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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형이상학 산책68-생명의 탄생(3)

헤겔 형이상학 산책68-펩타이드 연결과 본질

1)

앞에서 헤겔이 화합물 사이에서도 일종의 역 비례 관계가 출현한다고 했다. 이때 화합물의 반응을 매개하는 촉매가 화합물 내부의 구성 요소를 이루고 있으며 이행하는 화합물 속에 공통적이고 연속적인 부분을 이룬다. 각 화합물은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여 화합물의 고유한 질적 성격을 보여주는 부분을 지니며 이 부분은 서로 다른 것으로 이행한다.

이때 이행하는 부분이 한쪽이 증가하면 다른 쪽이 감소하는 식의 관계를 지니게 되면 역 비례 관계 속에 있게 된다. 이런 역 비례 관계를 지닌 것의 구체적 예를 헤겔은 제시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유기 화합물의 동족 계열 속에서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제 여기서 한 걸은 더 나가보자. 헤겔은 이런 화합물 사이의 관계에서 위와 같은 정 비례나, 역 비례를 넘어서 제곱의 비례도 가능한 것으로 본다. 헤겔은 정량의 비례를 다룰 때 제곱(제곱근)의 비례에서는 미분적 차이가 들어 있다고 본다. 이 미분적 차이는 두 정량의 비율이며 이 관계의 비율 자체가 점차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관계다. 이런 비율 자체의 증가나 감소에 따라서 두 정량은 누적적으로 증가하거나 감소한다.

이런 제곱하는 관계가 더 발전되면, 마치 두 천체 사이의 타원형 궤도와 같은 방식(3/2제곱 비례)도 가능하다. 여기서는 미분적 차이를 이루는 비율 자체가 근일점과 원일점에서 증가하는 비율이 달라지는 경우다. 원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느려지며 그 결과 회전 속도도 느려진다. 반면 근일점에서는 증가 비율이 빨라지기에 그 결과 회전 속도가 빨라진다. 이처럼 회전 속도를 규정하는 미분적 차이의 비율 자체가 유동적인 경우다.

헤겔은 정량에서 제곱 비례를 통해 기존의 것과 다른 차원의 것이 출현한다고 보았다. 예를 들어 직선을 제곱하면 면적이 되고 면적을 제곱하면 부피가 되는 것과 같다. 만일 그러하다면, 화합물의 작용에서 이런 제곱 관계가 이루어진다면, 이를 통해 단순한 화학적 화합물이 되는 것을 넘어서 새로운 질을 가진 화합물이 만들어 지지 않을까?

2)

우선 이런 제곱 비례를 이루는 화합물이 이행 관계를 헤겔은 개념적으로 어떻게 설명하는가 보자. 헤겔은 지금 다루어지는 ‘본질의 생성Werden’ 장 마지막 C절(본질로의 이행Uebergehen)에서 마침내 특정한 자립적 존재로부터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로의 이행을 설명한다.

여기서 특정한 자립적 존재란 척도 관계를 말하며 예를 들자면 하나의 화합물이다. 이런 척도 관계를 매개하는 촉매는 외적이고 이행을 매개한 후에는 화합물에서 빠져나간다. 그러나 이제 절대적으로 자립적인 존재는 역 비례에서처럼 촉매가 화합물 내에 머무르면서 연속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것이 외면적인 차이 없는 존재[외적 촉매]가 현존하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 때문에 동시에 차이 없는 존재가 처해 있다고 발견되는 대립은 곧 다만 잠재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그런 현존에 대립적으로 규정되고 대자 존재적으로 절대적인 것으로서 생각될 수 없다는 대립이다. 또는 그런 현존은 외적인 반성이어서 그 반성은 특정화한 것들이 본래 또는 절대자 속에서 동일하고 하나며 그 구별은 다만 무차별적인 구별이며 본래적인 구별이 아닌 구별이라는 사실에 머물러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81)

그런데 역 비례에서 이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은 즉 화합물의 이행에서 변화하는 부분은 촉매가 되는 부분과 외적으로 결합하는 부분이었다. 이 결합은 우연적이어서 이것이 결합하기 위해서는 외적인 조건 즉 열이나 전기 에너지가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제곱 비례에 이르면, 남아 있는 촉매 부분과 결합하는 부분이 이 촉매 부분에 내적인 관계를 지니고 있어서 다시 말하자면 촉매 부분 자체가 생성하는 부분이 된다. 이런 내적 관계를 지닌 것은 필연적이어서 외적 조건의 변화가 없더라도 가능하게 된다. 물론 외부에서 주어지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만, 이 재료가 주어지는 즉시 촉매 부분과 내적 연관 때문에 자동적으로 결합이 일어난다.

“여기서[잠재적인 차이 없는 존재]에서 여전히 결여된 것은 곧 이 반성이 사유하는 주관적 의식의 외면적 반성이 아니어야 하고 그런 통일이 전개하는 구별이 자기를 지양한다는 고유한 규정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그런 통일은 절대적 부정성을 드러내니, 이 절대적 부정성은 자기 자신에 대해 무차별하고 그 고유한 무차별성에 대해 무차별할 뿐만 아니라 타자 존재에 대해서도 무차별하다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3)

이런 점에 이 관계는 헤겔적으로 말하자면, 이중적 부정의 관계이다. 이 관계는 한편으로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이행하고 다시 타자를 부정하여 자기 내로 복귀하는 것이니, 이는 자기를 매개하여 자기와 통일을 이루는 관계이다.

이런 통일은 고요한 통일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에 대해 자기가 반발하면서 자기를 타자화하는 것이니, 오직 이런 자기와 대립 또는 모순 속에서만 자기를 유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차이 없는 존재는 자기 자신과 그것이 규정되어 있다는 사실 사이에 또는 그것의 본래 존재하는 규정과 그것이 정립된 규정성 사이에 존재하는 모순이므로 부정적 총체성이며 그 규정성은 자기 자신에서 자기를 지양한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자신의 근본적 일면성 즉 그 잠재적 존재를 지양한 것이다. 이를 통해 차이 없는 존재는 사실상의 모습으로서 정립되면서 자기에 대해 단순하고 무한하게 부정적으로 관계하며 자기가 자기 자신과 화해할 수 없는 것, 자기의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반발이 된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동시에 이 타자는 자립적인 것이거나 외면적인 것이 아니라 자기의 내적인 통일, 고유한 자기 관계 속에서 다만 계기로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거꾸로 그것을 통일하는 전체도 단순히 직접적인 것이 아니라 이런 타자로부터 복귀하는 것을 통해 성립하는 자기 매개적 존재일 뿐이다.

“그 계기는 최초에는 본래적으로 존재하는 통일에 속하고 그런 통일을 떠나지 않고 기체로서 그런 통일에 의해 지탱되고 다만 그런 통일에 의해 충족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82)

“따라서 그 존재 일반이나 구별된 규정성이 지닌 존재나 직접성은 마찬가지로 본래적 존재로서 사라지며 그 통일은 존재이며 직접적으로 전제된 총체성이서 단순한 자기 관계이며 이런 전제를 지양하는 것을 통해서만 존재하며 그것이 전제되어 있다거나 직접적 존재라는 사실은 그것이 반발하는 운동의 계기일 뿐이니 근원적인 자립성과 자기 동일성은 다만 결과적으로 출현하는 무한한 자기와의 합일로서 존재한다.”(논리학 재판, GW21, 382-383)

이런 자기 매개하는 존재가 곧 본질이다. 이 본질은 곧 정량의 제곱 비례에서 등장한 미분적 차이이며, 이 미분적 차이가 이루는 누적적 결과는 마치 선이 면으로 발전하는 것처럼 새로운 질을 그 이전에 개별적 정량에서 나타나지 않던 새로운 질이 출현하게 된다. 그 새로운 질이 곧 생명의 자기 재생산성이다.

