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필 감독을 기억에 새기며 [유철의 유럽방랑기] -4

이번 유철의 유럽방랑기는 특별히 필자의 삶에, 또 많은 이들의 삶에 인연과 시선을 남긴 고 박종필 감독에 대한 기억과 추모의 글을 싣습니다. 인연이 있던 많은 분들이야 당연히 고인을 추모하겠지만, 일면식 없는 이들도  세상의 한 구석을 가까이서 함께 기록으로 남겨왔던 고인과 고인의 작업들을 조금이나마 다시 되새기고 남겨야 한다는 마음에서요. 너무 늦었지만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영화감독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다. 무작정 카메라를 들고 돌아다니던 고등학생 그 시절, 나는 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보고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고자 했었다. 그 영화가 바로 ‘끝없는 싸움-에바다(박종필, 1999)’였다. 이를 계기로 나는 에바다 문제, 특히 에바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젊은이들의 투쟁을 영상으로 만들게 됐다. 그것은 참으로 허술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지만, 운이 좋게도 그 영상으로 국제영화제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 인생을 바꾼 건 그 영화제의 입상이 아니라, 그 영상을 만들며 만난 사람들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을 통해 사회를 조금씩 알아갔고, 그리고 현재의 내가 됐다. 가끔은 그 사람들을 원망할 때도 있지만, 그건 그냥 투정이란 것을 나도, 그 투정을 듣는 이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투정을 부리고 싶은 사람, 내가 영상을 만들며, 이를 통해 인연을 맺게 된 많은 사람들 중에 박종필 감독, 종필이 형이 있다. 그가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결코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없다. 그는 내 영웅이자 롤모델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가 아직도 기억난다. 2000년 어느 날 신촌에서 그와 처음 만난 곳은 연대 앞 아주 구석진 곳에 위치한 허름한 삼겹살 집이었다. 가난한 대학생들이 모여 삼겹살과 돼지 껍데기에 소주 한잔 나누는 그런 곳. 삼겹살이라 하더라도 불판에 얹으면 금새 녹아 없어지는 1인분 2000원짜리 삼겹살이니, 이게 정말 삼겹살인지 의심스러운 그런 삼겹살이 나오는 허름한 곳이었다. 
한 대학생 누나가 내게 오늘 내가 정말 좋아할만한 사람이 오니 꼭 나오라 연락에 나는 야자를 제끼고, 독서실 자리에 불을 켜 놓고서는 형 누나들과 할 소주한잔 기대하며 신촌으로 향했다. 
그들과 자리를 잡고 얼마 지나지 않아 시끄러운 가게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누나는 내게 그를 소개했다. 내가 본 그 영화, ‘끝없는 싸움-에바다’를 만든 그 사람이라고. 그도 내 이야기를 이미 들었었는지, 나를 보자마자 웃으며 인사한다.

“어, 네가 그 고등학생이구나! 반갑다!”

그는 내게 고등학생 한 명이 대학교 동아리실에 무작정 찾아와 그들을 쫓아다닌다는 이야기, 그리고 영화를 찍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그 동안 무척 궁금 했었다고 말했다. 뭐든지 물어 보라던 그. 그러나 내가 질문하기도 전에 그는 카메라 다루는 법, 촬영, 편집할 때 주의사항, 그리고 무엇보다 이러한 작업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유의미하고 그리고 중요한지를 늘어 놓았다. 고등학생인 내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이다. 그리고 웃으며 이야기했다.

“나중에 꼭 같이 작업하자.”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그의 제스쳐, 그의 말투, 그의 젓가락질, 소주 마시는 모습, 그 모든 것 하나하나가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그때 당시 그가 건낸 그의 명함을 나는 아직도 지니고 있다. 그는 내게 영웅이나 다름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대학에 들어갔고, 영상작업을 통해 생긴 그 인연으로 노들야학에서 신세를 지게 됐다. 그리고 다시 만난 종필이 형. 그는 바쁜 일이 생기거나, 촬영이 겹치거나 하면 가끔 내게 카메라를 맡기곤 했다. 그는 내게 촬영 부탁을 하면서, 그날 필요한 그림들과 내용들을 설명하다가는 결국 항상 마무리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그냥 네가 찍고 싶은 데로 찍어봐. 못 쓰면 다시 촬영하면 되지 뭐.”

