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도서관 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1. 자연의 성과 인간의 성

모든 생명체에게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본능적 욕구가 있다. 하나는 식욕이고 다른 하나는 성욕이다. 식욕이 자신의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한 욕구라면 성욕은 자신이 언젠가 죽더라도 그 전에 자신의 분신(유전자)을 남겨놓으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식욕이 개체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생존’ 욕구라면, 성욕은 개체의 생명을 증식하려는 ‘생식’ 욕구이다.

두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이므로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다. 둘 다 생명 그 자체의 본성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배불리 먹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과 짝을 찾아 가족을 이루는 문제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요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두 측면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에게는 금세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식욕은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성욕 또는 성이다. 우리는 왜 ‘성’ 또는 ‘성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해지고 민망해지는 것일까? 종족을 번식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기는커녕 모든 생명체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나아가 매우 중요한 과제인데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성기’, ‘성교’, ‘성감대’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일까?

사실 성욕이 모든 동물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성욕만큼은 다른 동물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점이 바로 ‘생식’ 이외의 목적으로, 즉 쾌락(즐거움) 자체를 위해 성욕이 일고 성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욕구나 행위가 ‘생식’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셈이다. 그래서 인간은 피임도구를 사용하여 성행위를 하고, 특별한 발정기 없이 1년 열두 달 성행위를 하며, 신체 전부가, 그러니까 성기 말고도 입, 젖가슴, 항문, 귀, 목, 발 등의 다른 용도의 신체기관까지 모두 성적 쾌락을 위한 성감대로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동물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흔히들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성적 취향과 행위를 보이는 사람을 ‘변태’라고 부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자체가, 인간 전체가 ‘변태’인 셈이다.
 

2. 본능과 문화 사이에서

프로이트(S. Freud)로부터 라캉(J. Lacan)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성을 순수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본능적 요소가 모종의 정신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변형된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의 문제와 ‘누구를 사랑(욕망)할 것인가?’라는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의 문제는 그 변형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경우 성적 주체와 성적 대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는 신체적으로는 남자 아니면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체의 차이가 마음의 차이를 저절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경우는 개체의 성장 이전이나 이후를 본능이 일관되게 지배하므로 신체적 성구분과 성적 지향성 사이에 간극이나 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성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인간의 성을 이해하려면 이 점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은 본능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다.

출처/ www.critical-theory.com

출처/ www.critical-theory.com

개인의 성적 특징, 곧 성적 정체성(: 주체)과 성적 지향성(: 대상)은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생과 해소라고 부르는 과정(일종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결정된다. 인간이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정신은 아직 사회 속에서 살아갈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다. 우선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떠받치는 토대이기에 언어를 모르고는 과학적 사고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현재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지각할 수조차 없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할 뿐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언어가 있기에 도덕과, 법, 종교, 예술, 과학이 모두 가능해진다.

도덕/법 역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결정적 지표이다. 단순히 ‘이롭다’와 ‘해롭다’의 구별이 아닌 ‘옳다’와 ‘그르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본능만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도덕과 법, 윤리와 가치를 내면화하고 준수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 본능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기의 신체와 두뇌 속에 생물학적으로 저절로 유전되고 전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 이 두 가지 능력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기의 부모는 그들이 속해 있는 보편적 문화의 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들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특수한 부모들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성의 모든 비밀이 바로 이러한 특정한 부모 밑에서 특정한 아기가 언어와 도덕/법을 교육받는 과정 속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아기의 성(性)은 이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3. 정신적 미분리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마다. 아기는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의 결합인 수정란으로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란은 어디까지나 엄마 몸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엄마 몸 속에서 엄마 몸의 일부로 9개월여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엄마 몸으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된다.