4)

이상에서 헤겔은 제곱 관계로부터 유추를 통해 화합물의 결합을 통해 생명이 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물론 이는 유추이며 그가 실증한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헤겔이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려는 시도를 전개했다는 점에서 획기적이다.

오늘날 과학의 발전은 유기화학에서 단백질의 합성을 발견하고 마침내 그 너머 생명의 화학적 합성 가능성을 암시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아직 그런 합성에 성공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지만, 적어도 단백질을 발견하고 DNA 사실을 발견한 것은 그런 가능성을 암시하는 데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이제 예를 들어 하나의 단백질 구조를 살펴보면서 헤겔의 개념적 설명과 비교해 보자. 필자의 무지 때문에 확고하게 설명할 수는 없고 다만 필자의 추측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단백질은 펩타이드 결합이 반복된 방식으로 출현하는 모양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펩타이드 결합인데 이 결합은 다음 도표를 통해 잘 보여진다.

위 도해를 보면 아미노산은 중심 축을 중심으로 두 상반된 결합기를(카르복실기COOH와 아미노기NH2)가 있어 이 두 결합기가 교차적으로 결합하면서 긴 아미노산 연쇄 사슬이 만들어진다. 이 결합 방식을 펩타이드 결합이라 한다. 이 아미노산의 펩타이드 결합체가 복잡하게 발전하면서 생명체의 원천이 되는 단백질이 되고 이 단백질의 자기 복제를 통해 생명이 유지된다.

앞에서 유기 화합물의 경우 동일한 기체가 이중 부분으로 이루어져 그 사이에 새로운 화합물이 결합하면서 연쇄를 이루는 것과 비교해 보면, 이런 펩타이드의 결합이 지닌 차이가 잘 드러난다. 여기서 이 곁사슬(중심축)이 좌우로 상반된 결합기를 지니고 결합한다. 상이한 아미노산의 연결은 상반된 결합기가 맡는다.

반면, 이 곁사슬(중심축)이 다양한 구조(H-C-R]는 또 다른 상반된 결합을 가능하게 하면서 연쇄된 아미노산 펩타이드 결합의 자기 복제를 가능하게 한다. 얼핏 보기에 유기 화합물의 결합과는 정반대 모양을 보여주는 이 펩타이드 결합은 헤겔적 언어로 보자면, 다음과 같이 이해할 수 있겠다.

상반된 결합기로 연결된 아미노산 연쇄가 헤겔 말로 하자면, 대자적으로 자립적인 차이 없는 존재다. 중심축을 통한 상반된 결합은 그것이 생산하는 타자이다. 아미노산 연쇄가 이런 타자를 통해 복제되는 것은 자기 매개다. 이렇게 생각해 보면, 용하게도 헤겔의 개념적 언어가 실제로 발견된 단백질 복사 과정을 개념적으로 설명해 준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헤겔 형이상학 산책67-생명의 탄생(2)

헤겔 형이상학 산책67-화학적 역 비례

1)

앞에서 촉매의 매개를 통해 화합물의 이행이 필연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에 대해 설명했다. 여기서 촉매는 매개하는 가운데 사라지며, 서로 이행하는 화합물에 대해 외면적이었다.

촉매가 이렇게 외면적인 것이라는 사실에서 곧바로 다음에 등장할 개념이 예측된다. 그것은 곧 두 화합물이 외적인 촉매의 작용 없이 내적으로 서로 결합하는 것이다. 내적인 결합이라는 개념은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이행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 처음의 화합물 내부에 존재한다는 말이 된다.

그러므로 이 촉매는 사라지지 않고 화합물 내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즉 어떤 화합물이 이미 이행하는 화합물의 요소를 포함한다는 것이다. 이 내적 촉매가 한쪽에서는 이것과 결합하였다가 다른 쪽에서는 다른 것과 결합하면서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의 이행을 매개한다.

과연 구체적으로 어떤 화합물이 그와 같이 자기 이행의 요소 즉 내적 촉매를 자기 내에 품고 있는 것일까? 사실 헤겔 자신은 구체적으로 이를 제시하지 못한다. 이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읽어보면, 헤겔이 여기서 개념적인 유추를 수행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유추는 곧 비례 관계에서 나온다.

앞에서 헤겔은 두 정량의 관계를 다루면서 비례 관계를 설명했다. 그 가운데 첫 번째 형태인 정 비례는 A/B가 일정한 상수이다. 여기서 A와 B는 서로 독립적인 정량이지만, 외면적으로 일정 비율로 관계했다.

이어서 역 비례는 A*B가 일정한 상수인 관계다. 여기서 A가 자립적으로 변화할 수 있지만, 그 변화는 상대방 B에 의해 제한되어 있다. 그것이 변화하는 만큼 B도 변화하게 된다. 그 결과 A, B는 각자 독자적으로 존립하는 자립적인 것이면서도 어떤 일면에서는 다른 것에 제약된 정립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A, B의 관계가 제곱이나 제곱근의 비례에 이르게 되면, 그 내부에 미분적 차이가 존재하게 된다. 즉 A의 미분적 변화가 축적되면서 B가 이루어지니, 양자는 진정한 의미에서 내적 관계에 있게 된다.

헤겔은 이런 비례 관계의 유추를 통해 화학적 작용에서 생명을 끌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유기화학도 출현하지 않은 시대에 사실 그런 유추에 해당할 만한 화학적 작용(아마도 유기화학일 텐데)을 알지 못한 채 그런 유추에 의거해 개념적으로 이 과정을 설명했다.

이런 설명은 유추에 불과하니 아직 사변적 요소가 다분하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헤겔이 화학적 결합을 통해 그것이 결합하는 방식이 변화한다면, 생명체도 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예감이다. 이런 예감은 자연을 어디까지나 자연적으로 설명하려는 시도가 된다. 헤겔 당시 대부분 철학자가 생명의 출현을 신적인 개입이나 자동 발생적인 것으로 설명하려고 했던 것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시도가 얼마나 획기적인 것인가 짐작된다.

3)

그러나 과연 이런 유추가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정량에서 비례를 다루는 경우와 화합물에서 비례를 다루는 경우는 다르다. 전자의 경우는 전적으로 양적인 것의 관계다. 그러나 화합물은 비록 양적인 측면 즉 비율을 가지지만, 그 비율을 이루는 구성 요소는 두 화합물에서 서로 다르다.

하나의 화합물의 양적 비율A/B과 다른 화합물의 양적 비율C/D 사이에 비례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이 말이 될까? 서로 다른 물질로 구성된 화합물의 비율을 관계시킨다는 것은 의미가 없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화합물에서도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가 동일하지만, 다만 양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 경우가 있지 않을까?. 헤겔은 화합물 사이에 이런 조건을 만족하는 것이 있다면, 비례 관계가 가능할 것으로 예상한다.

정량에서의 비례와 화합물 즉 척도 관계에서 등장하는 비례의 차이는 특히 논리학 초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잘 설명된다. 여기서 형식적인 역 비례와 실재적 역 비례가 구분되고, 전자는 정량의 역 비례이지만, 후자는 질들의 역 비례라고 한다.

