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더 얽히기 전에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한 유명한 말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없는 것은 아예 없으므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도 할 수 없다.’는 말 말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분명히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빠진 것이 있다.’임을 확인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쓰는 말이 틀렸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파르메니데스가 쓴 ‘없는 것’이라는 말과 우리가 쓰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 경우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따지는 데는 앞에서 우리가 한 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이 없으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거나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쓸 수 없고,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갈라 보는 분석뿐만 아니라,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고와 그 사고의 표현인 언어생활조차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했을 때 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없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빠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 7을 다시 보아 주십시오. 여기에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ㄱ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한없이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이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당분간 있음 바로 그것인 맨 왼쪽의 있는 것과 없음 바로 그것인 맨 오른쪽의 없는 것을 보지 말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ㄱ의 왼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있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있는 것들이라고 하고 ㄱ의 오른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없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없는 것으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있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충만(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없는 것이 그 안에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고, 없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결핍(아예 하나도 있는 것이 없고 비어 있는 허무로 향하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 안에 들어 있는 더 깊은 뜻은 나중에 파헤쳐 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예 없는 없음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규정적인 것 ㄱ에서 없는 것에 이르는 사이에 들어 있는 무한히 많은 저마다 다른 정도의 빠짐을 지닌 빠진 것들이라고 합시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 하면 철학의 역사에서 ‘없는 것’을 ‘없음 바로 그것’으로 놓고 벌여 왔던 많은 논쟁이 소모적일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 성급하게 한 마디 끼워 넣자면, 없음 바로 그것이나 있음 바로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논쟁거리가 못 됩니다. 학문의 대상은 있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있는 것과 같은 것에서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없는 것과 같은 것 사이의 무한히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학문은 규정하는 것[definition : 이것을 정의(定義)라고 합니다. 끝, 한계(peras)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지요.]인데,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이미 다 규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따로 머리를 싸매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르냐? 따위의 질문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학문의 탐구는 부질없는 노릇이 되고 맙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서 잘못하면 학생들이 허공에 한눈을 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그 기타 줄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로 이어져서 5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강철선 말입니다. 저는 그 기타 줄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짚어 튀겨 가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소리들은 규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겉으로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기타 줄 안에 소리가 아예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타 줄을 차례로 짚어서 튀기면 숨어 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없던 소리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없던 소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줄을 짚어서 튀겼기 때문이 아니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줄을 짚어서 튀긴다는 행위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만큼 줄을 끊어 냈다는 것 아닙니까? 잘라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요.”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얼른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죠! 이어진 줄을 어느 부분에서 잘라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진 것을 잘라 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이어진 것, 연속된 것은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것 아니에요? 그것을 끊어 냈으니 그만큼 한정시켰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몹시 귀여운 나머지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여학생이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한정시켰다? 좋은 말입니다. 그 결과 무엇이 드러났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소리요.”

어느 학생이 곧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제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기타 줄이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이어져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길이까지 포함해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을 끊어 내면 무엇이 나타나지요?”

그제야 학생들은 내가 듣기를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듯했습니다.

“아아, 알았습니다. 새로운 끝, 한계, 페라스(peras)요. 맞지요?”

“그렇습니다. 기타 줄을 끊어 내는 순간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져 숨어 있던 끝이, 한계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일정한 진폭과 진동수와 음색을 지닌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끝이, 한계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면 소리가 되었든 모습이 되었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문제를 조금 더 단순화시켜서 일차원의 세계에 있는 줄〔line〕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이 줄을 끊어 내면 거기에서 새로운 끝이 나타나는데, 일차원의 줄이므로 이렇게 해서 얻어 낸 끝〔peras〕은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쪽에 하나씩 새로운 끝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낱말은 하나라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있는 것이 왜 하나로 있는지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나의 끝이 나타나자마자 이것은 규정된 것(끝, 한계가 보인 것)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어려운데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하고 요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학생들의 감각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 있는 교탁을 번쩍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들어 보인 이 교탁은 한 개지요?”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나 뻔한 질문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는 제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나 봅니다.

“당연히 하나지요.”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정말 하나인 것이 그렇게 당연한가요? 왜 그렇게 당연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감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되물으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아까 들어 보였던 것처럼 이 교탁은 삼차원 공간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이어져 있지 않지요? 이 교탁이 놓여 있는 교실 바닥과도 떨어져 있고,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도 떨어져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 교탁은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 뒤, 아래 위에서 이 교탁의 끝을, 한계를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삼차원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끊어져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탁을 하나의 교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탁은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것은 교탁이다.’ ‘저것은 책이다.’ ‘그것은 연필이다.’와 같이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의 끝을 보고, 그 끝에서 다른 모든 것과 떨어져 있어서 하나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여럿이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의 하나는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는 단위입니다. 단위(單位)라는 한자말은 영어로는 유니트(unit)인데, 이 유니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우누스(unus)’, 곧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단위, 생명의 단위, 공간의 단위, 시간의 단위, 운동의 단위, 입자의 단위…… 이렇게 모든 것의 최소 단위를 찾아 헤매는 것은 모든 복합체들이 이 단위, 곧 하나로 되어 있어서, 하나만 찾으면 그 하나로부터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곁다리 이야기는 애초에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를 시켜서 만든, 우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플라톤의 우주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제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되는 것’[gignomenon, genesis : 이 말을 흔히 생성(生成)이라고 번역하는데, 독일 말로는 베르덴(werden),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으로 흔히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되는 것 또는 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을 이리저리 버무려 ‘같은 것[tauton〕’과 ‘다른 것[heteron〕’의 띠를 만들고 같은 것의 띠는 밖에 두르고 다른 것의 띠는 같은 것의 띠와 엇갈리게 해서 안쪽으로 둘러 이 우주를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라는 말에 걸려 곁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하지요. 플라톤의 우주론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많은 학자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콘포드나 테일러, 또 프랑스의 브리송 같은 사람이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해설해 놓은 터라, 제가 거기에 대해서 중언부언한다면, 그것은 마치 잘 그려 놓은 뱀의 몸뚱이에다가 다리를 그려 넣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 되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플라톤의 우주론이 지닌 존재론적인 의미(이렇게 쓰다 보니 정말 뭐 같아 보이는데,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에 연관된 토막 이야기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같은 것(또는 같음)의 띠로 둘러싼 이 우주의 밖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따라서 운동(또는 변화)도 여럿〔多〕도 없는 초월적인 이데아(idea)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이 괴물은 천의 얼굴을 지닌 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하도 많아서 플라톤 자신도 제대로 그 모습을 그려 내지 못하고, 이 괴물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오십 보 백 보인지라, 이제까지 이 괴물을 둘러싸고 수십 권(어쩌면 수백 권이 될지도 모릅니다.)의 책, 수천 편의 논문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다거나 이 괴물을 사로잡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이 이데아라는 괴물들의 왕은 ‘좋음’의 이데아라는데, 그 밑에 무수한 괴물들이 이 왕을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은 ‘사람’, ‘개’, ‘소’, ‘말’, ‘지렁이’, ‘바퀴벌레’, ‘쇠똥구리’…… 같이 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어떤 놈들은 ‘아름다움’, ‘참됨’, ‘용기’, ‘중용’, ‘거룩함’…… 따위의 제법 그럴싸한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다른 놈들은 ‘큼’, ‘작음’, ‘많음’, ‘적음’, ‘삼각형’, ‘동그라미’…… 같은 시답잖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 수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붙인 이름보다 더 많아서 이 괴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자면 ‘좋음’이라는 이데아계의 임금이 아무리 마음씨가 곱다 한들 어디쯤까지 좋은 임금님으로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와글거리는 이데아라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씨름하려 드는 건 마치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더미에서 콩알을 하나하나 골라 내 도끼로 뽀개는 짓과 진배없는지라 그런 일은 다른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분들께 맡겨 두기로 하고, 얼렁뚱땅 ‘이데아라는 놈들은 있는 것(또는 있음)이라는 하나의 괴물 몸에 생긴 두드러기들이다.’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무튼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이 괴물들을 보고, 그놈들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이 엉터리없는 이야기 속에 담긴 숨은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관심을 끄는 문제라는 것만 알고 넘어갑시다.”

세상에!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그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서양 고대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이렇게 제 쪽박 깨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하는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면 그야말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땅한 노릇이겠지요.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과학자가 없는 과학 윤리(1)[대안도덕교과서]-7

 

 

강경표(중앙대학교)

 

*이 글은 삼인출판사에서 출판 될 대안도덕교과서(가제)의 일부를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문화와 도덕’이라는 영역이 있습니다. ‘문화와 도덕’은 ‘진정한 아름다움이 무엇인가’로부터 시작해서 ‘예술이 주는 도덕적 감수성’의 문제를 지나, 갑자기 ‘과학과 도덕’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는 챕터로 마무리됩니다. 과학도 하나의 문화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분류도 타당하겠지만 다소 생뚱맞아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혹시 교과서를 만드신 선생님들이 하지 못한 다른 이야기가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도덕교과서 속에 숨겨진 과학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도덕, 과학에 활을 겨누다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를 묻는다면, 과학 자체는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E=mc²이라는 수식은 그 안에 아무런 도덕적 가치를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수식을 이용해 질량을 에너지로 바꾼다고 할 때, 그 에너지를 만들어 내고 사용하는 과학자의 행위는 가치중립적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 과학자가 살고 있는 시대, 문화, 역사, 환경, 정치, 신념에 따라 과학자의 행위가 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과학과 도덕’에서는 사실 과학자가 지켜야 하는 도덕을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과학자가 되고 싶은 학생들에게 과학자가 지녀야 할 도덕적 태도를 이야기해 주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과학자는 우리 사회를 파괴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만들어 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영화나 만화 속에 등장하는 악당 과학자들은 항상 지구를 파괴하거나 세계를 정복하는 꿈을 갖고 있으면서 무시무시한 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자신이 가진 과학의 힘을 과시하지만 도덕 능력은 빵점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는 영화 속에나 존재하는 이야기이고 현실의 과학계는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여줍니다. 사실 과학계의 상황을 고려할 때 과학자 개인의 윤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가의 과학관, 자본과 과학의 문제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과학과 도덕’은 이런 문제를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도덕 교과서의 출발이 국가가 원하는 인간상을 그려내는 것을 목적으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과학과 도덕을 이야기하면서도 과학을 반영하지 못하고, 엉뚱한 결론에 빠질 수 있는 생각들이 대안으로 제시되고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 이야기가 등장하는데도, 왜 교과서를 만들 때 과학자 또는 과학을 알고 있는 사람이 한명도 참여하지 않았을까요? 과연 도덕은 모든 학문을 능가하는 것일까요? 정말 과학자가 도덕을 배우지 않는다면 모두 악당이 될까요? 예술은 도덕적 감수성을 키우지만 과학은 도덕에 따라 움직여야만 하는 학문일까요?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 질문들 속에는 우리의 도덕 교과서가 두려워하는 것이 들어 있습니다.

도덕 교과서는 새로운 힘을 가질 수 있는 존재들을 두려워합니다. 프란시스 베이컨(1561-1626)의 말처럼 ‘아는 것은 힘’이고 이때 ‘아는 것’이란 과학 지식을 의미합니다. 과학은 물질을 다루는 새로운 지식을 찾아내고 만들어 내는 능력이 있습니다. 과학자들은 이런 새로운 지식을 발견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무모하기도 하고, 목숨을 위협할 정도로 위험하기도 합니다. 아무도 모르는 것을 새롭게 발견하기에 생길 수 있는 문제입니다. 예를 들어 보면, 예전에는 인터넷이 없었습니다. 사이버 공간도 없었지요. 그러나 현재 우리는 이 사이버 공간에서 다양한 활동을 합니다. 또 하나의 사회가 만들어진 것이지요. 사이버 공간도 사회적 성격을 지니기에 많은 도덕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발생하는 도덕적인 문제는 우리가 기존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것이 있기 때문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해법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이버 윤리’라는 새로운 영역이 탄생을 하게 되는 것이지요.

흥미로운 것은 도덕 교과서에는 과학자들의 행동을 전통적인 도덕 안에서 규제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해 과학자들의 양심만 올바르면 된다는 식입니다. 그러나 과연 과학자 개인을 겨냥한 도덕의 활만으로 과학을 통제할 수 있을까요? 또한 과학자가 지켜야할 규칙이 과학자의 참여가 없이 만들어진다면 그 규칙을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은 불만이 생기지 않을까요? 이제 이런 문제들을 하나씩 살펴봅시다.

 

‘신과학운동’이 과학 윤리인가?

