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엄친아가 아닌가” 수치심 키우다가는 결국…[철학자의 서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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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네 브라운의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

 

송인재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HK연구교수)

 

* 이 글은 <프레시안>의 기사를 재게재 한 것임을 알립니다.
 
 

1. 자책 속에서 배회하다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고 바라던 결과도 얻지 못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의욕을 갖고 링에 올랐지만 연타를 얻어맞고 주먹을 날려보지만 매 번 헛방만 날리는 복싱 선수의 기분이 이렇지 않을까? 그러다보니 지난날에 대한 회한과 자신에 대한 자책으로 보내는 시간도 많아진다.

기분도 전환할 겸 서점으로 향한다. 볼 만한 책이 무엇이 있을까 둘러본다. 늘 보는 전공서적들은 눈으로 훑고 지나가기만 한다. 오늘의 목적은 다른 데 있으므로. 대신 사람들이 많이 읽는 책은 무엇일까 이리저리 둘러본다. 한참을 지나도 별 소득이 없어 그만 나가서 한의원에서 침이나 맞자고 생각하던 그 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내가 내 편이 아니라고?’ 이런 생각과 함께 시선은 그 책에 멈추었고 어느새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섰다.

▲ <나는 왜 내 편이 아닌가>(브레네 브라운 지음, 서현정 옮김, 북하이브 펴냄). ⓒ북하이브

자신을 책망하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지던 차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제목만 보고 책의 내용을 예상해본다. 나의 이익, 혹은 의지와 다르게 생각하게 되는 사례들을 다룬 것일까? 과거에 한 행동을 후회하고 돌아보는 내용일까? 아니면 분열적 자아정체성을 말한 것일까?

책을 펼쳐보니 내 예상은 빗나갔다. 이 책은 마음의 상처를 받고 외로움 속에서 고통 받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리고 왜 사람들이 그런 고통을 받으며 어떻게 하면 그 고통에서 헤어날 수 있는가를 말하고 있다. 내 예상이 빗나갔어도 좋다. ‘자신에게 엄격한 것’이 미덕이고 그것이 자기발전의 덕목인 줄 알던 내게 냉정한 자아비판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아무리 냉정하고 이성적이려고 해도 스스로를 질책하면서 고통이 따르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다행히 고통이라는 공통분모를 찾았으니 본격적으로 저자의 말을 들어보기로 결정한다.

알고 보니 이 책은 이미 상당히 유명했다 저자 브레네 브라운의 TED 강연은 조회수가 900만을 넘었고 이 책은 아마존에서도 심리 분야 최장기 베스트 1위였다. 한국에서는 최근 유행하는 힐링 코드로도 읽히고 있다. 알기 쉽고 재미있는 강연으로 청중들에게 환영을 받아 TED 담당자로부터 ‘스토리텔러’로 소개해도 되느냐는 질문을 받기도 했단다.

그런 매력은 그냥 얻어진 것이 아니었다. 사회복지학 연구자로서 수년간 수백 명을 만나 그들과 대화하고 공감하면서 얻은 결과를 애정을 가지고 풀어냈기에 가능했다. 그만큼 학술적 노력도 많이 기울여진 책이다. 더 놀라운 것은 강연 주제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하는 ‘수치심’이라는 점이다. ‘수치심’은 이 책의 주제이자 브레네 브라운의 평생 연구 주제다. 저자는 이 ‘수치심’을 나의 가장 큰 적이 나 자신이 되는 이유로 지목한다. 따라서 왜,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를 관련 사례 제시와 분석을 통해 밝히고 원인을 찾는다. 그리고 분석을 바탕으로 해결 방안을 내놓는다.

책을 읽고 나니 이런 생각이 든다. ‘수치심’은 연구자인 저자만 흥미를 갖는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다. 심리적 고통이 심해 치료사나 상담사를 찾는 특정한 사람들만의 개인적인 이야기도 아니다. 우리 사회의 이야기, 서로 관계 맺고 사는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누구나 겪었을 법한 모두의 이야기다. 이제 왜 그런지 살펴보겠다.
 