그렇게 시간이 흘러, 2003년 에바다 농아원의 문이 열리던 그날, 나는 그곳에 있었고, 내가 ‘운동’이라는 것을 시작하게 된 계기였던 에바다 농아원 사태는 점차 정상화의 길로 나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맞이한 에바다 정상화를 자축하는 잔칫날.

“야, 너 유철이 아니니? 너 살아 있었구나? 어떻게 지내?”

반가운 형의 표정과는 달리, 어딘가 어색했던 나. 학생회를 한다는 핑계로, 나의 게으름으로 야학에 발걸음이 뜸해진 탓도 있었지만, 이제 더 이상 영상을 안하기로 마음 먹은 후였기에 더욱 그러했다. 
내 영상작업의 첫 대상이었던 에바다 농아원에서, 그 에바다 문제를 영화로 만들어서 내게 큰 영향을 주었던 그와의 만남, 그러나 예전 나의 꿈에서 많이 멀어진 나. 그 상황에서 그를 마주하는 건, 불편한 것이었다. 아니, 왠지 모를 서운함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다. 물론 그건 형에 대한 서운함은 아니다. 그냥 내가 당시 영상을 안한다는 그런 서운함일 듯 싶다. 그런 복잡한 내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형은 무심하게 한 마디 던진다.

“너는 이제 영상은 그만 둔 거니?”

최소한 그에게는 듣기 싫었던 질문. 베시시 웃으며 “네”라 대답한다. 
그러나 그는 내게 ‘왜’를 묻지 않았다. 그냥 내가 어떻게 사는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물으며 웃고 대견하다며 칭찬해 줬던 기억이 난다.

굳이 형에게 직접 연락하지 않아도 형의 얼굴을 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집회현장에서, 그리고 노들야학에서 쉬이 만나곤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회가 끝나고는 허름한 술집에서 종종 소주도 한 잔 기울이며 안부를 확인하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종로 모처에서 우연히 갖게 된 그와의 술자리, 형은 내게 물었다.

“그나저나 너는 왜 영상을 그만하기로 한거였지?”

갑작스러운 질문, 나는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렇게 머뭇머뭇 하고 있는 나를 그는 아무 말 없이 똑바로 바라보며 기다렸다.

“형, 저는 더 이상 카메라를 들 자신이 없었어요. 지금 당장이 비참하고 또 억울한데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든다는 건 너무 잔인해요. 평생 카메라 렌즈로만 세상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요. 그 상황에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나는 대학에 입학 후부터는 카메라를 결코 들지 않았다. 물론 몇 번 시도하기도 했으나, 열정과 분노만이 가득한 내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투쟁의 현장에서 투쟁하는 이들과 함께 구호를 외치기 보다는, 그리고 그 현장에서 같이 분노하기 보다는, 그들의 외치는 구호와 분노를 기록해야 하는 작업. 그들이 눈물을 흘릴 때도, 그들과 부둥켜 안거나 혹은 같이 울기보다는, 그리고 눈물을 닦아주기 보다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하는 작업. 내게 그런 작업들은 내 눈앞에 벌어지는 그 수 많은 사건들에 벽을 치는 그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걸 참을 수가 없었다. 

형은 그런 말도 안되는 내 이야기를 한참을 듣고서는 활짝 미소 지었다. 그리고는 이내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이야기했다.

“유철아, 우리에겐 각자의 몫이 있는 것 같아. 네가 해야할 역할과 내가 해야할 역할이 있는 거지. 그리고 지금은 너는 네 역할을 하고 있는 거야. 우리는 우리가 각자 해야만 할 그 일을 하고 있는 거야. 나중에는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나의 변명과 변명 속 어딘가에 묻어 있는 서운함, 아마 형은 그 서운함을 알아 차린 듯 싶었다. 내가 영상을 안하는게 아니라, 못하겠다는 것을 형은 이미 알아 차렸던 것 같다. 그때 그의 말이 무척 위로가 됐다.

