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부터 (e)시대와철학에 실렸던 글들 중에서 편집자가 다시 뽑아올린 글

전설의 슈팅 게임 썬더포스V[보고 듣고 생각하기]

?정해진 길은 없다[보고 듣고 생각하기]

전호근(경희대 교수)

 

#이 글은 2013년 7월 9일 한철연MT에서 진행된 강의의 강의록임을 밝힙니다.

 

전설의 슈팅 게임 썬더포스V

 

서기 2106년 인류가 만든 무인 탐사 우주선 이시바나가 명왕성 바깥 카이퍼 벨트에서 정체불명의 기체를 견인하여 돌아온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hapkiyusul&logNo=20177789543

2108년 지구통합정부의 연구기관이 극비리에 조사한 결과 정체불명의 기체는 현생 인류의 기술로 만들 수 없는 고도의 기술력으로 만들어진 전투기로 판명된다. 기체는 ‘위대한 자들이 만든 쇳덩어리[Vastian’s Steel]’라는 뜻으로 바스틸로 명명되었고 통합정부는 곧바로 기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2139년 바스틸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인류는 남태평양에 바스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무인인공섬 바벨을 건설하고 인공지능 관리 시스템 가디언을 제작한다. 이 기술로 인류는 에너지 문제와 환경오염 등 대부분의 문제를 해결한다.

2145년 인류는 바스틸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우주 이민계획을 수립하고 제1차 우주선단을 위성궤도상에서 건조한다.

2150년 인공지능 가디언이 독립을 선포함과 동시에 인류를 공격하여 위성궤도상의 우주선단은 조종불능상태에 빠지고 지구상의 바스틸 테크놀로지 시설은 괴멸된다. 이 전쟁에서 인류의 1/3이 희생된다.

살아남은 인류는 전투기 바스틸을 복제한 유인전투기 RVR-01 GAUNTLET을 개발하여 가디언과의 싸움에 나선다. 썬더포스 작전이 시작된 것이다. 당신은 건틀렛의 조종사다. 이제 인류의 생존은 오직 당신에게 달려 있다.

 

가디언이 인류에게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

I am cyborg humanity.

Cyborg animals.

Cyborg flowers.

A cyborg world.

And my name is the Guardian.

Soldier / Human, listen to me.

All the things created using Vasteel / that surpass human power have been destroyed by me / by you. Their number was too great, but has now been reduced to the proper level.The world will continue as it was before. The living creatures of this planet will continue to rejoice in / fear battle, and die in / live by combat. But even in a world of minor warfare, one overslight could mean…

“RVR-01 Gauntlet”…destroyed.

“RVR-02 Vambrace”….operational.

The existence of Vambrace will once again cause humanity to embrace mass death and destruction, just as Vasteel did. This I know. You know it too, do you not? Soldier / Human.

If you wish to safeguard the future of humanity, you must make sure humans can never again gain access to Vambrace…….

Soldier / Human, May fortune be with you…… (작곡: 츠쿠모 햐쿠타로 九十九百太郞)

 

어느 게임 블로거의 프로필

△ My Main NICK : RVR-12

△ 희망 : 게임을 굉장히 좋아하긴 하지만 희망직업은 음악가

△ 좋아하는 것 : 이탈리안 파스타를 포함한 면요리, 클래식, 게임음악, Thunder Force

△ 싫어하는 것 : 게맛살과 참치통조림을 제외한 모든 해산물 , NEXON, 미라클 큐브, 아카이럼

남의 취미를 함부로 욕하는 사람

△ 나의 역린이자 절대 금칙어 : 장애인

△ 내가 선호하는 장르 : 레이싱, 액션, 슈팅

△ 내가 선호하지 않는장르 : 1대1 격투액션, 명령식 RPG

△ 2012년 12월 기준으로 가장 활발하게 활동중인 게임 : 메이플스토리

△ 좌우명 한 마디 : 하고 싶은 것은 하되 끝까지 품위를 지키자. 게임은 기본적으로 매너있게!

악플러와는 일체 말을 섞지 말것.

 

어느 레즈비언 부부의 선택

아이를 원하던 레즈비언 커플(샤론 더치스노와 캔디 매컬로)이 기왕이면 자기들처럼 소리를 듣지 못하는 아이를 갖기로 작정했다. 그들은 자기들이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듣지 못하는 것은 문화적 정체성의 하나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과 같은 아이를 갖고자 하는 일념으로 5대째 청각장애인 가족에서 정자 공여자를 찾아서 청각장애를 가진 아들을 얻었다. 사람들이 비난하자 그들은 듣지 못하는 것은 장애가 아니며, 자신들과 같은 아이를 갖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청각장애라고 부르는 것을 장애가 아니라고 하는 이들의 말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마이클 샌델, <생명의 윤리를 말하다>)

절름발이 신도가와 정나라 자산

춘추시대 정나라의 명재상인 자산은 신도가라는 절름발이와 함께 백혼무인을 스승으로 모셨다. 스승을 뵙고 나면 자산은 항상 신도가가 먼저 나가기를 기다렸다가 한참 뒤에 나갔다. 병신과 나란히 걷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자산이 신도가에게 오늘은 자신이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나갈 테니 신도가더러 한참 뒤에 나오라고 요구했다. 신도가가 까닭을 묻자 자산은 말했다. 자신은 한 나라의 집정자고 신도가는 절름발이인데 어떻게 나란히 걸어 나갈 수 있겠느냐고.

놀란 신도가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에는 온전한 다리를 가지고 온전치 못한 내 다리를 비웃는 자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발끈하고 성을 내다가도 백혼무인 선생을 뵙고 나면 깡그리 잊어버리고 평화로운 마음을 되찾았다. 내가 선생과 노닌 지 19년이 되었는데, 한 번도 내가 절름발이인줄 몰랐다. 그런데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을 듣고 비로소 내가 절름발이인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대가 지금껏 나의 내면과 교유하는 줄 알았는데 이제 나를 밖으로 드러나는 육체에서 찾고 있으니 또한 잘못이 아닌가?

자산이 깜짝 놀라면서 얼굴색을 바꾸고 태도를 고치고서 말했다.

“내가 잘못 했네.”

 

덕이 충만한 사람들의 형상[德充符]

어떤 사람의 내면에 ‘덕(德)이 가득 차 있다는 부호(符號)’가 덕충부(德充符)다. 곧 도를 체득한 사람의 내면성이 밖으로 드러난 모습, 형상을 의미한다. 그러나 장자의 본뜻은 덕이 충만한 사람에 부합하는 형상이 따로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은 형상에 구애되지 아니하는 것, 형상을 초월한 형상을 드러내는 데 있다. 그 때문에 장자는 세상 사람들이 추하다고 여기는 절름발이나, 꼽추, 언청이 같은 불구자를 들어 그들의 입으로 도를 말하게 한다. 그로테스크한 기형불구의 인간들이야말로 도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는 역설적 우언을 통해 장자는 외형적인 모습에 구애받고 그것을 꾸미는데 집착하는 세상 사람들의 슬픈 어리석음을 크게 꾸짖고 있다.

신도가와 자산의 이야기에서 자산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치, 곧 부(富)와 영(榮)의 상징이다. 반면 절름발이 현자인 신도가는 무가치, 곧 천(賤)과 욕(辱)의 상징이다. 장자는 이 두 사람을 초월자인 백혼무인(伯昏無人) 앞에 세워놓고, 참으로 덕이 충실한 사람은 귀천을 잊고, 미추(美醜)를 포용하고, 만물을 자신이 품에 노닐게 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덕충부에 등장하는 해탈자의 면목은 모두 세상에서 상처받은 사람, 학대받는 사람, 추한 사람, 천한 사람들이다.

장자는 덕충부의 또 다른 주인공인 곱사등이 애태타(哀??)를 절대자로 묘사하고 그의 입을 빌어 말한다. 혹은 生하고 혹은 死하고 혹은 길이 존재하고 혹은 금방 사라지는 인간 사회의 천변만화가 모두 ‘事之變, 命之行’ 곧 만상의 끊임없는 변화, 운명의 유전에 지나지 않는다고.

시시각각 멈춤이 없는 일체만상의 변화, 운명의 유전은 밤낮으로 우리의 눈앞에 교대로 나타나는데 인간의 인식능력으로는 도저히 그것을 규명해 낼 수 없다. 그럼에도 어리석은 인간들은 그것들을 서열화하고 우열을 나눈다. 인간 세계의 불행은 대부분 그런 자들의 어리석음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장자는 그러한 변화를 있는 그대로 내맡겨 두어야 불행을 피할 수 있다고 말한다.

세상에는 다리가 하나인 사람도 있고 다리가 둘인 사람도 있다.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듣는 사람도 있다.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고 보는 사람도 있다. 길은 걸어 다니다보니 생긴 것이고 사물의 이름은 그렇게 부르다보니 그렇게 붙여진 것처럼. 본래 그러한 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보고 듣고 생각하기]

손석춘이 쓴 “그대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고 있는가?”

 

나태영(한철연 회원)

 

 

새누리당과 민주당이 통합진보당을 비판할 자격이 있는가?

 

“언론이 이승만의 3·15부정선거와 비슷한 사건으로 대서특필해간 통합진보당의 비례대표 선출 방법만 보더라도 민주당은 물론 새누리당과 얼마든지 단순 비교가 가능하다. 헌법기관인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부정선거라며 이승만까지 덧붙여 몰아가는 사람들과 그들의 여론몰이에 휩쓸린 사람들에게 정말 묻고 싶다. 새누리당과 민주당의 비례대표 순위는 어떻게 결정하고 또 했는가. ? 더러는 새누리당과 민주당은 통합진보당과 경선 규칙이 다르다고 반박한다. 과연 그러한가. 좋다. 두 당은 통합진보당과 달리 당 지도부가 당 안팎의 인사들로 임명한 ‘비례대표 공천심사위원회’에서 결정했다. 그렇다면 그 심사위에서 결정한 순위대로 모든 게 이뤄졌을까? 그 과정에서 당 지도부의 영향력으로 순위가 조정된 사람은 없는가? ? 바로 그렇기에 조중동의 틀을 벗어나지 못한 채 진보의 죽음을 들먹이는 사람들과 이 책이 서 있는 자리는 확연히 다르다. 진보정치 세력이 직면한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 또한 수구-보수세력과 민주세력은 달라야 한다.” (21, 22쪽)

 

김대중이?

 

“그렇다면 김대중 대통령이 가장 잘한 것은 무엇일까? 이건 후임자인 노무현 대통령의 결정적 문제와 연결되는 것인데, 그 시절에도 미국과의 BTI 논의가 있었는데, 한미 FTA 논의 시작하면서 처음부터 풀어주고 시작한 ‘4대 선결 조건’을 보면서 그는 BTI 논의를 아예 접어버렸다. 실무자로 정부에 참여하면서 본 것 중에서 미국 앞에서 당당한 외교를 했던 그가 놀라웠다.” (『김대중을 생각한다』중 우석훈 글, 275쪽)

 

이랬던 김대중이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을 옹호했단 말인가? 노무현을 도와주려고?

 

?“25 김대중의 신자유주의 도입을 IMF 구제금융 탓으로만 돌리는 논자들이 직시해야 할 사실이 있다. 구제금융을 모두 갚고 심지어 대통령에서 퇴임한 뒤에도 김대중은 노동계와 시민사회에서 노무현이 강행한 한미 자유무역협정을 반대하고 나섰을 때, 자신은 찬성한다고 밝혔다.”(76쪽) 1970년대 김대중 경제정책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 “김대중을 ‘김대중’으로 만든 것은 ‘대중에 의한, 대중을 위한, 대중의 경제체제’를 제시한 그는 박정희식 경제성장의 대안을 갖춘 진보적 정치인으로 자리매김했다.”(76쪽)

 

하지만 1997년 외환위기 당한 이후로는 김대중 경제정책은 더 이상 진보적이지 못했다.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을 지지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김대중이 미국과 양자협정 접었으면서도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 옹호했다는 사실 참 거시기 하다. 그래도 김대중은 북조선과 남한 통일에 대해서 약 40년간 힘썼다. 참 다행이다. 진보정당 사람들이 배워야 할 점이다. 진보정당 사람이라면 한미서민패죽이기 협정 폐기를 몇 십년간 외쳐야 한다. 지금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들이다. 억장이 무너진다.

 

진보당은 패권주의 사과하라!

진보당이 민주노동당일 때 대의원대회 결과는 국민참여당과 합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 민주노동당은 그 명령을 어기고 민주주의 원칙 무시하고 국민참여당과 합친 사실 사과하라! 우선순위 정해서 뛰라!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물고 늘어져라!

 

?“민주노동당이 진보신당의 당 대회를 앞두고 국민참여당과의 통합을 기정사실화하는 행태를 보면서, 또 그런 행보에 자극받아 진보신당이 당 대회에서 최종적으로 합당을 반대하는 결정을 내리는 걸 보면서 나는 참담했다.”(72쪽)

 

노동당(진보신당)은 진보당(통합진보당)에게 ‘종북’이라 말한 것 사과하라! 『 신자유주의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세계노동운동사에 해박한 지식을 지닌 장석준이 ‘도로 민주노동당’ 어쩌구 저쩌구 말한다.

사과하라!

노동당은 한미서민패죽이기협정 폐기 물고 늘어져라!

홍세화가 말했다.

다시 만날 수 있게 서로에게 상처 주는 말 하지 말자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때 잘한 일 참으로 많다.

물론 자주 까먹었지만 잘한 일 참으로 많다.

