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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안내]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 서울도서관과 협업 :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 [한철연 소식]

“2026년 <한철연 아카데미>는 서울도서관과 협업하여 서울도서관의 연속 강좌 “작가힙톡(Hip-Talk)”으로 진행합니다. 9월 작가힙톡(Hip-Talk) 3주(매주 금요일 / 4일, 11일, 18일) 일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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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월 4일 – 윤태양 작가 : 온고지신도 텍스트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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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윤태양(건국대학교 철학과 강사)
>도서 : 『 다시 , 동학 』
>내용 : ‘온고지신’의 자세로 미래를 구상하는 주체적인 고전 읽기 방법을 제안
>일시 : 9.4.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3. (목) 선착순 모집
● 9월 11일 – 김정철 작가 : 알고리즘의 파도 속, 느리게 읽기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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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김정철(충북대 인문학연구소 전임연구원)
>도서 : 『기울어진 문해력』
>내용 : 알고리즘 세계에서 느리게 읽기의 필요성과 가치
>일시 : 9.11.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0. (목) 선착순 모집
● 9월 18일 – 조배준 작가 : 포스트 휴먼의 질문하는 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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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사 : 조배준(숭실대 베어드학부대학 연구교수)
>도서 : 『읽지 않는 사람들』
>내용 : AI 시대, 독서와 질문의 필요성
>일시 : 9.18. (금) 19:00~20:30
>장소: 서울도서관 일반자료실 내 생각마루
>신청기간 : 8.25. (화) ~ 9.17. (목) 선착순 모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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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성원 바랍니다~^^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②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두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2주차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철학의 기술 / 2026724일 금요일 19:00

 

두 번째 밤의 주제는 ‘관계 속의 나’였습니다. 성균관대 현남숙 교수님이 ‘공감, 소통, 인간관계’를, 한국방송통신대 진보성 교수님이 ‘인정, 비교, 신뢰, 공정함’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지난 시간에 ‘개인으로서의 나’를 들여다보았다면, 이번 시간은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 즉 나를 둘러싼 관계를 들여다보는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이번에도 진행을 맡아 무대에 섰습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 서로 다른 전공의 두 분이 같은 주제 앞에 나란히 섰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현남숙 교수님이었습니다. 대화는 다이얼로그, 혼자 하는 독백이 아니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르틴 부버의 ‘나-너 대화’와 ‘나-그것 대화’를 빌려, 상대를 인격으로 만나는 대화와 도구로 대하는 대화가 얼마나 다른지 짚었습니다. 힘들 때만 연락해 몇 시간을 쏟아내고는 평온할 때는 소식 없는 지인 이야기가 인상 깊었습니다. 셰리 터클의 『외로워지는 사람들』을 빌려 온라인 시대의 소통이 편리해진 만큼 헐거워졌다고 짚었고, 막스 피카르트의 『침묵의 세계』를 인용하며 갈등은 침묵과 시간이 메워준다고 조언했습니다.

관계 이야기에서는 영화 <사랑한다면 이들처럼> 속, 사랑이 식을까 두려워 스스로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이야기로 시작해 바우만의 『리퀴드 러브』로 나아갔습니다. 단단했던 관계들이 액체처럼 흘러내리는 시대, 우리는 책임을 지는 ‘릴레이션십’보다 책임 없는 ‘네트워크’에 익숙해졌다고 했습니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을 빌려, 개성을 지키며 하나 되는 것, 보호와 책임, 존중과 지식이 관계의 조건이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두 번째 강연자는 진보성 교수님이었습니다.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서양 철학이 붙잡아 온 질문이지만, 『논어』에는 애초에 그런 존재론이 없다고 했습니다. 대신 ‘사람(人)’ 옆에 ‘두 이(二)’가 붙은 ‘인(仁)’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그 자체를 중심에 둔다는 것입니다. 복숭아 씨앗 속 씨알처럼 누구에게나 있지만, 관계 속에서만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인정에 대해서는 『논어』의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보지 못함을 걱정하라.”는 구절과 악셀 호네트의 ‘인정 투쟁’ 개념이 이어졌습니다. 비교에 대해서는 “군자는 두루 사귀되 비교하지 않는다.”는 『논어』 구절과 『장자』의 이야기를 빌려, ‘대동’과 ‘소동’을 구분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 “날이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듦을 안다.”는 문장으로 진짜 친구는 화려함이 사라진 뒤에야 보인다고 전하며, 거리를 두고 기다리라는 말로 마쳤습니다.

짧지만 강렬했던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가 이어졌습니다. 맨 앞에 나란히 앉은 두 분의 청중이 실은 오늘 처음 소개팅으로 만나 이 자리에 함께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며 강의실은 웃음과 탄성으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오랜 친구인데도 나이가 들며 달라진 처지에서 오는 씁쓸함을 묻는 질문, 관계를 맺을 때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기준을 묻는 질문도 이어졌습니다. 진보성 교수님은 타인을 자신의 삶의 패턴에 억지로 맞추려 하지 않고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것이라고 답했고, 현남숙 교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 개념을 빌려, 굽신거림과 오만 그 사이 어딘가에서 매 순간 적절한 판단을 찾아가는 것이 관계의 기술이라고 답했습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탁 트인 서울광장에 다시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는 여전히 게으름 없이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밤, 나를 들여다보고 관계를 살펴보는 일까지, 두 번의 저녁이 참석해 주신 모든 분들께 의미 있는 사색의 시간이었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소개팅 당일에 강연장까지 와 주셨던 두 분, 첫 만남에 나누었던 수많은 철학적 질문들을 함께 했으니, 앞으로도 오래오래 예쁜 사랑 이어가시길 진심으로 바라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프로그램이 종료되었습니다. 강연을 수락해주신 박은미, 현남숙, 진보성 선생님과 강연 협의부터 실무까지 함께 애써주신 서울도서관 관계자분들, 영상 촬영을 맡아주신 최기봉 피디님까지 깊이 감사드립니다. 더 유익하고 의미 있는 프로그램으로 다시 뵙기를 바라겠습니다.

끝.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한철연 강좌]

서울도서관 철학 토크콘서트, 두 밤의 기록,

삶을 돌아보는 네 가지 철학적 시선” ①

 

글 : 오상현 (철학박사,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

 

이 프로그램은 지난 7월, 서울도서관과 한국철학사상연구회가 함께 기획한 ‘작가힙톡’ 토크콘서트입니다. ‘개인으로서의 나’에서 ‘사회적 존재로서의 나’까지, 네 명의 철학자가 두 번의 저녁에 걸쳐 삶에 관한 질문을 나누었습니다. 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 사업1부장으로서 이 프로그램을 기획했으며, 두 회차 모두 진행과 토크콘서트 사회를 맡았습니다. 아래는 그 첫 번째 밤을 돌아보며 남긴 기록입니다.

