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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건국대학교 다자인多字人]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읽기  25절~32절

 

 

제4장 더불어 있음과 자기 자신으로 있음으로서의 세계–안에–있음. “그들” (25절~27절)

 

4장은 1.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에 대한 실존론적 물음의 단초를 실마리로 하여(25절), 2. 일상적 현존재가 처해 있는 실존론적 구조인 더불어 있음과 공동현존재를 분석한 뒤(26절), 3. 일상적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해 “그들[세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27절).

 

제25절 현존재는 누구인가 하는 실존론적인 물음의 단초

현존재는 그때마다 각기 나 자신인 존재자이며, 존재는 각기 ‘나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현존재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는 ‘나’라고 답하면 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지금의 ‘내’가 곧 현존재라는 자명성만으로 그 현존재가 ‘누구’인지에 대한 존재론적 해석이 확정되지는 않는다. 이때의 ‘나’는 모든 변화의 밑바탕에 놓여 있는 주체, 즉 어떤 동일성에 대한 지시일 뿐이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이것은 바로 나의 존재다”라고 가리키는 구속력 없는 형식적 제시일 뿐이다. ‘나’라는 말은 어떤 동일성을 지시하기는 하지만, 그 안에 누가 들어 있는지까지 정해 주지는 못한다. 실제의 현상적인 존재연관 속에서 ‘나’는 오히려 자신의 “반대”, 즉 ‘나 아닌’ 모습으로 드러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존재의 주체가 누구인가는 존재론적으로 문제일 뿐 아니라 존재적으로도 은폐된 채 남아 있다. 일상 속에서 현존재 자신에게조차 자신의 ‘누구’가 열어밝혀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물음은 단순히 내면을 들여다보거나 “Ego qui sum”이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물음은 어떻게 접근되어야 하는가? 현존재는 오직 실존하면서만 자기 자신일 수 있다. 그러므로 현존재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는 경우(자립성)와 자기 자신이 아닌 방식으로 존재하는 경우(비자립성)는 모두 현존재의 실존방식으로부터 실존론적으로 해명되어야 한다. “나”라는 동일한 실체가 언제나 밑바탕에 있다는 말로는 이 문제의 답이 되지 않으며, 현존재의 ‘누구’는 실존 속에서 밝혀져야 한다. 인간의 실체는 영혼과 육체의 종합으로서의 정신이 아니라 실존이기 때문이다.

 

 

제26절 타인들의 공동현존재와 일상적인 더불어 있음

현존재는 ‘누구’인가는 일상적 현존재에서부터, 그리고 현존재의 근본구성틀인 세계-안에-있음에서부터 물어야 한다. 그렇다면 가장 가까운 주위세계를 생각해보자. 수공업자는 도구와 더불어 그 “작품”이 그를 위해 행해지고 있는 타자도 함께 만난다. 손안의 것에는 이미 그것을 사용할 누군가가 지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즉 타인은 나중에 덧붙여지는 것이 아니라 도구의 지시구조를 통해 처음부터 함께 열어밝혀진다. 현존재로서의 타인과 내가 그 안에 존재하는 세계는 처음부터 공동의 세계이다. 타인이 도구도 사물도 아닌 이유는, 타인이 나(현존재)와 동일한 존재방식, 즉 “da”를 나와 더불어 공유하기 때문이다.

타인은 나를 제외한 여타의 사람들이 아니라, 나도 그 속에 같이 속해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현존재의 세계는 공동세계(Mitwelt)이고, 안에-있음은 더불어 있음(Mitsein)이며, 타인의 세계내부적인 자체존재는 공동현존재(Mitdasein)이다. 먼저 ’나‘가 확립된 뒤 ’나‘와의 대립을 통해 타인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도 타인도 배려하는 주위세계 안에서 함께 발견된다. 그래서 현존재는 본질적으로 그 자체에서 공동존재이다. 현사실적으로 타인이 지각되지 않을 때에도, 현존재의 혼자 있음 역시 더불어 있음이며, 타인은 더불어 있음 안에서만 결여될 수 있다.

더불어 있음 또한 염려(Sorge)의 현상에서 해석된다. 손안의 것과의 왕래가 배려함(Besorgen)이었다면, 타인의 공동현존재는 심려(Fürsorge)의 대상이다. 심려에는 두 극단이 있다. 타인 대신 뛰어들어(einspringen) 그를 의존적으로 만들거나 지배하는 심려, 그리고 타인에 앞서 뛰어들어(vorausspringen) 그가 그의 염려 안에서 투명해지고 염려를 향해 자유로워지도록(für sie frei) 돕는 심려다. 배려함을 이끄는 것이 둘러봄(Umsicht)이라면, 심려를 이끄는 것은 고려(Rücksicht)와 관용(Nachsicht)이며, 이들은 무정함(Rücksichtlosigkeit)과 눈감아줌(Nachsehen)으로 결손될 수 있다.

 

 

제27절 일상적인 자기 자신으로 있음과 “그들”

26절에서 보았듯 일상적 현존재는 서로 함께 있음이다. 그런데 타인과 더불어 무언가를 배려하는 가운데에서는 늘 타인과의 차이를 신경쓰는 염려, 즉 거리감이 존재한다. 뒤처지면 따라잡으려 하고, 앞서면 그 자리를 지키려 한다. 이 때문에 현존재는 일상적 서로 함께 있음에서 타인의 통치 아래 서 있게 된다. 타인들이 일상적 현존재로부터 그 존재를 빼앗고, 타인들의 임의가 일상적 존재가능성들을 좌우한다. 그런데 나 자신 또한 그 “그들”에 속하는데, 이는 우리가 남들이 즐기고 보고 판단하는 대로 따라 똑같이 그리하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로써 26절 끝의 물음, 곧 일상적 현존재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이 주어진다. 그것은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자기 자신도, 모두의 총합도 아닌 중성자(Neutrum)로서 “그들”, 즉 세인(das Man)이다. ‘그들’은 거리감, 평균성, 평준화로 이루어진 “공공성”을 통해 모든 세계해석과 현존재해석을 규제한다. 이는 사태에 깊이 파고들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차이에 무감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 안에는 책임질 그 누구도 없으므로, ‘그들’은 현존재의 부담을 덜어주면서 지배를 공고히 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는 결국 ‘아무도 아닌 사람’이다.

 

그러나 이를 존재의 격하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들’ 은 현존재가 그 안에서 가장 실재적인 존재자로 있게 되는 존재양태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세인이야말로 우리가 실제로 가장 자주, 가장 강력하게 그 지배를 받는 “실재하는” 현상이다. ‘그들’은 실존범주의 하나이며 근원적인 현상으로서 현존재의 긍정적인 구성틀에 속한다. 일상적 현존재의 자기는 본래적인 자기와 구별되는 그들-자기이며, 본래적인 자기 또한 ‘그들’의 변양태로 이해되어야 한다.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

 

제5장 안에–있음 그 자체 (28절~38절)

 

제28절 안에–있음에 대한 주제적 분석이 가지는 과제

지금까지 세계의 구조계기와 일상적 현존재의 ‘누구’를 밝혀 왔다면, 이제 안에–있음의 현상으로 다시 논의를 이끌어가야 한다. 안에-있음은 공간적 내재성도, 주체의 속성도 아닌 현존재 자신의 본질적인 존재방식이며, 세계-내-존재로 구성되는 현존재는 그 자체가 항상 자신의 “거기(Da)”이다. “나는 여기 있다”의 “여기”는 독립적으로 성립하지 않고, 손안에 있는 “저기”를 향해 거리를 없애고 방향을 잡으며 배려하는 존재로서만 이해된다. 이러한 실존론적 공간성은 다시 세계-안에-있음에 근거하며, “여기”와 “저기”라는 장소규정은 오직 하나의 “Da” 안에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안에-있음 그 자체, 즉 ‘거기에’의 존재에 대한 설명은 두 부분으로 나뉜다.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나. ‘거기에’의 일상적 존재와 현존재의 빠져 있음

 

가. ‘거기에’의 실존론적 구성

제29절 처해 있음으로서의 거기에–있음

존재론적으로 “처해 있음”이라 부르는 것은 존재적으로 가장 일상적인 <기분>, <기분 잡혀 있음>이다. 현존재는 언제나 어떠한 기분 속에서 자기 자신과 세계를 경험한다. 기분은 좋음, 나쁨뿐 아니라 침착함, 불쾌감, 무(無) 기분까지 포함하며, “사람이 어떤 상태에 있으며, 어떤 상태로 되어지는가”를 드러내 존재를 그것의 ‘거기에’로 데려온다. 기분 잡혀 있음 속에서 현존재는 자신의 존재를 떠맡겨진 존재자로서 열어밝혀져 있다.

 

현존재는 대개 존재적-실존적으로 기분에서 열어밝혀진 존재를 피한다. 그러나 피함 자체에서도 ‘거기에’는 열어밝혀져 있다. 어떠한 기분에 처해 있기 때문에 피하는 것도 가능하다. 이러한 “현존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그의 ‘거기에’로 내던져져 있음이라 칭하며, 이는 ‘떠맡음의 현사실성’을 암시한다. 현사실성은 눈앞에 있는 것의 사실성이 아니라 실존 속으로 받아들여진 현존재의 존재성격이며, 직관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이런 측면에서 기분은 인식이나 의지보다 더 근원적이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그의 내던져져 있음에서, 우선 대개는 피하는 돌아섬의 방식에서 열어밝힌다. 기분은 이미 세계-안에-있음을 전체로서 열어밝혔고, 무엇으로 향함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따라서 처해 있음은 세계, 공동현존재, 실존이 동일근원적으로 열어밝혀져 있는 실존론적 근본양식의 하나이다.

 

또한 처해 있음에는 세계에 열어밝히면서 의존해 있음이 놓여 있다. 현존재가 다른 존재자와 관계하려면 먼저 세계가 처해 있음을 통해 열어밝혀져 있어야 한다. 처해 있음은 현존재를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할 뿐 아니라, 그 열어밝힘 때문에 실존론적 분석론에서 원칙적인 방법적 중요성을 지닌다.

