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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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가치에 대해 의심하지 말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③-2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잘 설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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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anyone’의 한 명에 불과한 존재로 여겨지는 현대인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시선에 신경을 쓰며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게 된다. 다른 사람보다 조금이라도 나아야 사회에서 낙오되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일단 비교를 시작하면 우리는 절망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인간마다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누구나 나보다 나은 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이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고, 저 사람은 저런 면에서 나보다 뛰어나다. 항상 내게 없는 능력이 다른 사람에게 있기 마련인 것이다.

이런 식의 비교 속에서 자꾸만 자신에게 절망하게 되면 화가 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주변 사람들이 모두 미워지고 인간 자체에 대한 혐오를 느끼게 된다. 자신에 대한 실망은 자신에 대한 분노로 바뀌고 이러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은 자신도 모르게 자기 자신을 학대하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자신의 주변 사람들도 학대하는 방식으로 대하게 된다는 것이다. 자기를 공격하는 사람이 자기 주변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겠는가? 알코올 중독이 되어버린 가장은 자신에 대한 실망이 지나쳐서 중독자가 된 것이고 중독자가 되어 다시 또 가족들에게 인정을 못 받게 되니까 가족들을 폭력으로 학대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가 사회구성원들을 끊임없이 비교하고 경쟁시키는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는 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 순위는 13위인데 행복체감순위가 97위라는 것은 우리가 경제적 요인외의 다른 측면에서 사회구성원의 행복도를 상당히 저해하는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전반적으로 순위를 매기는 경쟁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기 때문에 가시적인 성과는 단기적으로 나타나지만 이 과정에서 바로 행복이 희생되고 있는 것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192비교는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 이렇게 비교하는 사회에서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확인받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현대인들은 자신의 고유성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쓸 데 없이 타인과 비교하면서 열등감에 빠진다. 그러나 A에게는 A의 장점이 있고, B에게는 B의 장점이 있으며, 나에게는 나의 장점이 있는 법이다. 즉 우리 모두 각자의 장점의 내용은 다르다. 그런데 우리는 이 비교를 부정확하게 하면서 각자의 장점을 제대로 인식해내지 못해 불행에 빠져버리곤 하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된다.

우리는 타인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고서는 열등감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즉 ‘그 사람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고 나에게는 이런 장점이 있구나’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걸 잘 하는데 나는 왜 그걸 못하지?’의 의문을 가지는 것이다.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장점을 비교하는 것이 아니라 그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니 일이 더 커진다.

내가 모자라는 부분에 신경을 쓰다보면 그 부분에서 잘하는 남이 더욱더 눈에 띄게 마련이다. 잘나고 싶고 잘 하고 싶은 욕심 때문에 남이 잘 하는 게 눈에 잘 보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교를 하게 될 때는 자신이 그 사람의 장점과 나의 단점을 비교하는 식으로 잘못된 비교를 하지는 않는지, 그 사람이 가지지 않은 장점을 내가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를 제대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잘못된 비교 속에서 열등감에 시달리는 고통을 줄일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열등감이 무조건 나쁜 것만은 아니다. 내가 어디에 열등감을 느끼는가 하는 것은 내가 어떤 사람인가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정보이다. 어차피 열등한 면이 전혀 없는 사람은 없으니 나는 나의 열등한 면을 열심히 바꿔나가면 되는 것이다. 이미 생긴 열등감이라면 그 열등감을 분석해서 자신의 약점을 파악하고 자신을 계발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이것이 열등감을 가장 잘 활용하는 방법이다. 열등감을 느끼느라 고통스러웠는데 그 고통을 통해 아무것도 얻어내지 못한다면 정말 손해 보는 것으로 끝나고 마는 것이다. 아들러 역시 열등감을 ‘창조성의 원천’으로 보았다. 열등감을 느끼기 때문에 무언가를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나에게 단점이 있어서 큰 일이다.’라고 생각하면 문제는 아주 복잡해진다. 나에게는 나의 성향이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되는 때는 있을 수밖에 없다. 성향이라는 것이 좋게만 발휘되고 나쁘게 발휘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날씨가 변하지 않고 늘 똑같기를 바라는 것처럼 허황되다. 우선 나의 성향은 성향 그대로 인정해야 한다. ‘나는 ~~한 사람이다.’라는 선언을 스스로에게 해야 한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성향이 좋은 방향으로 발휘되도록 발현방식을 조절하는 것뿐이다. 그리고 단점이 있다고 해서 가치가 없는 존재라는 과도한 비약을 해서는 곤란하다. 누구에게나 성향이라는 것은 있고 그 성향이 나쁘게 발휘될 때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un) 신부

