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봉도서관 강의]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인간의 성(性)과 욕망의 주체(1)

 

김우철(호원대 외래교수)

 

1. 자연의 성과 인간의 성

모든 생명체에게는 대표적으로 두 가지 본능적 욕구가 있다. 하나는 식욕이고 다른 하나는 성욕이다. 식욕이 자신의 생명을 잘 유지하기 위한 욕구라면 성욕은 자신이 언젠가 죽더라도 그 전에 자신의 분신(유전자)을 남겨놓으려는 욕구이다. 그러므로 식욕이 개체의 생명을 보존하려는 ‘생존’ 욕구라면, 성욕은 개체의 생명을 증식하려는 ‘생식’ 욕구이다.

두 욕구는 생명체의 기본적인 욕구이므로 어느 하나가 더 중요하다 말할 수 없다. 둘 다 생명 그 자체의 본성이며,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배불리 먹고 풍족한 생활을 하는 것과 짝을 찾아 가족을 이루는 문제는 인간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두 가지 요소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명의 두 측면을 생각하다 보면, 우리에게는 금세 한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식욕은 별 문제가 없는데, 문제는 성욕 또는 성이다. 우리는 왜 ‘성’ 또는 ‘성욕’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하면 자신도 모르게 불편해지고 민망해지는 것일까? 종족을 번식하는 일이 부끄러운 일이기는커녕 모든 생명체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고, 나아가 매우 중요한 과제인데도 불구하고, 왜 인간은 ‘성기’, ‘성교’, ‘성감대’ 같은 말을 입에 올리는 것을 불편해 하는 것일까?

사실 성욕이 모든 동물에게 나타나는 보편적인 현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성욕만큼은 다른 동물들에게 찾아볼 수 없는 대단히 특이한 점을 많이 갖고 있다. 첫 번째 꼽을 수 있는 점이 바로 ‘생식’ 이외의 목적으로, 즉 쾌락(즐거움) 자체를 위해 성욕이 일고 성행위가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생식’을 위한 욕구나 행위가 ‘생식’과 무관하게 일어나는 셈이다. 그래서 인간은 피임도구를 사용하여 성행위를 하고, 특별한 발정기 없이 1년 열두 달 성행위를 하며, 신체 전부가, 그러니까 성기 말고도 입, 젖가슴, 항문, 귀, 목, 발 등의 다른 용도의 신체기관까지 모두 성적 쾌락을 위한 성감대로 바뀌었다. 이런 현상은 다른 동물 세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흔히들 보통 사람들과 다른 특이한 성적 취향과 행위를 보이는 사람을 ‘변태’라고 부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 보자면 인간 자체가, 인간 전체가 ‘변태’인 셈이다.
 

2. 본능과 문화 사이에서

프로이트(S. Freud)로부터 라캉(J. Lacan)으로 이어지는 정신분석학의 흐름에서는 인간의 성을 순수 신체적 현상이 아니라 오히려 신체 본능적 요소가 모종의 정신 문화적 과정을 거치면서 필연적으로 변형된 결과라고 본다. 그러므로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라는 성적 정체성(sexual identity)의 문제와 ‘누구를 사랑(욕망)할 것인가?’라는 성적 지향성(sexual orientation)의 문제는 그 변형 과정을 고려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의 경우 성적 주체와 성적 대상은 태어나면서부터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신생아는 신체적으로는 남자 아니면 여자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직 남자도 아니고 여자도 아니다. 그렇다고 신체의 차이가 마음의 차이를 저절로 결정하는 것도 아니다. 동물의 경우는 개체의 성장 이전이나 이후를 본능이 일관되게 지배하므로 신체적 성구분과 성적 지향성 사이에 간극이나 괴리가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은 그렇지 않다. 인간의 ‘심리적’ 성은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 인간의 성을 이해하려면 이 점부터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성은 본능적 현상이 아니라 문화적 현상이다.

