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딧세이적 주체, 오이디푸스적 주체, 사드적 주체: 영화 ‘아가씨’와 주체의 담론들 [나인당케의 단상들]

박찬욱 감독의 영화 <아가씨>에서 우리가 만날 수 있는 것은 상이한 형태의 주체들이다. 영화는 각기 다른 권력관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주체들의 관계의 형태들을 보여줄 뿐 아니라, 이 관계들이 전복되며, 하나의 주체가 다른 형태의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 즉 주체의 고양 과정 역시 보여준다. 즉 영화 곳곳에는 주체의 위치변경과 고양을 암시하는 장치들이 곳곳에 배치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아가씨>는 한 편의 성장드라마이자, 계몽주의 시기에 연원을 두고 있는 ‘교양(Bildung)소설’의 현대적 버전으로 읽히기도 한다. 다만 이러한 주체의 고양의 귀결이 주인공이 속한 하나의 세계(한 평생 밖으로 나가보지 못한 집)의 붕괴와 성공한 탈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영화가 관객에게 주는 즐거움은 극대화된다.

 

여러 가지로 <아가씨>의 전편과 같은 느낌을 주는 <친절한 금자씨> 역시 이러한 주체의 고양을 화두로 던진다. 그런데 금자의 변신이 배신과 감옥생활 속에서 얻은 스스로의 깨우침에 의한 것이라면, 그리고 복수라는 달성해야 할 분명한 목적에 의한 것이라면, <아가씨>에서 두 여성의 각성은 서로가 서로의 삶을 관찰하고 이해하는 과정을 통한 것이다. 즉, 주체의 각성이 가능한 조건에 대한 물음은 주체들 사이의 새로운 관계설정에 대한 물음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새로운 관계설정은 금자가 자신의 딸 앞에서 죄를 고백함으로써, 즉 내러티브의 결과로 도달한 지점이다. 그러나 <아가씨>에서는 이러한 관계의 전도가 그 자체로 사건을 촉발시킨다.

 

이 점은 서로를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희생물로 대하던 두 사람이 어떻게 이 관계를 전도시키고 소통에 이르렀는가에 대한 고찰 속에서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질문을 이렇게 요약해 보자. 오딧세이적 계략의 두 주체는 어떻게 타자에게 자신을 개방하는가?

 

오딧세이적 주체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 등장하는 신화 속 오딧세이의 모험과 귀향 과정을 “주체의 근원사”로 파악하여, 그 안에서 근대적 주체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 그 중에서도 아도르노가 작성한 오딧세우스에 대한 보론의 핵심이다. 그에 따르면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목적(이타카로의 귀향)을 달성하기 위해 자신의 지략을 도구적 합리성으로 사용하는 근대적 부르주아 주체의 원형이다.

 

02691_D잘 알려진 시레네의 노랫소리에 관한 에피소드에서 오딧세우스는 부하 병사들이 시레네의 유혹을 듣지 못하도록 그들의 귀를 밀랍으로 막은 뒤 자신은 배의 돗대에 몸을 묶어 이 유혹을 통과한다. 키르케의 유혹과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위협을 물리치기 위한 과정에서도 오딧세우스는 지략을 발휘해 위기를 극복한다. 자신의 지략을 통해 상대를 물리치고 목적을 달성하는 주체의 모습 속에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부르주아적 차가움(bürgerliche Kälte)”의 원형을 발견한다. 오로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기 위해 타자를 희생시키는 근대적 주체의 유아론적인 태도 속에는 먹잇감을 희생시켜 자신을 보존하려는 맹수의 냉혹함이 내포해 있다. 이타카에 도달한 오딧세우스는 아들과 함께, 자신의 아내를 유혹하던 구혼자들을 잔혹하게 살해한다. 물론 서사시인 호메로스는 이 과정을 모험담이자 영웅담으로 미화한다. 부르주아적 주체의 영웅담을 ‘기업가 신화’로 포장해 미화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눈에 간계를 사용해 목적을 달성하는 오딧세우스의 모험담은 그 자체로 근대 부르주아 주체의 냉혹함의 원형일 뿐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모두 이루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위해 상대를 희생시키려는 계략의 주체였다. 숙희는 히데코를 백작과 결혼시킨 뒤 정신병원에 보내 그녀의 재산 중 일부를 가로채 신분상승을 이루려는 목표가 있었다. 히데코는 거꾸로, 그러한 숙희를 속여 자기 대신 병원에 가두고, 자신은 숙희의 이름을 빌려 이모부 코우즈키의 집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삶을 누리려고 했다. 둘은 모두 백작이라는 고리의 매듭과 공모하여 서로를 희생시키고자 했던 오딧세우스적 계략의 주체들이었던 것이다. 히데코가 백작과 결혼하도록 앞장서는 숙희의 모습과, 숙희의 어리숙함을 확인한 뒤 안도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그러한 계산적 주체의 냉혹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 계략적 태도의 반전은 어떻게 이뤄지는가? 아가씨와 하녀. 서로 양 극을 이루는 두 주체는 서로의 모습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일찍 부모를 잃고 외톨이로 살아가는 히데코를 씻기고 입혀서 아름다운 공주로 만드는 것에 보람을 느낀 숙희는 히데코의 어머니가 된다. 그녀는 모든 것을 가진 히데코에게서,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소문난 미인이었던 어머니의 사진을 보여주며 ‘난 엄마만 못하다는데…’ 하고 하소연하는 히데코의 모습은 전설적인 소매치기였던 어머니의 모습을 소문으로만 기억하는 숙희 자신의 모습의 투영이다. 모든 지각은 투사 과정이라고 <계몽의 변증법>의 저자들은 말한다. 히데코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한 숙희의 마음은 그러나 대상을 자기화하려는 동일성원칙의 주체와는 다르다. 그것은 오히려 상대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알고 함께 아파하는 미메시스적 주체의 모습에 가깝다.

 

‘난 태어나지 말았어야 했나봐’라는 히데코에 말에 ‘어머니는 아가씨에게 널 낳고 죽으니 괜찮다고 하실 거에요’라고 말해주는 숙희. 이 말은 그 자신이 여두목에게 직접 들은 말이기도 하다. 자신의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로 상대를 위로하는 숙희와, 그러한 위로의 말로 상처를 달래는 히데코의 동병상련은 이 두 주체가 서로를 희생물로 보지 않고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느끼는 계기가 된다. ‘넌 내가 불쌍하니? 난 네가 불쌍해’ 하고 자살을 시도하던 히데코는 말한다.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연민하는 관계는 불행하다. 그러한 관계는 연민하는 자와 연민을 받는 자 사이의 위계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로가 각자의 아픔에 공감하면서 이뤄지는 아픔의 공유는 둘의 관계를 수평적으로 만든다. 연대는 그러한 수평적 관계에서 비로소 가능하다.

 

두 주체는 이제 여성적 연대를 이룬다. 계략을 통한 주체에서 연대하는 주체로 고양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연대의 계기는 상대의 고통에 대한 연민, 그리고 타자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이해하는 공감이다. 그러나 두 주체의 관계는 공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두 여성은 자신들이 각기 다른 남성적 주체들 – 이모부와 백작 – 의 또 다른 희생물이라는 자각에 이른다. 이제 이 상호 연대는 또 다른 주체들에 대한 대항의 관계로 전화된다. 고통받는 자들의 연대는 그러한 고통을 자신의 양분으로 삼는 다른 주체들의 지배에 대한 거부의 원천이다. 이 또 다른 주체들, 그들은 극도의 거세컴플렉스를 지배본능으로 전화시킨 남성들이다.

 

오이디푸스적 주체

 

IngresOdipusAndSphinx잘 잘려져 있듯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유아가 겪는 최초의 성애가 어머니를 대상으로 한 근친적인 성격을 가지며, 아이는 어머니를 소유한 아버지의 존재로부터 자신의 존재 위협을 느끼고, 이 관계를 내면화함으로써, 즉 아버지의 지배권을 인정함으로써 오이디푸스기를 극복한다. 그렇게 해서 탄생한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그의 근원적 사랑의 대상을 상실했다는 결여감을 무의식 속에 간직하고, 내면화된 아버지의 권위(초자아Überich)에 복종함으로써 자신의 욕망(이드Es)을 희생시켜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다.

 

프로이트는 남자 아이와 여자 아이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오이디푸스를 극복하는 과정을 서술한다. 그에 따르면, 남자 아이는 처음에는 여자들도 자신과 같은 남근이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그러나 우연히 보게 된 다른 여자아이의 성기에 남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뒤, 아이는 자신의 남근도 거세될 수 있다는 공포를 겪는다. 아버지의 지배질서는 이러한 거세위협을 가하는 존재로 체험된다. 이는 아이가 그토록 쉽게 원초적 사랑의 대상인 어머니를 포기하고 아버지의 규범을 받아들이는 이유로 설명된다. 오이디푸스적 주체는 동시에 거세위협을 겪는 주체이며, 그러한 위협 앞에 자신을 희생시킨 주체다. 이 위협의 공포를 해소하기 위해 아이는 스스로 아버지가 되는 길을 택한다. 즉 스스로 지배자의 위치에 오른다면 남근이 거세되지 않을 것이라는 상상 속에서 자신을 아버지와 동일시하게 된다. 남성적 리비도가 지배본능과 결합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반면, 여자 아이는 자신에게는 없는 남근을 남자는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뒤 그것을 부정하거나 거세 위협에 시달리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즉각적으로 수용하고 남근선망에 빠진다. 즉 남자가 되고 싶고, 남근을 갖고 싶다는 불가능한 소망을 갖게 된다. 이제 아버지에 대한 사랑과 맞물려, 여아는 자신을 결여된 존재로 자각한다. 이는 여자 아이가 수동적인 존재로 자라나는 이유로 설명된다.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서, 신경증의 발병은 이 두 콤플렉스, 즉 거세콤플렉스와 남근선망의 극복과 관련되어 있다.

 

왼 손의 다섯 손가락이 모두 잘리고, 오른 손에도 구멍이 뚫리는 극한의 고통을 경험하고 죽음에 이르는 최후의 순간 백작의 입에서 발화된 말은 “자지를 지키고 죽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는 것이다. 이 순간은 실제로 히데코의 이모부가 그의 성기를 거세시키기 직전에 벌어진 상황이다. 남근을 지키고 죽는 것이 다행이라는 그의 말 속에서 백작은 극단적인 거세콤플렉스를 겪는 오이디푸스적 주체로서 자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박찬욱의 이전작 <올드보이>의 오대수 역시 혀를 희생시킴으로써 남근을 지킨 인물이다. 누나의 죽음에 복수하려는 이유진이 그에게 ‘이유진의 자지가 아니라 오대수의 혀가’ 자신의 누나를 (상상) 임신시켰다고 분개하자, 오대수는 그에게 무릎을 꿇고 자신의 혀를 스스로 절단한다. 이처럼 누나를 임신시킨 ‘상징적’ 남근을 제거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실제적 남근을 지킬 수 있었고, 딸인 미도와의 근친적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백작과 오대수는 모두 남근을 지키려는 남성 주체들의 거세공포를 재현한다.

 

백작의 거세공포는 거꾸로 그로 하여금 자신의 남근이 갖는 ‘권위’에 집착하게 만든다. 숙희를 협박할 때 그는 그녀의 손을 자신의 성기에 강제로 접촉시킨다. 이것은 자신의 말에 ‘남근’이라는 권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남근에 맹세하건데’ 나의 말은 장난이 아니라는 위협이다. 그는 여성의 남근선망을 교묘하게 이용한다. 그러나 숙희는 그의 위협에 순종하지 않는다. 그녀는 그에게 ‘어린애 장난감 같은 X대가리’를 치우라고 함으로써 이 남근의 권위를 조롱해버린다.