 

?“2 …한나라당이 추진 의사를 밝히고 있는 비정규직 임금 차별 해소는 과거 민노당(서평자 덧붙임: 정확히 민주노동당)의 핵심 정책이었다. 2004년 당시 민노당 의원 10명과 여야 의원 6명은 근로기간 및 근로시간 등의 이유로 차별을 금지하고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을 적용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발의했었다. 당시 한나라당과 민주당의 전신인 열린우리당은 “기업 부담 등을 고려했을 때 현실적 임금 차별을 허용할 수밖에 없다”며 이 법안에 반대했었다. 민주당이 비정규직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한 비정규직 노동자 사용 사유 제한도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이 반대했던 것이다. …”(20쪽)

 

이 책 20쪽 21쪽에 민주노동당이 잘한 일 도배질 한다. 독자 여러분 이 책 사서 확인하기 바란다.

“객관적 현실은 진보정치 세력이 집권하기에 가장 토양이다.”(13쪽)

손석춘 말에 나는 적극 공감한다.

 

21세기 대한민국 성적표가 이렇다.

자살자 거의 세계 1위,

애 낳지 않는 비율 세계 1위,

비정규직 노동자 약 50프로,

진보정당이 여당 될 까닭 너무도 많다.

그런데도 진보정당 지지율 7프로도 되지 못하는 까닭은?

영향력 약 80프로 차지하는 수구언론이 빨갱이 사냥해서,

장남 야당 민주당이 못나서,

진보정당이 실력이 부족해서, 진보정당이 사람 아우르는 길 몰라서 진보정당이 여당이 되지 못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한 번 품은 뜻을 끈질기게 밀고 나가지 못해서 그런다고 나는 생각한다.

“ “그동안 무엇을 위해 억척같이 살아왔는지 모르겠다.” 생활고로 부부가 자살하며 남긴 유서의 첫 문장이다.”(11쪽)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지금, 경제를 다시 생각한다]

자본주의를 다시 생각한다-10, 11강

 

박민미(동국대 외래교수)

* 당신의 돈, 당신의 비즈니스를 생각한다

 

당신에게 돈이란 무엇인가? (대안 화폐, 지역 화폐, 대안 금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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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습:

1. C-M-C(구매를 위한 판매목적=사용 가치)

2. M-C-M(판매를 위한 구매목적=교환 가치. 후자의 화폐는 자본으로 전화. 이미 자본. 유통에서 더 많은 화폐가 끌려 나온다. 이 과정의 완전한 형태는 M-C-M’이고, 여기서의 M’=M+ΔM이다.

3. ΔM은 어디서 오는가? 노동력 대가로 지불되지 않은 잉여 가치. 기존 패러다임에서는 공장단위로 분석되었으나(Marx), 현대 패러다임에서는 사회적 공장이라는 개념으로 대체된다. 잉여 가치가 붙는 단위가 단지 공장이 아니라, 전체 사회에 편재한 비물질적 노동과 관련된 사이클을 돌면서 잉여 가치가 부가된다(Negri).

4. 더욱이 화폐가 금본위제에서 브레튼우즈 협정 체결로 미 달러 금본위제로 갔다가 1971년의 닉슨 쇼크 이래 화폐가 제국권력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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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고 자료: John Protevi 정리 도표 번역 푸코 사회 권력 도표

(http://www.protevi.com/john/Foucault)

전성기

1650-1789

1780-1820

1820-1968

1850-현재

1980-현재

권력 양식

주권 권력

사회 권력

규율 권력

생명 권력

통제 권력

권력 이론

법률 이론

이데올로기

미시물리학

통치성

신자유주의적 이론

일차적 행위자

법률가

전문가

주체

자기 기업가

일차 타깃

신체들

영혼들/권리들

생산적정치적 능력들

삶들: 개체/인구

자기(개인) 자본

타깃에 접근하는 일차적 방법

고통

기호들

훈련

연구/고백

진단/시장 조사

목표 달성 위한 일차적 실천

의식(예식)

표상

연습/시험

규범화/위험 관리

치료/투자

최강 형식

신체형

극적 처벌

판옵티콘

약리유전학

희망 산출물

복종

공동체

유순함

자동통제

투자에 대한 최적 대가

지식 형식

법전

철학에세이

서류더미

통계 매뉴얼

가격 그래프

특권적 과학

법률학

철학적 심리학

인간 과학들

정치 경제

미시경제학

통제의 경제적 형식

선취(단순세금)

공공 작업

벌금/보상

복지/보험

(공적/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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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지역 화폐

<!–[if !supportEmptyParas]–>?출처: http://edunstory.tistory.com/589

지역 화폐 운동은 1983년 캐나다의 마이클 린턴이 ‘LETS (Local Exchange Trading System)’라는 지역 화폐를 사용한 데서 유래한다. 지역경제의 자립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 시작된 것으로, 특정 지역에서 통용되는 화폐로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체계이다. 마음 맞는 이들끼리 서로의 용역을 살 수 있는 현대판 품앗이이다. 해당 지역과 공동체에서 회원들끼리 통용되는 지역 화폐와 현금을 적절히 섞어 상품과 서비스를 교환하는 정에 기반한 합리적인 대안 화폐 시스템이다. 또한 지역 화폐는 대량 생산대량 소비대량 폐기 과정에서 발생하는 자원 고갈과 환경 오염의 악순환을 끊어보자는 취지로 확산되고 있는 환경을 생각한 녹색 운동이기도 하다.

현재 영국은 400개 이상, 프랑스는 250, 미국과 일본은 약 200개 등 세계적으로 2,500여 개의 지역화폐 제도가 있으며 점점 더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우리나라에서도 이렇게 지역 화폐 운동을 활발히 시행하는 사례가 있다.

대전 한밭레츠

대전시 대덕구 법1동의 한밭레츠 (www.tjlets.or.kr)1999년 활동을 시작한 지역화폐 운동 조직으로 580여 가구의 회원을 가진 국내 최대의 지역 화폐 조직.

한밭레츠는 두루라는 한밭레츠만의 화폐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널리또는 두루두루라는 뜻이 담긴 순우리말인 두루는 회원들의 혼란을 막기 위해 원화와 등가원칙을 적용해 1천두루= 1천원에 해당하는 값으로 정해졌다.

한밭레츠 회원이면 누구나 두루로 거래할 수 있고, 모든 가맹점의 거래는 30% 이상 두루를 쓰도록 되어 있다.

한밭레츠에서는 집수리·농사일·외국어·컴퓨터 교육·자동차 정비 같은 전문기술과 함께 편지쓰기·친구 되기·아이돌보기와 같이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품과 서비스를 품앗이 품목으로 다루고 있다.

특히 한의원 2곳과 의원 4, 치과, 동물병원, 약국, 채식식당, 건강학교, 카페, 포구사, 목공예점, 컴퓨터수리점, 자전거포, 유아용품점, 학원, 인쇄소 등의 가맹점이 있어 두루 거래를 활발하게 만드는 매개체 구실을 하고 있다.

송파품앗이

서울 송파구 삼전동 송파구민회관 2층의 송파구 자원봉사센터에서는 지역화폐 운동인 송파품앗이 (www.songpavc.or.kr)를 운영하고 있다.

99년 자원봉사자를 중심으로 시작된 송파 품앗이의 회원 자격은 18세 이상의 송파구와 인접 지역 주민이며, 품앗이 센터에 거래할 물품과 서비스를 신고함으로써 거래를 시작한다.

거래가 끝난 뒤에는 품앗이 센터에 거래 내역을 통보하도록 되어 있는데요, 센터는 회원의 거래 내력을 정기 소식지에 실어 모든 회원에게 알린다.

송파품앗이에서는 물건과 서비스를 교환하기 위해 SM(송파 머니)을 단위로 하는 가상의 화폐를 사용한다.

SM의 가치는 현금과 동일하며, 현금과 혼합해 사용할 수도 있는데, 거래내역은 자원봉사센터에 보고하고 거래자들은 각자의 통장에 +또는 SM 거래액을 기록한다.

서비스나 물건을 제공한 사람은 +로 저축을, 제공을 받은 사람은 로 빚을 지게 되는 시스템이다.

거래 품목도 자동차 수리, 학습 지도, 피부관리, 미용, 컴퓨터 교육과 수리, 피아노·미술 레슨, 사진 촬영, 버스 대여, 수지침 등으로 다양한 송파품앗이에서는 99년 이후 1767건의 거래가 이루어져, 현금 2432만원, 4550SM 등 모두 6982만원어치가 거래되었다.

경남 함안 녹색대학의 녹색화폐 사랑

지역과 괴리된 으로 전락한 대학을 지양하고 생명체로서의 대학을 만들자는 90년대 중반의 대안대학 운동 속에 잉태된 녹색대학 (http://www.green.ac.kr/)은 생태공동체를 지향하며 녹색문화학, 녹색살림학, 생명농업학, 생태건축학, 등 독특한 분야의 전공수업으로 유명하다.

이러한 녹색대학의 가장 특별한 시도는 대안화폐운동이라 할 수 있는데, 녹색대학은 야생화사업단, 천연염색염료 사업단, 생태마을사업단, 건강식품사업단 등으로 구성된 그린네트워크의 배후 지원을 받아 지역화폐(녹색화폐)를 통용시키고 있다.

은행도, 이자도 없는 이 녹색화폐의 액면가는 일반화폐와 11로 교환되며 사랑(SA)’이라는 단위를 사용하는데요, 녹색대학이 조폐공사에 의뢰해 액면가 30억원 어치의 녹색화폐 20만장을 인쇄하였고, 이 돈은 실제로 위조방지 처리까지 돼 있다.

교수와 교직원은 급여의 25%를 녹색화폐로 받고, 학생들은 등록금의 25%를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녹색화폐로 낼 수 있으며, 녹색화폐는 학교 주변에서 이미 음식 값으로 치러질 정도로 지역화폐로 싹을 틔우고 있다.

특히 체인형태의 유기농 녹색가게인 신시(http://www.shinsi.com/)는 그린네트워크의 지원을 받아 전국 55개의 매장에서 녹색화폐를 통용한다고 한다.

각 가게에 설치된 중고 생활용품 교환 코너에 물건을 가져다주면 녹색화폐를 받을 수 있고, 그 녹색화폐로 유기농산물을 구입할 수도 있다.

서울시에서도 품앗이 화폐인 S(Seoul)-머니(가칭)를 도입한다고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으로 남을 돕고 그 대가로 남의 도움을 받아 서로 돕는 나눔의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가 실현되려면 많은 사람의 공감이 필요하다.

에드가 칸의 <이제 쓸모없는 사람은 없다>라는 책은 타임 뱅크, 타임 달러를 소개하고 있다. 타임 뱅크는 영국에서 시작된 운동으로, 한 사람의 한 시간 노동을, 그 노동의 종류가 무엇이든지 동일한 가치로 쳐주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지역화폐 운동의 하나였다. 에드가 칸은 이 운동에서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원칙을 확인한다. 첫째, 모든 사람은 나눌 것이 있다. 둘째, 1시간은 동일한 가치를 갖는다. 셋째,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넷째, 공동체는 사회적 자본으로, 사회적 자본은 공허한 개념이 아니라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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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한밭 레츠-<지역 화폐와 여성주의>의 논의를 중심으로

지역 화폐의 대안성은 1. 경제적인 면, 2. 공동체, 3. 지역 사회 개발론, 4. 생태주의, 5. 소비자주의 등 다양한 면에서 주목된다. 대안성은 크게 대안 경제와 공동체, 두 축에서 설명된다. 지역화폐운동은 20세기 초 이래 국가통화의 대안으로 생겨났다. 대체로 시장경제가 위축되었을 때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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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TS

Time Dollar

Hours

도입 시기

1983

1986

1991

시발 지역

캐나다 밴쿠버코트니

미국 워싱턴 DC

미국 이타카시

운영 실태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

미국 38개주 67개 시스템

북미에서 39개의 시스템이 운영 중

특징

교환 거래의 일반적인 유형을 말함

시간당 서비스 가치를 동일하게 취급, 노동 시간을 저축해줌. 서비스 중심 거래.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지역 내에서 자체적으로 화폐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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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츠의 도입은 지역 경제 침체에 따른 지역 주민의 실업이 주된 요인이었다. 1983년 캐나다 벤쿠버 코목스 벨리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던 마이클 린턴(Michael Linton)이 실업으로 자신의 목수 기술과 일대일교환을 시도하다가 새로운 화폐제도인 레츠를 생각해냈다. 일대일교환이 어려움에 부딪히자 다자간 교환을 시도했고, 레츠 시스템 내에 있는 사람들 간 거래를 해나갔다. 1985년에는 500명의 회원이 연간 30만 달러 가치의 거래를 했다.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 전세계적으로 1,500여 개의 레츠가 운영되고 있다.

