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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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염세주의자의 충고-쇼펜하우어의『행복론』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1

박지용 (경희대 객원교수)

 

이 글은 3월18일 7시에 열린 <논현정보도서관 행복한 고전읽기> ?첫 강연 원고입니다.

 

쇼펜하우어?[Arthur Schopenhauer]?1788. 2. 22 ~ 1860. 9. 21

 

염세주의 철학의 의미

 

B.?러셀은?<서양 철학사>에서 쇼펜하우어를?“특이한 사람”으로 보고,?그 이유를 쇼펜하우어의 염세주의 철학에서 찾는다.?쇼펜하우어에서처럼 지독한 염세주의는 철학의 역사에서 어떤 유별난 태도라고 말하는 것이다.?철학자는 대체로 삶의 의미를 낙관하는 근거를 설명하고자 한다.?무엇을 낙관하고 또 그 낙관의 기초가 무엇인가는 각기 다를지언정 삶과 세계를 의미있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보통 철학자들의 생각이라면,?삶이 철저하게 의미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그 점에서 특이하다는 것이다.

삶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고,?의미 있기도 하고 무의미하기도 한 시간들이 지속적으로 교차하고 반복한다면 낙관도 비관도 아닌 중간적인 것일 수 있다.?삶에 대한 낙관적 태도는 삶을 전체적으로 의미있는 것으로 보고 가치를 부여하려는 긍정적인 태도다.?비관적인 삶의 태도는 삶과 세계를 고통스러운 것으로 보고 그 고통으로부터 인간이 벗어날 길이 없다고 말한다.?그러므로 이 세 가지 각기 다른 삶의 태도들은 긍정,?부정,?그 중간 정도로 분류될 수 있다.

그런데 쇼펜하우어의 관점을 좀 더 옹호적으로 해석해 볼 수도 있다.?삶을 의미있게 보려는 낙관적인 노력이 일종의 철학적인 기만이라는 것이 쇼펜하우어의 생각이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가 진정 말하고 싶었던 바는 삶은 원래 비관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고 이것이 삶의 진리라는 것이다.?비참한 삶을 직시하고 그 진리를 말할 수 있어야 진정한 철학이라는 말이다.?삶의 비참함을 애써 포장하여 마치 의미있는 것인냥 호도하는 것이야말로 거짓된 철학이게 된다.?그러므로 쇼펜하우어의 태도는 비참하지 않은 삶을 비참하게 생각하는 삐딱한 태도가 아니라,?오히려 두려움 없이 삶의 허무를 인정할 수 있는 진리에 대한 용기를 보인다고 할 수 있다.

삶에 대해 갖게 되는 거짓 희망,?삶이 전체로서 의미있다는 태도에 맞서 그 무의미성을 부르짖는 쇼펜하우어를 통해 우리는 삶에 대한 균형 잡힌 시각을 취할 수 있다.?동시에 우리가 갖는 낙관이 과도한 것이 아닌지,?혹은 삶의 무의미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치부하는 것이 아닌지 반성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누구나 삶의 과정에서 간헐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타인의 죽음을 통해,?우리는 삶의 무상성을 자각하게 된다.?무엇하러 우리는 아등바등 애쓰며 살았는가 생각하게 되며 삶은 본래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생각에 이르기도 한다. “삶은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는 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고자 한 바로 그 지점에 접근한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일관념론의 철학과 예리한 대립각을 세웠다.?쇼펜하우어는 대표적으로 헤겔의 철학이 대중을 기만하는 철학이고 헤겔은 그 점에서 진정한 철학자가 아니라 사기꾼이라고 보았다.?그럼에도 현실에 있어서는 쇼펜하우어 자신이 기대했던 반응은 정반대로 나타났다.?쇼펜하우어는 대중들이 자신의 철학의 의미를 이해해주기를 기대했지만 그 소망을 대중들이 저버린 것이다.?당대의 학계와 청중들은 쇼펜하우어보다는 헤겔의 철학에 더 많은 호의를 보이게 되었다.?진실한 삶의 실체를 가리고 기만하는 거짓된 희망일지언정 삶을 낙관함에서 불가능한 희망을 찾고자 애쓴 대중들은 그러한 낙관을 보여준 헤겔에 열광했다.?마치 힘든 현실을 잊기 위해 거짓 성공 신화를 자아내는 헐리웃 영화에 보이는 대중들의 반응과 비슷한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는 것을 알지만,?그러니 우리에게 희망이 필요한 것이야.?허무한 삶을 허무하다고 말하면 삶이 더 허무해지지 않겠어?”?이러한 대중들의 반응은 낙관이 정점에 이를 때,?다시 허무를 수용할 수 있는 탄력을 갖게 되고,?허무주의를 수용함으로써 지나친 낙관이 일종의 중간 상태에 이를 수 있게 된다.?요약하자면 삶의 대한 허무주의,?염세주의는 건강한 삶을 유지시키는 한 방식이지만,?낙관적인 태도와의 연관관계 속에서 나타나는 시대적인 반응이라 할 수 있다.

