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4-서정시와 실러 ‘종의 노래’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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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54-서정시와 실러 ‘종의 노래’

 

1) 서정적인 예술작품의 구조

앞에서 감정을 직관과 관념으로 객관화하는 시인의 능력을 살펴보았다. 시인은 응축된 감정을 지니면서도 그것을 객관화할 수 있는 자기 관계적(대자적) 존재이다. 시인은 이런 객관화를 통해 시대 정신을 표현하면서, 예술적 탁월성을 성취하게 된다. 이어서 헤겔은 서정시의 구조를 본격적으로 파헤친다. 여기서도 헤겔은 서사시와의 비교를 설명의 지렛대로 삼는다.

우선 서사시에서 작품은 내적으로는 산만하다. 왜냐하면 작품을 이루는 사건은 자립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건 전체는 그 시대 민족 정신의 전체를 보여준다. 민족 정신은 그 사건들을 내적으로 관통하고 있다.  그 사건들은 민족 정신이 일어나고 다시 쓰러지는 가운데 벌어진 사건들이다.

반면 서정시는 특수하고 개별적인 주관적 자아가 자신으로부터 표출된 다양한 표상을 통일하고 있다. 시적 내용을 이루는 요소는 자립성을 지니지 못하고 시인의 주관적 내면을 표현하는 수단일 뿐이다. 이 요소는 시인의 특수한 구체적 주관성으로부터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통일적 주관은 단순하게 “동일한 자아가 말하자면 단순한 그릇으로서 그것들을 자신 속에 담는 것”은 아니다.  주관은 곧 “한편으로 정조나 상황을 구체적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 이렇듯 특수화된 자신과 자신을 동일시하여 그 속에서 자신의 감정과 관념을 표현해야 한다.”[1] 즉 특수하고 구체적인 주관이 내면 전체를 자신의 색깔로 물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2)

서사시의 경우 그 전개과정은 느릴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개별적인 사건들이 우연하게 전개되므로 그 과정은 여러 갈래로 갈라지며 각 사건마다 지루하게 머무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독자적으로 생생하게 전개되는 개별적 사건들이니, 그런 점에서 헤겔은 서사시의 전개는 공간적으로 확장적이라고 한다.

반면 서정시의 경우, 표출된 개별적 관념은 주관적 자아를 통해 신속하게 이행한다. 이런 과정에서 하나의 요소는 다른 요소로 평온하게 이어지기도 하지만 또 한편 시적 상상력을 통해 도약적으로 전개된다. 헤겔은 이를 ‛서정적 도약’이라고 말하는데, 이런 도약 때문에 한편으로 개별 요소는 화려하고 수다스럽게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요소들은 마치 압축되듯이 지나가며, 공간적으로 펼쳐질 사이도 없이 시간적으로 사라지고 만다. 그런 가운데 압축된 요소들을 통해 그것을 산출하는 주관적 내면의 깊이가 표현된다.

 

“서정시인에게는 거의 침묵하다시피 하는 압축성과 능변의 명료함을 위해 완벽하게 다듬어진 관념 사이에 매우 풍부한 뉘앙스와 단계들이 열려 있다.”[2]

 

서정시의 요소들이 주관적 내면으로부터 떨어져 나오지 않으며, 압축적으로 전개하면서 주관적 내면을 구성한다고 하더라도, 서정시 역시 시 예술인 한에서 서사시 못지 않게, 개별적 요소가 가지는 자립성이 음미되어야 한다. 그것은 산문적 자의나 지성의 필연성, 철학의 사변적 전개와 구분되면서 개별적 요소가 자유로운 것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서사시의 경우 개별적 요소 하나하나가 그런 자립성을 지니고 음미되지만, 서정시에서는 오히려 그런 요소들의 일견 비약적인 연관성 자체가 개별적 요소 자체보다 더 많은 흥미를 이끌어낸다.

 

‟그런데 이 경우[서정시]에는 수미일관한 연관성이 거의 중단 없이 평온하게 이어질 수 있지만, 마찬가지로 서정적 도약들 속에서 하나의 표상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또 다른 표상을 향해 무매개적으로 이행할 수도 있다.”[3]

 

이 경우 시인은 “얼핏 속박 없이 종횡 무진하는 것으로 그리고 이 도취된 열광의 비상 속에서” 어떤 힘에 의해 소유 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 힘은 “시인의 의지에 반해 그를 다스리고 또 그의 마음을 빼앗는다.” [4]

평온한 연관성에서 열광적 비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단계는 시인의 특수한 성격에 의해 결정된다.

 

3) 서정시의 음악적 요소

시문학은 관념을 질료로 하지만 전달 수단으로서 언어도 간접적으로 중요하다. 시문학에서 언어적 기호가 발생시키는 음악적 효과는 마치 영화 음악에서 그렇듯이 시문학이 관념과 사유를 통해 전달하는 내용을 전체적으로 예감하게 한다는 점에서 나름대로 시문학에서 결여할 수 없는 요소가 된다.

