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이반 일리히,『절제의 사회 Tools for Conviviality』를 읽고…/지미정 [보고 듣고 생각하기]-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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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미정(한철연회원)
이반 일리히의 상생 사회를 위한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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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12년 봄에 차를 팔았다. 차 안에서 우연히 들은 라디오 방송의 사연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했다. 젊은 아내가 남편을 설득해 차를 판 사연이었다. 부부는 치솟는 기름 값과 교통체증 때문에 대중교통으로 출·퇴근을 했으며 기껏해야 주말에 마트나 나들이를 할 때만 자동차를 사용했다. 그러나 자동차를 보유하기 때문에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자동차 할부금과 보험료, 세금 그리고 유지비와 보수비를 따져보니 자신들의 소득에 비해 터무니없이 과했다. 세대 당 한 대의 자동차 보유를 당연히 여기는 요즘 시대에 그녀의 지혜로운 선택은 내게 용기를 주었다. 그 당시 나는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가까운 거리도 차로만 움직이고도 늘 시간에 쫓기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들도 소비에 의존했다. 나는 차를 팔고 약간의 불편함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은 차 없는 생활의 이로움을 발견하며 만족하며 살아간다. 아마도 그 배경에는 이반 일리히(I. Illich)의 영향이 크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일리히는 오스트리아 철학자며 로마 가톨릭 수사였다. 그는 서양 문화의 제도들이 우리의 교육, 의료, 노동, 에너지 사용, 교통 그리고 경제 발달에 미치는 효과를 비판했다. 일리히는 인생 후반기에 얼굴에 자라는 암 때문에 고통 받았으나 전문적인 의료에 따르기보다 전통적인 방법들로 치료했다. 그는 종양에 의한 고통을 진정시키기 위해 정기적으로 아편을 피우기도 했으며, 일리히는 종양이 진행 초기일 때, 종양을 제거하기 위해 의사와 상담했지만 종양을 제거하면 말하는 능력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듣고 종양과 함께 사는 삶을 선택했다. 일리히는 그 삶을 자신의 운명이라 말했다.

▲이반 일리히 지음 박흥규 옮김, 생각의 나무 펴냄

일리히는 『상생 도구 Tools for Conviviality』에서 우리 사회가 부정의한 이유는 극소수에게만 자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의 존재를 정치적으로 용인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리히의 ‘도구 tools’와 ‘상생 conviviality’ 개념은 앞으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간단한 의미는 다음과 같다. 일리히는 “현대 기술이 관리자managers가 아니라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에게 봉사하는 사회”(Illich, p.?)를 ‘convivial’하다고 말한다. 관리자는 기업의 사장을 의미한다. 즉 현대 기술은 기업의 사장이 돈을 벌게 쓰이는 것이 아니라 개인에게 돌아가는 이익이 많아지게 하는 도구여야 한다. “정치적으로 서로 연결된 개인”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려면 일리히가 정치를 어떤 뜻으로 사용하는지 알아야 한다. 일리히에게 정치는 “에너지나 정보의 동등한 투입이 아니라 일정한 한계 안에서만 최대의 산업적 산출의 분배”(Illich, p.?)를 다루어야 한다. 정치는 투입이 아니라 산출과 관련한다. 산출의 분배를 최대화하는 것이 정치의 목표다. 분배의 최대화는 곧 돈 많이 버는 것이고, 그렇다면 ‘convivial’은 사장이 아니라 개인들이 돈을 많이 벌게 한다는 뜻으로 볼 수 있다.

이 글에서 나는 먼저 도구의 근본 독점을 비판하고 일리히의 ‘도구 tools’와‘convivial’ 개념을 분석한 후, 일리히가 제시한 대안들을 평가한다. 일리히가 상생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제시한 구체적인 정치 대안은 이상적이고 전 근대적이라 현실에 적용하기 어려운 점이 있다. 그러나 나는 오늘의 지구 환경과 생태 문제를 단순히 자연에 대한 존중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 또는 조화라는 추상적인 답에서 찾는 것은 문제에 대한 원인을 잘못 분석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반면 일리히의 사상은 산업 도구의 근본 독점에 대한 비판을 통해 상생 사회를 위한 개인의 노력이 무엇인지를 일깨우고 사회 개혁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더 구체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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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근본 독점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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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 따르면 과도하게 효율적인 도구가 자연환경에 대한 인간관계를 조장하도록 응용하면 도구가 인간과 자연 사이의 균형을 파괴하면서 환경을 부패시킨다. 또 도구는 사람들이 스스로 할 필요가 있는 일과 기성품이 필요한 일 사이의 관계를 파괴할 수 있다. 후자의 파괴는 근본 독점을 낳는다. ‘근본 독점’이란 “하나의 상표가 지배적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유형의 제품이 지배적인 것을 의미한다.”(Illich, p.55) 예를 들어 코카콜라가 아니라 탄산수들이 음료 시장을 독점하고 식혜나 수정과 같은 전통 음료와 차를 음료시장에서 배제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자동차도 이런 방식으로 교통을 독점한다. 자동차는 도시 이미지를 만드는데, 미국은 이미 1970년대에 도시의 자동차가 도보와 자전거의 이동을 배제했고, 대만에서는 자동차가 하천 교통을 배제했다. 이와 같이 한 상표의 자동차를 많이 타는 것이 아니라, 자동차에 의해 도보, 자전거, 배 등의 다른 교통수단이 배제되는 것이 근본 독점이다. 학교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공부에 대해 근본 독점을 확대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인가 대안학교나 서원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은 공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으로, 즉 ‘무교육자’로 낙인찍혀 검정고시를 통과하지 않으면 교육 받은 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의료 행위도 학교 교육을 받은 의사일 경우에만 환자를 치료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다.