 

2.?염세주의 철학의 근본토대들.?낙관주의에 입각한 환상 파괴

 

03-18@19-27-36-516-2영원한 진리가 어쩌면 찰나적인 인간의 삶에 의미의 빛을 선사할 수도 있으리라는 희망은 인간이 갖는 근원적인 형이상학적인 초월의 욕망이며,?이 점에서 철학의 목표점은 종교와 같은 것이다.?이러한 진리와 진리를 향한 철학적인 태도를 통해서 삶의 의미가 드러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는다는 점에서 철학자들은 낙관적이다.?그러나 쇼펜하우어에 있어서,?삶은 그 자체로 고통이고 알면 알수록 더 고통스러울 뿐만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도 우리는 고통에서 벗어날 희망이 없어 보인다.?가령 회의주의적인 태도를 지향하는 철학(고대회의주의자,?흄,?몇몇 포스트모던 사상가들)의 경우에도,?진리에 대한 회의는 진리에 대한 가상이 오히려 삶을 왜곡시키므로 삶을 위하여 회의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올바르다는 태도를 취함으로써 일종의 삶에 대한 낙관을 지향한다고 할 수 있다.?그러나 쇼펜하우어의 경우에는 지식으로는 접근할 수 없는 세계의 근본적인 원인 자체가 고통을 유발시키므로 어떤 식으로든 우리는 고통의 그물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함으로써 보다 적극적으로 고통스러운 삶을 말한다.?쇼펜하우어가 생각한 세계는 왜 고통스러운 것인가?

이 물음에 대한 단순한 답변으로 삶이 원래 고통으로 느껴진다는 답을 생각해보자.?그 답은 우리에게 이미 익숙한 어떤 관점이기도 하다.?세상은 고통이다.?불교의 가르침이 바로 그것이다.?쇼펜하우어는 기독교의 교리에 대응되는 철학적인 근본전제들과는 전혀 다른 전제에서 삶을 접근한다.?쇼펜하우어의 세계관은 기독교적인 세계와는 다르며 오히려 불교적인 세계와 유사하다.?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 교리에 대한 반대:?신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 것은 그저 기독교적인 세계관일 따름이다.?고통으로부터의 구원이 가능하다면,?그것은 의지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밖에는 없다.

