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상노동[자본론 강독]-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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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미나 참석 : 이재유, 김선이, 김성심, 신재길, 신준하, 옥철
정리: 신재길
?*? 2012년도 교육강좌 후속 세미나로 [자본]을 읽고 있습니다. 세미나 팀에서 매번 정리하여 웹진에 연재하기로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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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상품 가치와 관련한 추상적 노동은 인간노동력 일반의 지출로 나타난다.
“만약 생산 활동의 규정적인 성격, 따라서 노동의 유용한 성격을 무시한다면, 생산활동은 다만 인간노동력의 지출에 지나지 않는다. 재봉과 직포는 비록 질적으로 다른 생산활동이기는 하나 모두 인간의 두뇌. 근육. 신경. 손 등의 생산적 소비이고, 이 의미에서 모두 인간노동이다. 재봉과 직포는 인간노동력의 지출의 두 가지 서로 다른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자본론1상 55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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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는 이렇게 추상노동을 생리적학 의미의 인간노동일반으로 설명한다.
하지만 가치를 생산하는 추상노동이 단순히 인간노동일반일 경우 가치가 갖는 역사성을 담아낼 수 없다. 가치는 상품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상품생산사회에 나타나는 역사적 개념임을 앞에서 보았다. 하지만 추상노동을 단순히 생리적 노동력의 지출이라고 한다면 이런 생리적 지출은 어떤 사회에서나 필요한 노동이 되고 만다. 가치를 생산하는 노동뿐만이 아니라 인간 활동이면 모두 적용되는 너무 일반적 개념이다. 하지만 맑스가 말하는 추상적 노동은 상품생산사회의 특수한 노동을 말하는 것으로 위와 같은 정의로는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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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추상적 노동은 역사적 범주로서 상품경제에만 존재하는 사회적노동의 특수한 형태이다.
“상품의 가치는 순전한 인간노동[즉, 인간노동력 일반의 지출]을 표현하고 있다.”(상동)
“재봉과 직포의 특수한 질이 무시되고 양자가 인간노동이라는 동일한 질을 가지는 한, 재봉과 직포는 저고리와 아마포의 가치의 실체를 형성한다.”(자본론 1상 57p, 김수행)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인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자본론1상, 58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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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인용문들에서 인간노동 일반으로서의 추상노동은 상품가치와 관련되며 상품가치의 실체를 형성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품가치는 상품간 비교 등등화를 위한 기초로서 작용한다. 이는 개인적이고 구체적 노동이 상품교환을 통해서만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된다는 것을 말한다. 개인적 노동에 의해 생산된 생산물은 다른 상품들과 비교 동등화를 통해 교환될 때 만 사회적으로 그 가치가 인정된다. 상품에 내재한 개인적 노동은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 때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되는 것은 개인적 구체적 노동인 재봉이나 직포노동으로서가 아니라 재봉과 직포을 생산하는데 들어간 인간노동일반으로서 이다. 이것이 상품을 생산하는 인간노동으로서의 추상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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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상품을 생산하는 추상노동은 당연히 사회적 노동의 성격을 갖게 된다. 그러나 사회적 노동이 노예제, 봉건제 또는 사회주의에서는 추상노동의 형태를 갖지 않고 구체적 노동이 직접적으로 사회적 노동으로 나타난다.
노예제나 봉건제에서 구체적 노동 그 자체로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된다. 노예제나 봉건제에서는 노동생산물이 교환을 통해, 즉 생산물의 비교 동등화를 통해 교류되는 것이 아니다. 봉건제에서 주된 경제활동은 가치교환이 아니라 가치의 일방적 이전에 따라 이루어진다. 농노나 노예들은 자기가 생산한 생산물을 일정한 비율에 따라 또는 전부를 영주나 노예주에게 이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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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신분제 사회에서는 어떤 생산 분야가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가치보다도 더 많은 노동력이 투여되어도 사회적으로 필요하다면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유지된다. 주로 하층민들이 생산하는 생산물에 투여된 노동은 그 투여된 노동가치 이하로 평가된다. 따라서 노예제나 봉건제등의 신분제에서는 인간노동이 동등하게 평가 되지 않기 때문에 인간노동일반을 비교 동등화시키는 추상노동이라는 개념은 생겨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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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 사회에서도 구체적 노동은 계획에 의해 직접 사회적 노동으로 인정된다. 사회주의적 생산에서 노동생산물은 사전 계획에 의해 생산되기 때문에 교환이라는 과정에 들어가기 이전에 이미 사회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순수 계획경제라면 생산도 분배로 사전 계획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상품간 동등비교를 위한 추상노동이 문제가 되지 않고 계획된 생산물을 생산할 구체적 노동만이 고려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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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품생산사회에서는 구체적 노동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사회적 인정을 받지 못한다. 상품생산사회에서 상품생산자들은 자기의 책임 하에 사용가치를 생산하는 각이한 종류의 구체적 노동을 지출하여 시장에서 상품을 교환할 때 비로소 그 노동은 사회적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은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의 뒤에는 모든 노동에 있는 어떤 공통된 것이 숨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공통적인 것은 서로 다른 구체적 노동을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인 인간노동일반이다. 이 구체적 형태와는 관계없이 인간노동일반의 지출로서 나타나는 상품생산자의 노동을 추상적 노동이라 한다. 이렇듯 추상노동은 상품교환이 일반화된 상품생산사회와 관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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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추상노동은 ‘일반적 인간노동’이라기보다는 ‘상품을 생산하는 일반적 인간노동’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추상적 노동의 역사성을 담지 할 수 있을 것이다.
3. 추상노동은 가치의 계산단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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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가치의 크기는 그 상품에 들어 있는 노동량만을 표시하기 때문에, 상품들은 어떤 일정한 비율을 취하면 그 가치가 동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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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종류의 노동이 그 측정단위로서의 단순노동으로 환원되는 비율은 [생산자들의 배후에서 진행되는]하나의 사회적 과정에 의해 결정되며, 따라서 생산자들에게는 관습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처럼 보인다.”(자본론1상, 56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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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복잡한 노동은 강화된 또는 몇 배로 된 단순노동으로 간주될 뿐이며….이와 같은 환산이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은 경험으로 안다”(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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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치와의 관련에서는 [노동이 벌써 순전한 인간노동으로 환원되어 있으므로] 양적으로만 고려된다. … 노동력이 ‘얼마나’ 지출되는가, 즉 노동의 계속시간이 문제로 된다.”(자본론1상 57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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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노동이라는 각기 다른 구체적 노동에 공통된 실체를 파악함으로 해서 이제 가치를 측정할 수 있는 단위를 얻게 된다. 상품이 가지고 있는 가치는 이제 추상적 노동의 노동량에 따라 측정할 수 있다. 이는 도량형의 통일과 같다. 이제 제각기의 다른 노동은 추상적 노동이라는 공통된 척도로 비교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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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남는 문제가 있는데 상품을 생산하는 인간노동 일반에도 노동자마다 다른 복잡도와 숙련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맑스는 이를 비숙련 단순노동으로 환산할 수 있다고 전제한다. 이는 관습적으로 이해되고 경험적으로 안다고 한다. 맑스는 계산의 단순화를 위해 이를 전제하고 논의를 진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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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추상적 노동과 구체적 노동은 하나의 노동과정이다.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생리학적 의미에서 인간노동력의 지출이며, 이 동등한 또는 추상적인 인간노동이라는 속성에서 상품의 가치를 형성한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노동은 특수한 합목적적 형태로 인간노동력을 지출하는 것이며, 이러한 구체적 유용노동이라는 속성에 사용가치를 생산한다.”(자본론1상 58p, 김수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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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하나의 동일한 노동과정이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한편으론 추상노동이 다른 한편으론 구체노동이 수행되고 있는 것이다. 외투을 만드는 구체적 노동은 그 자체가 인간노동력의 생리적 지출이다. 이는 상품이 사용가치를 가지면서 동시에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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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미향의 두 자화상[보고 듣고 생각하기]
/0 Comments/in old & goodys, 문화 & 생각보기, 보고 듣고 생각하기 /by cabeza감성적 내일을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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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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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본 웹진의 [문화보기] 코너에 성황리에 연재를 한 [나무이야기]와 작가의 블로그http://dandron.blog.me/에 있는?김설미향 작가의 그림에 대한 단상임을 알립니다.
1. 작가의 두 자화상이 있다. 하나는 드로잉 자화상들이다. 다른 하나는 [나무이야기]라는 타이틀의 자화상이다. 나무들을 자화상이라고 [과감히] 말하는 이유는, 작품에는 항상 작가의 의식이 따른다는 예술 일반론에 기대어 하는 말이다.
드로잉화 자화상들은 제목도, 번호도 없다. 이들은 하나같이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얼굴은 일그러지거나 뼈만 남은 듯 볼 품 없다. “음, 그림이 꿈틀거리는군요. 자기 얼굴은 자기가 잘 아는 법, 자화상의 진가를 느끼고 감”이라는, 알쏭달쏭한 덧글을 남기고 가는 이도 있다. 나도 덧글을 따라, ‘그림이 요동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려 애써본다.
그나마 작가의 자화상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의 행복하지 않은 심정을 읽을 단초가 있다. 작가는 묻는다. “나의 가족은 무엇”인가? 잠자다가도 작가는 운다. 추측으로만 가능한 트라우마가 있다는 의미이다. “쓰레게 줍는 노인들에게 슬프고”, 소비의 방향을 잃은 사람들 때문에 슬프다.
또 다른 작가의 자화상, [나무이야기]의 그림들은 드로잉 자화상에 비해 분위기가 다르다. 밝은 채색이 우선 시선을 붙잡는다. 연결되는 짧은 이야기들 덕분에 그림들에 논리적 순서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숲 속의 나무가 행복한 봄을 즐긴다. 나무는 아이들(사람들)에게 풍성히 베풀어준다. 그러나 무참히 상처받는다. 상처받고 잠이 든 나무는 동료들의 위로에 따라 다시 깨어난다(다시 생명을 얻는다). 나무는 나비들과 새들을 포함하여 자연과, 사람들과 관계한다. 아마도 자화상은 자연에 있는 모든 존재들과 생명을 나누기를 꿈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해서 ‘예술은 삶을 짓누르는 형식에다가 인간의 의미를 새겨 넣는다’는 경구가 성립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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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을 읽기 위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 전반부(1-5절)에서 말하는 예술 일반론을 짧게 언급할 필요가 있다. 고전 예술론과 니체에 의하면 예술은 자연의 모방이다. 그러나 단순한 자연모방이나 사실을 표현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실로부터 등을 돌려, 사실에 대한 인상이나 착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자연의 모방이란 주관인 내가 객관인 자연과 상호 교호작용을 하는 방식이다. 니체는 교호작용의 예를 서정시인의 시작(詩作) 상태를 빌려 설명한다. 서정시인에게 기쁨(해방된 욕구)과 비애(억압된 욕구)의 상태에서 자연에 대해 자신을 주체로 인식한다. 결핍된 욕구인 열망이 해방받기 위해 분출된다(니체 식으로 말하면, 욕망이 주관을 이끌어낸다). 니체를 따라, 쇼펜하우어 식으로 말하면 어떤 욕구가 충족되면 다른 욕구가 다시 생기게 마련이다. 주관의 열망이 분출되면 자연 경관이 다시 우리의 욕구를 순수한, 의식 없는 인식을 갖도록 해 준다. 이렇게 해서 예술가의 창작 상태는 주관적 의지와 반성적 자연 상태를 나누어갖게 된다.