그렇게 시간은 계속해서 흘렀다. 어느새 나는 대학을 졸업했고, 같잖게도 공부를 한다는 핑계로 한국을 떠났다. 그러던 지난해, 초여름. 정말 오랜만에 양재동에서 형과 만났다. 다른 동지들과 함께하는 술자리, 그러나 너무나도 오랜만에 만난 형과의 술자리에 나는 추억 팔이 삼매경에 빠졌다. 신촌에서 불판에 얹으면 녹아 없어지는 삼겹살을 안주 삼아, 그리고 질겨서 결국 씹다가는 결국 그냥 이를 삼켜야 했던 돼지 껍데기를 안주 삼아, 빡빡머리 고등학생 앉혀놓고 소주 따라주던 시절 이야기로 시작된 추억팔이. 형은 내게 그 때 나와 함께 촬영 다니던 여학생하고는 사귀던 사이가 아니었냐며 뜬금포를 날렸다. 이에 나는 질세라 거 형의 연애사로 응수하며 ‘우린’ 박장대소 했다. 그리고는 다시 진지한 얼굴로 세월호 이야기를 꺼내고, 노들이야기를 하고.. 
함께 술자리를 하던 동지들이 하나 둘씩 자리를 떴지만 한참을 형과 소주를 기울였다. 둘의 혀가 조금씩 꼬여가던 찰나

“집 근처에서 한잔 더 할까?”

당시 두 번째 허리 수술을 한지 얼마 안됐던 터라 나는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쉬움을 뒤로 형과 함께 탄 택시. 형은 내 손을 꼬옥 붙잡으며 말했다.

“유철아, 건강해야 해. 유학생활 힘들겠지만 건강관리 잘하고, 들어오면 또 한잔 하자.”

그렇게 나는 다음에, 진짜 다음에 꼭 한 잔 할 것을 약속하고는 택시에서 내렸다. 
그게 형과의 마지막이 될 줄이야, 그 때는 몰랐다. 그게 마지막인 줄 알았다면, 결코 내리지 않았을 텐데.. 최소한 소주 한 잔 더 하자는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았을 텐데.. 조금 더 놀려주었을 텐데.. 건강 꼭 챙기시라 이야기 했을텐데.. 그랬다면 이렇게 허망 하지는 않을 텐데.. 아무리 이렇게 후회해 보아도 이미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에, 그의 가는 길 조차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그 후회마저 허망하다.

종필이 형, 이제 정말 형을 볼 수 없는 거야? 전 형이 언젠간 꼭 같이 작업하자는 말 기억하고 있어요. 근데 가긴 어딜가요.. 아직도 저는 더 이상 형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리고 어떻게 받아들일지 정말 모르겠어요. 그냥 너무 힘드네요. 특히 요즘 너무 힘들었는데 말이야. 이렇게 아직도 형에게 투정만 늘어 놓네요. 아직도 형 앞에선 제가 철부지 고등학생인 것 같아요. 그냥 지금 형이 그리운건 어쩔도리가 없네요. 보고싶어요.. 형.. 그저 형이 가는 길에 함께 할 수 없음이 너무 괴롭네요.

형이 아프다는 이야기 들었을 때, 그냥 이 말 꼭 전하고 싶었어요. 그 날 양재동에서 형에게 한 말, 다시 하고 싶었어요. 내가 꿈을 키워가던 시절, 당신은 내게 영웅이었고, 지금도 형을 보면 설렌다고. 그리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건 정말 형이라고 말이에요. 결국 전하지 못한 이말 이렇게나마 남겨요. 그곳에서 라도 이 글 읽어주세요.

이제 정말 형을 보내야만 하는 시간이 다가오네요. 아니, 보낸다는 건 말이 안되겠죠? 그냥 가슴에 묻는 것이겠죠. 호식이 형을 가슴에 묻은 것처럼.. 아마 가슴에 묻은 형들이 내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나침반으로 계실 것이고, 지치고 힘들 때 내 삶의 원동력이 될거에요. 

