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5-연극이냐 극시냐?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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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55-연극이냐 극시냐?

 

1) 연극이냐 시문학이냐

헤겔의 책 <미학강의>는 다양한 예술 장르를 다루고 있지만 그 가운데서 최근 미학적 발전에 크게 영향을 주었던 분야라면 단연 극시 이론이 아닐까 한다.

앞에서 소개했지만, 헤겔의 서사시와 극시의 구분은 루카치가 고대 서사시와 연극을 구분할 때 기본 개념을 제공했다. 더 나아가서 그의 비극론은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니체의 비극론과 대립하며 후일 벤야민이 고전 비극과 근대 비애극을 구분할 때, 고대 비극 개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또한 그가 고대 희극을 설명하면서, 제시했던 희극적인 것[komisch]과 우수꽝스러운 것[laecherlich]의 차이는 프로이트와 바흐친의 웃음 분석을 미리 예고하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헤겔의 극시 이론에 관해 들어가기 전에, 먼저 부딪히는 물음이 있다. 극시라는 이름 자체가 이미 극을 시문학 속에 분류한 것인데, 과연 그런 분류가 정당한가 하는 물음이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로 연극을 극시로 보고 시문학에 귀속시켰으니,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하다. 극시를 보통은 연극 또는 희곡이라 하는데, 여기서 연[演]은 곧 재연의 행위를 의미하고 희[戱] 역시 놀이 또는 ‘가상적인 것[虛]로서의 전쟁[戈]’이라는 행위를 의미한다. 이런 이름에서 보듯이 마치 음악이 소리를 질료로 하듯이 극도 행위를 질료로 하므로, 극은 문학이 아니라 독자적인 예술 즉 연극으로 분류되어야 마땅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대학의 경우 대부분 연극과가 따로 있거나 연극영화과로 묶여 있다. 둘 다 연기, 즉 재연의 행위라는 점에서 함께 묶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헤겔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연극을 극시로 묶어서 시문학 속에 집어넣은 까닭은 무엇일까? 과연 헤겔적 분류가 아무리 정통적인 분류라 하더라도 당연한가 따져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2) 언어적 재연

헤겔은 극시의 일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드라마는 표상[관념]하는 의식을 위한 것이다. 드라마 일반이 필요로 하는 것은 현재하는 인간의 행위와 관계의 서술인바, 이 서술은 행위를 표현하는 인물의 언어적 표출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극적 행위는 한 특정 목적의 무난하고 단순한 실행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충돌하는 환경들, 열정들, 성격들에서 기인하며, 또 이에 따라 작용과 반작용으로 이끌리는데, 이것들은 나름대로 다시 투쟁과 갈등의 종식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동적 성격들 및 갈등적 상황들로 개별화된 목적들의 자기 제시와 자기주장, 상호 표출의 순간에 생기는 서로에 맞선 개입과 규정, 또한 의지와 실행 속에서 얼키설키 충돌하다가 평온함으로 해결되는 이 전체적인 인간적 행태의 내적으로 정초된 최종 결과를 목도한다.”[1]

 

좀 길게 서술됐지만 요약하자면, 극시는 극적 행위와 그것에 반작용하는 행위, 그리고 양자의 갈등과 투쟁 그리고 해소라는 사건을 내용으로 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극시는 이런 행위와 그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자의 내면을 언어적으로 표출한다는 것이다.

사실 행위와 사건, 상황과 관련해서 극시는 지문을 통해 아주 간단하게 언급할 뿐이며, 실제 드라마 속에서는 상황은 무대의 배경을 통해 표현되고, 행위나 사건은 최소한으로 그저 암시할 수 있을 정도로만 표현될 뿐이다. 극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주인공의 독백과 상대 인물과 대화 또는 전체를 대변하는 합창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것은 극시에 등장하는 인물의 내면을 표현하는 것이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극시에서 언어가 표출되는 방식이다. 그것은 독백과 대화, 합창과 같은 언어의 직접화법적인 재연이다. 극시에서 배우는 무대 위에서 내면을 표출하는 언어를 재연한다. 그러므로 극시는 시문학이되, 재연의 문학인 것이다.

극시가 영화와 동일한 재연에 기초하더라도 양자가 구분되는 지점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만일 영화라면, 중요한 것은 사건이며, 이 사건을 일으킨 배우의 행위가 될 것이다. 영화는 이 행위와 사건을 재연하여 보여준다. 그러나 극시인 한에서 중요한 것은 행위와 사건을 일으킨 내면의 동기나 다른 행위에 대한 인물의 내적인 반응이다. 극시에서는 이런 내적 반응은 언어적 표출을 통해 재연한다.

 

3) 극적 행위

헤겔은 극시의 특징을 서사시와 서정시와 차이를 통해 좀더 부연하여 설명한다. 우선 서사시의 경우 극시와 같이 행위와 그로부터 일어나는 사건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다루는 방식이나 그 내용에서 서사시와 극시는 구별된다.

