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형이상학 산책66-생명의 탄생(1)[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Spread the love

헤겔 형이상학 산책66-본질로의 이행

1)

헤겔 논리학 1부 객관 논리학의 1권이 존재론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 부분을 ‘형이상학’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해 왔다. 이 1부 존재론의 마지막 3편이 척도이고, 그 3편의 마지막 3장은 제목이 ‘본질로의 생성’이다. 1권 2부가 본질론이니, 존재에서 본질로 이행을 다루는 부분이다.

‘본질’이라는 개념은 헤겔에서는 생명 개념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거슬러 올라가면 사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를 지속적인 것으로 규정했는데 이처럼 자기를 지속할 수 있는 것은 자연계에서는 생명체에 와서 시작된다.

자연계에서 그 이전 영역 즉 물리적 영역에서 다루는 물체나 화학적 영역에서 다루는 원소는 아직 지속성을 지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은 외적인 힘에 영향을 받아 항상 자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반면 생명체는 외적인 영향을 받더라도 그 영향을 자기에 동화시킴으로써 자기를 재생산할 수 있다. 이런 재생산성이 있으므로 지속할 수 있고 그렇기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를 실체[Substance]라고 했던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에서 제이 실체 즉 종이 제일 실체 즉 개체라고 하는 주장은 이런 생명체의 종이 개체를 통해 자기를 재생산하는 것을 통해서 모순 없이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헤겔에서도 마찬가지다. 헤겔은 실체라는 개념은 일반적 본질 예를 들어 사회와 같은 것에 한정해서 사용하고, 단순한 종적 개체로서 생명은 본질이라고 규정한다. 헤겔의 이런 본질 개념은 플라톤적인 이데아 개념과 구별되는 것이며 아리스토텔레스에서 실체와 마찬가지로 지속적인 것이니, 이는 생명체에서 발견되는 자기 재생산 과정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

이 본질이 다루어지는 영역이 바로 본질론이다. 본질론에서는 이 생명체의 자기 운동을 다루니, 그 운동의 방식이 앞으로 소개하겠지만, 곧 반성 논리이다. 지금까지 다루었던 질과 양, 그리고 척도의 영역에서 다루어졌던 것은 역학적 물체나 화학적인 원소에 해당하는 논리였다. 그것은 물체나 원소가 운동하는 방식인데, 질에서는 이행의 운동이, 양의 영역에서는 연속성의 운동이 지배했다. 마지막 척도에서 양자의 통일 즉 질과 양의 상호 전환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앞의 장 마지막 부분에서 헤겔은 ‘기체[Substrat]’라는 개념에 이르렀는데 이 기체는 화학의 영역에서 촉매를 고려해서 제기된 것으로 보인다. 지금부터 다루려 하는 3장 ‘본질로의 생성’은 화학 영역에서 제시된 촉매가 생명체의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을 다루는 것이다.

2)

논리학을 다루는데 생명체로의 발전을 다룬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여겨질지 모르겠다. 순수 형식적 논리라면, 논리의 전개와 자연의 발전은 무관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헤겔의 논리학은 그렇지 않다. 처음 시작할 때 언급했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무래도 잊어버렸을 것이다. 헤겔의 논리학은 논리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이런 논리는 삼단논법에서 보듯이 일반적 추상적인 것이 구체적인 개별적인 것으로 이행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적 이행은 헤겔에서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배후에는 자연의 발전이 전제되고 있다. 자연은 감각적 질로부터 점차 일반화되어 나간다. 이 과정은 정신현상학에서 전개되는 과정과 같은데, 다만 인식의 영역이 아니라 자연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역사적 전개이니, 자연사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 자연사는 단순히 자연 진화의 역사를 의미하기보다는 자연의 범주적 층위(물체, 원소, 생명 등)가 생성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 과정은 역학적 물체, 화학적 원소, 생물학적 생명체로 발전되는 과정이다.

헤겔 정신현상학에서 인식의 운동이 대상의 운동을 매개로 해서 출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논리학에서 논리적 이행은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을 매개로 해서 전진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자연의 범주적 생성과정이 경험적으로 일어난 결과 그 최종 결과를 통해서 이 생성과정이 회고적으로 재구성되는 것이 논리적 전개 과정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항상 논리 범주를 전개할 때 주석 등을 통해서 그 범주와 관련된 영역에 관한 자연사의 진화를 파악하는 과학의 성과를 소개하고 비판했다. 그는 그런 과학의 발전을 전제로 하고 이를 회고적으로 논리적 범주의 발전으로 재구성했다.

3)

그런데, 심지어 우리 시대에서도 자연 영역에서 생명의 발전이 충분히 설명되었다고 볼 수는 없다. 여전히 생명에 관한 창조론적인 견해나 신비한 자동발생적 사유가 만연하고 있다.

더군다나 논리학 재판이 발간된 1831년 다음 해에 사망한 헤겔에게는 화학의 영역조차도 아주 초보적인 원리의 발전만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의 당대 베르질리우스에 의해 요소의 합성이 이루어짐으로써 처음 유기화학이 시작되었지만, 헤겔은 이를 아직 이해하지 못했다. 더구나 그 시대 유기화학으로부터 단백질과 같은 생명체의 기본 구조의 발생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상태다.

