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반의 사랑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살다 보면 바뀌는 것도 있고,?안 바뀌는 것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한국사회가 지난 한 세대 동안 너무 숨 가쁘게 달려 왔기 때문에 당연히 외형적인 변화는 말할 필요도 없다.?너무 다이나믹하다 보니 한?2-3년만 지나도 도시의 외관이 달라지고 도로가 달라지고 건물이 달라지는 경우가 숱하다.그러다 보니 그 도시에 사는 사람들의 생각이나 마음도 당연히 크게 바뀐 것 같다.?크게 달라진 것 중 하나가 동성애에 대한 태도이다.?종종 토론 주제로 동성애를 다루는 경우가 있는데,?의외로 학생들이 남녀 불문하고 동성애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하다는 것이다.?우리가 대학 다닐 때는 게이나 레즈비언이란 이름만 들어도 소름이 돋고 외계인 취급을 했던 것과는 천양지차다.내가 대학 시험에 합격을 하고 겨울에 고대 타임 반 동계 특강을 다닌 적이 있다.?이 타임 반은 상당히 유명해서 동계 강좌인데도 불구하고 참가자들이 많았던 것으로 기억했다. <타임>지를 선배들이 읽고 설명해주는 형태로 진행된다.?그런데 그 때 타임지 표지 모델로 여자?2명이 팔짱을 끼고 걷는 모습이 나온 적이 있다.?그 중의 한 여자는 가방을 들고 바지를 입고,?다른 여자는 선글라스를 끼고 스커트를 입은 것으로 기억된다.?타임즈 표지 모델이 레즈비언을 처음 화두로 올렸던 것이다. 1976년이니까 미국 사회에서도 동성애자들이 사회의 주목을 받던 초기였으리라.?그 때 강독을 이끌던 고 학번 선배가 이 중에 누가 여자 역할을 하고 누가 남자 역할을 하는가를 맞추어 보라고 주문하는 것이다.?그 당시 나는 그런 장면이 너무나 희한하고,?또 그런 것들이 논쟁거리가 된다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그럼에도 거진?4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기억을 하는 것을 보면 그만큼 그 장면이 인상적이었음을 반증한다.?그 뒤로 별로 그 문제를 생각하지 않았다.?그러다 박통이?10.26?사태로 죽고 나서 교회를 내 발로 찾아간 적이 있다.?지금도 인상적인데 그 교회의 남성 반주자가 피아노도 잘치고 얼굴도 이쁘장한 사람이었다.?신앙생활도 아주 잘해서 교회에서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인기가 많았던 사람이다.?그 사람이 당시 중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여러 명 건드렸다는 소문이 돈 적이 있다.?혈기방장하던 시절이라 그 문제를 덮지 못하고 교회와 각을 세우다가 혼자 나온 경험이 있다.

그런데?90년대 중반 이른바?PC?통신이 한창 유행할 때였다.?알 만한 사람들은 알겠지만 그 당시 하이텔이나 나우누리 같은 통신망들의 대화 방은 밤만 되면 북적거리던 시절이다.?대화 방에 가면 숱하게 많은 남자와 여자들이 밤을 새워 밀담을 즐긴다.?입담 좋으면 여자 만나기도 쉬워 이른바 번개도 유행했던 것으로 안다.?그런데 어느 날?’이반’이라 이름붙인 대화 방에 들어가려니까 일반인지 이반인지 묻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모 몇 학년 몇 반 정도로 생각해서 그냥 일반이라고 하니까 일반은 안 된다고 하면서 입장 불허하는 것이다.?하도 이상해서 나중에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그곳은 동성애자들의 방이라고 한다.?일반은 일반인을 말하고,?이반은 그냥?2반이 아니라 일반을 일탈한?’이반’이라는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그 사정을 알고는 그 방 근처만 가도 머리가 쭈뼛 서는 느낌을 받았다.?그만큼 당시의 우리 세대에게는 동성애는 여전히 낯선 코드이고,?그만큼 편견도 적지 않다.?이런 편견을 극복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 지나서이다.?이 당시?e-Mail을 통한 소통과 연애는 톰 행크스와 맥 라이언의?’You’ve got a mail’에 잘 나타나 있고,?대화 방은 전도연이 주연한?’접속’처럼 아름다운 추억의 장소로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호불호는 문화적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다.?서구에서 유대 기독교의 영향을 받던 시기는 동성애에 대한 거부감이 크다.?가부장적이고 남성적인 중심적인 사회에서 동성애는 악마적이고 자연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된다.?서구에서도 지금까지 가장 동성애에 대해 반대가 심한 곳은 기독교적 전통이 큰 곳에서이다.?기독교가 서구의 중심에 자리 잡기 전만 해도 동성애에 대해 대단히 관대한 문화가 유지되고 있었다.?특히 그리스 문화에서는 성인 남자가 어린 미소년과 사귀는 일종의 원조교제가 유행처럼 번지고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았다.?이런 문화는 철학적 정당성도 얻고 있었다.?남녀 간의 사랑은 육체를 매개로 하는 저급한 욕망에 기초해 있지만,?성인 남자와 미소년의 관계는 순수한 영혼의 교류라는 것이다.?그 만큼 더 사랑의 이데아에 가깝다는 이야기일 터인데,?일찍부터 이성이 가방 들고 감성의 욕망을 쫓아다녔다는 증좌일터이리라.?소크라테스의 주변에 늘 젊은이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그 중에 한 사람이 나중에 그리스의 유명한 정치인이 되었던 알키비아데스이다.?그는 명문가 출신이고 용모도 수월하고 명민한 두뇌의 소유자이다.?그런 그가 소크라테스를 대단히 연모한 것이다.?한 번은 둘이서 해변 가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있었다.?하지만 이 사랑은 짝사랑이다.?파도소리가 들리고,?별이 보석처럼 밤하늘을 장식한 해변 가에서 사랑하는 연인이 밤을 새운다고 상상해보라.?얼마나 가슴이 설레 이겠는가??알키비아데스도 그런 대단한 썸씽을 기대했을 것이다.?그런데 돌부처 같은 우리의 소크라테스는 동이 틀 때까지 우뚝 서서 꿈쩍도 안하고 동쪽 하늘만 바라다보았다고 한다.?그러니 이제 막 사랑에 눈뜬 젊은 알키비아데스의 실망이 말할 수 없이 컸다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플라톤의?『향연』에 보면 그가 여러 사람들이 토론하는 곳에서 노골적으로 소크라테스에 대한 연정을 토로하는 장면들이 나온다.?그만큼 동성애가 일반화되어 있다고 할 것이다.

20세기의 가장 뛰어난 철학자의 한 사람인 비트겐슈타인이 동성애자라는 이야기도 낯선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이 집안사람들은 대단한 천재들이고 예술적 재능도 타고 났다.?오스트리아 철강 재벌인 탓에 그의 집에는 늘 당대의 뛰어난 재사와 예술가들이 북적거렸다.?하지만 그의 형제들 대부분은 비극적 운명으로 일찍 죽거나 자살을 하고 또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클림트의 에로틱한 그림에는 그의 누이동생이 모델로도 나온다.?유명한?’볼레로,?왼손을 위한 피아노 협주곡’은 전쟁에서 오른 팔을 잃고 돌아온 그의 형인 피아니스트를 위해 작곡가 라벨이 헌정한 곡이다.?약관?21살에?1차 세계대전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틈틈이 메모로 썼던?『논리-철학 논고』라는 책은?20세기 영미 분석철학의 성전 역할을 하기도 했다.?철학 도들의 입에서 끊임없이 회자되는 이 책의 명제 몇 가지. “언어는 세계의 그림이다.” “언어의 한계는 세계의 한계이다.”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하라.”?거의 잠언 수준이다.?집안 내력 때문인지 비트겐슈타인은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우울한 감정을 떨치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캠브리지 대학의 강의를 마치고 집으로 오는 도중에 사창가가 있었는데 종종 그곳을 들렀다는 보고도 있는 것을 보면 동성애자라는 것은 확증된 사실만은 아닌 것 같다.?이 문제는 지금도 논란이 많다.?한 때 포스트모던 철학의 기수로 한국에서도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미셸 푸코도 동성애자이다.?그는 친 동성애자 운동,?소수자 차별 반대 운동을 주도하던 행동하는 철학자이기도 했다.?그는 예일 대 교환교수로 있을 때 종종 게이 바를 들렀는데 결국?1984년에?AIDS에 걸려 죽기도 했다.?그는 근대의 정신과 몸을 지배하는 지식과 권력 체계를 비판하는 일에 주력했다.?근대의 합리적 이성이 이성과 반이성을 나누고,?광기를 추방하고,?의학적 지식이 이런 지배의 도구 역할을 한다는 것을 고발했다.?감옥과 병원의 탄생,?그리고 학교의 탄생이 근대적 지식의 담론 속에서 동일한 출생지를 갖고 있다는 것을 밝히기도 했다.?미시 권력의 네트워크와 생산적 권력의 개념은 한국 사회를 분석하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광기의 역사』,?『감옥의 탄생』,?『감옥의 탄생』등은 많이 읽히는 그의 주저들이다.

80년대 후반에 나온 영화?<필라델피아>는 동성애자에 대한 사회적 차별을 고발한 빼어난 법정 영화이다.?로펌의 잘나가는 변호사인 주인공 톰 행크스가 동성애자라는 것이 밝혀지자 업무 미숙을 이유로 부당 해고 당한다.?그 당시만 해도?AIDS?환자에 대한 무지와 불신이 커서 동료 변호사들도 그의 소송을 대리하려고 하지 않는다.?편견으로 주저하던 흑인 변호사 댄젤 워싱턴이 사건을 맡으면서 톰 행크스와 함께 로펌을 상대로 진행하는 법정 공방은 법과 정의가 무엇인가를 강렬하게 일깨워준다.?배심원 측이 회사 측의 부당 해고를 인정하면서 원고의 손을 들어주자 법원은 원고에 대한 피해배상 외에 우월적 지위를 남용하던 피고에 천문학적인 징벌적 손해 배상을 선고한다.?왜 한국의 법정에서는 이 징벌적 손해 배상 제도가 도입되지 않는가??이 영화를 보다 보면 동성애자를 감싸주는 가족들의 태도가 인상적이다.?한국의 가족에서 동성애자임을 커밍 아웃하면 여전히 맞아 죽을 일이고 쫓겨날 일이다.?사실 그들도 우리와 다르지 않은 사람이고,?다만 성적 기호만이 다를 뿐이다.?이러한 차이가 차별의 근거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데 종종 우리들의 편견은 그것을 잊고 있다.?이 영화의 빼어난 장면 중의 하나가 최종 판결 전에 죽음을 예감한 톰 행크스가 변호사 워싱턴 앞에서 마리아 칼라스의?”La mamma morta”(어머니는 돌아가시고)를 들으면서 몸으로 연기하는 장면이다.?안 본 사람은 꼭 한 번은 볼 일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3b0p9mTJOJI?변호사가 동성애자 의뢰인에 진정 마음을 열고 공감하는 계기가 되는 아리아다.?동성애자들의 빼어난 예술적 취향을 보여주려는 뜻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사랑의 종착역은 결혼이다.?사랑이 사랑으로만 끝나면 너무 무책임하지 않은가??모든 인륜지 대사의 기초는 사랑하는 사람끼리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나는 굳이 남자와 여자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했다.?동성 결혼이 우리나라에서는 인정이 되지 않고 있고,?세계적으로도 네덜란드와 벨기에,?그리고 미국의 매서츄세츠 주 등 아직은 소수이다.?문화적으로 진보적이라고 생각되는 파리에서도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시위가 몇 달 전에 격렬하게 일어난 적이 있을 만큼 아직은 거부감도 크다.?하지만 동성결혼의 합법화를 인정하는 것은 세계적 추세이다.?멀지 않은 미래에는 우리 역시 이 추세를 거부하기 힘들지 모르겠다.?이미 영화감독 김조광수는 공개적으로 동성결혼을 선언한 적이 있다.?그렇다면 결혼을 남녀로 국한시키는 혼인법이나 가족법,?기타 이와 관련된 친족 상속법,?민법 등 많은 법 개정도 불가피할지 모르겠다.?미래의 가족은 우리가 그간 알아 왔던 형태와는 상당히 달라질 것이란 생각이 크다.?일단 결혼이란 이성간의 일이라는 것만이 아님을 받아들여야 될 때가 올 것이다.?이 부분은 문화적인 인정과 사회적인 합의가 있기 까지 진통도 클 것이다.?특히 기독교는 신의 섭리,?창조 질서 등을 앞세우면서 반대가 심할 것이다.?동성 간의 결혼을 인정할 때2세 생산도 과거와는 크게 다르게 이루어질 수 있다.?입양과 시험관 아기,정자와 난자의 기증 및 매매, 2중 대리모와 대리부 등 이성 간의 결혼에서 생각하기 힘든 방식이 일상화될 것이다.?무엇보다 자식에 대한 부모들의 과도한 집착과 교육에 대한 태도도 많이 달라질 것이다.?미래에는 교육과 관련한 한국사회의 고질적인 병폐가 동성결혼으로 인해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고 본다.?이러한 변화가 긍정적이 될지 아니면 부정적이 될지는 지금 예단하기는 힘들겠다.?덕분에 우리 시대는 죽을 때까지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고민해야 할지 모르겠다.?무조건 귀를 닫으면 꼴통 보수요,?꼰대 소리를 듣지 않겠는가?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2

조은평(건국대)

 

 

3. ‘소비의 사회’와 현대인 : ‘나는 소비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소비사회’라는 규정에 대해>

– 소비사회의 문제는 오늘날 여러 철학자나 사회학자들에 의해서 주목을 받고 있다. 예를 들어 지그문트 바우만 같은 사회학자는 오늘날의 소비사회를 자본주의가 만들어 낸 일종의 환상의 공동체라고 보고 있다.

