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생명과 그 적대자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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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여정은 인생의 여정을 보여준다. 이 장미나무를 심어 놓으면 가지가 솟아 잎은 무성해지고 찬란한 꽃이 피울 것이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꽃은 시들고 잎은 마를 것이다. 인생이라는 이름도 장미의 이름과 마찬가지가 아니더냐. 마흔여섯 개의 염색체를 가진 생식세포는 오만 종의 유전자 쌍을 토대로 자기를 형성해 간다. 너는 나의 아들이지만 너와 나는 같지 않다. 신비한 어떤 기제가 있어, 각자 정보를 선택한 대로 자기를 만들어 가기 때문일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를 읽는 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읽는 것보다 쉬울 것이다. 장미의 유전자는 몇 쌍일까? 일곱 쌍? 아니면 여덟 쌍 정도? 완두콩의 염색체가 여섯 쌍이니, 장미는 적어도 완두콩보다는 더 복잡한 염색체 구조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완두콩에는 없는 여러 가지 색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장미를 그 장미로 만드는 것은, 장미가 가진 유전자 정보뿐만 아니라 토질의 성분에도 달려있다. 장미는 뿌리가 흡수하는 자양분을 토대로 자기를 완성할 준비를 할 것이다. 자양분이 많다면 키도 더 클 것이고 꽃도 많이 필 것이다.

이곳 지표는 마사토이다. 나는 이 땅에 구덩이를 파고 깨끗한 황토흙을 채웠다. 황토 속에는 장미와 내 육체를 구성하는 성분들이 들어있다. 탄소, 질소, 산소 등. 이 장미는 번성하지는 못할지라도 건강할 것이다. 나는 이 장미가 무성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키가 크지 않아도 좋다. 아, 흰 장미라면 더 좋았을 것을. 역시 무덤가에는 색깔 있는 장미보다는 흰 장미가 더 어울릴 것이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를 심었다. 그때도 이렇게 황토를 복토해 국화를 심었다. 네 엄마는 살만큼 살았다. 네 엄마 무덤에는 국화가 무난하다. 명이 다해 죽은 사람이니까. 그러나 너는 네 명을 다하지 못하고 죽었다. 그렇다면 평화로워 보이는 국화로는 충분하지 않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절하다. 너는 만개한 한 때를 살았다. 그러나 너의 죽음은 평온하고 자연이 만들어 낸 죽음이 아니었다. 저 바다의 죽음과 같은 격렬한 죽음이었다. 네 무덤에는 장미가 적당하다. 다른 식물들보다 더 격렬하게 사는 장미가 적당하다. 맹렬하게 꽃 피우는 것도 그렇고, 가을이 오기 전에 꽃이 시드는 것도 그렇다.

장미나무를 심는 것이 어쩌면 내 생 최후의 노동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내 생을 모두 타인의 노동에 맡겨야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아들아. 내가 이 장미꽃을 볼 수 있을지 없을지 나는 알 수 없다. 나는 모든 정열을 다 써버리고 시드는 때의 장미 잎과 같다.

그러나 장미와 나는 다른 데가 있다. 내 육체는 쇠잔해 가는데, 정신은 이리도 청명하다. 나는 다른 사람의 말을 정확히 들을 수 있다. 내 정신, 기억력은 여전하다.

너는 네 삶의 목표가 있었나? 너는 회사일, 그리고 출근하기 전과 퇴근 후에는 농사일에 매달렸다. 너의 인생을 계획하거나 돌아볼 틈이 있었을까?

네가 살아있을 때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어주지 못했다. 아! 장미를 보며 네 생을 계획하렴, 하고 네게 말 할 수만 있다면… 이제나마 나는 너를 위해 장미를 심는다.

나의 육체는 장미와 비슷한 성분으로 구성되어 있을 것이다. 우주 안에 어디 새로운 것이 있을쏘냐. 다 같이 흙이라는 한 고향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름 붙여진 것들의 허망함이여!

의사의 말처럼 죽는 순간 나의 뇌는 전기신호를 멈출 것이다. 살아있다는 것과 죽어있다는 차이는 뇌의 전기신호 여부이다. 그러나 죽는 순간 나는 죽음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죽음이 두렵지 않다.

나를 진단한 의사가 하는 말들, 심히 걱정스러운지 진단결과를 내게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는 의사의 토막말들을 나는 재조립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이 약이 할아버지에게 잘 듣지 않는군요.”

“어째서 그런가?”

“할아버지의 몸이라는 기계가…… 그러니까 모든 기계는 쓰면 낡기 마련이잖아요? 약효가 좋지 않은 이유도 그런 거지요. 낡은 기계에 기름을 칠해도 삐걱거리잖아요?”

의사는 대단히 말을 조심했다. 나를 실망시키려 하지 않으려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경우에는 표정관리를 잘 해야만 내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나는 고개를 끄떡이고는 의사에게 물었다.

“그러면 이런 기계로 나는 얼마나 살 수 있겠는가?”

“얼마나 살 수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죠. 하느님이나 할 수 있죠. 약이 잘 듣지 않는 것으로 봐서 몸이 쇠약해졌다는 것만은 알 수 있죠.”

