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미학산책57-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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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미학산책57-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의 그리스 비극론

 

1)

극시의 종류에 관해 헤겔은 희극과 비극, 그리고 희비극으로 구분하며, 역사적 발전에 따라서 고대에는 비극이 없었으니[1] 그리스(고전) 비극과 근대(낭만적) 비극으로 구분한다. 종류와 역사를 조합하면 네 가지 극시가 나오는데, 헤겔의 경우 모든 극시를 파악하는 전범은 그리스 비극이다. 여기서 변형하여 희극이 설명되고, 다시 고대적인 극시를 발전시켜 근대적인 극시가 설명된다.

이미 앞에서 그리스 비극를 전범으로 한 헤겔의 극시론을 소개했다. 헤겔의 극시론은 자주 아리스토텔레스의 극시론이나 니체의 비극론과 비교되는데, 여기서 이들의 입장을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2)

비극에 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의를 이해하기 위해 전반적인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즉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가 모방에서 나왔다는 데서 출발하여, 서사시와 비극이 모방 대상이나 모방 방식에서 차이가 있다고 한다.

서사시는 ‘우리들 이상의 선인’을 대상으로 하며, 주로 ‘서술체’이며 ‘장중한 운율(6보격)을 통해 전달된다. 반면 극시에서 비극은 ‘실제 이상의 선인’을 묘사하니(희극은 ‘실제 이하의 악인’을 묘사한다) 서사시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묘사의 방식은 ‘실연’이어서 서사시와 다르다. 비극의 언어는 대체로 운문으로 된(3보 또는 4보격) 대화와 노래로 구성된다.

비극은 “일정한 크기를 지닌 완결된 행동을 모방하는 데”에 있다. 여기서 비극은 ‘사건의 결합으로서’ 플롯을 가지고, 드라마적 형식을 취한다. 어떤 것이 드라마가 되기 위해서는 플롯상 반전이나 발견이 있어야 한다. 이런 플롯은 필연적이어야 한다. 행위는 인물의 “성격과 사상”에서 나와야 하며 행위는 필연적으로 반전과 발견[2]으로 이끌어져야 한다. 성격과 플롯 가운데 더 중요한 것은 플롯이다[3].

아리스토텔레스는 비극이 되기 위해서는 독특한 심리적 효과를 자아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른바 공포와 연민이라는 비극적 효과를 제시한다. 이 효과가 관객의 감정을 카타르시스 함으로써 관객은 비극을 즐기게 된다는 것이다.

 

3)

이상 소개된 전반적 논의에서 플롯을 지닌다는 것과 심리적 효과를 낳는다는 것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핵심을 이룬다. 그는 두 가지 주장 가운데 후자 즉 심리적 효과를 더 중요한 것으로 간주한다. 그의 철학이 전반적으로 목적론적(기능주의적)이고, 그것은 비극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이므로 그런 선택은 그로서는 불가피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좋은 비극이 되기 위해서 그 심리적 효과가 플롯 즉 구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야 한다.

 

“공포와 연민의 감정은 장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고 사건의 구성 자체에 의하여 환기될 수도 있는데 후자가 더 훌륭한 방법이며 더 훌륭한 시인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4]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롯이 공포와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는 몇 가지 규칙을 제안한다. 우선 “덕과 정의에서 탁월하지는 않는”[5] 따라서 관객과 유사한 정도의 사람이 불행을 겪게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람만이 관객으로부터 연민을 얻을 수 있다. 둘째로 보통 사람에게서 가장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사건은 바로 “친근자(가까운 혈연) 사이에 일어나는” “살인이나 이와 유사한 행위”[6]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보통 사람이 이런 공포스러운 사건을 저지르게 되는 데에 어떤 필연성을 상정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 때문에 그는 이런 사건이 그에게 일어나는 데에는 어떤 우연성이 개입한다고 말한다[7]. 이 우연성은 작품마다 다양한데, 에우리피데스의 메데아가 자기 자식을 죽이는 것은 분노이며,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하는 것은 무지 때문이다.

 

“덕과 정의에 있어서 탁월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을 당한 인물이 곧 그러한[비극의] 인물이다.”[8]

 

비극의 전개 과정에서 우연성이 강조되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에서 인물의 성격이 지니는 파토스적 측면이나 비극이 결말에 이르러 생겨나는 해소의 측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결여된다.

 

5)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경험을 통해 귀납적으로 전개했기에 설득력을 지니지만, 그 가운데 이미 그의 목적론적 철학이 노골적으로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게 바로 비극을 심리적 효과로부터 설명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심리적 효과를 강조하다 보니, 비극적 사건이 일어나는 원인은 우연성이나 과실에 두고 말았으니, 결과적으로 비극의 극적인 전개에서 일어나는 필연성을 간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후일 사건의 우연성이 강조되는 근대 비극에 전범을 주었다고도 할 수 있겠으나 고대 비극에 대한 충분한 설명인가는 의심스럽다. 이 점은 헤겔이 고대 비극에서 사건이 전개되는 필연성을 강조했다는 것과 대비된다.

