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1-낭만적 종교 예술

 

1)

낭만주의 미학은 중세 종교적 구원에서 출발하여 기사도 정신을 거쳐, 근대 세속적 성격 예술로 나간다. 이런 분류는 예술 작품이 다루는 주제를 중심으로 분류한 것인데, 이는 헤겔이 이 시대 시간적 흐름을 고려한 것이기는 하지만, 시간적 흐름과 완전하게 일치하지 않는다. 이는 흔히 이 시대 예술을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계몽주의 등과 같이 시간적으로 분류하는 것과 대비된다.

헤겔은 그 출발점에 해당하는 종교 구원을 다루는 예술을 세 가지 부류로 나누었다. 첫 번째가 그리스도의 수난의 역사에 관한 형상화이며, 두 번째가 기독교적 정신인 종교적 사랑을 표현하는 작품이다. 세 번째는 교회의 정신을 다룬다.

종교 예술에 관한 헤겔의 설명은 여러모로 고딕 예술을 중점을 다룬다는 것을 암시한다. 하지만 헤겔은 종교 예술은 고딕 이전 로마네스크나 그 이후 르네상스까지 포함하는 폭넓은 예술을 포함하고 있다. 헤겔은 종교 예술이 각 시대마다 보여주는 양식상 차이에 관해서는 별로 주목하지 않으며 오히려 여러 시대에 걸쳐 등장하는 기독교 종교 예술이 지닌 공통성에 주목한다. 여기서는 논의의 편의를 위해 종교 예술을 주로 고딕 예술과 관련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2)

흔히 고딕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는 11세기에서 13세기에 걸친 시대를 말한다. 이 시대 유럽 사회는 전반적으로 변화했는데, 새로운 경작 기술을 바탕으로, 부역 노동은 생산물 지대로 전환했다. 잉여가 축적되면서 수공업이 분리되며 상업적 교역이 발전하고 도시가 형성되었으며 귀족의 사치품을 매개하는 원격지 무역이 부활했다. 영주권이 집중되면서 그 가운데 왕과 대영주의 권리가 신장되었다.

왕은 웅장한 교회를 세우는 등 교회를 물질적으로 지원하고 교회는 왕과 대 영주를 위해 이데올로기적인 지원과 관료층을 제공했다. 이를 위해 수도원 학교와 대학이 세워졌다. 이 시기 이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이슬람 세력과의 접촉을 통해 그리스 고전 학문이 유럽으로 들어와 스콜라 철학을 발전시켰다. 이런 역사적 정신적 변화를 바탕으로 여러 예술작품이 형성되었는데 이 시대 예술 작품을 통칭하여 고딕 예술이라 일컫는다.

이 시기 등장한 고딕 예술은 종교적 내용을 주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 예술형식이나 고전적 예술형식과 맥락을 같이 한다. 하지만 헤겔은 여기서 근본적인 차이를 발견하는데, 그 이전 시대 예술은 영원하며 부동하는 신 자신의 모습을 정지된 상태에서 보여주는 것이었으나 고딕 예술은 신이 일으키는 역사를 그 운동하는 과정 가운데서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와 성모, 사도, 신도들이 겪는 수난과 참회 그리고 영광의 삶이 펼쳐진다.

 

3)

기독교적 종교 예술 대표적으로 고딕 예술이 보여주는 가장 근본적 특징을 헤겔은 특칭성[Partikularitaet]이라는 개념에서 찾고 있다. 즉 그 모습이 과거 신의 모습에서 보여졌던 숭고하거나 이상화된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고 그리스도를 그리던 신도를 그리던 간에 그 모습이 우연하며 개별적인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 시대 어느 작품이나 사실성을 갖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연하고 개별적인 모습 자체가 신의 모습은 아니다. 특칭적인 모습 가운데서 신적인 면모가 출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겪는 삶 속에서 표현될 수밖에 없다. 그 삶은 곧 수난과 참회, 영광을 보여주는 것인데, 대체로 긍정적인 최종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등장하는 부정적 요소가 강조된다.

또한 이런 삶의 운동하는 장면은 제단화에서 보듯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거나 하나의 장면 속에 응축되거나 몽타쥬되어 표현될 수밖에 없다. 이런 특성은 고딕 시대 대표적 화가 시모네 마르티니의 작품에서 충분히 발견할 수 있다.[1]

부정적 장면 그리고 응축 등 기법이 사용되는 가운데 처음에 사실적인 모습은 파괴되면서 기이하게 일그러지고 심지어 조악하며 야만적으로 보이니 그 때문에 이 시대 예술은 고딕적이라고 불리어지게 된다. 하지만 세부적으로만 본다면, 그런 가운데서도 사실성을 잃지 않으니, 이 두 가지 대립된 속성 때문에 자주 이 시대 종교 예술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사실성에 주목한 사람들은 이런 종교 예술 속에 그리스 고전 문화의 영향을 찾게 되며, 로마네스크니 르네상스니 하는 이름이 붙여진다. 반면 왜곡된 형상의 측면에 주목하는 사람들은 이 시대 예술을 고딕[또는 게르만적]이니 바로크니 하는 이름으로 부르게 된다.[2]

 

4)

실제로 로마네스크 조각과 고딕 조각을 비교해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앞의 부조는 로마네스크 양식을 대변하는 스페인 산티아고 폼포스텔라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후자는 고딕을 대표하는 프랑스 파리의 사르트르 성당의 현관 부조이다.

건축적으로 본다면, 로마네스크와 고딕은 판연하게 구분된다. 하지만 조각을 놓고 보면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데, 양자 모두 한편으로는 사실적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양식화되어 있어, 약간의 정도 차이만 보여줄 뿐이다.

이런 이중성을 헤겔이 어떻게 지적하고 있는지 확인해 보자.

 

“현재 우리의 국면에서는 형상이 일상적인 것이자 주지의 것으로 머물며, 그 형식들은 어느 정도까지는 무차별적인 특징적인 것, 즉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그리고 이 면에서 대단히 자유롭게 취급될 수 있는 것이다.”[3]

 

“왜냐하면 개체적 주관성과 신의 화해는 직접 등장하는 조화가 아니라, 무한한 고통, 헌신, 희생으로부터 그리고 유한하며 감각적이며 주관적인 것의 절멸로부터 비로소 등장하는 조화이기 때문이다.”[4]

 

3)

이런 수난과 참회를 통해 다시 복귀한 신성이 곧 성령이니, 신이 전개하는 역사로서 예술은 마침내 성령의 표현으로서 예술로 발전하게 된다. 기독교적 성령의 본성은 무한한 사랑의 감정이다. 헤겔은 이 사랑을 개념적으로 규정하면서 “타자의 자기 속에 자기를 망각하는 동시에 이런 망각 속에서 비로서 자신을 소유하는 것”[5]이라고 규정한다.

기독교적 사랑은 한 개인의 다른 개인에 대한 인간적 사랑은 아니다. 이 사랑은 곧 절대자 즉 신 자신의 사랑이다. 이 사랑은 내면적으로 집약된 무한한 심정 즉 “그 무궁무진함을 직접 심정의 단순한 심연으로 끌어 모으는” 내밀한 사랑이다. 또한 이 사랑은 모든 개인에 대한 일반적인 사랑 즉 “그 내용의 일반성에 의해 고양되고 담지되는” 사랑[6]이다.

헤겔은 무한한 일반적 사랑을 표현하는 예술의 어려움을 말한다. 고전적 예술이라면 이런 심정을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으로 표현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적 신성은 우연하고 개별적인 인간 속에 머무르니, 특칭적인 인간의 모습 속에 무한한 사랑, 순수한 심정을 표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희생을 통한 인류에 대한 사랑보다는 성모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예수에 대한 사랑이 더 자주 표현되었다. 왜냐하면 마리아의 아기 예수나 죽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모성애라는 자연적인 감각적 형상을 갖기 때문이다. 여기서 “모성애의 자연적인 내밀성은 철저히 정신화되어 신적인 것을 본래의 내용으로 삼지만, 그 정신적 내용은 그윽하면서도 무의식적인 것으로 남는다.”[7]

라파엘의 마돈나 상이다. 마돈나의 눈은 헤겔이 말하는 그윽하고 무한한 모성애를 잘 표현한다.

 

4)

종교 예술은 그리스도의 수난사나 내밀한 사랑의 정신의 표현에 그치지 않는다. 종교 예술은 사도나 신도의 삶으로까지 확장된다. 순교의 고통, 참회와 개종, 신도에게 펼쳐진 기적 등이 예술적 표현 대상이 되는데, 헤겔은 이런 유형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유형 대상 중의 하나가 곧 마리아 막달레나[8]라고 말한다.

페르지노의 십자가 1480, 예수의 발 아래 기도하는 사람이 마리아 막달레나이다.


[1] 시모네 마르티니(1284-1344)는 고딕 후기에 이탈리아 시에나에 살았던 대표적 고딕 화가이다. 그의 작품 십자가에서 내림(1315)은 성경의 이야기를 파노라마 식으로 전개하면서 하나의 그림 속에 중첩해서 표현하고 있어 운동감이 느껴진다.

[2] 예를 들어 아놀드 하우저의 주장을 들어보자.

[3] 미학강의 2권, 181쪽

[4] 미학강의 2권, 182쪽

[5] 미학강의 2권, 165쪽

[6] 미학강의 2권, 164쪽

[7] 미학강의 2권, 168쪽

[8] 헤겔은 그 중 가장 탁월한 것은 이탈리아 화가의 작품이라 하는데 어떤 그림을 지칭하는지는 밝혀지지 않는다. 헤겔 당시 마리아 막달레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와 죄의 이미지가 겹쳐 있었다. 그 때문에 헤겔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아름다운 죄인’이라 말한다. 헤겔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육체적인 아름다움보다는 정신적인 아름다움 즉 무한히 사랑하는 마음을 파악하는 것으로 보인다. 헤겔은 그녀의 음란의 죄가 그녀의 육체적 아름다움 때문에 나오는 것으로 본다. 그 죄는 자연적으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오히려 그녀는 머리칼로 예수를 씻는 정신적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으니 그 마음에 비추어 볼 때 그녀의 죄는 진정한 죄가 아니며, 그녀는 죄를 짓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키고 있으며 그나마 지은 죄조차 이미 고해하고 예수로부터 용서를 받았다. 그녀에 내재하는 사랑하는 마음 때문에 용서를 받은 것이다. “감동적인 것은 사랑하는 가운데서도 양심을 지킨다는 것이며, 영혼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속에서 고통의 눈물을 흘린다는 것이다. 그녀의 잘못은 그녀가 수많이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에 있지 않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믿었는데 이 사실이 아름답고도 감동적인 오류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의 감각적으로 풍부한 아름다움 자체를 본다면 그녀가 사랑 속에서도 고상하며 깊은 심정을 지니고 있었다는 생각밖에는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미학강의 2권, 178쪽)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20-낭만주의적 예술 형상으로서 가상

 

1) 가상

앞에서 근대가 시장 관계가 일반화된 사회라 했다. 이 시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것을 표현하는 종교적 형식 즉 내재하면서 초월하는 신과 이 시대 인간의 파토스와 죽음에 관한 생각을 살펴보았다. 이제 이 시대 정신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형식인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살펴보기로 하자. 

 

근대에 들어와 소외된 정신이 등장하면서 예술 형식도 근본적으로 변화하게 된다.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을 표현하는 기호이다. 상징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수수께끼처럼 보여주는 상징이었다. 고전주의 시대 예술 기호는 그 의미를 이중화하여 보여주는 기호 즉 닮은 꼴, 현상이었다. 헤겔에 따르면 이제 소외된 정신의 시대 등장하는 예술 기호는 가상이라는 형식을 취한다.

 

가상[Schein]은 본질이 자기를 비추는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 영상을 말한다. 그 거울 속에 본질의 영상이 맺히지만, 그것은 이제 자신이 다른 것의 영상이라는 사실을 감추지 못한다. 그 점에서 가상은 현상과 구분된다. 현상 역시 본질이 비친 영상이지만 그것은 자신이 마치 자립적인 실재처럼 또는 진실된 것처럼 나타난다.

 

현상은 사실 거짓 영상이면서도 자신이 진실된 실재라고 믿는 것이며 반면 가상은 자신이 거짓 영상이라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면서, 오히려 진실된 실재 본질 자체가 되는 것을 말한다. 현상과 가상의 이런 관계는 자신을 실재처럼 보이게 만드는 무대 장면과 다양한 소원화 장치를 통해 그런 환상을 깨는 무대 장면의 관계에 비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 눈동자

낭만적 예술 형상인 가상은 그것이 어떤 형상인 한에서 구체적인 자연성을 지니지 않을 수 없지만, 어떤 형상이 이미 자기 부정성을 지닌다는 것은 구체적인 형상이 더 이상 자연 그대로 머무르지 못하고 이미 자기 내로 복귀하면서 정신화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신의 현존재는 자연적이고 감각적인 것 그 자체가 아니라 감각적인 것을 비감각적인 것으로, 즉 정신적인 주관성으로 전환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신의 진리는 단순히 상상에 의해 산출된 이상이 아니라, 스스로 유한한 즉 외면적이고 우연한 현존재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을 신성한 주관성으로 자각한다. 즉 자신 안에 무한히 머물며 또한 이런 무한한 자신을 자기에 대해 존재하게 한다는 사실을 자각한다.”[1]

 

절대적 주관성 즉 신은 예술적 형상 속에 내밀하게 존재하므로 이런 내밀성은 자주 영혼을 들여다보는 눈으로 표현된다. 고전적 신상은 눈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기서 신은 자기를 외부로 전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안으로 들여다 보일 내면을 가지지 않기 때문이다. 상징적 신상에서는 눈을 가지지만 그 눈은 신의 눈으로 세계를 조명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나 낭만적 신상에서 그 신은 유한한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있으면서 그 눈을 통해 그 속에 감추어진 내밀한 신적 존재를 암시한다. 여기서 눈은 내면을 들여다 보는 통로다. 라파엘로 시스티나 마돈나 상에서 표현된 성 모자의 눈동자를 보라.

3) 시간성

고전주의 예술 형식인 현상에서 내용(의미)은 그 형상(기호)과 닮은 꼴로 합치한다. 내용은 형상 속에 남김없이 드러나며, 형상은 내용을 드러내면서 자기를 이상화한다. 반면 낭만주의적 가상에서 내용과 그 형상 사이에 다시 분리가 일어나니, 이때 형상은 더 이상 이상화된 형상이 아니고 다만 실제 그대로 유한한 형상에 불과하다. 반면 내용은 이런 유한한 형상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절대적 무한성이다.

 

여기서 표면적으로 보면 내용과 형상이 분리되는 상징적 예술 형식이 다시 부활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상징과 가상은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상징은 그것을 지시하는 내용에 대해 다만 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양자의 관계는 수수께끼적인 관계이다.

 

반면 낭만적 가상은 형상에 속에 이미 자기 부정성이 들어 있으니 이를 통해 내용이 자기를 비추어준다. 이런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으로 충분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이 자기 부정성은 개별적 현상의 연속적인 운동을 통해 드러날 뿐이다. 낭만적 가상은 내용이 자기를 타자화하고 다시 자기 내로 복귀하는 운동 과정 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낭만적 예술의 근본적 특징인 시간성이 드러난다. 상징적 예술이나 고전적 예술은 시간성을 결여한다. 그것은 정신이 드러나는 영원한 한 순간일 뿐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고정된 순간이 아니라 시간적 운동 속에 자기를 표현한다. 미술이 음악을 지향하고 음악이 문학적 서술을 지향하는 것도 낭만적 예술에 필수적인 시간성 때문이다.

 

4) 일상성

헤겔에 따르면 낭만적 예술 형식은 더 이상 신을 주제로 삼지 않는다. 과거 상징주의 예술이나 고전주의 예술은 시대 정신은 신을 직접인 주제로 삼는다. 이런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상징하거나 신을 드러내는데 목표를 둔다.

 

그러나 낭만주의 예술 형식에서는 신은 항상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간접적으로 출현할 뿐이며, 여기서 예술이 소재로 삼는 것은 유한하고 우연한 세속적인 현상일 뿐이다. 신은 이런 유한하고 우연한 현상에 내재하거나 이런 현상이 부정되는 운동을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다. 예를 들자면 그리스도의 죽음이거나, 인간이 세계 속에서 겪는 세속적 운명이 예술의 주제로 될 뿐, 신은 그 어디에서도 직접 드러나는 법은 없다. 