 

우리의 전통 문화 속에서 과학적 사실을 밝혀내고 가치를 창출하는 것은 과학자에게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과학적 사실을 전통적 사고에 기초해서 찾아내고 조화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한때 전통적인 사유와 과학의 조화를 이야기하는 신과학운동이 현대 사회와 과학 문명의 대안이 될 수 있다는 생각들이 존재했습니다. 그런 생각들을 바탕으로 종교와 과학의 융합, 생태?환경운동이 촉발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우리의 도덕교과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캐프라는 물리학을 동양사상과 비교하는 강연과 논문을 많이 발표하였는데, 그가 저술한 “현대 물리학과 동양사상”과 “새로운 과학과 문명의 전환”이라는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으며, 유럽과 미국에서 급속히 확산되고 있는 새로운 과학 운동, 녹색 운동의 이념적 기반을 마련해 줌.(중학교 도덕1, 미래엔 278쪽)

아직까지 대다수의 과학자들은 캐프라로 대표되는 신과학운동을 과학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신과학운동은 과학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신비주의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덕 교과서에는 신과학운동이 과학의 도덕적 대안 모델인 것처럼 제시되어 있습니다. 캐프라가 뛰어난 과학자는 분명하다고 해도 그 한 사람의 견해가 과학의 도덕적 대안이 될 수는 없습니다. 신과학운동에 대해 다른 교과서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습니다.

신과학운동은 현대 과학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의식을 가지고 새로운 세계관을 찾는 과학 사상운동이다. 신과학 운동자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핵전쟁으로 인한 공포, 자연환경의 오염 등을 비판하면서 우리 삶의 터전이 황폐해진 원인과 책임이 과학 기술에 있음을 지적한다. 이들은 과학 기술의 사회적 책임을 말하거나 과학 자체를 거부하기도 한다. 신과학 운동은 동양사상이나 새로운 철학을 바탕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과학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서로 연관되어 있고, 인간의 의식을 떠나서는 과학의 객관성은 존재할 수 없다고 본다. 신과학운동은 주관적인 것과 객관적인 것을 엄격히 분리시키는데 반대하고, 모든 사물들은 서로 연관되어 있고 모자란 부분을 채워주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고 말한다.(중학교 도덕2, 중앙교육진흥연구소 288쪽)

전통적 사유 속에서 도덕적 진리를 찾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과학을 동양철학적 사유 위에서 이해한다는 것이 매력적일 수 있을지 모르지만, 현장에서 과학 연구를 수행하는 학자들에게는 크게 설득력이 없습니다. 실제적인 과학 윤리는 과학 탐구 행위에 부합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야 하는데 과학자들이 참여하지 않고서는 실제적인 과학 탐구 행위가 무엇인가를 알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과학의 뿌리는 서양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양의 전통과 과학의 조화가 마치 과학 윤리인양 이야기 하는 것은 현실 과학과 너무나 동떨어진 것은 아닐까요?

인간의 의식을 떠나 객관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실을 밝혀낸 것도 과학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는 태양이 동쪽에서 떠서 서쪽으로 지는 것처럼 느끼지만 이는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지 우리의 의식이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사실 우주와 자연에 대한 다양한 현상들은 과학에 의해 밝혀졌고, 과학은 그러한 사례들의 연관성을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삶의 근거를 동양철학적 사유에서 찾지 않아도 그 근거를 충분하게 제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많은 도덕?윤리 선생님들은 (자연적)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행위를 자연주의의 오류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진화론이라는 과학이 발전하던 시대에 진화론에 매우 비판적이었던 조지 무어(1873-1958)라는 사람이 그렇게 주장했습니다. 이 주장은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과학자들이 밝혀낸 사실로부터 당위를 도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논리로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철학적 당위 위에 놓인 과학은 좋은 과학이고 과학적 사실로부터 철학적 당위를 도출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한 문제일까요?

신과학운동은 철학적 당위와 과학적 사실을 결합한 형태의 학문입니다. 그러나 다수의 과학자들은 신과학운동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인간의 행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게는 도덕 또한 인간의 행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가설일 뿐입니다. 과학에서 가설은 실험을 통해 검증되어야만 합니다. 단순하게 전통이라는 이유로 도덕을 따르는 것은 과학적인 태도도 아닙니다. 이것은 과학자가 지켜야할 도덕을 만드는데 과학자가 참여해야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실제 과학자들의 생각이 반영되지 못한 우리의 도덕 교과서는 신과학운동을 마치 과학이 걸어가야 하는 모범적인 모습인양 이야기하고 있을 뿐입니다.

(2)에서 계속…

제 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자본론강독]-15

제7장 노동과정과 가치 증식과정

정리 : 김선이

 
□ 본문 발제(p.235263)
? 제1절 노동과정[또는 사용가치의 생산](p.235~246)
[자본가는 노동력을 사용하기 위해 구매한다] 노동력의 구매자는 노동력의 판매자에게 일을 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소비한다. 노동력의 판매자는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 노동력이 된다. 노동자가 자기의 노동을 상품에 대상화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의 노동을 사용가치에 대상화해야 한다. 그러므로 자본가가 노동자에게 만들게 하는 것은 어떤 특수한 사용가치(어떤 일정한 물품)이다. 사용가치의 생산이 자본가를 위해 자본가의 감독 하에 수행된다고 해서 그 생산의 일반적 성질이 달라는 것이 아니므로 노동과정은 어떤 특정 사회형태와 관계없이 고찰되어야 한다.

● 노동
노동은 인간과 자연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하나의 과정이다. 인간은 하나의 자연력으로서 자연의 소재를 상대한다. 인간은 자연의 소재를 자신의 생활에 적합한 형태로 획득하기 위해 자기 신체를 운동시킴으로써 외부의 자연에 영향을 미치고 변화시키며 동시에 자신의 자연을 변화시킨다. 이 과정을 통해 자신의 잠재력을 개발하며 이 힘의 작용을 자신의 통제 밑에 둔다.(p.235)

노동은 오로지 인간에게서만 볼 수 있는 형태의 노동이다. 노동과정의 끝에 가서는 그 시초에 이미 노동자의 머리 속에 존재하고 있던 결과가 나오는 것으로 노동자자는 자신의 목적을 자연물에 실현시킨다. 그 목적은 자기의 행동방식을 규정하며 자신의 의지를 이것에 복종시키는데 이 의지는 노동기간 전체에 걸쳐 요구된다. 더욱이 노동의 내용과 그 수행방식이 노동자의 흥미를 끌지 않으면 않을수록 노동자가 노동을 자기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힘의 자유로운 발휘로서 즐기는 일이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더 치밀한 주의가 요구된다. 노동과정의 단순한 요소들은 ①인간의 합목적적 활동(노동 그 자체), ②노동 대상, ③노동수단이 된다.(p.236~237)

⇒ 노동은 인간의 노동력이 발현된 것, 즉 노동력의 작동인데 ①노동에 앞서 이미 인간의 두뇌 속에 실재하고 있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의식적인 합목적적인 활동이다. 이 점에 있어서 인간의 노동은 거미나 벌이 그 집을 만들 때의 무의식적 본능적 활동과는 다르다. ②노동은 자연의 형태를 바꾸어 인간의 욕망을 보다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하는 활동으로 그것은 무에서 유를 만들어 내는 활동이 아니다. ③인간은 노동에 의해 외부의 자연에 작용하여 자연을 변화시키고 인간의 욕망을 한층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는 형태로 바꾸지만 그와 동시에 노동을 함으로써 자신의 육체를 변화시키고 자신의 여러 능력을 발전시킨다. 두뇌를 발전시키고 언어를 만들어 내고 지식을 발전시켜서 유인원을 인간으로 진화시키는 것도 다름 아닌 노동이었다. ④노동은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자연적 필요사이며 없어서는 안 될 조건이다. 노동을 그만둘 때 사회는 멸망한다.

● 노동 대상
토지는 인간노동의 일반적 대상으로 인간의 수고 존재한다. 노동에 의해 자연환경과의 직접적 연결로부터 분리된데 불과한 물건들도 모두 천연적으로 존재하는 노동대상이다. 물고기, 원목, 광석 등이 그러한 것 들이다. 이와 반대로 노동대상 그 자체가 이미 과거의 노동이 스며든 것이라면 그것은 원료라고 부르는데 광석이 그것이며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 된다. 그러나 모든 노동대상이 원료인 것은 아니고 노동대상이 원료로 되는 것은 이미 노동에 의해 어떤 변화를 받은 경우뿐이다.⇒ 원료는 모두 노동대상이지만 노동대상이 모두 원료인 것은 아니다. 노동에 의해서 이미 그 형태가 바뀌어 진 것만이 원료이다.(p.237)

● 노동 수단
노동수단이란 노동자가 자기와 노동대상 사이에 끼워 넣어 이 대상에 대한 자기 활동의 전도체로서 이용하는 물건[여러 가지 물건들의 복합체]이다. 노동자는 여러 물질들의 기계적, 물리적, 화학적 성질들을 이용해 그 물질들을[자기 힘의 도구로서 자기의 목적에 따라] 다른 물질들에 작용하게 한다. 노동자가 직접 손에 넣는 것은 노동수단이다. (p.237)

토지는 그 자체가 하나의 노동수단이기는 하나 그것이 농업에서 노동수단으로 사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많은 노동수단과 비교적 고도로 발달한 노동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노동과정이 조금이라도 발전하게 되면 특별히 가공된 노동수단을 필요로 한다. 노동수단의 사용과 제조는 인간 특유의 노동과정을 특징짓는다.(p.238)

? 노동수단표

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 용기) 생산의 골격, 근육 계통(기계, 도구)
생산의 맥관 계통(관, 통, 바구니, 항아리)
기타, 목축용 토지, 비료제조에 있어서의 가축 등
노동과정에 필요한 일반적인 물적 조건 생산의 장소로서의 토지, 생산용 건물, 도로, 운하, 항만, 창고 등

? 광의의 노동수단
광의의 노동수단 중에는 협의의 노동수단 이외에 노동과정이 진행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물적 조건이 포함된다. 이리하여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노동이 노동수단을 사용, 노동대상에 작용하여 당초에 의도했던 대로의 변화를 노동대상 위에 일으킨다. 노동과정이 낳은 생산물은 인간의 욕망을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도록 형태가 바뀌어 진 자연물이다.

? 협의의 노동수단
협의의 노동수단(생산용구)은 노동자가 자신과 노동대상 사이에 개재시키는 그리고 그 대상에 대한 그들의 활동의 전도체로서 그를 위해 역할 하는 하나의 물건 또는 여러 물건의 복합체이다. 인간은 자신의 목적에 따라 하나의 물건을 다른 물건에 작용시키기 위해 물건의 물리적, 물리적?화학적 제 속성을 이용한다. 노동자가 직접 작용하는 것은 노동대상이 아니라 노동수단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을 생산용구라 부르고 토지도 하나의 생산용구로 불렀다.

? 생산용구는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협의의 노동수단의 발전수준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의 정도를 측정하는 척도이며 인간이 달성한 경제발전의 정도를 나타내는 지표이다. 멸망한 경제적 사회구성체를 탐구하는 데 노동수단의 유물이 중요하다. 경제적 시대를 구별하는 것은 무엇이 생산되는가가 아니고 어떻게 어떠한 노동수단으로 생산 되는가이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노동수단은 인간의 노동력 발달의 척도일 뿐 아니라[사람들이 그 속에서 노동하는] 사회적 관계의 지표이기도 하다. 그리고 노동수단 중 역학적인 종류의 노동수단은[그 전체를 생산의 골격, 근육계통이라고 부를 수 있다] [예컨대 관, 통, 바구니, 항아리 등과 같이] 노동대상의 용기로 쓰일 뿐이고 생산의 혈관계통 이라 부를 수 있는 노동수단에 비해 하나의 사회적 생산시대를 훨씬 더 결정적으로 특징짓는다. 화학공업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p.238~239)

? 생산수단, 생산적 노동
노동과정의 수행에 필요한 모든 객체적 조건들은 더 넓은 의미의 노동수단에 포함될 수 있다.그것들은 직접적으로는 노동과정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들 없이는 노동과정이 전혀 행해지지 못하거나 불완전하게만 행해진다. 이러한 종류의 보편적인 노동수단은 역시 토지 그 자체이다. 노동과정에서는 인간의 활동이 노동수단을 통해 노동대상에 변화를 일으킨다. 노동과정은 생산물 속에서는 사라진다. 그 생산물은 하나의 사용가치이며 자연의 소재가 형태변화에 의해 인간의 욕망에 적합하게 된 것이다. 노동은 그 대상과 결되어 노동은 대상화되었고 대상은 변형되었다. 이 과정 전체를 그 결과인 생산물의 입장에서 고찰한다면 노동수단과 노동대상은 생산수단으로 나타나며 노동 그 자체는 생산적 노동으로 나타난다.(P.239~240)

어떤 사용가치가 생산물의 형태로 노동과정으로부터 나올 때 그 이전 노동의 생산물인 다른 사용가치는 생산수단으로 노동과정에 들어간다. 동일한 사용가치가 어떤 노동과정의 생산물이면서 동시에 다른 노동과정의 생산수단으로도 된다. 그러므로 생산물은 노동과정의 결과일 뿐 아니라 노동과정의 조건이기도 하다.(P.240)

물건들은 각각 여러 가지 속성을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용도가 각양각색일 수 있기 때문에 동일한 생산물이 아주 판이한 여러 가지 노동과정의 원료로 쓰일 수 있다. 동일한 생산물이 동일한 노동과정에서 노동수단으로도 원료로도 쓰일 수 있다. 소비를 위해 완성된 형태로 존재하는 어떤 생산물이 새로운 다른 생산물의 원료로 되는 일도 있다. 또는 노동이 우리에게 생산물을 주는 경우도 있다.(P.241)

요컨대 어떤 사용가치가 원료, 노동수단, 또는 생산물로 되는가는 전적으로 그 사용가치가 노동과정에서 행하는 특정한 기능[그것이 노동과정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의존하는데 이 위
생산물은 생산수단으로서 새로운 노동과정에 들어가면 생산물이라는 성격을 상실하며 다만 살아있는 노동의 대상적 요소로 기능한다. (P.241~243)

우리의 장래의 자본가로 돌아가 보자. 우리의 자본가는 그가 구매한 상품인 노동력의 소비에 착수한다. 다시 말해, 그는 노동력의 담지자인 노동자로 하여금 노동을 통해 생산수단을 소비하게 한다. 노동과정의 일반적 성격은 노동자가 노동과정을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본가를 위해서 수행한다는 사실에 의해서는 물론 변하지 않는다.