조은평 표4

– 일단 ‘소비사회’라는 규정은 ‘상품을 대량으로 소비할 수 있게 된 사회’를 의미한다. 2차 세계 대전 이후 세계 경제의 고도성장은 기존의 자본주의와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를 탄생시켰는데, 프랑스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Jean Baudrillard)는 이것을 ‘소비의 사회’라고 지칭한다.
– 하지만 단순히 대량생산에 기초해서 대량소비가 경제적으로 가능해진 풍요한 자본주의 사회라는 의미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보드리야르는 경제학에서 정의하는 소비개념과는 다른 소비개념을 통해 현대사회를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상품(사물)의 소비란 ‘사용가치’의 소비를 포함하면서도 그것을 뛰어 넘는 어떤 행위이다. 그는 사물을 기호로 파악하고, 사회를 의미작용의 체계로 해석하면서 소비 행위를 특정한 상품(사물)에 대한 욕구가 아닌 차이에 대한 욕구로 규정한다.(‘사용가치’에서 ‘기호가치’로!)

<소비사회가 개인에게 가져온 변화>

1) 상품미의 무한 추구.
– 현대 소비 사회에서 사람의 취미를 형성하는 것은 ‘예술미’라기 보다는 ‘상품미’다. 상품은 이런 미적 가상을 불러일으키는 형식이자 자본의 수단이며, 소비자는 상품미에 현혹되어 욕망을 가상적으로 충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끊임없이 욕망의 허기가 생긴다.

2) 개인의 욕망구조도 변화.
–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일과 생산을 통해 채우는 것이 기본 전략이었지만 현대 사회에서 욕망 구조는 놀이와 소비를 채우는 전략으로 변모했다. 놀이를 통해 채우는 욕망은 이성이 아니라 감성, 의식이 아니라 무의식에서 생겨난다. (일과 생산 -> 놀이와 소비)
– 소비 사회에서 사람들은 상품의 ‘사용 가치’가 아니라 ‘기호 가치’를 소비한다. 사용 가치는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지만 기호 가치는 지위나 심리의 차이를 표시하는 수단이다.
– 그렇기에 소비 사회에서 욕망의 논리도 차이의 논리다. 소비 사회에서 욕망은 특정 사물에 대한 욕망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욕망이다.

< ‘소비사회’라는 현실을 가장 잘 보여주는 몇 가지 사례들>

1) 미국의 세계 지배를 상징하던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이 구멍이 뻥 뚫려 산산이 부서지는 것을 목격하고는 충격을 받아 얼이 빠져 버린 미국인들에게 당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보냈던 첫 메시지. -> “다시 (평상시처럼) 쇼핑하는 일로 되돌아가라to go back shopping!”
(cf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의 한국정부 관련 기사 “정부, 세월호 참사후 처음 ‘소비 둔화’ 우려 진단, 파이낸셜뉴스, 2014. 5. 6 / 현오석 부총리, “세월호 참사 후 서비스업 다소 부정적영향”, 아시아경제, 2014. 5. 6)

2) 아이 여성(child-women)의 출현 : 아동기에 대한 상업화!
– 대부분의 시간을 자기 침실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옷을 입어보거나 엄청나게 많이 수집해 놓은 구두나 핸드백을 신어보거나 걸쳐보면서 보내는 어느 소녀의 이야기. 더구나 당시 그녀는 가슴 성형수술을 위해 돈을 모으는 중이었지만, 좀 더 자신의 우상인 모델 조던처럼 되기를 꿈꾸면서 그 수술을 기다리는 일조차도 무척 힘들어했다는 이야기.
– 익숙하게 들었을 법한 이야기. 그러나 당시 그 소녀의 나이가 10살!
– 더구나 한 영국의 한 통계에 따르면 대다수의 10세 소녀들은 ‘헤어스타일이나 패션, 화장에 사로잡혀 있다’는 점. 또한 그 소녀들 중 26퍼센트는 ‘자신들이 별로 날씬하지 않다고 느끼면서 몸무게 때문에 고민’. 말하자면 점차 어린 소녀들은 ‘자신들이 충분히 날씬하지도 않으며, 충분히 아름답지도 않다’고 느끼면서 ‘자신들의 모습을 잡지 속에 인쇄된 우상(아이돌)들의 그 불가능한 이미지’와 비교한다.

3) 어린 시절부터 너무나 익숙해지는 쇼핑과 쇼핑몰 문화?
– 어린 시절부터 갖고 노는 쇼핑카트!(뽀로로 쇼핑카트)

4) 쇼핑몰이라는 공간의 전략.
– 백화점과 쇼핑몰 건물에서 상품이 본격적으로 진열된 곳에 공통적으로 없는 그 무엇은 뭘까?
– 광고처럼 모든 쇼핑몰의 공간(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도 포함해서)은 철저하게 이성적이고 전략적으로 구성된 공간. 그처럼 마케팅 원칙에 따라 구성된 공간에 들어선 소비자는 당연히 포획당할 수밖에 없다. (참조 EBS 다큐프라임 ?자본주의? 5부작 중 2부 ‘소비는 감정이다’)

조은평 사진2-1

 

4. ‘소비 사회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가능할까?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의 약국 속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아니 왜 탈출해야 할까? 이렇게 좋은 자유로운 약국에서 말이다. 당연히 이런 의문이 들 듯.

1) 우선 ‘왜 탈출해야 할까?’
– 사실 소비를 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의 소비사회처럼 결국에서는 구매력에 따라 위계가 정해져 있을 수밖에 없고, 또 ‘소비의 자유’를 누릴 수 없는 그 누군가의 희생에 기초해서 사회가 유지되고 있다면, 이러한 사회는 ‘소비의 자유’라는 이데올로기에 지탱되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일 것이다.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다른 세계’를 꿈꾸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해야 한다.
– 또한 ‘소비의 자유’를 충분히 누리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사실 스스로 주체적이고 자유롭다고 느끼지만, 이는 그저 이데올로기적인 환상일 뿐이다. (환상의 공동체) 좀 더 다른 형태의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도 탈출을 고민할 필요가 있다.

2) 그렇다면 과연 어떻게 탈출할 수 있을까?
– 소비사회라는 동굴, 쇼핑몰이라는 동굴에서 빠져나오기(?)
: 그냥 소비를 줄이고 검소하게 살기? 과연 가능할까?
: 합리적 소비자로 생활하기?
: 소비자 운동을 통해 저항해보기. 불매 운동(예. 광고 불매 운동, 녹색 소비자 연대 등등)
: 소비 하지 않기? 아마도 가장 두려운 현상일 것!! 예) 9.11 이후 부시 대통령의 말!
자본 – 상품 – (불려진) 자본( M-C-M’ / C-W-C’)
– 말하자면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의 순환 운동’에서 탈출하는 것이 과연 가능할까?
– 아마도 대부분 회의적일 것. 아니면 너무 이상적이고 공상적인 이야기로 여길 듯.
– 하지만 분명한 것은 ‘소비사회’를 유지하고 만들어 낸 ‘자본의 흐름’을 변혁하는 문제를 생각하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탈출은 불가능하다는 점.
– 결국 이것은 ‘정치적으로 앞으로의 세계를 어떻게 바꿔나가야 하는가’라는 실천적인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 그럼에도 일단 ‘탈출을 가능하게 해줄 지점’을 생각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 사실 우리는 자본주의 생산-소비 체계를 정말로 어쩔 수 없는 당연한 현실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런 현실을 그대로 따라 쫓아가야만 생존할 수도 있고, 어쩌다 성공도 할 수 있는 그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의 역사 500만년을 하루 24시간으로 환산했을 때 자본주의가 출현한 시간은 23:59:56! EBS 다큐프라임)
– 이데올로기는 이제 더 이상 자본주의 시대에서는 그저 잘못된 현실 인식이나 단순한 오해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허위의식’이라는 과거의 이데올로기 개념처럼 말이다.
– 오히려 슬라보예 지젝의 말대로,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야 한다. 믿음은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치 티벳 승려들이 기도할 때 기구를 돌리는 것처럼, 교회에서 기도하고 예배하는 의식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믿음을 형성하고 확고히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본의 시스템이나 위계질서의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면서(또 여러 역할을 수행하면서) 우리는 현재의 동굴 상황이 어쩔 수 없는 현실이라는 믿음과 확신을 얻는다.
– 다시 말해 현재의 소비 시스템(소비사회의 전략)을 따라 소비를 수행하면서, 우리는 되풀이해서 ‘소비사회’라는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는 셈이다.
– 그렇다면 역으로 우리는 다시 이런 ‘이데올로기의 수행성’에 주목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결국에는 기존의 시스템이 요구하는 삶의 방식과는 전혀 다른 삶의 형태, 삶의 관계들을 형성하려는(수행하려는) 노력 속에서 또 다른 탈출구를 찾을 수도 있지 않을까?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다원적 맑시즘과 그 미래 – 에티엔 발리바르의 대담에 다녀와서 [베를린에서 온 편지 4]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프랑스 정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tienne Balibar)가 베를린을 방문했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설렜다. 나는 이미 2011년 5월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열린 국제 심포지움에서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자신의 강연만 마치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며칠간 이어진 다른 강연을 거의 대부분 참석해 청중석에서 모든 연사들에게 진지하게 질문하고 자신의 생각을 피력하던 진지한 노학자의 모습을 나는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의 베를린 일정 중 가장 이목을 끌었던 것은 6월 13일 열린, 그와 그의 오랜 지적 동료이며 베를린 자유대학교(FU Berlin) 철학과 명예교수인 (그리고 나의 부지도교수이기도 한) 프리더 오토 볼프(Frieder Otto Wolf) 사이의 대담이었다. 두 노(老) 거장들의 우정어린 대화 속에 진행된 이번 행사는 발리바르가 1993년 집필한 책 『맑스의 철학(La philosophie de Marx)』이 오토 볼프의 변역으로 최근 독일에서 새로 출판된 것을 기념해 베를린 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 지역에 위치한 인문학 서점 b_books에서 열린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사진1>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대담이 열린 b_books

발리바르에 대해서야 국내에 이미 잘 알려진 터라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겠지만, 프리더 오토 볼프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그는 독일에 얼마 되지 않는 알튀세르 학파의 일원으로 1970년대 이래로 알튀세르, 발리바르와 지속적인 교류 속에서 자신의 사상을 전개해 나갔으며, 최근에는 알튀세르의 『자본을 읽는다(Lire le Capital』를 최초로 독어로 완역(기존의 번역은 영어판, 한국어판과 마찬가지로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의 글만을 번역했을 뿐 랑시에르, 마슈레 등 다른 저자들의 글은 번역되지 않았으며 숱한 오역으로 많은 지적을 받아왔다)했을 뿐 아니라, 알튀세르 전집을 편집, 발간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실천에도 깊이 관여하고 있어서 1984년부터 89년까지, 그리고 1994년부터 99년까지 두 차례 녹색당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적이 있으며, 현재 독일 휴머니즘 연합(Humanistischer Verband Deutschlands) 의장을 역임하고 있다.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사진 2> 에티엔 발리바르(좌)와 프리더 오토 볼프(우)

발리바르는 최근 부흥하고 있는 새로운 조류의 맑스주의 정치철학들(지젝. 바디우, 랑시에르 등)에 대해 언급하며 자신의 강연을 시작했다. 오늘날 이 철학자들의 부흥과 대조적으로 자신이 『맑스의 철학』을 집필한 1993년은 동구권의 붕괴 이후 ‘맑스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급속도로 지적, 실천적 영역에 확산되고 그 자리에 푸코, 페미니즘, 후기식민주의 등 새로운 이론 조류들이 부상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러한 상황에서 ‘21세기에 맑스는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자신의 저작 의도였다고 말했다.