예술가가 이처럼 자연을 모방하게 되는 것은 가상에 대한 필요성 때문이다. 니체는 라파엘로의 그림(천국과 지옥)을 빌려, 예술가가 왜 가상을 필요로 하는지 설명한다. 인간은 그의 토대에서 고통스러운 존재이다(그림 하반부). 그러나 매 순간 가상(상반부)이 만들어내는 욕구 충족경험을 한다. 이렇게 하여, 표현된 것으로부터 새로운 가상인 즉 [가상의 가상] 세계가 만들어진다. 새로운 가상은 이 세계를 [살 만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니체의 유명한, “세계는 예술로서만 정당화된다”는 경구가 완성된다.
예술 일반론에 더하여 리얼리즘 예술론도 잠깐 살펴보자. 까간은 [미학 강의]에서 리얼리즘과 고전 문학의 차이를 명료히 했다. 고전문학에서는 성과 속, 미와 추의 게토가 엄격히 분리되어 있었다. 그러나 리얼리즘에서는 이 게토가 무너진다. 인간은 천사도 아니고, 그 내면은 추악하기 짝이 없다. 예술가가 현실의 미, 추를 적나라하게 밝히는 이유 역시 어떤 목적 때문이다. 예술 일반론에서 예술의 목적이 가상에 대한 필요였다면 리얼리즘 예술의 목적은 사회적 치유에 있다. “그대들, 젊은이들을 위해 시인은… 플라터너의 거친 혓바닥으로 폐결핵의 가래침을 낱낱이 핥는다”. 미래를 위해 현재의 해악들을 제거하겠다는 것이 리얼리즘의 진수이다.
회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피카소를 어느 화풍이라고 규정하든, 그의 그림 [게르니카]에는 리얼리즘이 숨쉬고 있다. 그는 그림을 통해 인간의 잔인성과 야만을 고발하고 있다. 말들이 죽어가고, 인간이 학살당하고 있다.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면 사진도 있고, 신문 기사도 있다. 그러나 리얼리즘 예술을 리얼리즘 예술답게 하는 이유는 인간의 야만성을 고발하고(이것이 현실이다), 참 인간화된 세계는 이런 것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웅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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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제 김미향의 그림들을 다시 읽을 수 있다. 또 다른 자화상인 그림에 첨가된, 이해 가능한 절제된 경구들에는 풍성한 의미들이 숨어있다. 인간은 물론 자연과의 교호작용, 형제 관계를 형성하겠다는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다. 나무의 눈을 보자. 그(녀)는 암, 수 구별 이전의 존재로서 나비(이성이 아니다)를 쫒고, 아이들을 쫒고, 죽었다가(잠들었다가) 다시 깨어(살아)난다. 자연이란 원래 ‘생명’의 다른 이름이 아닌가. 그래서 “시는 나와 같은 바보나 짓지만, 나무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뿐”이라는 외침이 가능할 것이다.
우중충하고 암울한 드로잉 자화상에는 다행스럽게 귀에 헤드폰이 걸려있다. 작가가 위로받을 양식이 있는 것이 다행스럽다. 자세히 보면 그림은 적적성성(寂寂惺醒)하다.
?고요한 가운데 깨어있음이 분명하다. 눈은 차분하게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다. 잠들어 있지도, 요동치지도 않는다. 다시 들여다 보면, 눈은 아마도 맑은 갈색이리라 짐작하게 된다. 어쨌든 눈은 맑다. 응시하는 시선이란 반성적 시선이요 현실에서 일어나는 어느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작가는 오늘날 가족일반에 대해 반성한다. 가족 일반이라는 말이 중요하다. 현실을 사실적으로 바라본다는 의미이다. 박범신은 이득과 희생을 강요하는 오늘 가족의 세태를 그리지 않았던가. 어느 여성은 옷 장사하는 시누이가 제사 때마다 짝퉁을 들고 와 강매하는 통에 죽을 지경이라는 하소연을 했다. 가족 관계에서조차 장사꾼의 이득 논리가 지배하는 현실이라면 그런 장사꾼을 믿느니 차라리 창녀를 믿으라는 마크 트웨인의 경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가족을 이처럼 갈기갈기 찢어놓은 이유는 무엇보다도 공평하지 못한 사회적 분배에 기인한다는 것을 누가 모르랴.
가족이란 내게 무엇인가? 소통하는 존재인가? 의지할 수 있는 존재인가? 필자는 [비가 오면 우산이 되어주]는, [그림 6]에 기대어 작가의 의도를 과감하게 추측해 본다. “오늘은 내게 기대세요, 내일은 내가 당신에게 기댈께요.” 그림책의 나무들은 작가가 현실에서 살아가는 소명(Gerufe)을 보여주는 듯하다. “좋은 예술가가 되어 타인들(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 그녀의 바램이다. 나에게 와서 쉬라. 오늘 가족 일반에게 이것이 가능한가? 가능하다면 가족 공동체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족은 또 다른 지옥이다(홍 선생님 어록). 가족은 작은 사회이다. 가족이 이득관계로 지옥이듯이 사회 역시 이득관계로 지옥이라면, 이런 사회와 가족은 지양되어야 한다. 이 예술가의 의도이다.
드로잉 자화상에 이어지는 글 속의, 작가가 행복할 수 없는 요소들에 대해 반드시 짚어야 한다. 폐지줍는 노인과 몸 파는 여성들 때문에 고통받는 작가는 ‘창밖에 떨고 있는 저 개 한 마리 대문에 결코 행복할 수 없’는 존재이다. 타인의 고통에 무딘 것이 오늘 사회 현상임을 작가는 고발한다. 삶의 의미를 묻는 작가의 의도는 여기에 있는 듯하다. 더 나은 사회는 가슴과 가슴으로 만나는 사회여야 한다. 타인의 고통에 민감한 사회이어야 한다.
작가가 인간으로 많은 약점을 지녔다하자(자화상에서 보듯, 수려하지 않은 외모이든, 시에서 보듯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든). 시인의 의도는 범인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아도 되리라. 그러나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로서 많은 장점을 지녔기에 그녀는 참 좋은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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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를 위한 그림책이라 생각하고 가벼이 읽다가(보다가), 몸 어느 부위를 때리는 충격을 받는 것은 뎅커(Denker)로서의 기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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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3일!!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 정신분석학의 철학이 시작합니다[ⓔ시대와철학알림]
/0 Comments/in old & goodys, ⓔ시철 아카데미, 한철연소식 /by cabeza프로이트에서 들뢰즈까지 :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프레시안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하는 철학사 강의 그 세번째 강좌가 시작합니다.
2013년 6월 13일 부터 – 8월 22일 까지 매주 목요일 7시 30분-9시 30분 총 10강으로 진행되는 강의에 많은 신청 부탁드립니다.
<다시 읽는 현대 철학사 시즌3>: 정신분석학의 철학
-멘토와 힐링이 키워드가 된 시대, 정신분석학을 철학적으로 공부하기
정신분석학은 임상 치료에서 시작하여 임상 이론을 거쳐 거대한 사상적 흐름을 바꾸는 철학이 된다. 더 나아가 정신분석학은 일상생활의 필수어가 되고 문화와 정치를 설명하는 이론이 된다.
이러한 정신분석학의 영향력은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과 다윈의 진화론에 비견된다. 이러한 지위에 오르기까지 여러 천재적인 인물들의 고뇌와 노력이 필요했다.
우선 과학적으로 고전주의적인 경향으로 정신분석학을 연구하는 경향이 있다. 과학적인 정신분석학을 창안한 프로이트는 말할 필요도 없다. 또한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당하지만 오히려 정신분석학을 구조주의와 탈구조조의라는 새로운 철학적 흐름의 원류로 전환한 라캉도 있다. 이러한 라캉을 문화 비평과 정치 비판에 적용하여 세계 철학계에 혜성처럼 등장한 지젝의 이름도 빼놓을 수 없다.
이와는 다르게 욕망의 해방을 꿈꾸는 낭만주의적 흐름이 있다. 프로이트의 총망하던 제자에서 이론적인 적대자가 된 융은 리비도를 성적인 차원에서 해방하여 신화와 동양철학을 복권하는 뉴에이지 철학의 기초를 정신분석학적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신비주의인 관점과는 달리 사회해방이론으로서의 정신분석학의 가능성을 보여준 라이히가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마르쿠제를 비롯한 프랑크푸르트 학파는 정신분석학과 맑스주의를 결합해서 욕망의 해방으로 상징되는 혁명적인 정치학을 제시한다. 게다가 단순히 프로이트나 라캉의 정신분석의 오이디푸스적인 가족 관계의 협소함에서 탈피하여 새로운 욕망의 해방 이론을 제시한 들뢰즈와 가타리의 분열분석이 있다.
마지막으로 기존 철학계의 남성중심성에 문제제기를 하는 여성주의적인 정신분석학의 흐름이 있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시적 언어의 해명을 통해, 주디스 버틀러는 기존의 정신분석학에 내재한 이성애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를 비판하며 여성주의적 탈구조주의적 형성에 기여한다.
일시: 2013년 6월 13일 – 8월 22일 매주 목요일 7시 30분-9시 30분(총 10강)
장소: 프레시안 건물 1층 강연장 (마포구 서교동 395-73 bk빌딩)
주최: 프레시안 신문사,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도서출판 오월의 봄
강사: (사)한국철학사상연구회 교수진
수강료 -전체수강 : 25만원
-두 사람이 함께 신청할 경우 2명 35만원의 할인된 금액으로 신청 가능합니다.
-개별 강의 수강 : 강의당 3만원
신청 안내
무통장 입금 후 메일(admin@pressian.com)로 성함과 연락처를 보내주시면 됩니다.