노동과정은 자본가에 의한 노동력의 소비과정으로서는 두 가지의 독특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다. ①노동자는 자기의 노동을 소유하는 자본가의 감독 하에서 노동한다. ②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물이지 직접적 생산자인 노동자의 소유물은 아니다. 상품의 사용은 상품의 구매자에게 속한다. 그리고 노동력의소유자, 즉 노동자는 노동을 함으로써 실제로는 자기가 판매한 사용가치를 제공하고 있을 뿐이다. 자본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노동과정은 자기가 구매한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소비에 지나지 않지만 그는 노동력에 생산수단을 첨가함으로써만 노동력을 소비할 수 있다. 노동과정은 자본가가 구매한 물건과 물건 사이, 즉 그에게 속하는 물건과 물건 사이의 한 과정이다.
(P.244~246)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발터 벤야민과 함께 티어가르텐을 산책하다 [베를린에서 온 편지 7]

 

 

한상원(한철연회원/베를린 통신원)

 

*베를린에서 유학 중인 한상원 회원이 인문학 동향이나 정치 소식을 연재합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내가 사는 곳은 베를린 모아빗(Moabit)이다.?종교박해를 받던 위그노 교도들이 이주해 와서 성경에 등장하는?‘모압’이라는 지명을 따다가 이름 붙인 것이 그 이름의 기원이라고 알려져 있다.?전통적으로 모아빗 바로 위에 있는 베딩(Wedding)과 함께 베를린 노동계급의 거주지였고?20세기 초에는 이 지역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공산주의 운동이 활발하게 성장,?히틀러 치하에서도 반나치 운동이 왕성하게 펼쳐진 곳이다.?지금은 슈프레강 인근의 부유한 주택에 사는 독일인 중산층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에서 온 가난한 이주자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며,?특히 베딩,?크로이츠베르크(Kreuzberg)에 이어 터키인들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라 거리에 나가보면 여기가 독일인지 아니면 터키나 중동의 어느 도시인지 구분이 되지 않을 때도 있다.

모아빗 인근에는 커다란 도심 속의 숲 티어가르텐(Tiergarten)이 위치해 있다.?티어가르텐은 과거 프로이센 왕의 사냥터였다가 이후에 공원으로 지정되어 시민들에게 개방된 곳이며,?대규모의 도심 속 숲이다.?날씨가 좋은 날 자전거를 타고 학교를 갈 때는 모아빗에서 출발해 전승기념탑을 지나 티어가르텐을 가로질러 브란덴부르크 문을 통과한 뒤 운터덴린덴(Unter den Linden)?거리를 따라 달린다.?한여름의 뜨거운 햇살이 내리쬘 때에도 티어가르텐의 숲 속으로 들어가면 나무들 사이로 부는 시원한 바람에 더위를 잊게 된다.?도심 한 복판에 삭막한 고층건물이 아니라 커다란 숲과 공원이 위치해 있다는 것은 베를린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축복일 것이다.?이 때문에 티어가르텐은 오늘날 사람들이 베를린을?‘생태도시’로 규정할 때 가장 먼저 떠올리는 베를린의 상징물이기도 하다.?빽빽이 들어선 빌딩숲이 아니라 말 그대로 수풀로 우거진 자연공원 속에서 길을 잃을 수 있는 경험은 베를린이 아닌 다른 대도시에서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바로 이 때문에 발터 벤야민 역시 그가 베를린을 회상할 때 가장 먼저 이곳 티어가르텐을 언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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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잃은 벤야민

“어떤 도시에서 길을 잘 모른다는 것은 별일이 아니다.?그러나 그 곳에서 마치 숲 속에서 길을 잃듯이 헤매는 것은 훈련을 필요로 한다.”?벤야민의『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 등장하는 첫 문장이다.?티어가르텐에서는 길을 잃기 쉽다.?넓은 숲속에 나있는 복잡한 산책로들이 미로처럼 얽혀있기 때문이다.?이곳에서 길을 잃는 것은 그러나 나쁜 경험으로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여기서 길을 잃은 산책자는 시간에 쫓기거나 뚜렷한 목적지에 도달해야 한다는 다급함 없이 꿈을 꾸듯 부유하며 자신의 사색을 전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진2

벤야민의 어린시절도 그러했다.?벤틀러 다리(Bendlerbr?cke)에서 시작되는 벤야민의 티어가르텐에 대한 회상은 티어가르텐의 미로처럼 복잡한 산책로들 위에서 아리아드네의 실을 따라 이어진다.?이 다리는 어린 나이에 죽은 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던 뤼초우 물가와 교차하여 란트베어운하(Landwehrkanal,?조금 뒤에 보겠지만 로자 룩셈부르크가 죽은 곳이기도 하다)를 가로지르는 곳이다.?벤틀러 다리를 지나 조금 더 걸으면 티어가르텐의 남쪽 입구가 나온다.?아마 어린 벤야민은 이곳을 거쳐 자신의 목적지로 향했던 것 같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벤틀러 다리의 완만한 아치형 곡선은 내가 처음으로 접한 언덕의 측면이었다.”

그의 발걸음이 가장 먼저 닿는 곳은 티어가르텐 안에 위치한 루이제섬(Luiseninsel)이다.?이곳에는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3세와 그의 부인이자 독일인들에게 지금까지도 널리 사랑받는 인물인 루이제 왕비의 동상이 약간의 간격을 두고 서 있다.?벤야민은 이곳을 아주 좋아했고 특히 동상을 받쳐주는 아래 기둥 부분의 조각장식들을 마음에 들어 했던 것 같다.?특히 루이제 왕비의 동상 아래 부분에는 남녀간의 격정적인 사랑을 표현해놓은 장식이 있는데,?벤야민이 그의 글에서 바로 이곳에서 그가?‘사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했다고 한 것은 이런 배경에서일 것이다.?특히 벤야민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루이제 왕비로부터 자신의 동급생이었던 루이제 폰 란다우의 사연을 연상시킨다.?이 둘은 모두 루이제라는 이름을 갖고 있으며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이로부터 벤야민은 아름다움에는 언제나 차가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서,?그것을 손에 넣으려 제 아무리 시도한다 한들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의 지배를 받는다는 비극적인 진실을 깨닫는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와 루이제 왕비

 

전승기념탑

영화?<베를린 천사의 시>에서 인간들의 삶을 엿보고 그들의 생각을 엿듣는 천사 다미엘(브루노 간츠)은 티어가르텐의 정중앙에 위치한 전승기념탑의 여신상 어깨에 올라 앉아 인간 세계를 내려다본다.?사랑의 기쁨,?헤어짐의 고통,?삶의 무게,?시간의 무상함 등 인간들이 느끼는 감정과 그들의 일상적 삶에 무한한 호기심과 동경을 갖고 지내던 다미엘은 써커스단에서 곡예를 하는 어느 여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뒤 인간이 되기로 결심한다.?천사가 인간이 되려면 자살을 해야 하는데,?이 때 그가 선택한 장소 역시 전승기념탑이다.

사진5

전승기념탑은 프로이센이 프랑스와의 보불전쟁에서 승리,?나폴레옹?3세의 항복을 받아낸 스당전투를 기념하기 위해?1873년 설립되었다.?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은 이듬해 독일 전체를 통합하고 스스로 황제국으로의 승격을 선포한다.?따라서 전승기념탑은 뿔뿔이 흩어져 통일된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근대화를 이룩하지 못한 채 낙후되어 있었던 독일이 프랑스를 제압하고 통일을 이룩한 뒤 유럽최강국으로 변모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기념물이라 할 수 있다.?그러나 전 세계인들이 알고 있듯이,?독일의 역사는 이후 평탄하지 못했다.?가빠른 군국주의화 물결 속에 두 차례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모두 패한 뒤 독일은 동서독으로 분단되었고 수도 베를린 역시 두 개로 쪼개져야 했다.?그 이후 냉전기간동안 전승기념탑은 독일의 비극적인 현대사,?그리고 동서로 분단된 채 장벽으로 가로막힌 베를린의 현주소를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다.?독일의 승리와 번영의 상징에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의 상징으로.?전승기념탑은 독일 현대사의 주요 장면들과 늘 함께 해왔다.?이 점에서 탑의 꼭대기에서 인간들을 내려다보는 승리의 여신상은 인간들의 삶의 기쁨과 고통을 있는 그대로 지켜보는 천사 다니엘을 닮아 있다.

사진6

인간 역사의 진보는 동시에 계속해서 반복되는 파국의 역사이기도 하다는 것이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적 성찰이다.?마찬가지로 그는 스당전투의 승리와 전승기념탑 건립이 보여주는 독일의 성공과 번영,?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나치의 세계대전 수행의 와중에 세계사의 죽음을 보았다.?『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그는 이렇게 쓴다. “프랑스인들이 패배한 이후 세계서는 영광스러운 무덤 속으로 가라앉은 것처럼 보였으며 이 전승기념탑은 그 무덤 위에 세워진 돌로 된 묘비였다.”

아름다움은 차가운 그림자를 안고 우리 앞에 나타난다는,?루이제 왕비의 동상으로부터 얻은 벤야민의 깨달음은 역사의 흐름에도 적용된다.?군국주의 독일과 나치즘의 승리와 번영은 이미 그 자체로 세계 역사에 짙게 드리운 총체적 파국과 일치한다.?역사의 진보는 그것이 그 정점에 서 있을 때 동시에 참담한 파국의 역사로 나타난다.?승리를 기념하는 탑이 세월이 흘러 전쟁의 비극과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기념물이 되었듯이,?역사는 희극과 비극이 무한히 교차하는 가운데 운명처럼 그 힘을 드러낸다.?벤야민 역시 그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도주하던 중 스페인 국경도시인 포르부에서 자살을 택함으로써 그 스스로 이?“세계사의 죽음”의 희생자가 되지 않았던가?

 

란트베어카날

베를린의 란트베어운하는 많은 것들을 가로지른다.?벤야민은?『베를린 연대기』에서 란트베어운하를 빈민구역과 부유층 거주지를 가르는 경계로 소개한다. “프롤레타리아 주거 지역과의 차단벽 역할을 하는 란트베어 운하의 느릿느릿 흐르는 물”은 계급 분단을 나타내는 지표다.?운하의 남쪽에는 동물원 역과 쿠담 거리가 있고,?고가 명품 의류를 판매하는 상점들이 즐비한 이곳은 베를린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손꼽힌다.?반면 운하와 티어가르텐 북쪽에 위치한 모아빗과 베딩은 노동계급의 집단 거주지였다.?그곳에는 벤야민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하러 집밖으로 나왔을 때 화려한 트리장식과 달콤한 먹거리들 사이로 자신의 존재를 불쑥 내밀어 그를 당혹케 만든?“가난한 자들”,?그리고 벤야민의 꿈 속에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꼽추 난쟁이”들이 살고 있었다.

