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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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여정은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장미나무를 심어 놓으면 가지가 솟아 잎은 무성해지고 찬란한 꽃이 피울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름도 장미의 이름과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를 가진 생식세포는 오만 종의 유전자 쌍을 토대로 자기를 형성해 간다. 너는 나의 아들이지만 너와 나는 같지 않다. 신비한 어떤 기제가 있어, 각자 정보를 선택한 대로 자기를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를 읽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읽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는 몇 쌍일까? 일곱 쌍? 아니면 여덟 쌍 정도? 완두콩의 염색체가 여섯 쌍이니, 장미는 적어도 완두콩보다는 더 복잡한 염색체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완두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미를 그 장미로 만드는 것은, 장미가 가진 유전자 정보뿐만 아니라 토질의 성분에도 달려있다. 장미는 뿌리가 흡수하는 자양분을 토대로 자기를 완성할 준비를 할 것이다. 자양분이 많다면 키도 더 클 것이고 꽃도 많이 필 것이다.
이곳 지표는 마사토이다. 나는 이 땅에 구덩이를 파고 깨끗한 황토흙을 채웠다. 황토 속에는 장미와 내 육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들어있다. 탄소, 질소, 산소 등. 이 장미는 번성하지는 못할지라도 건강할 것이다. 나는 이 장미가 무성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키가 크지 않아도 좋다. 아, 흰 장미라면 더 좋았을 것을. 역시 무덤가에는 색깔 있는 장미보다는 흰 장미가 더 어울릴 것이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때도 이렇게 황토를 복토해 국화를 심었다. 네 엄마는 살만큼 살았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가 무난하다. 명이 다해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너는 네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평화로워 보이는 국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절하다. 너는 만개한 한 때를 살았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평온하고 자연이 만들어 낸 죽음이 아니었다. 저 바다의 죽음과 같은 격렬한 죽음이었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당하다. 다른 식물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는 장미가 적당하다. 맹렬하게 꽃 피우는 것도 그렇고, 가을이 오기 전에 꽃이 시드는 것도 그렇다.
장미나무를 심는 것이 어쩌면 내 생 최후의 노동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 생을 모두 타인의 노동에 맡겨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가 이 장미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모든 정열을 다 써버리고 시드는 때의 장미 잎과 같다.
그러나 장미와 나는 다른 데가 있다. 내 육체는 쇠잔해 가는데, 정신은 이리도 청명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내 정신, 기억력은 여전하다.
너는 네 삶의 목표가 있었나? 너는 회사일, 그리고 출근하기 전과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너의 인생을 계획하거나 돌아볼 틈이 있었을까?
네가 살아있을 때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어주지 못했다. 아! 장미를 보며 네 생을 계획하렴, 하고 네게 말 할 수만 있다면… 이제나마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는다.
나의 육체는 장미와 비슷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주 안에 어디 새로운 것이 있을쏘냐. 다 같이 흙이라는 한 고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름 붙여진 것들의 허망함이여!
의사의 말처럼 죽는 순간 나의 뇌는 전기신호를 멈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차이는 뇌의 전기신호 여부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 나는 죽음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를 진단한 의사가 하는 말들, 심히 걱정스러운지 진단결과를 내게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의 토막말들을 나는 재조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약이 할아버지에게 잘 듣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런가?”
“할아버지의 몸이라는 기계가…… 그러니까 모든 기계는 쓰면 낡기 마련이잖아요? 약효가 좋지 않은 이유도 그런 거지요. 낡은 기계에 기름을 칠해도 삐걱거리잖아요?”
의사는 대단히 말을 조심했다. 나를 실망시키려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경우에는 표정관리를 잘 해야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런 기계로 나는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하느님이나 할 수 있죠. 약이 잘 듣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몸이 쇠약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죠.”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네 무덤가에 장미를 심는 일이다.
안순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다시 짐차를 몰고 돌아갔다.
“할아버지, 씩씩하게 장미 잘 심고 돌아가세요. 먹감나무 묘목 가지고 내일 다시 올게요,”
국밥을 먹다가 안순옥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렇게 국밥 잡수실 돈은 어디서 나세요? 아드님? 아니면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놓으셨어요?”
“젊었을 때야 많이 벌었지. 그러나 지금 쓰는 돈은 내가 번 것이 아닐세.”
“그럼 누가 번 돈이에요?”
“아들이 남긴 유산.”