그런데 아이가 탯줄을 끊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해서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기는 눈도 못 뜨고 목도 가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무능하기 때문에 엄마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기의 생존을 돌봐야 한다. 먹여 줘야 하고 따뜻하게 해 줘야 하고 배설을 잘 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아이는 엄마와 몸이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도 못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는 아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 아기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엄마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자기 의식과 대상 의식은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고차적 인식 능력이다. 아이의 정신은 맨처음에는 백지와도 같아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정신적으로는 백지 상태이지만, 물론 신체적으로는 최소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목청껏 운다.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이 바로 입 속으로 들어오고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먹거리가 제공된다. 아이가 눈을 뜰라치면 앞에는 늘 다정한 두 눈빛이 빛나고 있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아이의 귓전을 맴돈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꼭 껴안고 입맞춰 주며,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키면서 아이의 온몸을 끊임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런 경험 속에서 (엄마의) 젖가슴, 시선, 목소리, 입술, 손길 등을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일체로 느낀다는 점이다. 즉 엄마와 자신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정신은 언제, 어떻게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일까?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2

제레미 리프킨의 ?『노동의 종말』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2

 

이재유(건국대)

 

1. 자본은 어떻게 형성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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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자본주의 사회는 <이익>을 최고의 가치로 삼는 사회이다. 그러면 그 <이익>은 누구의 이익인가? 그 이익은 보통 일하는 사람들의 이익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라는 명칭이 보여 주듯이 자본(가)의 이익이다. 그러면 자본은 무엇이고, 어떻게 형성되는 것일까?

화폐나 자본은 얼핏 보아 일반적으로 돈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화폐와 자본은 특성이 질적으로 다른 개념이다. 화폐는 위에서 보았다시피 상품교환(유통)에서 신적인 역할을 하지만 단순한 유통수단일 뿐이다. 이 화폐로는 은행의 이자, 고리대금, 부통산 투기 이익, 주식배당, 재산의 재테크 등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 설명해 줄 수 있는 개념이 바로 자본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자본은 자기 증식(번식)하는 가치, 즉 잉여가치를 낳는 가치이다. 그러나 화폐는 자기 증식하지 못하는 가치이다. 예를 들어 은행에 돈을 10.000원 예금하여 100원의 이자를 낳았다고 하자. 100원의 이자가 어떻게 나왔을까? 10,000원이 은행 안에서 5,000원과 결혼하여 100원짜리 아이를 낳은 것일까? 유통수단으로서의 돈 그 자체인 화폐는 이렇게 자기 증식하지 못한다. 자기 증식하는 특성을 가진 자본은 인간의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이 유통과정에서 출현하여 이 상품이 생산과정에 투입되었을 때 생겨나게 된다.

예를 들어보자. 어떤 노동자가 한 자본가와 다음과 같이 계약조건으로 계약을 맺는다고 해 보자. 즉 이 노동자가 하루 8시간 일해서 10원짜리 벽돌 20개를 만들면 하루 임금 100원을 받는다고 해 보자.

이재유 표

그러면 임금으로 받는 노동시간은 4시간인데, 이 4시간을 ‘필요노동시간’이라고 하고 임금으로 받지 못하는 4시간을 ‘잉여노동시간’이라고 하며, 이 4시간을 정치경제학적인 용어로 ‘착취’라고 한다. 이 잉여노동시간을 ‘잉여가치’라고 하고, 이 잉여가치가 바로 자본이 되는 것이다. 즉 자본가는 노동자에게 주는 임금 100원을 투자하여 10원짜리 벽돌20개인 200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즉 100원=200원이 되는 셈이다. 잉여가치의 100원 부분은 사회적으로 주식 배당, 은행이자, 고리대금, 주식투자, 부동산투기 이익, 지대 등으로 배분된다.

그런데 자본은 이러한 과정의 지속적 반복을 통해 노동자가 일하는 시간을 최대한 늘려서 잉여가치 부분을 더 많이 늘리고자 한다. 즉 8시간 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10시간을 시키고, 4시간을 필요노동시간으로 6시간을 잉여노동시간으로 하여 최대한의 잉여가치를 뽑아내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절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루는 24시간일 뿐이다. 무한정 일하는 시간을 늘릴 수는 없다. 또한 너무나 많은 시간을 일하는 노동자들의 저항과 투쟁은 일하는 시간을 법률에 의거하여 일정 정도로, 즉 하루 10시간, 8시간으로 줄이도록 했다.

