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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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이제 다시 제가 앞서 그렸던 그림으로 돌아갑시다.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를 많이 쳐서 그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고요? 그렇다면 다시 그리지요. 힘든 일은 아니니까요.

 

윤구병29-2

 

제 고조부모인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①만 있고 ②부터 ⑥까지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플라톤 옹에 따르면 ①과 ②의 속살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저 세상〔이데아(idea)의 세계와 직관의 세계〕에 있고 ②의 겉껍데기와 ⑤까지만 현상계에 있습니다. 제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①은 없다고 본 듯합니다. 제 아버지가 신으로 모셨던 분은 ①이 아니라 ②라고 저는 믿는데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신은 ‘생각의 생각〔noesis noeseos〕’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묘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생각〔noesis〕은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멈추면 그걸 어떻게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각은 멈추게 되고, 그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제 아버지가 하나이신 ‘하나님(신)’을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하나를 찾는 것은 생각이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또 생각과 하나는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생각 속에는 생각함과 생각됨이 더불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존재론의 전통을 저 나름으로 졸가리를 찾으면 아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이신 있는 것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자연을 낳고, 자연이 질료를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옹 말씀 그대로 하나이신 있는 것은 가득 차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하나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늘 하나를 지향하지만, 생각 속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 때 앞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생각과 뒷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틈은 빈 데를 뜻합니다. 무엇인가 빠져 있을 때 빈틈이 생깁니다. 틈이 있으면 하나로 있던 것이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를 둘로 가르는 이 틈은 무엇 때문에 생겨날까요? 무엇이 빠져서 둘 사이가 갈라질까요? 빠진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무튼 ‘빠진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더니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하데요.(누구한테 듣기는 누구한테 들어? 윤모가 《있음과 없음》이라는 글에서 자기네 조상들이 쓰던 말이 그렇다고 했지!) 자, 앞생각과 뒷생각이 갈라지자 어느 틈에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는 있는 것이 모습을 감추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빠지는 자리이지요. 생각이 하나로부터 갈라서는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길을 잃지요. 감각을 징검다리로 삼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고도로 추상화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언어학자가 찾는 음소〔phoneme〕나 형태소〔morpheme〕에서 생물학자가 찾는 생명의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이 하나를 찾기에 그처럼이나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생각이기를 그치지요. 하나를 잃은 생각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니까요.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의식 불명이라 이르지 않던가요? 하나를 찾아 빠진 것을 메워야 생각이 제 구실을 합니다. 제가 생각을 ‘하나이자 여럿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은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지만 있는 것 바로 그것은 아닙니다. 생각에는 빠진 것, 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없는 것이 없게’ 만들려는 플라톤 할아버지의 노력이 있는 것들의 모두인 여러 하나들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 냈지만, 이데아 세계의 여러 하나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생각도, 이것과 저것을 먼저 놓고 그것을 같거나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추론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은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는 세상, 곧 둘이 있는 곳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공간이 있는 곳에는, 비록 그 공간이 순수한 사유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는 직관의 대상이지 추론하는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이데아의 세계는 직관의 대상이라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러니까 생각에는 직관도 있고 추론도 있습니다. 직관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이고 추론은 여럿과 관계를 맺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는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란 없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저는 없는 것을 그렇게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우리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른바 ‘그리스 사유의 전통’을 깨지 않으면 존재론의 일관된 체계를 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것과 생각은 하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우기는 고조할아버지의 고집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물론 우리의 생각은 늘 하나를 지향하지요. 일관된 생각이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이 둘로 흩어지면 종잡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각은 움직이는 것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것과 하나가 되려고 해도 하나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아예 없는 것, 다시 말해 허무를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apeir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순수 질료’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 반문에 대해서 대답하지요. 그렇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 순수 질료니, 무규정적인 것이니 하는 것의 뿌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뿌리를 찾는 학문이고, 까닭을 캐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철학이 제대로 서려면 존재론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져야 합니다.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또 그 삶을 반영하는 감각이나 사유 속에서 없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생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운데 난로에 온기가 없습니다. 있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생활에서나 감각에서나 생각에서나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이 없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이라고요? 결핍이라고요? 이미 있었던 것의 사라짐이라고요? 늘 있는 것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홀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 세상에는 감각의 세계와 사유의 세계로부터 이 없음을 몰아 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합시다.

‘태초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없는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 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로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생각의 고리 둘레를 생명의 고리가 둘러쌌는데 생명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둘이 뚜렷이 갈라졌다. 하나의 힘이 지배하는 우주 생명은 생각의 고리에 닿아 있어 하나로 남았으나, 밖에 있는 자연의 고리에 잇대어 있는 생명은 없는 것이 사이에 들어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생명의 고리 바깥에 자연의 고리가 둘렸는데, 이 고리에서 하나인 있는 것과 하나가 아닌 없는 것이 팽팽하게 힘으로 맞섰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물과 식물과 땅같이 감각으로 지각되는 크기를 가진 몸뚱이를 지닌 것들이 나타났다. 이 자연도 생명의 고리에 가까운 ‘만드는 자연’과 밖에 있는 질료의 고리에 가까운 ‘만들어진 자연’으로 갈라졌다. 하나인 있는 것의 힘이 미치는 테두리는 여기까지다.’ ‘자연의 고리 밖에는 있는 것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질료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는 것이 없으면 낱낱으로 구별되는 여러 하나도 생겨나지 못한다. 고유 명사로 부르는 낱낱의 저마다 다른 것은 이 없는 것의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까지도 받아들이자고 한 생각의 큰 테두리는 이런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간단히 줄이고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저 나름으로 해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자 속에 감추어 놓고 끝까지 보여 주려 들지 않았던 것의 실체가 플로티노스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플로티노스는 서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숨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헤겔도 베르그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부정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추려고 애썼던 없는 것이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이제부터 그 동안 우리가 뒤로 미루어 놓았던 과제, 곧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 되는 판단 형식이 될 수 있는지 따져 봅시다. 보통 모순율을 대표하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A is not non-A).’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 ㄱ이라면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에서 ㄱ 아닌 것이고, 따라서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 형식에 일치합니다.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존재론 차원의 문장으로 왜 ‘있는 것이(은) 없는 것이 아니다.’를 들지 않고 하필이면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들었느냐고 묻는 분에게는 있는 것은 하나이고, 하나로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추론의 공간 속에 자리잡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다시 모순율로 되돌아가서, 만일에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 형식이 어떤 경우에도 참임이 증명될 수 있다면 모순율은 자명한 논리학의 공리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없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고, 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글자로)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없는 것이라는 말을 버젓이 들으면서(글자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있지 않다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판단 형식이 공리 행세를 하려면 그 판단 형식에 실오라기만 한 의심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율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돌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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