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겔 미학 산책 3-고대예술과 근대예술 논쟁[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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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 미학산책 3-고대예술과 근대예술 논쟁

 

1)

헤겔의 미학은 빙켈만 이래로 내려오는 고전주의 미학과 낭만주의 미학의 대결을 마무리하는 결정판이었다고 할 수 있다. 헤겔의 미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헤겔 이전에 이루어진 격렬한 논쟁의 전말을 살펴보아야 한다.

논쟁의 출발점에 빙켈만이 있었다. 그는 1755년 로마에서 고대예술작품을 직접 관찰하면서 연구한 끝에 1764년 <고대 예술의 역사>라는 저서를 완성했다. 여기서 그는 고대예술의 근본특징을 ‘고귀한 단순성과 고요한 위대함’을 갖는다고 평가했다. 

빙켈만 이후 서구에서는 고대의 아름다움을 되살리려는 (신)고전주의가 출현했다. 고전주의의 중심에 괴테가 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고전주의를 옹호하는 예술사가, 미학자가 모여들었다. 대표적으로 쉴러, 히르트, 마이어 등이다.

고대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도 근대 예술의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등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중세 낭만주의 예술의 전통을 잇는 근대예술이 고대 예술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고대의 예술을 부활하려 했던 르네상스 예술을 제쳐 놓는다면, 14세기 고딕 예술이나 낭만주의 문학, 17세기 바로크 예술은 고대의 미학적 기준으로 보면 예술로 인정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였다. 여기서 근대 예술작품의 미학적 가능성을 확보하려는 시도가 등장하면서, 논쟁이 벌어졌다.

이런 논쟁에서 고대예술에 관한 한 빙켈만의 규정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논쟁의 초점은 고대에 있기보다는 오히려 근대에 있었다.

 

2)

이런 논쟁에서 효시가 된 것이 바로 쉴러다. 쉴러는 괴테와 함께 발간하던 잡지 호렌에 1795년 11월에서 1796년 사이 세 논문[1]을 연재한다. 그는 여기서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을 구별하면서 전자를 소박 문학이라 규정하고 후자를 감상(또는 성찰) 문학이라 규정했다. 그에 따르면 소박문학이란 현실적 대상 속에 이미 아름다움이 내재하고 있어서 단순한 경험만으로도 그 아름다움을 표현할 수 있다. 반면 근대에 이르러 문명의 진보에 따라 현실은 분열에 처했으며, 아름다움은 사라졌다. 이런 아름다움을 이상의 세계 속에 창조하려는 시도가 성찰 문학을 낳는다.

쉴러의 주장에서 고대 문학이나 근대 문학의 목표는 같다. 그것은 자유롭고 조화로운 질서이다. 이 속에서 감성과 이성, 우연과 필연이 통일되어 있다. 다만 이런 질서에 다가가는 방식만 다를 뿐이다. 고대 문학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서술할 뿐이며 근대 문학은 이미 사라진 것을 환상 속에서 만들어내려 한다.

쉴러에 따르면 사라진 아름다움을 다시 찾으려는 시도는 루소 등에서 보듯이 문명을 버리고 원초적인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길을 택할 수 없다. 감상 문학은 문명의 진보를 인정한 위에서 사라진 아름다움을 다시 창조해야 한다. 감상 문학의 시도는 여러 가지 형식으로 나타나는데, 그는 특히 세 가지를 거론한다.

첫 번째가 곧 풍자적인 문학이다. 풍자 문학은 현실을 비판하고 부정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풍자 문학은 단순한 부정에 머무른다는 한계가 있다. 두 번째가 곧 비가적[elegiac]인 문학이다. 비가적 문학은 상실한 아름다움을 한탄하지만 그것을 도달할 수 없는 유토피아 속으로 밀어 넣는 한계를 지닌다. 세 번째가 목가적인 문학인데 이는 이상의 세계가 현실적으로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근대 성찰 문학이 추구하는 최고의 목표가 여기서 출현한다.

그러나 쉴러의 이런 시도는 고대 문학의 아름다움으로 근대 문학을 재단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런 기준으로 재단되지 않는 다양한 근대 문학을 설명할 가능성을 결여한다. 프리드리히 슐레겔은 고대 미학의 품 안에 머무르는 쉴러에 반발하면서 근대 문학의 미학적 기준을 고대 미학의 기준으로부터 독립시키려는 시도를 전개했다.

 

3)

슐레겔은 고대 문학과 비교되는 근대 문학을 정립하기 위해, <그리스 문학 연구>[2]라는 책을 서술했다. 슐레겔이 이 책 초판을 작성할 당시 쉴러의 논문 <소박 문학과 성찰 문학>이라는 논문을 읽지 못했다. 그는 발간하기 전 쉴러의 논문을 읽고 책의 서문에서 쉴러의 논문을 평가한다. 그는 그 속에서 자신의 생각과 유사한 부분을 발견하면서도 쉴러의 생각과 자신의 생각이 다르다는 점을 부각하였다.