안순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들이 간척회사 농장에 다니다가 사고로 죽었어. 보상금을 내게도 조금 주었지. 지금 내가 쓰는 돈도……”
안순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유 할아버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그렇다고 식사하시면서 우시면 어떡해요?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눈물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더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감정이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변하는 현상이 눈물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감정도 없다. 나의 이 마른 몸에서 눈물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정신이 느낀 것이 생리적으로 표현될 때 눈물이 된다.
육체가 쇠잔한데도 정신이 말짱한 것이 신비이듯, 육체가 쇠잔해도 젊은 여인을 보면 웃음이 날 듯 반갑다는 것도 신비스럽다. 내 기억의 저편 어느 한 구석에 웃음 한 자락이 붙어있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과거 활발했던 내 육체가 만들어 내었던 웃음처럼 반가운 기억을 일깨우는 것일 게다. 눈물과 웃음은 모두 기억이라는 정신이 육체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노쇠하고 말라비틀어진 내 육체는 상황에 따라서 과거 내 육체가 경험했던 것을 복사해 낸다.
나는 장날마다 다릿목에 묘목장수가 좌판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묘목장수는 우럭포 등, 말린 생선도 함께 팔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쉬엄쉬엄 걸어서 다릿목에 도착했다. 묘목을 파는 여인은 나를 기억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묘목을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않았다. 여인이 물었다.
“할아버지, 묘목 사시게요?”
“흰 장미 한그루 사고 싶은데.”
“흰 장미는 오늘 없고요, 혹시 꼭 필요하시다면 다음 장날 제가 가지고 나올 수도 있어요. 명함 드릴 테니 전화 주시겠어요?”
명함을 보고야 그녀의 이름이 안순옥이고, 집이 고북에 있는 무진농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장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다음 장날 다시 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거든. 오늘 가지고 나온 장미는 무슨 색깔인가?”
“잡종이지요. 빨간 색도 피우고 노란 색도 피울 거예요.”
“좋네, 장미 한 그루 싸 주게.”
안순옥은 나무를 싸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참 특별하시네요. 과일나무를 심으시다가, 이제는 장미까지… 묘목을 사 가는 노인들은 가끔 있지만…”
“노인들이 과일나무라…… 그 나무 열매 따먹을 때까지 살라는 보장도 없는데 과일나무를 심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인가?”
안순옥이 감탄을 섞은, 높은 소리를 내었다.
“스피노자! 할아버지, 공부 많이 하셨네요?”
“내가 예전에 수원 농림학교를 다녔거든. 내 선생이 후에 농림장관도 하고 그랬어. 그 선생한테 들은 말인데 갑자기 기억나네 그려.”
“와아, 인텔리셨네요? 그럼 할아버지는 젊어서 직업은 뭐였어요?”
“농사지었지.”
“공부하신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셨네요?”
“선친께서 내가 대처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지. 험한 세상이니 몸 사리고 집에 있으라고……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았지.”
“염라대왕도 부러워했겠네. 어디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어디에서 사세요?”
“갈마리.”
원래의 마을 이름은 갈매, 쪽빛 강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정 때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갈마리가 되었다. 목마를 갈, 말 마 자를 붙여 갈마리라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자 호사가들이 나서 마을 이름에 뜻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돌곳이 형국이 물을 찾는 목마른 말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새로 지은 이름이 옛 이름을 당할까? 어디를 파나 물 잘 나오지, 황토에 거름 주면 농사 잘 되지, 사람 살기 좋은 땅이었다. 농사지을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바닷물만 쫓아다녀도 배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맨몸으로 바다에 가서 먹을 것을 벌어왔다. 큰 시내와 바다가 만나는 곳은 갈맷빛 그것이었다. 간척하기 전 까지는 그 이름이 적당했다.
생도둑놈들이다. 한 바다를 ‘내 것이다’라고 울타리 치는 놈들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네 것 내 것으로 이름붙이다니!
간척사업을 한 뒤로는 목마를 갈, 말 마, 갈마라는 지명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돌곳이 뻘, 기름져 만물이 살아 움직이던 물기 먹은 저 갯벌은 시체처럼 황폐해졌다. 햇볕에 굳은 갯벌 흙은 돌덩이처럼 차디차다. 농사지을 곳이라야 간척지의 일부분 정도 뿐, 나머지는 썩은 물로 차 있다.
나는 농부였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도수 어부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터 아래, 고기들이 먹이를 찾는 곳에 주낙을 놓을라 치면 바구니 가득 고기를 잡았다. 한바다 가득 물이 들어찬 꿈꾸기 여러 번이었다. 간척되기 이전의 바다를 꿈꾸고 일어나면 항상 목마르듯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났으며,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신화는 이처럼 인간의 자궁을 두 곳으로 지목했다.