사진7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벤야민은 이들의 삶을 직접적으로 알지 못했다.크리스마스가 되면 그는 부모와 함께 화려한 가판대에서 물건들을 구경하지만,?가난한 집안의 아이들은 스스로 만든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부유한 집안 사람들이 크리스마스 장터를 구경나오면 그들에게 구걸을 해야 했다.란트베어 운하가 빈민층 거주지와 부유층 거주지를 구획했듯이,?크리스마스 역시 아이들을 두 개의 집단으로 나눈다. “크리스마스는 부르주아 집안의 아이들 앞에 다가오면서 그들의 눈앞에서 단번에 도시를 두 개의 진영으로 나눈다.”

란트베어운하는 슬픔을 간직한 곳이다.?이곳은 그가?『1900년경 베를린의 유년시절』에서 소개한,?귀족 가문의 동급생 루이제 폰 란다우가 살았고 그녀의 시신이 안치된 곳이기도 하다.?그런데 이곳과 연관된 또 하나의 죽음이 있다.?벤야민이 언급하지 않지만 실제로는 그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결정적인 죽음이다. 1919년?1월?15일 독일 혁명의 와중에 로자 룩셈부르크는 반혁명 의용대의 손에 살해당한 뒤 그 시신이 이곳에 버려졌다.?며칠 뒤 그의 시신이 떠오른 곳에는 수십년이 지난 뒤 그녀의 죽음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졌다.

사진8

로자 룩셈부르크는 란트베어운하가 가르는 가난한 자들과 부유한 자들의 삶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해 싸우다가 죽었고,?의용군 병사의 개머리판에 의해 두개골이 부서진 그의 시체는 다시금 란트베어운하에 던져졌다.?벤야민의 꿈에서?“꼽추 난쟁이”의 형태를 하고 나타나 그를 괴롭히는 알 수 없는 형체는,?란트베어 운하가 가르는 계급의 분단에 의해,?전승기념탑이 상징하는 독일의 군국주의화와 되풀이되는 전쟁에 의해 희생되어야 했던,?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의 알레고리인지도 모른다.

티어가르텐에서 길을 잃는 것은 좋은 경험이다.?아드리아네의 실에 의지해 미로를 따라 걷고 또 걷다보면,?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순간들은 결국 지나간 순간들이 우리 앞에 되살아나 오늘날의 우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벤야민의 무의식 속에서 그를 한없이 괴롭히던 꼽추 난쟁이는 결국 그에게 다가와 속삭인다.

“사랑하는 아이야,?아,?부탁이다,

꼽추 난쟁이를 위해서도 기도해주렴.”

우리는 지금,?누구를 위하여 기도를 해야 할까.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정치적 판단과 법적 판단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지난 주말 두 가지 판단이 논란이 되었습니다. 하나는 민주당 비대위 대표 박영선이 2011년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 2012년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으로 활동하며 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대통령 당선에 기여했던 이상돈 교수를 비대위 위원장으로 내정했다는 정치적 판단이고, 다른 하나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국정원 선거 개입 관련 재판에서 전 국정원장 원세훈에 내려진 법원의 판단입니다. 둘 다 여론의 질타를 받고 있는 예민한 문제인데, 저는 판단이라는 의미에서 한 번 이야기해보고 싶습니다.

 

칸트의 <판단력 비판>에 따르면 판단은 보편과 특수를 결합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에는 크게 이미 존재하는 보편을 특수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과 특수로부터 보편을 찾는 반성적 판단이 있습니다. 전자는 도덕적이고 법적인 판단에서 많이 볼 수 있고, 후자는 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에서 많이 내려집니다.

 

먼저 특수에서 보편을 찾는 정치적 판단을 보지요. 세월호 정국에서 비대위 대표를 맡은 박영선의 행로를 보면 괴이할 정도입니다. 새누리와의 협상안이 당내에서 두 번이나 부결이 되고, 유족들의 반발도 크게 샀지요. 협상 내용을 떠나서 협상의 기본적인 원칙과 방식조차 없었기 때문입니다. 협상에 들어가려면 관련 당사자의 합의를 거친 내용이 있어야 하는데, 그걸 상대측과 협상하고 와서 당내에서 그리고 유족들의 동의를 구하는 형태인거지요. 본말이 전도된 셈이지요. 비상 상황이라 전권을 행사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부결되었으면 다시 실수를 되풀이해서는 안 되겠지요. 그런 실수를 두 번 되풀이하는 것을 보고 괴이쩍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두 번 실수는 분명히 책임을 물어야 하는데 새민련에서 그냥 넘어간 것도 문제이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새민련 내부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해서 이상돈 교수를 영입하려 했다가 당내의 큰 반발을 사고 있습니다. 아하, 이 대목에 와서 나는 박 대표가 정말 정치적 판단력이 없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얼마나 포스트 모던적으로 생각을 해서 여야와 진보/보수의 경계를 넘나드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상돈 교수는 직전 대통령 선거까지 적장의 책사 노릇을 했던 자가 아닙니까? 그가 아무리 새누리를 비판하고 있고, 합리적 사고와 중도 입장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적장의 책사를 자당의 비대위 위원장으로 앉히려는 생각을 했을까요? 그냥 좋은 게 좋은 거라 그렇게 했을까요? 나는 이것이 정치의 기본도 모르고, 정치적 판단이 전혀 안 돼 있는 데서 나왔다고 생각합니다. 그에게는 현 상황이 아무런 질적 차이가 없이 무수한 잡다들의 혼재로 비춰진 것이지요. 다 그놈이 그 놈이고, 대신 좀 더 낫거나 좀 더 나쁜 정도의 차이로만 파악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 상황의 보편적이고 객관적 의미나 원리가 파악이 안 되는 거라 할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을 못한다는 것이지요.

 

칼 슈미트 이야기처럼 정치란 적과 아군을 구분하는 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래야 전선이 어디에 있고, 전략을 어떻게 세우며 전방과 후방에 인력을 어떻게 배치해야 하는지를 확실히 할 수가 있지요. 이건 강경파니 온건파니 하는 문제와는 상관도 없습니다. 그동안 새민련이 세월호 정국에서 허둥지둥 거리면서 새누리에 면박당하고 유족들 꽁무니를 따라 다닌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셈입니다. 피아를 구분하지 못하니까 어떻게 행동할 지 판단이 서지 않은 거지요. 한 마디로 정치적 판단력의 부재 혹은 무능, 정치에 대한 무감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셈입니다. 이럴 때는 다른 수 없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장수를 갈아치우는 수밖에요.

 

사진-ttp://www.ohmynews

사진-ttp://www.ohmynews

판단은 앞서의 경우처럼 특수한 상황으로부터 그 객관적 의미를 찾아가는 반성적 판단이 있는 반면, 어떤 원칙이나 규칙을 가지고 특수한 상황에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도 있습니다. 국정원장이 지난 선거 정국에서 선거법을 위반했는지를 판단할 때, 국정원법을 위반해서 정치에 개입한 것에 대해서는 유죄를 인정했지만 선거에 개입한 부분에 대해서는 무죄를 선고한 겁니다. 게다가 정상 참작으로 집행유예를 선고했으니까 사실상 아무 문제도 되지 않은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명백히 국정원장이 직원들을 동원해서 11만 건이나 되는 댓글 공작을 한 정황이 드러났음에도 선거법 위반이 아니고 구속도 되지 않았으니 국민의 법 감정이나 여론이 용납하기 힘든 것이겠지요.

 

법적 판단은 사건과 관련된 여러 증거들을 판단해서 해당 법 조항을 적용하는 것이지요. 이 때 이런 판단은 특수한 상황이나 증거에 어떤 조항이나 원칙이 적용되는 가가 문제가 됩니다. 이것은 상당한 증거 능력과 관련된 공방이 필요하죠. 본 사건의 경우에도 댓글 공작이 2012년 1월 전이고, 야당 후보가 확정되지 않은 상태라 특정 후보의 탈락을 겨냥한 것이 아니고, 이런 댓글 행위가 일상적인 정치 행위인지 아니면 의도적으로 선거에 영향을 미치려는 행위인지 등등을 따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증거가 확정이 됐을 때 검찰의 기소내용과 여기에 적용할 법조항이 무엇인지를 판단하는 것이죠. 때문에 법원의 이런 판단은 상당히 정교하고 기술적인 법적 판단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법 실증주의자들이 말하듯 이 판단은 자판기에 동전을 넣고 커피를 뽑는 식으로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사건의 의미와 정치적 성격, 그 파장 등을 바라보는 재판부의 입장이 드러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거 재벌들이 탈세나 기타 등등으로 법원의 판결을 받을 때 이른바 국민 경제에 미친 공로나 영향 등을 판결 주문에 넣고 정상참작 운운하면서 집행유예로 빼 넣는 경우들이 다반사였습니다. 하자만 이것은 법치와 평등의 원칙에 어긋나는 재판부의 월권이나 다름없는 것이지요.

 

국민경제는 그들이 판단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님에도 판사의 재량권과 해석권이란 차원에서 주관적이고 자의적으로 개입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법원이 재벌에 대해서 이런 봐주기식 판단을 상당히 제한하는 것은 법치와 사법부의 독립이란 측면에서 고무적이라 할 수 있을 겁니다. 아무튼 재판부가 법조항이란 보편과 사건이라는 특수를 결합해서 판단할 때 자의성이 개입할 여지, 쉽게 말하면 정치적 판단의 여지가 많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판결문이 문제가 됩니다.

 

이번 판결에서는 국정원의 정치적 개입은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빼준 것도 문제가 될 겁니다. 정치적으로 중립을 지켜야 할 국가 기관, 특히 정보기관이 조직적으로 정치에 개입한 것을 인정하고서도 유야무야하는 것 자체가 정치적 판단이지요.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 상식적인 정치적 판단을 재판부가 한 것입니다. 다음으로 선거에 개입했는가의 여부를 판단할 때 적용한 법조항이 문제입니다. 법원은 선거법 제85조(선거운동금지)와 제86조(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 금지)의 차이를 부각시키면서 기소된 제85조 위반이 아니라고 합니다. ‘선거 또는 선거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와 ‘선거운동’을 엄격히 구분하고 있는 공직선거법의 입법취지 및 죄형법정주의의 원칙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라는 것이 그 이유지요.

 

제86조는 검찰의 공소장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법원이 판단할 이유가 없어서 별론으로 처리를 했습니다. 선거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선거운동 한다는 것보다 외연이 넓고 포괄적이죠.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는 것은 그만큼 법을 엄격하고 좁게 적용하겠다는 제스처지요. 여기서 짜고 치는 고스톱 판을 연상케 합니다. 이미 국정원의 정치 및 선거 개입 여부에 대해 강력 수사하겠다고 했던 검찰 총장을 사생활 문제로 밀어냈고, 수사팀도 완전히 물갈이를 해놓았습니다. 이런 사전 정지 작업을 통해 건드리면 다친다는 무언의 경고를 한 셈이지요. 이제부터 검찰은 자기검열을 하게 된 것이고, 쉽게 말하면 알아서 기는 개가 될 수밖에 없는 형국이었지요. 제86조는 이미 민주당에서 고발장을 제출할 때 적용한 법규인데 검찰이 그걸 몰라서 뺐을까요? 당연히 바보가 아닌 바에야 국민은 검찰과 법원, 그리고 그 윗선의 거래에 대해 상상력을 발동할 수밖에 없지요.

 

세 번째로, 선거운동금지에 관한 85조 적용문제를 보지요. 법원은 국정원의 조직적인 댓글 공작을 정치활동으로 인정했으면서도 집행유예로 무력화했고,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라는 판단을 공소장에 없다는 것으로 빼버렸습니다. 이렇게 외연을 좁혀 놓고 나서 마지막으로 국정원의 조직적 댓글이 선거운동도 아니라고 한 것입니다. 죄형법정주의 운운하면서 이렇게 좁고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느라 재판부도 고심 많이 했을 겁니다. 한 마디로 재판부는 축소전략을 쓴 것이고 이것이 일관성이 있다고 한다면 뭐라고 하겠나요? 법을 엄격하게 적용해야 하는 것은 법원의 덕목이니까요?

 

그런데 담당 판사는 2013년 야당 시의원의 리트윗 단 한건에 대해 벌금 500만 원이라는 의원직 상실 형을 선고했고, 야당 후보자 배우자가 월간지에 보도된 내용을 인용해 상대 후보자의 부정축재 의혹을 제기하는 이메일 1건을 보냈다는 이유만으로 징역 6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쪽에서는 법을 한 없이 축소해서 적용하고, 다른 쪽에서는 한 없이 확장해서 적용한 셈이죠. 이러니 일반 국민의 법 감정은 법원의 판결을 고무줄 판결이라고 생각하고 코에 걸면 코걸이고, 귀에 걸면 귀걸이로 생각하는 거지요. 법관의 자의성과 주관성, 게다가 정치적 판단이 민주주의의 발전에 중요한 판결에서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겠죠. 당장 현직 동료 판사가 이 판결문을 가지고 지록위마(指鹿爲馬)라고 비난하고 나선 겁니다. 동료의 판결문을 비판한다는 것은 대단히 이례적이고 용기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중요한 대통령 선거 정국을 앞두고 정치에 개입은 했지만, 선거 운동은 아니라는 판단은 개도 웃을 일이지요. 손바닥으로 해를 가린다고 해서 가려질 수 있을까요? 법관들이 이렇게 뻘짓을 하니까 사법부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고, 법원 판결을 믿지 못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가지고 어떤 이들은 법관들이 형식논리도 모른다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논리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의 문제입니다. 검은 것을 검다 하고, 흰 것을 희다고 하지 못하는 거짓의 문제이지요.

