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자기를 괴롭히는 생각의 습관을 버려라>[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6-1

박은미(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박은미의 <진짜 나로 살 때 행복하다(자기 자신과의 화해를 위한 철학 카운슬링), 2013, 소울메이트 출판사>의 내용을 개제한 것임을 밝힙니다.

?

?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 러시아 문학과 정치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백작(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 1828년 ~ 1910년)은 러시아의 위대한 소설가이자 시인, 개혁가, 사상가이다.(사진출처: www.hemovac.com)

 

고뇌 없는 인생은 발전이 불가능하다. 고뇌야말로 정신이 향상되어가는 과정이다.

– 톨스토이-

??

당신은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가?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잘 알면 그 스트레스를 조절하려고 노력하게 되고 조절을 위한 방안을 강구해내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심각해지는 경우는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자신이 무엇 때문에 어느 정도까지 스트레스를 받는지 모르는 경우이다. 스트레스 관리에서 문제가 되는 유형의 사람은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 에너지를 쓰느라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때는 그게 힘든 줄도 몰랐다.”고 말하는 경우는 견뎌내야 한다는 확고한 전제 때문에 힘들거나 말거나 그 어려움을 이겨내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었다는 소리가 된다. 이는 자기 자신의 상태를 완전히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한 인간 인식의 특성 때문이다. 인간의 인식은 항상 상황이 벌어지는 T1시점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그 시점이 지난 T2시점에서야 이루어진다. 상황이 벌어지는 시점에는 당황해 ‘이게 뭐지?’ 하다가 상황이 종료된 시점에서야 ‘아 그렇구나!’ 하고 파악하게 되는 것이다.

원래 나 자신이 스스로를 ‘내가 이러이러하다’고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어렵게 말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기 어렵다. 타인에 대해서는 파악이 쉽다. 저 사람이 지금 이러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는데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한 쪽으로 편향적으로 잘못 파악하고 있구나 하는 것까지 알게 된다. 그러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에 대해서는 그러한 객관적 파악을 하기 힘들다. 나는 나이기 때문에 나 자신을 객관으로 두고 파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즉 메타차원(상위차원)에서 자신에 대해 인식을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현재의 자신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과거의 나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객관적인 파악이 가능하다.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일이 벌어진 시점이 지난 지금, 어느 정도 객관적인 인식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즉 제대로 된 인식은 사건 발생 시점이 지나야 가능해지는 것이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로마 신화에서 미네르바와 항상 함께 다니는 신조(神鳥)인 부엉이를 말하는데 지혜의 상징이다. (출처:wikipedia)

그래서 헤겔은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황혼이 되어서야 난다.”고 말했다. 미네르바는 지혜의 여신을 지칭한다. 헤겔의 이 말은 ‘인식은 항상 한 발 짝 늦게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자신의 상태에 대해서 일이 벌어지는 당시에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이러한 특성 때문에 우리는 자신이 어떠한 문제에 얼마만큼이나 스트레스 받는지를 파악하지는 못하면서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서는 상당히 객관적으로 인식해낼 수 있다.

??

스트레스를 견디는 데에만 골몰하다보면

?

우리가 타인의 스트레스에 대해 전해들을 때 보이게 되는 반응에는 2가지가 있다. 하나는 ‘뭘 그런 것 가지고 스트레스 받느냐’는 반응이다. 그러나 그 사람은 내가 아니니까 나와는 다르게 반응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뭘 그걸 가지고 스트레스를 받느냐 생각하지만 오히려 진실은 ‘그러한 것에 스트레스 받는 것이 그 사람의 특성이다’라는 것에 가깝다. 그 사람으로서는 그것에 스트레스를 받을 수밖에 없어서 받는 것이다. 스트레스 받고 싶어하는 사람은 없다. 그 사람도 그것에 스트레스 받고 싶지 않지만 그 자신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이다. 즉 자신도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존재방식 때문에 그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나는 저런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는데 그 사람은 어떻게 견뎠을까’ 하는 의문을 보이는 반응이다. 이 경우 ‘그 사람은 왜 그런 스트레스의 근원을 빨리 해결하지 않고 계속 견디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사람은 스트레스를 우선 견디려고 하기 때문에 당시에는 얼마나 큰 스트레스를 받는지조차 의식하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중에서야 자신이 그런 큰 스트레스를 받고 어떻게 살았는지가 스스로도 의심스러워지게 되곤 한다. 생각해보라. 우리는 지금 그 때로 돌아가 그렇게 다시 하라면 죽었다 깨어나도 할 자신이 없는 그런 일들을 헤쳐 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그래서 주변에서 “너무 힘든 것 아니냐?”고 말해주면 그 때서야 ‘정말 이게 힘든 건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 때 남들도 힘들어할 일이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받기도 한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힘들었는데 나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자리에 있었으면 힘들었을 일이었구나, 힘들어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니구나!’ 하면서 위로를 받게 되는 것이다.

또 어떤 때는 누구나 힘들 일이었다는 사실에 억울함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그렇게 힘들 수밖에 없었던 일을 내가 겪어내야 했다는 사실에 화가 나기도 하는 것이다. 나 자신이 인내력이 부족하거나 어떤 나의 고유한 특성 때문에 힘들었다면 모르겠지만 누가 그 일을 겪어도 그 일은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내가 왜 그러한 일을 겪었어야 했는지 억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여하간 스스로 어떤 일에 얼마만큼의 스트레스를 받는지를 파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가 남들 같으면 받지 않을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도 있고, 남들 같으면 많이 스트레스 받을 일인데도 잘 넘기는 경우가 있다. 본인이 너무 견디려는 사람은 아닌지 혹은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아닌지 살펴보자. 너무 견디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좀 쉽게 쉽게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너무 견디지 않는 사람은 주변 사람들로부터 “너 때문에 못살겠다. 생각 좀 하면서 살아라.” 하는 소리를 듣게 마련이다.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무시하면 안 된다. 주변 사람들은 내가 못 보는 나의 모습을 봐주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래서 나를 만나는 사람 세 명이 똑같이 말하면 그 말을 들으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 나보다 더 나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조건에 있는 사람들의 말을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때로는 그 말을 들어 넘기는 것이 고통스러울지라도 그 말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어쩌면 그 말이 고통스럽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이 진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려고만 해서도 안 되고,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지 않으려고 해도 안 된다. 그 정도를 알 수 없다면 주위 사람에게 물어보자. “내가 스트레스를 너무 견디나요, 아니면 너무 안 견디나요?”

??

내 탓만 해도 안 되고 남 탓만 해도 안 된다

?

누구나 잘못할 수 있다. 타인의 잘못은 무시하고 자신의 잘못에만 골몰하면 열등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무언가 잘못되었을 때 자신의 실수와 잘못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이 실수와 잘못을 다시 반복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질문하는 편이 낫다. 그런데 이럴 경우에 남 탓을 하고 싶은 심리구조상 남 탓을 자꾸 하고 싶게 된다. 내 탓은 생각하려고 노력해도 생각이 잘 안 나지만 남 탓은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해도 자꾸만 생각나는 법이다. 물론 우울증을 앓는 경우에는 반대가 된다. 내 탓만 생각나고 남 탓은 생각나지 않는다.

건강한 인식은 내 탓과 남 탓을 현실에 맞게 하는 것이다. 내 잘못이 어느 정도이고 남의 잘못이 어느 정도인지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즉 남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이고 내 탓을 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까지인지를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것이다. 이렇게 객관적으로 파악해놓고 나면 변화시킬 수 있는 것과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때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은 변화시키면 되고, 변화시킬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변화시킬 수 없음을 받아들이면 마음이 편해진다.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왜 변화되지 않느냐고 원망해봐야 변하지 않는다.

인간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을 두고 변화되지 않는다고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다. 주어진 환경과 타인의 행동은 내가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환경은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이 있기는 하지만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는 경우가 많다. 타인의 행동에 대해서도 이러저러한 요청은 할 수 있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뜯어고칠 수는 없다.

생각해보라. 내 행동도 내가 고치기 힘든데 남의 행동이 나의 말에 의해서 고쳐질 것이라고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인가? 자신의 행동을 변화시키기 힘드니까 우리는 자꾸 남이 변하기를 바라게 된다. 그 편이 나에게 가장 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마음이 돌아가는 방식은 이렇게 자기 마음이 편해지는 방식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부분은 변화시키려 노력하고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은 수용하면 된다는 말이 너무 맞는 말이라서 진부해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말에서 철학카운슬링이 강조하고자 하는 부분은 ‘변화시킬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한 판단을 나의 욕망에 맞추어 비틀어서 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변화시킬 수 없는 부분을 두고 변화되기를 바라느라 너무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한다. 그렇게 바라기만 하고 있는 편이 나의 에너지가 덜 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우매한 일이다. 변화시킬 수 있는 나를 변화시키려고 하지 않으면서 변화시킬 수 없는 남만 붙잡고 통사정하는 우리 마음의 비논리를 잘 직면해야 한다.

?

?

?

?

?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내 고향은 거제도라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3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나가 7살에 병이 들었다. 내 우로 언니가 둘 있었는데, 큰 언니가 먼저 병이 들었다. 울 언니는 얼굴에 병 표가 마이 나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고, 나는 병 표가 얼굴에는 안 나고 다리에 나더라. 그것도 무릎 우로 나서 치마로 감추모 안 보였다. 큰 딸도 한스러운데 셋째 딸까지 그 험한 병에 걸리고 보이 울 아부지 엄마 맘이 어땠겠노. 내가 펄쩍거리고 뛰다가 행여라도 다리에 난 병 표가 들킬까봐 울 엄마는 나보고 뛰지도 못하게 했다.

7살에 병이 들어도 나는 내가 병든 줄을 몰랐다. 우리 집에서는 아무도 나를 환자 취급 안 했거든. 어린 기 병 걸린 게 맘이 아파서 내말은 무슨 말이든지 전부 다 들어줬다. 국민학교도 갔다. 집에만 있을 때는 몰랐는데 학교를 가니까 자연적으로 알게 되더라. 나도 모리게 자꾸 손이 치마로 가서 잡고 있었제. 펄쩍 거리고 뛰다가 다리 병표가 들킬까 무서버서 체육시간이 되모 자꾸 뒤로 가는 기라.

하루는 공부 마치고 집에 갈라고 하는데 담임 선생님이 부르더라. 가니까 손을 펴 봐라, 손을 뒤집어 봐라 하데. 요리조리 보다가 고마 치마를 걷어 보라는 기라. 나는 안 걷을라꼬 자꾸 움찔움찔 했다. 그래도 어짜겄노 그마 다리 병표를 봤는 기라. 담임 선생님은 아무 소리 안 하고 “내일부터 집에 있어라.” 하고 나가더라. 응, 그 말은 인자 학교 오지 말라는 기지. 혼자 터벅터벅 걸어와서 말하니까 울 엄마도 집에 있으라카더라. 그 길로 학교도 못 가고 집에만 있었다.

뭐라고? 원망스럽지 않냐고? 모리겄다. 그때는 내가 큰 죄를 지은 것만 같고 또 선생님이 오지 말라니까 가모 안 되는 걸로 생각했고. 그래도 그때는 울 엄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괜찮았다. 학교는 우리 아버지가 우기서 보내줬다. 엄마는 문맹이다. 내 우에 작은 언니는 나하고 큰 언니 때문에 참 마이 힘들었다.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밖에 나가모 잘 놀아주지도 않고 그랬다.

대성당 앞 벚나무

대성당 앞 벚나무

집에만 있으께 참 심심하더라. 학교를 안 갈 때는 몰랐는데 다니다 안 다니니까, 아이고 그 참 심심하데. 동네 아(이)들이 학교 갈 때는 집에 있다가 길에 아(이)들이 안 보이모 산으로 놀러갔다가 바닷가로 내리왔다가 그리 하다가 또 아(이)들이 학교서 올 때쯤 되모 집에 콕 들어왔다. 죄 지은 것도 없지만 어린 맘에 산으로 바닷가로 쏘다니면서 사람들 눈에 안 보일라고 애 마이 썼다.

큰 언니는 얼굴에 볼긋볼긋하게 나더라. 얼굴에 그리 나께 할 수 없이 학교도 못 가제. 집에 있으께 병이 나도 자연히 밥을 해 묵게 되는 기라. 작은 언니는 학교 가고 나는 어리고, 또 내 밑에 남동생은 마이 어린 기라. 아부지하고 엄마는 아침부터 해질 때까지 밖에서 일을 했다. 그라니까 큰 언니가 엄마 노릇을 해 줬제. 병들어도 언니가 집에 있으께 부모님도 그리 부지런히 날뛰었고, 우리 식구는 밥 안 굶고 쌀밥도 묵고 했다.

하루는 언니가 물양동이를 이고 우물에 물을 뜨러 갔다 아이가. 근데 우물가에 있던 여자들이 언니를 보고 소리 지르고 물을 끼얹고 난리를 피웠는 기라. 와 그랬겠노. 물 못 떠가게 그라제. 병 걸리 갖고 물뜨러 오께나 저거한테 병 옮는다고 그 난리를 피웠제. 여자들이 떼거지로 달리 들어서 언니를 이리저리 흔들고 옹기를 집어 던지고 물을 바가지 채로 갖다 붓고 물담아 이고 다니는 옹기를 발로 차고…… 휴우 휴이….

물에 흠뻑 빠져갖고 혼이 나가서 들어왔는데, 그날로 언니가 병이 났다 아이가. 그만 시도 때도 없이 발작을 하는 기라. 여자 셋만 있으모 그마 혼이 나가는 기라. 그마 셋이 지나만 가도 그래. 그라이 집에만 있는데 울 부모 맘이 어땠겠노. 어데 가서 따지지도 몬하고 누구한테도 말 몬했다. 그날 들일 갔다가 들어오셔서는 언니 그 꼴 보고 아무 말도 안 하고 앉아 쉬지도 않고 일만 하더라.