바다, 인간의 자궁도 죽을 수 있다는 증거가 저 간척지이다. 저 바다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격렬한 죽음이다. 바다 속 만물이 일어나 죽음에 저항하다가 껍질만 남기고 전멸했다. 커다란 죽음 자체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너를 담당한 의사가 내게 말했다.
“뇌사라는 것을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뇌사란 곧 의사가 진단하는 죽음이에요. 뇌가 전기신호를 멈추었다 것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너의 심장은 아직 따뜻한데 의사는 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너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뇌사 이후 마흔 여덟 시간이 지나면 영안실로 모셔야 합니다.”
나는 너를 집에서 임종하도록 해야 했다. 태어난 곳에서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신앙이었다. 그리고 여기 양지바른 곳에 너를 묻었다. 내가 너를 묻었기로서니 정말 너를 묻었을까?
네 무덤을 밟듯이 장미의 뿌리를 밟는다.
장미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며, ‘이 장미는 뿌리가 실해서 잘 살 것’이라는 안순옥의 말을 이어 내가 물었다.
“그래, 자네의 뿌리는 어디인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네 고향을 물은 거네.”
“뿌리가 왜 고향 이예요?”
“나는 고향 사람들, 특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 거네. 갈마리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는 농토 없이 바다에다 뿌리를 두고 살던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마을을 떠났지. 일정 때 소작하던 땅을 잃고 유리하던 사람들처럼 자궁을 떠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아네. 자기 삶의 자양분을 빨아대는 곳, 그곳이 고향이요 자궁이 아니겠나?”
안순옥이 눈을 작게 하고는 말했다.
“간척회사에서는 지방 사람들 일터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던데요? 신문에도 났었어요.”
나는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아, 수만 명 일터를 빼앗고, 몇 십 명 일터를 준다는 것이 대수야?”
“수만 명이라뇨?”
“도수어업이라고, 그러니까 배나 특별한 도구 없이 간단한 농기구를 들고 바다로 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저 바다를 끼고 도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그 몇 만 명이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네. 뿌리, 자양분을 빨아들일 땅을 잃어버린 꼴이지, 그 사람들이나 나 모두.”
내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안순옥이 꺄드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러면 제 고향은 장터네요? 저는 장바닥에 뿌리를 두고 살거든요. 이건 농담이고, 제 고향은 고북, 무진농장이예요. 농토 한 떼기 없는 그곳에서 태어났죠. 간척지 옆이예요. 전에는 경치가 아주 좋았어요. 지금은 삭막함 그 자체죠. 비행기가 농약이라도 뿌릴라 치면 빨래 걷으랴, 장독 덮으랴, 숨도 못 쉬고 살죠.”
“아버지가 무진농장을 운영하시는가?”
“아뇨, 조경 노동자였죠, 나무에 깔려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그럼 묘목은 누가 키우나? 누구하고 사나?”
“동생하고 함께 살죠. 묘목은 여기 저기 농장에서 받아오죠.”
나는 장미 나무를 받아들었으나 무엇인가 그냥 가기가 섭섭했다. ‘스피노자!’라고 소리치던, 그 활짝 웃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니면 내 기억 저편에서 나와 함께 웃고 슬퍼했던 고향사람의 뿌리 잃은 모습을 안순옥에게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섰다 않았다 하기를 반복한 후에 말했다.
“자네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노망든 노인이라고 하지는 말게. 일본에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이 있다고 하네. 대개 노인들이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식이라네.”
안순옥이 두 손뼉을 부딪쳐 ‘짝’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아하,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드릴까요?”
“아니, 더 있네. 내가 점심을 살 테니, 나하고 이야기함세.”
그리고 무진농장이라고 쓰인 짐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또, 내가 갈마리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네. 택시비 낼 테니 자네 차로 나를 갈마리까지 태워다 주지 않겠나?”
안순옥이 웃으며 말했다.
“어렵지 않아요. 점심은 어차피 먹어야 되고, 조금 있으면 동생이 잠시 교대해 주러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노인한테 대접해야지 오히려 얻어먹어서 되겠어요?”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조금 지나면 이제 돈 쓸 일도 없어.”
우리는 장날마다 문을 여는 국밥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장사하면서 늦깎이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배움에 미련이 있다고 했다.
“제 법명이 능인이었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스님이었다는 게야, 아니면 보살계를 받았다는 거야?”