이러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동시에 20세기에 지배적이었던 공식적 맑스주의 조류들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일이다. 그는 기존의 전통적 맑스주의 철학 조류의 결정적 문제는 맑스의 ‘철학’을 다른 저작들로부터 고립시켜 이해하려 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치경제학 비판’의 경우 물신주의를 비롯한 일부만이 논의 주제로 부각되었을 뿐이며, 이러한 몇몇 철학적 관점들이 맑스의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분석으로부터 분리되어 고찰되었다. 이러한 공식적 맑스주의의 극단적으로 위험한 사고는 특히나 구 소련을 중심으로 맑스주의를 ‘체계화’하는 것으로 귀결되었으며, 발리바르 자신은 이에 대항하기 위한 ‘반체계적 서술’에 몰두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공식 맑스주의의 체계화 경향이 그 물질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는 맑스주의라는 유기적인 이념과 담론이 당형태의 운동으로 고착화되는 데에서 발견된다고 지적했다. 자신의 ‘반체계적 서술’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그는 원래 이 책의 제목을 “맑스의 철학들”이라는 복수형 표현으로 정하려고 했다고 한다. 이는 맑스의 사상이 하나의 동일한 체계로 고정될 수 없으며, 따라서 맑스의 사상을 체계화하려는 모든 시도에 저항해야 한다는 그의 사고가 반영된 것이다. 그러나 ‘철학’이라는 단어를 복수로 사용하는 것이 워낙 일상적 언어용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편집자의 강한 반발에 부딪혀 현재와 같은 단수 표현으로 제목이 정해졌다고 한다.

이처럼 발리바르는 ‘맑스주의’라는 굳어진 사상체계도, 또 맑스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시도도 모두 거부한다. 그의 관점에서 맑스 이론의 대안은 오히려 맑스의 사상 자체를 ‘변형’하는 데에 있다. 발리바르는 미셸 푸코가 『사물의 질서』에서 맑스의 경제학 비판을 (근대)철학적인 역사 개념이자 19세기적인 진화론 패러다임으로 규정하며 비판한 이래로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이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고 말한 뒤, 오늘날 자본주의가 전 지구적으로 승리를 거둔 상황에서 자본주의 비판으로서 맑스의 사상은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는 오늘날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맑스가 말한 것으로 돌아가자’가 아니라 ‘맑스가 제공한 도구들을 통해 다시 한 번 시작하자’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맑스가 자본주의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관념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했다. 결국 발리바르에게 있어 ‘맑스의 현재성’에 대한 물음은 ‘다원적 맑시즘’의 재구성이라는 과제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어진 대담에서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이 책이 갖는 가장 큰 매력은 ‘단수로서의 철학’이라는 관념에 종말을 고했다는 데에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특성 상황에 대한 반성적인 이해로서 다수여야 하며, 이는 정치적 행동과 관련을 맺으며 실천적 결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철학은 마지막 단어를, 궁극적인 답을 갖지 않는다. 언제나 철학에 의해 사유되지 않는 것, 담론화되지 않는 것이 존재하기 마련이며, 반성활동을 통해 이를 도그마로 만들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다.

또 그는 알튀세르와 발리바르에 의해 1960년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자본을 읽자’ 운동의 성과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지적 운동은 맑스 이론을 단지 재발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맑스 사상의 재구성에 기여했고 이는 특히 (헤겔을 차용한) 기존 맑스주의의 논리적 형태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져, ‘상이한 사회에 대한 상이한 지배분석의 필요성’이라는 결론으로 나아갔다.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사진3> 발리바르의 강연을 듣기 위해 온 청중들

청중토론 시간에 나는 지젝, 바디우, 네그리, 아감벤 등 현재 유행하고 있는 새로운 형태의 맑스주의 내지 비판적 철학이론들에 대한 바디우의 견해를 물었다. 나는 (발리바르의 제자이기도 한) 진태원 선생이 한국에서 이 철학 이론들을 “좌파 메시아주의”라고 비판한 뒤 촉발된 논쟁을 발리바르에게 소개하고 이에 대한 그의 의견을 듣고싶다고 말했다. 발리바르는 나의 질문이 매우 중요하다며 친절하게도 무려 20분가량을 할애해 아주 상세히 이 문제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밝혀주어 나를 감동시켰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새로운 조류의 비판적 이론들을, ‘맑스주의의 죽음’이 선언된 상황에서 철학적 담론의 에너지를 결정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훌륭한 시도들이라고 규정했다. 따라서 이 저자들 중 누가 옳은 사람이고 누가 거부해야 할 사람인지를 따지는 것은 어리석인 일이다. 발리바르는 이 저자들이 모두 훌륭하고 발리바르 자신보다 뛰어나다며 (매우 겸손하게) 그들의 이론들을 옹호했다. 그러나 이들이 훌륭한 이론가들이라고 해서 그들의 사상 전체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덧붙였다.

그렇다면 이들 사상가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하게는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에 있어서 그 사상적 자원이 다양할 수 있다는 점이 언급됐다. 이는 맑스만이 비판의 유일한 원천이 아니라는 그의 모두발언 결론과 연결되는 주장이다. 즉, 맑스의 이론을 계승하려는 시도들은 푸코, 한나 아렌트, 들뢰즈 등 다양한 형태의 담론들로부터 얼마든지 비판적인 에너지를 수용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정치적 상상력’을 확장할 수 있다. 이는 궁극적으로, 단순화된 기존 1세대 맑스주의의 변형과 재창조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늘날 맑스의 사상을 계승하려는 사람들은 전통적 맑스주의와 달리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을 사고해야 한다. 이 “정치적인 것의 이질성”은 우리가 맑스 자신으로부터 수용해야 할 어떤 것이다.

‘메시아주의’에 대해서 발리바르는 맑스 자신의 사상에도 ‘메시아적인 것’의 요소, 즉 에른스트 블로흐가 “희망의 원리”라고 부른 것이 깃들어 있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메시아주의적 흐름은 궁극적으로 인간 자신이 새로운, 다른 형태의 인간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종말론적 열정의 표현이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메시아주의적인 열정으로 정치적인 것에 대한 분석을 대체하고 현재의 상황을 보상받고자 하는 시도 자체에 대해서 자신은 매우 비판적이라고 고백했다.

이어 내 질문에 대해 프리더 오토 볼프 역시 자신의 생각을 덧붙였다. 그는 1960년대 학생운동의 경험을 소개하며, 다양한 형태의 메시아주의적인 정치 조류들은 실천적으로 반드시 분파주의에 빠지게 된다고 말하면서 여기에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최근 유행하고 있는 철학 이론가들의 사상은 각자가 가진 장점들이 매우 다양하기 때문에 각 이론가들의 장점들을 중첩해서 이해할 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나는 맑스 이론의 현재화와 재구성은 무엇보다도 도그마적 체계화에 대한 거부와 다원성에 대한 인정, 그리고 자본주의 비판의 사상적 원천을 넓게 개방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발리바르의 설명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맑스주의의 다원성’에 대한 강조는 맑스의 사상을 하나의 체계로 고정시키고자 했던 20세기의 공식적 맑스주의와 결별할 수 있는 결정적인 출발점일 것이다. 다만 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판단에 대해서는 몇 가지 점을 덧붙이고 싶다. 맑스주의와 메시아적 사상의 결합은 맑스주의를 기독교 신학과 조화시키려고 했던 블로흐뿐 아니라 벤야민과 아도르노 같은 유대인 지식인들에 의해 유대교적 메시아주의의 이념을 변혁적 정치와 결합하려는 시도들에 의해서도 이미 선취된 것이었다. 벤야민은 그의 “역사철학 테제”에서 사적 유물론과 신학이 결합을 새로운 역사 인식의 필수적 과제로 제시한 바 있다. 이는 물질적 이해관계에 의해 조직된 사회와 이 이해관계를 둘러싼 투쟁들 그리고 이 투쟁들로 구성되는 역사에 대한 유물론적 분석이 현존의 ‘초월’이라는 신학적인 이념과 결합되지 않으면 손쉽게 현재 상황에 대한 타협과 옹호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역사적 경험(특히 제2인터내셔널의 교조화와 소련에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체계화)으로부터 비롯한 성찰이다. 아도르노 역시 유물론과 신학은 그 목적에서 일치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헤겔의 ‘규정적 부정(bestimmte Negation)’ 개념을 구약성경에서 강조되는 ‘우상숭배 금지원칙(Bilderverbot)’과 결합시켜서 현실의 모순적인 논리를 비판하고 극복할 수 있는 비판이론의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한다. 즉 비판이론은 긍정적인 규범적 당위(예컨대 칸트)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기존 사회에 존재하는 규범들이 현재의 사회에서 실현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실현이 사회의 구조적 결함으로 인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즉 내재적 비판으로써만 진정한 비판을 수행할 수 있다. 이 내재적 비판의 궁극적인 목적은 그러나 현존하는 사회의 변화, 즉 ‘초월’에 있는 것이다. 나는 유물론적 이론이 이렇게 초월에 대한 이념을 수용함으로써만 일관된 비판적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쉽게 물리쳐선 안 된다고 본다. 이 때문에 나는 정치를 메시아주의로 환원하는 것이 위험하다는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의 생각에 동의하지만, 메시아주의적 요소와 유물론적 정치 이론이 결합되는 것(이는 다른 말로 “‘구원’과 ‘해방’의 결합”이라고 부를 수 있다)을 그 자체 부정적으로 판단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청중의 질문에 대한 발리바르의 답변 중에서 흥미로운 것을 하나 더 소개해보자. 발리바르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개념을 비판하며 ‘최종심급’에 대한 사유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한 것에 대해 어떤 청중은 “최종심급에 대한 관념 없이 어떻게 비판과 정치가 가능한가?” 하고 물었는데, 발리바르는 이에 대해서도 매우 자세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해주었다. 그는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이라는 알튀세르의 관념이 그 당시 맑스주의 전통 내에서 포기할 수 없는 유물론의 시금석이었으며, 이를 폐기할 경우 마치 관념론에 굴복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맑스주의 내에 만연해 있었다고 지적한다. 당연하게도 맑스주의자들이 ‘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을 거부하지 못한 것은 계급투쟁을 정치적 변화의 핵심으로 배치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알튀세르가 이 유물론의 시금석을 지키려고 시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비판한) 그람시가 도달한 문제의식(최종심급이라는 관념의 거부)보다도 훨씬 후퇴한 영역에 머물고 말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물론 알튀세르는 (엥겔스에게서 차용한) 수려한 문장을 덧붙임으로써 이 관념의 문제를 상쇄하고자 했는데, 그것은 “최종심의 고독한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봉착한 이 두 문제를 모두 봐야 한다고 말했다. 즉 이 상반된 정식화는 계급투쟁과 그 중요성을 정치의 영역에서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결정심급이라는 생각을 포기해야 한다는 두 가지 과제 모두를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발리바르가 보기에 그러나 ‘최종’ 심급이라는 표현에는 결정적인 문제가 있으며 이는 무엇보다도 그 표현이 마치 하나의 사회가 수직적인 축과 결정구조를 통해 구조화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는 데에 있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그는 이 표현을 포기해야 하며, 지배구조의 다원성을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회 영역이 동일하게 결정력을 갖는다’는 식의 다원주의적인 표상을 수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핵심은 중층결정 과정에서 각 사회적 영역들이 교차하면서 만들어가는 지배적 구조의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이다.

발리바르와 오토 볼프, 그리고 청중들이 함께 대화와 토론으로 만들어간 이 대담회는 오늘날 급진 정치철학의 재구성에 대해 고민하는 신구세대의 의견 교환의 장이었다. 젊은 세대는 ‘오늘날 과연 당이 필요한가? 페미니즘과 맑스주의는 어떻게 긴장 없이 공존 가능한가?’ 같은 새로운 질문과 의견들을 전달했고, 두 노 학자들은 새로운 세대의 문제의식을 수용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관점에서) 몇몇 과도한 편향들에 대해서 자신들의 비판적 의견을 전달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철학의 거장들과 젊은 세대의 지식인 및 활동가들이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격식 없이 자신들의 의견을 전달할 수 있는 이 ‘키치’적인 철학 행사는 그 자체로 나에게 몹시 새로운 경험이었다. 나아가 두 노 학자들이 자신들의 변함없는 오랜 우정을 과시하며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는 모습은 흐뭇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철학을 자신의 삶으로 선택한 사람에게 그것은 동시에 존경과 경탄의 감성이 드는 광경이기도 했다. 베를린의 어느 여름날에 펼쳐진, 인문학적이며 또한 급진적인 풍경이었다.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기만이 가득하군[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

최종덕(한철연 회원)

단 하루, 어제 신문에 오른 사회면 뉴스만 대충 집어보련다

문창극 총독 지명자는 대학원 다니고 박사학위 다 할만 했으니까 한 거라고

송광용 신임 비서관은 논문 표절 아니라구 허구

노대래 공정위원장은 손석희 아나운서를 빨갱이라고 하니

이 세상 빨갱이 천지가 되었고

전광훈 목사는 서울시민들을 정신병자로 몰아세우질 않나,

하기야 그 목사만 그런 게 아니니까

박상은 국회의원은 부끄럽지 않게 살아왔다는 개그까지 하고

김기춘 청와대 비서실장은 “언론은 모두 입을 다물라“고 대국민 협박을 하고

박유하라는 교수는 위안부를 매춘부로 묘사한 책을 냈다니,

교수들은 신림동 좌판 나물 파는 우리 할머니에게 머리 조아리라

끔찍한 일베의 살인인증사진과 더불어

원세훈 전 국정원장은 직원들의 댓글달기를 몰랐다는 판결이 났다고 하는데,

글쎄 누가 믿을까

거짓말들,

어제 하루치 신문에만 뜬 거라고.

