, 부르주아 자유 개념이 있고, 지주들의 자유 개념이 있고, 자본가의 자유 개념이 있고… 저마다 내세우는 자유들이 서로 결이 달라요. 무엇을 ‘자유민주주의’라고 그러죠? 자본주의를 자본민주주의라고 말하는 대신에 이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자유’가 하도 좋으니까, 저마다 자기 체제, 자기가 신봉하는 이념에 ‘민주’도 끌어다 놓고 ‘자유’도 끌어다 쓰고 그래요.

우리 헌법에 보장된 자유가 뭐죠? 신체의 자유, 사상의 자유, 집회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이런 것들이 다 들어가죠? 추상적인 것 말고 거주이전의 자유, 신체의 자유, 여행의 자유, 이런 소박한 것들을 생각해봅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 없는 사람은 아무 자유도 없어요. 돈이 없으면 거주이전의 자유도 없고, 신체의 자유도 없고, 아무 것도 없어요. 헌법에 보장된 자유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있는 사람만 누릴 수 있는 자유예요.

여러분들, 추석이나 설 때마다 도시에 붙들려 있는 아들딸이 ‘어머니, 미안해요. 회사일이 너무 바빠서 이번에는 못 내려가요.’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화면을 통해 들어보셨죠? 그러고 철야하죠? 고향에 돈이 없어서 못 가는 거예요. 여행의 자유도 없고 고향 찾아 갈 자유도 없어요.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종만 있습니다.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아주 명쾌하게 갈라지죠. 이건 제가 한 말이 아니라 <셰익스피어 이야기>를 쓴 유명한 찰스 램이 한 이야기입니다. 흑인, 백인, 황인, 이런 인종구별 없다, ‘있는 놈’과 ‘없는 놈’, 딱 두 종류로 구별이 된다. 있는 놈은 다 있고, 없는 놈은 아무것도 없고… 오죽하면 ‘없는 놈’이라 그래요? 재산이 없으면, 돈이 없으면 ‘존재’조차 없는 거예요.

‘스탠포드 엑스페리먼트’(Stanford Experiment) 이야기를 잠깐 떠올려 보지요. 이 이야기는 책으로도 나오고 영화로도 만들어져 있으니까 따로 긴 설명을 하지 않겠습니다. 아홉 명이 죄수 역할을 맡고, 열두 명이 간수 역할을 맡은 가상 감옥에서 벌어지는 실제 이야기입니다. 이 실험에 자원한 20대 젊은이 가운데 12명은 네 명씩 삼교대로 간수 역을 맡게 됩니다. 간수가 되는 사람은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이 지닌 한 개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 상식적이고 건강한 시민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없애야 하고, 등질적인 죄수 집단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침을 받습니다. 죄수가 된 사람의 자기 정체성을 끊임없이 없애서 비인간화시키는 것이 간수의 임무예요. 감옥 체제에 무조건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임무이기 때문에 자기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수록 죄수들을 비인간화시킬 수밖에 없어요. 그리고 그 정체성을 없앨 수밖에 없어요. 거기에서 죄수들에게서 심각한 시간 왜곡 현상이 나타납니다. 보통 사람의 경우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이 우리 몸에 그대로 작동을 합니다.

 

영화 ‘The Stanford Prison Experiment’ 출처: http://folksonomy.co/?keyword=15274

 

쥐들에게 실험을 해봤는데, 같은 용량의 인슐린 주사를 시간을 바꾸어서 투여하면 어느 시간대에서는 백퍼센트 죽고, 똑같은 양인데도 어느 시간에 투여하면 한 마리도 죽지 않습니다. 우리 몸 안에 저항이 커지고 줄어드는 생명의 주기들이 있는 거예요. 시계로 측정되는 인간의 시간에는 이런 게 하나도 없는데, 복종을 끌어내기 위해선 생명체가 지닌 자연의 시간, 곧 생명의 시간을 등질화시킬 필요가 있어요.

감옥에서 간수 역을 맡은 사람은 교대시간에 무조건 호루라기를 불어서 죄수 역을 맡은 사람을 일으키고 팔굽혀펴기 등 체제에 순응하고 권위에 순종하도록 온갖 종류의 벌들을 부과하는 거예요. 너희들은 이제부터 사람이 아니다, 너희들은 개성이 없다, 감옥 안에서 일률적으로 밥은 몇 분 안에 먹고 소변보는 시간은 몇 분 만에 끝내라, 이렇게 모든 것을 통제하게 된단 말이죠.

이 상황 속에서 죄수로 자원했던 선량한 중산층 대학생이(처음에는 모두 죄수로 자원하겠다고 하고 간수하기 싫다고 했던 사람들인데), 자기가 돈을 받고 계약을 해서 감옥에 갇혀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진짜 감옥에 갇혀서 여기서 벗어날 수 없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나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말하면 금방 나올 수 있는데, 못 나와요. 그리고 간수 역을 맡은 사람들은 점점 잔인해지고, 나중에는 취미 삼아서 성적인 학대까지 하게 됩니다.

이라크에서 자기들의 전리품으로 생각해서 붙잡힌 사람들 목에다 줄을 매서 끌고 다니고 성적인 모욕을 주고 그 행위를 사진으로 찍어서 자랑스럽게 공개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슬람 세계에서 성적인 모욕이라는 것은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입니다. 목숨은 내놓을망정 그런 짓을 당하지는 못하겠다고 하는 사람들인데, 바로 그런 반응이 가장 큰 약점이니까 그 의지를 완전히 꺾어버리려고 그 잔혹한 짓을 태연하게 저지릅니다.

그 미군들이 ‘스탠포드 실험’에서 나오는 20대 초반의 젊은이들과 똑같은 사람이죠. 전혀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고 ‘시스템’이, ‘매트릭스’가 작동하는 데 따라 그런 일을 태연하게 저지르는 거죠. 그러니까 자유 박탈은 인간에게 비인간화, 몰개성화로 나타날 수밖에 없습니다.

자유 박탈 가운데 가장 광범위로 이루어지는 것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간도 등질적인 공간으로 바꾸고 시간도 등질적인 시간으로 만들어 생명의 시간 가운데 자연의 시간을 죄다 없애버리고 모두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 전체 우주 체계, 아주 작은 소립자 단계에서부터 아주 큰 우주까지 전부 등질적인 시공간으로 바꿔서, ‘인간의 의식’ 속에서만 형성되고 합의되는 세계, 수학공식을 통해서 확정된 세계를 진짜 우주로 감쪽같이 바꿔치기 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천체물리학이나 수학을 아무리 열심히 공부해도 이 덫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것이 휜 공간이 됐든, 무한히 확산되는 공간이 됐든 날마다 해가 뜨고 지는 시간이 달라지든, 달이 차고 기우는 시간이든, 지구가 해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시간이든, 사람의 의식 속에서 가공되는 시간은 잘라내는 기준에 상관없이 내용을 채우는 것들은 다 빼버립니다. 그래야 계산할 수 있고, 측정할 수 있습니다.

‘아날로그’화 된 세계, 이어진 연속체는 늘 무규정성이 들어가 있어서, 이게 이렇다, 저게 저렇다 딱 잘라서 수치화되지 않아 끊어낼 수가 없습니다. 측정 가능한 것, 수치화된 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도시사회에서 삶을 통제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도시사회에서는 저마다의 삶을 인간끼리 통제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길이 없습니다. 통제하는 세계에서는 맨 밑바닥에서 맨 위까지 위계질서가 반드시 성립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맨 위에는 ‘빅브라더’가 있고 맨 아래에는 ‘노바디’(아무것도 아닌 사람)로 위계질서가 생기는데 이런 위계질서를 세우는 작업을 우리 왼쪽 뇌가 맡습니다. 분석하고 조직하는 것은 왼쪽 뇌에서 하는데, 인간 수컷들이 ‘반편이’들이거든요, 언어와 추론의 중추가 왼쪽 뇌에만 몰려있어요. 여자들은 이야기할 때 양쪽 뇌가 작동하지만 남자들은 한쪽 뇌밖에 작동하지를 않아요. 그래서 수컷들은 조직하면 주욱 늘어서고, 정치 이야기하면 정신을 못 차립니다.

어쨌거나 자율성이란 것은 생명의 시간 속에서만 싹트고 꽃 피고 열매 맺습니다. 생명의 시간은 자연계의 여러 생명체와 함께 살아갈 때 가장 도드라지게 드러나게 됩니다. 지나가다 우연히 보게 되는 강아지풀도 누가 언제 싹터라, 꽃 피워라, 열매 맺어라 이렇게 명령하고, 간섭하고, 통제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연스럽게 싹트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죽을 때는 알아서 죽고 또 땅에 묻힙니다.

그리스 사람들이 가장 경계했었던 말이 있습니다. 히브리스(hybris), ‘오만’이라는 뜻이죠. 현대 도시에서 ‘디지탈’화한 시간, 시 단위로, 분 단위로, 초 단위로 끊어낸 인간의 시간, 공간화된 시간은 인간의 오만이 극대화된 시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전자 조작을 통해 하느님 흉내를 내죠? 생명체를 자기 마음대로 변형시킬 수 있다고 믿고, 사기도 치죠? 돼지 장기로 사람 장기를 대신해서 프랑켄슈타인처럼 몸 전체를 잘라내고, 잇고, 기워도 끄떡없다고 여깁니다. 돼지 장기를 사람 몸에 꿰맞추면 사람이 돼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왜 못하는지 몰라요. 물질체계에서는 상호교환이 가능하고 가역성이 성립이 되지만, 생명계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물질과학에 기초를 둔 생명공학자들은 생체조직과 물질조직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생각 못합니다. 장기이식이라든지 유전자 조작이라는 것이 정말 아무 문제가 없는 것이냐 하는 것은 여러 세대를 거쳐서 지켜봐야 합니다.

저한테 누군가가 그런 질문을 합니다. 장기기증 하지 않을 거냐고, 제가 착해 보이는 모양이에요. (일동 웃음.) 저는 자신이 없다고 그랬습니다. 저도 저 자신을 못 믿는데 안구를 기증해서 눈을 번쩍 뜨게 만들면, 그 사람이 어느 순간 누구에게 갑자기 심한 증오심을 느끼게 될 때 칼로 푹 쑤셔 살인죄를 저지를지 어떻게 알아요? 장기 이식을 받은 사람이 꼭 그것을 고맙게 여기고, 착하게만 살라는 법 없잖아요. 제가 보기에는 기증된 장기를 나쁘게 쓰려고 준비하는 사람이 훨씬 더 많아요. 전 세계가 장기이식 시장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있는 나라 있는 사람들은 없는 나라 없는 사람 눈알도 빼고 콩팥도 빼는데 혈안이 돼 있는 세상입니다. 죽을 때 기증한 장기가 꼭 성냥팔이 소녀한테 가라는 법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죽어서 장기 기증하겠다고 하면 착하단 말 들을 줄 알고 있지만, 이미 죽은 사람에게 착하다는 칭찬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안식교 사람들은 수혈과 헌혈을 안 하잖아요. 그것을 이기적인 동기와 종교적인 편견 탓으로만 돌려서는 안 됩니다. 전엔 저도 걸핏하면 수혈하고 헌혈하고 그랬지만 나중에 B형 간염을 걸려서 자꾸 간염 걸린 흔적이 복제되는 게 있어서 헌혈해도 그 피 버리게 된다고 적십자병원에서 하지 말라고 연락이 와서 그 뒤로 그만두었습니다. 어쨌거나 우리가 어떤 일을 했을 때 사회가 전부 그것이 옳다고 해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사회가 전부 그르다 하더라도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정말 내가 이 일을 받아들이는데 내적인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서 행동을 결정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자기 몸과 마음을 자율적으로 이용하고, 상황과 체제에 맞서서 자유로운 공간과 시간을 열어가는 길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생명의 시간을 인공의 시간으로 바꿔치기 하려는 모든 통제에 대해서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말아야 합니다.

‘어떻게 될 것인가’ 걱정 말고 ‘무엇을 할 것인가’ 다시 물읍시다.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10월 월례발표회 후기]

?[2013년 10월 월례발표회]

 

중국의 지식(인)은 대안이 될 수 있을까?

 

발표: 조경란(연세대)
후기: 진보성 (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동북아시아에서 센카쿠 열도(중국명:댜오위다오) 분쟁에 이어 이어도를 중심으로 한중일 3국의 방공식별구역(ADIZ) 갈등이 연일 고조되고 있다. 여기에 미국이 중재자로 개입하면서 동북아시아의 영토분쟁 문제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닌 첨예한 상황이 되었다. 그런데 우리는 마치 제3자의 일인마냥 이 문제를 좌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런 동북아 정세를 감안한다면 지난 10월에 있었던 월례발표회에서 장장 3시간 30분에 걸친 논의도 어찌 보면 부족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주제로 이렇게 오랜 시간 동안 발표와 토론이 진행된 발표회는 근래에 없었던 것 같다. 그만큼 조경란 선생님이 들고 나온 문제의식은 단순 담론을 넘어 우리 주위 현실의 문제와 맞닿아 있는 것이었다. 반드시 우리의 가장 가까운 미래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급변하는 동아시아에서 그 중심 자리에 전 세계가 주목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중국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이번 발표에는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와 직접적으로 관련 있는 중국의 부상에 대해 학자적 양심에 의한 견제와 비판이 담겨 있다. 특히 정치경제적인 중국의 부흥에 편승해 우러러 박수만치는 친중화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인문학적 분석이라는데 의의가 있다.