 

나는 모든 법관들이 이렇게 정치성을 띤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어물전의 망신은 꼴뚜기가 시킨다고 소수의 출세지상주의 판사들이 사법부의 위상을 떨어뜨리고 있는 것이지요. 당장 이 판결문에 대해 의롭게 문제제기를 하는 판사도 있고, 또 이재현 CJ 회장에 대해 과거의 재벌 봐주기 식과 다르게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는 재판부도 있다고 봅니다. 하지만 이번의 원세훈 판결과 2013년 김용판 전 서울지방경찰청장의 국정원 수사 은폐 사건 판결 같은 것은 법원이 스스로 알아서 기는 개가 되는 치욕적인 판결이고, 사법적 정의를 크게 후퇴시키는 판결이라 생각합니다.

 

검찰이야 행정부 소속이고, 최고 권력자의 입김이 검찰총장을 통해 압박으로 가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합니다. 하지만 삼권이 분리된 법치국가에서 법원이 독립적으로 판단을 하지 못하고 권력의 눈치를 본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대단히 불행하게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민주주의와 법치는 헌법이 자동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무엇보다 법을 운용하고 적용하고 또 판단하는 법관들이 법의 정신을 지키려고 노력할 때 가능한 것입니다. 무소불위의 권력과 금력이 지금 정치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하고 국민을 소외시키고 있을 때 그것을 막을 수 있는 최후의 보루가 사법부가 아닐까요? 이 점에서 본다면 법률적 판단은 단순히 보편을 특수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규정적 판단에 그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특수가 지니고 있는 보편성을 알아가는 반성적 판단도 개입하고 이를 통해 법의 정신과 법치주의가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6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5살에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 가던 날

외동딸 나를 “가스나”라고 부르던

어머니

가면서 돌아보고 또 돌아보던

내 어머니

 

할미꽃 꽃대 꺾어 머리에 꽂으면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렇게 꺾어 되느냐 가르치시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힘들게 가르친 딸 대신하여

졸업장 받아들고

소리 없이 우셨을

어머니

내 어머니

– 이○○, 2014년 2월 19일 구술 내용에서 발췌-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사진-김성리
성심원 요양사 정경

 

애락원에 갈 때 내 나이는 열다섯 살이었다. 외동딸이라고 나를 귀하게 여겼던 어머니는 부를 때 이름 대신 꼭 “가스나야”하고 부르더라.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어머니가 우겨서 좀 늦게라도 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밥장사를 했는데, 글자를 몰랐다. 그라께 여자도 배워야 한다고 그리 안 우겼겠나. 내가 열서넛 살 되었을 끼다. 그때부터 안 좋았다. 손가락이 자꾸 뻣뻣해지는 기라. 주물러도 그 때뿐이고 좀 지나면 다시 뻣뻣해졌지.

학교에서 무용을 하는 시간이 있는데, 손가락을 펼치기도 하고 여러 모양으로 구부리기도 했다. 왜 그리 손을 많이 쓰는지 무용 선생님이 원망스럽더라. 아이들은 무용시간이 좋아서 들떠 있는데 나는 그럴 수가 없더라. 다른 데는 크게 표도 안 나고 그때는 발도 괜찮았는데, 뭔 조화인지 손가락부터 안 좋아지더구먼. 손가락이 뻣뻣하니까 손 모양을 따라 할 수가 없잖아. 혹시 내 손가락을 보고 친구나 선생님이 병 걸린 걸 알까봐 조마조마했다.

무용 수업이 있는 날은 아침부터 손을 궁둥이 밑에 넣어 깔고 앉아 있었다. 그러면 따뜻한 온기와 몸무게가 있어서 안으로 꼬부라져 오는 손가락이 잠시 펴진다 아이가. 겨우겨우 무용 시간이 끝나면 왜 그리 어린 마음에도 맘 한 구석이 허해지던지… 그리 애를 써도 손가락은 자꾸 굳어오고 안으로 오그라들더구나. 밥장사하던 우리 어머니는 아무리 바빠도 조그만 틈만 나면 내 손을 주물러 줬다.

친구들이 처음에는 아무 것도 모르고 내 손을 흉내 내고 놀렸지만 나하고 잘 놀았는데 언젠가부터 드문드문해지더라. 나는 얼굴도 작고 피부도 하얗고 고와서 오물짜 같다고 했다. 그리 하모 뭐 하노. 나중에는 찾아오는 친구도 없고 놀 친구도 없는데. 놀 사람이 없고 동네 사람들 눈치가 보이니까 자꾸 산에 갔다. 산에는 나보고 뭐라 하는 사람도 없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안 들리제. 그래서 산에 갔다.

우리 동네 뒷산에는 할미꽃이 참 많았다. 지천에 널린 게 할미꽃이었다. 초봄부터 여름이 다 갈 때까지 지천으로 피어 있었다. 할미꽃 뿌리는 기침에 참 좋은 약이 된다. 모양은 그래도 그 꽃은 여러 모로 잘 쓰면 좋은 기 많다. 혼자 산에서 놀다가 심심할 때 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가만히 들여다보면 밑자루 있는 데가 불그스름하게 보인다. 고개 숙이고 외진 데에 피어 있는 할미꽃이 꼭 남의 신세 같지 않더라. 한참을 보다가 꽃대를 꺾어서 머리에 꽂고 산을 여기저기 그리 돌아다녔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사진-김성리
복지사 선생님의 허락하에 게재합니다.

할미꽃을 귀 옆에 꽂고 좋다고 집에 돌아오모 우리 어머니는 항시 같은 말을 하셨다. “너도 늙으면 할미꽃 된다.” 그러면 나는 픽 웃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세상 보려고 나온 생명인데 그리 꺾어 되느냐고 안쓰러워하던 어머니 마음을 이제는 알 것 같다. 병든 어린 딸이 무심코 꺾은 그 생명이 그냥 예사로 보이지 않으셨던 게야. 그리 함부로 꺾다가 혹시라도 나한테 안 좋은 일이 생기모 어쩔까 걱정이 앞섰던 게야.

열다섯 살이 되니 그나마 학교에 가기도 힘들어졌어. 동네 사람들도 학교 선생님도 모두 나를 어디로 보내라고 어머니를 졸랐다. 우리 어머니는 우짜든지 나를 안 보내려고 용을 썼지만, 어쩔 수 없어서 애락원으로 가기로 했제. 우리 엄마가 해주는 국밥을 먹으러 오던 단골 중에 손상이라는 떠돌이 곡식 장수가 있었는데, 그 양반이 애락원을 말해줬어. 열서너 살에 말해줬는데 우리 어머니가 안 보낼라고 모르는 체 했거든.

더는 못 버티고 우리 어머니 손잡고 애락원으로 갔는데, 문 앞에서 헤어져야 하는 기라. 병자 아닌 사람은 안으로 못 들어가. 문을 가운데 놓고 엄마도 나도 손을 못 놓고 꼭 잡고 있었다. 보다 못한 직원이 나서서 강제로 꼭 잡고 있던 손을 떼어 놓고 나를 문 안으로 들이 밀었어. 나는 문 안에서 우리 어머니 보고 우리 어머니는 문 밖에서 나를 봤다. 담도 아이고 문을 가운데 놓고 들어가도 못하고 나가지도 못하고 그리 그리 서로 바라만 봤다. 돌아가야지.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가야 하고 나는 애락원으로 들어가야 하제. 어머니는 가면서 돌아보고 몇 발자국 가다고 또 돌아보고 했다. 나는 그냥 물끄러미 보고 있었다.

초등학교를 5학년까지 다니다가 애락원으로 갔다. 글도 모르고 밥장사하는 어머니였지만, 하나뿐인 딸은 공부도 가르치고 예삐게 그리 키우고 싶어 하셨다. 세상 부모 다 그렇지만 그래도 우리 어머니 생각은 지금도 난다. 근데 왜 어린 시절에는 기억이 잘 났는데 중년 이후로는 이리 기억이 흐리지노? 그리 우겨서 힘들게 보냈던 학교를 나는 졸업식에 못 갔다. 우리 어머니가 나 대신 졸업장 받아왔지. 얼매나 울었을꼬. 나도 어미 되고 이리 늙어가니 새삼 어머니가 보고 싶다. 참 보고 싶다.

우리 어머니는 여걸이었다. 실수가 없었다. 손끝이 야무져서 바느질도 참 잘하고 음식도 맛깔스럽게 잘 했다. 그래서 동네 큰일이 있으모 뽑혀가서 음식을 만들고는 했다. 밥장사는 고령 장날만 장에 가서 했다. 집에서는 떠돌이 장사치들을 상대로 하숙을 했다. 장사치들이 장을 따라 다니기도 하고 물건을 지고 여기저기 다니거든. 그러다가 우리 동네 가까이 오모 꼭 우리 집에 와서 자고 가는 기라. 그런 하숙이지. 애락원이 있다고 알려 준 손상도 그런 사람이었다. 손 씨인데 그때는 손상이라고 했다.

애락원에 들어갈 때 만원 줬다. 그때 그 돈은 엄청 큰 돈이었다. 굳이 돈을 안 줘도 되는데 우리 어머니는 나를 보내면서 그리 큰 돈을 줬다. 애락원은 병원 같은 데였다. 플래처 선교사가 의사이기도 했는데, 그 때는 건물이 2개 있었다. 나병원이라고 하더라. 우리 어머니는, 글도 모리던 우리 어머니가 시장에서 국밥 말아 팔고 장사치들 밥해 준 돈 만원을 내 치료해주라고, 잘 치료해서 꼭 낫게 해주라고 애락원에 냈다.

나는 ‘불효자는 웁니다’ 노래를 들으면 울고, 어머니 생각해서 울고 그냥 울고 매일 밤 한 번은 운다. “불러 봐도 울어 봐도 못 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 보고 땅을 치고 통곡해요.다시 못 올 어머니 불초한 이 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이리 부르고 어머니 생각하고, 휴우~~~ 말해도 소용없는 지난 일 생각하고…… 그래서 운다. 그리 힘들게 번 큰돈을 갖다 바쳐도 안 되는 게 이 병이더라.

오빠가 있었다. 오빠는 초등학교 나와서 대구에서 포목 장사를 했다. 동생은 일본에서 대학까지 나왔다. 우리 어머니하고 오빠가 열심히 일해서 내 병원비랑 동생 학비를 댔다. 내가 병에 걸려 학교를 못 다녀도 고등수학까지는 안다. 옆에서 보고 들으면서 혼자 공부했다. 나는 경북 고령이 고향이다. 주민등록증에는 1921년 1월 5일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1919년 1월 5일(양력)이다. 홍진으로 예방접종을 했다는 말은 들었다. 그때는 어린 아이들이 많이 죽었다. 그래서 호적에 늦게 올린 건가 싶다.

어머니가 해 주던 음식 중에 가죽 자반이 있다. 가죽을 뜯어서 살짝 데쳐서 말리거든. 살짝 말려야 돼. 약간 꼽꼽하게 마르면 밀가루 풀을 이파리 사이사이에 넣어서 잎을 반듯하게 만들어. 그 위에 찹쌀풀을 먹이는데, 그 찹쌀풀은 찹쌀하고 고추하고 소금을 넣어서 빻아서 만들어. 찹쌀풀을 서너 번 덧발라 줘야해. 마지막 풀이 또 꼽꼽하게 되면 통깨를 뿌리고 말려서 단지에 차곡차곡 재여 놔.

좀 맵거든. 매우니까 병에 안 좋다고 우리 어머니가 못 먹게 해. 그런데 그게 참 맛있어. 어머니 몰래 하나씩 꺼내 먹으모, 아이고 참 맛있다. 매워서 헥헥 거리면서도 훔쳐 먹고는 했다. 그리 하는 것도 있고, 여린 가죽 이파리를 소금물에 절여 꼭 짜서 말린 후에 고추장 양념해도 맛있다. 그것 말고도 갈치가 참 맛있었다. 명태도 맛있고 함흥에 청어가 많이 났는데 그 청어도 맛이 있지. 아, 참 김밥도 맛있다.