그러면 어떻게 잉여가치 부분을 늘려갈 수 있을까? 그것은 이제 필요노동시간 부분을 상대적으로 줄여 나가는 것이다. 즉 노동 강도를 높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8시간 동안 20개의 벽돌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30개의 벽돌을 만들어 내게 하거나, 3사람이 하던 일을 두 사람이 하도록 하거나 사람이 하던 일을 기계로 대체하거나 등이다. 이것은 오늘날의 구조조정과 똑같은 모습이다. 이것을 ‘상대적 잉여가치의 생산’이라고 한다. 다른 한편 이 잉여가치의 생산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획기적으로 불러왔다. 그러니까 과학기술의 발전은 필요노동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잉여노동시간을 최대로 늘리려는 노력과 궤를 같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잉여노동시간을 최대로 늘리려는 것은 바로 무엇을 어떻게 생산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무제한적인 생산만이 문제가 되는 상품의 가치의 경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2. 자본주의 경제의 양면성.

이러한 자본의 이익을 최대한 늘리면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사회의 발전은,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이중적인 측면을 가지게 된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으로는, 과학기술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이전에는 인간의 노동을 통해 이루어졌던 일들이 기계로 대체된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시기에는 모든 나라에서 노동자가 거의 필요 없는 농장과 공장 및 사무실이 등장하게 될 것이며, 아주 정교화된 지식 분야에서만 소수의 엘리트 노동자만이 노동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는 죽어라 일하기를 강요당하는 산업사회의 노예노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으로 부정적인 측면으로는, 기계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하게 됨에 따라서, 인간이 노동할 수 있는 노동시간이 급격하게 줄어들 것이며, 이는 전반적으로 노동자의 일자리 수가 엄청나게 줄어듦을 뜻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것은 노동자가 계속 일을 할 수 있을 것인지, 임금을 지속적으로 받을 수 있을지가 불분명해짐으로써 생계가 아주 불안정해지고, 이는 곧 경제의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뜻한다. 이는 현재에도 필요할 때만 노동자를 쓰는“노동 유연화 정책”, “구조조정 정책”과 맞닿아 있다.

 

3. 분배, 교환의 기준 1-리프킨(노동시간)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을 해결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제레미 리프킨은 경제적 측면에서의 이러한 모순을 경제에만 맡겨 두어서는 더 많은 고통이 뒤따를 것이기 때문에, 정치적 측면에서 정부의 강력한 개입을 통해 이 모순을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부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 서 있게 된다. 하나는 실업에 따른 범죄 계층의 증가에 대응한 경찰력의 증가와 감옥의 증설이고, 다른 하나는 제3부문의 일자리 창출을 적극적으로 지원하는 것이다. 제레미 리프킨은 이 두 가지 중에서 두 번째를 위하여 시장에 적극 개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는 제3부문의 영역은 사회?문화적 생활을 구성하는 모든 공식적, 비공식적인 비영리적 활동을 포함하는 영역이며, 이 영역에서 사람들은 공동체적 유대와 사회적 질서를 창출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영역은 경제적 이익(자본의 이익)을 창출하는 시장의 영역과 대립되는 모든 비영리적 자치 활동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 활동 영역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회적 자산으로서 이 활동 또는 이 활동의 결과물, 그리고 정부의 재원이 이 이 영역에서 어떻게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하자면 어떤 기준으로 분배, 교환되고 소통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것들에는 시간은행(time bank), 타임 달러(time dollar) 등의 제도가 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다음과 같다. 어떤 특정인이 자진해서 자신의 전문적인 활동(노동)을 한 시간 제공하면, 한 시간 달러의 보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여기에서 이 보상은, 여러 전문적인 활동들이 서로 질적으로 아주 다를지라도, 한 시간 달러로서 동등하게 이루어진다. 즉 각 활동(노동) 시간은 기여한 바의 특징과 종류에 관계 없이 동등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제레미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이 제도 운영 방식은 사실상 본질적으로 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미 위의 자본의 생성(시장 영역에서 이루어진다) 과정에서 보았듯이, 질적으로 서로 다른 노동 생산물이 교환되는 기준 역시도 1시간, 2시간 등으로 표현되는 자연 시간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 시장 영역과 대립되는 제3부문 영역 사이의 교환, 분배 소통 방식의 기본적인 구조는 동일하기 때문에 이 두 영역 사이의 차이점이 사라진다. 이는 곧 위에서 말한 부정적인 측면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깊어질 수 있는 위험성이 많아질 수 있음을 뜻하게 된다.