한국에 레츠가 소개된 것은 1996<녹색평론>이다. 19983월 신과학운동조직인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을 시작으로 지역화폐운동이 확산되었다. 사회적 배경으로는 1998년의 IMF 체제로, 기존 경제 시스템에 대한 위기의식이 작용했다 할 수 있다. 당시 신문, 방송, 시민단체들에서 지역화폐운동에 대한 관심과 열기가 고조되어 주로 실업자 구제책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IMF 구제금융체제가 오지 않았다면 지역화폐제도로서의 레츠가 우리나라에서 그렇게 짧은 시간 동안 소개되고 확산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지역 화폐를 복지관 등에서 사업으로 한 경우 대부분 사업비가 끊기면 바로 마감하는 식이어서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그런데 흥미로운 현상은 서서히 활동 중단이 되어가던 지역 확폐가 2008년 미국 금융위기와 세계 경제 위기 이후로 다시 지역화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이다. 2008년을 전후로 지역화폐 활동을 시작한 단체들은 다음과 같다. 대전의 어린이 도서관 중심의 동별품앗이(관저품앗이, 짜장마을 어린이도서관, 호숫가마을품앗이), 인천(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평화의료생협, 참좋은 품앗이 등), 서울(서울시 복지재단의 e-품앗이, 관악건강가족지원센터의 한마을 품앗이), 경기(과천무지개교육마을의 어울림품앗이, 성남문화재단의 성남문화통화, 의정부 시민단체 중심의 의정부레츠), 경상권(부산 여성회의 사하품앗이, 부산동원복지관의 가마골품앗이, 대구여성노동자회, 경주여성노동자회) 등 많은 지역에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다음은 새로운 관심 이전의 지역화폐 상황에 대한 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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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화폐 공동체

참여 주체

지역 화폐명

도입

시기

비고

미내사 FM

미래를 내다보는

사람들의 모임

미래머니

(future money)

19985

활동 중단

민들레 교육통화

출판사 민들레

민들레

19991

활동 중단

서초품앗이

서초구청/주민

그린머니

(green money)

19992

중단 뒤

2009년 재개

작아장터

녹색연합 출판사

없음

19993

활동중단

송파품앗이

주민/자원봉사센터

송파머니

(songpa money)

19998

활동 침체기

동작 자원봉사은행

동작구 자원봉사센터

없음

199911

활동 중단

한밭레츠

주민

두루

2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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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천품앗이

주민

아리

200011

자원봉사센터와 연계

안산 고잔품앗이

고잔1동사무소

지역주민

고잔머니(GM)

20026

활동 중단

구미 사랑고리은행

구미 요한선교센터

고리

2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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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품앗이

광명그루

주민/광명시

평생학습원

그루

20043

활동 중단

대구 지역화폐

늘품

대구 달서구 본동

종합사회복지관

늘품

20054

활동 침체기

대전은 본래 1990년대 들어서 금강 제2휴게소 건설 반대운동을 벌인 환경보전대전시민연합(1991), 녹색연합 전신인 배달환경연구소(1991)가 활동하며 환경운동의 텃밭을 마련하고 있었다. 이후 1997년에 대전·충남 녹색연합이 창립되어 재활용, 유해폐기물 적정 처리운동, 생태천 복원운동 등 활동을 하고 있었고, 아나바다 상설장터 녹색가게 또한 운영하고 있었다. 1993년 창립된 대전환경운동연합 또한 설립되어 환경운동을 지속했고, 1990년 주부아카데미 수료생을 주축으로 구성된 살림의 집을 모태로 한 한밭살림소비자협동조합이 설립돼 건강하고 안전한 먹거리 운동과 지역 공동체 활동을 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동호회에 그칠 수 있을 정도의 취약한 출발이었으나, 2000년의 의약분업 논쟁 중에 2002년 민들레의료생협이 출범하면서 민들레의료생협에 가입했다가 한밭레츠에 가입하는 방식으로 되었다. 내과, 치과, 한의원 진료를 받을 수 있는 민들레의료생협은 지역화폐로 전액 진료를 받을 수 있는데, 실무자 급여를 두루로 지급함으로써 지속될 수 있었다. 대안학교인 대전 꽃피는 학교또한 레츠와 상호작용하면서 커나간 터전이다.

거래 총액에서 두루 비율은 30% 이상이 원칙으로 자원 봉사나 재활용품 거래처럼 100% 두루로 거래되는 경우도 있고 농산물처럼 30%가 두루 거래인 경우도 있다.

철학자 와트는 ‘”돈이 없기 때문에 서로 가치를 교환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측량 단위가 없어서 집을 짓지 못한다는 말과 같다고 말했다. 기존 화폐 시스템은 돈이 있어야 거래가 가능하나, 두루에서는 두루를 벌든 쓰든, + 거래든 거래든 거래 자체가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는 게 기본 생각이다. – 거래로 시작하더라도 이를 줄이기 위해 거래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공동체 및 두루의 활성화 방법이라는 것이다.

두루의 교환 가치는 (1) 서로의 상황과 조건이 고려되면서 만들어진다. 그럼으로써 공동체 내에 두루를 많이 가진 회원과 빚이 많은 회원 간에 자연스러운 재분배가 이루어진다. (2) 유용성과 쓰임새에 따라 가치가 만들어진다. 주지하다시피 시장에서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가 구분되었다. 물건과 노동력이 그 쓰임새에 따라 필요한 사람과 교환해야 한다고 인식하기 때문에, 두루 가격은 서로의 필요와 상황에 따라 조정해가며 사용 가치를 반영해 거래가 이루어진다. (3) 부담이 덜 되는 가치. 전문가가 레츠를 통해 회원들에게 자신의 재능과 노동력을 나누는 경우도 있고, 기존 시장보다 대여 거래가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4) 신뢰를 바탕으로 자원가 가치가 순환된다. 레츠가 매개되어 맞교환 방식이 아니므로 물건과 노동력이 순환될 수 있다.

지역 화폐가 가지는 순기능의 또 다른 면은 기존 시장에서 배제되거나 저평가되었던 노동이 가시화된다는 것이다. 가사 노동이나 동네의 여러 일들(가령 지역 주민을 위한 이동 영화 상영 자원 활동, 어르신 건강 교실 등)의 일이 가시화되고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경력이 단절되었던 여성의 일자리 만들기가 가능해진다. 전업 주부였던 회원, 은퇴 후 어르신 등이 천연 비누 등 친환경 천연 제품을 만들어 공급하고, 이를 가르치면서 강사로서 활동하는 경우, 재활용 빨래비누를 만들고 냄비 받침을 만들어 제공하는 경우 등이다. 그리고 간호와 같은 보살핌 노동이 가시화된다. 그리고 이러한 가사노동과 보살핌 노동에서 기존 시장 체제에서는 감정 노동의 가치가 무시됨으로써 노동 소외를 낳았다면 지역 화폐의 호혜 시장에서는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관리하는 주체가 된다는 큰 차이점이 있다.

(3) 반월가 시위

월가 점령 시위는 금융업계의 탐욕에 대해 누적되었던 불만이 표출된 사건이었고, 다중의 창의적인 대응을 보여준 사례였다. 발단은 소비자의 직불 카드 사용에 수수료를 매기려 한 대형 은행에 대한 반발이었지만, 더 근원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끊임없이 채무를 지움으로써 부를 불려가는 은행의 비도덕적 관행에 대한 반발이었다.

?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의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 포스터. 미국의 100달러 지폐에 새겨진 벤자민 프랭클린이 얼굴에 가이 포크스의 가면을 쓰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하고 있다. 가이 포크스는 1605년 영국 국왕 제임스 1세를 살해하려던 화약음모 사건에 연루돼 처형당한 인물로, 2005년 영화 <브이 포 벤데타>를 통해 재조명을 받으며 최근 전세계 99%의 시위에서 저항의 상징으로 떠오르고 있다.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제공

5일은 월가를 점령하라시위대가 금융권 탐욕에 대한 저항의 표시로 은행 계좌 옮기는 날’(Bank Transfer Day)로 정한 날이다. 월가 시위대가 지난 929, 대형 은행의 계좌를 5일까지 지역의 소형 은행이나 주정부 및 지역공동체가 운영하는 신용협동조합 등으로 옮기는 운동을 시작한 이래로 한달여 만에 신용협동조합에 65만명의 신규 계좌가 늘어났다고 신용협동조합 위원회가 이날 밝혔다. 이를 통해 신용협동조합에는 45억달러(5130억원)가 새로이 계좌에 편입했다.

이처럼 월가 시위대의 목소리가 행동으로 옮겨진 것은 사회적 불평등을 호소하는 월가 시위대의 주장에 많은 사람들이 동조하는 데다, 특히 대형은행인 뱅크오브아메리카가 내년부터 직불카드에 매달 5달러의 수수료를 물리겠다는 방침을 밝힌 데 대해 소비자들이 거세게 반발한 영향도 크다. 실제 지난 9~10월 신용협동조합의 신규계좌 개설은 지난해 같은 기간에 견줘 38%나 늘어났는데, 새로이 늘어난 계좌의 상당수는 뱅크오브아메리카에서 넘어온 소비자들이다. 시티그룹, 제이피모건체이스, 웰스파고 등 다른 대형 은행들도 최근 몇 주 동안 계좌 폐쇄가 눈에 띄게 늘어났다.

금융 쪽의 소비자 운동은 이번이 사실상 처음이다. 대형 은행들의 계좌 폐쇄가 이어지고 뱅크오브아메리카가 결국 직불카드 수수료 부과 입장을 철회한 것은, 월가 점령 시위가 구체적이고 합법적으로 거둔 첫 전리품이라는 상징적인 의미도 크다. 로스앤젤레스의 자영업자인 크리스텐 크리스티안(27)은 최근 뱅크오브아메리카 계좌를 폐쇄하고, 신용협동조합에 두 개의 계좌를 개설했다. 그는 <에이피>(AP)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소비자들이 깨어나고 있고, 우리가 선택권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워싱턴/권태호 특파원 (2011116일자 한겨레 신문)

(4) 신용권그라민 은행

그라민 은행의 사례: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gp3project&logNo=10144861682

(UNESCO, http://www.unesco.org/education/poverty/grameen.shtml의 번역)

그라민 은행(Grameen Bank)은 기존 은행 시스템과 다른 운영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그라민 은행은 다른 은행들과 다르게 담보를 요구하지 않으며 대출자와 은행 간의 신뢰와 엄격한 관리를 통해 운영된다. 또한 대출자들의 창조성, 책임 의식, 참여 의식을 토대로 설립되었다. 그라민 은행은 초기 가입 시 고객의 신용도를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데, 이는 전반적인 사회발전 과정에서 촉매제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이 신용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가난한 사람들이 신용을 얻음으로써 사회, 경제적인 지위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용은 은행과 관련된 업무를 이용하는 것이 불편했었던 사회 빈곤층들에게 경제 활력을 불어넣어 주는 역할을 한다.

그라민 은행을 처음 기획한 사람은 현재 그라민 은행 총재를 맡고 있는 무하마드 유누스(Muhammad Yunus) 교수이다.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다음과 같은 목표들을 달성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빈곤층을 위한 은행업무시설 확충

? 비합리적인 이자율로 빈곤층을 착취하는 고리대금업자 축출

? 사회로부터 버림받아 실업자로 전락한 잉여 인력을 위한 자영업 일자리 창출의 기회 제공

? 가난으로 혜택을 받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정치, 경제, 사회적인 상호 협력을 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

? 이전까지 반복되었던 낮은 수입, 낮은 저축률, 낮은 투자악순환을 낮은 수입, 낮은 신용, 낮은 투자에서 높은 수입, 높은 투자, 높은 신용의 발전적인 선 순환체계 구축

1976년부터 1979년까지 시행된 이 프로젝트는 조브라(Jobra)마을(그라민 은행 프로젝트가 첫 번째로 시행된 곳으로, 치타공(Chittagong)대학이 위치한 곳)과 주변의 인근 마을들이 향후에 경제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후, 중앙은행의 지원과 국가소속 상업은행의 협력을 받으면서, 그라민 은행 프로젝트는 탄가일(Tangail) 지역(방글라데시의 수도인 다카(Dhaka)의 북부지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그라민 은행 설립자는 신용을 경제 발전을 위한 강력한 무기이자 인간의 기본권이라고 말한다. 신용이 높을수록 재원 확보가 용이해지며 그에 따라 경제적인 지위도 높아진다. 신용은 재정 자원을 요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하며 가난한 사람들, 특히 가난한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해방이 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전까지 시행되었던 담보 대출은 가난한 사람들의 신용권을 부정했다. , 담보대출을 요구하던 기존의 은행 시스템은 빈곤층이 그들을 둘러싼 사회 경제적 빈곤과 그에 따른 어려움에 끊임없이 대항할 수밖에 없는 위치로 내모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 그라민 은행의 운영 방식은 모든 사람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 주는 데에 중점을 둔다. 그라민 은행은 대출을 재원 확보의 수단으로 삼는다. 대출을 재원 확보 수단으로 사용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성장 잠재력이 있는 기술들을 사용하여 임금과 고용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이에 따라 더 높은 소득을 내며, 더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 또한 자영업을 통한 경제 활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경제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게 한다. 그리고 자영업 운영은 가난한 사람들이 자급자족적인 기반을 확보하게 도와준다. 유누스 교수는 자영업 운영을 통한 생계 유지는 실업 수당이나 복지 급여와 같은 복지 시스템을 조성하는 것보다 실업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에 있어 효과적입니다.”고 말했다.