 

히데코의 이모부 코우즈키 역시 남근의 형상을 자신의 권위의 지표로 삼는다. 남근의 권위를 상징하는 뱀의 형상은 넘어서는 안 될 금기를 지시한다. 이 비밀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알려고 해서도 안 되고, 여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자의에 의해 도망쳐서도 안 된다. 뱀 조각은 넘지 말아야 할 한계를 지칭한다. 뱀은 그의 장서관에서 행해지는 음란한 독서회를 지키는 수호신이다. 히데코와 함께 도주하는 날, 숙희는 히데코가 강제로 낭독해야 했던 책들을 내다버리고 이 뱀 조각을 잘라버린다. 그것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들이 만들어 놓은 남근의 권위와 금기에 대한 도전이며, 동시에 ‘남근선망은 없다’는 것을 반항적 행위로 표현한 것이다.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두 여성은 남성의 고환을 상징하는 방울들을 주고받으며 사랑의 유희를 나눈다. 권위와 금기를 상징했던,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남근은 이제 남성들의 질서에서 벗어난 두 여성들의 유희의 대상이 된다. 남근은 선망의 대상이기를 중단하고, 그 권위적 역할은 상대화되며 가치저하된다. 이제 두 여성은 오이디푸스적 주체를 극복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거듭난다. 오이디푸스의 (누이이자) 딸인 안티고네는 테베의 새로운 왕 크레온이 내린 금기, 즉 자신의 오빠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매장하지도, 장례를 치러주지도 말라는 명을 어기고 그의 시신을 매장한다. 지배자의 금기를 어긴 안티고네의 행위는 ‘인간의 법’과 ‘신의 법’의 이항대립이라는 사고를 낳았다. 인간의 법은 죽은 자에 대한 원한으로 그의 시신 매장을 금지했지만, 신이 내린 법은 사랑이라는 원초적 감정이 실정법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계명을 뜻한다. 이 계명을 지키기 위해 안티고네는 죽음을 자초한다. 히데코와 숙희는 남근의 권위가 부여하는 법을 어김으로써 신의 법을 실행에 옮긴 안티고네의 후예들임을 드러낸다.

 

‘내 인생을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 나의 타마코, 나의 숙희.’ 귀족 집안의 상속녀 히데코의 삶을 망치는 것은 동시에 그녀를 구속에서 해방시켜 주는 행위이기도 하다. 좁은 삶의 울타리에서 벗어나기 위한 시도는 남근이 부여한 금기와 질서에 순응해 왔던 삶을 붕괴하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그런데 이러한 붕괴는 기존의 주체가 새로운 주체로, 즉 자기 욕망에 대한 무한한 긍정의 주체로 탄생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무한한 욕망을 즐기는 사드적 주체 말이다.

 

사드적 주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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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우즈키의 비밀 장서관에서 열리는 낭독회에서는 사드를 흉내낸 일본인 작가의 포르노 소설이 낭독된다. 코우즈키는 실제로 사드의 <소돔 120일>에 등장하는 사악한 주인공들을 연상시킨다. 자신의 욕정을 실행하기 위해 닥치는대로 살인을 하고 음모를 벌는 사드의 인물들과, 아내를 버리고 새로 맞은 일본인 아내를 죽음에 이르게 하며 조카를 자신의 욕망에 동원하는, 그리고 관음증적인 성적 도착에 탐닉하는 코우즈키는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그는 선과 악의 경계 따위는 신경쓰지 않는, 원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든 얻으려 하는, 악덕의 관능을 예찬하는 사드적 인물이다. 그의 대저택과 비밀장서관은 <소돔 120일>에서 6개월 간 향락과 폭력의 잔치가 벌어진 블랑지스 공장의 대저택을 연상시킨다.

 

<소돔 120일>은 사드가 12년간의 감옥 생활중 쓴 책으로, 이 책에서 묘사된 악덕과 폭력, 광기, 온갖 종류의 도착적 성행위들은 악덕을 지지하고 도덕에 분개했던 작가 사드의 상상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고, 바스티유 감옥이 습격을 받아 그가 풀려난 뒤, 그는 좀 더 절제되고 명료한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가다듬는다. 그의 성과 정치에 대한 관점이 집약적으로 서술되어 있는 <규방철학>에서 사드는 프랑스혁명이 몰고 온 악습에 대한 대대적인 철폐작업이 일상을 구속하는 구 시대의 성도덕에 대한 폐지와 해방으로 한발 더 나아가야 함을 강조한다.

 

생땅쥬 부인의 별장 규방에서 벌어지는 향락은 이제 새로운 시대 리베르탱이 지녀야 할 철학적 입장을 배우고 그것을 몸소 구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을 맡는다. 구 시대가 강요하는 성도덕에서 벗어나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데 모든 힘을 기울이라는 돌망세와 쌩땅쥬 부인의 가르침은 새 시대의 리베르탱들에게 전달하는 사드의 호소였다. “한 마디로, 성교하고 성교해라. 바로 그것이 네가 세상에 나온 이유다. 네가 가진 힘과 의지 말고는 네 쾌락에 구속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새 시대의 도덕은 성과 욕망을 규제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욕망이 제기하는 충동과 그 흐름이 곧 도덕이 되는 것이다. 이 도덕은 인간이 종교의 허울을 쓰고 만들어낸 관습이 아니다. 새로운 도덕, 즉 향유하라는 도덕은 자연이 우리에게 욕망을 부여하고 그것을 실현할 신체적 에너지를 줌으로써 명령한 우리의 존재 목적을 실현하는 일이다. 즉 자연이 부여한 목적이 바로 입법의 원리가 된다.

 

집 밖으로는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는 히데코는 <규방철학>에서 모친의 강요로 수녀원에 가야 했던 소녀 으제니를 닮아 있다. 돌망세와 생땅쥬 부인의 교육을 받는 학생 으제니는 넘쳐나는 호기심과 놀라운 습득력으로 그들의 스승들을 들뜨게 만든다. 히데코는 숙희의 제자가 되어 그녀에게 성적 욕망을 해소하는 법을, 그리고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스스로를 기꺼이 ‘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에게 내맡기고 탈주를 실행하는 히데코는 자신의 충동 외에 그 어떤 도덕적 규칙에도 순응하지 말라는 사드의 계명에 충실한 사드적 주체다. 즉 <아가씨>에는 두 가지 사드적 주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하나는 <소돔 120일>의 사드적 주체인 코우즈키이고, 다른 하나는 <규방철학>의 사드적 주체인 히데코다.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사드적 주체인가라는 물음을 던지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이다. 사드는 도덕적 판단에 무관심했던 인물이고, 누가 ‘진정한’ 주체냐는 식의 물음에는 하품을 했을 것이다.

 

다만 우리가 어떤 욕망의 주체를 긍정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던져볼 수 있을 것이다. 히데코와 숙희는 오딧세이적 계략의 주체에서 연대하는 미메시스적 주체로, 오이디푸스적 남근선망을 거부하는 안티고네적 주체로 고양되는 과정에서 으제니의 모범에 따라 자신의 욕망을 긍정하는 사드적 주체에 도달한 어떤 주체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씨>는 주체의 담론에 대한 영화로 이해될 수 있다.

 

섦 [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7

 길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한없이 낯선, 한없이 내려가는 그 길을 가면
체를 걸러 면을 만들라고 하고
한없이 위를 보라한다.
위를 보면 길을 걸을 수도 없다.
아래를 보고 한발한발 걸을 때
구멍송송 걸른 체 사이로 버려질 것은 버려지고
사이로 들어오는 바램은 얼굴에 맞닿아 바람을 일으킨다.
그 곳에는 굳이 채워야 할 것도
내세워야 할 것도 필요하지 않다.
바람 한점 없는 굽은 땅에
저절로 바람은 분다.
바람은 항상, 언제나 기다리고 있다.
내가 머무는 곳에, 내가 가는 곳에.

2016-6-29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이시대와철학2016-6-29 길 copy


작업노트

아직 푸른 잎이 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고 앙상한 나무를 마주할 때
나무의 선을 따라 그려지는 가지의 선은 사람들의 발길 닿는대로
만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지는 조금씩 조금씩 변화하여 무수한 길을 만들어내듯
우리의 삶 깊숙이 들어가 있는 인위가 만들어낸 복잡한 공간 현상에서
새로운 곳으로 떠나 자연이 숨쉬는 산을 오르고 내려가며
아무것도 없었을 그 곳에 많은 사람이 밟고 지나갔을 새 길이 다져져 있음을 봅니다.
자연의 한숨 한숨과 이웃하며 사람들의 공간을 내려다보면
삶을 너무 틀에 가둬 살았다는 생각이 들고 가슴 한 곳의 무거움이
어느 한 순간 가벼움으로 바뀝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참으로 시원해지는 순간입니다.
어렵지 않게 스스로의 발이 가는 길을 바라보기도 하며
노래하는 새들을 바라보기도 하며, 척박한 공기에 어느 순간 바람이 불어오면
어지럽게 춤을 추는 나무를 보기도 하며, 세상의 소리도 듣기도 하며
바람의 노래를 듣기도 하며 자신이 만들어가는 길에서 가는 방향에 따라
새롭고 다른 형태의 길이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 밟아가는 그 모두의 여정은
아름다운 길이 되는 것 같습니다.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영화 [나쁜나라] 공동체 상영 후기

이지영(학술1부 부장)

 

다시 4월이 왔다. 4월은 얼었던 황무지에서 생명을 키워내는 잔인한 달이라고 영국의 한 시인은 노래했다. 새로운 생명이 움트는 찬란한 일에는 고통이 따르는 법이다. 그러나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에게 4월은 힘들게 움튼 생명이 만개하기도 전에 속절없이 사라지는 것을 그저 바라보아야만 했기에 잔인한 달이 되어버렸다. 생명의 존귀함에 경중이 있겠느냐마는 300여 명의 세월호 희생자들 중 상당수가 세월호를 타고 수학 여행길에 올랐던 고등학교 2학년 어린 학생들이었기에 그 아픔은 더욱 배가 되었다. 세월호 침몰 사고 2주기를 앞둔 2016년 3월 26일 토요일 오후 3시, 영화 “나쁜 나라” 한국철학사상연구회 공동체 상영 및 김진열 감독과의 토론을 위해 회원들 및 그 친구들이 하나 둘 씩 연구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기 시작했다. “나쁜 나라”는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이 사고로 가장 많은 희생자가 나온 단원고 희생 학생 유가족들의 대정부 진상 규명 요구의 진행 과정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보다 좋은 질의 영상을 함께 보기 위해 공동체 상영을 기획한 이들은 1시부터 한철연 사무실에 나와 영사기를 설치하고 영상과 음질을 체크하는 등 공을 들였다. 정성이 헛되지 않았는지 상영은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사고 이후 50일이 지난 시점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카메라의 눈은 팽목항, 진도 체육관, 광화문 광장, 국회 등에서 ‘세월호 침몰의 진실을 밝혀 달라’고, ‘다만 내 아이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려달라’고 외치는 유가족들의 모습을 따라간다. 뭐든 해줄 것 같았던 정부는 책임을 회피하거나 축소하려하고, 언제든지 청와대로 찾아오라는 대통령은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진상 규명을 요구하는 유가족들의 아픈 몸짓과 절규가 차가운 청와대의 거대한 침묵과 대비를 이룬다. 영화가 진행됨에 따라 정숙했던 관람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청와대 진입을 막는 이들을 향해 ‘아이들이 죽어갈 때 마지막에 엄마를 불렀을 것이라고, 내가 바로 엄마라고’라고 외치는 한 어머니의 뒷모습에 여기저기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영화가 끝나고 김진열 감독과의 대담이 시작되었다.

