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흐린 창가에서-이병창의 문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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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퍼와 정신분석 4 – ‘등대’

 

1)

호퍼가 망사르 지붕을 한 집을 그렸던 것은 대개 1920년대 후반이다. 이 시기 호퍼의 그림 가운데 우리의 눈을 또 한 번 끌어당기는 그림이 있다. 그것은 등대 그림이다. 이 등대는 호퍼가 자주 여행을 갔던 메인주 바닷가에 세워진 등대이다. 이 등대는 언덕 위에 세워져 있어(등대의 뒷면은 절벽이다), 호퍼는 대체로 아래에서 언덕 위를 쳐다보는 시각에서 등대를 그렸다. 이렇게 등대를 그린 그림 가운데 온라인에 소개된 것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니, 거의 광적인 집착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1927년 그려진 ‘등대 언덕(Ligthouse Hill)’의 경우, 등대로 올라가는 언덕은 왼쪽 위에서 햇빛을 받아 명암이 마치 파도처럼 일렁거린다. 이런 일렁거리는 파도가 화면의 아래쪽 반을 차지하고, 그 위에 투명한 푸른 창공을 배경으로 등대지기가 사는 집과 등대가 나란히 서 있다.

 

집의 어두운 그림자가 진 박공 면이 등대를 마주보고 있다. 집은 좀 축소된 듯하며, 등대의 밝게 햇빛을 받는 측면이 집에 마주 서 있는데, 이 등대는 상당히 우람하다는 느낌을 준다. 등대의 위쪽 창문이 닫혀 등대 불빛은 보이지 않지만 불빛을 암시하는 듯 노란색이다. 등대지기의 집과 등대는 약간 떨어져 있지만, 마치 다정한 관계이듯 언덕 위에 서 있다.

 

2)

1929년 그려진 ‘the lighthouse at two lights’(두 개의 빛에 비친 등대, 그림에서 하나의 빛은 햇빛을 의미하고 다른 하나는 등대 불빛으로 생각된다.)에서 호퍼는 앞의 등대 그림과 마찬가지로 밑에서 언덕 위의 등대 집과 등대를 쳐다본다.

 

쳐다보는 방향은 앞의 그림과는 반대방향이다. 햇빛도 이번에는 석양인데, 화면의 오른쪽에서 들어오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명확한 명암을 등대와 집에 만들고 있지만, 이 그림에서는 일렁거리는 파도와 같은 언덕의 모습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또 석양인지라 붉은 색조가 전체, 심지어 푸른 하늘조차 감돌고 있다.

 

멀리 마치 망원경으로 본 듯, 중간의 언덕 부분은 잘려져 있다. 그러므로 이 그림은 등대와 등대지기의 집만이 클로즈업된 셈인데, 앞의 그림에서 등대와 집이 균형을 이루었던 것과 달리, 이 그림에서는 등대가 창공으로 상당히 빠른 속도로 치솟아 오른다. 반면 집은 마치 내려 앉은 듯하다.  등대에서는 위압감조차 느껴진다.

 

3)

두 그림에서 정도는 다르지만 시각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아무래도 등대로 보인다. 호퍼는 등대를 우람하게 위로 치솟는 방향으로 그렸다. 누구 보기에도 등대의 우람함에 충격을 받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적 눈으로 본다면 우람하거나 위압적인 등대는 거대한 팔루스를 상징한다는 것을 쉽게 이해하리라.

 

등대 그림은 망사르 지붕을 한 집 그림과 대비된다. 앞에서 망사르 집은 호퍼에게 실재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앞의 그림에서 실재로 다가가는 길은 점차 차단되면서 실재가 불러내는 매혹은 더욱 강화되었다. 그렇다면 등대 그림에서 팔루스가 거대해진 것은 실재로 다가가려는 호퍼의 욕망이 차단되어 있다는 것에 반비례하는 것이 아닐까?

 

거대한 팔루스는 호퍼가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는데 라캉은 이런 동일시를 상상계적인 욕망으로 설명한다. 그의 거대함의 진실은 실재로 가는 길의 불가능성이니, 상상계적인 동일시를 통해 호퍼는 이 차단된 길을 넘어 가고 있다.

등대 그림에서 호퍼의 욕망은 마치 퀸스보로우 다리에서 과도적으로 보이는 다리의 모습처럼 과잉적이다. 그것은 실재에 가 닿기보다는 실재를 지나치며, 그러기에 다시 돌아와 새로이 실재에 다가간다. 호퍼는 실재에 다가는 새로운 길을 바로 이런 상상계적인 동일시, 거대한 팔루스를 통해 발견하려 했던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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