일리히는 우리의 타고난 능력이 배제되는 곳이라면 어디서나 근본 독점이 생기며 이 근본 독점이 강제적 소비를 강요함에 따라 개인의 자율성을 제한한다고 보았다. 또 “근본 독점은 거대 제도가 공급하는 표준 제품의 강제 소비를 수단으로 강요하기 때문에 특별한 사회적 통제를 만든다.”(Illich, p.56) 거대 제도가 만든 강제 소비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나라는 불과 50년 전만 해도 아이를 낳는 곳은 병원이 아니고 가정이었다. 간호사 경력이 있는 산파는 아이를 받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고 병원에서 아이를 낳을 때 드는 비용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적은 비용만으로 출산이 가능했다. 그리고 산모의 산후 관리도 지금처럼 큰 규모의 조리원에서 이루어질 필요 없이 가족의 도움으로 집에서 조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연분만을 위해서도 병원에 하루나 이틀 입원을 해야 하고, 입원 절차에는 각종 검사가 따르며 그에 대한 부담도 소비자가 진다. 이것은 의료 제도가 개인에게 강제하는 것이지 개인이 필요에 의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금도 집에서 아이를 낳는 산모들이 있지만 그녀들은 성가시고 불편한 방송 기자의 호기심 가득한 취재에 응해야하는 불필요한 관심을 감수해야 한다. 또 분만을 돕는 산파를 구하기도 어렵다.

장례 문화도 근본 독점을 낳았다. 멕시코에서는 한 세대 전(일리히가 책을 쓴 1973년을 기준)까지도 묘지를 파는 일과 죽은 자를 축복하는 일 외에는 모든 장례 준비를 가족이 했다. 가족이 모여 장례를 치르는 동안에는 서로 다투기도 하지만 죽은 자를 보내는 슬픔을 터뜨리며 기분을 풀기도 하고, 죽음이라는 숙명과 삶의 가치를 되새기는 기회로 삼을 수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멕시코의 모든 장례 절차는 패키지 상품이 되었고, 장의사가 하는 장례 의례는 법률로 강제해서 장의사들이 시신을 통제하는 근본 독점을 낳았다.

일리히는 치유하고, 위로하며, 이동하고, 배우고, 집 짓고, 죽은 자를 묻는 일과 같은 인간의 필요를 충족하는 수단이 사람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에 의존하면서 상품에는 제한적으로 의존한다면 우리는 풍족할 수 있다고 말한다. 즉, “스스로 가능한 활동은 교환가치가 아닌 사용가치를 부여”(Illich, p.58)하지만 우리는 더 이상 사용가치를 부여하는 자유로운 활동을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고 있다. 우리가 타고난 능력을 포기하고 우리를 대신해 ‘더 좋은’ 무엇과 우리의 능력을 교환할 때 근본 독점은 성립한다. 근본 독점은 가치를 산업적으로 제도화하는 것을 말하며, 이것은 ‘새 것들’의 희소성과 소비 수준에 따라 사람을 계급화 하는 틀을 만든다. 근본 독점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정의는 가치 있는 서비스 비용을 증가시켜 특권을 차별적으로 부여하고 자원에 대한 접근 권리를 제한하여 사람을 의존하게 만든다. 최근에 장례 대행업체 가운데 일부는 상당히 고가의 장례 예식 상품을 유족에게 권한다. 부자가 아니고는 이용할 수 없는 고가의 장례 예식은 결국 서비스에서 차별화 전략으로 또 다른 특권 의식을 낳으며 일부 계층만이 누리는 서비스 자원이 되고 만다. 우리가 근본 독점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지 않는다면 그 독점은 다원적으로 진행해 강제된 모든 것들에 대한 우리가 가진 인내의 한계를 파괴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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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상생 도구?
1) 도구의 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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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히에게 도구의 범위는 넓다. “나는 (…) 단순한 기자재만이 아니라, (…) 거대한 기계만을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넓은 의미로 사용한다. (…) 생산시설도 포함시키고 교육, 건강, 지식, 의사결정을 생산하는 것과 같이 만져서 알 수 없는 상품의 생산 체계도 포함시킨다.” (Illich, p.22)

일리히에게 ‘도구 tools’는 어떤 목적 달성을 위해 마련한 장치인 ‘수단’을 의미한다. 그는 합리적으로 고안한 모든 장치를 하나의 범주로 포섭할 수 있기 때문에 도구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기술 도구만이 아니라, 학교의 교과 과정이나 결혼 법 같은 의도적으로 형성한 사회적 고안물도 도구에 속한다.

일리히에게 ‘도구’는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다. “인간을 위해 일하는 도구인 기계는 사람들을 더욱 교묘하게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로 만들지만, 인간과 함께 일하는 ‘도구’는 개인이 갖는 에너지와 상상력을 최대한으로 만들 수 있는 도구”다.(Illich, P.10) 동력 도구 가운데 몇 가지는 인간 에너지의 증폭기 역할을 한다. 가령 소가 쟁기를 끌지만 사람도 소와 함께 일하고 그 성과는 인간과 동물의 힘이 결합해 얻어진다. 전기톱과 기중기도 같은 방식이다. 반면에 제트기를 조정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간 에너지는 제트기 출력에 의미 있게 쓰이지 않는다. 그래서 제트기는 프로그램화된 에너지 노예 인간을 위해 일하는 ‘산업 도구’며 인간과 함께 일하는 소, 쟁기, 전기톱, 기중기는 ‘상생 도구’라 부른다. ‘상생 도구’는 사용하는 각자가 상상력을 발휘해 환경을 풍요한 것으로 만들 수 있게 최대의 기회를 부여한다. 도구는 사용자의 목적에 따라 상생을 진작시키는데 전화는 구조적으로 상생 도구다. 왜냐하면 관료는 사람들이 전화하면서 이야기한 개인 비밀을 간섭하거나 보호할 수는 있어도 전화로 서로 말하는 내용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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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계속…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아람누리도서관> 청춘의 고전 1 : 예술과 인문학이 만났을 때 [ⓔ시대와철학알림]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에서 <청춘의 고전>시즌1편 중 몇 편을 선정해 다시 강연을 합니다.