헤겔은 극적 전개의 필연성을 강조하기 위해 우선 등장인물이 아리스토텔레스처럼 보통의 인간이 아닌 영웅적 인물로 삼았다. 그는 개인적 목적이 아니라 실체적 목적을 수행하며 자신의 실체적 목적이 지닌 의무, 법, 정당성을 확고하게 믿으면서 일체의 주저 없이 단호하게 수행하는 영웅이다. 그런 실체적 목적은 그의 자연적 태생이나 주변 환경과 생동적으로 통일되어 있다. 바로 이것이 비극적 영웅의 파토스이다.

또한 그런데 그리스 시대 인륜적 실체 자체가 두 대립하는 원리로 분열되어 있어서, 영웅이 수행한 행위는 필연적으로 자신과 대립하는 실체적 원리를 침해하며 그 결과 필연적으로 그것에 대립하는 행위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그 결과 행위는 필연적으로 충돌을 일으키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스스로가 자기가 맞서 싸우는 것의 위력 속에 있으며, 그들 자신이 자신의 고유한 실존에 적합하려면 의당 존중해야 마땅할 바로 그것을 침해한다.”[9]

 

또한 헤겔은 이런 충돌이 필연적으로 다시 해소되는데, 왜냐하면 본래 인륜적 실체 자체가 두 대립하는 원리의 상호 균형을 통해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서로 대립하는 극단적 행위는 서로 충돌하면서 서로 해소되어 균형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적 성격은 자신이 알지 못하거나(또는 그 정당성을 파악하지 못한) 원리를 침해한 것에 대해 자신의 무지를 들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는다. 그는 범죄를 저지르지만 그 범죄는 오히려 그에게서는 영예이다. 그는 정당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인은 자신의 무지에 의해 행위한 것도 비록 그의 고의나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인 한, 그에 대해 책임을 진다[10]. 그러므로 관객은 범죄를 저지르는 성격적 개인의 파멸에 대해 차라리 경탄하는 마음을 지니게 된다.

 

‟편파성은 지양되어야 한다면 개인은 하나의 파토스로서 행동했던 한에서, 희생되고 제거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이다. 왜냐하면, 개인은 단지 이 하나의 [파토스적인] 삶이기 때문이다. 이 개인이 이런 하나의 [파토스적] 삶으로서 독자적으로 확고하게 타당하지 않는다면 그 개인은 이미 파괴된 것과 다름 없다.”[11]

 

헤겔은 비극에서 사건의 필연성을 강조하는 반면,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의 일차적 본질로 삼은 공포와 연민이라는 효과에 관해서는 별로 말이 없다. 헤겔은 아리스토텔레스와 달리 한편으로 영웅의 행위 자체가 나름대로 실체적 원인을 가지므로, 관객 역시 그 목적에 공감하면서 연민을 불러일으킨다고 말한다. 반면 영웅의 행위에 대립하며 영웅을 파멸시키는 것 역시 하나의 실체적 목적이기 때문에 관객은 그 앞에서 공포감을 느낀다.

전반적으로 볼 때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의 주인공은 보통 사람이고 헤겔의 비극론에서 주인공은 파토스적인 인물이라는 점이 양자의 결정적 차이점이라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론은 당대의 비극에 대한 직접 경험에 기초한 만큼 비극을 설명하는 데 설득력을 지닌다. 반면 헤겔의 비극론의 전제가 되는 파토스적 인물과 실체적 대립은 그가 항상 고대 비극의 모범이라 생각하는 안티고네나 오이디푸스와 같은 제한된 비극에는 탁월한 설명력을 지니지만 그런 설명이 나머지 대부분의 비극에도 적용될 것인지는 문제가 있다.


[1] 헤겔에서 극시는 개인적 자아가 성숙한 이후 등장하니, 아직 개인의 자아가 출현하지 않은 고대에는 극시가 없다.

[2] 반전과 발견은 비극에서 대립이 충돌로 발전하고 다시 해소되는 전환을 의미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예를 든다. 반전의 예: 오이디푸스에서 사자가 오이디푸스의 신분을 밝힘으로써 오이디푸스를 기쁘게 하려 했지만, 오히려 오이디푸스의 죄가 드러난다. 발견은 무지의 상태에서 지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인데, 오이디푸스에서 오이디푸스가 아버지를 살해한 자라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말한다.

[3] “비극의 제1원리 또는 비극의 생명과 영혼은 플롯이고 성격은 제2위인 것이다.” (시학, 53쪽)

[4]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천병희 역, 문예출판사, 1976, 84쪽

[5] 시학, 78쪽.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덕한 자가 불행해지거나, 악한 자가 행복해지는 것 또한 극악한 자가 불행해지는 것은 모두 연민의 감정을 불러일으킬 수 없다고 한다.

[6] 시학, 85쪽

[7] 시학, 90쪽 참조

[8] 시학, 78쪽

[9] 미학강의3, 555쪽

[10] 법적 책임은 고의성이 전제된다. 하지만 정치적 책임은 고의성을 넘어서 그에게서 나온 것이라면 무엇이든 책임지게 되니, 그리스 비극에서 죄와 책임의 문제는 정치적 책임에 가깝다고 보겠다. 비극의 주인공은 대체로 정치적 지도자, 영웅이니 법적 책임을 넘어 정치적 책임을 진다는 생각은 당연하다고 보겠다.

[11] 미학강의3, 55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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