[국민은행, 292501-01-121940 예금주:(주)프레시안]
강의문의: 02-722-8546(담당자 민정훈)
강좌 안내
1강 프로이트 1 – 무의식에 이르는 길 : 꿈, 히스테리, 성욕 ?연효숙 교수(6월 13일)
2강 프로이트 2 – 쾌락원칙을 넘어서 : 충동, 신경증, 초자아-연효숙 교수(6월 20일)
3강 라캉-프로이트로의 귀환-김성우 교수(6월 27일)
4강 지젝-욕망과 의지가 아닌 충동의 주체-김성우 교수(7월4일)
5강 융-무의식의 중층 구조,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행?이정은 교수(7월 11일)
6강 라이히-해방! 사회적 소외에서 오르고노미로-이정은 교수(7월 18일)
7강 마르쿠제-일차원적 사회의 감옥을 부수는 에로스의 힘-박민미 교수(7월 25일)
8강 들뢰즈/가타리-정신분석에서 분열분석으로-신승철 교수(8월 1일)
9강 줄리아 크리스테바-아버지 법을 전복하는 어머니의 몸과 시적 언어-서영화 교수(8월 8일)
10강 주디스 버틀러-남근 중심적인 이성애 질서로서의 정신분석학 비판-윤지영 교수(8월 22일)
강좌 소개
<1강과 2강> 프로이트-연효숙(연세대 외래교수)
프로이트 1 : 무의식에 이르는 길 : 꿈, 히스테리, 성욕
프로이트 2 : 쾌락원칙을 넘어서 : 충동, 신경증, 초자아
정신분석학자 프로이트! 그는 20세기에 무의식의 영역으로 걸어 들어갔다. 지금 21세기에도 무의식을 언급하지 않고 어떻게 현대적인 사상과 문화, 예술 심지어 영화를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프로이트는 평생동안 자신의 진료실에서 새로운 사유의 혁명을 준비했다. 프로이트는 강단 철학의 영역에서 무시되었던 꿈의 의미를 해석하였으며, 히스테리 환자들을 통해서 인간의 본성이 성욕에 집중되어 있음을 간파하였다. 후기에 프로이트는 인간 본성을 지배하는 쾌락원칙 너머의 죽음 충동을 역설함으로써 또다른 인간의 면모를 밝히고자 하였다. 충동이 억압되는 문명의 생활에서 누구나 다 조금씩은 신경증 환자가 될 수밖에 없는 불가피성도 역설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동의하든 하지 않든 간에 이후 수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의 문제 의식에 빚지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3강> 라캉-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프로이트로의 귀환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프랑스의 철학자인 알랭 바디우는 라캉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반(反)철학자인 라캉이야말로 철학의 르네상스를 위한 조건이다. 오늘날 철학은 라캉과 양립할 수 있어야 가능하다.” 실로 라캉은 1950년대부터 30년 동안 그 유명한 세미나를 통해 파리 지성계의 흐름을 주도하며 많은 후속 철학자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된다. 물론 정신분석학자인 그가 표방한 것은 “프로이트로의 귀환”이다. 하지만 그는 정신분석학을 임상의 공간이 아닌 철학의 차원으로 발전시킨다. 그의 정신분석학적으로 다듬어진 철학적 문제의식과 개념들은 문학과 영화 등 문화 비평에 두루 영향을 미치게 된다.
라캉의 사상은 크게 두 시기로 나뉜다. 1950년대의 구조주의자로서의 초기 라캉과 1970년대 이후의 탈구조주의자로서의 후기 라캉이 그것이다. 정신분석학에 입문하면서 맨처음에 관심을 쏟은 상상계에서 벗어나 상징계에 초점을 맞춘 구조주의자로서의 라캉은 파리 지성계와 더 나가 세계 철학계의 새로운 철학적인 조류인 구조주의의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친다. 초기 라캉에게 정신분석적인 치료의 성공은 무의식적인 증상(코드화된 메시지)을 통해서 말하는 ‘나, 즉 진실’에 귀를 기울이는 ‘상징적인 깨달음‘의 해방력에 의존한다. 그러나 라캉의 후기 단계에 이르면 그도 한때 믿었던 무의식적인 욕망이 급진적이고 혁명적인 힘이라는 생각을 버린다. 법을 위반하는 행위도 여전히 법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의 금지에 의해 욕망은 생겨난다. 그래서 욕망은 큰 타자에 등록되어 있다면 주체는 이와는 다르게 큰 타자 바깥에 이것과는 독립적으로 실존한다. 주체는 그것(이드), 즉 충동의 자리이다. 이렇게 라캉의 사상적 궤적은 다시 상징계로부터 리얼로의 옮겨가는 여정을 그린다.
<4강> 지젝-김성우(兀人고전학당 연구소장)
욕망도 아니고 의지도 아닌 충동이 근대적 주체성의 핵심이다.
지젝은 라캉의 정신분석학적인 개념을 가지고 독일 관념론을 해석하며, 독일 관념론의 변증법을 활용해서 정신분석학을 철학적 지반 위에 올려놓는다. 그는 정신분석학의 개념들을 가지고 영화와 문화, 정치와 조크의 사례 분석을 다양하고 날카롭게 시도하여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공감대와 호소력을 획득한다. 그는 상징계 중심의 구조조의적인 초기의 라캉보다는 리얼을 강조하는 후기의 라캉을 소개하고 문화 비평과 정치 분석에 탁월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지젝이 해체론으로부터 라캉의 정신분석학을 통해 독일관념론으로 복귀한 이유는 데카르트가 발견한 주체성이라는 지반을 포기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주체 해체를 비판하고 근대 주체의 복권을 추진한다. 근대 주체의 복권이 그의 철학의 세 중심축(라캉의 정신분석학, 독일관념론의 변증법, 이데올로기 비판)을 하나로 엮는 핵심적인 주제이다. 그런데 지젝에 의하면 과학적 자연주의(뇌과학, 진화론 등)와 담론적 역사주의(해체주의)이라는 민주적 유물론과 이에 대한 영적인 반작용으로 일어난 뉴에이지 서구 불교와 선험적 유한성의 사유(하이데거)라는 네 가지 현대 철학적 경향들이 각기 주체 해체를 시도한다. 이러한 현대 철학의 주체 해체 경향에 맞서 지젝은 라캉의 무의식의 주체를 충동의 주체로서 포괄적으로 정교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초기 라캉에서 후기 라캉으로의 전환을 상징하는 것이 욕망의 주체로부터 충동의 주체로의 강조점의 이동이다.
<5강> 카를 융-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무의식의 중층 구조, 집단적 무의식으로 이행
무의식을 언급하면 정신분석학, 프로이드, 리비도를 연상한다. 그러나 무의식을 리비도에 한정하면 인간 이해가 편협해지지 않는가라는 생각을 할 법도 하다. 프로이드 제자들 중 그런 길을 걷는 사람은 정신분석학회에서 제명되거나 탈퇴당하는 강권 속에서 활동한다. 칼 융은 자신 스스로가 정신병 환자였으며, 의사로서 오랜 임상실험을 거치면서 무의식 층위를 확장하고 다층화한다. 무의식은 리비도로 한정되지 않는 인격성과 전체성을 지니며, 자아의 저편에 놓여 있는 참된 자기의 근간이다. 참된 자기에는 개인적 의식 이외에 태고 적부터 누적되어 온 원형적 의식, 집단적 무의식이 있으며, 이것이 개인들의 차이와 공통성을 설명하는 기반이다. 집단적 무의식을 통해 남성 안에서 여성성과 여성 안에서 남성성이라는 아니마와 아니무스의 측면, 신과 만나는 지점들을 프로이드와 다르게 전개해 나간다.
<6강> 빌헬름 라이히-이정은(연세대 외래교수)
해방! 사회적 소외에서 오르고노미로
일찍이 프로이드 수제자이면서 애제자로 출발하지만, 프로이드 이론에서는 성해방이 개인문제로 환원되고 어릴 적에 성심리가 결정되면 변화 가능성이 낮다고 보기 때문에, 라이히는 프로이드에게 반기를 든다. 라이히는 무의식을 사회와의 연관성에 더 초점을 맞추어 설명하려고 한다. 성해방과 사회해방이 연관되어 있고, 사회해방은 성해방과 연관되어 있다는 관점에서 마르크스주의 운동에도 참여한다. 이를 통해 파시즘 같은 독재정치의 발현을 설명하는데, 이것은 곧 정신분석학에서 일탈하여 불우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신호탄이 된다. 프로이드학회에서도 마르크스주의자에게서도 모두 버림받은 그는 미국으로 건너가서 새롭게 오르곤 에너지 이론을 만들게 된다. 인간의 성과 인격체는 인간을 감싸고 있는 생명 에너지의 작용이며, 그 에너지는 우주에 존재하는 생명 에너지이기도 하다. 오르곤 에너지라는 생명 에너지를 통해 인간과 우주의 상호 작용을 설명하려고 하나, 세인의 주목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된다.
<7강> 마르쿠제-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일차원적 사회의 감옥 부수는 에로스의 힘
마르쿠제는 프로이트를 위해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본 것이 아니라, 맑스를 위해 프로이트를 비판적으로 고찰한다. 프로이트 이론에서 문명은 필연적으로 억압 위에서만 가능하다면, 맑스가 꿈꾼 사회는 풍요로운 문명을 전제로 하기에, 마르쿠제는 비억압적이면서 해방된 문명 사회의 가능성을 프로이트의 ‘에로스’ 개념에서 길어낸다. 마르쿠제는 자신이 목도한 서구 문명을 ‘일차원적 사회’라고 진단한다. 다양한 가치 판단을 허용하는 이차원적 사회와 달리, 전사회에 물질적 부를 숭배하는 획일적 가치가 판침으로써 그 이외의 가치를 도외시하는 일차원적 사회로 전락했다는 사실에 탄식한다. 마르쿠제는 일차원적 인간에서 벗어나는 방법으로써 ‘상상력’의 활성화를 이야기한다. 삶 본능, 즉 에로스의 해방이, 그리고 상상력의 해방이 유토피아를 현실화할 것이라는 그의 외침이 귀에 쟁쟁하다.
<8강> 들뢰즈/가타리 ?신승철(동국대 외래교수)
정신분석에서 분열분석으로
들뢰즈와 가타리의 만남을 혹자는 번개와 피뢰침으로 비유하기도 하는데, 스스로는 여럿, 다양, 복수가 되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두 사람은 자본주의가 욕망을 생산하면서도 억제하는 이중구속의 모습을 보이는데 착안하여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부제를 단 『앙띠 외디푸스』와 『천개의 고원』을 서술하였다. 그리고 욕망의 생산이라는 측면에 ‘욕망하는 기계‘를, 욕망의 억제라는 측면에 ‘기관 없는 신체’를 배치한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스피노자와 라이히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프로이트-라캉 계열의 ‘정신분석’을 넘어선 ‘분열분석’으로 향한다. 분열분석은 정신분석의 전이(=동일시), 가족주의, 해석의 한계를 넘어서서 횡단성, 사회-역사적 무의식, 변용의 흐름의 입장에 서 있다. 이 두 사람은 정신분열증과 같은 ‘협착분열’을 넘어서, 대안적인 관계망과 주체성을 생산하는 ‘분열생성’이라는 입장에 서서 소수자운동과 대안운동의 모습을 그려냈다. 두 사람의 만남이 만든 색다른 무의식의 지도그리기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9강> 줄리아 크리스테바 ?서영화(한신대 외래교수)
아버지 법을 전복하는 어머니의 몸과 시적언어
근래 한국 사회의 진보 진영이 겪어내야 했던 일련의 사건들은 자본주의 사회 시스템에 저항하기 위한 운동이 언제든지 또 하나의 보수적인 시스템의 일부로 전락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회의 변화를 위해서는 주체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크리스테바의 명제는 여전히 21세기 한국 사회에도 유효하다. 크리스테바는 상징계적 담론 질서와 그에 기반한 시스템의 전복과 파열의 가능성을 주체가 말하는 방식, 즉 시적 언어로부터 해명한다.
크리스테바에 의하면 시적 언어가 상징계적 담론 질서를 전복할 수 있는 근원은 아이가 갖는 어머니 몸과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어머니 몸이 시적 언어의 의미 생산의 근거라는 크리스테바의 논의는 지속적으로 생물학적(자연주의적) 결정론이라는 비판을 받아 왔다. 또한 어머니의 금기와 거부에 기반하여 시적 언어의 혁명성을 해명하는 논의는 상징적 질서를 반복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본 강의는 시적 언어와 몸, 그것도 어머니의 몸을 키워드로 크리스테바의 이론을 살펴볼 것이다. 나아가 라캉과 버틀러의 논의를 참조함으로써, 어머니의 몸으로부터 시적 언어의 전복 가능성을 해명하는 크리스테바 이론의 고유한 힘과 그에 따를 수 있는 이론적 난점을 생각해 볼 것이다.