경기도 고양시 아람누리 도서관은 <예술 특성화 도서관>이라고?하며 <예술>과 <인문학>의 만남을 시도한 <청춘의 고전> 강연을?개최하기로 하였습니다. 나날이 유명해져가는 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 강연 시리즈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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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웹진 편집주간 강지은입니다. 길고 지난한 웹진의 리뉴얼이 얼추 끝나갑니다. 진작 끝냈어야 했지만 악성코드 등의 문제로 정상화까지 시간이 많이 지연되었음을 사과드립니다.

한 가지 드릴 말씀은 리뉴얼 과정에서 비밀번호를 그대로 옮겨오지 못했습니다. 기술적인 문제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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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번 번거롭게 해드려 죄송합니다.?한국철학사상연구회의?참 목소리를 담아내는 멋진 웹진??[ⓔ시대와철학]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48%의 좌절, 51%의 승리?;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③[시대와 철학]

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4) 도제(道諦): 방법은 없는가?

 

기억의 전이

 

구제금융기와 신자유주의의 파고를 거치면서 우리는 빈곤의 재림이라는 공포에 시달리고 있다. 공포에 직면한 51%들은 무의식적으로 박정희식 개발 모델을 대안으로 떠올렸다. 지금까지 효과를 봤던 익숙한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적용시키고자 했던 것이다. 몸과 정신에 깊숙이 각인된 개발주의적 기억은 성장 모델이 효과적이라고 외치고 있다. 우리의 51%는 필연적 삶의 욕구를 다시 한 번 집단화함으로써 이 환란을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업식(業識)에 끌려다니다가 호되게 당하고 있다.

현재는 과거가 아니다. 우리가 겪는 현재의 고난은 과거의 어려움과는 다르다. 물론 그것의 겉모습은 실업, 부도, 빈곤 등과 같이 과거와 유사한 형태를 띠고 출현한다. 그러나 현재의 경제적 어려움은 과거와 같이 재화량의 절대 부족에 의해 발생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재화량의 과도한 잉여를 적절하게 사용하지 못한 데에서 발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우리는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경제적 공포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한 것으로 오해하고, 과거에 효과를 봤던 방법을 다시 사용하려다가 재난에 휩싸이게 된 것이다. 현재가 과거와 엄연히 다르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의 경제 위기를 과거의 그것과 동일하게 해석하게 된 이유는 현재의 빈곤에서 과거의 적빈을 연상했기 때문이다. 이 부당한 기억의 전이는 과거의 독재자를 경제적 영웅으로만 회상하게 하는 기억의 선택을 만들어냈다. 또한 한국의 대중은 이제는 낡아버린 시대의 욕구인 개발주의적 삶의 방식을 다시 한 번 관철해서 그때의 기쁨을 또 다시 맛보고자 했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와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에서 기인한 이른바 ‘응답하라 70년대’의 간절한 외침은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추억 놀이를 불러일으켰고 불행하게도 그것은 정치적 세력의 형성으로까지 이어졌다. 기억의 부당한 전이를 교정하고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의 업식을 끊으려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 그것은 필연적 삶의 악순환을 끊고 정치적 삶의 길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성취될 수 있다.

 

무임승차를 넘어서

 

필연적 삶에 대한 집착을 끊는 길은 정치적 삶의 양식을 다방면에서 시도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다. 현재 국민 대중의 관심사는 소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거주의 부담을 느끼지 않으며, 자식을 바르게 교육시키고, 안온한 노후생활을 보낼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정치권에서는 이러한 요구에 대해서 경제 구조 혁신을 통한 질 좋은 일자리 확보와 복지 제도의 확충으로 호응하고자 한다. 성장 일변도의 경제 운영의 방식에 대해 일정한 거리를 두려는 흐름은 이미 거스르기 힘든 대세를 형성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정책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다양하게 분화된 계층 및 세력과의 정치적 합의 과정을 요구한다. 과거에는 이 과정이 권력을 위임받은 대통령이나 정당에 의해 추진되었다. 특정 정당이나 대통령에게 권력을 몰아줌으로써 국민의 요구를 대리하도록 하는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대리인을 통한 추진 방식은 현대 복잡사회에서는 적합하지 않다. 현대 사회는 단일한 지도력을 토대로 사회적 갈등을 무마시킬 수 있는 단순한 사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과정은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와 자기 기획을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은 시민들이 경제 활동을 자기 삶의 중심축으로 삼던 지금까지의 태도를 버리고 민주적 참여를 자기 삶의 핵심으로 여기게끔 하는 정치적 삶의 수행을 요구한다.

하지만 국민국가적 규모의 정치 공동체에서는 이러한 대의제적 방식을 채택해야만 하는 현실적 어려움을 지니고 있다. 그래서 근대 민주주의의 선진국들은 의회 민주주의와 거대 행정 체제를 결합하는 국가 체제를 운영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민주주의 국가 체제는 사실 시민들의 자치적 활동과 그 활동의 역사에서 노출된 단점을 극복하면서 형성된 결과물이다. 그러나 한국의 대의 정치 체제는 시민의 자율적 구성 활동의 오랜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법적, 행정적 요구에 직면하여 정치 엘리트들의 인위적 구상에 의해 단기간에 만들어짐으로써 시작된 것이었다. 사정이 이러하기에 한국 국민의 의식 속에는 자신들이 오늘날의 정치 공동체를 건립한 주인이라는 의식이 희박하다. 더구나 많은 한국인들은 국가로부터 버림받고 폭력적으로 취급당한 상흔을 간직하고 있기에 국민국가라는 근대적 정치 공동체는 개인적 삶의 보존을 위해 전략적으로 활용되는 수단으로서의 이해되는 경향성을 띤다. 박정희 정권을 비롯한 군사 정부 는 국민들이 자율적 시민으로서 공적 활동에 임할 수 있는 공간을 아예 봉쇄했기 때문에 필연적 삶 외에 정치적 삶을 경험하는 것은 소수 예외적 인물들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런 까닭에 대다수 한국인이 필연적 삶의 방식에 익숙할 뿐, 정치적 삶의 양식에는 이물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 자료사진

 

 

그렇지만 우리에게도 분명히 민주적 입헌국가 체제를 자율적으로 수립했던 경험이 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그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우리는 필연적 삶 이외의 공적 시민으로서의 자치의 경험을 끊임없이 늘려나가고 있다. 정치적 삶의 방식이 필연적 삶의 습관을 압도할 수 있으려면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구나 민주적 의사소통과 합의의 절차를 존중하는 삶의 양태는 온갖 꼼수의 방해를 헤쳐 나가고, 구성원 간의 지난한 이해의 과정을 참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민 자치라는 정치적 삶을 중단하고 특정 대리인이나 체계에 임무를 맡기는 유혹에 쉽게 넘어갈 수 있다. 민주적 헌정 체제의 수립 이후 한국 국민들이 범한 실수도 바로 이러한 유혹에 빠진 것이었다. 시민적 자치의 발걸음을 이어가지 못하고 대의적 기관과 정치인에게 정치적 업무를 맡겨버리면서 혼란은 가중되었다.