하루하루가 이런 뉴스들로 가득 채워져 가고 있으니,

온갖 거짓이 횡행하더라.

기만이 땅에 가득차고 뻔뻔함이 하늘을 찌르니

신도 혼미해졌는지 교회까지 자기 속임수에서 허우적거리는거군.

기만은 자기 이익만을 크게 하려니,

부끄럼 한 점 없다고 당당한 위선의 몸짓까지 흉내낸다

기만을 성공시키려니

첫째가 뭇 사람들이 내 속임수를 눈치 챌 수 없도록 속임수를 세게 가는 거야

둘째는 네가 혹시 내 속임수를 의심하고 있는지 아니면 잘 속고 있는지를 판단하는 잔머리도 늘어나는 거지.

기만꾼들은 남들이 내 기만에 마음을 놓고 속아 주도록 주도면밀함까지 있다구.

거기다 대통령이 받쳐준다고 생각하니,

든든한 마음에 허세 또한 당당해져

그보다 기만에 더 능한 자들이 여기저기,

자기 자신도 자기가 하는 기만을 기만으로 생각하지 않는 기만들이 많거늘,

그런 기만을 자기기만이라 하더라.

남들에 마법을 피우기 전에 나 자신에게 기만의 주술을 거는 거야.

그리고 나서야 남을 더 잘 속일 수 있기 때문이지.

기만자는 자기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야 한다고 끝까지 우기는 거야.

신문에서 날마다 보듯이 말이지.

인간중독이 아니라 자기중독이라서, 그건 약도 없어.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일단 왕권력을 바꾸고 봐야겠지.

거짓을 탐지하고 알아채는 사람들이 많으면 그런 사기꾼들이 없어지는 것이고

우리들이 기꺼이 속아주면 기만자들은 놀랄 속도로 자기증식하니깐

그렇다고 치료 불가능은 아닌데, 믿음은 지식권력의 수단일 뿐임을 아는 거지.

교회나 절에 나가는 신도는 믿음은 강한데, 그런 믿음도 권력지식의 노예니깐

자기기만 병증이 샤머니즘이나 주술의 향을 타고 이 땅을 질식키려는데,

원래가 교회권력이나 독재정권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행동양상인거지

다행히 우리 몸속에는 기만을 알아채는 생리적 능력이 있으니 그런 능력을 잘 발휘해야겠지

발휘하면 뭐하나, 눈 부릅뜨고 행동으로 보여줘야지

신문 좀 편하게 봐야지.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3-1

조은평(건국대)

 

 

조은평 사진1-1

 

‘긍정의 힘’과?‘힐링’!?곳곳에서 상처받고 삶에 시달리는 우리들을 유혹하는 말들입니다.?게다가 인생의?‘멘토’를 자처하는 온갖 전문가들이?‘멘붕’에 빠진 우리들에게 삶의 나침반이 돼주겠다고 외쳐댑니다.?물론 이 복잡하고 유동적이며 불안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런 노력들은 어쩌면 절망적인 삶에서 헤쳐 나오려는 나름의 노력일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누구에게 인생의 멘토가 될 수 있을까요??대체 누가 어떤 권리로 내 삶의 나침반을 자처하며 내 상처를 치유할 수 있을까요??사실 우리는 너무나 힘든 삶에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바로 이런 전문가들에게 기대려 합니다.?그럼에도 이처럼 전문가들에게 기대려는 충동은 결국 스스로 삶을 반성할 수 있는 자신의 지적 능력을 망각하게 하는 것 같습니다.

이에 비해 인문학,?특히 철학은 언제나 스스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것을 요구합니다.?어쩌면 누구나 스스로 삶을 돌아보며 주변을 진지하게 고민한다면,?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습니다.?더구나 그런 자신의 고민들을 주변 지인들과 나누며 치열하게 토론한다면,?누구나 우리 삶을 억누르며 방해하는 요인들과 사회 환경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아마도 철학은 이런 스스로의 노력들이 만나 소통하는 공간이자 함께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려는 시도일지도 모르겠습니다.?짧은 시간이지만 함께 각자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서로 소통해 보는 기회가 되길 바랍니다.

 

1.?철학이란? : ‘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로부터 출발하는 철학함

“스스로의 철학함(Philosophieren)?없는 철학은,?다시 말해 자신의 철학적 체험이 없는 철학은 빈껍데기에 불과하다.”

1)?일상에서 솟아나는 철학

-?철학이란??과연 인간이 생각하는 이유는? ‘철학이란 결국 비-철학,?철학의 외부’?때문에!

조은평 표1

2)?그럼에도 일상에 거리두기를 하는 철학(비판/반성/낯설게 보기)

-?일상에서 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하지만 동시에 일상에 매몰되는 우리들.

-?말하자면?‘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들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미 우리는 철학을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이런 면에서 누구나 각자 자신만의 철학을 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물론 이처럼 일상에서부터 출발하지 않는,?즉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고민 속에서 출발하지 않는 철학적 물음을 당연히 공허하다.?하지만 반대로 일상에서의 삶에만 매몰되고,?그 속에서 자신이 던진 질문들과 대답들 속에만 갇혀 있게 될 경우에는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철학은 이러한 이유 때문에?일상에서 솟아나는 질문으로부터 시작하지만,?동시에?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고 고민한다.

-?바로 플라톤의?‘동굴의 비유’는?‘일상에 매몰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경계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일상???철학?(일상에서 솟아나는 동시에,?일상에 거리두기)

조은평 표2

 

2.?오늘의 주제이자?‘일상에서 솟아나는 사소한 질문’

:?소비와 인간의 삶?- ‘나는 왜 쇼핑몰에서 해방감을 느끼는가?’

-?나는 왜 쇼핑몰을 갈까??또 쇼핑을 하면 왜 즐거운 걸까??특히 기분이 우울하거나 짜증날 때,?대형 쇼핑몰에 가면 왜 갑자기 즐거워지는 걸까??뭐 여러 가지 질문들을 떠올려 볼 수 있을 듯.

-?그럼 왜 쇼핑몰에서 나는 즐거움을 느끼는 걸까??당연히 내가 그 공간에서 만큼은 주체적으로 자유롭게 소비하면서 만족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

-?그러면 일단 우리 삶에서 쇼핑이 이루어지는 몇 가지 상황을 생각해 보자.

1)?쇼핑할 때 느끼는 자유와 해방감(?)

조은평 표3

– 우리가 느끼는 자유와 해방의 상황은 아마 이렇게 정리해 볼 수 있지 않을까?

– 말하자면 다른 일상에서의 삶은 내 뜻대로, 내 의지대로, 자유롭게 누릴 수 없더라도, 쇼핑을 하는 순간만큼은 자유롭고 주체적으로 그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해방감을 느끼며 쇼핑몰을 산책하게 된다고 할 수 있을 듯.

– 이런 측면에서 쇼핑의 공간은 마치 ‘약국’과도 같은 곳.(아래 바우만 참조). 다시 말해 모든 일상의 괴로움을 훌훌 털어버리고 나의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곳. (물론 나의 구매력이 허락하는 한!)

2) 쇼핑몰이라는 동굴의 비밀(?)

– 하지만, 사실 우리도 잘 알고 있다. 우리가 즐기는 쇼핑의 순간은 그저 잠깐일 뿐이고 그때 느끼는 주체적이고 자유로운 해방의 감정도 결국에는 나의 구매력에 의해 좌우된다는 점을.

– 이렇듯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쇼핑을 할 때, 또 쇼핑몰을 구경할 때 우리는 그럼에도 자유롭고 주체적이라고 생각한다. (자율성이라는 환상 : 독립적인 소비자. 합리적인 소비자. 주체적인 소비자) 말하자면 그 무엇에 의해(광고든, 마케팅이든 간에) 영향을 받아 소비를 한다고 하더라고(그렇다고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그런 선택을 하는 건 나의 결정이니까 나의 자유라고. 그렇기에 난 자유롭고 합리적인 소비자라고. 뭐 이런 식으로 우린 스스로의 자율성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사후적으로 정당화한다. (이데올로기적인 환상 : 이데올로기적인 원환성)

–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다른 공간에서는 너무나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예를 들어 일터에서는 상사의 눈치를 봐야하고, 정치 영역에서는 늘 전문 정치인들에게 지겹게 끌려 다녀야 하기 때문에, 바로 그런 일상의 부자유 공간에서 벗어나 쇼핑할 때만큼은 나의 자유를 누린다고도 할 수 있을 듯.

– 하지만 쇼핑의 공간과 쇼핑의 상황은 어쩌면 ‘플라톤의 동굴’과도 흡사하다. 마치 동굴 속 죄수들이 자신들 앞에 펼쳐지는 이미지들의 세계를 바라보며 자신들의 삶이 자율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상상하듯이, 현대의 소비자들도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를 바라보면서 자신들이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하고 있다고 착각한다는 점에서.

( ‘동굴’ 벽면에 펼쳐지는 이미지 세계 = 쇼핑몰에서 펼쳐지는 현란한 이미지의 상품 세계)

–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겠다. 푸코가 ‘현실에 감옥이 왜 존재하는지 아는가? 현실이 감옥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저기 감옥이 존재한다’고 말했던 것처럼, 쇼핑몰이 우리 주변에 멋지게 펼쳐져 있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이미 쇼핑몰과 같은 곳이라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라고’.

– 말하자면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이미 소비를 통해 모든 것을 해결하려는 ‘소비지상주의 사회’라는 점을 은폐하기 위해서.

– 그렇다면 이런 동굴과도 같은 쇼핑몰에서 주체적이고 자율적으로 소비를 하며 살고 있다고 믿게 하는 사회는 어떤 식으로 지탱되고 있는 것일까?

– 바로 이런 논의가 ‘소비의 사회’라는 이름으로 진행되는 철학적, 사회적 논의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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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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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배우고 익힘에서 기쁨을 찾다-인생을말하는『논어』?<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3

구태환(상지대 강사)

 

이 글은 5월 20일?7시에 열린?<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세번째 강연 원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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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고 익힘,?그리고 공자와?『논어』

우리나라의 성인들 대부분은 『논어』라는 책을 한 번은 접해봤을 것이다.그래서인지 『논어』의 첫 구절인?“學而時習之,?不亦說乎.?有朋自遠方來,?不亦樂乎.(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은 대부분 알고 있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다는 것은 맞아.?하지만 공부가 얼마나 지겨운데.?배우고 익히는 게 기쁘다는 것이 말이 돼?’라고 말이다.?물론 멀리 있는 벗이 나를 보고자 찾아왔는데,?즐거워하지 않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그런데 배우고 익히는 것,?즉 학습(學習)은 진정으로 기쁘지 않은 것일까??여기에서 우리는『논어』 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다.?여기에서‘배우고 익히는 것’은 반드시 교과서를 달달 외우고,?읽기 싫은 책을 읽는 것만이 아니다.?영어,?수학을 배우는 것도 배우는 것이지만,?수영,?오락,?기타,스케이트보드,?스키,?춤,?노래,?축구,?심지어는 화투를 배우는 것 역시 배우는 것이다.?그것이 재미있고 기쁘지 않다는 말인가??실제로 공자는 소(韶)라는 음악을 듣고서 그것을 배우는 과정에서 석 달간 고기 맛을 모를 정도로 심취했었다고 고백한다.

이처럼 『논어』에는 언뜻 봐서는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 제법 있다.?물론 『논어』에 담긴 모든 말을 시공을 초월하는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가 아니다.