<10강> 주디스 버틀러-윤지영(가톨릭대 외래교수)
남근 중심적 이성애 질서로서의 정신분석학 비판
버틀러는 퀴어 이론의 대가이며 푸코, 데리다, 들뢰즈, 라캉이라는 프랑스 현대 철학의 지류에 영향을 받은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이다. 버틀러는 라캉의 성차 개념이 실재에 속한다는 것을 강력히 논박하며 성차란 상징계라는 아버지의 법질서에 속하는 것이며 이는 친족 구조의 변화와 함께 변혁 가능한 것이라 본다. 이로써 신성화되고 초월적 구조로 탈역사화된 상징계의 전환 가능성에 대해 비판적으로 논의를 진행한다. 나아가 버틀러는 라캉의 남근 중심적 상징계뿐만 아니라 크리스테바의 모성적 공간인 기호계 역시 강력히 비판한다. 해체주의자인 버틀러에게 있어 크리스테바가 설정한 기호계역시 부권적 개편 방식의 일부로 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정신분석학 내에 내재한 이성애중심주의와 남근중심주의를 분쇄하는 흥미진진함을 펼쳐 보인다.
원문기사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98130527150714
자화상[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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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노래에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한다
?
나의 존재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끊임없는 약속과도 같은 물음을 찾아가고 있다.
?
별이 빛나는 시월의 달을 짖고
봄의 휘날리는 구름섬과 같은
바람의 향기에 보이지 않는 공기처럼
붉게 물든 어린 복숭아 향기를 기억하듯
나는 그렇게?짖는다
?
해가 뜨고 아주 가끔 바람이 내게로 와
비오는 산막골을 되찾듯 어린잎에 피어오르는 빗줄기에
작은 풀은?쓸쓸함에 기억을 도둑 맡고 있다
?
돌다리에 던지는 마음이 풍덩
어린아이는 밤하늘 반짝반짝 커다란 우주를
물빛에 차갑게 담는다
?
내 삶의 영혼 그 흔적의 자리 그림자는
자체의 흔들림을 가지고
밝음도 그 어둠도 가지지 않은 체를 건져 올린다.
?
그저 그 자리에 그 것일 뿐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성이 짓밟은 그들의 외침, “침묵을 지킬 순 없었니?”[철학자의 서재]
/0 Comments/in old & goodys, ⓔ시철북 & 아카데미, 철학자의 서재 /by cabeza?프랑수아 플라스의 <마지막 거인>
송종서(한반도 동북아 연구소 선임연구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4년 8월 말에 어떤 ‘거인’이 내게 책 한 권을 선물했다. 그때 나는 중국 양쯔강(揚子江)의 중류 지방의 어느 도시에서 몇 년째 졸업 논문을 준비하다가 그곳의 여름을 견디다 못해 잠시 고국으로 피서를 와 있었다. 어스름이 내리는 늦여름 저녁 무렵 서울에서 거인과 마주앉았을 때 그는 땅거미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두 거인
“내가 좋아하는 책이야. 너와 느낌을 나누고 싶다. 그림책이라 금세 읽지만, 조금씩 천천히 읽어도 좋아.”
거인과 마주 앉았던 장소나 둘이 나눈 이야기는 이제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지만 그가 건넨 책의 표지를 보면서 느낀 이상야릇한 기분은 아직도 뚜렷하다. <마지막 거인>(프랑수아 플라스 지음, 윤정임 옮김, 디자인하우스 펴냄)? 묘하다. 거인이 거인에 관한 책을 주다니. 실상 그의 겉모습은 ‘거인’과 별로 상관이 없다. 오히려 그는 보통 사람들보다도 키도 크지 않고 몸집도 왜소한 편이다.
그러나 체구가 작고 먹는 양이 적은 것을 제외하면 그는 확실히 모든 면에서 거대한 느낌을 준다. 때문에 나는 그를 무의식적으로 거인이라 여겼고, 이 느낌은 나만의 감상은 아닐 것이다. 그를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생각을 가질 것이다. 사람들 누구나 이런 거인을 마음속에 갖고 있다. ‘거인’이라 부르든 ‘영웅’이라 부르든 자신이 닮고 싶고 배우고 싶은 사람을 간직하고 산다. 그날 <마지막 거인>이라는 책을 선물해준 사람이 내게 바로 그런 거인이다. 내 거인이다.
‘마지막 거인’이라는 비장한 제목이 지금도 현실의 내 거인과 기묘하게 겹쳐진다. 그날 자신이 건넨 동화책을 애지중지 바라보던 저녁 어스름 속의 거인은 슬프고 가라앉은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아름다움을 담고 있었다. 그는 푸르스름한 황토색 표지 속에서 널따란 등을 드러내고 저 멀리 구름인지 아득한 산악인지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거인 안탈라의 뒷모습과 겹쳐졌다. 이제 다시 보면 몸에 걸친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안탈라의 등허리와 팔다리와 뺨은 온통 어지럽고 복잡한 무늬와 그림들로 가득하다. 이 마지막 거인의 문신이 내 거인 속으로 옮겨 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피부는 대기의 미세한 변화에도 반응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살랑거리는 미풍에도 몸을 떨었고, 금갈색 태양 빛에도 이글거렸으며, 호수의 표면처럼 일렁이다가, 폭풍 속 대양처럼 장엄하고 어두운 색조를 띠기도 했습니다.” (46쪽)
거인은 지평선만큼이나 평온한 목소리로 이 책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나는 낯선 사물을 마음속에 들이는 데 민첩하지 못한데다, 자꾸 묘한 느낌에 사로잡히게 되어서 얼떨떨한 기분이었고 거인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내 거인과 책 속 거인의 유사한 느낌에 자꾸 사로잡혀서일까. 흙의 빛깔을 닮은 그 거뭇하고 거칠한 음성과 동화책 표지를 물들인 황토 빛깔이 한눈에 겹쳐지면서 주변 공기가 뭉쳐진 느낌이랄까, 시간의 흐름이 멈추는 느낌이었다.
거인들이 사는 나라
처음 선물로 받은 날 밤에 멋진 그림들에 빠져 연신 책장을 넘겨보기는 했지만 머릿속을 가득 메운 학술 자료들과 논문 걱정으로 이야기책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겨우 크리스마스가 돼서야 이 동화책을 보았다. 예상과는 다르게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저자가 12~13세 어린이를 생각하고 지은 동화책이라고 하지만 어른들이 읽어야 할 동화라고 느꼈다.
나는 책을 읽는 동안 화자(話者) 아치볼드 레오폴드 루트모어가 되었다. 나는 탐험가이자 지리학자로서 1849년 9월 29일 아침에 동인도 회사의 낡은 무역선을 타고 영국을 떠나 흑해의 원천에 있는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 갔다. 나를 거인족의 나라로 이끈 것은 이전에 부둣가에서 우연히 손에 넣은 거인족의 어금니였다. 정확히 말하면 어금니 뿌리 안쪽에 새겨진 미세한 지도였다. 거인족의 나라를 찾아가는 동안 나는 천신만고를 겪었다. 수많은 희생과 죽을 고비를 넘고 겨우 도착한 그 골짜기는 거인들의 묘지였다.
나의 탐험은 순전히 학문적 동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는 학자로서 이제껏 누구도 얻지 못한 최고의 성취감과 빛나는 명예를 얻고 싶었다.
“계곡의 지형도를 제작하는 데만 꼬박 한 달이 걸렸습니다. 일일이 세어 본 해골의 수는 백 십여 개였지만, 땅 속에 더 많이 묻혀 있으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두개골에는 기이한 돌덩이가 모자처럼 얹혀 있어 제례 의식의 대상이었음을 암시하고 있었습니다. 전부 다 삼사천 년 전 것이었습니다. 다만 이 종족이 전멸하게 된 이유만이 여전히 풀어야 할 신비로 남아 있었지요.” (36쪽)
거인족의 나라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 바로 문신이었다. 거인족의 몸에는 혀와 이까지 포함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통 구불구불한 선, 소용돌이 선, 뒤얽힌 선, 나선, 그리고 극도로 복잡한 점선들로 이루어진 정신없이 혼란한 금박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 환상적인 미로에서 식별되는 이미지들이 있었다. 나무, 식물, 동물, 꽃, 강, 바다의 모습이 그것이다. 거인 아홉 명의 몸 전체에 그려진 그림들은 도대체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문명과 그 적들
나는 가장 키가 큰 안탈라의 등에 그려진 아홉 명의 거인들 틈바구니에서 열 번째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실크 해트”를 쓰고 있는 자신이었다. 내 실크 해트는 19세기 서유럽 남자의 상징이다. 우리는 세계 곳곳을 탐험하며 ‘최초의’ 학문적 성과를 적잖이 이룩했다. 그 성과들은 유럽인의 눈으로 본 미지의 세계를 그려내고 쓴 것이다.
아시아, 오세아니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그 모든 대륙을 우리는 ‘탐험’을 한다는 구실로 거침없이 넘어 들어갔다. 우리에게 대항하는 원주민들은 공포의 대상이 아니면 살육의 대상일 뿐이다. 하마터면 나도 “사람 머리를 절단 내는 기이한 습성을 가진” 와족에게 붙잡혀 목숨을 잃을 뻔했다.
우리는 세계 대륙의 원주민들에게 죽임을 당하기 전에 그들을 죽여야 했다. 원주민에 대한 대량 학살은 그렇게 벌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땅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지구상 모든 대륙의 80퍼센트가 유럽인의 식민지가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신(神)의 은총을 받지 못한 그들의 ‘쓸모없는 땅’에 복음을 전파했고, 신에게 제사 의식(cult)을 거행했으며, 그곳을 쓸모 있는 땅으로 경작(cultivate)했다. 이것을 ‘문화(culture)’라고 부르거나 ‘문명(civilization)’이라고 한다. 이런 선진적인 유럽인이었기에 내 모습은 항상 ‘실크 해트’로 상징된다.
그러나 내가 만난 거인족은 유럽인들과 완전히 딴판이었다. 우선, 그들은 미지의 땅을 탐험할 때 내가 가장 중시하는 그림을 그릴 줄 몰랐다. 그러므로 거인들의 온몸에 그려진 그림은 그야말로 신비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과 처음 만난 때를 회상해 보면, 나는 거인들의 계곡에 도착하자마자 탈진한 나머지 정신을 잃었다. 그 짧은 순간 내가 환영처럼 본 것은 나를 향하여 기울어지던 거대한 돌기둥의 그림자였고, 환청처럼 들은 것은 그 돌기둥의 믿을 수 없을 만큼 감미로운 노래였다. 거인들은 이방인인 나를 정성껏 돌봐 주었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정신을 되찾았을 때는 그 모든 악몽이 무어라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꿈으로 변해” 있었고,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만난 날부터 내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그들은 나를 어린아이처럼 돌봐 주었다. 또 내게 먹을 수 있는 식물들을 알려주고 그들의 음식을 나누어주기도 했다.