앞으로 책으로 출간될 이번 논의에서 제기하는 중요한 문제의식은 3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동아시아의 역사궤적에서 중국의 서양에 대한 인식이 어떠했는지 던지는 질문이다. 바로 근대성 얘기이며 서구의 근대성과 동아시아에서 근대란 과연 무엇이었는지의 문제이다. 이를 바탕으로 우리는 중국사회주의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 그리고 북경거리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오와 마주보게 된 부활한 공자를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이번 월례발표회는 중점적인 이 문제들을 심도 있게 다루기 위한 전초적인 과정의 일환이기도 하다.

현재 중국 내부에서 중국을 보는 관점은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중국의 경제성장 이후 양지에 주목하는 낙관론이다. 경제성장을 통한 중국인들 스스로 자신감의 소산이다. 또 하나는 비관론으로 중국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보는 관점이다. 신좌파와 유교중국을 꿈꾸는 자들이 힘을 합해 세계문명으로써 바라마지 않는 제국주의를 경계하고 이런 모습에 거리를 둔다. 다시 말해 비관론자들은 세계를 지배해 왔던 유럽적 보편주의(근대성) 문제에 대해 중국이 새로운 보편으로서의 근대적 민주주의를 제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런 중국을 두고 “눈물의 계곡을 거쳤다”고 했다. 중국은 사회주의에서 자본주의로 가는 국가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았고 그 과정을 거치면서 중국의 국가능력은 이미 보통을 넘어섰다. 그러나 지금 중국에서 극명하게 드러나는 빈부의 차이와 화려한 도시에서 처참하게 죽어나가는 민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지금의 중국이 제대로 된 능력을 가졌다고 평가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생각해보면 예전에 동양에서 능력(能)은 곧 덕(德)을 말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후진타오 전 국가 주석이 달성하자던 전면적 소강(小康)사회가 중국의 정치적 부흥과 경제적 성장만을 두고 말한 것이었다면, 또는 청중들이 이것을 염두하고 소강을 이해했다면 현대 중국에서 ‘인(仁)에 바탕을 둔 가족윤리’의 전면적이고 전방위적인 확장은 불가능하다. 그런 사회에서 ‘인(仁)’은 이미 사회의 최소단위에서 형성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내부에서 보는 중국은 굴기에 대해 고무적이지만, 외부에서 보는 중국은 위중해 보인다는 것이다. 내부에서는 외부에서 보이는 것들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21세기에 들어와 이제 중국은 자신들의 방식으로 자기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했다. 지금 중국의 정치사회권의 분위기를 보자면 신좌파는 극우가 되어가고 있고 이 신좌파와 대륙 신유가의 관계는 서로 밀접해지고 있다. 중국 정부는 유학의 ‘화(和)’개념을 통해 뒤에서 유가의 등을 밀고 있지만 동시에 통제하기도 한다. 이런 모습들은 지난날 중국의 사회주의가 중국 내부에서 제대로 기능하지 못했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면서 지젝의 지적처럼 현재 중국 사회주의의 경제적 성공은 사회주의의 권위주의와 자본주의의 권위주의가 만나 결국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중국은 과거 유교의 ‘천하’개념을 통해 국가독점 자본주의를 유지하면서 동시에 동아시아에 대한 수평적 인식을 포기한다. 아시아가 중국이고 중국이 곧 아시아인 것이다.

중국의 지식인들이 주장하는 중국모델론은 ‘문명-국가(civiliztion-state)’의 틀을 제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고 이것이 중국 지식인들이 고민하는 핵심문제이다. 중국 이데올로기를 대표하는 위치에 있으면서 이른바 유교사회주의공화국을 주장하는 간양(甘陽)과 같은 사람은 ‘대중화문명-국가’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것이 21세기 중국 사상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경란 선생님은 이 대목에서 중국 21세기의 핵심개념인 ‘문명-국가’의 논리가 과거 유교적 천하통치주의였던 ‘천하-문명’과 과연 무엇이 다르냐고 반문한다. 만약 중국모델론이 그 내용에 있어서 인문학적 통찰에 근거한 합리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더니티와 민주주의를 보여줄 수 있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적 헤게모니에 의해 국가와 ‘공모’한 중국모델론은 결국 중국의 국가 이데올로기를 표출할 수밖에 없다.

 

?박영미

 

마치 과거 중국 제국주의의 역사가 다시 반복되는 듯하다. 그런데 과거 동아시아 역사에서 중국은 19세기 말 서양의 제국주의의 형태와는 다르게 당시 조공제를 통해 어느 정도 평화적 체제를 유지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다. 왕후이(汪暉)는 자신의 분석을 통해 이 조공체제를 재구성하여 현대에도 재활용(?)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혹시 중화문명으로서 중국이 편제한 동아시아의 문명은 서구의 문명과는 다르기 때문에 과거 동아시아에서는 서구와 전혀 다른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이것은 지금도 유효하다는, 마치 B급 중화반점식 짬뽕논리와 같은 막무가내 낙관론은 아닐까? 조경란 선생님은 이런 입장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고 하면서 “역으로 서구도 중국과 같은 배경이었다면 국가 관계에 조공제를 썼을 것이고, 이 조공제라는 것 자체가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었다고는 하지만 상호필요에 의해 위선을 전제한 서로의 주고받기의 평화 유지 방법이었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논의들을 살펴보면 우리는 중국의 사회주의가 서구를 극복한 대안체제였는가? 라는 질문에 바로 ‘Yes’라고 대답할 수만은 없는 중요한 지점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사회주의는 서구 자본주의를 극복하기 위해 나타났다고 할 수 있지만 결국 중국 사회주의도 근대성의 테두리 안에 갇혀 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은 현재 중국의 상황이 독립적인 지식인들의 윤리적 공동체가 만들어지기 쉽지 않고, 사회 안에서 일정한 공론장도 형성되기 어렵다고 본다.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국가와 자본의 지배가 강력하며 국방비 지출 보다 국가 통제 시스템을 위한 지출이 더 많다는 사실이 이것을 잘 말해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지식인이나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중국의 정치경제적 신장에만 기대하여 교류를 위해 중국의 긍정적인 면만을 보고 접근하면서 중국 내부의 문제나 중국과 우리 사이의 문제적 상황에 대해서는 얘기하려 하지 않는다. 이것은 새로운 소중화주의 아닌가.

실패한 서구의 극복 차원에서, 또는 서구의 대안으로써 근래 사람들은 중국을 주목한다. 이런 관심은 서방 중심의 세상은 이제 종결되었다는 전제 아래, 중국은 기존의 것들과는 뭔가 다르며 유럽적 보편주의와 미국적 보편의 가치를 뛰어넘은 새로운 보편을 제시할 수 있다는 기대에 기인한다. 하지만 이러한 기대는 서구의 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도 결국 중국의 모순적인 현 상황을 눈감고 지나갈 수 있는 여지를 남긴다. 한국에서 중국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마찬가지 상황일 것이다. 조경란 선생님의 언급처럼 보편성은 가치로써 존재하는 것이고 현실을 견인해 내는 것이지만 보편적 보편주의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 아닌가. 서양좌파들이 중국의 좌파들에게 기대하는 것 자체가 근거가 없다. 자기들의 사회와 체제는 문제제기하고 비판하면서 그 연장선상에서 중국에는 희망을 건다. 어떻게 중국에서는 이런 문제들이 보이지 않을까? 이들은 세계 중심의 힘이 중국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히 보는 것 같다. 그들은 이를 문명의 전환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문명론은 매우 허구적일 수밖에 없다.

“우리가 보편주의라고 불렀던 서구식 지식구조가 동서양의 패권구도, 현실사회의 강약구도에서 불평등을 은폐할 뿐 아니라 양극화를 조장하고 유지해오는 데 어떤 작용을 했다는 사실을 알았고 그와 함께 현 중국 자본주의가 ‘괴물자본주의’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현실에서 중국 내부의 ‘민족-국가’ 지배체제와 자본의 이중지배, 그리고 그 아래에서 어느 때보다 주변화 되고 있는 민(民)과 이(夷)의 존재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발표문 중에서 –

중국이 향후 50년 동안 어떤 새로운 대안적인 틀로써 ‘보편적 보편주의’를 제시할 수 있을지의 문제는 사실 어느 정도 지켜봐야할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앞서 논의한 내용들을 통해 현 동북아시아 정세를 두고 본다면 그다지 긍정적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중국의 미래를 둘러싼 이해방식은 곧 한국의 미래에 대한 이해방식과 연결될 수 있다. 이것은 중국연구자로써 조경란 선생님 자신도 말한바 ‘또 하나의 도전’인 셈이다. 이 도전이 어떻게 진행될 지도 우리로써는 관심 있게 지켜볼만하다. 이번 발표회에서 논의된 내용들의 흥미진진함은 앞으로 출간될 책에서 더욱 풍부한 식견과 내용을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⑥

그림자 박물관[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⑥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나루는 힘센 왕이 된 황금빛 그림자를 상상했어.
그런데 개토할아버지의 미소 뒤로
감추어진 기다란 꼬리가 살짝 보이는 거야.
할아버지는 아이들의 그림자를 사서 영혼을 빼앗았어.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삶과 생명체[철학을다시 쓴다]-⑭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미래가 없는 도시문명이 우리를 이끌어가는 대로, 그야말로 ‘되는’ 대로, ‘될 대로 되라’고 살아갈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지속가능한 미래를 확보하기 위해서 이제부터라도 떨쳐 일어서서 무엇인가 ‘해야 한다’는 결단을 내려야 할 것이냐입니다.

도시에서 봉기해서 혁명이 성공한 예는 역사상 한 번도 없습니다. 의회주의에 기대서 세상을 바꾸어 보려는 시도는 이미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가장 가까운 예로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아옌데 정권을 들 수 있는데 결국엔 미국이 뒷받침한 군부 쿠테타에 의해서 무너졌죠? 지금까지 인류 혁명의 거점은 늘 농촌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산과 혁명의 거점이던 농촌이 다 무너져버리고 있습니다.

제가 변산에서 십여 년 이상 농사를 짓다 보니까, 이상하게 나무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물고기가 하는 말도 알아듣게 되고, 들에 나가서 볍씨들이 수군거리는 말도 알아듣게 됩니다. 제가 사는 변산은 소나무가 많았던 지역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변산 기후도 아열대성 기후로 바뀌면서 소나무가 급속도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자리에 참나무가 자라는데, 가을이 오면 많은 도토리 알을 떨굽니다. 한 해에도 수천 알의 도토리를 땅으로 떨구는데, 제가 참나무에게 물어봤습니다. ‘우리 나라 산지가 70%인데 거기에 모두 네 씨만 뿌리내리게 하려고 그래?’ 그랬더니 아니랍니다. ‘그러면 해마다 뭐하러 그렇게 많이 떨어뜨려?’ 물었더니 자기가 죽을 때쯤 떨어뜨린 씨앗 가운데 한두 그루 건강하게 자라서 자기를 대신해 종이 유지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해요.

 

?한겨레

 

볍씨도 마찬가지죠, 한번 심을 때 두 알 세 알 심으면 스무 포기로 늘어나는데 한 포기당 백 알 넘게 달리고 해서 풍년에는 볍씨 하나가 때로는 천 단위로, 때로는 만 단위로 열매를 맺죠. 그래서 볍씨한테 ‘야 들판 전부를 니 종자로 덮으려 그래?’ 물으니 아니라 그래요. 쥐도 먹고, 새도 먹고, 당신도 먹고 씨앗으로 남긴 것으로 우리 종 유지하면 그만이라고 이야기합니다.

바다에 사는 숭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수억 개의 알을 낳아서 태평양, 대서양까지 온 바다를 전부 니 새끼로 덮을 생각이냐?’ 했더니 아니라 그러죠. ‘그중에 한두 마리만 남아서 자기 종을 유지시켜 주면 그만이다’ 해요. ‘그럼 나머지는 뭐하려고 그렇게 많은 알이 필요하니?’ 물으면 자기 몸을 던져 다른 생명체를 살리고, 자기 새끼들이 그 생명체에 기대 살기 위해서 그렇게 많은 알들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우리가 삼시 세끼 먹는 반찬들이 전부 다른 생명체가 밥상에 올리는 ‘생체보시’입니다.

유한한 세계에서 무한한 생산력이라는 건 없어요. 그것은 ‘신화’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르크스 시대의 신화죠. 씨 하나 뿌리면 수천수만 알을 얻을 수 있는 유기물의 세계에서도 무한이라는 건 없어요. 도시에서는 5%의 생산력만 늘어나도 ‘라인강의 기적’, ‘한강의 기적’ 이런 소리를 하는데 유기물은 무한축적이 안 돼요. 곡식의 씨앗을 이년만 묵혀버리면 발아율이 현저히 떨어져버려서 곡식 구실을 거의 못 합니다. 유기물이라 오래 두면 썩어버리니까 싫든 좋든 나눠야 해요.
그런데 ‘생산력의 무한한 발전’과 ‘생산물의 무한한 축적’에는 썩는다는 개념이 없어요. ‘무한축적’이 가능한 것도 무기물밖에 없는데 그것은 전부 ‘부동산’, ‘동산’으로, 화폐나 유가증권 같은 것으로 되면서 종이쪽지 하나에 수억, 수십억의 자산도 축적이 가능한 세상이 되었어요. 자본주의 체제가 지속되는 한 자손만대를 물려줄 ‘사유재산’으로 법적인 보호를 받아요. 폭력적인 국가기구가 이 사유재산을 보호해 주죠.