2011년부터 이상하게 입안이 헐어서 안 나아. 요 안에, 입 안에 봐라. 헐어 있는 거 보이제? 아이고 많이 아프다. 김치를 참 좋아하는데 김치도 못 먹고 매운 것도 못 먹고 하니까 어머니가 만들어 주던 게 자꾸 생각이 나. 죽을 먹는데 김치도 없이 뭔 맛으로 묵노. 오늘은 김치를 물에 씻어서 먹었는데 그것도 김치라고 좀 낫더라. 전에 여기 성심원에 의사로 있던 이비인후과 선생이 요새도 한 번씩 오거든. 내처럼 이리 입안이 헐고 아픈 거 공부해서 꼭 낫게 해준다 했는데, 그 공부가 어려운가 아직 안 낫아.

 

아침단상[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아침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아침에 일어나서 페북의 타임라인을 보다 보니 두 가지 기사가 유독 눈을 끈다. 하나는 삼성 반도체 노동자로 일을 하다가 백혈병에 걸려 죽은 황유미 양의 아버지에 관한 기사이고, 다른 하나는 ‘경영판단의 원칙’에 관한 김 상조 교수의 시론이다. 둘 다 삼성과도 관련이 있다.

 

고 황양의 아버지는 인터뷰에서 항소심에서도 유가족의 판단에 손을 들어준 법원의 판단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딸이 백혈병에 걸린 지 9년만이고, 죽은 지 7년 만이다. 그 긴 세월 동안 꽃 같은 딸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가는 모습에 가슴아파하고, 또 그만큼 긴 세월동안 나 몰라라 하는 재벌 기업을 상대로 분노하면서 싸워왔던 아버지의 힘들었던 모습이 오버랩된다. 한국사회에서 개인이 재벌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외롭고 힘들고 모든 것을 바쳐야 하면서도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무력감과 좌절감을 이겨내고 승리한 것이다.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의 힘이다. 그만큼 이런 승리는 보석같이 빛난다.

 

사진-http://hr-oreum.net

사진-http://hr-oreum.net

삼성반도체와의 싸움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직업병으로 판정된 것은 2 케이스 뿐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번 판결이 산재 보상의 좋은 선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정치 논쟁은 끝이 없지만 법원의 판결은 중요한 판례로 유사 사건들의 판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정치투쟁만을 일삼는 세월호 공방이 눈여겨 볼 대목이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삼성도 기업의 사회적 역할과 책임에 적극적인 자세를 가져야 하며, 다른 유사 사건들도 전향적으로 잘 마무리를 했으면 한다. 삼성이 오늘날의 성공 신화를 만들 수 있었던 것은 이건희 회장을 위시한 소수만으로 가능한 것이 아님을 직시해야 한다. 그 이면에 수많은 직원들의 헌신과 고통, 그리고 반도체 사망자들처럼 산재로 죽어간 노동자들의 피와 땀, 그리고 국민들의 소비와 국가의 정책적 지원 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제 세계적으로 성장한 기업으로서 윤리의식과 책임의식을 같이 키워야 할 것이다.

 

사실 이번 판결이 나기까지 무려 7년이나 걸렸던 데는 삼성의 무력시위와 악의적인 방해 공작, 그리고 막강한 로펌의 인력들이 동원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는 법률가들의 지원을 받았기는 하지만, 이런 삼성의 권력에 맞서 일 개인이 소송을 벌인다는 것 자체도 상상하기 힘들다. 골리앗과 다윗의 싸움과 같기 때문에 미국의 법정이었더라면 이번 판결에서 단지 유족들의 손을 들어주는 것 이상으로 소송과정에서의 재벌의 행태에 대해 ‘징벌적 손해 배상’이 적용되어 천문학적 책임을 물게 했을 것이다. 이 법은 우리 국회에도 상정이 되었지만 국회로 진출한 법피아들의 방해로 아직도 계류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징벌적 배상 제도가 적용된다면 기업도 마음대로 소송과정에서 횡포를 부릴 수가 없을 것이다. 법원도 이 문제를 좀 더 전향적으로 생각해야만 한다. 그래야 이 땅에 정의가 살지 않겠는가?

 

다른 하나는 2년 가까이 소액주주운동을 벌여온 김상조 교수의 ‘경영판단의 원칙’에 관한 글이다. 지난 세기 말 IMF를 겪고, 2009년 금융위기도 거쳐 온 기업들이 투자 불확실을 이유로 사내에 엄청난 유보금을 쌓아 놓고 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대학도 천문학적 유보금을 쌓아 놓고 등록금 타령만 하고 있는 현실이다. 이 유보금을 그대로 적립할 것인지 아니면 특정 부문에 투자를 할 것인지는 기업의 고유한 경영판단이라는 것이다. 투자를 유도하기 위해 현 경제 내각이 이 부분에 높은 세율을 적용하겠다고 했지만 용두사미 격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경영판단은 일종의 초헌법적인 통치행위와 비슷한 의미가 있다. 국정의 총책임자인 대통령의 판단은 사법 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특별권력관계의 통치 행위라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지난 정권 때 엄청난 부실과 이권으로 진행된 4대강 사업에 대해 제대로 된 조사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오늘 날 헌법학자들은 이런 초헌법적 통치행위가 헌법의 정신을 무력화한다고 해서 인정하지 않는 쪽으로 학설을 정리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기업의 경영판단의 원칙이라는 것도 그 경계와 책임이 모호한 면이 적지 않다. 오늘날 기업이 사회에서 차지하는 비중과 역할은 막중하다. 그런 기업, 특히 삼성과 같은 세계적인 기업의 경영판단의 잘잘못은 국가 경제와 국민들의 일상적 삶에도 큰 충격을 미칠 수가 있다. 때문에 그런 기업의 경영 판단을 감시하고 견제할 수 있는 장치가 필수적이다. 김 교수가 벌이는 ‘소액주주운동’도 그런 견제의 한 방식이다. 김 교수는 20년 전부터 경실련을 배경으로 소액주주 운동을 벌였고, 그 과정에서 삼성과도 많은 마찰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사실 이런 감시와 견제를 위해서는 단순히 분노와 의기만 믿고 할 수 없는, 고도의 전문적 지식이 요구된다. 때문에 이것은 그 방면의 전문가들, 지식인들만이 사회적 책임을 갖고 뛰어들 수 있는 부문이다.

 

나는 김 교수를 보면서 이 땅의 지식인들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늠한다. 전문적 지식을 갖고 높은 연봉을 받는 대학교수들이 일반인들과 똑같이 피켓 들고 행진하고 단식 흉내 내고 하는 것은 직무 태만이고 유기이다. 물론 그런 행동들이 전혀 필요가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고도의 전문적 지식과 높은 연봉을 받는 만큼 그런 전문성을 발휘하는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 그들은 사회를 비판하고, 국민들을 움직이는 글을 쓰고 이론을 만들어야 하고, 전문적 식견을 통해 그런 비리와 불평등을 실증적으로 밝혀내야 한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사회당이 압승을 거둔 데에는 68운동 세대들의 이론들이 밑거름이 되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대학사회의 구조적 부정의와 불평등과 싸워야 하고, 이제 노골적으로 극우행동을 하는 젊은 학생들의 생각을 바꾸기 위해 교육 현장에서 싸워야 한다. 오늘날 자본과 권력에 의해 순치된 대학이 자기 검열에 급급하는 데 어떻게 사회 비판을 할 수 있겠는가? 세월호 문제가 정체된 데는 지식인들과 법률가들의 전문성이 실종된 상태에서 일반인들과 똑같이 행동한 책임도 크다. 공론장을 이야기하고 의사소통의 합리성을 떠들던 이 땅의 수많은 하버마스리언들은 다 어디로 갔는지 궁금할 뿐이다. 결국 그들에게는 피켓 들고 세월호 운운 하는 것과 이 땅의 현실과 유리된 이론들을 수입해서 저들끼리 골방에서 티격태격 하는 것 사이에 아무런 연관도 없는 것 같다.

 

사정은 정치인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국회의원 한 명을 운영하는데 연간 들어가는 비용이 5-6억이 넘는다고 한다. 본인의 세비와 보좌관들의 연봉, 그리고 사무실을 운영하고 기타 등등으로 들어가는 비용이다. 입법과 의정 활동을 하라고 국회에 보내주었지만 이들이 지난 몇 개월 동안 세월호 문제로 정치가 실종되는 동안 입법 활동을 한 것은 단 한 건도 없다고 한다. 이 정도 되면 직무 태만이 아니라 유기이고 해고감이 아닌가? 그러면서도 세비는 꼬박꼬박 챙기고 있다. 하다못해 감옥에 있는 통진당의 이석기 의원도 그동안 챙긴 세비가 6억이라고 한다. 거기다가 동료의원의 비리를 감싸는 방탄 국회를 만드는 데는 여야 없이 합심단결하고 있다. 이게 말이나 되는가? 하루 종일 폐지를 줍는 이 땅의 노인들의 한 달 폐지 수입이 5만원이고, 사회 변화를 위해 고군분투하는 NGO 단체의 간사들이 한 달 100-150만원도 안 되고, 열심히 지식보따리를 들고 이 대학 저 대학으로 강의를 위해 뛰어다니는 대학 강사들의 연 수입이 1000-2000만원도 안 되는 현실을 그들은 아는가? 그럼에도 그들은 탱자탱자 하면서 엄청난 세비만 챙기고 특권만 누리고 있는 것이다. 무노동 무월급은 파업현장의 노동자들이 아니라 바로 이런 정치인들에게 적용되어야 할 원칙이다.

 

한 마디로 우리 사회는 전문가들이 사라진 사회이고, 전문가들의 윤리와 책임의식이 실종된 사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저 구석에 있는 지식인들의 이름은 꿰고 있지만, 우리 현실을 대처할 때는 그저 몸으로 때우는 것 외에는 -그것이라도 제대로 하면 모르겠지만- 할 줄 모르는 게 지식인이다. 아무런 전문적 훈련도 받지 못하고, 역량도 없는 인간들이 열심히 눈도장 찍어서 공천 받고 발품 팔아 당선되고 나면 나 몰라나라 하는 정치인들이 득세하는 한 이 땅의 변화와 개혁은 요원할 뿐이다.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11

세월호 특별법에 관한 단상

이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요구하는 문제는 나에게는 진리에 대한 칸트와 헤겔의 대립을 연상케 한다.

 

칸트

칸트

1.2. 그들은 말한다. 진상 조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필요하다.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은 세월호 참사의 진상을 밝히기 위한 선험적 조건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먼저 ‘성역 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을 특별법 속에 정립해야 한다.

 

1.3. 칸트는 말한다. 진리를 알 수 있느냐의 문제는 먼저 인식 주체인 우리 자신의 능력 여부를 알아야 한다. 주체의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가 진리 탐구의 전제이다. 그런데 인식 능력에 대한 탐구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이다. 경험을 시작하기 전에 이런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모른다면 우리는 경험을 할 수가 없고, 진리를 알 수도 없다.

 

2. 헤겔은 칸트의 이런 물음을 간단히 일축한다. 내가 수영 능력이 있는지 없는 지는 직접 물 속에 들어가봐야 한다. 물 속에 들어가기 전에 나의 수영 능력이 가능한지 안 한지 검토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레닌도 비슷하게 말한다. 말을 탈 수 있는지 없는지는 직접 말을 타봐야 안다고…물 속에 들어가보지도 않고, 말을 타보지도 않고 가능한지 안 한지를 따지는 것은 공허한 형식주의 논쟁이다.

 

2.1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물 속을 들어가봤다고, 이미 말을 타봤다고. 조사권만 가졌던 과거사 진상조사위가 무기력하게 벽에 부딪혀 보지 않았냐고. 그래서 더 ‘성역없는’ 수사권이 필요하지 않는가고.

 

2.2 과거사 진상 조사위하고,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특검이 동일한 것인가?

 

2.3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이 초헌법적이라는 발상에 대해 어떤 이는 말한다. 이미 반민특위가 가져보지 않았냐고.

헤겔

헤겔

 

2.4 반민특위는 그런 ‘성역없는’ 수사권으로 무엇을 경험했는가? 그들은 경험을 경험했는가?

 

3. 오늘 날 한국사회에서 진보를 표방하면서 ‘성역 없는’ 조사권과 수사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칸트의 후예라는 것을 아는가 모르는가? 그들에겐 애시당초 참사의 진상은 알 수 없는 X인지 모른다. 그들에게는 오로지 진상을 밝힐 수 있는 조건의 가능성 여부만이 관심사인지 모른다. 가능성의 조건이 그들에게는 동시에 진상규명의 조건이다. 하지만 이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한가는 실제 수사를 하면서, 재판을 하면서, 대책을 수립하면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진상에 대한 접근은 형식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 진상 조사를 하면서 드러나는 내용의 문제가 아닌가?