긴 시간 세월호 유가족들과 밀착 동행해 내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김진열 감독에게 참석자들은 여러 가지 질문을 던졌다. 세월호 유가족을 만나면 어떻게 대하는 것이 좋은가, 유족들이 국가에 바라는 구체적인 요구 사항은 무엇인가, 영화가 sns 인터넷 뉴스 보도 등과 달리 극적인 면이 떨어지는데 의도가 있었는가, 인문학 연구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등으로 이어졌다. 김진열 감독은 차분하게 질문 하나 하나에 응했다. 유가족을 만나면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하는 것이 좋겠다, 타인들의 시선에 감시당하는 듯한 느낌에서 벗어나고 싶어한다. 유가족들은 다만 진실을 원한다, 정부가 진상 규명을 회피한다는 정황을 만들기 때문에 의혹도 깊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동의 아래 만들어졌다. 유가족들은 자극적인 사고 사진이나 증언들을 접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분들의 정신적 고통의 깊이를 감안하여 자극적인 면은 피하고 최대한 객관적 시선으로 자취를 쫒았다. 인문학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러 와서 시민 학교를 열었던 적이 있는데 유가족 반응이 좋았던 것으로 안다. 인문학자들은 인문학자대로 자신들이 할 역할을 찾아서 해주면 좋겠다 등의 답변이 있었다. 그러나 영화를 보며 침울해진 분위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1시간 반에 걸친 대담이 끝나고 김진열 감독이 참석한 뒷풀이가 이어졌다. 오히려 대화는 참석자들 대다수가 참여한 뒷풀이 장에서 활봘하게 오갔다. 김진열 감독이 오프 더 레코드를 요구한 이야기도 오갔다. 밤이 술과 함께 깊어질수록, 세월호 참화에 대한 울분과 분노 반성의 말들이 격렬하게 오갔다. 단원고 학생만한 자식을 둔 부모로서, 참사에 객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인문학자로서, 사회의 부조리에 분노하는 젊은 학도로서 우리는 어우러져 함께 생각을 나누고 아직은 함께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졌다. 침묵하는 정부가 숨기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은 진실을 요구하는 민중의 열망을 이긴 적이 없다. 시간과 함께 우리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말이다. 숨기고 싶어하는 이가 있는 진실을 밝히는 힘은 오래 지속되는 기억과 정의의 요구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희를 잊지 않을 것이다.

공동체상영2

섦[별과 달과 바람의 노래]-12

 

김설미향(그림책 작가)

 

수 많은 별들 가운데 빛나는 수는 하나이다.

하나의 수와 하나의 수는 이어져 길이되고

길은 공간에 수를 채우고 채워진 벽에

수 많은 사람 안에 띄우는 수의 수는 붉은 심장이 된다.

빼어난 수는 수 안의 수 아닌 수의 결합이다.

 

작가의 블로그 http://dandron.blog.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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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간] 한중일의 유교문화담론

김예호 신간

 

출판사 서평

동아시아 사회 전통문화의 중심축인 유교가 한중일 삼국에서 어떻게 형성 발전되어 왔고, 어떤 특징이 있으며, 유교와 유교문화를 둘러싼 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이러한 논의들이 현 시점에 어떤 의미를 시사하는지 전반적으로 개괄한 책

 

▣ 책의 출간 의의

이 책의 기획 의도는 한중일의 유교담론과 유교문화의 정체성 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있다. 글의 내용은 한중일 3국의 근대전환기 즉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무력으로 충돌한 시기를 논의의 출발점으로 삼고, 근대 전환기 이후 한중일 삼국에서 발생한 유교와 유교문화 담론을 개괄하고 있다.

이 책은 한중일 3국의 전통사회 유교문화에 대한 특징을 서술한 후, 근대 이후 각 국가의 사회·정치·경제의 흐름과 이에 대응하는 유교문화담론의 특징을 고찰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구성도 주요 유교 지식인들의 주장이나 각 시기에 유행한 유교담론의 요지를 소개해 빠른 시간 안에 근대 이래의 한중일 유교담론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초점을 두었고, 글의 성격은 중국과 일본보다 한국 분야의 유교문화담론에 더욱 엄격한 평가기준을 적용했다.

한중일 각 나라의 문화담론의 중심에는 언제나 유교가 위치한다. 이는 최근까지 중국적인 것과 중국 정체성, 일본적인 것과 일본 정체성, 한국적인 것과 한국 정체성 등 지속적으로 다루어지는 주제들을 살펴봐도 알 수 있다. 또한 각 나라의 사회정치적 상황 등과 관련한 다양한 문화담론을 통해서도 유교가 아직도 동아시아 사회에서 중요한 논거가 된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따라서 한국의 유교도 미래 사회의 가치에 부응할 수 있게 역할과 위상을 재정립할 필요가 있고, 더 나아가 한국의 유교가 아시아의 도덕적, 문화적 가치를 선도하는 역할을 자임할 수 있을 정도로 환골탈태할 필요가 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 한중일 삼국의 유교문화 들여다 보기

 

ㆍ 중국 더 나아가 중국 공산당에게 오늘의 ‘유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

중국 사상계나 문화계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는 것은 ‘중국적인 것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중국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인데, 덩샤오핑 체제의 중국 공산당이 들어선 이후에 이 문제에 부쩍 더 관심을 기울였다. 특히 국학 논의의 중심에 있는 전통 유교문화는 중국 문화 부흥론자들은 물론이고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도 현재 뿌리칠 수 없는 매력적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현재 중국 공산당의 주요 관심사는, ‘아시아적 가치’가 아닌 ‘중국적 가치’, ‘유교 민주주의’를 포함한 ‘민주주의’보다는 여전히 경제성장으로 인한 사회적 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회통합방안에 있다. 이는 1989년 천안문 민주화 운동 이후 중국 공산당이 한편으로 개혁개방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국학’이란 이름 하에 유교연구를 지원하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즉, 중국 공산당의 입장에서 유교는 한편으로 대외적으로 화교의 자본력을 유인하기 위한 훌륭한 문화 수단이면서도 대내적으로는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사회적 모순을 중화주의의 민족의식 코드로 희석시키는 수단으로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무엇보다 향후 중국인의 문화적 자존심은 중국의 경제성장에 편승해 중국을 대표하고 부흥시킬 수 있는 문화적 코드로서 유교부흥을 내세울 가능성은 농후하다.

 

ㆍ 일본 고유의 정체성의 중심축으로 작용하는 ‘화혼’의식과 유교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

일본의 ‘화혼’의식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일본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가치로 근대 전환기 이후로도 일본이 자신만의 고유한 사회문화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데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즉, 일본의 ‘화혼’의식은, 막부시대에 중국과 한국으로부터 수입한 원시유교와 성리학을 일본화해 정착시키는 과정, 근대 전환기에 들어서는 탈아입구의 기치 아래 서양철학을 수용하는 과정, 메이지유신 중반 이후로는 화혼(和魂)이 양재(洋才)를 주도하는 과정, 현대에 이르러서는 일본식 자본주의를 견지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일본 사회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특히 현대 일본 사회에 이르러서는 자국의 침체된 경제위기 상황 하에서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향수하는 극우세력의 등장과 이를 방조하는 상부의 정책 과정을 통해서도 이러한 화혼의식은 확인할 수 있다.

일본 문화의 특수성은 무엇보다도 유교를 포함한 타자를 부정하면서도 부정하는 대상을 통섭하는 가운데 그것에 대항하는 이론체계를 새롭게 만들어낸다는 점이다. 즉, 일본은 유학을 수용한 이후 한국과는 달리 중국 고전의 교설을 최고의 권위로 삼는 유교에서 벗어나 일본만의 유교를 만들고 또 새로운 학문을 창출해냈다.

이와 같이 일본식 사회문화는 전통문화와 새롭게 유입되는 문화가 긍정과 부정의 작용과 반작용을 통해 중첩되는 과정을 거쳐 형성되며, 이러한 중첩 과정의 중심에는 의식적 내지 무의식적으로 항상 ‘화혼(和魂)’의 가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것은 일본의 근대화 과정에서도 일본 사회를 평가하는 내부의 자체적인 기준으로 작용한다.

 

ㆍ 한국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한국 사회는 어떤 측면에서 볼 때 일본은 말할 것도 없고 유교의 본고장인 중국보다도 더 모범적인 유교사회로 나아갔다고 할 수 있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도덕과 정치의 결합’, ‘가족주의적 서열의 강조’ 등의 중국 유교문화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수용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 중국 유교문화와는 달리 더욱 철저하게 성리학에 대한 교조적 입장을 견지하며 수양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중국 유교문화와는 차별성을 지닌다. 이 점에서 조선은 ‘개량된 중국형’의 유교사회 내지 동북아시아 국가 중 가장 모범적인 유교사회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황도유학의 본격적인 공세를 받는다. 즉, 일본의 지배 기간 동안 천황 내지 국가 공동체를 강조한 일본식 유교문화의 강력한 영향을 받음으로써 한국의 전통 유교문화는 고유한 자기수양의 형이상학적 색채가 완전히 탈색되는데 이러한 현상은 이승만 정권의 독재를 위한 유교문화 정략과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박정희 정권의 충효 일본(一本)의 일본식 유교문화의 선전 작업을 통해 해방 후 한국 사회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행사한다. 특히 학문적으로는 최근까지 ‘공동체’ 의식의 강화라는 미명하에 ‘대동(大同)’ 이상의 실현이 한국 유교문화의 중요한 본질이라고 논의하는 자리를 어렵지 않게 접한다. 일본 유학에 경도된 한국 유교문화의 공동체 의식에 대한 애착은 IMF 이후 사회 구성원 개개인의 자존적 문제나 자아실현의 문제보다는 한동안 한국 사회에 유행한 공동체라는 집단 곧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만을 중시한 유교자본주의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된다.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8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아아들 아버지는 애락원에서 만났다. 애락원은 개신교다. 개신교 플래처 목사가 세웠는데, 대구나병원이라고 한다. 애락원 거기는 병원이었다. 아매 지금 동산병원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그때는 나환자들만 보는 병원이라 다른 환자들은 없었던 것 같다. 아마 격리시키는 거제. 산위에 고아원이 있었다. 후문으로 가면 기념관이 있었제. 전에 보니까 애락원 나무들은 별로 안 변한 것 같더라. 그 집들이 지금도 있을까 모르겄네.

그때 애락원에는 겉으로 보기에는 병 표가 안 나서 시장꾼으로 밖으로 다니는 사람이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니까 밖에 나가서 필요한 물건도 사 오고, 간혹 환자들에게 오는 돈이 있으모 가서 찾아오고 하는 일을 했다. 병표 나는 사람이 밖에 가서 일을 볼 수 없고, 환자는 함부로 밖에 못 나가지만, 그 사람은 겉으로 보모 워낙 멀쩡해 보이니까 일이 있으모 수시로 다녔지.

애락원에는 평옥과 구이층집으로 불리는 건물이 있었다. 평옥은 단층집인데 여자 환자들이 지낸다. 구이층집은 오래된 2층집이라서 그리 불렀는데 남자들이 살았다. 사는 곳은 달라도 애락원 마당은 같이 쓰니까 마주치고 했지. 그 사람은 발이 좀 시원찮았다. 나는 사람들이 오물짜 같다고 했다. 지금 이쁘기는 뭐가 이쁘노? 니도 거짓말 참 잘한다. 그 때도 이쁜 기 아이라 얼굴이 하얗고 작다고 그리 부르더라.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영 수사

성심원 들어가는, 눈쌓인 다리
사진 촬영 엄삼용 수사

그 남자 누나가 자꾸 나를 불러내는 기라. 그래 밖으로 나가모 그 남자가 기다리고 있고 그러대. 응, 뭐 연애라면 연애지. 좋았지. 시간이 지나니까 옆에 있는 사람들도 다 알고. 그 사람은 밖에 나갔다 들어오면 나한테 꼭 뭔가 사오고는 했다. 둘이서 철문을 타고 살짝 넘어가서 영화관도 가고, 손도 잡고 그랬다. 대구 극장에서 영화 봤다. 내가 원에 허락받고 외박 나가는 날에는 역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람은 병표가 없으께, 그리고 원에는 이런 저런 일들이 많으니까 내가 외박 나가는 날에는 지도 뭔 핑계를 만들어서 나오는 거지. 오빠 집에 가서 저녁 먹고 나오면 서문시장가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거기 가서 만났다. 내가 오빠 집에 가는 날이모 그 사람은 서문시장가에서 항상 기다리고 있었거든. 어떤 때는 둘이서 시장에서 저녁 먹고 대구극장 가서 영화보고 했지.

그렇게 지내는데, 애락원에 김진옥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함흥 사람인데 우찌우찌해서 애락원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 친구가 그러는 기라. “흥남으로 가라. 니 정도면 흥남 가서 살모 아무도 나환자로 안 본다. 니는 손만 표가 좀 나니까 그리로 가모 아무도 모른다.” 그러는 기라. 그 위쪽에는 손에 화상 입은 아아들이 많아서 나도 화상입어서 그리 된 줄 알거라고 하더라.