의사의 이야기를 듣고 나는 전부터 생각해 왔던 일을 하기로 했다. 네 무덤가에 장미를 심는 일이다.

안순옥은 다음과 같이 이야기하고는 다시 짐차를 몰고 돌아갔다.

“할아버지, 씩씩하게 장미 잘 심고 돌아가세요. 먹감나무 묘목 가지고 내일 다시 올게요,”

국밥을 먹다가 안순옥이 물었다.

“그런데 할아버지, 이렇게 국밥 잡수실 돈은 어디서 나세요? 아드님? 아니면 젊어서 돈을 많이 벌어놓으셨어요?”

“젊었을 때야 많이 벌었지. 그러나 지금 쓰는 돈은 내가 번 것이 아닐세.”

“그럼 누가 번 돈이에요?”

“아들이 남긴 유산.”

안순옥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다가 말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아들이 간척회사 농장에 다니다가 사고로 죽었어. 보상금을 내게도 조금 주었지. 지금 내가 쓰는 돈도……”

안순옥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유 할아버지, 내가 괜한 질문을 했나봐요. 그렇다고 식사하시면서 우시면 어떡해요? 진정하세요, 할아버지.”

눈물처럼 신비한 것이 또 있더냐. 보이지 않는 정신적인 감정이 보이는 물질적인 것으로 변하는 현상이 눈물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가 없다면 보이지 않는 감정도 없다. 나의 이 마른 몸에서 눈물이 솟아날 수 있다는 것이 고맙기도 하다. 정신이 느낀 것이 생리적으로 표현될 때 눈물이 된다.

육체가 쇠잔한데도 정신이 말짱한 것이 신비이듯, 육체가 쇠잔해도 젊은 여인을 보면 웃음이 날 듯 반갑다는 것도 신비스럽다. 내 기억의 저편 어느 한 구석에 웃음 한 자락이 붙어있어, 내가 보는 대상에 따라 과거 활발했던 내 육체가 만들어 내었던 웃음처럼 반가운 기억을 일깨우는 것일 게다. 눈물과 웃음은 모두 기억이라는 정신이 육체를 통해서 만들어낸 것이다. 이 노쇠하고 말라비틀어진 내 육체는 상황에 따라서 과거 내 육체가 경험했던 것을 복사해 낸다.

나는 장날마다 다릿목에 묘목장수가 좌판을 벌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농사짓는 일이 힘들어지면서 묘목을 심기 시작했다. 묘목장수는 우럭포 등, 말린 생선도 함께 팔고 있었다. 병원에서 나와 쉬엄쉬엄 걸어서 다릿목에 도착했다. 묘목을 파는 여인은 나를 기억했다. 나는 웃음을 머금고 묘목을 늘어놓은 곳으로 다가가 무릎을 구부려 않았다. 여인이 물었다.

▲ ⓒ프레시안(김하영)

“할아버지, 묘목 사시게요?”

“흰 장미 한그루 사고 싶은데.”

“흰 장미는 오늘 없고요, 혹시 꼭 필요하시다면 다음 장날 제가 가지고 나올 수도 있어요. 명함 드릴 테니 전화 주시겠어요?”

명함을 보고야 그녀의 이름이 안순옥이고, 집이 고북에 있는 무진농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다음 장날까지 기다릴 수 없었다.

“내가 다음 장날 다시 나올 수 있으리란 보장이 없거든. 오늘 가지고 나온 장미는 무슨 색깔인가?”

“잡종이지요. 빨간 색도 피우고 노란 색도 피울 거예요.”

“좋네, 장미 한 그루 싸 주게.”

안순옥은 나무를 싸며 말했다.

“할아버지는 참 특별하시네요. 과일나무를 심으시다가, 이제는 장미까지… 묘목을 사 가는 노인들은 가끔 있지만…”

“노인들이 과일나무라…… 그 나무 열매 따먹을 때까지 살라는 보장도 없는데 과일나무를 심는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오더라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것인가?”

안순옥이 감탄을 섞은, 높은 소리를 내었다.

“스피노자! 할아버지, 공부 많이 하셨네요?”

“내가 예전에 수원 농림학교를 다녔거든. 내 선생이 후에 농림장관도 하고 그랬어. 그 선생한테 들은 말인데 갑자기 기억나네 그려.”

“와아, 인텔리셨네요? 그럼 할아버지는 젊어서 직업은 뭐였어요?”

“농사지었지.”

“공부하신 것과 어울리지 않는 일을 하셨네요?”

“선친께서 내가 대처로 나가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지. 험한 세상이니 몸 사리고 집에 있으라고……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았지.”

“염라대왕도 부러워했겠네. 어디에서 농사도 짓고 고기잡이도 하면서 살 수 있어요? 어디에서 사세요?”

“갈마리.”