 

3.1 그들이 말하는 ‘성역없는’이 법리로 가능한가? 모든 ‘성역’은 정치 논쟁, 정치 투쟁 속에서 드러나는 것이 아닌가?

3.2 한 시인은 말한다. “낭만주의자들은 집에다 싸움판을 벌여놓고 가출한다. 그들은 본질적인 문제를 해결할 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이미 제기된 문제를 미루거나 포기하고 새로운 문제를 찾아나선다. 그들이 ‘신비’에 정통한 듯이 행동하는 것도 그곳에서는 안심하고 나태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모든’ ‘완전한’ ‘진실한’ 등 일련의 형용사들의 간계를 조심하지 않은 까닭에, 젊은이들의 정신이 정체하거나 부패하는 수가 있다. 힘겨운 문제를 대면하는 데 지구력을 보일 수 없는 사람들은 이와 같은 형용사들을 미끼로 문제를 농담으로 유인해들이는 것이다.” (이성복,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 )

 

4. 아마도 그들의 관심은 다른 데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런 가능성의 조건만을 따지면서 벌이는 무한한 스콜라적인 신학 논쟁, 말하자면 공허한 정치 투쟁이 본질인지 모른다. 이들은 문제를 푸는 데는 관심이 없다. 다만 자기 목소리를 키우고, 맹주 역할을 하는 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5. 헤겔은 비판한다. 인식 가능성의 조건에 대한 탐구는 인식을 도구로 간주하는 형식주의일 뿐이라고. 하지만 인식이라는 사고의 도구는 인식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역없는’ 수사권과 조사권에 관한 법률 조항도 현실 바깥에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5.1 부정적인 것을 직시하고 그 속에 머무는 것이 정신의 힘이다. 이러한 머뭄이야말로 부정적인 것을 존재로 바꾸는 마법의 힘이다.(헤겔)

 

6. 인식의 이런 선험주의는 도덕적 엄숙주의와 궤를 같이 한다. “이 세상 안에서, 아니 세상 밖에서라도 제한 없이 선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오직 선의지뿐이다.” (칸트 도덕 형이상학 기초) 이 착한 마음은 현실의 다른 어떤 것도 고려하지 않는다. 오로지 마땅히 해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감만으로 하는 것이다. 이런 의무감은 무조건적으로 타당한 도덕 법칙에 대한 존경에서 행하는 행위이다. 이것이 양심의 윤리이다. 하지만 그가 따르는 도덕법칙은 얼마나 공허한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내 마음 속의 의심할 수없는 양심! 엄숙주의와 자폐증, 또 이런 선은 얼마나 추상적이고 독단적인가?

 

7. 헤겔은 말한다. 양심과 추상적 선의 무기력을, 엄숙한 도덕적 주체의 공허함을…이 공허함과 부정성에서 오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노예의 종속 상태로 자신을 비하시키게 될 객관성에의 동경을…그들은 어떤 확고한 지주나 권위를 붙잡고자 한다(헤겔)! 교황을 열광하던 그 마음과 그 태도들을 보라.

 

8. 이제 우리는 더는 그런 공허한 형식주의, 도덕적 엄숙주의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9. 마르크스는 말한다. “인간의 사유가 대상적 진리성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결코 이론 문제가 아니라 실천적 문제이다. 인간은 자기사유의 진리성을, 즉 현실성과 힘을, 그 생명력을 실천에서 증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천을 떠난 사유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 하는 논쟁은 순전히 스콜리학적인 문제이다.”(포이에르바하 테제)

 

10. 노자는 말한다. “挫其銳(좌기예)하며, 解其紛(해기분)하며, 和其光(화기광)하며, 同其塵(동기진)이니라.”(도덕경) 날카로움을 무디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풀어헤치며, 그 빛을 부드럽게 하고, 진흙 구덩이 속에 함께 하라고…그렇다. 진흙구덩이 속에 들어가서 부딪히는 것이 아닌가? 들어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문제를 풀 수 있는가?

 

11. 이들의 말은 모두 한결같다. 직접 현실로 뛰어 들라고, 그 현실 속에서 풀어 헤치라고, 그 현실 속에서 확인하라고. 그 현실 속에서 바꾸라고…벌써 세월호 참사가 몇 개월이 지났는가? 그 사이에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끊이지 않는 형식주의 논쟁, 도덕적 엄숙주의, 종교적 순결 외에 우리는 무엇을 확인했는가? 그 끝은 어디로 가는가?

 

12.다른 시인은 말한다. “이 비정한 세상에 희망은 있는 것일까… 그 많은 진단과 분석, 나라를 개조하자던 다짐들은 어디로 가고…증오와 불신과 비어들만 거리마다 넘치는가”(도종환, 광화문 광장에서) 혹시 그들은 이제 이처럼 희망을 상실한 비탄에 빠져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왜 우리는 스스로 만든 관념의 노예가 되려 하는가?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와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가? 혹시 우리들은 파리통 속에 빠진 파리들이 아닌가? (비트겐슈타인)

 

13. 특검은 구성도 못했는데, 정작 검찰과 법원은 수없이 조사하고 판단들을 내려가고 있지 않은가? 그런 판단들을 내렸다가 나중에 다 다시 뒤집으려는가?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 그 판단의 판단의 판단의 판단…무한한 퇴행!

 

14. 나는 나의 이런 말들이 질주하는 욕망의 비계 덩어리들, 영혼이 없고 창이 없는 독단의 황제를 두둔하는 말로 곡해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여전히 그들을 미워한다. 나의 말들은 다만 내 친구들의 생각에 조금이라도 충격을 주어서 사라진 어린 영혼들이 안식처를 찾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그러나 사고를 싫어하고, 오직 편들기에만 열중하는 시대에 나도 내 말이 무익한 열정일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사회의 탄생과 정치 혐오: 나는 왜 정치가 지긋지긋한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7

“사회의 탄생과 정치 혐오:?나는 왜 정치가 지긋지긋한가?”? <광진정보도서관 아주 사소한 물음에서 시작하는 철학> 7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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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월호 참사’와?‘인사 참사’의 사이에 있는 한국의 정치

*?한국정치의 수준과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노골적으로 드러낸 한국사회의?‘쌩얼’; ‘수직적 위계사회’에서?‘수평적 자율사회’로 나아가지 못하고 뒷걸음질 치는 퇴행의 역사.

* ‘밀실?수첩 인사’의 참혹한 풍경,?유신잔당들과 국정원의 득세.

▷?세월호 침몰 사건 이후 우리는 슬픔과 분노를 어떻게 표현하고 있는가.

▷?국민의 생명도 지켜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시스템과 부정의한 법적 체계에 대해 주권자로서의 자각이 담긴 질문b’국가란 무엇인가’.?그러나 이 질문의 한계.

☞?[물음]?우리가?‘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대체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가?

(일상언어의 용법?: ‘정치력’, ‘정치적인 사람’, ‘정치적 문제’, ‘국익’, ‘국민의 뜻’…)

▷?정치적 무관심,?정치 불신,?냉소주의적 정치 혐오는 어디에서 출발했는가.

▷?‘삼포세대’?젊은이들의 절망과 정치 무관심의 관계, ‘희망 없는’?사회의 도래.

* ‘유병언’만 잡으면,?세월호와 함께 침몰한 우리사회의 전도된 가치들도 회복되는가.

* ‘진보?vs?보수’?프레임의 함정을 더 깊이 파버리는 언론의 폐해.

* ‘세대’, ‘지역주의’, ‘부동산’에 종속된?‘정치 놀음’ :?노년 세대의 결집,영호남의?‘묻지마 투표’, ‘강남?3구’의 계급투표.
*?안철수의?‘새 정치’?담론의 관념성?:?한국정치의 문제 설정,?안철수라는 기표의 몰락,?이미지 정치-인지도 정치의 한계.

☞?[물음]?정치는 우리의 일상-삶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IMG_1916-1▷?정치혐오의 원인?:?투표하는 날에만 주권자(주인)가 되고 평소에는‘구경꾼’이나?‘들러리’가 된 시민.?국민들이 정치에 불신을 가지는 것은 정치 자체를 부정하는 게 아니라,?정치가 민의와 민생을 대표하지 못하는 문제에서 기인함.

▷?‘정치판은 더럽고 치사하고 추잡스러운 곳’이라는 이미지가 대중에게 널리 유포될수록 이익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

▷?국가 또는 정부와 착종되어 있는 정치.?결국 정치혐오의 끝은 정치에 대한 부정,?전체주의,?독재….?다시 물어보게 되는 질문,?한국에서?‘정치’란 정말 지긋지긋한 것인가.

* “정치꾼은 다음 선거 생각만 하고,?훌륭한 정치인은 다음 세대를 생각한다.”

*?권력투쟁,?정치공학,?선거공학,?권모술수와 음모, ‘차떼기’와 협잡,?이합집산과 줄서기?…?햇갈리는 정치의 속성.

☞?[물음]?정치인(꾼)들의 정치와 다른 우리들(국민?시민?민중?대중?인민……)의 정치는 왜 중요하며 어떻게 달라야 하는가??정치보다 더 중요한‘정치적인 것’의 발견은 어디에?

 

2. ‘정치 불신’의 사상적 기원?:?근대 국민국가 및 계약론 모델의 의의와 한계

(1)?사회계약론의 성과와 법적 권위

▷?근대 계약론이 함유하고 있는 권리 개념의 특징?: ‘주체적 권리’?개념을 전제함.

▷?고전적 자연권 또는 자연법 사상(아리스토텔레스, T.?아퀴나스) :?조화와 균형 추구,?자연과 인간세계의 모든 위계적인 질서를?’자연적인 것’으로 간주함,?사람들 사이의 몫의 비례적 배분으로 자연권(법)을 정의함.?정치란 사회를 구성하는 각 부분들 사이에 존재하는 질서의 표현,?정체공동체의 구성은 이미 존재하는 질서의 반영으로 제시됨(“인간은 정치적?사회적 동물이다’).

-?근대적 자연권 또는 자연법 사상(홉스,?로크,?루소) :?자연에 대한 개체주의적/기계론적 이해에 바탕함,?고립되고 고유한 개인이라는 토대 위에서 대부분의 근대 계약론자들은 자연권을 자신의 생명과 재산을 보존하고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자유로서 정의함.?즉 개별 주체가 고유하게 갖는 어떤 속성,?특질,?권한,?능력으로서의 권리 개념을 창안함.?→?인간을 모든 사회적 결정들이나 위계질서로부터 독립해서 규정하여 모든 인간이 그 본성에 있어 동등하며 정치에 참여할 권리를 갖는다는 급진성을 띔.

-?근대 계약론의 혁신성?:?에서는 모든 개인들의 근원적 평등을 전제하고 이것이 정치의 토대라는 사실을 자연상태 이론을 매개로 보여주고 있음.?즉 자연상태의 인간이 가진 추상적?‘자연?본성(nature)’은 전-정치적(pre-politic)?단계를 가리키며 이것은 인간이 가진 정치성의 전제가 됨.

-?근대 정치철학의 최대의 성과?:?자연상태의 고립된 개인들이 갖는 비정치성에 관한 이론은 정치적 사유의 지평을 이동시켜,?정치를 근본적으로 새롭게 사유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음.?즉 근대 이전에는 정치의 문제가‘통치’나?‘지배’에 관한 이론이었던 반면에 사회계약론을 통해 이제 정치는‘권력의 기원’에 관한 문제로 전위되었던 것.?또한 인간의 본성을 선험적으로 규정(로고스를 지닌 인간은 이미 정치성을 가지고 있음)하지 않고,?그것을?‘구성된 것’으로 위치시킴.?어떤 도덕적 가치나 사회 초월적 가치에 정치적 문제가 종속되는 것을 차단함.

“인간들은 자유롭게,?그리고 평등한 권리를 가지고 태어났으며,?또한 그렇게 존재한다.?……?모든 정치적 연합의 목적은 제한할 수 없는 이 자연권을 보존하는 것에 있다.”

1789년?<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프랑스 국민회의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진리들을 자명한 것으로 간주한다.?즉 모든 사람들은 평등하게 창조되었다는 것,?그들은 양도할 수 없는 어떤 권리들을 창조자로부터 부여받았으며,?그 권리들에는 생명,?자유,?행복추구가 속한다는 것,?그리고 이러한 권리들을 보장하기 위해 통치체들이 인간들 사이에 설립되는데,?그것들의 권력은 피통치자들의 합의로부터 나온다는 것.”