이 제도는 19C에? J.그레이, P.J.프루동, R.오언 등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에 의해 주장되었던 노동화폐 제도와 유사하다. 노동화폐는 금을 화폐로 사용하지 않고 노동시간을 화폐단위로 하여 노동자 자신들의 노동과 노동생산물이 국립중앙은행을 매개로 교환되는 제도이다. 즉 몇 시간 노동을 했는가 하는 증명서로서의 노동화폐를 국립중앙은행이 발행하고, 이 노동화폐를 다시 중앙은행에 가서 자기가 필요한 물건으로 교환한다는 것이다. 이 제도는 오언에 의해 실행에 옮겨져 1832년 노동화폐로 노동생산물을 교환하는 국민평형노동교환소가 설립되었지만 3년을 못 넘기고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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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분배, 교환의 기준 2-맑스(각자의 필요)

이렇게 노동시간을 기초로 분배, 교환되는 방식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기본 구조이다. 그런데 이 구조에서는 내가 1시간을 열심히 일했다고 해서 1시간의 보상을 받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노동시간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은 과학기술의 발달 정도, 숙련 정도, 교육을 받은 정도 등에 의해 결정된다. 이 중에서 중요한 것은 교육을 받은 정도인데, 왜냐하면 과학기술에 어느 정도 정통하고 있으며, 숙련되었는가를 객관적으로(수치상) 알려 줄 수 있는 것이 교육을 받은 정도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학 교육을 비롯해 더 좋은 교육을 받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를 쓰며, 이는 곧 사교육비의 엄청난 증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할진대, 리프킨이 말하고 있는 시간은행 같은 경우는 성공할 확률이 거의 없다고 봐야 한다. 시간은행에서의 시간 역시도 결국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으로 환원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교수의 노동 1시간과 블루칼라 노동자의 노동 1시간이 결코 같을 수 없다는 생각이 사람들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일자리가 줄어들어 노동자의 생계가 엄청 위협받음과 동시에 부익부빈익빈이라는 사회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다른 방식이 존재한다. 이 다른 방식은 다름 아니라 맑스가 말하는 “각자의 필요에 따라”, 즉 각자의 욕구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 속에서는 그 누구도 이익을 보거나 손해를 볼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방식을 대단히 현실과 동떨어진, 유토피아적이고 이상적인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은 이미 알게 모르게 우리의 삶의 방식에 움터 있다. 친구들과의 관계, 가족과의 관계, 연인, 동아리 등등의 관계에서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 속에서는 이익이나 손해 등을 따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러한 관계 속에서 각자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고받는다. 그러므로 이 방식은 현실에서 실현 가능성이 있다. 문제는 이 방식을 어떻게 의식적으로 사회 전체에 적용시킬 수 있는가이다. 그렇지만 이것도 실현가능함을 우리 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다. 국내적으로 보면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 집회에 가면 서로가 서로에게 먹을 것과 담요, 음료수 등을 아무런 이해관계 없이 주고받는다. 서로에게 격려와 희망, 연대의 벅참을 주고받는다.

국외로 보면? 쿠바, 베네주엘라, 볼리비아 등이 민중무역협정(PTA)(미국을 축으로 하는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해서 만든 협정)이라는 것을 체결하였다. 자유무역협정은 사회적 평균 노동시간(이것은 화폐의 양으로 나타난다)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민중무역협정은 각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자의 양에 따라 분배, 교환, 소통하는 방식이다. 쿠바는 베네주엘라로부터 석유를, 볼리비아로부터 천연가스와 콩을, 베네주엘레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볼리비아로부터는 천연가스와 콩, 밀을, 볼리비아는 쿠바로부터 의사를 비롯한 선진 의료제도를, 베네주엘라로부터는 석유 등을 필요한 만큼 서로 주고받는다.