 

상징적 예술형식에서나 고전적 예술형식에서, 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은 지극히 제한되었고 예술적 소재는 한정적이다. 반면 낭만적 예술 형식에서는 현실의 모든 것이 예술적 소재로 다루어진다. 왜냐하면 그 어느 것이나 자기 부정성을 통해 신적인 것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정신은 근대에 들어와 그 이전 시대에 비해 비할 바 없이 깊어졌고 거꾸로 이런 정신을 표현하는 감각적 형상의 범위는 무한정 넓어졌다고 한다.

 

일체의 유한하고 규정된 것이 낭만주의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으므로, 그런 소재는 일상적인 현실 어디에서나 찾을 수 있다. 과거에 간과된 소재도 이제는 훌륭한 예술적 소재가 될 수 있으니 예술가는 어떤 일상적 현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정신의 원칙이 내적으로 깊어질수록 그만큼 더 관심, 목적, 그리고 감각의 범위는 무진장한 것이 되며 그리하여 정신은 무한히 증가된 내용을 갖는 내적, 외적 충돌과 분열들, 여러 단계의 열정들, 그리고 극히 다양한 국면의 만족들로 전개된다.”[2]

 

낭만주의 예술은 가장 철저한 리얼리즘 예술이다. 낭만적 예술은 현실의 자기 부정성을 추구한다. 이런 부정성은 외적인 부정성이 아니라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부정성이니, 그런 점에서 자기 부정성이다. 작가가 자기 마음대로 현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성이 현실 그 자체에서 존재하는 것이려면, 작가는 현실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 세부에서까지 찾아 들어가고 그 유한성과 규정성 속에서 있는 그대로 현실을 파악해야만 그 속에서 부정성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초상화적인 것[Portrartig]’이라고 한다. 또는 ‘일상적인 것 속에서 고향을 두고 있다[Heimatlichkeit im Gewoehnlichkeit]’고 말한다.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이 리얼리즘적인 경향성을 지니게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한다.

 

“낭만적 예술의 무한한 주관성, 절대성은 그 현상 속으로 침잠하지 않고 자신 안에 머물며 바로 이로 인해 그 외면성을 고립적으로[fuer sich] 갖지 않고 타자에 대해 관계하는 것으로서[fuer Andres] 즉 자유롭게 방임되어서 어떤 것에 희생되기도 하는 외면으로서 갖는다. 나아가서 이런 외적 요소는 일상성과 경험적 인간의 형상을 반드시 띠어야 하는바 까닭인즉 여기서는 … 신 자신이 유한한 시간적 현존재로 내려오기 때문이다.”[3]

 

5) 비미적인 것과 숭고

낭만주의 예술에서 예술의 소재가 되는 외적인 현존은 자립적인 것이 되지 못하고,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니, 그것은 유한성과 규정성을 받아들이게 된다.

 

고전주의에서 예술적 현존은 이상화되면서 자립성을 지닌 것이 된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고 고요하게 머무른다. 반면 낭만주의에서 예술은 이런 유한성과 규정성 때문에 고전주의적 미학에 비추어 본다면 균형과 조화를 결여한 비-미적인 것[Unschoen], 즉 추한 것을 포함하게 된다.

 

하지만 낭만주의 예술에서 이런 비-미적인 소재는 진정한 낭만적 예술의 이념을 드러내는 계기에 불과하다. 이런 비미적인 것은 곧 이행하고 마는 우연한 것이니, 이러한 비-미적 예술 소재는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을 드러내려는 매개체에 불과하다.

 

고전주의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 미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균형과 조화를 지니면서 이상화된 형상이다. 그러나 낭만적 예술은 외적 형상에서는 비미적인 것이지만, 절대적 주관성을 드러내면서 정신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여기서 정신적 아름다움이란 정신이 조화와 균형을 갖는다는 의미는 아니다. 정신적 아름다움은 곧 자신이 절대적 주관성인 신적 존재라는 의미이니, 이 아름다움은 숭고한 아름다움에 속한다고 하겠다.

 

여기서 상징주의 시대 등장한 숭고성이 다시 출현하는데, 상징주의 시대 숭고성은 마법적인 방식으로 신과 합치에 이르는 것이라면, 낭만주의 시대 숭고는 스스로 자기를 부정하는 데서 존재한다. 다시 말하자면 이 숭고는 무상의 죽음을 택한 예수 그리스도의 숭고성과 같은 숭고이다.

 

6) 음악성

그러므로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은 두 세계를 갖는다고 한다.  그 하나는 절대적 주관성의 내적인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외적인 것의 영역이다. 헤겔은 이 두 세계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이 때문에 낭만적 예술은 외면성이 이제 다시 독자적으로 활보하게 만들며, 이런 점에서 … 각양각색의 소재들이 자연적 우연성을 갖는 현존재 그대로 거침없이 표현되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이런 내용은 동시에 단순히 외적인 소재로서는 무차별적이고 저급한 것이며, 오직 그 속에 심정이 집어넣어지고 … 내면의 내밀성[Innigkeit]을 언표할 때만 본래의 가치를 지닌다는 규정을 지닌다.”[4]

 

이처럼 외적인 현존의 부정을 통해 떠오르는 절대적 주관성을 헤겔은 마치 음악과 같은 것에 비교하고 있다.  

 

“이런 관계 속에서 내면은 정점에서 표출되면서 외면성 없이 외화된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은 채 흡사 자기만을 듣는 듯하며 대상성도 형상도 띠지 않은 음조 자체이고, 물위를 떠도는 것이며 세계 위에 울려 퍼지는 울림이니, 세계는 자신의 현상 속에서 그것도 이질적 현상 속에서 다만 영혼의 내적 존재를 비추는 그림자만을 받아들이고 또 이런 내적 존재를 반영할 뿐이다.”[5]

 

“그러므로 낭만적인 것의 기본 음조는 음악적이며 특정한 표상 내용을 갖는다는 점에서 서정적인 것이다.”[6]

 

헤겔은 이런 점에서 낭만적 예술은 한편으로 무한히 다양한 소재를 받아들이는 보편성과 다른 한편으로 모든 외적 현존이 지양되는 순수한 내적 심정의 심연이 공존하는 데 있다고 말한다.

 

7) 낭만적 예술과 종교

 낭만주의에서 내용은 예술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은 신을 드러낸다. 여기서 신은 자신을 외적으로 현현하므로 오직 예술을 통해서만 자각되며, 예술 없이는 자각되지 않는다. 예술이 부차적이라는 점에서 낭만주의 예술은 상징적 예술과 같은 위치에 있지만 그럼에도 양자에 차이가 있다. 

 

상징적 예술에서 신적 존재는 먼저 종교를 통해 표상[환상]으로 주어지지만, 이런 표상은 소수의 사제에게서나 가능한 것이며 대중에게서는 불가능하다. 대중은 상징적 예술을 통해 신적 존재에 접근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예술은 상징주의 시대에는 종교에 봉사하는 데 이런 봉사는 부차적이면서도 불가피하다고 볼 수 있다.

 

반면 낭만적 예술에서 절대적 주관성의 정신은 자기 매개적인 존재이다. 이런 자기 매개 속에서 외적인 존재는 그 자체에서 자기 부정성을 지닌 것이기에, 우연하며 잠정적인 것으로 주어지므로, 이것은 예술의 소재가 되기는 하지만, 이런 예술을 통하지 않고서 절대적 주관성은 자기 매개를 통해 즉 사유를 통해 자기를 인식할 수 있다.  이런 사유는 일반 대중에게도 가능한 것이며 따라서 대중에게 예술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이로써 예술은 낭만주의 시대 말기 즉 근대에 이르러 일반 대중에게서도 잊혀지면서 예술의 종말이 다가온다.

 

[1] 미학강의 2, 140-141쪽

[2] 미학강의 2, 148쪽

[3] 미학강의 2, 156쪽

[4] 미학강의 2, 150쪽

[5] 미학강의 2, 150쪽

[6] 미학강의 2, 151쪽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9-근대인과 파토스

 

1) 근대인

근대는 시장 또는 계약 관계를 바탕으로 한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를 받는다. 헤겔은 이런 관계를 ‘정신의 소외’라는 개념으로 서술했다.

소외된 정신 속에서 신과 인간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 신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 작용 즉 개인의 자기 부정을 통해 자기를 나타낸다. 앞에서 이를 내재적 초월이라는 기독교 신의 모습을 통해 설명하였다.

신의 모습을 거울처럼 반대로 반영하는 것이 곧 근대인의 모습이다. 한편으로 근대인은 보이지 않는 손이 자기를 긍정하리라 믿는다. 그는 자기에 대한 오만에 빠지며, 무한정한 열정으로 자기를 추구한다. 이것이 근대인의 파토스다. 다른 한편으로 그 보이지 않는 손은 언제든지 그를 파멸시킬 수 있으니, 그는 운명에 대한 예감 가운데 죄의식을 느끼며 그 앞에서 불안하다.

헤겔은 무한한 파토스 속에서 오만하면서도 닥쳐오는 운명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헤겔은 이런 점을 근대인의 파토스와 죽음의 개념을 통해 설명한다. 이 두 개념은 고대에서도 출현하는데, 헤겔은 고대적 개념과 근대적 개념의 차이를 정신적 토대의 차이에서 규정하려 한다.

 

2) 고대의 파토스

고대인의 파토스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이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라는 작품이다. 여기서 두 주인공 엘렉트라와 클레온은 파토스에 따라 행동한다. 역시 그들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 예를 들어 가족의 윤리나 국가의 윤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이들은 자기 자신이 명백하게 정당하다고 믿고 이를 주저 없이 단호하게 행동으로 실천한다.  

그들은 행위의 결과 몰락하지만, 그의 몰락은 그가 자기의 실체와는 대립하는 다른 실체적 힘을 해치게 되었기 때문이며 이 다른 실체적 힘에 의해 보복 당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는 자신에 대립하는 실체적 힘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이 부당하게 보복 당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안티고네의 말을 들어보자. 그는 오빠를 장사 지내고 클레온 앞에서 끌려와서 자신이 택한 원리가 하늘의 법이라고 주장한다.

 

“전 글로 쓰인 것은 아니지만, 확고한 하늘의 법을 넘어설 수 있을 만큼 임금님의 법령이 인간의 몸으로서 강한 힘을 갖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늘의 법은 어제오늘 생긴 것이 아니고 불멸의 것이며 그 시작은 아무도 모릅니다.”[1]

 

 반면 클레온[안테고네의 외삼촌이다]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국가적으로 본다면 싸움을 벌인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조국을 방어한 자이고 다른 하나는 조국을 배반한 자다. 당연히 전자는 경배 되어야 하고 후자는 처벌되어야 했다. 클레온은 등장하자마자 코러스 앞에서 자신의 임무를 고백한다. 그는 국가를 최우선의 원리로 삼는다.

 

“시민에게 안전이 아니라 파멸이 닥쳐오는 것을 보고서는 나는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작정이며, 또한 국가에 적대하는 인간을 친구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외다. 그것은 즉 우리나라가 우리의 안전을 지켜 주는 배이며, 그 배가 편히 항해할 때 우리는 진정한 친구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2]

 

안티고네든 클레온이든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실체적 힘과 다른 실체적 힘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지 못했으니, 그는 무지에 의해 범법을 실행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안티고네는 자신의 무죄를 끝까지 주장한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3]

 

그럼에도 그들은 마침내 자신의 죄를 자각하게 되는데, 그런 자각은 자신이 다른 실체적 힘으로부터 보복 당하면서 비로소 생겨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서 정당성이란 주관적이거나 추상적인 당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지배하는 실체적 힘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파멸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된다. 아래 클레온의 고백을 들어보자.

 

아, 이 죄는 도저히 다른 사람한테 전가할 수 없는 것이구나! 내가, 그렇다, 내가 죽였다. 불쌍한 이 몸! 나는 진실을 알고 있다. 얘들아, 어서 나를 데려가거라.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나를 빨리 데려가거라!”[4]

 

3) 근대의 파토스

근대인의 파토스는 이런 실체적 힘과는 무관하다. 여기서 파토스란 자신의 목적을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추구하면서도 이런 추구가 단순히 자신의 주관적 선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신적인 힘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그는 아직 신적인 강요를 명백하게 자각하지 못하며 그것은 다만 느낌으로 다가오기에 그는 자신의 목적을 자기를 넘어선 욕망 즉 무한한 욕망 즉 열정이라는 방식으로 느낀다. 

하지만 이런 자의적인 추구는 필연적으로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파멸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토스적 인간은 처음에 그에게 다가오는 파멸을 어떤 알 수 없는 외적인 힘에 의해 지배되는 운명으로 파악한다. 그는 이런 운명을 무의식적으로 예감하면서 자신의 삶에 대해 끝없는 죄의식과 불안 속에 있다.

근대인의 파토스는 예를 들어 절대주의 시대 대표적인 예술가인 라신느의 희곡 페드라[5]에서 나타나는 페드라의 모습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페드라는 자신이 이폴리투스를 고발한 다음 이렇게 말한다.

 

“유모! 질투의 불길에 휩싸인 이 몸의 심정을 보살펴 주오. 아리시아를 그냥 둘 수는 없소. 그 가증스런 혈통에 항거하는 내 낭군의 분노를 불러일으켜야 하오! 그녀의 죄는 그의 오빠들의 죄에 능가하는 것이니 가벼운 벌로 그치지 않도록 내 질투에 겨운 분노에 힘입어 내 낭군 테세우스에게 간청하려오. 아니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가? 내 지각이 갈피를 잃고 질투에 눈이 멀어 테세우스왕에게 애원하는 것에 의지하다니. 내 낭군이 엄연히 살아 있는데 시련으로 몸을 불사르다니!” [6]

 

위의 글의 앞부분은 질투, 뒷부분은 죄의식을 드러낸다. 자신도 제어할 수 없는 한없는 질투, 그것이 곧 근대인의 파토스이다. 그런데 이런 파토스 속에 이미 그는 자신의 잘못, 죄를 자각하고 있다. 그의 질투에는 죄의식이 동시에 교차하고 있다.

그는 이미 자신의 죄를 자각하고 파멸을 예감하고 있다. 그에게 마침내 파멸이 다가온 순간 그는 그것이 그 자신에게 적절한 자신의 정의라는 것을 인정한다. 자신의 죄를 자각한 페드라는 모든 것을 고백하고 죽기로 결심한다.

 

“지금 이 몸은 촌각이 소중하오. 테세우스왕이시여! 제발 내 말에 귀를 기우려주오. 순결하고 존엄한 왕자에게 불륜의 추파를 던진 것은 이 몸이요 비너스신의 화살이 이 가슴에 정념의 불길을 타오르게 했으며, 그 밖에 모든 일들은 하녀 에노느가 서둘러 저질은 짓이옵니다. 그러나 이젠 그도 자기 죄를 깨닫고 바다 속에 몸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이 몸은 당신 앞에 나아와 내 한 맺힌 탄식을 털어놓고 한발 늦게 죽음의 나라로 내려가려 합니다.”[7]

 

4) 죽음에 관해

헤겔에 따르면, 고대인과 근대인은 죽음에 관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이해한다. 고대인에게 삶은 정당한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것이니, 그에게 죽음이란 자연이 그에게 부과한 몫이 그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실체적 힘을 추구하는 일은 이제 그의 사후에 새로운 인간에 의해 이어져가니, 그의 죽음은 우연적인 개인적 삶의 소멸에 불과할 뿐이며 그의 삶이 추구하는 본질은 계속적으로 이어 간다. 따라서 고대인은 이미 스스로 불멸하며, 불멸에 대해 진지하지 않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 담담하며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아래는 죽음 앞에 선 안티고네의 고백이다.

