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데올로기』1·2(2019), 『정신의 오디세이: 자유 의지의 역사』(2021) 등을 저술한 전 동아대 철학과 교수 이병창 회원이 영화와 소설, 철학 등 광범위한 문화 비평을 담아내는 코너이다.

헤겔 미학 산책2-예술의 과거성 테제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미학 산책2-예술의 과거성 테제

 

1)

헤겔 미학과 관련해 가장 뜨거운 논제는 예술의 과거성 테제일 것이다. 헤겔은 미학강의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 예술의 아름다운 시절과 중세 후기의 황금시대는 사라졌다[sind voruber].” (미학강의1, 30쪽)[1]

“최상의 규정이라는 면에서의 예술은 우리에게 과거의 것[Vergangenes]으로 존재하며 또 그렇게 남아 있다. 이로써 예술은 우리에 대해 진정한 진리와 생명성도 역시 상실했으며[verloren], 예전의 필연성을 현실 속에서 주장하여 한층 높은 지위를 점하기보다는 오히려 우리의 표상 속으로 그 자리를 옮겼다.”(미학강의1, 30쪽)

 

이런 구절에서 헤겔은 ‘사라졌다’ ‘과거의 것’ ‘상실했다’는 표현을 반복함으로써 소위 예술의 과거성[vergangen] 테제가 출현하게 되었다. 예술의 과거성 테제는 고전주의 시대인 그리스 예술작품에서 미가 완성되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고전주의의 미적 작품은 예를 들어 그리스 조각 작품에서 보듯이 예술의 내용인 이념을 이상화 된 감각적 현존을 통해 표현한다. 이렇게 이상화 하는 가운데 고전적인 아름다움 즉 조화와 비례가 갖추어진다. 이 조화나 비례는 아름다움의 정점이었다.

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작품은 예술의 퇴락이다. 낭만주의 예술작품 가운데 인정할 만한 게 있다면 고전주의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예를 들자면 르네상스 시절의 종교화나 괴테의 고전주의적 작품이 그렇다. 그 외에는 뭐 볼 게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성 테제는 예술의 시대는 그리스 고전주의 이후 지나갔다고 주장한다. 

 

2)

이 과거성 테제는 헤겔 미학 강의 텍스트 자체에 대한 논쟁으로 발전했다.[2] 이 논쟁에서 핵심은 위에서 언급한 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달려 있다. 과거성 테제를 찬성하는 사람은 곧 헤겔이 그리스 예술을 이상화하는 고전주의자라고 보고 위의 말을 과거성 테제로 해석한다.[3] 이에 반대하는 사람은 헤겔의 위의 말은 헤겔 미학을 편집한 편집자 호토의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과거성 테제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힘들다. 굳이 낭만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중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의 탁월함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헤겔 역시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나 네델란트 풍속화를 칭찬하는 데 결코 인색하지 않으며, 더구나 회화나 음악, 시문학은 낭만주의적 예술 장르라고까지 주장한다. 중세 이후 낭만주의 예술을 부정한다면, 지금 남아있는 대부분의 고전과 핵심적 예술 장르를 버려야 할 지경이다.

 

3)

호토가 헤겔을 왜곡했는지는 제쳐두고 위에서 언급된 ‘지나갔다’는 헤겔의 발언조차도 엄밀하게 살펴보면, 과거성 테제로 해석하기 어렵지 않을까? 위의 구절에서 ‘최상의 규정이라는 의미에서의 예술’이 사라졌다고 할 때, ‘최상의 규정’이라는 말의 의미가 문제가 된다. ‘최상의 규정으로서 예술’은 고전주의 미학자들이 믿듯이 그리스 예술이 인류의 최고 예술이라는 의미로 본다면 과거성 테제가 출현하게 된다.

그러나 이 말은 절대정신을 대변하던 예술이라는 의미로 보아야 할 것이다. 헤겔은 그리스 시대는 예술이 종교나 철학을 제치고 절대정신을 대변했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판단의 구체적 근거로 그리스 신화조차도 호머의 서사시를 통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거론하기도 한다. 그렇게 본다면 과거성 테제는 예술이 절대정신을 대변하던 그리스 시대가 지나갔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이후 그리스 시대보다 더 탁월한 예술이 나오기도 했지만 절대정신을 대변하는 자격에서 예술은 이제 철학에 자리를 양보하게 되었다는 말이 될 것이다.

그리스 시대, 예술이 절대정신을 대변하는 이유에 대해 주목해야 한다. 헤겔은 이 시대 예술의 내용이 되는 신은 곧 민족신이라고 규정한다. 민족신은 그 이전 자연신의 단계를 벗어나기는 했지만 아직 각 민족에게 고유한 개별적 신이다. 개별적이라는 것은 곧 감각적인 것과 같은 말이니 헤겔은 그리스 신이 개별 신이기에 외적인 감각적 현상으로 출현할 수 있다고 본다.

신 자신이 민족신으로서 감각적으로 현상하므로 감각성에 머무르는 예술이 이 시대에 종교를 제치고 지배적인 절대정신이 된다. 하지만 이런 민족신을 이해하는 데 사유가 필요한 것이 아니므로 철학이 아니라 예술이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한다는 주장이다. 비유하자면 산수 정도는 초등학생이 가장 잘한다는 뜻이다.

 

4)

그런데 문제가 여기서 끝나는 것은 아니다. 낭만주의 시대에도 예술이 여전히 ‘진리와 생명성’을 주장하려면 이 시대 예술의 가능성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이 문제가 헤겔의 미학을 이해하는데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왜냐하면 어떻게 보면 이 시대 예술은 근본적인 난관에 부딪히기 때문이다.   

헤겔의 역사관에서 중세 이후 근대까지 이어지는 주관성의 시대이다. 이 시대 예술이 곧 낭만주의 예술인데 낭만주의 예술의 내용이 되는 것은 유일하며 보편적인 기독교 신이다. 그 신은 감각적 현실을 초월하는 신이다. 이 신은 우상숭배금지의 원칙에서 보듯 자신을 감각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을 거부하는 신이다.

초월적 유일 보편 신을 어떻게 감각적 예술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을까? 헤겔이 낭만주의 예술의 특징을 특징성에 두었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다. 이런 특징성란 곧 셰익스피어의 희극의 주인공이 지닌 것과 같은 권력욕(맥베스) 질투(오델로) 등 주관적 성격을 말하는데, 이런 특징성 자체가 아름답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이 특징성이 예술의 원리가 될 수 있는 것일까? 여기서 추가 예술의 원리가 된다는 주장으로 나가기도 하지만 추가 예술의 한 요소는 몰라도 기본 원리로 인정되기는 어렵다.[4]

설혹 괴테나 실러의 고전주의적인 작품에서 보듯이 그리스적 예술작품의 흉내를 내더라도, 우선 우수꽝스럽다. 미켈란제로가 예수의 모습을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의 모습으로 표현했을 때 생각해 보라. 그리고 낭만주의적 인물이 기독교적 신을 표현하는 한에서는 여전히 우상숭배 금지의 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니, 아마도 후일 성상 파괴 운동에서 보듯이 교도의 도끼 아래 파괴되고 말지 않을까?

그렇다고 예술이 감각을 떠나 개념을 사용하거나 불립문자와 같은 방식으로 수수께끼적으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을까?

 

5)

헤겔은 낭만주의가 표현하는 신이 초월적 신일뿐만 아니라 인격신이라는 데서 모든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 인격신이라는 말은 곧 신이 우리 눈앞에 자신을 직접 계시한다는 말인데, 계시된 신의 존재가 곧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신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그는 무상의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비로소 사람들은 그가 곧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신의 탄생과 죽음은 신의 인격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여기서 감각적 예술의 가능성이 생겨난다. 즉 낭만주의 시대 예술은 신의 인격성과 마찬가지로 감각적 현상이되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어야 한다. 헤겔은 이를 곧 가상이라 규정한다.[5] 낭만주의 예술의 근본적 원리는 바로 감각적 가상이다.

헤겔은 예술은 이념의 가상이라고 규정하는데, 이 가상이라는 개념이 본격적으로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낭만주의 예술에 와서이다. 이집트 예술은 신을 수수께끼와 같은 상징으로 표현한다. 그리스 신은 이상화 된 현상으로 출현한다. 낭만주의 시대 신은 자기 부정이라는 가상을 통해 출현한다. 예술의 개념 즉 이념의 가상이라는 개념은 상징과 현상을 거쳐 가상에 이르러 자기를 실현한다. 그러니 헤겔에서 예술은 고전주의가 아니라 낭만주의에서 완성된다고 하겠다.

 

5)

예술이 낭만주의에 와서 완성되었다고 하더라도, 예술이 낭만주의 시대 절대정신에 대한 유일한 표현이거나 최고의 표현은 아니다.

인격신은 가상을 통해 표현되더라도, 감각적으로 표현되는 한 한계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예수의 탄생과 죽음은 사실 신이 현현하는 모습인데, 인간의 눈에 그저 자연적인 탄생과 죽음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면서 달을 보지 않고 손가락만 보는 경우이다. 헤겔이 예술이 ‘진리와 생명성을 상실했다’라고 말할 때 그것은 감각성이 지닌 이런 한계를 뜻한다. 

그러므로 낭만주의 시대에 헤겔은 인격 신을 표현하는 절대정신의 대변자로서 자격을 철학에 넘겨준다. 철학은 추상적 사유가 아니라 자기반성적인 사변적인 개념을 통해 인격 신을 표현할 수 있다. 이제 심지어 예술은 진리를 알고 있는 철학의 반성 대상이 되어 그 자리를 앞에서 인용 귀절에서 말했듯이 ‘표상 속으로 옮기니’ 여기서 ‘예술에 대한 학문’으로서 미학이 출현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술이 죽은 왕의 후궁처럼 구중 궁궐에 숨어 지내야 한다 말은 아닐 것이다. 우선 철학이 인격신을 사변적으로 표현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이다. 사변적 개념에 기초한 철학은 헤겔 철학에 와서야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이전 추상적 사유에 기초한 철학 즉 근대철학보다는 차라리 예술이 낫다. 왜냐하면 예술은 비록 한계는 가지지만 가상을 통해 인격신을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사변철학이 등장하여 인격신을 표현하더라도, 이런 사변철학은 일반인이 이해하기 힘들다. 헤겔이 정신현상학 서문에서 말했듯이 사변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중들에게 사변철학보다는 예술이 훨씬 쉽게 인격신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지 않을까?