의지란 무엇인가??쇼펜하우어 철학의 특이성은 의지 개념에 대한 이해에 달려있다.?〈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Die Welt als Wille und Vorstellung〉(1818)에서 표상보다는 의지 개념이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더 독창적이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 “세계는 나의 표상이다”?쇼펜하우어는 현상과 물자체라는 칸트의 구분을 따름으로써 칸트 철학의 충실한 후계자임을 자처한다.?그러나 인식불가능한 것으로 남겨진 칸트의 물자체는 쇼펜하우어에 있어서는 의지 개념으로 변형된다.?세계는 한측면 현상으로서,?또다른 한측면 의지로서 이분화된다.?그러나 이분화된 두 세계의 경계,?마야의 장막으로 경계지워진 두 세계의 구분을 인간은 자신의 존재이해를 통해서 이해하고 또 넘어설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인간에게서는 두 가지 방식의 세계가 동시에 공존한다.?말하자면 인간은 외적으로 신체적 존재로서 현상으로서의 자신을 알고 있고,?내적으로는 자기자신 자체는 곧 의지라는 점을 단적으로 자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즉 의지는 물자체이다.?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앎을 통해 의지는 존재의 근본 원리가 된다.?인간,?생명체,?무기적 자연에 이르기까지 전체 존재는 맹목적인 의지의 소산이라는 것이다.?이러한 개별적인 존재들의 연결망을 존재계 전체의 지속적인 상승화 충동을 낳고 목표도 없이 끝없이 이어지는 운동이며,?그것이 세계자체의 의지인 것이다.?그러나 그 끝은 개별적인 존재에게는 존재의 소멸,?죽음밖에는 없다.?죽음은 살려는 의지에 가해지는 강력한 폭력이며,각 개별 존재에게 애쓰기의 최종적인 종결을 선언한다.

인간은 예술을 통해서는 단지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의지의 봉사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그러나 진정한 해방은 오직 자아에 의해 부과된 개인성의 경계를 무너뜨림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개별적인 존재로서 자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를 적극적으로 포기하는 행위를 통해서 개인은 해방에 도달할 수 있다.?해방은 적극적인 의지의 포기를 통해서 이루어진다.?동정적이고 비이기적이며 친절한 행동에 공감하는 사람,?남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느끼는 사람은 누구나 모든 민족과 모든 시대의 성인들이 금욕주의를 통해 달성한 것,?즉 살려는 의지의 포기에 가깝게 가 있는 것이다.

 

3.?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기 위해서

 

행복에 대한 많은 단상들은 쇼펜하우어의?〈소품과 단편집?Parerga und Paralipomena〉(1851)에서 주요한 주제를 이루는 것이기도 하다.?이 저작은 그의 주저?<의지와 표상으로서 세계>와 비교하자면,?비체계적인 단편들의 묶음이라는 특징을 갖는다.?일종의 에세이적 저작인 것이다.

행복이란 무엇인가??우리는 때로는 행복을 느끼고 때로는 불행을 느끼기도 한다.?그렇다면 우리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가??배가 고플 때 밥을 먹고,갈증이 날 때 물을 마실 때 우리는 신체적인 만족감을 느낀다.?그러나 개체의 의지는 어떻게 해도 충족될 수 없어서 끝이 없다.?그저 하루하루를 생존할 뿐 인생은 참다운 행복에 한발짝씩 다가가지 못한다.?왜 그런 것인가??삶은 그저 살려는 맹목적인 의지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행복이란 도데체 존재하지 않는다.?이루지 못한 욕구는 고통을 주고,?욕구의 성취는 싫증을 낳을 따름이다.?본능은 인간을 생식에로 몰아 세운다”삶에의 의지의 가장 완전한 현상은 죽음을 통해서 드러난다.?삶은 허망한 것이다.?결국은 죽음을 향한 과정으로 삶이 드러나는 것이다.?인생을 환멸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옳다.?지상의 시간은 모든 행복과 삶의 허망함을 우리에게 가르치는 수단이다.?의지가 억제당하고 방해받을 때 고통이 생긴다.?인식의 정도에 따라 고통이 커진다.?세상에 부러워할 만한 사람은 없는 반면,매우 슬퍼해야 할 만한 사람은 무수히 많다.?세상을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그러한 고통이 산재해 있음을 느낀다.