그래서 그리 가기로 했다. 그 사람은 한 달 먼저 함흥으로 가서 기다리고, 나는 원에서 수속 밟아서 엄마하고 오빠하고 기차타고 한 달 후에 갔다. 나 시집 보낸다고 우리 엄마랑 오빠가 이것저것 좀 장만해서 같이 간 거라. 그 사람은 나 기다리면서 한 달 내내 하루도 안 빠지고 흥남 역에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다더라. 내가 언제 올지 정확하게 모르니까 그리 한 거지. 매일 나와서 기차가 올 때마다 뛰어와서 찾다가 없으면 다음 기차가 올 때까지 노래를 부르며 왔다 갔다 하면서 기다렸다 카더라.

“오늘도 걷는다 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죽마다 눈물 고였네 선창가 고동소리 옛님이 그리워도 나그네 흐를 길은 한이 없어라 타관땅 밟아서 보니…” 아이고, 이 노래만 들으모 지금도 눈물이 난다. 허허허, 내가 안 올까봐 불안해서 노래를 불렀다고 하더라. 혹시 가요무대에 이 노래가 나오모 그리 좋다. 옛 추억이 생각나고, 그때가 꼭 지금처럼 생생하고 그렇다. 애락원에 15살에 들어가서 23살에 나왔다. 24살에 결혼했다.

우리 오빠가 그 사람을 흥남지서에 취직 시켜줘서 먹고 사는 것은 별로 어렵지 않았다. 그게 웃지방은 너무 추운 기라. 방과 부엌에 벽이 없다. 아이고, 참, 그 말을 그리 못 알아 듣노. 너무 추우니까 솥이 방안에 있는 기라. 그러니까 아궁이 불 넣는 데는 부엌에 있고 솥은 방안에 있는 거지. 불 때서 방을 뜨겁게 하는 거로는 난방이 제대로 다 안 되는 기라. 부엌에서 불을 때면 자연히 난로가 되고, 방은 뜨거워도 밖이 워낙 추우니까 방안이 썰렁해. 그래서 방안에 솥이 있는 거지. 방안에 솥이 있으니까 추워서 솥을 안고 자다가 어린 아아들이 손을 데이기도 하고, 어린 아이가 뽈뽈 기어 다니다가 솥에 손을 데이기도 하는 거지. 밖에서 방으로 들어올라 하면 부엌으로 들어와서 방으로 온다. 부엌이 참 깨끗타.

그래 보니까 거기에는 나처럼 손이 오그라든 사람들이 많아. 나는 심한 것도 아이라. 시장에라도 가면 사람들이? “아이고, 새댁이 욕 봤겄네.” 하고, 또 “어쩌다 이랬을고, 쯧쯧쯧”하지 내가 이 병에 걸렸다고는 생각을 안 하더라. 그러니 마음 편하게 살았다. 좋았지. 좋은 사람하고 사니까…… 그 사람도 겉으로 표가 안 나니까 아무도 우리를 그리 안 봤거든. 그러니 밖에도 맘대로 다니고, 그랬다.

해방이 되고 고향도 가고 싶제. 오늘 내일 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남으로 갈라모 빨리 가라하는 거라. 삼팔 선이 그어져서 시간이 지나면 못 간다고 하대. 그래서 안 되겠다 싶어 서둘러 갈라고 보니까 이미 사람은 삼팔 선을 못 넘는 거라. 할 수 없이 남편 먼저 가고, 속초에서 만나기로 했다. 그때 딸이 3살이고 아들은 뱃속에 있었다. 아니다. 남편만 먼저 갈라고 간 게 아이라.

사람이 삼팔 선을 못 넘으니까 배를 타고 가는데, 사람은 배에 탈 수가 없고, 짐만 실어 가는 거지. 응, 화물선 쯤 되는 갑다. 사람들이 그 짐 보따리 안에 숨어서 가는 거지. 근데 나는 그때 임신 7~8개월 때라 배도 부르지만 3 살배기 딸을 짐 속에 숨길 수가 없지. 얼라가 울기라도 하고 보채기라도 하면 숨어 있는 사람 다 들켜서 바다 귀신이 될 판이니 나하고 딸은 어찌하든지 육로로 해서 남쪽으로 내려와야 하는 기라.

함흥에서 일부러 옷을 남루하게 해서 떨어진 광목치마를 입고 보따리를 이고 딸 손잡고 연천까지 왔다. 연천에서 밥을 사 묵으러 들어가서 이남 가는 길을 물었다. 그러니까 주인이 이남 갈려면 논둑을 타고 가야 한다고 길을 요리조리 가서 어찌 어찌 가라고 가르쳐 주더라. 그러면서 하는 말이 저기 가다보모 꼭 지나야 하는 다리가 나오는데, 그 다리 밑에는 소련 군인들이 지키고 있는데, 들키모 그 자리에서 바로 총알 맞는다고 조심하라고 일러 주는 기라.

하이고 참, 밥을 시켜 묵고 해는 지고 ‘어찌할꼬’ 하고 앉아 있는데 웬 여자들이 커다란 보따리를 이고 여남은 살 먹은 머스마를 데리고 들어오는 거라. 주인이 저 사람들이 이남으로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니까 따라 가면 될 거라고 일러 주더라. 그래 그 사람들에게 나도 이남 가야한다고 데려가 달라고 했지. 어린 머스마가 딸려 있어서 말을 했지, 어른들만 있었으면 말 못했다.

알고 보니까 그 사람들은 이남에 없거나 귀한 것들을 떼서 이고지고 이남으로 가서 팔고, 거기서는 또 이북에 귀한 거를 사 와서 파는 보따리 장사들인 기라. 그 사람들이 데리고 있던 머스마는 저거 아아가 아니고, 그 사람들도 부탁 받고 머스마를 이남으로 데려다 주는 기라. 같이 가기로 하고 잠이 살짝 들었는데, 그 사람들이 깨워 보니 캄캄한 밤중이라. 해뜨기 전에 임진강에 가서 배를 타야 된다고 하더라.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너무나 작은, 그러나 너무나 소중한 할머니의 서재
사진촬영 김성리

새벽 두 시에 자는 애 깨워서 밥 먹고 장사꾼들을 따라 나섰다. 캄캄한 밤에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겠는데, 그 사람들은 여러 번 다녀 놓으니까 잘 가대. 나는 배는 부르고 보따리는 이고 딸애 손을 잡고 한 번도 가 본적이 없는 길을 죽을 동 살 동 따라 갔다. 그 사람들을 놓치모 오도 가도 못 하는 기라. “새댁이 걸음이 와 그리 느리네”하면서 어서 가자고 재촉은 해도 나를 두고 가지는 않더라. 근데 그 머스마 덕분에 내가 따라 붙었지. 여남은 살 먹은 아아가 얼마나 잘 걸을 수 있겄노. 허허허 그 머스마 덕을 좀 봤다.

밤새 걷고 또 걸었다. 참 산길이 끝이 없더만. 저 멀리서 해가 떠오르려고 하니까 뿌옇게 주변이 보이는데, 옆에 보따리 장사가 한탄을 하는 거라. 알고 보이 밤새 동네 뒷산만 뱅뱅 돌았던 거라. 출발했던 그게 와 있는 기라. 하하하, 참 지금은 웃음이 나온다. 그때는 앞이 캄캄했지. 임진강으로 가서 배를 타야 하는데, 그 배를 못타면 이남으로 못 가는 거야. 육로로 걸어서는 소련군 총알에 죽을 판이고.

“아이고, 큰일 났네. 어서 갑시다. 어서” 아주머이들이 난리가 났지. 참말로 죽을 힘을 다 해서 산길을 걸었다. 밤중에 산으로 산으로 얼마나 걸었을꼬. 인자 해가 떠올라서 사방이 훤하지. 말하자면 배를 몰래 타고 임진강을 건너 이남으로 가는 거지. 그 사공은 우리를 태워주고 다시 이북으로 와야 하는데, 우리가 늦으면 그 사공이 그만 집으로 돌아가는 기라. 배 삯은 벌써 줘놨지. 그러니 전부 애가 타는 거라.

죽어라고 따라갔다. 하이고, 말 못한다. 고무신을 신고 있었는데 발은 부르트고 퉁퉁 붓고, 그래도 그 발로 죽어라고 따라 붙었다. 딸아를 업었다. 보따리를 이고 죽는지 사는지도 모르고, 어데가 어딘지도 모르고 그 보따리 장사꾼들을 안 놓치려고 허겁지겁 따라 붙었다. 배는 부르지 아아는 업었지 보따리는 이고, 참말로 그 머스마가 은인이라. 갸는 지금 어데서 우찌 살고 있을꼬.

저 멀리 임진강이 보이고, 사공이 우리를 알아보고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대. 허겁지겁 배에 올라탔는데, 사방이 너무 훤해서 간이 쪼그라들데. “하이고, 인자 오면 어짜요. 갈까말까 했소. 왜 이리 늦었소?”하면서 사공이 한탄을 하더라. 사공도 사방이 그리 훤한데, 지도 들키모 총살이니 암만 돈이 좋아도 목숨보다 귀한가. 그때는 아무도 못 넘어가. 육지는 군데군데 소련군이 지키고 섰제, 바다는 화물선만 다닐 수 있었어. 참 살벌한 시대였다.

배를 타고 건너 편 임진강에 도착하니까 이남에서 보고 있던 순경들이 고생했다, 어서 오시오 하면서 환영을 하더라고. 참말로 이남에 왔다 싶대. 인자 거기서 화폐교환을 해 주더라. 북쪽 돈하고 남쪽 돈하고 다르니까 교환을 해야지. 북쪽으로 가는 사람하고 남쪽으로 온 사람들하고 서로 갖고 있던 돈을 다 바꿨다. 그리고는 동두천으로 갔다. 거기 수용소가 있는데, 예방주사도 맞고 어디로 갈 건지 물어도 보고 하더라.

동두천으로 가는 길은 꼭 가리마 같은 길을 걸어서 갔다. 비가 왔다. 고무신 안에 물이 차서 걸을 때마다 철컥철컥 하고, 이미 퉁퉁 부어 있는 발은 인자 고무신 안에서 불어터져서 피고름이 신 안에 흥건했다. 애기 업은 두데기(포대기)까지 물이 줄줄 흐르고, 힘든 거는 말로 다 못한다. 그래도 가야지. 동두천 수용소에서 전국으로 흩어지는 기라. 나는 일단은 대구로 가기로 했다. 친정에 가서 순천으로 갈라고 했지.

기차역에는 사람들이 억수로 많아. 기차는 자주 없고 사람은 많으니까 빨리 표부터 끊어 놔야지. 그래서 딸아를 보고 “엄마 올 때까지 꼼짝하지 말고 여게 있어라. 이 보따리 꼭 잡고 있어라.” 하고 나는 표를 끊으러 갔다. 남대문으로 가야 부산 가는 기차를 타고 대구로 가지. 겨우 표를 끊어 갖고 오니까 보따리가 없는 기라. 보따리 어데 갔냐 하고 물어도 딸아는 말이 없고, 옆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할매가 와서 보따리 달라고 하니까 그만 주더란다. 그래서 저거 할매인 줄 알았다 안 카나. 그 보따리 안에 옷하고 돈이랑 다 들어있었는데……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한글날을 생각하며[가동(可洞)선생의 삶의 철학]

 

이 종철(연세대학교 철학연구소)

 

『파이드로스』라는 플라톤의 대화편에 보면 소크라테스가 문자와 말의 관계에 관한 신화를 소개하는 흥미로운 대목이 있다. 타무스 왕이 다스리는 테베에 토트라는 신이 찾아온다. 토트 신은 왕에게 통치에 필요한 여러가지 기술을 소개한다. 이 신은 서양에서 주사위 놀이를 처음 발명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농사를 짓는 기술과 천문 지리에 관한 기술, 그리고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는 기술을 말한다. 왕은 이 모든 기술이 대단히 실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해서 기쁘게 받아들인다. 다음으로 토트 신이 백성들에게 문자를 가르쳐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왕이여, 이런 배움은 이집트 사람들을 더욱 지혜롭게 하고 기억력을 높여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기억과 지혜의 묘약(phamakon)으로 발명된 것이니까요.” 그런데 유독 문자와 관련해서는 왕이 거부를 한다.