한국 사회의 복잡한 갈등과 요구는 특정 인물, 정당, 행정 기관 체계가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다. 그런 의미에서 복지 프로그램과 경제 구조의 혁신을 기획하는 정치 엘리트들은 자신들의 답과 해결책을 시민들에게 일방적으로 제안하거나 추종할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하는 한 한국의 대중은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잘 시행되는지 간이나 보려는 무임승차자의 자세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정치 엘리트들은 정책의 입안과 집행을 주도하는 역할이 아니라 아래로부터의 자발적 노력들이 서로 소통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발휘할 수 있도록 자리를 만들어 주는 여건 조성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야 한다. 그들은 시민의 적극적 활동을 통해 제안된 대안들을 정부 정책과 연결하는 노력을 다양하게 시도해야 한다. 설사 그것이 자신들의 이념이나 정책 방향과 부딪힌다 해도 정치 엘리트는 그것을 수용하는 데에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 대리인 혹은 대리 기관들이 아무리 순정을 다 바쳐서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해도 복잡사회로 접어든 한국 사회의 현실은 그들을 희생양으로 삼켜 버릴 것이다.

현대 한국은 숲의 왕을 옹립함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는 황금가지적 주술시대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대통령에게 모든 희망과 기대를 걸고 권력을 몰아주는 수동적 해결책을 고수하려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구원자 신드롬을 극복하지 못한다면 51%의 승리감과 48%의 절망은 결국 100%의 배신감으로 보복할 것이다. 구원자가 추진하던 개혁이 기대에 못 미칠 경우 대중의 좌절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좌절은 대중의 반지성주의를 자극하여 결국 민주주의 자체를 회의하게 만드는 움직임을 낳을 수 있다. 이 움직임은 박정희 신드롬 정도로 멈추지는 않을 것이다. 전체주의 운동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남쪽으로 튀어

 

황금가지적 민주주의, 즉 구원자적 대의제 민주주의를 정치적 삶과 동일시 할 수는 없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삶을 능동적으로 살아가게끔 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외적 제도의 수혜자로 멈춰 서있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제도로서의 민주주의가 아니라 생활로서의 민주주의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들이 공동체적 협력을 통해 새로운 삶의 대안을 마련하고 기존과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하는 노력을 어려워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이제야 말로 제도가 기획해주는 삶이 아니라 자기가 기획하여 실현시키고 그것의 지속을 제도에게 압박하는 정치적 삶을 살아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영원토록 남한테 얻어먹는 신세로 남아있을 수는 없는 일이다. 직접 해먹는 요리가 더 맛나듯이 직접 마련하는 삶의 양식이 더 빛날 수 있다. 제도가 우리가 원하는 일자리도, 교육도, 의료도, 주택도, 문화도 주지 않는다면 직접 만들어 볼 수밖에 없다. 처음에는 작고 빈약하며 불편하겠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삶의 대안들은 늘어나기 마련일 게다.

체계의 시선에서 방치된 서민들에게 기존 제도 정치와 경제는 이미 ‘차가운 북쪽’이다. ‘북쪽의 제도’에서 얼어죽기를 기다리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난 앉아서 죽기 싫다. 어차피 버려진 몸, 자치의 삶을 상상하고 구현해보는 ‘남쪽’으로 튈 테다. 모든 버려진 이들의 동참을 바란다.

 

(끝)

 

48%의 좌절, 51%의 승리? ;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 사성제(四聖諦)-② [시대와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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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길석(한철연 교육부장)?

 

(2) 집제(集諦): 왜 앓게 되었는가?

 

‘연가시’ 재난

 

경제 성장이라는 꿈은 사실 잘 살아보겠다는 욕망, 부자 되겠다는 욕심을 점잖게 이른 말일 뿐이다. 솔직히 우리가 바란 것,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나와 내 주변만의 풍요다. 남이야 어떻게 되든, 사회야 어찌되든 나만 풍요로우면 된다는 욕망은 성장에 대한 맹목적 기대를 낳게 한다. 우리의 욕심이 오늘의 재난을 불렀다. 수구 세력은 우리 안에 내재한 자기 보존의 맹목적 욕구를 부채질하여 정치적으로 활용하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대중의 욕심을 이렇게만 보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다. 사실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자기보존 욕구는 공포와 불안에서 비롯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부에 대한 순수(?)하고도 능동적인(?) 욕망과는 다르다. 부자가 되길 바라는 서민들의 마음은 사실 ‘더 가난해지지 않겠다’ 혹은 ‘다시는 가난 때문에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표현한 것일 뿐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들은 이토록 필사적으로 빈곤을 거부하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들을 공포에 질리게 만들었을까? 구제금융 위기 이래 형성된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그것이었다. IMF의 요구는 사람들로 하여금 식민지 경험과 그것으로 유발된 전쟁의 악몽을 연상케 했다. 도처에서 발생하는 해고, 도산, 실업, 가정 해체는 처절했던 전후 사회 빈곤의 트라우마를 되살렸다. 신자유주의적 산업 구조화가 낳은 빈곤은 과거의 빈곤과 동일시되었다. 현재의 실업에서 그들은 적빈했던 과거의 지긋지긋한 악취를 맡았다. 토굴 같던 초가집, 주린 배를 움켜쥐며 잠든 밤, 동생을 위해 희생했던 누이의 뒷모습, 가난 때문에 접은 꿈의 불길한 체취가 그들의 코끝에 느껴지자 21세기의 현재는 어느새 과거의 그날이 되고 말았다. 개인적 근면과 성실만으로는 신자유주의적 재난을 이겨낼 수 없었다. 밤새워 일을 해도 살림살이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도무지 무엇이 잘못됐는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누군가 외쳤다. ‘저기 가난을 물리친 그분이 오신다!’ 돌아보니 잊고 있었던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그래, 그가 있었지. 그는 우리를 이만큼 살게 한 사람이었어.’ 너도 나도 그에게 달려가기 시작했다. 가까이 보니 어느 기업인이기도 한 듯싶다. ‘하지만 대수랴. 또 다시 풍요를, 또 다시 가난에서의 해방을….’ 갈증에 허겁지겁 그가 제공하는 물을 마시고 그가 이끄는 삶의 방식대로 살아보았다. 마치 변종 연가시에 감염된 영화 속 인물들 같이 그가 제공하는 성장의 꿈을 벌컥벌컥 마셔댔다. 하지만 빈곤에 대한 공포와 부에 대한 갈증은 더해만 갔고 인간으로서의 삶은 멀어져만 갔다.