 

1주차 진짜 나를 들여다보는 철학적 시선 / 2026710일 금요일 19:00

 

진짜 나를 찾는 여름 밤. 첫 번째 밤의 주제는 ‘진짜 나’였습니다.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 ‘진짜 나, 욕망, 죽음, 행복’을, 저는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을 주제로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금요일 저녁 일곱 시, 무더운 여름 공기가 가시지 않은 채로 사람들이 서울도서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습니다. 마흔 명 정원을 훌쩍 넘어서 최종 신청 인원은 예순여덟 명이었습니다. ‘불타는 금요일’, 이른바 ‘불금’을 포기하고, 저마다의 약속을 미뤄두고 온 얼굴들을 보면서, 무엇이 이들을 여기까지 오게 했을까 생각했습니다.

프로그램의 기획 취지를 설명하면서 저는 ‘사람’과 ‘인간’이라는 두 글자를 나란히 세웠습니다. ‘사람(人)’ 옆에 ‘사이 간(間)’이 만나야 비로소 ‘인간(人間)’이 된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옆자리에 앉은 낯선 이와 눈을 맞추고 인사를 나누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좌우에 계신 이분들이 바로 여러분을 사람에서 인간으로 거듭나게 만들어주시는 소중한 조건입니다.” 『논어』의 한 구절도 함께 건넸습니다. 세 사람이 길을 가면 그중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그런데 그 세 번째 사람은 다름 아닌 ‘나 자신’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첫 시간은 사람, 즉 ‘개인으로서의 나’를 살펴보겠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첫 번째 강연자는 철학커뮤니케이터 박은미 선생님이었습니다. 먼저‘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는 묵직한 질문을 던졌습니다. 반면에 타인의 시선에 자신을 내맡기는 삶을 ‘가짜 나’라고 했습니다. 늘 누군가와 비교하고, 인정받아야 안심이 되고, 그러다 문득 공허해지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진짜 나’는 비교할 잣대가 없다고 했습니다. 나는 유일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꼭 한 번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 자신이다.”라는 말씀이 참석자들의 마음에 내려앉았습니다. 세네카의 말도 빌려 왔습니다. 인생은 진정으로 시작할 준비가 되면 거의 끝나 있다고 말입니다. 죽음을 자꾸 회피하려 들기 때문에 우리 삶이 새로워지지 못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습니다.

두 번째는 제가 나섰습니다. 외로움, 불안, 능력주의, 대체불가능성. 네 개의 단어를 들고 무대에 섰습니다. “외로운 것보다 더 외로운 것은 외로움을 들키는 것”이라던 어느 카피라이터의 문장에서 시작해, “외로우니까 사람이다”라는 정호승의 시구를 지나, 마침내 『논어』의 한 구절에 닿았습니다. “덕은 외롭지 않다. 반드시 이웃이 있다.” 외로움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적극적으로 선택하고 넘어서야 비로소 독립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얹었습니다. 다음 키워드는 불안이었습니다. 공포는 그 대상이 분명하지만, 불안은 그 대상 없이 오직 가능성만으로도 벗어나기 어렵습니다.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정해진 목적 없이 던져진 우리 인간에게 불안은 숙명과도 같다고 전했습니다. 그러니 지금 혹 불안을 느낀다면, 그것은 병이 아니라 오히려 정상인 셈이라고 전달했습니다. 위로가 되었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입니다.

짧은 두 강연이 끝나고 토크콘서트 시간이 이어졌습니다. 한 참여자가 조용히 손을 들어 자기의 이야기를 풀어냈습니다. 하고 싶은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상황과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교차하면서 매일이 불안하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저는 가수 보아의 노래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데뷔 초, 유행했던 곡의 제목은 ‘No.1’이었지만, 십 년이 지나 그녀가 부른 노래는 ‘Only One’이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일등이 아니어도 좋다고, 유일한 존재가 되는 길도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습니다. 사람들은 해본 일보다 해보지 않은 일을 더 오래 후회한다고, 망설여진다면 일단 저질러 보라고 말입니다.

어느덧 마칠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정답을 얻으러 온 밤이 아니었습니다. 두 철학자의 이야기 역시 그들의 시선이기에, 각자의 시선이 무엇인지 고민해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고 전했습니다. 강의실을 나서는 청중들의 얼굴을 한 분 한 분 확인할 수는 없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만은 한결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프로그램을 모두 마치고 나와 탁 트인 서울광장에 섰습니다. 저 멀리 남산타워가 무심하게 빛을 내고 있었습니다. 불금을 포기하고, 철학으로 자기 삶을 돌아보고자 와주셨던 모든 분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끝.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2021) 서평[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결의 철학자 윤구병 선생의 <꿈꾸는 형이상학> 서평

1)

이 글을 쓰게 된 동기는 윤구병 선생님(이하 ‘선생님’으로 지칭)의 철학을 소개한 한재경 선생의 책 <윤구병 철학의 이해>(미발간 원고)을 읽고 다시 한번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흥미가 이끌렸기 때문이다.

필자는 몇 년 전인가 선생님을 모시고 선생님의 철학에 관한 심포지엄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그때 필자는 선생님이 2013년 발간한 책 <철학 다시 쓴다>를 중점적으로 살펴보고, 이 책을 중심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 관해 논평했다.

이번 읽은 한재경 선생의 책을 통해 그동안 선생님의 철학적 사유에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는 것을 깨닫고 급히 새로 발간한 윤구병 선생의 책을 두 권이나 사서 읽었다. 하나는 <꿈꾸는 형이상학>(보리, 2021)이고 다른 하나는 <철학자가 본 우주 역사>(보리, 2024)이다. 그 가운데 전자가 눈에 뜨였다. 이 책에서는 확실히 그 이전에 나타나지 않았던 논의, 대표적으로 ‘거품 우주론’이 새로이 등장해서 진한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2)

먼저 한재경 선생에게 감사하다. 한 선생은 선생님의 철학을 ‘산뜻하다’(또는 스마트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잘 정리했다. 먼저 선생님의 핵심적 저서 세 권(위의 두 권을 제외한 나머지 책은 ‘있음과 없음’이다)을 ‘단계’로 요약하고, 여기서 문제가 되는 논점을 ‘고리’로 정리했고, 마지막에는 ‘묻고 답하기’를 통해 독자가 드는 의문점을 풀어주었다.