 

“(안티고네) 저는 이렇게 친구들의 버림을 받고 불행한 이 몸은 목숨이 붙어 있는 채로 죽음의 동굴로 갑니다. 나는 하늘의 무슨 법을 어겼습니까? 경건한 일을 하다가 경건치 못하다는 말을 들었건만 어째서 불쌍한 이 몸은 신들께 의지해야 합니까? 누구에게 도움을 청해야 합니까? 그러나 이런 일로 신들의 마음을 즐겁게 해드리면 내 운명을 다 겪고 난 다음에는 내 죄가 무엇인지 알게 되겠지요. 그러나 나에게 판결을 내린 사람에게 죄가 있다면 나에게 한 부당한 것과 똑같은 화를 그들도 겪게 되기를 바랍니다.” [8]

 

반면 근대인에게 죽음이란 두려운 일이다. 그것은 거꾸로 근대인에게서 죽음이란 자신에게 아주 소중한 삶을 빼앗는 것이기 때문이다. 근대인은 자신의 주관적 욕망이 무한히 중요한 것이므로, 죽음이 두려운 것으로 다가온다. 그러므로 근대인은 불멸에 대한 진지하고 커다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인에게서 죽음은 오히려 신적인 정의의 실현이 된다. 사실 무한한 욕망으로 추구되던 개인적인 목적은 자의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이런 자의적인 목적이 제거되는 것만이 진정으로 중요한 객관적인 정의를 실현하는 일이니, 죽음은 신적 정의를 회복하여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는 과정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근개인에게서 죽음은 곧 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는 영광을 드러내는 일이 된다. 즉 개인의 죽음은 신이 자기를 드러내는 수단이었다는 것이다.

근대인의 죽음 개념의 앞에서 언급한 페드라에서도 나타난다. <페드라>에서 운명의 힘은 마지막 장면에서 폭로된다. 이 마지막 순간 페드라의 태도에서 반전이 일어난다. 라신느는 온몸에 독이 퍼져서 죽어가는 페드라의 고백을 통해서 이를 밝히고 있다.

 

“죽음은 내 눈에서 빛을 빼앗아 이 눈이 더럽힌 이 세상의 모든 빛을 정결케 하려는 것이요.”[9]

 

페드라는 자기의 죽음을 긍정한다. 그 때문에 페드라는 마지막 순간 더는 자책도 사라지고 고귀한 고요 속에서 죽음을 겪게 된다. 이런 몰락의 극을 통해 라신느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이 세상을 영원히 지배하는 신의 힘, 신의 영광이다.


[1]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현암사, 1969. 이 가운데 소포클레스의 『안티고네』는 조우현이 번역했다.

[2]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3]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4]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5] 라신느는 루이 14세 시절 즉 바로크 시대 궁정 작가이다. 그는 같은 비극작가 코르네이유와 희극 작가 몰리에르와 대결하면서 여러 비극을 작성했는데, <페드르와 이폴리투스>는 그의 대표작이다. 주인공 페드라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인물이다. 원래 에우리피데스가 만든 비극 <이폴리투스>가 있지만 작가 라신느가 이를 개작했다. 에우리피데스의 작품은 비교적 단순한 비극이지만 라신느의 비극은 그의 시대 바로크 시대의 분위기에 맞는 화려한 비극이다. 라신느는 개신교의 예정조화론을 믿는 장세니즘의 신봉자였다. 그는 에우리피데스의 그리스적인 운명 개념 대신 근대 기독교적 운명 개념을 비극 <페드라>를 이끌고 가는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았다. 대체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아테네의 왕 테세우스의 아내인 왕비 페드라는 전 왕비의 아들인 이폴리투스를 사랑하지만 감히 고백하지 못하고 야위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출정 중 죽었다는 소문이 돌자, 이폴리투스에게 사랑을 고백하지만 이폴리투스는 냉정하게 거절한다. 반면 이폴리투스는 테세우스가 무너뜨린 아테네 전 왕조의 딸 아리시아를 사랑한다. 테세우스가 죽었다는 소문에 이폴리투스는 아리시아를 찾아가 사랑을 고백한다. 아리시아 역시 이폴리투스를 연모해왔던 터라, 두 사람 사이에 사랑이 맺어지게 된다. 하지만 테세우스가 살아서 돌아온다. 그러자 페드라는 공포에 사로잡힌다. 혹시 이폴리투스가 자신을 왕에게 고발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이다. 페드라는 먼저 왕에게 무릎을 꿇고 이폴리투스를 고발한다. 이폴리투스가 오히려 왕이 없는 사이 자기를 겁탈하려 했다면서 이폴리투스에게서 훔쳐온 그의 단검을 증거로 내보인다. 테세우스는 이폴리투스를 추방하고, 분노 때문에 바다의 신 넵튠(포세이돈)에게 추방당한 이폴리투스를 죽여 달라고 요청한다. 페드라는 이를 알자 후회하지만 이번에는 아리시아에 대한 질투감 때문에 자신의 거짓을 밀고 나간다. 이폴리투스는 자신의 죽음을 모르고 사랑하는 아리시아에게 먼 나라에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떠나지만 그가 타고 가던 마차를 넵툰이 보낸 괴물이 덮쳐 그는 죽게 된다. 그의 죽음을 알게 되자 죄의식으로 고통 받던 페드라는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게 된다. 페드라는 스스로 독을 마신 채 왕에게 나가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고 죽는다.

[6]  라신느, Phaedra, 이연자 역(극단 성좌 77년 공연 대본), 2막 5장

[7]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8] 곽복록 외 편역, 『희랍 비극 전집』 위의 책

[9]  라신느, Phaedra, 위의 책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8- 소외된 정신과 기독교

 

1) 전면적인 시장화

낭만적 예술 형식은 근대 정신을 반영하는 예술 형식이다. 헤겔은 근대 정신을 절대적 주관성으로 규정했는데, 어떤 의미일까? 거슬러 올라가 먼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한 역사적 토대부터 이해해야 한다.

우선 통상 중세와 근대를 구분하지만 헤겔에서 중세와 근대는 단절된 시대가 아니라 연속된 시대라는 점이 중요하다. 그리스, 로마의 도시국가[헤겔에서는 인륜성의 시대이다]가 해체되면서 개인적 인격의 발전이 일어난다. 이제 인격 즉 형식적인 자유로운 결정권은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부여된다. 여기서 추상적인 법이 지배하는 사회가 등장한다.

인격은 아직 실질적 정의의 원리를 결여하므로 자유의 실질적 내용을 둘러싸고 인격 사이의 무한한 투쟁이 벌어진다. 이런 투쟁은 후일 홉스가 주장한 만인의 만인의 투쟁에서와 같이 끝내 황제가 자의적으로 법을 결정하는 세계[로마 제국 시기 이후]로 된다. 황제는 절대권을 지니지만 그 역시 하나의 인격이므로 그의 결정은 전적으로 자의적이니 이 시대는 모두가 형식적으로는 자유롭지만 내용적으로는 황제가 자의적으로 지배하는 사회다.

황제가 자의적으로 제정한 국가[로마 제국]가 만인의 자유로운 결정에 의해 이루어진 오성 국가로 발전하기까지가 헤겔에서 근대 정신이 출현하는 시기이다. 그 토대가 되는 것은 이 시대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인데[1] 이는 시장의 출현을 매개로 한다. [2]

이런 시장이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펼쳐지게 되면서 마침내 근대 사회가 출현한다. 헤겔에서 근대사회란 곧 시장이 지배하는 사회라고 규정할 수 있다.[3]

시장의 기본적 관계는 자유로운 인격 사이의 법적 계약관계이다. 이런 계약적 관계는 비단 경제적 시장에서만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계약적 관계는 그 동안 존재했던 모든 사회적 관계 속으로 침투하면서 전체 사회를 보편적 계약 관계로 전환시킨다.  사회 속에 존재하는 다양한 단체는 물론이며, 국가조차도 마침내 계약 관계로 되며, 심지어 가족 관계조차 이런 시장적인 계약관계가 파고들어간다.

중세와 근대의 차이는 다만 시장 즉 사회적 상호관계가 발전하면서 사회 전체가 이런 시장 관계로 전환하는 정도에서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니, 헤겔은 통상적으로 구분되는 중세 사회와 근대 사회를 이런 시장의 계약관계가 발전하는 연속적 단계로 파악한다.

 

2) 보이지 않는 손의 지배

헤겔은 이 시기를 정신적으로 보면 근대 정신[그 산물이 곧 오성 국가이다]이 발전하는 시기라 규정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 사회 전체에 일반화되는 시장 관계에서 인간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가를 분석해 보자. 시장 관계에 대한 헤겔의 설명을 보면, 그가 아담 스미스의 경제학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시장 속에서 표면적으로는 개인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한다. 하지만 개인의 목적은 타인을 통해 실현되며, 거꾸로 타자의 목적은 개인 자신의 활동을 통해 실현된다. 여기서 개인은 타인을 자신의 수단으로 삼으면서 동시에 그 자신을 타자의 수단으로 만든다. 개인과 타인은 이제 보편적 상호 의존관계 속에 놓여지게 된다.

개인은 자신의 산물에 주관적 가치를 부여한다. 그 산물이 지닌 객관적 가치는 시장을 통해 실현된 가치이니, 그의 활동은 전적으로 시장의 지배를 받는다. 두 가치가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그가 부여한 주관적 가치는 시장에서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으며, 그의 산물은 시장에서 예상치 못한 가치를 실현할 수도 있으니, 그의 자유란 오직 시장에 의해 제약된 자유에 지나지 않는다.

개인은 생산하는 활동 중에서는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심지어 그 가치가 실현될 수 있을지조차도 모른 채 맹목적으로 생산한다. 그는 생산을 마치고 시장에 나가 그 생산물을 교환 속에 집어넣는 때 비로소 뒤늦게야 자기가 생산한 것의 가치를 알게 된다.

사회 전체로 본다면 표면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항상 어긋난다. 그 때문에 단기적으로 시장 관계는 공황과 붐이라는 끝없는 요동 속에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시장을 통해 장기적으로는 수요와 공급은 조절된다. 사회는 이런 시장에 의한 조절을 통해 안정적으로 발전한다. 시장을 지배하는 이 힘은 현상 속에서는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상 속에서 자기를 관철하니, 아담 스미스는 이런 시장의 힘을 보이지 않는 손이라 하였다.

헤겔은 시장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타인의 상호 작용 관계를 일반화한다. 사회 전반에 전개되는 법적 계약관계는 이런 시장 관계를 원형으로 삼는다. 전반적으로 볼 때 이 사회적 상호 관계 속에서 개인은 주관적으로 자유롭게 활동하지만 그의 활동은 맹목적일 뿐이다. 그 너머에 사회적 실체가 그 힘을 발휘한다.

여기서 헤겔은 사회 전반에 일반화된 시장 관계를 통해 자기를 관철하는 객관적 가치를 사회적 정의[Sache Selbst] 또는 실체로 규정한다. 이런 실체의 힘 즉 보이지 않는 시장의 힘을 헤겔은 소외된 정신이라 규정했다. 이를 굳이 소외라고 규정한 까닭은 그 힘은 한편으로는 현상 너머에 초월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현상 속에 자기를 관철하고 있으니, 내재하면서도 초월적이라는 의미에서 이를 소외[4]라고 규정한 것이다.

황제의 국가에서 오성 국가 즉 근대 국가로 형태 전환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정신의 발전이다. 그 정신은 소외된 정신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이 소외된 정신을 자각하면서 자각된 정신으로 발전하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자면 여기서 시장 관계 속에 전개된 개인적이고 형식적인 자유의지가 마침내 개인이 실체적 목적을 자기 의지의 목적으로 삼는 루소적 일반적 자유의지가 출현하는 데로 발전한다.

물론 근대 국가인 오성 국가에서는 아직 정신의 발전은 완성되지 못했다. 헤겔은 루소의 일반의지 단계를 넘어서 객관적이고 실질적인 자유의지로 발전하며 이 과정을 통해 이상적 국가의 형태가 출현한다. 하지만 이 마지막 과정은 헤겔이 상정한 미래의 역사이지 현실의 역사는 아니다.

 

3) 절대적 주관성과 무한한 내면성

중세부터 서서히 발전해 온 근대 사회의 정신은 곧 소외된 정신이니 이 소외된 정신은 근대 정신을 표현하는 종교와 예술, 철학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먼저 이런 시장 사회를 토대로 하는 종교의 모습부터 확인해 보자.

헤겔은 바로 이와 같은 소외된 정신을 통해 개신교의 근본적인 특징이 도출된다고 본다. 개신교의 신은 헤겔에서 마치 아담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과 같은 것인데, 그것은 개인에게 내재하면서도 초월해 있는 신이다.

신이 세계를 너머 초월해 있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와 단절된 피안에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신은 이 세계 속에서 개인의 상호 활동을 통해 자기를 관철하지만 다만 그 관철하는 활동이 개인에게는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초월적이다.

개인에게 내재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범신론적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즉 개인 자체가 신의 현현은 아니다. 신은 시장 속에서처럼 개인들의 활동이 상호 작용하는 가운데 있다는 의미이다. 이 상호 작용은 곧 개인이 서로를 부정하는 관계이니, 개인들의 상호 부정적인 관계 속에 신이 현현한다.

개인은 이런 상호작용적 관계 속에 신이 출현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 이런 개인에게 신의 활동은 곧 외적인 강제, 맹목적 필연 즉 운명의 힘이다. 그러나 개인이 객관적으로 관철되는 실체의 힘을 알게 되면, 그것은 곧 자기 자신의 본질에 스스로 복종하는 것이니 자유로운 의지가 된다. 여기서 신과 나는 합일에 이른다.

이런 자각은 근대를 넘어서야[칸트 자유의지에서 비로소 이런 자각이 시작된다고 한다] 가능하며 개인은 아직 이런 자각에 이르지는 못한다. 하지만 개인은 무의식적으로는 이미 이런 합일을 내적으로 느끼고 있으니, 신과 나의 합일이 이런 느낌의 단계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것이 곧 신에 대한 믿음이다.

개인의 측면에서 신과 나와의 합일은 스스로 자기를 넘어서 신에 이르는 고양의 과정이다. 이 고양의 과정은 개인의 자기 부정성 즉 무한한 규정성으로 규정된다. 신의 측면에서 본다면 이런 합일은 신 자신이 나를 매개로 해서 자기 인식에 이르는 과정이니, 이 과정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낭만주의 예술에서 무한한 주관성은 그리스 신과 달리 홀로 자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으로부터 나와 타자와의 관계 속으로 발을 들이나 이 타자는 주관성 자신의 타자로서 그 안에서 주관성은 자신을 재발견하며 또한 자신에 머무르는 존재[Bei Sich Sein]로서 그것과 통일되어 있다는 사실이다.”[5] 

 

느낌을 통해 다가오는 믿음의 상태를 헤겔은 ‛내밀함[Innigkeit]’으로 규정한다. 이런 믿음의 단계에서 신은 한편으로 개인에게 알 수 없는 소원한 존재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개인에게 그의 본질인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니, 개인은 이 신에 대해 두려움과 친밀함을 동시에 느낀다.[6]

여기서 기독교적 신과 인간의 관계를 설명하는 두 개념 즉 ‘절대적 주관성’과 ‘내밀함’ 사의의 연관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개인이 주관 속에서 이미 내적으로 신과의 합일을 느끼고 있을 때 그것이 곧 내밀함이며, 이런 내적 합일은 자기 부정적인 행위를 통해서 마침내 실현되면서 절대적 주관성이 된다. 내적 내밀함 속에 절대적 주관성이 예감되며, 내밀함의 외적인 실현이 곧 절대적 주관성이다.

 

4) 역사 속의 신

이런 신은 한편으로 상징주의 시대 주관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 뿐인 추상적 신과 구분되며 다른 한편으로 각 민족의 자연적 개별성을 담지 하는 그리스 시대 개별적인 정신과도 구분된다. 절대적 주관성으로서 신은 가장 추상적인 유일 신이 가장 구체적인 인간[그리스도]으로 출현하니 이 신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를 인간에게 직접 계시해 주는 신이다.

예수는 성령이 곧 사랑이라고 선포했다. 헤겔로 볼 때 이는 곧 신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다. 신이 소외된 정신이고 이 정신은 실체적 정의를 자발적으로 실현하는 의지이니 이는 공동체적 정신인 사랑일 수밖에 없다. 신의 본질, 성령이 곧 사랑이므로 기독교 신은 인격신이다.

헤겔은 본래 기독교 정신은 신과 인간 사이의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믿음의 관계이지만, 이런 내밀한 믿음의 관계는 봉건제 시대에서 거룩한 빵과 성 유물 숭배 신앙[7]으로 후퇴했다고 한다. 이는 사물 속에 신이 강림한다는 신앙이니 곧 상징주의 단계의 신앙에 불과하다. 봉건제 말기에 이런 신앙은 다시 성상 신앙으로 전개되었는데 이는 고전주의 단계의 예술적 종교[8]이다. 마침내 종교 개혁을 통해 다시 원래의 내밀한 믿음의 관계가 회복되면서 진정한 기독교의 관계가 출현했다.