 

2. 수치심은 무엇이고 어디서 오는가

브레네 브라운은 수치심을 이렇게 정의한다. “나에게 결점이 있어서 사랑이나 소속감을 누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할 때 느끼는 극심한 고통”(36쪽) 이 정의에서 눈에 띄는 말은 ‘소속감’, ‘가치’다. 수치심은 어딘가로 숨고 싶은 일시적인 부끄러움이 아니다. 그것은 나에게 어떤 결점이 있어서 어딘가에 소속될 수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과 연결되며 이 고립감 역시 일시적인 상태가 아니다. 이것이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와 연결되면서 근원적이고 장기적인 더 나아가 항구적인 것이 된다. 그래서 수치심은 나의 ‘존재’ 자체와도 연결되는 감정, 스스로의 결점 때문에 나의 ‘존재’도 부정적으로 만들어 버리는 감정이다.

누구나 결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수치심은 그 결점 때문에 존재의 가치조차 깎아내리는 감정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도 자기 스스로가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수치심을 죄책감과 구분한다. 죄책감은 ‘행동’에 국한된 것인데 반해 수치심은 ‘존재’로 확대된다. 이를 테면 시험에서 부정 행위를 한 뒤 ‘다시는 그러지 말아야지’ 하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죄책감이고, ‘나는 거짓말쟁이고 사기꾼이야, 난 바보 같고 나쁜 사람이야’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수치심이다.(43쪽)

잠시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자책의 풍경을 떠올려보자. 자신에 대해 스스로 ‘바보’, ‘머저리’, ‘못된 놈’ 따위의 비하적인 말을 쏟아 내며 머리를 쥐어박거나 스스로를 때리는 행위를 동반하는 행위가 쉽게 떠오를 것이다. 또한 자기반성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통념 속에 이끌려 행위 자체를 넘어서 나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 좋은 사람인가라는 생각도 쉽게 하게 된다. 물론 반성 없는 삶은 잘못된 행동에 제동을 걸 수 없고 더 큰 잘못을 낳을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그 반대의 경우 행위에 대한 반성을 넘어 존재 자체에 대한 가치 판단까지 해버리는 것도 큰 문제를 초래하게 된다. 어떤 잘못을 했다고 수치심까지 느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요인은 내 마음 속이 아닌 외부의 환경에 더 많이 도사리고 있다. 떠올려보자. 우리는 교육을 목적으로 혹은 상대방의 행동을 이끌어 내기 위해 수치심을 자극하는 경우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교육적 목적을 위한’ 선의를 내세우지만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은 그 효과가 지속적이지 못하다. 오히려 역효과만 나기 십상이다. 학습 열등생이든 실적이 떨어지는 회사원이든 오랫동안 가사만 돌보던 전업주부든 누구에게도 성적이나 실적을 향상하라고 사회로 나아가 자아를 찾으라고 한답시고 일종의 ‘충격요법’으로 그 사람의 존재를 비하는 발언을 한다면 오히려 결과는 그 의도와는 반대로 흘러가게 된다는 말이다. 오히려 수치심을 느낀 사람은 그 충격으로 마음을 닫고 위축되거나 비뚤어진 방향으로 그 고통을 발산할 수 있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보다 근본적인 계기는 개개인의 내면이나 개별적인 상호접촉을 넘어서는 더 큰 차원에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속한 사회의 문화'(25쪽)다. 그렇다면 수치심을 유발하는 문화는 어떤 문화일까? 우리는 ‘사람이란 자고로 ~~~해야 한다’, ‘~~~이 좋은 것이다’라는 유의 말을 많이 들어왔다. 은연 중 이런 말들은 우리 삶의 잣대가 된다. 문제는 그 잣대가 과도하고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지나치게 완벽한 것을 추구할 때 발생한다.