그라민 은행은 담보도, 보증인도 없이 오로지 신용으로 대출을 해주는데, 그렇다고 무조건은 아니다. 채무자 5인이 모인 모임에 가입하고, 이 모임이 8개 모인 더 큰 모임에 소속되어 총 40인이 서로 관련된다. 만일 한 사람이 채무를 갚지 못하면 나머지 사람들의 대출이 제약되는 방식이다. 따라서 채무자는 자신과 같이 어려운 처지에 모인 사람들의 신용권을 지켜주기 위해 스스로 채무를 상환해간다. 그래서 그라민 은행의 원금 회수율은 98%에 달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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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P2P 금융대출 및 투자

금융 소외 계층 대상의 품앗이 대출팝펀딩도 주목할 만하다. 팝펀딩은 신용도가 낮아 은행·카드사 등에서 대출을 받을 수 없는 금융소외계층에게 개인대출자들을 연결해주는 팝펀딩 사이트(www.popfunding.com)2007년부터 시작했다. 영국의 조파’(Zopa)와 미국의 프로스퍼’(Propser) P2P(Peer to Peer) 금융 모델에 착안했다. 이곳에서는 과거 두레에서 이뤄졌던 십시일반 품앗이처럼 품앗이대출이 이뤄진다.

대출 신청자가 신청 사유와 상환계획, 필요 금액을 제시하면, 개인 투자자들이 대출 금액과 이자율을 입찰하는 역경매 방식으로 대출이 이뤄진다. 이 과정에서 다양한 분야의 개인투자자들이 모여 대출 신청자에게 질문하는 과정을 거쳐 대출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평가·심사 과정에서 집단 지성이 작동한 결과, 지금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의 상환율은 평균 93%를 기록하고 있다. 국내 대형 대부업체의 상환율이 평균 89%라는 점과 비교하면 상당히 양호한 결과다. 2012년말까지 팝펀딩에서 이뤄진 대출 건수는 모두 1600여건에 금액은 30억원을 넘어섰고, 성사된 대출 금리는 평균 11%를 기록했다.

팝펀딩은 지난해 2월에는 자금과 고객이 필요한 소기업이나 프로젝트에 개인 후원자들을 연결해주는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 굿펀딩(www.goodfunding.net)을 개설했다. 팝펀딩이 대출을 연결한다면, 굿펀딩은 투자(후원)를 연결하는 곳이다.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아 후원 형태로 지원하고, 성과가 나오면 그 결과를 함께 공유하는 형태다. 신생 벤처는 초기 자금을 확보하면서 상품을 판매하거나 홍보하는 효과까지 누릴 수 있다. 외국에서는 킥스타터가 대표적이고 국내에서는 굿펀딩 외에도 텀블벅, 개미스폰서, 오마이컴퍼니 등이 있다.

(원낙연 한겨레경제연구소 연구원 2013326일자 한겨레신문)

돈에 눈 멀 것이 아니라, 돈이 행복한 삶의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자각한 다양한 실천이 이미 이루어지고 있다. 함께 지혜를 모아 냉혹한 금융 자본의 겨울을 종식시키고 따뜻한 돈, 윤리적인 돈에 대한 대안을 찾을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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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연 8월 월례발표회가 열립니다[ⓔ시대와철학 알림]

8월 월례발표회-조광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강연회

 

 

안녕하세요, 학술1부입니다.
8월 월례발표회를 알려드립니다.

8월 월례발표회는 조광제 선생님의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 출간 강연회입니다.
『존재와 무』보다 더 방대한 총 1456쪽으로 구성된 이 책은
오랫동안 국내 철학계에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샤르트르 철학의 핵심 저서를 소상하게 소개합니다.
무더운 여름 새로 단장된 한철연 강의실에서 ‘현존철학’에 관한 강연과 토론을 함께해주시기 바랍니다. (강연원고는 당일 배부합니다.)

주제: <존재의 충만, 간극의 현존-장 폴 샤르트르? 『존재와 무』 강해> (그린비)
발표: 조광제 (철학아카데미)
사회: 박은미 (건국대)
일시: 8월 8일 목요일 오후 4시 태복빌딩 3층 한철연 강의실

“인간 존재는 결핍입니다. 결핍을 메우기 위해 결핍된 것을 향해 초월하는 것이 인간 존재이고, 거기에서 욕망이 성립합니다.
그래서 근본적인 욕망은 대자와 즉자의 통일인 총체성에 대한 것이 됩니다.
이를 사르트르는 ‘존재 욕망’(d?sir d’?tre)이라 부릅니다.”(1권, 256쪽)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는 근본적으로 존재의 결핍을 넘어서고자 하는 인간 욕망에 대한 연구이다.
인간이 의식을 갖는 것은 나의 외부, 나의 타자를 갖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책이 사르트르의 물음의 출발점으로 강조하는 곳은 바로 이 의식의 존재 조건 자체를 문제 삼는 지점이다.
나의 타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나 스스로’ 혹은 타자 없이 ‘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을 현상학에서는 흔히 ‘즉자’(卽自)라 칭한다.
이것은 나의 외부를 모르는 완전히 자기완결적인 존재방식을 뜻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의식은 나의 외부에 대한 자각을 통해 나 자신을 스스로가 인식하면서만 생겨날 수 있는데,
이를 ‘자기 자신에 대해 존재한다’는 뜻의 ‘대자’(對自)라는 개념으로 명명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존재는 근본적으로 즉자적인 상태에서 대자가 생겨나면서 자기 분열을 겪게 된다.
나 혼자만의 완결적인 만족감이 붕괴되면서 타인의 세계를 마주하게 되는 이 충격으로부터 비로소 의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존재론적 문제들은 바로 이러한 조건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출판사 책소개 중에서)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구보씨 여름을 즐기다[철학자 구보씨의 세상생각]

 

문성원(부산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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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보씨는 바다를 좋아한다. 산이 싫다는 건 아니지만 바다가 더 좋다. 흐르는 강물도 괜찮지만 철썩이는 바다가 더 마음에 든다. 무엇보다 그 느낌이 시원하지 않은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폐포(肺胞)가 씻기는 듯, 답답한 기분이 잦아든다. 바다는 언제나 하늘을 비추고 그 하늘을 눌러 담은 빛으로 출렁인다. 바다의 색깔은 하늘보다 더 짙고 다양하다. 하늘 아래 세간의 기운마저 비추어 담기 때문일까.

밤바다도 매력적이다. 때로, 달빛을 받아 일렁이는 바다와 마주해 있노라면, 세상의 온갖 걱정들이 다 그 물결에 반사되고 부서지는 것 같다. 바닷가에서 나고 자란 한 친구는 바다에서 수영하는 참 맛을 알려면 밤바다에 들어가 봐야 한다고 했다.

“우주가 온 몸을 휘감는다는 느낌이 들 거야.”

정말 그랬다. 구보씨는 어둠의 촉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다. 어둠이란 어떤 결여가 아니라 빛으로 희석되기 전 세상의 본 모습이 아닐까. 바닷물의 감촉과 사위의 어둠이 한꺼번에 다가오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긴 별빛의 존재감마저 유별났다. 공기 중에 산란되는 대낮의 빛이 증폭된 음향과 닮았다면, 어둠 속의 별빛은 끊어질 듯 이어지는 아련한 노랫가락 같았다. 밤바다의 출렁임 가운데 머리만 내놓고 잠시 떠있을 때면, 껴안는 듯한 막막함이 두려움이나 충만함에 앞서 와 닿았다.

비 오는 날 바다에 들어가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떨어지는 빗방울은 곧장 바다의 일부가 된다. 하늘과 빗줄기로 이어지는 바다 가운데서 작은 점처럼 고개를 들면 얼굴에 부딪히는 빗방울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는 표현은 원래 헤밍웨이의 것이라고 했던가. 바다 위에 내리는 빗방울들은 한껏 입을 벌려 담아내고 싶은 아득한 곳의 인삿장 같다.

출처: http://bluei333.egloos.com

금년에도 구보씨는 자주 바다를 찾았다. 그러나 한적한 바닷가에서 밤수영을 즐기거나 빗줄기로 샤워를 대신하는 호사를 누리지는 못했다. 대신, 해수욕장의 번잡함을 피해 아침을 이용하곤 했다. 남들이 헬스장을 향하는 이른 시간에 바다에 몸을 담구는 것이다. 아침나절이면 바닷가 인근의 주차장도 한산하다. 한 시간 정도 호젓하게 바다를 즐기다가 젖은 몸을 수건 한 장으로 대충 닦고 목욕탕으로 향하면 그만이다.

“그럴 바에야 헬스장이 낫지 않아? 그 시간대에는 비키니 입은 여자애들도 없을 거 아냐?”

구보씨가 간단히 해수욕 하는 비법(!)을 알려주자 제법 명민한 척하는 동료 하나가 한 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하는 말이다. 글쎄, 그렇긴 하다. 하지만 구보씨는 요새 ‘비키니’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렇다고 헬스장의 손바닥만 한 수영장에 가고 싶은 마음도 안 든다. 갇혀 있는 느낌이 들어서다. 바다에 들어가는 것에는 수영을 한다는 의미만 있지 않다. 그것은 일종의 즐김이기도 한 까닭이다.

즐기는 것은 도구적으로 이용하는 것과는 다르다. 도구는 목적에 의해 갇혀 있기 마련이어서, 도구적 이용에는 즐김이 없거나 있다 해도 억압되기 십상이다. 건강을 위해, 또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수영을 한다면, 거기서 우세한 것은 목적성이지 즐김이 아니다. 목적에는 그 목적을 성취하기 위한 규제와 한정이 따른다. 반면에 즐김에는 놂이, 놀이가 있다. 여기엔 정해진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수반된다. 사실, 즐김의 즐거움이란 이런 벗어남 때문에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벗어남 자체가 즐거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것은 성급한 오해다. 물론 그렇게 볼 만한 여지가 있긴 하다. 억압에 대한 탈출과 해방이 쾌감을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쾌감과 즐거움 또는 즐김을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즐거움은 단순한 쾌감과 달리 주관 내부의 즉물적 유착에서 벗어나 객관으로 한 발 더 다가간 폭넓은 느낌이다. 더구나 즐김은 느낌에 국한되는 않는 행위의 사태다. 그리고 즐거움은 즐기는 행위에서 온다.

즐김과 즐거움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과 관련된 대상이나 사태가 어떤 의도나 목적으로 한정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산과 바다를 즐기고, 청명한 날씨를 즐기며, 친구와 교제를 즐기고, 삶 자체를 즐긴다. 이 가운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는가? 즐김의 한쪽은 우리가 붙잡고 있지만, 다른 한 쪽은, 더 넓고 더 멀리 뻗쳐 있는 다른 한쪽은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런 탓에 즐김은 항상적이지 않고, 그런 까닭에 즐김은 비로소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즐김은 양면적이다. 바다를 생각해 보자. 바다를 바라보거나 바다에 몸을 담금으로써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그러나 언제나 그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바다는 풍랑에 사나워지기도 하고 엄청난 크기로 우리를 위협하기도 한다. 바다가 우리를 감싸고 우리에게 스스로를 열어주는 때는 사실 얼마 되지 않는다. 우리는 기껏 여름 한 철 동안 바다에, 그것도 해변의 한 귀퉁이에 다가갈 수 있을 따름이다. 바다를 즐길 수 있을 경우는 바다 자체의 존재에 비해, 그 넓이에 비해 너무나도 좁다. 바다가 우리와 어울린다고 느껴지는 때, 그리고 바다의 가없음이 그 어울림과 잠시 이어져 있을 때, 그래서 바다가 우리에게 즐김을 허용할 때, 우리는 바다를 즐긴다. 이런 것이 즐김의 특성이다. 즐거움은 이 즐김에 수반되며 또 우리를 이 즐김으로 인도한다. 즐거움은 즐김으로 난 길에 기꺼움으로 쓰인 표식이다.

요즘 프랑스 철학 용어로 자주 거론되는 주이쌍스(jouissance)는 이 즐거움에 대한 이름이라 보아 좋다. 주이쌍스는 우리가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쾌락이 아니다. 자크 라캉의 정신분석학에서 주이쌍스는 일단 성적(性的) 향락(享樂)이라는 뜻으로 새겨지지만, 이 향락이야말로 제어되지 않는 심연에 닿아 있지 않은가. 거기서 열리는 틈바구니는 우리에게 정체를 완전히 드러내지 않는 실재(實在)로 이어진다. 향락을, 주이쌍스를 우리는 소유할 수 없다.

즐거움이란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즐거움이 비롯하는 즐김이 우리보다 큰 터전에 바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즐김과 함께할 수 있을 뿐이다.

“즐… 구보야, 넌 어쩜 끝까지 그 모양이니? 난 도무지 네 말이 이해가 안 돼. 즐기는 거야 그냥 즐기면 되는 거지, 너처럼 이상하게 꼬아 생각해서야 어떻게 즐거울 수가 있겠어? 내 눈엔 네가 제대로 즐길 줄을 모르니까 괜한 얘길 늘어놓는 걸루 밖엔 안 보여.”

“허, Y야, 무슨 소리야. 넌 아까도 내가 바다에서 노는 걸 봤잖아. 즐길 줄 모른다는 건 정말 나하곤 거리가 먼 얘기라구.”

“피, 그게 뭐 노는 거고 즐기는 거야. 아침나절에 잠깐 바닷가에서 어슬렁거려 놓고…”

“어어, Y 너도 그때 기분 좋다고 했잖아? 그렇게 날이 더워지기 전에 바람 쏘이는 게 따가운 여름을 현명하게 즐기는 길이라구. 공자님이 봤으면 증점(曾點)의 지혜라고 칭찬했을 거야.”

“누구? 증점?”

“그래, 봄날에 사람들이랑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고 싶다던…”

“관 둬, 됐거든. 철학자라고 다 너처럼 고리타분하진 않을 텐데, 참 걱정이다, 얘.”