그렇다면 낭만주의 시대 끝에 이르러 사변철학이 등장하고 마침내 인격신의 비밀이 대중적으로 폭로된다면 예술은 어떻게 되는가? 헤겔은 낭만주의 예술형식의 발전 끝에 예술 자체의 종언을 제시한다. 이것은 흔히 과거성 테제로 오해되기도 하지만 사실은 다른 논제이니 추후 살펴보기로 하자.


[1] 헤겔, 미학 강의 1, 이창환 역, 세창, 2020

[2] 헤겔은 1818년 하이델베르크 대학에서 미학을 처음 강의한 이후, 베를린 대학에서 1821 겨울, 1823년 1826년 1828년 겨울 네 번에 걸쳐 강의했으나 자신의 강의를 출판하지 못하였다.

1831년 헤겔 사후, 헤겔 강의록 출판의 흐름 속에서 헤겔의 미학강의도 출판되었다. 미학강의는호토[H. G. Hotho]가 처음으로 1835년 편집하여 불멸자의 친우판 전집으로 발간했고 1842년 개정했다. 호토는 헤겔 자신의 베를린 시대 23년 강의 수고와 자신의 필기록을 대조하여 편집했다.

20세기 초 헤겔 부흥운동 중 1911년 이후 라슨 판 전집이 발간되는 가운데 라슨이 1931년 미학강의를 재편집하였다. 라슨은 1826년 강의의 필기록을 참조로 하여 호토의 판을 살펴본 결과, 호토가 생략하거나 표현을 왜곡한 부분이 다수 발견되어 재편집하였으나, 서문과 1부의 발간에 그쳤다.

그 이후 이어지는 헤겔 전집에서는 즉 70년대 수어캄프 판이나 펠릭스 마이너판까지 모두 호토판에 기초하였다. 1971년 부브너[R. Bubner]는 호토판을 불신하면서 라슨이 편집한 것을 재편집하여 미학강의를 단행본으로 출판했다. 안네마리 게트만 지페르트는 호토 판을 불신하면 강의 필기록에 기초하기를 주장했다. 니콜라스 헤빙[Nicholas Hebing]이 편집하여 2015년 발간된 헤겔 서고 판(펠릭스 마이너 출판사)은 제목조차 미학 강의가 아니라 예술철학 강의[Vorlesungen ueber die philosphie der Kunst]로 바꾸었고, 호토의 편집을 불신하고 강의 필기에 기초하여 편집조차 21년(미학), 23년(예술철학), 26년(예술철학). 28년(미학) 강의록이라는 방식으로 전개했다. 

현재 한국에서 번역된 두행숙 번역판(나남, 1996)이나 이창환 번역판(세창, 2022)은 모두 1970년 발간된 수어캄프 판 미학강의를 번역한 것이다. 헤겔의 강의 필기록은 개별적으로 번역 출판되었다. 서정혁은 미학강의-베를린 1820/21(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3). 한동원은 헤겔 예술철학(미술문화, 2008), 권정임은 헤겔 예술철학 1826년 강의(세창, 2023)을 출판했다.

[3] 이 논쟁에서 최근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을 들라면 G. S 안네마리를 들 수 있겠다. 그의 주장을 간단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①호토판 미학강의는 헤겔을 왜곡했다. ②여기서는 헤겔을 고전주의자로 간주하면서, 고전주의 예술작품에서 미의 이상은 완성되었다고 본다. ③중세 이후 고전적 이상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르네상스 종교화와 고전 음악 정도이다. ④중세 이후 등장한 낭만주의 예술작품은 특징적인 것에 몰두하는데 이는 미적 이상으로부터의 후퇴이다.

안네마리는 호토판 헤겔미학을 혹독하게 평가하면서, 헤겔의 미학강의에 관해서는 학생들이 남긴 필기록을 복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1826년 강의 필기록에 주목하는데, 이에 따르면 헤겔의 미학적 관점은 앞에서 제시된 것과 전혀 다르다.

①고전주의 시대 예술이 표현하려는 절대정신은 민족신이었으나, 낭만주의 시대 절대정신은 기독교적 신 즉 내재하는 신이다. ②헤겔 미학에서 상징주의, 고전주의, 낭만주의는 이념이 현존하는 방식의 차이를 주장한다. 각각에 고유한 미적 이상이 존재한다. ③고전주의는 미적 이념이 아름답게 현존하는 방식을 말한다. 낭만주의에서 미적 이념은 이념과 감각적 현존이 불합치하는 추의 방식으로 출현한다. ④구체적으로는 예를 들어 쉴러의 드라마에서 등장하는데, 주인공은 윤리적 의도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좌절되면서 범죄자로 전락한다.

[4] 그러나 헤겔에서 낭만주의 예술 형식을 파악하는 것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호토의 헤겔 미학강의가 왜곡되었다고 비판하는 안네마리조차도 이 점에서 분명하지는 않다. 그는 고전주의가 아름다운 감각적 현존을 제시했다면 낭만주의 예술형식은 추의 형식을 제시했다고 말한다.

무엇이 예술에서 추일까? 안네마리는 미가 이념과 감각적 형식의 조화, 합치라고 한다면, 추는 이념과 감각적 형식 사이의 부조화라고 한다. 하지만 이념이 어떤 형식이라도 갖는다면, 미와 추를 논할 수 있겠지만, 기독교 신은 이념은 아예 감각적 형상화가 거부되니, 무엇이 미이고 추인지를 알 수 없다. 

중세 고딕 신상을 보면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은 왜곡되고 과장되어 있다. 하지만 르네상스 시절 신의 모습은 그리스 조각상처럼 이상화되어 있다. 전자가 낭만주의 예술이라면 후자는 낭만주의 예술이 아니란 말인가?

[5] 가상[Schein]이나 현상[Erschein]이나 똑 같이 빛난다[scheinen]는 말에서 나온다. 하지만 현상은 직접적인 것에 머무르며, 가상은 자기부정적인 것이다.


» 다음 글: 헤겔 미학 산책 3-고대예술과 근대예술 논쟁

헤겔 미학 산책 1-미에 관한 철학이 가능한 것일까?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헤겔 미학 산책 1-미에 관한 철학이 가능한 것일까?

 

1)

헤겔은 미학강의 서문에서 들어가자 마자, 미학이라는 학1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지금 대학에 미학과가 있으니 굳이 그 가능성을 문제 삼을 필요가 없지 않을까? 생각해보면, 매우 흥미로운 문제가 아닐까 한다.

예를 들어 미와 유사한 멋이나 맛의 학문이 가능할까? 물론 맛의 기술과 멋의 디자인이 전공[discipline]으로서 가르쳐지고 있으니, 학문이 아니라 할 수는 없지만, 헤겔에게 물어보았다면 아마 맛과 멋의 학문은 없다고 했을 것이다. 왜 헤겔은 멋이나 맛에는 학문이 성립하지 않지만 미에는 학문이 성립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일까?

 

2)

헤겔은 미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으로 두 가지를 거론한다. 우선 예술은 생존이 걸린 문제가 아니라 맛과 멋처럼 일종의 잉여라는 주장이다. 예술은 진지함이 결여된 유희, 오락에 가까우니, 이를 위해 학문적 연구의 노고를 기울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우선 예술이 쓴 약에 감초를 넣듯이 예술이 감성과 경향성을 통해 이성과 의무의 부담을 덜어주니 그런 봉사 수단으로서의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대표적으로 쉴러 같은 철학자는 예술은 진리를 감성적인 것을 통해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주장했다. 헤겔은 그런 주장이 못마땅하다. 헤겔이 보기에 이는 이성과 의무가 지닌 순수성을 더럽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헤겔은 예술이 유희나 오락이라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예술의 신성함을 옹호한다. 즉 종교나 철학과 마찬가지로 절대정신에 속하는 등근원적인 것이라 한다. 예술은 절대정신의 감각적 현존으로서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만 종교와 철학과 차이를 가질 뿐이다.

절대정신의 표현 방식에서 시대에 따라 예술, 종교, 철학 가운데 어느 하나가 지배적인 지위를 차지할 수 있다. 그리스 시대 절대정신은 주로 예술을 통해 표현되었으니, 그리스 신화는 헤시오도스와 호머의 예술작품을 통해 창조됐으며 철학은 아직 예술의 생동성과 풍요로움을 따라갈 수 없었다.

현대 포스트모더니즘에 이르게 되면 예술은 기꺼이 장식이 되고, 오락과 유희가 되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헤겔은 예술에 너무 과도한 가치를 부여했을지 모르겠다. 반면 모더니즘 예술가들은 예술이 그 자체로 사회의 혁명이며 인류의 구원이라고 생각하면서 예술을 신성시했다. 반 고흐의 예에서 보듯이 그들은 예술을 위해 자신의 삶 전체를 내던지기도 했으니 헤겔의 주장에 눈물지을지 모르겠다.

헤겔은 왜 예술에 절대정신이라는 엄청난 의미를 부여했을까? 절대정신이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한데, 이 점은 문제로만 제기하고, 미학이 불가능하다는 두 번째 주장을 살펴보자.

 

4)

두 번째 주장은 미학이 필요하더라도 다루어지는 대상의 성격상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런 주장은 미적 작품은 공통적으로 감각적 질료적 성격을 가진다는 데서 나온다.

예술작품에는 이런 성격이 들어 있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건축이나 조각 회화 음악은 물질적 수단을 이용하니 말할 것도 없다. 비물질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문학도 추상적인 것을 지칭하는 개념적 언어보다는 구체적인 것을 지칭하는 감각적 언어가 사용된다.