원래의 마을 이름은 갈매, 쪽빛 강물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일정 때 마을 이름을 한문으로 표기하면서 갈마리가 되었다. 목마를 갈, 말 마 자를 붙여 갈마리라 했다. 그렇게 이름을 붙이자 호사가들이 나서 마을 이름에 뜻을 부여하기 시작했다. 저기 보이는 돌곳이 형국이 물을 찾는 목마른 말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어디 새로 지은 이름이 옛 이름을 당할까? 어디를 파나 물 잘 나오지, 황토에 거름 주면 농사 잘 되지, 사람 살기 좋은 땅이었다. 농사지을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바닷물만 쫓아다녀도 배불렀다는 말이 있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이 마을에서는 누구나 먹고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땅 없는 사람도 이곳에서는 맨몸으로 바다에 가서 먹을 것을 벌어왔다. 큰 시내와 바다가 만나는 곳은 갈맷빛 그것이었다. 간척하기 전 까지는 그 이름이 적당했다.

생도둑놈들이다. 한 바다를 ‘내 것이다’라고 울타리 치는 놈들이 도둑놈이 아니고 무엇이냐? 이름붙일 수 없는 것에 네 것 내 것으로 이름붙이다니!

간척사업을 한 뒤로는 목마를 갈, 말 마, 갈마라는 지명이 적절해 보이기도 한다. 돌곳이 뻘, 기름져 만물이 살아 움직이던 물기 먹은 저 갯벌은 시체처럼 황폐해졌다. 햇볕에 굳은 갯벌 흙은 돌덩이처럼 차디차다. 농사지을 곳이라야 간척지의 일부분 정도 뿐, 나머지는 썩은 물로 차 있다.

나는 농부였다. 그러나 나는 동시에 도수 어부이기도 했다. 끝없이 펼쳐진 모래터 아래, 고기들이 먹이를 찾는 곳에 주낙을 놓을라 치면 바구니 가득 고기를 잡았다. 한바다 가득 물이 들어찬 꿈꾸기 여러 번이었다. 간척되기 이전의 바다를 꿈꾸고 일어나면 항상 목마르듯 슬픔이 차오르곤 했다.

나는 신화를 믿는다. 바다에서 생명이 태어났으며, 인간은 흙으로 만들어졌다. 신화는 이처럼 인간의 자궁을 두 곳으로 지목했다.

바다, 인간의 자궁도 죽을 수 있다는 증거가 저 간척지이다. 저 바다의 죽음은 자연적인 죽음이 아니다. 격렬한 죽음이다. 바다 속 만물이 일어나 죽음에 저항하다가 껍질만 남기고 전멸했다. 커다란 죽음 자체이다.

중환자실에 들어간 너를 담당한 의사가 내게 말했다.

“뇌사라는 것을 설명 드리기가 어렵군요. 뇌사란 곧 의사가 진단하는 죽음이에요. 뇌가 전기신호를 멈추었다 것은 인간이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지요.”

너의 심장은 아직 따뜻한데 의사는 네가 죽었다는 것이었다. 나는 너의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의사의 다음과 같은 말에 너를 집으로 데리고 올 수밖에 없었다.

“뇌사 이후 마흔 여덟 시간이 지나면 영안실로 모셔야 합니다.”

나는 너를 집에서 임종하도록 해야 했다. 태어난 곳에서 죽어서 땅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내 신앙이었다. 그리고 여기 양지바른 곳에 너를 묻었다. 내가 너를 묻었기로서니 정말 너를 묻었을까?

네 무덤을 밟듯이 장미의 뿌리를 밟는다.

장미를 비닐봉지에 넣어 주며, ‘이 장미는 뿌리가 실해서 잘 살 것’이라는 안순옥의 말을 이어 내가 물었다.

“그래, 자네의 뿌리는 어디인고?”

“그게 무슨 말이예요, 할아버지?”

“그러니까, 자네 고향을 물은 거네.”

“뿌리가 왜 고향 이예요?”

“나는 고향 사람들, 특히 고향을 떠난 사람들을 생각한 거네. 갈마리에서 살던 사람들 중에는 농토 없이 바다에다 뿌리를 두고 살던 사람들이 많았거든. 그런 사람들은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마을을 떠났지. 일정 때 소작하던 땅을 잃고 유리하던 사람들처럼 자궁을 떠난 사람들의 곤궁한 삶을 아네. 자기 삶의 자양분을 빨아대는 곳, 그곳이 고향이요 자궁이 아니겠나?”

안순옥이 눈을 작게 하고는 말했다.

“간척회사에서는 지방 사람들 일터를 많이 만들어 주었다고 말하던데요? 신문에도 났었어요.”

나는 언성을 높였다.

“이 사람아, 수만 명 일터를 빼앗고, 몇 십 명 일터를 준다는 것이 대수야?”

“수만 명이라뇨?”

“도수어업이라고, 그러니까 배나 특별한 도구 없이 간단한 농기구를 들고 바다로 가서 해산물을 채취하면서, 저 바다를 끼고 도는 곳곳마다 사람들이 살고 있었네. 바다가 간척지가 되자 그 몇 만 명이 하루아침에 할 일을 잃고 고향을 떠날 수밖에 없었네. 뿌리, 자양분을 빨아들일 땅을 잃어버린 꼴이지, 그 사람들이나 나 모두.”

내 나름대로 심각한 이야기였으나, 안순옥이 꺄드득 웃음을 터트리고 말했다.