매체에서나 볼 수 있는 모델, 언제 어디서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슈퍼맨, 일과 가사 모두를 척척 해내는 슈퍼우먼, 언제나 화목하고 평화로운 가정, 공부도 운동도 잘하고 심성도 착한 모범생 등등. 이런 것들은 상업적 욕망에 의해 가공되었거나 주변의 지나친 기대에서 나온 이미지들이다. 수치심은 내가 이런 기준에 미달하거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그런 자신을 남에게 보여주기를 꺼려할 때 생겨난다. 완벽해 보이는 혹은 기대에 부응하는 모습을 보이려 안간힘을 쓰고 있어 힘겨울 때 그리고 그 목표를 달성 하지 않았을 때 ‘자신이 형편없다’고 느끼게 되면 수치심은 점점 자라난다.
 
 

3. 공감과 유대로 수치심을 떨쳐버린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수치심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여기서 다시 수치심의 정의 중 한 단어에 주목해본다. 그것은 ‘소속감’이다. 수치심이 무서운 이유는 그것이 내가 세상 어디에도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느끼는 고립감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이 고립감은 수치심을 느끼는 자신에도 해를 주는 동시에 심각한 사회 문제를 야기한다.

저자는 강연에서 미국의 심각한 사회 문제인 비만, 중독, 약물남용 등이 수치심에서 비롯된 잘못된 결과라고 지적한다. 그에 의하면, 타인에 폭력을 휘두르는 행동도 마찬가지로 고립감을 동반한 수치심에서 비롯한 것이다. 맞는 말이다. 자신의 좋지 않은 감정을 타인과의 정상적인 대화를 통해 해결할 수만 있다면 왜 공연히 폭식과 약물로 자신의 몸을 그르치며 타인을 해치기까지 할까? 그래서 저자는 ‘공감’을 수치심의 강력한 해독제로 제시한다.

이것은 사람은 홀로 있는 존재가 아니라 네트워크 안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어디에 소속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수치심은 존재 자체에 대한 회의가 되므로 위험한 것이다. 나의 상태, 나의 마음에 대한 타인과의 공감은 그래서 당연히 수치심의 해결책이 된다. 공감을 위해선 말하는 사람의 용기와 듣는 사람의 자비가 중요하다. 용기 있게 말하고 자신의 상황을 공유함으로써 수치심을 느꼈던 사람은 회복의 실마리를 찾는다. 시야를 더 넓혀서 본다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었어’라고 생각하게 되어 단절과 고립감도 해소할 수 있다. 듣는 이는 ‘나도 그럴 수 있어’라는 생각으로 공감을 해야 한다. 자칫, ‘비평자’의 태도로 상황을 해설하거나 평가하려 들거나 심지어 심한 말로 자존감을 허무는 언사를 한다면 수치심을 줄 수 있다. 그렇게 되면 당장은 말한 사람은 그 자리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이 들겠지만 단절과 고립감은 점점 커질 수밖에 없다.

한때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했던 탈주범이 회고록에서 선생님으로부터 ‘너 착한 놈이다’라는 말만 들었어도 범죄자가 되지 않았을 거라고 했다. 그런데 도리어 선생님은 돈을 안 가져왔다고 욕설을 하며 ‘빨리 꺼지라’ 했고 그 때부터 마음속에 ‘악마가 생겼다’고 한다. 물론 변명이 섞여 있음을 감안해야 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학생의 존재 가치를 훼손하는 선생님의 말은 듣는 이의 마음에 ‘악마’를 자라게 했고 결국 그 학생은 스스로를 고립시켜 범죄자가 되었다. 이 경우는 개인적 경험에서 오는 수치심이 개인의 심리적 고통을 넘어서서 사회 문제까지 유발할 수 있다는 말을 보여준다. 반면 비슷한 유년시절을 보낸 한 유명 프로파일러는 관심을 갖고 따뜻하게 감싸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비슷한 환경에서도 정반대의 길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이 있다면 그것을 버려두어서도 그것에 빠져들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차분히 돌아보아 그 원인을 찾아내서 감정을 회복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평소 자신의 경험을 분석적으로 파악하고 마음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아두었다가 만약 수치심이 유발되는 상황이 도래하면 빨리 빠져나오도록 해야 한다. 현실에서는 졌는데 저 혼자만 이겼다고 웃는 아큐의 자기기만적 ‘정신승리’도 옳은 방법이 아니다. 그것도 주변으로부터 벽을 쌓는 길이다. 용기 있기 자신의 상황을 말하고 타인과의 공감을 형성해서 유대의 끈을 유지하는 것이 수치심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중요한 방법일 것이다.

