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성의 생성철학(6)-왕선산의 코스모고니[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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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성의 생성철학(6)-왕선산의 코스모고니

1)

형이상학이란 자연의 질서를 기초하는 원리를 밝히려는 시도다. 그러므로 형이상학의 핵심 원리는 최종적으로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는가를 통해 정당화된다. 따라서 자연이 음양의 동정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왕선산의 주장도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질서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형이상학이 설명하려는 질서는 과학이 다루는 구체적 사물의 질서가 아니라 일반적 질서다. 그 가운데 핵심은 자연 속에서 존재하는 사물을 범주 또는 층위에 따라 구별하고 그 생성을 형이상학적 원리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자연에는 물체와 생물 그리고 인간이 있는데 그 생성을 어떻게 설명하는가가 형이상학의 성패가 달린 문제다.

과학에 관한 왕선산의 입장에 관해 이규성은 왕선산 대신 방이지의 ‘질측지학’을 소개한다. 이규성은 “방이지의 과학과 철학에 대한 관점은 왕선산의 관점과 같다”(129)고 단정한다. 방이지의 말은 다음과 같이 소개된다.

“과학은 ‘일체를 모두 궁극적 원리인 것으로 집착하여 사물의 개별적 영역을 멋대로 덭어 가려 구체적 원리들에 대해 정밀하지 못하게 되는 것’을 경계한다. (생성의 철학, 127쪽)

“물에는 그것의 원인이 있다…그 불변적 측면과 변화의 측면을 추론한다. 이것을 질측이라 한다. 질측은 곧 통기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생성의 철학, 128)

질측은 과학적 사실에 대한 탐구다. 통기는 그것의 원리에 대한 탐구이니 곧 철학이다. 이런 관점은 우주와 합일에 머물렀던 황종희와는 구별된다. 왕선산은 철학이 과학적 사실에 대한 경험적 연구를 토대로 그것을 넘어나가야 한다고 보았다.

2)

자연은 누구나 알다시피, 물체의 세계와 생물의 세계, 그리고 인간의 세계로 이루어진다. 그 차이점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런 것은 경험적으로 발견되는 사실에 속할 것이다. 물체와 달리 생물은 재생의 능력을 지니며 인간은 인식과 자유의지라는 정신의 능력을 가진다.

왕선산이 제시한 형이상학 원리 즉 음양이라는 두 가지 기체의 동정이 이런 자연이 물체에서 인간으로까지 발전하는 생성의 세계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일단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사물이 물체냐 생물이냐, 인간이냐는 그것을 이루는 기의 질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것으로 규정된다.

“태허 가운데 응취한 것은[무기적 물질] 무겁고 혼탁하여 다른 사물이 침투할 수가 없다.”

“식물은 땅에 뿌리박고 있어서 오행이 결합한 땅의 유형적 기를 받아서 성장한다. … 다만 형질만 있고 성은 없다.”

“동물은 땅 위로 나와서 오행의 아직 형체를 이루지 않은 기를 받아 태어난다. 형체가 신으로써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각기 자신의 성을 머금고 있다.”(생성의 철학, 267-268 요약)

“인간만이 순수한 형태의 융통성을 발휘하는 청통의 기 즉 신기 혹은 신리를 그대로 자신의 내적 본성으로 가지고 있다. ..그의 본체가 영민하면 할수록 그 작용도 더욱 광대하다.”

이상 인용문을 볼 때, 기질에 관한 왕선산의 특별한 설명은 없지만, 자연을 설명하는 가운데 그는 청탁과 경중, 대소* 등과 같은 기질의 성질에 대한 설명이 발견된다. 그 가운데 물체는 대체로 탁하고 무거우며 큰 기질의 운동이며 반면 인간은 맑고, 가볍고, 작은 기질의 운동이어서 전자보다 후자는 훨씬 유동적이어서 영묘하다.

주*) 대소에 관한 직접적 표현은 발견할 수 없으나, 기의 취산이라는 말은 존재한다. 그리스 원자론자에서 원자의 취산은 곧 크기를 결정하는 것처럼 왕선산에서도 취산이라는 표현은 크기의 대소와 관계되는 것으로 보인다.

3)

그런데 기는 하나이다. 그 기는 사실 음양 두 기의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상호작용한다는 면에서 하나라고 한다. 이 하나의 기가 어떻게 해서 위와 같이 자연의 범주나 층위를 구분하는 기질로 나누어지는가? 이에 관한 설명 가운데 특히 돋보이는 구절은 다음과 같다.

“현상 세계도 ‘수많은’ ‘다양한’ 이라는 규정을 갖는다. 이 다수성의 출현 과정은 음양의 상징인 양효와 음효가 6열로 배열되어 64괘를 형성하며 이의 순열 조합에 의해 수가 증가되는 방식으로 확산된다.“(생성의 철학, 149)

“단순한 본체는 순열조합적 과정으로 현상화한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하게 증가한다고 할지라도 기본적으로 음양의 재출현에 불과하다.”(150)

이상의 설명은 왕선산의 주역에 대한 설명을 이규성이 정리한 주장이다. 이규성의 설명을 검토해 보면, 음양의 운동이 중첩되면서 하나의 음양 위에 또 다른 음양이, 그리고 그 위에 또 음양이 운동한다.