예술작품의 질료가 되는 감각적 자연은 개별적이며 우연적으로 움직이다. 더구나 예술 작품은 자연적 산물에 머무르지 않고 자유롭게 산출되는 판타지로 가득 차 있다. 판타지는 자의적이니, 어떤 법칙적 규제도 이성적 목적에서도 벗어난다. 이런 예술작품에서 학문의 기초가 되는 규칙적인 것이나 합목적적인 것을 찾으려 한다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 연목구어(緣木求魚)가 아닐까? 그러니 예술작품은 학문적 연구의 대상으로서 자격 자체를 갖지 못하지 않을까?

사실 예술에 관한 많은 담론은 그저 주변적인 사실에 대한 소개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언제 누가 어떤 동기로 이 작품을 만들었고, 누구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고, 뒤에 어떤 영향을 남겼다고 얼마에 팔린다는 둥, 자질구레한 사실을 많이 알수록 훌륭한 비평가로 행세하는 것이 현실이다. 거기에 약간의 주관적 감상이 덧붙여지는데, 좋았다는 감탄을 얼마나 다양하게 표현하는가가 훌륭한 비평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헤겔은 예술작품이 감각적 질료를 가진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미학의 가능성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예술 작품의 감각적 질료는 예술의 내용인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형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예술작품은 경험적 실재인 자연산물과 같이 직접적으로 존재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우연과 혼돈의 지배 아래 있겠다. 하지만 예술작품은 자기 스스로를 통해서 자기를 부정하면서 절대정신을 표현하는 가상2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물론 예술작품의 가상성은 하나의 암시에 지나지 않으며 표면적으로 작품의 감각적 질료적 성격은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예술작품은 항상 수수께끼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나 그럼에도 예술작품은 어떤 경우라도 이런 암시가 감추어져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가상이다.

역설적이지만 헤겔은 예술작품의 가상성 때문에 미학의 가능성이 펼쳐진다고 본다. 예술작품의 자기 부정성을 통해 진리인 절대정신이 드러나니, 이를 통해 예술작품은 우연성을 벗어나 필연성으로, 경험적 실재를 넘어서 진리의 세계로 들어가게 된다. 예술작품이 단순한 감각적 자연이나 판타지가 아니라 자기 부정적인 가상이므로 오히려 학문적 연구의 대상이 될 충분한 자격을 가진다는 것이다.

 

5)

이런 점에서 헤겔은 예술작품을 역사와 비교한다.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 속에는 역사의 의미 즉 시대정신이 드러나 있다. 마찬가지로 감각적 예술작품에는 작품의 의미 즉 절대정신이 드러난다.

동시에 헤겔은 두 가지를 엄밀하게 구별한다. 역사의 경우 예를 들어 나폴레옹에게서 보듯이 구체적 사건을 일으키는 행위자는 자기 행위의 진정한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행위 했을 뿐이다. 그 행위는 보이지 않는 방식으로 역사적 목적을 달성한다.

그러나 예술작품에서 작가는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자각적으로 노력한다. 그는 자기 작품 속에 다양한 방식으로 작품의 의미를 새겨놓는다. 그 때문에 작품은 가상성을 띠게 되는데, 관객이나 독자는 작품의 감각적인 측면을 따라가더라도 그 작품 속에 놓여 있는 작가의 암시에 따라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된다.

작가가 작품 속에 어떻게 그런 암시를 새겨놓는가 하는 방식이 곧 장차 미학이 다루어야 할 대상이다. 이런 방식이 곧 예술작품의 역사적 형식과 장르의 개념을 이룬다. 헤겔의 미학 강의는 곧 이런 역사적 형식과 장르의 개념을 전개하는 데 있다.

 

6)

절대정신과 가상성이라는 두 개념은 헤겔 미학의 핵심 개념인데, 미학의 가능성을 설명하다 어느덧, 헤겔 미학의 기본 개념을 언급하게 되었다. 그 의미는 앞으로 상세하게 다루기로 하자. 마지막으로 오늘날 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테제가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간략하게 언급하기로 하자.

오늘날 포스트모더니즘은 미학의 불가능성이라는 문제를 헤겔 당시보다 더 심각하게 제시한다. 헤겔 당시에는 진리나 가치의 인식 자체가 부정된 적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 후기구조주의의 등장 이후 진리나 가치의 인식 자체가 회의되고 있다. 미의 영역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서 진리나 가치가 사라졌으며, 예술은 기꺼이 오락이 되고 여흥이 되었다. 예술은 삶의 풍요한 잉여가 되기를 지향한다. 예술은 상품화되었다. 이런 사태 앞에서 미의 가치를 논하고 미와 진리의 관계를 논한다는 것 자체가 불필요해진 것이 아닐까?

1980년 이후 신자유주의 시대 전성기를 누린 포스트모더니즘은 오늘날 후퇴하는 것으로 보인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자체가 위기에 부딪히면서 다시 진리와 가치에 대한 열망이 되살아나고 예술을 신성시했던 모더니즘이 부활한다. 이런 흐름에서 본다면 헤겔의 미학을 살펴보는 것도 하나의 대안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 다음 글: 헤겔 미학 산책 2-예술의 과거성 테제

호퍼와 정신분석 7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7

 

1)

앞에서 언급한 서로 대조되는 두 그림은 당시 호퍼의 관음증과 노출증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의 나르시시즘과 더불어 상상적 동일화의 증상이다. 호퍼에게서 등장하는 관음증과 노출증은 다양한 형태로 변형되지만 항상 그림의 모델은 조로 보인다. 

 

물론 조와 다른 인상을 주는 여성도 있지만, 사실 그런 차이는 중요하지 않다. 모두가 조라고 해도, 그 의미는 다르다. 여성은 실제 조가 아니라 호퍼의 어머니이거나, 호퍼 자신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우선 아래 그림을 보자.

 

결혼하기 전 1921년 그려진 또 하나의 그림을 보자. 역시 방안에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창가에 있기는 하지만 창 밖을 바라보지는 않는다. 그녀는 재봉틀에 몰두하고 있다. 그녀는 붉은 벽을 배경으로 옆모습으로 관찰되고 있다. 붉은 색 바탕에 흰색과 노란색이 섞여 전체적으로 따뜻한 느낌이 든다. 그녀는 긴 머리와 눈부신 흰 속옷을 입고 있다. 왼쪽에 화장대가 보이는데, 화장대의 크기가 압도적으로 크다.

 

일에 몰두하거나 책을 읽거나 아니면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은 자기 내에 되돌아가 완결된 안정적인 모습이다. 그녀가 란제리 차림으로 있다는 것은 지금 호퍼가 숨어서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장대의 거대한 크기를 생각해 보면 역시 팔루스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그림 안에 반쯤 들어와 있다. 그림의 시선은 관음증적이지만 노골적이거나 자각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니 마치 아이가 어머니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아이는 일에 몰두한 어머니가 자신을 보아주기를 갈망한다.

1921년 뉴욕 실내라는 작품이다.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녀는 검은 방문을 배경으로 등을 돌리고 있다. 손 동작을 보건대 아마도 드레스를 꿰메는 것으로 보이는데, 누군가 뒤에서 그녀를 훔쳐보고 있다. 아직 결혼 전이니 아내 조의 모습은 아니다. 힌트는 앞에 걸려 있는 반쯤 만 보이는 희미한 사진에 있을 것 같다. 그 사진 속의 인물을 정확하게는 알아볼 수는 없지만 남자의 얼굴이다. 사진 속의 남자는 드레스를 입은 여성을 바라본다. 호퍼의 관음증적 시선을 잘 보여주는 그림으로 보인다.

2)

이어서 같은 해 그려진 에칭화를 보자.

 

제목이 ‘저녁의 바람’이다. 여성의 신체 모습이나 머리칼의 모습은 결혼 전인데도 조와 닮았다. 결혼 전이니 조를 모델로 하기보다, 호퍼가 늘 마음 속에 품은 여성의 모습이다. 긴 머리칼과 약간 작은 키, 약간 마른 살집, 이 특징은 결국 호퍼 자신의 어머니의 모습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저녁이니 햇빛은 없다. 창문 밖은 이미 약간 어두울 텐데, 호퍼는 이 부분을 생략하여 마치 환한 그러나 달빛처럼 은근한 빛이 들어오는 것처럼 보인다. 그림 왼편에 탁자가 보이고 그 위에 팔루스적 형상을 지닌 주전자가 어둠 속에 흐릿하게 놓여 있다.

 

여성은 옷을 벗고 침대에 들어가는 순간인데, 밖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커튼이 상당히 심하게 흔들리고 있으니 바람이 상당히 세게 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을 생각할 때 밖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여성의 마음이 내면에서 느끼는 욕망을 의미할 것이다.

 

욕망에 흔들리는 여성의 모습, 그것은 ‘아침 11시’에 등장한 여성의 모습과 같이 노츨증적인 증상을 드러낸다. 두 여성은 모두 벌거벗고 있으며, 창 밖을 바라본다. 거기에 있는 것은 자신의 시선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거기에 있어야 할 것 즉 자기를 바라보기를 바라 마지 않는 어떤 시선이다. 여성은 안타까이 그 시선을 기다리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그 시선은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할 것이다.

 

3)

호퍼의 상상적 동일화의 증상은 점차 절망에 빠지면서 자폐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더 이상 그는 이제 자기 밖을 보지 않는다. 자기 속의 내면에 갇히게 된다. 20년대보다 30년대 호퍼의 그림은 더 절망적이고 주인공은 거의 자폐적이다. 이는 30년대 미국의 대공황에서 받은 심적인 타격을 그린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동시에 호퍼 자신의 욕망 구조에서의 절망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1931년에 그려진 그림이다. 호퍼는 여행을 좋아해 여행을 암시하는 소재를 많이 그렸다. 이 그림의 제목이 ‘호텔 방’이니, 이 여성도 여행을 떠나왔을 것이다.