이런 감각은 선생님이 젊었을 때 ‘뿌리 깊은 나무’라는 잡지를 편집할 때 지녔던, 또 출판사 보리를 통해 새로운 감각으로 그림책을 만들어낼 때 보여주었던 감각인데, 한 선생이 그런 감각을 빼닮았다는 느낌이 들어, ‘우연이 아니네’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필자가 잘 정리했다는 것은 선생님의 생각에 물음을 던질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한 선생의 정리 덕분에 선생님의 생각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필자가 한 선생의 글을 평가하려면, 선생님의 철학을 알고 그것과 비교해야 하는데, 아직 그럴 처지에 이르지 못해 그런 평가는 하지 않으려 한다. 다만 서문에 선생님 자신이 한 선생의 책이 자신의 철학을 온전하게 담아냈다고 하니, 그에 기초해서 차라리 선생님의 철학에 직접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철학 다시 하다’라는 저서도 못지않게 선생님의 철학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빠뜨린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의 형이상학에는 그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동양철학의 전통이 그 가운데서도 특히 기 철학의 전통이 새롭게 등장하는데, 이 전통에 관해서 충분히 부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실 필자가 보기에 선생님은 그사이에 그 이전 플라톤이나 신플라톤주의 전통에서 동앙 철학의 기 철학 전통으로 대대적인 회전 기동을 했다. 그런 가운데, 아직 그런 회전 기동이 완성된 것이 아닌지, 그 이전 플라톤적 이원론적 체계 즉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양극 체제와 기 철학에서 기 일원론적 사유가 혼재하면서 그사이에 균열과 충돌이 벌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을 쓰는 동기가 이런 갈등에 대한 질문을 던지기 위한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

3)

선생님의 철학의 출발점은 여러 책에서 강조되는 것과 같이 ‘없는 것’이라는 개념을 ‘빠진 것’으로 이해하자는 주장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한 이래로 ‘없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지만, ‘있는 것’에 대립하는 ‘없는 것’ 없이는 형이상학이 출발하지 않으니, ‘없는 것’이 부딪히는 난점, 모순을 피하려 ‘빠진 것’이라는 개념으로 대체하기를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실상 여러 책에서 선생님이 사용하는 언어를 검토해 보면, 굳이 이런 제안이 의미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대부분 글에서 선생님은 ‘빠진 것’이라는 말 대신 ‘없는 것’이라는 말을 그대로 쓰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마도 ‘빠진 것’이나 ‘없는 것’이나 큰 차이가 없는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선생님이 그렇게 제안한 것은 ‘없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것인데, ‘빠진 것’은 빠진 것 외에 나머지는 있으니 아무것도 없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지만, ‘빠진 것’은 받아들일 여지가 있다는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빠진 것’도 모든 것이 빠진 것으로 되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서 ‘없는 것’과 같은 것이 되니, 큰 차이가 없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필자는 파르메니데스처럼 과연 없는 것은 사유조차 할 수 없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없는 것’은 있는 것은 아니더라도 사유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없는 것’ 없이는 사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구나 빨간색을 보고 거기에 없는 것인데도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사유하는 것이 아닌가?

심지어 선생님은 글에서 ‘없는 것이 없다’는 ‘[모든 것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한다. 만약 ‘없는 것’이 사유할 수 없다면, ‘없다’가 중첩된 이 말을 우리는 어떻게 사유해서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어떻게 보면, 우리의 사유는 반성적이다. 우리는 빨간색과 파란색(논의의 필요 상 색에 두 가지만 있다고 하자)을 묶어서 사유한다. 파란색은 빨간색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빨간색을 보고 곧바로 파란색이 아니라고 하며, 파란색이 없으면 빨간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 전기와 -전기를 보자. – 전기는 ‘없는’ 전기는 아니다. 다만 + 전기에 대립하는 전기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사유에서 우리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대립시켜 사유한다. 그러므로 ‘있는 것’이 있으면 ‘없는 것’은 없다고 말하기도 하며 ‘없는 것’이 있으면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이런 사유가 가능한 것은 우리의 사유가 ‘없는 것’을 통해서 사유하는 반성적 사유이기 때문일 것이다.

3)

선생님의 생각은 어떻든 ‘없는 것’을 ‘빠진 것’의 극단으로 보자는 것인데, 마찬가지로 ‘있는 것’ 역시 반대쪽 극단이 될 것이다. 양극단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은 ‘있는 것인 동시에 없는 것’이며 ‘있지 않은 것이며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이 곧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없는 무규정자, 아페이론이다.

아페이론’ 개념이야 플라톤 철학 이래로 익숙한 개념이다. 그런데 선생님은 여기서 더 나가서 아페이론에 정도를 설정한다. 즉 ‘있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과 ‘없는 것’이란 극단에 더 가까운 아페이론이다. 이렇게 되면 그사이에 무한한 수의 아페이론이 출현한다. 제논의 역설이 잘 보여주듯 1과 0 사이에는 무한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아페이론에 정도가 있다는 것은 좀 이해하기 힘들다. 아페이론 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인데 무규정적인 것에 정도가 있을 수 없지 않을까?

유한한 것들 사이에는 가깝고 멀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처한 극단은 극단인 한에서 무한한 거리에 있다. 무한한 거리를 측정할 수 없으니, 어느 것이 무한에 더 가까운가는 말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무한히 선한 하나님 앞에서 교황과 나 가운데 누가 하나님에 가까울까? 아마 하나님 앞에서는 다 같이 타락한 죄인일 것이다.

더구나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상대적으로 짝이 지어진 개념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아페이론은 b, c, d는 있지만, a는 없다고 하자. 이것은 ‘있는 것’이 많으므로 ‘있는 것’에 가까운가? 그러나 사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무한히 많은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에는 e, f, g, …d 없으니 차라리 없는 것에 더 가까운 것이 아닐까?

4)

일단 ‘있는 것’과 ‘없는 것’이라는 양극단 사이에 아페이론이 있다고 하자. 중요한 것은 이 아페이론은 운동한다는 것이다. 이 운동은 한편으로는 ‘없는 것’에서 ‘있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며 다른 한편에서는 ‘있는 것’에서 ‘없는 것’으로 가는 운동이다.

이 두 가지 운동을 선생님은 ‘함’과 ‘됨’의 운동이라 한다. 이 운동 개념이 사실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는 생각이다. 우선 이 운동은 각기 그 원천이 다르다. ‘함’의 운동은 원천이 ‘있는 것’에서 나온다. 반면 ‘됨’의 운동은 원천이 ‘없는 것’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형이상학의 핵심적 문제에 부딪힌다. ‘있는 것’은 있을 뿐이다. 그것이 순전하면 할수록 더욱 ‘있는 것’뿐인데, ‘있는 것’이 어떻게 ‘함’이라는 운동의 원천이 되는가? ‘있는 것’은 하나이니, 하나로 뭉치게 하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없는 것’은 여럿이니, 여기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나오는 것일까?

