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8)-왕선산의 한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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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생성 철학(8)-왕선산의 한계

1)

위에서 황종희가 그의 형이상학과 달리 전통 유가 질서를 옹호하는 이탈을 범했듯이 왕선산 자신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주성과 소통성을 위한 형이상학적 토대를 확립했으면서도 자신은 이를 통해 전통적인 유교적 질서를 다시 회복하고자 했다.

왕선산의 형이상학에서 유교적 차별 질서가 어떻게 도래하는가? 이규성 자신은 이에 관해 여러 가지 근거를 제시했다.

① 먼저 마음의 본성과 신체의 기질 사이의 차이에 주목해야 한다. 이 관계는 체용의 관계로 규정되었지만, 체용의 관계는 모호하다. 체용의 관계는 양자의 동시에 가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발언이지만, 동시에 그 가운데 더 중요한 가치는 어디까지나 체에 있게 된다. 또는 체는 순수하지만, 용은 불순하다는 정도의 차이를 인정하게 된다.

도심과 인심, 기질지성과 정욕의 체용적 관계를 사회적으로 적용해서 이를 남녀나 지배피지배층에 적용한다면 불평등한 사회질서가 나오게 된다는 점에서 체용 관계는 보다 명확하게 규정되어야 할 것이다.

② 또한, 의를 다루면서 이규성이 했던 발언도 주목된다. 여기서 의의 차별성은 각자에게 ‘각자에 마땅한 몫을 주어야 한다’는 객관적 정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왕선산은 의의 차별성에서 전통적인 유교적 차별적 질서를 정당화하려 했는데 이는 역사적인 차별을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한다. 이규성은 그 때문에 왕선산 자신은 자기의 인간 본성론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보지 못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런 객관적 정의관은 개인의 추상적 인격의 가치를 평등하게 긍정하는 주관적 정의관[추상적 인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과 대립적이다. 또한, 그의 인성론이 자유의 생명성에 기초한 개방적 인격을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음에도 그는 그것을 정치학적으로 발전시키지 못하였다. 이 점에서 왕선산의 정의관은 사회의 구조를 자연 법칙화하는 물신주의적 견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생성의 철학, 300)

③ 그러나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것이다. 왕선산의 한계를 파악하는 데서는 이규성은 왕선산이 음양 가운데 양이 음에 대해 우위를 가지고 지배적이라고 보았다고 했다. 이를 윤리적 차원에 적용한다면, 인간성에서도 음양의 관계에서 양이 음에 대해 지배적으로 되는데, 여기서 불평등이 유래할 수도 있다.

2)

왕선산이 이처럼 형이상학적으로 양이 음에 대해 우위에 이른다고 본 것은 음양의 규정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껏 오해를 피하려 왕선산의 음양 개념을 음양으로만 소개했으나 사실 왕선산에서 음양은 ‘유순함’과 ‘강건함’이라는 특정한 성질을 지닌 것이었다.

아마도 주역의 건괘와 곤괘에 대한 해석에서 이런 성질이 유래한 것으로 보이는데, 음양을 이렇게 규정한다는 것 자체에 이미 양의 지배라는 사고가 감추어져 있다.

“이렇게 순전한 양을 건으로 삼은 것은 음양이 합하여 운행하는 가운데서 그중 양이 왕성하고 광대하게 유행하는 것을 들어서 말한 것이다.“(왕선산, 주역내전, 생성의 철학, 140, 재인용)

음양 대립은 자체는 아무런 규정이 없다. 그것은 다만 서로 대립하는 힘을 의미할 뿐이다. 물론 기는 운동하는 가운데 기질을 지니니, 그 기질을 통해 대립하는 힘은 구체적으로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마치 자연력에서 인력이나 척력, 전기력에서 +전기와 -전기 같은 것이다.

그러나 유순함과 강건함은 엄밀하게 대립하는 힘은 아니다. 그것은 강약의 차이라는 정도의 차이이니 대립에 속하지 않아 음양을 규정하기에 충분하지 못하다. 그런데도 왕선산은 이를 음양의 성질로 규정하니, 강건함은 본래부터 유순함보다 더 강한 것이니 여기에 우위라는 사유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다.

이제 남녀가 음양으로 규정되면 남자는 여자에 대해 우위가 되고 지배층이 양이고 피지배층이 음이면 마찬가지로 여기서 지배층의 지배가 도출되니, 음양의 규정 자체에 이미 불평등의 구조를 감추고 있었다.