 

왕이 거부하는 첫 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첫째, 문자가 진리(truth)를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짝퉁(the semblance of truth)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문자로는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는 흥미로운 진단이다. 진리는 화석화된 문자가 아니라 생생한 목소리를 통해 우리의 의식(영혼)에 각인되는 것이다. 사실 현장의 생생한 소리는 영혼에 직접적으로 현전한다. 우리는 스승의 이런 목소리를 통해 진리를 깨우치고 또 이 진리를 똑 같은 형태로 전승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자로 표현되는 순간 이런 생생한 현전이 사라진다. 문자는 다만 그것을 저장할 뿐이고, 우리는 그 저장되고 기록된 문자를 통해 화석화된 진리의 흔적(semblance, 짝퉁)만을 상기할 뿐이다. 문자는 영혼의 기억(memory) 능력을 퇴화시키고, 다만 떠올리는 능력(상기: reminiscence)만 남긴다. 모든 종교에서 스승(구루)의 역할은 이런 생생한 진리를 우리의 영혼에 각인시키는 데 있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 스승은 대부분 남성과 아버지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자는 독학을 가능하게 하므로 스승이 필요 없고, 스승의 권위도 잊게 한다. 권위가 사라지면 결국 왕의 통치도 위험해질 수 있다고 본다. 이런 몇 가지 이유를 들어 타무스 왕은 토트 신이 문자를 가르쳐주겠다는 제안을 거부한 것이다.

 

문자가 진리의 생생한 현전을 단순한 모방(시뮬라크르)으로 변질시킴으로써 서양의 로고스의 형이상학을 지탱해왔다는 데리다의 분석은 일면 타당하다. 목소리(음성)는 이 현전의 형이상학을 통해 가부장적인 아버지의 권위와 통치의 권위를 정당화한 것이다. 테베의 왕은 문자가 도입되면 이런 아버지와 스승, 그리고 왕의 권위가 무너질 것을 우려해서 문자를 전해주겠다는 토트 신의 제안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런 역할을 목소리만 담당했겠는가? 문자 역시 그것을 아는 식자識者와 무식자 無識者를 차별하고, 식자의 강력하고 유효한 통치수단으로 활용되어 오지 않았던가? 전통적인 유교 경서에 기반한 조선의 과거시험은 통치를 담당하는 관료들을 등용하는 관문의 역할을 했다. 때문에 한문을 모르고 경서를 읽지 못한 일반 대중은 반상의 차별 이상으로 통치계급에 접근할 수 있는 지식이 없다. 조선에서 한자라는 문자는 봉건적인 조선의 위계질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해주는 강력한 수단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15세기 중반 조선의 위대한 왕 세종은 문자를 거부하는 테베의 왕과 다르게 오히려 적극적으로 문자를 발명해서 어리석은 백성의 삶을 개선하려 한 것이 아닌가?

 

“나라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끼리 서로 맞지 아니 할세. 이런 이유로 어리석은 백성이 이르고자 할 바 있어도 마침내 제 뜻을 쉽게 펴지 못할 놈이 많으니라. 내 이를 위하여 어여삐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드노니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쉬이 익혀 날로 씀에 편안케 하고자 할 따름이니라.”(훈민정음 서문)

 

읽어 볼수록 명문이다. 중국과 조선이 언어 체계가 다른데 중국의 한자로 모든 생각을 표현하고, 모든 문서를 한문으로 작성하는 상황에서는 조선이 아무리 자주 독립을 외친다 해도 중화적 세계관을 벗어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한문에 접근하기 어려운 일반 대중의 뜻이 정치에 반영되기 어려운 것도 사실이다. 그러니까 한문은 중화적 세계관에 갇힌 조선의 봉건체제를 유지하는 수단이 되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문자를 만든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는 중화적 세계관으로부터 정신적으로 독립하겠다는 것이고, 내부적으로는 봉건적 위계질서 안에 민주주의의 정신적 토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글 창제의 소식을 듣고 최만리를 위시한 조선의 양반 사대부들이 극렬 반대했다는 것은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 자신들이 누려왔던 보호와 기득권이 무너질 수 있었다는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성경을 위시한 서적이 대량 보급되고 이것이 루터의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단순히 인쇄의 기술이 아닌 문자를 발명해서 보급하려 했던 것이니 그 얼마나 혁명적인가? 한글이 1446년에 반포되었고 유럽의 종교개혁이 1517년 시작이 되었으니 적어도 70년 이상을 앞서 있다.

 

전문 언어학자에 따르면,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를 위시한 서구의 모든 언어는 인도 유럽피언 언어가 문화와 지역에 따라 특성화되고 개선되면서 자연발생적으로 형성,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언어를 일정한 원리와 계획에 따라 독자적으로 발명한다는 것은 유럽의 전통이나 그 밖의 세계 어떤 전통에서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조선의 세종은 분명한 언어 창제의 원리에 따라 한글을 만든 것이다. 자음은 발성기관의 기능과 작동을 본 딴 음운학적 원리를 따르고, 모음은 동양사상의 오랜 전통인 천지인天地人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모든 글자는 모음과 자음이 독립적인 아닌 결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결국 한글이라는 글자는 음과 양의 대대관계, 우주 자연의 정신 및 철학과 몸과 기계의 기능 및 작동이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표현한다. 이 한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할 정도니까 한글의 표현가능성과 확장 가능성은 대단히 우수한 것이다. 게다가 음양의 원리와 같은 모음과 자음의 결합은 현대 컴퓨터 언어의 기초를 이루는 이치 논리를 담고 있기 때문에 기계어로 확장될 가능성도 무한하다. 오늘 날 인터넷에 기반 한 디지털 혁명에 언어학적으로 가장 활용성이 큰 언어가 한글인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한글이 이런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지만, 표음문자로서의 한계도 적지 않다. 다시 말해 고도의 사색을 축약하고 추상하는 면에서는 표음문자가 그 역할을 다 할 수 없다. 반면 추상기능은 표의문자로서의 한문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장점이다.

 

이 점에서 나는 좀 더 솔직해지고 성숙해질 필요가 있다고 본다. 많은 한글학자들이 한글 한자 병행론을 비판하면서 한글 전용론을 외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첫째, 언어와 문자는 고정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간이 지나고 문화가 바뀌면서,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의미도 바뀔 수 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한자는 조선시대의 한자나 그 한자로 만들어진 한문과는 큰 관계가 없다. 한중일이 똑같이 한자를 사용한다 하더라도 발음은 전혀 다르고 의미 차이도 큰 경우가 있다. 한자는 중국에서 탄생했을지라도 오늘날 그것은 동아시아의 정신문화의 근간일 뿐이다. 그런 한자를 받아들여 오래 사용하면서 이미 각 나라 별로 토착화되고 변용된 것이다. 마치 유럽의 영어와 독일어,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 등 모든 유럽 언어가 인구어 전통의 라틴어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각 나라 별로 발전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라틴어는 유럽 언어의 근간이자 정신적 뿌리 역할을 하면서 각 나라의 언어의 내용을 풍부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들이 교육과정에 라틴어를 도입하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 한자도 마찬가지여야 한다고 본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의 70%가 한자로 만들어진 개념어이다. 그런데 그것을 표음문자인 한글로 표기가 된다고 해서 모두 음성언어로 바꾼다는 것은 비효율적일 뿐더러 무식의 표현이다. 간단히 말해 한글학자 최현배 식으로 모든 것을 인위적으로 한글로 바꾸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우리 사고의 영역을 절대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이미 한자는 동아시아의 오랜 전통 속에서 타자의 언어가 아니라 우리 언어 체계 속으로 동화된 우리 언어나 다름없다 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것이다. 마치 영어와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와 같은 각 언어가 라틴어에서 유래했기 때문에 그들 나라의 모국어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불합리한지와 같다. 이런 의미의 한자는 과거의 서책에서 발견되는 한문과도 별 상관없다. 때문에 일상적으로 표현되는 한자를 알 수 있는 교육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하겠다.

 

둘째, 동양철학이나 불교 관련 논문들 그리고 책들을 보다 보면 수백, 수천 년 전의 한문 투가 전혀 번역이 되지 않은 상태로 쓰이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페이스 북에도 불교 경전이 한문 투를 거의 바꾸지 않은 상태로 올라오는 경우가 있다. 만약 그것이 문헌학의 대상이라면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떤 의미 있는 종교적 내용을 전달하는 수단으로 그렇게 했다고 하면 그것은 대단히 문제가 있다고 본다. 어떤 이는 그것이 그 사상이나 종교의 핵심을 표현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예를 들어 불교의 사상도 인도에서 유래한 것이고, 그것이 중국의 한자와 사상을 통해 번역된 것이다. 수 백, 수 천 년 전의 한문 투는 그 당시 중국 사람들, 혹은 한자 문화권 하에서 자기 언어가 없던 우리 조상들의 생각을 표현하는 어쩔 수 없는 방식일 뿐이다. 문헌학적 연구나 사상사적 연구가 아니라면 빼어난 우리 한글을 가지고 있는 우리가 그 오래된 유물을 반복할 이유는 전혀 없다.

 

세상이 달라지고 문화가 달라지고 사용하는 언어도 바뀌고 있다고 한다면, 우리가 과거의 그런 방식을 고집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과거에 예속된 것이고 지적으로 태만한 것이다. 이때의 번역은 단순히 한글 전용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현대 한국에서 일상적으로 사용되는 한글과 한자로 이루어진 국어에 의한 번역이고 가독성에 기초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능할 때 비로소 고전이 현대적 의미로 재해석될 수 있다. 불교든 동양사상이든, 아니면 서양사상이든 우리가 이런 언어를 가지고 표현할 때 그 모든 것들은 더 이상 타자의 사상이 아니라 우리 사상 속에서 재해석될 수 있다고 본다. 데카르트가 라틴어가 아닌 프랑스어로 철학책을 쓰고, 괴테가 독일어로 소설을 쓰면서 비로소 프랑스 철학과 독일 문학이 뿌리를 내릴 수 있었던 것과 같지 않을까?.

 

셋째, 오늘 날 한글에게 위협이 되는 것은 앞서 이야기한 것보다 다른 데 있을지 모른다. 지난 수 십 년간 이룩한 경제 성장과 세계화, 인터넷의 등장은 영어의 위력을 말할 수 없이 키워 놓았다. 여기에는 자연발생적인 측면도 있지만 인위적으로 이루어진 영어 교육의 열풍도 크다. 한국처럼 영어가 돈을 벌고 출세를 하는 데 절대적 영향을 미치는 사회에서는 영어의 비중은 말 할 수 없이 크다. 때문에 이런 영어의 영향력이 불가피한 측면을 무시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좀 더 큰 문제는 인위적인 영어의 열풍과 교육이 새로운 정신적 사대주의를 조성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할 수 있다는 점이다. 창의적인 교육이 이루어져야 할 대학 강의조차 영어강의를 획일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국문학이나 한문학도 영어로 강의를 하고 유럽에서 유럽 학문을 공부하고 돌아온 선생한테도 영어강의를 요구한다. 대학평가 점수와 연관되어 있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이것은 학문의 내용과 질을 전혀 고려하지 못한 처사다. 영어로 언어를 획일화하는 것은 언어 생태계를 파괴하고 학문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해칠 수 있을 뿐더러, 모국어로 연구하고 사유할 수 있는 것을 막음으로써 학문의 창의적이고 장기적인 발전도 막는 것이다. 영어 강의자를 우대하고 국내 대학 출신이 자연스럽게 배제됨으로써, 학문의 사대적 종속을 심화시키고 새로운 언어 계급주의를 야기하고 있는 실정이다. 학문의 자생적 발전이 절대적으로 어려워지고 있다. 이웃나라 일본에서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가 모두 국내파 지방대 출신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우리의 획일적 언어 정책이 얼마나 대학의 창의적 교육을 망치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한글날은 결코 일회적인 행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잘못된 한글화 정책으로 모국어의 풍부한 자원을 스스로 황폐화시켜서도 안 된다. 학자들은 끊임없이 이 모국어를 통해 훌륭한 정신적 창작물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서양철학이 수입된 지 120년이 넘어가도 아직 이렇다 할 우리 철학의 자랑거리가 되는 저작이 없는 실정이다. 모국어로 쓰인 훌륭한 창작물은 그것이 비록 서양 사상이나 과거의 중국철학, 불교철학을 기술한 것이라 해도 우리의 철학이다. 이 점은 다른 학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국어의 정신을 살려 표현하는 것은 단순히 간판 몇 개 바꾸고, 낱말 몇 개 한글로 표현해서 쓰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이다. 우리는 언제가야 진정 이 모국어로 사유하고, 이 모국어로 쓰인 문헌들을 중심으로 참조하고, 이 모국어로 우리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고, 그리하여 이 모국어로 빼어난 정신적 창작물들을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인가?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나는 사해(四海)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 ?[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5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세상 사람들이 뭐라고 해도 나는 괜찮았다.?처음에는 몸이 아프니 마음이 아프더라.?그래서 날마다 울었다.?이 병이 왔을 때에는 뭐가 뭔지 몰라서 안 울었고,?소록도에 갈 때도 언니가 있으께,?내가 있어야 불쌍한 우리 언니 돌보아 줄 수 있으께 안 울었다.?온 몸이 아프고 죽을 것처럼 열이 나고 덜덜 떨리니까 겁이 나고 그렇더라.?남들은 다리 없이 어찌 살거냐고 하고,?우리 아버지는 내 꼬라지 보고 그 길로 화병을 얻어서 돌아가실 때도 한을 품고 가셨다.