헤겔은 화학적 결합이 전자 공유에 의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나 이와 유사한 철학적 개념인 상호 침투의 원리를 통해서 어느 정도 화학적 결합을 설명하는 데는 이르렀으나, 이런 화학적 결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전을 경험적으로 설명한다는 것은 헤겔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 때문에 우리가 이제 살펴보려 하는 ‘본질로의 생성’ 장은 극히 논리적이고 극히 단순화되어 있어 심지어 양적으로도 많지 않다. 과학적 경험과 관련된 것도 전혀 없다. 생명의 탄생을 다루는 이 부분이 지니는 중요성에 비추어 본다면 이런 사변적 설명으로는 헤겔이 생명의 탄생을 어떻게 다루는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헤겔이 생명의 발생을 신비한 창조적 작업에 돌리지 않고 자연적 과정을 통해 특히 바로 전 단계인 화학적 작용을 통해 끌어내려 시도한 것은 특히 눈에 뜨인다. 자연을 자연을 통해 설명하는 것이 유물론이라면, 논리학에서 헤겔은 이런 유물론적인 논리를 전개했다고 하겠다.

그런데 그는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생명의 발전을 다루었던 것인가? 그 생명의 탄생이 우리가 바로 앞에서 다루었던 화학적 촉매 개념과 어떤 연관성을 지니는 것일까? 다행이 우리로서는 화학적 작용으로부터 생명체의 발생에 이르는 과학적인 과정에 대해 충분하지는 못하지만, 단서 정도는 파악하고 있다. 유기화학이나 단백질의 형성, DNA의 구조 등이 그런 단서에 속한다.

하지만, 필자와 같이 자연과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에게 겨우 화학의 기본 원리나 따라갈 정도지, 이런 유기화학, 단백질, DNA 등의 개념은 헤겔의 책보다 더 어렵게 느껴진다. 간신히 꿰어맞추는 정도인데, 이런 한심한 지식을 가지고서도 어떻든 헤겔이 사변적으로 전개한 논리를 어렴풋하게나마 맞추어 보려는 것이 필자의 시도다.

4)

그럼, 이제 헤겔이 촉매를 통한 화학적 결합 작용에서 어떤 방식으로 마침내 생명 개념에 이르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그 출발점은 촉매라는 개념이 될 것이다. 이 촉매는 하나의 화합물을 다른 화합물로 이행하게 하는 것이다. 그 자체는 양자의 속성을 다 가지고 있으니 그런 점에서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 또는 ‘기체[Substrat]’라고 한다.

물론 이 촉매 역시 하나의 화합물인 한, 독자적인 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것의 질은 촉매가 수행하는 매개 작용과는 무관하다. 이 촉매를 구성하는 원소들의 양적 비율이 매개 작용에서 결정한다. 이 촉매 속에 들어 있는 원소의 양적 관계가 매개가 되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다른 질을 지닌 화합물로 변화된다.

하나의 화합물에서 다른 화합물로 촉매 없이 일어나는 이행은 외적 상태에 의해 일어나는 우연적인 작용이었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이행을 무한진행이라 하였다. 그러나 촉매가 등장하면서 두 화합물의 이행은 필연적으로 일어나게 되니, 촉매야말로 진무한에 해당한다.

이 과정을 화합물의 관점에서 본다면, 하나의 질을 지닌 화합물이 양적으로 해체되고 촉매 과정을 거쳐서 다시 양적으로 새롭게 구성되면 새로운 질을 지닌 화합물로 된다. 그러나 이 과정을 촉매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런 이행은 촉매가 동일하게 남아 있는 차이 없는 존재, 기체가 되고 화합물의 이행은 그것이 지닌 외적인 상태가 변화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은 촉매의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이며 다시 자기를 자기가 부정하고 다시 자기로 복귀하는 운동이다. 전체적으로 자기의 부정을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자기 매개의 과정이며 부정적인 통일이다.

“그러나 절대적 무차별성이라 불릴 수 있는 차이 없는 존재[Indifferenz]는 존재에 속하는 모든 규정성 즉 질적 규정성과 양적 규정성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그리고 척도에서 일어나는 양자의 직접적 통일을 부정하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과 매개하여 단순한 통일로 되는 것이다. 그 규정성은 차이 없는 존재에서는 다만 여전히 하나의 상태로서 즉 질적인 외면성으로서 존재하니 이것은 기체에 대해 차이 없는 것이다.”(논리학 재판, GW21, 373)

이런 자기 매개의 과정, 단순한 부정적 통일 등은 후일 헤겔이 개념을 설명할 때 그 본질적 특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아직 촉매는 그런 개념의 수준에까지 이르지는 못한다. 촉매는 화합물을 이행하게 하는데 여기서 마지막으로 촉매는 화합물로부터 빠져나온다. 그것은 이 촉매가 화합물의 이행에서 외면적으로만 관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촉매 즉 기체가 아직 잠재적으로만 자립적인 존재이지 진정한 생명체에 이르러서 나타나는 대자적인 자립적 존재가 되지는 못한다고 한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