“왕선산은 군주정을 자연적 질서로 간주한다. 건의 강건성이 세계의 주인이다. 건은 군음의 종주이다. 그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각각의 사물은 자신의 본성적 한계를 가진다. 이러한 사물이 올바른 것이다. 건의 강건성이 구체적 사물이 능가할 수 없는 존재와 변화의 주인이다.”(생성의 철학, 172)

3)

황종희나 왕선산은 자신의 형이상학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이규성은 오히려 그들은 자기의 형이상학이 지닌 본래 가치를 망각했다고 한다. 이규성에 따르면 황종희의 기 일원론이나 왕선산의 음양의 상호작용은 평등하고 소통하는 연대를 이룰 수 있는 기초가 된다.

이상에서 우리는 왕선산의 형이상학과 인성론의 대강을 살펴보았다. 중요한 것은 여기서 소통성의 근거를 확보하는 것이다. 이미 설명하는 가운데 언급되었지만, 다시 한번 정리해 보자.

여기서 황종희에서 형이상학의 세계는 기 일원론의 홀리즘적 성격이 강하다. 황종희에서 만유는 본체를 지니지 않는 우주적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통로일 뿐이다. 여기서 우주적 기와 마음은 혼연일체를 이룸으로써 마음은 만물과 소통한다. 이런 세계에서 아주 강력한 소통성이 출현한다. 그러나 만물에 아직 고유한 본성이 결여하므로 아직 개별자의 고유한 자주성은 결여한다.

황종희 자신은 이런 세계를 통해 전통적 유가 질서를 회복하려 했지만, 이규성이 볼 때 이는 부당한 비약이었다. 이규성은 오히려 황종희의 형이상학은 이런 혼연일체를 통해 생겨나는 무차별적 평등의 세계이며 이는 태주학파나 이지를 통해 잘 드러난다고 한다.

황종희의 이런 철학을 이규성은 내재의 철학으로 규정하는데, 여기서 발견되는 혼연일체의 강력한 소통성은 90년초반까지 전개되었던 운동권의 연대의식이라는 시대정신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4)

그러나 왕선산에서 형이상학적 세계는 대립하는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기서 사물의 고유한 본체가 출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개별 사물은 음양 운동이 치우친 상태이며 다시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운동을 전개하려 한다. 이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별자로부터 힘을 빌어오니 양자는 서로 상보적이고 이것이 왕선산에서 소통성의 토대가 된다.

왕선산은 이를 통해 개체의 자주성을 인정한 가운데서 상반상성의 상호 보완적인 소통성을 추구했다. 전체적으로 보면 소통성에서는 혼연일체를 주장하는 황종희보다 뒤떨어지지만, 이런 소통성을 개체의 자주성을 확보한 위에서 추구한다는 점에서는 탁월하다.

왕선산의 이런 체계는 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한 이후 개인의 자발성이 강조되던 시기의 시대 정신을 잘 반영한다. 물론 이 시대에도 여전히 연대의 의식이 강했으니, 이규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이런 왕선산의 체계로부터 발견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5)

이전에 살펴보았듯이 황종희의 일원적 기의 세계는 문제점을 지닌다. 황종희에서 음과 양은 운동의 양태로서 교체될 뿐이니, 현성파에서 보듯이 양이 지배하는 세계는 개방성과 소통성의 토대가 되더라도 일시적일 뿐이며 그것은 천도의 교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었다.

반면 왕선산에서 소통의 가능성은 본체의 자기 지속성과 회복력을 인정하는 가운데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새로운 세계를 단지 기다리지 않고 중정으로 복귀하려는 강한 실천적 동기가 마련될 수 있다.

그러나 이규성은 개인의 자주성보다 소통성을 더 강조하는 편이다. 그러기에 왕선산의 체계에 만족하지 못한다. 그는 여전히 강력한 혼연일체의 무차별적 평등적 세계에 강력하게 이끌린다. 그러므로 그는 왕선산의 글 가운데서도 왕선산을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그러나 왕선산은 왕양명의 심즉리가 사실은 윤리적 가치가 심의 본체에서 자생하는 심의 내재적 본질이라는 것을 강조하려는 의도에서 주장된 것임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 또한, 태주 학파와 이지가 기존의 이는 군자 집단의 특권적 지배 원리이기 때문에 서민적이지 못하며 따라서 보편적일 수 없다고 하는 비판적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성찰적으로 대응하지 못하였다.”(생성의 철학, 328쪽)

결국, 이규성은 왕선산의 철학을 떠나 다시 황종희의 기 일원론으로 돌아간다. 황종희의 철학에 기초해 평등한 소통의 세계를 확보하면서 그것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실천적 동기, 혁명적 저항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는 없을까? 여기서 이규성은 동학 최시형의 세계로 마지막으로 관심을 이동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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