나는 나이가 없어서 그때는 그 심정을 몰랐제. 한참 살고보이 인자는 생각만 해도 숨이 턱턱 막힌다. 이 병은 옮는 기 아이다. 우리 식구 여섯 중에 큰언니하고 나만 걸린 거 보모 모리나. 걸릴라 쿠모 다 안 걸맀겄나. 내 밑에 남동생은 나보다 나이가 마이 적었다. 엄마는 일 나가서 안 들어오고 동생은 배가 고파서 운다. 달래도 안 되고 배가 고프니까 자꾸 칭얼거리기도 하고……

암죽을 먹이야 하는데 나도 얼라 아이가. 어찌 해야 할지 몰라서 생쌀을 입에 넣고 씹었다. 꼭꼭 씹어서 먹이기도 하고, 내가 씹은 쌀을 밥그릇에 담아 겨우겨우 불을 때서 끓여 먹이기도 했다. 내가 어리지만 생쌀을 그대로 주모 안 되겄고 굶길 수도 없고 그래서 그리 했는데, 그래도 내 맘 한 구석에 겁이 나서 엄마가 들어 오모 그 말을 못 했다. 말할 용기가 없는 기라. 혹시라도 어린 남동생이 병에 걸리모 어짜노 싶어서 조마조마했다.

그래도 그 동생은 병 안 걸리고 건강하게 잘 산다. 이기 옮는 병이모 우리 남동생은 걸리도 내가 쌀을 씹어 먹인 만큼 병이 걸리야 하는 거 아이가. 큰언니? 그때는 우물가에서 그 일을 당한 후로 병이 점점 들어서 그냥 멍하니 있는 기라. 아가 울어도, 그거를 암죽을 끓이가 먹이야 되는데 그것도 안 될 정도로 그리 병이 깊어가더라고. 내 맘에 쌀을 씹어 먹이모 그기 암죽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천방지축 뭐가 뭔지도 잘 모르고 날 새모 산에 간다. 산에 가모 봄이면 진달래가 온 천지다. 그거 뜯어서 입에 넣어 보모 싸~ 한 기 맛이 있었다. 맨날천날 산으로 들로 바닷가로 다니다가 배고프모 집에 와서 밥 한숟가락 묵고, 동생 울모 업어주고 그랬다. 나는 별로 힘들지도 않고 학교 안 가는 게 그리 서럽지도 않더라. 심심한 거 하고 친구들 옆에 가기 힘든 것만 빼모 그리 힘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우리 큰언니가 자꾸 문제가 생기는 기라. 우물가에서 그라고 온 뒤로 대문 밖을 안 나가는데 얼굴에 나는 기 더 표가 나. 점점 마이 나고, 나는 얼굴에는 안 나는데 왜 그리 얼굴에 나는지. 병 표도 마이 나고 정신도 나가고, 동네 사람들 눈에 우리 언니는 같은 동네에 있으모 안 되는 사람인기라. 저거 때문에 언니가 정신이 그리 됐는데……

내 눈에도 언니가 갈수록 심해지는 것 같더라. 집에 있다가도 갑자기 소리 지르고 벌벌 떨고, 그라모 나는 어째야 할지 몰라서 덩달아 겁이 나고 그랬다. 아마 우리 부모님 마음이 마음이 아니었을 기라. 지옥이 따로 있겄나, 그기 지옥이지. 하기사 그보다 더한 지옥이 기다리는 걸 나는 몰랐지.

사람들이 처음에는 모린 척 하다가 점점 수군거리고, 언니를 소록도로 보내라는 기라. 우리 부모님은 애써 못들은 척 해도 마이 힘들었제. 가까이 지내서 걱정하던 사람도 시간이 지나니까 “인자 아(이)들을 그마 보내야 안 되겄나?”하고, 집에 오는 것도 좀 뜸해지는 것 같더라. 그때는 순경이 병자들을 잡아가기도 하고 그랬다.

그라다가 인자는 순경이 우리 집으로 온다. 뭐하러 오겄노? 동네 사람들이 우리 집에 문디 있다고 신고하니까 순경이 나오지. 빨리 잡아서 보내라고 신고하는 거지. 아버지 엄마는 들일하다가도 멀리서 순경이 우리 집으로 가는 거 보이모 어떤 때는 소리치고 어떤 때는 쫓아온다. 그라모 나하고 큰언니는 뒷산으로 내빼는 기라. 그냥, 그냥 산으로 들어간다. 언니하고 쪼그리고 있다가 해지모 집으로 들어가제.

하루는 집에 있는데 순경하고 동네사람들이 몰리 오는 기라. 아버지가 대문 앞에서 “아(이)들 없다. 왜 이라노?”하고 두 팔을 쫙 벌리고 버티고 서서 큰 소리를 지르는 기라. 응, 우리보고 빨리 달아나라는 뜻이지. 언니하고 나는 뒷문으로 돌아서 또 산으로 간다. 가다가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앞으로 퍽 고꾸라지고 있는 기라. 순경이 집안으로 들어 올라고 아버지를 사정없이 밀친 기라.

성심원 산책로

성심원 산책로

마음이 아프고 눈물 나고 그런 것 보다 큰언니하고 나는 겁에 질려서 계속 산으로 산으로 들어간다. 정신이 나간 언니 손을 꼭 잡고 안 잡힐라고 정신없이 뛴다. 온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이 아득해. 어데 나무 밑에 덤불 밑에 쪼그리고 그리 있다가 어두워지모 엉금엉금 내려 왔다. 해가 있으모 못 내리오제. 동네사람들이 우리 보모 그냥 안 두지. 어짜든지 우리를 동네에서 쫓아 버리야 저거가 병 안 걸린다고 생각했으니까. 어떤 때는 어두워져도 안 가고 우리 집 마당에 버티고 있기도 하고.

응? 아이다. 다른 집에도 병자가 있었다. 그때 그리 흔한 병도 아이지만 드문 병도 아니었다. 그 사람들? 다 소록도로 가든가 집을 떠나든가 했제. 우리는 아버지가 어짜든지 멀리 안 보내고 옆에 가까이 두고 병을 낫게 할라고 하니까 동네 사람들이 큰언니하고 나를 어데 보내라고 해도 못들은 척하고 버틴 거지. 그라고 우리 집이 그래도 좀 먹고 살았거든. 그라니까 아주 함부로 하지는 못했제. 그래도 결국은 떠나왔제.

고향? 생각 마이 나제. 어릴 때 떠나와도 이상하게 기억이 잘 난다. 봄이 되모 도다리 쑥국이 일품이다. 니가 어째 도다리 미역국을 아노? 니도 거제도라고? 거제도 어데고? 고향 사람 만났네. 맞다. 도다리 넣은 쑥국하고 미역국은 지금도 생각난다. 희한하게 쑥하고 도다리가 어울린다. 된장 약하게 풀어 넣고 캐온 쑥하고 싱싱한 도다리가 있는 국은 봄이 되모 생각난다. 미역국도 도다리 넣고 끓이면 국물이 진하고 참 시원타.

하이고, 너거 할머니도 숭어 간 맛을 알았네. 숭어 간, 그거 안 묵어 본 사람은 모린다. 나도 어릴 때 숭어 어장이 옆에 있었다. 어린 마음에 숭어 간을 한번 훔쳐 묵어 봤는데, 맛있는 기라. 몇 번 훔쳐 묵었지. 하하 흠, 참 맛이 있다. 숭어 한 마리에 간은 한 개제. 꼭 밤톨 맨치 생긴 게 싱싱한 숭어 간은 탱탱하다. 소금에 콕 찍어 묵으모 쫄깃한 기 참 맛이 있다. 보통 탁주하고 같이 묵는데, 술도 사람에 따라 발효하는 기 다른 기라.

누룩도 보통 요새 파는 누룩이 아이다. 그 누룩이 곡식 아이가. 물에 불리서 만들어 윗목에 두모 한 3일 뒤에는 발효하는 기라. 어데, 3일 후에 발효되는 기 정상이다. 더 오래 두모 술맛도 없고 술 색깔도 안 좋다. 그런데 더 빨리 발효되는 경우도 있다. 그래 갖고 술을 담가도 담가는 사람에 따라 술이 잘 익기도 하고 잘 안 익기도 한다. 술이 사람에 따라 다리게 발효되는 기지. 말하자모 술이 사람 가리는 기라.

칼치 회 묵어 봤나? 그거는 안 묵어 봤고나. 칼치는 바다에서 올라 오모 바로 죽는다. 칼치 잡는 배에서나 맛볼 수 있다. 그래도 금방 잡아갖고 금방 들어 오모 묵어도 괜찮다. 칼치는 반짝반짝한다. 맞다, 그렇제. 칼치는 비늘을 벗기야 된다. 칼치 비늘은 호박잎으로 마무리 하모 된다. 호박잎으로 몇 번 쓱 문지르모 된다. 뼈채 썰어서 된장에 함께 묵으모 그 맛이 기차다. 고소하고 참 맛있다. 에이, 고등어 회는 비리다. 비리서 별로라.

내 노래 한 번 해볼까?. “서러운 내 인생 흐르고 흘러가도 잊혀지지 않고 이 내 몸이 서럽고 서러워 한 세상 살아도 서러운 세상”. 나는 노래하는 기 좋다. 가수가 되고 싶은 적도 있었는데, 옛날에는 한 번 부르모 한 번에 몇 곡씩 연달아 불렀다. 노래를 부르고 있으모 서러움도 잊어뿌고 눈물도 안 나고 괜찮다.

니는 차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여게 뭐할라꼬 오노? 니가 차가 있어야 하는데, 그기 걱정이다. 저게 박카스 있다. 박카스 묵어라. 저게 마이 안 있나. 한 개만 묵지 말고 마이 가져가라. 고마 한 박스 가져가라. 목마르고 할 때 묵으모 좋다. 또 갖다 준다. 걱정하지 말고 가져가서 차 가면서 묵어라. 뭐 할라고 또 온다고, 안 와도 된다. 니가 너무 힘들다 아이가. 내 걱정 하지 마라.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침몰한 세월호, 침몰한 대한민국]-6

<문창극의 ‘하나님의 뜻’은 도착증 환자의 환상일 뿐이다>

김성우(ⓔ시대와 철학 편집위원장)

?이 글은 <프레시안>과 공동게재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우려면 신이 존재해야 할까? 아니면 존재하지 않아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하여 사르트르는 무신론을 택한다. 그의 실존주의는 신이 없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야 인간에게 미리 정해진 본질(시나리오)이나 규범이 없게 될 테니까? 다시 말해서 인간이 살아가면서(실존하면서) 자신의 시나리오(본질)를 써 가는 작가가 된다. 그는 도스토예프스키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자유를 선포한다.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슬라보예 지젝은 현대 정신분석학의 대가인 라캉의 말을 다음과 같이 인용한다.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는 이러한 말로 정치적인 전체주의의 병리적인 현상을 설명한다. 진정한 스탈린주의 정치가는 인류를 사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끔찍한 정화(숙청)와 집행(학살)을 수행한다. 그의 마음은 그 일을 하면서도 찢어지는 듯이 아프다. 그렇지만 그는 그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일이 인류의 진보를 향한 그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 그는 단지 ‘역사적 필연성’의 도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는 전형적인 도착증 환자의 태도이다.

꾸미기_유럽2013.01 462도착증의 대표적인 유형은 가학증인 사디즘과 피학증인 마조히즘이다. 도착증의 전형적인 태도는 자신을 ‘큰 타자의 도구’로 여기는 것이다. 여기서 큰 타자는 주체에게 그 상징적 정체성을 부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정치가에게는 ‘국민의 뜻’, 기업가에게는 ‘소비자의 욕구’, 일신교도들에게는 ‘신의 뜻’, 민족주의자에게는 ‘민족의 사명’, 관료에게는 ‘조직의 명령’ 등이 그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대표적 사례인 사디스트는 타인에게 고통을 가하면서도 자신은 책임이 없다고 느낀다. 그는 자신을 ‘큰 타자의 뜻’을 성취하는 수단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는 일을 저지르면서도 그것에 대한 책임을 부정하는, 도착증에 전형적인 부인(disavowal)에 해당한다.

지젝은 이러한 도착증의 범주를 가지고 정치적 전체주의는 물론 테러리즘에 빠져든 종교적 근본주의까지 해명한다.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정적을 살해하거나 표적물을 죽일 때도 역시 ‘알라신의 뜻’에 호소한다.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나자 이완용은 세 차례에 걸쳐 경고문을 <매일신보>에 실었다. 특히 5월 29일에 기고한 제3차 경고문에서 그는 조선이 일본에 식민지가 된 것도 다 ‘상천(上天, 유교의 하나님)의 뜻’이라고 썼다. 따라서 일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움직임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망령된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은 매국도, 제국주의적 침략도 정당화하는 마법 지팡이이다.

혹시, 문창극 국무총리 후보의 ‘하나님의 뜻’에 관한 발언도 이러한 도착증적인 증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까? 이제는 유명해진 그의 온누리 교회 강연록(국무총리실 제공)의 한 구절을 인용해보자.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한국방송공사(KBS) 화면 갈무리

“그때도 그러면 왜 그럼 우리나라를 보호해 주셨으면 일본한테 합방하지 않게 하시지, 하나님은 왜 이 나라를 일본한테 이렇게 당하게 식민지로 만들었습니까? 라고 우리가 항의할 수 있겠지, 속으로. 그런데 저는 아까 서두에 말씀드렸듯이 하나님의 뜻이 있는 거야. 우리한테 너희들은 이조 500년 허송세월을 보낸 민족이다. 너희들은 시련이 필요하다. 너희들은 고난이 필요하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신 거라고 생각해요. 그 고난 속에서 우리가 36년을 지나고 난 다음에야 마치 광야의 40년 생활을 하고서 우리가 가나안 땅으로 들어 갈 수 있듯이 36년의 고난을 거치고 난 다음에 대한민국에게 독립을 허용하신 거예요. 그것도 다 하나님의 뜻이라, 이거예요.”