『논어』는 공자의 제자와 재전(再傳)?제자들이 공자와 그 제자들의 말과 행동을 기록한 책이다.?공자(이름은 구丘)는 늙은 아버지와 어린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기에 경제적으로 힘든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으로 추정된다.그가 살았던 시기는 중국의 춘추시대였다.?춘추시대는 주나라의 종법제도(宗法制度)가 붕괴되고 힘을 상실한 천자를 대신해서 각국의 제후들이 중국 천하의 권력을 장악하려고 다투던 혼란기이다.?공자는 이러한 혼란을 잠재우고 종법적 질서가 회복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했다.?이러한 공자의 노력은 각국을 돌아다니던 공자의 모습에서 엿볼 수 있다.?그는?56세부터?68세까지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각국을 돌아다니면서 자기 나름의 천하를 평정할 방도를 역설한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고,?공자는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에 낙담할 수밖에 없었다.?오죽하면?‘도가 실행되지 않는 세상을 떠나 뗏목을 타고 바다에 떠다니고 싶다’고까지 한다.?그리고 자신의 뜻을 펼치기 위해서 임금을 배신하고 반란을 일으킨 조나라의 필힐이 부르자 그를 만나려 하고,?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당시에 국정을 좌우하는 여인으로서 평판이 좋지 않았던 위나라 군주의 아내인 남자(南子)를 만나기도 한다.?그리고 이런 행동 때문에 제자 자로(子路)로부터 욕을 먹고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기도 한다.

공자는 이처럼 자신의 뜻을 펼치고자 노력했지만 자신의 뜻이 이뤄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며,?결국?68세의 나이에 조국 노나라에 돌아와 학문과 교육에 힘쓰다.

 

학습의 내용

그렇다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의 내용은 무엇일까??사마천의『사기』?에 의하면,?공자의 제자는 약?3,000명이고 그 가운데?‘육예(六藝)’에 통달한(通)이가?72명이었다고 한다.?그렇다면 공자의 학습 내용은?‘육예’였던 셈인데, ‘육예’는 예(禮,?예의범절),?악(樂,?음악),?사(射,?활쏘기),?어(御,?말이나 수레 몰기),?서(書,?글쓰기),?수(數,?셈하기)를 말한다.?이 여섯 가지는 당시의 지배층이 습득해야 교양이었다고 할 수 있다.?그런데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서 봐야 할 것이 있다.?육예에?‘통달했다’는 것이다.

통달했다는 것은 단순하게 어떤 것을 배우고 익혔다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것의 원리까지 체득했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학습의 궁극의 경지이다.?예컨대 조상에 대한 제사나 부모에 대한 삼년상은 예의 중요한 항목이다.?그런데 대다수의 사람들은 제례나 상례를 치룰 때 그러한 의식을 왜 거행하는지를 생각하지 않고 답습한 대로 실행할 뿐이다.?하지만 공자는 제례나 상례가 조상과 부모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는 의식임을 밝히고 있다.?어떤 의식에 통달했다는 것은 그것을 실천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의식의 연원이 무엇인지를 궁구하여 밝히고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겉모습으로서의 예의만이 아니라 그 예를 실행할 때의 마음가짐까지 갖추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그리고 이러한 교양은 지배층이 습득해야 할 것이다.

 

배움의 목적,?군자

DSC09035-1사실 공자가 개창한 유가 사상은 일반 백성들을 위한 사상이 아니다.?지금과는 달리 신분제 사회였던 과거에 일반 백성은 그 사회의 주인이 아니었다.그 사회의 주인은 임금을 비롯한 소수의 지배층이었던 것이다.?그리고 유가 사상은 사회의 주인인 이들 지배층이 어떻게 하면 일반 백성들을 바르게 다스려나갈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공자가 보기에는 이들 지배층이 도덕적으로 올바르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되어야 했다.?그리고 배움이라는 것도 결국은 이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이들 지배층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군자(君子)’이다.?우리는 흔히?‘군자’라고 하면, ‘도덕군자’, ‘성인군자’를 연상하며,?도덕적 인격체를 가리키는 개념으로 이해한다.?하지만?‘군자’는 글자 그대로 임금(君)의 아들(子),?즉 지배층이다.?그런데 공자는 이 용어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만 사용하지는 않는다. 『논어』에 나오는 군자는 크게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말 그대로 지배층이다.?계강자라는 사람이 공자에게 정치를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한다. “당신이 선해지고자 하면 백성들이 선해질 것입니다.?군자의 덕은 바람과 같고 소인의 덕은 풀과 같으니,?풀 위에 바람이 불면(풀은)?반드시 눕게 됩니다.”?지배층이 도덕적으로 모범이 되면,?바람이 불면 풀이 눕듯이,?백성들도 그를 모델로 하여 선해질 것이라는 말이다.?이처럼 군자를 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은 공자 이전에는 당연한 것이었다.?그런데 공자는 이 개념을 변용한다.

공자는 지배층을 가리키는?‘군자’를 군자다운 덕목을 가진 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바꿔놓은 것이다.?그는 군자를 이야기할 때 원래는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개념인?‘소인(小人)’과 대비해서 말하고 있는데,?그 중 하나가?“군자는 옳음에 밝고,?소인은 이익에 밝다”는 말이다.?이것을 현대어로 바꾸면, ‘지배층은 무엇이 옳은가에 관심을 갖고,?피지배층은 무엇이 이익이 되는가에 관심을 갖는다’가 된다.

그런데 공자의 이러한 언명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당위를 말하고 있다. ‘착한 어린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가 실제로는?‘착한 어린이가 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는 의미를 갖는 것처럼 말이다.?위의 언명도?“군자(지배층)는 옳음에 밝고,?소인(피지배층)은 이익에 밝다”라는 사실을 가리키는 문장으로 해석될 수도 있겠지만, “지배층은 옳음에 밝아야 하고,?피지배층은 이익에 밝아야 한다”로 읽힐 수 있다.?더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옳음에 밝아야 지배층 자격이 있고,?이익에 밝은 이는 피지배층일 뿐이다”?라는 말이 된다.?이는 옳음,?사회적 정의에는 관심이 없고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당시의 지배층에 대한 공자의 질타이다.

 

군자의 모습

공자가 말하는 배움이 진정

DSC09029-1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라면,?그러한 군자는 어떤 모습을 띠고 있을까??비교적 잘 알려진 구절로는?“君子和而不同,?小人同而不和”(군자는 화합하되 부화뇌동하지 않고,?소인은 부화뇌동하되 화합하지는 못한다)를 들 수 있다.?여기에서
의?‘화’는 조화나 화합으로 해석될 수 있는데,?이러한 조화나 화합은 기본적으로 다른 것들 사이에 가능하다.마치 오케스트라의 여러 다른 악기들이 각각의 음을 내면서도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어내듯이,?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들은 각기 다른 입장을 갖고 있으면서도 타인과 조화하여 바람직한 사회를 만들어낸다.?이처럼 서로 화합하고 조화하는 그들이지만,?결코 권력과 이익이 있는 곳으로 몰려가서 힘 있는 이의 견해에 무조건 동조하는 소인배 같은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처럼 각기 다른 입장을 갖는 이들을 조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커다란 원칙이 필요할 것이다.?즉 이들도 서로간에 다름 속에서도 공통적인 무엇인가가 있어야 그 안에서 조화할 수 있을 것이다.?공자의 사상에서 그러한 원칙은 인(仁)과 예(禮)라고 할 수 있다.?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인)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 사랑을 표현해내는 수단(예)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을 공자는 꾸밈과 바탕의 적절한 조화라고 한다. “子曰,?質勝文則野,?文

勝質則史.?文質彬彬,?然後君子.(공자가 말했다.바탕이 꾸밈을 넘어서면 야만인이고,?꾸밈이 바탕을 넘어서면 문서를 다루는 관료이다.?꾸밈과 바탕이 아름답게 조화된 다음에야 군자가 된다)”는 문장에서 바탕(질)이란 바로 인간에 대한 사랑,?즉 인이고,?꾸밈(문)이란 사랑의 표현,?즉 예이다.?이처럼 내면에는 인간에 대한 사랑을 갖고 있으면서 그것을 적절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군자인 것이다.

이러한 군자,?즉 지배층다운 덕목을 가진 사람이 현실에서 지배층이 되어 백성들을 다스린다면,?우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질 것이다.?그리고 그 사랑을 적절히 표현할 제도를 마련할 것이다.?만약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있다면 백성의 삶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고 백성들의 삶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서 그것을 제도로써 표현해야 할 것이다.?백성을 사랑하는 마음 없이 제도만 내놓는다면,?그 제도는 아마도 백성들의 마음을 일시적으로 얻기 위한 것이거나 눈앞에 닥친 정치적 곤경을 순간적으로 모면하기 위한 수단일 것이다.?하지만 그러한 제도가 백성들의 삶에 도움이 될 리는 만무하다.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을 꿈꾸다

앞에서 보았듯이 공자가 말하는 학습은 바로 군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공자는 그러한 군자가 세상을 다스리기를 바랐으며,?그러한 군자가 다스리는 세상은 평화롭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시대의 군자는 누구인가??우리 시대는 신분제를 거부한다.모든 사람이 평등하며,?헌법에도 나와 있듯이?‘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즉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으며,?민주주의는 모든 사람이 주인인 사회를 지향한다.?신분상으로 봤을 때 우리 사회의 모든 성원이 군자,?즉 이 사회의 지배층인 것이다.?그렇다면 우리 사회의 군자들은 누구를 다스리는가?바로 우리다.?우리는 각자가 군자이면서 소인이다.?이제는 신분상의 군자,소인은 무의미해졌다.?다만 각자의 관심에 따라,?즉 각자의 이익을 추구할 것인가 사회의 정의를 추구할 것인가에 따라 소인과 군자가 나뉠 뿐이다.어찌 보면 공자가 생각했던 것이 실현된 사회이다.

자기들을 지배층이라고 생각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지배층으로 인정하고 그들의 지배에 따라 사는 소인이 될 것인지,?스스로가 군자인 지배층이 되어 소수의 관료들을 심부름꾼으로 부리고 살 것인지를 신중하게 선택해야 할 시대이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 6월 17일 주인으로 살아가기-맹자의 『호통』?:?구태환(상지대 강사)입니다. ?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거짓 원인의 오류 [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학생들에게?Argumentation Theory를 가르치다 보면 논리학의?’오류론’을 한 번은 꼭 다룬다.?그런데 이 오류 론에는?’형식적 오류’와?’비형식적 오류’가 다 포함된다.?형식적 오류는 형식적 규칙을 위배했는가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니까 그 규칙만 알면 비교적 판별하기가 쉽다.?마치 도로 교통에서 신호 위반이나 과속의 경우 규칙 위반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과 같다.?그런데 일상 언어에서는 형식이 아닌 내용과 관련해서 문제가 생기는 경우가 다반사다.?겉으로 보기에는 그럴듯한데 곰곰이 따져보면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이다.?때로는 이 오류를 일정한 효과를 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하는 경우도 있다.?재판정에서 피의자가 눈물 흘리면서 동정심에 호소하는 경우가 전형적이다.?그가 한 행위와 그의 처지는 별개지만 눈물은 이 둘을 연결시켜줘서 정상참작에 도움이 되는 경우도 종종 있을 것이다.?소크라테스도?『변명』에 보면 이런?’연민에의 호소’를 한다. “친구여,?저도 사람입니다.?다른 사람과 똑같습니다.?저도 호머의 말처럼 목석으로 된 인간이 아니라 피와 살을 가진 인간이고,?식구도 있고,?아들도 셋 이예요.”?찔러도 피한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소크라테스 조차 마누라와 자식새끼를 앞세우며 선처를 구하는 것이다.?김 시습의?’자지는 만지고,?보지는 조지라'(自知晩知 補知早知)는 표의문자와 표음문자로 혼용되는 우리 일상어의 애매성을 노린 위트 효과다.?서당에서 열심히 글을 읽는 아이들 모습이 기특해 큰 소리로 한 수 읊었더니 서당의 훈장 이하 아이들이 욕하는 줄 알고 달려들었다는 것이다.?사실은 김 시습 자신이 왔는데도 내다보지도 않는 모습에 부아가 나서 야유를 한 것이리라.?스스로 알려고 하면 늦게 알고,?도움을 받아 알려고 하면 일찍 안다는 말이다.?선거철만 되면 흑색선전이 난무하고,?온갖 비리들이 폭로되는 경우가 있다.?전형적인 물 타기 방식이요,?피장파장의 오류이다.?종종?’예수 믿으시오’?하면서 확성기로 떠들고 앞뒤로는?’불신지옥’?간판을 달고 다니는데 이는 흑백논리의 오류이다.?신이 이 아름다운 세계를 창조했는데 그들은 흑과 백이라는 두 가지 색깔로만 보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신의 창조물을 왜곡하는 저들이 오히려 불신하는 것은 아닐까??이런 단순화가 합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하지만 그 효과가 강력하기 때문에 종종 정치인들이나 대중을 선동하는 사람들이 쉽게 유혹을 뿌리치지 못한다.?때문에 이런 형태의 오류는 무조건 틀렸으니 사용해서는 안 된다고만 말하기 어렵다.?그 중에 하나가?’거짓 원인의 오류’이다.