사람이 무엇으로 사는가? 이 질문을 던질 때, 도시 사람들은 답변할 길이 없어요. 도시공간에서는 사람들만 모여 사니까 ‘착취하고 살거나 착취당하면서 살지 뭐~’, ‘주인이나 노예로 살지 뭐~’ 이런 대답밖에 할 수 없어요. 전체 생명의 그물망 속에서 모든 생명체가 서로 도와 그물을 만들어가면서 살아야 하는데, 그렇게 살아갈 길이 없어서 도시사람들은 덫에 갇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환상 속의 세계를 실제 세계라고 자기최면을 겁니다. 정신적인 유목민들이 우글거리면서 ‘가상의 초원’, ‘의식의 평원’을 질주하고 있어요. 실재하는 평원이 아니라 등질화된 의식 공간을 질주하면서 나는 지금 말을 타고 달리고 있다고 상상을 해요. 어쨌든 밥상에 아침, 점심, 저녁으로 올라오는 것이 다른 생명체의 생명이다, 살아있는 몸을 나에게 제공하는 거니까 이것을 먹고 뭘 ‘해야 할지’ 성찰해야 해요. 그렇지 않으면 ‘되는’ 대로 살 수밖에 없어요. ‘하면 된다’는 능동성은 사라지고, ‘되면 한다’는 수동적인 반응만 남아요.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앙리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철학자의 서재]

 

조현진 (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리듬 분석>(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이라는 제목 때문에 이 책이 음악에 관한 책일 것이라 생각해 읽을 용기가 나지 않은 분들이 계셨다면, 그런 걱정은 떨쳐 버려도 될 듯하다. 이 책은 음악에 관한 책이 아니라 일상에 관한 책이며, 이론적 동기보다는 실천적인 관심에서 쓰인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 책은 현대 사회의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과 비판을 계승하고 보완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쓰인 책이며, 이를 통해 나와 세계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을 변화시키려는 의도로 쓰인 책이다.

르페브르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리듬들을 분석하기 위한 하나의 과학을 (…) 정초”(한국어판 55쪽)하려는 그의 원대한 꿈은 미완의 기획으로 끝나고 말았지만, 그는 이 책 곳곳에서 사회를 접근하는 새로운 시각과 틀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런 시각과 틀을 특징짓는 키워드가 바로 ‘리듬’이다.

 

리듬에 입각한 새로운 사회 분석

그럼 르페브르는 왜 리듬에 주목하는 것일까? 먼저, 리듬은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갈등, 곧 “거대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된 프로세스 사이의 충돌이 벌어지는 장소이자 극장”(202쪽)이기 때문에 르페브르에게 주목의 대상이 된다. 예를 들어 기업에 의해 부과되는 야간 노동은 노동자의 신체 리듬을 깨뜨림으로써 일의 능률성을 저하시킬 뿐 아니라 노동자의 건강을 손상시킬 수 있다. 이처럼, 리듬 분석은 일상생활의 갈등과 모순을 드러냄으로써 일상성에 대한 르페브르의 비판 작업을 보완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앙리 르페브르 지음, 정기헌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또한 르페브르는 리듬 개념을 통해 불변하는 정적 존재가 가변적인 동적 존재보다 우위에 있다는 존재론적 발상을 혁신할 수 있다고 보았다(56쪽 참조). “세계 안에 움직이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83쪽)으며, 결국 “느리거나 빠르고 매우 다양한 리듬들만이 있을 뿐”(앞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가령, 인간을 살아 있게 하는 것은 심장박동을 포함하는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인간이 먼저 있고 전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나중에 나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라고 말할 수 있다.

르페브르가 리듬 개념에 주목하는 세 번째 이유는 “각각의 리듬을 분리함으로써 무엇이 ‘자연’에서 왔고, 무엇이 후천적인 것, 관례적인 것, 정밀하게 만들어진 것인지를 이해”(86쪽)하고, 이를 통해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착각을 피하게 하기 위해서다. 그렇지 않을 경우, 후천적이고 관례적인 리듬을 선천적이고 자연적인 리듬으로 착각할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르페브르에게 리듬은 일상생활에 대한 그의 분석과 비판을 보완하고, 존재에 대한 관점을 혁신시키며,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통해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로잡는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분석 대상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의 모순

르페브르는 거시적인 리듬들과 사회경제적인 조직에 의해 부과되는 절차간의 갈등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순환적 반복과 선형적인 반복이라는 개념 쌍을 도입한다. 순환적인 반복이란 “우주적·세계적·자연적인 것에서 오”(64쪽)는 것으로 “낮, 밤, 계절, 바다의 파도와 조수, 달 모양의 변화 등이 이에 해당한다.”(위와 같은 쪽). 반면, 선형적인 반복은 “인간의 활동에서 비롯된 것”(위와 같은 곳)으로 “주어진 틀에 따라 행위와 동작이 단조롭게 반복”(위와 같은 곳)되는 것을 말한다. 시계의 반복적인 똑딱거림이라는 선형적 반복이 낮과 밤의 순환이라는 자연적 반복을 측정가능하게 할 때처럼, 양자는 때로는 통일적인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인간의 휴식시간과 여가시간이 철저히 노동시간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선형적인 반복과 순환적인 반복은 갈등 관계를 맺는 경향이 있게 된다. 관행으로 굳어진 잔업이나 야근과 같은 근무 형태의 반복은 삶의 자연적 리듬을 깨뜨리고 파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리듬의 기원과 성격에 대한 르페브르의 분석은 이처럼 선형적이고 기계적인 반복 속에 갇혀 있는 우리의 삶의 리듬의 족쇄를 풀고, 우리의 삶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복원시키기 위한 기획이라고 할 수 있다.

몸의 우선성과 고통을 통한 리듬의 지각의 필요성

이렇게 볼 때, 르페브르의 ‘리듬 분석’은 자연적이고 우주적인 리듬들과 사회적이고 선형적인 리듬들의 형태들을 분류하고, 이들이 각각 어떤 성질을 갖고 있으며, 서로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파악하려는 이론적 기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리듬 분석>은 미완의 저작이기에 이런 작업의 단초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이런 웅장한 기획에 대한 분석과 평가는 필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과제이기에, 르페브르의 기획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두 가지 주제와 함께 르페브르 철학의 실천적 의의를 논하는 것으로 이 서평을 마무리할까 한다.

르페브르는 “우리가 어떤 문제로 고통을 겪는 순간에 이르러서야 우리 자신을 이루는 리듬들의 대부분을 파악할 수 있다”(210쪽)고 주장한다. 이는 리듬 분석이 제 3자에 대한 관조나 관찰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체험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지는 작업임을 시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듬 분석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는 인간은 자신의 몸을 가지고 고통을 체험하는 인간이다. 다시 말해, 고통이 리듬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주는 인식 근거라면, 리듬은 고통을 존재할 수 있게 해 주는 존재 근거다.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이 깨져 고통을 느낄 때, 우리는 비로소 리듬의 존재를 자각하게 된다. 하지만 균형이 깨지는 것을 지각하기 전이나 후 모두, 우리를 우리로 존재하게 해 주는 것은 바로 리듬들 간의 균형이다.

이런 맥락에서 <리듬 분석>에서 고통의 문제는 두 가지 윤리적인 의미를 갖게 된다. 먼저 신체의 리듬들 간의 불균형을 극복하고 균형을 회복하라는 요구를 삶의 지상명령으로 설정하게 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개인윤리적 의미를 갖게 된다. 또, 이런 개인적 차원의 신체 리듬들 간의 균형이 회복되기 위해서는 사회적·정치적·경제적 조건의 구비가 요구된다는 점에서, 리듬 분석은 사회윤리적인 의미 역시 함축하고 있다. 이러한 르페브르의 주장은 개인의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손상이나 파괴를 가져오는 고통이나 죽음은 악이며, 심리적·물리적 균형의 극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사회·정치적 조건이 갖추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스피노자의 주장과 매우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

<리듬 분석>의 서론에서 르페브르가 공언하긴 했지만 명확하게 제시하지는 않은 실천적 방안 역시도 이런 스피노자적인 맥락 속에서 보다 명료하게 파악될 수 있다. 이 책 전체를 통해 제시되고 있는 리듬 분석의 실천적 방향은 크게 두 가지로 보이는데, 예술적 리듬을 통한 카타르시스(192쪽)와 조화리듬성의 회복(196쪽)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는 신체의 리듬들 간의 균형을 전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을 필요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해, 리듬 분석의 실천적 효과가 좀 더 가시적인 것이 되기 위해서는, 리듬들 간의 균형을 위한 개인적인 조건뿐만 아니라 사회경제적이고 정치적인 조건들이 해명되고 제시되어야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르페브르의 사유는 스피노자의 발상과 합류한다.

물론, 르페브르의 실천적 의의는 이에 국한되지 않는다.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 등으로 인한 자연적이고 거시적인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심각한 상황에서, 이러한 리듬의 교란과 파괴가 미시적이고 인위적인 리듬의 반복에 기인한 것일 수 있음을 우리에게 끊임없이 환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기획연재] 서구 지성의 원천 ? 고대 그리스 문화 대 탐험(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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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이정호 (방송통신대학교 교수)

 

 

* 주제 3에서는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제8장 “Zur Philosophie, Wissenschaft und Redekunst”(Gesammelte Werke, Band VII, s. 275-421)의 내용을 수회에 걸쳐 발췌 요약하는 방식으로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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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3 : 부르크하르트의 『그리스 문화사』: 그리스 철학과 과학의 지성사적 기원과 의미

 

2. 신화와의 결별

다. 자연철학의 등장

그런데 그리스적 사고가 완전한 독립에 이르렀음을 선언해야할 시대가 도래하였다. 자연학과 윤리학 그리고 토론술(Dialektik)의 시기로 불리어지는 철학의 시대가 그것이다. 사실 이 시기들은 모두 하나의 지속적인 발전과정의 일환임이 분명하다. 이렇게 자연학의 시대는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과 함께 모든 저항을 이겨내고 마침내 신화의 시대와 결별하였다. 그리스인들 모두가 이 분야에 대한 지식에 굶주리고 있었던 것이었다. 또 그만큼 일반적 추리력도 발전하여 그로부터 윤리학과 토론술도 나타났다. 철학의 가능성은 이렇듯 자연학에서 그 발단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만물의 근원과 성질에 대해서는 대부분의 민족의 경우 그들의 종교에 이미 일정한 교리로 확립되어 있었지만, 마침내 그리스 사람들은 신화와 구전으로 전승된 자신들의 우주창조설화를 깨고 사물의 근원(archai)에로 육박하기에 충분한 자유를 획득하기에 이르렀다. 탈레스(기원전 640-550년)는 물을, 아낙시만드로스는 무한정자(apeiron)를 물질의 근원으로 주장하고 그 중앙에 대지가 구(球)로서 떠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를 물질의 근원으로 여겼고, 별들이 대지 위의 천정처럼 떠 있는 것이 아니라 공기 안에 있으면서 지구 주위를 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 사람의 밀레토스 학파에 이어서 이 영역에서 아주 중요하고도 현저히 뛰어난 인물이 나타났는데 그 사람이 곧 에페소스의 헤라클레이토스이다. 그의 저작은 고대에서조차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모두가 일치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끊임없이 자극을 불러일으키는 그의 단편들은 오늘날에서조차 실로 여러 가지 해석과 생각들을 낳는 모태이기도 하다. 헤라클레이토스는 우주 만물을 생성 과정으로 파악하기 위해 영원한 새로움의 상징으로서 한 순간의 휴식조차 없는 불을 필요로 했다. 그에 의하면 모든 것은 끊임없는 유동과 영원한 개조의 한 가운데 있으며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이다. 그 귀결 안에서 그는 주기적인 반복의 세계를 불태우고 있는 영겁의 불을 상정하고 있다. 세계에 대한 위대하고 대담한 생각들 중에는 그가 최초로 말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것들 중에는 감각으로 확인하기 힘든 것들도 있지만, 우리는 그의 말에서 호메로스와 그 신들의 세계에 대한 공공연한 증오와 철학자가 폴리스에 대해 행한 것으로서는 가장 최초의 격렬한 이반을 발견한다. 그의 관심사는 매우 크고 넓어 개개의 폴리스 차원의 문제들을 넘어서 있었다. 그는 벌써 세계 시민이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이토스(기원전 540?-480?)

 

크세노파네스, 파르메니데스, 그리고 제논 등 엘레아학파의 사람들은 모든 것은 하나이고 그 하나가 신이라는 존재에 대한 정의를 가지고 이오니아학파에 대립한다. 그들은 범신론의 길을 걸으면서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이 민족 종교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적 존재를 그 순수성 속에서 파악하려 했기 때문이다. 이오니아학파와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완전하고도 자유로운 탐구와 다함없는 정진을 추구한다. 자유로운 사상은 그 자신의 필요로부터 학설로 발전하였고 또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들 모두 충분한 부 또는 간소한 생활을 바탕으로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연구에 완전히 몰두할 수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이 시대에도 이미 철학자들 서로에 대한 경쟁이 지배하게 되었다.