나는 그냥 어리벙벙했다.?얼굴도 수건으로 안 덮어주고 수술하는 걸 보다가 졸도했는데,?깨어나서 보니 시원하더라.?얼매나 몸이 아프고 힘들었는지 슬프고 울고 그런 거 없었다.?너무 아픈 데가 없어지께 후련하고 가뿐하고 그랬지,?뭐.?그런데 살다보니 눈물이 날 때가 더러 있더라.?지금도 몸이 아프모 눈물이 안 나는데,?마음이 아프모 눈물이 난다.?왜 그럴꼬??소록도 생각해도 눈물이 나.?그때 생각하모 마음이 아파.?자꾸 아파.

소록도에 있을 때에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옷은 광목이었다.?틀린 거는 겨울이 되모 검은 물들인 옷을 입은 기다.?참 추웠다.?배도 고팠어.?배급을 주는데 맨날천날 모자라.?나는 어리다고 밥도 마이 안 줬어.?그래서 칡을 마이 묵었다.?칡이 억시기 많아서 물칡은 안 묵고 끊어 버리고 했다.?거기서 죽는 거는 사는 것보다 쉬워.?죽으모 제대로 장례도 안 지내주고 함부로 한께 사람 뼈가 예사로 있어.?왜 저 앞에 텔레비전에도 나오는 것 같던데,?그거 사실이다.?그때도 쇠꼬챙이로 아무 데나 땅을 부시모 뼈가 나오제.

밤에 바다를 보모 퍼런 빛이 번득여.?사람 뼈에서 나오는 인이 그리 보이는 기라.?아이가,?그냥 버리는 게 아니고 화장을 하는데,?제대로 안 돼서 그래.큰 도람통 같은 기 있는데,?죽으모 거기다가 넣고 화장하는데,?요새같이 그리 안 되지.?납골당이 있기는 있었어.?큰 뼈는 납골당에 넣고 납골당이 차모 지하실에 따로 보관했다.?그라고 자잘하게 나오는 거는 바닷가에 버리기도 했거든.?어떤 날은 뼈에 파래가 끼인 채로 해변가에 뒹굴어 다닜다.

양추자 - 시모임

바닷가에 자주 나갔지.?먹을 기 있다 아이가.?나는 소록도에 가서 반지락을 처음 보고 알았다.?우리집이 있던 거제도는 물살이 세서 반지락이 없어서 몰랐다.?파도에 껍데기만 밀리오고 했거든.?소록도에는 많았다.?그거 주워서 삶아 묵고는 했다.?그라고 파래가 많았거든.?파래를 뜯어서 그 우에다가 강냉이 가리를 솔솔 뿌리 갖고 쪄묵었다.?허허,?맛은 무신 맛.?파래강냉이 떡이지.?파래만 찌모 안되니까 쌀가리 대신 강냉이 가리를 쪼끔 뿌리서 묵는 긴데,?그기라도 실컷 묵었으모 했다.

그거를 묵고 나모 침이 질질 흘러.?몰라,?이상하대.?파래만 묵으모 속이 데리고 침이 질질 나와.?속이 마이 데린다.?처음에는 괜찮은데 자꾸 먹다 보모 데리다 못해 침이 질질 흘러내리.?산나물도 마이 뜯어서 그리해서 묵는데,산나물은 속이 고달퍼.?산에서 나는 거는 마이 묵고 자꾸 묵으모 속이 고달프고,?바다에서 나는 거는 속이 데린다.?그 이유는 몰라.?한 방에?10명씩 살았는데,?나만 그런 게 아이고 거의 다 그랬어.?그래도 묵을 기 워낙 없으니 바닷가에 가모 널린 기 파래고 옥수수 가리는 배급이 나온께 그거라도 해 묵고 허기를 달랬어.?묵고 나서 침이 흐르고 속이 데리도 그기라도 많이 묵고 싶었어.

곡식이 귀해서 그랬지 묵을 거는 그거 말고도 제법 있었제.?산에 소나무 안 있나.?소나무도 묵었다.?허허 아이다.?무신 아무 소나무를 꺾어 묵노.?니도 참 말이 안 된다.?소나무 솔잎에 새순이 안 드나.?그 새순이 올라오는 거(가지)?밑에 있는 가지를 꺾어서 껍데기를 벗기모 안에 또 껍데기가 나와.?그 껍데기를 이로 긁어서 묵으모 맛이 괜찮아.?작년에 올라온 새순 위(가지)에 또 새순이 올라 오모 올해 거는 놔두고 작년 걸 꺾어 묵었다.

소나무는 꽃도 묵고 이파리도 묵는다.?참 고마운 나무제.?송진도 묵는데 그거는 흐르고 난 뒤 사나흘 지나모 꼬들꼬들해지거든.?꼬들꼬들해진 걸 뜯어 묵는데,?꼭꼭 씹으모 껌처럼 된다.?배가 고플 때 그기라도 꼭꼭 씹고 있으모 좀 낫다.?씹으모 껌같이 되는 기 피비(삘기)다.?니도 피비는 묵어 봤고나.맞다.?거제도에 참 피비가 많다.?소나무는 묵으모 배가 부르고 그거는 묵으모 더 허기가 나.?풀도 나무도 생긴 대로 다 다른 기라.?굶어 죽으란 법은 없어서 천지에 묵을 거를 흩어 놓고 안 있나.?그기 자연이다.

16살에 다리 끊고 나무다리로 그리 그리 살았는데, 19살에 중매로 결혼했다.?옆에서 중매해줬는데, 29살 묵은 노총각이었다.?암만 노총각이라해도 내를 봐라.?좋은 마음으로 내 도와준다고 장가들었다. “어임주”?우리 영감 이름이다.?법 없이도 살 사람이다.?산청이 고향이다.?산청초등학교 다닜다카더라.?소록도에서 나와 갖고 함안 정착지에서 살다가 여게(성심원)로 온 것도 다 그런 인연이제.?부부로 사십칠팔 년을 살아도 싸움 한 번 안했다.법도 없이 살 사람이다.

2007년?10월에 갔다.?내가 폴도 마이 아프고 다리도 좀 그렇고 해서 그런지 나를 마이 위해 줬다. 2007년 들어 좀 샐샐했제.?기운도 빠지고 해도 그래도 나는 그리 갈 거라고는 생각 못했다.?그날 저녁에 밥을 참 맛있게 묵더라.그러고는 생전 안 하던 짓을 하는 기라.?밥을 한 그릇 더 주라는 기라.?내가 무신 밥을 또 묵을라카노 하면서도 한 그릇 더 퍼주니까 암 말도 안하고 그 밥도 깨끗이 비우더니,?고마 자다가 안 가나.?응,?자다가 그리 갔다.?평생 그리 고생하고 배도 마이 곯았는데,?그래도 가는 길은 편하게 가서……얼매나 배 곯고 살았으모 가는 길에는 배 안 고플라고 두 그릇 든든하게 묵고 갔을꼬.?가는 동안은 배 안 고팠을 기다.

19살에 결혼은 했는데, 26살에 살림 났다.?결혼은 해도 낮에만 같이 있고 어두워지모 합숙하는 방에서 잤제.?방이 없었어.?어짜다가 누가 죽어서 혼자 되는 집이 있으모 그때는 혼자 된 사람은 합숙하고 그리 빈방에 살림을 내줬거든.?결혼했다고 딴 방을 줄 형편이 안됐어.?그래서?26살까지는 낮에만 부부지.?그래도 부부가 되니까 낮에 와서 힘든 일도 도와주고 좋대.?좋더라.하하하.

그래서 아이가 안 생긴 거 아이다.?그놈들이 단종수술을 해서 아를 못 낳았다.?소록도에서는 젊은 남자가 들어오거나 어리서 와도 사내 구실할 나이가 되모 모조리 단종수술을 했거든.?강제로 했다.?단종대가 따로 있었다.?붙들어 가서는 뭐 제대로 마취도 없이 묶어 놓고 했지.?그래서 원통하고 분하다.자식도 없으니 천지간에 나 뿐이라.?명절이 제일 서럽다.?평소에는 모리고 살지.?명절이라고 주변에 그래도 자식이 찾아오고 자랑하는 거 보모 서럽고 인자 그만 살고 싶다.

임신한 여자가 들어오모 강제로 낙태시켰다. 10개월이 되어도 아를 낳게 하는 기 아이라 낙태시켰다.?병원 지하에 강제 낙태시킨 태아들을 보관하는 데가 있었다.?나는 봤다.?병에 보관되어 있는데,?머리카락이 새카만 태아도 들어 있었다.?우찌우찌해서 아를 낳아도 바로 보육시설로 보내진다.?엄마가 울고불고 해도 소용없다.?놀래기는 와 그리 놀래노??거는 그런 거 예사다.?지금이야 뭐 천국이다 어쩌다 하지만,?우리 살던 옛날 소록도는 사람 사는 데가 아이다.

언젠가 남편이 그러더라. “우리 이 몸으로 돈 많이 벌었다.?참 일 많이 했다.”?그러대.?참 열심히 살았다.?죽어라고 일만 했다.?시동생이 아를 다섯 명이나 두고 먼저 갔다.?동서는 가출했버맀고 하니까 시어머니가?‘조카도 자식이다’?하대.?그 아이들을 시어머니가 키우는데 양육비를 보탰다.?말하자모 그 아이들 다섯 다 거두고 시어머니 생활비를 대줬다.?조카가 자라서 취직했을 때는 작은 차도 한 대 뽑아줬다.?둘째 질부는 가까이서 복지사로 일한다.?조카들이 가까이 있어도 안 온다.?그 시어머니도?2008년도에?98세로 돌아가셨다.

소록도에서 나와서 함안 농장으로 왔거든.?와서 보이까 우리 시어머니가 아들도 없이 손자 다섯을 데리고 살고 있는데,?나라로부터 아무 도움도 못 받고 살고 있는 기라.?하기사 누가 나서서 아들 하나는 죽고 하나는 몹쓸 병 걸리 있고,?며느리는 집나가고 없는 촌 할멈한테 관심을 두겄노.?우리 영감이 면사무소에 참 뻔질나게 다니고 항의도 하고 애원도 하고 해서 생활보호대상자가 됐다.?우리가 보태주는 것도 한계가 있고,?그래도 그 돈이라도 나라에서 나오니까 밥은 안 굶고 손자들 공부는 시킸다.

60년 도에 소록도에서 통마늘 농사 지어서 서울에다 팔았는데,?얼추?1년에 한 천만 원씩은 되는 것 같더라.?그때는 보상 없었다.?무임금 노동이라고 들어 봤제??그런 기다.?돈 달라고 말도 못한다.?참 일 마이 했다.?불쌍한 우리 언니가?85년도에 죽었다.?그리 가엾고 또 가엾게 살다가,?나 생매장 안 시킬라고 내 배위에 엎어져서 그리 울던 큰 언니가 결국은 갔다.?언니가 죽자 우리도 소록도에서 나왔다.?그때는 우리가 나가고 싶다 하모 내보내주고 했다.?가운데 언니는 외동딸 하나 낳고 부산에서 살고 있다.?건강할 때는?1년에 한 두 번 씩 왔다 갔는데,?인자 늙고 몸이 안 좋은께 오도 못한다.