“그러면 제 고향은 장터네요? 저는 장바닥에 뿌리를 두고 살거든요. 이건 농담이고, 제 고향은 고북, 무진농장이예요. 농토 한 떼기 없는 그곳에서 태어났죠. 간척지 옆이예요. 전에는 경치가 아주 좋았어요. 지금은 삭막함 그 자체죠. 비행기가 농약이라도 뿌릴라 치면 빨래 걷으랴, 장독 덮으랴, 숨도 못 쉬고 살죠.”

“아버지가 무진농장을 운영하시는가?”

“아뇨, 조경 노동자였죠, 나무에 깔려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어요.”

“저런, 그럼 묘목은 누가 키우나? 누구하고 사나?”

“동생하고 함께 살죠. 묘목은 여기 저기 농장에서 받아오죠.”

나는 장미 나무를 받아들었으나 무엇인가 그냥 가기가 섭섭했다. ‘스피노자!’라고 소리치던, 그 활짝 웃던 모습을 한 번 더 보고 싶었다. 아니면 내 기억 저편에서 나와 함께 웃고 슬퍼했던 고향사람의 뿌리 잃은 모습을 안순옥에게서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일어섰다 않았다 하기를 반복한 후에 말했다.

“자네 내 이야기를 듣고 나를 노망든 노인이라고 하지는 말게. 일본에서는 이야기를 들어주는 직업이 있다고 하네. 대개 노인들이 이야기하고, 젊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들어주는 식이라네.”

안순옥이 두 손뼉을 부딪쳐 ‘짝’ 소리를 내고는 말했다.

“아하, 제가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어 드릴까요?”

“아니, 더 있네. 내가 점심을 살 테니, 나하고 이야기함세.”

그리고 무진농장이라고 쓰인 짐차를 가리키며 말했다.

“또, 내가 갈마리 가려면 택시를 타야 하네. 택시비 낼 테니 자네 차로 나를 갈마리까지 태워다 주지 않겠나?”

안순옥이 웃으며 말했다.

“어렵지 않아요. 점심은 어차피 먹어야 되고, 조금 있으면 동생이 잠시 교대해 주러 오거든요. 그런데, 제가 노인한테 대접해야지 오히려 얻어먹어서 되겠어요?”

“돈 이야기는 하지 않아도 되네. 나는 조금 지나면 이제 돈 쓸 일도 없어.”

우리는 장날마다 문을 여는 국밥집으로 가서 마주 앉았다.

그녀는 장사하면서 늦깎이 방송통신대학교를 다닌다고 했다. 그녀는 배움에 미련이 있다고 했다.

“제 법명이 능인이었어요.”

나는 잘못 들었나 싶었다.

“스님이었다는 게야, 아니면 보살계를 받았다는 거야?”

그녀가 간단히 자신의 이력을 설명했다. 승가대학을 다닐 때 모친이 죽었다. 문제는 젖먹이 동생이었다. 부친도 몸이 불편해 아이를 돌볼 수 없었다. 그녀는 환속했다. 동생을 돌보며 몸이 불편한 아버지를 대신해 운전하며 장을 돌아다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아예 이 길로 나섰다. 크게 욕심 부리지 않으면 두 식구 먹고 살 수는 있지만, 올해 고등학교를 졸업한 자기 동생이 한창 공부할 나이인데 장사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나는 젊은 시절, 중이 걸머지는 배낭에 주목했다. 암울한 시대였다. 항상 떠나는 것을 생각했다. 그러나 떠날 수 없었다. 부모를 모셔야 하고, 너를 키워야 했다.

나의 부친, 너의 조부의 임종을 기억한다. 한의사가 왕진 왔다가 돌아간 후 부친은 “칠성판을 가져오너라”, 하고는 그 위에 누웠다. 임종까지 열흘 동안, 가족들은 그의 머리맡에 앉아, 죽음과 싸우는 그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떤 불평도 없이 끙끙거리다가도, 네가 방에 들어서면, “아가, 이리 오너라. 와서 네 찬 손으로 내 뜨거운 이마를 식혀주련?”이라고 말했지. 200여 개의 만장이 그의 운구 행렬을 앞서 갔다.

나도 그런 식의 임종을 맞이하고 싶었다.

국밥집을 나와 찻집에 앉자, 안순옥이 장미를 화제로 꺼내었다.

“장미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뭘까?”

“처녀성.”

나는 작지 않은 나이의 여성이 로맨틱한 이야기를 하는 것에 속으로 감탄하며, 장미의 부드러운 꽃잎과 여인의 은밀한 속살을 비교해 보았다.

“적절한 상징이로군. 그러나 해석이 필요하네.”

“어느 면에서요?”

“실패한 생명의 상징이랄까, 억지로 이어붙이자면 자궁이 더 좋을 듯하네. 생명을 잉태해야 할 곳, 그러나 실패한 자궁, 매번 생리를 하는 처녀의 자궁, 그리고 씨를 맺지 못하는 장미 꽃.”

