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3

– 선 –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우리 내부의 무수히 많은 혈관은

외부로 연결되어 있는 선과 연결된다.

소통과 단절은 인체의 복잡한 선을 지나

선을 넘거나 지킬 때 외부와 내부는 끊어지기도 이어지기도 한다.

사회의 선이 막힐 때 삶의 소통은 끊어지고

안전선도 끊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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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2015-4월-1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2

고통과 절망에 대하여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삶의 고통과 좌절은 늘 우리의 욕구 안에 숨을 쉰다.

고통으로 좌절할 때 희망이라는 행복을 보고

행복할 때 또 다른 고통이 찾아와 좌절을 본다.

한 가지의 고통과 한 가지의 행복은

같은 나무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열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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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1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1

– 섦, 그 현상에 대해서 –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익숙함이란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새로움을 재인식하는 과정이고

있는 것은 언제나 변화하는 하나의 흐르는 낯섦에서 익숙함으로 받아들이는

본질적인 존재의 현상이다.  갇혀 있는 영역, 가두어둔 사고의 공간을 환기시키고

가상의 벽과 허상의 껍질을 벗기고 본질의 익숙함에 이르고자 한다.

그것을 섦으로 이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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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기변환_이시대와철학2015-2 copy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한 위선[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영화 [거래(Arbitrage)]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1. 영화는 종종 철학 수업이나 사유의 좋은 텍스트가 되기도 한다. 강의 시간에 좋은 영화를 보고 토론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나름 깊은 메시지가 있는 영화는 생각하기를 자극한다. 요즘은 대학 강의실에서 영화를 이용해서 수업을 진행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나도 강의를 할 때 1-2번 정도는 영화를 상영하고 있고 학생들도 좋아한다. 좋은 영화는 웬만한 텍스트 이상으로 우리의 시야를 확장시켜 준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며칠 전에 우연히 본 리차드 기어 주연의 <Arbitrage>라는 영화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이 영화는 감독의 연출 의도 이상으로 곳곳에 해석의 여지가 많은 텍스트다. 문제의 정답을 이야기하려는 것보다는 그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을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http://evelin-hvezdy.blog.c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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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헤지 펀드(Hedge Fund)를 운영하는 로버트 밀러는 화목한 가정의 가장 역할도 충실하게 하고 있다. 그의 60회 생일 축하 자리에는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두루 모여 즐거움을 함께 한다. 성공한 가장이 이룩한 화목한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의 부인도 그를 사랑한다고 한다니 이보다 더 큰 행복이 어디에 있을까? 오래 살을 맞대고 살아온 부인의 인정과 사랑만큼 한 남자의 성취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것이 있겠는가?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한 것은 모두가 가정을 위한 것이고 가정의 행복에서 가장 커다란 의미를 느낀다고 말을 한다. 사회적 성취를 이룬 데는 무엇보다 가정의 행복이 밑바탕이 되었고, 가정의 행복이야말로 성취의 궁극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회와 개인이 분열된 근대 자본주의 사회 이래로 핵가족 사회에서 개인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이상일지 모른다. 공동체의 인정보다 가족의 인정이 더 일차적인 것이다. 사회적으로 성취했다 하더라도 가정적으로 불행하다면 부르주아 사회의 행복의 기준에서 그는 결코 행복했거나 성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점에서 밀러는 사회적으로 성공한 행복한 가장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그의 핸드폰에는 정부 (情夫) 줄리의 문자가 들어 있고, 그의 욕망은 업무 핑계를 대고 줄리를 만나러 간다. 완벽한 가정 속에 감추어진 커다란 구멍. 젊은 여성 줄리는 그가 투자한 갤러리의 대표이자 밀러의 숨겨둔 정부이다. 자신의 생일 축하를 받아주지 못하는 밀러에 대해 투정하는 장면이 보인다. 하지만 잠시 그들은 불같은 사랑을 나눈다.

 

3. 이어서 장면은 밀러가 처한 회사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그는 회사를 매각하려 하지만 상대방은 계속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밀러의 불안감을 더해 준다. 그는 이미 러시아의 동광에 투자한 많은 돈을 날린 상태다. 어려워진 자기 회사의 재정 상태를 감추기 위해 친구에게 4천억을 빌려 잠시 예치해 놓은 상태로 매각을 추진하고 있다. 약속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해진 친구가 그 돈을 돌려놓을 것을 재촉한다. 친구와의 채무 관계, 회사 매각의 지연 등으로 진퇴양난에 빠진 격이다. 사업상 통상 벌어질 수 있는 상황이겠지만 이번의 경우는 지금까지 쌓아 올린 공든 탑을 하루 아침에 날릴 수 있다. 투자와 투기의 차이는 무엇인가? 안정과 불안정의 차이에 있을까, 혹은 그것 너머 다른 차이가 있는 것인가? 모든 투자는 투기의 위험성을 안고 있다. 복잡한 상황이 연출되자 그는 집에서 잠을 자다가 새벽에 줄리에게 간다. 줄리는 사람들과 파티를 하다가 밀러의 강압으로 친구들을 돌려보낸다. 채워지지 않은 사랑에 대한 줄리의 안타까운 갈망은 밀러에게 투정과 비난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밀러는 자신의 가정을 포기할 수 없는 상황이다. 양립이 불가능한 유부남의 불륜이자 일탈적 사랑의 전형이다. 하지만 이런 사랑이 대안이 될 수 있는가? 안정적 가정이 투자라면, 일탈적이며 위험이 크지만 매혹적인 불륜은 투기인가?