있기는 있고 그것이 하나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하나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지 않을까? 마찬가지로 ‘없는 것’은 여럿이더라도 그것을 여럿으로 만드는 힘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철학에서 ‘있는 것’, ‘없는 것’과 구별되어서 ‘임’과 ‘아님’이 논의되어 왔다. ‘임’은 그 자체가 긍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고 ‘아님’은 부정적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니 차라리 ‘임’과 ‘아님’에서 ‘함’과 ‘됨’이라는 운동이 나오는 것이 아닐까?

선생님은 ‘있는 것’과 ‘임’, ‘없는 것’과 ‘아님’을 이미 동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임’과 ‘아님’이 따로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임과 아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는 모든 철학자가 논하는 중요 문제인데도 선생님의 글에서는 그런 논의가 없다. 왜냐하면, 양자를 일치하는 것으로 전제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양자는 언어상으로, 특히 한국어에서는 두 언어쌍은 명백하게 구분되는 것이다.

필자는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이 아닌 다른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예시하려는 것이다. ‘임’과 ‘아님’이 운동의 원천이 아니더라도, 하여튼 운동의 원천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은 특별하게 논증되어야 할 사실이다.

5)

이제 선생님 형이상학의 전모를 이해하기 위해 ‘있는 것’, ‘없는 것’이 운동의 원천이라는 주장을 논증 없이 받아들이고 보자.

더 큰 문제가 있다. 운동의 힘은 성격이 다르다. ‘있는 것’의 운동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간다. 그래서 아페이론을 더욱 하나가 되게 만든다. ‘없는 것’은 자기 방향으로 아페이론을 끌고 가서 더욱 여럿으로 만든다.

이런 운동은 사실 헤라클레이토스가 촛불의 비유를 통해 생성하는 힘과 소멸하는 힘으로 제시한 바가 있다. 이런 운동하는 아페이론을 운동의 측면에서 보면, 끊임없이 운동하는 것이지만, 두 가지 운동이 균형 속에서 있을 때 그것은 정지한 것으로 보이며 헤라클레이토스는 이를 ‘로고스’라 한다.

동양철학에서 기 철학도 마찬가지로 음과 양이라는 두 가지 대립하는 힘은 끊임없이 상호 전환하는 운동을 전개하니 이 운동 자체는 무극이며 이 운동이 고유한 균형을 이룬다면 곧 태극이다.

그런데 헤라클레이토스든, 기 철학에서든 두 운동은 서로 대립하지만 대칭적이다. 두 가지는 어느 것이 어느 것보다 앞서고 우위라고 말할 수 없다. 이런 일방의 우위는 기의 일원론적인 철학에서는 논리적으로 배격될 수밖에 없다. 여기서는 양자가 균형을 이루어야만 하나의 기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의 경우, 두 힘의 대립을 제시하면서 이 두 힘은 펼치고 수렴하는 힘이라고 하지만, 펼치는 힘이 펼치는 것은 수렴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수렴하는 힘이 수렴하는 것은 펼치는 힘이 그렇게 촉발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양자 사이에 능동과 수동을 공평하게 부여한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두 가지 운동을 ‘함’과 ‘됨’의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이 ‘함’과 ‘됨’은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적인 운동이다. ‘함’, 능동은 작용하고 ‘됨’, 수동은 수용한다. 그러나 ‘됨’이 능동적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함’이 수동적일 수도 있지 않을까?

5)

이렇게 비대칭적인 운동을 설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선생님이 앞서서 가졌던 유출설적인 흔적이 아닐까 한다. 신플라톤주의자에게서 ‘있는 것’은 ‘없는 것’을 향해 유출한다. ‘있는 것’으로부터 멀리 떨어질수록 하나로 만드는 힘이 떨어지니, 거꾸로 여럿으로 만드는 힘이 강하게 된다. 이런 유출 가운데 자연계의 다양한 층위가 출현한다. ‘철학 다시 하다’에 따르자면, 여기서 정신과 생명, 자연, 질료가 차례로 출현한다.

자연의 위계적 계층성을 설명하는데 이런 유출설이 기여한다. 이 신플라톤주의에서부터 나오는 유출설이야말로 그 이후 자연의 위계성 또는 진보적 진화를 확립하는 원천이 되었다.

그런데 2021년 발간된 <꿈꾸는 형이상학>이란 책에 이르면, 이제 ‘함’과 ‘됨’이라는 두 가지 힘이 비대칭적이라는 성격을 벗어나기 시작한다. 필자가 선생님이 이 시기 큰 변화를 겪었다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런 점 때문이다. 이제 이런 변화의 측면을 더 규명해 보자.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은 두 가지 우주 설화를 제시한다. 한 재경 선생이 요약한 바에 의하면 두 가지다. ① 하나의 설화에서는 ‘한어미’라는 개념이 출현한다. 원래 두 힘은 ‘한어미’ 속에 통일되어 있었다. 그러다 어떤 우연한 기회에 두 가지 대립하는 힘으로 분열되는데, 이제 두 힘은 ‘밝이’나 ‘검이’와 같은 대립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거미가 밝이를 푹 감싸고 있어서 .,, 밝이는 검이가 끝없이 옥죄는 바람에 뜨거워지고 또 뜨거워져서 펑 하고 터져 버렸다. … 이때 한 덩어리였던 힘이 둘로 갈라진다. 밝이의 힘은 하미가 되고 검이의 힘은 되미가 된다. 하미가 힘을 쓰면 되미는 그 힘을 받아 하는 대로 된다.”(한재경, 미발간원고)

② 다른 하나의 설화는 ‘까망이’와 ‘하양이’라는 용어가 쓰인다. 그런데도 일원론의 흔적은 은폐된 방식으로 출현한다. 즉 두 대립하는 힘의 긴장된 관계를 통해 내적인 통일성을 가정한다.

“하양이와 까망이가 틈새 없이 맞닿아 두 힘이 서로 다른 결을 이루면서 태극도형처럼 하나는 함으로 다른 하나는 됨으로 휘어진 결 무늬를 이루기 시작했다.”(꿈꾸는 형이상학, 28)

여기서 ‘밝이’나 ‘햐양이’, ‘검이’나 ‘까망이’는 동양철학에서 양과 음에 대응하는 용어로 보인다. 이렇게 두 힘이 원래 통합되어 있었다는 것이나, 두 힘이 음양으로 구분되면서 양자 사이에 비대칭적인 흔적은 사라진다. 그 점은 두 힘의 관계가 태극도설의 모양으로 제시된다는 데서 확인할 수 있다.

6)

이처럼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동양철학의 기 일원론으로의 전환을 일으킨 원인은 무엇일까? 그 원인은 따지고 보면 그 이전부터 계속된 선생님의 지론인 ‘결’의 개념 때문이 아닐까 한다.