“여기서 역 비례가 돌아온다. 그러나 이 역 비례는 최초의 형식적인 역 비례는 아니다. 최초의 역 비례에서 특면들의 질적 관계가 있었는데, 한 측면은 다른 측면이 지닌 질이 아니었으며 즉 무차별했다. 왜냐하면, 두 측면은 정량 일반일 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즉 실재하는 역 비례에서 두 측면의 고유한 질적 본성은 양자를 연관시켜주니, 각자의 특정화하는 규정은 타자가 존재하지 않는 한에서 그 자체로 존재한다는 배제의 계기를 포함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5)

4)

이런 구성 요소는 동일한데 양적으로 차이가 생기면서 서로 다른 질을 지닌 화합물이 있을까? 헤겔 자신은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지 못했으니 알 수 없다. 그러나 다행히 헤겔 이후 발전된 유기화학에서 합성물의 예들을 보면, 어느 정도 헤겔이 유추했던 것과 같은 비례가 출현한다.

소위 유기 화합물에서 동종 계열을 보자. 한 예로서 알코홀의 동종 계열인 메타놀과 에타놀을 비교해 보자. 위의 화합물은 메타놀이고 아래 화합물은 에타놀이다. 두 가지는 왼쪽에 CH3 이 있고 오른쪽에 OH가 있으며 가운데 CH2가 배치되어 있는데, 이 CH2가 수적으로 증가하면서 여러 알코홀의 동종 계열이 만들어진다.

메타놀과 에타놀의 차이에서 보듯이 그 각각은 질적으로 다른 물질이지만, 여기서는 구성 물질은 동일하다. 그 구성 비율만이 다르며, CH2의 양적 증가가 이 알코홀의 동종 계열의 질적 차이를 낳는다.

이런 유기화학의 예를 헤겔적 개념으로 설명하자면 이렇게 된다. 메타놀과 에타놀에서 동일하게 반복되는 부분 즉 CH3-OH는 마치 내재하는 촉매와 같은 역할을 담당하니, 이는 차이 없는 존재 또는 기체에 해당한다. 반면 CH2는 증가하면서 새로운 질을 산출하는데 이는 상태 변화에 해당한다.

그런데 앞에서 설명한 외적인 관계로서 촉매 반응은 촉매가 사라지는 것이었다면, 여기서는 촉매가 물질 내부에 계속 남아 있어서 자기의 한 부분[CH3-OH]이 타자와 공통으로 갖고 있는 것이어서 타자의 부분[CH3-OH]을 이미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CH2의 증가에 의해 질이 변화할 때 이 화합물은 촉매[CH3-OH]에 이제 외적인 상태가 아니라 이미 촉매와 결합하여 이를 통해 고유한 질을 지닌 화합물에 내적인 상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5)

위와 같은 예는 내적 촉매가 동일한데 일정 요소가 계속 증가하는 결합 방식이니, 정비례의 예라고 할 수 있다. 정비례가 가능하다면 역 비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필자처럼 유기화학에 대한 문외한이 어설프게 주워들어 억지로 꿰어맞추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헤겔이 말하는 화합물의 역 비례 관계는 다음과 같은 예를 통해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위의 식은 에타놀의 산화가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과정이다. 한 번 산화하여 에탄알이 되고 다시 산화하여 에탄산이 된다. 위의 변화에서 CH3-C-OH는 모두 동일하다. 다만 한쪽에 CH2의 증가와 다른 쪽에 O가 증가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것은 마치 CH2와 O사이에 역비례 관계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헤겔을 따라서 이런 역 비례를 개념적으로 설명해 보자. 이런 역 비례에 각 항은 공통적으로 내적 촉매를 포함하지만, 다른 한편 자기의 항의 질을 규정하는 요소뿐만 아니라 다른 항의 질을 규정하는 요소도 포함한다. 각 항은 이미 다른 항을 포함하므로 다른 항과 연속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각 항은 이미 그 자체에서 차이 없는 존재와 같다. 그러므로 각 항은 이미 그 자체가 전체이다. 여기서 각 항은 서로 역 비례의 관계에 있으므로 정량에서 역 비례와 마찬가지로 이 비례에서 각 항은 한편으로 자립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타자에 의해 제약되어 있다.

“그들은 양적으로 구별되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차이 없는 존재이니, 이 후자의 측면에 따르자면 서로는 서로로 넘어가 연속되어 있으며 이 연속성은 두 가지 통일의 각각 속에 질이 동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각각은 두 측면 즉 규정의 전체이므로 따라서 차이 없는 존재를 포함하는 가운데 서로에 대해 대립하는 것으로서 동시에 자립적인 것으로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75)

“두 측면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의 통일[척도 관계]인데 본래 동일하며 자립적인 것이지만, 그들이 이런 통일인 것은 그 부정이나 타자에 의해 매개되는 한에서다. 각각은 타자에서 자기 내로 복귀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6)

다만 하나의 질적인 항은 한 측면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항보다 많으며 다른 측면에서는 질적으로 다른 항보다 작다. 각 항이 포함하는 두 측면 가운데 한 측면은 줄어들고 다른 측면은 증가하면서 다른 항으로 이행한다.

“두 측면의 구별은 하나의 측면에서 하나의 질이 더 많은 것을 지닌 채 정립되고 다른 측면에서는 더 적은 것을 지닌 채로 정립되며 다른 질은 거꾸로 방식으로 정립된다는 것에 제한된다. 그러므로 각 측면은 그 자신에서 차이 없는 존재의 총체이다. 두 질 각각은 독자적으로 개별적으로 본다면 마찬가지로 합으로 머무르는데, 이는 차이 없는 존재와 동일한 것이다.” (논리학 재판, GW21,376)

각 항이 한 측면에서 증가하는 것은 다른 항이 그 측면에서 감소하기 때문이며 거꾸로 각 항이 다른 측면에서 감소하는 것은 다른 항이 이 다른 측면에서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를 수식으로 표현하자면 다음과 같을 것이다.

[n*A/B+1/m*C/D] * [1/n*A/B+m*C/D]=p

헤겔 형이상학 산책66-생명의 탄생(1)[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6-본질로의 이행

1)

헤겔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의 1권이 존재론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부분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왔다. 이 1부 존재론의 마지막 3편이 척도이고, 그 3편의 마지막 3장은 제목이 ‘본질로의 생성’이다. 1권 2부가 본질론이니,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을 다루는 부분이다.

‘본질’이라는 개념은 헤겔에서는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지속적인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처럼 자기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생명체에 와서 시작된다.

자연계에서 그 이전 영역 즉 물리적 영역에서 다루는 물체나 화학적 영역에서 다루는 원소는 아직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아 항상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면 생명체는 외적인 영향을 받더라도 그 영향을 자기에 동화시킴으로써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다. 이런 재생산성이 있으므로 지속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실체[Substance]라고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제이 실체 즉 종이 제일 실체 즉 개체라고 하는 주장은 이런 생명체의 종이 개체를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을 통해서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헤겔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은 실체라는 개념은 일반적 본질 예를 들어 사회와 같은 것에 한정해서 사용하고, 단순한 종적 개체로서 생명은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헤겔의 이런 본질 개념은 플라톤적인 이데아 개념과 구별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실체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것이니, 이는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자기 재생산 과정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본질이 다루어지는 영역이 바로 본질론이다. 본질론에서는 이 생명체의 자기 운동을 다루니, 그 운동의 방식이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곧 반성 논리이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질과 양, 그리고 척도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것은 역학적 물체나 화학적인 원소에 해당하는 논리였다. 그것은 물체나 원소가 운동하는 방식인데, 질에서는 이행의 운동이, 양의 영역에서는 연속성의 운동이 지배했다. 마지막 척도에서 양자의 통일 즉 질과 양의 상호 전환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앞의 장 마지막 부분에서 헤겔은 ‘기체[Substrat]’라는 개념에 이르렀는데 이 기체는 화학의 영역에서 촉매를 고려해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다루려 하는 3장 ‘본질로의 생성’은 화학 영역에서 제시된 촉매가 생명체의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2)