 

4. 그 때 밀러는 줄리에게 어디 먼 곳으로 도망가자는 제안을 한다. 그날 밤 둘은 차를 몰고 떠난다. 떠난다는 의미가 무엇일까? 잠시 머리를 식히려는 것인가, 아니면 총체적 난국을 해결할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완전히 증발하려는 것일까? 물론 사업가의 스마트한 두뇌가 후자를 선택할 가망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졸음운전을 하던 밀러에게 차량 전복 사고가 일어난다. 이런 상황은 물론 예외적 상황이리라. 하지만 모든 정상은 이런 예외와 비정상을 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차에서 간신히 깬 밀러가 옆 자리의 줄리를 보니 이미 죽은 상태다. 만약 그 사고 장면이 언론에 보도되면 밀러는 불륜의 당사자로 그가 쌓아 놓은 모든 이미지에 먹칠을 하게 되고, 회사 매각과 관련된 비즈니스도 중단되고 마침내는 사기 횡령죄로 감옥에 갈 수도 있는 상황이다. 이런 계산을 한 밀러는 줄리를 남겨두고 차에서 나오는데, 그 순간 차량은 화염에 휩싸인다. 이 때 밀러는 일전에 죽은 자신의 운전기사의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구한다. 물론 핸드폰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도록 용의주도하게 공중전화를 이용한다. 미심쩍어 하는 지미에게 흔적을 남기지 않도록 톨게이트를 통과하지 말도록 당부한다. 위기의 상황에서도 투자와 관련된 합리적 판단으로 단련된 머리가 치밀하게 돌아가고 있다. 투기꾼의 합리적 사고는 어떤 상황에서도 계산을 멈추지 않고 합리적 선택(rational choice)을 지향하는 것이다. 지미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몰래 귀가한 밀러는 상처의 흔적을 지우고 조용히 아내의 침대로 기어들어간다. 밀러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정서적으로 반응하기 보다는 차가운 이성을 통해 합리적 계산을 하는 냉정한 두뇌의 소유자이다. 고대의 윤리학의 기준에 비추어 본다면 분명 밀러는 탁월함(Virtue)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이런 탁월함조차 그 밑바탕에 선의지(Good Will)가 전제되어 있지 않다면 얼마든지 더 큰 악의 수단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탁월함이 큰 악덕(Bad Virtue)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의미다.

 

5. 이 사건을 담당한 형사 로스는 사고 당사자, 현장 주변과 통화 기록 등의 조사를 통해 부자 밀러와 깊은 연관이 있음을 직감한다. 해서 밀러를 기소하기 위해 압박해 들어가는데 밀러는 여러 가지 증거 인멸과 알리바이를 통해 로스의 수사망을 빠져 나가려고 한다. 그는 자신이 현재 구속될 경우 회사 매각이 결렬되고,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다칠 수 있다는, 일견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이유를 가지고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려 한다. 그는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회계 부정까지 일삼는다. 목적을 위해서는 얼마든지 수단을 정당화하는 이런 태도를 우리는 도처에서 본다. 하지만 그가 처한 난처한 재정 상황은 이미 딸에게도 드러나 충분히 사기 횡령이 될 수 있다는 비난을 받는다. 이 문제를 가지고 딸과 언쟁을 벌인다. 회사의 회계 담당 이사인 딸의 입장이 난처해질 수밖에 없다. 비리를 묵인할 경우 형사처벌도 받을 수 있고, 앞날이 막혀 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부정의 당사자가 누구인가? 바로 친아버지가 아닌가? 법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육친의 정과 도리를 받아들여야 하는가? 충분히 경험할 수 있는 딜레마이다. 밀러는 딸을 설득하려하기 보다는 딸에게 판단을 맡긴다. 자신의 태도를 정당화하고 강제하려는 우리의 정서보다는 그나마 낫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다. 내가 보기에 유일하게 거래를 넘어서는 부분일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거래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일까?