사회에 나와서 정착촌으로 갔는데 거가 함안 농장이다.?처음에는 짐승을 키웠는데,?품삯으로?50만원을 받았다.?기분 좋지.?일하고 돈을 받으니 아침부터 밤까지 참말로 열심히 했다.?죽기 살기로 일해서 우리 명의로 된 짐승도 사고 그리 했지.?니 보다시피 내 폴이 이렇다 보니 크게 힘쓰는 일은 영감이 했다.?나도 하는 데까지 힘을 보태도 다리도 나무 다리고 폴도 이리 해 갖고 뭐 그리 큰일을 했겄나.?밥하고 집안 일 하는 것도 참 힘들고 어렵더라.

학교??응,?다닜다.?소록도에서 학교를 다닜다.?집에서는 국민학교?4학년까지 댕깄는데,?소록도에 중학교가 생기서 들어가서 배웠다.?영감 만나 결혼하고 나서 학교 갔지.?재밌더라.?영감도 다니지 말라는 말은 안 해.?소록도 교회 안에?1960년도에 야간 성경 고등학교가 생깄다.?그게도 댕기고 있었는데,?고마?63년도부터 학생들 보고 오마도 공사에 가라카대.?오마도 공사에 학교 학생들을 죄다 데리고 가서 일 시킨다고 학교를 보내주나,?못 가게 하는 기라.?해뜨모 학교가 아이라 오마도로 갔다.?그래서 고등학교는 저절로 없어졌지.?그 길로 공부는 끝났다.?오마도 이야기는 안 하고 싶다.?참 마이도 죽고,?흔적도 없이 갔다.?일하다가 바다에 빠져 죽고 파도에 휩쓸리 갖고 죽고 일하다가 죽고……

97년도에 여게 성심원으로 왔다.?더 이상 일도 힘들고 조카들도 얼추 크고 하니까 영감이 이리 오자고 하더라.?그래서 시어머니하고 조카들 단도리 좀 해 주고 돈?○○○원 들고 여게 와서?201동에 살림을 풀었다.?그때는 성심원이 지금하고 좀 달랐다.?응,?그렇지.?지금이 더 좋아졌지.?영감이 죽고 나서도 한참 동안 밥해묵고 있었다.?근데 폴이 이리 덜렁거리고 힘이 없은께 밥 한 끼 하는 것도 너무 힘들고 고달파.?관절 때문에 팔에 기브스도 했는데,?밥을 제대로 해 묵을 수가 있어야지.?밥 한 끼 묵는 기 어찌나 고되던지 말도 못한다.

여게 요양사에 방이 없어서 못 들어오고 있다가 작년(2013년) 10월에 들어 왔다.?아이고,?암만 낫지.?밥 주제,?청소해 주제,?목욕 시켜 주제,?이런 데는 없다.?내가 시를 하나 썼는데 한번 봐라.?직원한테 불러주고 직원이 이리 종이에 옮겨서 갖다 놨다.?여게다가 내가 곡을 붙이서 노래 해 보꾸마.

 

성심원 구름이 두둥실

멀리 멀리 퍼지네.

너는 아느냐

성심원을……

나그네 천국이라는 걸

(중략)

성심원 바람이 두리둥실

온 세계에 퍼지니

너는 아느냐……

성심원이 장애인 동산이라는 걸

-2014년?4월?4일 구술-

 

이거는?4분의?4박자로 불러야 된다.?샤프(샵, #)를 넣어서 센트(크레센도)로 불러야 한다.?알지.?샤프와 센트는 높고 강하게,?프렛은 낮게 불러야지.내가 이래봬도 성가대 경력?30년이다.?소록도에서 교회 다닐 때도 노래 부르고,?천주교 다니고 나서도 노래 불렀다 아이가.?이거는 얼마 전에 소록도 갔다 와서 지어 봤다.?혼자 지어 갖꼬 혼자 노래 부르고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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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심원은 우리 같은 나그네의 천국이다.?성심원이 좋다.?그런데 소록도에 가니까 예날 생각이 나고 눈물이 나대. (성심원)요양사에서 옆방 사람하고 맘이 안 맞아 속이 상해?‘나갈까’?하는 생각이 든다 한께 전에 같이 소록도에 있던 사람들이 오라고 하더라.?잘 지내던 사람들이 좀 남아 있더라.?다 안 죽고 살아 있더라.?보고 싶은 사람들이 많았는데 다 못 만나고 왔다.?그게는 방도 항상 준비돼 있다 카더라.?벽지도 새 거고 방마다 에어컨도 있고……그게서 살다가 성심원으로 가고 싶으모 가도 된다고 그라더라.

소록도는 그때나 지금이나 병원이다.?그게는 워낙 이름이 알려져 있으니까 봉사자들이 많아서 아픈 사람들은 방마다 밥도 갖다 주고 하더라.?여게는 직원들이 밤낮으로 안 뛰어 다니나.?참 고맙고……?말로는 고마운 맘을 다 표시 못하제.?나한테는 우리 성심원 직원이 가족이다.?나는 사해에 솥단지 하나 걸어 놓고 살아도 된다.?돈 필요 없다.?나는 생활보호대상자라서 아파도 병원에서 돈 안 받는다.?이 나이 되고 보이 자식 하나 못 남긴 것,?그것만 억울하다.?나 죽고 나모 우리 영감이나 나나 누가 기억하겄노.

옛날에 우리 아부지가 그러는데,?내 사주가 남자 같았으모 사모관대를 쓸 사주인데,?여자로 태어나서 국록을 먹는다고 했단다.?큰 기와집 밑에서 전깃불 아래에서 산다고 했다는데 딱 맞다.?그 말을 모리겄나??내가 지금 나라에서 주는 돈으로 묵고 사니 국록을 받아 묵는 기고,?소록도에 가니까 전깃불이 있더라.?그라고 지금 성심원,?이 큰 집이 내 집 아이가.?기와집이라는 거는 진짜 기와집이 아이고 큰 집이라는 뜻이라.?니도 참,?그리 못 알아 듣나?

울 아부지 함자는?‘양재만’,?울 엄마는?‘김순이’,?나 때문에 화병 걸린 우리 아부지는 일흔일곱에 돌아가시고 울 엄마는 이부지 뒤에 가셨다.?나는 원래1941년?3월?27일(음력)에 태어났는데,?호적에는?12월?10일로 되어 있다.?이유를 모리지,?왜 틀리게 되어 있는지.?내 밑으로 남동생이 다섯 명 있었다. 5남?4녀이다.?내 밑으로 아들이 줄줄이 나왔제.?내 이름 덕 좀 본 기라.?이런 이야기도 인자 다 부질없다.?세상이 허무하다.

요 앞에 날이 따시모 경호강에 가서 앉아 있으모 낚시하는 사람들을 제법 만난다.?고기 잡는 모습을 보모 참 사는 모양이 다 다르다.?어떤 사람은 내가 물어도 대답도 안 하고 본 척도 안하고,?어떤 사람은 대답하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먼저 말을 걸기도 한다.?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 다 가져가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잡은 고기를 놓아주고 빈 바구니 들고 간다.?잡았던 고기를 놓아 주모 고기가 물에 들어가자마자 파드득 놀래서 꼬랑댕이를 흔들며 가는 기 귀엽다.?그런 사람은 고기를 낚는 게 아이고 강가에 서서 세월을 낚는 기라.

그나저나 인자 나 시모임에 안 갈란다.?왜는,?그냥 안 갈란다.?처음에는 시를 모린다 하고 안 쓰던 사람들도 인자는 다 시를 써 와서 읽고 하는데,?나는 니 보다시피 연필을 쥘 수가 있나,?글을 쓸 수 가 있나.?머리속에 기억해놔도 그마 자고 나모 다 잊어버린다.?직원들도 바쁜데 내가 생각날 때마다 어찌 자꾸 써주라고 하노.?그리하모 안 된다.?사람이 미안한 거를 알아야지.내 생각만 하고 그라모 안 된다.

니가 서운하다고??그래도 안 갈란다.?뭐 내가 안 간다고 서운하노.?다른 사람들도 안 있나.?마이 서운하다고??섭섭하다고??맘이 안 좋다고??알겄다.생각해 보꾸마.?그래도 자꾸 신경이 쓰이고 그렇다.?나만 가만 있는 것 같고……?내 다시 생각해 볼게.?니가 그리 서운다 하모 그것도 내가 잘못하는 기제.?응,?응,?알겄다.?알았다고.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내 얼굴은 큰 바위 얼굴 같다”[김성리의 성심원 이야기] -4

김성리(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풍경3학교에서는 오지 말라고 해도 그래도 실실 가니까 또 별 말이 없어. 그래서 좀 더 다녔다. 응, 오다가다 가다말다 했제. 큰 언니는 얼굴에 표가 자꾸 나. 나는 7살에 병이 들었다카는데 내가 스스로 안 거는 아매도 초등학교 1학년 때였지 싶다. 뭐 병이 들었다 해도 그기 무슨 병인지 얼매나 심각한 건지는 몰랐제. 바닷가에 있는 바위는 넓고 크다 아이가. 바닷가에 놀러가서 큰 바위에 어짜다 닿으모 그 부위가 빨갛게 불키는 기라.

그리 긁었던 기억은 없다. 집에 와서 엄마한테 말하모 엄마는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가 밤에 그 왜 큰 가마솥 안 있나? 그 솥 밑에 붙어 있는 검정을 긁어 와서 잘 때 되모 불킨 데에 솔솔 흩어서 뿌려주더라. 그라모 다음 날 아침에 보모 그 불킨 기 흔적도 없어. 그래도 바위에 닿으모 또 불키고, 검정은 그때뿐이고…. 그래도 그기 유일한 약이었던 것 같다. 그거 말고는 소록도 가기 전까지 약을 묵거나 바른 기억은 없어.

시간이 가니까 불키는 것 말고도 인자 무릎 우로 종기가 한두 개 나는 기라. 그래도 안 보이니까 그런 건지 그럭저럭 슬슬 다니고 때로는 친구들하고 놀기도 했다. 아매도 국민학교 4학년 때였지. 바닷가에서 친구들과 바위를 펄쩍 거리며 옮겨 다니며 노는데 그만 바람에 치마가 훌렁하고 날리는 기라. 친구들이 그만 봤다. 다리에 소소하게 빨갛게 불키 있는 거를. 치마를 얼른 덮었는데 친구들이 더 이상하게 여기는 것 같대.

아니나 다를까. 다음 날 학교에 가니까 역시 담임이 나오라쿠는 기라. 친구들이 담임에게 말했지, 뭐. 담임이 치마를 걷어보더마 인자 진짜 학교 오지 마라하고 집에 가라고 하더라. 그래서 집에 왔지 뭐, 어짜겄노. 오지 말라는데, 안 가야지. 또 언니하고 나하고 둘이서 산에서 놀다가 해가 지모 내려오고 그랬다. 뭐 먹었냐고? 산에 가모 묵을 거 천지다. 다래가 꼭 목화송이처럼 하얗게 보이는데, 그런 기 여기저기 많았다. 밥만 없지 묵을 거는 많아서 언니하고 나는 산에서 있는 게 편했다.

그런데 인자는 그것도 안 된다고 하더라. 산에 가는 것도 눈치가 보여서, 자꾸 눈치가 보이더라. 사람들이 자꾸 소록도에 가라고 하는 기라. 우리 아버지 엄마도 어쩔 도리가 없어. 버틸 재간이 있어야지. 면사무소에서도 오고 지서에서도 오고 마을 사람들은 내내 ‘왜 안 보내노? 언제 보낼 끼고?’ 하면서 우리 엄마 아버지를 자꾸 뭐라카고 한께 우리 부모님도 버틸 재간이 없었어. 언니하고 나 안 보내고 데리고 있을라고 얼매나 애를 썼다고. 그래도 더는 못 버텨. 성한 둘째 언니하고 내 밑으로 줄줄이 있는 남동생들을 생각하모 안 보낼 수도 없는 기라.