 

파르메니데스(기원전 513-445)

 

그런데 어느 물질적인 원소에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운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다(多)의 통일체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또는 피타고라스학파 사람들과 같이, 수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아니면 데모크리토스와 같이 원자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든 간에 그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그 체계들은 모두 종교에 대한 단순한 주석이 아니고 오히려 독립된 창조물이었다. 신관에 의한 강제나 유인 없이 이루어진 이러한 자연학적 발견이나 예측은 본질적으로 종교로부터 자유로운 사고와 개인들에 의해 수행된 최초의 연구 활동이다. 이러한 지식은 종교적 의식이나 신화의 옷을 걸칠 필요가 없었다(엠페도클레스(Empedokles)의 학설에서 보이는 증오(neikos)와 사랑(philia)과 같은 추상적 힘은 여전히 신화의 파편이라고는 해도). 물론 이오니아학파의 자연학(peri physe?s)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그럴만한 시대적 조건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식민지가 식민지로서의 걸음을 시작할 즈음에는 새로운 세계에 관한 지식이 풍부해지기 마련인 데다가 본토의 다른 땅보다 훨씬 자유로운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으며 사고와 행동을 저해하는 모든 종교적 편견으로부터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이러한 사정은 이탈리아의 그리스 식민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낙사고라스(기원전 500?-428)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탈레스가 만물은 신들로 가득 차 있다고 말했다고는 하지만 설사 그것이 사실이었다고 해도 그것이 민간 종교에의 예속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은 운동의 원인을 그 원소와 전혀 구별하지 않았으며 특히 아낙사고라스(Anaxagoras)는 그 ‘정신(nous)’을 여전히 물질적인 것으로 생각하고는 있었을 지라도 세계에 질서와 운동을 부여하는 원리로 삼을 정도로 위대한 혁신을 이룩했다. 최대한 기존의 아무런 전제도 염두에 두지 않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낙시만드로스(Anaximadros)의 개체의 발생에 대한 설명 또한 그들이 그 다양한 추측을 행하는 데에 얼마나 독립적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즉 그는 인간이 물고기로부터 서서히 진화해온 것으로 가르쳤던 것이다.

 

데모크리토스(기원전 460?-307?)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이오니아학파 사람들의 주장이 제각기 다르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이 학파의 독립성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들의 뒤를 이어 나타나는 세 명의 밀레토스 학파 사람들 또한 마찬가지이다. 헤라클레이토스는 감각에 의한 지각을 신뢰하기 어려운 것으로 배척하고 있는데 그것은 보는 주체도 객체도 끊임없이 흐름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군가가 철학자를 어떠한 정치적 혹은 사회적 이유로 파멸 시키려할 경우, 통상 신에 대한 불경을 빌미로 삼곤 했는데 페리클레스의 정적들이 아낙사고라스에 대해서 제기한 소송은 그러한 중상들의 첫 번째 사례이다. 그가 호메로스의 신화를 도덕적으로, 신들의 이름을 우의적으로 해석했다는 것이다. 그는 태양을 한 개의 돌 또는 뜨거운 금속 덩어리로, 달을 일종의 지면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옥고를 치렀고 석방된 후에도 아테네를 떠나 람프사코스(Lampsakos ; 헬레스폰토스 동쪽 해안)에서 죽음을 맞이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또한 자신의 책을 통해 “신들이 존재하는지 혹은 존재하지 않는지 나는 모른다.”고 주장했다는 이유로 아테네의 사람들에 의해서 추방되었고(기원전 411년) 그가 쓴 책들 모두가 그의 집과 뤼케이온 그리고 그것을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로부터 회수되어 몽땅 불태워졌다. 디아고라스(Diagoras) 역시 엘레우시스(Eleusis)의 비의를 누설했다는 혐의를 받고 더 심한 곤욕을 치루지 않으면 안되었다. 도망을 친 그의 목에 1달란톤의 상금이 걸려 있었던 것이다. “바다는 언젠가 완전히 말라버릴 것”이라고 말한 아폴로니아의 디오게네스(Diogenes)도 결국 도망을 가서 생명을 부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소크라테스에 대해서는 나중에 말할 생각이다. 아테네의 민주정은 신들의 문제와 관련하여 희극에서는 제멋대로 다루어도 관대하게 내버려 두었지만 철학에서만은 유독 보수적이었다. 특히 기원전 432년에 디오페이테스(Diopeithes)의 제안을 받아들여 “신들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 혹은 자연현상을 해명하려고 시도하는 사람 모두를 고소해야한다”는 결의가 이루어진 이래, 자연에 대한 학적 탐구는 아테네에서 비밀리에 행해질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분위기상으로는 더 이상 철학을 억누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이미 크세노파네스는 다신교적인, 또 의인적인 민간 종교에 대항하여 그 특유의 새로운 신의 개념인 하나이자 전체(hen kai pan)를 다음과 같은 말로 변호하고 있다. “사자로 하여금 만약 그림을 그릴 수 있게 한다면, 신들도 사자를 닮은 모습으로 그려질 것이다”. 또 데모크리토스는 민간의 신을 부정하고, 모든 사건을 필연성으로부터 도출하여 인생의 목표를 공포나 미신에 의해서 흔들리지 않는 영혼의 평정(euthymia, euest?)에서 찾았다. 그리고 그를 시조로 하는 원자론 학파는 회의론자들과 에피쿠로스가 출현하는 바탕을 마련했다. 물론 아리스토파네스가에서 진절머리가 날 정도로 묘사하고 있듯이 그러한 움직임을 비웃는 일이 아테네에 만연해있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철학을 해칠 정도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신분이 높은 사람들은 모두 철학에 신경 쓸 겨를도 없이 무고자(sykophantes)들로부터 생명과 재산에 대한 끊임없는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오랜 전란기를 보내면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많이 익숙해져서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 소송을 당한다 해도 예전만큼 그렇게 무서워하지도 않게 되었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들에 대한 불경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가능한 한 회피할 수 있는 방법도 찾아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에피쿠로스는 신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신들의 세계 지배는 부정한다는 교묘한 화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그리스 철학은 민간 종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해나가면서(대체적으로 봐서 그렇다) 그렇다고 무신론은 아닌 일신론에 이르게 됨으로써 그 순환의 끝인 신플라톤주의에서 종교가 될 운명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향한 공격, 다시 말해 모든 그리스적 생존과 교양의 위대한 전제를 향한 공격은 전통적 신들을 향한 공격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사실 이 적대 행위는 벌써 피타고라스 때로부터 자신들의 신들에 대한 보다 큰 외경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행해졌다. 피타고라스학파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는 신들에 대해 엄격한 신앙심으로 헌신하고 있었다. 실제 그들의 윤리학은 종교적 토대 위에서 성립한 것이었고, 게다가 종래의 신화들을 희생해도 좋다는 생각을 포함하고 있었다. 피타고라스는 지하세계에서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가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보았다고 주장했고 헤라클레이토스도 “호메로스는 아르킬로코스(Archilochos)처럼 시인들의 경시대회에서 추방당하고 채찍으로 맞아도 좋다”고 말했다. 게다가 또 신화를 거의 범신론적 개념상의 이름들로 극복하려한 크세노파네스는 호메로스와 헤시오도스를 공격하는 엘레게이아(Elegeia)와 이암보스(Iambos)율(풍자에 적합한 운율)의 시를 써서 신들에 관한 그들의 언급을 비난하였다.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것은 플라톤이 국가에 대한 저작에서 행한 시인들에 대한 비판이다. 후대의 사람들 중 어떤 이들은 이러한 그의 태도가 소크라테스가 조각을 단념한 것처럼 그 자신 비극 문학을 단념하게 된 데에서 비롯된 호메로스에 대한 질투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사색하는 사람들의 신화와의 결별은 이미 모든 곳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윤리학과 토론술 또한 순전히 철학을 통해서 자연학과 나란히 어깨를 같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새로운 현상으로서 소피스트 철학이 끼어들었던 것이다. 소피스트 철학은 사회 현상으로서 나중에 고찰하게 되겠지만 여기에서는 그리스적 사고와 지식의 발전 과정에 있어서 소피스트가 차지하는 위상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해두기로 한다.

소피스트들은 철학자들로서는 아주 만만한 경쟁 상대였다. 따라서 철학자들의 말만 들으면 소피스트들에 대한 평가가 그리 좋지도 높지도 않다. 하지만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해져온 선입견과 대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소피스트들은 모두 외지로부터 아테네로 온 사람들이다. 이를테면 프로타고라스는 압데라 출신이고 고르기아스(Gorgias)는 레온티노이, 힙피아스(Hippias)는 앨리스, 프로디코스(Prodikos)는 케오스 출신이다.

 

고르기아스(기원전 483?-376)

 

그들은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많이 끌어 축제가 있을 때면 연설을 통해 사람들을 매료시켰고 존경도 크게 받아 고액의 사례를 받았다. 그들이 돈까지 받았는데도 대중들이 그들에게 갈채까지 보냈다는 것은 분명 철학자들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라면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만으로도 수긍이 갈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의 경우, 정말 도움이 되는 처방전이라면 공짜로 그것을 받는 것보다 사례를 지불하고 받는 것을 더 좋게 그리고 고맙게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소피스트들은 아테네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시 가장 유명한 사람들, 예를 들어 페리클레스라든지 투퀴디데스(Thukydides)와 같은 사람들 또한 그들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이러한 일들은 우연히 일어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로부터 생긴 필연적 결과들이다. 그렇다고 그렇게 된 것이 단지 소피스트들의 윤리적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자체로 선이고 그자체로 악인 것은 없다고 주장했고, 모든 것이 그 나름의 견해와 약정에 의해서(doks? kai nom?) 선이 되기도 하고 악이 되기도 하는 것이며, 또 모든 일에는 찬반양론(duo logous)이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또 종교와 관련해서도 그들은 단순한 회의론을 넘어서서 바야흐로 부정론을 내세워 아테네의 사람들을 사로잡아 온갖 이상한 행위로 그들을 내몰았다. 그런데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이러한 생각들을 그토록 광범위한 범위에 걸쳐서 만들어 내고 유포할 수 있었을까? 사실 이러한 생각은 훨씬 이전부터 존재해왔었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이 되살아날 수 있는 일정한 방식을 제공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그들에 의해서 개발된 연설기술(Redekunst)은 모든 인식이 주관적이라고 하는 학설과 일체의 것이 설득력에 달렸다는 학설과 결합되면서 더욱 고취되고 크게 육성되었다. 게다가 그들은 참된 인식은 승인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철학적 문제들 전반에 대해 정통해 있었다. 특히 그들은 엘레아학파로부터 차용해온 허위 추론방법을 그들의 토론술에 적극 활용하였다. 그 기술을 익히는 것은 그들에게는 아마 정신적인 체력훈련(Gymnastik)이었을 지도 모른다. 비록 그들의 교육에는 깊이가 결여되어 있어 사람들을 ‘보다 좋은 사람으로 만든다’는 요구에는 부응할 수 없었을 지라도, 그들은 세상사를 살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과 기능을 가르쳤던 까닭에 대중들은 그들에 대해 대단한 사의를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힙피아스는 올림피아에서 석조 인장 등 자신의 손으로 만든 온갖 종류의 치장물을 몸에 붙이고 나타나 스스로 일종의 백과사전적 만능인이라고 떠벌리고 다니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들은 많은 실제적인 지식으로 사람들을 끌어들여, 서적 또한 얼마 되지 않는 지적 풍토에서 대단한 지식욕에 불타고 있었던 시대적 요구에 영합했던 것이다. 보다 쉽게 이해하기 위해 굳이 만일을 빌어 이야기한다면 만일 우리가 그 시대로 돌아가 그들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들이 이탈리아의 인문주의자가 이룬 것 같은 효과를 그 시대에 미쳤다고 말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들은 우주의 구조에 대한 학설(idea tou kosmou)과 천문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기하학을 알고 있었고 그것을 사용해 지도를 작성하는 방법까지 체득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시인들의 작품을 해석하고 음악을 가르쳤으며 문법에도 정통해 있었다. 힙피아스는 기억술과 관련한 학문도 취급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들의 논의영역에는 역사와 고고학, 폴리스의 종류에 대한 학설, 즉, 아리스토텔레스의의 예비 작업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비교정치학, 식민지학, 법률학, 가정 및 국가 행정에 관한 이론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다. “무엇이든 다 물어보라”(das proballete)고 말한 고르기아스의 그 유명한 재촉이 논리학상의 조작에 관한 것에 불과하고 모든 학문 영역에 걸친 모든 질문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라 해도, 어쨌든 그 말은 소피스트들의 지식이 그 만큼 풍부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고, 소피스트들은 그것을 대중에게 광범위하게 유포함으로써 그리스 사회에서 하나의 은혜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의 생활에서 필요한 요소였고 그런 점에서 그들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당시 사회에서 그렇게 하찮은 취급을 받고 있지는 않았던 것이다.(3. 연설기술 -다음에 계속)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보고듣고생각하기]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나태영(한철연 회원)

 

 

 

과거는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중앙정보부, 국가안전기획부, 국가정보원은 그 놈이 그 놈이다. 박정희는 18년간 독재로 이 나라를 숨 쉬고 살기 힘든 나라로 만들었다. 박정희 시대에 중앙정보부가 태어났다. 태어나자마자 죽었어야 했는데 명이 참 길다. 1980년 12월 31일자로 국가안전기획부로 이름이 바뀌었다. 1999년 1월 국가정보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김종필이 1963년까지 초대 중앙정보부장(현 국가정보원장)을 지냈다.

박근혜 아버지인 다까끼 마사오(박정희)를 1979년 10월 26일 총살시킨 사람이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김재규이다.