이렇듯 박정희 신드롬의 이면에는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가 유발한 빈곤에 대한 대중의 공포가 놓여있다. 박정희 신드롬의 최대 수혜자인 기득권 세력은 이 신드롬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지 않았다. 그들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 입장에서 신드롬의 전염을 즐기고 있을 뿐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를 하며 태극기를 쥐고 거리로 나가는 이들은 현재가 두렵고 미래가 불안한 서민들이다. 그렇다면 서민 대중의 현재적 빈곤을 막고 복지 시스템을 구비하면 이 현상이 해결될까? 신자유주의적 사회 구조를 수정하고 복지국가 모델을 도입하면 박정희 신드롬은 소멸될까? 일정한 성과는 있겠지만 근본적 해결책은 되지 못할 것이다. ‘어머니 박정희 혹은 박근혜 앓이’의 심층에는 우리의 몸과 마음에 내면화된 개발 및 성장주의적 사고방식, 자기 생존의 생활양식이라는 ‘연가시’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정한 조건이 형성되면 이 ‘연가시’는 언제든 활동을 재개할 것이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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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연적 삶의 요구

 

따지고 보면 한국 사회에서 자기 생존 및 이익 보존의 욕구를 상대화하고 일정하게 거리를 취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는 정치적으로 진보적 지향을 갖든 보수적 입장을 취하든 상관없이 정도 차이만 있을 뿐 거의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욕구라고 할 수 있다. 이 욕구는 정치적 이념에 의해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새 몸에 익어버린 생활 방식 혹은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달려있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생존과 안정의 절대적 추구라는 욕구를 어떠한 과정을 통해 내면화 하게 된 것일까? 그것은 식민지와 전쟁으로 인해 폐허가 된 조국을 건설과 개발을 통해 다시 일으킨 성장의 역사 속에서 새겨진 것이라 할 수 있다. 식민지적 수탈과 전쟁의 참상은 한반도를 석기시대로 돌려놓았다. 전래의 가치와 인륜 구조는 무너졌고, 오직 생존과 이익의 안정적 확보만이 급한 과제였다. 국가도 이웃도 그 누구도 나와 내 부모 형제의 가난과 생명의 안전을 책임져 주지 않았다. 국민 대중은 국가로부터 이미 여러 번 버림받은 기억이 있었다. 임금과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버리고 나라를 팔아버렸으며, 정부는 국민을 속이고 한강다리를 건너버렸다. 서민의 입장에서 보면 매국노와 지주들은 말할 것도 없고 잘난 지식인과 애국지사들도 제대로 된 나라를 만들기는커녕 소모적인 대립과 갈등만 벌이다가 온 천하를 전쟁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아무도 믿을 수 없었다. 믿을 건 오직 나 자신의 노력과 힘뿐이었다. 전후 국민 대중의 의식 한 켠에 반지성주의적 평등의식과 지식 엘리트에 대한 반감이 자리한 까닭에는 이러한 역사적 경험이 존재한다. 이러한 반지성주의적 평등 문화는 군부정권에 대한 맹목적 지지, 비판적 문제 제기와 논의 문화에 대한 거부로 이어져 민주적 정치문화의 정착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혼돈과 전쟁에서 살아남으려면 적자생존과 자력갱생의 준칙으로 무장해야만 했다. 먹이는 오직 투쟁하면서 스스로 확보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강력한 적자생존의 윤리와 자조(自助)의 준칙을 체화하면서 사람들은 집을 고치고, 돈벌이에 나섰다. 치 떨리는 가난의 굴레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온 힘을 기울였다. 식민지의 수탈과 전쟁의 참상을 겪은 이들에게 나라란 생명의 보존과 안정된 삶을 제공하는 보호소의 의미를 지닐 뿐이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국민 대중의 상식에 깃든 정부의 존재 이유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 성취 가능한 필연적 삶의 요구를 문제없이 해소하는 것에 있다. 얼핏 보기에 이러한 요구는 지극히 당연하며 문제없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필연적 삶의 요구는 상당히 위험한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당시 사람들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켜준다면 어떤 정부가 와도 괜찮다는 생각을 했다. 국민 대중이 쿠데타로 집권한 군사정부에 적극적 반대를 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의 내면에 강력하게 자리한 필연적 삶의 요구 때문이었다. 필연적 삶의 요구는 양식을 갖췄다는 지식인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심지어 [사상계]의 많은 필자들이 쿠데타를 환영하거나 반대 의사를 적극적으로 보이지 않았는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의 의식에 가난의 질곡을 해방시켜야 한다는 필연적 삶의 요구가 그들의 내면 속에도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

 