슐레겔의 사유는 순환론적인 관점을 취한다. 그에게서 역사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교차되어 있어서, 고대의 끝에 근대가 시작하며, 근대의 끝에 다시 고대의 출발점에 이른다. 마찬가지로 인식론적으로는 서로 대립하는 감성과 이성은 서로 교차한다. 감성은 이성을 향하고 이성은 다시 감성을 향해 간다. 미학적으로도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 발견(모방)의 본능과 구성의 충동이 대립하면서 서로를 향해 나간다.

고대 문학은 무질서하고 자연의 맹목적인 운명에서부터 출발한다. 여기서 현실 속에서 조화의 질서를 발견하려는 노력이 시도되었다. 이를 통해 아름다운 그리스 고전예술작품이 출현했다. 그 정점에 있는 아테네 비극이 있다.

이 과정은 자연 스스로의 자발적인 운동을 통해 전개되므로 슐레겔은 이를 자연문학이라 한다. 그리스 문학은 비극을 넘어서 나갔으며 그 결과 고전시대 말기 즉 헬레니즘 시대에는 개인적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 즉 희극이 출현했다.

슐레겔에 따르면 근대 문학은 인위적인 문학이다. 이 문학은 세계를 구성하려는 충동에서 나온다. 근대의 구성적 충동은 처음 감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흥미로운 문학으로 출현했다. 흥미로운 문학은 고대 문학의 말기에 등장한 개인의 행복을 추구하는 문학과 외형적으로는 유사하지만 미학적으로는 새로운 전환이 일어났다. 흥미를 추구하는 문학은 중세 말기 셰익스피어의 특징성(성격)의 문학에서 정점에 이른다.

구성의 충동은 흥미로운 것을 넘어 나간다. 구성 충동은 사회적인 자유가 현실적으로 실현되는 이상을 향해 나가며, 이를 통해 괴테의 작품에서 보는 것과 같은 객관적(도덕적) 미학이 성립한다.

슐레겔 자신은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았지만 객관적 미학은 다시 해체되면서 그 끝에 맹목적 운명을 인정하는 문학으로 발전할 것이다. 이는 다시 고대 문학의 출발점이 된다.

슐레겔은 고대 문학과 근대 문학을 대립하면서도 교차 시킴으로써 고전주의 미학의 탁월성을 인정하면서도 근대 낭만주의 문학의 가능성을 살리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입장은 고대 문학의 도달점에 개인의 자유를 설정하면서, 고대 문학을 근대적 관점에서 파악한다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 아닐까 의심스럽다. 고대적 개인은 어디까지나 민족적 실체를 대변하는 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닐까? 

 

4)

쉴러가 근대 문학작품을 고대 미학의 기준으로 파악한다면, 슐레겔은 근대 미학을 가지고 고대 문학작품을 해석한다. 이런 착잡한 논쟁 가운데 괴테는 독특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는 한편으로 쉴러와 교제하면서, 고전주의를 옹호하였지만 다른 한편 마이어와 교제하면서 역사적 관점을 미학의 영역에 끌어들인다.

헤겔 <미학강의> 서문에서 헤겔은 예술사가인 마이어[Johann Heinrich Meyer]를 거론하는 가운데, 히르트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히르트를 소개한 후, 마이어의 주장을 본격적으로 소개한다. 히르트[Aloy Hirt][3]는 헤겔이 존경을 바치는 베를린 대학 동료 교수이다.

헤겔에 따르면 히르트는 이렇게 주장한다. “[예술작품에서] 표현양식 상의 모든 특수자는 내용의 특정한 묘사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극시에서] 본격적 내용으로서 특정한 행위와 직접적으로 관계 맺지 않는 것은 배제되어야 한다.”

헤겔은 이렇게 히르트를 소개한 다음, 다시 마이어[4]의 주장을 소개한다. 헤겔은 괴테가 마이어와 같은 주장을 한다고 하면서 그 주장의 핵심을 아래와 같이 소개한다.

“예술작품의 경우 우리는 우리에게 직접 현시된 것에서 출발하며 그런 다음 비로소 그 의미나 내용이 무엇인가를 묻는다. 전자의 외면성은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가치를 가지지 못하며, 오히려 우리는 외적 현상에 영혼을 부여하는 하나의 내면성, 하나의 의미를 여전히 그 배후에 상정한다.”

여기서 마이어의 주장은 헤겔에 의해서 예술은 상징의 예에서나 우화의 예에서 보듯이 예술작품은 현상으로서 “그것과는 다른 어떤 것”을 의미한다는 주장으로 파악된다.

 

5)

히르트의 특징성을 지닌다는 주장과 마이어의 의미성을 지닌다는 주장은 헤겔에 따르면 서로 다르지 않은 주장이지만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사실 상당히 다르게 보인다.

원래 히르트의 주장은 원래 미의 범위를 이상적인 것에 제한하려는 의도에서 제시된 것이다. 이상화에 철저하기 위해서는 개별적이고 우연적 요소를 배제해야 한다. 이런 주장은 빙켈만 이래로 고대 예술의 가장 기본적 원칙으로서, 빙켈만이 히르트에게 준 영향을 보여준다.

