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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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생성 철학(결론)-동학사상과 영 일원론

1)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규성은 90년대 중반 황종희의 철학에 기울어졌다가, 다시 2001년에는 왕선산의 철학으로 기울어진다. 전자는 내재의 철학인데, 우주적 기와 마음의 합일에 의해 혼연일체가 되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다. 그러나 기의 변화를 다만 기다리는 내적 망명이나 현실 도피에 이른다.

반면 후자는 음기와 양 기의 상호작용에 의해 사물의 본체가 성립하며, 개별 사물들은 음양의 운동 상태로 중정을 향해 움직여 가는 가운데 상호 보완적으로 된다. 여기서는 본체를 통한 자주성이 확보된다. 그러나 운동 상태에서 본체로의 복귀라는 강력한 실천 동기가 출현하지만, 소통성은 상반상성[相反相成]의 수준으로 약화된다.

이규성은 자주성에도 관심을 지니지만, 그에게서 일차적인 것은 천인합일에 의해 만물과 소통하는 강력한 소통의 철학이니, 그는 다시 양명학의 일원론적 기 철학으로 돌아가면서도 강력한 실천성과 현실 저항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런 가운데 이규성이 주목한 것이 바로 동학 최시형의 철학이다.

이규성은 최시형에 관해 2011년 <최시형의 철학-표현과 개벽>이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그에 앞서서 이미 1999년 <해월 최시형과 동학사상>이라는 책을 발표했다. 필자는 뒤의 책을 구하지 못해 앞의 책만을 참고로 했는데, 필자 생각으로 뒤의 책을 다시 발표한 책이 아닐까 짐작한다. 동학사상에 관해서는 2012년 발간된 <한국현대철학사론 1장 표현과 개벽>에서도 다루어지는데, 이 책이 내용상 오히려 더 풍부하다. 왜냐하면, 여기서는 최재우에서 최시형을 거쳐 이돈화, 손병희 등 초기 동학 사상가를 포괄적으로 다루기 때문이다.

최시형의 철학을 다루는 책에서 부제에 ‘개벽’이라는 말이 들어있다는 것이 특별하게 주목된다. 그것은 이미 이규성이 최시형을 다룰 때 그의 철학이 지닌 현실 변혁의 저항성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 현실 저항성은 자주성과 소통성을 추구해온 이규성의 철학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려는 목표로 규정해도 무방할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면 이규성은 최시형의 철학을 양명학의 기 일원론의 철학적 체계에 따라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앞에서 말했듯이 황종희, 현성파로 이어지는 양명학의 흐름에서는 저항성은 나오지 않고 오히려 기의 변화를 기다리는 내적 망명, 현실 도피적 성향이 강하다. 그렇다면, 유사한 철학적 토대 위에서 최시형은 어떻게 현실 저항성을 획득했을까?

2)

동학사상을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의 개념을 통해 해석해 생명이 생성하는 철학으로 확립하려는 시도는 이미 이돈화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근 김지하도 생명의 철학을 전개하면서 마찬가지로 생명철학으로 해석했고, 이런 입장은 이규성 자신의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천도를 하나의 우주적 기로 보며 이 우주적 기가 펼쳐지면서 만물이 형성된다고 본다. 이 “기의 운행은 剛健하며 不息하며 玄妙無爲하니”(최시형, 천도교 경전, 241) “만상은 천도의 表顯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28). 만물에 하늘이 임존하니 “사사천이며 물물천이고” “천불이인이고 인불천인”(최시형, 천도교 경전, 329)이다. 그 운동은 한편으로 동질화하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이질화하는 운동이다. 전자가 음의 운동이라면 후자가 양의 운동일 것이다.

인간은 그런 우주적 기와의 합일을 통해서 만물과 소통하는 상태에 이르며(내유신령) 이를 통해 깨달은 우주적 기를 인간의 역사 속에서 실현하려 한다.(외유기화) 합일을 통해 자각된 우주적 기의 진정한 모습은 평등한 세상이며 서로 소통하는 조화나 동포의 세계이다.

“한울을 공경함으로써 타인과 내가 포태를 같이 하고 사물과 내가 포태를 같이하는 전체적 진리를 깨닫는다.” (최시형, 천도교 경전, 355)

그것은 투쟁을 치유하고 원한을 용해하는 것이다. 이 관계는 구체적으로 경천, 경인, 경사의 관계로 규정된다. 이제 이런 세계가 막 실현되려 하니, 곧 선천의 세계는 지나가고 새로운 개벽이 다가온다.