논리학을 다루는데 생명체로의 발전을 다룬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순수 형식적 논리라면, 논리의 전개와 자연의 발전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학은 그렇지 않다. 처음 시작할 때 언급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무래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삼단논법에서 보듯이 일반적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개별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이행은 헤겔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자연의 발전이 전제되고 있다. 자연은 감각적 질로부터 점차 일반화되어 나간다. 이 과정은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같은데, 다만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전개이니, 자연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자연사는 단순히 자연 진화의 역사를 의미하기보다는 자연의 범주적 층위(물체, 원소, 생명 등)가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역학적 물체, 화학적 원소, 생물학적 생명체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운동이 대상의 운동을 매개로 해서 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논리적 이행은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을 매개로 해서 전진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이 경험적으로 일어난 결과 그 최종 결과를 통해서 이 생성과정이 회고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논리적 전개 과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항상 논리 범주를 전개할 때 주석 등을 통해서 그 범주와 관련된 영역에 관한 자연사의 진화를 파악하는 과학의 성과를 소개하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과학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이를 회고적으로 논리적 범주의 발전으로 재구성했다.

3)

그런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도 자연 영역에서 생명의 발전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생명에 관한 창조론적인 견해나 신비한 자동발생적 사유가 만연하고 있다.

더군다나 논리학 재판이 발간된 1831년 다음 해에 사망한 헤겔에게는 화학의 영역조차도 아주 초보적인 원리의 발전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당대 베르질리우스에 의해 요소의 합성이 이루어짐으로써 처음 유기화학이 시작되었지만, 헤겔은 이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시대 유기화학으로부터 단백질과 같은 생명체의 기본 구조의 발생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헤겔은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인 상호 침투의 원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화학적 결합을 설명하는 데는 이르렀으나, 이런 화학적 결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전을 경험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헤겔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제 살펴보려 하는 ‘본질로의 생성’ 장은 극히 논리적이고 극히 단순화되어 있어 심지어 양적으로도 많지 않다. 과학적 경험과 관련된 것도 전혀 없다. 생명의 탄생을 다루는 이 부분이 지니는 중요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사변적 설명으로는 헤겔이 생명의 탄생을 어떻게 다루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헤겔이 생명의 발생을 신비한 창조적 작업에 돌리지 않고 자연적 과정을 통해 특히 바로 전 단계인 화학적 작용을 통해 끌어내려 시도한 것은 특히 눈에 뜨인다.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유물론이라면, 논리학에서 헤겔은 이런 유물론적인 논리를 전개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생명의 발전을 다루었던 것인가? 그 생명의 탄생이 우리가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화학적 촉매 개념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다행이 우리로서는 화학적 작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생에 이르는 과학적인 과정에 대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단서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유기화학이나 단백질의 형성, DNA의 구조 등이 그런 단서에 속한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겨우 화학의 기본 원리나 따라갈 정도지, 이런 유기화학, 단백질, DNA 등의 개념은 헤겔의 책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간신히 꿰어맞추는 정도인데, 이런 한심한 지식을 가지고서도 어떻든 헤겔이 사변적으로 전개한 논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맞추어 보려는 것이 필자의 시도다.

4)

그럼, 이제 헤겔이 촉매를 통한 화학적 결합 작용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침내 생명 개념에 이르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출발점은 촉매라는 개념이 될 것이다. 이 촉매는 하나의 화합물을 다른 화합물로 이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자체는 양자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 또는 ‘기체[Substrat]’라고 한다.

물론 이 촉매 역시 하나의 화합물인 한,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질은 촉매가 수행하는 매개 작용과는 무관하다. 이 촉매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양적 비율이 매개 작용에서 결정한다. 이 촉매 속에 들어 있는 원소의 양적 관계가 매개가 되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다른 질을 지닌 화합물로 변화된다.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촉매 없이 일어나는 이행은 외적 상태에 의해 일어나는 우연적인 작용이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이행을 무한진행이라 하였다. 그러나 촉매가 등장하면서 두 화합물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니, 촉매야말로 진무한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화합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양적으로 해체되고 촉매 과정을 거쳐서 다시 양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면 새로운 질을 지닌 화합물로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촉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이행은 촉매가 동일하게 남아 있는 차이 없는 존재, 기체가 되고 화합물의 이행은 그것이 지닌 외적인 상태가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촉매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며 다시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전체적으로 자기의 부정을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자기 매개의 과정이며 부정적인 통일이다.

“그러나 절대적 무차별성이라 불릴 수 있는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는 존재에 속하는 모든 규정성 즉 질적 규정성과 양적 규정성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척도에서 일어나는 양자의 직접적 통일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매개하여 단순한 통일로 되는 것이다. 그 규정성은 차이 없는 존재에서는 다만 여전히 하나의 상태로서 즉 질적인 외면성으로서 존재하니 이것은 기체에 대해 차이 없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73)

이런 자기 매개의 과정, 단순한 부정적 통일 등은 후일 헤겔이 개념을 설명할 때 그 본질적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촉매는 그런 개념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촉매는 화합물을 이행하게 하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촉매는 화합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것은 이 촉매가 화합물의 이행에서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촉매 즉 기체가 아직 잠재적으로만 자립적인 존재이지 진정한 생명체에 이르러서 나타나는 대자적인 자립적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한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5-화학에서 촉매와 기체의 개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5-화학에서 촉매와 기체의 개념

1)

앞의 글에서 척도 관계를 다루었는데,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니기에 무엇을 지칭하는 것인지가 애매하다. 헤겔은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를 이루는 산과 알칼리 또는 일반화해서 화학적으로 결합하는 분자적 결합 관계를 척도 관계라고 한다. 즉 두 척도가 결합하는 관계를 말한다.

이런 척도 관계는 하나의 계열을 이루는데, 예를 들어 질소 산화물을 보면 일산화 질소NO, 이산화 질소NO2, 질산 이온NO3-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산화물을 좀 더 확장하면, 다양한 금속 산화물을 들 수 있겠다. 산화 제일철FeO 산화 제이철Fe2O3, 그리고 산화 마그네슘MgO와 같은 것이 있다.

헤겔은 이런 척도 관계의 계열은 징검다리와 같은 마디 선[Knotelinie]을 이룬다고 한다. 단순한 정량의 계열에서 각 항 사이가 균등하게 전개되는 반면, 마디 선의 경우 각 항 사이가 불균등하게 전개된다.

이제 하나의 화합물이 다른 화합물로 변화하는 것을 살펴보자. 앞에서 보았지만, 추상적인 정량의 경우 하나가 부정되는 것과 동시에 다른 하나가 출현한다. 여기서 정량의 부정은 다시 정량이다. 양적인 것은 이미 자기 내에서 자기를 부정하는 힘을 지닌 것이다. 그 변화는 연속적이고 점진적이다.

그러나 마디 선과 같이 띄엄띄엄 존재하는 화합물의 경우 각 화합물은 이지 대자 존재 즉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자립적이다. 여기서 변화는 자기 내에서 나오지 않으며 외적인 다양한 영향에 의해 일어난다. 새로운 화합물 역시 자기 관계하는 자립적인 것이니 그것의 출현 역시 자기 내적인 것이다. 그런 한에서 이행은 우연적이다.