그 중첩되는 정도만큼 질적 차이가 나타난다. 이런 질적 차이가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처음에 탁하고 무겁고 큰 기질은 점차 맑고 가볍고 작게 되며 점차 유동화되고 영묘해진다. 전자가 물질적 기질이라면 후자는 심적 기질이다.

이런 설명이 정확하게 왕선산의 자연 설명에서 나오는지 필자로서는 확인할 수 없으나*, 적어도 이규성의 설명을 따르자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설명이라 하겠다. 사실 이런 설명은 주렴계가 태극도설에서 음양으로 오행을 설명하는 것과 기본적으로 같은 발상에 속한다.

음양으로 오행이 설명된다면, 이때 오행은 4괘로 설명된다. 즉 음양이 중첩되면서 4괘가 생기고 그 각각에 오행이 대입되는데(예를 들어 물은 소음이며, 불은 태양이다. 나무는 소양이라면 쇠는 태음이 된다), 이런 발상을 확장하면 운동 상태에 있는 만물은 각 층위에서 음과 양의 중첩적으로 조합하여 이루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것이 이규성이 설명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주*) 과연 왕선산이 그렇게 보았는지는 불분명하지만, 이규성이 이해하는 한 왕선산은 그렇다. 왕선산에 관한 다른 책 예를 들어 안재구의 책에서는 이런 설명이 없다. 이규성에게서만 이런 설명이 나오는 것은 이규성이 형이상학에서 이런 범주의 생성을 설명하는 문제의 중요성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설명은 일단 개별 사물의 상이 지닌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물이 이처럼 여러 층위의 음양이 조합하여 이루어지는 것 즉 상이라면, 자연의 같은 범주에 속하는 물체들이 지닌 질적 차이들도 이런 방식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물은 최종 층위에서 음양을 달리하더라도 나머지 층위에서는 음양을 같이 할 수 있으니, 이런 차이를 통해 개별 사물이 범주나 층위로 구별될 수 있고 이를 통해 이런 범주나 층위에서 작용하는 음양의 기질적 차이를 규정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4)

이런 발상에서 이규성의 철학적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등장한다. 앞에서도 설명했듯이 개별 사물은 마치 남녀와 같이 자기의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치우친 상태로 규정된다. 그러므로 개별 사물은 중정으로 복귀하려 하는 운동을 전개하려 하며, 그 때문에 자기와 대립하는 것에서 힘을 빌려오는 상보적 관계를 맺는다. 이를 상반상성의 관계로 규정하였다.

이제 하나의 사물은 여러 층위를 지니고 각 층위에서 음양이 운동하는 것이라 한다면, 사물들의 상반상성의 관계는 층위를 넘어서까지 전개될 수 있을 것이다. 즉 두 층위가 중첩되었다고 할 때, 아래층과 위층의 음양이 서로 교차해서 관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위의 층에서 음은 아래층에서 양을 끌어당기고 아래층에서 양은 위의 층의 음을 끌어당기는 관계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여러 층위의 복합체인 사물들 사이에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관계가 성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점은 예를 들어 오행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설명될 수 있다. 물은 소음이니(위층의 음), 소양(아래층의 양)인 나무를 생성하며, 불은 태양(두 층 모두 양)이니 태음(두 층 모두 음)인 금을 생성한다. 소위 오행의 상생상극의 관계가 이런 층위에서 교차하는 음양의 운동으로 설명된다는 것이다.

주역에서 이 층위 간 교차 관계를 왕선산이 설명하고 있는지, 설명한다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명되는지는 필자가 알지 못하지만, 그런 이론적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며 적어도 이규성의 ‘순열조합’이라는 말을 통해 그런 이론적 가설은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이제 사물은 여러 층위로 이루어져 있고 층위 간에 음양 운동이 서로 교차할 수 있다면, 앞에서 언급했던 사물의 상반상성의 관계를 만물 간에 층위를 넘어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 층위에서 상반상성의 예 즉 남녀의 관계가 이규성이 추구했던 사물 간의 소통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라면, 만물의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은 만물 사이에 상반상성의 관계 즉 상보적인 소통 관계를 설정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런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서 이규성은 소통성의 형이상학적 토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앞에서 황종희의 경우, 사물은 본체를 결여한 채 홀리즘적 방식으로 소통했다. 그런데 왕선산은 위에서 보듯이 사물의 고유한 본체를 통해 자주성을 인정한 채 동시에 상반상성의 관계를 통해 소통의 가능성을 확보한다.