‘권력에서 밀려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은 결국 자신이 모시던 박정희 대통령을 저격했고 이는 유신독재의 몰락을 불렀다. 남재준 국정원장의 몰락이 박근혜 정권의 붕괴로 이어질지 주목된다.’(문경환 글, 128쪽)

‘국정원’ 세 글자는 ‘피눈물’ 세 글자와 동의어이다. 국정원 때문에 피눈물 흘린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저는 공소장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검찰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부양능력 없는 엄마를 둔 조카를 돌보는 일조차 국가정보를 빼내기 위한 내란음모의 증거라며 억지로 들이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국정원이 자신들의 대선부정을 덮기 위해 조작해낸 이번 사건에는 상식도 기본도 없이 광기만 존재하는 것 같았습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아이아빠가 갇혀 있는 하루하루가 억울하고 일분일초가 아깝습니다. 아이 모습을 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아이 아빠를 보는 것도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

“도대체 이런 슬프고 말도 안 되는 일이 왜 생긴 걸까요.” 믿었던 30년 지기 친구가 국정원에서 돈을 받고 자기 양심을 판 것을 알았을 때도 분노보다는 처절한 안타까움과 연민을 먼저 가졌던 제 남편입니다.’(임이화 글, 7쪽)

국정원이 엄한 사람 간첩 만들어 죽였다. 엄한 사람 국가보안법이란 죄로 감옥에 가두었다. 감옥에 갇힐 인간은 다름 아닌 국정원장 남재준이다.

 

김갑수 외 공저, <내란음모의 블랙박스를 열다>, 도서출판615, 2013.

 

‘1968년 ‘남조선해방전략당’ 사건은 중앙정보부가 각종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조직한 사건으로 밝혀졌다. 당시 중앙정보부가 ‘간첩사건’으로 발표한 이 사건으로 ‘수괴’로 지목된 권재혁은 이듬해인 1969년 사형됐고, 이강복은 암으로 옥중사망, 이형락은 만기출소 후 자살했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 진실화해위)는’ “1968년 8월 24일 중앙정보부가 ‘통일혁명당사건’과 함께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을 ‘간첩사건’으로 발표했지만, 별도의 ‘국가보안법 위반 사건’으로 권재혁 등 13명을 연행해 불법 구금과 가혹행위를 통해 ‘남조선해방전략당사건’이라는 이름을 붙여 반국가단체로 조작한 것”이라고 밝혔다.

진실화해위는 “중앙정보부는 ‘통일혁명당 사건’의 수사과정에서 권재혁 등 13명을 1968년 7월 30일 경부터 강제 연행해 3일에서 53일간 불법 구금하고, 구타와 잠 안 재우기 등의 고문과 가혹행위를 통해 허위 진술을 강요했다”고 설명했다.

이어 “중앙정보부가 지인들 간의 친목모임을 ‘남조선해방전략당’이란 명칭과 강령을 가진 반국가단체로 확대 과장해 조작한 것으로 판단한다”면서 “피고인들에 대한 검사작성 피의자 신문조서나 자술서 등은 임의성이 의심이 있는 억압적인 상태에서 작성된 것으로 판단되어 반국가단체 구성, 가입 내지 내란예비음모 등의 범죄사실에 대한 증거도 없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진실화해위는 국가에 피해자와 그 가족에게 사과하고 ‘화해조치’를 취할 것과 재심을 권고했다.’(통일뉴스, 박현범, 2009.10.13.)

21세기에도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살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독자 여러분은 <구속노동자후원회>라는 단체 누리집 들어가 보기 바란다.

 

고등학교 교육만 제대로 받아도 국정원이 저지른 잘못 알 수 있다.

 

하지만 대학교 졸업하고서도, 박사학위까지 따고서도, 언론사 기자 일 여러 해 하고서도, 언론사 이끌면서도 국정원이 시키는 대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있다. 민주당 국회의원들, 정의당 국회의원들, 손호철, 이대근, 오연호, 심상정, 진중권, 주대환 등등이 그들이다.

국정원이 프락치를 시켜서 진보당 모임 현장을 녹음했다. 녹음 내용을 조작하고, 짜깁기해서 녹취록을 퍼뜨렸다. 한국일보가 ‘짜깁기 녹취록’을 퍼뜨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국정원이 평소에 왜곡, 조작하는 데 선수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국정원이 퍼뜨린 ‘짜깁기 녹취록’을 먼저 의심해야 했다. 먼저 1차 녹음 파일을 정확히 글로 옮기는 작업을 해야 했다. 왜곡 없이 글로 옮겨진 내용을 바탕삼아 국정원이든, 진보당이든, 이석기를 비판해야 했다. 하지만 저들은 그리하지 않았다. 국정원이 퍼뜨린 ‘짜깁기 녹취록’을 바탕삼아 이석기와 진보당을 비난했다. 이 땅에서 ‘상식’이란 두 글자가 한 데서 고생이 많다.
‘진보적이고 배운 사람들이, 여전히 현상에 압도되어 본질을 보지 못한다는 점에서는 매카시즘의 노예들과 별 차이가 없다.’(김대규 글, 뒤표지)

 

손호철을 비판한다.

 

‘그러나 이번에 밝혀진 녹취록 등은 사법적 판결이 어떻게 귀결될 것인가와 상관없이 테러계획 등 그 내용이 충격적이다.’

손호철한테 말한다. 테러계획은 없었다. 정확히 파악하고 글을 써라.

‘문제는 이번 사태가 보여주듯이 국가보안법의 존재 등으로 인해 종북주의자들이 자신의 정치적 노선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지 못함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민주당의 묻지마식 반MB야권연대와 비례대표제가 더해져 이들의 정체성에 대한 엄밀한 대중의 검증이 없이 문제의 인물들이 국회에 진출한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오히려 국가보안법을 폐지해 종북주의자들이 떳떳하게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고 국민의 정치적 심판을 받도록 만들어서 민의에 의해 정치적으로 고사시켜야 한다. 또 민주당도 낡은 묻지마식 야권연대에 대해 다시 생각해야 한다.’(2013-09-15[손호철의 정치시평]이석기를 넘어서)

진보당 국회의원들 괜찮은 사람들이다. 국정원에 놀아난 민주당, 정의당 국회의원들이 문제 많은 인물들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합쳐야 한다. 민정당으로 합쳐야 한다. 국가보안법 폐지되면 진보당 사람들이 더 힘을 얻는다. 진보당 사람들 죽지 않는다.

‘정의당 그리고 노동당으로 이름이 바뀐 진보신당 등 주사파에 비판적인 진보세력들은 진보의 존망이 걸린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대중의 올바른 선택이다. 시대착오적인 종북주의는 신랄하게 비판하되 그것이 ‘종북매카시즘’으로 나가는 것을 막고 올바른 진보가 성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대중의 몫이다.’(2013-09-15[손호철의 정치시평]이석기를 넘어서)

정의당은 한미 서민패죽이기협정을 옹호하는 국민참여당 계열이 함께한 정당이다. 손호철한테 부탁한다. 정의당한테 바라지 말라. 상처 입는다. 노동당(진보신당)은 민주노동당에게 ‘종북’이란 주홍글씨 새긴 것 사과하라. 한나라당이 ‘친북’이란 두 글자 쓸 때 당신들은 ‘종북’이란 두 글자 썼다. 손호철 같은 진보지식인 척 하는 지식기술자들이 정신 차려야 이 땅 진보정당이 산다.

손호철처럼 진보당을 비난하는 사람들한테 손석춘이 한 말을 알려준다.

“언론이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와 비슷한 사건으로 대서특필해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방법만 보더라도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 얼마든지 단순 비교가 가능하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선거라며 이승만까지 덧붙여 몰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여론몰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비례대표 순위는 어떻게 결정하고 또 했는가. 더러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통합진보당과 경선 규칙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과연 그러한가. 좋다. 두 당은 통합진보당과 달리 당 지도부가 당 안팎의 인사들로 임명한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 심사위에서 결정한 순위대로 모든 게 이뤄졌을까?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영향력으로 순위가 조정된 사람은 없는가? 바로 그렇기에 조중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의 죽음을 들먹이는 사람들과 이 책이 서 있는 자리는 확연히 다르다. 진보정치 세력이 직면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또한 수구-보수세력과 민주세력은 달라야 한다.”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21, 22쪽)

새누리당, 민주당 인간들아! 제발 냉수 마시고 속 차려라!

당신들 당내 비례대표를 구렁이 담 넘어가듯 뽑지 말고 진보당처럼 투표로 뽑아라. 진보당보다 더 멋지게 비례대표 뽑아라. 그런 다음에 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뽑는 길 비난하라.

 

‘이석기 사태’가 아니라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다.

 

‘태안 기름유출사건’이 아니라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건’이 맞다. 많은 언론들이 ‘태안 기름유출사건’이라는 표현을 쓴다. 심지어 진보언론에서도 이 표현을 쓴다. 옳지 않다. 태안 사람들을 두 번 죽이는 짓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 삼성은 대통령 보다 힘이 세다. 삼성이 힘 있는 사람들한테 떡값을 돌렸다. 삼성이 언론사에 많은 광고를 준다. 언론사는 삼성한테서 광고 받지 못하면 밥벌이가 힘들어진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 그래도 진보언론이라면 ‘삼성중공업 기름유출사건’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

똑같이 ‘이석기 사태’라는 표현을 쓰면 문제 일으킨 국정원은 빠진다. 죄 지은 것 없는 이석기만 고생한다. 이석기가 문제 일으켰다는 분위기를 만든다.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란 표현을 써야 한다. 조중동, 종편, 지상파 방송한테는 바라지도 않는다. <한겨레신문>, <경향신문>, <오마이뉴스>, <프레시안>은 ‘국정원 내란음모 조작사건’이란 표현을 써 주기 바란다. 진정 당신들이 진보언론이라면 그리해주기 바란다.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상황에 따른 인간의 의식과 행동 변화[철학을다시 쓴다]-⑬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비판은 쉽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때려 부수는 일은 삽시간에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안을 제시하는 것, 이렇게 때려 부수고 나서 여기다 무엇을 쌓아올릴 것이냐를 의논하고 실행에 옮기는 데에는 시간이 걸립니다. ‘없을 것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있고 누구든지 민감하게 대응을 하고 없애야 한다고 뜻을 모읍니다. 스스로 행동에 옮기지는 못해도 없애야 할 것이라는 의식은 분명히 갖습니다. 하지만 ‘있어야 할 것’인데 지금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는 과정은 쉽지 않습니다. 서로 편안하게 살자, 서로 우애하면서 살자, 전쟁은 안 돼, 이런 빛 좋은 말로 때우는 것을 넘어서서 구체적인 실천과 연관 지어서 이건 없는데 우리가 빚어내야겠어, 길러내야겠어, 만들자고 뜻을 모으고 힘을 길러내는 데에는 창조적 지성의 결집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아주 애 터지고 지루하고 힘든 건설의 과정이 요구됩니다. 그런데 건설은 우리가 머리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요. 머리를 쓰는 일도 필요하지만 건설은 손과 발, 몸을 놀려서 합니다. 손발이 제대로 움직일 수 있도록 몸이 튼튼해야 건설 사업에 동원이 되죠.

중국에 문화혁명이 있었죠? 문화혁명이 일어나고 십여 년 이상을 마오가 생존해 있었고, ‘사인방’이 전면에 나섰을 때는 세계가 온통 중국의 문화혁명에 열광했습니다. 요즘 젊은이들이 체 게바라를 읽고 다니듯이 그 당시에는 마오가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최고의 혁명지도자였습니다. 그 후로 사인방이 몰락하고, 급속도로 경제력이 떨어지게 되고, 세계열강의 대열에서 멀어지게 되면서, 또 문화혁명 기간에 피해가 엄청나게 늘어나고, 비판의식과 창조의식을 겸비하고 있는 사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 치르게 된 대가가 만만치 않았습니다. 결국엔 등소평 체제가 등장해서 급속도로 시장경제 쪽으로 경제정책을 바꿔 오늘날 이런 상황에 이르게 되었죠.

1966년 천안문 성루에서 신문을 읽는 마오쩌둥 – 출처: http://blog.hani.co.kr/blog_lib/contents_view.html?BLOG_ID=spider&log_no=26193

중국에서 부정부패는 일상화되어 있습니다.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다가 온 사람에게 직접 들은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그 정도로 부정부패가 심하면 나라가 거덜 났을 거라고 합니다. 그러나 ‘사회주의적 시장경제’라는 괴물경제를 유지하면서도 아직 희망이 있는 까닭은 문화혁명 시절에 농촌이나 공작소로 하방되었던 많은 청소년들이 지금 중국 공산당의 중간 간부가 되어 국정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이 희망입니다. 이 사람들이 문화혁명 때, 어떤 사람은 자발적으로 지원하고 어떤 사람은 강제로 끌려가서 농촌에서 몇 년, 공장에서 몇 년씩 몸으로 때운 신체적 기억이 방부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거의 모두 공산당 당원들이고, 한꺼번에 무너지지 않는 두터운 층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부패가 널리 확산되지 않고도 자본의 본원적 축적이 가능한 체제가 꾸려진 것입니다. 몸으로 겪고 때우는 게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의 의식은 별로 믿을 게 못 됩니다.