 

제30절 처해 있음의 한 양태로서의 공포

공포는 세 측면에서 분석된다. 대상, 상태, 원인의 측면이다. 먼저 공포의 대상, 즉 <두려운 것>은 그때마다 손안의 것, 눈앞의 것, 공동현존재의 존재양식을 가진 것으로서 세계내부적으로 만나게 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유해함의 사용사태 양식을 띠고, 특정한 방면에서부터 와서 특정한 주변영역을 겨냥하며, “섬뜩한” 것이다. 아직 가까이 있지 않지만 가까워 오고 있으며, 이 가까워 옴에서 위협의 성격을 갖는다. 그냥 지나갈 가능성도 있다는 점이 오히려 두려움을 증대시킨다. 그 다음으로, <두려워함 자체>는 그렇게 성격규정된 위협적인 것이 자신에게 닥치도록 놔두는 자유롭게 내줌이다. 미래의 악을 먼저 알고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함이라는 처해 있음 속에서 세계가 이미 두려운 것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그 때문에> 공포를 두려워한다고 할 때의 그 ‘ 때문에’, 즉 두려움의 원인은 바로 현존재 자신이다. 현존재만이 자기 자신의 존재를 문제시할 수 있기에 두려워할 수 있다.

 

따라서 두려움은 언제나 현존재를 그의 ‘거기에’ 있음에서 드러내준다. 두려움은 위협해오는 세계내부적인 존재자와 위협받는 안에-있음을 똑같이 근원적으로 열어밝히며, 따라서 처해 있음의 한 양태이다.

 

제31절 이해로서의 거기에–있음

처해 있음과 더불어 <이해>가 근원적으로 “거기에”의 존재를 함께 구성한다. 처해 있음은 그때마다 나름의 이해를 가지며, 이해는 언제나 기분 잡힌 이해이다. 따라서 <이해> 역시 기초적 실존범주이다. 인식양식이라는 의미의 이해는 이 일차적 이해의 실존론적 파생체일 뿐이다. 이 근원적인 <이해>는 현존재가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존재하는 방식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그 때문에’ 안에서 실존하는 세계-안에-있음이 그 자체로서 열어밝혀져 있으며, 이 열어밝혀져 있음이 이해”이다. 현존재는 지금의 모습으로만 존재하지 않고 가능성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며 살아간다. 그래서 이해를 통해 ‘누구인지’, ‘어디에 있는지’가 아니라 ‘누구일 수 있는지’, ‘어디에 있을 수 있는지’의 방식으로 자신을 파악한다.

 

이는 <이해>가 <기획투사>라는 실존론적 구조를 가지기 때문이다. 이해는 현존재의 존재를 유의미성과 ‘그 때문에’에게로 기획투사한다. 기획투사는 현사실적인 존재가능의 여지를 지칭하는 실존론적 존재구성틀이다. 현존재는 그의 존재가능에서 “아직 아닌” 바로 그것으로 “존재”하며, 그가 되거나 되지 못하는 그것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네가 무엇인 바로 그것이 되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이해>가 “~수 있음”의 형식으로 파악되기 때문에 가능하다.

 

현존재는 우선 대개 그의 세계에서부터 자신을 이해한다(비본래적 이해). 그러나 이해는 자신을 일차적으로 ‘그 때문에’ 안으로 던질 수도 있는데, 이때 현존재는 그 자신으로서 실존한다(본래적 이해). 다만 이는 주체나 개인, 인격으로서가 아니다. 또한 비본래적 이해는 지양되어야 할 것이 아니라, 전체로서의 기획투사의 한 실존론적 변양태이다.

<이해>는 기획투사성격에서 현존재의 <시야>를 만들어 낸다. 그중 일차적으로 그리고 전체에서 실존에 관계되는 시야를 <투명성>이라 하며, 하이데거는 이 말로 잘 이해된 “자기인식”을 가리킨다. 현존재는 세계 곁에 있음, 타인과 더불어 있음에서 투명하게 된 한에서만 “자신을 본”다. 이렇게 <처해 있음>과 <이해>는 세계-안에-있음의 근원적인 열어밝혀져 있음을 성격규정한다. 현존재는 기분 잡혀 있음에서 가능성들을 “보고”, 그 가능성들을 기획투사하며 열어밝힘에서 이미 기분 잡혀 있다.

 

제32절 이해와 해석

현존재는 이해로서 자신의 존재를 가능성에게로 기획투사하며, 이해의 기획투사는 스스로를 형성할 고유한 가능성을 가진다. 이 형성을 <해석>이라 한다. <해석>에서 이해는 자신이 이해한 것을 이해하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 <해석>은 이해된 것을 알게 됨이 아니라 이해에서 기획투사된 가능성들을 정리작업함이다.

 

<의미>는 앞서 가짐, 앞서 봄, 앞서 잡음에 의해 구조지어진 기획투사의 ‘그리로(의미 지평)’이며, 거기에서부터 어떤 것이 어떤 것으로서 이해될 수 있다. 의미는 오직 현존재만이 “가진다”. 그래서 오직 현존재만이 의미 있거나 무의미할 수 있다. 가령 볼펜이 의미를 자기 안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것을 어떤 도구로 이해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의미>라는 개념에 대한 이러한 원칙적인 존재론적-실존론적 해석을 확고하게 견지할 경우 현존재적이지 않은 존재양식의 모든 존재자들이 전혀 의미와 무관한 것으로, 본질적으로 의미가 전혀 없는 것으로 개념파악되어야 한다.

 

해석에는 이미 앞서 가진 이해가 필요하고, 이해는 다시 해석을 통해 깊어진다. 그래서 이해와 해석이 서로를 전제하며 맴도는 순환이 생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를 피해야 할 악순환이나 불완전함으로 “느끼는” 것은 이해를 근본적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현존재는 아무 전제 없는 백지 상태에서 무언가를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이미 세계와 자신을 어느 정도 이해한 채로 존재하며 그 위에서 해석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해>에서의 <순환>은 결함이 아니라 의미의 구조에 속하며, 현존재의 실존론적 구성틀, 즉 해석하는 이해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자신의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존재자는 이러한 존재론적 순환구조를 가진다. 다만 <순환>이라는 표현 자체는 눈앞에 있음의 존재양식에 속하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순환은 이해의 구조를 드러내는 표현일 뿐, 이것으로 현존재를 “순환”이라고 존재론적으로 성격규정하는 일은 피해야 한다.

 

(계속)

공화의 길: 팔천만 입말의 소통[천 하룻밤 이야기]

공화의 길: 팔천만 입말의 소통

2026 09 23 추분(秋分) : 올해는 추석이 추분 다음다음이구나

세상을 놀이터 또는 수련터라고 생각하는 경향을 가진 자들이 있는가 하면, 세상에서 숙명처럼 살아야 하며, 절대적 신앙 속에서 그 신앙에 맞는 운명을 살아야 하는 이들도 있다. 신앙의 방식으로 산다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그래도 믿는 구석이 있는데, 놀이(수련)터로 생각하는 이들에게도 숙명에 따라 운명을 개척하며 노력해야 한다는 데도 믿는 구석이 있는데, 그 믿음에는 약간은 건방지게도 스스로 자신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낙관이 들어있다. 아마도 빠스깔은 전자를 택했을 것 같다.

세상의 이야기가 길고 두꺼운 백과사전에 실려있듯이, 어느 영역 또는 어느 방향에서 자신을 만들면서 산다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의 삶을 마치 백과사전의 한 쪽 또는 한 꼭지 속에 장면처럼, 삶의 과정과 목표를 참조할 것이다. 종교인들이야 당연히 자신들의 종교에 맞는 경전을 참조할 것이다. 보르헤스는 자신의 소설을 쓰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어느 문헌이든 경전이든 간에 그 사이에 빠져있는 부분들을 끌어낸다고 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세상을 책으로 비유한 이들은 많았다. 책을 잘 읽어야 자기 삶을 잘 이끌어 갈 수 있다고 여겼다. 공부를 평생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데카르트는 ‘세계라는 책’에서 진리에 이르는 방법을 찾으려 했다고 한다. 그런 책을 스스로 썼는데, 그 해 갈릴레이가 종교 재판을 받는 것을 알고서, 이 책을 썼으나 출판하기를 포기했다고 한다. 데카르트 시절만 해도 신앙의 지배가 약화 되었음에도, 마남사냥의 여파는 학문의 세계에도 넓게 너울처럼 덮여있었다. 이 너울을 벗어나야 진실로 살아가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생각은, 인민들이 ‘니르고자 홀배 있어도’ 자기 입말로 소통할 수 있는 시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마남사냥이 공개적이지 않던 1730년대를 들뢰즈는 다양한 발현(되기, 생성)의 시대라고 했었다. 그리고 백과전서파들이 인민이 물질과 더불어 생활하고 생각할 수 있는 방법들을 상세히 나열 하였다고 한다. 그 책은 삶의 터전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 활동을 넓히는 작업을 위한 작품이었다. 이 작업의 응용들은 다음 세기인 1830년대 이후에 거의 무제한의 영역으로 확장되었다. 이로부터 모순이나 우연과 달리 아자르(hasard, 주사위 놀이)라는 용어가 책을 가로질러 그리고 현상을 떠돌아 놀게 될 것이다.