간척회사는 바다라고 하는 이 처녀지에 새로운 농토를 만들겠다고 했다. 독재자는 그 회사 회장에게, “당신이 경제 대통령이요”라고 말하며, 조상들의 생명이었으되 후손들의 생명일 바다의 전권을 위임했다. 그러나 저 바다는 처녀지가 아니었다. 거대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이들의 것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려는 이들의 위장적 수사가 ‘처녀지’였을 뿐이다.

그러나 세월이 지났어도, 그리고 아무도 여기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지라도 바다의 죽음은 아직도 나에게 모호함 자체이다.

짐차를 운전해 오면서 안순옥이 말했다.

“아드님은 몇 살에 사고를 당했어요?”

“……마흔 아홉.”

안순옥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내 나이였네. 무슨 일을 하시다가, 어떤 이유로……”

“간척농장에서 트럭을 운전했지. 농산물이나 부산물을 실어 나르는 일을 했지. 일찍 죽은 이유야 여러 가지지만, 큰 이유는 배운 게 없어 험한 일을 한 탓이겠지. 하나 더 꼽으라면 탕떼기라고 해서, 트럭 한 차 짐 실어 나르면 딱지 하나를 주는 식으루다 작업하는거지. 아이는 돈을 더 벌고 싶어 무리했을지도 몰라. 노동을 적대적으로 삼는 사람들이, 살아남으려면 더 뛰라고 말한 사람들이 이 아이를 죽인 셈 아니겠나. 내 아들은 그 회사 회장보다 훨씬 먼저 갔지. 그 회장은 이곳에 도서관을 지어 기증했거든. 도서관을 볼 때마다 생각되는 것은, 사람들이 합의 하에 어떤 일을 한다면 저처럼 생색낼 필요도, 회장이 떼돈 벌 이유도 없을 것이야. 회장은 여행할 때에도 간호원을 대동했다지? 그는 자기가 가진 특권 때문에 오래 살 수 있었겠지.”

뒷말은 나의 혼잣말이었다. 나는 잠깐 옆에서 누가 듣고 있다는 것을 잊고 있었다. 안순옥의 말이 나를 다시 불러 세웠다.

“정말 죽음까지도 공평한 것이 아니네요?”

죽음도 사회적 계급에 따라서 다르다. 결코 공평하지 않다.

나는 특권을 누리는 삶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죽을 때 누군가가 손이라도 잡아 주었으면 좋겠다.

누구의 위로도 없이 혼자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것은 싫다. 네가 살아있어, 내 죽음을 지켜보아 주었더라면……

그렇다. 누군가가 필요하다. 안순옥에게 제안했다.

“자네, 무진농장에 농토도 없이 쓰러져가는 집 한 채 뿐이라면 우리 집으로 이사 오지 않겠나? 소지주였던 부친 덕분에 집이 널찍하네. 밭도 작지 않네. 자네 알다시피, 밭에는 감나무를 심었지. 이왕 이렇게 된 거, 감나무를 더 심세나. 감나무 농사는 자네가 짓고, 수익도 가지게나. 대신 나를 돌봐 주고, 임종 시 손을 잡아주는 거야.”

“좋아요, 할아버지. 점잖으시고 지적이신 데다가, 잘 생기셨으니 맘에 들어요. 하하 농담이고요, 저도 감나무 농사지어서 안정되게 생활할 수 있다면 좋죠. 또 노인 돌보는 거야 제게 이력이 났죠. 부친의 경우도, 그리고 예전에 절에서 스승님 돌보는 것도 그랬죠. 상품 가치가 높은 먹감나무를 심어요, 우리. 내일 당장 심어요. 민주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살다가, 할아버지 임종 하실 때 손을 꼭 잡아 드릴게요.” 하고 그녀는 내 손을 꼭 잡았다. 그 순간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 황혼이다. 저 빛은 잠시 후 지평선 너머로 사라질 것이다. 나 역시 곧 사라지겠지. 내가 죽으면 내 육체의 주인은 내가 아닐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몫, 타인들의 평가의 대상이 될 것이다. 나는 타인들의 입장에서만 회자될 것이다. 하늘이 붉게 물들고 나면 어둠이 시작되듯이, 나에 대한 타인들의 평가도 또한 사라질 것이다.

잘 있어라.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 단편소설 – 배추이파리 [철학을 사랑한 소설]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두세 달 간 대웅전을 짓는 일을 하는 동안 덕암사 주지는 틈만 나면 사진기를 들고 와 일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가 찍은 내 사진만도 한 봉투나 되었다. 그는 절 지은 기념으로 그 사진들을 보관하겠다고 했다. 그 사진들 속에서 나는 일하고 있었다. 가장 활기 있던 나의 생의 한 시절이 그 사진 속에 들어 있었다.

절 지붕을 올리는 중인가 보다. 나는 용마루 위에 서 있다. 작업하다가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 옆에 장씨가 몸을 구부린 채 무슨 일인가를 하고 있다. 장씨는 항상 등산화를 신고 일했다.