체제와 상황이 사람을 규정하는 힘이 너무 커서, 책상머리에서는 혁명가이기도하고, 영웅이기도 한 사람들이 현실에서 상황이나 체제의 압력에 짓눌리게 될 때 어떻게 망가지고 변하게 되는지는 도처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설득을 통해서나 토론을 통해서 사람이 변화되는 것만을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지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 생산관계가 건강하게 바뀜에 따라서 생산력이 증가하고 그 증가한 생산력은 무한히 다양화되고, 무한히 커가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키게 되고, 그렇게 되면 ‘쪼는 질서’(pecking order)가 없어진다는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겁니다. ‘페킹 오더(peking order)’는 먹이를 적게 주면 제일 힘 센 닭이 다른 닭들이 접근하지 못하도록 다 쪼아서 쫒아버리고 혼자만 먹이를 독차지해서 마음껏 먹다가 배가 차면 물러나고, 그 다음 힘이 센 놈이 쪼고, 배가 차고, 물러나고, 힘없는 놈은 나중에 비리비리 말라 죽는 힘센 놈 중심의 위계질서를 일컫는 말입니다. 이것을 ‘쪼는 질서’라고 합니다. 마르크스 레닌은 생산관계가 건강해져서 생산력이 무한히 발전하게 되면 쪼는 질서가 없어지고, 자연히 평등한 세상이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그런 신화는 믿지 않죠.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에서는 벌써 200년 전부터 그리고 덩달아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50년 사이에 온 세상이 도시화의 길로 접어들면서 우선 지구라는 생태 환경 자체가 급속도로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무한한 탐욕에 길들여져 있는 도시인들이 물질 에너지를 펑펑 써서, 과거 삶의 자산, 미래 자손들이 물려받아야 할 생명 자산까지 짧은 시간에 전부 탕진해버리고 지구를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후손들이 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어, 물려줄 것이라곤 전쟁과 굶주림과 증오밖에 없는 상황이죠. 지구라는 한정된 행성에 생명자원이나, 물질자원이나 모두 한정되어 있는데, 이걸 펑펑 써버리면서 온 인류가 모두 무한히 증가하는 생산력에 따라서 무한히 증가하는 욕망을 무한히 충족시킬 수 있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지난 수십만 년 동안 인류는 생명에너지, 생체 에너지를 써서 사는 길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불과 200년이 지나지 않은 짧은 기간에 인류의 삶의 양식이 급격히 바뀌어 이제 물질에너지에 기대지 않으면 너도나도 살길이 없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물질 에너지는 확산에너지로, 폭발시켜서 얻는 에너지인데, 이 폭발 과정에서 80% 이상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그 낭비된 에너지는 모두 대기를 오염시키고 수질을 오염시키고 토양을 오염시키는 산업쓰레기로 바뀝니다.

생체에너지는 응집에너지입니다. 여러분들 ‘확산’(divergent)과 ‘응집’(convergent)이란 말 알고 있죠? 응집 에너지가 사용되는 데는 낭비요소가 최소화되고, 산업쓰레기를 발생시키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에너지가 순조롭게 순환하는 쪽으로 쓰이게 되는데, 현대 도시사회는 응집 에너지, 곧 생체에너지만 써서는 살길이 없는 곳으로 바뀌었습니다. 생체에너지가 응집되어 있는 정상 상태의 유기물은 자연과 인간관계 속에서만 생산되고 분배되고 소비됩니다. 그런데 자급자족을 할 수 있는 생산지가 도시내부에는 없습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철학자의 서재]

파울로 코엘료의<11분> [철학자의 서재]

 

이한오(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성공회 신부)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파울로 코엘료의 장편 소설 <11분>(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이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제목과 표지 뒷면에 그려있는 매혹적인 그림 때문이었다. 남녀가 성교를 나누는 평균시간을 제목으로 단 것도 도발적이고, 아가씨의 누드도 단순히 에로틱한 것을 넘어 무언가를 암시하는 듯 했지만, 나로 하여금 이 책을 읽게 만든 요인은 소설의 시작과 마지막을 장식하는 문장이었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코엘료는 “옛날 옛적에”와 “창녀”를 대조했는데, “옛날 옛적에”는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해줄 때 사용하는 표현인 반면, “창녀”는 나이든 자들의 용어이기 때문이란다. 작가는 이 명백한 모순을 이야기의 첫 문장으로 끌어들이면서, 인간이라는 존재가 한 발은 동화에 한 발은 나락에 살고 있는 현실을 응시하자며 그 첫 문장의 모순을 설명한다. 동화와 나락이라! 첫 페이지의 다른 문장도 범상치 않았다.

“모든 창녀가 그렇듯 마리아도 동정녀로 태어났다”

 

“옛날 옛적에 마리아라는 창녀가 있었다.”

▲ <11분>(파울로 코엘료 지음, 이상해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우리는 성은 넘쳐도 사랑이 없는 시대에 산다. 섹스산업은 밤낮으로 돌아가고 단지 11분의 섹스를 위해 돈을 들여 약까지 먹지만 정작 사랑은 없는 시대다. 거짓과 냉소가 난무하는 관계에 사랑은 없는 법이다. 소설은 브라질 북부의 작은 지방에서 태어난 소녀 마리아의 학창시절과 짧은 직장생활, 그리고 스위스 제네바에서의 1년 동안의 창녀경험을 배경으로 한다. 작가는 이 이야기를 실제 인물의 인터뷰를 기초로 하고 있는데, 소설이 끝나는 마리아의 나이는 23살이다. 겨우 스무 두세 살짜리 아가씨에게 어떤 일이 벌어진 것일까?

소설의 구성은 시간의 흐름에 따르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스토리텔링과 중간 중간에 삽입되는 마리아의 일기가 두 축을 이룬다. 마리아의 일기에 따르면 그녀의 성장기는 “예”라고 말하고 싶을 때 “아니요”라고 말했던 것의 연속이었다. 10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소년이 등굣길에 연필을 달라고 했을 때 망설이다 주지 못했던 것을 시작으로, 하고 싶은 것을 늘 주저했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주목받지 못하고, 남자친구와 키스를 하고 싶었지만 여자가 너무 쉽게 허락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 입술을 열지 못했고, 사흘이 지난 후 마리아는 자신의 여자 친구와 손을 잡고 있는 청년을 바라보게 된다. 마리아의 성장기는 늘 이런 식이다. 타이밍을 놓치고 후회하는-.

 

소녀 마리아

사실 내가 이 소설을 처음 읽을 때는 섹스를 매개로 한 마리아의 성장사를 중심으로 보았다. 소녀 마리아, 여행을 떠나는 마리아, 창녀가 된 마리아, 그리고 그 이후의 변화 과정을 말이다. 하지만 두 번째 보았을 때 한두 가지를 더 발견했다. 그것 역시 그림처럼 본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겉표지와 속표지 다음에 나오는 다음의 기도문이다.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여,
당신께 도움을 청하는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소서. 아멘.”

이 기도문은 가톨릭과 성공회에서 자주 드리는 기도문의 일부인데, 성모 마리아를 통해 기도하면 하느님께서 더 잘 들어주실 것이라는 믿음이 융성하던 시대에 지어진 기도이다. 그래서 ‘마리아께 도움을 청하오니 들어주소서!’라고 하지 않고, ‘마리아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대신 기도해 주소서’라고 한 것이다. 그 유명한 비틀즈의 노래 ‘렛 잇 비'(Let It Be)에 나오는 마리아도 이 모티브가 작용하고 있다.

그런데 그 기도문이 소설 <11분>에, 그것도 창녀 마리아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 소설의 앞쪽 간지에 들어왔을 때는 의미가 달라진다. 의미란 상황과 맥락에 따라 움직이고, 달리 해석되는 것이 아니던가. “죄 없이 잉태하신 동정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이기도 하지만, 꿈 많고 순수한 브라질 소녀 마리아는 창녀로 둔갑한다.

 

파울로 코엘료

코엘료는 이런 배치의 효과를 잘 알고 있다. 그는 저 기도문 이외에 소설의 본문이 시작되기 전에 세 가지 글과 하나의 지도를 제공한다. 첫째는 머리말 성격의 글, 둘째는 기원전 3~4세기경 나그함마디에서 출토된 이시스 찬가(“나는 최초의 여자이자 마지막 여자이니”로 시작하여 “나는 추문을 일으키는 여자이고 더없이 멋진 여자이니”로 끝나는), 세 번째는 마리아가 나중에 창녀가 되어 지내는 제네바의 지도가 있고, 끝으로 신약성서의 루가복음의 일부도 옮겨놓았다. 이 자료들을 거기 그 자리에 놓았는지 별도의 설명은 없다.

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까지는 예수가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서 식사를 하러 갔을 때, ‘죄지은 여인’이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와서 예수의 발을 닦아주는 이야기이다. 이 성서 속 이야기를 툭 제시해놓고 이후 어떠한 설명도 하지 않은 채 소설을 풀어 가는데, (성서를 가까이 하며 사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 소설 전체가 성서 본문에 대한 하나의 해석 작업이 아닐까 생각한다. 성서도 이야기이고, 소설도 이야기이다. 이야기는 사실(팩트)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전하고자 한다. 그는 이야기와 이야기의 배치를 통해 빚어지는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고자 하는데, 그 의미에 대해서는 이 글의 끝에 가서 한 번 더 말하기로 하겠다.

나는 춘천에 산다. 내가 만난 춘천 학생들은 기회만 있으면 서울로 가려한다. 학생들이 보기에는 춘천이 너무 답답하고 일자리도 없고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일까? 브라질 북부 지방도시에서 태어난 마리아도 먼 곳을 여행하고 싶었다. 또 마리아에게 이제까지의 남자들은 늘 고통스런 기억만 남긴 채 사라졌다. 그녀는 사랑은 항상 고통만 줄 뿐이라 믿었고 바다를 건너 더 넓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싶었다. 연예인이 되어 돈을 많이 벌어 가난한 부모님께 집도 사드리고 자신에게 고통을 주었던 남자들에게 보란 듯이 복수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떠난 여행이 브라질의 꿈의 도시, 리우데자네이루였다. 마리아는 여행지에서 스위스인 프로듀서 로제를 만난다. 그가 연예인으로 성공시켜 주겠다는 제안에 마리아는 ‘예스’라고 응답한다. 그녀는 1주일 만에 모든 것을 결정한 뒤 그를 따라 제네바로 떠난다.

 

돈과 모험을 찾아 나선 여행

꿈에 부풀어 스위스로 도착했지만,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냉정한 현실이었다. 1주일에 500달러를 준다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비행기 값을 제해야 했다. 그녀가 할 일은 삼바댄서였다. 손님과 대화를 하면 안 되고, 사랑에 빠져 일을 그만 두면 해고당한다는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스스로 그 사랑을 피하는 것은 몰라도, 막상 타의적으로 ‘사랑금지’를 당하고 나니 그녀의 몸이 거부하기 시작했다. 결국 3주 만에 아랍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보기 좋게 해고당하고, 하루아침에 거리에 나서게 될 뻔하다가 변호사를 통해 손해배상을 받고, 그 남자는 사라지고, 다른 일을 찾게 되고, 그 과정에서 돈 많은 남자를 만나 일생일대 최대의 관문에 서게 된다. 연예인 프로듀서인 줄 알고 만난 아랍인이 호텔로 옮겨 포도주 한잔을 더 하면, 1000프랑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매춘을 제안 받은 것이다.

1000프랑이면 요즘 우리나라 돈으로 130만 원 정도 되는, 브라질에서 석 달을 일해야 받을 수 있는 돈이었다. 고민 끝에 그녀는 그 호텔에서 그 포도주를 마시기로 한다. 막상 몸을 팔고 보니, 이상한 해방감을 느꼈다. 아름다움은 바람처럼 사라지는 법이 아닌가? 그녀는 본격적으로 창녀가 되기로 작정하고, 제네바의 텍사스촌 베른가를 찾아간다. 그렇게 마리아는 창녀가 되었고, 직업적 창녀가 된 지 일주일이 지난 일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영혼을 담고 있는 육체가 아니다. 나는 ‘육체’라 불리는, 눈에 보이는 부분을 가진 영혼이다. 요 며칠 동안 나는 그 영혼을 아주 뚜렷이 느낄 수 있었다. 그 영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날 비판하지도, 불쌍히 여기지도 않았다. 그냥 날 바라보기만 했다. 오늘 그 이유를 깨달았다. 내가 사랑을 생각하지 않은지 아주 오래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랑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나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103쪽)

창녀도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이다. 첫째 밤 혹은 둘째 밤의 고비를 넘기면, 그것 역시 고된 일과 치열한 경쟁 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다른 것과 똑같은 직업이었다. 창녀들도 직업적인 경쟁력을 갖추려고 노력했고, 시간표를 준수했고, 스트레스를 받았고, 손님이 너무 많으면 짜증을 부렸고, 일요일에는 쉬었다. 또 “창녀들은 대부분 기독교 신자였다.”(110쪽) 나는 작가가 ‘창녀들도’라고 하지 않고, 그냥 담담하게 ‘창녀들은’이라는 주격조사를 사용한 것에 주목했다. 그들을 하나의 동등한 인격체로 보는 것이다. 작가는 또 마리아가 “자신의 영혼을 잃지 않기 위해 일기를 붙들고 씨름했다”(111쪽)고 적었는데, 그럼으로써 몸을 파는 창녀가 잃지 않으려는 영혼이 독자의 그것과 다를 수 있는지 계속해서 묻는다.