사실 이 ‘결’의 사상은 일찍부터 지녀왔던 사상이며 매번 강조해 마지않던 사상이다. 그런데 유출설적인 입장에서 대립하는 힘인 ‘함’과 ‘됨’이 비대칭적이라면 이것들이 만나서 결이 나온다고 보기 어렵다. ‘결’은 두 힘의 균형을 통해 서로 순환하는 것을 전제로 하는데 비대칭적이라면 이런 균형이 깨어지면서 순환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선생님으로서는 ‘결’이 ‘톨’보다 우위에 있다는 생각은 현대과학의 이론과 연관되면서, 형이상학이 확정되기도 전에 이미 확고하게 가지고 있는 신념이다. 그런데 유출설의 입장에서 이 결을 설명하기가 곤란했던지, 사실 앞선 책에서는 ‘결’이라는 말은 나오지만, 그것이 어떤 과정을 통해 나오는지 상세한 설명이 없다.

‘결’의 사상을 끌어내려면 대립하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에 이르러야 했는데, 이런 대립의 균형은 이미 양자의 통일을 전제로 하기에 기 일원론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 아닐까 한다. 그 덕분인지, ‘꿈꾸는 형이상학’에서는 두 힘이 꼬여서 어떻게 결이 나오는지가 상세하게 그려진다. 이게 소위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이다.

‘거품 우주’론의 상세한 내용은 생략하도록 하자. 그게 성공적인지는 필자가 평가할 능력이 되지 못한다. 다만, 그 근거는 함과 됨이라는 비대칭적 구조 없이 기일원론에 근거한 대칭적인 음양의 순환으로도 충분한 것으로 보인다. 그 우주는 주역에서 음양이 중첩되어 사상, 팔괘,  64효 등으로 나가는 세계와 어쩌면 그렇게 신통하게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다만 선생님은 주역에서 음양의 관계를 뫼비우스적 띠로 이해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밝이’의 한 가운데 블랙홀이 있고 ‘검이’의 한 가운데 화이트홀이 있으며 이 양자가 다시 월홀과 한 자리에 있다는 주장에서 분명하게 엿보인다. 하나의 뫼비우스의 띠가 다시 중첩되면서 뫼비우스의 띠를 이룬다면, 거품 우주론이 나오지 않을까? 

어떻든 간에 매우 흥미로운 우주였다. 필자는 이규성 선생 덕분에 동양철학, 그 가운데 왕선산의 기 철학을 배운 적이 있는데, 하나의 기가 음양 두 기로 분화되어 상호 대립하는 가운데 우주 만물이 생겨난다는 주장에 흥미를 느꼈다. 그러나 그의 철학에서 음양의 대립이 어떻게 다양한 만물로 발전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그저 기에 청탁과 유동성과 고정성이 있다는 정도 외에 더 들을 수는 없었다. 또한, 필자는 여러 주역 소개서를 읽었다. 동양철학 그것도 주역에 관해 지식이 턱없이 부족한 상태이기는 하지만, 주역에서 음양의 괘가 중첩되는 과정을 선생님처럼 우주 발생론으로 읽는 것은 발견할 수 없었다.  그런 점에서 선생님의 ‘거품 우주론’은 무척이나 탁월한 설명으로 보인다.  음양을 통해 이루어진 우주생성론, 코스모고니는 선생님이 최초가 아닐까? 여기 선생님이 주역이 제시한 것과 ‘거품 우주론’을 보여주는 한 가지 도해만을 소개하려 한다.(이 도해를 읽을 때 그저 평면적으로 보아서는 안 될 것 같다. 순환이 뫼비우스적인 방식으로 일어난다는 것을 전제로 읽으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도해로 보인다.)


7)

마지막으로 선생님의 형이상학에서 아직도 신플라톤주의적 유출설적 흔적이 여전히 남아, 일원론적 기 철학적인 흔적과 충돌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 마치려 한다.

이런 흔적은 ‘밝이’나 ‘검이’ 대신 ‘하미’나 ‘되미’, ‘잇스미’나 ‘업스미’라는 용어가 사용된다는 데서 남아 있다. 또한, 한 덩어리인데 그 모습이 ‘밝이’가 ‘검이’를 싸안고 있고 옥죄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는 데서도 나타난다. 아무리 싸안더라도 또는 서로 꼭 붙어있더라도 둘은 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닌가? 더구나 ‘하미’가 하면 ‘되미’는 “하는 대로 된다”라고 말하는 데에는 여전히 비대칭적 능동-수동 관계가 등장한다.

함과 됨, 능동과 수동이라는 비대칭성을 유지해야 할 다른 이유가 있을까? 유출설이나 서양철학적 흔적에서 완전히 벗어나면 앞으로 어떻게 될까? 의문이 많다. 2021년 <꿈꾸는 형이상학>에서 선생님이 유출설에서 기 일원론으로 도약했듯이 다시 한번 도약이 일어날 것으로 기대한다.

필자는 지금까지 선생님의 철학을 한마디로 하면 곧 ‘결의 철학자’라고 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좀더 오래 사셔서 우리에게 또 “새로운 철학이네!” 하는 경탄을 다시 한번 불러일으키기를 고대해마지 않으면서, 이 글을 마치려고 한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4-실체에서 주체로

1)

헤겔은 칸트의 선험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면서 칸트가 선험적 범주가 대상을 구성하는 것은 직관의 다양이 선험적 범주에 할당되는 것이며 따라서 개념은 공허한 형식이고 그 내용은 직관에서 주어지는 다양이라고 했던 것을 비판한다.

헤겔은 선험적 범주는 공허한 형식이 아니라 그 자체로 자기의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범주는 일반적 개념이지만, 동시에 자기 규정성을 지닌 구체적인 개념이다. 실재성은 범주 자신에서 나오므로 범주와 실재성, 개념과 대상은 합일하면서 객관적인 진리로 된다.

“또한, 여기[칸트적 심리적 관념론]에 속하는 것은 개념이 다시 직관의 다양이 없으면 내용이 없고 공허할 뿐이라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개념이 선천적[apriori] 종합이라는 사실을 무시한다. 개념이 그와 같이 선천적 종합이므로, 개념은 정말로 말해 규정성과 자기 내 구별을 지닌다. 규정성은 개념의 규정성이고 따라서 절대적 규정성, 개별성이므로 개념은 모든 유한한 규정성과 다양성의 근거이자 원천이다.”(논리학 2부, GW12, 23)

헤겔은 ‘선천적 종합’, 즉 개념에서 그 규정성이 나온다는 주장을 자기의 철학의 원리로 삼는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어떻게 보면, 마치 나르시시즘적 원리처럼 보인다.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이니 그 속에 자기가 들어 있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자기가 만들어놓은 것은 주관적인 산물이며 그 너머에 대상 자체, 물 자체가 여전히 존재하는 것이 아닐까?