장씨가 특별히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등산화를 신고 일하는 탓에 장씨는 항상 몸이 굼떠 보였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항상 못마땅해했다. 하 사장은 장씨에게 일 시킨 것을 후회하곤 했다. 장씨는 우리와 함께 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덕암사 일을 시작하기 전, 안영사에서 종각 짓기를 마치자 함께 일하던 일꾼 두 사람이 빠져나갔다. 그러자 덕암사에 와 일할 사람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하 사장이 찾아낸 것이 장씨였다.

장씨는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 덕암사에 왔다. 덕암사 기단 공사랑 주변 축대 공사를 마치자 장씨는 혼자 덕암사에 남아 공사 잔거지를 하고 있었다. 하 사장은 그런 장씨를 뒷일꾼으로 썼다.

장씨는 마흔이 갓 넘었다. 그러나 미혼이었다. 막일로 몸이 굳은 사람처럼 보이는 것도 아니요, 특별히 다른 기술도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평소에 무엇으로 소일했느냐, 누구와 사느냐고 물을라치면 그는, “머, 산으로 들로 돌아다녔에요. 갈 곳 없으면 형님 집에……” 라고 얼버무리곤 했다.

식사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도 있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앉아 식사하고 있다. 양씨가 내 옆에 있고, 진옥 씨가 사람들 옆에 서 있다.

그녀는 다리를 절었다. 어떤 사람은 주지의 부모가 그녀가 어렸을 때 수양딸로 데려다 키웠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그리고 우리보다 오래 덕암사에 있었던 탓에 장씨는 절 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장씨는 그녀가 공장을 다니다가 몸이 나빠져서 휴양차 이곳에 와 있다고 했다. 그녀가 딱히 절에서 어떤 역할을 한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공양주 보살을 도와 식사 준비도 같이 한다. 그렇다고 그녀가 전적으로 식사를 책임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녀는 주지 다음으로 절에서 중요한 일들을 관장하고 있었다. 요사채 겨울나기를 주도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장씨를 시켜 요사채 주변 헛간에 비닐로 문을 해 달기도 한다.

장씨는 그녀 말이라면 껌뻑 죽는 시늉이다. 말끝마다 “진옥씨가 불러서……”라고 한다. 진옥 씨가 자기에게 일시키는 것을 자랑스러워하는 것 같은 태도이다.

원래 식사는 대웅전 공사 현장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요사채에서 했다. 그러나 하 사장이 공양주 보살에게 현장까지 점심을 날라다 줄 것을 부탁했다. 겨울이라 날이 짧아 그렇지 않아도 일할 시간이 적은데 점심 먹으러 오르락내리락 하니 일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 추운 데서 식사하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말로 그런 불만을 나타내는 이는 양씨 뿐이었다. 하 사장이 없는 곳에서 양씨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밥 먹는 시간이 을매나 된다구 밖에서 식은밥을 먹게 하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일 그만할 께다.”

양씨는 50이 넘었다. 하 사장이 일을 들볶을 때 가장 괴로워하는 이가 양씨이다. 포를 조각하거나 끌 구멍 파는 데는 이력이 났지만 연목이나 인방 감을 메어 나르는 일에는 몹시 힘들어 한다. 무릎뼈를 다쳐 찬바람이 불면 시리다고 했다. 하사장이 일을 채근하는 눈빛을 보내거나 일을 채근하는 소리를 지를라 치면 양씨는 다른 사람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렇다고 하 사장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할 수는 없다. 세화 김씨는 일꾼들 돈 떼어먹은 적 없고, 품값 주는 날 하루도 넘겨본 적이 없다는 면에서 하 사장이 성실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곤 했다. 물론 세화 김씨도 하 사장이 닦달하는 대상에서 비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조금만 머뭇거리면 하 사장이 세화 김씨의 연장을 빼앗아서, 김씨 말대로라면 미친년 널뛰듯 지랄한다는 것이다.

사장이라고 하지만 하 사장도 함께 일하는 목수이다. 절 공사를 도급 맡아 일하므로 사장이라고 불린다. 하 사장은 입버릇처럼 퇴직금 이야기를 하곤 했다.

“직장 다니는 사람들이야 퇴직금이나 있지. 우리네야 퇴직금이 있나, 절 지어 돈 남으면 퇴직금 쪼로 작은 건물이라도 하나 마련해야 할 텐데, 이것 참 날은 춥지, 일 능률은 안 오르지, 이것 참.”

하사장의 말을 잡고 늘어지는 장씨와 그에 대한 하사장의 대거리는 우습지만은 않다.

“그래, 건물 살 만큼 돈을 거의 모았에요?”

“건물 살 돈 있으면 이 겨울에, 가족을 떠나서 이렇게 고생하겠소? 지금부터라도 열심히 일해서 조금 모아 보려는 거지.”

하 사장은 장씨를 향해 눈을 치뜨고는 쏘아댄다.

“오늘 먹을 것만 있으문 돼요. 배추이파리는 낼모레 썩으니까.”

“돈이 썩는다면 사람들이 일하겠소? 너도나도 오늘 먹을 만큼만 일한다면 겨울엔 어쩔 거요? 굶어죽을 것 아뇨? 벌어놓은 것 없으니.”

“목수가 하루 일 하면 열흘은 먹는데 굶기야 하겠에요? 목수가 일 안 하면 아쉬운 건 사장들이겠지.”