 

11분을 축으로 돌아가는 세상

작가는 머리말에서 “세상엔 우리를 꿈꾸게 하는 책도 있고, 또 우리에게 현실을 일깨워주는 책도 있다”며, 이 책은 두 번째에 해당하는 것임을 암시한 바 있다. 코엘료가 보기에 세상 사람들이 알아야 할 현실 중에 하나는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루 24시간 중 그 11분 때문에(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모든 사람이 매일 밤 아내와 사랑을 나눈다고 가정할 때) 결혼을 하고, 가족을 부양하고, 아이들의 울음을 참아내고, 늦게 귀가하게 되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함께 제네바 호숫가를 거닐고 싶은 수십 수백 명의 다른 여자들을 훔쳐보고, 자신을 위해 값비싼 옷을, 그 여자들을 위해서는 더 비싼 옷을 사고, 채우지 못한 것을 채우기 위해 창녀를 사고, 피부 관리, 몸매관리, 체조, 포르노 등 거대한 산업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117쪽)

마리아가 제네바에서 만난 남자들은 자신이 세상과 자기 삶의 주인인 것처럼 자신만만하게 보이기 위해 무슨 짓이든 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그들의 눈에서 두려움을 읽었고, 남자들의 외로움을 접하면서 자신만이 외로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제 섹스 그 자체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리를 벌리고, 콘돔을 사용하도록 요구하고, 약간의 신음소리를 내고, 관계 후 즉시 샤워를 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잠깐만요”(128쪽)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나가는 마리아를 어떤 화가가 부른 외마디 소리였다. 그 소리는 마리아의 인생을 새롭게 바꾸는 전환점이 되는 소리였다.
“당신에게 빛이 있어요.”

“스케치라도 하게 해줘요.”(129쪽)

이 말은 지금까지 자주 듣던 “가슴이 정말 탱탱하군”, “허벅지가 정말 매끈해”, “아파트 한 채를 얻어줄게”하던 그런 말이 아니었다. 마리아는 모델 일을 마치고 나서, 자신의 직업이 창녀인데 그래도 빛이 계속 나는지 따지듯 묻지만, 화가는 중요한 건 창녀가 아니라 “당신이라는 여자와 상관이 있다”고 말한다. 화가는 그녀를 소유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그저 하나의 존재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에겐 빛이 있어요.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것들의 이름으로 소중한 것을 희생할 수 있는 존재가 가진 의지의 빛이 눈, 그 빛은 당신의 눈을 통해 드러나요”(142쪽)

화가는 그녀를 육체적 미의 대상이 아니라, 인격적 대상으로 선한 눈빛을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다. 에로스에서 필리아로의 상승이랄까. 마리아는 전혀 다른 관점으로 자시에게 관심을 보이는 그 남자와 결국 ‘산티아고의 길’을 따라 호수로 흘러드는 강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144쪽)

산티아고는 예수의 열두 제자 중 야고보 성인이 걸었던 길로, 지금도 순례의 길로 유명하다. 나는 그들이 첫 만남에서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것이 일종의 회개로 보인다. 성서에서 ‘회개’ 혹은 ‘회심’으로 번역되는 희랍어는 ‘메타노이아(metanoia)’인데, 그 뜻은 ‘방향을 돌리다’는 뜻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인생길의 방향을 타락과 환락의 ’11분’이 지배하는 세상의 베른가로 향하지 않고, 영원한 사랑의 길을 암시하는 성인의 순례길로 그들은 걷기 시작한 것이다. 산티아고의 길을 걷는 동안, 마리아는 행복하다고 느꼈다. 첫날 그들이 나눈 대화를 보면 그 길의 의미가 어떤 것일지 더욱 강렬하게 다가온다.

– 당신을 만나러 가겠소.
– 그러지 말아요. 난 곧 브라질로 돌아갈 거예요.
– 손님으로 당신을 찾아가겠소.
– 나에겐 굴욕일 거예요.
– 당신에게 구원받기 위해 찾아가겠소.(149쪽)

물론 섹스에 권태를 느낀 화가가 다시 쾌감을 맛보고 싶은 뜻에서 ‘구원’이라는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지만은 않다. 기독교(신 구교)에서는 ‘구원’을 얻기 위한 조건으로 회개를 제시한다. 회개란 시공간에 묶인 역사적 존재인 인간이 자기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구하겠다는 계획을 포기하고, 시공간을 창조한 절대자에게 위임하는 것으로 사유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자, 삶의 실천방식을 자기중심에서 점점 확대하여 이웃하는 인간과 자연 그리고 신의 생각을 조용히 따르고자 하는 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화가는 마리아에게 간청한 ‘구원’은 마리아를 직업여성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자신”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고,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인간으로 존재하는, 어떤 빛을 가진 인격으로 만나고자 한 것이다. 그날의 마리아의 일기는 자신에게 구원을 간청하는 남자로부터 신의 목소리로 여긴다.

나는 몇 시간 전, 한 카페에 들어갔고, 한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신이 그곳에 던진 것과 같았다. 나는 나에게 다른 종류의 관심을 보여준 첫 번째 사람에게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불행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행복한 하루는 거의 기적에 가깝다.(151쪽)

그들은 이제 자기도 모르는 방식으로 서로가 서로를 구원하는 운명적인 만남에 이른다.

 

구원의 빛과 영원한 사랑

마리아는 그 화가가 자신이 영영 잃었다고 생각한 자긍심과 ‘빛’을 찾아 주었다고 생각했다. 마리아는 사랑이 체위에 좌우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체위의 변화는 춤의 스텝처럼 자발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충분히 경험했다. 그리고 가장 강한 사랑은 자신의 연약함을 내보일 수 있음을, 뿐만 아니라 사랑에 빠진 사람은 성적 행위에 의존하지 않고도 쾌감을 느낄 수 있으며, 서로 사랑하고 함께 있는 두 사람은 놀이와 ‘연극’을 통해 그들의 시곗바늘을 맞추어야 하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단순한 만남 이상이라는 것을, 생식기의 ‘포옹’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는 화가 랄프와의 새로운 만남 와중에도 사디즘에 빠진 영국 신사를 만난다. 가학적인 고통을 주고 받는 그와의 만남도 이 소설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하지만 사디즘이 추구하는 고통과 노예적 굴종을 통한 정화 그리고 거기서 오는 성적 쾌감은 또 다른 중독과 마찬가지로 허무함을 알게 된다.

화가 랄프와의 만남의 시간은 짧았지만 강렬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로 대해준 유일한 사람과 만난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존재 그 자체로 받아들이는 대화적 섹스를 시도하며 새로운 삶의 활기와 의미를 찾아가는데, 결국 그들은 생식기의 ‘포옹’을 통해 이제껏 한 번도 느끼지 못한 영원한 오르가슴을 맛보게 된다. 그녀의 뜨거운 고백은 이러하다.

“나는 그와 합류했다. 그것은 11분이 아니라 영원이었다.”(337쪽)

 

루가복음 7장의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

소설 <11분>에서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옮겨놓은 루가복음의 소제목은 ‘용서받은 죄 많은 여자’이다. 예수에 대한 존칭을 생략하고 줄여 옮겨보면 이런 이야기이다.

예수가 어떤 바리사이파 사람의 초대를 받아 그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게 되었다. 마침 그 동네에 살던 행실이 나쁜 여자가 그 소식을 듣고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왔다. 그리고 예수 뒤에 와서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며 향유를 부었다. 그랬더니 예수를 초대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이것을 보고 속으로 “저 사람이 정말 예언자라면 자기 발에 손을 대는 저 여자가 어떤 여자며 얼마나 행실이 나쁜 여자인지 알았을 텐데!”하고 중얼거렸다. 그 때에 예수가 시몬에게 묻기를 “어떤 돈놀이꾼에게 빚을 진 사람 둘이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졌고 또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이 두 사람이 다 빚을 갚을 힘이 없었기 때문에 돈놀이꾼은 그들의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 두 사람 중에 누가 더 그를 사랑하겠느냐?” 그러자 시몬은 “더 많은 빚을 탕감 받은 사람이겠지요”하자, 예수는 옳은 생각이라면서, 계속 말하기를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머리카락으로 내 발을 닦아주었다. 너는 내 얼굴에도 입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 맞추고 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발라주었다. 잘 들어두어라. 이 여자는 이토록 극진한 사랑을 보였으니 그만큼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루가복음 7장 37절에서 47절 요약, 공동번역 대본)

예수가 역사적으로 생존했던 유대사회는 먼지가 많은 땅이었다. 그래서 손님이 오면 발을 씻을 물을 대접하거나, 경우에 따라서는 직접 주인이 발을 닦아주는 관습이 있었다. 그런데 그 바리사이인은 물을 내놓지도 않았다. 바리사이인은 스스로 ‘구별된 자’라는 의식을 갖고 종교적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다. 요즘으로 치면 주일을 잘 지키고 교회에서 장로의 직분을 갖고 있는 그런 사람들일까? 아마 열심히 신앙생활은 하지만 그 종교의 본질인 사랑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니 예수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 비판의 눈을 감추지 않는다. 이에 비해 행실이 나쁜 처녀(아마 창녀일 것이다)는 향유를 붓고 자기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어주었다.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친 셈이다. 보기에 따라 에로틱한 상황으로 해석될 수 있는 장면이다. 하지만 예수를 구원자로 여기며 하느님의 아들로 믿는 전적인 신뢰가 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평판을 아랑곳하지 않고 두려움 없는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예수는 그녀에게 선포한다.

“네 죄는 용서받았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루가 7장 30절)

화가도, 마리아도, 그녀의 배위에 올라와 ’11분’ 남짓 애를 썼던 수많은 남자들 모두에게 필요한 한마디가 아니겠는가. 이런 의미에서 <11분>은 일종의 종교소설로 읽을 수도 있다. 하지만 더욱 보편적인 주제는 뭐니 뭐니 해도 사랑이다. 인간은 어떤 의미로든 결국 사랑으로 구원하고, 사랑으로 구원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①

협동경제의 철학적 이해/14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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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덕(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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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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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더 잘 살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잘 사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기준이 무엇인지를 우리는 잊고 지낼 때가 많습니다. 급격한 산업화와 인구 증가, 그리고 그에 따른 사람들 사이의 경쟁과 다툼 이런 사회의 변화 때문에 정말 잘 사는 삶의 의미를 잊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원래 사람들은 혼자 사는 것보다 여럿이 함께 사는 것이 훨씬 더 잘 살 수 있었던 원형의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 혼자 잘 살아보겠다는 개인주의라는 삶의 위세에 눌려 남들과 함께 하는 삶의 모습은 어느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 희귀한 삶의 양식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원시적인 삶의 양식으로 돌아가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단지 현대라는 역사적 변화를 수용하면서도 사람이 사람처럼 잘 살 수 있는 진정한 길이 무엇인지 찾아보려는 노력이 여전히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처럼 살자고 굳이 떠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환경오염, 문명오염, 정치오염, 그리고 그보다 더 겁나는 개개인의 의식오염이 이미 퍼져있는 이 땅에서 과연 내가 인간답게 살고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지 확신할 수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도 실망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쓸려간 땅에도 그 다음 해에는 풀이 돋아난다. 이러한 풀의 기운을 되살려 풀죽어 가는 삶에 풀먹이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사람처럼 살 수 있는 방법은 아주 간단합니다. 억지로가 아니라 “저절로 그러하고” 또한 남에게 기대지 않는 “스스로 그러한” 그러면서도 더불어 “함께 하는” 자연(自然)을 생각하고 그러한 자연의 모습을 닮아 가려는 삶을 실천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너무 추상적인 방법이 아니냐고 반문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반문이 나올 수 있는 이유는 우리가 오염된 틀에 너무 쉽게 면역이 되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람처럼 살기 위하여 “억지로” 그리고 “남에 기대는” 그리고 “혼자만 살려고 하는” 모순된 삶에서 벗어나면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모두가 도시를 벗어나 시골로 가거나, 산업문명을 거부하여 원시생태로 돌아가자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연의 삶이란 수용할 수밖에 없는 현대사회의 구조 속에서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잘 살 수 있을까하는 작은 희망이고 구체적인 실현가능의 삶을 추구하는 하나의 길일뿐입니다. 그래서 현실 안에서 “억지로” 그리고 “남이 시키고 남에 기대는” 모순된 삶의 벽을 하나 하나씩 깨트리고, 그래서 “함께 하는” 길을 찾아 나서야 합니다. 같이 걷고 함께 마련하며 어울어 숨을 쉬는 그런 작은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삶의 공간은 지리적 공간에 묶여 있는 것이 아니라, 현대라고 하는 문화공간에 적응하는 새로운 방식의 삶의 패턴이기도 합니다.?

사실 자연의 흐름대로 저절로 살고 스스로 사는 삶, 그리고 우리의 자연과 함께 또한 남과 함께 두고두고 잘 살기 위해 필요한 실천의 지식은 아주 간단합니다. 첫째 적게 쓰면 된다. 그리고 둘째로 이왕 썼으면 그 쓴 것을 다시 쓸 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이렇게 간단한 논리를 너무 유치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현대인의 잘못된 생각이고 잘못된 지식입니다.?