내가 12살 때, 1952년도에 소록도로 갔다. 동생들이 있으니까 아버지 엄마는 못 오고 나하고 언니하고 둘이 손잡고 갔다. 부모님은 좀 있다가 우리 보러 왔제. 언니라 해도 정신이 그러니 내가 언니 손을 꼭 잡는 기 아이고 우리 언니가 내 손을 꼭 잡고 다녔다. 견내량 다리를 건너 버스 타고 가다가 들키모 아무 데나 차 세우고 내리라 하고 그라모 내리고, 그래서 언니하고 손잡고 걷다가 차가 오면 손들어서 타고, 또 쫓겨 내리서 걸었다. 묻고 물어서 처마 밑에 자고 해서 이틀 만에 소록도에 닿았다. 여관에 갔는데 나가라 해서 길에서 잤다.멀면 멀고 가까우면 가깝고, 게가 그렇더라.

내가 갔을 때에는 소록도에 마을이 7개 있더라. 어데, 소록도는 구역을 나누어서 병 상태에 따라서 다리게 살게 해. 병 상태가 양호한 한센인은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야 해. 나는 나이가 어리도 병상태가 양호하다고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에 가서 시중을 들어라 하데. 가서 물도 떠 주고 밥도 멕여 주고 잔심부름도 하는데, 제일 못할 기 대소변 수발드는 기라.

그 사람들은 화장실을 못 가. 혼자서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중환자들이 있는 부락이었거든. 우리 언니는 정신이 온전치 못하니까 일은 안 했제. 나는 병표가 마이 안 나고 그리 안 깊어서 굳이 소록도로 안 가도 되는데 우리 언니 혼자 못 보내니까 같이 간 거거든. 우리 부모님이 큰 딸이 걱정돼서 막내딸을 딸리 보내면서 맘이 어땠을꼬. 동네 사람들도 언니보고 난리지 나보고는 그리 안 했어.

밤새 요강에 오줌을 싸고 그래. 그라모 나는 아침에 일찍 해뜨기 전에 일어나서 그 요강을 비워야 돼. 그래도 다행인 게 똥은 딴 데 쌌어. 똥은 거름이 되거든. 오줌도 따로 모았어. 아무 데나 버리모 안 되고 그 모아 놓는 데에 갖다 버리야 하거든. 밤새 요강이 가득 차니까 어두컴컴한 새벽에도 일어나야 해. 빨리 안 가모 욕도 하고 난리가 나. 내가 빨리 요강을 비워야 또 싸지. 모아 놓는 데는 사람들이 있는 데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어. 그게까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들고 가모 오줌이 막 내손으로 손목으로 타고 흘러내리.

손이랑 손목에 오줌이 마를 날이 없더라. 그때 겨우 12살인데…. 겨울이 너무 힘들었어. 날은 춥지. 요강은 무겁지. 오줌이 가득 찬 요강을 두 손으로 받치 들고 저 멀리까지 가모 팔이랑 다리가 바들바들 떨리고 아무리 살살 걸어도 오줌은 출렁거리고 흘러 내리. 아무리 빨리 걷고 빨리 움직이도 거리가 멀고 하니까 요강을 비우고 가모 욕이 들려. 내가 안 가모 오줌을 못 싸니까 오줌이 누고 싶은 사람은 참으면서 욕이 나오는 기지. 하하하. 욕 듣는 기 싫어서 빈 요강을 들고 종종거리기도 하고 뛰기도 했어.

한겨울에는 손목이랑 손가락이 얼어 터지는 것 같애. 그라고 요강을 씻는 것도 내가 했거든. 그때 따신 물이 있나. 그냥 찬물에 씻는데 너무 춥고 손이 시린께 오줌 냄새도 안 나. 누가 나를 씻기 주는 것도 아이고, 맨날 손이랑 손목이 틀어서 보기 숭했어. 겨울에는 튼 데가 터지서 피도 나고 가렵기도 하고 그렇는 기라. 그게 오줌이 흘러 내리모 따갑고 씨리고, 그라다가 딱지가 앉고, 어짜다 딱지가 떨어지모 또 피도 나고 그랬어.

더러버도 어짤 기야. 안 하모 안 되는데. 소록도에 간 이상 나가지도 못해. 온통 바다인데 어데로 가. 바다 속으로 들어가? 인자 그때 마음은 기억이 잘 안 나. 그냥 마음이 아파. 12살짜리 계집애가 오줌 가득 든 요강을 들고 찬바람 속을 발발 떨고 가던 기억만 또렷하고 자꾸 떠올라. 그래도 그기 있던 사람들이 나 어리다고 마이 예삐해 주고 잘 해줬다. 오줌을 참고 있으모 성을 내도 평소에는 참 따뜻하게 대해줬어.

어데로 가나 성질머리 더러운 사람은 있어. 그런 사람들 성질낸 거는 기억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하나 잘못하나 성질 내는데 거기에 동조할 필요가 없는 기라. 그 사람 천성이라. 그런 사람은 잘해 주도 툴툴 못해 주모 성을 뭐같이 낸다. 그런 사람의 성질에 내가 움직이 봤자 나만 손해라. 그냥 한쪽 귀로 듣고 한쪽 귀로 넘겨야 해. 세상만사 내 뜻대로 되는 기 어딨노.

풍경2내가 살던 부락에서는 식당에서 밥을 먹었어. 환자들이 스스로 밥을 못하니까 단체로 밥을 해서 줬거든. 나도 식당에서 밥 먹었제. 그때 내 나이가 16살이었어. 날짜도 안 잊혀져. 4월 27일 주일이었어.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이 점심시간까지는 시간이 남았다고 가서 나물을 뜯어 오라 카더라. 요강 비우는 것보다는 나물 뜯는 일이 안 좋나. 오랜만에 홀가분하게 가서 나물을 뜯다가 시간 가는 줄 몰랐어. 놀래서 허겁지겁 갔는데 그래도 점심시간에는 좀 늦었어. 마이 안 늦고 쪼금 늦었어.

그래도 규칙을 어긴 게 돼서 감독관한테 불리 가서 종아리를 맞았어. 근데 좀 세게 때려졌는가봐. 그만 뼈가 부러졌던가봐. 종아리도 좀 터지고. 자꾸 덧나. 진물도 나고 안 낫는 기야. 그래도 오줌 요강은 들고 다녔제. 워낙 중환자도 많고 나는 부모도 없이 정신없는 언니하고만 있응께 자꾸 일을 해야제. 아팠지. 얼매나 아팠다고. 그게는 사지 있는 사람은 아프다고 봐 주는 것 없어.

날이 지나가니까 온몸이 불덩어리라. 열이 너무 심해서 어떤 날은 까무라치기도 하고 그랬어. 보다 안 되니까 다리를 끊자 하대. 치료법이 뭐가 제대로 없었어. 살면 사는 기고 못 살고 죽으모 죽는 운명이지. 의대가 있는 데에 병원이 있었어. 아이라, 지금 겉은 의대가 아니고 진짜 의사는 몇 안 되고 거기서 흰 가운 입고 의사 도와 일하는 젊은 사람들이 있는 데를 의대라고 불렀어. 해부도 하고 그랬제.

수술실 천장에 커다란 거울이 있었어. 둥글고 큰 거울인데 수술대 위에 누워서 보면 내 얼굴까지 다 보여. 수건으로 얼굴도 안 덮어줬어. 전신마취가 어데 있노. 그냥 허리 아래만 마취해. 수술하면서 저거끼리 웃는 소리, 말하는 소리 다 들어. 그라고 기계 덜그덕 거리고 다리 자르는 소리도 들리고 보였어. 봤지. 거울로 보다가 기절해버렸지, 뭐.

눈 뜨니까 당가에 거꾸로 매달아 놨어. 오른 쪽 다리가 없대. 링겔도 없고 눈 뜨고 물이라도 넘기모 사는 기고 안 그라모 죽는 기라. 나중에 이야기 들은께 몇 시간 동안 눈도 안 뜨고 못 깨어났어. 사람들이 죽었다고 해부실로 옮길라고 했는데, 우리 언니가 가슴이 따뜻하다고, 아직 안 죽었다고 내 가슴 위에 엎드려서 안 비켰어. 사람들이 나를 못 옮겨가게 내 위에 팍 엎어져서 “우리 동생 안 죽었다.”고 울고불고 했던 모양이야. 울 언니가 날 살린 셈이지.

열이 너무 마이 나고 오랫동안 열에 시달리고 나니까 얼굴 살이 축 늘어지대. 그냥 살이 축 늘어지고, 지금 나 봐라. 얼굴이 이리 축 처져서 바위 얼굴 같다 아이가. 웃기는 와 웃노? 내가 예삐다고? 니 거짓말도 잘 한다. 눈도 깜짝 안하고 입도 안 삐뚤어지고 그리 거짓말을 하나? 허허허 우리 아버지가 나 다리 잘리고 난 뒤에 와서 내 얼굴 보더니 “얼굴이 큰 바우 얼굴 같다.” 이라대. 그래가 내가 보니까 진짜 그렇더라. 그 전에는 좀 예뻤겠제? 처음에는 시간이 좀 지나모 괜찮아질 줄 알았는데 안돌아 오더라.

며칠 누워 있었던 것 같애. 열도 내리고 몸을 좀 움직일만 하자 또 요강 비우러 다녔지. 옳은 치료도 없고 누가 있어서 나를 돌봐 주겄노. 우리 언니야 내 옆에 껌딱지 마냥 붙어 있지 그 이상도 이하도 아이라. 목발이 어데 있노? 나무 작대기 하나 주워서 그거 짚고 절뚝거리고 다녔지 뭐. 맞을 때 양쪽 종아리를 맞았거든. 응? 점심시간에 늦었으니까 맞았지. 그게는 규칙이 하도 엄해서 딱 정해진 대로 움직여야 해.

왼쪽 다리도 마이 아팠어. 그래도 그 다리로 안 움직이모 어떻게 해? 누가 밥 먹여주나? 작대기 짚고 오줌이 흐르는 요강 들고 아픈 다리에 힘을 주고 절뚝거리고 다니다 보니 그마 왼쪽 다리도 탈이 났어. 너무 아프고 또 열이 나. 봄에 오른쪽 다리 자르고 난 후로 여름 내내 떨리기도 하고 열도 나고 춥기도 하고 아프기도 하고…… 슬펐냐고? 잘 모리겄다. 슬펐던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하루하루 살았던 것 같기도 하고……

그해 가을에 왼쪽 다리도 마저 잘랐다. 방법이 없었다니까. 요새하고 달랐어. 그라고 그게는 소록도다. 소록도가 어떤 데인지 알기나 하나? 지금 소록도는 그때 소록도가 아이다. 지금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모 우리 인생 아무도 모린다. 나도 가끔씩은 꿈이던가 생시던가 싶기도 하다. 어찌 다녔냐고? 처음에는 엉덩이로 밀고 다니다가 좀 있으니까 나무다리를 해 주더라. 응, 그때도 의족이 있었다.

지금 의족하고는 마이 달라도 걸어 다닐 수는 있었다. 나무로 동구랗게 홈을 파서 그게다 다리를 넣고 끈으로 묶어 다녔다. 처음에는 무겁고 불편해도 그게 아니모 못 걷는다 아이가. 그라께 열심히 연습했다. 나무다리로 다니면서 심부름도 하고 요강도 비우고 우리 언니도 돌봐주고 그리 했다. 나 때린 사람도 미안타 하더라. 그리 될 줄 몰랐다고, 일부러 그리 한 거는 아이라고 하더라. 그라모 됐지. 일부러 그라는 사람이 어데 있노. 미안하다고 했으니까 됐다. 으응, 원망 안한다.

갑자기 사진은 무신 사진이고? 에이, 안된다. 니 얼굴 베린다. 커다란 내 얼굴이 니 옆에 있으모 니 얼굴 베리서 안 된다. 너무 붙이지 마라. 얼굴을 저리 좀 옆으로 해봐라. 니 얼굴이 고운데 나 때문에 베리모 어짤라고 자꾸 옆에 붙어쌌노. 사진? 올리도 된다. 누가 나를 알겄노? 어데다 사진을 낸다꼬? 내 이야기하고 같이 올린다고? 그리해라. 괜찮다. 응,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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