특히 서정시에서는 주관적 심정이 관념과 사유로 객관화되므로, 서사시 이상으로 강한 음악성을 지니고 있다. 언어적 기호로서 소리가 지니는 음악적 특성은 시적으로 표현된 감정과 어울릴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서사시 역시 이미 일정한 음악성을 지닐 수밖에 없지만 서정시에 이르면, 이런 음악성은 더욱 강조된다.

서사시의 경우 주로 6운각[Hexameter]과 같은 운율적 요소 즉 음성적 기호의 장단과 강약이 결합된 리듬적 요소가 중요하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그것은 “균일하고 안정된 그런가 하면 다시 생동적이기도 하므로” 사건 자체가 스스로를 노래하는 듯한 서사시에 어울린다.

하지만 주관적 내면이 표현되는 서정시의 경우 전체를 일관하는 어떤 운율보다는 시적은 흐름에 따라서 변화하는 내적 감정의 움직임에 따라서 “다양한 운율과 한층 다면적인 내적 구조”가 요구된다고 한다. 이런 운율을 통해 그때그때마다 심정의 움직임을 예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서정시의 소재는 …시인의 주관적 내적 운동인 바, 그 한결같음이나 변화, 동요와 평온, 고요한 흐름이나 들끓는 범람 및 용출이 이제 내면을 전달하는 어휘음향들의 시간적 운동으로도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5]

 

그 뿐 아니라 서정시에는 서사시와 달리 운율적 요소 이상으로 압운적 요소가 중요하게 된다. 왜냐하면 압운적 요소란 어떤 음절, 말이 자연적인 장단과 강약으로부터 벗어나, 시적인 주관이 부여하는 정신적 의미를 통해 강조되면서 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정시의 경우, 이런 음악성은 언어의 음성적 요소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서정시는 음악의 반주를 통해 음악적 요소를 더욱 강화하니 여기서 서정시는 선율적 요소까지 끌어들이게 된다. 이런 선율적 요소는 서정시가 단순한 민요나 가곡[Lied]의 수준에 머무를 경우 강조되면서 심지어 관념적 요소조차 종속시킨다. 그러나 서정시가 비가나 소네트, 칸초네로 발전하게 되면 그만큼 언어적 전달만으로도 비교적 큰 독자성을 얻으면서 음악적 요소는 후퇴하게 된다.

 

3) 서정시의 형식적 발전

헤겔은 서정시는 극시로 발전하게 된다고 말한다. 서정시는 행동이 억눌리면서 고양된 감정으로부터 시작한다. 서정시는 감정의 직접적 발산을 벗어나 이를 관념으로 객관화한다. 이런 관념이 그 시대 정신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주관적 관념만으로는 부족하니, 서정시는 점차 둘 이상의 주관의 대화로 발전한다. 이런 대화는 곧 극시의 출발점이 된다. 극시처럼 아직 행위가 출현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시를 통해 서정시는 극시로 이행하게 되는 것이다.

서정시의 이런 발전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서정시가 출현한다. 시인이 직접적으로 감정에 휩쓸려 있을 시기, 그리고 그 감정이 직접 정신적인 것을 표현할 때, 출현하는 것이 찬가[Himmen]이다. 이는 주로 신성한 존재인 신을 예배 드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 찬가는 디오니소스교의 디티람보스적 찬가에서 보듯이 자신을 망각하는 망아적 상태를 표현한다.

이런 찬가에서 관념적 요소가 더 발전하게 되면 이제 송가[Ode]가 출현한다. 송가는 신뿐 아니라, 영웅이나 군주, 역사적 사건, 사랑이나 우정 등을 대상으로 하면서 그런 대상으로부터 시인 자신의 내면에 울리게 된 감정을 표현한다.

이제 가곡의 단계에 이르면, 특수한 주관이 지닌 내밀성이 표현된다. 송가가 세속적 사건이 아닌 역사적 사건을 대상으로 한다면 가곡에서는 세속적 사건이 대상으로 된다. 특수한 주관은 구체적 삶 속에서 살아가면서 그 가운데 그가 느끼는 슬픔과 기쁨 등의 감정이 관념적으로 표현된다. 가곡은 한 개인의 감정에 머무르지 않고 상호 주관적인 감정으로 발전한다. 헤겔은 이런 상호 주관적 가곡으로서 대화시의 형태를 띄고 있는 괴테의 시 마왕[6]을 소개한다. 그 시는 대화를 통해 전개된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누가 바람 부는 밤, 이리 늦게 달려가는가? 그의 아이를 데리고 가는 아버지이네, 팔에 소년을 보듬어 안았지. 어찌나 꼭 안았는지 소년은 따뜻해진다.

아들이여, 너는 왜 그렇게 불안하게 네 얼굴을 감추는가?

보세요, 아버지는 마왕을 못 보시는가요? 왕관을 쓰고 긴 옷자락을 끌고 있는 마왕을 못 보십니까?

아들이여, 그것은 넓게 퍼져 있는 띠 모양의 안개이구나..”