종교적 근본주의의 특징은 일종의 논리적인 합선(short-circuit)이다. 세속적인 것과 신성한 것을 제멋대로 합선시켜 구사하는 것이다. 광신주의적 살인마는 표적물이 된 사람에게 보낸 협박 편지를 신의 분노로 포장한다. 그는 교묘히 세속적인 협박 편지가 주는 공포와 최후의 심판 때 신의 분노를 마주할 때 일어나는 두려움을 섞는다. 문창극 후보자의 논리에도 이러한 합선이 존재한다. 학술적이거나 객관적인 근거도 없이 우리의 민족사와 신성한 섭리를 뒤섞어 민족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한다. 식민 지배, 더 나아가 분단과 6·25라는 민족적 비극의 역사를 단 한마디로 풀어낸다. 이런 사건 모두 다 우리 민족을 단련시키려는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나님은 너희들은 안 되겠다. 다시 고난을 더 가져라, 그래서 분단을 시켰어요. 그것뿐입니까? 6·25까지 만들어 주셨어요. 이 6·25까지 주신 거야. 우리 생각에는 이야, 하나님 참 너무 하다, 이럴 수가 있냐. 어떻게 6·25를 우리에게 주셨습니까? 6·25가 저는 이렇게 얘기하면 지가 죽지 않았으니까 말이야, 6·25를 또 저렇게 미화한다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단련이 된 거예요, 6·25가 있었기 때문에.”

이런 논리적 합선에 대해 기독교계 일부에서도 문제를 삼고 있다. 광주 기독교연합회(NCC·CBS·YMCA·YWCA)는 “문 후보자는 역사에 대한 자신의 자의적 해석을 하나님의 뜻으로 둔갑시킨 비성경적이고 반신학적인 인사“라고 규정한다.

물론 또 다른 기독교 인사들은 문 후보자의 논리를 두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이종윤 원로목사는 “우리가 당한 고난의 길도 따지고 보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한 것이다. 따라서 문 후보의 교회에서 강연은 모든 것이 하나님 뜻 안에서 이루어짐을 강조한, 지극히 성경적 표현인 것”이라고 평했다. 심지어 전광훈 목사는 “이스라엘 백성의 4백년 애굽종살이나 70년간의 바벨론 포로도 하느님의 주권적 섭리”로 해석되는 것처럼 “한국 근대사에서 긍정적 내지 부정적 모든 사건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뜻 안에서 이뤄졌다고 봐야 한다.”며 “세상 정치인들이나 언론들에서 교회 내 기독교 신앙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 관점에서 이를 재단하는 것은 잘못이자 교회에 대한 모독”이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대로 기독교 신앙적 관점과 세상적 관점을 구분하는 것은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유대교적인 관점과 기독교적인 관점의 구분도 중요하다. 문 후보자를 비롯한 그를 비호하는 목사들의 해석은 세상적인 것에 기독교적인 관점과 심지어 유대교적인 관점까지도 뒤섞어버린다. 이는 테러와 침략을 신의 뜻으로 해석하는 이슬람 근본주의자 및 미국의 네오콘(신보수주의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BBC 방송에 따르면 조지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 및 아프가니스탄 침공은 신의 계시에 따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는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처럼 “나는 신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라고도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은 이들의 정신세계에서는 라캉의 말처럼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

과연 테러, 학살, 침략을 이렇게 신의 계시, 신이 주신 사명으로 해석하는 것이 지극히 이슬람적인 관점이거나 기독교적인 관점인가? 가해(加害)를 신의 명령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나와 같은 비신학자가 보아도 당연히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마찬가지로 피해(역사적 비극)를 신의 섭리로 이해하는 것, 그리고 우리나라의 민족사와 유대교의 민족사를 마구 뒤섞는 것도 마찬가지로 비신학적이고 비성경적인 해석이다. 신약성서의 어디에 예수가 이스라엘에 대한 로마의 지배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한 곳이 있는가? 예수는 도리어 “가이사(로마의 황제인 케사르)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라는 말로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을 뒤섞지 말 것을 요구한다. 그렇다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여 식민지로 지배한 것도 일본에게 주신 신의 뜻인 것인가? 이러한 해석이 앞선 말한 도착증 환자의 논리적 합선에 해당한다. 가해를 신의 뜻으로 본다면 이는 사디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하고 피해를 하나님의 뜻으로 간주한다면 이는 마조히즘적인 도착증과 유사한 것이다.

더군다나 왜 문 후보자는 애국적인 투사인 안중근도 아닌, 김구도 아닌 매국노의 대표자인 윤치호의 글을 인용한 것인가? 더군다나 비판적인 자세가 아니라 공감적인 자세로 인용한 것은 아닌가?

“그런데 이 사람은 어떻게 또 버전 업을 시켰느냐 하면, 이 윤치호라는 사람은. 조선유학생들이 일하기가 싫다, 이거야. 그리고 앉아서 순 말로만 하는 것 좋아한다 이거야.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하고 남한테 신세지고 이게 아주 우리 민족의 DNA로 남아 있었던 거야. …… 그러니까 우리나라 그 이조 말기에 우리 민족들의 피에는 공짜로 놀고 먹는 게 아주 그냥 몸에 박혀 있었대요. 하여튼 이런 나라였어요. 게으르고 일하기 싫어하고 그런데 그런 나라에 선교사님들이 와가지고 변화를 시킨 거야.”

이완용ⓒWikimedia Commons

이 인용문에 따르면 우리 민족은 게으르고 자립심이 부족한데 선교사가 와서 변화를 시킨 것이다. 여기에는 극단적인 자기 폄하와 서구 중심주의가 깔려 있다. 이러한 자기 폄하는 일제의 식민 사관에서 가장 강조하는 핵심적인 주제이며 유럽의 식민 사관도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자기 폄하와 외부에서 구원자를 찾는다는 것은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는 매국노의 기본 논리이다. 그래서 친일은 필연적으로 친서구로, 종국적으로는 친미로 귀결된다.

“6·25전쟁이 그렇게 났으면 우리는 소련이나 중공 밑에서 그 후원을 받은 북한에 우리 다 지금 다 흡수되고 말았을 거예요. 그런데 하나님이 안 되겠다, 너희들 붙잡아야겠다. 너희들 어떻게 붙잡느냐. 미국을 못 가게 만들어 주겠다. 하나님이 미국을 우리 딱 붙잡아 주셨어요. 미국이 6·25 사변이 끝나면서 우리하고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상호안보조약을 맺었어. 그건 뭐냐. 우리나라가 침략을 당하면 미국이 침략을 당한 것처럼 도와주고 미국이 침략을 당하면 우리가 침략 당한 것처럼 또 미국을 도와준다. 우리가 무슨 미국을 도와줄 힘이 있습니까? 괜히 미국에 조약을 맺기 위해서 그러는 거지. 그 안보조약을 맺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까지 그 조약이 있어요. 그것 때문에 지금 우리나라가 살고 있는 거예요, 사실은. 그것 때문에 지금 미군이 주둔하고 있는 거예요. 여러분, 한국에 미군이 없는 한국을 한 번 생각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이러한 친일과 친미적 사관이 기독교적인 사관과 무슨 관계란 말인가? 그러면 예수는 친(親)로마적인 매국노인가? 아니면 반(反)로마적인 민족 투사인가? 아니면 이런 정치적인 것과는 무관한 종교적 구원자인가? 정상적인 기독교인이라면 아마도 세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기독교적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물론 도착증 환자라면 첫 번째나 두 번째의 예수의 모습을 선택할 것이다.

도착증 환자의 가장 큰 특징은 진실을 부정하는 방식에 있다. 지젝에 의하면 부정(Verneinung)은 무의식의 저항이다. 일종의 방어 메커니즘이다. 여기에는 세 가지 형태의 부정, 즉 억압(Verdr?gung), 부인(Verleugnung) 그리고 거부(Verwerfung)가 있다. 이러한 부정의 세 가지 심리 메커니즘은 신경증, 도착증, 정신병이라는 진단 범주들에 상응한다. 신경증적인 부정은 억압이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주전자를 빌린 후에 다시 깨진 주전자를 돌려줄 때 세 가지 형태로 부정하는 발언들이 존재한다. “난 결코 네가 요구하는 주전자를 빌린 적이 없다.” 이런 발언이 전형적인 억압적인 부정이다. 또한 물신주의적인(도착증적인) 부인은 다음과 같다. “난 그것을 온전한 상태로 너에게 돌려주었잖아.” 마지막으로 정신병적인 거부(Verwerfung, foreclosure)의 사례는 상징 질서인 큰 타자를 배제하고 있어서 비(非)논리적으로 발언한다. “어쨌든 그것은 구멍이 있었어.”

이와 유사하게 문 후보자와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발언의 변화를 살펴보자. 채널A 방송에 따르면 처음에 문창극 후보자는 출근길에 교회에서의 강연 내용에 대해 사과할 생각이 있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사과는 무슨 사과냐?”고 반문했다. 청문회 준비단과 회의를 한 후에는 “종교인으로서 교회에서 한 강연이 일반인의 정서와 거리가 있을 수 있으며 오해의 소지가 생겨 유감”이라고 표명했다. 하지만 반나절이 지나 청문회 준비단은 왜곡된 보도를 하는 언론사에는 법적 대응을 하겠다고 밝힌 이후에 문 후보자도 퇴근길에서 “(강력 대응하시는 이유는 뭡니까?) 사실을 왜곡했기 때문”이라고 답변했다.” 다음 날, 몇몇 기독교 목사들은 문 후보자의 해석이 지극히 성경적이라고 두둔했다. “어쨌든 그것은 성경적이었어.” 이러한 태도는 처음에 인용한 “신이 존재한다면 모든 게 허용된다.”는 식이다.

부디 우리나라 기독교계를 이끄시는 분들 가운데 몇 분이 혹시라도 도착증 증세가 심해지거나 심지어 정신병으로 발전하지 않기를 바라며 이 글을 마친다.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2

“내 이름은 양추자입니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2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고향

?

빨간 색 뽈통 소쿠리 가득 담기면

주물러 붉은 물 빼고

남은 씨는 고운 햇살에 말려

찧으면 나오는 붉은 가루로

개떡 만들어 주던 이웃은 어디로 갔을까.

?

어머니 몰래 가져간 밥 한 그릇과

바꾸었던 칡수제비 한 그릇 먹고

함께 놀던 친구들은 잘 있을까.

?

목화송이마냥 하얗게 부풀어

베어 먹으면 새콤달콤한 동백꽃

구름이라도 끼이면

끝도 없이 가물거리던 그 작은 섬들

?

산이라도 그대로

바다라도 그대로

날 기다리며 있을 것 같은

한번은 가보고 싶은

잊을 수 없는 그 곳!!

-양추자, 2014년 2월 18일 구술한 것을 수정-

20140122_091652참말로 이상하고 얄궂다. 무신 시를 쓰고 읽자고 자꾸 찾아 오노? 말은 하는데 시는 모린다. 뭐 안 쓰도 된다하이 한번 해 보자. 내 이야기 들어가꼬 뭐 할끼고? 나는 서럽고 서러워서 그라고 억울해서 말하고 싶지 않다. 그란데 또 이야기하고 싶기도 하다. 내 맘을 나도 모리제. 이래 뵈도 내가 노래는 참 잘한다. 소록도에 있을 때에도 사람들이 노래를 부르라 하모 뜻도 모르는 유행가를 몇 곡씩 불어 제낐다.

고향? 우리 겉은 사람한테 고향이 어딨노. 태어나서 8살 묵을 때까지 살았다. 나는 거제도 바닷가 동네에서 태어났제. 위로 언니가 둘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내 고향은 앞에 바다가 있었고 뒤에는 산이 있었는데, 그 산에는 참꽃이 얼매나 붉게 피었는지 모린다. 참꽃 피몬 벚꽃도 피제. 아참, 머루도 참 많았다.

머루보다 뽈통이 더 많았는데, 그 뽈통은 워나게 커서 몇 개만 따 묵어도 금방 배가 부르고는 했다. 뽈통 알제? 큰 거는 손가락 마디만 하다. 없는 집에서는 그 뽈통으로 개떡을 만들어 묵었제. 산이라고 해도 바다 가까이에 있는데, 뽈통나무를 타고 올라가 흔들모 열매가 우두둑 떨어진다. 금방 소쿠리가 찬다 아이가. 참 재미있었다. 뽈통은 약간 떫으면서도 단맛이 난다.

우리 옆에 집에 살던 아가 그 뽈통을 한 소쿠리 따 가모 그 집 어매는 소쿠리 채 뽈통을 주무르는 기라. 그러면 뽈통 살은 빠지고 포루스럼한 씨가 남아. 씨는 포루스럼하고 하얗는데 그 씨를 빻으모 벌건 가리가 나오는 기라. 하모, 가리 색깔이 벌겋제. 그 가리를 체에 몇 번씩 거르모 밀가루 같다. 그게다가 쑥을 찧어 섞어 버무리서 커다랗게 만들어 찌거든. 그게 쑥개떡이라. 그게 너무 맛있어 보이제. 그래서 우리 어매 몰래 솥에 있는 밥을 한 그릇 가져가서 개떡하고 바까서 묵었다 아이가. 참 맞을 짓 했제.

어떤 때는 칡가리 수제비하고 밥하고 바까 묵기도 하고…… 아이고, 칡은 크기가 내 다리만 하다. 큰 칡을 도구통에 넣고 찧어서 물에 담가 놓거든. 시간이 지나모 밑에 칡가리가 가라앉는다. 그라모 물은 버리고 가라앉은 것을 돗자리 펴고 그 위에서 말린다. 그기 칡가리다. 그 말린 가리를 반죽해서 밭에서 나는 푸성귀를 섞기도 하고 그냥 칡가리만 갖고 반죽해서 뚝뚝 뜯어 끓는 물에 넣어 끓이모 수제비 아이가. 칡수제비는 시커멓다. 암만 생각해도 그리 맛있는 거는 요새까지도 별로 없는 것 같네.