안젤름 그륀(Anselm Gr?n) 신부의 말대로 자신의 가치를 느낀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약점과 한계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가치를 의식함을 의미한다. 그는 『자기 자신 잘 대하기』라는, 우리에게 위로를 많이 주는 책에서 “나는 나에게, 내 실수와 약함에 분노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과 공감한다. 나는 그것들에게로 향한다. 그것들은 있어도 된다. 사랑하는 이의 눈길 아래에서 그것들은 변화될 수 있다.”고 말한다. 나의 약점이 ‘있어도 된다’는 것은 중요하다.

약점이 없는 사람은 없다. 나에게는 이러한 약점이, 타인에게는 저러한 약점이 있을 뿐이다. 약점의 종류가 다를 뿐 약점 자체가 없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만 크게 보고서는 타인들이 모두 자신의 약점만 쳐다보며 비난할 것이라고 착각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들은 그렇게까지 나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면 타인도 나의 약점을 더 이상 물고 늘어지지 않는다. 내가 나의 약점에 신경 쓰면 오히려 그 태도가 타인의 공격성을 자극해 계속 공격하게 만드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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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가치는 내가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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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노래가 있다. 그 노래를 듣는 대부분의 사람은 위안을 얻는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니 고마운 마음이 드는 것이다. 철학적으로 보면 사실 근거가 없는 얘기이다. 왜 태어났는지도 모르는데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고 주장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실 또 철학은 삶의 범위를 벗어난 것에 대해서는 유의미하게 언급할 수 없기 때문에 이를 철학적으로 따져 묻는 것은 별로 적합한 일이 아니기는 하다. 철학은 따져들 수 없는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다루어서도 안될 것이다.

17살의 쇼펜하우어는 “이 세상은 선한 존재자의 작품일 수 없다!”고 일기장에 썼다. 쇼펜하우어는 이러한 깨달음을 전제로 해서 이 고통의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철학적으로 고민했다. 살다보면 조물주의 악취미에 대해 절망하는 때가 있다. 왜 존재하게 해서 이 고생을 하며 살게 만드느냐는 원망이 솟구칠 때이다. 사실 ‘세상의 이 모든 것이 왜 존재하는가?’, ‘왜 무(無)가 아니고 유(有)인가?’는 철학의 제1질문이다. 이 역시 답을 유의미하게 낼 수 없는 문제이지만 인간이면 묻게 되는 질문이다. 삶의 이유 자체에 대해서는 철학이 주는 답이 없다. 물론 철학자들은 답을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이러저러한 이유를 찾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이유가 아니기 때문에 나의 삶의 근거가 되지는 않는다.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20대 초반에 삶은 불쾌한 것이라고 결론짓고 ‘불쾌한 인생에 대해 사색하며 지내기로’ 결정한다. 수많은 철학자들의 철학을 접하다보면 그들의 철학 자체가 이유 없이 시작된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유의미하게 살다 가려고 노력한 흔적임을 느끼게 된다. 각자의 성향에 따라 체계적이고 정밀한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고 문학적이고 울림이 있는 내용의 철학을 구축하기도 하지만 설명되지 않는 인생을 자기 나름대로 설명해내려는 그 노력이 가상하게(!) 느껴질 때도 많다. 여하간 분명한 것은 자기 삶의 이유는 자기가 결정하고 자기 인생의 색깔은 자기가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평생 빈민운동에 헌신한 아베 피에르(Abbe Pierre)신부님

아베 피에르 신부님은 인간의 삶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라고 허락된 짧은 순간이라고 하는데 인생에 대해 이보다 더 맞는 답은 없는 것 같다.(지금 나는 논리적 설명없이 비약하고 있다. 이 부분에서는 비약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하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존재로 되기 위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논리를 펴는 편파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 자체에게서 사랑이 자연스럽게 저절로 나오지는 않는다.

사랑은 자기중심적 논리를 극복하는 것이다. 물론 에로스에 입각한 남녀 간의 사랑의 경우 일정 기간 스스로 이 자기중심적 논리를 파괴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당사자 중에 한 명이라도 상대방이 조금이라도 소홀한 것 같이 느끼게 되면 그 사랑이 아주 쉽게 파괴되어버리고 마는 것도 사실이다. 개인차가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부모 자식 간의 사랑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그 사랑에도 계산이 완전히 배제되지는 않는다. “내가 너를 어떻게 길렀는데!”라는 말은 내가 손해를 보았다는 비명이다. 이 역시 사랑이 인간에게서 자연스럽게 그냥 나오는 것이 아님을 알려준다.