그리는 사람과 그려지는 사람
“거인들은 식물, 흙, 바위를 아주 가끔 먹었습니다. 난 그네들이 운모판 가루를 뿌린 편암으로 맛있는 파이를 만들거나 장밋빛 석회 조각을 앞에 놓고 군침을 흘리는 모습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 준비 과정을 비밀에 붙여 가며 자기들이 특별히 만들어 낸 국을 맛보여 주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큰 강의 진흙처럼 혀에 엊혀 화산의 용암처럼 불타오르다가 숲의 부식토 같은 뒷맛을 남겼습니다.” (48쪽)
거인들의 몸에 그려진 나무, 꽃, 짐승, 강, 바다의 무늬와 형상은 그들이 한밤중에 하늘을 향해 부르던 노래에 대지가 화답해 그려 준 “악보“였다. 노래가 우주를 향한 기도였다면 문신은 우주 자연의 응답이었다. 나와 유럽의 탐험가들이 미지의 땅을 정복하면서 그림 그리고 문명을 새기는 존재라면, 거인족은 대자연의 신비를 노래하며 그림 ‘그려지는’ 존재다.
“(…)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그들의 목소리는 서로 뒤섞이고는 했습니다. 그것은 유려하면서도 복잡하고 반복적인 멜로디와 가냘픈 변주, 순수한 떨림, 맑고 투명한 비약으로 장식된 낮고 심오한 음조로 짜여 있었지요. 무심한 사람의 귀에나 단조롭게 들릴 그 천상의 음악은 한없이 섬세한 울림으로 내 영혼을 오성의 한계 너머로 데려다 주었습니다. 우연히 나는 오래 전부터 별들의 움직임과 하늘을 세심하게 관찰해 오던 터였지요. 그래서 일종의 이중어 사전을 기획하고는 각각의 별자리에 상응하는 음악의 소절을 붙여 주었습니다.” (42쪽)
나, 루트모어 아치볼드 레오폴드는 이 거인들의 문신을 “진정한 노래”라고 말한 적이 있지만, 이는 결코 깊은 깨달음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그저 지나가는 말에 불과한 덕담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거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내가 자랑스러웠고, 이제 남은 일은 그들을 알아가고 이해하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일은 학문적인 작업이었으니 말이다. 정말이지 학술은 내가 헌신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나는 내 숭고한 학문이 저 고귀하고 아름다운 거인족을 파멸시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거인족의 파멸은 내가 “신들의 축복을 받은” 덕분으로 거인의 골짜기를 발견한 뒤 “학문의 숭고한 임무”를 위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잊어서는 안 될 생생한 인상을 생동감 넘치는 그림으로 그려” 낸 데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거인의 눈물
“밤새도록 별들을 차례대로 불러대는” 거인족의 노래와 더불어 지낸 지 열 달이 지나면서 나는 런던의 밤하늘이 그리워졌다. 비록 거인족의 삶은 굳건하고 완벽해 보였지만 내가 그곳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들의 감미로운 노래와 몇 날이고 계속되는 힘겨루기 퍼레이드에 그만 진력이 났다. “거인 친구“들은 이런 내 심정의 변화를 금세 알아차렸다. 그리고 마침 그들도 사랑을 나누고 깊고 오랜 잠을 자야만 할 때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나를 고향으로 무사히 귀환하도록 도와주었다.
“그들은 제각기 작은 호박 조각을 나에게 선물했고 거기에 소중한 마법의 힘을 실어 주는 듯했습니다. 난 점토 찰흙으로 만든 조그만 조각품을 끈에 매달아 일일이 걸어 주었습니다. 거인 친구들이 그토록 자주 웃으며 바라보았던, 우스꽝스런 실크 해트를 쓴 사람의 모습을 조각한 것이었지요. 안탈라와 제울은 갈 수 있는 한 멀리까지 저를 데려다 주는 임무를 맡았습니다. 난 눈물에 젖은 거인 친구들을 마지막으로 돌아보았습니다.” (54쪽)
내가 이 책의 화자가 되어서 진술하는 마지막 말은 여기까지다. 그 후 벌어지는 이야기는 암시했듯이 비극적인 결말이다. 그것은 화자에게 너무도 익숙한 거인 안탈라의 목소리를 통해 울려나온다.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니?” 그것이다.
만약 저자가, 거인족의 나라를 떠나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가는 화자의 모습으로 이야기를 끝냈다면 이 책이 1990년대 프랑스의 각종 어린이 도서 부문, 문인 협회, 도서관 협회, 나아가 독일, 미국의 여러 문예 잡지와 비평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의 힘은 지금까지 서구인들이 저질러 온 ‘문명’이라는 이름의 ‘야만성’을 폭로하고 학문과 이성이 기실 어떻게 세계를 마름질했는가를 성찰하고 비판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성찰은, 이 책의 화자가 그랬듯이 왜 언제나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 생긴 뒤에야 나오는 걸까?
죄 없는 인류를 수없이 살해하고 식민지를 건설했던 제국주의자들이 모두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뒤늦은 후회나 반성도 무의미한 일은 아니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의미 있는 작용을 일으키려면 지식인의 역할이 아주 중요하다.
지금도 과거 제국주의자들의 만행과 유사한 강대국의 폭력은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그들은 ‘세계화’니 ‘자유 무역’이니 하며 형태를 바꾸어 교묘한 방식으로 약자의 권리를 침해한다. 학문에 종사하고 지식인 행세를 하는 사람들의 책임이 갈수록 커지는 이유다. 폭력의 형태와 얼개는 점점 더 세련되고 복잡해진다. 나의 거인이 내게 이 책을 선물한 이유를 요즘에야 조금 알 것 같다.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 다시 쓴다]-①
/0 Comments/in old & goodys, ⓔ시철 아카데미, 철학을 다시 쓴다 /by pipjc11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철학을다시 쓴다]-①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박사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다음에 계속>
노동을 다시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④
/0 Comments/in old & goodys, ⓔ시철 아카데미, 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by pipjc11노동을 다시 생각한다-4강, 5강?
박영균(건국대 HK교수)?
1. 자본주의의 성장과 노동가치론
1-1. 자본주의의 성장: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13세기 인클로저운동 시작, 15세기 말―16세기에 절정, 14세기 후반-15세기 중반 르네상스운동, 15-16세기 종교개혁운동): 17세기 “자신의 노동을 섞고 무언가 그 자신의 것을 보태면, 그럼으로써 그것은 그의 소유가 된다.” “인간의 삶에 유용한 토지 생산물 중에서 10분의 9가 노동의 결과라고 말해도 그것은 대단히 낮추어 잡은 계산일 것”(로크), ‘노동은 부의 아버지이고 토지는 부의 어머니’(1667년, 윌리엄페티→상품 교환의 공통 척도로서 노동량이라는 개념의 제시(애덤 스미스, 리카르도)
1-2. 정치경제학에서의 노동가치론: 정치경제학에서 노동 가치는 ‘노동이 유용한 어떤 것을 생산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 노동의 양적인 규정과 관련하여 사용되었다. 즉, 어떤 상품의 가치 크기를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이런 노동 가치의 개념을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사용한 사람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페티이다. 그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부의 어머니는 자연이고 부의 아버지는 노동’이라고 말했다. 나중에 마르크스는 이것을 ‘사용가치’라는 개념으로 정의하고 ‘가치’와 구별하지만 이 당시에는 이런 명확한 개념 구분이 없었다.
예를 들어, A라는 사람이 가진 쌀 한 가마와 B라는 사람이 가진 은 한 냥을 교환한다고 하자. 여기서 쌀과 은은 전혀 ‘쓰임’이 다른, 즉 질이 다른 물품이다. 그런데 어떻게 둘을 교환할 수 있는가? 어떤 공통점도 가지고 있지 않은 두 물품이 교환된다. 그렇다고 해도 그 둘을 교환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매개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있어야 하지 않은가? 바로 여기에서 가치의 다른 한 측면이 드러난다. 정치경제학적 의미에서 ‘가치’는 이 문제에 집중되어 있다. 서로 다른 물건이 교환되기 위해서는 어떤 공통의 척도 또는 매개적인 것이 있어야 한다.
페티는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이런 질문을 던진 것은 페티가 처음이 아니다. 그보다도 약 2천 년 전,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졌다. 그는 《정치학》에서 “교환을 위해서 생산되어지는 모든 상품 속에는 공통적인 어떤 것이 들어 있고 그 공통적인 것 때문에 상품간의 비교가 가능하다”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노예제 생산양식을 가진 사회였다. 그러나 그리스는 노예제를 기반으로 하여 해상무역을 전개하였으며 상업이 발전하였다. 탈레스를 비롯한 그리스의 자연철학자들은 상인출신이 많다. 그들은 지중해를 중심으로 무역을 전개하면서 상품교환을 했으며 여기서 개별자들의 평등에 대한 관념과 민주정에 대한 관념이 싹 튼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그리스에는 소수이지만 근대적 의미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었다. 상품교환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문은 이렇게 발전한 상업의 영향으로 제기되었던 것 같다.
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공통적인 것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았고, 그것을 정확히 인식하는 데에는 약 2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17세기에 들어서면서 상품 생산이 일반화되고 이런 상품 생산의 발전과 더불어 상품 교환의 수수께끼를 해명하려는 노력이 본격적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 그러나 노동가치론을 가장 분명하게 밝힌 선구자는 1738년에 나온 소책자 《화폐 일반의 이자에 관한 몇 가지 성찰@Some Thoughts on the Interest of Money in General@》을 쓴 익명의 저자였다. 그 익명의 저자는 “모든 상품이 상호 교환될 때 여러 상품의 ‘가치’는 그것들을 생산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반적으로 투하되는 ‘노동량’에 의해 규정된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그는 여러 가지 상품들이 매매되거나 교환될 때, 그 상품이 지닌 가치 또는 가격은 ‘노동량’과 교환의 공통적인 ‘척도(화폐)’의 많고 적음에 의해 규정된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페티는 ‘노동 시간’의 많고 적음으로 규정한 것이다. 여기서 이윤의 원천은 노동이 될 수밖에 없으며 특정한 상품이 가진 가치는 그것을 생산하는 데 투여되는 시간일 수밖에 없다.
최초로 토지나 금과 같은 자연 상태 그대로가 아니라, 거기에 투하된 노동력이 가치의 원천이라는 노동가치론을 정식화한 사람은 애덤 스미스였다. 그는 제조업에 투자된 노동은 무익하며 비생산적이라는 중농주의자들의 주장뿐만 아니라, 금을 통해서 부의 축적을 정당화하고자 했던 중금주의적 환상에 대항하여 노동이 이윤과 축적의 원천이며 경제적 진보의 원천이라는 사실을 주장하고자 했다. 그러나 리카도는 ‘지배노동가치설’을 비판하고 ‘투하노동가치설’을 주장했다.