칡 알제? 그 칡이 가리 칡도 있고 물 칡도 있다. 가리 칡은 꼭 생긴 게 고구마 같다. 이 칡이 큰 거는 참 크다. 웬만한 사람 다리만 한 것도 있고, 더 큰 것도 있다. 큰 칡은 손으로는 못 떼내고 톱으로 자르는데, 그때 옆에서 보모 칡가리 날리는 게 보인다. 이 가리 칡은 가리가 많아서 묵고 나모 입안이 터분한데 달착지근한 게 맛은 있다.

물 칡은 가리 칡보다 좀 작은데, 이거는 그냥 손으로 죽죽 찢으모 찢기거든. 입에 넣고 씹으모 물하고 찌꺼기가 입안에서 따로 논다. 단물만 빨아묵고 찌꺼기는 뱉아 내지. 그때는 묵는 게 귀해서 그런 것도 맛있었다. 요게 성심원의 클라라의 집에 있을 때 박군이 칡을 참 잘 캤다. 바로 그 옆이 산이거든. 툭하면 산에 가서 칡을 캐오는데, 참 잘 캐오더라.

우리 집이 있던 거기는 한 열대여섯 가구가 살고 있었다. 내가 시방도 한 집 두 집 셀 수 있다. 논이 거의 없었는데, 아마 한 집 정도 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란데 우리집에는 쌀밥이든 보리밥이든 항시 밥이 있었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니 우리 부모님이 얼마나 애를 썼겠노 싶다. 논이 거의 없다보니 주로 강냉이하고 고구마를 마이 키웠다. 강냉이랑 고구마 참 마이 묵었다. 지금은 고구마 안 묵는다. 안 묵고 싶다.

바닷가에는 언제나 염소가 있었다. 그 염소들은 바닷가 바위 위를 폴짝폴짝 다님시로 여게저게 풀을 뜯어 묵다가 희한하게 해 지모 들어오는 기라. 산에는 소가 있고 바닷가에는 염소가 있는데, 해가 안 떨어져도 비가 오모 들어온다. 짐승도 생각은 있는 기라. 비라도 올라고 구름이 끼이모 섬들이 끝도 없이 가물가물하제. 실눈을 뜨고 봐도 섬은 기냥 가물거리고 있는 기라. 날이 맑으모 대마도가 아른아른 비치고, 어떤 때는 훤하게 보이기도 하고……

그 산이라도 그대로, 그 바다라도 그대로 있겄제. 나는 이리 변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안 변하고 그대로 있겄제. 사람들은 나를 모린 척 해도 그 산은 그 바다는 나를 기다릴 것 같다. 내 친구들은 아즉도 살아있을까. 이때쯤 되몬 동백꽃도 따 묵고 했는데…… 커다란 동백꽃을 따서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하다. 동백꽃 안에 고인 물을 빨아 묵으모 새콤달콤해.

미처 꽃이 되다 만 동백꽃은 뒤꽁지가 목화솜처럼 부풀어 있거든. 말하자모 사람으로 치모 장애자라. 씨가 온전하게 못돼서 장애자가 된 기라. 거기를 베어 묵으모 참 달다. 좀 새콤하기도 하고, 그 맛이 생각난다. 같이 꽃을 따 먹고 뛰놀던 내 친구들, 영이, 성이, 동열이, 재열이 다 거기 살고 있겄제. 나만 여게 있다. 친구들 이름은 그대로 적지마라. 갸들한테 해가 가모 어짤기고. 친구들 이름은 바리게 적지 마라.

우리 동네에 나무소년이 있었다. 그 이름은 내가 그냥 그리 불렀다. 열서너 살 쯤 우리 동네로 이사를 왔는데, 지지리 가난했다. 맨날 지게 지고 산에 가서 나무 해 와서 그 많은 식구를 멕여 살렸다. 나는 학교에 갈 때 갸를 만나고는 했는데, 내가 머리를 푹 숙이고 지나치고는 했다. 마음이 참 안 됐더라고. 아부지는 병들어 누워있고 어매는 능력이 없고, 어린 여동생만 둘이 있었다. 그리하니 땅뙈기도 하나 없고 맨날 산에 가서 나무 주워 와서 묵고 사니 얼매나 가난하겄노.

그런데 세상에는 법이 없다. 남의 산에 가서 나무하다가 들키모 두드려 맞고 나무도 뺏기고, 그래도 다음 날에는 또 남의 산에 가는 기라. 내가 소록도에 있을 때 우리 어매가 와서 갸가 죽었다고 안 하나. 남의 산에 가서 땅에 떨어져 있는 나무를 주워오다가 들켜서 얼매나 맞았는지 집에 와서 시름시름 앓다가 죽었단다.

세상에 무슨 법이 있노. 그게 법이가? 땅에 떨어진 나무 좀 주워 그 많은 식구 멕여 살리는 그 얼라가 무슨 죄가 있다고 죽을 만치 때리노. 땅에 떨어진 나무도 임자가 있는 갑다. 나는 그 아가 안 잊어진다. 자꾸 생각이 안 나나. 이상하제. 울 언니가 전에 와서 말해주는데 여동생 둘이는 그대로 그게 살고 있다카더라.

그래도 참 가보고 싶다. 근데 그기 왜 그리 안 되노. 아이고, 잊을 수가 없다. 얄궂게 왜 안 잊혀질고. 생각이 자꾸 난다. 내 고향은 거제도 함목이다. 동부면 갈고지 함목이다. 산양도 기억나고 도당포도 기억나고 구조라, 장승포도 놀러 다녔다. 쌍나리라고 있었는데…… 쌍나리는 내 외갓집 동네 이름이다. 통영다리를 지나서 한참 가모 나온다. 산을 타고 돌아가야 나오는데 산비탈이라서 돌이 떨어지모 그대로 바다에 첨벙하고 떨어진다. 그리 멀고 험한 동네도 외갓집이라고 힘든 줄 모리고 걸어서 놀러 다녔다.

건강하던 그 때의 내 이름은 막딸이었다. 언니 둘하고 나까지 연달아 딸이 태어나니까 우리 집에서는 이제 딸은 그만 놓으라고 막딸이라고 불렀는데, 내 밑으로 남동생이 태어났다. 나는 이름을 막딸로만 알고 있었는데, 울언니하고 소록도에 가서 아부지가 서류에다가 ‘추자’라고 적더라. 그때 알았다. 내가 추자, 양추자인 걸. 모리제, 원래 추잔데 아들 놓으라고 막딸이라 한긴지 이름이 없는데 적으라 하니까 ‘추자’라고 적은 긴지.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새로운 글을 시작하며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지리산 자락에 성심원이 있습니다. 한센인들이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자들과 수녀, 그리고 사회복지사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모여 살고 있는 곳입니다. 마을이 한창 번성할 때에는 한센인만 600여 명에 이르렀지만, 지금은 생의 끝에서 150여 명의 한센인과 수십 명의 장애인이 모여 함께 살아갑니다. 성심원이 있는 곳의 원래 지명은 ‘풍현마을’입니다. 뒤로는 지리산이 있고 앞으로는 경호강이 흐른답니다. 그리고 성심원 내의 그 어딘가에는 지리산 둘레길로 들어가는 오르막 길이 있습니다. 대성당 앞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벚나무가 있지요. 성심원의 옛모습을 보려면 조금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을 잡고 올라가야 하지만, 이 벚나무는 성심원 입구에 있는 철선과 함께 성심원의 오랜 시간을 말해줍니다.

이 글들은 성심원에 계신 한센인들의 구술을 옮긴 것입니다. 그 분들의 삶은 좀 더 건강하고 좀 더 편안한 삶을 추구했던 비한센인들과 전체 국민의 안녕을 염려했던 정부 정책에 의해 훼손되고 소실되었지요. 그럼에도 그 분들은 가파른 지리산 자락에 몸을 숨기기도 하고 경호강물에 울음을 삼키기도 하면서 모진 세월을 견뎌 왔습니다. 이제 그 분들에게 남겨진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분들의 삶을 기억하고자 이 글들을 씁니다. 기억하는 이 없이 마치 처음부터 있지 않았던 사람들처럼 그렇게 그 분들을 떠나보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모리스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철학자의 서재]

신우현(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사물놀이의 무아지경

 

이제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인다. 70년대부터 시작해서 90년대 중반까지 대학에서는 민족문화를 보급하기 위해 무척이나 노력했다. 각 대학 동아리에는 민요를 부를 수 있는 노래패가 만들어지고 풍물패가 만들어졌다. 이제 대학 축제의 메인 무대는 당연히 아이돌이지만, 그때는 달랐다. 연예인을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축제가 열렸던 것이다. 본격적인 공연의 전조는 풍물패가 어김없이 차지했다. 모든 사람들을 한 곳에 모으는, 요즘 식으로 말하면 낚시질을 하는 것이지만 어깨춤이 절로 묻어나는 신명나는 한 판 놀이였다. 이제는 그런 모습을 찾을 수 없다.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김덕수사물놀이ⓒJinho.Jung

사물놀이에 대해서 좀 더 말하고 싶다. 김덕수 사물놀이패의 공연이 TV를 통해 방영된 적이 있었다. TV를 통해서 보지만 그 짧은 공연은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안성맞춤이다. 리듬은 변주를 거듭한다. 느리게, 빠르게, 때에 따라서는 휘몰아치는 번개처럼 청중을 압도해 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넋을 놓고 있으면 어김없이 뒤통수를 치듯 징이 울리며 청중을 흔들어 깨운다. 현장에서 그 공연을 본다면 김덕수를 비롯한 사물놀이 공연단의 모습은 무아(無我)에 빠져 있는 듯할 것이다. 실제로 김덕수는 공연하고 있을 때 자신은 꽹과리에 몸을 빌려줄 뿐, 자신이 연주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악기가 자신의 소리를 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런 모습은 자신은 잊고 다른 사람과 협연하면서 일종의 공명을 일으킨다. 최소한 그 연주동안 모든 성원들은 자신을 잊는다. 그러면서 타자들과 만나고 있다.
?
지금 그런 공연은 무대에서 펼쳐지지만 원래는 장터를 비롯한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어우러지는 대동놀이였다. 대동놀이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신분을 말할 필요가 없다.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곳에서 화합하면서 어우러진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모습은 지워지고 타자와 소통하는 대동의 춤. 블랑쇼의 글을 읽고 있으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이런 대동놀이다.?

 

▲ (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 <문학의 공간>(모리스 블랑쇼 지음, 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 ⓒ그린비

프랑스의 문학자인 모리스 블랑쇼가 사물놀이에서 시작된 대동놀이를 본다면 뭐라고 했을까? 이번에 소개할 책은 블랑쇼의 <문학의 공간>(이달승 옮김, 그린비 펴냄)이다. 이 책은 무척이나 어렵다는 평판을 듣는다. 이 책 뿐 아니라 블랑쇼의 모든 책이 어렵다. 혹독하게 문장도 길고, 중요하게 다루지 않은 개념을 중심 개념에 놓고 있으니 어렵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비록 그는 자신의 이해지평에서 어렵게 사태나 개념을 설명할 수밖에 없지만, 그 내용은 우리에게 매우 친숙하고 정감이 간다. 만일 그가 우리의 대동놀이 모습을 보고 있었다면 경탄을 했을 것이라고 본다. 서구에서는 무아의 경지라는 말도, 윤회에서 비롯되는 죽음에 대한 인식도 낯설고 어려울 수밖에 없다. 블랑쇼 역시 이런 개념 자체가 낯선 환경에서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어려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강강술래와 같은 공동체의 놀이를 경험하고 그것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블랑쇼의 얘기가 정겹게 느껴질 것이다.

 

예술가의 고독

 

그가 <문학의 공간>에서 처음으로 제시하고 있는 개념은 고독이다. 고독감은 다른 사람과 떨어져서 홀론 존재한다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할까? 혼자서 하는 놀이가 있어야 시간이 잘 간다. 블랑쇼는 이 부분을 잘 파악했다. 그에게 고독이란 무엇에 대한 몰입으로 나타난다. 문학가의 경우 작품에 몰입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가의 작품은 독자들에게 본질적인 고독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거의 모든 예술가들은 고독에서부터 시작해서 자신의 창작 활동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 몰입으로 완성된 고독을 통해 치유를 시작한다. 말하자면 고독은 더 이상 고립이 아니라 세상과 소통하는 하나의 열쇠가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예술가에게는 우울함이 있어야 한다고 얘기했다. 우울함은 자신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극대화된다. 그 과정을 통해서 예술가들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

?

▲ Sonny Rollins. ⓒWikipedia

▲ Sonny Rollins. ⓒWikipedia

이와 관련해서 꼭 얘기하고 싶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Sonny Rollins, 1930~)라는 재즈 뮤지션이다. 소니 롤린스는 1950년대 데뷔한 미국의 유명한 재즈 색소폰 연주자이다. 그 시대는 춤을 추기 위한 재즈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어려운 멜로디가 나오는 시대이기도 하다. 그때 많은 재즈 뮤지션들이 별처럼 쏟아졌다가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이유는 약물 때문이다. 재즈 뮤지션들은 마약을 하고 즉흥 연주를 하면서 재즈의 매력을 한껏 발산하다가도 약물 부작용으로 소리 없이 사라져 갔다. 거의 유일하게 약물에 의존하지 않은 사람이 소니 롤린스이다. 물론 그도 젊은 시절 마약에 손을 댔지만, 보석기간 중 약물 복용 혐의로 강제로 재활원에 갇히게 된다. 이를 계기로 그는 약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고, 다른 뮤지션과는 달리 아직까지도 활동할 수 있게 됐다.