그래서 주고도 잊어버리는 사랑이 진짜 사랑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인간은 준 것과 받은 것 중 준 것을 훨씬 더 잘 기억하는 편파성의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에는 능력과 노력이 요구된다.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상대방을 이해하는 능력과 노력, 그리고 상대방의 고유성을 수용해주고 인정해주는 능력과 노력, 즉 전체적으로 인간에 대한 이해력과 인내력이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관계가 부부관계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남녀간의 사랑이기 때문에 주고 받는 대차대조표를 많이 신경쓰게 되고 성별이 다르기 때문에 서로를 이해하는 데도 상당한 노력이 든다. 또 부모 자식처럼 본능적으로 연결된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관계를 유지하는 데에 많은 노력이 든다.

인간은 누구나 손해에 민감하다. 그런데 손해를 보지 않겠다는 마음으로는 사랑을 제대로 할 수 없다. 상대방이 나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의식하지 못하면서도 내가 상대방 때문에 손해본 부분은 너무나 잘 의식하고 기억하는 인간의 인식구조상 사랑을 지속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1등 신랑감, 1등 신부감을 거론하는 데 부모의 유산까지도 감안하는 시대에, 돈이 없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느끼지조차 못하겠다는 시대에 자신이 손해 입는 것을 뻔히 목도하면서 상대방을 참아주는 일은 점점 줄어들 수밖에 없다. 이러한 상황을 고려하면 이혼률이 높아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지금 대학생들을 보면 4명 중 한 명은 부모님이 이혼을 하신 상태에 있다. 나는 학생들에게 자주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라고 말이다. 내가 결혼생활을 15년 넘게 해보니 이혼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말이다. 이혼이 자연스럽다. 자신이 잘 하고 상대방이 못한 것만 기억하고 상대방이 잘 한 것과 내가 잘못한 것은 의식하기 어려운 인간의 인식구조상 이혼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오히려 결혼이 참으로 부자연스럽다. 나를 불편하게 하는 상대방의 생활습관과 가정환경 그리고 상대방 부모님의 비합리성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방의 존재 자체의 어두움 등 그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인내하며 결혼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말한다. 이혼한 부모님을 원망하지 말고 결혼을 유지하고 계신 부모님을 존경하라고 말이다.

꾸미기_DSCN0699인간이 정말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인간을 가장 편안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이 사랑임은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사랑받기 위해 태어났다는 노래는 우리에게 위안을 준다. 그런데 기실 사랑받는 가장 빠른 방법은 사랑을 주는 것이다. 당신은 주변 사람중에 누구를 가장 사랑하는가? 아마도 당신을 가장 사랑해준 사람일 것이다. 설사 당신이 괴롭힐지라도 당신에 대한 사랑의 끈을 놓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당신조차 당신의 가치를 의심할 때에도 당신을 믿어주는 사람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을 두고 ‘가치가 있네 없네’ 평가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다. 누가 감히 인간의 존재 가치를 결정하겠는가? 나의 존재가치는 나만 결정할 수 있다. 내가 가치 있게 살려고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타인의 시선에 매일 필요가 없다. 사회가 인간의 가치를 등급화해서 그렇지 모든 인간은 그 자체로 존중되어야 하는 존재이다.

인간이 만든 돈에 다시 인간이 노예가 되어버리는 아이러니한 현상 속에서 인간은 타인을 인간으로 대우하기보다는 나에게 얼마만큼의 화폐를 제공해줄 수 있는 존재인가를 계산해서 ‘가치 있는 존재/가치 없는 존재’로 나누어 대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 모두는 자신의 가치에 대한 의심을 경험하게 된다. ‘내가 얼마나 소비할 수 있는가’로 스스로의 가치를 가늠하는 체제에서 우리는 자신의 가치를 의심하게 되기 쉽다.

그러나 나의 가치를 내가 믿고 내가 만들어나가지 않으면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는다. 가치 없는 존재란 없다. 존재는 존재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다. 존재하고 있는 나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가치가 있다. 나의 가치에 대한 판단을 타자에게 맡겨버려서는 안 된다. 나의 가치는 내가 나 스스로를 믿고 나를 만들어나가는 데서 생기고 유지되는 것이므로 내가 만들어가기 나름이다. 나는 내가 결정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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