형, 종필이 형! 조심히 가요. 먼 훗날 꼭 저승에서 약속한 소주 한 잔 기울여요. 그 때까지 건강히 계셔요..!

 

사진출처 : 4. 16 연대 페이스북 타임라인


현재 유튜브 [4.16연대 미디어위원회]에서 고 박종필 감독의 영화 다시 돌아보기가 진행 중이니 꼭 보시는 것도 추모의 방법이라 생각됩니다.

 

섦 – 빈집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4

빈집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썩어가는 흰 눈에 바람에 가려진 나무의 흔들림이 있다

산은 말하고 말은 말이 없고 마른 하늘은 새벽별 그리워

밤이 그리워 가슴에 빛이 나고  세상은 온통 까만 닭이 짖는다

눈이 내리고 비가 내리고 내리는 빗속에 눈이 내린다

 

2017. 7.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섦 -풍문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3

풍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바람에 달이 있어 저 구름인 양 시월도 오고 가는 데

시의 시원한 바람은 잡히지 않은 양을 타고 간다.

흔들리고 떨리는 눈동자에 찬 시가 열리어 가는 데

거울의 아침은 보리밭 알알이 타는 까만 속이 열리고 있다

향기는 시큰하게 찬 밤하늘의 별빛으로 속삭이는 데

바람의 달이 송이송이 빛나고 있다.

 

2017. 6.28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섦 – 유리의 성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 -32

유리의 성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깨어질 듯, 깨어지는 틈새로

작은 꽃이 스스럼없이 피어난다.

한 때는 흙이었고

한 때는 바람이었고

한 때는 길이었다.

차갑고 단단했던 유리는

타인의 길에 의지할 때 깨어진다.

스스로 자라는 길에는

작은 씨앗이 보송보송 피어나고

옹기종기 모인 자갈들은

오늘의 이야기를 충실하게 담는다.

나는 곧 타인의 끝에 서있다.

나는 다시 타인의 시작에 서있다.

 

2017. 6. 15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작업노트

나와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담는 것은 곧 나라는 존재의 균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새가 스스로 알을 깨지 못하면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여행을 할 수 없는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타인이라는 존재를 받아들이고 이해함으로써 유리처럼 단단했던 그 벽이 투명해집니다. 우주를 이해하면서 작은 꽃이 피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서 아프기도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서 시원함도 느낄 수 있는 자갈도 만납니다. 작은 씨앗들이 모이고 옹기종기 모인 우리들의 다양한 모습은 변화의 길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게 단단하고 두꺼웠던 벽은 흐려지고 타인을 통해 나를 만날 수 있는 유리의 성을 깨고 우주를 항해합니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유철의 유럽방랑기] -3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 

슬로베니아 남서쪽 끝자락 크로아티아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 작디 작은 마을, 피란Piran. 수도 루블라냐에서 5시간, 국토 대부분이 산악지역으로 이루어진 슬로베니아에서 버스 외에는 변변한 교통수단을 기대하기란 어렵다. 특히 피란은 바다를 앞에 두고 산으로 둘러 쌓인 지형을 갖고 있기 때문에 기차를 탄다 하더라도 근처 도시인 코페르Koper에서 버스나 택시로 갈아타야 한다.
벅차 오르듯 넓디 넓고, 새파란 바다가 보고싶어 떠나온 여행이었다. 그래서 내가 택한 길은 베니스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피란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피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이탈리아 두이노, 미라마레, 슬로베니아의 코페르, 이졸라의 아름다운 경관은 내 선택이 옳았음을 증명했다. 그러나 이를 그저 지나쳐 갈 수 밖에 없는 그 아쉬움은 어쩔 수 없다. 그저 다음에, 그리고 언젠가 다시 오리라 나를 위로해 본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해안도로를 빠져나와 피란으로 들어가는 길, 산비탈을 굽이굽이 넘어 내려오자 눈 앞에 펼쳐지는 경관은 황홀경에 빠지게 한다. 배의 선수처럼 뾰족하게 톡 튀어 나와 있는 마을, 피란. 그리고 이를 둘러싼 새파란 바다가 눈 앞에 펼쳐진다. 유난히 맑은 하늘, 바다와 하늘을 가르는 수평선의 경계는 모호하다. 이는 마치 아드리아 해가 하늘로 쏟구쳐 나를 삼킬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저 감탄사만 나올 뿐이었다.
옆 좌석에 앉은 노부부는 그런 나를 보며 웃는다. 그러나 그들도 나와 다를바 없다. 들썩이는 할아버지의 궁둥이나, 목을 내뺀 할머니의 모습에 나도 웃음이 나왔다. 살짝 몸을 비틀어 드리자, 할아버지는 들썩이는 엉덩이를 들어 상체를 쑤욱 내밀며 오래되어 보이는 자동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다.