그의 활동 중에 독특한 이력이 있다. 1950년대 그는 이미 최고의 뮤지션 대열에 합류했다. 그런데 갑자기 1959년부터 3년 동안 잠적해 버린다. 새로운 동갑내기 라이벌인 오넷 콜먼(Ornette Coleman, 1930~)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잠적기간 동안 롤린스는 요가를 통해 명상하면서 밤이면 인적이 드문 뉴욕의 다리 위에서 색소폰의 매혹에 빠져 연습을 거듭했다. 아마도 그 시간은 그에게 가장 고독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 혹독한 고독의 시간 속으로 빠져드는 동안 그는 아마도 세상이 자신의 존재마저 망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블랑쇼는 이런 말을 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시간의 부재의 매혹에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분명 고독의 본질에 다가서고 있다. 시간의 부재란 순전히 부정적인 양상이 아니다. 그것은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 주도를 할 수 없는, 긍정 이전에 이미 긍정이 되돌아와 있는 그러한 시간이다.”(28쪽)
????
블랑쇼가 문학에 대해서 말하듯이 음악에 대해서, 혹은 소니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을 말한다면 위와 같은 맥락에서 말했을 것이다. 롤린스가 잠적한 사건은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롤린스가 부재한 시간을 의미한다. 즉 롤린스는 색소폰의 매혹 속에서 다른 사람들과는 차이가 있는 시간을 보냈다. 철저한 고립은 작품을 만들어내는 몰입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 세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가 망각되는 부재의 시간을 경험하는 것이기도 하다. 세상의 시간과는 떨어져 있는 시간은 과거로 기억되는 시간도 아니고 현재의 상태로 남아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의 시간에서 한걸음 떨어진 깊이의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는 과거, 현재, 미래라는 도식 속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몰입된 시간은 그런 계열화된 시간과는 다르다. 물리적으로 같은 것이 반복되는 과거, 현재, 미래의 시간과는 다르게 양으로 표현할 수 없는 질적인 시간도 존재한다. 질적인 시간은 같은 시간이라도 심리적으로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과 유사하다. 예를 들어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1시간과 재밌는 영화를 볼 때의 1시간은 물리적으로는 같지만 심리적으로 완전히 다르다. 전자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지만, 후자는 매우 빠르게 지나간다. 그런데 후자와 같은 시간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시간을 잊고 무엇엔가 몰입해 있어야 한다. 이처럼 몰입은 시간의 부재를 경험하는 예가 된다. 마찬가지로 소니 롤린스가 몰입한 시간은 계기적으로 주어지는 시간과는 다르게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깊이의 시간이자 나를 잃어버리는 무아의 시간이기도 하다. 또한 블랑쇼가 말하는 현전을 위한 ‘자발적 죽음’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렇게 보낸 공백의 시간은 그로 하여금 다시 최고의 작품을 탄생시키게 한다. 물론 예로 든 롤린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그런 몰입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예술과 전혀 관계없는 사람들에게조차, 몰입은 자신 안에 있는 새로운 나를 만드는 작업이다. 블랑쇼가 <문학의 공간>에서 말한 고독과 몰입은 시간과 연결되어 작품을 탄생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임과 동시에 누구에게도 해당될 수 있는 새로운 소통의 방식을 주장하는 것이다. 예술가의 작품이 더 이상 예술가의 것이 아니라 감상자의 것이 되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죽음 앞에서

 

이렇게 정리하면 특별히 어려울 것도, 그다지 새로울 것도 없는 내용처럼 보이지만, 현대 프랑스의 사상계는 블랑쇼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문학의 공간> 뿐 아니라 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고 있는 화두는 ‘바깥’이다. ‘바깥’이란 말은 상식적으로 보면 ‘안’과 대립된다. 그런데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은 이런 의미와는 다르다. 그에게 바깥은 타자와 소통하는 공간이다. 흔히 소통을 한다는 것은 내가 다른 사람과 만나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하지만 블랑쇼에게는 복잡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불행과 고통의 연속이다. 가장 자유롭고자 하는 욕망은 이 세계에서 고통과 함께 부조리함을 느끼게 해준다.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타자와의 소통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블랑쇼의 생애와 연결해서 살펴보자.

 

블랑쇼의 삶을 살펴보면 무척이나 흥미로운 경험들을 발견하게 된다. 그 경험 중 눈에 띄는 두 가지 사건을 제시해 보자. 먼저 2차 대전 중 죽음의 공포 속에서 극적으로 생존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화가 있다. 1944년, 2차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면서 나치의 퇴각이 이루어지는 시기, 블랑쇼는 자신의 집 앞에서 총살형을 당할 위기에 놓여있었다. 그런데 아주 극적으로 레지스탕스가 그 일대를 선제공격하기 시작했다. 블랑쇼는 이 전투 때문에 극적으로 살아남을 수 있게 된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이후의 생은 덤으로 생존한다고 간주했다.

 

“당신은 이미 이 년 전에 죽었어야 할 사람이므로 앞으로 남은 수명은 모두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죽음의 선고>(고재정 옮김, 그린비 펴냄) 중에서)

 

그리고 그는 저작에서 끊임없이 ‘죽음’의 문제를 분석하고 있다. 물론 이 죽음의 문제는 당시 유행했던 실존주의 철학, 혹은 현상학의 영향력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
그리고 다른 하나의 특이한 경력은 68 혁명 중 ‘학생-작가 행동위원회’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는 잡지 <위원회>에 익명으로 글을 남기게 된다. 이미 당대의 유명한 문필가였던 그가 자신의 이름조차 버리고 평등한 위치에서, 그것도 자신의 제자밖에 되지 않는 학생들과 동등하게 ‘익명’으로 활동했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68년 5월의 행동위원회와 시위대에서는 친구는 아니지만 나이차도 이전의 명성도 무시한 채 너와 나로 말하는 동지들이 있었다.”(“Pour l’amiti?” 중에서)

 

행동위원회에서 블랑쇼는 익명을 주장했지만, 대다수의 작가들은 익명의 동지 관계를 포기했다. 그렇지만 블랑쇼는 익명성을 마치 문학적 체험으로 느꼈다. 문학적 체험은 작가의 체험이 더 이상 작가의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무한하게 열리는 것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작가는 깊은 사색의 시간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지만,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의 것으로 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독자의 것이고, 모든 이의 것이 된다. 이런 블랑쇼의 경험은 모든 권력을 포기하고, 주체의 익명성을 지속적으로 주장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 가지 경험은 그의 주요 테마인 ‘바깥’을 설명하는 중요한 단서로 작동한다. 프랑스 철학에서 ‘바깥’이라는 말은 푸코와 데리다 철학의 주요 테마가 된다. 또한 이 용어는 그대로 들뢰즈에게서 다시 사용된다. 뿐만 아니라 낭시나 아감벤과 같은 당대 철학자에게도 끊임없이 회자되는 개념이기도 하다. 앞서 바깥은 소통의 공간이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그 소통의 공간은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고통과 좌절을 경험하는 곳이다. 오히려 완전한 바깥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자아의 죽음을 경험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완전한 소통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죽음’이라는 테마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상황을 <문학의 공간>에서는 키릴로프의 사례로 분석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자신의 소설 <악령>에서 신의 죽음을 알리는 인물로 키릴로프를 등장시킨다. 키릴로프는 신이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공개 자살을 선택한다. 이는 자기의식의 순수한 현전 가능성을 분명하게 밝히는 예에 해당한다. 이로부터 블랑쇼는 죽음 안에 놓여 있는 자아의 분열을 분석한다. 자신 안에 놓여 있는 타자. 이 타자는 소통을 위한 근원적 공간이 된다.

 

이 근원적 공간은 마치 문학 혹은 글쓰기의 시원을 이루는 역할을 한다. 앞서 사례로 제시했던 김덕수나 소니 롤린스의 경우처럼 물리적인 죽음이 아닌 자신의 세계로 빠지는 무아지경은 어쩌면 블랑쇼가 말하는 바깥을 가장 정확하게 지적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즉 타자와의 근원적 공간은 현전을 위한 죽음이라는 내밀성으로부터 시작해서 타자의 내밀성과 만나는 지점이 바로 소통의 공간이고, 바로 예술의 공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안토니오 네그리 외 <탈정치의 정치학>[철학자의 서재]

김범수(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2008년 촛불의 진짜 ‘배후’!

 

자율의 이중성

 

5공화국 시절 중고등학생들에게 ‘자율’이라는 말은 환영과 동시에 엄청난 부담감을 안겨주었다. 전두환 정권의 포퓰리즘은 프로스포츠, 국풍사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두발 자율화, 교복 자율화를 들고 나왔다. 그 당시 학생들은 그 자율화를 반겼다. 교복은 학생들을 억압해왔던 ‘상징’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그 ‘상징’이 무너지는 것은 학생의 인권 신장이라는 막연한 즐거움을 안겨줄 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그 자율화는 학교의 권위, 교사의 권위 앞에서 다른 방식으로 코드화되어 학생들을 억압했다. 아무리 두발 자율화라고 하지만 머리 긴 것은 용납이 안 된다. 그리고 여지없이 ‘바리깡’을 들고 교실을 감시하는 교사. 결국 자율은 또 다른 권위에 복종해야 한다는 의식을 주입하게 했다.?

080503_ROK_Protest_Against_US_Beef_Agreement_05

2008년 5월 3일 시청앞 광장 촛불 집회ⓒWikipedia

이런 자율의 이중성은 학생들의 두발이나 교복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한국 사회에서 ‘자율주의’라는 말은 아마도 2008년 촛불집회 때문에 널리 보급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해 5월, 6월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였다. 그리고 그 현상은 아직도 우리 사회 변혁을 진단하는 변곡점으로 파악된다. 촛불문화제의 모습은 여느 시위 문화와도 달랐다. 행사를 주도하는 단체도 없고, 모인 주체도 특정한 하나의 집단으로 말할 수도 없는 형태였다. 유모차를 끌고 나온 아줌마, 넥타이를 매고 나온 회사원, 교복 차림으로 나온 고등학생들, 심지어 질서와 안전 지킴이를 자처하고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까지. 그들은 다양한 정보를 공유했고, 수준 높은 지식으로 소통하기도 했다. 이런 현상을 ‘다중지성’ 혹은 ‘집단지성’이라 칭했다. 그리고 그 집단지성은 즐겁게 놀면서 싸우고, 자율적으로 움직였다.

제발 해산하자는 말을 듣지 않은 채 아침에 출근하는 사람들과 횡단보도 놀이를 하며 거리를 활보했던 사람들. 이러한 자율은 매우 다양한 형식으로 분화되었다. 쌍용자동차, 기륭전자의 싸움에 화답했고, 밀양 송전탑과 제주 강정마을 해군기지 건설 저지 등에도 힘을 실어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매체인 팟캐스트를 통해서 소수자들의 목소리, 사회 정의의 목소리를 담았다. 이름도 없는 사람들이 ‘자율적으로’ 특이한 개체들로 모여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집단의 자율은 제도적 폭력 앞에 다시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과거에는 공권력이라는 구실로 물리적인 폭력이 행사되었다면, 지금은 재편된 제도를 이용한 경제적인, 혹은 정신적인 폭력이 자율을 억압하고 있다.

 

다중지성과 자율의 이론적 모델?

 

탈정치의정치학

▲ <탈정치의 정치학 : 비판과 전복을 넘어 주체성의 구성으로>(안토니오 네그리 외 지음, 워너 본펠드 엮음, 김의연 옮김, 갈무리 펴냄) ⓒ갈무리

여기서 자율주의는 안토니오 네그리가 행했던 ‘아우토노미아(autonom?a)’를 번역한 말이다. 시기적으로 보자면 1968년 이후 70년대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형태의 노동 운동 과정에서 등장하는 일련의 운동, 특히 네그리가 이론적 중심이 된 모델이 바로 아우토노미아(자율)다. 우리나라에서는 2008년도 촛불집회 때문에 아우토노미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졌지만, 이 내용이 국내에 소개된 것은 이미 90년대부터였다. 주로 조정환, 윤수종 등이 적극적으로 번역하고 소개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안토니오 네그리 등이 쓰고 김의연이 번역한 <탈정치의 정치학>(갈무리 펴냄)인데, 그 내용은 아우토노미아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론가들의 논쟁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을 본격적으로 소개하기에 앞서 여러 이론적 상황들을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한 명의 저자가 쓴 책이라면 일정한 흐름이 있는데, 불행하게도 이 책에서는 그런 흐름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의 매력에 빠지는 데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따라서 여기서는 이 책에 접근하기 위한 기본적인 문제 상황과 이론적 배경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1990년대 이른바 ‘한국의 좌파’는 공황상태에 빠져야 했다. 독일이 통일되고, 소련이 몰락하고, 독립 국가들이 탄생하는 급격한 변화의 바람이 불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폐해를 말하기 위해 그 반대편에 있었던 집단이 필요했으니 그 집단이 사라진 것은 매우 큰 충격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자본주의 체제의 절대적 승리라는 주장에 넋을 놓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분명 자본주의는 구조적인 모순을 안고 있다. 자본주의도 완전체가 아니라 투석 치료를 받아야하는 신부전증 환자일 뿐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마르크스를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의 스펙트럼을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재조명하게 되고, 국내 소개하게 되었다.

 

먼저 마르크스의 <자본> 분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었다. 그래서 알튀세르를 비롯한 프랑스 사회철학자들의 이론이 도입되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 아예 마르크스주의와 결별을 선언한 그룹도 탄생하게 된다.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이 그것이었다. 물론 이런 부류 외에 전통적으로 존재해왔던 스탈린주의를 배격한 마르크스-레닌주의나 레닌조차 배제한 마르크스주의 등의 관점들이 존재한다. 이런 스펙트럼에서 자율주의는 어느 편에 속해 있을까?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

 

이 책을 엮은 본펠드는 자율주의를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고 단언하고 있다. 이 의미는 ‘정통’에 대한 지위를 거부한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여러 명이고, 그래서 이 저자들 모두가 이런 입장이라고 단언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스스로 이단적 마르크스주의라는 멍에를 쓴 이 모든 글에서 공통적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위기를 인정하지만, 포스트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등의 이론을 ‘마르크스를 통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입장을 재확인시켜주는 부분이 이 책의 3장 ‘맑시언의 범주들, 자본의 위기, 그리고 오늘날의 사회적 주체성 구성’이다. 이런 공통적인 흐름은 이 ‘이단’이 단순히 마르크스에 대한 거부가 아니라 마르크스를 넘어서 마르크스로 향한다는 역설적인 의미를 담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여전히 자본 안에서, 그리고 자본에 대항하면서 자본을 넘어서는 노동의 역량을 긍정한다. 그리고 이것이 마르크스의 중심적 개념이라고 강조한다.