“지금 저 현상은 하늘의 색과 땅의 색, 순수한 것과 잡된 것으로 인해 문채를 얻고, 장단과 종횡으로 인해 양적 한도를 얻는다. 견고하거나 약하고 움직이거나 멈추어서 그로 인해 형질을 얻고 대소와 동이로 인해 고유한 경향성을 얻는다. 일월성신으로 인해 광명을 얻고 진흙이나 흑색 토양으로 인해 산물을 얻는다. 초목과 꽃과 열매로 인해 재물을 얻고 바람이 불고 비가 내리며 산과 평원으로 인해 절기를 얻는다. 귀는 구멍을 열어 들을 수 있으며 눈은 눈동자를 가지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그것들은 하나로 통일되게 된다. 현상은 다양성으로만 언제나 있을 수 없으므로 역의 논리로 통일된다.”(232 재인용)

4)

사물의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의 문제는 추상적인 차원이다. 이것은 추상적 차원에서 사물의 본성을 다룬다. 그런데 자연은 단순한 존재가 아니라 복합체다. 인간을 예로 들자면 인간은 정신과 신체의 복합체다. 그러므로 복합적인 사물은 본성이 출현하는 기질 말고 다른 물질의 기질도 동시에 가지면서 여기서 사물의 도와 기[器]의 관계가 출현하게 된다.

하나의 사물은 음양의 상호작용을 통해 본성을 지닌다. 이 본성은 운동 속에서 이쪽저쪽으로 기울어지지만, 다시 자신의 본성을 회복하니, 이 본성은 지속성을 지닌다. 그런데 하나의 사물은 그 본성의 바탕이 되는 기질 즉 형질이 있다. 이것이 곧 기[器]이다. 사물의 본성은 그 바탕이 되는 형질의 음양 운동 위에 또는 그 속에서 출현하니, 여기서 출현하는 본성을 도라 한다.

여기서 도와 기[器]의 관계가 문제 된다. 앞에서 이규성은 기질의 관계를 기의 중층적 발전 개념으로 설명했다. 여기서 다시 도기의 관계는 기질 층간 관계가 더 구체적으로 규정된다. 그 관계는 우선 수용성 즉 담지자 개념이다.

“기가 토대가 되고 도는 그것에 의존해서만 존재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기는 추상적 원리가 의존하는 그릇이다. 그것은 기와 그것의 산물인 만물을 질서의 담지자로서 이해하게 하는 개념이다.”(생성의 철학, 256)

기[器]는 본성을 받아들이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런 한계 때문에 본성이 다양하게 발생하며 여기서 하나의 사물에서 개별적인 다양성이 나타나게 된다. 즉 이 즉 도는 하나지만, 기[器]는 다양하다. 하나의 도는 순수하지만, 기 속에 받아들여진 도는 불순하다.

또는 이규성은 왕선산에서 도와 기[器]의 관계를 다시 체용의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을 어떻게 설명하든, 여기서 두 기질의 관계, 본성과 기의 관계는 모호하지만, 대체로 두 요소의 동시적 필요성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 어느 것도 결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앞에서 물체를 이루는 층위 간에 음양의 교차 운동이 가능하다면, 도와 기의 관계는 결국 하나의 사물 속에 복합되어 있는 두 사물의 관계로 볼 수 있으니, 여기서 도와 기의 관계를 앞에서 말한 층간 음양의 교차 운동으로 설명할 수도 있지 않을까?

5)

황종희에서 개체는 본체가 없으며 만유는 기의 운동이 지나가는 매듭에 불과하다. 반면 왕선산에서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각 층위에서 음양이 상호작용한다. 이를 통해 만물은 고유한 본성을 지니는 동시에 그 음양의 운동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

그렇다면, 아직 중층적 운동을 전개하기 전 원초적인 기 즉 그 기의 가장 근본적인 본체는 무엇인가?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를 범신론에 빗대어 범심론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심이란 곧 기체의 본질을 의미한다.

원초적인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기는 중층적으로 발전하면서 마침내 심적인 기질에 이른다. 그 기질은 유동적이며 영묘한데, 이런 최종 발전된 기질이 곧 원초적인 기질이 될 수 있을까?

“실재는 유적 본성으로 구획되어 있지만, 그 경계선을 잘라서 볼 수 없는 것은 우주의 연속적 본성에 기인한다. 실재의 궁극적 구조는 고체성의 극한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유동적 연속성에서 얻어진다.”(생성의 철학, 260)

“ 우주의 본질이 심리적 원리라는 것은 우리의 내면에 대한 성찰에서 경험된 것을 본질로서 유추해낸 것이다. … 세계의 본질은 연속적 흐름으로서 하나의 생명 원리이다.”(생성의 철학, 258쪽)

이와 같이 사물과 인간을 이루는 우주적 기는 본질적으로 마음이다. 마음이 우주적 기의 본체라는 주장은 근거가 부족하지만*, 우리로서는 이규성의 주장대로 일단 우주적 기의 본체가 마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나가자.

주*) 여기서 이규성은 마치 아리스토텔레스식의 목적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닐까? 과연 이런 목적론적 우주론이 왕선산에게서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목적론적 체계를 인정하더라도 원초적 기가 심적인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확립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유물론자처럼 원초적 기의 본질은 물질적이지만, 이로부터 정신적인 기질이 발생한다고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더구나 이규성은 왕선산의 체계가 목적론은 아니라고 강하게 반발한다. 왜냐하면, 왕선산의 형이상학적 체계는 기질의 중첩으로 이루어진 구조적 세계일 뿐이며, 여기서 개별 사물은 곧바로 우주적 기와 통하기 때문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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