이상하게도 비슷한 시기에 물질적 세계의 다양한 효과들을 발견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학의 세계에도 다양한 기호적 함수들을 발현하게 되었다. 게다가 사회도 이런 물질과 사유에게 각각의 이중적 측면만큼이나, 생명체로서 생명의 유기적 조직화의 다양한 가지치기들과 더불어, 사회제도의 조직화에서도 여러방식들이 등장하였다. 공산사회의 건설은 맑스와 엥겔스의 것만이 아니라, 미시시피강 가에 실제적인 공산사회를 건설하려는 프랑스 공산당의 활동도 있었다. 이런 사유의 발현, 물리적 세계의 발명, 생명체의 유기체 계열, 사회의 조직화의 결사들과 방향들 등은 기존의 스콜라적인 보편과 절대로부터 연역체계와 다른, 일상의 공통성에서 합의와 약속에 이르는 귀납체계의 진솔함을 생각하게 되었다. 현상에서 다양함과 삶과 사유 방식의 여러 갈래들이 무엇을 만들어 내었을까.

19세기 중반에서부터, 무작위 세계, 자연 세계, 추리 세계, 추상 세계 등에서 하나의 통일성으로 꿰뚫는 체계란 허구 또는 착각이 아닐까? 인간에게 통일성으로부터 도덕과 의식을 규정하는 것이 거꾸로 인간을 굴레 속에 또는 제도 속에 포로를 만드는 것이 아닐까? – 루소가 이미 이런 세상을 감옥으로 보았지만 – 세상의 현실 또는 상황은 아자르의 세계가 아닐까? 개연성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이상하게도 니체(1844-1900)와 말라르메(1842-1898)는 같은 시기에 다른 분야에서 다른 서술의 방식으로 이런 생각을 하면서, 각각의 사유에 주사위 놀이를 끌어 들였다. 삶의 과정이란 공중에 뜬 주사위와 같고, 놀이의 방식이 6면체든, 정20면체든 어느 면이 정해지는(이 세상을 뜨는) 시기까지 놀이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 놀이 과정들을 니체는 “도덕론”의 계보로, 말라르메는 기나긴 장편의 “책”이라는 제목의 ‘시’로 서술하였다고 한다. 어느 놀이든 인간답게 살아가려거나 인간답게 생각을 풀어보려는 것이리라.

이 둘에는 그 문헌들과 사유 과정 사이에 상응하는 방식을 하나로 통일시킬 수 있는 변증법같은 것은 없는 것 같다. 변증법이 아니라 다양한 발산의 과정에서 수렴들(주사위의 수 놓기)의 다변화에서, 그래도 함께 할 수 있는 공통 기반의 마련을 위한 평결을 만드는 방식이 중요할 것 같다. 당대까지 알려진 비례중항과 조화중항 사이에 있을 이다. 전자에서 연역의 길을 택하거나 후자에서 귀납의 길을 택하거나, 두 길은 인간의 신체의 활동(작동) 속에 이중화 현상이 있다는 것을 무시할 수 없었다. 좌파와 우파는 같은 표면 위에 배치되어 있다. 개인의 선택은 자유이고 의지이다. 그 인간들의 선택의 연관들을 그래프로 만들면 아마도 가운데가 볼록하게 올라온 종(鐘)모양의 가우스 곡선이 될 것이다. 그 곡선의 좌측은 자기 완성을 향한 가치를 추구하고, 우측은 완성된 제도 속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는 것일 것이다. 그럼에도 종 모양의 꼭대기와 같은 변곡점들이 역사의 과정 속에서 죽 있어 왔다. 마치 천개의 “고원”처럼, 지구의 역사 속에서는 수 만개의 “고원”을 형성했을 것이다. 개인에게도 변곡점이 있으며, 우리는 변역(變易)의 시기라 부르고 사회에서는 혁명(革命)이라 부를 것이다. (59TM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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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곡점의 좌우의 방향은 생각하는 방법들이 다르다는 의미(un sens)에서 방향차(un sens)이다. – 이 단어는 감관이라는 의미도 있다. – 그리고 각각이 생각하는 기술(techne, art)이 그 사람의 삶의 양태를 표출한다. 사람들의 양태들은 방향이 반대 방향으로 다를 수 있다고 해서 모순이라 할 수 없다. 지국의 남극과 북극을 모순이라 부르지 않고 지구의 자전으로부터 사유하는 기술을 갖는다. 우리는 항상 말하듯이, 좌편과 우편이 51 대 49가 되는 것이 좋은 양태의 시대일 것이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유시민이 말하는 현재 민주당의 가우스 곡선은 5 대 95인 것 같다. 문조털래유를 양키두들처럼 받아들이고 노래하고 놀이하는 것도 양태들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시민사회에는 사유 방식들의 차이는 여론조사가 종과 같은 현상을 드러내지만, 정점을 기준으로 거의 반반으로 갈라진 것 같다. 사유의 과정 상으로 그리고 사회의 변역 상으로, 적대적 관계가 아니라 합의와 평결의 연관을 통해 인격도 제도도 건강성을 유지할 것 같다.

돌이켜 보건데, 사림파를 제거한 무오사화 이래로, 그리고 사문난적을 기치로 마치 마남 사냥을 일삼은 노론 지배를 거쳐서, 근대에서 이들의 일제 부역자들의 놀이판, 이 후예들의 미제 숭배자들에 이르기까지 기울어진 평면이라고 들 했다. 우리 입말로 소통하기 시작한 지 80년이 지나, 좌파와 공화정을 이야기할 수 있는 변곡점에 이르렀다. ‘나랏말씀이 뒹국과 달라’ – “입말과 문자화가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와 다르기에” 새로운 공화국을 창안하리라. 우리나라는 한자 문화권에서 특이하게 우리입말과 우리 문자화가 있다. 통일과 공화정은 소통이 잘 이루어지는, 이론상 이런 이론이 6.5명을 거치면 거의 전체가 소통된다고 했느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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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은 전두환 군부쿠데타 시절에, 학교가 문을 닫았을 때 집에서 수업을 하겠다고 계엄군부에 신고했는데, 수업을 못하게 해서 그해 5월 18일 이후 그 학기에는 강의를 못했다. 그는 다음 학기에 수업이 다시 열리면서, 학자들이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아서 그렇다고 또 다시 한탄하셨다. 서울대에서만이라도 이렇게 많은 교수들이 있는데 제대로 공부하는 교수가 없다는 말씀이 이해가 안되었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에 나는 당시 아직 어렸었구나 하고 되돌아본다. 이런 생각에서 철학사에서, 그리스 민주정 시절에 소크라테스와 그 제자들의 계열들을 들여다보기도 했다. 그리고 “빛들세기”에 루소와 그 주변의 유물론자들이 왜 달리 말하기 하는 시기에 제3신분과 인민이 등장하였는지, 프랑스 인민이 인민의 입말로 소통하는 공화정으로 나갈 수 있었는지에 대해 흥미로웠다. 19세기 말 다양한 공간 개념들과 더불어 시간(지속)에 대한 논의들에서 여러 종류의 직관들을 제기하였다. 이 즈음 철학도 수학들(les mathematiques)처럼 복수로 철학들(les philosophies)이고 써야 한다고 했다. 이런 경향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에 여러 혁명들을 거치면서, 더불어 삶의 터전에서 다양한 발현들, 분화들에서 나오는 방법들이 실증적으로 다른 길들이라는 것이 알려진 것도 한 몫 하였으리라.

하나의 원리로부터 또는 하나의 방법으로서 연역법이 모든 사실들의 자료(la donné)들을 다루는 것이 유일하고 보편과학의 학문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중세의 보편 논쟁에서 한번 걸러졌었다, 그리고 대혁명에서 제3신분의 등장과 더불어 공공과 공화의 의미를 달리 생각했으며 터전에서 삶의 토대에는 귀납적 방법이 먼저이고 연역은 결과를 이용한 현실에서 적용에 방법적 차이들이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19세기 초반에 미적분은 정태적 공간에서뿐만 아니라, 동태적 공간과 지속하는 시간에서도 적용 가능했다. 그 적용의 방법들은 현상들의 영역에 따라 달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들로서 열역학에서 열의 전파의 세 국면, 전자기학에서 자기장의 삼중성, 빛의 운동의 파동과 입자의 양면성에 보태어 열에너지의 발산, 소리의 파장에서 결들의 회절과 중첩에 이어서 크기와 높낮이에 보태어 고유한 음색에 대한 3국면 등의 논의에서, 구성과 구축보다 조성에서 공명을 이루는 조화를 다시 생각했다고들 한다. 이런 의미에서 심리학이든 물질계든 내재성의 다양성을 제기하는 자료들(les données)을 여성으로 쓴 것 같다.

앙리 벩송(Henri-Louis Bergson, 1859 ~ 1941)