 

이런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율주의의 이론적 배경을 좀 더 알아두어야 한다. 이 책의 매력에 빠지기 힘든 것은 바로 배경 지식을 요구한다는 점에서다. 먼저 노동의 역량에 대한 부분을 보충 설명해 보자.??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Baruch Spinoza(1632~1677)ⓒWikipedia

스피노자 철학에서 핵심 개념 중 하나로 ‘코나투스(conatus)’가 있다. 이 말은 ‘생을 지속시키려는 힘’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스피노자는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이단으로 취급받던 인물이다. 그런데 프랑스를 중심으로 스피노자를 재해석하기 시작한다. 그중 스피노자의 ‘역량(potentia)’이나 ‘정동(affect)’ 따위의 개념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되고 중요 개념이 된다. 네그리를 비롯한 자율주의 사상가들도 이런 해석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물론 네그리가 프랑스 사상가는 아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정치적 박해 때문에 프랑스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여기서 가타리, 알튀세르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과 만남을 가졌다.)

 

특히 네그리는 스피노자의 코나투스 개념을 특정한 개체에 한정시키지 않고 집단에 활용했다. 그래서 집단적 코나투스에 해당하는 ‘다중의 역량’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이는 명목상의 권력을 비판하고, 모든 권위에 대한 부정과 저항의 의미를 담을 수 있다. 이를 근거로 자본의 권력과 부도덕한 권력에 대항하여 세계를 재구성할 수 있는 주체성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이 집단의 힘은 강할 수는 있지만, 결코 사회 변혁이라는 구도로 배치된다는 보장은 없다. 여기에는 반드시 독특한 주체 개념이 상정되어야 한다.

 

네그리는 <전복의 정치학>(최창석·김낙근 옮김, 인간사랑 펴냄)에서 주체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지적이면서도 프롤레타리아적이고 다양하면서도 평등에 대한 집단적 요구를 하며 정치적 타협을 하면서도 생존과 투쟁을 위한 윤리적 결단을 추구하는 주체.”

 

비록 포스트모던한 사상가들이라고 하는 인물들 중 일부는 주체에 대해서 개체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 있거나 주체 중심의 사고를 거부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는 하지만 변화의 중심을 이끌어갈 수 있는 주체는 필요하다는 것이 어쩔 수 없는 이성주의의 그림자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개념이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이 제국의 논리에 종속되지 않고, 오히려 이것으로부터 벗어나서 자신의 고유한 역량을 탈정치의 윤리적 성격으로 정립해야 하기 때문이다.
?
이러한 주체들은 노동의 조건 자체가 변화되는 상황과 함께 연구된다. 자율주의에서는 이러한 변화와 연관해 ‘비물질적 노동’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이 말은 스피노자의 정동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최근 들어 우리 사회에서도 ‘감정 노동’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비스업을 비롯해서 정신적 에너지를 소비하는 노동이 증가하고 있다는 현실을 반영하는 것이다. 과거에 이런 노동은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지 않거나 불필요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정보화 사회에서는 새로운 생산 패러다임을 갖게 만들었으며, 이런 패러다임은 생산의 탈중심화, 탈장소화를 가능케 했다.

 

이런 노동의 양식은 자본의 운동 방식을 재탐색하게 한다. 이 책에서는 1장 ‘태초에 절규가 있었다’와 8장 ‘자본이 운동한다’에서 자본 권력이 아니라 불복종적인 노동의 역량을 다루고 있다. 또한 7장 ‘발전과 재생산’에서는 새로운 형태의 소통과 접속의 확장을 다루고 있다. 이를 통해서 자율 공간의 창출에 공헌하는 주체성에 대한 논의를 분석한다.

 

형용모순처럼 보이는 탈정치의 정치

 

일상에서는 정치에 무관심한 것이 탈정치인 것으로 각인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중립적인 태도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하지만 자율주의에서의 탈정치란 이렇게 정치에 무관심한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니다.?

 

인간을 규정하는 말 중에서 ‘사회적 동물’이라는 정의가 있다. 원래 아리스토텔레스가 했던 말을 번역한 것인데, 정확한 번역이 아니라고 비판받고 있다. 적절한 번역 용어는 ‘정치적 동물’이다. 이 말은 인간이 고대 도시 국가인 폴리스에 거주하는 동물이라는 뜻이다. 여기에서는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혹은 경제적인 것)을 엄밀하게 구별하게 된다. 공적인 것이란 폴리스 전체와 관련된 일이고, 사적인 것이란 먹고 사는 문제, 즉 경제적인 것으로 한정된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즉 정치적인 것과 경제적인 것이 서로 구별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는 경제 체제인데 어떻게 경제적인 이해관계를 제외하고 공적인 것을 말할 수 있을까?

 

자율주의에서 탈정치는 엄밀하게 보자면 공통적인 것의 복권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공통적인 것에는 사적 소유 관계와 신자유주의적 전략들에 대립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있다. 자본은 자신의 소유 관계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국가라는 허울을 쓰고 있고, 이 국가들은 다시 자본의 논리에 맞춰 제국주의적 성향으로 발전하게 된다. 먹고사는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의 모든 성원들에게 공통적인 것이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탈정치는 역설적으로 매우 정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책에서는 이런 고민을 10장 ‘정치적 공간의 위기’와 13장 ‘공적 공간의 재전유’ 등에서 만날 수 있다.

 

자율주의의 문제의식과 추이를 조금만 이해한다면, 이 책엔 우리 현실과 비교해서 사색의 깊이를 더할 내용이 많다. 자율에는 반드시 통제가 뒤따라왔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이 통제 사회 안에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발전하기 위해서, 집단들의 역량을 강화시킬 수 있는 가치의 전유가 필요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통해서 현재 우리 사회에 놓여 있는 통제 사회의 징후를 차단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이 책은 그런 고민을 깊게 만들 수 있는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자율주의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친절하지 않다. 이 책을 재미있게?읽기 위해서는 조정환이 쓴 <아우또노미아>(갈무리 펴냄)나 윤수종의 <안토니오 네그리>(살림 펴냄)와 같은 책을 미리 읽어보길 권한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지금부터 제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이른바 서양에서?‘존재론(存在論?: ontology)’이라고 부르는 철학의 한 분야에 대한 것입니다.?이 분야는 전통적으로 존재와 무를 다루는 분야로 알려져 있습니다.?존재(存在)와 무(無)라니!?여기에서 잠깐 제가 강의실에서 학생들과 한 이야기를 끼워 넣겠습니다.

“여러분,?장 폴 사르트르라는 프랑스 철학자를 잘 아시지요?”

“예,?그분 소설가이기도 하지요?”

“그렇습니다.?그런데 그분이 비교적 초기에 썼던 유명한 철학책이 있습니다.?그 책 이름을 아는 분 계십니까?”

“예.”

“뭐지요?”

“《존재와 무》?아닙니까?”

학생들은 입을 모아 대답했습니다.

“존재와 무라??대단히 어렵고 심오한 말인 것 같은데,?여러분은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이런 말 자주 씁니까?”

“가끔 씁니다.”

“그럼,?여러분들 가운데서 지난 한 주일 동안 날마다 한 차례 이상 존재나 무라는 낱말을 입 밖에 내본 사람이 있으면,?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난 한 주일 동안 이 낱말들을 한 번도 써 본 기억이 없는 학생이 있으면 손을 들어 보십시오.”

강의실에 앉아 있던 학생들 거의 모두가 쭈뼛쭈뼛 손을 들었습니다!?이것은 바로 제 강의를 듣는 철학과 학생들과 저 사이에 있었던 일입니다.?제 강의실에서나 있었던 특수한 경우일까요??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그러면 사르트르가 붙인 원래 제목을 써 보겠습니다.?《Letre et le Neant》입니다.?이 프랑스 말을 토박이 우리말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L’etre et le neant =?있음과 없음(또는 임과 아님)입니다.?다시 물어 보겠습니다.?여러분 가운데 있다,?없다,?이다,?아니다라는 말을 빼고 단 일 분간이라도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눌 자신이 있는 분은 한번 손을 들어 보십시오.”

제?‘존재론’?강의는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저는 칠판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지금 쓴 글은 우리가 보통 하는 말을 옮겨 적은 것입니다.?이 말을 참과 거짓이 구별되는 문장,?곧 논리학에서 말하는 명제(命題?: proposition.?참 끔찍한 말이기는 합니다만 논리학 책을 보면 이런 낱말이 나옵니다.)로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사람은 개가 아니다.”

학생들이 외쳤습니다.?저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 적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다. (일상 언어)?→?사람은 개가 아니다. (참말,?논리적 명제)

“그런데 왜 우리는?‘사람은 개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그것을 참말이라고 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사람은 개와 다르게 생겼잖아요.”

“개는 네 발로 걷고 사람은 두 발로 걷잖아요.”

“개는 냄새를 잘 맡는데 사람은 그렇지 못하잖아요.”

“…….”

강의실이 온통 시끌벅적해졌습니다.

“잠깐,?사람과 개가 서로 다르니까 사람은 개가 아니라는 말은 아까 나왔던 말이고,?이제 한 단계 더 높여서 이른바?‘존재론’답게 말해 봅시다.?다시 말해서?‘있다’, ‘없다’는 말을 써서 사람이 개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 보자는 거지요.”

여기까지 이르면 학생들은 거의 잠잠해지기 마련입니다.?저는 칠판에 이렇게 썼습니다.

일상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와 다르다.

논리 언어의 차원?:?사람은 개가 아니다.

존재 언어의 차원?:?사람에게 있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없고,?사람에게 없는?(어떤)?것이 개에게는 있다.

“여기에서 보다시피?‘같다’, ‘다르다’는 말은?‘이다’, ‘아니다’는 말로 바꿀 수 있고,?또 이 말은?‘있다’, ‘없다’는 말로 바꿀 수 있습니다.?다시 말하자면,?우리 둘레에 있는 서로 다른 온갖 것들을 가르는 기준이 있음과 없음에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저는 네 개의 문장을 칠판에 써 내려갔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

2.?있는 것이 없다.

3.?없는 것이 있다.

4.?없는 것이 없다.

“자,?이 네 개의 글 가운데 어느 것이 참말이고 어느 것이 거짓말입니까?”

학생들은 문장 네 개를 꼼꼼히 뜯어보고 있더니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구별하기 힘든데요.”

“왜,?왜 그렇지요?”

“글쎄요.?참과 거짓을 가릴 수 있는 문장은?‘ㄱ은?ㄴ이다.’나?‘ㄱ은?ㄷ이 아니다.’라는 틀을 가지고 있잖아요.?그러니까?‘사람은 동물이다.’나?‘사람은 개가 아니다.’와 같이?‘이다’, ‘아니다’로 앞에 있는 말과 뒤에 있는 말이 이어져 있어야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수 있는데,?이 문장들은 그냥 있다,?없다로 끝나잖아요.?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쏭달쏭한데요.”

“맞습니다. ‘저기 사람이 있다.’나?‘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같은 말은 그 말만 보아서는 그것이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따라서 이런 말은 일반적으로 논리적인 명제라고 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이렇게 모른다는 말이 참말이 될 수도 있습니다.?저는 다시 물었습니다.

“그런데 칠판에 적혀 있는 이 네 마디 말들은 모두 뜻이 있는 말인가요??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이 말들이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나요?”

“예,?알아들을 수 있겠는데요.”

“그럼 지금부터 우리 그 뜻을 한번 캐 보기로 하지요.”

학생들과 제가 머리를 짜내서 캐낸 뜻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1.?있는 것이 있다.?→?달리 이 말을 바꿀 필요가 없다.?이를테면 우리는?‘있는 것은 있고,?없는 것은 없는 거야.’라고 할 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다.

2.?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눈여겨볼 낱말?: ‘하나’)

3.?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 (눈여겨볼 낱말?: ‘빠진 것’)

4.?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눈여겨볼 낱말?: ‘다’)

자,?여기서부터 어려워지기 시작했습니다.?첫 번째 말이야 그냥 넘어갈 수 있다 치더라도 두 번째부터는 그럴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이 어떻게 해서?‘하나도 없다.’는 뜻을 지니게 될까??배운 도둑질이라고 저는 서양 고대 철학자 파르메니데스(Parmenides)의 생각을 빌려 이 문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있는 것은 하나일까요,?여럿일까요?”

제가 이렇게 물었더니,?학생들은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었습니다.?틀림없이?‘저 선생 어떻게 된 거 아냐?’?하고 머릿속으로 내 머리를 향해 손가락을 서너 바퀴쯤 돌렸음직한 표정들이었습니다.

“에이,?선생님도!?있는 것은 당연히 여러 개지요.?저도 있고 선생님도 있고,여기 책상도 있고,?가방도 있잖아요.”

“잠깐,?잠깐만요.?제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제가 조금 설명을 하고 나서 다시 묻지요.?저기 있는 예쁜 여학생,?학생은 여자가 분명하지요?”

와그르르 웃음소리.

“요즈음에는 겉모습만 보아서는 도무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를 때가 많아서 한 말이니 노엽게 듣지 말아요.?그럼 제가 칠판에 몇 개의 낱말을 적어 볼 테니까 이 낱말들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지 알아맞혀 보세요.”

여자―사람―동물―생물―있는 것

학생들은 이 낱말들을 연결시켜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여자는 사람이다. (여자 수보다 사람 수가 더 많다.)

사람은 동물이다. (사람 수보다 동물 수가 더 많다.)