 

벽 기둥을 가운데 두고 그림은 둘로 나뉘어진다. 반쯤 열린 창문을 통해 보면 캄캄한 밤이다.

그림 오른편에 소파는 녹색인데, 호퍼의 그림에서 자폐적인 모습은 자주 이런 녹색으로 표현된다. 여름의 밝고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가 소파에 걸쳐있지만, 가방은 풀지도 않은 채 닫혀 있다.

 

왼편에는 침대가 있고 여성이 걸터앉아 있다. 그녀는 호퍼가 좋아하는 긴 머리와 달리 파마머리다. 여성은 내의 차림으로 침대에 걸터앉아 있다. 내의가 붉은 색인데 상당히 에로틱하다. 아마침대로 올라가 잠들기 전일 것 같다.

 

그녀는 어떤 접힌 종이, 아마 브로셔를 펼쳐 읽고 있다. 여행 안내서나 기차 시간표일까, 아니면 호텔의 안내문일까? 그녀의 얼굴빛으로 보면, 그녀는 이 브로셔를 읽는 것 같지 않다. 그저 손에 들고 있을 뿐 어떤 생각에 잠겨 있는 듯하다.

 

그녀의 얼굴은 어둡게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어 우리를 놀라게 한다. 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누구를 만나러 왔으나, 만나지 못한 것일까? 더욱 놀라운 것은 실내등의 빛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는 밝은 빛이 그녀를 비추고 있다. 마치 성스러운 듯한 빛이 그녀를 감싸지만, 그녀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진 것 같다. 이 밝은 빛과 참담한 그녀의 얼굴 사이의 대조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4)

여행이란 어딘가에 있을 그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것은 창 밖에서 무언가를 찾으려는 모습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 자신을 바라보아야 할 실재를 찾는 것이다. 그녀는 그저 창 밖에서 찾는 것에 멈추지 않고 행동에 나서 여행을 떠난다. 어딘가에 그것은 분명히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낯선 도시에 이르러 그녀는 절망에 빠진다. 지금껏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 대체 어디로 가야 하나, 마음 속으로 생각하지만 알 수가 없다. 그녀가 찾으려는 그것 즉 실재는 실제로는 없다는 말인가? 절망에 빠진 그녀는 자신의 기억 속의 대상으로 되돌아 가려 한다.

 

그녀를 에워싼 그 환한 빛은 밖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녀의 내부 기억에서 나오는 빛일 것이다. 이 그림에서 그녀의 생각에 잠긴 모습은 이제 한 걸음 더 나가면, 기억에 사로잡힌 자폐적인 모습으로 변화될 것이다.


« 이전 글: 호퍼와 정신분석 6

호퍼와 정신분석 6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6

 

1)

앞에서 1924년 호퍼가 조와 결혼한 이후, 호퍼와 조의 욕망 구조는 상상적 동일화의 관계로 규정했다. 이 상상적 동일화는 다채로운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 핵심은 자기에 대한 나르시시즘적 관계이다. 이 나르시시즘은 자기를 어머니가 사랑하는 대상, 즉 팔루스로 간주하는 것인데 호퍼의 등대 그림이 그런 나르시시즘을 잘 보여준다.

 

상상적 동일화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모습이 소위 부인이라는 모습이다. 이는 한편으로 자기가 어머니의 사랑 대상이라는 사실을 믿으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이를 부인하며, 자기가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았다고 믿는 것이다. 믿음과 부인은 끊임없이 전전반측하면서 주체를 이원적으로 분열시킨다.

 

이런 부인의 모습은 상상적 동일화의 여러 증상에서 공통적으로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페티시즘이나 조울증이며 그에 못지 않게 관음증과 노출증 역시 이런 부인의 기제에 속한다.

 

2)

등대 그림과 같은 시대 즉 1920년대 호퍼의 그림에는 그의 관음증을 보여주는 그림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방안의 여성을 그린 그림이다. 이런 그림에는 두 가지 유형이 있다. 하나는 밖에서 창문을 통해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보는 그림이다. 다른 하나는 방안의 여성이 창문 밖으로 그림 안에는 등장하지 않는 무언가를 바라보는 그림이다. 대표적으로 아래 두 그림을 비교해 보자.

 

 

이 그림은 1928년 그려진 ‘밤의 창문’이라는 그림이다. 이 그림에서 시선은 창 밖의 어둠 속에 머무른다. 그 시선은 창을 통해 밝은 빛이 비치는 방안을 들여다본다. 방안은 아찔하도록 밝은 노란 빛이 반사하고 있고 그 가운데 붉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마치 냉장고에 무언가를 꺼내는 듯한 등을 구부린 채 서 있다.

 

오른쪽 창문을 통해 보이는 물체는 형태가 모호하여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은 여성이 입은 가운과 같은 색조인 밝은 붉은 색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 놀라운 것은 왼쪽 창문에서 흰색의 커튼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다. 보통은 바람이 밖에서 방안으로 부는데 이 커튼은 방 안에서 밖으로 흔들리고 있다. 커튼의 흔들림은 마치 안으로 들어오라는 듯이 유혹한다.

 

그 때문에 붉은 가운을 입은 채 등을 구부린 여성의 모습은 에로틱한 환상을 불러일으키면서, 관음증의 대상이 된다. 관객은 어둠 속에서 숨어서 숨을 삼키며 방안의 여성을 들여다볼 것이다.  바로 이 관객의 시선은 원래 호퍼의 시선이 아니었던가?

 

3)

 

이 그림은 1927년의 ‘아침 11시’라는 작품이다. 앞의 그림과 제목부터 대조된다. 앞의 그림이 깊은 밤이라면, 이 그림은 늦은 아침이다. 여기서 아침의 밝은 햇빛이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바람은 잔잔한 듯 커튼의 창가에 그저 늘어져 있을 뿐이다. 짙은 푸른 색 소파에 앉은 여성은 벌거벗은 채, 창 밖을 바라본다. 이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가 없다.

 

방안은 붉은 색, 푸른 색, 노란 색 등이 어울려 상당히 생동적이고 화려한 느낌을 준다. 이 그림에서 시선을 끄는 것은 벌거벗은 여성이지만, 그에 못지 않게 시선을 끄는 것이 있다. 바로 왼쪽의 탁자 위에 있는 전등이다. 여성의 나체를 에워싼 밝은 색과 불이 꺼진 전등의 어두운 붉은 색이 대조되며, 여성의 신체가 지닌 크기에 비해 본다면 전등의 크기가 상당히 과장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과장된 실내등의 모습은 전형적으로 팔루스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고 봐도 되지 않을까?

 

뒤의 그림에서 여성의 체형이나 머리칼의 모습을 볼 때 모델이 아내인 조이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앞의 그림에서는 여성의 뒷모습만 보이지만 신체의 체형은 상당히 젊은 여성으로 보인다. 아마도 자기의 집에 있는 아내 조의 모습을 집밖에서 시선으로 그린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그림은 몇몇 해석자가 설명한 것처럼 호퍼가 고가 전철을 타고 가다가 창문을 통해서 본 낯선 여성의 모습일 수도 있지만, 그림에서 시선의 위치가 고가 전철보다 높아서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났을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4)

두 가지 그림이 모두 아내 조를 모델로 하였지만 실제 그 의미는 전혀 다르다고 하겠다. 앞의 그림은 관음증적인데, 관음증의 표면적 대상은 다르지만 그 대상의 궁극적 의미는 곧 자신의 어머니이다. 그는 지금 프로이트가 말한 원초적 장면을 훔쳐보고 있다. 그는 이 장면을 보고 또 보지만, 그는 확신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가 본 장면을 그는 스스로 은폐하기 때문이다. 즉 부인의 기제가 여기서도 작동한다.

 

뒤의 그림에서 여성은 자신을 노출하고 있다. 관음증의 대상은 오히려 은폐된다. 이런 은폐가 시선을 자극한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벌거벗은 여성은 관음증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노출증의 증상으로 볼 수 있다. 이 경우 그림 속의 인물은 자신을 누군가의 사랑의 대상으로 보여주려 한다. 즉 자신의 육체를 무기로 타인의 시선을 끄는 것이다.

 

그림 속의 여성이 바라보고 있는 그림 밖의 무엇인가는 그녀의 시선의 대상이라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고 있을, 그리고 바라보기를 바라는 어떤 타자이다. 이 타자는 누구일까? 여성의 노출증에서는 그녀의 아버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이 그림처럼 남성인 호퍼가 그린 여성이라면, 이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할 것이다. 호퍼는 그림 속의 여성과 자신을 동일시하고 있다. 이런 동일시는 앞에서 ‘여름 실내’라는 작품에서 침대에서 미끌어 떨어진 여성에서도 등장했다. 호퍼는 연애에서 실패한 자기를 이 여성에 투영하였던 것이다. 그림 속의 호퍼가 그 자신을 의미한다는 사실은 이 벌거벗은 여성의 뒤에 놓여 있는실내등이 암시하지 않을까?

이 여성이 곧 호퍼 자신이라면 자신을 바라보아 주기를 그토록 바라 마지 않는 대상은 곧 어머니가 될 것이다. 그림의 주인공은 그의 어머니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을 것이라고 믿고  창 밖에서 그 시선을 찾고 있다. 어딘가 있겠지만,  아무리 찾아도 찾을 수는 없다. 여기서도 부인의 기제가 작용하기 때문이다.


« 이전 글: 호퍼와 정신분석 5

» 다음 글: 호퍼와 정신분석 7

호퍼와 정신분석 5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5

 

1)

앞에서 20년대 후반 호퍼의 욕망 구조에 대해 언급했다. 다리, 망사르 집, 등대 그림 등에서 보듯이 실재로 가는 길은 차단되었고 그는 이에 대응하여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실재로 다가간다.