이런 다양한 방법들의 방향과 영역들마다 적용 방식에 따른 수학적 함수들의 다양성도 제기되었다. 보편 또는 절대의 용어들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다시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 보편적 진리를 말하는 정신이 있기나 한가? 오성, 지성, 이성이라고 부르는 인식 역량들은 자연을 또는 인간적 자연(la nature humaine)을 제대로 다룰 수 있는가? 인식 역량의 최상위로서 정신을 먼저 설정한 것이 보편자와 절대자의 선전제에 근거하면서, 선전제 미해결의 오류(악순환)를 범하고 있지는 않는가? 인간의 인식능력이 신적 정신에 못미친다면, 그 못 미치는 점이 무엇이며 무엇을 자료로 삼는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뒤따랐다. 진리(la vérité)가 있다와 절대적 또는 보편적 진리가 있다는 것이 같은 말인가? 신이 아닌 인간이 불완전하기에 절대적 보편적 진리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지금까지 진리라고 말하는 것을 검증할 수 있는(vérifiable) 것까지만을 진리라고 하는 것이 솔직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검증 가능한 진리는 무엇인가? 이로서 모든 진리들은 가능한 조건 속에서, 가능한 범위 안에서, 가능한 세계 내에서, 가능한 추론 영역 속에서, 이루어진 것 이외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데, 그 검증 가능성에 대해서는 열역학 제2법칙의 문제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과학자들이 말하는 진리는 일정한 범위, 영역, 함수, 범주 안에서 체계의 획일성 또는 정합성이지, 자연의 모든 현상들과 사건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이유에서 열역학 연구자들이 진리의 개연성을 주장하는 것인데, 고대 그리스의 고르기아스의 불가지성, 아케데미 학당의 후기(9대학당 이후)에 이데아의 개연성, 데카르트의 방법적 회의의 제기 등도 진리의 확실성을 보증해주는 것이 결국 인간의 인식 능력이 아님을 보여준다. 이 인식 역량들조차 다양하고(다곱성), 서로의 체계들 간에 정합성을 찾을 수 없어서 대립 또는 반대되는 경우들이 있는데, 이들 사이의 대립이 모순이 아니라 체계들 사이에 정합성이 서로 환원되지 못하는 체계들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각 체계가 진리 검증을 통해 모든 것의 진리가 아니라, 한 조건 안에, 또는 한 경계의 틀 안에서 진리일 뿐이라는 측면에서 독사들인 셈이다. 한 체계의 독사에 대해 다른 체계의 독사라는 것이, 즉 독사의 독사가 파라독사인 셈이다. 이를 눈치챈 것은 집합론의 여집합을 무 또는 부재로 놓았던 것을 현존의 한 요소로서 취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았던 러셀이다. 물론 레셀 이전에 프레게가 이미 제시했지만, 비존재를 현존으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 또는 부조리로 취급했다가, 그 추론 자체가 스스로가 부조리에 빠진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다. 연역적 체계의 논리적 추론 상, 왜 열은 평준화되어 절대 온도에 이르지 않는가? 지금까지 진리를 맞다고 하는 것에 잘못이 있는 것이 아닌지. 이런 생각은 열역학처럼 사물들 속에서, 수학에서 수의 기원에 대해서, 또한 기하학의 점이 현 위에서 또는 소리의 결(파동) 위에서 점과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언어에서 추론의 최고 류 항목(류 개념)이 인위적이 아닌지를 회의하였다. 언어에서 모든 용어는 고정적이고 정태적이 아니라 지속적이고 동태적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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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사와 더불어 수학사를 읽으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보편이니 절대니 무니, 무질서니, 정태적이라는 용어들이 착각이라는 점이다. 벩송도 착각이라고 한다. 진리가 있다고 믿는다는 말과, 오류가 있어도 믿는다고 하는 말이, 어쩌면 들뢰즈식으로 표현하면 같은 기호화작용(signification)이라는 것이다. 브룅슈비끄 식으로 말하면 같은 은유, 유비, 상징, 알레고리(une allégorie), 비례(une proportion)등으로 공통성과 공유성이 함께 하는 합의에서 온 것이 아니겠는가. 추론하여 더 나아가 추상하여 기호를 체계화하는 것이 인식의 틀(도식)에 가깝다. 이런 틀이 하나여야 한다는 것이 오성, 지성, 이성의 착각이 아닐까 한다.

일반적으로 철학사에서 수(數)와 원자(原子), 그리고 하늘 운행의 점(원주의 점)과 음향의 점(현의 점) 등이 유비와 은유처럼 같은 기호일 것이라고 여겨왔던 것 같다. 그리고 이런 기호화의 의미를 진리일 수 있게 하는 것, 지성(인식역량)이 기호화를 체계화한 것, 이것이 말로서(공통의 상식) 소통하는 항목들의 설정에서 온 것이라 한다. 이 항목의 체계화가 논리학일 진데, 이 논리학에서 항목들의 계층을 이루어 류와 종 또는 최고류와 최하종으로 등등 계속에서 분류 또는 분할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논의의 진실은 공동체의 공공성과 체제의 공화에 있을 것인데, 이런 추론의 규칙이 진리에 이르는 길이라고 여긴다. 이 입말의 소통은 이런 규칙에 근거한다. 그 규칙이 법칙으로 그리고 원리로 그리고 하나로서 최고 류에 이르는 추리 방식은 인류 공동체의 삶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런 공통 규칙으로부터 정의, 공준, 공리 등을 세워서 수학적 체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규칙이 영역들 중에서 부분이라고 추리한 것은 19세기 중반이었다. 규칙의 생성이 동일한 하나에서 나왔을까? 반성하건대 수, 원자, 천문의 지속점, 소리의 결점 등은 성질이 서로 다르다는 것이다. 알려진 이런 네 가지가 이상하게도 언어의 규칙에서 검증할(vérifiable) 수 있는 것으로 여겼다. 이 검증의 터전이 공동체이며, 이런 검증이 잘 이루어져 삶의 터전을 조화롭게 하는 것이 사회이다. 사회의 중요성이 이쯤에서 등장하는 것과 꽁트의 사회학이 등장하는 것은 같은 궤도 상에 있다.

언어에서 항목 또는 용어의 기준 마련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간단하게 합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 합의는 대상에 대한 지시어가 같아야 할 것이다. 이 지시어의 합의에서 용어, 말, 소, 감, 대추 등은 상식의 공유, 공공화일 것이다. 그러면 사람에게도 환인, 길가메시, 헤라클레스의 항목은 정지된 상태의 이름일까? 여기서 흥미 있게도 원시 문명을 연구가나 (범죄) 심리학에서 그 항목은 동적인 또는 긴 삶의 과정을 포함하는, 즉 운동하고 지속하는 삶의 총체를 이름하여 항목으로서 개체의 이름을 부른다고 한다. 언어의 항목이 ‘소’라는 용어가 성체의 ‘소’만이 아니라 태어나서 자라고 성체가 되는 과정을 일컬어 운동하는 과정의 총체로서 ‘소’이다. 벩송이 단어(명사든 고유명사든)가 정태적이 아니라, 동태적(지속적)이 먼저이고, 편리와 적용을 위해서 한 부분을 잘라서(분할하여, 플라톤의 이데아도) 대표(대리, 표상, 재현)로서 이름을 부르고, 그 사회에서 통용하는 용어로 또는 개념으로 쓰인다고 한다.

19세기 후반에 용어, 항목, 개념, 관념 등이 학문의 분과학들의 편리한 기호 작용이라는 것을 제시했었다. 한 용어가 문제 제기되는 경우는 이미 선불교에서 선문답에서 다루었었는데, 한 영역과 다른 영역의 지시에서 다르거나(공안), 행위자들의 의도와 의지를 포함하여 서로 간에 차이가 제시되어서 말투를 달리하거나(선문답), 더 나아가 다른 사회 제도와 다른 인식 체계에서 공통적 진술(명제)의 차이들이 드러나는 기호화 방법들의 계열이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화두의 기호화의 차이). 이들을 종합하여 하나로 만드는 것은 강압과 폭력을 동반하는 데 비하여, 이들 사이의 조화와 공감을 통한 평결과 합의를 찾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만 이를 찾기 위한 노력을 통하여 제도 상으로 민주제와 공화제를 만들려고 하는 것이 역사였다. 단일 체계의 통일성을 만드는 것은 명령과 강압을 통해서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속박과 구속의 삶인데 비해, 자아의 만들기와 더불어 자유 실현의 과정에서 계약과 평결을 통한 공화의 길은 노력과 학습이 함께 행해야 할 것이다. (59TMA)

(4:24, 59TMC) (5:24, 59TMCC)

아우드로네 주카우스카이테 지음, 『유기체지향 존재론』(갈무리, 2026.10) 서평

『유기체지향 존재론』 : 생명정치를 거역하는 생명

 

 

정현주, 전남대학교 학술연구교수

 

 

 

1. 생명정치에 대한 문제의식

 

류성실의 작품 <Ten Thousand Dreams>(2026)은 여학생 교복을 입은 12개의 마네킹이 합창을 하는 장면을 연출한다. 성공에 대한 국가의 강박적 야망을 드러내는 합창은 거대한 집단적 규율을 이룬다. 서사는 국가의 ‘꿈’을 개인에게 심는 교육의 참모습과 이를 거역하려는 반체제적 불협화음을 동시적으로 표출한다. 피날레에서 한 마네킹의 치마가 위로 들쳐지면서 그 자궁으로부터 강렬한 빛이 관객에게 뿜어져 나오는 순간, 이 압도적 장면이 드러내는 것은 교육과정에 침투해 생명의 모든 영역을 장악하고 조작하는 생명정치다. 이 암울한 전망 속에서 생명정치적 통제에 대항하는 일은 어떻게 가능한가? 만약 가능하다면 무엇에 근거해 우리는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유기체지향 존재론』의 문제의식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렘케에 따르면 생명정치를 규정하고 그 의미를 밝히는 작업은 가치중립적 활동이 아니라, 도리어 그 탐구가 불가피하게 변화와 갈등을 야기하는 이론적이고 정치적인 영역의 작업이다. 주카우스카이테(A. Žukauskaitė)는 유기체와 유기적인 것(the organic)의 내재적인 ‘저항의 존재론’을 정립하기 위한 시도로 나아간다. 이는 생명 자체의 저항 역량을 규명하는 일이다. 저자가 인용하는 푸코와 들뢰즈, 말라부의 관점에서 그 잠재력은 생명체의 구조 자체에 새겨져 있다. 그녀는 이러한 유기적인 것의 특성이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에 대립하는 실체적 거점이 될 수 있는지를 묻고 입증하고자 한다.

 

저자는 서론에서 칸트의 ‘자연목적’ 및 내재적 인과성 개념에서 출발하여, 폰 베르탈란피의 일반체계이론, 위너의 사이버네틱스, 그리고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성(autopoiesis) 이론을 차례로 엮어낸다. 칸트 이후 유기적인 것에 대한 사유는 고전적 기계론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했다. 유기체는 외부의 원인이나 선형적 인과성으로 환원되는 기계적 모델과는 달리, 재귀적이고 내재적인 인과성을 따라 스스로를 준거하고 변형하며 우연성을 내부 질서로 통합한다. 특히 사이버네틱스적 관점에서 살아있는 유기체는 포도당 등을 이산화탄소, 물, 요소로 연소시키는 열기관이며, 살아있는 유기체와 기계/기관은 분리되지 않는다. 또한 기계가 유기체 작동을 모방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기체와 기계는 아무 차이도 없다. 실제로 사이버네틱스의 자기조직화 개념은 기계론과 생기론 사이의 논쟁을 그 근원에서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결과적으로 유기적 사고는 마뚜라나와 바렐라의 자기생성이론과 연결됨으로써, “스스로 조직하고 스스로 산출하며 변화할 수 있는 자체의 역량”이라는 생명 자체의 자기조직화·자기생성·가소성이라는 내재적 역량을 도출하는 이론적 기초를 구성한다.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일반체계이론, 사이버네틱스, 자기생성체계, 일반 기관론으로 이어지는 유기적 사고의 흐름을 짚어냄으로써 생명체 고유의 자기 주도적인 자기조직화 역량을 입증하고자 한다.