따라서 기독교적 신의 모습은 고전적 신의 모습과 구분된다. 헤겔은 이 두 신의 모습은 모두 인간의 형태를 통해 나타나므로 어떻게 보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으나, 헤겔은 두 신의 모습에서 근본적인 차이를 지적한다.

우선 고전적 신은 예술 즉 감각적 형상을 통해 자기를 드러내며 이 감각적 형상은 영웅을 닮은 이상화된 모습이다. 그 감각적 형상은 불멸의 영원한 모습으로 시간을 초월해 존재한다.

반면 기독교 신은 감각적 형상이 아니라 시간적인 역사 속에서 자기를 드러낸다. 기독교 신은 살과 피를 지닌 구체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지만, 그 모습 자체가 신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며, 그런 구체적 인간이 스스로 전개해나가는 역사적 운동 가운데서 자기를 드러낸다. 이 역사적 운동은 개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지는 운동이다.

이런 개인의 상호작용 운동은 개인이 자신을 부정하는 운동이니 이를 통해 개인은 육체가 아닌 정신적 존재로 복귀한다. 이런 정신적 존재 속에서 신이 출현한다. 고전적 신은 아름다운 육체 속에 출현하지만 기독교 신은 육체가 아닌 자기 복귀적인 아름다운 정신 속에서 출현한다. 이 자기 복귀적인 정신이 곧 무한한 내면성이고 절대적 주관성이다.

기독교 신의 조각이 고전적 신상에 대해 지니는 차이의 핵심에 눈이 있다. 헤겔에 따르면 고전적 신의 형상에는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눈동자는 곧 영혼을 드러내는 것인데, 고전적 신은 무한한 내면성인 영혼을 결여하기 때문이다. 반면 기독교 신은 현상을 너머 자기 내로 복귀하는 무한한 존재이므로 기독교 신의 모습 속에는 영혼을 표현하기 위해 눈동자를 지닌다.

신상에 눈동자가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결함은 조각 형상들이 단순한 영혼의 표현 즉 눈빛을 갖지 않는 점에서 외적으로 드러난다. 아름다운 조각의 걸작들은 시선을 결여하고 있으며 그들의 내면은 작품들에서 이러한 정신적 집중을 갖는 –이것은 눈을 통해 알려진다-자기인식적 내면성으로서 비치지 않는다.”[9]

 

“그러나 낭만적 예술의 신은 시선을 지니는 것으로, 자신을 의식하는 것으로, 내면화된 주관성으로, 그리고 자신의 내면을 내면에 열어 보여주는 것으로 현상한다. 왜냐하면 무한한 부정성, 즉 정신적인 것의 내면으로의 회귀는 육체성으로 주조된 상태를 지양하며, 또한 주관성은 자신의 내면을 비추는 정신의 빛이기 때문이다.”[10]


[1] 헤겔은 국가 형태의 발전은 정신현상학 정신 장에서 다루고 이런 정신 발전의 토대가 되는 사회적 상호관계의 발전은 이성 장에서 다룬다.

[2]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미 11세기에서 13세기에 시장이 발전하면서 중세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이 시기 도시는 해상무역을 매개하면서 여기서 상공업을 통해 사유재산이 발전했다. 도시는 이를 바탕으로 영주와 대결하면서 자치권을 획득해 나갔다. 도시는 이 과정에서 탑을 세우고, 시민 군을 결성하며, 시 자치체를 구성했고 마침내 재판권까지 획득하였다. 도시는 영주와 대결하는 가운데 왕의 보호를 받고 왕을 지지하면서 왕권 성장을 낳았다.

[3] 알다시피 마르크스는 시장이 전면화되는 것은 노동력이 시장에서 판매되는 임금 노동이 출현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헤겔은 시장이 전면화된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 원인이 임금노동의 출현이라는 사실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아무튼 전면적인 시장화가 근대 사회라고 보는 점에서는 마르크스와 일치한다.

[4]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이런 소외라는 개념을 통해 근대 정신을 규정한다. 후일 마르크스는 이런 소외를 자본주의 사회를 규정하는 개념으로 사용했다.

[5] 미학강의 2권, 156쪽

[6] 헤겔은 기독교적 믿음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란 일반적으로 눈 앞에 없는 과거의 사건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고도 절대적인 신의 진리를 주체적으로 확신하는 것이다.” “루터 파에서 진리는 완성된 대상이 아니다. 주체는 흔들림 없는 진리 앞에 자아의 특수한 내용을 버리고 이 진리를 자기의 것으로 함으로써 비로소 진정한 주체가 되는 것이다.”(역사철학강의, 400-401쪽)

[7] 헤겔은 중세 기독교의 타락이 이런 거룩한 빵, 성 유물 신앙에서 나온다고 한다. 이것이 기적이 나 그리스도의 친견, 그리스도의 무덤을 회복하려는 십자군 원정, 사제와 평신도의 계급적 구분, 눈에 보이는 행동을 통한 구원, 진리가 밖에서부터 주어진다는 생각, 사제 서품, 고해와 순례여행과 순결 빈곤 복종의 행동, 등의 타락된 모습 등의 원천이다.

[8]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이렇게 말한다.

“정신의 눈앞에 있는 것이 거룩한 빵과 같은 물체…인가, 그렇지 않으면 혼과 혼, 정신과 정신이 교감하는 정기로 가득 찬 그림이나 아름다운 조각 작품인가는 결정적 차이이다….후자의 경우 감각적인 것이 아름답게 완성되어 정신의 형식 그 자체가 진실된 것으로서 감각적인 것에 혼을 불어넣고 있는 것이다. 다만 진실된 것이 여기에서는 감각적 형태를 취해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역사철학강의, 394쪽)

[9] 미학강의 2, 142쪽

[10] 미학강의 2, 142쪽

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 17-신의 비애, 희극과 풍자

 

1) 비애감

그리스 도시 국가는 곧 민족 국가였다. 그리스 국가는 국가와 혈연, 국가와 개인 사이에 직접적 결합 또는 상호 균형을 통해 존재했다. 물론 이 균형은 서로 대립된 두 원리 사이에 서로 침범하고 다시 서로를 회복하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동적인 균형이었다.

 

그리스 국가가 후기로 가면서 내적으로는 개인의 자각이 발전하면서 내적으로 개인은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에 의문을 품으면서 국가를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켰다. 이런 모습은 자신의 권력을 위해 끊임없이 전쟁을 선동한 알키비아데스의 모습에서 잘 나타난다. 외적으로는 페르시아 전쟁 시기 이루어졌던 도시 국가 동맹은 해체되고, 펠레폰네소스 전쟁과 같은 분열에 처했다.

 

내적이거나 외적인 분열을 거쳐가면서 고대 국가는 새로운 국가로 발전하고 있었으니, 그 첫 걸음은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가 내디뎠다. 하지만 그가 젊은 나이로 죽음으로써 그가 맡았던 역사적 역할은 로마가 담당하게 되었다. 마침내 로마는 외적으로는 거대한 통일 제국을 형성했고, 내적으로는 만민법을 통해 개인에게 자유로운 법적 인격을 부여했다. 하지만 이는 황제의 자의적인 지배 아래서 이루어진 통일과 자유이었다. 이런 시대 기독교가 공인되면서 새로운 정신의 출현을 알렸다.  

 

그리스 국가의 분열에서 알렉산더를 거쳐 기독교 공인 이전의 로마 제국에 이르기 전까지의 시대를 흔히 헬레니즘 시대라고 하지만, 헤겔은 이 시대를 고전 시대의 몰락기로 본다. 새로운 사회가 배태되고 있던 로마 공화정 시대와 초기 로마 제국까지 고전 시대의 몰락기에 집어넣는 것은 이상하지만 로마 제국 기독교 공인으로부터 새로운 정신이 출현하는 헤겔의 시대 구분에서는 불가피하다.

 

고전주의 시대가 전성기에서 몰락기로 전환하면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몰락하는데, 헤겔은 이런 몰락의 징조를 신상 즉 조각 입상에 어려 있는 비애감을 통해 발견한다. 조각 입상은 고요하게 머무르는 가운데 비애감을 느끼게 한다.

위의 작품은 AD 130-138년 경 작품, 로마 하이드라누스 황제의 애인으로 알려진 안토니우스 상이고, 지금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한다. 이 작품에서 헤겔이 말한 비애감이 잘 표현되어 있다. 전성기 시대의 작품에서도 고요한 가운데서도 얼핏 이런 비애감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이 비애감은 그리스 신이 지닌 개별성 때문이라고 본다. 이 개별성 때문에 신들은 상호 투쟁할 수밖에 없고, 이런 투쟁 속에서 개별적인 신들 자신이 더 높은 최고의 신에 의해 몰락할 수밖에 없는 운명이니, 이 운명이 조각입상에 어린 비애감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슬픔은 그들의 운명을 형성하니 까닭인즉 그것은 무언가 한층 더 높은 것이 그들 위에 있다는 점, 그리고 특수함으로부터 그들의 보편적 통일로 향하는 이행이 필연적이라는 점을 지시하기 때문이다.”[1]

 

2) 희극

헤겔은 고전 예술의 몰락 과정을 그리스 말기와 로마 시대로 구별하여 서술하는데, 그리스 말기 예술의 전형적 특징은 희극에서 잘 드러난다. 반면 로마 시대의 전형적 예술은 풍자이다. 희극이든 풍자이든 이제 예술의 핵심적 주제가 되는 것은 실체적 신이 아니라 주관적인 개인이다. 이 주관적 개인은 그 이전 시대 관습의 지배 아래 있던 개인도 아니며, 그렇다고 근대의 무한한 주관성으로서 개인도 아니다. 이 개인은 자기 자신에 눈을 뜨고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개별적 개인이다.

 

그리스 말기에 등장한 희극은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발전하면서 국가에 대한 관습적 복종이 해체되면서 나타나는 현실을 타락으로 생각한다. 작가는 개인의 주관적 자유가 전개되는 일상적 삶을 자기를 전도하고 자기를 해체하는 아이러니한 것으로 간주한다.

 

예술은 이런 일상적 삶에서 개인의 자기 전도와 자기 해체를 노골적으로 폭로하는데, 작가는 이런 폭로를 통해 자기의 주관적 자유가 자기 부정을 통해 다시 말하자면 이런 일상적 삶의 자기 파괴를 통해서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한다.

 

‟오염을 겪는 어리석은 현실을 밝히는 방식은 현실이 자체 내에서 자기를 파괴하는 식이다. 이는 현실에 맞추어 살아가는 것[Richtigkeit]을 스스로 파괴하는 것을 통해서 이런 현실의 반영상[Widerschein]으로부터 진정한 것을 자기에게 확고하고 지속하는 위력으로서 제시할 수 있을 것이며 어리석고 비이성적인 현실의 측면에 자체 내에서 진리에 직접 대립하는 힘을 박탈하기 위한 것이다.”[2] 

 

헤겔은 이것이 아리스토파네스가 희극을 다루었던 방식이라 하는데, 여기서 희극은 여전히 실체적 정신에 대한 복종이 회복되기를 기대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그리스 정신의 한계 내에 머물러 있다.

 

3) 풍자

로마 시대 가장 번성한 예술은 풍자이다. 풍자 예술에서 작가는 현실에 대립한다. 현실에서 개인은 이기적 목적과 세속적 욕망을 통해 살아간다. 작가는 고결한 덕성이라는 입각 점에 서서 그에 대립하는 현실에 대해 분노하고 폭로하고 비판한다.

 

하지만 작가가 서있는 덕성조차도 사실은 개인적 목적의 일반화로부터 나온 것이니, 세속적 현실과 다를 바 없다. 그런 덕성은 실체적인 정신과 구분되는 주관적 정신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대립관계를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풍자는]… 주관으로서의 자신에게서 기인하는 주관이 추상적 지혜 속에서 선과 덕에 대한 인식 및 의지를 갖고 타락한 현재에 대해 적대적으로 대립하도록 만든다. 이런 대립은 해결 불가능하니, 왜냐하면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이 경직된 부조화를 이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런 대립으로부터 양 측면의 산문적 관계가 형성된다.”[3]

 

그리스 희극에서는 여전히 도시 국가의 정신을 회복하려는 시도가 들어 있다. 하지만 로마 시대 풍자에 이르게 되면 도시 국가와 같은 실체적인 것은 사라져 버린다. 남아 있는 것은 개인적 주관일 뿐인데, 풍자가 아무리 일반적 선과 덕을 표방하더라도 주관성을 넘어가지 못한다.

 

고전적 예술 형식에서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이념 자체 즉 정신이었다. 이제 풍자에 이르게 되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예술을 통한 현실에 대한 비판은 곧 개인적 덕성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 이런 점에서 헤겔은 이런 관계를 산문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앞에서 보았듯이 상징주의 예술 형식은 원래 의미와 형상의 괴리에서 출발하여 양자의 유사성을 향해 나가며 유사성이 발전하면서 끝내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작가가 개인적으로 설정한 의미로 전락하면서 비유라는 예술 형식이 출현했다.

 

반면 고전주의 예술 형식은 의미와 형상의 일치에서 출발하면서 점차 양자의 괴리가 등장하게 된다. 이제 풍자에 이르러 예술적 형상의 의미는 정신적 의미가 사라지고, 주관적 의식 속에 현존하는 의미[즉 덕성]로 대체되니, 여기서 고전적 예술 형식은 해체된다.

 

4) 운명

실체적 정신을 상실한 개인은 상호 대립 속에서(홉스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의 개념에서 보듯이) 그 스스로 자신을 통일하는 원리를 생성한다. 그것이 곧 “내적으로 추상적이며 비형상적인 것” 즉 “필연성과 운명이다.” 그런 운명은 개별적 인격을 강제하는 것이지만 그 자체로는 “불가해하고 비개념적인 것”[4]이다.

 

알 수 없으나 필연적인 운명의 힘은 “그 자체로는 어떤 형상화나 개성을 갖지 않은 것이다.” 운명은 로마 황제의 절대적인 자의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것을 통해 자신의 힘을 발휘한다. 로마 황제는 이런 필연적 운명의 조종을 받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이제 고전주의 시기 말기에 이르러 세속적 현실과 불가해한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가 도래한다. 운명이 지배하는 시대, 이런 운명은 더 이상 자기를 표현할 수 없으니, 마침내 예술은 출현하지 않는다. 헤겔은 로마를 지나가 새로운 신이 출현하면서 다시 예술이 부활하게 된다고 말한다.


[1] 미학강의 2권, 116쪽

[2] 미학강의 2, 127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3] 미학강의 2, 130쪽. 번역은 필자가 수정

[4] 미학강의 2권, 116쪽

헤겔미학산책16- 고전적 예술 형식[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헤겔미학산책16- 고전적 예술 형식

 

1) 자기 관계

상징적 예술 형식에서 설명했듯이 정신이 추상적이고 무규정성 상태에 머무르고 있을 때, 그 정신을 표현하는 예술 형식은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이었다. 왜냐하면 이런 추상적 무규정적 정신은 자각될 수 없는 것이기에 형상화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전주의 시대에 이르러 정신 즉 민족 국가 또는 도시 국가는 자신을 개별적으로 구체화한다. 이런 정신은 자각이 가능하게 된다. 자각은 이제 감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니 그것이 곧 정신의 닮은 꼴 또는 정신이 비추어진 영상이다. 헤겔은 이런 영상을 현상적 기호라 부른다.  

 

헤겔은 정신의 감각적 형태 즉 정신의 영상은 인간적 형상이 아닐 수 없다고 한다. 왜냐하면 정신이 인간의 집단 의지를 의미하는 한 그런 정신은 인간 자신의 표정과 자세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고전주의 시대에 들어와서 예술 작품에서 동물적 형상은 사라지거나 아테네 여신의 어깨에 있는 부엉이처럼 점차 부차적인 요소로 전락한다.[1] 

 

정신의 닮은 꼴, 정신이 비추어진 모습 즉 영상 또는 현상이 곧 고전적 예술 형식이다. 여기서 고전적 예술 형식의 근본적인 원리가 밝혀진다. 그것은 곧 형상과 그것이 의미하는 정신의 일치이다. 이런 일치는 다시 말하자면 곧 형상은 정신의 ‘자기 관계’이며, 정신이 ‘자기를 해명하는 것[das sich selbst Deutende]’, 정신이 ‘자기 자신을 의미하는 것[das sich selbst Bedeutende]’  등으로 표현할 수 있다.