그러나 그 잘못은 한 개인 개인에게 있기보다는 우리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합니다. 이러한 방향으로 끌어가기 위해서 공학적이거나 경제학적 접근만으로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연의 환경을 말하기 전에?자연을 죽어 있는 물질로만 보는 기존의 입장이 아니라 자연을 살아 있는 유기체의 하나로서 바라보는 인간의 자세가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환경은 인간학이 우선되어야 하고, 나아가 인간이 모여 잘 살 수 있기 위하여 철학의 중요한 숙제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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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소외와 소비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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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이야기하면서 자신의 개성을 강조합니다. 획일화된 전체 속에서 자기 자신을 하나의 부속품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역사와 지역을 막론하고 인지상정입니다. 그런데 고도의 산업사회에서 나타나는 개인주의의 양상은 조심해서 보아야 할 점이 많습니다. 대중매체서나 길거리에서 이제는 첨예화된 개인주의가 만연해 있습니다. 공동체 의식은 점점 뉴스 감으로 되 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개인의 개성을 찾는 일이 나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러한 매체에서 말하는 개성은 편협한 개인주의와 산업화의 한 단면이고, 상업주의의 농락에 빠진 개성이며 따라서 인간의 고립을 자초하는 이기적 개인주의로 빠질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산업사회 속의 인간은 이제 자기만이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위기 의식을 갖고 있으며, 이러한 위기 의식 때문에 타인에 대한 비인간적 공격을 일삼습니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공동체가 지니는 관계의 끈을 모조리 끊어 버리고 맙니다. 관계의 끈이 없어진 나는 생존에 대한 강박감 때문에 남을 헐뜯고, 남이 안볼 때 쓰레기를 대충 버리고 마는 무임승차하는 사람이거나, 자신을 쉽게 포기하는 자아상실 혹은 편집광에 가까운 자만심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새롭게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나 자신만의 성곽 안에서 자기 자신만을 투영하는 주머니 속의 반사경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역사의 그물망 속에서 내가 속한 위치를 정확히 볼 수 있어야 비로소 객관적인 나의 모습을 세울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삶의 그물망이란 상업주의나 개인주의의 맹목적인 희생물이 될 것을 거부하고 서로가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그런 삶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삶의 양식은 역사와 시대의 아픔을 같이 하는 삶의 태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진 : http://laborhealth.or.kr/28730

물론 이제 현대인은 기계화된 산업화 속에 매몰된 자아를 찾으려는 나름대로의 노력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기계나 사회조직의 도구로서가 아니라 당당히 삶의 주체자로서 행동하고 싶어합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에 많은 현대인은 회사의 과장으로서의 나, 두 아이의 아비로서의 나, 동창회 총무로서의 나, 교회 집사로서의 나 등으로서 답변을 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내가 진정한 나인지를 되물어야 합다. 어떤 역할 속에서의 내가 아니라 나의 삶의 진정한 주체자로서의 나를 찾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철학에서는 어려운 말을 써서 ‘소외로부터의 해방’이라고 말합니다.?

주체적인 나를 찾기 위하여 먼저 할 일은 내가 남과 더불어 살고 있다는 생각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남이란 지금이라는 시점에서 시간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도 포함합니다. 시간적으로 먼 남을 같이 생각하는 일을 우리는 역사성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역사적 타인을 생각하는 일은 환경을 생각하는 출발점입니다. 그 역사적 타인은 나의 자손과 지구 저편 사람들의 자손까지도 포함합니다. 왜 나 하나 살기도 어려운데 그렇게 멀리 있는 남까지도 생각해야 하느냐고 반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야만 나도 비로소 잘 살 수 있는 것입니다. 특히 현대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현대를 보통 정보사회라고 말합니다. 정보사회가 되면서 지구 구석구석이 더욱 가까워진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이는 분명히 과학의 산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교통과 통신의 과학기술 발전으로 인해 나와 남이 더욱 가까워졌습니. 이렇게 과학기술을 통해 외형적으로는 서로 가까워졌는데도 불구하고, 나는 나만의 아성을 더 높게 쌓고 불필요한 소비만을 낳게 하는 거대한 상업주의를 거들어 주고 있을 뿐입니다.?

과거에는 자기가 사는 지역만이 세계의 중심이었고 세계의 전부였습니다. 그 작은 세계 안에서 나는 세계와 일대일로 대화하는 주체성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세계관을 보통 신화적 자연관이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신화의 시대에서 문자의 시대로, 그리고 나아가 정보의 시대로 변화한 가운데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언어로 우리의 자연을 전부 그리려고 합니다.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자연과학이 형성되었고 자연과학을 통해서 자연을 모두 그려 낼 수 있다는 사람들의 오만이 팽배해졌습니다. 그래서 인간 이성의 오만함은 인간이 그릴 수 있는 자연을 갖고 자연을 정복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인간 이성은 근대과학을 낳고 산업화를 이루면서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상업주의 전략에 빠져 이기적 개인주의를 마치 개성의 표현인 양, 자기만 잘났다고 하는 것을 자신의 주체성인 양, 자기 자신을 스스로 고립시키고 남과 벽을 만드는 자가당착에 빠진 것입니다. 이러한 불행의 흔적이 진화되어 사람들의 의식 안에 정착된다면 우리의 미래는 정말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벌써 이러한 의식의 변화는 현대에 이르러 인간위기와 더불어 전지구적인 환경위기를 초래해 가고 있다는 징후가 너무나 분명합니다.?

오늘의 환경위기는 생각보다 너무 심각한 것이어서 우리가 총체적인 인간관을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기술적인 측면에서만 현재의 환경위기를 대처하는 일은 사실 눈감고 아웅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거창하게 인간의 소외문제를 이야기했습니다. 역사성을 팽개치고 관계의 그물망을 찢어버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 그리고 사람과 자연 사이의 끈을 쓸데없이 꼬거나 끊어버리고, 개인들의 경쟁과 탐욕으로 모인 어설픈 집단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과 비판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요즘 경제문제, 사회문제가 하도 심각하니 환경문제는 도외시되는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환경위기의 심각성을 보고하는 각종의 매스컴 보도에도 불구하고 나아지는 것은 없고 오히려 더 나빠지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생각이 진짜로 바꿔져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 그렇게 해왔으니까, 나도 그럴 뿐인데 뭘 야단이야’ 하는 생각이 환경문제에서 정말 심각합니다. 환경문제는 분명히 심각한 위기임에도 불구하고 무임승차가 당연시되고 있고 더욱이 요즘은 경제 회오리에 휩쓸려 거의 실종되어 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그러한 환경위기가 아니라, 오늘의 환경위기를 위기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진짜 위기인 것입다.?

이렇게 우리 사회에 대한 반성과 비판은 앞서 이야기했듯이, 오늘 우리가 안고 있는 환경위기의 원인이 단순한 물질적 오염이 아니라 의식 오염으로부터 야기된 것임을 강조해야 합니다. 문제는 이로부터 어떻게 헤쳐 나올 수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합니다. 과학기술을 통한 환경 개량주의도 그 해결의 작은 방도일 수 있지만 환경위기가 인간위기의 한 단편임을 깨닫기에는 모자랍니다. 결국 궁극적인 환경위기를 극복하는 단초는 우리의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찾아져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교육의 문제, 사회민주화의 문제, 경제 정의의 문제 등을 올바르게 보고 그에 따른 실천의 생활관습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먼저 소비의 문제를 따져보기로 합시다.?

우리는 왜 소비해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일상적인 생활의 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소비는 문제일 수도 없고 문제되어서도 안 됩니다. 소비는 더 나은 문화적 창조를 위한 것으로 연결시켜야 하며 이러한 연결은 저절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소비에 대한 철학과 반성을 통해서 얻어질 수 있습니다. 산림을 무차별하게 깎아 먹는 골프장과 한강변이나 신도시 주변의 러브호텔들, 축사오염, 염색공장의 폐기물, 과대포장, 일회용품 사용을 반대하는 실천적 운동이 굉장히 중요합니다. 동시에 그러한 시설물이나 제품이 나와야 하는 모순된 사회경제구조를 반성적으로 질문하고 비판하는 일도 중요합니다.?

소비 문제를 비판하면서도 문제의 이면을 보지 못하고 표피적 현상에 얽매어 있다면 결국 개발 최상주의라는 환상에 빠지는 꼴이 되고 맙니다. 예를 다시 청소년 문화로 돌려봅시다. 소위 신세대 경향은 개인주의의 한 양상일 뿐입니다. 개인주의는 자본주의의 한 부분이고 다른 각도에서 본다면 구세대가 만들어 놓은 마취제 기능이 성공적으로 나타난 한 사례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요즘 문제가 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과소비 행태는 어른들이 만들어 놓은 자본주의의 함정에 빠진 것과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개인의 소비에 대한 비판도 중요하지만 소비성향의 사회적 풍조를 반성하고 비판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 동안 물질적 풍요로움의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 그리고 지금도 우리는 모든 것이 풍족해서 소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 조종되어 소비한 것입니다. 불행히도 그 누군가라는 것은 고정된 정관사가 아니고 우리가 근대화를 거치면서 왜곡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부정관사의 모습입니다.?

소비 문제와 관련하여 에너지 생산과 절약에 관한 이야기를 마저 해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부존자원 에너지를 계속 늘려가자고 주장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부존자원을 영원히 그리고 무한정 늘려 갈 수 없는 것은 너무 당연합니다. 그런데도 이런 구호를 계속 외치는 일은 많이 가진 사람들이 자신의 물질적 기득권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의도일 뿐입니다. 에너지 생산의 한계는 세 가지 측면에서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물질적인 욕구이며 둘째는 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생산된 에너지이며 셋째는 그 에너지를 사용함으로써 야기된 물질의 오염과 의식의 오염이 그것입니다. 의식의 오염은 새로운 물질적 욕구를 낳게 되며 다시 끝없는 악순환을 반복할 뿐입니다.?

예를 들어 원자력 발전소 건립에 대하여 오로지 앞의 둘째 문제만을 말하면서 절대로 안전하다느니 발전소 건립의 충분한 경제성이 있다느니 하는 말만을 하는 개발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발전소 건립 이후 야기되는 셋째 문제가 중요합니다. 순전하게 경제적 이유만을 따진다해도, 핵발전에서 생기는 저준위, 고준위 폐기물을 처리해야만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미래의 처리비용을 계산한다면 핵발전의 경제적 타당성은 전혀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이미 경제적 이유 때문에 핵발전 시설계획을 전면 포기하게 된 것입니다. 핵발전소 역시 콘크리트 구조물이기 때문에 구조물 수명이 있게 마련입니다. 핵발전소는 수명이 다한 후에 아파트처럼 재건축할 수도 없고 폐기해야 하는데, 이 때 건축 폐자재인 콘크리트 조각 하나하나 모두가 영구히 보존해야할 방사능 누출오염 폐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핵폐기물 처리에 드는 경제적 비용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경제적 이유를 떠나서 원자력 발전소 건립으로 더 많은 물질적인 혜택이 예상되지만 그것은 초과된 소비이며, 그 소비를 향유하기 위하여 더 많은 사회범죄가 일어날 수도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도덕과 윤리의 파괴로까지 이어질지 모른다는 생각은 단지 우려에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의식의 오염은 핵 쓰레기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회적 문제를 일으킬 것이 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에너지를 갖고 또 얼마나 많은 ‘문명의 잔해’를 만들어 낼 것인지 생각해 보면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입니다.?

이러한 악순환의 고리가 어떤 방향으로 나갈지 정말 알 수 없습니다. 많은 개발주의자들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 유토피아로 생각하고 싶겠지만 지금 같은 소비형태와 문화양상으로 비추어 볼 때 결코 낙관적으로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국가부도의 위기에 이어서 계속되는 경제 불황의 근본 원인은 위기를 낳은 사회적 요인에 대하여 근원적인 치료를 전혀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미래를 낙관하는 일은 더 큰 위기를 초래할 수 있습니다. 사회의 총체적인 상황을 무시하고 오늘의 경제위기를 단순히 경제 정책이나 단순이론으로만 풀려는 것은 진정한 문제해결의 방식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의 경제난국을 푸는 궁극적인 문제 해결은 경제현장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경제단위인 주체인 소비자의 맹목적인 소비 행태들을 스스로 반성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러한 소비의 맹목성을 부채질한 기업의 소비 유도논리를 비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경제문제의 해결은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갖고 있는 의식의 오염을 정화시키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들에게 만연되어 있는 의식오염을 정화하기 전에는 결코 정상적인 경제 정착이 어렵다는 것은 너무 뻔한 일입니다.?

환경문제는 총체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합니다. 환경문제에 대한 사회구조적 이해 없이 개인의 환경구호만을 강조하면 지하철과 공원과 길거리는 깨끗해질지라도 기업의 일회용 포장지와 화학적 제품은 더 늘어날 것입니다. 도쿄의 길거리는 정말로 깨끗하지만 1인당 일회용품 사용량이 세계 최고라는 사실을 잘 새겨들어야 합니다. 쓰레기 분류가 잘 되기는 하지만 사회의식이 결여됐다면, 지금의 검측기로 측정이 어려운 다이옥신은 소각로 굴뚝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며, 원자력 에너지가 청정에너지라는 정부의 홍보가 승리하여 여기저기 핵발전소가 들어설 것입니다. 그리고 님비현상을 단순한 지역이기주의라고 계속 몰아붙이면서 행정편의주의로 가거나 기업가의 손을 들어 줄 것입니다. 그리고 폐기물 이동금지협약은 유명무실해져서 국가간 기술이전과 경제원조라는 명목 아래 힘의 논리와 경제논리가 우선한 특정폐기물의 보이지 않는 이동이 더할 수 있습니다. 소비에트 붕괴 이후 세계는 미국 중심의 시장구조로 재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FTA 체제 국제경제의 흐름은 시장경제기준을 몇몇 힘 있는 선진국에 맞출 것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지역논리와 전체논리 사이의 괴리는 경쟁과 이기주의, 약육강식과 물질만능주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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