박정희 정권과 국민 대중 간의 관계는 무척 이중적이다. 둘 사이에는 호응과 협력의 역사도 있지만, 긴장과 반목의 역사도 존재한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이 둘의 역사는 한 가지 요소가 두 개의 상이한 모양으로 표출된 반응에 불과하다. 그것은 사적 개인으로서의 자기 실존의 주장이다.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조국의 근대화라는 프로젝트는 국가에 대한 불신과 자력갱생의 준칙이 몸에 익은 국민들에게는 낯선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비협조적이거나 조건적인 태도를 보였다. 국민 대중이 박정희 정권의 프로젝트에 손을 빌려준 것은 전국가적 근대화라는 사명에서라기보다는 이러한 사업에 협조하는 것이 개인적 가난으로부터의 해방에 효과적이라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국민 대중은 사적 욕구의 충족을 위해 박정희 정권을 전략적으로 활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의 근대화 과정이 공권력과의 전략적 제휴를 통한 사적 욕구의 충족이라는 형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공적 시민으로서의 정체성보다는 사적 개인으로서의 정체성이 강하다는 한국인들의 특징을 역사적으로 설명해준다. 전략적 제휴는 박정희 정부가 필연적 삶의 요구를 만족시키지 못할 경우 언제든지 철회될 수 있는 가능성을 함축한다. 박정희 정권의 붕괴 과정은 이러한 거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 고지된 ‘계약 해지’의 속성을 지닌다. 이렇게 볼 때 박정희 정권에 대한 저항은 사적 삶의 욕구 혹은 필연적 삶의 욕구 실현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한 사적 개인들의 반발로도 해석해볼 수 있다.

반면에 국민과 박정희 정권이 호응과 협력의 역사를 이루어냈다고 해석할 수 있는 근거는 박정희 정권이 국민들의 갈급한 요구였던 필연적 삶의 요청에 대해 일정한 반응과 응답을 보였다고 기억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억은 결코 허구적인 것만은 아니었다. 경부고속도로, 중화학공업단지, 포항제철 등의 토건사업과 새마을운동을 거치면서 국민 대중은 필연적 삶의 요구를 충족시키는 실제적 경험을 얻게 되었다.

건설과 경제 발전의 과정은 국민들에게 당당한 사적 개인으로서의 존재 가치의 확인이라는 실존적 경험도 부여해줬다. 가진 것이라고는 노동력 밖에 없었던 나라에서 단기간 동안 경제를 일으킨 사례는 세계 어디에서도 드문 일이었다. 못 먹고 못 배운 자신들이 오직 육체의 근면과 성실을 통해 이 커다란 업적을 이룩했다는 사실은 자기 존재의 가치를 긍정적으로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은 식민지와 원조 경제의 경험에서 얻은 열패감 및 자기모멸 의식을 떨쳐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물론 경제 건설과 근대화의 과정은 강제적 동원에 의해 폭력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강제와 강압의 결과 얻은 성과물이 개인적으로는 자기 긍정의 에너지로 작동하는 측면도 있었음을 간과할 수는 없다.

새마을운동은 자기 노력에 의해 고난을 극복하는 긍정적 자아를 발견하는 계기를 농촌과 같이 소외된 영역에도 제공해주었다. 물론 새마을운동은 조국 근대화와 패배주의적 정신의 일소라는 순수한 의도에서 기획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1971년 대통령 선거로 감지된 도시 지역 국민의 이반을 농민층의 지지로 견제하기 위해 정략적으로 기획된 운동이었다. 새마을운동은 농민 지지의 안정적 토대를 확보하기 위해 뉴딜 정책을 날림으로 모방함으로써 진행되었다. 당시 과다 생산된 시멘트를 농촌에 선별적으로 보급하면서 박정희 정권은 농촌에서의 건설 사업을 독려하기 시작했다. 처음에 농민들은 비협조적이었으나 새마을을 건설하기 위한 활동에 차츰 열성을 보였다. 열패감과 상실감에 시달렸던 농민들은 이 과정에서 일정한 성취감과 자신감을 발견하였다. 마을 공동체를 위해 함께 일하고 협력하는 과정에서 농민들은 공동체 속에서의 자신의 존재 가치가 인정되고 찬사 받는 경험을 획득할 수 있었다. 공동체에서 모범일꾼으로 인정받는 경험은 그들에게 새로운 것이었다. 이 경험 속에서 자기의 삶과 인격이 고양되는 기쁨을 그들은 느낄 수 있었다. 이 기쁨을 지속하기 위해 그들은 새마을운동을 위한 자기희생과 적극적 협력을 자발적으로 감행하기도 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한국인들은 개발과 성장의 역사에서 자기 정체성 및 자기 실존을 확인했다. 그들은 조국 근대화의 과정 속에서 자기 인생이 빛나고 있음을 경험했다. 높은 빌딩과 쭉 뻗은 도로, 번듯하게 단장된 시골 마을은 사적 실존의 자부심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작업 결과물이었다. 이 집단 작업에 참여함으로써 대중은 한국이라는 국민국가를 건설한 진정한 국민으로서의 자격과 존재 가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자기 경험의 역사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경제 건설 과정의 참여가 온전한 국민 자격의 획득을 의미하며, 경제 건설 과정이 곧 대한민국이라는 정치적 공동체의 건설 활동과 동일하다고 해석하게끔 만든다. 그들에게 건설하고 개발하지 않는 사회란 한국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하고 실존적 자기 회의를 유발한다. 건물이 올라가는 등의 성장을 체감할만한 물리적 경험이 없으면 많은 한국인들은 이내 불안에 휩싸인다. ‘가난이 다시 오지 않을까?’, ‘나의 삶은 제대로 굴러가고 있는 것일까?’, ‘생산 활동이 아니면 내 존재의 의미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그래서 한국인은 ‘필연적 삶’의 집단운동에 몰두한다. 박정희를 개발 경제의 영웅으로만 선택적으로 기억하고 숭배하는 박정희 신드롬은 사실 우리 몸과 정신에 깊숙이 훈습된 ‘필연적 삶’의 욕구와 생활방식에서 비롯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청춘의 서재]

, 에드워드 사이드, 김석희 역, 살림 2001.