“거 쓸데없는 말 그만 합시다.” 하고 하 사장은 대꾸를 피한다. 배추이파리 공화국(이것은 내가 장씨가 말하는 내용에 붙인 제목이다)을 이야기할 때의 장씨는 이 문제를 대단히 오랫동안, 그리고 열심히 생각해 본 사람과도 같다. 특히 화투판이 벌어질라치면 장씨는 배추이파리 공화국을 실현하려는 사람 같다.

저녁 식사 후 대개는 일찌감치 이불을 펴고 누워들 있다. 잠은 안 잘지라도 지친 몸을 쉬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화투판이 벌어진다. 대개 세화 김씨, 장씨, 나, 그리고 하 사장이 함께 한다. 하 사장은 내일 일을 설칠까봐 일꾼들이 밤늦게 자는 것도 꺼려하였다. 아니면 매일 화투판이 벌어졌을 것이다.

장씨는 화투판에서도 말끝마다 ‘배추이파리’이다. “배추이파리는 썩으세요. 웬만큼만 긁어가세요.”라거나,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만 좋은 것이세요.” 라는 식이다.

장씨가 돈을 따는 날이면 색다른 일이 벌어졌다. 하 사장은 일꾼들이 술을 먹는 것도 꺼렸다. 역시 내일 일을 설칠까봐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장씨는 하 사장의 그런 눈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 화투판이 끝나고 돈을 세어 보고는 장씨는 기세 있게 말한다.

“내가 이만큼 땄에요. 배추이파리 석장. 이걸 나 혼자 집어넣으면 배추 이파리가 썩어요. 술을 사오겠에요.”

그런 다음 예의 그 등산화를 신고는 산을 내려간다. 장씨는 술과 안주 등속을 사되, 과일이나 음료수, 과자 등속을 넣은 다른 꾸러미 하나를 더 만들어 온다. 그러고는 그것을 공양주 보살과 진옥 씨가 있는 방 안에 밀어넣어주곤 한다. 장씨와 진옥씨가 하는 이야기가 우리들이 자는 방까지 들려온다.

“공양주 보살은 잠들었어요. 저두 먹기 싫어요. 갖다 잡수세요.”

장씨는 막무가내로 들이미는 모양이다.

“우리는 술과 안주가 있에요. 두었다가……”

장씨는 우리 방으로 돌아온다. 우리는 모두 장씨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숨 잠들어 있던 사람들까지 술 소리에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난다. 저녁 식사 후 시간도 적당히 지난 후라 술 한 잔은 그야말로 몸을 녹아나게 한다. 장씨가 돈을 따기를 바라는 것은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새삼스레 장씨의 배추이파리공화국을 되뇌며 잠드는 것이다. “배추이파리는 꼭 필요할 때에만 가치가 있에요.”

신정이 다가와 우리는 일을 며칠 쉬기로 했다. 우리가 쉬겠다고 한 것이기보다는 하 사장이 결정했다는 것이 더 정확하다. 나이 많은 축들은, 명절이란 구정이니 신정에는 일하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하 사장은 역시 일 능률을 먼저 생각한다.

“일이 안 돼요, 남들 쉴 때 일하면.”

일을 쉬기로 했다면 의당 일하던 사람들은 집으로 간다. 그러나 장씨는 마땅히 갈 데가 없는 눈치였다. 장씨를 제외하고 우리는 모두 집으로 갈 준비를 했다. 두어 달 만에 집에 가는 것이요, 한꺼번에 받은 임금봉투도 두툼해 사람들은 흥에 겨워했다. 홀로 남게 된다는 생각 때문이라서 그런지, 장씨가 조금 쓸쓸해 보여 나는 말을 걸어본다.

“돈 받으니까 모두 기분들 좋아하네요. 이게 배추이파리라 한다면 사람들 기쁨이 줄어들지도 모르겠네.”

적어도 배추이파리를 화폐로 쓰자는 발상에 관해서만은 장씨 대답은 경탄스러울 정도이다.

“그 반대일지도 모르잖겠에요?. 배추이파리 한 보따리씩 갖구 가지만, 도중에 썩어버릴 테니까 나한테 한 주먹씩 나눠줄 것 아뇨, 술두 먹구, 진옥 씨 허구 맛있는 것 사먹으라구. 주는 사람 즐겁지, 받는 사람 기쁘지, 이형 생각과 같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에요?”

나는 웃으며 또 농쳐본다.

“그럼 진옥 씨 하고는 잘 되어가는 중이란 말예요? 아이구, 고목나무 꽃 필 일 생기네.”

장씨는 황망히 손 저으며 부정한다. 마치 나에게 달려들 기세이다.

“그런 게 아니라, 진옥 씨도 지금은 돈을 못 버는 처지이니 나누어 쓸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지, 내가 어떻게 진옥 씨와 잘 되어갈 수 있겠에요?”