더구나 하나의 부정은 곧바로 다른 화합물의 출현을 의미하지 않는다. 중간에 비어 있는 틈 즉 공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서 이행은 단속적이다. 그사이에는 텅 빈 죽음이 매개하고 있다.

2)

여기서 척도 없음, 과도한 것[Masslos]이라는 개념이 나온다. 어떤 화합물은 자기 관계하는 것이므로 일정한 척도를 지닌다. 그 척도가 곧 그 화합물의 질을 이룬다. 예를 들어 이산화 질소는 질소와 산소가 1:2의 비율로 결합한 것이다. 1:2라는 비율이 이산화 질소의 척도다.

그런데 만일 이 화합물이 자기의 척도를 넘어서게 되면, 그것이 곧 과도한 것이니, 헤겔의 표현에 따르면 ‘das Masslose’이다. 어떤 화합물이 자기의 척도를 넘어서게 되는 것은 외부의 영향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합물을 둘러싼 일정한 온도가 그런 과도함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이 과도한 것은 그런 화합물이 해체된 것이며, 아직 그것이 새로운 것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다. 아직 화합물을 구성하던 소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다시 어떤 결합을 이룰지는 주변 환경에 달려 있다.

이런 과도한 것, 척도를 넘어선 것은 무한 진행한다. 하나가 해체되면 주변 환경에 따라 새로운 것이 나오며 다시 그것 역시 주변 환경의 영향에 따라 해체되어 다시 새로운 것으로 변화한다.

하나의 척도 관계가 다른 척도 관계로 변화하는 이행 과정은 하나의 척도 관계인 질적인 것이 질적 규정이 없는 양적인 것 즉 ‘과도한 것’으로 이행하고 다시 여기서 새로운 척도 관계인 질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으로 서술된다. 이런 이행 과정의 바탕에서 척도 관계를 이루는 두 척도의 양적 비율이 변화한다.

3)

이런 무한 진행은 그 이전에 언급했던 질적 무한 진행과 양적인 무한 진행과 구별된다. 질적인 무한 진행은 하나의 질이 부정되면 그것과 대립적으로 관계하는 다른 질로 이행한다. 이 다른 질은 하나의 질에 대해 타자 즉 피안이다. 즉 빨간색의 부정은 빨강이 아닌 색이다. 양에서도 무한 진행이 출현했다. 여기서 하나의 양의 부정은 또 하나의 양이며 여기서는 질은 변화함이 없으며 다만 양 즉 크기만 변화한다. 이런 진행은 무한한 크기의 양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현존에서 존재하는 질적인 무한성은 무한자가 유한자에서 출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직접적인 이행이며 차안이 그 자신의 피안으로 소멸하는 것이었다. 그에 반해 양적인 무한성은 그 규성상 이미 정량의 연속성이니 정량이 자기 자신ㅇ르 넘어나가는 연속성이다. 질적인 뮤한자는 무한자로 된다. 양적인 유한자는 그 자신에서 자기의 피안이며 자기를 넘어 나간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이런 질적 무한 진행이나 양적인 무한 진행과 구별되어 과도한 것은 무한 진행이기는 하지만, 징검다리 식으로 진행하는 것이니, 한편으로 양적인 것과 질적인 것이 상호 지양되어 통일되어 있다. 다른 한편으로 이런 진행은 환경의 영향에 따라 종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우연적인 변화이고 불규칙적인 도약이다.

“그러나 특정화한 척도[관계]에서 나타나는 무한성은 질적인 것과 양적인 것을 상호 지양하는 것으로서 정립한다. 따라서 이는 양자의 최초로 일어나는 직접적인 통일이니, 이런 통일은 일반적으로 자기 내로 복귀한 것으로서 따라서 정립된 것으로서 척도이다. 질적인 것 즉 특정한 현존은 다른 현존으로 이행하니 이때 다만 [척도] 관계에서 나타나는 크기 규정의 변화만이 일어난다.”(논리학 재판, GW21, 370)

4)

그런데 여기서 헤겔의 서술에서 새로운 범주가 출현한다. 이 구절 바로 다음에 헤겔은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사태’라는 개념을 끌어낸다.

“따라서 양적인 것의 질적인 것으로의 변화는 외적인 것이고 무차별한 것으로서 정립되며 그리고 자기와 합치하는 것으로서 정립된다. 양적인 것은 곧바로 지양되면서 질적인 것으로 즉 그 자체이며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으로서 질적인 것으로 지양된다. 이처럼 척도의 교체 속에서 자기 내에서 연속하는 통일성이 진정하게 머무르는 자립적인 물질 즉 사태 자체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위의 구절에서 앞부분은 “외적이고 무차별한 것”이란 구절은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을 서술한다. 하지만, 바로 다음의 뒷부분에서 “자기 합치하는 것”이나 “그 자체이며 대자적으로 규정된 것”, ‘사태’라는 개념이 나오면서 진 무한 개념이 나온다.

사태는 곧 “진정으로 지속하는 자립적 물질”이다. 그 핵심은 자기를 지속하는 존재 또는 자기를 재생산하는 존재다. 이는 장차 출현하게 될 본질 개념의 출발점으로 된다. 그것은 아직 ‘본질’ 자체는 아니며 다만 ‘기체’에 머무른다.

이런 기체의 개념은 화학적인 촉매라는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화합물의 해체와 다른 화합물로의 이행은 외적인 영향에 좌우되니 우연적인데, 오히려 그 때문에 이런 이행을 조절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바로 촉매를 집어넣는 경우이다. 기체상에서 발생하는 간단한 예로, 2 SO2 + O2 → 2 SO3 반응은 일산화질소NO를 첨가하여 촉진될 수 있다. 이 반응은 두 단계로 발생한다.

2 NO + O2 → 2 NO2

NO2 + SO2 → NO + SO3

여기서 목표는 아황화가스를 삼산화황(황산의 원료)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행 과정은 촉매로 일산화질소를 사용하면 두 개의 화학적 결합과정을 포함한다. 즉 일산화질소가 이산화질소로 이행하는 과정과 이산화질소가 아황화 가스와 결합해 삼산화황(황산의 원료)이 나오는 과정이다.

5)

위와 같은 촉매 반응은 화학적 결합물을 중심으로 서술한 것이다. 이제 거꾸로 촉매를 중심으로 서술하면, 촉매는 자기를 부정하여 타자로 변화하지만, 이 타자는 다시 자기를 부정하면서 원래의 자기로 복귀한다. 이런 자기로 복귀하는 것은 재생산되는 것이므로 ‘사태[Sache]’로 규정된다.

척도 관계의 무한 진행에서 띄엄띄엄 존재하는 척도 관계 사이의 비어 있는 틈은 척도 관계에 대해 외면적이었다. 그러나 이 비어 있는 틈이 척도 관계 자체에 내재적이 되면 그것이 곧 사태이다. 틈이 비어 있는 것이라면 사태는 척도 관계들을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이다.

“척도[관계]들의 교체 속에서 자기를 자기 내에서 연속하는 통일성은 진정하게 지속적으로 머무르는 자립적 물질 즉 사태이다.”(논리학 재판, GW21, 370)

이제 기체를 매체로 일어나는 척도 관계들의 변화를 헤겔은 ‘상태 변화’라고 한다. 이 전체 변화의 과정에서 각 척도 관계는 하나의 마디일 뿐이며 그것을 매개하는 촉매는 영속적으로 머무르며 그러기에 기체[Substrat]으로 불린다.