이 오류는 원인과 결과 사이의 관계가 필연성이 없음에도 마치 있는 것처럼 상정하는 오류다.?예전에 마당이 있던 시절 여름날 열심히 빨래를 해서 마당에 널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고 생각해 보라.?또 그런 불편한 경험을 두 어 차례 반복해보라.?그러니까 나오는 엄마들의 소리가?’빨래만 하면 비가 온다’는 것이다.?여러분들은 세차를 할 때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는가??세차만 하면 비가 온다고…사실 빨래를 널거나 세차를 하는 사건과 비가 온다는 사건 사이에 인과 관계가 없음에도 우리의 연상 속에서는 자연스럽게 연결된다.?개들만 조건 반사하는 것이 아니다.?전라도 사람이 어떻고,?경상도 사람이 어떻고 하는 것도 사실 그 사람 자체와 그의 출신 지역 사이에 필연적 인과관계가 없음에도 자연스럽게 편견으로 자리 잡고 있다.?중세의 마녀사냥이나 나치가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은 것,?한국 정치에서 늘 반복이 되는 종북 놀이도 그 한 예이다.?과거 왕조시대에 여름 날 가뭄이 심하면 왕이 나서서 기우제를 지냈다.?자연재해와 인간의 도덕적 책임 간에 어떤 연관이 있다고 믿는가??동양의 전통적인 천인합일의 사상에서는 양자는 연결되어 있고 상호 조응한다고 본다.?이 형이상학적 가설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은근슬쩍 학생들한테 이런 질문을 던진다. “기우제를 지내면 실제로 비가 올까요 안 올까요?”?학생들은 당연히 연관이 없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질문을 받으면 당황 하면서 여러 가지 답변을 내놓는다. ‘안 옵니다.’?사실 이런 답변이 합리적이다.?그런데 배운 것이 죄라고,?어떤 학생은 기우제를 지내면 연기가 하늘로 많이 올라가 비가 내린다고 나름 과학적으로 답변하는 경우도 있다.?마른하늘에 그 한 조각구름이 무슨 큰 역할을 하겠는가??하지만 정답은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반드시 온다는 것이다.?왜 그럴까??비가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니까…

일전에 송 강호,?김 혜수가 주연한?<관상>이라는 영화가 히트를 친 적이 있다.?병약한 문종이 관상쟁이를 통해 역모의 상을 미리 알아 단종의 보위를 지키려다 실패하는 이야기다.?수양의 상은 전형적으로 역모의 상이라고 한다.?역모는 당시 정치 상황을 꿰뚫고 있다면 충분히 예측 가능할 것이다.?관상쟁이의 판단은 다만 사람들에게 합리적 예측에 대해 신념과 확신을 불어넣어 주는 데 적격이다.?꿈보다 해몽이고 후행적 정당화에 가깝다고 할 것이다.?관상은 얼굴에 드러난 상을 통해 그 사람의 과거/현재/미래를 본다는 것인데 사실 가당찮은 이야기일까??드러난 상은 과거를 일정하게 반영할 수 있고,?그 과거를 통해 미래를 미루어 짐작은 할 수 있다.?그리고 이런 판단은 상당히 경험적이고 통계적이다.?게다가 오랜 숙련을 통해 통계예측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과학적인 통계가 부족하던 시절의 경험적 통계학이다.?사람들을 많이 대하는 직업에서는 외양을 통해 그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신뢰도가 있다.?나도 그렇게 판단하는 방법이 있다.?동양의?12지 이론을 가지고 사람들을 일정하게 그 유형에 포함시켜 판단하는 것이다.?예전에 노무현과 이회창이 대통령 선거로 대립할 때 다들 이 회창을 독수리 상이라고 했는데,?나는 쥐 상이다고 하고 노 무현 상이 호랑이 상이다고 어거지 부린 적이 있다.?사실 이런 포괄적 분류가 전혀 근거 없는 것은 아니다.?아무튼 이걸 가지고 학생들이 많이 떠들면?”?너희들 다 보인다.?미래가”?라고 엄포주면 서로 봐달라고 하면서 조용해진다.?학생들은 나의 합리적 이론보다는 그런 불합리하고 비합리적인 속설에 더 반응한다.?학자가 하는 애기보다 사주 봐주는 점쟁이 이야기를 더 귀담아 듣지 않는가??일종의 심리적 효과이고 플라세보 효과?(placebo effect)이다.?서양에서도?19세기 초에 이런 형태의 관상학과 골상학이 유행한 적이 있다.?용모와 안색,?얼굴에 드러난 특성 등을 통해 그 사람의 마음을 읽는다는 것이다.?외면이 내면을 반영한다는 생각이다.?특히 범죄인의 성향과 유형을 판단하는 데 골상학이 상당히 이용되기도 했다.?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사이비 과학으로 더는 과학의 반열을 유지하지 못하게 된다.?외면으로 드러난 특질,?뼈의 구조와 배치 등이 내면의 정신과 필연적 연관이 없다는 것이다.동양에서는 관상보다는 골상이요,?골상 보다는 심상이라고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안에 감추어진 마음을 더 높이 사고 있다.?나는 아직도?”정신은 뼈다”라는 말의 의미를 묻고 있다.

현 정부 들어 크고 작은 사건이 빈발하고 있다.?그 중에서도 세월 호 사건은 너무도 큰 참사인데다 현재까지도 진행형의 사건이다.?얼마 전에는 내가 사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양 터미널에서 화재가 나?7명이 죽고 수 십 명이 큰 부상을 당했다.?시민들이 일상으로 이용하는 시설에서 이런 사고가 벌어졌다는 것은 큰 충격이 될 수 있다.?전남 장성의 한 요양원에서는 화재가 놔 요양 노인들?21명이 불에 타고 연기에 질식돼서 죽는 사고도 났다.?그런데 이처럼 빈발하는 사고의 형태가 과거 김 영삼 대통령 시절을 연상케 하고 있다.?당시의 대형사고 몇 가지만 손꼽아도 서해 페리호 침몰사고(사망292명),?대구 지하철 가스 사고(98명 사명),?삼풍 백화점 붕괴 사고(사망500여명), KAL기 괌 추락사고(228명 사망),?성수대교 붕괴사고(32명 사망)이다.?하나 만으로도 엄청난 데 이런 대형 사고가 부지기수로 터지니까 국민들이 받는 체감 충격이 얼마나 컸겠는가??그러니까 영부인의 상이 곡상(哭象)이라 국민들의 눈물을 많이 뺀다는 말이 돌았다.?영부인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들어가고 나온 굴곡(屈谷)이 없지는 않다.?뒤의 곡(谷)을 앞의 곡(哭)으로 치환한 것이다.?어느 유명한 관상가의 말이라고 했다.?물리적인 사고와 대통령 영부인의 상간에 인과관계를 어떻게 찾을 수 있겠는가마는 관상가들의 그런 자다가 봉창 두들기는 소리가 대중들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저항 없이 자리 잡기도 한다.?김 영삼 정부 말에 초유의?IMF?위기를 맞았으니 더 그 말의 울림이 더 크다.?전형적인?‘거짓 원인의 오류’이지만 국민들의 집단 연상의 메카니즘 속에서는 필연성이 있다는 믿음이다.?혹세무민은 바로 이런 틈을 파고든다. “어,?그러고 보니 박 근혜 상도 만만찮아.?눈물 꽤 짜내게 생겼네.?편안한 상이 아니여…”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신기욱의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철학자의 서재]

이병수(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HK교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

 

▲ (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 ⓒ창비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신기욱 지음, 이진준 옮김, 창비 펴냄)는 미국에서 한국학 연구의 중심인물로 활동하고 있는 스탠포드대학교 신기욱 교수의 2006년 저서(『Ethnic Nationalism in Korea: Genealogy, Politics, and Legacy』)를 2009년 창비에서 번역 출간한 책이다.

저자 신기욱은 서문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혈연에 기초한 단일민족주의 내지는 의식”이며 “한국인의 단일민족주의를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한국사회와 정치의 변화를 제대로 읽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전제에서 출발한 저자는 단일한 민족의식이 도대체 어디에서 기원한 것인가를 질문하면서 그 역사적 형성과정을 확인하고자 한다. 다시 말해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를 통해 다양한 집합적 정체성들 가운데 어째서 공통의 혈통을 강조하는 종족적 민족주의로 귀착했느냐를 탐문한다.

요컨대 저자는 이 책에서 한국사회를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원리를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적 민족주의로 보면서, 종족적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원과 형성, 그리고 기능에 대해 총체적으로 고찰하고 있다.

1990년대 이래 한국 민족주의의 억압적, 배타적 기능에 대한 문제제기가 본격화되면서 민족주의 논쟁이 전개되었지만 한국 민족주의를 역사적인 맥락에서 실증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서구의 민족이론에 의존하지 않고, 19세기 말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의 근현대사의 구체적인 전개과정에 기반을 두고 한국 민족주의를 논하고 있다. 서구의 민족이론에 더불어 한반도 근현대사의 역사적 경험들을 동시에 섭렵함으로써 이론적 고찰과 경험적 자료의 활용이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구의 주류 민족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에 대해서도 진지한 고민을 담고 있다. 이는 특히 민족의 기원에 대한 원초주의적 견해와 근대주의적 견해의 한계점들을 극복하려는 저자의 시도에서 잘 드러난다.

 

저자는 한민족의 기원에 대한 국내학자들의 견해를, 첫째 단일한 혈통을 자연적이고 운명적으로 간주하는 원초주의적 견해, 둘째 한민족을 조선왕조 말기에 도입된 근대 민족주의 이데올로기의 산물로 보는 근대주의적 견해, 셋째 두 입장을 논박하며 서구와는 다른 한민족의 역사적 경험의 특수성(장기간의 중앙집권적 국가 등선재하는 역사적 유산)을 강조하는 견해 세 가지로 정리한다. 그는 세 입장이 모두 한계를 지닌 것으로 보면서 새로운 분석틀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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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저자는 무엇을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로 보는가? 저자에 따르면 우연한 민족의 구성에서 결정적 요소는 경쟁적인 정치의 결과다. 따라서 저자는 자신의 분석틀을 “민족은 특히 대내외의 논쟁적인 정치의 결과, 역사적으로 각인되고 구조적으로 우연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의 산물”로 요약한다.

요컨대 저자의 입장은 전근대적 유래를 지닌 종족적 유산의 규정력을 인정한다는 측면에서(역사적 각인) 위의 두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나며, 그 규정력을 약화시켜 우연적으로 본다는 측면에서(우연한 상황) 세 번째 견해와 차이가 난다. 그리고 이 역사적 각인과 우연한 상황을 정당화하는 민족 형성의 결정적 요소가 “이중적인 경쟁적 논쟁”이다.

그는 민족개념이 처음부터 혈통에 기반을 두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보면서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으로 되어가는 역사과정을 이중적 경쟁의 과정으로 설명한다. 민족은 인종, 계급 등 초민족적인 집단 정체성과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민족개념에 대한 여러 해석들 가운데 종족적 민족개념이 경쟁에서 이겨 지배적인 것으로 정착되었다고 본다. 즉, “20세기에 인종지향적인 한민족 개념이 출현하고 지배하게 된 것은 민족세력과 초민족 세력 사이의 논쟁과 민족 개념에 대한 논쟁이라는 이원적 논쟁과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이 책의 1부와 2부는 민족적인 것과 초민족적인 것의 경쟁, 민족개념 자체를 둘러싼 경쟁이라는 이중적인 경쟁의 틀에 따라 서술되어 있다. 저자의 “역사적으로 각인된, 우연한, 경쟁적”이라는 분석틀은 매력적이지만 그 분석틀의 성공 유무는 일차적으로 이런 이중적 논쟁이 한반도 근현대의 역사적 사실과 합치하는가에 달려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역사적 사실과의 합치 여부보다는 이 책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대한 규정과 “종족성과 시민성의 관계”에 대한 저자의 관점, 두 가지 문제에 대해서만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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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족적 민족주의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우선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혈통에 바탕을 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는 민족개념에 대한 우리의 통념적 이해이기도 하다. 이를테면 현재 우리의 종족성이 어떻게 규정되고 있는지는 강한 혈통주의적 특징(더불어 대한민국 중심주의)을 지닌 재외동포재단법에서 찾을 수 있다.