김운하 / 소설가. 건국대 몸문화 연구소 연구원

인생을 다룬 소설이나 전기를 읽는 것은 타인의 생을 간접적으로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타인의 생이라는 거울에 자기 자신을 비추어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는 거기서 기쁨과 슬픔, 실패와 방황과 좌절, 꿈과 현실의 마찰과 그 사이에서 생겨나는 고뇌들, 예측 불가능한 행운과 불운들을 읽으며 인간적인 공감을 느끼기도 하고, 또는 굳센 의지와 신념, 치열하거나 심오한 사유가 드러내 주는 인간성의 고귀한 높이에 찬탄하며 경외심을 품기도 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결국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질문으로 되돌아 온다.

돌이켜 보면, 나는 젊은 시절에 전기류를 더 많이 읽지 않았던 것에 대해 크게 후회스럽다. 대학에 다니던 80년대, 그 암울하고 잔인한 시대를 살아가며, 오직 지금의 현실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하는 바깥의 문제에만 온통 몰두한 나머지 정작 한 개인으로서 ‘나는 무엇인가?’ 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관해선 사실상 거의 도외시해버렸던 것이다. 그것을 자아 정체성의 문제라고 불러도 좋다. 혹은 삶의 정체성 문제라고 해도 상관 없다. 나는 마치 무조건 물에 뛰어들어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기만 하면 그것이 수영인줄로만 아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바다에 겁 없이 몸을 던져 넣었다. 그런 이유로 내 청춘의 방황은 남들보다 더 길어졌고, 더 힘들었고, 더 우스꽝스런 한 편의 연극 같은 것이 되고 말았던 것 같다. 만일 내 청춘기에 타인들의 구체적인 삶의 기록들을 거울삼아 더 깊이 좀 더 자주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토록 무모하고 어리석게 좌충우돌 하지는 않았을까?

소설가 밀란 쿤데라는『커튼 Le Rideau』이라는 책에서 “무엇보다도 먼저 그 사람의 나이를 이해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이해할 수 없다.”고 쓰고 있다. 그는 특히 젊은 사람들의 특징을 방황이라고 보는데, 방황 가운데서도 특별한 방황이라고 쓰고 있다. 청춘의 방황이 하필 왜 특별하단 말인가? 그 이유는 청춘은 방황하면서도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로 방황하기 때문이다. 또 이중적인 의미에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첫째 청춘은 인생을 산 경험이 너무 짧기 때문에 아직 삶과 세상이 어떤 것인지 모른다. 둘째 아직 삶의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나는 내 경험에 비추어 거기에 딱 한 가지만 더 덧붙이고 싶다. 가엾게도 청춘은 자신이 이중적인 무지에 빠져 있다는 그 사실조차 모른다. 쿤데라는 청춘의 방황을 방황 자체로 진심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은 오직 청춘이라는 터널을 통과한 후에 거리를 두고 뒤를 돌아보게 될 때다.

나 역시도 그랬던 것 같다. 길을 잃고 헤매는 방황과 표류의 긴 시간의 끝에서야 겨우 그런 모든 경험들이 갖는 의미를 뼈아프게 이해하게 되었으니. 내가 처음『에드워드 사이드 자서전(원제 Out of place)』을 읽으며, 무엇보다 그 책의 마지막 문장에 마음이 흔들렸던 것도 그런 이유였으리라.

“이따금 나 자신이 한 줄기 흐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고체처럼 충일하고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라는 개념,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중요하게 여기는 정체성보다는 한 줄기 흐름이 나는 더 좋다….나는 제자리에 머물러 있기보다 거기서 엉뚱하게 벗어나기를 좋아한다. 그렇게 된 것은 그만큼 내 인생에 불협화음이 많았기 때문이리라. ”

어쩌면 이 한 문장에 에드워드 사이드가 자서전에서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말이 모두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사이드의 자서전은 독특하게도, 어린시절부터 삼십대 초반 청춘의 나이에서 끝난다. 그는 백혈병에 걸려 투병생활을 하던 중인 94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하여 5년만인 99년도에 가서야 힘겹게 책을 끝낼 수 있었다. 이 책은 그가 쓸 수 있는 마지막 책이 되었다. 2003년 9월, 백혈병이 끝내 그의 삶을 다른 세상으로 데려갔다. 68년 동안의 한 생이 그렇게 마감되었다. 치명적인 병과 싸우는 와중에도 2000년에는 이스라엘의 무력사용에 항의하기 하기 위해 레바논으로 달려가 레바논 국경의 이스라엘군 초소에 돌을 던지며 시위를 하는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을 보여주었다는 걸 생각하면 놀랍기만 하다.

그는 이 회고록을 쓴 가장 중요한 이유로 “현재의 생활과 당시의 생활 사이에 가로놓인 시간과 공간의 간격에 다리를 놓고 싶은 욕구였다.” 고 말한다. 그리고 그 간격에 대해 왈가왈부하며 따지고 가치평가를 하려는 것이 아니라, 초연하고 객관적으로, 오직 명백한 사실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는 이 책을 쓰면서 일종의 사명감을 느꼈다고 쓰고 있다. “영원히 지나가버린 역사와 상황은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하지만 추억이나 대화를 통해 이따금 되살아날 뿐 기본적으로 회상되거나 기록되지 않은 역사와 상황은 또 얼마나 허약하고 덧없는 것인가를 새삼 절실히 깨달았다.”

나는 그 문장을 읽으며 시간과 이야기의 관계에 대한 평소의 내 생각을 다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무한한 시간조차도 기억과 이야기가 아니라면 무에 불과하다는 것, 따라서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이야기를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남긴다는 것. 인간의 삶은 비록 시간 속에서 허망하고 덧없이 사라져 가는 것이지만, 이야기를 통해 망각의 운명으로부터 벗어나고, 삶은 절대적인 소멸이 아닌 어떤 지속성을 얻게 된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아마도 이야기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시간과 죽음을 의식하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고 근원적인 욕망인지도 모른다.