“아니, 이거 고리타분한 거 아니야. 즐기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구. 오늘날이라고 해서 편리함 속에 모든 걸 가둘 순 없거든. 그리고 즐긴다는 건 그렇게 가두어진 틀 밖으로 나가야 가능한 거야. 어려움과 위험의 틈새에 놓인 안락함과 여유로움이 아니라면, 즐김의 진짜 매력은 사라져 버리는 거지. 그러니까 즐김은 모든 문제의 해결이 아니야. 쾌락의 충만은 더더욱 아니고 말이지. 증점이나 공자가 즐김을 어떤 유토피아적 상태에서 찾았다고 생각하면 곤란하다구. 실제로 공자와 증점은 다른 제자들이 자리를 뜨고 나자 그 제자들이 논의했던 정치 얘기를 계속하거든. 즐김은 어디까지나 세상 가운데에, 또 세상의 틈새에 놓이는 거야.”

“구보야, 즐긴다는 건 그냥 자기가 좋아하는 곳에서 자기가 좋아하는 사람과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거 아닐까. 그거면 충분한 거지, 너처럼 괜한 토를 달기 시작하면 즐겁던 일도 정나미가 떨어질 것 같애.”

“뭐, 그럴 수도 있겠지. 근데, 좋아하는 것과 즐기는 것은 똑같은 게 아니거든. 다시 공자 얘길 해서 안 됐지만, 공자도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과 같지 않다(好之者 不如樂之者)고 하잖아. 즐긴다는 건 좋아한다는 것보다 더 이루기 어려운 어떤 걸 거야. 좋아한다고 해서 다 즐길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말이지. 즐긴다는 건, 뭐랄까, 내가 아닌 어떤 흐름 속에 있어야 하는 거라구. 거기에 더불어 있는 것, 그러나 소유하거나 지배하지 않는 방식으로 있는 것, 이를테면 어떤 흐름을 타고 같이 흘러야 하는 거야. 그건 마치 파도타기와도 같지. 파도를 즐길 때 우리는 파도를 거스르는 것도 파도에 완전히 파묻히는 것도 아니야. 파도와 함께 하는 것이긴 하지만.”

“구보야, 나 파도타기 안 좋아해. 안 좋아하는 건 즐길 수 없는 거 아냐?”

“그야 그렇겠지. 하지만 거기엔 묘한 면이 있어. 가령 산을 타는 사람들을 생각해 봐. 이 한 여름에도 아찔하게 높은 히말라야같이 험준한 설산(雪山)을 오르는 사람들. 그들이 산을 좋아하는 건 사실일 거야. 그러나 그건 단순한 좋음일까? 거기에는 좋음 말고도 두려움과 불안과 기대와 동경 같은 것들, 몇 마디로 줄여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들어 있어. 하지만 그 사람들은 그걸 즐기는 것이 아닐까. 달리 말하면, 그렇게 펼쳐지는 즐김의 장에 뛰어드는 것 아닐까.”

“에구, 구보야. 난 히말라야에 오를 생각 없어. 난 그딴 거 안 좋아한다구.”

“쩝… 그럼, 이렇게 생각해 봐. 나는 어때? Y야, 너는 이 구보를 좋아만 하는 건 아니지? 차라리 넌 이 구보와의 관계를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 관계가 우리 두 사람의 뜻대로 되는 건 아니잖아. 우리는 각자 이 관계의 한 쪽 끝을 쥐고 있을 뿐이야. 그 끝을 잡고 때로는 이렇게 때로는 저렇게 흔들리는 관계의 물결을 타고 가는 것이지. 거기에는 때로 열락(悅樂)도 깃들고 회한(悔恨)도 깃들지만, 그것 자체로 우리는 이 관계를, 이 삶을 즐긴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구보야, 착각하지 마. 뭐? 열락? 회한? 미안하지만 구보야, 넌 지루함 자체라구. 거기에 즐길 게 어딨니?”

“엥? 그럼, 왜 여지껏 날 계속 만나는데?”

“그거야…네가 그래도 한철연 회원이니까 그렇지. 그걸 여태 몰랐어?”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당파성’이 ‘객관성’에 앞선다.[철학을다시 쓴다]-⑥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제가 여기까지 이야기했을 때 학생 하나가 다시 질문을 하더군요.

“선생님, 용어에 관한 문제인데,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나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표현에서 주어에 나오는 있을 것과 술어에 나오는 있을 것은 성격이 다르지 않습니까? 이 문장들은 ‘있을 것이 있으리라.’ ‘없을 것이 없으리라.’고 표현해서 두 말의 성격이 다름을 분명히 밝혀 주는 게 좋을 듯한데요.”

“좋은 질문입니다. 그러나 ‘엎어치나 메치나 마찬가지’라는 속담이 있지요? ‘있으리라’, ‘없으리라’는 표현을 찬찬히 뜯어보면 그 말이 ‘있을 이라’, ‘없을 이라’에서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치 ‘젊은 이’나 ‘젊은 것’이라는 말이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대상은 같은 것이나 마찬가지로 ‘있을 것’, ‘없을 것’이나 ‘있을 이’, ‘없을 이’도 어감은 다르지만 가리키는 것은 똑같습니다. 이 문장들에서 기본 형식은 꼭 같이 ‘ㄱ은 ㄴ이다.’입니다. 제 생각에는 그렇습니다. 필요하다면 그렇게 말을 바꾸어도 상관없겠지요.”

뒤이어 저는 서둘러 나머지 문장들을 살펴보았습니다. 메마른 문장 분석은 저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지겨울 뿐만 아니라 이 문장 분석은 학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보조 자료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길게 늘어놓을 필요가 없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살펴볼 문장들은 아직 없는 것의 내부 관계입니다.

ㄷ-1 ‘있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말은 동어 반복으로 읽힐 수도 있지만 ‘있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리가 없습니다.

ㄷ-2 ‘있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남을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말로도 해석할 수 있고 ‘있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ㄷ-3 ‘없을 것이 있을 것이다.’라는 문장은 ‘빠질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고 ‘없어야 할 것이 있으리라 예상한다, 추측한다.’는 뜻도 있지요.

ㄷ-4 ‘없을 것이 없을 것이다.’라는 말은 ‘앞으로 다 있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또 ‘없어야 할 것이 없으리라 예상한다, 기대한다, 추측한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이처럼 아직 없는 것, 아직 드러나지 않아서 무엇이라고, 어떻다고 규정할 수 없는 것 사이의 내부 관계, 다시 말해서 미래의 세계에는 예상과 기대와 추측뿐만 아니라 어떠해야 한다는 규범까지도 포함한 복잡한 판단들이 잠재해 있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러한 판단 형식의 메마른 분석은 큰 뜻이 없습니다. 판단과 사태가 늘 일치하지는 않으니까요. 긍정 판단(이다)에 부정 사태(아닌 일)가 대응할 수도 있고 부정 판단(아니다)에 긍정 사태(인 일)가 대응할 수도 있습니다. 또 동일성(저됨)을 드러내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실제로는 차별성(남됨)을 내포하기도 하고 차별성(남됨)을 부각시키는 듯이 보이는 문장이 동일성(저됨)을 드러내기도 하지요.

다만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이 모두 있음과 없음에 연관된 이른바 존재 판단인데, 여기에는 사실 판단도 있고, 가치 판단도 있고, 헤겔이 말하는 긍정(임)과 부정(아님), 칸트가 이야기하는 여러 판단 형식들이 빠짐없이 대응한다는 것만 눈여겨보면 되겠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까지 과거─과거, 과거─현재, 과거─미래, 현재─과거, 현재─현재, 현재─미래, 미래─과거, 미래─현재, 미래─미래라는 세 가닥으로 꼬인 세 개의 밧줄이 다시 하나로 꼬여 역동적으로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지속과 변화의 흐름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이고 있어서, 현재에서 과거로, 현재에서 미래로, 또 과거에서 현재로, 과거에서 미래로, 그뿐만 아니라 미래에서 과거로, 미래에서 현재로 넘나드는 통로로 안내되는 길목에 서 있음을 이 서른여섯 개의 판단 형식을 통해서 살펴보았던 셈입니다.”

제 말이 여기에 이르자 이번에는 노골적인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선생님, 저희가 선생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한편으로 이런 생각이 듭니다. 이 부질없는 현학이 과연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하는 회의가 일면서 이 존재론 강의와 주체 현실의 관계 고리가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이 들어요. 물론 앞으로 강의가 진행되면서 지금까지 엉클어진 생각의 가닥이 조금씩 잡혀 가겠지 하는 기대 때문에 이렇게 아직까지 듣고는 있습니다만.”

“그래요? 아마 내가 칠판에 적어 놓은 서른여섯 개의 판단과 그 판단들에 대한 틀에 박힌 설명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았겠지요. 그러나 이 판단들에 대한 면밀한 분석은 우리가 앞으로 다루게 될 의식에 주어진 것과 감각에 주어진 것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직관에 주어진 것까지도 올바로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길잡이가 되리라 여기고, 시간 나는 대로 들여다보기 바랍니다. 지금 당장 이 판단 형식들의 상호 관계를 전체로 이해하기는 어렵겠지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출처: http://simmye.tistory.com/131

우리가 지속과 변화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현상계의 법칙과 의식의 법칙을 문제삼는 것은 그러한 문제들이 모두 살기 좋은 세상 만들기와 잇닿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여러분들에게 익숙한 개념의 틀 안에서 이 문제들이 어떻게 구체 상황들과 연관을 맺는지 힘이 닿는 대로 밝혀 나가도록 합시다.”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칠판에 적힌 판단 형식들 가운데서 미래가 주어의 자리에 있는 세 계열의 문장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지웠습니다. 칠판에 남아 있는 문장들을 다시 눈여겨보시지요. 눈여겨보는 순서는 관심에 따라 다르겠지만 저는 미래─현재, 미래─미래, 미래─과거 차례로 이야기를 풀어 나가겠습니다. 문장 앞에 있는 표시 기호는 일부러 지웠습니다. 여기에서는 그 기호들이 도리어 방해가 되리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미래─현재
있을 것이 있다.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
없을 것이 없다.

“자, 이 문장들을 다시 한 번 눈여겨보기로 할까요? 꽤 오래 전에 이 강의를 시작하면서 우리는 어떨 때 좋다고 하고, 어떨 때 나쁘다고 이야기하는지에 대해서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좋음의 형상을 모든 형상들 가운데 가장 윗자리에 둔 플라톤의 형상 이론을 구태여 들먹이지 않더라도 모든 가치 판단은 맨 나중에 좋다, 나쁘다로 모아집니다. 따라서 플라톤의 말투를 따르자면 좋음의 형상(나쁨의 형상)을 바로 보는 눈이 필요한데, 나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것을 직관하는 눈이 열려 있지 않으니, 추상 공간의 마지막 계단에서 정의〔definition〕를 통해서 그 모습을 드러내도록 노력합시다. 앞 강의에서 나는 좋음과 나쁨을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좋음 :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음

나쁨 : 있을 것이 없고(거나) 없을 것이 있음

그리고 보기를 들어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좋은 사회냐 나쁜 사회냐를 판가름하려면 있을 것과 없을 것의 관점에서 현재 우리 사회에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느냐를 면밀히 살펴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우리 사회에 억압, 착취, 부정, 부패, 탐욕, 이기심, 분열, 전쟁의 공포, 국토의 분단……들이 있는데 이 현상들이 있을 것(있어야 할 것)이냐,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또 우리 사회에 자유, 평등, 평화, 우애, 협동, 관용, 정의, 공과 사의 분명한 구별……들이 없는데 이 현상들이 없을 것(없어야 할 것)이냐, 아니냐를 따질 필요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있을 것이 다 있고 없을 것이 하나도 없으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좋은 사회다, 있을 것이 하나도 없고 없을 것으로 가득 차 있다면 그 사회는 온전한 뜻에서 나쁜 사회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좋은 사회, 덜 좋은 사회로 등급이 매겨지고, 있을 것이 많이 없고, 없을 것이 많이 있으면, 그 정도에 따라 더 나쁜 사회, 덜 나쁜 사회로 평가된다.─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사회는 그대로 온전히 지속되어야 합니다. 어떤 변화도 마다하는 극단의 보수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있을 것이 많이 있고 없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지속에 더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지속이 주요 변수라면 변화는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다양한 편차가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생기겠지만 보수주의(이른바 우파)의 득세가 정당화됩니다. 그러나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사회는 전체가 변화해야 합니다. 어떤 기존 질서나 가치의 지속도 거부하는 극단의 진보주의가 이런 사회에서는 가장 바른 노선입니다.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사회는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변화에 더 힘써야 합니다.(변화가 주요 변수가 되고 지속은 종속 변수가 됩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있고 없는 정도에 따라 다양한 편차가 나타나겠지만 진보주의(이른바 좌파)의 득세가 당연시됩니다.

우리 사회가 좋은 사회가 되기 위해서 있을 것이 무엇이고, 없을 것이 무엇이냐, 그것이 실제로 있느냐, 없느냐, 있으면 얼마나 있고, 없으면 얼마나 없느냐를 꼼꼼히 살피지 않고 보수주의가 좋으니 진보주의가 좋으니, 수구니, 개량이니, 혁신이니, 혁명이니 하고 말로만 내세우는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지요.”

제가 잠시 말을 멈추자 그 틈을 타고 학생 하나가 저에게 이렇게 묻습디다.