 

헤겔은 이런 일치, 자기 관계로부터 고전 예술의 다양한 느낌을 끌어내는데, 이 느낌에 대한 헤겔의 표현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몇 가지만 소개하자면, 곧 밝음과 명료성, ‘거침없는 자유’ 와 자립성, ‘무한한 확실성과 고요[Sicherheit und Ruhe]’,  ‘근심 없는 지복[Seligkeit]’과 명랑성[Heitrlichkeit]과 같은 느낌이다. 헤겔은 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기도 한다.

 

“영원한 진지함, 동요 없는 평안이 신들의 이마에 왕관을 올린다.”[2]

 

“정신은 전적으로 외적인 형상 속에 침잠한 채로 나타나며, 또한 동시에 그런 외적인 형상으로부터 벗어나 자기 내에 침잠해 있다. 그것은 마치 가사적인 인간 사이에서 불멸하는 신이 돌아다니는 것과 같다.”[3]

 

2) 이상화와 미

정신과 형태가 일치한다면 이를 통해 형태를 이루는 개별적 요소는 서로 분리되지 않고 유기적인 연관을 맺는다. 흔히 그리스 예술에서 이런 유기적 연관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곧 황금 분할의 비율이라 하는데 헤겔은 단순한 수적인 규칙보다는 오히려 이런 비율이 정신적인 것을 표현한다는 점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헤겔은 그리스 조각 작품의 두상이 지닌 비율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인간의 얼굴은 입과 광대뼈가 들어가고 이마가 나옴으로써 정신적 특성을 얻는다. 이를 통해 앞으로 나온 이마는 필연적으로 두개골의 전체 구조를 규정하는 요소가 되는바, … 오히려 이마에서 코를 지나 턱밑까지 하나의 선이 그어지고 이 선은 뒷머리에서 이마의 정점으로 이어지는 두 번째 선과 직각을 혹은 직각에 가까운 각을 형성한다.”[4]

형태가 이처럼 유기적 연관을 맺게 되면서 이런 유기적 연관과 무관한 개별성에 속하는 형태의 측면은 순화되고 그 결과 형태는 이상화된다. 이런 이상화된 인간의 모습은 곧 영웅의 모습이다.

 

“우리는 신들의 구체적 개별성에서 유한자의 갖가지 궁핍으로부터 초연한 정신적 기품과 고결이 드러난다는 것을 본다. 순수한 내면 존재, 각종 규정성으로부터 추상적 해방은 어쩌면 숭고성으로 이끌릴 법도 하지만 …정신의 숭고성마저도 아름다움 속으로 직접 이행한다. … 이 점이 신들의 형상에서 고결의 표현 곧 고전적 의미에서 미적 숭고성의 표현을 필수적인 것으로 만든다.”[5]

 

헤겔에서 미는 여기에서 보듯이 조화와 균형, 비례를 의미하니, 예술 가운데 오직 고전적 예술만이 이런 미적인 것을 가지게 된다. 그 외 상징적 예술과 낭만적 예술에서 정신의 표현은 오히려 미적인 것과 충돌하게 된다.

 

3) 총체성의 결여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고전 예술은 자기 연관, 유기적 통일성과 미라는 보편성의 측면만 갖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또한 개별성의 측면을 가지니, 이런 개별성은 추상적인 개별성이 아니라(그런 개별성은 이상화하는 가운데 제거된다) 보편성을 표현하는 개별성을 말한다.

 

예를 들어 아폴론 신은 월계수를 쓰고 리라를 든 모습으로 묘사되거나 아테네 여신은 투구를 쓰고 창과 방패를 들고 나온다. 여기서 월계수나 리라, 그리고 투구와 창 방패는 그 자체로는 개별성이지만 그것이 아폴론이나 아테네 신의 본성을 드러내는 징표로 사용될 때, 헤겔은 이를 특수성이라 한다. 여기서 보편적 신성과 개별성은 매개 없이 직접적인 결합으로 결합되어 있다.

 

개별성과 보편성과 직접 매개 없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런 특수성이 이루는 전체 집합은 유기적인 통일성을 형성하지 못한다. 이로부터 헤겔은 그리스 신들이 지닌 다양한 한계를 제시한다.  신들이 보여주는 다양한 모습은 상당히 혼란스럽고 중첩되며, 불완전하다. 

 

하나의 신도 여러 특수한 징표를 갖는다. 예를 들어 아폴로 신은 리라 외에 활을 들고 나오기도 하고, 아테네 여신은 투구를 쓴 것 외에 어깨에는 올빼미가 앉아 있기도 한다. 동일한 본성을 여러 신들이 대변하니, 군신으로 아레스와 헤파이토스가 분열하며, 빛의 신은 아폴론과 헤르메스로 분열하며 여신은 아르테미스, 아테네, 아프로디테로 분열한다. 또한 여러 신들 사이에는 아직 어떤 통일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제우스는 신들의 통일성을 의미하지만 동시에 개별적인 한 신에 불과하고 그의 명령은 다른 신들을 완전하게 굴복시키지 못한다. 신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불화가 존재하며, 제우스조차 이 불화 속에 이리저리 흔들린다. 이것이 그리스 신화에서 올림푸스의 의미이며 신들의 잡다성은 로마에서 만신전의 형태로 여전히 유지된다.  

 

4) 상호 균형

그리스 정신이 보편성과 개별성이 직접적으로 결합된 결과 여기서 그리스 정신은 다시 두 가지 대립된 원리의 결합으로 나타난다. 보편성이 국가의 원리라면, 개별성은 곧 혈연의 원리이니, 그리스 도시 국가는 시민으로 이루어진 국가이면서도 여전히 혈연의 원리인 민족성을 버리지 못한다. 즉 민족 국가이다.

 

두 가지 원리가 직접 결합된 결과 두 원리는 상호 균형을 이룬다. 이런 상호 균형은 정적인 방식이 아니며 끊임없이 유동적으로 일어나는 균형이니, 여기서 두 원리가 서로를 침해하고 그 결과 서로의 몰락에 의해 다시 균형이 회복되는 운동이 일어난다.

 

그리스 정신의 특징인 특수성은 앞에서 말한 신의 징표로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런 특수성은 그리스적 인물이 지니는 특징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에서 안티고네와 그에 대립하는 클레온은 모두 그리스적 정신이 지니는 특수성을 대변한다. 안티고네는 그 가운데 혈연의 원리를 대변하며, 클레온은 국가의 원리를 대변한다.

 

그들은 자신이 대변하는 특수성을 직접 매개 없이 대변하므로 단호하고 영원히 이를 대변한다. 그 때문에 각자는 자신이 대립하는 원리에 의해 파멸에 이른다. 국법을 어기고 혈연인 오빠를 묻어준 안티고네는 클레온의 명령에 의해 감옥 속에서 죽는다. 조국의 배반자를 처단하려는 클레온은 가족의 원리를 위배하면서 그의 아들과 아내가 죽게 된다. 이런 상호 파멸을 통해 서로 대립된 두 원리는 다시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

 

4) 신과 인간

보편성과 개별성의 직접적 매개 없는 결합은 예술 작품 속에서 보편적 신과 개별적 인간의 관계에서도 나타난다. 신 모습 자체가 인간의 모습을 닮았으며 인간적 영웅은 곧 신적인 존재가 된다. 인간과 신은 함께 살아가며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를 촉발하며, 거꾸로 신의 행위가 인간적 행위를 유발한다. 신은 인간의 삶 속에 들어와 수시로 개입하며 심지어 인간이 신의 세계 속으로 끌려들어가기도 한다.

 

이런 상호 침투와 중첩에도 불구하고 신과 인간이 영원히 구분된다. 신이 인간적인 삶 속에 개입하더라도 그것이 신의 신성을 해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신의 개입을 요구하더라도 그 책임은 항상 인간 자신에게 돌아간다.

 

헤겔은 이런 예로서 서사시 일리아드에 나오는 여러 얘기를 소개한다. 그리스 진영에 퍼졌던 흑사병은 아가멤논이 아폴로 신전의 제사장 크리세스의 딸을 포로로 하고 크리세스의 간청에도 풀어주지 않자, 아폴로의 분노에서 비롯된다고 말한다.

 

또한 헤겔은 아킬레스의 죽음에 관한 오디세이아의 서술을 소개한다. 

 

“그리스인들은 종일토록 싸웠으며 제우스가 싸우는 자들을 뜯어 말렸을 때 그들은 비로소 고귀한 시신을 배로 옮겼으며 또한 울먹이면서 시신을 씻고 향유를 발랐소. 그러자 바다에서 신의 울부짖음이 일었는데”  “어머니[아킬레우스의 어머니 테티스]가 죽은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불사의 바다 님프들과 함께 바다에서 나왔소”[6]

 

헤겔은 이 인용문 끝에 아킬레우스에게 다가간 것은 인간적인 것 즉 흐느끼는 여인인 어머니이며 또한 이는 그들 자신의 본 모습일 뿐이라고 말한다. 다시 말하자면 인간의 행위 자체가 신의 행위로 서술되어 있다는 것이다.

 

5) 예술과 종교

그리스 예술의 기본 원리는 예술과 종교의 관계에서도 관철된다. 예술과 종교는 동일한 그리스 정신의 원리를 표현하지만 그 표현방식은 다르다. 종교는 마음 속의 환상을 통해 표현하며 예술은 물질적 형상을 통해 표현한다. 마음속의 환상과 물질적 형상은 서로 대응하니, 예술과 종교는 서로 상응한다.

 

우선 예술은 표현을 위한 소재를 종교 속에서 찾는다. 예술이 신과 신화를 표현하더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념을 표현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며 예술이 봉사하는 것은 종교가 아니라 곧 그리스 도시 국가이다.

 

민중은 이미 이념에 관한 어떤 환상을 마음 속에 가진다. 하지만 이는 무의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런 환상이 물질적 형상으로 나타날 때 비로소 민중은 자기 마음 속의 환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된다. 종교는 예술을 통해 비로소 자기를 표현할 언어를 발견하니, 예술가는 민중에게 예언자이며 교사가 된다.

 

예술가는 소재를 종교에서 찾으니 이미 종교적으로 전승된 것을 바탕으로 한다. 이런 종교적 전승이 없다면 예술은 성립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술가는 이런 전승된 것을 그대로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예술가는 이런 전승된 것을 소재로 이념을 현상화하면서 이를 아름다운 형상으로 만들어내니, 이런 작업은 한편으로 예술가의 독창적인 창조에 속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에는 이미 전승된 것을 조탁한 것이라 하겠다.

 

그리스 예술 형식에서 인간과 신이 중첩되어 있듯이 예술과 종교 역시 중첩되어 있다. 그리스 종교는 <정신현상학>에 나오는 헤겔의 표현을 빌리자면 곧 예술 종교이다.


[1] 인간적 형태를 취한다고 해서 의인화된 것으로 볼 수는 없다. 예를 들어 지혜가 아테나 여신으로 표현될 때, 아테나 여신은 지혜의 의인화가 된다. 하지만 고전 예술에서 지혜는 아테나 여신이 지닌 여러 속성 중의 하나이며, 아테나 여신은 그 자체가 하나의 주체로서 활동한다. .

[2] 미학강의 2권, 91쪽

[3] 미학강의 2권, 91쪽

[4] 미학강의 2권, 415쪽

[5] 미학강의 2권, 89-91쪽

[6] 미학강의 2권, 87

헤겔미학산책15-피디아스와 라오쿤[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5- 피디아스와 라오쿤

 

1)

헤겔은 미학강의 2권에서 그리스 조각을 설명하면서, 느닷없이 영국의 외교관 엘진 경을 거론한다. 그는 1789년에서 1803년 사이에 터키 제국에 파견된 영국 외교관으로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 조각품을 떼어내어 영국으로 가져온 인물이다. 

 

헤겔은 언급하기에 사람들(특히 낭만주의 시인 바이런이 그렇다)은 그를 약탈자라고 비난하지만, 그 자신은 오히려 가만 두었으면 이슬람 지배 아래 파괴되었을 예술품을 구출하였다고 평가하겠다고 말한다. 엘진 경의 약탈물은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그는 그의 약탈 때문에 파산했으니[1] 신으로부터 충분히 처벌받았다고도 하겠으나, 엘진 경의 콜렉션은 헤겔이 고전적 예술형식에 대해 새롭게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점은 미학강의에서 헤겔 자신이 이렇게 말하는 데서 잘 알 수 있다.

 

“이 시대 작품들에서 이구동성으로 평가되는 것은 형식과 자세의 매력과 고상함이 아니며 피디아스 이후의 시대에서처럼 이미 외부를 향하는, 그리고 감상자의 측면의 만족을 목적으로 삼는 우아함이 아니며, 제작의 섬세함과 대담함 또한 아니며 오히려 일반의 찬사가 주목하는 것은 이 형상들이 갖는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이다. 그리고 특히 자연적 질료적인 것을 완전히 꿰뚫고 지배하는 자유로운 생동성을 통해 경탄은 정점으로 치달았다.”[2]

 

결론적으로 말해 엘진 경의 약탈물이 들어오면서 그리스 예술에 대한 평가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그 이전 그리스 예술은 매력과 고상함, 우아함 등 때문에 만족을 주었으나, 이제 자립성과 자기 관계성, 자유로운 생명성 때문에 경탄을 주고 있다고 한다.

 

2)

여기서 엘진 경의 약탈물이 미친 영향을 이해하려면, 그 작품의 유래를 이해해야 한다. 엘진 경의약탈물은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에 부착된 조각품이었다. 파르테논 신전은 아테네가 그리스 동맹을 이끌고 페르시아 전쟁에서 이룬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페리클레스가 BC 5 세기경 건축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리고 이 신전 건축을 지도했던 인물이 바로 그리스 조형 예술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 피디아스의 작품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엘진 경의 약탈물은 그리스 조형 예술의 최고작품을 대변한다.

 

그런데 이 작품은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을 대변했던 작품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주었다. 그 이전 시기 그리스 조형 예술의 대표작은 빙켈만에 의해 평가되어 신고전주의 시기 모범이 되었던 작품인 Apollo BelvedereLaocoön 군상,  Belvedere Torso, Antonous Mondragone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BC 3세기 그리스 몰락기에서부터 AD 2세기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이며 지금 대부분을 교황청이 소유하고 있다.

 

두 시대의 작품을 비교해 보기만 하면 헤겔이 왜 미학강의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남겼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우선 엘진 경의 약탈물 중의 하나를 보자. 이것은 파르테논 신전 페디먼트에 부착된 것으로 엘진이 가지고 와서 지금 대영박물관에 보관하는 조각상 중의 하나다.

 

이것과 비교하여 전성기가 지난 BC 4세기 작품을 보자. 이것은 그 시대 크니도스에서 만들어진 이후 AD 1세기 로마 시대 복사한 것으로 교황청에서 소장하고 있는 크니도스의 비너스 상이다.

전성기 작품은 어떤 풍파에도 흔들리지 않는 고요함과 자립성이 지배하고 있다. 반면 몰락기 작품은 헤겔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며 특히 약동적이다. 물론 전성기 작품 속에서도 몰락기 요소를 찾을 수 있으며, 몰락기 작품 속에서도 전성기의 요소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지배적인 것은 전 후 시대 서로 다른 것이었다.

 

3)

고전주의 작품은 처음에는 주로 16세기 들어와 로마에서 발굴된 것을 통해 알려졌다. 당시 아테네는 오스만 터키의 지배 아래 있었으므로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발굴된 것은 앞에서 말한 로마 교황청 소장품과 같은 것인데, 르네상스 이래 사람들은 그런 작품의 주로 표면적인 모습에 주목했다.

 

그 결과 르네상스 시절 고전 예술은 세속적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것으로 파악되었다. 그것은 인간의 순간적으로 운동하는 모습이 그대로 포착된 리얼한 것이었으며, 보는 사람의 욕망을 자극하고 해방하는 힘을 지녔다. 헤겔의 말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고 매력적인 모습은 르네상스의 대표 화가 보티첼로의 비너스 상에서 너무나도 잘 드러난다.