 

6. 그가 구속되느냐 아니면 빠져나가느냐의 열쇠는 이제 지미에게 달려 있다. 밀러는 지미에게 20억의 신탁 자산을 가지고 입을 막으려 한다. 반면 형사 로스는 지미의 차량 기록을 가지고 전과가 있는 지미의 협조를 압박한다. 상대는 돈과 권력을 갖고 있는 부자이고, 최고로 실력있는 변호사를 동원할 수 있다. 일개 수사관이 상대하기에는 벅찰 수도 있다. 무리수는 종종 이런 지점에서 유혹한다. 유죄에 대한 심증이 앞선 수사관은 증거 조작이라는 위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이런 증거로 인해 검사 역시 로스를 지원한다. 이제 지미가 진실을 털어 놓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인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반전의 묘미가 재밌다. 동일한 증거자료가 똑같이 반증자료로 사용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텍스트는 해석에 있는 것이 아닌가? 지미가 톨게이트를 통과한 적이 없다고 한 말에 주목한 밀러는 변호사를 동원해 차량 기록이 조작되었음을 밝힌다. 결국 영화는 위법적 절차이기는 하지만 진실을 찾으려는 형사 대신 다수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양심을 속이고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밀러의 손을 들어준다. 이 대목에서도 많은 생각을 일으킨다. 불법을 밝히기 위해 똑같이 불법적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 혹은 합법의 형태로 수사망을 빠져나가는 피의자를 멀뚱히 쳐다만 볼 것인가? 이런 형사 사건의 경우에서도 재벌을 상대로 하는 소송이 힘든데 일 개인이나 집단이 거대 로펌을 앞세운 재벌이나 행정당국과 어떻게 법적 분쟁을 해결할 수 있을까? 삼성반도체 공장의 노동자들, 태안의 기름 유출 피해자들, 쌍용의 해고 노동자들, 혹은 노동 현장의 파업으로 인해 손해배상소송에 걸린 노동자와 노조들 등, 법적 쌍방 간의 불평등과 불균형을 생각하다보니 끝이 없다.

 

7. 밀러의 부인은 밀러의 부도덕한 현실을 빌미로 재단을 딸에게 넘기도록 강요하지만 밀러는 그것도 거부한다. 마지막 부부간의 대화는 그동안 화목하고 행복했던 부부로 믿었던 것이 얼마나 위선이었고 다른 방식의 거래일 수 있는가를 적나라하게 드러내준다. 부르주아의 행복이란 것의 허구! 결혼은 성기의 배타적 점유를 위한 계약이라는 칸트의 말을 연상하게 한다. 그 배타적이고 독점적인 계약이 깨졌을 때 부부관계는 새로운 형태의 거래로 변질될 수밖에 없는 것일까? 한편 밀러는 회계장부까지 조작한 회사도 강하게 배팅해서 성공적으로 매각한다. 결국 모든 상황을 자신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도록 바꾸어 놓은 성공적인 비즈니스 맨의 모습이다. 거래(Arbitrage)는 쌍방 간의 가격 차이를 이용해 최상의 결과를 얻고자 하는 장사꾼들의 합리적 행동을 지향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밀러의 행동은 성공적인 거래의 전형을 보여준다 할 것이다. 가정에서도 그렇고, 불륜 상대인 줄리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자신을 추적하는 형사와 위증을 통해 자신을 지지하는 지미와의 관계에서도 그렇고, 성공적으로 회사를 매각하는 배팅에서도 그렇다. 위험천만하지만 그러나 성공적인 이런 거래의 이면에는 끊임없이 도덕적 정당성의 문제가 제기된다. 합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지만 부도덕한 현실, 그리고 왜곡된 진실의 모습…과연 진실이 무슨 의미이고, 돈과 권력의 역할을 무엇인가? 영화의 마지막은 그가 이런 모습의 전형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수상 장면이다. 수상을 발표하는 자리는 자신의 딸이 사회를 맡고, 딸은 밀러에게 더 할 수 없는 찬사를 바친다. 밀러는 부인에게 행복한 키스를 보내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수상을 축하하는 박수를 친다. 하지만 마이크를 건네주는 딸의 모습은 냉랭할 뿐이다. 겉으로 드러난 사람의 모습과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의 허구를 극명하게 대비시켜 준다. 성공한 이미지 정치의 아이러니가 아닐까? 이중적이고 위선적인 양면을 한 인격 속에서 무리 없이 잘 표현해준 배우 리처드 기어의 뛰어난 연기가 돋보인다.