그런데 바로 이 시기는 호퍼의 생애에서 어쩌면 가장 행복했을 수도 있는 신혼기였다. 호퍼는 1924년 9월 같은 동료 화가인 조(Josephine Nivison)과 결혼했다. 그리고 1925년 삽화가로서 상업적 활동을 포기하고 그림에 전적으로 몰두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그의 그림이 팔리기 시작했다. 이런 시기에 그가 상상계적인 동일시에 빠졌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

호퍼 자신의 전기를 통해서 그의 욕망 구조를 짐작해 내는 일은 어려운 일이다. 호퍼의 생애에서 그런 부분에 관한 연구는 없다. 그런데도 몇 가지 흔적을 발견할 수 있는데, 우선 눈에 뜨이는 것은 그의 부모이다.

 

2)

호퍼의 부모는 침례교도로서 상당히 경건한 삶을 했다고 알려진다. 부모는 결코 강압적이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호퍼의 관심을 격려해주었다. 그럼에도 호퍼의 부모의 청교도적인 태도는 호퍼에게 강한 영향을 남긴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1906 이후 3년간 파리에서 생활했다. 그 당시 미국에서 파리로 온 예술가들은 파리의 모더니스트 예술가들의 무정부적인 삶에 휩쓸려 들었다. 호퍼는 파리의 인상주의 그림에 상당한 영향을 받았음에도, 파리의 예술가들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는 부모가 정해준 집과 미술관을 오가며 혼자서 인상파의 그림을 습득했다고 알려진다.

무엇보다도 그가 나중에 자신이 살았던 집과 유사한 집을 그리면서 이름을 청교도라고 붙인 데서 이런 청교도적 영향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이 집은 흰색 나무 판넬로 이루어진 단순한 맞배 지붕 형태이며, 이런 집은 후일 호퍼의 그림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3)

호퍼의 그림에서 파리 시절 초기에는 거의 유일하게 인상파적으로 밝고 경쾌하며, 붓터치가 자유로운 그림이 그려졌다. 파리 이전 습작기에서나 1909년 그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 이후 어느 때나 그의 그림은 무겁고 어두우며 이제 붓터치를 알 수없이 평면화 된 색채가 지배하게 된다. 파리 시절 이 경쾌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왜 미국으로 돌아왔을 때 다시 어두워졌을까?

그가 막 미국으로 돌아왔던 시기에 그린 그림 ‘여름 실내(Summer Iinterier: 1909)’는 그의 마음에서 무언가 중대한 사건이 일어났다는 것을 암시해 준다. 이 그림에서 왼편의 짙은 갈색의 침대를 제외하고는 모든 부분은 상당히 밝은 색조를 이루고 있다. 그 한 가운데 이불보와 함께 침대에서 바닥으로 미끄러진 한 여성이 있다.

그녀는 상의만 걸치고 하의는 벗은 모습이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숙이고 있어 얼굴은 윤곽만 보이지만 오뚝한 콧날이 인상적이다. 얼굴은 검게 칠해져 마치 뒤로 묶은 머리카락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는 무언가 충격을 받았으며, 그 앞에서 무기력하게 내팽개친 모습이다.

 

4)

대체 이 여성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꿈을 꾸다가 침대에서 떨어진 듯하다 볼 수도 있는데 상의를 걸치고 있다는 것이 그에 어울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누군가 그녀를 덮친 이후 갑작스럽게 떠난 것인가? 검은 얼굴은 그렇다고 말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침대를 제외한 나머지 밝은 색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제목은 ‘여름 실내’인데, 이 제목으로 보면 호퍼의 삶에서 여름에 어떤 사건이 일어난 것으로 보인다. 이 그림은 호퍼가 실연 이후의 심정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시기 호퍼는 독일에서 온 한 여성을 사귄 것으로 알려진다. 호퍼는 그녀에게 상당한 애착을 느낀 듯한데, 그녀는 호퍼에게 깊은 감정은 없었고, 그러기에 쉽게 떠나고 말았다. 한 두 번 편지 교환이 있었던 모양이지만 더 이상 관계는 발전하지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그림을 보면, 그림에서 미끌어진 여성은 호퍼 자신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호퍼는 독일계 여성과의 관계에서 자신이 무기력하다는 것을 느꼈던 것이 아닐까? 호퍼가 육체적으로 무기력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호퍼의 무기력은 호퍼에게 여성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심적으로 억압하는 기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 그는 상당기간 극복할 수 없는 무기력에 사로잡혀 있었다고 그의 친구 Walter 는 말한다. 

“[그는] 며칠 동안 이젤 앞에 앉아서 불행감을 느끼며 손가락을 들어 주문을 깰 수도 없는 상태에서 살았다”

 

5)

여기서 호퍼의 욕망 구조를 추측해 보자. 호퍼는 청교도 가정에서 심적 억압을 느꼈다. 그것은 거꾸로 그만큼 그의 마음의 표면 아래서 실재의 욕망이 일렁거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시절만해도 그의 의식계는 어느 정도 균형을 유지하면서 어둡기는 했지만 그래도 평온한 상태였다.  파리 시절 호퍼가 앞에서 말한 연애에 빠졌을 때, 그의 욕망 구조는 가장 안정적이었다. 이때 경쾌하고 밝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나 호퍼의 실연은 그에게 심적인 충격을 주었고 그 때문에 그럭저럭 유지되어온 그의 상징세계는 균열하면서 이런 균열의 틈 속으로 마그마와 같은 욕망, 실재에 대한 욕망이 분출하기 시작했다. 분출하는 실재에 대한 욕망 앞에서 그가 취한 태도가 곧 상상적인 동일화이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에서 기괴할 정도로 솟아 있는 망사르 집이 실재에 대한 욕망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1927년 ‘등대 언덕’에서 그려진 솟구친 등대는 상상적 동일화를 의미한다.

그의 욕망 구조가 상상적 동일화 단계로 진입하는 시기 1924년 호퍼는 조와 결혼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42살이고 동갑이니 호퍼보다 조가 상당히 늦은 나이에 결혼한 것으로 보인다. 호퍼와 조의 관계는 욕망 구조의 측면에서 본다면 부부의 욕망 관계로 받아들이기에는 석연하지 않는 점이 눈에 뜨인다. .

 

6)

호퍼와 아내의 관계를 아주 잘 보여주는 사진이 있다. 이 사진은 호퍼의 친구인 사진가가 1960년에 찍은 사진이다. 이 집은 호퍼가 바닷가 South Truro에 그가 직접 지은 집이다. 이 사진에서 호퍼는 무척이나 확대되어 있고 반면 조의 모습은 뒤쪽에 아주 조그마한 크기로 등장한다. 마치 그의 등대 그림에서처럼 거대한 조는 위압적이다.

이 그림을 보면 호퍼는 마치 압도적인 가부장적 존재이고 반면 조는 그에 종속되어 존재감 자체가 희미하게 보인다. 하지만 이 사진의 진정한 의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조가 뒤에서 아이와 같은 호퍼를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호퍼는 아이와 같고, 조를 어머니처럼 따른다. 조가 없으면 호퍼는 짜증을 내면서 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호퍼는 사춘기 소년이 항상 그렇듯이 자기 자신을 압도적 힘을 지닌 존재로 확신한다. 하지만 그의 확신은 그의 배후에 그의 어머니가 그를 지키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니, 이 관계를 라캉적인 용어로 설명하자면, 곧 상상적인 동일화의 심적 구조에 속한다고 하겠다.


« 지난 글: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 다음 글 : 호퍼와 정신분석 6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1)

호퍼가 망사르 지붕을 한 집을 그렸던 것은 대개 192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 호퍼의 그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또 한 번 끌어당기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등대 그림이다. 이 등대는 호퍼가 자주 여행을 갔던 메인주 바닷가에 세워진 등대이다. 이 등대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등대의 뒷면은 절벽이다), 호퍼는 대체로 아래에서 언덕 위를 쳐다보는 시각에서 등대를 그렸다. 이렇게 등대를 그린 그림 가운데 온라인에 소개된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 거의 광적인 집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27년 그려진 ‘등대 언덕(Ligthouse Hill)’의 경우, 등대로 올라가는 언덕은 왼쪽 위에서 햇빛을 받아 명암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이런 일렁거리는 파도가 화면의 아래쪽 반을 차지하고, 그 위에 투명한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등대지기가 사는 집과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집의 어두운 그림자가 진 박공 면이 등대를 마주보고 있다. 집은 좀 축소된 듯하며, 등대의 밝게 햇빛을 받는 측면이 집에 마주 서 있는데, 이 등대는 상당히 우람하다는 느낌을 준다. 등대의 위쪽 창문이 닫혀 등대 불빛은 보이지 않지만 불빛을 암시하는 듯 노란색이다. 등대지기의 집과 등대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마치 다정한 관계이듯 언덕 위에 서 있다.

 

2)

1929년 그려진 ‘the lighthouse at two lights’(두 개의 빛에 비친 등대, 그림에서 하나의 빛은 햇빛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등대 불빛으로 생각된다.)에서 호퍼는 앞의 등대 그림과 마찬가지로 밑에서 언덕 위의 등대 집과 등대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방향은 앞의 그림과는 반대방향이다. 햇빛도 이번에는 석양인데, 화면의 오른쪽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명확한 명암을 등대와 집에 만들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일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언덕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또 석양인지라 붉은 색조가 전체, 심지어 푸른 하늘조차 감돌고 있다.

 

멀리 마치 망원경으로 본 듯, 중간의 언덕 부분은 잘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등대와 등대지기의 집만이 클로즈업된 셈인데, 앞의 그림에서 등대와 집이 균형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등대가 창공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오른다. 반면 집은 마치 내려 앉은 듯하다.  등대에서는 위압감조차 느껴진다.

 

3)

두 그림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무래도 등대로 보인다. 호퍼는 등대를 우람하게 위로 치솟는 방향으로 그렸다. 누구 보기에도 등대의 우람함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눈으로 본다면 우람하거나 위압적인 등대는 거대한 팔루스를 상징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리라.