‘찰칵, 지잉…’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중간쯤 어딘가의 카메라가 정겹다. 그러나 장담 컨데 그 사진엔 내가 나올 수밖에 없었을 뿐더러 반사광에 바깥 풍경은 그저 하얗게 나올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럼에도 내게 ‘엄지 척!’ 하며 웃으신다.
어린 시절, 아직 남은 필름이 들어있는 사진기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가 이것 저것 찍었던 기억이 난다. 난 그저 그 안에 있는 사진을 빨리 현상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선 24방, 36방을 빨리 채워버려야만 했다. 지금같이 원하는 것을 골라서 현상하거나 혹은 컴퓨터에 저장해 놓고 생각날 때 클릭해서 보는 그런 시절과 다르다. 무엇이 찍혔을지, 혹은 어떤 필름이 들어 있는지 하는 기대가 있었고, 그 필름이 현상되어서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설렘이 있었다. 그런 노부부의 카메라를 보니 문뜩 그때 그 시절의 그리움이 싹튼다.

버스에서 내리자, 눈 앞에 펼쳐진 아드리아 해와 오늘따라 유난히 파란 하늘에 그 수평선 마저 모호한 그 곳에 내가 마치 던져져 있는 듯한 느낌이다. 마치 하늘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 방파제 끝에 서로 마주한 초록과 빨강색 등대들은 더욱 또렷하게 보인다. 드라마 ‘디어 마이 프랜즈’에서 고현정과 조인성이 이 방파제에 기대어 저 두 등대를 배경삼아 둘이 와인을 마시던 장면이 문뜩 떠오른다. 그러니 여기에 로멘틱함도 더해진다. 한국인으로 보이는 커플이 그 자리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런 데서 셀카를 찍는 건 촌스러운거야!’ 셀카를 찍고 싶은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가볍게’ 그곳을 지나친다.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

 

호수 같이 잔잔하고 깨질듯 맑은 아드리아 해를 곁에 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걷는다. 그러자 눈 앞엔 타르티니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 곳 한 가운데에는 피란이 자랑하는 이탈리아 바이올린 비루투오소이자, 작곡가인 쥬세페 타르티니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한 그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 사실 둘러보면 이 곳 마을은 타르티니 일색이다. 광장 입구에는 타르티니 호텔이 있으며, 동상 맞은 편 건물에는 타르티니의 생가라고 크게 쓰인 현수막이 걸려 있다. 그의 동상 뒷 편 언덕 중턱의 성 프란시스 성당에도 마찬가지다. 성당에는 찬송가가 아니라 타르티니가 작곡한 소나타가 하루 종일 흘러 나온다. 지금 내가 서 있는 타르티니 광장도 마찬가지다. 타르티니 광장 한 가운데서 어린 꼬마의 바이올린 연주가 한창이다. 바이올린 케이스를 열어 두고선 타르티니의 명곡, ‘악마의 트릴’을 연주한다.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동전을 하나 둘씩 던져주지만 아랑곳 하지 않고 도도한 표정으로 입술을 살짝 깨문 채 고개를 휘저으며 연주에 집중하는 꼬마 모습이 당돌해 보인다.