“이제 그러한 관계는 다만 동일한 기체의 마디로서 규정된다. 이를 통해 척도들과 그것을 통해 정립되는 자립성은 상태로 전락한다. 변화는 다만 상태의 변화이며 이행시키는 것[Uebergehende]은 그 속에서 동일하게 머무르는 것으로서 정립된다.”(논리학 재판, GW21, 371)

헤겔에서 무한 진행은 악 무한이다. 반면 진 무한은 자기 관계하는 대자 존재다. 질의 차원에서 진 무한은 양적 일자이며, 양적 차원에서 진 무한은 미분 즉 소멸하는 비례이다. 이제 척도 관계에서 악 무한이 앞에서 말한 과도한 것이라면, 그 진 무한을 헤겔은 사태라고 규정한 것이다.

“영속하는 기체는 동일한 방식으로 우선 그 자신에서 존재하는 무한성의 규정을 갖는다.”(논리학 재판, GW21, 370)

하나의 질적 촉매는 자기를 자기로부터 반발하게 하여 자기의 타자로 이행하는 것이지만, 이 타자 역시 자기로부터 발발하니, 이 전체 과정을 통해 촉매 자기로 되돌아온다. 그러므로 촉매 과정에서 이행은 이행을 부정하는 것이다. 또는 이 촉매는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와 매개하는 자립성”(논리학 초판, GW11, 223)이다.

“그러므로 각자는 타자로 되는 가운데 오히려 이런 것 즉 타자로 되는 것을 지양하니 각자는 이렇게 타자로 되는 가운데 다만 자기 자신과 합일한다.”(논리학 초판, GW11, 222)

6)

이미 척도 관계에서 질적인 통일이 일어났다. 예를 들어 산과 알칼리는 결합하면서 부피는 통일된다. 이런 통일이 곧 대자 존재 또는 질의 측면이다. 그러나 여기서 통일은 한 부분에서의 통일이니 무게의 양적인 측면은 자기를 유지하면서 단순히 혼합될 뿐이다.

이제 하나의 척도 관계를 다른 척도 관계로 이행할 때 등장하는 촉매 즉 사태는 자기 자신을 타자화하면서 다시 타자 속에서 자기로 복귀하는 자기 매개하는 자이면서 진정한 무한자이다. 헤겔은 이를 “절대적으로 규정된 대자 존재”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 촉매는 하나의 화합물이어서 그 스스로 일정한 비율을 지닌 대자 존재로서 질적 존재다.

그런데 이런 매개 과정에서 그 자신의 질적 존재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한다. 그것은 오직 교환체로서만 의미를 지니니, 그것이 지닌 양적 비율만이 문제가 된다. 이 양적 비율이 이제는 전체의 매개 중심으로서 매개의 단위가 된다. 즉 양이 그 자체로 질이 되니, 진정한 양질의 통일이 여기서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기체는 아직 개념이 되지 못한다. 개념이라면, 그 계기들이 개념의 자기 구별로부터 나와야 한다. 즉 “그 자신의 구별된 것들에 내재적 규정을 제공해야”(논리학 재판, GW21, 372) 한다. 그러나 여기서 촉매는 변화하는 계기들에 영속하는 기체일 뿐이다. 계기들은 그 기체의 외적인 상태일 뿐이다.

헤겔 형이상학 산책64- 척도 관계의 계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형이상학 산책64- 척도 관계의 계열

1)

헤겔 존재론 3편 척도 장은 어떻게 보면 상당히 복잡해 그 체계 전체를 한눈에 파악하기 어렵다. 그러나 조금 생각해 보면, 척도 개념이 규칙적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두 정량의 관계가 척도를 이룬다. 예를 들어 비중과 같은 것인데 비중은 무게와 부피의 관계다. 두 척도의 관계가 척도 관계이다. 척도 관계들이 서로 배열될 때 예를 들어 도미솔과 같은 동일한 주파수의 배가에 의한 결합도 있지만, 예를 들어 산과 알칼리 또는 일반화해서 화학적 결합과 같은 결합도 있다. 전자가 단순한 친화성이라면 후자는 선택적 친화성이다.

산과 알칼리 또는 화학적 결합은 두 척도의 선택적인(또는 배타적인) 결합이다. 여기서 결합하는 두 측면은 각기 척도이다. 즉 두 물질은 각기 비중(무게와 부피)을 지니면서 서로 결합하는데, 이 결합에서 무게는 단순히 혼합되지만, 부피는 서로 뒤섞이니 즉 상호침투적이다. 헤겔은 이때 부피의 측면을 대자 존재의 측면 즉 질적인 측면이라 하고 무게의 측면을 양적인 측면이라 한다.

이제 이렇게 선택적 친화성을 통해 결합한 산물은 일정한 계열을 이룬다. 대표적인 것이 일산화질소[NO], 이산화질소{NO2], 질산이온[NO3-]이다. 이것들은 질소와 산소의 결합 즉 척도 관계다. 이것이 곧 이제 우리가 다룰 척도 관계의 계열이다.

이 계열은 상대 극에 무엇이 있는가에 따라 다양하게 출현한다. 위에서 산소를 반대 극에 둔 질소의 계열을 살펴보았는데, 수소를 반대 극에 둔 계열을 살펴볼 수도 있다. 그러면 물(H2O), 암모니아(NH3)와 같은 계열이 만들어질 것이다.

이상 이야기를 간단히 말하자면, 두 양의 관계로서 척도, 두 척도의 관계로서 척도 관계, 척도 관계들의 관계로서 척도 관계의 계열이라는 식으로 전개된다고 볼 수 있다.

2)

지금까지 척도 관계로서 선택적 친화성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이제 척도 관계들이 이루는 계열을 살펴볼 차례다. 척도 관계의 계열을 이루는 각 항은 각기 하나의 척도 관계이며, 그것들은 한편으로 고유한 질을 지닌다. 예를 들어 일산화질소와 이산화질소는 각기 다른 고유한 질을 지닌다. 전자는 몸에 유익하지만, 후자는 치명적이다.

이런 질적 차이는 서로 선택적으로 결합한(또는 부정적으로 통일한 것) 결과로 다른 것에 대해서 특정화한 것이니, 여기서 타자와의 관계는 곧 자기와 관계이어서 자립적이다. 쉽게 말해 그 결합이 견고하다. 이런 선택적 결합체 즉 척도 관계는 다른 척도 관계에 대해 질적인 차이를 지니며, 각자 특정한 것이고 하나에서 다른 것으로 이행하는 것은 비약적이다.

“관계로 이루어진 척도의 자기 관계는 그것의 양적 측면에 속하는 외면성이나 가변성과 상이하다. 이 관계적 척도는 자기 관계하는 것이니, 이는 양적 측면에 대립하는 하나의 존재하는 질적 토대이니, 동시에 그런 관계적 척도는 자기의 외면성 속에서는 연속하지만, 질 속에서는 이 외면성을 특정화하는 원리를 내포했어야 지속하는 물질적 기체가 될 수 있다.”(논리학 재판, GW21, 364)

그런데 다른 한편 이 척도 계열의 각 항은 양적 차이를 지닌다. 이산화질소는 산소에 대해 질소가 하나이며, 이산화질소는 두 개, 질산이온은 세 개다. 이런 양적 변화는 연속적이다.

그런데 여기서 나타나는 연속성에는 정량의 연속성과 다른 측면이 있다. 자연수에서 수는 연속적인데, 각 수가 앞이나 뒤의 수에 대해 갖는 관계는 균등하다. 반면 음정의 도레미파솔라시도에서 보이는 연속성은 각 음정에서 앞이나 뒤의 음정에 대해 갖는 관계는 차이가 있어 불균등적이다. 그러나 그런 가운데 자연수처럼 배가되는 음정이 있는데 그게 조화를 이루는 음정 도미솔이다.