 

 2. 유기체지향 존재론의 세 원리

 

따라서 생명정치가 위계질서를 창출하고 분할과 배제를 통해 생명을 수량화·착취할 때,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다음의 세 가지 개념을 핵심 원리로 삼아 이에 저항한다. (1) 유기체가 지닌 가소성을 통해 입증되는 과정성(Processuality)은 존재를 지속적인 개체발생으로 보는 가장 상위의 원리다. 생명의 가소성은 권력체계가 생명을 통제·조절·착취하게 만드는 조건인 동시에, 역설적으로 고정된 도식을 지속적으로 벗어나 맞설 수 있는 생명 고유의 역량이기도 하다. (2) 저자는 유기체를 총체적 실체가 아닌, 다양한 이질적 요소들이 유기적으로 뒤얽힌 들뢰즈적 회집체(assemblage)로 이해하고 이를 공동생성(sympoiesis) 개념과 연결하면서 철학적 출구를 마련하고자 한다. 저자에게 회집체란 환경·미생물·공생체·테크닉적 확장 등 이질적인 요소들이 수평적으로 결합하는 다중성(Multiplicity)을 특징으로 하는 통생명체(holobiont)다. 이는 유기체를 단일하게 경계 지어진 개체나 총체로 보는 생명정치의 위계와 구획에 저항할 수 있는 존재론적 역량을 드러낸다. (3) 유기체가 단순한 외적 자극에 선형적으로 반응하는 기계가 아니라, 우연성과 자극을 내재적으로 흡수하여 완전히 새로운 구조와 행동 양식을 창조하고, 쇠퇴, 질병, 트라우마, 사멸로 나아가는 존재라는 점은 예측 불가능한 질적 변화를 함축한다. 이러한 잠재성(Potentiality)과 비-잠재성(impotentiality)은 생명정치적 공학을 맞서 약한 신체들에도 동등한 존재론적 가치와 존엄을 부여할 수 있는 자율적 역량이 된다. 나아가 유기체 고유의 자기조직화·자기결정모델은 인류세 등의 행성적 위기와 생물학적·테크놀로지적 얽힘을 새로이 사유할 수 있는 철학적 조건을 제공한다.

 

이 서론에서 구축된 프레임은 본문의 제1장부터 제7장에 이르기까지 전후 프랑스철학, 일반기관론, 행성적 가이아 이론, 공동생성 담론을 관통하는 핵심이다.

 

 

<유기체지향 존재론>, 갈무리, 2026

 

 

3. 시몽동에서 일반 기관론까지의 사상사적 계보

 

주카우스카이테가 유기체지향 존재론을 통해 본론에서 그려내는 것은 대륙철학 전통의 사상사적 지형도다. 게다가 이 존재론의 시작과 끝을 이루는 개념의 토대가 대륙철학의 것이라고 해도 저자가 최종적으로 시선을 두는 곳은 전후 프랑스 철학자들에게 미친 사이버네틱스의 영향이다. 즉 이들의 존재론에 이식된 재귀적 자기조직화와 내재적 인과성이다. 이것은 외부의 선형적 인과나 초월적 목적론을 거부하고, 체계가 스스로를 끊임없이 준거하며 우연성을 내부 질서로 통합하는 작동 원리이다. 시몽동은 실체 형이상학과 전통적 질료형상론과 씨름하기 위해 존재론의 중심에 과정과 변화의 잠재성을 설명하는 개체화(individuation) 이론을 위치시킨다. 뤼예 또한 형태발생 과정을 분자형태학으로부터 아무 공백 없이 자체 내부의 질적 변화를 주도하는 자기조직화 활동의 하나로 봄으로써 형태가 미리 결정되어 수량적으로만 확대된다는 전성설 및 유전자 중심주의와 결별하고,10) 유기체를 동등잠재성과 자기살핌의 역량을 갖춘 ‘일차 의식’으로 정의한다. 이때 뤼예의 의식개념은 어떤 외적 관찰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자기준거적 회로로서 내적 시각에 해당한다. 두 사상가 모두 미리 형성되거나 완결된 상태로 존재하는 고정된 ‘개체’ 개념을 배격하고 변화와 생성의 주체를 생명으로 보며, 따라서 유기체가 스스로 질적 형상을 만들어내는 내재적 주체라는 점에서 자율적 자기조직화를 고려한다는 공통점을 보여준다.

 

주카우스카이테는 들뢰즈의 독해에 있어서 시몽동 수용을 통해서는 사이버네틱스의 자기조직화 원리를 연결시킨다면, 뤼예의 수용을 통해서는 제2차사이버네틱스의 자기관찰 체계 및 재귀적 인지 모델을 연결시킨다. 들뢰즈는 시몽동의 ‘전-개체적 상태와 개체발생의 구도를 잠재적인 것(virtual)과 현실적인 것 사이의 차이를 생성하는 상호연출로 변형한다. 그런데 잠재적인 것이 현실화되는 개체발생 과정에서 역동성의 수용자로서 애벌레/배아적 주체성은 뤼예의 일차 의식, 곧 유기적 의식과 공명하며 이는 나아가 바렐라의 자기 없는 자기라는 신체화된 재귀적 인지 개념과도 연결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뤼예의 일차 의식은 말라부의 내재적 가소성과, 스티글러와 육 후이의 일반 기관론의 기술적(technical) 객체의 내재적 발전으로 확장되는데, 이는 유기체의 내재적 자기조직화 역량이 신경망의 유기적 가소성을 거쳐 외부 테크놀로지 및 사회적 기관으로까지 집단적으로 확장되는지에 대한 단계적 답변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칸트로부터 스티글러·육후이까지 저자가 쌓아올린 대륙철학의 사상사적 계보는 뇌/신경계, 유기적 신체, 기술, 사회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서로 분리된 실체가 아니라, 재귀적 자기조직화와 가소성 개념을 핵심 축으로 공유하는 하나의 연속적인 생명-기술적(life-technical/technological) 회집체임을 입증한다. 이는 다시금 해러웨이의 통생명체/공동생성 담론을 연결하는 강력한 사상적 다리가 된다. 그리고 생명정치에 대항하려는 저자의 확고한 입장은 행성과 생물학적 혼종의 관점으로 나아간다. 생명 자체가 비유기적·기술적 확장 및 타자들과의 공생을 통해 스스로를 조직하는 포괄적 회집체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4. 행성, 생물학적 혼종으로의 확장

 

해러웨이는 생물학적 세계에서 그 어떤 것도 스스로를 혼자 만들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녀의 통생명체/공동생성의 논리에는 신경계와 살아있음의 조직 자체는 작동적으로 폐쇄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는 외부의 타자를 직접 만날 수 없다는 자기생성이론에 대한 문제의식이 놓여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생성이론만으로는 환경에 적응하여 스스로의 체계를 유지하는 ‘항상성’을 설명할 수는 있어도, 새로운 구조가 출현하고 생명정치적 통제를 벗어나는 ‘질적 변화와 저항’이 가능한지 설명하기 어렵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이 지점의 어려움은 신경계 내부의 관점과 환경 내에 거주하는 유기체를 관찰자가 외부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충돌하는 논리적 공백으로부터 온다.

 

저자는 해러웨이의 문제의식을 그대로 공유하기보다는 다른 경로를 모색한다. 이 경우 주어진 과제는 자기생성체계의 구조결정론적 폐쇄성을 극복하기 위해 왜 생명이 비 유기적 테크닉적 객체(일반 기관론)나 생태-면역학적 관용이라는 인터페이스를 매개로 환경으로 외부화된 회집체를 형성할 수밖에 없는지 그 당위성 설명하고 자기생성과 타자생성/공동생성을 아우를 수 있는 지점으로 나아가는 경로를 확보하는 데 있다. 저자는 울프의 논의를 빌려 해러웨이의 통생명체 또한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처럼 회집에 대한 다양한 정도의 개방성을 요구하기 때문에 경계를 전복해야하는 사태에 마주하게 되는 모순을 경고한다. 그리고 유기체지향 존재론은 자기준거체계와 가이아 이론을 연계시킨 바렐라 및 클라크의 견해를 따라, 체계(system)는 전체성을 함축하지 않는다는 사이버네틱스적 정식화의 수용으로 나아간다. 자기생성체계의 폐쇄성은 오히려 체계 내부의 재귀적 연산을 통해 우연성을 수용하고 환경과의 연결성과 복잡성을 증대시키는 근원이다. 그리고 폐쇄성의 함축으로서 공동생성은 자기생성을 내부로 포섭하여 더 높은 차원의 복잡성으로 확장하는 공생적 연동(symbiotic couplings)으로 나타난다. 결국 유기체지향 존재론이 입증하는 것은 자기생성 체계를 축으로 한 가소적이고 공생적인 생명-기술적 회집체이다. 이는 생명을 규제하고 수량화하려는 국가적·생명정치적 통제에 남김없이 포섭되지 않는 가장 급진적인 내재적 저항 거점이 된다.