 

등대 그림은 망사르 지붕을 한 집 그림과 대비된다. 앞에서 망사르 집은 호퍼에게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의 그림에서 실재로 다가가는 길은 점차 차단되면서 실재가 불러내는 매혹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등대 그림에서 팔루스가 거대해진 것은 실재로 다가가려는 호퍼의 욕망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팔루스는 호퍼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런 동일시를 상상계적인 욕망으로 설명한다. 그의 거대함의 진실은 실재로 가는 길의 불가능성이니,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호퍼는 이 차단된 길을 넘어 가고 있다.

등대 그림에서 호퍼의 욕망은 마치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과도적으로 보이는 다리의 모습처럼 과잉적이다. 그것은 실재에 가 닿기보다는 실재를 지나치며, 그러기에 다시 돌아와 새로이 실재에 다가간다. 호퍼는 실재에 다가는 새로운 길을 바로 이런 상상계적인 동일시, 거대한 팔루스를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 지난 글: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3 – ‘망사르 지붕’

 

1)

앞에서 호퍼의 그림에 나오는 다리를 살펴보았다. 호퍼의 다리는 결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호퍼에게 이 다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이다. 다리는 어디론가 건너가는 것이며, 그곳으로 향하기 위해 죽음과 같은 강물을 건너가야 한다.

 

그런데 이 다리는 어디로 건너가는 것일까? 그림에서 호퍼가 다리를 건너 이르는 곳은 다름 아닌 집이다. 1909년의 ‘왕궁 다리’나,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보이듯이 그 집은 주로 망사르 지붕을 한 집으로 나타난다.

 

2)

망사르 지붕이란 17세기 프랑스 바로크 양식을 대표하는 지붕이다. 이 망사르 지붕은 19세기 말 부활하여, 제국주의 양식의 일부가 되어, 이 시기 상류층의 저택이나 호텔에서 차용되었다. 아마도 미국에서도 시골 농장주나 도시 부르주아의 저택이 주로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망사르 주택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 고립적으로 존재하면서, 한 두 창문을 제외하고는 굳게 닫혀 있어서, 매우 침울한 모습을 하고 있다. 1909년 ‘왕궁 다리’ 그림이 그려질 시기만 해도, 이 왕궁으로 가는 다리는 안정적으로 펼쳐져 있었다. 1913년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주택으로 접근하지만 그 힘은 너무 과도하여 이미 지나친다.

 

20년대 이르면 이제 이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냉혹하게 차단되고 마니, 이 시기 이후 집은 주변의 환경으로부터도 고립되면서 마치 꿈 속에서나 나타날 것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취하게 된다.  1925년 그려진 ‘철로 가의 집’을 보자.

 

이 그림에서 화면의 하단을 가로지르며 녹슨 철로와 둔덕이 지나가면서 그 너머에 있는 집으로 접근하는 것을 차단한다. 그 너머 망사르 지붕을 주택은 시각적으로 약간 왜곡되어 있다. 전체의 왼편보다 오른쪽 편이 약간 확장, 돌출하여 있다. 시선이 오른쪽 위쪽에 놓여 있는 듯한데, 반면 햇빛이 그림의 왼쪽으로 들어오면서, 시선의 방향과 충돌한다.

 

창문은 모두 닫혀 있고, 이층의 햇빛을 받는 쪽의 창문 하나가 반쯤 열려 있다. 전체적으로 녹슨 철로의 붉은 색과 대조되는 망사르 지붕의 짙은 녹색은 황량한 느낌을 주고 있다. 이 집은 아마 현실 속에 실제로 있는 집 같지 않다. 주택의 이런 왜곡된 모습은 어쩌면 환상 속에 있는 듯하다.

 

3)

1927년 그려진 ‘도시’라는 그림에서 화면의 오른쪽 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망사르 지붕을 한 호텔이다. 이 호텔은 실제 크기보다 더 크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그림의 왼편 아래쪽에는 텅 빈 광장이 있고 행인의 모습은 지극히 축소되어 점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림의 왼편 위쪽에는 1950년대 세워졌을 법한 빌딩, 수평적인 빌딩과 수직적인 빌딩이 교차한다. 이런 빌딩은 오른쪽의 호텔에 비해 상대적으로 위축되어 보인다.

 

빌딩이나 망사르 호텔의 어느 창문도 검고 닫혀 있어 그 안을 볼 수 없다. 다만 호텔의 2층 시선이 가는 바로 앞의 창문은 전체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게 밝은 색으로 차양이 내려져 있다. 이 부분을 제외하면 그림의 전체 색조는 대체로 우중충하게 탈색된 듯하여 전체적으로 황량한 느낌을 준다.

 

호퍼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이런 망사르 주택(저택이나 호텔)은 다리와 마찬가지로 형태상 아름다움의 느낌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도 호퍼가 여러 번 반복하여 이런 집을 그리는 까닭은 무엇일까?

 

이 집은 아마도 사회적 관점에서도 해석할 수 있겠다. 망사르 지붕의 집은 아마도 미국 시골의 농장주나 도시의 중소 부르주아의 저택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 미국이 급속하게 자본주의화하면서, 과거 농장주와 중소 부르주아는 몰락하기에 이르렀을 것이니, 호퍼에게 아마도 향수를 불러일으켰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호퍼 그림 전체에서 목가적인 향수가 주제로 된 적은 없으니, 이런 사회적 관점도 적절한 해석이 되지는 못한다.

 

이 집이 호퍼에게 지닌 의미를 이해하는 것이 호퍼의 그림에 접근하는 통로를 마련해 줄 것으로 보이는데, 그 단서는 쉽게 발견되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에게 하나의 힌트가 주어져 있다. 그것은 히치코의 영화 사이코이다.

 

그의 영화에도 망사르 지붕을 한 주택이 출현한다. 언덕 위에 고립적으로 솟아 있는데, 이 집은 아래쪽 모텔의 주인인 남자가 살고 있는 집이다. 영화는 마지막에 이르러 이 집의 비밀을 폭로한다. 남자는 자기 어머니를 살해하고 그 유골을 지하실에 보존한다. 그리고 그 일정한 때가 되면 스스로 자기 어머니로 변신한다. 그 때란 곧 그가 외부의 다른 여자에게 욕망을 느낄 때이다. 그는 자신이 욕망을 느낀 여자를 어머니의 이름으로 살해한다.

 

영화에서 히치코크는 실재계에 사로잡혀 있는 주인공 남자의 심리를 표현하기 위해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주택을 내세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망사르 지붕의 집이 호퍼를 사로잡았던 이유도 바로 이런 실재에의 고착이 아니었을까?

 

3)

집이 어머니를 상징한다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 집은 고향이며, 어머니이고 유년의 시절이고 자궁이다. 그렇다면 호퍼도 이런 망사르 지붕을 한 부르주아 또는 농장주의 저택에 살았을까? 그렇지는 않다.

 

호퍼의 부모는 중산층이고,  독실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 실제 호퍼가 살았던 집은 그의 그림 ‘퓨리턴’에 나오는 것과 같은 집이다. 단순한 맞배 지붕으로 이루어지고 백색의 나무 판넬로 지어진 집이다. 그런데도 호퍼가 이렇게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집착한 이유는 무엇일까?

 

망사르 집의 특징은 아무래도 지붕 밑 다락방에 있을 것이다. 약간 상상해 보자. 내가 어릴 때 살았던 집은 단층 기와집이었다. 부엌의 위쪽에는 다락이 있었다. 안방에서 다락으로 들어가는 구조였지만, 나는 학교 시절 자주 책을 들고 혼자 다락방에 올라 책을 읽었다. 주로 소설책이었다.

 

그렇게 다락방에 머무르는 시간은 어머니의 자궁에 들어 있는 것과 같은 고요함과 아늑함을 느낄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그런 기억을 생각해 보면, 망사르 지붕을 한 집에 호퍼가 심리적으로 꽂힌 이유도 짐작되지 않을까?

 

망사르 지붕을 한 고립된 집은 호퍼에게는 곧 실재이다. 그는 이런 실재계의 흔적을 전반적으로 황량하게 보이는 집에 암시했다. 그것은 유독 눈길을 끌도록 하는 붉은 색 굴뚝이나 밝은 색깔의 차양이다. 호퍼는 때로는 과잉적으로 지나치기도 하고, 때로는 차단되어 다가가지 못한다. 이 집은 끊임없이 호퍼를 매혹하며, 차단된 저 너머에서 그에게 손짓한다.  호퍼의 의식이 접근하지만 끝내 접근하지 못하는 그것은 즉 실재이다.


» 다음 글: 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 지난 글: 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

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 [흐린 창가에서 – 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 2 – ‘다리’

 

1)

시기적으로 볼 때 1906년 호퍼가 뉴욕 미술학교를 졸업한 이후, 1924년 호퍼가 상업적 삽화가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그림에 전념할 때까지 흔히 호퍼의 독창적인 그림이 형성되는 준비 기간으로 간주된다.

 

이 시기 초반 1906년부터 1911년까지 세 차례 프랑스에 건너갔는데 그때마다 오래 머무른 것은 아니며 당시 파리에 모여든 예술가들과 다양하게 교제했던 것도 아니지만, 이 시기를 그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모더니즘의 예술에 상당히 깊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다. 특히 이 시기에 남겨진 그림에는 밝고 경쾌한 색깔이 주조를 이루고 사물의 형태는 흔들리면서 순간적이며 자유로운 붓질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1911년 이후 미국 뉴욕에 거주하면서 한편으로 그는 삽화가로서 밥벌이를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독창적인 그림에 이르기 위하여 분투하였다. 그의 그림은 곧 어둡고 무거운 색깔이 짙게 깔리고 사물의 형태는 확고하게 자리잡았다. 이제 그의 그림에서 붓질의 흔적이 거의 발견될 수 없는 정도에 이른다.

 

호퍼는 이와 같이 인상파적인 그림 기법을 벗어나면서 자신의 독창성에 이르게 되지만 그런데도 이 파리 시기부터 호퍼가 관심을 가지는 그림의 소재는 다른 유럽 모더니스트 화가와는 단적으로 구별된다.