우리가 노동하는 것은 각자가 필요한 것을 얻고 충족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이것이 바로 노동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에로스와 삶 ? 『베니스의 죽음』과 『파이드로스』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1

에로스와 삶 ? 『베니스의 죽음』과 『파이드로스』 <도봉도서관 청춘과 함께하는 인문학> 1

 

이지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1. 토마스 만 ? 『베니스의 죽음』

토마스 만 : 토마스 만(Mann, Thomas 1875-1955)

– 뤼벡의 시민 계급 출신.

– 북부 독일의? 자유 시민 특유의 냉정, 명석, 자제의 정신 태도를 견지. 또한 일면 남미 출신의 어머니에게서 민감한 감수성, 공상력, 음악성, 그리고 상처받기 쉬운 신경을 물려받았다고 평가받음.

– 그는 작품 속에서 인간과 인생에 대한 단면이 아니라 세계와 인생을 깊이 있게 제시. 토마스 만의 작품은 이중적 의미 제시와 문장의 난해함으로 대중성을 얻는 것에는 실패. <<베니스에서의 죽음>>, <<마의 산>>, << 요제프와 그의 형제들>>, << 파우스트 박사>> 등의 주요 작품을 남김.

1) <<베니스의 죽음>> 내용 – 주인공 아셴바하는 시인으로 명성과 지위를 얻은, 도덕가의 풍모가 돋보이는 예술가였으나. 베니스에서 절대미를 가진 소년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 과정에서 사랑과 미와 관계에 대한 통찰을 얻을 뿐더러 시인으로서의 자신의 명성이 거짓된 광대짓, 허위였다는 것을 깨닫게?된다. 절대미, 절대적인 에로스의 경험은 언어로 잡아낼 수 없는 것, 그는 베니스에 만연한 콜레라에 전염되어 사랑하는 소년의 모습을 두 눈 속에 담은 채 사망한다.

….구스타프 아셴바하는 거의?탈진 상태에서 일하는 모든?사람들, 과중한 부담에?허덕이는?사람들, 이미 녹초가 되어버린 사람들, 아직은 그래도 꼿꼿이 자신을 지탱해 가고 있는 사람들, 신체도 허약하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하지 못한 중에도 초인적인 의지와 현명한 자기 관리로 적어도 얼마 동안이나마?영향력을 발휘한 그 모든 업적주의 도덕가들의 시인이었다. 그런 도덕가들은 많았으며, 그들이 이 시대의 영웅들이었다. 그래서 그들 모두는 하셴바하의 작품 속에서 그들 자신을 재발견했고, 자기 자신들이 그 속에서 인정받고, 고양되고 예찬되는 것을 알았으며 그에게 감사했고,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리게 되었다…<민음사 판, 세계문학전집 8, 토마스 만 – 베니스의 죽음? p 430

2) <<베니스의 죽음>>을 지배하는 죽음의 이미지 :

소설 전반부: 산책에 나선 아센바하 죽음의 신을 닮은 남자를 만남

소설 후반부: 죽음의 전염병으로 가득찬 베니스

3) 죽음과 에로스의 만남 : 에로스, 즉 신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은 흔히 서구에서 죽음과 연결되어 왔다. 에로스는 유한자인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죽음을 극복하는 한 방식, 혹은 생은 언제나 죽음을 그 조건으로 하여 가능함을 역설

ex ) 바타이유(사상) – <<에로티즘>>, 슈베르트(음악), 에곤 쉴레, 클림트(그림) – 소녀와 죽음, 사신과 에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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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플라톤 (BC 427~BC 347)

– 서양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지나지 않는다 : 화이트 헤드

– 아테네 최고 정치 명문가 출신 : 아버지 아리스톤은 아테네 왕가의 후예, 어머니는 정치가 솔론의 후손

– 20살에 철학자 소크라테스를 만나 철학에 심취. 28살에 되던 기원전 399년 아테네 시민

500명으로 구성된 직접 민주제적 법정은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욕했다며 소크라테스에게 사형을 선고. 이후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중우衆愚 정치로 판단.