서사시는 행위와 사건 자체를 외적 관찰자의 시점으로 서술한다. 여기에는 전달자로서 화자가 개입하며, 사건이나 행위를 직접 재연하기보다는 간접(화법)적으로 서술한다.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서사시가 다루는 행위나 사건의 내용과 관련된다. 즉 서사시는 행위나 사건이 일어나게 된 다양한 계기들이 서술의 초점이 된다. 이 계기로는 주관의 내면에 못지 않게 그 사건을 일으키는 데 기여하는 외적이고 우연적 상황이 모두 서술된다. 서사시에서 그려지는 행위와 사건은 그 분지와 연관에 따라 관련된 세계 전체에 걸치게 된다.

그러나 극시의 경우 행위와 사건의 서술은 극적 행위라는 개념과 직결된다. 여기서 극적 행위란 곧 인물의 행위 가운데 그 규정성에 따라서 필연적으로 그것과 대립하는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대립은 다시 필연적으로 갈등과 대립을 끝내는 해소될 수밖에 없다.

극시는 이와 같이 극적인 전개과정에서 결정적인 행위와 사건에 집중되니 이런 극적 행위와 무관하다면 인물과 아무리 관련을 지닌 것이라 하더라도 그런 행위나 사건은 배제된다. 더구나 극시는 행위나 사건 자체의 외적이고 우연적 계기에 대한 서술보다는 행위와 사건을 일으키는 주인공의 내면을 표출하는 것을 위주로 하며 이런 인물의 내면조차 극적 행위와 관련된 한에서만 서술된다.

극시가 인물의 내면을 표출한다고 본다면, 서정시와 닮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서정시와 극시는 표현하는 내면의 내용이 서로 다르다. 서정시의 경우 표현하는 것은 주로 시인의 개인적 감정과 연관되는 것이다. 서정시는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 관념과 사유를 통해 객관화하여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 중심에는 시인의 감정이 존재한다.

하지만 극시가 표현하려는 것은 인물 내면 가운데 앞에서 말한 극적인 행위를 일으키게 된 내면을 말하니, 이 내면은 단순히 상황에 의해 수동적으로 엄습한 감정이나 자기도 모르는 열정에 그칠 수는 없다. 이 내면은 자기가 정당하다는 주장과 변호가 담겨 있으며, 상대방의 행동에 대해 비판하고 저항하는 내용이 담긴 것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극시가 다루는 인물의 내면은 ‘참된 것’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런 참된 것은 단순히 진리가 아니라 사회적인 요구, 권리, 당위를 담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므로 참된 내용, 진정으로 편재하는 작용인은 영원한 권능, 즉자대자적인 인륜성, 생동적 현실의 신, 한마디로 신적이며 참된 것이다.”[2]

 

헤겔은 이런 참된 것을 신적인 것과 관련시키는데, 여기서 신적인 것은 “고요한 권능, 신성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것[Gemeinde: 교회]”을 말한다. 이 공동체는 곧 그 시대 사회적으로 상호작용하는 개별적 의지의 총체성을 말하니, 마치 성령의 불길이 교인들에게로 갈라지듯이 극중에서 서로 대립하는 인물의 대립과 화해 속에서 자기를 구현한다. 이 공동체적인 것은 “인간적 개성의 내용과 목적으로서, 구체적으로 현존하고 실존하며 행위로 소환되고 운동하는”[3] 것이라 한다.

 

4) 인물의 파토스

서정시에서 감정을 표출하는 자아는 어디까지나 감정에 머무르고 만다. 그는 감정을 직관과 관념으로 표현하기는 하지만 그의 감정 자체가 그 자신이 행동으로 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다. 반면 극시에서 인물은 파토스를 지닌다. 그는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는 것을 행동으로 밀고 나간다. 그는 자신의 파토스에 철저하게 충실하며 어떤 저항에도 불구하고 단호하게 추진한다.

이런 파토스는 열정적인 것이니 시인이 가지고 있는 감정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는데, 시인의 감정은 아무리 격정적이라 하더라도 수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상황에 의해 억눌리면서 시인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극시에서 인물의 파토스는 능동적이다. 인물의 파토스는 그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것에 기초하며, 이런 정당성에 대한 믿음이 그의 파토스를 산출한다. 그런 한 극시에서 파토스는 능동적인 열정이라고 하겠다. 헤겔은 이런 능동적 파토스를 곧 ‘성격’이라고 규정한다.