1-3. 사회정치적 근대혁명(소유권과 근대민주주의): 캘빈의 구원예정설과 루터의 직업소명설(베버, 프로테스탄트윤리)→ “시민사회의 주요한 목적”은 “재산의 보존”(로크)
2. 자본주의생산양식과 근대적 패러다임: 노동가치론과 생산패러다임
2-1. 자본주의 생산양식: M-C(LP+MP)-M′
: 상품화(이중의 해방)-자연과 노동의 상품화
: 자본의 외부-노동력의 재생산과 자연의 수탈 메카니즘 → 자본주의적 지배메커니즘 확립
→ ① 자연의 수탈 메커니즘으로서 과학기술의 발전(생산력-MP, LP), ② 생산-소비 메커니즘의 확립(소비욕망의 창출), ③ 총자본의 대변자로서 국가의 조직화(교육, 의료, 주거 등)
2-2. 자본주의의 내부와 노동력 상품: 자본주의생산양식은 생산을 자본과 임노동이라는 두 관계로 추상화한, 생산의 특정한 사회적 양식이다. 이 생산양식의 핵심은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과 자신의 노동력을 파는 임노동이라는 두 존재의 상호관계이다. 여기서 ‘자본’은 단순히 축적된 화폐가 아니라 기계처럼 ‘생산수단’을 사는 데 소비된 화폐이며 ‘임노동’을 자신의 파트너로 고용하고 있는 ‘화폐’이다. 따라서 맑스는 자본주의 내부의 지양이 아니라 그 안에 존재하는 근본적 ‘균열’과 ‘공백’을 탐구하고자 했다. 그것이 바로 노동력의 상품화와 필요/잉여노동으로 구성되어 있는 자본주의생산과정 내부의 모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존재론적 특성은 그것이 ‘상품’의 세계라는 점에 있다. ‘노동력’이라는 상품, 즉 “그 사용가치 자체가 가치의 원천으로 되는 독특한 속성을 가진 한 상품”(Marx, 1989: 211-212)의 출현은 이 상품의 세계를 보편적인 존재양식으로 만들었다.
2-3. 자본주의 내부와 생산적 노동: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생산적 노동은 자본에게 생산적인 노동이다. 맑스는 아담 스미스의 ‘생산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다루면서 “이런 규정들은 노동의 소재적 특징에서, 즉 그 노동의 생산물의 본성에서도, 구체적 노동으로서의 노동에 고유한 일정한 속성들에서 가져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 노동이 실현되는 일정한 사회 형태, 여러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가져온 것”(Marx, 1965: 127)이라고 말하면서 “여기서 그것은 언제나 화폐 소유자인 자본가의 입장에 의해 이해되며 노동자의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다.”(Marx, 1965: 128)고 논평한 바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을 상품화하는 방식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대립적 체계를 통해서이다.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생산적 노동은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이며 이런 사용가치를 가지는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상품이다. 그런데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으로서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노동을 투여할 수 있는 대상과 노동수단으로부터 그 자신을 분리시켜야 한다. 그것은 경제학적으로 자연이 가치를 생산한다는 관점에서 노동이 가치를 생산하는 관점으로, 인간은 자연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존재라는 상징체계의 전환 뿐만 아니라 자연에 속박되어 있는 인신을 인격적으로 독립시키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따라서 인간을 주체로 전화시켜 상품 계열화하는 근대자본주의생산양식의 작동방식은 무엇보다도 인간과 자연의 분리 및 지상의 주인으로 인간을 주체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2-4. 자본주의적 가치계열화와 자본의 외부: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자연/인간의 분리와 ‘생산/비생산적 계열화’의 작동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의 내부화를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전제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부로 계열화된 자연/인간의 분리는 기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에 대한 착취의 가치계열화라는 점에서 근대자본주의는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분리에 근거하여 이성애적 가부장제를 정당화하고 ‘성-사랑’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 ‘근대적 가족제도’를 생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생식’이라는 생산의 패러다임과 ‘인구학’이라는 국민경제학적 통제의 문제로 바꾸어 놓는다. 자본주의생산양식은 노동력의 가치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동을 재생산하거나 ‘생식’을 통해 후속 인구를 재생산하는 문제를 ‘가족’이라는 사적 공간으로 이전시키고 그것을 ‘비생산적 노동’으로 만들어 그에 대한 가치 지불의 책임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 근대적 삶의 방식인 ‘공적/사적 영역’, ‘소비와 생산의 영역’의 이원화는 바로 이런 ‘생산/비생산’의 이원화에 상응한다.
– 자연과 인간의 분리: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이전의 생산양식과 다른 첫 번째 특징은 인간과 비인간을 구별하고 자연의 힘으로부터 인간의 인공적인 힘을 분리함으로써 그 스스로 인간적인 세계, 인공적인 세계, 기술적인 세계를 만드는 데 있다. 애초 인간은 자연에 일부였으며 그 세계에 의존했다. 그러나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런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직접적인 관계,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존을 끊어냄으로써 그 스스로 자신의 세계를 인공적으로 구축한다. 그것은 자연-인간이라는 관계를 자연/기계(기술)-인간이라는 관계로 변화시킬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접적인 세계로서의 기계”(Ihde, 1979: 63)를 생산한다. 여기서 기술은 인공적 시스템, 기계적 시스템, 기술적 시스템이다.
그러나 이렇게 ‘거대한 자동기계’가 작동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맑스는 기계와 도구를 구분하고 “완전히 발전한 기계는” “본질적으로 서로 다른 세 부분, 즉 동력기, 전동장치, 끝으로 도구 또는 작업기”(Marx, 1989: 477)로 이루어진, 여러 도구들을 통합하는 “자동장치”(Marx, 1989: 487)라고 말한다. 이것은 “생산수단인 기계를 기계로서 생산”함으로써 “자신에게 적합한 기술적 토대를 창조”하며 “자기 자신의 두 발로 서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계에 의한 기계의 생산에 가장 필수적인 생산조건은 어떠한 출력도 낼 수 있으며 또 그와 동시에 인간이 완전히 통제할 수 있는 원동기”(Marx, 1989: 491)를 필수적으로 동반한다. 따라서 문제는 에너지원이다.
자연의 생명 에너지와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를 소비할 때 발생하는 엔트로피를 그 스스로 ‘자정-정화’하면서 ‘생태적 균형’을 회복함으로써 이루어진다. 그러나 생산력의 발전은 이런 자연의 ‘자정능력’과 ‘생태적 균형’을 파괴한다. 자연의 생태적 순환은 에너지의 균형과 생성소멸이라는 생명의 흐름에 의해 규정되며 자연적 물질들은 생명적 에너지들의 분배와 흐름에 의해 이루어진다. 반면 과학-기술은 ‘효율성’과 ‘인간중심’이라는 가치체계 하에서 작동하며 자연적 시간과 공간을 파괴하는 기계적 시공간, 또는 탈물질화된 시공간을 창출하며 자연에 없는 신물질들을 생산한다. 따라서 이 두 개의 메커니즘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충돌은 자본주의생산양식이라는 체계에서만 일어난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많은 도시들의 성장과 파괴가 그 도시들을 발전시킨 에너지시스템의 성장과 파괴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문제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이 인간과 자연을 ‘인간의 주체화-향락적 소비욕망’, 그리고 ‘생산/비생산의 가치계열’로 자연을 계열화함으로써 그전에 존재했던 그 어떤 생산양식보다도 더 총체적이고 전면적으로 지구의 에너지순환시스템과 생태계적 자정 및 균형능력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게다가 현대자본주의는 BT산업과 같이 그전에는 상품의 대상이 아니었던 ‘생명체’들을 자본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라 ‘환경오염과 위기’를 ‘물의 사유화’ 및 각종 환경친화적 상품들로 바꿈으로써 ‘그린의 상품화’라는 새로운 가치축적의 대상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환경위기는 근본적이고 총체적이라고 할 수 있다.
– 성/생식의 자본주의적 포획: 근대자본주의에서 여성의 성은 비록 그것이 가부장제적 남성의 환타지와 결합된 ‘성의 상품화’와 함께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혈연의 재생산’이라는 성의 자연성으로부터 분리된 인간의 성적 욕망에 대한 긍정을 포함하고 있다. 여기서 ‘성-사랑’은 근본적으로 자연적 성을 초과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에 대한 대가 없는 지불이라는 ‘사랑의 공동체’라는 환상체계를 만들어낸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의 노동의 상품화가 함축하는 인간과 자연의 분리, 그리고 인간의 인격적 독립성이라는 환상과 함께 진행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한 종족 번식으로서의 ‘성=생식’이라는 자연성을 넘어서며 신에 의해 억압되어 왔던 인간의 욕망과 감정, 성적 욕망을 포함하는 인간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인문주의적 운동을 가져왔다.
그러나 이렇게 초과하는 ‘성-사랑’은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온전하게 포섭될 수 없다. 왜냐 하면 노동력이 노동과의 분리를 통해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상품으로 전환될 수 있는 것처럼 성-사랑도 자본주의생산양식의 가치 메커니즘 안으로 포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의 과학기술이 테크노피아적 미래라는 환상에 기초하여 대중을 포획해 왔듯이 근대가족제도도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들과의 공모를 통해서 가부장제의 자본주의적 재편이 이루어진다. 이성애적 성인 남성노동자는 자본주의생산양식의 ‘생산적/비생산적 노동’이라는 가치의 틀을 수용함으로써 가족제도 내에서의 권력을 획득한다. 따라서 이 구조 하에서 자본과 임노동은 상호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수탈하는 전체메커니즘을 이끌어가는 파트너일 뿐이다. 여기서 자본/임노동의 상호 투쟁적 메커니즘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지배, 이성애적 권력이라는 또 다른 권력메커니즘에 의해 보완되며 전치된 환상체계를 만든다.
남성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그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그 책임에 대한 대가로 ‘가부장제적 권력’을 보존한다. 그는 힘들지만 그의 권력이 그의 책임에 대가로 주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임노동자로서 노동자가 가부장제와의 공모를 통해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 포획되면 될수록, 그리하여 임노동만을 생산적인 것으로 보는 자본주의의 생산적 노동 개념을 고수하면 할수록 그의 얄팍한 지배 욕망 때문에 그의 노동력 가치는 더욱더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바로 여기에 임노동자로서 남성노동자들, 자본에 포획된 노동운동의 딜레마가 있다. 즉, 이성애적 가부장제는 단순한 성모순의 문제가 아니라 역으로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로의 노동을 포획하면서 발생하는 노동/노동력의 간극을 감추는 기제가 되며 노동자의 노동력 가치를 하락시킴으로써 임노동자의 노동을 착취하는 기제로 전화된다는 것이다.
임노동자는 그의 노동력을 팔아서 ‘사랑’이라는 의무와 책무 속에서 가족 전체를 재생산하고자 하지만 자본주의생산양식은 그의 ‘성-사랑’에 가치를 고려하지 않는다. 자본의 본성은 ‘가치증식’에 있기 때문에 오직 노동력의 가치(임금)를 노동자의 육체적 최소치-생존적 필요(need)로 줄이려고 한다. 반면 노동자들은 ‘사랑’이라는 환상 속에서 항상 그 반대편, 즉 전체 가족의 생계에 대한 책임과 그들의 삶에 대한 향유라는 욕망을 향해 움직인다. 따라서 그의 노동력 가치 하락은 가족 전체의 생명을 재생산하는 데 필요한 재화의 부족, 생존의 위기로 비화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자본은 자본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가 아닌 자기 자신을 목적으로 하는 임노동자와 대면”(Lebowitz, 1999: 109)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것이 근본적으로 향하는 방향은 ‘생산적 노동’이라는 자본의 가치양식으로부터의 이탈, 즉 ‘생식’ 밖의 ‘성-사랑’이다.