 

 

사실 타르티니의 악마의 트릴에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타르티니의 친구였던 프랑스 천문학자 요셉 랑드의 일기에는 그 이야기가 적혀있다.
음악에 심취한 타르티니는 좋은 악상을 떠올리기 위해 매일 밤을 전전긍긍하며 보냈다고 한다. 아마도 성직자가 되길 바랬던 부모를 배신하고, 사랑하는 여인을 선택한 그리고 다시 그 사랑하는 여인을 버리고 음악을 선택한 그에게 남은 건 음악, 바이올린 그것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타르티니는 꿈을 꾼다. 그리고 거기에서 악마와 마주하게 된다. 어둠 가득한 곳에서 나타난 붉은 모습의 악마는 타르티니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살고 싶다면 당장 네 영혼을 내놓아라. 네가 영혼을 내놓는다면, 내가 너의 소원을 들어주마.”

마치 괴테의 ‘파우스트’에서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한 제안을 마르티니가 받은 것이었다. 악마의 제안에 타르티니는 자신의 바이올린을 악마에게 건내며 망설임 없이 답한다.

“이 바이올린으로 지금껏 들어보지 못한 가장 황홀한 연주를 내게 들려 주시오.“

그러자 악마는 그와의 약속에 따라 타르티니를 위해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악마가 들려준 트릴은 타르티니가 지금까지 평생에 들어보지도 상상해보지도 못한 아름다운 것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그는 꿈 속에서 들은 악마의 연주를 오선지에 옮겼는데, 그것이 ‘악마의 트릴’이라고 한다.

타르티니가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한 악마의 트릴, 만약 악마가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누군가에게 한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답할까? 당장에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앙상의 문제를 들먹이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세계평화? 남북통일? 그 순간 이렇게 거창한 것을 말하는 이도 많지 않을 터, 그럼 박근혜의 종신형? 영생이나 막대한 금은보화? 그것도 아니면 세월호에서 숨진 이들의 생환?…

문뜩 동네에서 만난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가 떠오른다. 아직 볕이 귀했던 영국의 겨울 어느 날,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을 만끽 하고픈 마음에 잽싸게 밖을 나섰다. 지금 해가 떠도 5분 뒤 비가 올 수 있는 것이 영국 겨울 날씨다. 시내를 거니는데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 온다. 오랜만에 허락된 햇볕과 함께 들려오는 바이올린의 선율은 내 감수성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바이올린 소리에 이끌려 간 곳은 광장 한 귀퉁이. 그곳에는 바이올린을 켜고 있는 백발의 아시아계 노인이 있었다.
낡디 낡은 테일드 코트에 잘 다려진 흰색와이셔츠, 검정색 등산복 바지에 반짝반짝 광나는 구두를 신은 백발 노인. 군데 군데 하얗게 빛 바랜 바이올린은 그 기능이나 할까 싶지만, 그 노인의 활 놀림에 응답하며 아직 수명을 다하지 않았노라 외친다. 인상을 쓰다가 살짝 미소 짓다, 고개를 가로저으며 짓는 애잔한 그의 표정은 그 울림에 깊이를 더 하는 듯 하다.
초라하지만 나름 갖춘 그의 복장과 그의 바이올린 연주실력에 길을 걷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그 앞에서 발길을 멈춘다. 연주를 마친 그는 관객에게 정중하게 인사하고는 파란 하늘을 향해 키스를 던진다. 그리고 관객에게 말한다.

“이번 곡은 제 아내를 위한 곡입니다. 하지만, 더 이상 들려줄 수가 없어요. 얼마 전 그녀는 세상을 떠났거든요. 그녀를 대신해 여러분들께서 감상해 주시면 좋겠어요.”