 

가곡이 정신을 표현할 수 있기 위해서는 단순한 가곡으로 머물러서는 안 된다. 가곡이 대상으로 하는 사건은 자기부정적인 가상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여기에 사건의 운동이 발생하게 되며 더 나가서는 하나의 드라마가 발생하게 된다. 가곡은 이를 통해 단순한 민요나 교양가곡을 넘어서, 소네트와 비가[Elegie], 서한시 등의 형태로 발전하게 된다.

 

4)

서정시의 형식적 발전은 서정시의 역사적 발전과 맥락을 같이한다. 헤겔은 서정시의 발전을 동방의 서정시에서 그리스 로마의 서정시로 마지막으로는 낭만적 서사시에 이른다.

동방의 서정시는 주로 찬가의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는 다양한 사물의 형태 속에 상징적으로 내재하는 신을 찬양한다. 여기서 신은 오직 구체적 사물에 대한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가시화된다. 시인은 세계 속에 내재하는 신의 모습 앞에서 자기를 잊고 황홀한 상태에 빠져 있다. 그의 개체성과 특수성은 그 속에 사라지고 만다. 즉 “[시인의] 내면은 경계 없는 모호함 속에서 자신을 상실하며”, “형상화할 수 없는 실체를 서술하려” 한다[7]

그리스 로마에서 서정시는 주로 송가의 형태를 취한다. 시인은 민족적 정신과 일체화된 상태에서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영웅과 역사적 사건, 위대한 사물 앞에 느끼는 그의 감정을 표현한다. 시인은 그런 탁월한 존재가 지닌 탁월성을 마치 조각 작품처럼 눈앞에 생생하게 현상시킨다. 그것은 비유를 통해 언표되기 보다는 오히려 직접적으로 “가시적 형상 속에서 그 자체로서 객관화”된다. 그것은 “투명한 보편성을 지니면서도” 시인 자신의 주관성 속에 녹아 들어서 표현되니, “독자적 성향과 이해방식의 자유로운 개성을 결여하지 않는다.”[8] 이런 특징은 우리가 그리스 신상에서 보았던 것과 같다.

헤겔은 그리스적 서정시가 비극에서 합창의 형태로 완성된다고 말한다. 합창 서정시는 “관념과 반성의 풍부함, 이행과 연결의 대담함의 면에서뿐만 아니라, 외적 음송의 면에서도 가장 풍성하게 전개된다.”[9] 합창단의 노래는 여러 음성의 교대로 나타나거나, 조형적인 춤사위를 통해 가시화된다.

마지막으로 낭만주의 시대에 이르러 서정시는 압운적인 측면이 강화되는 가곡으로 발전하고 이제 음악적 선율을 동반한다. 이런 가곡은 특수한 주관의 내밀성이 표현되는데, 이런 주관의 자기 내 복귀를 표현하기 위해 대화적 형태를 띄거나 서사적 요소를 강화하고(발라드나 소네트), 자기 부정적인 운동성을 가미하면서 극시적인 형태를 가진다.

낭만적 서정시인 가곡은 발라드와 비가를 넘어 마침내 세계 전체의 운동을 표현하는 철학적 시가로 발전하는데 그런 발전을 서술하는 끝에 헤겔은 실러의 시 ‘종의 노래’를 소개한다. 실러는 망아적인 상태로 빠져드는 디티람보스의 경우와 달리 “열광의 충동 속에서 대상의 위대성과 싸우지 않고 오히려 대상을 완벽하게 다루는 명인”[10]이었다.

 

낮은 지상의 삶 너머 높은 곳

창공에서 종이,

천둥의 이웃이, 울리매

별들의 세계에 닿으리라.

위로부터 한 소리가 있으리라.

그 창조주를 떠돌며 칭송하고

화관을 쓴 해를 인도하는

밝은 별무리처럼,

영원하고 진지한 사물들에만

쇠로 된 그 입이 헌정되리라.

그리고 매시간 빠른 진동과 더불어

접하리라, 종은 시간의 날갯짓을.

 

위의 시는 별무리가 지고 아침의 해가 떠오를 무렵 들리는 종소리를 표현한다. 시인은 이 종소리를 들으며 어떤 엄숙한 분위기에 사로잡히는데, 그는 이 엄숙함을 신들이 마침내 지상으로 내려오는 순간으로 이해한다. 이 신은 기독교 신이라기보다는 실러가 이상으로 삼았던 그리스의 신이며, 그것은 그가 바라 마지 않는 자유롭고 평등한 세상을 의미할 것이다. 실러는 이 종소리를 통해 신들이 지상으로 내려오면서 마침내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는 것으로 즉 ‘시간의 날갯짓이 시작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는 이런 시대, 신을 맞이하는 영원하고 진지한 인간의 출현을 고대하고 있다.


[1] 미학강의 3권, 452쪽

[2] 미학강의 3권, 453쪽

[3] 미학강의3, 456쪽

[4] 미학강의 3권, 456

[5] 미학강의 3권, 455쪽

[6] 괴테의 시 마왕은 슈베르트가 나중에 가곡으로 만들었다.

[7] 미학강의 3권, 472쪽

[8] 미학강의 3권, 475쪽

[9] 미학강의 3권, 475-476쪽

[10] 미학강의 3권, 46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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