 

 

서초 세모녀 살해… 그래서 난 <국제시장>이 무섭다[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가족주의의 유령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오마이뉴스> 1월 8일 자에 중복 게재되어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070412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 지난 6일 오후 경북 경북 문경 농암면에서 경찰에 붙잡힌 ‘서초 세모녀 살해 사건’ 용의자 A씨가 서울 서초경찰서로 이송되고 있다. A씨는 서울 서초구 서초동 자택에서 아내와 두 딸을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 연합뉴스

실직한 가장이 부인과 두 딸을 죽이고 도주 자살을 시도하려다가 붙잡혔다. 불황과 실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 끝에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셈이다. 가족 간의 불화와 증오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가족애와 과도한 연민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더 가슴이 아프다. 전혀 낯설지만은 않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수도 있다. 경제적 곤궁이나 우울증 등으로 인해 삶을 포기하려는 어른들이 종종 자식들과 동반 자살하는 경우도 있으니까…

?살인범이 된 대한민국의 가장, 가족 때문이다

이런 사건들을 보면서 그런 극단적 선택을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생각의 밑바탕에 깔려있는 극진한 가족주의가 마음을 아프게 한다. 이런 가족주의는 이 땅에 살아가는 우리들이 공유하는 정신이니까 우리 모두 극단적인 선택의 잠재적 공범일 수도 있다. 가족주의로 인해 가족은 가장이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소유물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땅의 대부분의 엄마들은 자식들의 모든 것, 그들의 미래의 삶마저도 걱정하고 책임지려고 한다. 하지만 자식이 부모의 소유물인가?

 

한 때 택시의 서비스 개선책으로 나온 구호가 있었다. 가족처럼 모시겠다는 취지의 슬로건으로 기억된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제발 가족처럼 취급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차라리 가족이 아니라 생면부지의 고객에 대한 서비스 정신으로서 모시는 게 훨씬 잘 모실 수 있지 않겠는가? 택시 기사들이 승객들을 멋대로 무시하고 거칠게 대한 것이 아마도 가족처럼 생각해서 그런가보다고 생각한 것이다. 우리의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 가장은 가족 구성원들의 의사를 무시하고 군림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가장이란 명분하에 자신이 성공했다면 그 성공한 삶을 자식이 이어받아야 한다고 믿고, 자신이 실패했다면 그 실패한 삶을 자식이 대신해서 보상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의 욕망의 주인이 될 수 있다고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그런 가족주의의 망령이 아닌가?

 

자식은 부모의 소유물이 아니다. 부모가 자식의 모든 것, 그의 미래와 생명을 책임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져서도 안 된다. 부모가 현재 고통을 겪는다고 해서 자식이 똑 같이 반복한다고 예단하는 것은 지나치다. 설령 그런 고통을 겪게 될 지라도 그 모든 것을 부모가 책임져야 하는 것은 아니다. 부모의 역할이 있고 자식들의 삶이 있는 것이다. 다들 가족을 이루는 구성원이지만 각자 독립된 인격을 가진 주체가 아닌가? 이제는 그런 독립적 주체로 받아들이고 살아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한 세대 전이나 21세기에 들어선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다.

?<국제시장>이 거부감 드는 이유

▲  영화 의 한 장면.   ⓒ CJ E&M

▲ 영화 <국제시장>의 한 장면.
ⓒ CJ E&M

한국의 신산(辛酸)한 근대사를 그린 영화 <국제시장>이 히트를 치면서 그 시대를 거쳐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세대는 그것을 경험했기 때문에 너무나 공감을 하지만, 나는 이제 그런 감정과 과도한 가족 유대가 부담스럽고 거부감이 든다. 이런 가부장적 가족주의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몇 장면이 있다. 흥남부두에서 등에 업은 누이동생을 잃어버리자 구하러 갔던 아버지와 헤어지면서 아버지가 당부하는 다짐이 있다.

“덕수야! 지금부터는 네가 가장(家長)이다. 가장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가족이 최우선이다.”

주인공 덕수는 가장으로서의 이런 책임을 지기 위해 자신의 개인적 삶을 포기할 만큼 평생을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 동생이 서울 대학교에 합격을 하자 가족의 경제를 책임지기 위해 그는 지체 없이 서독 광부를 지원한다. 나중에 돌아와서 막내 누이의 결혼 비용과 고모의 가게를 지키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다시 베트남전쟁의 한 복판으로 뛰어 들어간다. 부인이 이제 그만 짐을 내려 놓고 당신 자신의 삶을 살라고 눈물로 호소할 때도 덕수는 그게 가장의 책임이고 역할이라고 말한다.

늘그막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벌일 때 덕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아버지 유품을 모신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서 덕수는 힘들었던 지난 삶을 회상하면서 아버지의 인정을 구한다. “아버지! 저 이만하면 약속 잘 지켰지예? 저 진짜 힘들었거든요!”개인의 삶보다는 가족을 위한 삶이 덕수의 정체성을 이루었던 탓에 그 가족의 첫 번째 가장인 아버지의 인정이야말로 고통과 희생에 대한 보상으로 믿기 때문이다.