그녀가 간단히 자신의 이력을 설명했다. 승가대학을 다닐 때 모친이 죽었다. 문제는 젖먹이 동생이었다. 부친도 몸이 불편해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환속했다. 동생을 돌보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운전하며 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면 두 식구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동생이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장사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중이 걸머지는 배낭에 주목했다. 암울한 시대였다. 항상 떠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고, 너를 키워야 했다.
나의 부친, 너의 조부의 임종을 기억한다. 한의사가 왕진 왔다가 돌아간 후 부친은 “칠성판을 가져오너라”, 하고는 그 위에 누웠다. 임종까지 열흘 동안, 가족들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죽음과 싸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불평도 없이 끙끙거리다가도, 네가 방에 들어서면, “아가, 이리 오너라. 와서 네 찬 손으로 내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련?”이라고 말했지. 200여 개의 만장이 그의 운구 행렬을 앞서 갔다.
나도 그런 식의 임종을 맞이하고 싶었다.
국밥집을 나와 찻집에 앉자, 안순옥이 장미를 화제로 꺼내었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뭘까?”
“처녀성.”
나는 작지 않은 나이의 여성이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며, 장미의 부드러운 꽃잎과 여인의 은밀한 속살을 비교해 보았다.
“적절한 상징이로군. 그러나 해석이 필요하네.”
“어느 면에서요?”
“실패한 생명의 상징이랄까, 억지로 이어붙이자면 자궁이 더 좋을 듯하네. 생명을 잉태해야 할 곳, 그러나 실패한 자궁, 매번 생리를 하는 처녀의 자궁, 그리고 씨를 맺지 못하는 장미 꽃.”
간척회사는 바다라고 하는 이 처녀지에 새로운 농토를 만들겠다고 했다. 독재자는 그 회사 회장에게,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요”라고 말하며, 조상들의 생명이었으되 후손들의 생명일 바다의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저 바다는 처녀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이들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이들의 위장적 수사가 ‘처녀지’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어도, 그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지라도 바다의 죽음은 아직도 나에게 모호함 자체이다.
짐차를 운전해 오면서 안순옥이 말했다.
“아드님은 몇 살에 사고를 당했어요?”
“……마흔 아홉.”
안순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나이였네. 무슨 일을 하시다가, 어떤 이유로……”
“간척농장에서 트럭을 운전했지. 농산물이나 부산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지. 일찍 죽은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큰 이유는 배운 게 없어 험한 일을 한 탓이겠지. 하나 더 꼽으라면 탕떼기라고 해서, 트럭 한 차 짐 실어 나르면 딱지 하나를 주는 식으루다 작업하는거지. 아이는 돈을 더 벌고 싶어 무리했을지도 몰라. 노동을 적대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더 뛰라고 말한 사람들이 이 아이를 죽인 셈 아니겠나. 내 아들은 그 회사 회장보다 훨씬 먼저 갔지. 그 회장은 이곳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거든. 도서관을 볼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합의 하에 어떤 일을 한다면 저처럼 생색낼 필요도, 회장이 떼돈 벌 이유도 없을 것이야. 회장은 여행할 때에도 간호원을 대동했다지? 그는 자기가 가진 특권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겠지.”
뒷말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깐 옆에서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안순옥의 말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정말 죽음까지도 공평한 것이 아니네요?”
죽음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르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
나는 특권을 누리는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손이라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위로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싫다. 네가 살아있어, 내 죽음을 지켜보아 주었더라면……
그렇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순옥에게 제안했다.
“자네, 무진농장에 농토도 없이 쓰러져가는 집 한 채 뿐이라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지 않겠나? 소지주였던 부친 덕분에 집이 널찍하네. 밭도 작지 않네. 자네 알다시피, 밭에는 감나무를 심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감나무를 더 심세나. 감나무 농사는 자네가 짓고, 수익도 가지게나. 대신 나를 돌봐 주고, 임종 시 손을 잡아주는 거야.”
“좋아요, 할아버지. 점잖으시고 지적이신 데다가, 잘 생기셨으니 맘에 들어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감나무 농사지어서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다면 좋죠. 또 노인 돌보는 거야 제게 이력이 났죠. 부친의 경우도, 그리고 예전에 절에서 스승님 돌보는 것도 그랬죠. 상품 가치가 높은 먹감나무를 심어요, 우리. 내일 당장 심어요.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 임종 하실 때 손을 꼭 잡아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황혼이다. 저 빛은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나 역시 곧 사라지겠지. 내가 죽으면 내 육체의 주인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몫, 타인들의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입장에서만 회자될 것이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나면 어둠이 시작되듯이, 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도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잘 있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