그의 말에 관객들은 박수를 보낸다. 노부부는 다시금 손을 꼬옥 부여잡았고, 맞은편 어린 아이는 그녀의 부모를 꼬옥 끼어 안는다. 아직 찬 공기에 나는 손을 모아 입김을 불고는 두 손을 비벼본다.
호흡을 가다듬은 노인은 다시 바이올린을 켜기 시작한다. 그의 활이 바이올린의 현과 마찰하며 이전과는 또 다른 깊은 울림을 만들어 낸다. 그건 건반악기가 주는 그런 직관적인 감동과는 다르다. 여러 개의 모노코드를 박자에 따라 혹은 화음 만들어 감상자에게 전달하는 감동과는 다른 감동, 찰현악기가 내는 소리는 이보다 훨씬 감성적이다. 그 소리는 심장을 요동치게 한다. 눈물이 흐르는 소리라고나 할까? 그의 연주에 나도 모르게 그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아마도 악마가 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에게 나타나 타르티니에게 한 제안을 한다면, 분명 그는 ‘마지막으로 내 아내에게 나의 바이올린 연주를 들려주게 해다오’ 하고 말했을 것이 분명하다. 먼저 떠난 아내에게 바치는 그의 연주는 무척이나 애절했고, 무척이나 행복해 보였다.

꼬마 바이올리니스트의 연주를 뒤로 하고 광장을 떠나려고 하는데, 좀 전에 버스에서 마주한 노부부가 서로 번갈아 가며 광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있다. 필름 돌아가는 손맛이 그리웠던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제가 두 분을 찍어드릴까요? 두 분 같이 서 보셔요!”

할아버지가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잡아 끈다. 괜찮다는 표정을 지으며 다시 내게 카메라를 건내려 하자, 그녀는 마지 못해 그의 옷자락을 놓는다. 아마도 낯선 동양청년에게 ‘귀중품’을 맡긴다는 것이 불안했나 보다.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해 메고 있던 가방을 잠시 바닥에 눕히고 그 위에 내 핸드폰을 놓았다. 그러자 비로소 되찾은 그녀의 미소.

“할머니! 할아버지랑 더 가까이 붙으셔요. 좀 더! 굿! 자, 찍습니다. 하나, 둘, 저매니~”

‘찰칵, 지잉..’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고 말하는 독일인 노부부, 할머니는 언제나 마지막 여행이라 생각한다고 한다. 그래서 날씨가 좋아지는 시기인 봄, 그리고 절정인 여름마다 여행을 다닌다고 내게 말한다. 할아버지는 이에 덧붙이며 말한다.

“그래서 나는 늘 다음 여행을 미리 예약해. 낸 돈이 아까워서라도 죽을 순 없지. 이번 여름에는 두브로브니크!”
그러자, 할머니는 웃으시며 말한다.
“그래요. 두브로브니크, 갑시다. 그러려면 당신도 계속 운동해야 해요.”

할아버지는 손을 번쩍들며 여전히 자신이 건강하다고 표현한다. 아마도 이 노부부에게는 다음 여행, 그리고 그 다음 여행, 또 그 다음 여행이 악마와의 거래 대상이 될지 모르겠다.

그럼 나는? 나는 악마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지금 내가 내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갈구하는 것은 무엇일까? 내 처지를 생각해 보면 아마도 박사학위 정도라 답하지 않을까? 박사논문 서론에 내 연구의 의의랍시고 쓴 거창한 포부는 말하기도 부끄럽다. 하지만 이것이 죽은 아내를 위한 바이올린 연주나, 늙은 노부부의 다음 여행과 같이 그 다지 로맨틱하지도, 그렇다고 작지만 영혼과 맞바꿀 정도로 절실하거나 절박한 것 같지도 않다. 어찌 보면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들은 그저 시작했기에 하고 있는 것이고, 이를 마무리 짓기 위해 필요한 것들일 뿐 이기도 하다.
나는 지금 내가 갈구하는 그것이 가치 없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잘 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군가로부터 그냥 주어진 것이라면 영원히 가치가 부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악마와 거래에서 이를 요구한다면 그건 하찮은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 노부부와 백발의 바이올리니스트의 바람이 가치 있는 건 그들 인생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러 했는가? 내가 이 과정에 충실해야 할 이유는 거기에 있는지도 모르겠다.

사진/글 :  이유철  (페이스북 https://www.facebook.com/uchul83)

 

 

사진출처 : 이유철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