“선생님 말씀은 책상머리에서 듣고 있으면 그럴싸한데요. 그렇지만 우리 역사를 살펴보면 분명히 없을 것이 많이 있고, 있을 것이 많이 없는 그런 사회가 줄곧 변화 없이 지속되어 온 측면이 두드러지거든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지요?”
제 이야기의 흐름이 또 한 차례 끊긴다고 느꼈지만 그냥 얼버무리고 넘어갈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이렇게 대답하고 말았습니다.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보수주의자들이 쓴 안경에 비치는 현실은 늘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좋은 세상입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요. 더러 ‘있을 것이 없다.’ ‘없을 것이 있다.’는 현실 상황이 그 안경을 통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지만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손을 대면 ‘긁어 부스럼’이라는 두려움이 보수주의자들의 의식에 완강하게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변화되면 더 나빠진다는 거지요. 보수주의의 기본 성격인 현실 긍정은 보수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인 기득권과 연관해서 설명할 수도 있지만 이런 설명만으로는 보수주의의 특징이 모두 해명되지 않습니다.

보수주의는 지속을 고집하는데, 지속은 안정과 동의어입니다. 무엇이든지(비록 그것이 나쁜 관습, 나쁜 제도, 나쁜 체제라 할지라도) 오래 지속되면 안정이 이루어집니다. 안정 상태에서는 긴장의 이완이 옵니다. 긴장은 힘의 소모를 가져옵니다. 생명체의 경우에는 그것은 생명력의 낭비로 나타납니다. 판판한 길, 잘 닦인 길을 걸을 때 우리는 우리의 발걸음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의식중에 일정한 보폭으로 발걸음을 옮깁니다. 습관이지요, 습관이 형성되면 우리의 걸음걸이는 자동화합니다. 자동화는 우리가 생체 에너지(생명력)를 최소로 소모하면서 걷는 방식입니다. 자동화, 긴장의 이완은 행동이나 기능의 반복을 가능하게 하고, 이 반복에서 행동 양식이나 기능의 동일화가 확보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동일한 형상, 동일한 의식으로 굳어집니다.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나요? 자연 상태에서 나무나 풀은 왜 종마다, 또 개체마다 같은 잎, 같은 꽃을 반복해서 피워 낼까? 한 그루의 나무, 이를테면 떡갈나무 가지에 온갖 형태의 잎이 다 달려 있는 것이 떡갈나무가 살아가는 데 더 좋지 않을까?

떡갈나무가 꼭 같은 형태의 잎을 자동 기계처럼 찍어 내는 데는 떡갈나무 나름의 삶의 경제가 작용합니다. 나중에 더 자세히 이야기할 자리가 있겠지만 미리 귀띔해 두는 것도 나쁠 것 같지는 않군요. 만일에 떡갈나무가 같은 잎만 지속?반복해서 찍어 내지 않고 순간순간 다른 형태의 잎을 피워 낸다고 칩시다.(여기에서 내가 같은이라는 말과 다른이라는 말을 강조한 데에는 뜻이 있습니다.) 이것은 요즈음 우리 경제계에서 유행하는 이른바 ‘다품종 소량화 정책’에 해당할 텐데, 왜 이런 일이 한 개체나 한 종의 단위에서 생존 전략으로 채택되지 않느냐 하는 데는 큰 까닭이 있습니다. 그 까닭은 나중에 우리가 흔히 양, 질, 척도라고 부르는 같음과 다름, 저됨(동일성)과 남됨(차별성), 이어짐과 끊어짐, 크기와 모습 들을 포괄해서 다룰 때 밝히기로 하고 여기에서는 보수성이 모든 생명체가 살아남기 위해 생명력을 배분하는 방식과 뗄 수 없는 관계가 있는 중요한 특질이라는 것만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인간의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보수성도 정치 경제학의 틀 속에서 간단히 해명될 특질이 아니고 물질과 생명의 관계, 생명체 상호 관계까지 포함한 더 큰 틀 속에서만 제대로 밝혀질 수 있습니다.”

“나는 왜 엄친아가 아닌가” 수치심 키우다가는 결국…[철학자의 서재]

?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자책 속에서 배회하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의욕을 갖고 링에 올랐지만 연타를 얻어맞고 주먹을 날려보지만 매 번 헛방만 날리는 복싱 선수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서점으로 향한다. 볼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둘러본다. 늘 보는 전공서적들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으므로. 대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둘러본다. 한참을 지나도 별 소득이 없어 그만 나가서 한의원에서 침이나 맞자고 생각하던 그 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내가 내 편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과 함께 시선은 그 책에 멈추었고 어느새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자신을 책망하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지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예상해본다. 나의 이익, 혹은 의지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례들을 다룬 것일까? 과거에 한 행동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내용일까? 아니면 분열적 자아정체성을 말한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좋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미덕이고 그것이 자기발전의 덕목인 줄 알던 내게 냉정한 자아비판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해도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TED 강연은 조회수가 900만을 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도 심리 분야 최장기 베스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힐링 코드로도 읽히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아 TED 담당자로부터 ‘스토리텔러’로 소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매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연구자로서 수년간 수백 명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 얻은 결과를 애정을 가지고 풀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학술적 노력도 많이 기울여진 책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강연 주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수치심’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이 책의 주제이자 브레네 브라운의 평생 연구 주제다. 저자는 이 ‘수치심’을 나의 가장 큰 적이 나 자신이 되는 이유로 지목한다. 따라서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관련 사례 제시와 분석을 통해 밝히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분석을 바탕으로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수치심’은 연구자인 저자만 흥미를 갖는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이 심해 치료사나 상담사를 찾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 서로 관계 맺고 사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모두의 이야기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다.
 
 

2. 수치심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36쪽) 이 정의에서 눈에 띄는 말은 ‘소속감’, ‘가치’다. 수치심은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일시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과 연결되며 이 고립감 역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면서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더 나아가 항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수치심은 나의 ‘존재’ 자체와도 연결되는 감정, 스스로의 결점 때문에 나의 ‘존재’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치심은 그 결점 때문에 존재의 가치조차 깎아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죄책감과 구분한다. 죄책감은 ‘행동’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수치심은 ‘존재’로 확대된다. 이를 테면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이고, ‘나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야, 난 바보 같고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43쪽)

잠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책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바보’, ‘머저리’, ‘못된 놈’ 따위의 비하적인 말을 쏟아 내며 머리를 쥐어박거나 스스로를 때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행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기반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념 속에 이끌려 행위 자체를 넘어서 나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반성 없는 삶은 잘못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고 더 큰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행위에 대한 반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해버리는 것도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어떤 잘못을 했다고 수치심까지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은 내 마음 속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교육을 목적으로 혹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선의를 내세우지만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은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학습 열등생이든 실적이 떨어지는 회사원이든 오랫동안 가사만 돌보던 전업주부든 누구에게도 성적이나 실적을 향상하라고 사회로 나아가 자아를 찾으라고 한답시고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는 발언을 한다면 오히려 결과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위축되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 고통을 발산할 수 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개개인의 내면이나 개별적인 상호접촉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25쪽)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어떤 문화일까? 우리는 ‘사람이란 자고로 ~~~해야 한다’, ‘~~~이 좋은 것이다’라는 유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은연 중 이런 말들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된다. 문제는 그 잣대가 과도하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 언제 어디서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 일과 가사 모두를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언제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심성도 착한 모범생 등등. 이런 것들은 상업적 욕망에 의해 가공되었거나 주변의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이미지들이다. 수치심은 내가 이런 기준에 미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할 때 생겨난다. 완벽해 보이는 혹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힘겨울 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면 수치심은 점점 자라난다.
 
 

3. 공감과 유대로 수치심을 떨쳐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수치심의 정의 중 한 단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소속감’이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내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은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에도 해를 주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비만, 중독, 약물남용 등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타인에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고립감을 동반한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좋지 않은 감정을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왜 공연히 폭식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그르치며 타인을 해치기까지 할까?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디에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되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상태, 나의 마음에 대한 타인과의 공감은 그래서 당연히 수치심의 해결책이 된다. 공감을 위해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듣는 사람의 자비가 중요하다. 용기 있게 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사람은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야를 더 넓혀서 본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단절과 고립감도 해소할 수 있다. 듣는 이는 ‘나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공감을 해야 한다. 자칫, ‘비평자’의 태도로 상황을 해설하거나 평가하려 들거나 심지어 심한 말로 자존감을 허무는 언사를 한다면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말한 사람은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단절과 고립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이 회고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너 착한 놈이다’라는 말만 들었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선생님은 돈을 안 가져왔다고 욕설을 하며 ‘빨리 꺼지라’ 했고 그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변명이 섞여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학생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선생님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악마’를 자라게 했고 결국 그 학생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범죄자가 되었다. 이 경우는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이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유명 프로파일러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어서도 그것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차분히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내서 감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경험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두었다가 만약 수치심이 유발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졌는데 저 혼자만 이겼다고 웃는 아큐의 자기기만적 ‘정신승리’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도 주변으로부터 벽을 쌓는 길이다. 용기 있기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해서 유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완벽주의도 나를 수치심에 빠뜨리는 덫이다. 앞에서 말한 모델, 슈퍼맨, 슈퍼우먼, 다재다능한 모범생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모습이다. 당연히 누구나 될 수 없다. 누구나 결핍이 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성장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결핍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강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271쪽) 실제로 저자는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도 강점을 찾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한 태도, 완벽을 강요하는 풍토 속에서 수치심을 방지하고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되어 수치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4. 나를 괴롭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라

이 책의 논조는 균형적이고 포괄적이다. 우선 연구서이면서 교양서이고 심리서이면서 사회문화서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별하면서 과도한 문제의식에 빠지는 원인을 지적해서 과한 자기반성이 자기붕괴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찾아낸다. 개별적인 대화나 마음 다잡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유대감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며 누구나 소속감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출신, 종교, 국적, 혈연 등 집단정체성에 기대어 형성되는 ‘전형화’는 개인에게 덧씌운다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지적한다. 그 대신 공감을 매개로 공동의 노력과 개인의 심리회복 노력을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나도 스스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완벽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문화비평적 시야에서 지적하는 데 그치거나 저항하자고 선동하는 대신 완벽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대화하고 매체를 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능숙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미덕이라고만 간주되었던 엄격한 자아비판, 의도가 좋다는 핑계로 묵인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한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과 훈육 등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익하지는 않다. 붕괴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는 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서투르고, 모두를 해치는 삶의 방식들도 방치되어 있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조차 내 편이 아니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프롤레타리아트[노동이야기]- ⑧

이 재 원(한철연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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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사람을 다 책임질 수 있단 말인가?

평택 항 수입물류 공장 공사현장이다. 바닷바람은 육지보다 체감기온 5-6도정도 낮다. 산소가 많은 바닷가 공기 덕분에 일해도 힘든 줄 모르겠다. 목수 2인 1조로 일해서 더욱 좋다.

며칠 간 J와 손을 맞춰 일했다. 일도 잘 할 뿐 사람이 젊잖다. 고향도 같다. 목수 두 사람이 모이면 그중에 실력이 나은 사람이 있다. 힘으로나 실력으로나 J가 나보다 났다. 따라서 일머리를 J가 이끌었다. 나는 육체 뿐 아니라 머리까지 편했다.

일 끝난 후 저녁식사를 함께 하는 재미도 쏠쏠했다. 혼자서는 주문 받지 않는 물 회(회 국수)가 가장 럭셔리한 메뉴이고, 국수나 국밥 등을 함께 먹었다. 그의 개인사는 듣지 않아도 알 듯 했다.

눈이 가는 곳에 마음이 있다. 처음 J와 손을 맞춰 지하에서 바라시(해체)하는데, 그가 담배를 피우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담배를 내밀자, 그는 3일간 담배를 못 피웠다고 했다. 그는 한 달을 방구석에서 헤매다가 돈이 떨어지자 무작정 H인력을 찾아왔다고 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인데, 그는 스크린 경마장을 즐긴다. ‘비가와도 눈이 와도 말은 달린다’는 명언을 했다. 얼마를 넣고 가도 한 순간에 없어진다고 했다. 지름 신이 임하는 순간 뭉칫돈을 거는 탓이다.

바라시를 끝내고 가와바리, 즉 공중에 걸쳐놓은 속고 위에 폼을 붙이는 작업도 둘이 함께 했다. 나는 조기, 폼에 적절한 치수를 재어 못 두 개를 밖아 J에게 건네준다. J는 내가 밖아 놓은 못 두 개를 지지 삼아 패널을 속고에 고정되도록 못을 박았다. 우리는 혼자 하는 사람들보다 두 배 이상 작업을 했다. J는 계산도 빠르고, 작업도 차분하게 했다.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함께 작업하니까, 작업 지시하는 반장이 아예 우리 둘을 항상 함께 작업에 배치했다.

ⓒ 이재원

J와 손 맞추어 일 하던 중, 나는 평택 항 현장의 최고참, 돼지띠 노인에게 간택 당했다. 그는 어제까지 외국인과 손을 맞춰 일했는데, 두 사람은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의사소통이 되지 않기 때문이요, 외국인이 노인에게 불평하기 때문이었다. 노인이 다리를 보여주는데, 퉁퉁 부어있었다. 노인은 나에게 재료는 물론 소모품도 모두 갖다 달라고 했다. 몇 일간 노인과 함께 일하는 동안, 내 별명은 졸지에 <데모도>가 되었다. 노인의 주문에 따라 움직이는 내 편을 들어준 별명이다. 바람이 몹시 부는 날, 벽체를 보강하는 일종의 보, 통칭 ‘눈썹’을 ‘되 나우시’, 즉 부적격 작업을 고치는 일을 하게 되었다. 노인은 아래에 있고, 나는 보위로 올라갔다. 폼을 뜯어내는데 벽체가 바람에 몹시 흔들렸다. 기분 나쁜 것을 가까스로 참으며 간신히 뜯어내고, 다시 정확한 치수대로 눈썹을 이어냈다.