 

북리뷰를 마무리하며, 여전히 한 가지 의문이 남는다. 생명정치에 대한 저자의 문제의식은 타당하다. 그렇다해도 우리는 어떤 유기체가 지닌 생태적 적소의 본질이나, 어디까지 그 범위가 미치는지는 오직 그 적소를 통합하는 유기체의 ‘살아있음’의 방식을 관찰해야만 비로소 알 수 있다. 지구 위의 수많은 다양한 종류의 유기체가 생태학적 유기체-적소 단위체들로 된 다양한 연결망을 통합하면서 존재할 때, 가이아를 단순히 자기생성체계이자 공동생성체계로 암시하는 방식은 그 행성적 본질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6- 추론의 자기 지양

1)

필연성(관계) 추론은 정언 추론에서 가언 추론을 거쳐 선언 추론에 이른다. 이 선언 추론이 추론의 마지막 형식이다. 필연성 추론은 주어와 술어를 매개하는 것이 유 즉 실체다. 유는 한편으로 단순한 규정성인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유가 실현된 개별적 종의 전체이다. 유적 본질이 특수성에 해당한다면, 종의 전체는 곧 일반성을 의미한다. 유 자체는 구체적인 개별성에 해당한다.

정언 추론은 현존 추론의 일격[E-B-A]을 따른다. 그 매개는 특수자[유적 본질]로서 유인 동시에 유 자체이다. 정언 추론에서는 유적 본질이 대전제에 언표된다. 소전제에서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가 제시된다. 여기서 아직 일반자로서 유는 우연한 개별자 속에 감추어져 있다.

가언 추론은 이격[B-E-A]을 따른다. 가언 추론의 매개는 일반자로[A와 B의 관계]서 유와 개별자의 존재[A라는 존재자)다. 가언 추론에서는 대전제에서 개별자의 조건적 관계를 통해 제시된다. 이 조건 관계는 실체적 연관을 의미한다. 소전제는 개별자의 존재를 나타낸다.

가언 추론에서는 우연한 개별자 사이의 관계를 통해 개별자 전체가 제시되지만, 여기서 개별자의 관계 즉 실체적 연관은 개별자에 외면적이어서 이 개별자는 직접적이고 우연적이므로 그 전체는 진정한 전체로서 유를 이루지 못한다.

2)

이제 정언 추론이나 가언 추론과 비교해 선언 추론의 형식을 살펴보자. 헤겔은 선언 추론이 삼격의 도식[E-A-B}을 지닌 것으로 설명한다. 그는 선언 추론의 형식으로 매개가 긍정적인 것과 부정적인 것을 동시에 제시한다. 결론은 그 반대로 나온다. 매개가 긍정이면 결론은 부정이고, 매개가 부정이면 결론은 긍정이다.

긍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이다. 그러므로 A는 C가 아니다.

부정적 형식:

A는 B 또는 C이다. A는 B가 아니다. 그러므로 A는 C이다.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에서 바뀐 것은 대전제에서 가언 판단이 선언 판단으로 바뀐 것만은 아니다. 사실 형식 논리학적으로 가언 판단과 선언 판단은 서로 교환될 수 있으니, 이런 대전제의 바뀜이 중요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오히려 선언 추론에서 이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entweder oder, negative Einheit, gegenseitig]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B와 C는 서로 배타적이며 그런 한에서 유의 전체를 이룬다. B와 C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다는 사실은 소전제와 결론이 서로 부정적이라는 데서 알 수 있다.

형식적으로 보아서 대전제의 선언 판단은 반드시 배타적인 통일을 이룬 것은 아니다. 그러나 선언 추론은 형식상 이미 소전제와 결론을 통해 배타적 통일성을 부여하고 있다. 배타적 통일성이 아닌 선언 판단이 가능하지만, 배타적 통일이 없는 한 선언 추론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헤겔은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을 이런 배타적인 통일을 지닌 것에 한정한다. 사실 배타적 통일성이 없는 선언 판단이나 선언 추론도 가능하다. 일반 논리학에서 선언은 이런 비배타적 관계를 지닌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헤겔이 선언 추론을 배타적인 것에 한정한다. 그 이유는 배타적 통일을 지닌 선언 추론만이 다른 형식과 비교해서 새로운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일 것이다.

3)

헤겔에서 유는 항상 배타적으로 분화한다. 배타적 관계는 타자를 통해 자기에 관계하는 것이며, 곧 부정의 부정을 통한 관계다. 만일 선택지가 배타적인 통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그것의 전체는 유를 이루지 못한다. 그런 전체는 서로 무차별한 개별자의 집합일 뿐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인종의 구별은 유를 이루지 못한다. 황인종, 백인종, 흑인종은 서로 배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동물은 파충류, 포유류와 유인원 등으로 구분되는데, 이들은 흔히 동물 유의 종으로 여겨지지만, 이는 형식적인 의미에서만 그러하다. 헤겔에서 이런 구별은 유가 개념적으로 분화된 종이 아니다. 오히려 암컷과 수컷의 구별은 생물체의 유를 이룬다. 유는 암수로 구별된다. 암수만이 생물체 유의 종이 될 수 있다.

결과적으로 가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세 가지 규정을 동시에 지닌다. 대전제에서 주어는 A는 개별자의 배타적 통일(B or C)로서 유 즉 일반성을 의미한다. 소전제에서 A는 특수성으로서 유 즉 특수화된 종(B)이다. 결론에서 A는 특수성의 부정(-C)이니, 곧 개별성을 의미한다. (부정적 형식에서는 소전제가 개별성이고 결론이 특수성으로 될 것이다.)

이제 매개가 모든 개념 규정성을 총체이므로 이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이미 정언 추론에서 내용상 동일성이 출현했다. 그러나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면 내용상 동일성은 형식상의 동일성으로까지 발전했다.

“선언 추론 안에 개념의 총체로서 설정된 중심은 그 자체로 두 극단을 완전한 규정성 속에서 포함하고 있다. 이 두 극단은 중심과는 구별된 가운데 다만 정립된 것으로 존재할 뿐이니 중심에 대립하는 더 이상 본래적인 규정성이 그런 정립된 극단에 속하지 않는다.”(주관 논리학, GW12, 124)

4)

추론이 여전히 주관성에 머물렀던 것은 추론의 양극단을 매개하는 매개 항이 양극단에 대해 외면적인 추상적 규정성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선언 추론에 이르러 양극단과 매개 항은 모두 내용적으로 유를 의미하며, 동시에 형식적으로도 매개는 주어와 술어의 규정성을 자기 안에 포함한다.

“[추론에서] 이러한 형식주의적인 것 또는 주관적인 것이 성립하는 원천은 양극단을 매개하는 자가 추상적 규정으로서 개념이며 이 매개하는 추상적 규정이 자기가 통일하는 양극단과 구별된다는 데 있었다. 반면, 완성된 추론[선언 추론]에서 객관적 일반성[유]이 그에 못지않게 형식적 규정들의 총체로서 정립되면서 매개하는 것과 매개되는 것 사이의 차이가 제거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25)

이제 매개와 매개되는 것, 전제와 결론의 구별이 사라지고 “매개되는 것은 매개되는 것의 본질적 계기이고” 각 계기는 매개를 통해 필연적으로 출현한다. 여기서 매개는 현존 추론처럼 타자를 전제로 하지 않으며 반성 추론처럼 자기의 결론을 전제하지 않고 각 항의 동일성을 통해 더는 매개가 필요하지 않으니, 이미 추론이라는 매개를 넘어선 직접적인 된다.

이제 종합적으로 추론의 각 형식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추론에서 각 항은 개별성, 특수성, 일반성이라는 개념 규정성을 지닌다. 여기서 매개 항은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어야 한다. 그래서 매개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당위는 추론이 발전하는 가운데 실현된다.

우선 현존 추론에서 매개는 각 추상적 규정을 교대로 지닌다. 반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별성과 일반성의 직접적 결합으로서 양면성을 지닌다. 마지막 필연성 추론에서는 매개는 개념 규정성의 총체이다.

이와 같이 매개가 양극의 규정성을 통일하면서 매개와 매개된 것이 구별되지 않으면서 개념의 분화가 지양되고 마침내 통일이 회복된다. 이 통일성은 다만 내적인 분화에 머물렀던 개념이 아니라 판단을 통해 분화가 이루어진 동시에 추론을 서로 통일된 것이다. 이렇게 분화된 가운데 통일된 것이 세계의 총체 즉 객관성이다.

“추론은 매개이며 개념이 완전하게 정립된 것이다. 추론의 운동은 이 매개를 지양하는 것이며 이를 통해 그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오직 타자를 매개로 해서만 존재하게 된다. 따라서 그 결과는 매개의 지양을 통해 출현한 직접성이며 그에 못지않게 매개와 동일하게 된 존재이니 그 존재는 개념이되, 자신의 타자 속에서 그리고 그 타자를 통해 자기 자신을 회복한 개념이다. 따라서 이 존재는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사태 즉 객관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6)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5-필연성[관계]의 추론

1)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개별자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 즉 개별자의 전체이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 이르면, 매개 항은 곧 일반성인데 단순하게 된 것 즉 유이다.

매개 항인 이 유는 두 가지 방식으로 규정된다. 첫 번째는 ‘단순하게 규정된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을 통해 규정된 유이다. 유적 본질이 ‘규정성’이라는 측면에서는 현존 추론의 매개 항과 같은 특수성이다.

두 번째는 구별된 개별자[종]의 전체[일반성]로서 유이다. 헤겔은 이를 ‘충족된 단순한 일반성’으로 규정한다. 개별자 전체라는 점에서 이 매개 항은 반성 추론의 매개 항과 같다. 이 일반성은 전체라는 점에서 일반성이며 동시에 개별성의 전체라는 점에서 개별성이다.

매개 항인 유 즉 실체는 우선 일반자의 본질이 단순화된 것이므로 이 점에서는 일반성과 특수성, 개별성을 동시에 지닌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단일한 규정성이었고 격의 변화에 따라 교체되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이중적인 것이었으나, 내적인 전체성이 점차 표면으로 부상하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필연성 추론에서 매개 항은 세 가지 개별 규정을 동시에 포함한다는 점에서 앞의 두 추론과 구별된다.