동물은 생물이다. (동물 수보다 생물 수가 더 많다.)

생물은 있는 것이다. (생물 수보다 있는 것 수가 더 많다(?))

“어때요,?한 방 먹으셨지요??있는 것은 헤아릴 수 없이 많잖아요.?있는 것이 하나뿐이라니 말이나 돼요?”

아이고 골치야.?그야말로 제가 여우처럼 제 꾀에 넘어가고 만 셈이었습니다.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조은의 <사당동 더하기 25>[철학자의 서재]

?오상현(숭실대학교 강사)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나는 스댕 요강과 1986년을 기억한다”

 

우연한 기회에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라는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이라는 부제가 나타내듯, 사회학자인 저자가 바라본 25년 가난의 기록들을 그림을 그리듯 잘 표현했습니다. 서평을 쓸 생각에 책을 읽다가 계획을 바꿨습니다. 사당동 사람들은 저자의 연구 대상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한 기록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서평은 서평이 아닙니다. 그저 어린 시절의 지독한 가난을 기억하는 한 젊은이의 고백입니다.

 

“엄마랑 아빠는 진짜 힘들게 살았다. 너희 두 남매만 집에 남겨두고 일하러 갈 적엔 마음이 정말 …….” 사당동 시절을 떠올리던 엄마는 눈물부터 흘린다. 이제는 아줌마보다 할머니에 가까워진 이 여인의 눈물 앞에 나는 말을 잃고 말았다. 애당초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였다고 생각했다. 그녀에게 ‘사당동’은 한숨과 눈물의 다른 이름일 테니까.

 

사당동 더하기 요강

 

▲ (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 <사당동 더하기 25>(조은 지음, 또하나의문화 펴냄). ⓒ또하나의문화

부모님은 내가 네댓 먹었을 때 서울로 상경했다. 첫 번째 도박이었다. 농사를 지어 먹고 살던 시골에서 위로 형과 누이를 셋이나 두었고, 아래로 동생 둘을 두었던 아빠. 여기에 엄마와 자식 둘까지 거두어 먹이려면 농사일만으로는 답이 안 나왔을 것이다. 그래서 택한 것이 서울행, 원래 잃을 것이 별로 없는 사람이 중대한 선택을 쉽게 하는 법이다. 그런 선택이란 사실 강요되는 것이니까.

사당동을 생각하면서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첫 번째 물건은 ‘요강’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요강을 ‘방에 두고 오줌을 누는 그릇’이라고 정의하는데, 실제로는 똥도 눈다. 멀쩡한 화장실을 놔두고 왜 요강을 방에 두냐고 묻는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 모르는 소리다. 요강을 방에 두고 쓰는 것은 화장실이 없어서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라는 사실. 우리 집은, 아니 우리 방은 (어차피 단칸방이었으니까) 반지하로 주인집을 떠받치고 있었는데 화장실은 그 주인집 마당에 있었다. ‘쾅’하고 대문 여닫는 소리가 주인집을 거슬리게 할까봐 해질녘이면 요강이 등장했다. 마치 해가 지면 나타나는 달과 같았던 은빛 스댕의 요강.

 

‘아이들을 방 안에 둔 채 문을 잠가 두고 일 나가는 경우도 흔했다.'(132쪽) 정말 그랬다. 맞벌이가 아니면 버티는 것조차 까마득하게 먼 시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침 일찍 일터로 나가시던 엄마가 잘 놀고 있으라고 손을 흔들며 문을 닫으면, 이내 ‘철컥’하고 자물통 잠기는 소리가 났다. 밤이 되어 다시 그 자물통 소리가 날 때까지, 잠긴 방 안에 남겨진 (둘의 나이를 합쳐도 겨우 열 살 남짓이던) 남매가 하루 종일 할 수 있는 일은 단 두 가지다. 아직 중천에 이르지도 않은 해가 어서 빨리 서녘으로 지기만을 바라는 일, 그리고 남겨진 밥상을 비우고 텅 빈 요강을 채우는 일이었다. 넘치지 않기를 바라면서.

 

사당동 더하기 산동네

 

아빠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저씨들처럼 ‘노가다’를 다녔다. 내게는 ‘목수’라는 전문직에 종사했었다고 포장했지만 사실 건설 현장의 일용직 노동자였던 셈이다. 여러분이 한 번은 가 보았을 ‘예술의 전당’이나 ‘동작대교’를 짓는 일에 참여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대부분의 서울 사람들은 이처럼 사당동 아저씨들의 덕을 한번쯤은 본 셈이다. 나중에는 둔촌동에 있는 시장에서 경비 일을 했다. 경비라는 직업도 사당동 아저씨들이 많이 하는 일이었다. 어쨌든, 아버지의 망치질은 여전히 경이로운 수준이라 환갑이 넘은 지금도 망치질은 손수 한다. 나는 장성한 아들이지만 나서지 않는다. 핀잔 섞인 눈총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작은 효라고 믿기 때문이다.

 

“일터 옮기는 일은 이들의 자의적 선택처럼 보이지만 자의처럼 보일 뿐 타의일 때가 더 많다. 이들의 직장은 거의 영세 업체들이어서 수시로 주인이 바뀌거나 부도가 나서 문을 닫는다. 또한 어차피 오래가지 못할 직장이기 때문에 월급이 조금이라도 많거나 노동 조건이 좋은 곳이 나오면 주저 없이 옮긴다.”(153~154쪽)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 이 책의 토대가 된 사당동의 한 가정에 대한 긴 관찰을 영상으로 풀어낸 다큐멘터리 <사당동 더하기 22>(조은, 박경태 감독)의 한 장면. 철거촌의 현장. ⓒhttp://indiespace.kr

엄마는 사당동 대부분의 아줌마들처럼 다양한 일을 했다. 남성시장 어귀에서 양말 장사도 했었고, 겨울이면 산동네를 돌아다니며 찹쌀떡이나 메밀묵을 팔았다. 당시 엄마의 나이는 20대 후반이다. “찹쌀떡~ 메밀묵~”을 외치며 산동네의 인적 드문 밤길을 홀로 다녔을 엄마다. 떡과 묵이 잔뜩 담긴 나무통의 무게보다 가난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삶의 무게가 더 했을 그때,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나와 동생의 얼굴이었을 것이다. 이후 엄마는 가발공장엘 나가 미싱사로 일했다. 남성시장에서 아빠랑 같이 포장마차도 했었단다.

 

동작초등학교(당시 국민학교)에 입학할 무렵이 돼서야 우리 남매는 감금에서 해방되었다.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기에 알아서 문도 잠그고 학교에도 갈 수 있었다. 당시 사당동의 인구밀도는 상상을 초월해서 2부제 수업은 기본이었다. 오후반 수업을 받을 때, 한번은 집에서 놀다가 학교 갈 시간을 놓쳤다. 1학년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내내 울다가 어떤 삼촌이 학교에 데려다 주었다. 사실 지각을 한 것인데 사정을 들은 담임선생님이 없던 일로 해주었다. 그 덕에 나는 초중고 12년 동안 결석은 물론이거니와 지각도 없다.

??

사당동 더하기 교통사고

 

’86 아시안 게임’이 한창이던 그 때, 사당동의 하늘에도 색색의 애드벌룬이 둥둥 떠 있었다. (<사당동 더하기 25>의 저자가 연구를 시작한 시점이 바로 이때다.) 바람에 날리는 그 풍선을 따라가다 나는 생애 최악의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뼈가 종아리를 뚫고 삐져나온 상황이었다고 들었다. 사고를 낸 아저씨는 이미 의식을 잃은 나를 안고 가까운 병원으로 뛰었다. 사당동 아이들은 늘 이런 사고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시유지에 아무렇게나 지은 집들이나 축대는 언제 무너질지 아슬아슬했고, 구불구불 좁은 길에는 사각지대가 많아서 차 사고도 빈번했다.

 

가해자 아저씨는 적어도 양심적인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두 군데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해야만 한다’는 진단을 받았음에도 애써 나를 세 번째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 세 번째 병원이 고석주 정형외과다. (자리는 옮겼지만 지금도 이수역 근처에 있다.) 당시 원장선생님은 다른 곳과 달리 일단 수술을 해보겠다고 했단다. 만약 실패를 한다면야 어쩔 수 없겠지만 7살 아이의 다리를 어떻게 쉽게 자르겠냐며. 휴대폰도 없던 시절, 길가에 뿌려진 아들의 핏자국을 따라 정신없이 당도한 병원에서 부모님의 하늘은 무너졌을 것이다. 다행히 수술은 성공적이었다. 20년 뒤에 나는 42.195킬로미터 마라톤 풀코스를 5시간 15분 만에 완주했다.

 

아들에 대한 미안함이 컸던 모양이다. 석 달 넘게 병원 신세를 지고 있는 내게 아빠는 컬러텔레비전을 선물했다. 그렇게라도 미안함을 표현하고 싶었으리라. 생애 첫 텔레비전을 나는 보물처럼 아꼈다. 지금 생각해보니 당시 우리 살림에 텔레비전이란, 상상도 못할 물건이었다. 그 신통방통한 텔레비전을 통해 ’86 아시안 게임’을 실컷 볼 수 있었는데, 내가 교통사고 당시를 정확하게 1986년으로 기억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 텔레비전은 내가 대학에 들어갈 때까지 우리 집에 있었다.

 

100일을 넘기고서야 나는 퇴원을 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고 석 달 열흘 만에 나오는 것은 무리였을 테지만, 병원비가 만만치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시골에 살던 아주 어린 시절, 나는 감기로 오랫동안 앓았던 경험이 있다. 피를 토할 정도였으니 감기보다 더 심한 병이었을 것으로 짐작하지만 그저 나는 감기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병원비가 모자라 엄마는 하나뿐인 결혼 패물이던 금가락지를 내다 팔았다고 한다. 더 이상 내다팔 물건이 없는 가난한 자들에게 병원은 오래 머물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텔레비전을 되팔 수는 없었을 테니까.

 

사당동을 떠나다.

 

철거를 앞두고 부모님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대부분의 사당동 사람들이 같은 고민에 놓였다. 또 다른 사당동으로 옮기거나 근처 위성도시로 떠나야 하는 그런 상황 말이다. 또 철거를 당할 바에야 근처 지방으로 옮기는 게 나을 듯 했다. ‘안양, 시흥 등 서울 근처 위성도시로 빠져나간 경우도 상당했다.'(147쪽) 우리는 안양을 선택했다. 두 번째 도박이었다. 모은 돈을 모두 털어 철물점을 차렸지만 장사가 잘 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비록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그곳에서 모든 것을 새로 시작해야만 했지만 아빠에겐 ‘내 사업’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우리 가족은 작은 방 하나가 딸린 가게로 이사했다. 역시 단칸방이었고 화장실도 밖에 있었지만 적어도 주인집의 눈치를 보지 않고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나는 이 시절을 행복으로 기억한다. 안양 호계동으로 이사한 뒤로는 늘 가게(집)엔 아빠와 엄마가 있었다.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고, “학교 다녀왔습니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난은 마치 그림자처럼 쉽게 벗어날 수 없는 것이어서, 그 뒤로도 엄마는 꽤 오랫동안 하나뿐인 그 방에서 이런 저런 부업을 했다. 미싱을 돌려 가발을 만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전자부품을 끼우는 일도 했다. 전자부품 끼우는 일은 나도 참 열심히 했었는데, 파란색 플라스틱 가루가 많이 날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일을 하고나면 꼭 그 고약한 가루들이 밥 위로 올라와서 밥을 먹다가도 몇 번씩은 집어내야 했다. 귀찮아서 그냥 씹어 넘긴 일도 많았지만.

 

4학년이 되던 첫 날, 그러니까 1990년 3월 2일에 호계동으로 이사했는데, 그해 2학기에 나는 부반장으로 당선되었다. 부반장이 되고 얼마 뒤가 내 생일이었는데 나는 무턱대고 우리 반 아이들을 죄다 초대했다. 심지어 담임선생님까지. 네 식구 편히 눕기도 어려웠던 단칸방에 그 많은 아이들과 선생님을 초대할 발상이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겠다. 게다가 없는 살림에 무슨 음식으로 생일상을 차리겠는가? 1990년 그 해 생일에 30명이 넘는 친구들이 우리 집에 왔다. 물론 천사 같았던 담임 홍금숙 선생님도 오셨다. 그날 엄마와 아빠는 열 마리가 넘는 통닭 값을 대야 했지만 나는 그날 받은 생일 선물(주로 노트나 연필)을 중학교 다닐 때까지 썼다.

 

당시 친구들을 적어도 내가 단칸방에 산다는 이유로 놀리지는 않았었다. 생일 초대에 응해준 친구들 중에는 방 두 개짜리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도 있었지만 나와 잘 어울렸다. 찻길 하나만 건너면 논밭이 펼쳐졌기에 개구리도 잡고 흙장난도 많이 했다. 이후 그곳은 수도권 신도시를 대표하는 ‘평촌’이 되었고, 나는 그곳에 새로 들어선 범계중학교에 입학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나는 가난이 ‘부끄러운 것은 아니다’라고 생각했지만, 얼마 뒤에 ‘부끄럽진 않아도 내세울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라고 고쳐 생각하게 되었다. 으리으리한 68평대의 아파트에 사는 친구 집에서 생일파티를 하고 나오면서였다. 단칸방으로 돌아온 그날 밤,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 <사당동 더하기 22>의 한 장면. ⓒmovie.naver.com

 

다시 사당동으로

 

이듬해, 철물점으로 악착같이 돈을 모은 부모님은 의왕시 변두리에 21평 아파트를 분양받았다. 물론 융자를 많이 끼고 샀으며 오래도록 갚아야 했다. 어쨌든 중학교 2학년 때, 나는 처음으로 단칸방을 벗어났다. 그러나 여유도 잠시, 세계화의 물결 속에서 자본은 밑바닥 경제까지 잠식해나갔다. 철물점도 예외는 아니어서, 대형마트에 밀려 점차 손님이 줄었고 대신 부모님의 한숨이 늘어갔다. 내가 안양시청에서 공익근무요원을 하던 때, 우리는 충남 공주로 내려와 떡방앗간을 시작했다. 세 번째 도박이었다. 또 다시 제로에서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또 10년이 넘게 흘렀고, 떡방앗간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목수였던 아빠의 빈틈없는 철저함과 악착같이 살아서 얻은 엄마의 넉넉한 마음이 근원이었다. 공주로 내려올 당시, 집안이 어려워 내놓았지만 팔리지 않았던 탓에 우리의 첫 ‘내 집’은 그대로 남았다. 나는 지금 부모님의 눈물과 피땀으로 얻은 그 집에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고 한다.