동학사상의 일반적 얼개를 위와 같이 정리해 보면, 이는 전형적으로 앞에서 황종희의 철학을 통해 밝혀진 일원적 기가 전개하는 운동과 다를 바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규성 자신도 동학사상은 “신유가의 이학적 사고를 계승한다” 또는 최시형은 “동학을 도학으로 도학을 심학으로 이해한다”(한국현대철학사론, 78)라고 말한다.

이규성은 그러면서도 동학사상에 나타나는 강력한 실천성과 저항성에 놀라며, 이것이 기 철학 자체에 본래 내재하는 것으로 다룬다. 그는 일원론적 기의 철학이 중국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내적인 비밀의 힘을 동학사상에서 발견한 것으로 생각한다. 이를 통해 이규성이 추구했던 소통의 철학은 완성에 이르렀다.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는 모든 곳에 빈틈없이 내재하는 충만의 원리이자 개체들을 관류하여 융통시키는 연속성과 소통성의 원리이다.”(한국현대철학사론, 59)

3)

그러나 여기서 의문이 등장한다.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면 그것은 황종희나 현성파의 바탕이 되는 기 일원론과 유사하게 된다. 이규성은 현성파를 다루면서 현성파는 결국 기의 흐름이 변화하는 것을 기다리는 것에 머물렀다고 했다. 그런데 동학의 사상에서는 개벽이 닥쳐왔다는 종말론적인 확신이 출현했으니 이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

그것은 일원론적 기 철학에 내적인 비밀의 힘이 등장한 것인가? 과연 지금껏 없었던 힘이 마침내 드러났다는 것인가? 아니면, 동학사상을 이렇게 기 철학에 한정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더구나 동학사상은 이처럼 기 일원론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여러 개념들이 출현한다. 동학사상은 기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항상 거기에 어떤 절대적임을 표현하는 형용사를 덧붙인다. 이 기는 一기이며, 至氣이고, 元기이다. 마찬가지로 도를 언표할 때도 단순히 도라고 하지 않는다. 그것은 무극대도다. 사실 동학사상에서는 기라는 개념 못지않게 靈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천령, 심령이나 性령, 靈符이다. 또는 천이라는 말을 사용하니 천명이며 한울이고 천도이다.

이런 표현들은 어떤 절대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동학사상의 출발점에는 이런 절대적 존재와의 만남을 보여주는 사건들이 출현한다. 그것이 경신년 4월 5일 최제우의 체험이고 최시형 역시 유사한 체험을 겪었다.

흔히 기독교의 영향으로도 설명되는 이런 영성에 관련된 표현들은 앞에서 이해된 기 철학적인 체계와 어떤 관련을 지닐 수 있는 것일까?

4)

이규성 자신은 확신을 가진 듯이 동학사상이 이학이며 심학이라 하지만, 동학사상에 관한 그의 설명 가운데 이미 이런 영적인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을 발견할 수 있다.

즉 이 기는 “초월적이며 내재적인 본체적 원리”(한국현대철학사론, 59쪽)라는 것이다. 이 표현은 다시 반복된다.

“동학의 영원성에는 미묘한 양의성 즉 초월적이면서 내재적인 성격이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10쪽)

이 구절이 나온 맥락은 먼저 성서적 시간관을 설명하는 가운데서 나온다. 성서적 시간관은 요한복음에서 보듯이 초월적 영원성이 이 지상에 임재하는 것이므로 여기서도 내재의 관계가 성립하는데, 기독교에서는 초월성을 더 강조하는 반면 동학사상에서는 인내천을 강조하면서 무극대도의 내재성에 더 비중을 두고 있다고 한다.

논의의 의도 자체는 동학사상을 기 일원론과 연결시키려는 시도지만, 필자는 오히려 위의 논의에서 이규성이 한편으로 내재성 못지않게 다른 한편 초월성을 인정한다는 것에 주목된다. 그것은 이규성이 동학사상에 내재성 이상으로 초월성의 흔적이 있다는 사실을 직감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내재적이면서 초월적인 무극대도는 내재적 원리로서 생명, 기를 뛰어넘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이규성이 동학사상에서 무극대도가 단순한 생명 또는 기 이상의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은 개벽을 천명으로 규정하는 데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규성은 최시형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선천은 물질개벽이요 후천은 인심개벽이니… 일대 개벽의 운이 회복되었으니 우리의 도를 천하에 포덕하여 창생을 널리 구원하는 것이 한울의 명하신 바이다.”(최시형, 천도교 경전, 417-418)

‘개벽의 운’이라는 표현은 기 철학에서 음양 운동의 양태가 변화한다는 것을 의미하니, 기 일원론적 관점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이를 다시 ‘한울의 명하신 바’로 규정한다는 것은 단순히 기 철학에서 말하는 천명 이상의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보인다. 한울의 명은 초월적 계시에 가까운 표현이다.