점심 직전에 비가 내린 날이다. 한 30분을 비 맞으면서 일했다. 땀에 젓은 옷이 비에 젖어 무척 짜증이 났다. 작업을 중단하고 용역회사에 돌아와 돈을 받은 J가 총총히 사라졌다. 그는 좀 전에 넌지시 내게 물었었다.

“이제부터는 무엇을?…”

나는, ‘상명대 도서관에…’라고 응답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요일이다. 그의 발걸음으로 봐서 늦은 경마장 행이라고 짐작했다.

몇 년 전에 만난 노동자는 <바다이야기>에 빠져 있었다. 한 달에 두어 번, 돈을 모아서 도박장에 간다. 어느 경우에는 차비도 없어, 주변 사람에게 ‘차비 좀 달라’하면 거절당하기 일쑤였다.

평택 항 일이 없는 날, J와 학교 신축 공사 현장에 팔려나갔다. 학교 건축은 80년대 말, 90년대 초 건축회사 수석 목수로서 내 전문 분야였다. 따라서 현장이 고향 같았다. 예전 식으로 슬래브 작업을 했다. 횡 800센티, 종 360 센티 슬래브 여섯 칸 작업이다. 하리, 기둥 형틀을 세웠고 하스라, 즉 보 형틀을 올려놓은 상태였다.

우선 J와 시다 목을 준비했다. 슬래브 종대 치수보다 40-60 센티 정도 짧게 오비끼를 자른 후, 여기에 삿보도를 끼워 받치기 위해 3인치 항 대못을 네 개 박아둔다.

슬래브 하스라 위에서 다른 두 사람이 각목을 횡으로 길게 매달아, 시다 목을 받을 준비를 한다. 준비가 되자, J는 시다 목을 슬래브 위 사람에게 올려주고, 나와 다른 한 사람이 삿보도를 받쳤다. 구름 속에 있던 햇빛이 드러나자, 갑자기 숨이 ‘컥’ 막히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다음 시다 위에 네다 재료를 배열한다. 두께 5센티 각 파이프를 30센티 간격으로 깔고, 이음매 부위에 각재를 깔아, 시다와 못으로 고정시킨다. 그리고 그 위에 수지 알판이나 베니야 알판을 못으로 고정시킨다.

알판 슬래브 작업은 십 몇 년 만에 처음이다. 오직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슬래브 깔아갈 때는 물결 흐르듯이 작업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한 쪽부터 한 사람이 한 칸씩 깔아 가면, 그 다음 사람이 하리 통 치수를 맞추면서 다음 칸 슬래브 작업을 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 작업을 도와주다가, 간신히 작업 방식을 파악하고는 J의 조언을 참고로 맨 마지막 슬라브를 깔아나갔다.

J는 하루 쉬고 경마장에 가겠단다. 도박, 광신과 세뇌를 클리닉 하는 방식에 대해 ‘줏어들은(口耳之學)’ 적이 있다. 나는 J가 경마장 간다고 한 날 새벽에 메시지를 했다. “경마장 가지 말고 강릉 가서 물 회나 먹고 오자.” 잠시 후 그가 전화로, ‘오늘은 경마장, 강릉은 다음에 가자’고 했다. 나는 도서관에 앉아 있다가, 시장으로 갔다. 오리 한 마리, 낙지 두 마리, 전복 세 마리를 샀다. J가 TV에서 보았다며, 이것들을 함께 끓인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는 말을 기억했던 것이다. 다시 전화했다. J가 당장 오겠다고 했다.

그는 ‘난생 처음 이토록 맛있는 음식을 먹어 본다’고 했다. 옥에 티는, 그가 오리 뼈를 덕수가 십여 년 전 수학여행에서 사다 준 은도금 재떨이에 버렸다는 것이다. 식사 후 그는 총총히 경마장으로 갔다. 나는 혼잣말을 했다. ‘너(나)여, 모든 사람을 책임질 수 있는가?’

대학원 시절, 유학 간 약혼녀로부터 파혼을 선고받은 친구가 빠친꼬에 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를 따라 빠친꼬장에 가 보았다. 그는 크게 돈 욕심을 내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상처를 잊으려 몸부림치는 것 같았다.
노동자들이 도박에 빠지는 것은 자기 고뇌에 대한 응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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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성(性愛)과 경제, 그리고 두목노동자

인간 내면에 대해서는 항상 더러운 이야기만 하게 된다. 전에 가본 적이 있는 H인력에서 멧세지가 왔다. ‘목수 일 많습니다. 일 나오세요.’ H인력은 하루에 100명 정도의 목수를 현장에 보내고 있었다. 나는 평택 항에 고정으로 일 나가기 전까지 땜빵용, 그러니까 고정으로 한 현장에서 일하던 목수들이 안 나올 때 그 현장에 투입되는 인력으로, 이곳저곳 현장을 돌아다녔다. 원룸 현장에서 외국인 Y와 함께 일했다. 나는 그를 <따거>라 불렀다. 키가 크고 힘이 좋은 이를 지칭하기 좋은 이름 아닌가. 그가 서투른 한국 말로 내게, ‘내일 비 와. 애인(자기에게 소개시켜 줄 여성) 있어?’라고 말했다. 나는 ‘없어’라고 말했다. 그가 재차, ‘애인 줘’라고 말했다.

이튿날 비가 왔다. Y와 점심때 국밥집에서 만났다. 그는 머리고기와 소주 두 병을 해 치웠다. 잘 통하지 않는 대화로 애먹고 있을 때, 한국말을 잘 하는 Y의 친구가 왔다. 친구로부터 시원하게 Y의 심중을 들을 수 있었다. Y는 곧 고국으로 돌아갈 참이다. 고민이 있으니, 방금 한국에 온 친구 때문이다. 친구는 목수 일은 되지만, 한국말을 못해서 어디현장에서 일을 시켜줄 지 의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에게 자기 친구를 데리고 일 다녀 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서는 자신 있게 대답을 못 했다.

두 사람이 모국어로 한 참을 이야기했다. 나는 무료해, 가방에서 책을 꺼내 읽었다. 이것이 실례되지 않을 듯 했다. 그만큼 그들은 할 이야기가 많았다.

그들이 나가자고 했다. 어슬렁거리며 따라가자, 콜라텍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J의 친구가 말했다.

“내내 일 하면서 고생하다가, 이런 곳에 와서 기분을 풀지요. 언니들 바글바글 해요.”

플로어에는 할머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녀들의 옷차림은 전문 댄서와 같았다.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적나라하다. 눈치를 보아 하니, 파고다 할머니들이 많은 듯 했다. 노동할 수 없는 여성들은 경제력 있는 남성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파고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일용 노동자조차도 아주 높은 계급이다.

나는 다시 책을 꺼내 읽었다. Y의 친구가 ‘책은 집에 가서 읽어요, 여기에서는 그냥 놀아요’라고 했다. 다시 둘러보니, 외국어를 하는 젊은 여성들도 많았다.

술 취한 Y가 집요한 내면을 드러내었다. 말끝마다 새끼손가락을 들어올리고, <애인>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아마도 hook-up body만 중요한 곳에서 ‘아름다운(젓가슴, 사랑, 육체)이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플로어의자에서 사람들이 끈적거리는 눈으로 다른 사람들의 뒤를 쫓았다.

60대의 O목수는 좋은 차를 몰고 다닌다. 우람한 몸에 성질도 장기(長氣)해서, 화내는 것을 본 적이 없는 호인이다. 그 역시 <땜빵>이라서 나는 그의 차를 타고 몇 군데 현장에 일하러 갔다. 그 역시 말끝마다 <여자친구>였다. 외국인 여자 친구와 아라비아 지역 까지 여행을 다녔다. 여자 친구는 몇 년간 출국 했다가, 이제 며칠 후면 한국에 들어온다고 했다.

하루 벌어 하루를 사는 노동자들에게 감정과 성,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는 답이 없다. ‘손 맞인 즉 땡기는 맛이 없어 유흥업소 여성은 사양’하고 자기만의 창녀를 갖기 위해, 입에 담기에도 꺼려지는 인간 종들이 <장자연>을 만드는 세계에서 경제 때문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빼았기는) 것이 현실이다. 더 얻은 사람이 있다면 빼앗기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다. 경제적 형편 대문에 사랑을 빼앗긴다는 것은 소설이 아니다. 이런 저런 사정, 특히 경제적 형편 때문에 남편을 버리고 돈 벌러 나왔다는 이야기는 항용 듣지 않는가. ‘생식 능력만 있는 이’(이것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미이다)가 성적 상대를 빼앗긴다는 것은 그에게 행복 추구권리, 사랑을 통한 감정 충족 까지도 박탈당한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황폐해질대로 황폐해진다.

노동자들은 반장에게 비 호감적이다. 단지 반장이 우리보다 돈을 더 많이 번다는 것에 대한 질투만은 아니다.

반장 급은 일을 시키고, 목수들이 일하는 것을 감시한다. 일반 목수들이 자주 쉬어야 하지만, 반장들은 한 달 내내 일 할 수 있다. 일당도 더 많이 받는다. 책임이 큰 만큼 돈 많이 버는 것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진리를 탐구하는 이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태도를 바꾼다면 그것은 <변절>이다. 그러나 반장이 진리를 탐구하는 사람도 아니니 그가 노동자 편이 아니라 사용자 편이라고 해서 변절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노동자들의 의도를 해석하자면, 반장들이 미운 이유는 ‘한 사람의 노예 상태를 다른 사람의 완전한 인간적 발전을 위한 수단으로서 정당화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평택 항 현장에는 반장이 두 사람이다. 월급 받는 총 반장은 모든 데마, 철근, 콘크리트, 형틀을 총괄한다. 목수 반장에게 작업지시를 하는 것도 총 반장이다. 그리고 일당 노동자 목수 반장이 있다. 반장들이 정확히 일하면 ‘되 나우시’는 없다.

지금도 항용 그렇지만, 옛날이라야 몇 십 년 전만 해도 거짓말처럼 돈 잘 버는 오야지들은 애인이 있었다. 대충 서너 사람이 기억난다. 잡철 오야지의 여성은 아기를 안고 현장에 함께 왔다. 현장에서 그녀가 하는 것은 아이를 어르는 일이다. 어느 목수 오야지는 젊은 여성에게서 얻은 아이를 키우기 위해 은퇴할 나이가 훨씬 넘도록 일했다. 둘 이상의 여성을 거느린 미장 오야지는 오통으로 항상 허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애인인 여성들로부터 두목 노동자의 ‘카리스마에 반했다’는 이야기를 우회해서 듣곤 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어느 여성의 결정을 이끌어주는 남성다움에 반했다는 것인 즉, 그 여성이 일종의 매저키스트적이거나 자기 독립적(자기중심적이 아니라)이지 못한 여성들일 것이다. 그러한 결합이 바람직할 리 없다. 다만, 그 여성들이 경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다면, 그러니까 파고다 할머니들이 엄존하는 현실에서 타인에게 의탁할 수밖에 없는 여성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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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의 임금

목수들이 아주 흔히 화제를 삼는 것이 외국인 노동자와 내국인 인건비에 관한 것이다. 80년대부터 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O씨가 말했다.

“90년대만 해도 2000년 도에는 목수 품값이 일본이나 미국 수준이 되리라고 예상했다. 당시에는 젊은 사람들이 목수 일을 배우지 않았을 뿐 아니라, 점점 임금이 올라가는 추세였다. 그런데 갑자기 IMF터지고, 외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면서 품값이 오히려 떨어졌다. 여행 비자든 방문비자든 개의치 않고 현장에 와서 일하는 통에 완전히 망했다.”

87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나면서 건축노동자들의 품값이 오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공공연히, ‘노태우가 우리 형편을 좋게 해 주었다’고 말했다. 지금이야 5,1.6프로의 보수층이 있지만, 권력 지지 기반이 없던 당시로서는 정치가들이 기층노동자들에게 어느 정도 잘 해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자본가들은 노동자들보다 정보도 많고 똑똑하다. 중소기업 협회 등에서는 기업하기 좋은 나라, 인건비가 싼 나라를 만들려고 불철주야 노력한다.

한 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인건비가 비싸지면 값 싼 노동력을 외국에서 끌어들여온 역사는 길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는 것은 공허한 메아리가 아니라 당대의 노동자들이 처한 절실한 문제였다. 노동 시간이 짧아지고 인건비가 오를 만하면 자본가들이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을 끌어들이는 통에 노동자들이 국제적으로 단결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나라의 값 싼 노동력이 만들어 내는 것은 생 떽쥐베리가 분노하듯이 <살해된 모차르트>들, 짐짝처럼 실려 있는 폴란드 노동자들이 탄 기차의 교육 받지 못하는 어린이들만이 아니다. 자국과 타국 노동자들의 빈곤의 공평화도 만들어낸다.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치유시학]

매듭을 풀어나가는 자기실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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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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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실현의 길?

자신의 비밀을 평생 동안 혼자 간직하고 있다가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 뒤에는 온전한 자유를 향한 염원이 있다. 온전한 자유, 진정한 자유는 세계와 교류하여 나와 세계가 서로 영향을 줄 때 실현가능한 것이다. 삶의 빛은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난 속에서 더욱 빛나기 때문이다.