그런데 특징적이란 곧 ‘가장 적합한 것’으로 해석되면서, 이 주장은 ‘의미한다’는 주장으로 전환된다. 왜냐하면 어떤 것에 적합한 것은 자기를 넘어서 다른 것을 지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이제 예술작품은 매우 포괄적이 된다. 즉 예술작품은 그리스 예술처럼 이상화된 것 즉 아름다운 것만 것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추한 것도 포함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런 추한 것 역시 하나의 의미를 가장 적합하게 지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헤겔은 이렇게 말한다.

 “그 밖에도 희화적 요소는 나아가 왜곡된 것으로서 추한 것의 특징으로서 나타난다. 추한 것은 나름대로는 내용에 비교적 밀접하게 관계하므로 특징성의 원리에서 추한 것과 추한 것의 표현도 역시 근본 규정으로서 수용된다고 이야기될 수 있다.”

특징적인 것이 이처럼 하나의 기호로서 파악된다면, 여기서 고전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진다. 이제 각 시대에 고유한 특징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으며, 그리스 시대 아름다운 것이 특징적인 것이었듯이 근대에 이르게 되면 추한 것이 특징적인 것으로 될 수 있을 것이다. 마이어는 히르트의 고전주의를 이어받으면서도 미학의 역사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마이어는 이런 역사적 관점에서 그의 선구자인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작품을 시대적으로 잘못 분류했던 점을 지적한다. 그는 빙켈만 전집을 발간하는데, 주석을 통해 빙켈만의 오류를 수정한다.[5] 헤겔의 미학은 한마디로 말해 역사적 미학이니, 헤겔 미학의 출발점은 마이어의 미학적 사유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1] 그 제목은 다음과 같다. <소박한 것에 관하여>(1795. 11), <감상 시인에 관하여>(1795. 12), <소박 및 감상 시인에 관한 논문의 결론>(1796)

[2] 슐레겔은 이 책을 1795년 작성했으나 출판은 1797년 이루어졌다. 이 책은 본래 계획된 것의 서론에 해당하며, 그 본론은 작성되지 못했다. 1822년 슐레겔은 자신의 전집을 발간하려는 가운데 위의 책을 수정하여 재판으로 발간하였다. 재판은 표현의 변경과 부연 설명에 주력했다.

[3] 히르트는 원래 수도원 교육을 받았고 비엔나 대학에서 고전을 연구하다, 1782년 로마로 갔다. 거기서 그는 빙켈만의 저서를 읽은 후 고전 예술로 방향을 돌려 고전 예술을 연구했다. 그는 1796년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략 이후 로마를 떠나 베를린으로 가서 프리드리히 2세의 예술 고문이 되었다. 그는 1809년 고대의 원리에 따른 건축술이라는 저설르 발표하여, 신고전주의를 주장하였다. 그는 1810년 베를린대학 창립에 관여했으며 그 후 베를린 대학 예술사 및 고고학 교수로 있으면서 또 건축 아카데미를 창립했으며, 이를 통해 쉰켈 등과 같은 신고전주의 건축가를 길러냈다. 헤겔은 그를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도 진정한 예술감정가 중 하나이다”라고 평가한다.

[4] 마이어 취리히에서 예술가 도제수업을 받던 중, 화가였던 퓌슬리로부터 빙켈만의 저서를 소개받는다. 그는 미술사를 연구하기 위해 1784년 로마로 가며, 1786년 괴테가 로마에 도착하자 만나서 평생에 걸친 친구가 된다. 1791년 괴테의 초청으로 바이마르로 가서, 장식 연구가로서 활동한다. 그는 1798년 괴테와 더불어 잡지 <프로필레엔[prophylaen: 열주]>을 발간하면서, <조형 예술의 대상에 관해서>라는 글을 발표한다. 그는 여기서 예술사적인 관점 즉 예술작품이 만들어지던 당대의 취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1816년 새로운 잡지 <예술과 고대>라는 잡지에 그는 18세기 예술의 역사를 서술했다. 그는 1809-1811년 사이 바이마르 궁정에서 했던 강의를 토대로 1824년 <예술사> 1,2권을 발표했으며 그의 사후 1836년 3권이 발간되었다.

[5] 헤겔은 그리스 조각 작품을 논하면서 라오쿤을 설명한다. 라오쿤은 빙켈만이 그리스 예술의 전성기에 속하는 전형으로 파악했던 작품인데, 헤겔은 이는 명백히 후대 매너리즘 시대에 등장한 작품이라 본다. 왜냐하면 지나치게 정교하고 우아하기 때문이다. (이창환 역, 미학강의 2권, 470쪽) 반면 헤겔은 그리스 조각의 전형은 빙켈만의 표현대로 고요함과 단순함을 지닌 것으로 본다. 헤겔의 이런 평가는 분명 마이어의 주장으로부터 배운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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