3. 생산의 사회화와 근대정치의 불가능성
3-1. 총체적 빈곤화와 노동가치론적 세계의 와해: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두 개의 세계로 점점 더 분열되어 가고 있다. 한편에는 극단적인 충동과 향유, 풍요의 세계가 존재한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가 본격화한 이후 부자는 백만장자가 아니라 억만장자이며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0.5%가 1년 동안 쓴 돈은 6천 500억 달러로 이탈리아 전체 가구의 지출 규모에 맞먹는다(Frank, 2008: 175). 그러나 다른 한편에는 극단적인 결핍과 빈곤의 세계가 존재한다. 오늘날 세계는 전 세계 인구의 두 배인 12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 인구의 절반은 하루 2달러 이하로 살고 있으며 그 중 12억 인구는 하루 1달러 이하로 살고 있다. 따라서 ‘풍요 속의 결핍’은 자본주의가 세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생존권의 위기에 처해 있는 경제적으로 빈곤한 계층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오늘날의 빈곤은 단순히 경제적이기만 한 것이 아니다. 오늘날 빈곤은 문화적이고 환경적인 빈곤을 포함한 총체적인 빈곤이다. 따라서 그것은 단순히 경제적 자원 및 부에 대한 분배의 문제이거나 자본/임노동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기에는 자연/인간, 성-사랑/생식이라는 자본주의 내/외부의 변증법이 중첩적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오늘날 환경-생태계의 파괴는 이중도시(duel city)와 같은 공간의 분절 속에서 ‘그린의 상품화’를 만들어내고 있다. 제1세계와 부자들이 사는 공간에서 쾌적한 환경은 그 자체로 상품이다. 제1세계의 환경유해산업은 제3세계로 이전될 뿐만 아니라 ‘타워팰리스’나 ‘청담동’과 같은 그들만의 공간이 구획된다.
반면 제3세계의 특정 지역은 환경유해산업폐기물의 ‘쓰레기처리장’이 되며 생명공학은 이 이원화 속에서 GMO와 LMO를 생산하며 제3세계와 빈자들의 생존을 상품화하고 그들의 몸을 실험 대상으로 만들고 있다. 또한, 이런 빈곤화는 여성문제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최근 여성노동의 상품화는 제3세계와 빈자들의 총체적인 빈곤화를 가족에 떠넘기면서 경제력의 격차를 여성의 노동이나 성애 등을 상품화하고 있다. 제3세계 여성은 제1세계 중산층 자녀에게 돌봄노동을 하면서 정작 자신의 자녀들은 할머니에게 맡겨놓는다. 따라서 여성의 돌봄노동은 제1세계의 여성을 자본주의적 생산 메커니즘으로 포획하면서 빈부격차에 따른 제3세계 여성의 노동을 착취한다.
따라서 빈곤화는 ‘경제’뿐만 아니라 자신들이 살아가는 ‘삶의 환경’(환경적 빈곤)과 자신의 몸과 상징 등 문화적 자산의 결핍(문화적 빈곤)이라는 차원에서 삼중적으로 중첩(경제-환경-문화적 빈곤)되면서 진행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가부장제적인 수탈 메커니즘을 강화하면서 그것을 자본화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기존의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가치증식’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생산에 투자된 자본이 그 속에서 잉여가치를 생산하는 노동의 대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그것이 자본의 ‘가치증식메커니즘’으로 통합되고 있다는 것은 현대자본주의가 ‘노동/임노동’의 가치계열화를 ‘생산’ 영역에서 ‘소비’ 영역으로 확장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수탈메커니즘을 만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오늘날 생산적/비생산적이라는 ‘노동패러다임’을 부정하고 그것을 파괴하고 있는 것은 ‘자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은 그들의 소유권과 지배-통제능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점점 확대되는 자기모순을 국가의 법-제도적 강제장치를 이용한 ‘경제외적 강제’로 대체하고 있다. 하비는 ‘노동의 재생산을 통한 축적’과 구분하여 ‘수탈에 의한 축적’을 구분하고 있다. 전자는 맑스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의 특징으로 규정한 ‘경제적 강제’인 반면 후자는 ‘경제외적 강제’이다. 그렇다면 왜 오늘날 점점 더 자본주의생산양식 내부의 착취메커니즘인 ‘경제적 강제’가 아니라 ‘경제외적 강제’를 필요로 하는가? 그것은 바로 오늘날의 자본주의생산양식이 더 이상 임노동만으로 자신의 이윤증식메커니즘을 가동시키지 않으며 자연/인간, 가부장제적 약탈메커니즘을 내부화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는 EC혁명, BT혁명 등을 통해서 기존에는 가치증식 메커니즘으로 포획하지 않았던 영역들, 예를 들어 자연적 생명체들이나 정보-정서노동 등을 자신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급속히 빨아들이고 있다. LMO, RMO뿐만 아니라 전자네트워크를 통해서 구축된 삶 자체가 가치축적의 대상이다. 여기서 자본주의 축적 메커니즘으로 포획되고 있는 것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협력, 사회적 협력 네트워크 그 자체이다. 따라서 오늘날 자본주의생산양식에서 노동이 수행하는 ‘가치 생산’의 역할은 더욱더 떨어지고 있으며 직접적인 생산적 노동은 점점 배제되고 있다. 노동의 배제, 그것은 맑스가 이미 예견했던 바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형태의 노동이 부의 위대한 원천이기를 중지하자마자 노동시간이 부의 척도이고 따라서 교환가치가 사용가치의 [척도]이기를 중지해야 한다. 대중의 잉여 노동이 일반적 부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듯이, 소수의 비노동도 인간 두뇌의 일반적 힘들의 발전을 위한 조건이기를 중지했다.”(Marx, 2000b: 381)
3-2. 소결: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① 노동운동의 체제내화와 생산패러다임 벗어나기: 맑스 사후, 『자본』의 논리-역사적 추론은 그대로 실현되지 않았다. 부르주아 또는 프롤레타리아라는 주체의 개입은 자본의 운동양식에 대한 일정한 수정을 가져왔으며 1950년대 자본주의의 황금기와 더불어 서구의 노동자계급은 정치-당, 경제-노조의 양날개론에 근거한 지배체제 내부의 동맹을 형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역사에서 노동자계급은 더 이상 맑스가 말하는 ‘계급해방의 주체로서 프롤레타리아’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지탱하는 핵심계급이 되었다. 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노동자계급의 이해를 대변하는 사회민주주의로 흡수되었으며 자신의 계급적 이해를 위해서 자본가계급과의 ‘사회적 타협’을 만들어왔다. 따라서 노/자의 적대적 분열, 노/자의 화해불가능한 적대성에 기초한 자본주의 내부 또는 중심에서 그 밖으로의 도약이라는 ‘혁명의 정치학’은 더 이상 가능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 그렇다면 더 이상 자본주의체제 내부에서 새로운 사회에 대한 변혁을 모색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은 것일까? 애초 맑스주의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 사이의 화해는 불가능한, 적대적인 모순이라는 전제 하에서 출발했다. 노동자계급은 자본의 극복 없이 자기 자신을 해방시킬 수 없다. 그러나 1950년대 서구사회에서 노동자들은 자본을 극복하기보다는 자본가와의 사회적 대타협을 통해서 기존의 체제를 유지하는 길을 선택했다.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조합과 정치적으로 성장한 노동자당은 오히려 그들의 기득권을 공고히 하고 그들의 상대적 지위를 확고히 하는데 몰두하였다. 여기서 배제된 것은 자본/임노동의 생산체제 내부로 들어가지 못한 자들, 주변부에 밀려난 자들이었다. 따라서 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새로운 변혁의 주체가 자본주의 내부가 아니라 외부 또는 그 내부로 완전히 포획될 수 없는 지점, 주변, 경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② 사회경제적 구성의 변화: 노동의 신화 대 노동의 종말→산업사회 대 탈산업사회(엘빈 토플러, 다니엘 벨), 물질노동 대 비물질노동(네그리), 착취 대 약탈(하비)→근대적 패러다임/탈근대적 패러다임
: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은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비물질적 노동 즉 지식, 정보, 소통, 관계 또는 정동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노동이 출현했다.” (≪다중≫, p. 145.)→“우리의 주장은 비물질노동이 질적인 면에서 헤게모니적이 되었고, … 오늘날 노동과 사회는 정보화될 수밖에 없으며, 지적으로 되고, 소통적으로 되며, 정동적으로 될 수밖에 없다.”(≪다중≫, p. 146.)
⇒ 사적 소유의 불가능성→개인주의-자유주의적인 근대 부르주아사회의 한계, 부르주아 정치의 불가능성
cf. “삶정치적 생산이 한편으로는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자본이 결코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그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이유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맑스의 견해를 수정해야 된다.”(≪다중≫, p. 187) → “사실은 우리가 소통과 사회적 네트워크들, 상호작용적 서비스들, 그리고 공통 언어들로 구성된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 상품을 사용하고 상품의 점유에서 유래하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 이해되는 사적 소유 개념 자체는 이 새로운 상황에서 점점 더 무의미해진다. 이러한 틀에서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사용할 수 있는 상품들은 더욱 적어진다. 즉 공동체가 바로 생산하는 것이며, 생산하는 동안 바로 그 공동체는 재생산되고 재규정된다. 그러므로 고전적이고 근대적인 사적 소유개념의 근거는 탈근대적 생산양식 속에서 어느 정도 해체된다.”(≪제국≫, p. 395-96.)→“공통된 것의 강탈”: “오늘날 비물질적 생산의 패러다임에서 가치이론은 측정된 시간의 양이라는 관점에서는 이해될 수 없으며, 그래서 착취 역시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또한 착취를 공통된 것의 강탈로 간주하려고 해야 한다. 달리 말해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된 것이다. … 예를 들어 정동적 노동에서 뽑아내는 이윤에 대해 생각해보라. 언어, 아이디어, 지식을 생산하는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협동적으로 생산된 지식이 사유재산이 된 경우가 그러하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가 그리고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의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다중≫, p. 191.)
3-3.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과 향유의 삶: 현재 진행되는 자본-기술-권력의 일체성이 지닌 양가성(ambivalence)을 볼 필요가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킨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맑스는 기계에 의한 생산력의 발전이 사회의 필요노동시간을 최소한으로 단축시킴으로써 개인의 발전을 위한 예술적이고 과학적인 교양의 조건을 형성한다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이 자본에 의해 전유될 때, 과잉인구와 과잉생산으로 전화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전자의 길과 후자의 길은 전혀 상이한 가치와 결과를 함축하는 두 가지의 길이며 선택지이다.(두 가지 길)
맑스는 “오감의 형성은 지금까지의 세계사 전체의 노동”(Marx, 1991: 162)이며 “산업의 역사와 산업의 이미 생성된 대상적 현존재는 인간 본질적 힘들의 펼쳐진 책이며 감각적으로 눈앞에 있는 인간 심리학”(Marx, 1991: 163)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런 “모든 육체적 및 정신적 감각들 대신에 이러한 모든 감각들의 완전한 소외, 즉 가짐이라는 감각”(Marx, 1991: 160)으로 환원한다. 맑스의 국민경제학 비판의 초점은 여기에 있다.
“국민경제학, 이 부의 과학은 … 동시에 단념, 내핍, 절약의 과학이다. … 자기 체념, 생활의 체념, 모든 인간적 욕구의 체념이 국민경제학이 주로 가르치는 명제”(Marx, 1991: 173)이다. 따라서 그는 “풍부한 인간과 인간적 욕구”로 “국민경제학적인 부와 빈곤을 대체”하고자 했다. 그것은 “다른 인간들의 감각들과 정신”이 나 자신의 전유”가 되는, “인간적인 생활의 자기화 방식”으로서 대안적 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Marx, 1991: 159). 생산력의 발전은 자연이라는 제약이 제공하는 “곤궁성과 대립성의 형태를 벗어나” “개성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한 물질적 토대로, “사회적 결합 및 사회적 교류뿐만 아니라 과학과 자연의 모든 힘”들을 발전시킴으로써 “향유 수단의 발전” 및 “자유시간의 증대”시키는 사회적 생산력을 만들어놓는다(Marx, 2000b: 381). 따라서 맑스는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생산적 노동’의 가치를 고수하거나 노동가치론을 고수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극복하고자 했다.