5)

이런 맥락에서 그가 최종적으로 쓴 책 중국현대철학사론 가운데 마지막 장 장세영에 관한 이규성의 서술이 관심을 끈다. 장세영을 다루면서 이규성은 그 마지막 부분에 장세영이 기대했던 희망의 개념에 주목한다. 그것은 블로흐의 <희망의 원리>(1938-1947)와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1964)에 대한 장세영의 논평에서 나오는 개념이다.

장세영은 예술이 제시하는 환상을 설명하면서 이 환상은 비록 비현실적인 것이지만, 현실을 이끌어가는 힘을 주니 오히려 현실보다 더 진실된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환상이 지닌 진실을 기독교적 종말이 주는 희망과 연결한다.

“희망은 현실, 현존하는 것, 분명하게 나타난 것을 초월한다. 비애에 빠지는 것도 유한성에 갇혀 초월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은 희망 속에 살며 하루에는 하루의 희망이 있다. 인간은 무한성을 품은 유한자다. 장세영이 보는 최상의 희망은 인간과 만물이 일체인 경계다. 이 경계는 무한의 관점에서 유한을 보는 자유의 경계이다.”(중국현대철학사론, 1058)

이규성이 장세영의 피안이 주는 희망 개념에 주목하면서 그의 저서를 끝내고 심지어 그것으로 그의 삶 자체가 끝난 것은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이규성의 종말론적 희망은 동학의 개벽 개념과 연결지어 생각하고 싶다. 그렇다면 동학의 개벽 역시 이런 종말론적 희망 개념에 해당하지 않을까?

이런 종말론적 희망의 바닥에는 신성 즉 천령이 존재한다. 동학사상은 그것이 표현되는 방식으로 본다면 기 철학에서처럼 내재적으로 전개된다. 하지만 그 궁극적인 본체는 단순한 생명이 아니라 천령이다.

그렇게 본다면 이규성이 천도로 규정한 생명 개념도 영성의 개념으로 확장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6)

필자가 보기에 이규성은 동학사상의 무극대도를 기 이상으로 즉 천령으로 파악했음에도 전통적인 기 철학에 기대어 이를 내재적으로 전개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 절대적인 존재는 기독교에서처럼 인격적 존재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런 인격적 존재는 세계를 창조하고 수시로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섭리를 펼치는 존재다. 그러나 동학사상에서 절대적 존재는 우주적 기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운동을 전개하면서 만물을 생성하여 만물 속에서 자기를 표현하는 존재다. 이런 점에서 동학사상은 범신론적인 체계로 규정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이런 천령을 통해 심령의 윤리를 전개한다. 이 천령의 운동은 만유를 관통하고 있으니 이 천령과의 합일을 통해 인간은 만유와 소통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주적 심정에 근거한 자유의 윤리를 선택해야 할지 그 여부를 결단해야 하는 중대한 기로에 있다.”(한국현대철학사론, 120)

이 자유의 윤리는 부르주아적 자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 자유의 윤리는 “타인은 물론이고 만유와 연동하는 투명한 소통적 관계”(한국현대철학사론, 120쪽)를 의미한다. 심지어 이규성은 이런 자유의 윤리를 ‘영혼의 코뮤니즘’이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이처럼 기, 생명 개념이 천, 영의 개념으로 확장되면서, 이 운동은 이제 단순한 자연의 운동이 아니라 신적 절대적 존재가 전개하는 운동으로 된다. 이 절대적 존재는 인간에게 계시를 통해 명령하니 그것이 곧 다가온 개벽이다.

신적 명령 즉 천명이 부여된다는 사실을 통해 개벽은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필연적 의무로 다가온다. 절대적 존재가 계시를 통해 직접 명령한다는 것이 동학의 실천성 저항성을 입증해주는 것이 아닐까?

기 일원론에 빗대어 이 개념을 우리는 ‘영 일원론’, 그 윤리는 이규성이 말한 대로 ‘영혼의 코뮤니즘’이라 이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이규성은 이를 직감했지만, 더는 전개하지 않은 것 같다.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이런 자신의 독자적인 철학 체계가 완성되었을 것이다. 아마 그것이 완성되었다면, 테이야르 샤르댕이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 개념을 확장하여 영의 운동을 전개했던 것과 유사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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