문화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완벽주의도 나를 수치심에 빠뜨리는 덫이다. 앞에서 말한 모델, 슈퍼맨, 슈퍼우먼, 다재다능한 모범생은 현실 속에 존재하기 매우 어려운 모습이다. 당연히 누구나 될 수 없다. 누구나 결핍이 있다. 무언가가 부족하다는 것은 성장의 계기이기도 하다. 또한 결핍만을 보아서는 안 되고 “내가 무엇을 잘하는지를 알아야 하며 강점을 발견하려고 노력해서 자신의 목표를 이루는 도구로 이용할 수 있어야 한다.”(271쪽) 실제로 저자는 현장에서 학생들에게도 강점을 찾는 연습을 시키고 있다. 이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엄격한 태도, 완벽을 강요하는 풍토 속에서 수치심을 방지하고 자존감을 키울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럴 때 ‘사랑받고 소속되어 있다는 행복을 느낄 자격이 있다’고 느끼게 되어 수치심으로부터 멀어질 것이다.
 
 

4. 나를 괴롭히는 익숙함에서 벗어나라

이 책의 논조는 균형적이고 포괄적이다. 우선 연구서이면서 교양서이고 심리서이면서 사회문화서이다. 내가 느끼는 나의 문제를 외면해서도 안 되지만 매몰되어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죄책감과 수치심을 구별하면서 과도한 문제의식에 빠지는 원인을 지적해서 과한 자기반성이 자기붕괴로 나가는 것을 경계한다. 사람들이 불행하게 느끼는 문제를 다루면서 그 원인을 사회문화적 측면에서도 찾아낸다. 개별적인 대화나 마음 다잡기가 해결책으로 제시되는 동시에 유대감이 인간의 본원적 욕망이며 누구나 소속감 속에서 가치 있는 존재가 되길 바란다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동시에 특정한 출신, 종교, 국적, 혈연 등 집단정체성에 기대어 형성되는 ‘전형화’는 개인에게 덧씌운다면 수치심을 불러일으키는 요소로 지적한다. 그 대신 공감을 매개로 공동의 노력과 개인의 심리회복 노력을 병행할 것을 제안한다. 나도 스스로 수치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누군가가 내게 손을 내밀었을 때는 수치심을 갖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수치심을 유발하는 완벽주의 문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이 책에서는 문화비평적 시야에서 지적하는 데 그치거나 저항하자고 선동하는 대신 완벽주의 문화에 휘둘리지 않는 길을 일러준다.

감정을 느끼고 타인과 대화하고 매체를 접하는 것은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일이다. 그러나 익숙하다고 해서 능숙하거나 유익한 것은 아니다. 미덕이라고만 간주되었던 엄격한 자아비판, 의도가 좋다는 핑계로 묵인되거나 권장되기까지 한 수치심을 이용한 교육과 훈육 등도 우리에게 익숙한 것이다. 그러나 역시 유익하지는 않다. 붕괴될 것 같은 정신을 추스르는 일, 타인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대화하는 일에 우리는 여전히 서투르고, 모두를 해치는 삶의 방식들도 방치되어 있다. 그 후과는 고스란히 부메랑처럼 크고 작은 개인적·사회적 문제가 되어 돌아온다. 이제 나조차 내 편이 아니게 만드는 익숙한 것들이 있다면 버려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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