2)

헤겔이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온다고 했을 때 이 규정성이 자기 넘어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몰랐던 것은 아니다. 개념이 의식과 대상으로 분화되고 즉 그 자체 존재[an sich]가 대자 존재[fuer sich]와 대타 존재[Sein fuer andres]로 구별된다고 했을 때, 여기서 의식, 대자 존재란 곧 개념에서 나온 실재성, 규정성을 의미하며, 대상 곧 대타 존재는 이런 실재성과 규정성 너머에 등장하는 물 자체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런 분화와 구별이 의미하는 것은 곧 개념에서 규정성이 나오는 순간 물 자체에 부딪힌다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 물 자체를 헤겔은 어떻게 극복하는 것일까? 헤겔을 비롯한 모든 당대 철학자들의 근본적 아포리아였던 이 문제를 헤겔은 정신현상학 서론[Einleitung]에서 의식 경험의 길이라는 방법을 통해 풀어나간다.

즉 하나의 의식은 일정한 범주를 통해 대상을 규정한다. 의식은 이 규정성을 자기의 범주에서 끌어내지만, 이 규정성은 그 너머 물 자체에 부딪힌다. 그런데 이때 물 자체란 자기의 전제가 되는 의식 때문에 생겨난 것이니, 본래의 물 자체가 아니라 ‘그 의식에 대해 그 자체적인 존재[Fuer es an sich Sein]’가 된다.

그러므로 의식의 범주와 물 자체는 서로 모순 속에서 빠지고 이로부터 의식은 자기 내로 반성하면서 새로운 범주로 이행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시 새로운 규정성이 출현하며 이 속에는 그 이전 범주에서 물 자체였던 것이 이 범주에 의해 규정된 것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 결과 이 새로운 범주에 대해 또 새로운 물 자체가 출현하게 되면서 운동이 계속된다.

이런 과정은 의식의 범주가 개별적인 것에서 포괄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며 대상이 점차 더 구체적으로 자기를 실현하는 과정이다. 이 두 과정이 맞물려 나가는 것이 곧 의식 경험의 길이다.

3)

정신현상학에서 서술된 이 의식 경험의 길은 역사적으로 의식의 형태들이 겪어나갔던 발전을 의미한다. 이 발전을 매개하는 것은 의식과 물 자체와의 모순인데, 이런 역사적인 의식 형태가 현재 의식의 평면에 투영되면서 논리적인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에서도 범주는 그 자신에서 규정성과 실재성을 끌어내지만, 이는 곧 그 실재성을 넘어선 것 즉 물 자체와 모순에 부딪히게 된다. 그 결과 새로운 범주가 출현하면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일어나게 된다. 마침내 최종적으로 범주가 모든 실재성을 포괄하면서 더는 모순이 나오지 않는다면, 바로 이 범주가 최종적인 절대적 범주이며 곧 진리인 개념 즉 이념이다.

헤겔은 이런 논리적 발전을 통해서 칸트가 좌표축에 할당했던 범주를 논리적 순서에 따라서 전개한다. 헤겔은 칸트의 12개 판단 형식과 그 범주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다만 칸트와 달리 이를 논리적인 발전에 따라서 배치했다. 헤겔은 의식 경험을 통해 일어나는 논리적 계기의 발전을 통해 개념으로부터 규정성이 나온다는 선천적 종합 개념이 단순히 나르시시즘에 빠지지 않을 가능성을 제시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헤겔은 하나의 범주와 다른 범주로 이행하는 과정, 즉 범주의 자기 내 반성 과정이 중요하게 된다. 그것을 매개하는 것은 물 자체와의 모순이지만, 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는 과정은 사유의 과정이다. 바로 이 사유의 과정이 추론적 이성이 하는 일이며 이 추론적 이성이 사용하는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이 된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가 무시했던 반성 개념의 역할을 사유 속에 제대로 위치시킬 수 있었다.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헤겔에서 선험적 통각의 개념을 차이 나게 만든다. 칸트에서 통각과 범주는 서로 구별된다. 통각은 범주를 직관의 다양과 결합하는 기능을 지니지만, 그 자체는 독립적인 것으로서 범주 밖에 있다. 마치 그것은 플라톤에서 데미우르고스가 이데아와 아페이론을 결합하는 것과 같은 역할을 담당한다.

그러나 헤겔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구별하여 출현한 하나의 규정성이며, 통각은 이 규정성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다시 새로운 범주를 규정한다. 이 과정에서 범주는 선험적 통각의 본래 그대로를 드러내게 되면서 마침내 선험적 통각은 범주를 통해 자기를 실현하게 된다.

헤겔에서 범주의 생성 운동을 통해 출현한 ‘개념’이라는 범주에서 마침내 통각은 자기를 본래 모습대로 드러내니, 그런 점에서 앞에서 개념이 곧 선험적 통각 또는 자기의식이라 하였다. 그러므로 범주의 전개 운동 자체는 결국 선험적 통각이 자기를 드러내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4)

칸트는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에 이르렀으나, 범주를 여전히 형식적인 좌표축으로 보면서, 다시 형식 논리학에서의 추상적 일반적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다. 그러나 헤겔은 범주가 규정성을 산출한다는 선험철학의 원리를 지키면서 이를 범주의 발전과 결합하면서, 물 자체의 문제를 극복하게 되었다. 그 결과 헤겔은 형식 논리학과는 전적으로 구별되는 새로운 논리학을 형성할 수 있었다.

논리학의 핵심은 곧 판단이다. 논리적 범주란 곧 판단의 형식 즉 주어와 술어의 관계인 계사를 규정하는 개념이다. 판단의 형식은 12개가 있는데, 이 12개의 범주는 서로 다른 내용을 지닌다. 이 범주가 지닌 내용은 이 판단 형식이 구체적인 판단으로 나타날 때 지니는 내용과 구별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은 예를 들어 ‘이것은 빨갛다’와 같은 판단의 형식을 말한다. ‘이것의 빨강임’이라는 특정한 사태는 긍정판단의 구체적 내용이지만, 긍정판단의 판단 형식은 개별자인 주어와 일반적인 성질인 술어 사이의 관계이다. 이 판단형식 자체의 내용은 개별자와 일반자의 관계이다.

이런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정언판단 형식과 구분된다. 이 정언판단의 구체적인 예를 들자면 ‘진달래는 봄꽃이다’와 같은 판단이다. 문법적 형식으로만 보면 질적 긍정판단과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주어와 술어의 논리적 관계를 보면 후자의 경우 주어는 개별자가 아니라 일반자(즉 ‘진달래’)이다. 그리고 술어는 유적 일반자(‘봄꽃’)이다.