 

 

고전 예에 대한 이런 이해에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이 빙켈만이다. 빙켈만은 18세기 초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청이 소장하고 있는 발굴품을 직접 보면서 그 핵심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했는데, 그로부터 그리스 예술을 파악하는 고전주의적인 관점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리스의 뛰어난 미술 작품들이 자세와 표현에서 보여주는 가장 일반적이고 현저한 특징은 결국은 고귀한 단순함과 고요한 위대함이다. 아무리 바다의 표면에 거친 풍랑이 인다 해도 깊은 심연 속은 언제나 고요를 지킴과 같이, 그리스 조각상들은 격정의 한가운데 있다 해도 위대하고 초연함을 지키는 영혼을 재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평가했을 때 토대가 되었던 작품은 교황청 소장 라오쿤 군상이었다. 그는 이 라오쿤 군상[3]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그러한 영혼은 라오콘 군상, 특히 라오콘의 얼굴에서 격렬한 고통에 맞서는 모습으로 드러난다. 그의 육체의 모든 근육에서 고통이 드러난다. 굳이 얼굴과 다른 신체 부위를 보지 않고 고통으로 수축된 그의 복부만을 보더라도 충분히 고통이 우리에게 전해지는 것을 느낄 있다. 그러나 고통은 얼굴 표정이나 다른 몸짓이 격렬하기 때문에 두드러지는 것이 아니다. 라오콘 상은 시인 베르길리우스의 라오콘처럼 끔찍한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

 

라오쿤 군상의 표면적 모습은 고통으로 가득 찬 인간의 비명을 지르는 순간을 표현한다. 그 표면적 모습만 보면 이 군상은 오히려 그리스 예술의 후기 즉 몰락기에 나타나는 모습에 가깝다. 그런데도 빙켈만은 이런 모습 속에서 고통에 맞서 자기를 유지하는 고귀함과 고요함을 보니, 빙켈만은 표면적 모습에 감추어져 있는 심층적 모습을 간취하는 능력을 지녔다고 하겠다.

 

위대하고 고귀한 영혼은 조화롭고 고요한 상태에서 발견된다. 라오콘 상이 고통만을 묘사한다면 그것은 파렌티르소스일 것이다. 그러나 조각가는 영혼의 독특함과 고귀함의 성질을 통일하기 위해서 라오콘을 극한 고통 가운데 두면서도 고요한 상태와 맞닿아 있는 동작으로 표현해 내고 있다. 영혼의 평정은 유일하고 독특한 성격에 의해 나타나야 하고 형태에 고요와 움직임을 동시에 부여해야 한다. 그것은 지루하거나 둔감하지 않은 고요함이다.”

 

빙켈만은 고전 예술의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작품 가운데 보티첼리보다는 오히려 라파엘로를 높이 평가한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 시스티나의 마돈나 상과 같이 라파엘로의 그림에서는 고귀함과 고요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래 시스티나 마돈나 상 가운데 마돈나의 얼굴 모습을 보라.

 

4)

헤겔이 빙켈만의 영향을 얼마나 받았는가는 그가 고전 예술을 평가하면서 제시하는 개념을 통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고전 예술의 대표적 특징으로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은 고요함과 자립성을 갖는다고 하는데, 그런 개념은 빙켈만으로부터 유래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헤겔은 고전 예술이 단순히 고요함과 자립성만 지니는 것은 아니라 한다. 고전적 예술은 또 하나의 특성을 동시에 지닌다고 본다. 즉 생동성이다. 어느 시대에도 두 요소가 다 존재하지만 그 가운데 자립성은 전성기 시대 지배적이었고 생동성은 오히려 몰락기에 지배적이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헤겔은 <미학강의>에서 이행기를 거친 이후 고전 예술의 발전을 두 단계로 나누어서 설명한다.


[1] 터키 외교관 시절 엘진은 사비를 들여 그리스 미술품을 발굴했고 특히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의조각품을 떼어냈다. 엘진의 약탈물은 1803년 영국으로 보내졌으나 수송 도중 배가 침몰하여 이를 인양하는 데 많은 돈이 들었다. 그는 프랑스를 거쳐 귀국하다 프랑스와 영국의 전쟁으로 전쟁포로가 되었다. 나폴레옹에 탄원한 끝에 석방되어 1806년 귀국했다. 귀국해서 그는 자신의 부인이 자기의 친구와 바람이 났다는 것을 알고 이혼 소송을 하느라 많은 돈이 들었다. 그 때문에 처음에 사설 박물관을 세우기 위해 들여왔던 조각품을 영국 정부에 판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들인 전체 비용의 반 값으로 판매했으니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그는 나폴레옹에 탄원하는 중 그가 했던 발언 때문에 영국 정부로부터 상원의원과 귀족이라는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는 그를 추궁하는 빚쟁이를 피해 1820년 프랑스로 도피하여 1840년 파리에서 죽었으니, 약탈에 대한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고 하겠다.

[2] 미학강의 2권, 409쪽

[3] 라오쿤 군상은 트로이의 신관 라오쿤과 그의 두 아들이 포세이돈의 저주를 받아 바다 뱀에 물려 죽는 모습을 조각했다. 이 작품은 로도스 섬 출신 세 명의 그리스 조각가가 제작했다고 알려지며, BC 2세기 경 제작된 원본을 로마 황제 시대 복사한 것으로 알려진다.    

<논평> – 고(故)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에 관해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 논평

–고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에 관해서

 

이 글은 2024년 1월 11일 한철연 신년회에서 진행한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故 남기호 회원 저) 북콘서트에서 논평한 내용입니다. 헤겔과 야코비를 중심으로 전개한 남기호 교수의 학술 작업에 대한 평가를 담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남기호 교수를 잘 알지 못하지만, 가끔 학회나 논문을 통해 엿보게 되는 치열하게 철학을 연구하는 모습, 그것도 현실의 삶과는 무관한 것과 같은 형이상학을 그리고 이 시대는 거의 죽은 개로 버려진 헤겔 철학을 연구하는 모습은 나에게는 아주 감동적이었다.

본격적으로 자신의 철학을 쌓아 올릴 나이에 안타깝게도 세상을 떠난 남기호 선생을 생각하면 마음 속에서 철학의 순교자라는 말이 떠오른다.

남기호 선생의 철학적 고투를 가슴에 새기고 그가 노력하여 얻은 성과를 정리하여 그 위에서 우리의 갈 길을 열어나가는 것은 살아남은 자의 의무가 아닌가 해서 비록 충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여기 그의 철학적 성과를 정리하여 놓고자 한다.

 

1) 남기호 교수의 철학적 작업

필자가 알기로 남기호 교수는 그 동안 두 권의 연구서를 냈다. <헤겔과 그의 적들(도서출판 길, 2019)>과 <독일 고전 철학의 자연법>(도서 출판 길, 2020)이다. 위의 두 연구서는 법철학적 내용을 담고 있다. 남교수는 그 동안 여러 논문을 작성했고 그 중 헤겔 관련 논문을 제외하면 대부분 논문이 야코비와 관련된 논문이다. 아마 야코비 관련 논문들이 이번 유고집으로 발간된 책 <야코비와 독일 고전철학>으로 집성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발간된 두 권의 책에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헤겔 당시 독일에서 전개된 계몽주의의 자연법 사상과 낭만주의의 역사법 사상 사이의 논쟁이며, 이번 책에서 주로 논의되는 것은 낭만주의자인 야코비가 전개한 독일 고전철학자(레싱, 칸트, 피히테, 셸링, 헤겔 등)에 대한 비판이니 남교수의 철학적 문제의식 속에는 낭만주의와 합리주의 사이의 대결이 가로놓여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이런 논의 가운데 남교수의 입장은 대체로 헤겔의 자연법과 이성적 인식을 옹호하는 입장이지만, 남교수는 헤겔을 단순히 계몽주의와 합리주의의 계승자로 보지 않고, 야코비를 비롯한 낭만주의의 비판을 수용하면서 합리주의를 발전시키려 했다고 파악한다.

독일 낭만주의는 적어도 1807년 나폴레옹의 독일 점령 이전에는 프랑스적 민주제를 옹호하며 독일 봉건제도에 대해 비판적이었으나, 나폴레옹 해방 전쟁을 거쳐가면서 점차 보수화된다. 중세를 낭만화하며, 오스트리아 메테르니히의 반동체제를 옹호하는 이데올로거로 전락하고 만다.

헤겔은 1802년까지만 해도 낭만주의를 옹호하는 입장에 서 있었지만 1803년 이후 비판적으로 전환하며 그런 비판은 1807년 발간된 <정신현상학>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이 시기가 낭만주의가 보수화되는 시기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헤겔의 비판이 어떤 맥락에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겠다. 

헤겔과 낭만주의의 대결은 헤겔이 베를린 대학에 있을 때 더욱 치열하게 되니 그 한 가운데 잔트 사건이 있다. 그 사건에 대한 헤겔의 입장은 1821년 <법철학>에서 잘 드러난다.

 

2)

헤겔의 낭만주의 비판은 지금까지 주로 셸링 철학과의 관계에서 논의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남교수의 연구 덕분에 셸링 이상으로 야코비가 문제된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 같다. 이 점이 헤겔 연구에서 남교수의 중요한 철학적 기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낭만주의는 자연 속에서 신을 추방하는 근대 자연과학과 계몽주의의 흐름에 대립하면서 자연 속에서 신의 존재를 다시 회복하려는 시도 가운데 출현했다. 독일에서는 괴테의 질풍노도의 시기에서 시작된 낭만주의는 그 후 크게 보아 세 가지 흐름으로 전개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셸링이며 다른 하나는 야코비이며 또 다른 하나는 프리드리히 슐레겔이다.

셸링은 스피노자적 자연 개념을 끌어들여 실체적 통일을 자연의 무한한 생산력을 통해 파악하려 했다는 점에서 합리적 이성을 넘어서지는 않았다. 그에 반해 야코비는 심지어 셸링적 자연 개념조차 초월적 인격 신을 이성으로 끌어내린다고 비판하며 신은 오직 신 자신의 계시를 통해서만 인식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그에 반해서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지적 직관과 이성의 역할을 상호 보완적으로 이해하려 했다. 즉 지적 직관을 통해서만 이성의 활동을 신의 인식으로 인도될 수 있으며 이성의 비판 없이는 지적 지관은 망상으로 전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점을 고려할 때, 남교수가 헤겔을 파악하는 데서 하필이면 야코비에 대해 특별하게 주목했는가가 문제가 될 것이다.[1]

 

필자는 야코비를 직접 연구한 적은 없으나 남교수의 책을 통해 어렴풋하게나마 야코비의 생각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 이해에 의거해 볼 때 야코비의 근본 입장은 이렇게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신은 초월적 인격적 존재이며 자유로운 의지를 발휘하는 자이니, 신에 대한 합리적 개념을 통한 어떤 인식도 신을 부정하는 무신론으로 전락하게 된다는 것이다. 야코비는 인간이 신에 대한 접근은 인간적 이성이 아니라 인간이 귀속하는 이성 즉 오직 신이 인간에게 부여하는 계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남교수에 따르면 야코비는 칸트나 헤겔보다는 오히려 셸링에 대해 더 비판적이며, 양자 사이의 대결은 특히 치열했던 것으로 보인다. 남교수는 셸링에 대한 야코비의 비판을 아래와 같이 정리하고 있다.

 

“살아 있는 신의 현존이 증명되어야 한다면, 이 신은 그 근거로 의식될 만한 어떤 것으로부터 연역되어야 할 것이다. 마치 신이 자신의 원리로부터 진화하듯 말이다. 그러나 만일 그렇다면 신의 근거로 간주된 그 어떤 것이 신보다 먼저 그 위에 있게 될 것이다. 이는 불합리하다. 만약 신의 현존 증명이 살아 있는 신의 이념만을 연역하는 것이라면 이는 또한 살아 있는 현실적 신 자체의 증명일 수 없음을 물론이고 기껏해야 자신의 인식적 필요를 충족하려는 인간 정신의 주관적 산물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2]

 

이상은 야코비가 신이 자신의 근거로부터 자신을 전개한다는 셸링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으로 보인다.

 

3)

이번 발간된 책에서 남교수는 이 책에서 다른 누구보다도 헤겔과 야코비 사이의 대결에 초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양자의 대결에서 다루어진 논점은 주로 헤겔의 저서 <믿음과 앎>(1802년)이라는 글에서 나온다. 이 글을 셸링이 헤겔과 함께 발간한 <철학 비판 저널>에 실린 글이다.

이 글에서 헤겔은 야코비적 이성(즉 계시)이 신성의 사원을 세우는 것과 동시에 악마에게 예배당을 지어준다고 비판했다. 즉 계시로 얻어지는 지식이 진리인지 허위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 비판이다. 그런데 야코비는 이런 비판에 대해 거꾸로 이성을 통해서는 신에 도달할 수 없다면서, 헤겔을 이솝의 소처럼 커지려고 배를 부풀리다 터져 버린 개구리의 우화에 빗댄다. 

야코비는 여기서 형용사적 이성과 명사적 이성을 구분한다. 형용사적 이성은 인간에 속하는 이성이며, 명사적 이성은 인간이 그에 속하는 이성이다. 전자의 이성은 “자연 사물을 제약되고 매개된 필연적 사슬 속에서 인식하는 것”이기에 초자연적 무제약자는 이러한 이성을 통해서는 파악할 수 없다고 한다.

 

“오성적 이성을 지닌 인간은 동시에 피조물로서 이러한 신적인 이성에 속하고 있기에 매개들의 무한한 사슬을 넘어 단적으로 주어지는 모든 현존의 근원을 예감할 수 있다. 바로 그 때문에 인간에게도 자유가 가능한 것이다.“[3]

 

야코비는 위에서 말한 것처럼 인간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적인 이성에 인간이 귀속되어 있기 때문이니, 인간의 자유는 곧 신적 이성의 존재를 입증한다고 본다.

 

남교수에 따르면 헤겔은 그 후 야코비와 삶에서나 철학에서 야코비와 화해를 하면서,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한다고 본다. 한편으로 헤겔은 1807년 밤베르크 시절 니트함머의 중재를 거쳐 야코비와 개인적으로 화해한다. 이런 화해는 남교수에 따르면 프로테스탄트에게 주어졌던 정치적 개혁 과제의 공감과 야코비의 감화력 있는 인격 때문이었다고 한다[4]. 그 결과 1812년 야코비가 죽자 헤겔은 그의 학문적 기여에 대해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헤겔은 평생에 걸쳐 철학적으로는 야코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남교수에 의하자면, 야코비의 비판을 수용하여 자신의 철학을 발전시키려 시도했다. 남교수는 이런 전환을 통해 헤겔은 ‘매개적 직접성의 철학’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즉 존재는 매개되어 있으면서도 그 매개 자체가 지양되어 있다는 것이다.

 

“매개 없는 직접지도 거짓이지만 매개 속에서 이 매개 자체를 지양하지 않는 절대자의 사유도 거짓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에서 헤겔은 후에 자신의 철학백과요강 앞부분에서 야코비의 철학을 이전 형이상학과 근대 경험론 및 칸트의 비판철학을 능가하는 것으로 평가한다. 이른바 직접성의 변증법이라 할 만하다.”[5]

 

직접성 즉 계시는 야코비에게서는 순수한 예감, 또는 동경의 형태로 출현한다. 그렇다면 이런 직접성은 헤겔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출현할까? 그의 저서 <야코비..>에서 이 부분의 서술은 아주 간략하게만 다루어졌다.

 

4)

남교수가 헤겔 철학의 핵심으로 파악하는 매개된 직접성의 철학은 아마도 남교수가 쓴 논문 <매개된 직접서의 변증법>(시대와 철학 27-3, 2016)에서 좀더 상세한 설명을 들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논문에서 남교수는 헤겔이 <철학백과요강>에서 전개한 객관적 사유의 발전을 다루었다. 간단하게 이 논문에서 남교수의 설명을 따라가 보자.

우선 객관적 사유의 첫 번째 형태는 몰의식적 직접성의 사유이다. 그것은 직접적 접촉에 따른 사유이거나 자명한 자기 연관 속에 일어나는 사유이다. 전자는 경험적 사유를 지칭하며 후자는 아마 형식 논리학적 사유를 말할 것이다. 종전의 형이상학은 형식 논리학적으로 파악된 속성을 절대자의 술어로 파악하면서 절대자를 인식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형이상학은 절대자는 모든 술어를 넘어선 존재라는 점을 간과한다.

 

두 번째 객관적 사유의 단계는 매개적 사유이다. 직접적인 존재 자체가 이미 매개되어 있다는 주장인데 대상은 사유의 범주에 의해 구성되어 있다고 말한 칸트의 비판철학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헤겔은 칸트는 이런 범주 자체를 이미 직접 주어진 것으로 전제하고 있다고 한다. 칸트는 이런 범주 자체가 어디서 나왔는지를 설명하지 못한다. 더구나 범주가 구성하는 것은 경험인데 이 경험은 어떤 대상으로부터 주어지지만 칸트는 이 경험을 넘어선 그 대상은 인식할 수 없는 물 자체이다. 결국 두 번째 매개의 단계는 무지에서 무지 사이에 걸쳐져 있는 인식에 불과하다.