 

“‘재외동포’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외국에 장기체류하거나 외국의 영주권을 취득한 사람이거나 국적에 관계없이 한민족(韓民族)의 혈통을 지닌 사람으로서 외국에서 거주, 생활하는 사람”을 말한다.(재외동포재단법, 제2조)

 

▲ 단재 신채호

▲ 단재 신채호

그러나 식민지 시기 민족담론은 아직 혈통적 단일성에로 한정된 민족주의적 지향성을 갖는 것이 아니었고, 오히려 학자들은 다종족설을 상식으로 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다종족 구성, 주종족 주도론’은 일찍이 한말에 신채호가 ‘독사신론’에서 말한 바 있다. 단일한 혈통에 기초한 민족이라는 ‘단일민족론’은 해방 이후에 비로소 본격적으로 대두된다. 이는 해방 후 국내외적 정세가 민족분단의 가능성을 높이는 가운데 단일민족은 결코 분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단일민족설보다는 문화적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종족의 후손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한국의 민족주의가 종족적 민족주의의 성격이 강하다고 표현할 경우, 그것은 혈연보다는 풍속·습관과 같은 문화에 기반을 둔 민족주의를 뜻하는 방향에서 사용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다음으로, 저자는 종족적 민족주의를 통해 20세기 한반도에서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종족성의 전일적 지배를 강조하는 저자는 역사적으로 나타나는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적 현상을 획일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다양한 형태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와 동일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적 경향을 보이고 있다. 예컨대 백남운, 이광수, 김일성, 박정희의 민족주의는 혈연에 기반을 둔 종족성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등가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주의가 자기완결적인 논리구조를 갖추지 못한 채 다른 이데올로기와 결합하는 이차적 이데올로기이며, 진보성과 아울러 침략성의 양면성을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의 근현대사에서도 민족주의의 이러한 이데올로기적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난다. 해방 후 한반도에는 남북한 각각의 국가에 의해 주도된 두 개의 국가주의적 민족주의, 그에 반대하고 자유민주주의의 실현을 목표로 한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민중이 주체가 된 민중주의적 민족주의 등 다양한 민족담론이 존재한다.

이처럼 종족적 민족개념은 사회주의, 자유주의, 국가주의와 모두 결합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종족적 민족개념이 마치 불변적으로 지속되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정치적, 이념적 지향성을 무시한 채 혈연적 종족성이라는 유사성을 근거로 20세기 한반도에 등장한 다양한 민족주의를 통시적으로 적용, 평가하는 시각은 역사적 다양성을 배제하는 과도한 환원주의로 여겨진다.

셋째, 저자는 종족 민족주의의 역사적 기능을 축복이자 저주인 “양날의 칼”로 설명하면서 서구의 주요 민족주의 이론들의 한반도적 적합성 문제를 제기한다. 저자에 따르면 한스 콘 이래 서구의 민족주의 연구자들은 정치적 민족주의를 시민적, 통합적, 건설적인 것으로 보는 반면, 종족민족주의를 위험하고, 분열적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보는 강한 전통이 있다. 저자는 유럽적 경험에 바탕을 둔 이러한 이분법적인 본질주의 시각이 한국의 종족 민족주의가 지닌 다양하고 복잡한 역할과 기능을 간과한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종족 민족주의는 일제하 반식민주의의 기능을 했고, 남북의 근대화 과정에서 통합적 기능을 수행했으며, 나아가 통일과정의 초기 단계에서 두 체제의 부드러운 통합을 촉진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축복) 그러나 동시에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중요한 정체성들을 억압했고, 자유주의의 빈곤을 초래했으며, 남북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저주)

그러나 “양날의 칼”의 비유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책 곳곳에 되풀이해서 종족 정체성의 부정적인 성격을 부각시키고 시민적 민족정체성을 그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는 “혈통 중심의 민족 개념을 재고해야 한다. 외국인 이주민과 혈통을 떠나 민주국가의 동등한 시민으로서 함께 살아가는 ‘시민적 민족 정체성’이 필요하다. 통일 이후의 사회통합 논리이기도 하다.”고 말한다. 논의의 출발점에서 시민 정체성과 종족 정체성의 이분법을 거부하고 종족 정체성의 양면적인 역할과 기능을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책의 도처에서 시민적 정체성을 대안으로 내세우는 것을 보면, 과연 저자가 한스 콘 이래의 본질주의적 시각을 제대로 극복했는가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이 문제는 종족성과 시민성이 결합될 수 없다는 그의 관점과 밀접히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종족성과 시민성의 결합을 위하여

 

‘민족’은 순전히 언어, 역사 등의 문화적 단위로도, 순전히 정치적 단위로도 정의될 수 없으며, 양자가 결합한 범주로 이해될 수 있다. 민족의 역사는 정치공동체의 역사와 분리될 수 없지만, 민족은 정치 공동체로 환원되지 않는 종족적 기반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 현실에서 모든 민족은 종족적 특성들과 시민적 특성들을 동시에 갖게 마련이다. 종족성과 시민성은 서구의 민족국가에서도 한 번도 완전히 분리된 적이 없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양자가 완전히 분리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종족성을 배제하고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구성하려는 시도가 지닌 한계는 분명하다. ‘시민 민족주의’에서와 같이 시민성을 중심으로 민족 정체성을 형성하려는 전략이 현실적 차원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이유는 종족적인 기반에 의한 동기부여 없이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연합은 추진력을 갖고 실천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종족적 민족”(ethnic nations)과 “시민적 민족”(civic nations)의 구분 시도는 우리 학계의 민족논의에서 종족적 민족개념이 한국 민족주의의 성격을 강력히 주조(배타성과 획일성)했다는 점만 부각시키는 경향과 관련이 깊다. 하지만 종족성이 중요한 행위의 원천이라고 할지라도 그 자체로 어떤 정치적 행위를 낳는 것은 아니다. 종족성은 당대의 정치적 조건과 불가분하게 엮여 있으며 다른 이데올로기들과 결합할 때에만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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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저자는 여러 민족주의의 정치적, 이념적 지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종족적 민족개념이 지배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처럼 다루고 있다. 예컨대 지배세력의 공식적 민족 개념과 1980년대의 민중적 민족주의는 “민족의 종족적 토대에는 동의했지만, 민족에 대한 정치적 개념이 전혀 달랐”다. 정치적 민족 개념이 달랐을지라도 종족적 민족성의 토대를 건드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직 정치적 양상만이 논쟁의 대상이었을 뿐, 양자는 동일한 종족적 개념을 수용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종족성과 정치 공동체가 한 번도 일치해 본적이 없는 20세기 한반도의 역사는 특정 민족주의 개념의 지배를 위협하는 근본 요인이자 시민적 민족과 종족적 민족의 이분법의 적용불가능성을 보여준다. 20세기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은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되었다. 따라서 남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는 기존의 민족 정체성 모델에 딱 들어맞게 이해될 수 없다. 문화적 다양성과 민주적 권리를 강조하는 시민적 정체성이나 혈연 언어 전통 등을 강조하는 종족적 정체성은 그 어느 것도 20세기 한반도 역사에서 진행되어온 다양한 국적, 법적 지위, 언어차이, 관습의 현지화 등 민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을 설명하기 어렵다. 한반도의 민족 정체성은 종족적 요소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해당 거주국(남과 북 그리고 해외 디아스포라)의 정치 경제적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변용된 정체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남과 북은 과거의 문화전통 가운데에서 각자의 정치 경제적 체제에 맞는 국민적, 인민적 서사들을 교육과 언론매체를 활용한 국가주의적 기획 아래 동원하였다. 분단은 남북 모두 민족 내부의 적대적 타자라는 의미를 상대에게 부여하였고, 민족 서사와 민족 문화의 정체성에 균열을 가져왔다. 북은 사회주의 대가족 제도를 주장하면서 한민족의 혈통을 강조해 김일성에 대한 충효 그리고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한 도구로 민족주의를 활용했다. 남 역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힘입어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의 국가적 정체성을 강조하는 ‘대한민국 민족주의’가 강화되어왔다. 해외 디아스포라 역시 해당 거주국의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종족 정체성의 상당한 변용을 겪었다. 거주국 정치 경제 체제의 객관적 조건에 제약되면서 디아스포라는 자신의 생존과 적응을 위해 특정 전통을 선별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을 통해 종족 정체성을 재구성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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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개인의 자유와 시민적 성장을 억압한다는 이유로 민족 이해에서 종족성을 배제하려는 논리는 한반도와 해외 디아스포라의의 복합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일면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민족을 정치 공동체로만 규정할 경우, 중국 조선족은 중국민족이며, 일본으로 귀화한 재일 조선인은 일본민족이며, 한국 국적을 취득한 필리핀 이주 여성은 한국 민족이며, 북한 주민은 한 때 같은 민족이었지만 정치 공동체가 상이한 이상, 더 이상 한국 민족이 아니게 된다. 이런 논리가 복합적 정체성 때문에 실존적 고민과 사회적 갈등을 겪고 있는 남과 북의 주민 그리고 디아스포라 당사자들에게 과연 납득될 수 있을까?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 1998년 월드컵 당시 서울 광화문에서 응원 중인 붉은 악마ⓒhttp://blog.gwangju2015.kr/trackback/657

시민적 민족은 자유와 평등의 보편적 가치를 지니며, 종족적 민족은 피해의식과 인종주의적 폐쇄성을 지닌다는 이분법적인 접근이 아니라, 복합적으로 교차하고 있는 종족 정체성의 현실 속에서 새로운 정치 경제 공동체를 사유하는 것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종족성을 부인하고 시민적 연대를 긍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족성과 시민성을 결합하려는 사유이다.

종족적 정체성과 정치적 정체성의 결합을 사유하기 위해서는 이처럼 한반도의 종족 정체성이 특정한 정치 경제적 조건 속에서 다양하게 변용된 사실을 우선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20세기의 한반도 역사에서 비롯된 종족 정체성의 다양한 변용들을 단일 정체성으로 통합해야 할 정체성의 분열상태가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민족 개념을 사유하는 출발점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민족개념을 사유한다는 것은 단일한 민족국가를 추구하는 기존 민족주의의 틀이나 민족국가를 해체하는 탈민족주의의 틀이 아니라, 식민주의적 억압과 남북의 적대로 인한 상처를 극복하는 자주적 민족국가를 지향하면서도 인류 보편적인 가치를 담은 정치 공동체를 사유하는 사회 철학적 과제와 근본적으로 맞닿아 있다. 달리 말해 이는 남과 북이든 특정 공동체에 의한 민족개념의 일방적 전유가 아니라, 해당 국가의 정치 경제적 틀을 넘어 남과 북 그리고 디아스포라를 아우를 수 있는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전망과 관련된다.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대통령의 악수와 소통의 문제 [이종철의 세상보기철학]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는데 거부하는 나라..어이가 없네. 사실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다. 보통 사람도 악수를 청했는데 거절 당하면 불쾌한데, 그래도 일국의 대통령인데…이쯤되면 막나가자는 것이 아닌가? 이걸 그냥 둬, 말어. 권위주의 시대도 아니기 때문에 잘 못 건드리면 또 벌떼 처럼 달려붙을 텐데…사실 이 부분만 따로 떼어 놓고 비난할 일도 아니다. 과거 노무현 대통령 시절 그를 얼마나 희화화했는가? 현 권력의 핵심 실세는 아예 정신병자 취급하면서 싸이코라고 부르기도 하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배우 분장을 하고 그런 싸이코적 드라마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아랫것들이라고 배우지 말란 법이 있는가? 모 눈에는 모만 보인다고, 서로 막말이나 막가는 태도로 상대를 깍아 내리다 보니 이제 막 돼먹은 집의 망나니같은 아이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모 그런 것을 정색하듯 따지나…그래도 대한 민국의 미래를 해서 탈 권위주의 시대의 소통의 문제를 이야기해보자.?

박 근혜 정부를 ‘불통정부’라 부르는 이가 많다. 국민과의 소통이 적고 권위주의적 성격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 굳이 대통령이 아니더라도 많은 리더들이 이런 비판에 대하면서 억울해 할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아랫 사람들과 끊임없이 소통하려 노력했고, 또 그들보고 이야기를 하라고 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노력을 했어도 아래 사람들이 별로 이야기를 하려고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말 해, 얼마든지, 다 들어 줄께.”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왠지 고압적이고 권위적이다. 이런 분위기에서 말 잘못하면 경을 칠 일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런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것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는다고 자리 깔아줬다고 함부로 입을 나블대다 가는 신세 조질 수도 있다. 그러니 말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느냐를 먼저 판단할 일이다. 종종 TV를 통해 청와대에서 고위 공직자들을 모아다 놓고 회의하는 장면을 보면 가관이다. 수첩 공주 흉내를 내느라고 다들 열심히 펜을 들고 받아쓰기 하는 모습이다. 그들은 회의 참석 전에 관련 문건들을 검토도 하고 오지 않는지 궁금하다. 웬만한 기업이면 다들 사내 인트라넷을 통해 모든 문건들을 등급별로 공유하고 있다. 청와대의 내부 시스템은 다른 어떤 기업들보다 최상급일 텐데 그들은 여전히 종이와 연필을 들고 대통령의 목소리를 받아쓰는 데 정신이 없다. 이쯤 되면 대통령의 목소리는 가신들의 영혼에 각인되는 아버지 남성의 목소리와 다를 바가 없다. 2012년 대선 시 연세대 심리학과의 황상민 교수가 박근혜 후보보고 “생식기만 여성”이라는 말을 했다가 물의를 일으킨 적이 있다. 고위 공직자들도 제 말을 못하는 분위기에서 국민들의 이야기가 제대로 전달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울 것이다. 말로는 연일 소통하자고 하지만 그야말로 꽉 막혀 있다. 불통이 되다 보면 오해도 심해지고 갈등도 많아진다.