이 영화가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면 그만큼 가족주의의 정서적 유대가 우리 삶 속에 크게 자리 잡고 있음을 반증한다. 가족주의는 식민지를 거치고 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태에서 가족 구성원들의 생존을 보호하고 국가의 산업화를 이루는데 큰 힘이 되기도 했었다.

개인이 존재하지 않는 가족주의, 그만하자

하지만 가부장적인 가족주의는 권위주의적인 사회 구조와 남성 중심적 기업 문화, 연고주의적인 사회적 관계, 족벌경영과 부의 세습을 낳는 주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가족주의의 긍정이나 부정 여부와 관계없이 가부장적 형태의 가족주의는 이제는 벗어 던져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무엇보다 가족주의 안에서는 개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인의 욕망과 인격의 자립성, 개인의 주체성 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가족주의를 거부한다고 해서 가족을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가족이 중요하더라도 일차적으로 가족의 구성은 인격적 개인, 주체적 개인이어야 하고, 그런 개인들의 욕망과 인격이 인정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부장적 가족주의 하에서는 그런 개인들이 설 땅이 없다. 이 말은 세 모녀를 살해한 21세기의 가장에게나 힘들게 근대사를 살아왔던 <국제시장>의 덕수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그릇된 가족애가 정당화되고, 가족이란 이름하에 개인의 무한 희생이 당연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가 성장하면 잘 어울리던 옷도 더는 몸에 맞지 않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회가 변화하면 그 사회를 규정하는 원리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봉건적이고 가부장적인 가족주의가 힘을 발휘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가 집행유예라니…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딸 같은 12세 여아와 성매매를 한 40대가 집행유예를 받았다고 한다. 판결문을 읽어보지 못했지만 뉴스에 나온 양형 이유에 따르면 이렇다. “아직 성적 자기결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아동·청소년의 성을 매수해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내용을 보면서 도대체 이 나라의 사법부가 위치한 시간대가 어느 시대인지 의심스럽다.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조선의 19세기라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성을 매수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나 법률적으로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법원은 어떻게 이런 판단을 내리게 되었는가? 일단 언론에 보도된 내용만 가지고 보자.

 

법원도 12세 여아의 성을 매수한 것이 불량한 죄질임을 인정하고 있다. 현행법 하에서 성 매수는 불법이다. 특히나 13세 이하의 미성년자를 상대로 하는 경우는 특례법에 의해 가중 처벌을 한다. 자유의사에 의해 합의를 했다 하더라도 미성년자의 경우는 독립적인 인격이 아니므로 인정이 안 된다. 일단 성 매수가 불법이고, 무엇보다 미성년자, 특히 12살짜리 아동이다. 언론에 나온 것만으로는 두 차례 성 매수를 했다고 한다. 언론에 나온 정도가 이러니 그 이상도 생각해볼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라면 반복적이고 상습적일 수 있다. 상습범의 경우라면 더 엄중하게 처벌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데 법원은 집행유예로 판결했다. 그 이유가 재밌다.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아, 대한민국의 법정에서는 초범이고 반성하면 다 풀려나는구나. 법원이 언제부터 이렇게 관대해졌는가?

 

40대가 어린 막내 딸 같은 12살짜리와 성매매를 했다는 것이 어디 간단한 문제인가? 합의를 가장하고, 돈으로 유혹을 했다 하더라도 아이가 성큼 따라나설 수 있겠는가? 여기에는 돈으로 유혹하는 이상으로 위계에 의한 강박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7조(13세 미만의 미성년자에 대한 강간, 강제추행)은 10년 이상 무기징역까지 처벌할 정도로 엄중하다. 그런데 12살짜리 아동의 성 매수를 한 자에 대해 법원은 ‘죄질이 불량하다’는 표현으로 간단하게 처리한다. 이런 표현 속에는 죄질이 얼마나 위중하고, 얼마나 반인륜적이고, 얼마나 폭력적인가 드러나 있지 않다. 그저 통상적으로 있을 수 있을 정도의 불량한 죄 정도로 무심하게 넘겨질 수 있다. 아무튼 죄질이 불량하다고 했으니까 그 죄에 대해 문책하고 처벌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행위에 대해 법원은 어떻게 판단했는가?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일단 범행을 반성하는 점부터 보자. 아무리 나쁜 범죄를 저지른 자들도 엄중한 처벌을 받을 가능성이 높으면 면죄를 위해 반성을 가장할 수 있다. 이런 반성은 사실 진실한 반성일 수 없다. 물론 그런 경우도 없지 않겠지만 법원이 그런 반성문 정도로 면죄시켜 준다면 개나 소도 다 반성문 쓰고 나올 일이다. 법원의 판단이 그렇게 우연적이고 심정적인 판단에 매달린다면 법의 엄중함을 어디서 볼 수 있겠고, 그런 범죄가 다시 반복되지 않도록 예방적 처벌의 효과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음으로 다른 이유가 된 동종 전과가 없다는 점을 보자. 전과가 없는 초범의 경우 정상을 참작할 수는 있겠지만, 그것도 경우에 따라서다. 죄질이 불량하고 위중하고 반인륜적이고, 앞으로 반복될 가능성이 높은 범죄에도 똑같이 초범이라 정상을 참작한다는 것은 법원이 별 생각 없이 기계적으로 판단했다는 것 외로는 이해할 수가 없다.