헤겔은 극의 작가가 때로 서정시인처럼 주관적 파토스 즉 “사적인 고통이나 거친 열정, 또는 영혼의 화해되지 않는 내적 갈등을” “화해를 얻지 못한 상심과 제어되지 않는 분노”를 통해 관객의 감정을 불러일으키려 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 파토스는 “건전한 마음을 거의 감동시키지 못하며, 특히 참혹은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대신 차갑게 만들며” 하면서 “우리는 저민 가슴만을 느끼면서 얼굴을 돌린다고” 비판적으로 본다.[4] 심지어 헤겔은 많은 점에서 그가 존경해 마지 않는 괴테조차 이런 질풍노도식의 감정에 휩쓸린 연극을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극적 인물의 파토스는 객관적 파토스에서 나와야 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곧 능동적 파토스를 말한다. 여기서 인물이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파토스는 단지 인물 주관적 자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인물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에서 정당하다고 인정되는 원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이며 지속적이면서 심오한 극적 효과를 낳는 것은 오직 행위의 실체적 요소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정한 내용으로서는 인륜적인 것이며, 형식적으로는 정신과 성격의 위대함인데, 셰익스피어는 다시 이 위대함의 면에서도 걸출하였다.”[5]

 

즉 그것은 앞에서 말했듯이 참된 것이며, 공동체적인 것이다. 헤겔은 이런 점에서 그리스인을 찬양하며 또한 괴테보다는 오히려 근대 시민 연극을 만들어낸 실러를 더 높이 평가한다.

극시에서 중요한 것은 목적의 위대성에 못지 않게 그 목적을 추진하는 의지의 위대성이다. 여기서 고전적 극시와 낭만적 극시의 차이점이 등장한다. 고전적 극시의 경우 인물의 의지의 위대성은 자신이 정당하다고 믿고 있는 목적의 위대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낭만적 극시의 경우 인물의 목적은 셰익스피어의 연극이 잘 보여주듯 주관적 파토스일 수도 있다. 그것은 어리석음, 질투, 권력욕과 같은 우연적이며 특수한 열정인데, 이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열정이며, 그 자체로는 무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는 이런 열정을 그저 수동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한없이 극대화하여 추구한다. 그 결과 필연적으로 갈등과 대립을 빚어내고 다시 몰락하게 된다. 그럼으로써 근대 극시에서 인물은 다시 참된 것, 신적인 것으로 복귀하게 된다.

 

5) 극시의 시대

앞에서도 말했듯이 시문학은 관념을 질료로 하므로, 시문학은 이미 고대 상징주의 시대에 등장했다. 그러나 시문학은 형식적인 모범을 단연 고대 그리스에서 보여주었다. 이런 형식은 근대에도 이어지는 데 근대의 시문학은 내용의 측면에서 고대 시문학과 구별될 뿐이다.

형식의 완성이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시문학의 세 가지 장르는 그리스의 역사가 발전하는 단계에 따라서 출현했다. 서사시의 형식은 개인이 민족적 정신과 무의식적인 통일을 이루고 있던 영웅의 시대(대체로 BC 12-7세기)에 출현했다면, 서정시의 형식은 자아가 등장했으나 아직 실체의 힘에 눌려 행위로 나가지 못하고 감정에 머무르고 있는 시대(BC 7-5세기)를 배경으로 한다.

극시가 출현하기 위해서는 그 이상으로 시대정신의 성숙되어야 했다. 헤겔은 그 시대를 그리스 역사의 중 후기(BC 5세기)라 하였는데, 이 시대 그리스 도시는 성숙한 국가적 발전을 이루었으나, 아직 혈연이라는 자연적 실체로부터 국가는 완전하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리스 도시 국가에서 한편으로는 혈연의 원리와 다른 한편으로는 국가의 원리가 상호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 결과 도시국가는 아테네 민족이든 스파르타 민족이든 민족적 형식을 취하면서 그리스 전체의 통일을 이루지 못한 소 도시국가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제 개인은 자신의 내면을 지배하는 힘을 자각하는 “자유로운 자의식”을 가지며 이 힘을 단호하게 실행할 의지를 갖는다. 그러나 아직 그는 개인으로서 자립적인 존재가 아니며, 다른 모든 인간과 평등한 인격적 존재가 아니다. 그는 여전히 사회의 품 안에 있으니 그를 지배하는 힘은 곧 사회의 힘인 것이다. 개인은 이런 사회적 원리(즉 혈연의 원리와 국가의 원리)를 사회 속에서 자신이 처한 상황에 따라서 선택하니, 그의 선택은 자발적인 것이라기보다 그가 처한 상황에 의해 결정된 것이지만, 그는 이를 정당한 것, 당위 또는 의무로 간주한다. 그 정당성은 합리적인 방식으로 끌어낸 것이 아니라 관습적인 방식으로 존재하는 것이었다.

그리스 사회는 가장 성숙한 시기에조차 이런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으나, 바로 이런 그리스 사회의 고유한 특징 속에서 극시가 출현한 것이다.


[1] 미학강의 3권, 484-485쪽

[2] 미학강의 3권, 489쪽

[3] 미학강의 3권, 489쪽

[4] 미학강의 3권, 502쪽

[5] 미학강의 3권, 5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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