헤겔은 객관적 사유의 세 번째 단계를 설정한다. 이것이 바로 야코비의 직접지이다. 즉 무한자에 대한 신앙을 통해 얻어지는 계시적 인식이다. 헤겔은 직접지를 세 가지 관점에서 설명한다.

우선 이런 직접지는 경험적 내용을 형이상학화한 결과물일 수 있다. 즉 인간적 인식이지, 신의 계시라고 확립할 도리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이 직접지는 매개적 앎과 대립하면서, 그 자체가 하나의 독단이 되고 있다.

 

헤겔은 한편으로 야코비를 비판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야코비의 개념을 자기 나름으로 재구성하면서 자기의 철학으로 나가는 데, 논점은 감각적 경험과 지적 직관 사이의 관계에 있다.

야코비에게서 감각적 경험과 지적 직관은 직결되어 있다. 즉 감각적 경험이 곧바로 자기를 넘어서는 지적 직관이 된다. 야코비는 이 관계를 매개로 파악하지 않고, “매개를 배제하면서 동시에 비약을 통해 서로 분리되어 있다고” 본다. 그러나 헤겔은 야코비의 이런 주장은 오히려 직접지가 매개된 지식임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즉 지적 직관이 경험을 매개하여 출현한다는 것이다.  

 

“무한자에 관한 이 객관적 사고는 개별적 유한자와 분리되는 비약이 아니라 이 유한자를 전제하며 동시에 이를 넘어서는 고양함의 결과일 뿐이다. 이렇게 신에 관한 직접지는 유한자[감각적 경험]와의 매개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6]

 

남교수에 따르면 야코비가 매개의 지점을 간과한 것은 야코비가 매개가 지양되어 직접성이 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이는 학문적 매개에서 직접성이 지양될 뿐만 아니라 또한 동시에 직접성을 지양하는 이 매개 자체가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데서 비롯되는 선입견이다.”[7]

 

5)

그렇다면 헤겔에게서 매개 자체가 지양될 수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남교수에 따르면 바로 그것이 곧 헤겔에게서 가상의 역할이라 한다.

 

“세계 내 유한한 존재들은 단지 가상일 뿐이요 이 현상적 유한자들의 “매개 속에서 매개 자체를 지양하는 것”이 바로 “본질적 사유의 참다운 본성”이다.”[8]

 

헤겔에 따르면 참다운 이성은 매개 자체가 지양된다는 것을 통해 직접지에 이르는 것이다.

 

“객관적 사유는 그 유한성을 넘어 어떤 타자가 아니라 바로 “자기 자신과 매개된” 직접성으로서 무한자까지도 사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9]

 

이상에서 남교수의 평생에 걸친 철학적 고투를 간략하게 살펴보았다. 그 핵심 개념은 매개된 직접성의 개념에 있다. 하지만 매개된 직접성이란 무엇일까? 직접적으로 주어지는 것으로 보이는 경험이 사실은 매개된 것이라는 말일까? 예를 들어 오늘날 경험이라는 것은 이미 일정한 개념틀을 전제로 하는데, 그 개념틀은 역사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아니면 매개가 그 한계를 드러내면서 지양되고 다시 직접적 계시가 요구된다는 말일까? 매개가 한계를 드러낸다는 것은 매개가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에 그치는 것을 말한다. 이 경우 매개가 본질적인 것을 향하도록 만드는 데에는 이미 일정한 방향성이 내적인 직관을 통해 주어져야 한다.

많은 논의가 필요한 개념으로 보인다. 여기서는 그런 논쟁을 전개하기보다는 남교수의 철학적 입장이 야코비를 통해 헤겔의 매개된 직접성의 개념에 이르는 길이었다는 사실만을 밝히고 끝내기로 하자.


 

[1] 물론 남교수의 스승인 발터 예슈케 교수의 영향도 배제할 수는 없겠다. 발터 예슈케 교수는 헤겔의 연구자이면서 동시에 야코비의 연구자이기 때문이다.

[2] 남기호, 207쪽

[3] 남기호, 302쪽 참고

[4] 남기호, 311쪽 서술을 참고로 하라.

[5] 남기호, 309쪽

[6]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3쪽

[7]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4쪽

[8]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4쪽

[9] 남기호, 매개된 직접성의 변증법, 155쪽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4- 호머에서 신과 인간

 

1) 고전 시대

앞에서 언급했지만 헤겔에서 예술은 정신의 표현 기호이다. 이 정신은 마침내 절대 정신으로 발전하는데, 그 토대는 바로 국가이다. 이 국가는 사회적 상호 관계 위에서 출현한 사회 정의나 공동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개별적 의지의 통일체이니, 루소의 말을 빌리자면 즉 일반의지이다.

상징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었던 동방 국가(인도, 페르시아, 이집트의 국가)나 고전적 예술 형식의 토대가 되는 고전 시대 국가(앞으로 고전 국가로 통칭하기로 하자)가 도시 국가에서 출발해서 하나의 제국을 형성했다는 것은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헤겔은 양자 사이에 근본적 차이를 설정했는데, 그 차이는 무엇일까?

그 차이는 동방 국가에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억압이 일반적이었지만 고전 국가에서는 자유가 존재했다는 데 있다. 즉 고전 국가에서는 평민의 자유가 보존되었고 이주민에게 일정한 권리가 인정되었으며, 도시 국가와 도시 국가 사이에서도 상대적 평등이 인정되었다. 물론 이런 자유나 평등은 정점에 이르렀을 때를 말하며, 그 과정에서 억압과 불평등이 존속했으나, 동방 국가가 결코 도달하지 못했던 자유나 평등에 마침내 도달했다는 점에서 그렇게 평가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평가되는 역사적 근거는 고전 시대에서 적어도 그 전성기에서는 왕과 귀족에 대한 평민의 투쟁을 통해 민주제와 공화제가 출현했다는 사실에서 발견될 수 있을 것이다.[1] 같은 도시국가에서 출발했음에도 이처럼 차이가 나타난 이유는 무엇일까? 고전 시대가 민주제와 공화제로 나갈 수 있었던 역사적 원인을 밝히는 것은 이 글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이니 생략하기로 하자.

헤겔은 고전 시대에 찬탄함에도 불구하고 그 한계를 지적하는 것을 빼놓지 않는다. 대체로 두 가지 한계가 언급된다. 우선 고전 시대에서 개인의 자유가 출현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유에는 한계가 있었다는 사실이다. 고전 시대에서 개인은 자발적으로 공동체의 의지인 국가에 복종했지만 그것은 근대에서와 같이 자각적으로 복종한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관습적으로 형성된 민족 의식[2] 또는 위대한 영웅에 대한 감정적 신뢰를 통해서 복종했다는 것이다.[3]

또 하나 헤겔이 강조하는 한계가 있다. 고전 시대[여기서는 로마 공화정까지만 다루어진다]의 도시 국가 사이에는 협력과 대립의 관계가 무상하게 변천했는데 그런 가운데 한번도 동방의 국가가 도달했던 것과 같은 통일체에 이르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고전 시대의 도시 국가는 그리스에서처럼 공동의 동맹을 만들어내거나 로마 공화정에서처럼 자율권을 인정하면서도 그리스 동맹 도시보다는 발전된 형태 즉 동맹 도시 시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는 관계가 맺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로마의 동맹 관계조차 후일 로마 제국이나 그 이전 동방 국가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통합에 이르지는 못한다. [4]

 

2) 신들의 전쟁

고전 시대 사회가 지니고 있는 이런 한계 때문에 헤겔은 고전 시대의 정신을 개념적으로 설명하면서 여기서 개별성이 출현했으나 그 개별성은 일반성과 직접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이런 매개가 결여된 ‘직접적 결합’이라는 원리가 고전 시대 시대 정신을 규정하니 우리는 이런 특징을 예술적 표현에서 찾기 전에 먼저 종교적 표현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헤겔은 그 점을 아래와 같이 서술한다.

“정신적인 것을 내실로 삼고 자연적인 것은 단순한 출발점에 불과한 것이 그리스 신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리스 신은 아직 절대적으로 자유로운 신[기독교 신]은 아니며 인간적 한계를 지닌 특수한 신이고, 외부 조건에 좌우되는 특정 개성을 지닌 정신이라고 해야 한다. 객관적으로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를 띠는 것이 그리스 신이다. 신의 정신이 아직 여기서는 스스로의 정신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형태로 그곳에 놓여 있다. 다만 눈에 보이는 감각적인 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은 아니며, 그것은 표현을 위한 요소에 불과하다.”[5]

다시 말하자면 그리스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상징 시대처럼 동물 신의 모습이나 아니면 이슬람의 카바(흑색 돌)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지 않고,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기서 신 개념에 대한 헤겔의 이해를 엿볼 수 있는데 신의 본질이 바로 인간 공동체의 의지 즉 일반 의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그리스에서 신이 본성은 이성적으로 자각된 것은 아니고, 감각적 수준에서 직접적으로 자각된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신은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더라도 어떤 모습을 취하는가는 우연하다. 이런 우연성은 상징주의 시대 자연 신의 모습에서 빌어오든가 아니면 지역적으로 전래하는 신으로부터 빌어온다

하지만 그 우연성만 본다면, 전래의 상징적 신이 수용되었다고도 볼 수 있으나, 이미 구 시대 신의 형태는 새로운 신의 형태로 변형되었다. 구 시대 신은 더 이상 자연력을 의미하지 않으며 이제 정신적 힘을 의미하게 된다.

구 시대 신은 자연적인 것이며 불명료하고 우연적인 것이며 환상적인 것이지만 새로운 신은 정신적인 것이며 명료한 것, 필연적인 것이고 실체적인 것이다. 그리스 신화는 구 시대 신과 새로운 신 사이의 투쟁[6] 또는 신의 변용[7]을 그려내고 있다.

신의 이런 차이에 관해서 헤겔은 예를 들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거론한다. 프로메테우스는 구 시대 자연신인 티탄 족의 신인데도 인간을 위해 불과 기술을 가져다 준다. 헤겔은 이 사실은 얼핏 불합리해 보이지만, 이런 신화에서 신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헤겔은 이때 플라톤의 <프로타고라스>에 나오는 설명을 소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에피메테우스가 모든 생물에게 살아가기 위한 고유한 기술을 나누어주었는데 프로메테우스가 나중이 보니 인간에게 줄 기술은 더 이상 없었다. 그래서 그는 헤파이토스와 아테네로부터 불의 기술과 직조의 기술을 훔쳐 인간에게 주었다고 하면서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인간 사이에 끝없는 분쟁이 벌어지니 제우스는 어쩔 수 없이 헤르메스를 통해 정의를 선사했다고 설명한다.

헤겔이 주목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런 설명을 통해 볼 때 불과 직조의 기술은 아직 실체적인 것에 속하지 않는 단순한 생존의 기술, 자연의 힘에 속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비록 프로메테우스가 욕구의 만족을 위한 기술을 주었지만 프로메테우스 자신은 구 시대 신에 속한다는 것이다. [8]

헤겔은 이런 프로메테우스의 신화를 통해 구 시대 신인 프로메타우스와 새로운 신인 제우스, 헤르메스의 차이를 분명하게 부각한다.

 

3)신과 인간

더구나 신이 지닌 우연적인 모습은 이제 정신적 힘의 표현이 되므로, 단순한 인간이 아닌 이상적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왜냐하면 신은 개인적 의지가 아니라 공동체적 의지이기 때문이다. 헤겔은 이런 이상적 인간의 모습을 곧 “아름다운 개체의 형태”라고 말한다.

신이 자기를 이런 아름다운 개체의 형상으로 드러낼 때 헤겔은 이를 “그것이 신의 실질을 이루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 즉 그것을 마치 상징주의 시대에 자연 속에 신이 존재한다고 보는 범신론적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자연이라는 기호를 상징적으로 즉 마술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상징 시대 신상이 신이 현존하는 숭배의 대상이 된다.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 헤겔은 이를 어디까지나 신의 “표현”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표현이란 곧 이 시대 예술을 의미하는 자기를 이중화하여 드러내는 예술적 기호라는 의미이다. 달리 고전 시대 신상은 숭배의 대상은 아니다.

고전 주의 시대 신상은 한편으로는 인간의 작품으로 간주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신의 현존으로 간주되니, 양자는 직접적으로 결합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마치 그리스 서사시에서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중첩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편으로 인간적 사건이 신의 행위로 설명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신의 행위는 인간의 감정을 반영한다.

헤겔은 예를 들어 호머 일리아드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장면을 거론한다. 아킬레스의 친구 파틀로클로스와 트로이의 헥토르가 싸울 때, “어슴푸레한 어둠에 몸을 감춘 신(아폴로)가 혼전을 틈타 그에게 다가와 등과 어깨를 내리치며 투구를 벗겨 내고” “그의 손아귀에 있는 청동창 역시 부러뜨리며 그의 어깨에서 방패를 끌어내리고 갑옷을 벗긴다.” 이어서 호머는 비로서 에우포르보스가 창으로 파트로클로스의 뒤에서 어깨 사이를 찌를 수 있었다고 서술한다. 그리고 헥토르가 신속히 다가와 창으로 복부의 약한 부분을 깊숙이 찌른다. 이런 서술을 보면 인간의 행위가 신의 행위로서 기술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서사시가 아니더라도 그리스 신화에 보면 인간의 행위와 신의 행위가 서로 중첩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헤겔은 호머의 이런 서술을 이렇게 설명한다.

 

“왜냐하면 호메로스가 특수한 사건들을 그러한 신의 등장을 통해 설명하는 모든 경우에, 신들은 인간 내면 자체에 내재하는 것 즉 그의 고유한 열정과 고찰의 힘이거나 그가 처한 상황의 일반적 힘들 즉 인간에게 닥치는 것과 이 상황의 귀결로 그에게 발생하는 것의 힘이자 근거이기 때문이다.”[9]


 

[1] 헤겔은 역사철학강의에서 그리스 로마 사회에 대해 각기 이렇게 서술한다.

“사람들이 왕에 복종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에 바탕한 상하 관계에 의한 것도 … 아니고, 가부장제 지배에 의한 것도 아니고, 명문화된 법적 지배의 강요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함께 살아 가려면 … 복종할 필요가 있다고 모두가 느꼈기 때문이다. 왕은 … 개인적 위엄이 있었다.”(역사철학강의, 227쪽)

“로마에 이르러 겨우 자유라는 일반원리 또는 추상적 자유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은 한편으로 추상적인 국가와 정치와 권력을 구체적 개인 위에 두고, 개인에게 철저한 종속을 강요함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 일반적 권력에 대립하는 인격을 창출한다. 인격이야 말로 법의 근본적 기초이기 때문이다.”(역사철학강의, 275-276쪽)

[2] 이 민족의식은 씨족이나 부족을 통해 형성되는 혈연적 일체감과는 구분된다. 도시국가에서 다양한 씨족, 부족은 해체되며, 그 사이에 다양한 혼인이 교차되면서 역사상 민족이 형성된다. 예를 들어 아테네 민족이라든가 로마 민족 등이다.

[3] 이 점에 관해서는 헤겔의 다음 글을 참조로 하라.

“국민은 전쟁터에서 왕의 용병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지만 어쩔 수 없이 내몰려서 예속미으로서 마음에도 없이 싸우는 것도, 자기 개인의 이익을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그는 존경하는 주군을 따르는 자로서, 주군의 전공과 명예의 증인으로서 또 필요하다면 주군의 호위로서 싸운다.”(역사철학강의, 228쪽)

또는 미학강의에 나오는 다음 글도 참조하라.

‟그리스 인륜적 삶에서 개인은 독자적이며 내적으로 자유로웠으되, 현실의 국가에서 현전하는 일반적 관심 … 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지 않았다. 인륜의 일반성과 내적, 외적으로 추상적인 개인의 자유는 그리스적 삶의 원칙에 적합하게 평온한 조화를 이루었으니” (미학강의 2, 27쪽)

[4] 헤겔은 그리스 사회에 대해 로마 사회가 가지는 차이에 대해서도 간과하지 않는다. 로마 사회는 후일 제정으로 넘어가면서 한편으로 자유로운 인격이 출현하며, 다른 한편으로 로마법의 지배가 출현한다. 동시에 이 시대 기독교가 출현하는데, 헤겔은 그 핵심 원리를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관계에서 찾는다. 헤겔은 이런 추상적 법과 추상적 자유의 원초적 형태는 이미 로마가 출현할 때부터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간주한다.