 

2)

호퍼가 이 시기부터 상당기간 지속적으로 관심을 지녔던 소재 중의 하나가 ‘다리’이다. 그는 파리의 세느강을 가로지르는 여러 다리를 그렸을 뿐만 아니라(대표적으로’파리의 다리’1906 ‘왕궁 다리’1909), 미국에 건너와서도 대표적으로 ‘퀸스보로우 다리’(1913)를 그렸으며, 다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심지어 1946년 그린 ‘도시로 다가가면서’라는 그림에서도 남아 있다.

 

그 중 우리의 시선을 일차적으로 끄는 것은 파리의 다리(1906년)이다. ‘파리의 다리’는 파리에 처음 도착한 직후에 그린 것이어서 아직 프랑스적 영향이 보이지 않는다. 이 그림에서 색깔은 호퍼의 초창기 그림에서 나오는 짙고 어두운 색이며, 우람한 다리의 교각과 강변의 산책로만 보인다.

 

왼쪽 끝에는 두 그루의 튼실한 나무 그루터기가 보이며 다리 밑을 흐르는 강물이 오른쪽에 조금 눈에 뜨인다. 그림을 가득 채운 것은 아치형 다리이다. 다리 밑은 어둠이 깔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가운데, 산책로 난간과 교각 아래 부분만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이 그림에서 다리의 형태적 아름다움을 찾으려는 시도는 헛된 것일 것이다. 호퍼는 이 다리를 어떤 이유로 그렸던 것일까? 이상하게도 전체와 어울리지 않은 붉은 색 원반의 도로 표지가 다리 교각을 향한 왼쪽 시선을 가로막는다. 이런 표지판이 다리 아래 산책로에 서 있어야 할 이유는 없다. 아마 이 표지판은 호퍼가 환상을 통해 그림 속에 집어넣은 것이 틀림없다.

 

붉은 표지판은 통과를 금지하는 신호이니, 그것은 무언가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듯하다. 다리 자체가 접근을 금지하는 것일 수는 없다. 다리는 어딘가로 건너가는 것이니, 그렇다면 이 표지판이 금지하는 것은 바로 이 다리가 건너가는 그곳을 의미하지 않을까? 그런데 1906년의 이 다리 그림에서는 이 다리가 어디로 건너가는 것인지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3)

이런 의문 때문에 우리는 다리를 그린 다른 호퍼의 그림도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게 된다. 파리 시기 호퍼는 여러 다리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파리의 다리란 다리는 모두 그린 것이 아닐까 싶은데, 그 가운데 하나 1909년 왕궁다리를 보자. 그림 ‘왕궁 다리’는 왕궁(과거 불탄 왕궁의 남은 부분인데, 지금은 김나지움 건물로 쓰인다)과 이어지는 다리이다. 앞의 두 다리와는 달리 전반적으로 인상주의적인 색갈이나 붓질이 지배적이지만 여기에서조차 다리 자체는 그렇게 흥분할 만한 심미적 아름다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왼쪽의 다리는 오른쪽에 솟아있는 왕궁과 대조되어 있으며 전체적으로 왕궁의 압도적인 무게를 고려하자면, 구도상 다리가 주는 무게는 상당히 약하다. 그래도 이 그림에서 다리는 오른 편으로 약간 기울어져 약간의 속도감을 느낄 수 있다. 그림의 하단은 세느 강물이 흐르고 있다. 강물은 색깔이나 형태에서 생동감을 주기보다는 조용하다. 심연처럼 시퍼렇지도 않고 상당히 흐리지만 밝은 색이다. 다리는 이런 강물을 왕궁으로 간다.

 

3)

‘왕궁 다리’에서 보이는 안정된 구도는 ‘퀸스보로의 다리’에 이르면 전혀 달라진다. 아직 약간의 인상주의적 화풍이 남아 있고, 더구나 전체 구성은 ‘왕궁 다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왼편의 다리와 오른편의 집이 그림의 중심을 차지한다. 그 하단에는 강물이 흐른다.

 

그런데 퀸스보로우 다리는 이 그림에서 거의 압도적인 힘을 발휘하고 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급속하게 기울어진 철교는 마치 그 위에서 기차가 굉음을 내며 달리는 듯하다. 그림의 하단에는 이제 그림과 평행하여 흐르는 강물이 보인다. 왕궁 다리에서 그려진 강물과 달리 이 그림에서 강물은 시커멓게 보이고, 일렁거림도 느려져서 죽음의 느낌이 든다.

 

반면 오른쪽 하단에는 마치 안개에 싸인 듯이 집이 몇 채 보인다. 앞에 있는 집(박공지붕)은 흐릿한 윤곽만 보이며 그 뒤에 있는 집(현대식빌딩)은 아예 형체 자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왕궁 다리’에서 왕궁의 상당히 안정된 모습에 비하면, 위축되고 불안정한 모습이다.

 

’왕궁 다리’와 ‘퀸스보로우 다리’를 비교해 보면, 전자가 안정된 느낌이라면 후자는 불안정하다. 압도적인 다리에 비해 다리가 다가가는 집은 너무 불안하다. 압도적인 다리는 거꾸로 흥분한 듯한 초조한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다.

 

4)

이제 1946년 호퍼의 인생 말기에 그려진 다리를 보자.

이 그림에서 지하철 선로가 강물을 대신한다. 다리는 이 지하철 선로를 넘어가는 찻길로 보인다. 외편에 서 있던 집은 이제 늘어선 빌딩으로 바뀐다. 이 빌딩이나 다리 그리고 지하철, 다리를 이루는 벽 들은 지저분하고 누추하다. 창문이 닫혀 있고 단조로운 빌딩은 일단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라는 느낌을 준다.

 

이 그림이 주는 느낌은 어쩌면 1906년 그려진 ‘파리의 다리’와 유사하다. 다만 ‘파리의 다리’가 육중한 다리를 강조한 것이라면 이 그림에서 강조되는 것은 늘어선 빌딩이다. 앞의 다리에는 접근 금지의 붉은 색 표지판이 붙어 있다. 뒤의 다리 밑은 죽음이 짙게 깔린 동굴과 같다.

 

다리 그림만 놓고 보면 호퍼는 파리 시절 잠깐 밝음과 가벼움, 안정감을 획득했으나 불안하고 흥분한 모습을 거쳐 다시 초기의 음울함으로 되돌아간 듯 보인다. 호퍼는 파리 시절 자신감을 가지고 다리를 건너 어떤 집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그는 파리 이후 자신감을 잃은 듯하다. 처음 흥분한 듯하지만 곧 무기력하게 되며, 시퍼런 강물이나 차가운 지하철 선로에 의해 막혀 버린다. 호퍼의 자신감이 상실되면서 호퍼가 그린 집의 모습은 삭막한 빌딩의 모습으로 변화된다.


» 다음 글: 호퍼와 정신분석3-망사르 지붕

 


« 지난 글: 호퍼와 정신분석

호퍼와 정신분석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호퍼와 정신분석1-서론

 

1)

호퍼는 흔히 사실주의적 화가로 규정되어 왔다. 그의 그림은 고독한 현대인의 자화상(실비아 보르헤시)이라거나 미국 도시인의 초상화(슈미트)라 말해진다. 또는 그의 그림은 30년대 공황기를 그렸다고 한다.

 

이렇게 평가되는 이유는 누구나 그의 그림에서 쉽게 황량하고 소외되고 고독한 감정을 느끼기 때문이다. 이런 감정은 현대인이나 미국 도시인 그리고 공황기에서 지배적인 감정이었으니, 호퍼를 그렇게 평가하는 것도 일리는 있다.

 

이런 평가는 자주 호퍼 자신의 언급에서 확증을 얻기도 한다. 그는 1933년 현대 미술관 회고전에서 자신의 그림은 “자연에 관한 가장 내적인 인상을 전사한 것”이라고 했다.

 

2)

그러나 호퍼의 그림을 미국, 30년대, 현대 사회를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라 보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등장한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에는 이 시대 등장한 독립성을 상실한 대중이나 풍요한 소비 사회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외된 노동자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호퍼의 그림을 그의 시대를 반영하는 사실적인 그림으로만 본다면, 그는 이제는 상실한, 서부 개척 시대 목가적인 삶을 그리는 향수적 낭만주의 화가로 규정될 뿐이지만 그의 그림에서 아무도 이런 향수를 느끼지는 않는 것 같다.

 

그 때문에 그의 그림을 형이상학적 개념을 통해 해석하려는 시도가 등장했다. 그 대변자가 곧 렌너일 것이다. 그는 호퍼의 그림을 전반적으로 ‘문명과 자연의 대립’으로 규정한다. 호퍼의 그림 속에 나타나는 으스스할 정도로 무성한 숲과 그것에 대비되는 창문이 닫힌 집 사이의 대비를 본다면 그런 형이상학적 해석도 쉽게 받아들여진다.

 

호퍼의 그림에서 놓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의 그림이 가진 에로티시즘인데, 그의 그림을 이와 같이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서술할 때, 이런 에로티시즘을 설명하기 곤란하게 된다.

 

물론 원초적 욕망과 도덕적 억압 사이의 관계도 렌너가 말한 자연과 문명의 대립이라는 형이상학적 개념의 예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럴 경우 그의 에로티시즘은 상당히 낭만주의적인 개념이 되는데, 이런 설명을 선뜻 받아들이기 힘든 것은 그의 그림 어디에서도 원초적 욕망에 대한 찬가가 보여지기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의 그림 어디에서도 도덕적 억압에 대한 긍정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발견되는 것은 어떤 황량함과 무기력함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감정 때문에 그는 현대인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평가를 받기는 하지만, 그런 황량함과 무기력감은 다르게 본다면 오히려 에로티시즘과 더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지 않을까?

 

3)

여기서 욕망에 관한 라캉의 개념 틀을 검토해 보자. 라캉은 성적 욕망의 구조를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했는데 신경증과 정신증 그리고 도착증이라는 유형이다. 그 가운데 정신증 개념 또는 실재계라는 개념은 충동을 억압하면서 이를 욕망을 통해 대체적으로 충족시키는 상징계의 와해에서 생겨난다.