이제 척도 관계의 계열을 보자. 위에서 일산화질소, 이산화질소, 질산이온 등은 자연수처럼 진행하여 마치 균등한 것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부분의 척도 관계의 계열은 그 앞뒤의 관계가 불균등하며 중간이 비어있는 경우도 많다.

“그와 같은 대자 존재는 본질적으로 양의 관계이므로 외면성이나 양적 변화에 열려 있다. 그런 척도 관계는 하나의 틈을 갖는다. 그런 틈 안에서 이 척도[관계]는 변화에 대해 무차별하며 그 질을 변화하지 않는다.”(논리학 재판, GW21, 365)

그러므로 이런 척도 관계들의 계열을 보면, 연속적이기는 하지만, 정량[수]의 연속성과 달리 마치 징검다리처럼 띄엄띄엄 이어지는 연속성이다. 헤겔은 이와 같은 연속성을 ‘마디 선[Knotenlinie]’이라고 말한다.

4)

이런 마디 선의 개념과 더불어 척도 관계의 계열이 지닌 특성이 드러난다. 이미 앞에서 정량을 다룰 때 질과 양의 상호이행에 관해 서술했다. 자연수는 양적으로는 앞의 수와 연속되어 있다. 이런 연속성의 측면에서 보면 그 수는 개수이다. 예를 들어 다섯 개는 네 개에 하나 더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총수 다섯 개를 우리는 다섯이라는 수적 언어로 표현하는데, 이 다섯이란 고유한 질적인 규정을 지닌다. 그러므로 그것을 총수[Einheit] 즉 통일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그 결과 양이 변화하면 질이 변하고 질이 변화면 양이 변화하게 된다.

그런데 헤겔은 여기서 마디 선과 더불어 다시 양질 변화를 언급한다. 여기서 일산화질소에서 이산화질소 양적인 변화는 동시에 고유한 질적인 변화가 일어나며, 질적 변화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양적 변화가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자연수 또는 정량에서 질량 변화와 달리 척도 관계에서 질량 변화는 차이를 지닌다. 우선 척도 관계는 선택적 친화성의 관계를 통해 자기 관계하며 자립적인 질을 이루고 있으므로 하나의 척도 관계가 다른 척도 관계로 이행하는 것은 자기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척도 관계가 변화하는 원인은 외적인 상황, 조건 때문이다. 즉 “무규정적인 타자, 우연성, 외적 상황”(논리학 초판, GW11, 216) 때문이다.

이런 외적 상황과 조건이 작용하고 있으므로 하나의 척도 관계에 대신해서 새로운 척도 관계가 나올 때 그것은 이전의 척도 관계에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전의 척도 관계로부터 출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현하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65).

또한, 이런 척도 관계의 계열에서는 그 계열은 불균등하므로 중간이 비어 있는 경우가 있어서 이 변화가 점진적 내적이지 않다. 이 변화는 우연적이며 비약적이다.

5)

이와 관련해서 헤겔은 자연에는 우연과 비약이 없다는 주장을 검토한다. 이런 주장에 따르면 자연은 점진적, 내적으로 변화한다. 그런데 우리 눈에 비약이 보이는 것은 사실 이미 미소한 것이 출현해서 그 크기가 성장하고 있었지만, 우리가 그 미소한 것의 출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그 때문에 자연에 갑작스러운 비약이 출현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자연이 척도 관계들의 계열인 한, 이 관계들이 우연하고 비약적으로 출현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헤겔은 심지어 도덕이나 국가조차도 이런 양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비약이 존재한다고 한다. 예를 들어 도덕적으로 경솔함은 대부분 사소한 잘못이지만, 어떤 경우에는 사소한 경솔함이 엄청난 도덕적 불법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국가도 일정한 크기가 지속 증가하더라도 큰 변화가 없을 수도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크기 변화가 질적인 변화를 이루기도 한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로마가 팽창하다가 갈리아나 중동을 정복하면서 더는 공화국 체제로 유지될 수 없을 지경에 이른 예를 들어 볼 수 있다.

여기서 나온 대로 자연에 우연적 비약을 인정한다는 헤겔의 주장은 흔히 헤겔의 체계가 개념적 필연성을 인정한다는 주장과 상반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양자는 모순적이지 않다. 개념의 필연성은 개념적 존재 즉 정신적 존재에서 출현하는 것이다. 반면 자연은 아직 비정신적 존재이니, 여기서 개념의 필연성이 아니라 우연적 비약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자주 자연과 사회 및 정신에 적용되는 변증법을 동일시하는데, 이는 헤겔 변증법에 대한 오해이다. 변증법은 각각의 영역에서 고유하게 발전한다. 그러므로 자연의 변증법적 발전 방식과 사회나 정신의 발전 방식이 동일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만일 정신이나 사회도 그것의 양적인 측면 즉 자연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자연 자체와 마찬가지로 우연성과 비약이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중반 황종희의 철학에 기울어졌다가, 다시 2001년에는 왕선산의 철학으로 기울어진다. 전자는 내재의 철학인데, 우주적 기와 마음의 합일에 의해 혼연일체가 되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다. 그러나 기의 변화를 다만 기다리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에 이른다.

반면 후자는 음기와 양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물의 본체가 성립하며, 개별 사물들은 음양의 운동 상태로 중정을 향해 움직여 가는 가운데 상호 보완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본체를 통한 자주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운동 상태에서 본체로의 복귀라는 강력한 실천 동기가 출현하지만, 소통성은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수준으로 약화된다.

이규성은 자주성에도 관심을 지니지만, 그에게서 일차적인 것은 천인합일에 의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니, 그는 다시 양명학의 일원론적 기 철학으로 돌아가면서도 강력한 실천성과 현실 저항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런 가운데 이규성이 주목한 것이 바로 동학 최시형의 철학이다.

이규성은 최시형에 관해 2011년 <최시형의 철학-표현과 개벽>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에 앞서서 이미 1999년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필자는 뒤의 책을 구하지 못해 앞의 책만을 참고로 했는데, 필자 생각으로 뒤의 책을 다시 발표한 책이 아닐까 짐작한다. 동학사상에 관해서는 2012년 발간된 <한국현대철학사론 1장 표현과 개벽>에서도 다루어지는데, 이 책이 내용상 오히려 더 풍부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최재우에서 최시형을 거쳐 이돈화, 손병희 등 초기 동학 사상가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최시형의 철학을 다루는 책에서 부제에 ‘개벽’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주목된다. 그것은 이미 이규성이 최시형을 다룰 때 그의 철학이 지닌 현실 변혁의 저항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현실 저항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을 추구해온 이규성의 철학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규성은 최시형의 철학을 양명학의 기 일원론의 철학적 체계에 따라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황종희, 현성파로 이어지는 양명학의 흐름에서는 저항성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기의 변화를 기다리는 내적 망명, 현실 도피적 성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유사한 철학적 토대 위에서 최시형은 어떻게 현실 저항성을 획득했을까?

2)

동학사상을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개념을 통해 해석해 생명이 생성하는 철학으로 확립하려는 시도는 이미 이돈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근 김지하도 생명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마찬가지로 생명철학으로 해석했고, 이런 입장은 이규성 자신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천도를 하나의 우주적 기로 보며 이 우주적 기가 펼쳐지면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본다. 이 “기의 운행은 剛健하며 不息하며 玄妙無爲하니”(최시형, 천도교 경전, 241) “만상은 천도의 表顯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28). 만물에 하늘이 임존하니 “사사천이며 물물천이고” “천불이인이고 인불천인”(최시형, 천도교 경전, 329)이다. 그 운동은 한편으로 동질화하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화하는 운동이다. 전자가 음의 운동이라면 후자가 양의 운동일 것이다.