이 추론이 필연적인 것은 매개 항이 양극단의 규정성을 동시에 포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의 주어는 유가 실현된 개별성이며 결론의 술어는 일반성 즉 유적 본질인데, 매개 항으로서 유는 한편으로 유적 본질이며 다른 한편으로 개별자 전체이니, 이 매개 항은 결론의 주어와 술어를 필연적으로 결합한다.

양극단의 내용은 매개 항이 출현하는 다른 형식일 뿐인, 양극단과 매개 항은 내용상 동일하지만, 다만 형식이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추론의 각 항이 지닌 형식 규정은 독자적으로는 비본질적인 형식이다. 이 필연성 추론은 그 추론이 필연성을 띠기 때문에 그렇게 불린다.

2)

정언 추론은 형식적으로 현존 추론의 일격이나 반성 추론에서 전체성 추론(연역법)과 유사하다. 그러나 이 추론들에서 대전제를 이루는 명제가 서로 다르다. 현존 추론에서 대전제는 단순한 질적인(현존) 판단이다. 여기서 술어는 추상적 우연성이다. 전체성 추론에서 대전제는 전칭 명제이다. 그 술어는 필연성이다.

정언 추론에서 대전제는 정언 판단이다. 즉 주어는 어떤 유이고 술어는 그 유가 지닌 종차 또는 유적 본질이다. 예를 들자면 ‘사람은 사유하는 동물이다’와 같은 명제이다. 정언 추론의 소전제에서 술어는 대전제의 주어와 같은 유이다. 이 소전제에서 주어는 그 유에 속하는 단순한 개별자이다. 그러므로 이 개별자는 유가 실현된 우연한 개별자이지만, 그 속에 이미 유가 들어 있다.

그러므로 정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유이며 논리적 범주로 말하자면 실체이다. 이 실체는 유가 실현된 개체들의 ‘단순화된’ 집단을 말한다. 예를 들자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아니고, ‘사람의 유적 본성(예를 들어 사유)’도 아닌 유 자체 즉 실체이다.

매개 항으로서 유는 결론의 술어로서 유적 본질과 결론의 주어로서 유가 실현된 개별자를 결합하는 것이니, 이 추론은 필연적이다. 세 가지 항이 사실은 동일한 내용이지만, 다만 형식상으로만 서로 다르게 표현되어 있으니, 이미 내용적으로 본다면, 동일한 내용이 반복되니 이미 추론을 넘어선 것이다.

현존 추론에서 각 항은 서로 자립적이므로 여기서 추론을 통한 매개는 외면적이다. 이 추론은 형식적으로 타당하더라도 내용적으로는 모순에 이를 수 있다. 반성 추론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삼으므로, 이 추론은 내적으로는 필연적이지만, 아직 각 항의 자립성이 남아 있어 추론으로서 모습을 유지한다. 그런데 정언 추론에 이르면 형식만 다를 뿐, 내용은 동일하므로 추론은 이미 자기를 지양한 것이니 추론의 모습은 겉보기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 한에서 정언 추론은 더 이상 주관적이지 않다. 그 항들의 동일성에서 객관성이 시작된다. 중심은 양극단과 내용상으로 동일하며, 양극단은 그 중심 안에서 각자의 자립성을 지닌 채 포함되어 있다.”(주관 논리학, GW12, 120)

정언 추론에서 아직 남은 것이 있다면, 이 형식상 차이 때문에 남아 있는 추론의 겉보기 모습조차 사라지는 것인데, 이것은 가언 추론과 선언 추론을 거쳐 제거된다.

3)

정언 추론에서 소전제의 주어는 개별자이며, 이는 실체가 실현된 우연한 존재다. 따라서 다른 개별자 역시 이 개별자에 못지않게 실체에 속할 수 있다. 거꾸로 보면 이 개별자는 실체에 속하지 않는 다른 직접적인 성질을 지니는 것이며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한다는 것은 다만 내적인 필연성에 지나지 않는다.

그 결과 정언 추론은 가언 추론으로 이행한다. 가언 추론은 정언 추론의 진리다. 즉 정언 추론에서 여기서 두 가지 개별자의 실체적 연관은 내적인 필연성으로 남으며 각 개별자는 서로 무차별하게 존재하니, 바로 이 내적 필연성으로서 실체적 연관이 곧 가언 추론이다.

가언 추론의 대전제는 가언 판단이다. 즉 ‘A이면 B이다’라는 형식을 취한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A와 B의 연관은 이 개별자가 실체에 속하기 때문에 이루어지는 연관이며 아직 개별자가 직접적인 것으로 남아 있는 한, 내적인 것으로 남는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는 아직 A가 존재한다거나 B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언급되지 않았다.

이제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에서 A의 존재가 정립된다. 가언 추론에서 매개는 곧 A이다. 그것은 대전제에서는 하나의 가능성, 가정으로서 출현하며 소전제에서는 하나의 실제성, 현존으로 언급된다.

결론은 계사를 통한 판단의 형식을 취하지 않는다. 여기서 매개자로서 계사는 보이지 않는다. 계사는 ‘그러므로’라는 연결사가 대신한다. 헤겔은 이런 방식의 연결사를 ‘충족된 매개적 통일성’이라고 부른다.

4)

헤겔은 이런 가언적 관계(판단, 추론)는 조건적 관계로도 해석되며 더 인과 관계나 근거 관계로도 해석될 수 있으나, 가언 판단이나 추론에서는 조건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하다고 한다. 왜냐하면, 근거나 원인은 상대적인 개념이어서 자기를 통해 자기에 대립하는 개념인 토대나 결과와 같은 그 타자로 이행하지만, 조건 관계에서는 아직 조건과 제약된 것은 서로 무차별하고 그 관계는 내적인 필연성이므로, 이는 다른 관계를 포괄할 수 있는 더 일반화된 관계이기 때문이라 한다.

여기서 헤겔은 가언 판단과 가언 추론의 차이점에 대해 상세하게 서술해 나간다. 우선 가언 판단에서 A, B는 자립적이고 서로 무차별하며 그 관계는 다만 내적인 필연성일 뿐이다. 이런 가언 판단에서 조건[A]은 다만 가능성이며 그것은 결과[B]에서 실현되면서 실제성을 지니게 된다.

결과가 실현되기 위해서 그 조건은 다만 하나인 것은 아니다. 여러 조건이 동시에 작용해서 하나의 결과가 실현된다. 결과에 기여 하는 조건들은 개별화되고 분산되어 있으며, 결과에 이르러 비로소 통일성을 얻는다.

그런데 가언 추론에 이르면, 소전제를 통해 A의 존재가 언급된다. A라는 존재는 개별자이므로 다른 존재에 무차별한 존재이지만, 하나의 우연적 존재이므로 부정성을 지니면서, 지양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대전제에서 A와 B의 관계는 가언 판단으로 보면 내적 필연성에 불과하며 이런 내적 필연성은 A, B의 자립성에 막히게 된다. 그러나 가언 추론에서 보면 소전제의 부정성을 통해 대전제는 자기를 실현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이것이 실체적 연관이라는 개념이 자유롭게 자기를 실현하는 ‘개념의 자유로운 통일성’이 출현할 단서가 된다.

“이제 A가 매개하는 존재가 되는데 왜냐하면, 첫째로 매개자가 직접적 존재이자 무차별한 실제성이지만, 둘째로 동시에 본래 우연적이고 자기를 지양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들을 새로운 형태를 지닌 실제성[B]으로 즉 그 조건들을 조건으로 삼고 있는 것들로 옮기는 것은 조건들이 추상적인 직접성으로서 존재라는 사실이 아니라 이 조건들이 개념 속의 존재, 즉 우선은 생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 조건이 생성이더라도 개념이 더 이상 이행하는 것이 아니므로, 특히 자기에 관계하는 부정적 통일성으로서 개별성이다.”(주관 논리학, GW12, 122)

“왜냐하면, 이 중심은 한편으로는 객관적 일반성 즉 동일 내용의 총체성과 다른 한편으로 무차별한 직접성 사이의 모순이기 때문이다. -이 중심은 더 이상 내적 필연성이 아니라 존재하는 필연성이며 객관적 일반성은 단순한 직접성과 즉 존재로서 자기 자신과 맺는 관계를 내포한다.”(주관 논리학, GW12, 122)

매개 항인 A의 존재가 이처럼 모순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결론 즉 ‘B가 존재한다’는 것도 모순이다. B는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인 동시에 매개를 통해 존재하는 것이다. 전자의 측면에서 우연적이며 후자의 측면에서 필연적이다.

5)

정언 추론에서는 매개는 주어와 술어를 긍정적으로 통일한다. 이를 통해 세 항이 동일한 내용임을 보여준다. 가언 추론에서는 부정적 통일을 통해 이런 동일성을 표현한다. 즉 A가 사라지면서 B가 출현하는 것이다. 이런 사라짐과 출현을 통해 정작 실현되는 것은 A와 B라는 실체적 연관이다.

“제약하는 실제성을 제약된 실제성으로 옮겨놓는 것이 지닌, 형식 전환의 활동성은 본래 통일성이며, 그런 통일을 통해 … 무차별한 현존에 이른 규정성은 이제 해소되고 A와 B의 구별은 공허한 명칭에 불과하게 된다.”(주관 논리학, GW12, 123)

가언 판단은 이미 내적으로 실체적 연관을 보여준다. 이 실체적 연관은 가언 추론을 통해 실현된다. 실체적 연관이 실현되면서 ‘유적 본질’을 지닌 실체는 ‘개념적으로 분화한 종의 집단’으로 실현된다. 이 양자의 관계가 곧 선언 판단이다.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 논리학 개념 운동24-유비 추론의 적극적 가치

1)

반성 추론은 연역법과 귀납법에 이어서 유비 추론 즉 유추로 발전한다. 이 유추의 근본 도식은 삼격 즉 E->A->B(헤겔은 B->A->E로 표현한다)이다. 유추의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누구나 다음과 같은 예를 들 것이다.