?그림을 한 번 보자. 유명한 Matisse의 그림이다. 그림 속의 남자는 고압적으로 서서 여자를 내려다 보고 있다. 반면 여자는 의자에 앉아서 남자를 올려다 보고 있다. 이런 눈높이의 차이는 권력 관계를 반영하기도 한다. 시선으로 제압할 때는 대개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 볼 때이다. 그래서 팽팽한 기 싸움 할 때 상대방 보고 눈 내리까라고 겁준다. 게다가 남자의 손은 주머니 속에 꽂혀 있다. 여자에게 다가 가려는 태도가 아니다.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데서 그만큼 여자의 감정까지도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보인다. 그렇길래 여자는 의자에 갇혀서 남자의 처분만 기다리는 것 같다. 아이러니칼하게도 이 그림의 제목은 대화(Conversation)이다. 대화라면 당연히 서로의 눈높이도 맞추고, 거리도 줄이고, 주머니에서 손도 빼 상대방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때문에 이 그림은 역설적으로 ‘대화의 부재’를 표현하고 있지 않은가? 여자는 그런 고압적인 분위기에서 남자의 일방통행 식의 하명을 거부할 도리가 없다. 여자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침묵하는 것뿐이다. 이런 여자의 마음은 분위기로, 즉 그들 간의 마음이 교류되는 창의 창살로 표현된다. 창살에는 non이 표시되어 있다. 당신이 아무리 그런 식으로 이야기를 해도 내 마음은 ‘아니예요’라는 것이다. 그렇다. 이 역설적인 그림을 통해 대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 수가 있을 것이다. 대화는 소통이다.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한다. 아니 그 전에 서로의 눈높이를 맞추어야 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가 되어야 한다. 오랫동안 불통인 상황에서 갑자기 고압적으로 손을 내미는 것은 폭력일 수도 있지 않은가? 무조건 말하자고, 네 말을 다 들어주겠다고 말만 하지 말고 말을 할 수 있는 눈높이, 거리, 자세를 먼저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이 그림이 주제에 충실하려면 남자가 위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 아니라 무릎을 꿇고 여자의 손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갑자기 그런 제스처를 취하기 힘들면 적어도 다른 의자를 가져와 무릎을 맞대고 서로의 눈을 맞추면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종종 강한 자가, 높은 지위에 있는 자가 그렇게 하면 밑에서 올려다 보는 사람은 더 감동할 수 있지 않을까??

무릇 소통은 되먹임이고 순환이다. 순환이란 높은 것이 낮아지고 낮은 것이 올라가는 것, 혹은 외부가 내부로, 내부가 외부로의 전환이 잘 이루어지는 것이다. 모든 정체는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질 때 나타난다. 맛있는 것을 죽도록 많이 먹어도 변비로 배설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죽을 맛이리라. 로마의 귀족들은 아래로 배설이 안되니까 어거지로 구토를 유도하기도 했다. 그들은 하루 종일 성찬을 즐기면서 바로 옆에다가 그것을 토하는 행위를 반복했다. 하지만 입출력의 자연스러운 균형이 파괴되면 신체의 건강도 깨진다. 현대인의 비만은 대개는 좋은 것을 너무 많이 먹으면서 너무 적게 배설하는 데서 나온다. 나는 새로운 생명의 탄생과 늙은 생명의 죽음도 그렇게 이해한다. 이런 입출력의 균형이 깨어지면 사회 생태계도 깨질 수밖에 없다. 오래 사는 것이 능사일 수는 없다고 본다. 좋은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좋은 삶은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한 삶이다. 그것이 반드시 오래 사는 것과 직결되는 것은 아니다.

2. 동양의 오랜 철학서인 <주역>에도 이런 소통에 관한 괘가 있다. <주역>은 점서로 많이 알려져 있지만, 동시에 중국인들의 오랜 경험이 녹아진 자연관, 우주관을 특별히 괘(卦)라는 일종의 이미지(象)를 통해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이미지는 마구잡이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태극에서 음과 양이 나오고, 이 음양으로부터 4상이 나오고 하는 식의 ‘이치 논리’의 일정한 규칙을 띠고 만들어진다. 그리하여 총 64가지의 괘가 만들어지고, 이 괘를 통해 인간사와 우주 자연사를 설명한다. 이 중에 ‘천지비'(天地否)(왼쪽 그림)와 ‘지천태'(地天泰)(오른 쪽 그림)라고 하는 두 가지 괘가 있다. 이 두 괘는 모두 하늘과 땅이 중첩된 형상을 하고 있다. 천은 하늘이고, 남자이고, 왕이고 하는 것이다. 반면 곤은 땅(地)이고, 여자이고, 백성이고 한다. 만일 우리가 자연의 질서를 고려한다면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자연스럽다. 남자가 하늘이고 여자는 땅이라는 식이다. 왕은 위에서 다스리고? 백성은 아래서 다스림을 받는다. 그래서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괘가 천지비이다. 그런데 이 괘를 설명한 것을 보면 象曰 天地不交이다. 천지가 불통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괘를 얻으면 아주 좋지 않다. 불통이라 함으로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아 폐색되어 있다는 의미다. 장 폐색 때문에 장이 썩는 질병을 생각하면 얼마나 나쁜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입출력이 이루어지지 않고, 순환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하늘이 위에 있고, 땅이 아래에 있는 것이 오히려 불통해서 폐색한다고 하니 이상하지 않은가? 반면 이 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지천태이다. 이것은 땅이 위에 있고, 하늘이 아래에 있는 모습이다. 오히려 이것은 자연의 질서, 사물의 질서, 사회의 질서 등이 전도된 모습이 아닌가? 그런데 이 괘의 설명을 보면 이렇다. 象曰 天地交泰 상에 이르기를 하늘과 땅이 화합하여 태평하다. 전도된 형태가 오히려 화합과 교류가 잘 이루어져 태평하고 번성한다는 의미다. 이 또한 이상하지 않은가? 천지의 관계, 임금과 백성의 관계, 남자와 여자의 관계, 강자와 약자의 관계는 오히려 정상적 형태의 관계 보다는 전도되고 역전된 관계에 있을 때 더 소통이 잘 된다고 하는 것이다. 잘 이해가 안 될 수도 있지만 그 원리는 아주 단순하다.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가라 앉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양을 상징하는 하늘이 아래에 있고, 음을 상징하는 땅이 위에 있다면, 양기는 위로 올라가고 음기는 아래로 내려와서 서로 소통할 수 있지 않은가? 인간을 위시한 우주 만물의 모든 건강은 이런 자연스런 소통에 기초해 있다.

 

머리를 차게 하고 발을 따뜻하게 하라는 것도 이 원리를 적용한 것이다. 동양의 모든 양생 수련법은 수승화강(水升火降)이 기초다. 즉 물의 기운인 음기는 위로 끌어 올리고, 불의 기운인 양기는 아래로 내리는 것이다. 이런 소통이 잘 이루어질 때 신체의 건강이 유지될 수 있다. 책을 많이 보거나 머리를 많이 쓰면 머리에 열이 많이 난다. 열이 나면 골도 아프고 잠도 잘 오지 않는다. 수행을 잘 못 하다 보면 이렇게 양기가 위로 뻗쳐 며칠씩 잠을 못 자서 나중에 머리가 도는 경우가 있다. 주화입마(走火入魔)나 상기증(上氣)이 그것이다. 나도 개인적으로 그렇게 미친 사람들을 몇 번 본 경험이 있다. 그래서 그런건지 옛날 선비들은 열심히 공부해서 책을 한 권 마칠 때마다 반드시 책 걸이 행사를 한다. 이 책 걸이는 음주가무로 노는 것 같지만 사실은 공부 때문에 위로 뻗친 기를 다시 정상으로 되돌리는 작업이라 해도 좋다. 특히 이런 기가 머리로 뻗쳐서 통제가 안 될 때는 육체 노동을 강도 있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대 문호 톨스토이는 통제할 수 없는 이런 양기(성욕)를 풀기 위해 생활공동체를 운영하면서 강도 높은 노동으로 대신했다. 그래서 종종 정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육체노동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육체노동을 하는 사람은 독서나 음악 감상 등 정신노동으로 푸는 것이 이상적이다. 정신과 육체의 통일의 원리가 그 밑바탕에 깔려 있다.

 

그런데 양과 음은 사물의 고정불변하는 속성이 아니다. 양과 음은 관계 속에서 주어지며, 이러한 속성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성장과 소멸을 반복한다. 우리 태극기를 보면 잘 나타나 있다. 음이 커지면 양으로 변하고, 양이 커지면 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런 관계 논리 속에서 음과 양의 지위가 결정되는 것이다. 남자는 존엄하고 여자는 비천하다는 남존여비의 사상도 남과 여를 불변적 속성으로 생각하는 데서 나온 오류이다. 동양의 전형적인 새옹지마의 논리가 잘 보여준다. 그러므로 지천태의 좋은 괘도 방심하면 나빠질 수 있고, 천지비의 나쁜 괘도 대비를 하고 개혁을 하면 얼마든지 좋아질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속에서는 절대적으로 나쁜 것도 없고 절대적으로 좋은 것도 없다. 정치에서 여-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권력을 장악했기 때문에 여이지 불변하는 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선거에서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언제든지 야가 될 수 있으며, 야 또한 불변하는 야가 아니다. 국민의 지지 여하에 따라 여야의 관계가 결정된다. 그런데 종종 정치인들은 이런 권력의 속성을 절대 불변하는 것으로 착각해서 자신의 지위가 역전될 수 있다는 것을 잊어버린다. 권력을 장악하면 일방 통행 식으로 행사하려 하고, 그 권력을 상실하면 한없이 조롱하고 희화화한다. 이런 형태로는 권력에 대한 불신과 혐오감만이 있을 뿐이다. 정작 국민의 지지로 탄생한 그 권력이 진정 국민을 위하는 생산적 권력이 되지 못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 부를 가진 자가 국민과 법 위에 군림하려 해서는 안 된다. 그들이 먼저 하심하고, 낮은 데로 임하려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여야간의 소통, 국민과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다. 이제는 정치인들도 국민이라는 바탕 위에서 서로 상대방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하지 않는가??

다시 소통과 대화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대통령이 악수를 청하니까 직립 감읍해서 두 손으로 받들어야 한다는 것은 권위주의 시대의 관념이다. 그런 일방 통행 식의 권위는 이미 우리 사회에서 상당 부분 의미가 퇘색했을 뿐더러 희화화되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정치인들의 일방통행 식의 악수를 거절했다고 어이없다고 하는 것 자체가 요즘 세대에게는 더 어이없어 보일 수도 있다. 50대가 보수 꼴통이 되는 것은 이런 변화를 인정하려 하지 않고 몸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 남북 정상 회담할 때 김장수 국방장관이 김정일과 악수를 할 때 허리를 꼿꼿이 세웠다고 꼿꼿장수로 칭송을 받은 적이 있다. 북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그것도 어이상실이고 패륜이다. 제왕 같은 지도자 동지 앞에서 감히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악수를 하다니. 하지만 우리 국민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탈 권위주의 시대에 중요한 선거관리 직무를 보는 사람들이 갑자기 직립 도열해서 악수를 해야 한다고 하는 모습이 더 이상할 수 있다. 물론 악수를 거절하는 모습을 무조건 변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맺힌 마음에 악수를 거절했다면 그것을 비난하기 보다는 먼저 그 아픈 마음을 쓰다듬으려는 자세가 필요하지 않은가? 내가 보기에는 그런 장면을 포착해서 이상한 시각으로 전달하는 언론이 더 문제이고, 별 생각 없이 그런 비난에 동조하는 태도도 문제인 것 같다. 그것은 언론의 공정성을 상실한 채, 선거의 효과를 노린 일종의 악마의 앵글이고 편집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