이처럼 구체적 내용의 차이가 아니라 판단 형식 자체가 즉 범주가 다른 범주와 지닌 차이가 곧 판단 형식의 내용이다. 이런 판단 형식은 직접적으로 보면 진리이지만, 이미 자체 내 모순을 포함한다. 예를 들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개별자와 일반자가 대립하니, 이 양자의 통일성을 주장하는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미 그 자체 모순이다. 그러므로 이 질적 긍정판단 형식은 이런 모순에 부딪혀서 다른 범주 즉 다른 판단 형식으로 이행한다.

“이 절대적 형식은 자기 자신에서 자신의 내용을 갖거나 실재성을 갖는다. 개념은 진부한 공허한 동일성이 아니므로 자신의 부정성이나 절대적 규정이라는 계기 속에 구별하는 규정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말해 논리학의 내용은 절대적 형식의 그런 규정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이 내용은 절대적 형식을 통해 스스로 정립한 것이며 따라서 또한 그 자신에 적합한 내용이다.”(논리학 2부, GW12, 25)

어떤 판단 형식 속에 내재하는 모순은 그 자체로 드러나지 않는다. 처음에 아직 경험이 제한되어 있을 때 판단 형식은 통일성을 지니고 그 모순은 감추어지지만, 경험의 발전에 따라서 이 판단 형식의 모순이 드러나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 범주의 발전은 경험의 발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런 경험의 발전을 통해서 이런 논리적 범주의 발전이 가능한 것이다. 다만 정신현상학에서 의식의 발전이 역사적으로 일어나는 것과 달리 논리적 발전은 이런 경험의 발전을 의식 내에서 즉 현재 의식의 평면 위에 투영된 방식으로 겪을 뿐이다.

5)

구체적 내용이 아니라 판단 형식 그 자체의 내용이 판단 형식과 부딪히는 모순이 논리적 범주, 판단 형식의 발전을 이끄는 힘이다. 헤겔은 이점을 진리의 이념과 연관하여 설명한다.

진리는 알다시피 대상과 개념의 일치이다. 논리적 범주는 구체적 내용이 없는 일반적 형식이므로 이 일반적 형식에 관해 진리를 따질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논리적 범주 즉 판단 형식 자체가 내용을 지니고 있다고 본다면, 판단 형식과 그 내용 사이의 모순이 성립하고 거꾸로 양자의 일치인 진리가 가능하다.

그러므로 논리적 범주도 형식과 내용, 개념과 실재성의 일치인 진리를 향해 나간다. 논리적 범주 역시 진리를 향해 생동적인 운동을 전개한다. 이 생동적 운동은 모순을 겪어나가는 운동이다.

“논리학은 절대적 형식의 학문이므로 이런 형식성은 참된 것이 되기 위해서는 자기 자신에서 자기의 형식에 적합한 하나의 내용을 가져야 한다. 그런 요구는 논리적으로 형식적인 것이 순수한 형식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참된 것은 순수한 진리 자체이어야 하면 할수록 더욱 요구되는 것이다. 따라서 이 형식적인 것은 자체 내 규정이나 내용에서 훨씬 풍부한 것으로 사유되어야 하며 또한 구체적인 것에 대해 일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것보다 무한히 더 큰 작용력을 지닌 것으로서 사유되어야 한다.”(논리학 2부, GW12, 27)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3-칸트 비판

1)

앞에서 헤겔의 ‘개념’이 논리적 범주로서 다른 범주와 구별되는 내용적 의미를 살펴보고 동시에 일반적으로 논리적 범주가 지닌 의미가 형식 논리학에서의 의미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살펴보았다.

이제 개념의 일반적 논의에서 가장 핵심적인 문제에 이르렀다. 그것은 곧 개념이 선험적 통각 즉 ‘주체’라는 주장인데, 이를 위해 헤겔은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칸트에서 주체 개념으로 발전하는 과정을 이해의 맥락으로 제시한다.

그는 여기서 철학적 비판이 가진 의미를 다시 되새기는데 이는 정신현상학에서 이미 서술했지만, 여기서 되풀이된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그 체계를 그 체계 밖에서 단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비판은 비판하는 철학이 전제하는 근본 규정을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지만, 비판받는 철학은 자기의 근본 규정을 고집하면서 비판하는 철학의 근본 규정을 거부하니, 비판은 마치 적이 없는 곳에서 싸움을 전개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반박은 적의 힘 속으로 들어가서 적의 힘이 닿는 범위 안에서 자기의 진을 치는 것이어야 한다. 적을 적 자신 밖에서 공격하고 적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권리를 보유하는 것은 분투하는 것이 아니다.”(논리학 2부, GW12, 15)

그러므로 진정한 비판이 되기 위해서는 적이 진지를 차린 곳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내부에서 무너뜨려야 한다. 이것은 곧 그 체계 자신이 부딪히는 모순을 통해 스스로 부정되는 것이며 즉 그 체계 자신이 유래한 특수한 원리에 대한 부정이다.

즉 어떤 체계에 대한 비판은 ‘특정한 부정성[bestimmte Negation]’에 기초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기 내 반성이 일어나 더 일반적인 체계가 제시되고, 지금까지의 체계는 그 일반적 체계의 한 부분으로 포함된다. 헤겔은 스피노자 체계에 대한 비판도 이런 내적인 부정, 즉 ‘특정한 부정성’을 통해 일어나야 한다고 본다.

2)

스피노자 철학에 대한 비판과 관련하여 헤겔은 이미 본질론에서 ‘절대자’ 개념을 논하면서 어떻게 스피노자가 한계를 드러내는지 보여주었다. 거기서 그는 스피노자의 실체는 출발점에서는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는 원리로 제시했으나, 곧이어 이런 실체를 모든 규정성에 대한 단순한 부정으로 순수한 자기 동일성으로 규정하는 데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한다.

스피노자의 실체 개념이 지닌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은 라이프니츠에서 모나드 개념으로 발전했다. 라이프니츠는 자기를 산출하는 표상 개념을 통해 자기 원인이라는 개념을 발전시켰으나, 그로서는 이런 모나드가 개별적이며 따라서 이런 모나드 사이의 관계를 설명할 수 없었으니 결과적으로 라이프니츠는 예정조화설에 빠지고 말았다.