삶은 마치 힘든 과제를 떠맡는 것과 같아서?“나는 인생을 견뎌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삶이 그렇게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면,?합리적인 사고를 할 경우,?아이를 낳아 고통을 되물림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생존이 가능하지 않게 될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 죽었다.?삶의 의미를 종교적인 차원에서 설득하고 그러한 종교적인 교리를 사람들에게 설파하는 철학자들은 모두 사기꾼들이다.

기독교 신은 세상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고도?“모든 것이 매우 보기 좋다”고 자화자찬하는데 이는 종교적인 교의 중에 가장 열등한 것이다.?인간은 존재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죄 많은 것,?불합리한 것,?원죄로 이해된 것,그 때문에 죽을 운명에 처한 것이라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 좋다.?왜냐하면 그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맹목적인 의지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라고 명령을 내리고 우리는 맹목적으로 따르지만 의지 자체의 배후에는 아무 것도 없는 텅빈 공허뿐이다.

악몽과 같은 삶에서 깨우나는 것은 죽음을 통해서이다.?자살은 다른 사람에 위해를 가하는 행위에 비하면,?특별히 도덕적인 오류가 없다.?그러나 세계의 고통이 증대되므로 그리 옳은 행위라고는 할 수 없다.?생명을 소멸시킨다고 해서 의지 자체가 소멸되지는 않는다.?자살은 살려는 의지를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저 생명을 버리는 것이므로 근본적인 해결책일 수 없다.?오히려 가능한 하나의 해결 방식으로서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이념에 대한 인식 가능성을 제안하고 있다.?도덕의 형이상학적 이념보다는 미학적 이념이 마야의 베일 너머 세계의 실재를 인지하게 한다는 것이다.?고통 자체에 대한 순수한 인식은 예술가적인 인식을 통해 가능하다.?현상을 벗어난 나를 현상을 넘어선 물자체를 인식하는 것 그것은 예술이다.

삶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삶으로부터의 구원.?현상적 삶으로부터 구원이다.?기독교적 정신은 금욕적인 정신이다.?금욕적 정신이 삶에의 의지의 부정인 것이다.?의지의 부정이야 말로 구원에 이르는 길이다.?신약의 성경 정신의 핵심은 바로 의지의 부정 금욕적 삶의 이상을 주장하고 있다.?의지의 긍정은 자의식을 자신의 개체에 한정하는 것을 전제로 하며,?우연에 의한 행운을 기대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결국 타자의 불행에 공감하는 것이 의지를 부정하는 것의 방법이다.?자기 의식을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자기 부정을 이겨내려는 강박증이다.

칸트에서 의지란,?인간의 실천이성과 신이 조화된 세계,?목적으로서의 세계를 말한다.?그러한 의미에서 쇼펜하우어는 근대 서구전통에서 최초의 반기독교적인 철학의 원류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의지라는 점에서 여전히 관념론적이다.?비합리주의는 합리주의적 세계관에 대항한 관념론이다.?세계는 실재로 의지인 것이다.?서로 살려고 하는 아전투구의 현장이 바로 세계의 실재인 것이다.?허무한 세계를 마주 대할 수 있는 지적인 통찰과 용기를 갖는 것,?무의미한 삶을 지탱할 수 있는 저력을 갖추는 것이 낮은 시선으로 세계를 통찰하는 철학적인 삶의 의미인 것이다.?즉 쇼펜하우어는 세계의 낙관에 저항하는 것 자체가 삶에 대한 철학적인 자세라고 말하는 것이다.?구원은 없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하는가?

예술은 사물의 현상적인 재현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존재 자체의 본성(이념)을 드러냄으로써 현상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한다.?현실의 고통을 피할 수 있게 하는 위안이다.?고통을 제거하는 윤리적인 대안으로써 고통에 대한 감수성,?연민과 동정을 들 수 있다.?금욕적 삶의 태도 또한 의지를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라 할 수 있다.

 

 

논현정보도서관 다음 강의는?4월 22일 ?행복에 이르는 길?-?아리스토텔레스의?『행복론 : 김성우(兀人고전학당 소장) 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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