할머니가 7개월 동안의 만남에서 보여준 모습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개인의 고유성과 존엄성을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아왔기에 세상을 원망하기도 하고 지금은 없는 기억 속의 이웃들에게 분노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며 지난 삶을 정리하는 모습은 한 줄기 빛과 같았다.

그 지난한 삶에 맺혔던 매듭을 말로써 하나씩 풀어나가는 모습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내 할머니와 어머니의 다림질 모습이 떠오른다. 우물에서 퍼 올린 물로 긴 광목천을 발로 밟아 빨아서 마당을 가로지른 빨랫줄에 널어놓으면 마치 햇살이 내려와 하얗게 부서지는 것처럼 보였다. 바람에 펄럭이던 광목천 사이를 뛰어노는 사이 광목천은 바싹 마르고, 어머니는 그 천을 하나씩 걷어서 풀을 먹였다.

커다란 대야에 마른 광목천을 넣고 어머니가 풀주머니를 주물럭거리면 하얀 풀물들이 나와 광목천을 촉촉하게 적셨다. 광목천을 손으로 주물러 풀물이 골고루 천에 스며들면 다시 빨랫줄에 널어 말렸다. 풀을 먹인 광목천은 햇빛 아래에서 더 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빳빳하게 마른 천을 걷어 들인 어머니는 마루에 앉아서 입으로 물을 뿜어 천을 다시 촉촉하게 만들었다. 어머니가 물을 뿜는 소리에 비례해서 어머니의 콧등에는 땀이 맺혔다.

촉촉하게 젖은 광목을 직사각형으로 개켜 보자기로 싸서 발로 밟았다. 어머니의 발 아래에서 광목은 물기가 골고루 퍼지면서 동시에 구김살도 펴지고 있었다. 어느 정도 밟기가 끝나면, 광목은 다듬잇돌 위에서 다듬이 방망이에 의해 부드럽게 다듬어지고 있었다. 어머니는 양손에 방망이를 들고 일정한 속도로 다듬잇돌 위에 있는 광목을 두드렸다. 어머니의 다듬이 소리는 그 어떤 음악소리보다 어린 내 가슴 속을 휘젓고 다녔다. 마당의 평상 끝에 앉아 다듬이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어머니가 광목천과 하나가 되는 착각에 빠져들곤 했다.

다듬이질이 끝나면 할머니와 어머니는 마주 앉아 광목천의 끝자락을 잡고 팽팽하게 밀고당기다가 다리미질을 시작했다. 동그란 쇠 다리미에는 타고 남은 숯이 들어 있었고, 광목천은 다리미가 왔다갔다하는 사이에 잔주름 하나 없이 평평해지고 있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서 사악거리는 다리미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곤 했다.

할머니가 자신의 삶과 가슴에 맺힌 한을 말로 풀어나가는 그 모습이 마치 누런 광목을 하얀 천으로 만들어가는 어머니의 손길 같았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원망도 미움도 안타까움도 사랑의 아픔도 하나씩 벗어던지는 모습이 지난한 시간을 거쳐 하얗게 탈색되어 햇살 아래 빛나던 광목천과 같았다. 그것은 자기 의지에 의해 자기 본연으로 돌아가는 것, 곧 자기실현의 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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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이 크면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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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났을 때,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정확하게 드러내지 못했다. 떠나보낸 아들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 마쓰시타에 대한 회한, 먼저 가신 할아버지에 대한 미안함, 함께 살지 못하는 딸에 대한 아쉬움 등이 서로 뒤엉켜 마치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한은 할머니를 무겁게 누르고 있었다.

살아가면서 하나씩 보태지는 고통은 매듭과 같다. 이 매듭은 삶을 얽매는 질곡이자 현실을 어두움 속으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나의 고통에 함몰되면 내 고통이 너무 크게 느껴지기 때문에 자신의 삶은 보이지 않는다. 이 세상에 오로지 나 홀로 내던져진 것 같은 막막함만 남는다.

할머니의 초기 시를 보면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시 [내 인생길] 중)”고 고백한다. “약한 자는 아무리 말을 하여도/ 소귀에 경 읽기더라.(시 [내 인생길] 중)”는 표현으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울분을 토해 놓았다. 그러나 시를 읊고 그 시를 내 목소리를 통해 다시 들으며, 시로 못다한 이야기들은 말로 하면서 맺혀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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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시 왈가닥한 성격에
참지 못해 그 사이로 뛰어들어
발로 얼음을 타며 돌아다니다가
결국 엉덩이로 얼음에
방아를 찧고 말았네.
내 죽는다고 뒹구르니
길가는 나그네 아저씨가 두 손을 잡아
일으켜 주셨네
너무도 감사하여 맘으로 답례하였네.
– 시 [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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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wallsonline.org/beautiful-winter-river/

할머니는 구술한 마지막 시인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세계와 교류하고 소통하는 표현을 했다. 할머니는 이 시에서 “많은 인파들이 아이 어른 분별없이/ 팽대를 치며 썰매를 타고/ 옆에서는 스키를 타며/ 즐겁게 놀고 있는” 사이에 뛰어들어 얼음을 지치며 놀다가 넘어졌는데, 알지 못하는 나그네 아저씨가 도움을 주어서 고마웠다고 회상했다.

“임진강에는 언제 가보셨어요?” 나의 질문에 할머니는 “어데, 가 본적 없다. 학교 다닐 때 선생님에게 들었다. 꼭 한번은 가보고 싶대. 그래서 한번 생각해봤다.”라며 재미있다는 표정을 지으며 큰 소리로 웃었다. “김선생, 어떻노? 얼음이 얼모 팽이도 돌리고 얼음썰매도 탄다. 임진강은 저 우에 있으니 얼음이 더 얼었을 끼다.” 할머니는 눈을 지긋이 감고 혼자만의 생각에 젖어 들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편안해 보여서 말없이 옆에 앉아 있었다. 자신에게 일어났던 사실만 시로 읊거나 말을 하다가 상상으로 시를 읊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시 속에 처음으로 많은 사람들(“많은 인파”)이 등장하고, 스스로 그 인파 속으로 뛰어 들어가 함께 놀았다는 것은 또 어떤 의미일까? 우물물조차 마시지 못하게 하는 이웃사람들에 대한 원망에서 벗어나 넘어진 자신에게 손을 내밀어준 나그네에게 마음으로 답례를 하는 것은 어떤 변화일까?

어쩌면 고달픈 현실의 삶에서 희망을 찾고 꿈을 가지게 된 것은 아닐까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자 나는 할머니의 팔을 잡았다. “으응?”하며 나를 보는 할머니의 눈빛은 잔잔했다. 얼굴에는 밝은 빛이 서려 있었다. 며칠 계속된 감기로 머리가 아프다는 말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표정은 어린아이처럼 들떠 있었다. 할머니는 어두웠던 과거에서 빛을 찾아내어 어둠을 밝음으로 바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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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이 있어 기쁨은 빛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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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가 시와 이야기를 통하여 찾아낸 빛은 어린 시절 책에서 읽고 동경했던 임진강에 대한 기억이었다. 한 번도 가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리고 갈 수 없었기에 마음 깊은 곳에 꽁꽁 묶어놓았던 임진강으로 떠나서 해보고 싶었던 얼음지치기를 하며 노는 자신을 상상한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그 어떤 자유가 찾아 온 것은 아닐까.

온전한 자유란 혼자만의 세계를 떠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행해지는 실천이다. 비록 상상의 세계이지만, 많은 인파들 사이에 스스로 뛰어 들어가 놀다가 넘어지고, 누군가의 손을 잡고 일어서는 그 행위야말로 할머니가 원하던 자유였다. 할머니와는 물 한 모금도 나누어 마시지 않으려 하던 과거의 이웃은 넘어진 자기에게 손을 내밀어 주는 이웃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는 늘 과거의 낡은 생각과 결별해야 하는 의식이 따른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분노는 어리석음을 낳고, 어리석음은 눈과 귀를 가리고 미혹으로 우리를 유혹한다. 이 미혹으로부터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자각이 있어야 하는데, 자각은 경험으로부터 시작한다. 지나온 삶을 때로는 시로 나타내고 때로는 말을 하는 경험으로부터 할머니의 자각은 시작되었던 것이다. 자각은 과거의 삶을 버리고 새로운 삶으로 할머니를 이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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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갑자기 아무런 소식도 없이
회오리바람이 불어
온 스키장은 아수라장이 되어
모자와 목수건이 날아가며
그 나그네 아저씨의 모자가
하늘로 뱅뱅 돌더니
임진강 흐르는 강가에 떨어져서
돌고 있는데 철새 한 마리가
날개 죽지가 부러져서
퍼득퍼득 뛰며
그 모자 속으로 들어가서
갑자기 사공이 되어 노를 젓고
끝이 없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네.
이 일을 보고 있는 나그네 아저씨는
고요한 말로
‘허, 참, 이상하다’ 하더니
뒤돌아서네.
나는 곁에서 눈이 땅에 흐리도록
그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신기하다고 느꼈네.
– 시[임진강에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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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손을 잡아 일으켜주었던 나그네의 모자는 날개 죽지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새의 피난처가 되어 어딘가로 흘러간다. 그것을 눈이 흐려질 정도로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신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상처 입은 새와 함께 할머니의 지난 삶은 어딘가로 흘러가고, 이제 할머니는 사람 사이에서 신나게 놀기도 하고, 타인의 손을 잡고 일어서기도 하는 활달한 소녀로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강물은 스스로 흘러 바다로 간다. 나와 너, 자연과 인간이 서로 어울려 하나가 될 때, 우리의 삶도 강물처럼 가야할 곳으로 간다. 그러나 삶의 질곡은 우리를 세계와 단절시키고, 우리는 마음의 문을 닫고 어둠 깊숙한 곳으로 자신을 유폐시킨다. 유폐의 길고 어두운 시간을 지나 할머니는 닫혔던 삶의 문을 열고 새로운 희망의 공간으로 발을 떼기 시작했다.

내 고통의 실체를 그대로 볼 수 있을 때 진정한 삶은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나와 내 옆에 있는 사람을 함께 볼 수 있다. 할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날개 죽지가 부러진 철새 한 마리’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그 철새에게 모자를 양보한 나그네도 함께 놀던 많은 인파도 사라지고 할머니는 혼자서 멀리 사라져가는 철새를 보고 있다.

60년의 시간을 지나, 지금 여기에 있는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60년의 시간 동안 자신을 할퀴고 간 수많은 고통의 순간들을 할머니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병에 걸린 자신을 스스로 용서할 수 없었던 지나간 시간, 병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들, 어머니, 마쓰시타에 대한 기억도 철새 한 마리와 함께 강물에 흘려보낼 순간이 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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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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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시를 읊은 후에도 우리들의 만남은 한 달 정도 지속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봄이 오고 있는데도 그날은 몹시 추웠다. 방바닥은 냉기만 면하고 있었고, 전기장판 위에서 우리는 이불을 무릎에 덮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담담하게 앞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인자 오지 마라.” “내 할 말 다 했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 짧게 이어지는 말에 나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스스로 드러낸 할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없었다.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면서 나에게 한 말이 생각났다. “전에는 밤에 누우면, 무신 생각이 그리 많은지 잠이 안 온다. 잠은 안 오고 생각은 자꾸 나고. 눈물은 왜 그리 나오던지. 그런데 요새는 시 생각한다고 다른 생각이 안 난다. 뭐라고 할꼬. 우찌하면 잘 표현이 될꼬. 하룻밤에도 수십 번은 시를 썼다고 허물었다가 안 하나. 어떤 때는 머리가 아파서 에이 하지 말자 하다가도 또 생각하는 기라. 그라다보모 머리도 안 아프고 잠이 든다.”

“보래이, 김선생. 내 살아온 이런 이야기도 시가 되나? 참 우습제. 내 다시는 말 못할 줄 알았다. 하모, 누한테 말하겄노. 시를 생각하다보모 내가 나한테 말을 하는 기라. 그때는 그랬다. 아이다. 이랬다. 혼자 그라다보모 날이 샌다. 허허허. 참 우습제?” 그렇게 마음으로 쓰고 기억한 시를 구술하고 내가 받아 적은 후 다시 읽고 있노라면, 더러는 “아이가, 그기 아이다.” 하며 수정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시로 나타내기 위하여 온 정신을 다하여 집중하는 동안, 할머니는 자신을 얽매고 있던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지혜를 터득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 지혜는 자신의 삶을 시로 만드는 성찰과 집중의 과정에서 저절로 생겨난 것일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누군가가 곁에 있고,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시와 이야기로 들려주며 스스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으며, 그래서 마음의 파도를 잔잔하게 다스릴 수 있었던 이러한 모든 과정을 통해 할머니는 스스로 삶의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니 그동안 참말로 욕 봤다.”라는 말은 곁에서 이야기를 들어 준 나에게 한 말이자 할머니 자신에게 해주는 위안의 말이었으리라. 또한 구술을 할 때 상대의 말을 듣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우치게 해 준 말이었다.

우리들의 마지막 만남이 있었던 15개월 후, 할머니의 전화번호로는 더 이상 신호가 가지 않았다. 지난 6월 5일은 할머니가 시간과 공간, 무수한 인연들로부터 자유로워졌던 날이다. 날개 죽지 부러진 한 마리 철새는 임진강물을 따라 바다로 흘러가서 현해탄을 건너 아들을 만났을까. 마쓰시타를 만나 아들의 존재를 알렸을까. 그리고 할아버지를 만나 내 옆에 있어주어 고마웠다고 두 손 마주 잡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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