 

다시 한 번 양형의 이유를 보자. “죄질이 불량하지만 동종 전과가 없는 점, 범행을 반성하는 점을 참작했다.” 이런 표현은 대부분 copy and paste로 이루어지는 상투적 판단이다. 혹은 자판기에 넣고 커피 뽑는 것처럼 기계적이다. 이 판단에는 아동 성 매수가 얼마나 불량한 죄질인지에 대한 고민이 보이지 않는다. 법원의 판단은 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아동 성 매수가 갖는 반인륜성과 폭력성이 어떻고, 또 그 판단이 사회적으로 얼마나 파급효과가 있는지에 대한 아무런 성찰이 없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폭행이나 성 매수 등과 관련해 죄를 엄중하게 묻는 것은 세계적으로 일반적 추세이다. 그만큼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등의 발달로 아동 성매매의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런 추세를 저지하고 경고하기 위해서 더 엄중하게 처벌해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법원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이런 기계적 판단에는 그런 관심과 파급효과 등을 의도적으로 차단하려는 전문가의 계산된 냉정함이 엿보일 지경이다. 도대체 그것이 무엇일까?

 

일반인의 호기심 이상으로 법원의 판단에 대해 알 수 없는 나로서는 다만 법적 판단이 상당 부분 우연적이고 자의적으로 내려지고 있다고 생각할 밖에 없다. 이런 우연과 자의의 틈바구니로 정치적 압력, 금전의 유혹, 전관예우 같은 비합리적 요소가 들어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법원의 판단을 불신하는 사람들은 “귀에 걸면 귀걸이고, 코에 걸면 코걸이”, “유전 무죄요, 무전 유죄” 혹은 “늘었다 줄었다 하는 고무줄 판결”로 생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법의 판단이 그럴 수 없고, 결코 그래서도 안 된다. 엄중하고 공정해야 할 법원의 판단이 이렇게 자의적이고 우연적으로 이루어진다면 법적 정의가 훼손이 되고 법적 질서와 안정이 깨질 수가 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이 떠안게 되지 않겠는가? 12살짜리 아동 성 매수 범을 집행유예로 쉽게 풀어 줄 정도로 법원은 성범죄에 대해 관대하단 말인가? 법원은 자신들이 내리는 판단의 의미와 효과에 대해 좀 더 신중하고 성찰적이어야 할 것이다.

 

일본철학사전[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일본철학사전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헤겔과 그의 시대

헤겔과 그의 시대

어제 Yes24에서 건국대의 이신철 박사가 번역한 헤겔 관련 책을 2권 주문해서 받았다. 하나는 하세가와 히로시의 『헤겔 정신현상학 입문』이

고 다른 하나는 곤자 다케시의 『헤겔과 그의 시대』다. 히로시는 헤겔 원전 번역으로 독일 정부로부터 <레싱> 상도 받았다고 한다. 아직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두 권 다 연구가 탄탄한 느낌이다. 일본 학계의 연구 수준을 잘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런데 표지 날개를 보니 이 책을 번역한 이신철 박사가 칸트, 헤겔, 현상학, 마르크스, 니체까지 막대한 분량의 철학 사전을 다 번역한 것을 보고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평생을 작업해도 힘들 엄청난 분량과 난이도 높은 철학 사전들을 이렇게 혼자서 번역을 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고, 또 그러면서 한국 철학회나 출판계에서 그 흔한 번역상 하나 받지 못했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이다. 뒤로는 볼 것 안 볼 것 다 보면서도 앞으로는 무시하는 우리 학계와 문화계의 전형적인 이중성에 다름 아니다.

 