헤겔은 그 역사적 원인을 로마가 주변의 민족국가로부터 추방된 자 또는 도덕들로 이루어진 도시에서 출발했다는 데서 찾는 것으로 보인다. 그 역사적 원인이야 어떻든 헤겔은 로마의 정신을 그리스 정신과 구별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원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정신은 기쁨과 명랑함과 만족으로 충만한 형태를 취해 추상적 세계에 틀어박히는 일이 없다. …그 때문에 개인의 덕도 공동체 정신이 넘치는 예술작품이 되었던 것이다. 추상적이고 일반적 인격과 같은 것이 거기에는 아직 없었다.”(역사철학강의, 275쪽)

그리스 시대 개인은 관습적으로 길러지는 덕성[arete]을 통해 공동체적 의지로 통합되었으나, 로마 시대 개인은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추구하니 이런 욕망을 공동체로 통합하기 위해서는 추상적인 법의 원리가 출현한다. 이 법은 강제적 힘에 의해 강요되니, 이게 바로 로마 시민의 덕성(즉 virtue)이다.

“주관의 내면성이라는 원리는 우선 자신을 충족시키는 내용을 밖에서부터 지배자 내지 통치자의 특수한 의사라는 형태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역사철학강의, 277쪽)

그러나 헤겔은 그리스 사회와 로마 사회 사이의 차이를 너무 과대평가하는 듯 보인다. 적어도 공화정으로 나가는 시기 그리스 사회나 로마 사회는 별 차이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로마가 제정으로 변화하는 것은 그 시대 역사의 종합적 결과이지, 본래 내재하는 속성의 발현이라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 어떻든 고전적 예술 형식을 논하는 자리에서 로마의 예술은 후기 즉 그리스적 전성기의 해체기에 주로 다루어진다.

[5] 헤겔, 역사철학강의, 240쪽

[6] “반면 티탄들은 추방당하여 지하에 거주해야 하며 혹은 오케아노스가 그렇듯 밝고 명랑한 세계의 어두운 가장자리에 머물거나 기타 다양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헤겔, 미학강의 2권, 67쪽

[7]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이제 단순한 자연욕구와 그 만족에 제한되는 인간의 행동이 뒷전에 밀려감을 발견한다. 자의식적 정신에서 발원하는 법을 통해 규정되지 않는 옛 정의는 즉 테미스와 디케 등은 무제한적 타당성을 상실하며, 또한 반대도 마찬가지이니 단순한 지역성은 비록 그것이 여전한 역할을 하지만 보편적 신의 모습으로 변신하니, 그들에게서 지역성이 그저 흔적으로 잔존할 뿐이다.”헤겔, 미학강의 2권, 69쪽

신들의 변용에 관한 구체적 예를 들자면, 포세이돈은 오케아노스와 같이 바다의 신이지만, 그에게는 트로이의 건설자이고 아테네의 수호자라는 새로운 특성이 부여된다. 아마도 해양 무역을 보호하는 신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폴로는 태양의 신으로서 헬리오스의 자취를 가지고 있지만, 그는 또한 질서의 신이 된다. 에베소의 여신 디아나는 자연의 생산적 힘을 상징하는 옛 신이지만 원래 달의 신을 의미하는 아르테미스는 이제 동물을 사냥하여 인간을 보호하는 신이 된다. 그리고 아프로디테는 소아시아 지역에서 대지의 여신이었지만 그리스에서 미와 사랑의 여신으로 변모한다.

[8] 헤겔, 미학강의 2권, 61쪽 서술을 참조하라.

[9] 헤겔, 미학강의 2권, 111쪽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산책13-벤야민의 알레고리론

 

1)

헤겔은 상징적 예술형식을 다루면서 마지막 3절에서 비유법을 다룬다. 1절과 2절에서 다룬 상징, 숭고의 개념은 이념이 추상적이고 무규정적인 시대에서 출현한 예술의 형식이었다. 그러나 3절에서 다루는 비유법은 상징적 예술형식이 해체되어서 다른 시대의 예술형식에서 종속적인 형태로 사용되는 것을 다룬다.  

상징이나 숭고의 경우, 예술작품의 의미는 이념, 절대정신이었다. 여기서 기호 즉 작품과 그 의미 즉 이념 사이의 관계는 직접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작가는 무의식적 환상 속에서 의미를 파악하니, 마치 기호와 의미 사이에는 신비한 연관이 있어 작품은 마치 직접적으로 그 의미를 지시하는 것처럼 보이며, 그 연관은 대체로 수수께끼적인 특성을 지닌다. 본격적 상징에 이르러 양자 사이에 매개가 유사성이 되기는 하지만, 아직 그 매개를 작가 자신이 자각하지 못하는 상태에 있다.

그러나 비유법에서 이제 이념 즉 절대정신이 아니라 작가가 표현하려는 개인적인 의미일 뿐이다.  그 의미는 작품에 대해 외면적으로 관계하며 그 연관은 작가 개인의 주관적 파악에 의존하고 합리적인 방식으로 파악하는 것이 가능하다.

체계화를 좋아하는 헤겔은 이런 비유법조차 체계화한다. 그는 먼저 비유만 제시되고 그 의미는 간접적인 추론에 의존하게 만드는 형태로서 우화, 비유담, 교훈담, 속담, 변신담을 거론하며 이어서 비유와 더불어 그 의미가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제시되는 형태로서, 은유와 이미지(풍유) 그리고 직유를 구분한다. 전자나 후자는 비유와 그 의미 사이에 유사성과 같은 합리적 연관이 매개가 된다. 마지막으로 헤겔은 작가가 억지로 또는 자의적으로 양자는 연관시키는 형태로서 교훈시나 서술시(전원시)에서와 같은 비유법을 들고 있다. 이 마지막 형태에서 처음 상징에서 감추어져 있던 기호와 그 의미 사이의 무차별성이 마침내 폭로되면서 상징적 예술형식은 해체되고 만다.

비유법을 체계적으로 정리하려는 목적이라면 헤겔이 제시하는 비유법 설명을 한번쯤 읽어볼 만하다. 헤겔은 친절하게도 풍부한 예까지 소개하고 있으니, 비유법을 학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의 설명은 좀 개념적이지만, 그 내용은 요즈음 문학 교과서에서 소개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만 말해 두자.

 

2)

비유법의 종류를 구분하는 자체는 철학적으로는 별로 흥미롭지 못하지만, 비유법과 관련하여 한 가지 흥미로운 문제는 그냥 지나갈 수 없으니 즉 알레고리와 상징의 개념에 관한 논쟁이다. 논쟁의 출발은 괴테였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괴테 이전에 상징은 헤겔에서 보듯이 기호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다. 상징은 의미를 지시하지만 그 지시 연관이 무매개적이어서 신비하고 수수께끼와 같은 것이었다.

반면 괴테는 초기 질풍노도의 시기를 거쳐, 이탈리아 여행 이후 1800년 전후로 고전주의로 전향하면서[1], 상징이라는 개념에 자기만의 의미를 부여했다. 즉 상징은 그 의미인 이념을 직접 표현하는 형상을 말한다. 상징은 이념을 가장 적절하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어서 이념과 구체적 형상은 진정한 통일을 이룬다. 괴테를 이를 “감각적 현상과 초감각적 의미의 합일”[2]로 표현했다. 또는 “인간 정신이 가장 내밀하게 자연과 결합되어 온전한 형상으로 창조한 대상”이라고 말한다.[3]

괴테는 상징을 고전적 예술의 대표적인 도구로 파악하면서, 그의 이전 바로크 시대 예술의 도구인 알레고리[4]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괴테는 알레고리를 개념에 대해 외면적인 관계를 갖는 것으로 파악한다. 상징이 이념의 무한한 풍부성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알레고리는 개념의 외면적인 한 측면만 파악하는 단편적인 것에 그친다. 그러므로 괴테는 진정한 예술에 이르는 길은 알레고리가 아닌 상징이라고 하였다.

“시인이 보편적인 것을 표현하기 위해 특수한 것을 찾아내는가 아니면 특수한 것 속에서 보편적인 것을 직관하는가 하는 것은 판이하게 다르다. 전자에서 알레고리가 생겨나는데, 그 경우 특수한 것은 단지 보편적인 것을 예시하는 사례나 표본으로서만 그 의미가 있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가 본래 시문학의 본성이라 할 수 있는데, 시문학은 그 본성상 보편적인 것을 염두에 두거나 가리키지 않은 채 특수한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5]

 

3) 벤야민과 알레고리

괴테는 알레고리와 상징, 바로크 예술과 고전주의를 예술적 가치의 측면에서 비교했다. 그에 반해서 벤야민은 예술을 역사적으로 고찰하면서 알레고리의 개념을 자본주의 시대 예술의 근본적인 특징으로 파악한다. 벤야민의 알레고리 개념은 그의 실패한 교수자격취득 논문 『독일 비애극의 기원』에서 설명된다.

벤야민의 이런 시도는 각 시대 예술의 형식을 기호의 형태를 통해 파악하려는 헤겔의 시도를 닮았다. 그런데 헤겔은 알레고리를 한 시대의 특별한 예술 형식으로 말한 적이 없고 자본주의 시대의 예술 형식은 가상이라는 개념에서 발견하므로, 벤야민의 시도는 특별한 흥미를 끈다.

  우선 벤야민은 알레고리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는 알레고리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단순히 사회적 관습이나 자의적 연관에 토대를 두는 것이 아니라고 보면서 거기에 고유한 객관적인 토대가 있다고 본다. 즉 알레고리는 서로 분열된 두 개의 개념 체계 즉 구조가 중첩할 때 발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구조 속의 어떤 요소가 다른 구조 속에서 등장하여 다른 구조로부터 의미를 얻게 되면 알레고리가 된다.

벤야민은 17세기 바로크 시대 예술의 특징이 바로 이런 알레고리의 사용에 있다고 한다. 그는 바로크 시대 대표적인 예술로서 비애극-그는 이를 고대 비극과 구분하여 비애극이라 하는데-을 거론하면서 고대 비극과 구분되는 근대 비애극의 구조를 구체적으로 분석해 이런 알레고리의 형식을 발견하려 한다.

이 비애극[6]의 표면적 구조는-상세한 것은 나중에 고대 비극을 논할 때, 소개할 예정인데- 일종의 궁중암투이다. 여기서 서로 투쟁하는 두 세력 예를 들과 왕과 신하가 서로 야심을 부리는 가운데 몰락하고 만다. 표면적인 이런 구조의 배후에는 죽음과 부활 또는 구원이라는 기독교 신학적 구조가 매개되어 있다. 즉 왕과 신하의 상호 몰락은 곧 신이 세상을 구원하는 섭리의 역사였다는 것이다.

세속적인 세계의 필연적인 몰락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비애극은 멜랑콜리의 정신을 보여준다. 이런 멜랑콜리는 단순한 우울이 아니며 구원과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비애극의 기본 구조는 세속 세계와 신의 세계 사이의 이원적인 중첩이며 그 때문에 벤야민은 세속적인 사건 각각은 신적인 사건에 대한 알레고리로 작용한다고 본다.

 

4) 멜랑콜리의 정신

이런 이원적 구조의 중첩은 비단 바로크 시대 비애극에서만 발견되는 것은 아니다[7]. 바로크 시대는 역사적으로는 절대주의 시대이며 근대 자본주의가 출현할 무렵이다. 이 시대 예술 대표적인 예술은 회화와 건축에서도 발견된다. 그 가운데 대표적으로 뒤러의 작품 멜랑콜리아를 보자.

 

과학이 발전하고 지리상의 발견이 이루어지고 세속적 행복이 증가하는 가운데 등장하는 멜랑콜리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곧 세계의 분열이었다. 현실 세계는 배후의 어떤 세계에 의해 지배되지만, 인간은 그 힘을 알지 못하고 다가오는 몰락의 운명 앞에 두려워한다.

이렇게 분열된 세계는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 특징이기도 하다. 자본주의 역시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로 분열되어 있다. 전자는 표면적인 경쟁의 질서이다. 여기는 개인의 자의가 지배한다. 후자는 시장 및 가치법칙의 질서이다. 이것은 심층적이면서 표면의 질서를 배후에서 지배하는 필연적인 법칙이다. 벤야민은 바로크 시대 예술을 지배하는 알레고리의 형식은 곧바로 자본주의 시대 즉 소외된 시대예술의 일반 형식으로 간주한다.  

벤야민은 이런 알레고리 형식과 멜랑콜리의 정신을 19세기 부르주아 문화의 절정기에 등장한 보드레르의 도시 산책에서도 발견하며, 나아가서 20세기 등장한 대중 예술인 영화 예술 속에서도 발견한다. 벤야민의 이런 주장은 흥미롭기는 하지만, 이 글에서는 주제로부터 너무 벗어나니 생략하기로 하자.

 

5) 알레고리와 가상

벤야민은 알레고리를 자본주의 시대 예술 형식으로 보았는데, 이점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가 문제가 된다. 결론적으로 말한다면 필자가 보기에 벤야민이 알레고리의 형식을 자본주의 시대와 연관시킨 점은 문제가 있다.

알레고리가 두 개의 세계가 중첩되면서 발생하는 것이라면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접속하는 시기나 장소에는 어디서나 발생할 수 있다. 자본주의 역시 표면과 배후가 중첩된다는 점에서 알레고리가 사용될 수 있기는 하지만, 알레고리는 그 외의 다른 시기나 지역에서도 충분히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이질적 문화가 충돌하는 헬레니즘 시대에 다양한 곳에서 이런 알레고리적 형식이 출현했다.

자본주의적 알레고리는 멜링콜리의 감각을 불러일으키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 알레고리는 그런 감각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알레고리는 자본주의 시대 일반적 예술 형식으로 규정하려면, 멜랑콜리적 알레고리로 제한해야 한다.

헤겔은 중세 이후 발전하는 자본주의 시대를 낭만주의 시대라 이름 붙였는데 이 시대 고유한 예술형식으로서 가상이라는 형식을 제시한다. 헤겔이 말한 가상이라는 형식과 벤야민이 말한 알레고리의 형식은 구분된다.

헤겔의 경우 가상은 단순히 중첩되는 것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죽음처럼 자신의 죽음을 통해 이념적인 것을 지시하는 기호를 의미한다. 자본주의적 상호 작용의 관계에서 개별자는 몰락하며 그런 몰락 속에서 보이지 않는 손, 가치 법칙의 지배를 입증하니, 헤겔이 말한 대로 가상이라는 개념이 오히려 이 시대 절대정신 즉 이념을 적절하게 보여준다고 하겠다.


 

[1] 임홍배에 따르면 괴테의 상징 개념은 1797년 8월 16일 <쉴러에게 보낸 편지>에서나, 1797년 쓴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라는 글에서 잘 보여준다고 한다. 임홍배, <괴테의 상징과 알레고리 개념에 대하여>, 비교문화 45집, 2008. 6 참고.

[2] 가다머, 진리와 방법, 튀빙엔, 1990,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3]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0쪽에서 재인용

[4] 우선 알레고리란 무엇인가를 설명해야 한다. 알레고리란 그리스어로 ‘다른 것을 말하다’라는 뜻이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어떤 말이 표면적인 의미와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할 때를 말한다. 어떻게 보면 모든 비유법이 어떤 다른 것을 지시하므로 알레고리이지만 보통은 좁은 의미에서 사용된다.

알레고리란 관습적인 차원에서 어떤 것이 다른 것을 지시할 때 성립하는데, 그런 점에서 알레고리는 유사성에 기초한 은유{도상}나 인접성에 기초한 환유(지표)와 구분된다. 유사성이든 인접성이든 직접적인 연관을 지닌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반면 알레고리와 그 의미 사이에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간접적인 관련만 존재한다.

[5] 괴테, 조형예술의 대상에 관하여, 1797, 임홍배, 위의 논문, 102쪽에서 재인용

[6] 당시 비애극의 대표적인 예로서 안드레아스 그뤼피우스의 『레오 아르메니우스』를 보라. 드라마는 성탄절 하루 전 정오에 시작하며 작품 소재는 비잔틴의 최고 군사령관 미하엘 발부스와 그의 추종자들에 의한 황제 레오(AD 813-820 까지 통치)의 살해이다. 또한 프랑스 절대주의 시대 극작가 라신느의 희곡 『파에드라』에서도 유사한 구조를 발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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