이런 비판을 넘어서 헤겔은 실체는 곧 서로 대립하는 개체의 상호작용하는 관계라는 개념으로 규정하면서, 이를 통해 앞에서 말했듯이 ‘주체’라는 개념을 끌어냈다. 헤겔은 이런 주체라는 개념이 곧 칸트의 순수 통각 개념으로 출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칸트의 철학은 선험철학이며 여기서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범주를 통한 통일이다. 이런 통일을 통해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다양이 통일되면서 객체가 출현하게 된다. 여기서 주관 속에 있는 범주와 직관을 통해 주어지는 대상이 통일되면서 진리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의식의 주관적 통일]에 대립하여 표상의 객관적 규정이 지닌 원리는 통각의 선험적 통일이라는 근본 명제로부터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적 규정이라고 할 범주를 통해서 주어진 표상의 다양이 규정되니, 이 다양은 의식의 통일로 이끌려진다.”(논리학 2부, GW12, 18)

“이와 같이 대상이 정립되면서 대상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거나 객관적인 대상으로 된다. 따라서 대상은 개념 속에서 이런 객관성을 가지며 이 개념은 대상이 수용되는 자기의식의 통일이다. 따라서 대상의 객관성 또는 개념은 그 자체 자기의식의 본성일 뿐이며 주관 자체와 다른 계기나 규정을 가지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8)

직관의 다양을 통일하는 선험적 통각의 통일은 그러므로 대상을 정립하는 주체의 활동이다. 그런 점에서 헤겔은 칸트에서 비로소 ‘개념’으로서 주체가 출현했다고 보며, 헤겔의 철학은 칸트의 이런 선험적 철학의 원리를 받아들이며, 그 자신을 선험주의자라고 자처하기에 이른다.

3)

칸트의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곧바로 의문에 부딪힌다. 통각의 통일은 결국 주관성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며 칸트가 주장한 것처럼 누구나 인정하는 보편적인 현상 세계를 산출하기는 하지만, 물 자체를 인식하는 객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헤겔이 직관의 다양을 선험적 통각이 통일하면서 객체에 이른다고 말한 것은 칸트에 대한 오독이 아닐까?

바로 여기서 칸트와 헤겔의 차이점, 헤겔이 칸트를 어떻게 극복하는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헤겔은 오히려 칸트가 참다운 철학의 원리 즉 개념과 주체에 이르렀으면서도, 다시 이를 내던지고 말았다고 한다. 그 이유는 칸트가 선험적 통각의 개념 즉 범주의 본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칸트는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것을 마치 ① 선험적 통각의 범주가 마치 하나의 좌표계를 이루고 있으면서 경험을 통해 주어지는 직관의 다양을 그 주어지는 모습에 따라(즉 직관의 계기와 동시성 사이의 관계 즉 도식) 이런저런 범주에 할당되는 것처럼 생각했다.

여기서 직관의 다양과 범주가 통일되기는 하지만, 이 통일은 다만 외면적이다. 그것은 마치 음양의 축을 설정해놓고 모든 주어지는 것을 이런 음양의 좌표축에 할당하는 것과 같다. 그렇게 되면 좌표축과 대상이 결합하기는 하지만, 이 결합은 외면적인 것에 그친다.

사실 무엇이든 이 음양의 좌표축에 따라서 할당할 수 있으니, 이는 헤겔이 정신현상학에서 말한 것처럼 모든 땅은 모두 붉게 칠하고 하늘은 모두 푸르게 칠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며 나중에는 밤에 모든 소가 까맣게 보이듯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색으로 칠해질 수도 있다.

4)

중요한 것은 이렇게 보면, 통각의 선험적 범주는 스스로 내용을 산출하는 것이 아닌 ② 공허한 형식적 개념으로 다시 떨어진다는 것이다. 헤겔은 이런 생각은 칸트 자신이 범주가 직관의 다양을 통일한다는 원리와 모순된다고 본다. 왜냐하면, 헤겔이 보기에 이런 선험적 통각의 원리에 따르면 범주가 자신의 대상을 스스로 산출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지성은 이런 방식에서는 독자적인 공허한 형식이며 이 형식은 부분적으로는 앞에서와같이 주어진 내용을 통해 실재성을 얻으며 부분적으로는 그런 내용을 추상하여 즉 그 내용을 어떤 것이기는 하지만, 개념에서 보면 다만 쓸모없는 것으로 제거한다.”(논리학 2부, GW12, 20)

결국, 칸트는 직관의 다양이 일정한 좌표축에 할당된다고 보았으며 선험적 범주가 직관을 규정하는 것은 이런 할당에 한정하면서, 헤겔로 볼 때 칸트가 범한 가장 중요한 실책은 ③ 반성 개념을 무시했다는 데 있다.

즉 칸트는 선험적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12개의 판단 형식 즉 범주를 제시했다. 이 범주는 지성이 가지고 있는 범주인데, 지성은 판단의 능력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의 선험적 통각 속에는 또 다른 능력이 있으니 곧 추리의 능력이고, 이것이 바로 이성이다.

이런 이성의 능력에 속한 범주가 곧 반성 개념인데,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이 선험적 통각의 통일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런 반성 개념의 역할을 다만, 순수이성 비판에서 라이프니츠의 반성 개념을 비판하는 부록에 잠깐 언급했을 뿐이다.

“칸트는 다만 감정과 직관만 지성 앞에 둔다. 우선 그는 이미 그 자신의 이런 계단화가 얼마나 불완전한가를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었는데, 그 단서는 곧 그가 반성 개념에 관한 하나의 논문을 선험 논리학이나 지성론의 부록으로서 덧붙인다는 데 있다.이 반성 개념의 영역은 직관과 지성 사이에 그리고 존재와 개념 사이에 놓여 있는 영역[즉 본질론의 영역]이다.”(논리학 2부, GW12, 19)

직관의 다양이 범주에 할당된다는 칸트의 입장은 결국 ④ 범주 전체를 대상에 대해 외면적인 것으로 만든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범주 전체는 그 어느 것이든 그 너머에 물 자체가 존재하게 되며, 이런 물 자체에 이 범주를 적용할 수는 없다. 만일 물 자체에 이런 범주를 적용하는 순간 여기서 이율배반이 나오게 된다.

“칸트는 이성의 범주에 대한 태도는 다만 변증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사실 이 변증법의 결과를 다만 전적으로 무한한 무인 것으로서 파악하니, 이를 통해 이성의 무한한 통일은 또한 여전히 종합을 잃어버리고 이로써 출발점이었던 사변적이고 진정한 무한한 개념을 잃어 버린다.”(논리학 2부, GW1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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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칸트는 출발점에서는 범주가 대상을 구성한다고 했으나 곧 이를 단순히 범주가 대상에 할당되는 것으로 간주함으로써 자기의 출발점을 부정하고 말았다.

“두 번째로, [한 측면에서] 개념은 인식에서[선험적 인식] 객관적인 것으로서 제시되었으며 따라서 진리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개념과 같은 것은 어떤 주관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며 실재성은 주관에 대립하는 객관성이라는 뜻으로 이해되면서 그와 같은 주관적인 것으로부터 실재성을 끌어내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논리학 2부, GW12,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