헤겔정신현상학입문

헤겔정신현상학입문

그런데 두 번째로 놀란 것은 오전에 <법철학> 강의에서 발표하던 한 학생이 의도(Vorsatz)와 기도(Absicht)라는 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네이버 사전을 활용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다. 네이버에 『헤겔 사전』이 제공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도 한 번 네이버에서 검색을 해보니 이박사가 번역한 일본철학계의 사전들이 다 제공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의 대표적인 지식검색 사이트에서 제공되는 사전들의 내용이 모두 일본에서 출간된 철학사전에 기초한 것이다. 이것을 확인하고 나서 착잡한 느낌이 든다. 한국 철학계에 수없이 많은 학회들이 존재하고, 그 이상의 학회지들을 발간하며 수많은 논문들을 쏟아내면서도 솔직히 사전 한 권 못 만들고 있다. 오래 전에 학원사에서 나온 철학 사전도 다 일본 사전을 번역하고, 몇 개 항목만 국내 학자가 추가한 것들이다. 20여 년 전 <한국철학사상연구회>에서 나온 『철학대사전』은 구동독에서 출간된 것을 집단 작업을 통해 번역했고, 동양철학 항목들은 국내 소장 학자들이 공동 집필했다. 하지만 이 사전은 마르크스-레닌주의 세계관이 유명무실해졌기 때문에 더는 생명을 유지하기 힘들다. 사정이 이런데 한 개인과 한 출판사의 노력으로 사전들이 대거 번역이 되고, 또 그것이 네이버에서 실시간으로 제공되고 있다. 이런 사정을 한국 철학계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알고 있으면서 짐짓 모른 체 눈감고 있는 것인지…어떤 경우든 한국 철학계와 책임 있는 철학자들이 참으로 부끄러워해야 할 일이다.

 

한국 철학계가 대중과 거의 유리된 상태에서 A4 10장짜리 논문과 연구비, 실적과 승진을 위한 연구에 매달릴 때 일본 철학회는 우리가 감히 넘볼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게 기초 연구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것 같다. 지방 대학출신들도 노벨상을 받는 일본 과학계의 탄탄한 연구 시스템이 인문학계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 같다. 지금은 그렇게 노골적으로 하기 힘들겠지만 우리 윗세대 학자들 가운데는 일본 논문이나 저서를 이름만 바꿔서 출간한 것도 적지 않고, 나 개인적으로도 구체적으로 확인한 바 있다. 내가 대학졸업 논문을 쓸 때이니까 30년도 더 된 현실이다. 그런데 그 이후로 우리 학계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했지만 내부적으로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내 전공과 관련해서 갖는 느낌이다. 헤겔의 주요 저작들이 우리말로 번역되고 여러 차례 재번역까지 되었지만 전공 학자들이 인용하기 힘들 정도다. 그런데 일본에서는 똑같은 책들이 여러 번역자들에 의해 최근까지 재번역되고 있다. 이렇게 기초 작업과 기초 연구가 무시되고 소홀히 되다 보니 우리 연구자들은 끊임없이 새로운 이론, 새로운 철학만 찾아 헤매는 것이 솔직한 실정이다. 물론 새로운 것을 찾고 연구하는 것은 학자들의 당연한 임무겠지만 뿌리 없이 유행 따라 이루어지는 연구는 생명이 길지도 못하고 더더구나 창의적인 작업을 기대하기는 더 힘들다.

 

개인적으로 오늘부터 일본어를 배워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당장 인터넷으로 하세가와 히로시가 번역한 헤겔의 『정신현상학』 일본판을 주문했다. 일본어는 같은 알타이어 계 언어이고 한자문화권에 있어 다른 언어보다 쉽게 배울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다보면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될 것 같아 의도적으로 안 배우고 일본 학계의 동향을 무시했었다. 하지만 더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지금 수준에서는 우리가 여러 모로 수입하고 의존할 수밖에 없겠지만 어떻든 공개적으로 이 문제를 접근할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 학계, 아니 그 전에 나 스스로도 자극을 받고 무엇에 역점을 두고 무엇을 중시할지를 반성할 수 있지 않을까?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파이드로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와 말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온다. 토트 신은 왕에게 통치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신은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를 처음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사를 짓는 기술과 천문 지리에 관한 기술, 그리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왕은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토트 신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pha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를 한다.

 

왕이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가 진리(truth)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the semblance of truth)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자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진단이다. 진리는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의식(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스승의 이런 목소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또 이 진리를 똑 같은 형태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런 생생한 현전이 사라진다. 문자는 다만 그것을 저장할 뿐이고, 우리는 그 저장되고 기록된 문자를 통해 화석화된 진리의 흔적(semblance, 짝퉁)만을 상기할 뿐이다. 문자는 영혼의 기억(memory) 능력을 퇴화시키고, 다만 떠올리는 능력(상기: reminiscence)만 남긴다. 모든 종교에서 스승(구루)의 역할은 이런 생생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데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스승은 대부분 남성과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왕의 통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타무스 왕은 토트 신이 문자를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문자가 진리의 생생한 현전을 단순한 모방(시뮬라크르)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서양의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왔다는 데리다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목소리(음성)는 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테베의 왕은 문자가 도입되면 이런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왕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문자를 전해주겠다는 토트 신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목소리만 담당했겠는가? 문자 역시 그것을 아는 식자識者와 무식자 無識者를 차별하고, 식자의 강력하고 유효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유교 경서에 기반한 조선의 과거시험은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등용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 경서를 읽지 못한 일반 대중은 반상의 차별 이상으로 통치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봉건적인 조선의 위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은 문자를 거부하는 테베의 왕과 다르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자를 발명해서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닌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 할세.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읽어 볼수록 명문이다. 중국과 조선이 언어 체계가 다른데 중국의 한자로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이 아무리 자주 독립을 외친다 해도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창제의 소식을 듣고 최만리를 위시한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 반대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보호와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성경을 위시한 서적이 대량 보급되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단순히 인쇄의 기술이 아닌 문자를 발명해서 보급하려 했던 것이니 그 얼마나 혁명적인가?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고 유럽의 종교개혁이 1517년 시작이 되었으니 적어도 70년 이상을 앞서 있다.