 

“가난의 냄새는 무어라고 표현하기 어렵다. 그 냄새는 어쩌면 찌든 때처럼 그들 삶 깊숙이 박혀 있어 좀처럼 씻어 내기 힘들 것 같은 느낌마저 준다.”(303쪽)

 

그렇다. 가난이란 좀처럼 벗어나기 어려운 굴레다. 지금 우리 가족이 이만큼이나 살 수 있는 것은 과거의 세 번의 도박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또한 아빠가 (비록 오른쪽 집게손가락 한 마디를 잃었지만) 건설현장에서 크게 다치지 않아서이고, 엄마가 (비록 미싱일 덕에 지금은 양쪽 눈이 성치 못하지만) 집을 나갔다거나 일수놀이에 돈을 떼이지도 않았기 때문이며, 우리 남매가 (비록 교통사고의 흉터를 훈장으로 남겼지만) 죽거나 큰 병에 걸리지 않아서이다. 억세게 운이 좋은 경우이기에 예외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예외는 예외일 뿐.

 

어떻게 우리 사회의 빈곤을 끊을 수 있을까? ‘열심히 일하면 부자가 되고 게으른 사람은 가난해 진다’는 자본주의의 논리가 거짓이라는 것쯤은 이제 부연이 필요 없는 명제가 되었다. 세계화의 물결 속에 양극화는 가속화되고 있으며, 생활고를 이유로 스스로 생을 마감하는 이웃들은 늘어만 간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분배보다는 성장을 중요하게 여기는 분위기다. 공자 이래로 2500년 동안 우리는 늘 분배보다는 성장을 꿈꾸었고, 그래서 늘 부족하다고 여겼으며, 더 잘 살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흙에 묻혔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라를 다스리는 자는 ‘적은 것을 걱정하지 않고, 고르게 (분배)되지 못함을 걱정하며, 가난한 것을 걱정하지 않고 편안치 않을 것을 걱정한다.’고 들었다. 고르게 (분배)되면 가난함이 없어지고, 조화를 이루면 부족함이 없어지고, 편안하게 되면 (마음을) 기울일 일이 없어지는 법이다.”(孔子曰, … 丘也聞有國有家者, 不患寡而患不均, 不患貧而患不安. 蓋均無貧, 和無寡, 安無傾.)” (<논어>, ‘계씨’)

 

나는 내일도 모교 강의를 하러 가기 위해 사당동을 지날 것이다. 인연은 인연인가보다. 지독한 가난의 냄새도, 은빛 스댕 요강의 기억도 이제는 가물거리는 추억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이웃의 가난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때마침 지방선거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거짓말로 현혹하는 사람들을 걸러낼 시간이다.

 

 

신화 해석의 중요성: 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신화 해석의 중요성:?우리 사회의 지식 형성 과정[철학을다시 쓴다]-2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은 바다를 끼고 지중해 해안가에 세워진 그리스 이오니아 식민지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합니다.

여러분들 밀레토스라는 지역을 아시죠??밀레토스가 어떤 곳입니까??철학개론 배우신 분들 손들어 보세요.?탈레스라는 이름은 압니까??서양에서 최초의 철학자라 알려진 탈레스가 밀레토스 출신입니다.?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이 물이라고 말한 거로 유명한 사람이죠.?여러 방면에 다양한 재질을 가지고 있어서 천문학에도 일가견이 있었고,?늘 하늘만 쳐다보고 다니다가 웅덩이에 빠진 적도 있어서 가까운 것은 못보고 먼 것만 보고 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었다고 하는 일화도 있죠.?실제로 만물의 근원이 뭐냐 하는 물음은 오랫동안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중요한 주제였습니다.?종교에서도 이 우주,이 세상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지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거기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애를 써 왔고,?철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주를 이루고 있는 가장 작은 하나가 무엇이고,?그것의 크기는 얼마나 되는가에 대한 끝없는 탐구가 현대 입자 물리학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가장 큰 하나인 우주라는 것이 어떤 식으로 이루어져 있느냐,누가 이 큰 우주를 만들어 냈느냐,?혹은 저절로 이 큰 우주가 생겨났느냐 하는 화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관심이 크죠.

이야기가 좀 재미있어야 하니까 우리 쪽으로 눈길을 돌려봅시다.?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천지창조 신화가 없었던 걸로 생각을 해요.?이 잘못된 생각이 어디에서부터 비롯됐냐면,?단군신화를 엉터리로 해석해 온 이른바 신화학자들이나 역사가들의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인 데서 생긴 고정관념에 매달린 탓이 커요. ‘웅녀’설화를 예로 들면 토템사상을 끌어들여 웅녀는 곰 부족을 상징하고 환웅은 호랑이 부족을 상징한다,?이 부족국가들이 결합해서 고조선이라는 민족국가를 형성한 것이다,?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한단 말이죠.?이 엉터리 없는 이야기를 맨 처음에 퍼뜨린 사람이 누군지 알아보았더니 육당 최남선이 나옵디다. ‘불함문화론’에 나오는 이 터무니없는 주장을 신화학자 김열규 선생이 확산시킵니다.?너무 그럴싸한 이야기여서 많은 학자들이 거기에 넘어가 우리나라에는?‘토템’과?‘샤만’?이런 것들은 있었지만,천지 창조신화는 없다,?이런 식으로 규정을 짓는데,?아무리 조그만 부족도 천지창조의 신화가 없는 부족은 없습니다.?전부 나름대로 가장 큰 것이 어떻게 해서 생겨났는가에 대해서 관심과 호기심을 가지고 그것을 설명해 내려고 애씁니다.?물론 설명 체계는 짜임새가 정교한 것도 있고,?느슨하거나 엉성한 것도 있지만,?없는 곳은 없습니다.?우리 나라 사람들만 별종이어서 천지창조 신화가 없는 거냐 아니면 유실된 거냐??이런 생각 할 수도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다.?제가 한 삼십 년 전부터 단군신화는 재해석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신화학에 문외한인 사람이 떠벌리는 말이라고 권위를 인정해 주질 않아요.?이제부터 제가 제대로 해석을 할 테니까 여러분들 들어 보세요.

삼국유사에 나오는 단군설화를 보면?‘환인’의 아들?‘환웅’이 아버지에게 아래로 내려가 중생들에게 널리 이로움을 주겠다고 해서, ‘신단수’?아래로,?바람,?비,?구름,?번개,?우레 같은?‘손’(사)을 데리고 내려옵니다.?그런데 환히 빛나는 멋있는 수컷?‘환웅’(해)에게 반한 암컷 둘이 찾아옵니다.?이른바‘곰’과?‘범’이지요.?환웅이 쑥과 마늘을 먹고?‘100일’을 견디면 짝으로 삼겠다고 말하자, ‘호랑이’는 그사이를 참지 못하고 달아나고?‘웅녀’는 견디고 참아서 환웅의 짝이 되어?‘단군왕검’을 낳았다.?이런 식으로 기록되어 있죠.

‘호랑이’는 우리말로?‘범’이죠.?언어학자들은 어원을 추적할 때 모음은 제껴 놓는 일이 많습니다.?그 만큼 모음은 시간과 지역에 따라 자주 바뀌고 변화무쌍하기 때문입니다. ‘범’은?‘밤’으로도 발음되고,?그렇게 기록된 예도 있습니다.?그리고?‘곰’은?‘검’도 되고, ‘굼’도 되고, ‘감’으로도 바뀝니다.?처음 낱말을 가르칠 때 한 낱말을 비슷한 다른 말로 바꿔서 그 말의 뜻을 일러주는 것이 일반적인데,?이것을?‘사전적 정의’(lexical definition)라고 합니다.아이들에게 한문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가르치는 천자문을 보면 뭐라고 되어있어요??하늘천,?따지,?감을현,?누르황.?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냐면,?한 낱말을 뜻이 같은 다른 낱말로 바꾸어서 하늘은?‘검’이요,?땅은?‘누리’다,?이렇게 한 낱말의 뜻이 다른 낱말과 같다는 것을 밝혀주지요.?왜 하늘을?‘검’이라고 할까요??나중에?‘감’, ‘곰’, ‘구무’, ‘가마’, ‘개마’,?임금 할 때?‘금’,?이런 것들이 모두?‘거무(검)’에서 파생된 말인데,?우리 옛 분들은 빛의 간섭이 없는 밤하늘 빛깔이 본디 하늘빛이라고 봤습니다. ‘하늘은?‘검’이다.?그리고 땅은?‘누리’다.’?이렇게 옛날에?‘하늘’이라는 이름도 있었지만,?그것을?‘검’(거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개마’고원을 왜 그렇게 부르느냐 하면 하늘에 닿아 있는 봉우리라는 뜻에서 붙인 이름입니다.?개마,?고마,?구마,?다 같은 말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입니다.?이렇게 따지면 실마리가 잡힙니다.?밤도 깜깜하고 하늘도 깜깜합니다.?깜깜하다는 점에서는?‘밤’(범)과?‘검’(곰)은 다르지 않습니다.

‘백일’이라는 말도 달리 해석해야 해요.?해가 나는 동안, ‘온(백)날’, ‘온날’은 해가 비추는 동안,?온종일이라는 소리죠.?해가 비치는 동안에 자기와 함께 견딜 수 있는 것을 자기 짝으로 삼겠고 했는데,?해가 비추자마자 범(밤)은 달아나고 곰(검)은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것이죠. ‘하늘’과?‘해’가, ‘웅녀’와?‘환웅’이 짝을 맺게 되어,?하늘이 해의 아낙이 되었다,?이것이 단군설화에서 나타나는 우리식 천지창조 신화입니다.

“우리 신화에서는 하늘이 여성이고 태양이 남성입니다.?이게 그리스 신화 책엔 거꾸로 되는 거죠.?저쪽에서는?‘우라노스’, ‘천공’이 남성이고, ‘가이야’, ‘땅’은 여성으로 상징되지요.?하늘과 해가 짝을 지어서 낳은 게 무엇이냐……. ‘다’, ‘따’, ‘다알’(달,?딸),?땅.?이 지구도 그렇게 생겨났고,?달도 그렇게 해서 생겨났다.?그럴 듯한 말이죠??아무도 이것을 학설로 봐주지 않으니까?‘거짓말’로 여겨져?30년 동안 여기저기 귀에서 귀로 흘러 다니다가 사라져 버렸어요.?어때요,?그럴 듯해요?”

“네.”

그럴 듯하면 하나 더. ‘오행사상’?있죠??오행에서 기본색으로 다섯 가지 색이 나옵니다.?중국에서는 목,?화,?토,?금,?수가?‘오행’이죠??목은 동쪽과 풀,화는 남쪽과 불,?토는 중앙,?계절적으로 보면 여름과 가을 사이고,?금은 가을.?수는 겨울입니다.?말하자면 오행의 자리는 동,?남,?중,?서,?북인데 빛깔로 나타내면 목은 푸른색으로 나타나고,?화는 붉은색,?토는 누른색,?금(金)은 흰색,?수는 검은색으로 나타납니다.?목화토금수로 나타나는 오행이 우리나라에서는 그대로 가져다 쓰기 어렵다는 것을 곧 알 겁니다.?유럽이나 러시아,?그 밖에 다른 지역을 가보면 부엽토가 뒤섞이고 썩어서 물이 검습니다.그러나 우리나라 물은 맑아서 투명합니다.?색깔이 없습니다.?우리나라는 산구비가 가파르고,?나무가 많기 때문에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이 검지 않아요.?중국에서 만들어진 오행설을 보면 갑자기 하얀 해 대신에 숫돌에 하얗게 간?‘쇠’가 끼어듭니다. ‘금’(金)이?‘쇠’지요.?중국에선 오행이 색깔로 보면 푸른색,?붉은색,?누런색,?흰색,?검은색으로 되는데, ‘쇠’를 흰색으로?‘물’을 검은색으로 나타냅니다.?우리말 형용사?‘푸르다’는?‘풀’이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붉다’는?‘불’에서 나오고, ‘누르다’는?‘누리’에서,?다시 말해 황토 땅에서 나온 것이고, ‘희다’는?‘해’에서 나왔고, ‘검다’는?‘검’?곧?‘하늘’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예부터 우리 나름으로 오행설이 있었고 그에 따라서 빛깔이 지정됐다면 우리나라 기본 색채가 훨씬 더 원초적이고,?전부 자연물로 됐다, ‘쇠’?대신?‘해’가 들어가고,?물 대신 하늘이 들어갑니다.?우리나라 사람들은 가장 삶에 밀접한 자연물에서 우리의 색채를 끌어내었다.?이게 민족주의적인 발언입니까??아니죠?

잘 들어 보십시오.?우리나라에서는?‘물은 맑고’, ‘불은 밝고’, ‘바람은 부는’것입니다.?이름씨(명사)와 움직씨(동사),?그림씨(형용사)가 같은 소리,?하나의 말에서 흘러나옵니다.?우리민족은 이런 점에서 아주 좋은 언어를 물려받았고,?이런 말을 부려서 쓸 수 있었던 우리 조상들이 참 대단한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어요.?그런데 여러분들은 우리 조상들이 시원찮아 보이니까 있다/없다,?이런 말을 시시하게 여기고?‘존재’와?‘무’(無)하면 대단하게 보고 그렇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