1776년?<독립 선언>,?미국 독립의회

-?두 선언의 공통점?:?모든 인간들에게는 어떤 자연권들이 있으며,?모든 정치체는 이 권리의 보장에 그 목적이 있음을 밝히고 있음.?하늘이 부여한 인간의 권리가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도 권리로 인정됨을 천명함.

-?두 선언의 차이점?: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은 주로 루소적 관점에서,?법을?’일반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면서 인민의 정치에의 참여를 정당화함. <독립 선언>은 자유주의적 관점에서,?주권에 저항하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인권을 국가권력의 토대로서가 아니라 그것의 한계들을 지시하는 개념으로 파악함.?그런데 근대적 인권 개념은 근대 사회계약론에서 고유하게 제기되고 이해되고 있음.

– ‘근대 법적 실증주의’의 필연성 도출?:?위에서 설명하나 주체적 권리가 그 자체로,?즉 개념 규정상 개인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를 지배하는 법칙들의 토대가 될 수 없는 한에서,?성문화된 시민법은 또 다른 토대,?즉 사회적 질서를 확립하고 그것을 보전하는 어떤?‘권력’을 상정해야 함.?계약론자들은 이 권력을 개인들로 확립된 주체들의 자연권으로부터 이끌어내야 했는데,?그들이 여기서 사용한 개념이 바로?‘합의’-자신이 보유한 자연권을 양도 또는 위임하는데 동의 또는 합의했다는 계약을 한 것으로 가정함-이다.

-?자연권(법)과 실정법의 주객전도?:?이제 새롭게 구성된 이 권력은 형식적으로나 원칙적으로나 자연권들의 응축과 집중으로 나타남.?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응축된 권력,?위임된 권력이 독립적이고 초월적인 지위를 확보하면서 이제 역으로 자연권의 내용과 범위를 규정하게 된다는 것이다.?즉 실정법은 개인들의 권리로부터 독립성을 확보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권리 내용 전체를 구성할 권한을 갖게 됨.?한마디로 말해 애초의 자연권은 이제 실정법 속에서 해소됨.

-?저항권의 범위와 한계?:?물론 근대 계약론 모델에서 주권(sovereignty, sovereign power)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원천적으로 배제된 것은 아니다.?로크의 경우,?자연권(생명,?자유,?재산의 보존과 보장)의 보장을 목표로 하는 법이 그것에서 벗어나게 될 때,?주어진 법에 대한 저항은 개인의 권리(저항권)로서 인정됨.?그러나 법이 원리적으로 자연권의 보장으로서 정의되고,?더 나아가 자연권에 대한 독립성을 가지는 한에서 실제로 저항의 권리는 한갓 허울에 불과할 수 있는 위험을 갖고 있음.

(2)?사회계약론의 한계?: ‘인권’과?‘시민권’?구별의 모호함

-?계약론이 내포하고 있는 법적 실증주의의 영향?:?인간은 한 국가의 국민이 되는 한에서만,?또는 한 사회의 시민이 되는 한에서만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누릴 수 있게 됨.?즉 인권과 시민권의 구별이 모호해지는 난점을 갖게 됨.

–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읽는 두 가지 방식?: ‘인권의 난점들(Perplexities od the Rights of Man)’ (한나 아렌트(H. Arendt),?『전체주의의 기원』)

①?‘인권?=?시민권’ :?인권은 특정 국가의 시민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가 됨,?단순한 동어반복에 불과함.

②?‘인권?≠?시민권’ :?생물학적 존재로서 인간이 지니는 보장 받지 못하는 권리,?인권은 어떠한 권리도 갖지 못하는 사람들의 고유한 권리가 됨,?빈껍데기.

-?이에 대한 맑스(K. Marx)의 비판?:?여기서의 인간이란 실제로는 부르주아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인간이며,?그러한 한에서 인권이란 부르주아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자유롭게 추구할 권리,?이미 권리를 갖고 있는 자들의 권리일 뿐이라며 인권의 추상성과 허구성을 고발함.(『유태인 문제』)따라서 그에게 정치적 과제란 한갓 이름과 형식일 뿐인 권리와 현실 사이의 이 괴리감을 없애는 것이었음.?물론 그 과제는 바로 사회경제적 현실의 변혁.?맑스에게 인권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일 뿐.

-?아감벤(G. Agamben)의 비판?: ‘호모 사케르(homo sacer)’?개념을 통해 그는 시민이 되지 못하며 단순한 인간일 뿐인 인간,?주권 영역에서 배제되어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인간을 설명함.?그에게 정치는 모든 것으로부터 박탈되어 한갓 생명일 뿐인 생명을 증거하는 일이 됨.

-?주권의 절대적 힘?:?주권은 자연권의 연장으로서,?자연권의 보장을 그 목표로 하고 있지만,?국가의 법적 권위가 보장하는 독립성을 획득하는 한에서 이제 주권은 자연권을 오히려 규정하고 제한할 수 밖에 없게 됨.?이성이 현실적으로 국가 이성에 의해 표현되고 독점되는 한에서 자연법은 오직 시민법의 제한 속에서 규정될 수 있을 뿐임.

-?자연권에 이미 내재한 법적 권위?:?이러한 사태는 궁극적으로 계약론자들의 자연권 개념 안에 이미 법적 차원이 내재해 있다는 사실로부터 도출됨.?자연법(natural law)은 이성이 발견한 규칙 또는 명령으로 간주됨으로써 법적 권위와 강제성을 갖게 되는 것.?이처럼 이성에 의해 발견된 자연법이 하나의 명령이듯이,?국가 이성에 의해서 포고되는 시민법 또한 명령의 의미를 지니게 됨.

-?법에 대한 근대적 이해?:?법은 논의되고,?이해되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복종해야 할 명령으로서 나타남.?여기서 자연법과 시민법은 구별되지 않고 결합하지만,?자연법과 달리 시민법은 강제적 힘을 가짐.?결국 자연상태라는 추상적 가정 속에서 고려되는 인간의 권리가 이렇게 이미 법적 강제 속에서 이해되고 있는 한,?인권은 법적 테두리 하에서 규정되는 시민의 권리와 구별될 수 있는 가능성을 상실함.

?(3) ‘인권의 정치’가 가진 전망?:?계약론의 해체를 통한 민주주의 및 정치의 원리에 대한 재정립

-?주권의 소환 불가능성?:?계약에 의해 성립된 것으로 간주하는 주권은 소환불가능한 것이며 그런 차원에서 주권은 독립적인 법적 지위를 갖게 됨.계약론자들은 자연권의 보장이라는 주권의 목적을 강조하며 그것에 합리성을 부여하여 주권의 절대성을 확립하고자 함.?그런데 주권의 절대성은 모든 결정과 판단의 권한을 주권에 종속시킴으로써 가능해짐.

-?계약론은 정치의 해방이 아닌 정치신학으로의 회귀? :?주권의 목적에 부합하는 것이 무엇인지 판단하는 기준은 주권의 외부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닫힌 구조가 만들어짐.?결국 실질적으로 주권자는 저항과 비판의 대상이 될 수 없는데,?슈미트(C. Schmitt)는 이 주권자의 절대성을 신의 절대성과 동일한 것으로 보고 홉스에게서 정치와 신학의 분리가 아닌 통합을 발견함.?→?투표로 자신의 모든 정치적 권리를 위임하는 시민 이외에 법적 틀 안에서 새로운 정치적 주체의 생산이 차단됨.

– ‘인도주의적 권리’로서 정의된 인권 개념의 함정?: ‘인도주의적 권리’가 절대적 희생자의 권리,?어떤 일상적인 법적 보호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권리인 한에서,?그 권리는 일상적 법질서를 뛰어넘는 절대적 개입의 권리(모든 권리보다 우위에 있는 권리)를 요청하게 됨.?결국 이것은?‘인도주의적 간섭의 권리’로 변질됨.?제3세계에 대한 미국의 제국주의적 개입의 명분이 됨. (인권 개념이 강자?기득권자?가해자의 약자?소수자?피해자 코스프레에 활용되기도 함.)

– ‘인권’을 구조하고 소외된 주체들의 정치를 활성화시키는 전략?:?아렌트나 아감벤에서 보았듯이,?인권을 시민권과 구별하기 위한 유일한 가능성으로서,?인권을 모든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권리,?즉 텅 비어있는 권리로 규정하게 되면 역설적으로 제국주의적 논리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 받게 됨.?이에 대한 새로운 전략은 인권을 시민권과 구별되면서,?동시에 어떤 실재성을 갖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발리바르와 랑시에르는 공통적으로 인권을 민주주의와의 직접적인 연관 속에서 이해함. (둘 모두 스피노자의 먼 제자이자,?알튀세르의 직계 제자)

즉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성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역사적으로 획득되고,?상실되고,?재규정되는 어떤 것으로 바라 봄.그러면서도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어떤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함.?둘 모두에게 있어 인권은 선언된 형식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어떤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며 인권을 뜨거운 감자처럼?‘정치적인 것’으로 재사유하며 민주주의 자체에도 균열을 가하려고 함.?결국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 대한 특정한 방식의 해체를 통해서 인권의 정치,?민주주의의 활성화,?정치의 재사유를 시도하고 있는 것.

-?이에 대한 발리바르(?tienne Balibar)의 돌파구?:?시민권과 달리 정식화될 수 없는 것으로 인권을 바라보면 그것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님.오히려 이것은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인데,?이런 면에서 민주주의나 정의(Justice)?같은 정치적 개념들은 고정된 의미가 아니라 어떤‘무한성’으로서 시공간에 따라 지속적으로 재사유되어야 함.?이처럼?“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에 발리바르에게 인권은 민주주의나 정치와 동의어가 됨.?그는 민주주의의 원리로서 이 인권을‘평등한 자유’?혹은?‘평등-자유’라는 개념으로 표현한다.?결국 그에게 인권은 인간에 대한 자연적(전-정치적)?규정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정치적 계기’이자?‘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됨.

-?이에 대한 랑시에르(Jacques Ranci?re)의 돌파구?:?그에게서도 인권은 어떤 자연성이나 어떤 사회 및 경제적 결정들로부터도 정의되지 않는 것(계약론이 상정했던 인권?vs?시민권 그 어느 것으로도 환원되지 않음)임.인권이 정치의 원리,?민주주의의 원리라면 그것은 인권이 실현되어야 하고 달성되어야 할 어떤 목표(목적)나 이념이 아니라?‘원리가 아닌 원리’?혹은‘토대가 아닌 토대’가 됨.?그는 이것을?‘근본적 평등’?또는?‘아무개와 아무개의 평등’이라고 부르는데,?모든 위계적 질서는 모든 사회적 질서에 내재해 있는 이 근원적 평등에 기초해 있다고 봄.?따라서 랑시에르에게 있어 인권은 정치의 근원적 토대인 이 평등을 형식적으로 성문화한 근대적 산물이 되며,?이 인권을 정치적 주체화의 토대로서 이해함.

– ‘인권의 정치’의 의미?:?계약론에 근거한 근대 국가-정치의 현실적 지속과 더불어 새로운 정치적?이론적 상황들의 출현에 따라 여전히 인권의 문제는 중요한 정치적 쟁점이 됨.?인권을 정치적 문제로 사유하는 것의 의미는 단순히 인권의 범위를 넘어서서 주권 개념과 착종된 민주주의와 오늘날의 정치 개념 자체의 재정립을 추동함.

 

3.?교착상태에 빠져?‘죽어가는 민주주의’에서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있는가?

-?정치는 경제적 탐욕을 보전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신자유주의와 금융세계화의 심화 이후 국가의 개입이 증대하고 정치의 중요성이 대두되고 있지만,?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애초부터 국가의 독재적 개입이 중요했다.?사실 오늘날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성과들은 하층계급의 투쟁을 통해 쟁취한 것이다.

-?정치는 진리의 영역이 아니다.

→?다양성이 각축하는 조정의 장으로서 설득,?토론,?논쟁,?그리고 제도화될 수 없는 민중의 자각적 참여가 중요하다.?민주정치는 새로운 관점과 입장의 주체를 늘 기다린다.

-?정치는 고착화된 형식적 지배의 영역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결코 완성된 체제나 제도가 아니라 끊임없는 재해석과 시험을 요구받는?‘과정’으로서의 정치제도이다.?국가화된 정치가 배제했던 사회의 영역,?즉 민주주의가 국가화된 정치의 외부와 만나는 경계가 바로?‘정치적인 것’의 발생 지점(소외된 자들이 주체화되는 장소)이자 주체화하는 정치가 피어나는 지점이다.?민주주의는 끊임없이 재발명을 요구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해 용산,?강정,?밀양,?진도 앞바다를 쉽게 잊어서는 안 된다.)

-?정치에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어떻게 찾을 것인가?

(한국적 상황?: ‘87년 체제’의 극복을 위한 과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