 

전문 언어학자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위시한 서구의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피언 언어가 문화와 지역에 따라 특성화되고 개선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일정한 원리와 계획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명한다는 것은 유럽의 전통이나 그 밖의 세계 어떤 전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분명한 언어 창제의 원리에 따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자음은 발성기관의 기능과 작동을 본 딴 음운학적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인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글자는 모음과 자음이 독립적인 아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대대관계, 우주 자연의 정신 및 철학과 몸과 기계의 기능 및 작동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한글의 표현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은 대단히 우수한 것이다. 게다가 음양의 원리와 같은 모음과 자음의 결합은 현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이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어로 확장될 가능성도 무한하다. 오늘 날 인터넷에 기반 한 디지털 혁명에 언어학적으로 가장 활용성이 큰 언어가 한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글이 이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음문자로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고도의 사색을 축약하고 추상하는 면에서는 표음문자가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반면 추상기능은 표의문자로서의 한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장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 한자 병행론을 비판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언어와 문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면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의미도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조선시대의 한자나 그 한자로 만들어진 한문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한중일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음은 전혀 다르고 의미 차이도 큰 경우가 있다. 한자는 중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오늘날 그것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의 근간일 뿐이다. 그런 한자를 받아들여 오래 사용하면서 이미 각 나라 별로 토착화되고 변용된 것이다. 마치 유럽의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모든 유럽 언어가 인구어 전통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 나라 별로 발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틴어는 유럽 언어의 근간이자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면서 각 나라의 언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과정에 라틴어를 도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70%가 한자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음성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무식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한글학자 최현배 식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우리 사고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타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 속으로 동화된 우리 언어나 다름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마치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각 언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와 같다. 이런 의미의 한자는 과거의 서책에서 발견되는 한문과도 별 상관없다. 때문에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한자를 알 수 있는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동양철학이나 불교 관련 논문들 그리고 책들을 보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한문 투가 전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페이스 북에도 불교 경전이 한문 투를 거의 바꾸지 않은 상태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것이 문헌학의 대상이라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사상이나 종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불교의 사상도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의 한자와 사상을 통해 번역된 것이다. 수 백, 수 천 년 전의 한문 투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 혹은 한자 문화권 하에서 자기 언어가 없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일 뿐이다.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가 아니라면 빼어난 우리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오래된 유물을 반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거의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과거에 예속된 것이고 지적으로 태만한 것이다. 이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 전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과 한자로 이루어진 국어에 의한 번역이고 가독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고전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든 동양사상이든, 아니면 서양사상이든 우리가 이런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타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사상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책을 쓰고, 괴테가 독일어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프랑스 철학과 독일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셋째, 오늘 날 한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은 영어의 위력을 말할 수 없이 키워 놓았다.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의 열풍도 크다. 한국처럼 영어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영어의 비중은 말 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이런 영어의 영향력이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 더 큰 문제는 인위적인 영어의 열풍과 교육이 새로운 정신적 사대주의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 강의조차 영어강의를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국문학이나 한문학도 영어로 강의를 하고 유럽에서 유럽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생한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 대학평가 점수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학문의 내용과 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처사다. 영어로 언어를 획일화하는 것은 언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모국어로 연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막음으로써 학문의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발전도 막는 것이다. 영어 강의자를 우대하고 국내 대학 출신이 자연스럽게 배제됨으로써, 학문의 사대적 종속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언어 계급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의 자생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모두 국내파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획일적 언어 정책이 얼마나 대학의 창의적 교육을 망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글날은 결코 일회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한글화 정책으로 모국어의 풍부한 자원을 스스로 황폐화시켜서도 안 된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모국어를 통해 훌륭한 정신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이 수입된 지 120년이 넘어가도 아직 이렇다 할 우리 철학의 자랑거리가 되는 저작이 없는 실정이다. 모국어로 쓰인 훌륭한 창작물은 그것이 비록 서양 사상이나 과거의 중국철학, 불교철학을 기술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철학이다. 이 점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의 정신을 살려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간판 몇 개 바꾸고, 낱말 몇 개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언제가야 진정 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이 모국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참조하고, 이 모국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이 모국어로 빼어난 정신적 창작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