 

상징계가 와해되면, 그의 욕망도 마치 바람 빠진 것처럼 빠져나가게 된다. 그의 욕망이 사라진 빈 자리를 이제 이드 즉 실재가 지배한다. 그는 실재에 고착된다. 그는 이 실재계로부터 탈출하여 욕망을 느끼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실재에 고착된 인물은 히치코크 감독의 영화 ‘사이코’에서도 등장한다. 사이코는 죽은 어머니 속에 갇혀 지내며 그가 어떤 외부의 여자에게 욕망을 느끼는 경우, 그 여성을 살해한다. 이와 같이 욕망을 상실한 실재계적인 인물은  크로넨버그의 영화 ‘스파이더’에서도 등장한다. 여기서 실재계에 갇힌 주인공의 모습은 문이 폐쇄되고 창문이 닫힌 건물의 모습으로 상징된다. 실재게를 탈출하려는 그는 망상을 통해 자기를 합리화한다. 즉 자기의 어머니는 자기 아버지의 손에 의해 이미 살해되었고 지금 있는 어머니는 아버지가 자주 가는 술집의 매춘녀일 뿐이라는 망상이다.   

호퍼에게서 등장하는 인간의 모습은 이렇게 극심한 망상에 시달리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폐쇄된 상태에 머물러 있다. 그는 여기서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을 느끼면서도 끝내 무기력하게 머무르고 만다.


» 다음 글: 호퍼와 정신분석2-다리

삶과 예술의 화해(2)-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삶과 예술의 화해(2)

-천명관의 소설 고래를 통해

 

4)

금복은 후반부에 이르면 전반부와는 대립된 성격으로 변화한다. 그녀의 욕망은 이제 남성적 욕망의 형태를 띠며, 작가는 최후로는 금복이 남자로 바뀌는 것으로 설정한다. 금복은 이런 남성적 욕망에 토대를 두고 총명한 지혜를 이용하여 마침내 평대에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금복은 노파의 국밥 집을 운영하다가 다방으로 바꾸어 커피를 팔게 되고 돈을 모았으나 강도에게 다 털린다. 그날 폭풍우가 치면서 국밥 집 지붕이 무너져 노파가 쓰지도 못하고 감추어놓은 돈 무더기가 쏟아진다. 그 중에는 남발안이라는 곳의 토지문서도 있었는데, 금복은 곧 남발안을 개발하기로 결심한다.

 

금복은 지식인 다운 모습을 지닌 ‘문’(이름이 아니라 성만 기록된다)을 데리고 남발안을 방문한다. 문이 이 땅의 진흙을 만져보고 이 진흙을 이용해 벽돌을 찍으면 되겠다고 말하자. 금복은 문에게 벽돌 개발 책임을 맡기고 뚝심을 부려가면서 가진 모든 돈을 투자하여 마침내 벽돌공장을 세운다. 여기서 나온 벽돌은 단단하고 아름다워 전국에 팔리고 곧 금복은 부자가 된다.

 

금복은 그녀가 과거에 만난 사람들을 불러모아 거대한 기업을 세운다. 그녀는 생선장수를 불러 평대에 운수업체를 세우며 그 정점에서 금복은 그녀의 거대한 꿈을 실현시킬 고래를 닮은 극장을 세우려 한다. 

 

작가는 이 고래 극장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한다. 작가는 금복의 고래에 대한 동경을 서술하면서 이 거대한 힘을 지닌 존재를 통해 금복은 그녀의 뒤를 쫓는 죽음을 극복하고자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이런 고래를 획득할 수는 없다. 결국 극장이라는 환상적 예술의 형식을 통해 고래를 획득할 수밖에 없으니, 고래 극장이란 이런 점에서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고래극장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적 존재이며 따라서 허망한 존재를 말한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고래극장은 다름 아닌 자본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자본은 죽음을 극복하는 힘을 가진 존재이지만, 그런 자본은 사실 축적한 순간 곧 무너지고 마는 허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결국 금복은 마침내 고래극장을 세움으로써 고래를 획득했다고 믿지만 사실 이 순간이 바로 그녀가 추구했던 거대한 욕망이 물거품으로 떨어지는 순간이다. 금복은 자신이 어릴 때 사귀었던 약장수를 불러 고래극장을 맡기고 자신은 어린 창녀인 수련의 몸을 탐닉한다. 하지만 약장수와 수련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고, 둘은 미리 돈을 빼돌린 다음 함께 도망치고 만다. 금복은 실의에 젖어 술에 취해 살다가 극장에 라이터를 던져(떨어트린 것이지만, 아마 던졌을 것 같다) 고래극장은 불타고 만다. 영화를 보던 관객 800명도 함께 죽는다.

 

금복의 몰락은 자본의 몰락이니, 자본의 사회과학적인 일반적 법칙이라 하겠다. 하지만 작가가 자본을 그려내는 방식에는 자본에 대한 사회과학적 파악과는 구분되는 독특한 측면이 있다. 그것은 후일 자본가가 되는 금복이 전반부에서는 오히려 예술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작가는 금복이 기업을 세우고 마침내 고래 극장을 세우는 것을 죽음의 극복과 연관시킨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래 극장은 자본을 의미하면서도 동시에 예술을 의미한다. 이 경우 예술은 자본과 마찬가지로 허망한 꿈을 제공하는 사기 예술에 불과하다.

 

5)

그렇다면 진정한 예술은 어떤 것인가? 천명관의 입장은 앞에서 언급했던 토마스 만의 입장과 대척점에 놓여 있다. 토마스 만은 독일 낭만주의와 쇼펜하우어의 철학에 기초하여, 예술을 죽음에 대한 동경, 몰락에의 의지를 통해 설명하려 했다. 그에게서는 몰락과 죽음이 곧 아름다움이니 그런 점에서 예술은 삶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천명관은 토마스 만과 달리 예술을 오히려 죽음을 극복하는 진정한 의지로 설정한다. 작가는 예술의 꿈과 자본의 꿈이 어쩌면 동일한 바탕 위에 있는 것으로 상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자본은 앞에서 금복의 삶을 통해 말했듯이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인데, 작가는 이 점에서 예술 또한 마찬가지로 보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자본이 죽음을 극복하는 데 실패했다는 판단 위에서 작가는 오히려 진정한 예술은 죽음을 극복하려는 의지, 삶의 의지를 지탱해주는 힘이라고 본다. 이런 판단을 통해서 이제 소설 3부에서 예술가로서 춘희의 삶이 시작된다. 작가에게 예술가는 병약한 모습이 아니라 오히려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것이 바로 춘희의 모습이다.

 

춘희의 삶에서 보듯이 예술가는 마침내 예술에 도달하기까지 삶 속에서 끝없는 희생을 겪어야 한다. 마치 노파가 무심한 눈을 가진 반편이를 닮았다고 자기 딸을 애꾸로 만들었듯이 금복은 춘희를 태어났을 때부터 냉담하게 대한다. 춘희는 춘희가 걱정과 마찬가지로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을 가졌지만 단순하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버림받은 결과인 듯 춘희는 말을 하지 못하며, 어머니 금복의 죄를 뒤집어쓰고 감옥에 갇혀 온갖 수난을 당한다. 마침내 춘희는 남발안 벽돌공장으로 돌아와서 들판을 쏘다니며 짐승처럼 살아간다. 그녀와 마찬가지로 통뼈인 트럭 운전사의 아들을 만나 잠시 삶의 기쁨을 찾고 아이도 놓지만, 그는 춘희가 아이를 뱄을 때 자신의 자유가 얽매이는 것이 싫어 춘희를 버리고 떠난다. 춘희는 그가 떠난 겨울 차가운 눈 벌판에서 아이를 먹이려 애쓰다가 잠이 들고 아이도 얼어 죽게 된다. 깨어난 춘희의 온몸에서는 새로 탄생하는 예술의 힘인 듯 울음이 터진다. 말 못했던 자폐아 춘희가 드디어 예술적 소통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이미 감옥을 나왔을 때 노파의 두부를 먹으며, 춘희는 수난을 일차 마치지만, 자신이 낳은 아이의 죽음으로써 춘희는 예술적 단련의 문을 통과하게 된다. 

 

마치 예수 수난사를 연상시키는 이런 춘희의 삶(마구간에서 태어났다는 설정이 더욱 그렇게 보이게 한다) 가운데 그녀에게 내재하던 교감의 능력이 싹이 트고 자라나며 그녀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진 모든 것을 기억하며 그 거대한 몸집과 어마어마한 힘으로 진흙을 이겨 벽돌을 만든다.

 

벽돌을 만드는 것은 금복과 춘희가 동일하지만 금복은 그것으로 허망한 부를 쌓으려 했던 반면 춘희는 삶을 기억하기 위해 만든다. 춘희는 무상의 예술로서 벽돌을 남발안 벌판에 쌓아놓고 죽는다. 그러나 예술로서 벽돌은 살아서 춘희의 죽음을 넘어선다. 그리고 마침내 그 벽돌로 대극장이 완성된다. 그것은 고래극장과 같은 극장이지만, 이제 의미는 달리 한다. 고래극장이 헛된 꿈을 부풀리는 가상의 세계라면 대극장은 삶의 버팀목이 되는 예술이다.

 

6)

전체적으로 볼 때 삶과 예술의 대립을 그린다는 점에서 천명관 작가는 토마스 만과 마찬가지 예술의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토마스 만이 삶과 예술을 극명하게 대립시켰던 것과 달리 천명관은 삶과 예술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이미 삶을 대변하는 자본가 금복에서도 내재적으로는 예술적 능력이 감추어져 있다. 다만 금복의 예술은 허망한 꿈으로서 예술이니, 그것은 자본과 동일한 속성이 된다. 거꾸로 춘희는 예술의 원리를 대변하지만 그의 예술은 죽음에의 동경으로서 예술이 아니라, 삶에의 의지로서 예술이니, 예술은 고통과 희생을 딛고 출현하며 삶을 견디고 이끌어가는 힘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