인간은 그런 우주적 기와의 합일을 통해서 만물과 소통하는 상태에 이르며(내유신령) 이를 통해 깨달은 우주적 기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 한다.(외유기화) 합일을 통해 자각된 우주적 기의 진정한 모습은 평등한 세상이며 서로 소통하는 조화나 동포의 세계이다.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타인과 내가 포태를 같이 하고 사물과 내가 포태를 같이하는 전체적 진리를 깨닫는다.” (최시형, 천도교 경전, 355)

그것은 투쟁을 치유하고 원한을 용해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구체적으로 경천, 경인, 경사의 관계로 규정된다. 이제 이런 세계가 막 실현되려 하니, 곧 선천의 세계는 지나가고 새로운 개벽이 다가온다.

동학사상의 일반적 얼개를 위와 같이 정리해 보면, 이는 전형적으로 앞에서 황종희의 철학을 통해 밝혀진 일원적 기가 전개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규성 자신도 동학사상은 “신유가의 이학적 사고를 계승한다” 또는 최시형은 “동학을 도학으로 도학을 심학으로 이해한다”(한국현대철학사론, 78)라고 말한다.

이규성은 그러면서도 동학사상에 나타나는 강력한 실천성과 저항성에 놀라며, 이것이 기 철학 자체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는 일원론적 기의 철학이 중국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내적인 비밀의 힘을 동학사상에서 발견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추구했던 소통의 철학은 완성에 이르렀다.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는 모든 곳에 빈틈없이 내재하는 충만의 원리이자 개체들을 관류하여 융통시키는 연속성과 소통성의 원리이다.”(한국현대철학사론, 59)

3)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등장한다.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황종희나 현성파의 바탕이 되는 기 일원론과 유사하게 된다. 이규성은 현성파를 다루면서 현성파는 결국 기의 흐름이 변화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데 동학의 사상에서는 개벽이 닥쳐왔다는 종말론적인 확신이 출현했으니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그것은 일원론적 기 철학에 내적인 비밀의 힘이 등장한 것인가? 과연 지금껏 없었던 힘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학사상을 이렇게 기 철학에 한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동학사상은 이처럼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개념들이 출현한다. 동학사상은 기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어떤 절대적임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덧붙인다. 이 기는 一기이며, 至氣이고, 元기이다. 마찬가지로 도를 언표할 때도 단순히 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극대도다. 사실 동학사상에서는 기라는 개념 못지않게 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천령, 심령이나 性령, 靈符이다. 또는 천이라는 말을 사용하니 천명이며 한울이고 천도이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동학사상의 출발점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와의 만남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출현한다. 그것이 경신년 4월 5일 최제우의 체험이고 최시형 역시 유사한 체험을 겪었다.

흔히 기독교의 영향으로도 설명되는 이런 영성에 관련된 표현들은 앞에서 이해된 기 철학적인 체계와 어떤 관련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4)

이규성 자신은 확신을 가진 듯이 동학사상이 이학이며 심학이라 하지만, 동학사상에 관한 그의 설명 가운데 이미 이런 영적인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기는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한국현대철학사론, 59쪽)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다시 반복된다.

“동학의 영원성에는 미묘한 양의성 즉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성격이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10쪽)

이 구절이 나온 맥락은 먼저 성서적 시간관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나온다. 성서적 시간관은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초월적 영원성이 이 지상에 임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도 내재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초월성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동학사상에서는 인내천을 강조하면서 무극대도의 내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논의의 의도 자체는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지만, 필자는 오히려 위의 논의에서 이규성이 한편으로 내재성 못지않게 다른 한편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것에 주목된다. 그것은 이규성이 동학사상에 내재성 이상으로 초월성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무극대도는 내재적 원리로서 생명, 기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이규성이 동학사상에서 무극대도가 단순한 생명 또는 기 이상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개벽을 천명으로 규정하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규성은 최시형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이니…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었으니 우리의 도를 천하에 포덕하여 창생을 널리 구원하는 것이 한울의 명하신 바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17-418)

‘개벽의 운’이라는 표현은 기 철학에서 음양 운동의 양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기 일원론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다시 ‘한울의 명하신 바’로 규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 철학에서 말하는 천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울의 명은 초월적 계시에 가까운 표현이다.

5)

이런 맥락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쓴 책 중국현대철학사론 가운데 마지막 장 장세영에 관한 이규성의 서술이 관심을 끈다. 장세영을 다루면서 이규성은 그 마지막 부분에 장세영이 기대했던 희망의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1938-1947)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4)에 대한 장세영의 논평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장세영은 예술이 제시하는 환상을 설명하면서 이 환상은 비록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현실을 이끌어가는 힘을 주니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실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환상이 지닌 진실을 기독교적 종말이 주는 희망과 연결한다.

“희망은 현실, 현존하는 것, 분명하게 나타난 것을 초월한다. 비애에 빠지는 것도 유한성에 갇혀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희망 속에 살며 하루에는 하루의 희망이 있다. 인간은 무한성을 품은 유한자다. 장세영이 보는 최상의 희망은 인간과 만물이 일체인 경계다. 이 경계는 무한의 관점에서 유한을 보는 자유의 경계이다.”(중국현대철학사론, 1058)

이규성이 장세영의 피안이 주는 희망 개념에 주목하면서 그의 저서를 끝내고 심지어 그것으로 그의 삶 자체가 끝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규성의 종말론적 희망은 동학의 개벽 개념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동학의 개벽 역시 이런 종말론적 희망 개념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런 종말론적 희망의 바닥에는 신성 즉 천령이 존재한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본다면 기 철학에서처럼 내재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본체는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천령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규성이 천도로 규정한 생명 개념도 영성의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6)

필자가 보기에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무극대도를 기 이상으로 즉 천령으로 파악했음에도 전통적인 기 철학에 기대어 이를 내재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절대적인 존재는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인격적 존재는 세계를 창조하고 수시로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섭리를 펼치는 존재다. 그러나 동학사상에서 절대적 존재는 우주적 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물을 생성하여 만물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동학사상은 범신론적인 체계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이런 천령을 통해 심령의 윤리를 전개한다. 이 천령의 운동은 만유를 관통하고 있으니 이 천령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은 만유와 소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주적 심정에 근거한 자유의 윤리를 선택해야 할지 그 여부를 결단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20)

이 자유의 윤리는 부르주아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자유의 윤리는 “타인은 물론이고 만유와 연동하는 투명한 소통적 관계”(한국현대철학사론, 120쪽)를 의미한다. 심지어 이규성은 이런 자유의 윤리를 ‘영혼의 코뮤니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 생명 개념이 천, 영의 개념으로 확장되면서, 이 운동은 이제 단순한 자연의 운동이 아니라 신적 절대적 존재가 전개하는 운동으로 된다. 이 절대적 존재는 인간에게 계시를 통해 명령하니 그것이 곧 다가온 개벽이다.

신적 명령 즉 천명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통해 개벽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필연적 의무로 다가온다. 절대적 존재가 계시를 통해 직접 명령한다는 것이 동학의 실천성 저항성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기 일원론에 빗대어 이 개념을 우리는 ‘영 일원론’, 그 윤리는 이규성이 말한 대로 ‘영혼의 코뮤니즘’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규성은 이를 직감했지만, 더는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테이야르 샤르댕이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 개념을 확장하여 영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