현재의 총체적인 위기는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STR은 필요노동시간을 단축시키며 생산의 사회화한다. 그러나 자본은 생산의 사회화를 사적으로 전유하기 때문에 생산이 사회화될수록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며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을 자본의 증식 욕구로 바꾸고자 한다. 따라서 정보화-자동화는 인간 노동의 배제와 노동력 상품의 가치 저하를 생산한다. 반면 사회적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다른 사회적 기반을 창출한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이 아닌 다른 사회화의 길이다.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노동시간의 단축 없이 극복될 수 없다. 그것은 자본의 증식 욕구에 대당적이다. 따라서 필요노동시간의 단축은 문화사회로의 길을 위한 물질적 조건을 창출한다. 따라서 두 개의 길에서 전선을 나누는 선은 생산의 사회화에 있다.
삶의 자유를 위하여[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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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혼자 하는 사랑
사랑이란 어떤 것일까? 행복한 것일까 아니면 괴로운 것일까. 사랑의 시작은 달콤하고 절대로 이별이 없을 거라는 믿음으로 시작된다. 서로 마주 보기만 해도 행복한 시기에는 만남은 필연적으로 이별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생각하지 못한다. 설령 생각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사랑에 이별 따위는 절대 끼어 들 수 없다고 확신한다.
그러나 이별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찾아온다. 이별의 상황에서 상대의 입장을 이해한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음을 안다 하더라도 강제적이며 급작스러운 이별은 마음 깊은 곳에 그 마음보다 더 크고 깊은 상처를 남긴다. 할머니에게는 마쓰시타와의 이별을 준비할 시간도 없었고 현실로 받아들일 심리적 여유도 없었다.
할머니에게 마쓰시타는 어쩌면 괴로움 속의 행복이 아니었을까 싶다. 할머니가 처음 읊은 시 속에서 첫사랑은 풀벌레의 울음소리처럼 애달픈 기억이었다. 깊은 밤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도 할머니는 잠을 이루지 못하고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무에게도 자신의 슬픔을 나타낼 수 없었고, 그 어느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고통이었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시 <여름밤>의 부분-
할머니의 사랑은 그랬다. 60여년의 긴 시간 동안 오직 혼자 알고 혼자 아파하고 혼자 그리워해야 하는 사랑이었다. 다시는 재회할 수 없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도 밤하늘에 떠 있는 달과 밤이 되면 우는 풀벌레만 함께 할 수 있었다. 소리 내어 울지 못하고 그립다 말하지 못하고 홀로 잠 못 이루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그 고통의 시간은 또 다른 죄의식의 시간이기도 했다. 오랜 시간을 할머니의 곁을 지켜준 할아버지에 대해 할머니는 “나한테 참 잘했어. 내가 아무리 성질부리고 고집을 피워도 그리 화를 안 내대.”라는 말로 고마운 마음을 드러냈다.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참 똑똑했다. 시대만 잘 만났으모 한 자리 했을 끼다. 뭘 해도 뭘 맡아도 똑 부러졌거든.”하며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그 감정은 사랑이 아니었다. 한 가정을 이루고 부부의 연을 맺어 의지하며 긴 세월을 살아온 정이었다. 할아버지에 대한 정이 따뜻하고 깊어도 사랑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과 정을 검은 돌과 흰 돌처럼 확연하게 구분하여 정의내릴 수 없지만, 할머니는 할아버지에 대해 말할 때 사랑이나 그리움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다.
잃어버린 나를 찾아
마쓰시타에 대한 할머니의 감정은 사랑이었을까, 아니면 사랑의 가면을 쓴 집착이었을까? 18살 어린 나이에 만나 19살이 되어서야 마음의 문을 열고 20살에 헤어진 사람을 81세가 될 때까지 변하지 않고 사랑한다는 게 가능한 것일까? 사랑은 변하는 게 아니라고, 단지 그 사랑을 하는 사람의 마음이 변하는 거라고, 그래서 할머니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었다면 무엇에 대한 집착이었을까? 할머니는 왜 그렇게 오랜 시간을 집착하며 고통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무엇이 할머니의 마음을 60여 년 전의 시간 속으로 자꾸 끌고 간 것이었을까? 의문이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사라졌다. 아무 말 없이 물끄러미 창밖으로 시선을 주고 있는 할머니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할머니가 서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언제나 앉아 있었다. 어쩌다 치마 밑으로 발이 나오면 애써 치마를 끌어당겨 발을 감추곤 했다. 진물이 묻어 있는 할머니의 발을 볼 때에도, 전동 휠체어를 타다 넘어져 크게 다쳤을 때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자유의지로 서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을…..
80평생을 살아오면서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자신의 몸을 자기의지대로 할 수 있었던 게 언제였을까? 마쓰시타와의 사랑이 종말을 고한 그 시점까지였던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나의 생각이 틀렸을 수도 있다. 할머니가 집착하는 것은 잃어버린 사랑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신이 아닐까?
너무도 사랑하여
양손을 꼭 잡고
철로길을 걸으며 뛰며
동심에 싸여
아무것도 두렵고
무서운 걸 모르더라.
-시 <사랑>의 부분-
서로가 웃으며 변치 말자고
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맹세도 하였더라.
이것이 영원한 우리의
사랑의 속삭임이었더라.
-시<첫사랑 이야기 1> 부분-
애당초 나와 마쓰시타는
맺어질 사랑이 아니었구나.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다르니
이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
-시<첫사랑 이야기 2>부분-
넘어지며 엎어지며 미끄러질 때마다
사랑하는 그대의 두 팔로
안아 일으켜 줄 때마다
눈 속에서도 그 따뜻한 사랑이
우리의 정으로 더 깊이 들더라.
-시<눈 내리는 날> 부분-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은 사랑에 대한 영원한 약속에서 체념으로, 그리고 따뜻했던 정으로 이어진다. 사랑에 대한 약속도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에 의해 이루어진 것들이다. 비록 ‘국경이 다르고 나라가 달라’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던 이별도 할머니의 의지였다. “보내주리라, 가거라/ 속절없는 사랑, 미련 없이 보내주마”하며 체념한다. 그리고 그 사랑은 이제 따뜻한 기억으로 돌아와 있다.
내게도 행운이 있었던가
김철수라는 청년을 알아서
60년 동거생활하며 그 안에서
예쁜 딸을 선물로 하나 받았더라.
-시<내 인생길> 부분-
할아버지와의 만남을 “행운”으로 표현하며, 딸은 선물로 여긴다. 할머니는 할아버지를 21살 때 만난 청년 김철수로 호칭한다. 여기에서 나는 다시 할머니를 바라보았다. 할아버지와 함께 한 60년 세월을 ‘결혼생활’이라는 말 대신 ‘동거생활’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언어 하나하나를 분석하고 그 의미를 따지는 것이 때로는 무의미하기도 하지만, 불쑥 나오는 언어를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무의식의 발현이라고 본다면 결혼이 아닌 동거는 할머니가 생각하는 자신의 결혼관에 대한 표현일 수도 있다.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과 이별이 자기의지에 의한 것이었다면, 할아버지와의 결혼은 강제에 의한 것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일본에서 온 용한 의사를 만나기 위해 떠돌이 약장수를 따라 간 결과 이루어진 반강제적인 결혼이었다. 할머니는 그렇게 이루어진 결혼을 인정할 수 없었노라고 이미 수차례 되뇌었다.
살면서 만난 것을 행운이라고 여길 정도로 남편은 좋은 사람이었지만, 비록 자신의 손으로 키우지 못하고 입양시켜 보냈지만 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선물이라고 여길 정도로 귀한 인연이었지만, 그 결혼은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 헤어진 이후의 60년은 온전히 할머니의 삶이 아니었던 것이다. 살아도 살았노라고 자신에게 말할 수 없는 삶이었다.
선택의 자유
사랑이니 이별이니 하는 것들은 이제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랑은 눈 내리는 날의 따뜻한 정으로 기억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60여 년을 찾아 헤맨 것은 삶이라는 속박으로부터 벗어난 자유였다. 한센병이 찾아오면서 할머니가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살다보면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부끄러워질 때가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방종으로 낭비하면서도 그것을 자유라고 여기지 않는 경우도 종종 있다. 나는 자유의지로 할머니를 찾아왔고, 할머니도 자유의지로 나를 맞이해 주었지만, 두 자유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음을 비로소 알았다. 나는 내 연구의 당위성을 입증하기 위해 할머니를 만났고, 할머니는 삶으로부터 자유를 되찾기 위해 나를 만난 것이다.
나는 부끄러웠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생각만으로 얼마나 많은 올가미를 만들고 덫을 만들어 스스로를 구속했는지, 그리고는 살기가 힘들다고 푸념했는지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할머니에게는 생각의 자유마저도 없었다.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선택할 수도 없었고, 희망을 가질 수도 없었다. 애써 일구어 놓은 삶의 터전도 외압에 의해 뺏기고 낯선 곳으로 강제 이주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60년 동안 자신의 자유의지를 실현할 수 있는 날을 기다렸다. 그리고 자신의 삶과 사랑과 슬픔을 시로 읊었다. 비록 자유롭게 선택한 삶은 아니었지만, 그 삶을 자신의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선택한 것이 나와의 만남이었다. 선택의 자유, 온전한 자유가 항상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 선택에 의해 내일 불행한 일을 당할 수도 있고, 애써 일구어 왔던 꿈이 사라질 수도 있다. 다만, 선택의 자유에 의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된다는 사실만큼 가슴 벅찬 일이 있을까. 할머니는 자신의 삶을 풀어놓음으로써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지게 되었다. 자유에는 또 다른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할머니는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온전한 자유를 가지기 위해서는 할머니가 열어야 할 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5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알림]
/0 Comments/in old & goodys, ⓔ시철 아카데미, 한철연소식 /by cabeza안녕하세요, 학술1부에서 5월 월례발표회를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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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월례발표회는 유현상 선생님의 박사학위논문 발표입니다.
발표 주제는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입니다.
지난 달 월례발표회는 주제의 신선함(?)과 서유석 선생님의 논평에 힘입어 많은 회원들께서 참여하셨습니다.
이번 발표 역시 4월 월례발표회와 같은 많은 참여와 열띤 토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발표 논문은 파일로 첨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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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찰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
발표 : 유현상(숭실대)
논평 : 김상현(성균관대)
일시 : 5월 24일 금요일 오후 6시 30분 한철연 제1세미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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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self-determining freedom)’는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는 자유를 말한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의 적극적 자유로서의 성격을 규명하고, 그것이 소유권 보호 중심의 ‘소극적 자유’와 달리 진정한 의미의 정치적 자유에 닿아 있다. 테일러의 ‘자기 결정의 자유’는 그가 생각하는 도덕적 이상인 진정성의 기초 위에 성립하는 것이며, 그의 정치 철학적 입장인 ‘인정의 정치’를 통해 실현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정치적 실천과 행위의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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