– 이후 인생 행로를 바뀌어 정치가가 아닌 철학자의 삶을 선택.

플라톤의 에로스론 ? 『파이드로스』

– 상대에게서 발견한 아름다움에 대한 욕망이 곧 사랑이다. 당신이 사랑에 빠졌다면 그것은 상대에게서 어떤 아름다움을 발견한 것이다.

-? 그것이 단순히 표면적인 것, 신체적인 것에 머물러 있으면 사랑의 부작용, 몰이성과 부덕함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되고 그러한 사랑은 상대와 자신 모두에게 상처를 입히게 된다. 고전주의자 중의 고전주의자인 플라톤의 해법은 당신이 발견한 아름다움 너머, 눈에 보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그 아름다움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안 변하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이성을 통해’ 발견하란 것. 그의 육체적 아름다움에 머물러 단지 그 사람의 신체를 구속하고 소유하려고 하지 말고 상대가 가진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그러한 비신체적 아름다움을 아끼며 발전할 수 있도록 도와줌으로써 영혼과 영혼이 결합하게 되면 설사 둘이 헤어지게 되더라도 신체는 비록 멀어지되 서로의 영혼은 영원히 결합한 채로 남게 되리라 말한다.

– 플라톤은 에로스적 사랑이 육체에 대한 사랑에 머무르면 안된다고 역설한다. 육체를 통해 드러나는 아름다움의 본질을 정신으로 포착해, 두 사람의 결합이 신체의 결합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정신적 성숙을 돕는 정신의 합일, 정신의 승리로 승화되도록 이끌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 『향연』에서 플라톤은 다른 등장 인물들의 입을 빌려 에로스에 대한 다양한 서로 다른 견해를 보여주지만, 결국 에로스를 생산의 힘, 생산의 원동력으로 표현한다. 남녀의 사랑이 자식 생산으로 귀결되듯, 정신에 대한 사랑은 정신의 자식을 낳는다. 플라톤의 사랑관은 이처럼 플라톤답게 육체적 매력, 육체의 홀림을 뛰어 넘어 정신의 고결함에 이르는 것이 진짜 사랑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그 이유는 파이드로스여,?잘 명심해라, 아름다움만이 사랑스러운 동시에 눈에 보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름다움은 느낄 수 있는 자의 길이란다, 어린 파이드로스여, 예술가가 정신에 이르는 길이란다, 그렇지만 귀여운 애야, 이제 너는, 정신적인?것으로 가기 위해 감각적인 것을 통과하는 길을 걸어온 사람이 언젠가는 지혜와 진정한 품위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면 너는 이것이 오히려(결정은 네게 맞기마) 위험스럽고도 쾌적한 길, 즉 필연적으로 잘못에 이르게 하고 마는 정말 잘못된 길, 죄악의 길이라고 생각하느냐??…우리 시인들은 에로스가 옆에 와서 안내자로 나서주지 않으면 아름다움의 길을?갈 수가 없다는 사실이야…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열정이 곧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주는 것이며 우리의 동경은 반드시 사랑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이야…우리의 명성과 영예로운 지위는 일종의 익살극이고, 우리에 대한 대중의 신뢰는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것이며, 예술로 국민과 젊은이들을 교육시키겠다는 것은 무모한 것이며 금지해야할 계획이야…그 까닭은 말이지, 파이드로스, 인식이란?것이 결코 품위도 엄격함도 아니기 때문이란다, 그건 뭔가를 알면서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뿐 정신적인 태도나 형식을 지닌 것이 아니란다…새로운 엄격성과 제 2의 자유와 형식을 존중한다는 말이지. 그러나 파이드로스, 형식과 자유는 도취와 탐욕으로 치닫게 되고…?????<같은 책, p 525>

 

3. 『베니스의 죽음』과 에로스의 이중성

– 예술, 삶의 길

– 파멸, 죽음 : 사랑의 도취 속에 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