출처/ www.critical-theory.com

출처/ www.critical-theory.com

개인의 성적 특징, 곧 성적 정체성(: 주체)과 성적 지향성(: 대상)은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발생과 해소라고 부르는 과정(일종의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비로소 결정된다. 인간이 태어났다고 해서 바로 ‘인간’이 되는 게 아니다. 몸은 인간의 형태를 하고 있더라도 정신은 아직 사회 속에서 살아갈 문화적 소양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화적 능력은 기본적으로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다. 우선 언어는 인간의 사고를 떠받치는 토대이기에 언어를 모르고는 과학적 사고나 도덕적 판단을 할 수 없음은 물론이고 현재 우리가 지각하는 방식으로 이 세계를 지각할 수조차 없다. 언어는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가장 중요한 지표이다. 인간은 언어로 사고할 뿐 아니라 언어 속에서 살아가는 존재이다. 언어가 있기에 도덕과, 법, 종교, 예술, 과학이 모두 가능해진다.

도덕/법 역시 인간과 동물을 가르는 결정적 지표이다. 단순히 ‘이롭다’와 ‘해롭다’의 구별이 아닌 ‘옳다’와 ‘그르다’, ‘선’과 ‘악’의 구별은 인간에게만 있는 현상이다. 인간은 본능만으로는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도덕과 법, 윤리와 가치를 내면화하고 준수할 때 비로소 인간다운 삶을 영위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언어 능력과 도덕/법 능력이 본능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아기의 신체와 두뇌 속에 생물학적으로 저절로 유전되고 전승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모든 개인은 태어나면 이 두 가지 능력을 학습하고 내면화하는 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아기의 부모는 그들이 속해 있는 보편적 문화의 대리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다른 부모들과 생각과 행동이 다른 특수한 부모들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에서는 인간 성의 모든 비밀이 바로 이러한 특정한 부모 밑에서 특정한 아기가 언어와 도덕/법을 교육받는 과정 속에서 결정된다고 본다. 아기의 성(性)은 이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일을 겪는 것일까?

 
3. 정신적 미분리

아기가 성장하는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엄마다. 아기는 아빠의 정자와 엄마의 난자의 결합인 수정란으로 태어나지만, 처음부터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수정란은 어디까지나 엄마 몸의 일부로만 존재할 수 있다. 엄마 몸 속에서 엄마 몸의 일부로 9개월여를 지내고 나야 비로소 엄마 몸으로부터 신체적으로 분리된다.

그런데 아이가 탯줄을 끊고 바깥세상으로 나왔다고 해서 엄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아기는 눈도 못 뜨고 목도 가누지 못할 만큼 완벽하게 무능하기 때문에 엄마는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아기의 생존을 돌봐야 한다. 먹여 줘야 하고 따뜻하게 해 줘야 하고 배설을 잘 하도록 보살펴야 한다. 아이는 엄마와 몸이 분리되어 있긴 하지만, 어떤 면에선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게 아니다. 특히 정신적인 면에서 그렇다.

이제부터 우리는 말도 못하고 생각할 줄도 모르는 아기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이해하는지 아기의 마음 속으로 여행을 떠나야 한다. 아이는 눈도 뜨지 못하고 목도 가누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군지도 모르고, 눈 앞에 어른거리는 것이 엄마인지도 모른다. 이 같은 자기 의식과 대상 의식은 언어를 어느 정도 습득하고 나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고차적 인식 능력이다. 아이의 정신은 맨처음에는 백지와도 같아서 아무것도 구별하지 못한 채 모든 것이 하나로 뒤엉켜있는 ‘혼돈’으로부터 시작한다.

아이는 정신적으로는 백지 상태이지만, 물론 신체적으로는 최소한의 기능을 갖고 있다. 아이는 배가 고프면 본능적으로 소리를 내지르고 목청껏 운다. 그러면 엄마의 젖가슴이 바로 입 속으로 들어오고 세상에 둘도 없는 달콤한 먹거리가 제공된다. 아이가 눈을 뜰라치면 앞에는 늘 다정한 두 눈빛이 빛나고 있고, 또 부드러운 목소리가 끊임없이 아이의 귓전을 맴돈다. 그뿐이 아니다. 엄마는 아이를 꼭 껴안고 입맞춰 주며, 기저귀를 갈거나 목욕을 시키면서 아이의 온몸을 끊임없이 부드러운 손길로 어루만져 준다. 중요한 것은, 아이가 이런 경험 속에서 (엄마의) 젖가슴, 시선, 목소리, 입술, 손길 등을 자기 자신과 구별하지 못한 채 그저 ‘하나의’ 일체로 느낀다는 점이다. 즉 엄마와 자신을 구별할 능력이 없기에 정신적으로는 여전히 엄마로부터 분리되지 못한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의 정신은 언제, 어떻게 엄마로부터 분리되는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