사이드는 고통스런 병상 위에서 이 책을 기록해 나갔지만, 지나온 먼 과거와 현재 사이에 놓인 망각의 위험에 처한 기억의 간격들에 글쓰기라는 수단으로 연약한 구름다리를 놓으면서 삶이 가져다 주는 여러 곤란들과 고통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얼마나 삶을 사랑했는가를 다시 깨달았다고 썼다.

사실 에드워드 사이드란 이름은 무엇보다 그가 1978년에 발표한 책『오리엔탈리즘(Orientalism: Western Conceptions of the Orient)』이라는 저서로 우리에게 기억되고 있다. 그 책에서 그는 동양은 서양보다 열등하다는 사고방식의 유럽-서구 중심적 음모와 편견의 역사적 기원을 밝혀 세계에 충격을 주었고, 그 책 이후 서구에서나 한국 같은 비서구 사회에서도 역사와 세계를 보는 관점이 많이 달라졌다. 나 역시 그의 책을 읽고 나 자신의 무의식 속에 깊이 틀어박혀 있는 오리엔탈리즘을 새삼스레 다시 깨닫고 화들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고, 이후 서구 문화와 제도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으며 서구인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을 자신도 모르게 마치 우리 자신의 것인 양 내면화 해왔던 한국과 같은 사회에서는, 그가 맞서 투쟁하고자 했던 오리엔탈리즘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의 문제이기도 하다.

‘한 시대를 움직이는 책’ 이라는 찬사를 받았던 그의 책『오리엔탈리즘』은 사실 끊임없이 정체성 혼란을 겪으며 평생을 경계인으로 살아야 했던 그 자신의 삶의 편력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는 책이기도 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더 흥미롭게 읽었던 이유도 그런 인간적인 면들 때문이었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1935년 영국 치하의 예루살렘에서 팔레스타인인으로 출생했다. 1947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가족들은 모두 이집트로 이주했고, 1950년대 말에그는 혼자 미국으로 건너간다. 그의 가족은 아랍인이지만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를 믿는 집안이었다. 이집트에서 사업가로 성공한 아버지 덕에 윤택하게 살았고, 프린스턴과 하버드대에서 공부하고 학위를 받았으며, 대학의 교수로, 세계적인 비평가이자 실천적인 지식인으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팔레스타인 출신의 아랍인이자 카톨릭 세례를 받은 미국 국적을 가진 그의 삶은 늘 불안정하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자신이 어느 쪽에도 완전하게 속하지 못한 이방인이며, 경계인일 뿐이라는 불안은 젊은 시절 내내 그를 사로잡았다. 그에게 팔레스타인은 평생 이중적인 감정을 안겨주게 되는데, 어린 시절부터 “해결되지 않는 슬픔과 이해할 수 없는 분노의 근원” 이었던 그 문제는 회고록을 쓰는 순간까지도 여전히 그에게는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분열된 감정, “비통한 느낌과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과 슬픔을 자아” 내는 원천이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자아가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혼란스런 균열로 이루어져 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기묘하게도 영국의 한 왕자 이름에서 딴 에드워드라는 이름과 사이드라는 아랍식 성이 조합된 그 이름에서조차 그가 평생 살게 되는 그런 ‘경계인’ 적인 삶의 정체성이 마치 운명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는 자신을 경계인으로 생각했고, 또 끝까지 한 명의 경계인으로 살았다.

그럼에도 그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조화를 이루는 민주주의 국가를 꿈꾸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쳐 투쟁했다. 억압과 배제가 없는, 다양하고 이질적인 문화들이 평화롭게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꿈꾸며 온몸을 던져 그 꿈을 위해 싸웠다. 제국주의나 서구 중심주의에 일관되게 반대했지만, 삶과 인간성을 억압하는 어떤 권위나 권력, 경계 짓기에도 순응하길 거부하는 비타협적인 삶을 살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자서전에서 고체처럼 단단하고 안정된 자아나 정체성이란 개념을 거부하고 대신에 한 줄기 흐름, 끊임없이 경계를 벗어나 바깥에 머무르려는 도저한 흐름의 연속으로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한 것은 지극히 정당한 것이었다.

나 자신도 언제부터인가 더 이상 어떤 통일된 단일한 정체성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던 것 같다. 나는 정체성이란 것을 현재 주어져 있는 고정된 무엇이 아니라, 끊임없는 새로운 시도, 혹은 창조를 통해 형성하고 만들어가야 하는 낯선 미지의 어떤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지난 시절의 모든 방황과 표류를 수락하고 긍정할 수 있는 것도 그러한 방황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 내 삶을 형성하고 실패와 오류를 통해 끊임없이 다른 새로운 무언가를 탐색하고 추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사이드가 『오리엔탈리즘』에서 인용했던 12세기 철학자 생 빅토르 후고의 한 문장을 기억한다.

“고향을 감미롭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직 허약한 미숙아이다. 모든 곳을 고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이미 상당한 힘을 갖춘 사람이다. 그러나 전 세계를 타향이라고 느끼는 사람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경계인으로 산다는 것, 그것은 결국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방인으로 산다는 것이다. 그런 삶은 결코 쉬운 것이 아니다. 끝까지 당겨진 활처럼 팽팽한 긴장감, 집중력, 위험의 감수, 이 모든 것을 견뎌낼 의지와 신념이 필요하다. 내가 사이드의 자서전에서 새삼 발견한 것도 바로 그런 것이었다. 세상 뿐 아니라 자기에게조차 이방인이 되길 거부하지 않았던 한 정신의 편력.

웹진이 페이지를 옮겨 이사를 하는 도중입니다〈ⓔ시대와 철학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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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이사를 마치고 정상적 가동이 되어야 했지만 악성코드로 인해 몇 번 작업을 다시 하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현재 4백건이 넘는 기사들을 일일이 수작업을 통해 복사 뜨기를 해서 메모장에 옮긴후 다시 그것을 웹진에 넣는 지루한 작업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성코드로 인해 또 다시 문제가 발생할 소지가 많습니다. 중요한 시기에 웹진이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점 회원 및 독자 여러분께 깊이 사과드립니다.

이사작업을 최대한 빨리 마치고 다시 정상화 할 수 있도록 편집위원회는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