지구[Earth]는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달은 하나의 지구[Earth]이다.

그러므로 달은 사람이 거주하는 행성이다.

이와 같은 유추는 흔히 형식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 유추에서 매개가 되는 두 개념(예를 들어 ‘지구’)는 겉으로는 같게 보이지만, 사실은 서로 다른 것이어서, 정확하게 매개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를 네 개 항의 오류, 모호한 매개의 오류라 일컬어진다.

그러나 이렇게 형식적인 오류인 유추는 실상 과학적 탐구에서 아주 중대한 역할을 수행한다. 만일 유추가 없었더라면, 많은 과학적 진리는 발견되지 않았을 것이다. 원자의 구조를 파악하는데서 우주의 구조가 원형이었다는 사실은 자주 언급되는 예이다.

우리의 인식도 사실은 하나의 유추이다. 사유의 도구인 많은 추상적인 개념은 사실 원초적인 의미에서는 구체적인 것을 의미한다. ‘개념[concept]’는 ‘임신하다[concieve]’에서 나왔다. 아이를 임신하는 것과 머리가 사유를 잉태하는 것이 같은 것으로 여겨진 것이다.

유추는 사실 우리 사유의 원초적인 모습인데, 이런 유추를 사유에서 추방한다면, 우리의 사유는 빈곤해질 것이다. 헤겔은 유추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파악하는데, 그것이 지닌 긍정적 측면을 특별히 부각한다는 점에서 유추에 대한 유추에 대한 헤겔의 설명이 돋보인다.

2)

유추에서 중요한 것은 매개 항이다. 이 매개 항은 소전제에서는 유로 표현된다. 위의 예에서 ‘달이 하나의 지구라’ 할 때 지구는 지구의 유적 속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곧 ‘지구라는 것’ 또는 ‘하나의 지구’이며 아직 그 유적 본질(종차)이 명시되지는 않았으나, 유적 본질을 지칭하는 것이다. 반면 대전제에서 매개 항은 개별적인 것을 의미한다. 즉 여기서 ‘지구’는 개별적 행성으로서 지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유추에서도 매개 항은 연역법이나 귀납법과 같이 일반성과 개별성이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연역법이나 귀납법에서 일반성은 전체성이며, 개별자의 전체를 의미하며 여기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이고 아직 정립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유추에서 일반성은 정립된 유적 본질 즉 일반적 유의 본질적 속성을 의미하며 그런 점에서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측면을 지닌다.

소전제에서 주어는 이런 유적 존재에 속하는 하나의 개별자이다. 물론 여기서 개별자는 유적 존재가 우연하게 실현된 것이라는 점에서 연역법의 소전제와 같다.

그런데 대전제에서 술어는 주어인 개별자에 속하는 성질인데, 여기서 우연성과 필연성이 구별되지 않는다. 이 술어가 우연적일 수도 있고 필연적일 수도 있으나 유추에서 이런 구분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예를 들어 대전제가 ‘지구는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라고 한다면, 이 ‘사람이 사는 행성’이란 술어는 개별자인 지구에 속하는 우연성이다. 그러나 만일 그 술어가 ‘공전하는 행성’이라면 지구의 필연성에 속할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만일 이 유추가 부당하다면, 그 부당성의 원인은 흔히 말해지듯이 유추가 모호한 매개 항을 또는 서로 다른 매개 항을 사용한다는 것에 있지 않다고 한다. 유추의 부당성은 전적으로 대전제의 술어가 개별자에 속하는 우연성 즉 추상적 규정성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 유추에서 대전제의 술어를 개별자의 유에 속하는 필연성으로 규정한다면, 이 추론은 오히려 타당한 추론이 된다.

3)

흔히 유추의 부당성 때문에 이를 구하기 위해 사용하는 것은 유추의 형식을 일종의 삼단논법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이때 유추의 일반적 형식을 유추의 대전제로 삼는다. 그러면 유추는 다음과 같은 추론이 된다.

대전제:

‘어떤 객체에 어떤 징표에서 유사한 것은 다른 특징에서도 그 객체에 유사하다.’(즉 a가 p&q인데, b가 p라면, b는 q이기도 하다.)

또는 이 대전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두 대상이 어떤 성질에서 일치한다면, 하나가 가지는 다른 성질을 다른 것도 지니게 된다“(a가 p이고 b도 q인데, a가 q를 동시에 갖는다면, b 역시 q를 갖는다.’

소전제:

‘지구는 흙으로 이루어지고, 사람이 사는 행성이며’,

‘달은 흙으로 이루어진 행성이다.’

결론: ‘달은 사람이 사는 행성이다.’

추론의 형식을 이렇게 삼단논법으로 바꾼다고 하더라도, 결론이 부당한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헤겔은 유추라는 일반적 형식에 경험적 내용을 집어넣든, 유추의 일반적 형식 자체를 삼단논법의 대전제의 내용으로 삼든 결과는 마찬가지라 한다.

자주 문제 삼는 것은 유추의 형식 자체에서 매개 항의 이중성인데, 사실 이런 이중성은 앞에서도 보았듯이 연역법이나 귀납법 즉 일반적으로 말해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가진 일반적 특징이다. 유추의 형식이 매개 항의 모호성 때문에 형식적으로 타당하지 않다고 한다면 마찬가지로 귀납법이나 연역법도 타당하지 않다.

헤겔은 오히려 이런 문제점은 추론 형식이 발전하는 과정 중에서 인식적 의미 또는 객관적 의미가 제한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뿐, 그런 추론 형식이 원천적으로 추론에서 배제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4)

헤겔은 오히려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발전된 인식적 의미를 지니면서, 그 결과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계기가 된다고 본다. 이제 그 발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연역법에서 매개 항의 일반성은 개별자에 대해 외적인 것으로 특히 여기서는 주어의 전체성[예를 들어 ‘모든 사람은’]으로 출현했다.

그것은 귀납법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이 경우 매개 항의 일반성은 전제들의 전체성[e1, e2, e3…]으로 출현한다. 이런 전체성에서 유적 존재는 잠재적으로 내재하지만, 아직은 정립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게 되면, 일반성은 개별자[대전제의 주어]와 유적 본질[소전제의 술어]의 직접적인 결합이라는 방식으로 출현하면서 유적 존재가 처음으로 정립된다.

이처럼 잠재적이었던 유적 존재가 유추를 통해 처음으로 유적 본질로 정립된다는 점이 유추가 연역법이나 귀납법보다 뛰어난 점이고 연역법이나 귀납법이 사실 인식에 별로 기여하지 않는 반면, 유추가 과학의 발전에 더 많이 기여해 온 것도 이런 측면 때문이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매개는 개별자와 일반자의 결합이지만, 여기서는 개별자는 긍정적이며 일반자는 내적인 것이다. 아직 개별자는 자기를 부정하여 일반자로 고양하지 않았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일반자 즉 유적 본질이 직접 출현하면서 개별자와 결합한다.

이런 결합은 아직 직접적이지만, 이제 개별자가 이 일반자를 통해 부정될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왜냐하면, 일반성 자체가 개별성을 부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유추를 통해 이런 가능성이 열림으로써 이로부터 일반자 자체가 매개 항으로 되는 추론 즉 관계 추론이 출현하게 된다.

현존 추론에서 매개 항은 추상적 규정성이었다. 반성 추론에서 매개 항이 이중화되면서 최초의 부정이 등장한다. 그리고 반성 추론의 끝에서 유추에 이르러 직접적 규정성은 완전히 지양될 가능성이 열린다.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잠재적 일반성은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일반성’이 된다.

“유추 추론에서 유는 단지 직접적인 전제로서만 중심의 요소였다. 추론 자체가 전제된 직접성의 지양을 요구함에 따라 개별성의 부정이 정립되며 이를 통해 일반자는 더는 직접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정립된다. 반성의 추론은 처음으로 직접성에 대한 첫 번째 부정만을 포함하고 있었으나 이제 두 번째 부정이 등장함으로써 외적인 것에 머무르던 반성의 일반성이 그 자체로 자기에 대해 존재하는 것으로서 규정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7-118)

5)

현존 추론에서 하나의 추론 형식은 자기의 전제를 자기 밖에 있는 다른 추론 형식을 통해 입증했다. 연역법과 귀납법은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하니, 자기를 매개로 한다.

그러나 유추에 이르면 전제와 결론은 동일하게 된다. 유추에서 대전제는 p이면서 동시에 q라는 성질을 지니는데, 결론 역시 b는 q라는 성질을 지니기 때문이다. 전제와 결론의 동일성은 관계 추론이 지니는 특징이니, 이런 점에서도 유추는 반성 추론에서 관계 추론으로 이행하는 과정이 된다.

“[유추를] 긍정적 측면에서 볼 때 결론은 전제와 동일하며 매개는 그것이 전제하는 것과 합쳐진다는 것이 드러나며 이로써 반성적 일반성이 지닌 동일성을 통해 그것은 더 높은 일반성이 되었다.”(주관 논리학, GW12, 118)

개념의 내적 통일성은 판단에서 자립적인 양극단으로 분리된다. 추론에 이르면 양극단은 매개를 통해 서로 매개된다. 현존 추론에서 전제는 외적으로 매개되지만, 연역법과 귀납법에서 자기의 결론을 전제로 한다. 마침내 유추에 이르러 전제와 결론은 동일해지며, 따라서 매개 항은 양극단과 동일하게 된다.

마침내 유추를 넘어 전제와 결론, 매개와 매개된 것의 내용적으로는 이미 동일하게 되었으나, 다만 형식적으로만 서로 구별되는 관계 범주가 출현하게 된다. 관계 추론의 운동을 통해 이런 마지막 형식적 차이조차 극복되면 이제 개념의 주관성 장은 끝나면서 객관성 장으로 이행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