며칠 집에서 쉬고 다시 덕암사로 왔을 때 장씨만이 덩그런 요사채를 지키고 있었다. 인기척이 있자, 진옥씨가 어디선가 나타나 잠깐 얼굴을 보이곤, 다시 어디론가 박혀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은 밤늦게 도착할 것이다. 장씨가 절에 남아 있는 것이 조금 의아했다. 하다못해 극장이라도 가거나 술 한잔 하러 갈 수도 있었을 텐데 왜 무료히 요사채에 머물러 있을까.

저녁 준비를 할 때에야 무엇인가 느낌이 왔다. 일꾼들이 집에 가자 공양주 보살도 멀리 나들이한 터여서 식사 준비를 할 사람은 진옥 씨뿐이었던 것이다. 진옥 씨가 주방으로 들어가는 기척이 있자 장씨가 아주 익숙한 듯이 주방으로 갔다. 상을 내려 수저 등속을 준비하고 밥통을 열어 밥을 푼다. 진옥 씨가 한 일이란 국이며 찌개를 만든 것뿐이다. 마치 신혼부부가 다정스레 저녁을 준비하는 것 같은 정경이었다.

식사 후 장씨는 술 한잔 하자며 나를 이끌었다. 산길을 내려가면서 장씨가 말했다.

“이형이 하 사장과 일 한지는 얼마 안 되었다면서요?”

아마도 하 사장이 말을 한 모양이다.

일하겠다고 찾아온 내게 하 사장은 나의 목수 경력을 물었다. 목수들은 대개 함께 일하러 다니는 사람이 있기 마련인데, 목수가 일하겠다고 혼자 현장에 찾아오는 법은 드물다. 하 사장은 마땅히 물어볼 만하다.

나는 하 사장에게 사정을 말했다. 목수일 하기를 몇 년 쉬었다. 쉬는 동안 장사를 했다. 그러나 장사도 잘 안되어 다른 밥벌이를 찾아야 했다. 가장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목수 일이었다. 함께 목수 일을 하던 옛 동패들을 찾아보니 모두 흩어져 있었다. 할 수 없이 나 홀로 떨어져 일거리를 찾아다니고 있다. 그러니 내게 일을 시켜다오.

나는 장씨에게 말했다.

“이럭 저럭 하 사장과 함께 일한 지 일년이네요.”

시내에 이르자 장씨는 앞장서 술집으로 들어갔다. 여러 종류의 술을 파는 집이었다. 장씨는 국산 양주를 시켰다. 나는 생맥주를 마시는 편이지만 장씨 주문을 막고 싶지도 않았다. 양주도 그 독특한 맛이 있지 않은가. 나는 계면쩍게 웃으며 말했다.

“간조했다는 말이지요, 비싼 양주를 산다는 게? 좋아요, 홀가분한 총각이 한번 써 보시오. 나는 다음에 생맥주를 사겠소.”

그는 소리나게 양주 한 잔을 마시고 말했다. 아니, 빨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원래 나는 양주를 마십니다. 공사판 슬슬 따라다녀도 양주 마실 만큼 벌지 않겠에요? 머, 이렇게 사는 거지요.”

나는 그가 돈이 생기면 들로 산으로 돌아다녔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는 말했다.

“양주 마시면 산에는 언제 갑니까? 돈 모아야 산에 가서 몇 달 살 것 아닙니까?”

“갈 형편이 되면 가지요. 산이나 들도 따뜻한 때라야지 지금 같은 겨울이야 어디 적당하겠에요? 지금은 들이나 산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형과 술 한 잔 하자고 했에요.”

“어떤 이야기입니까?”

“이형 중매 해 봤에요?”

“아니요.”

“중매 한 번 해 보겠에요?”

“누구와 누구를?”

“나와 진옥 씨.”

“네?”

나는 비록 다리를 절지만 자태가 빼어난 진옥 씨를 떠올려 보았다. 답이 금방 나왔다. 속으로 조용히 머리를 흔들고는 술을 들이켰다.

“당사자끼리 부딪쳐 봐야 해결날 일 아닐까요? 데이트하자고 이야기해 보시지, 진옥 씨한테?”

“그렇잖아도 식사하러 나가자고 이야기 했더랬에요. 그런데……”

“진옥 씨가 거절합디까?”

장씨는 대답을 피했다. 그러고는 딴 말을 한다.

“진옥 씨가 이형을 좋게 생각하는 눈치였에요. 진옥씨가 그럽디다. 이형은 일 잘하는 목수라고. 또 노가다 티 내지 않고 젊잖은 사람이라고.”

“나를 좋아한다면 비참한 일이 생기지. 나는 결혼했는데. 이건 농담이고, 그래서 내가 말하면 진옥 씨가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할 거란 말이군요?”

나는 좀더 장씨의 개인사를 알고 싶어졌다. 묻고 들은 결과는 짐작했던 대로였다. 재산도 없다. 조실부모한 후로 형님 밑에서 컸다. 지금도 형님 집에서 얹혀 사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형님이 부자도 아니다. 독립해 볼 생각은 여태 하지 않고 살았다. 따라서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다. 공부도 많이 하지 않았다. 내가 장씨에게 말했다.

“장성한 조카들이 각자 제 밥벌이하는데 장씨 혼자 벌어 혼자 쓰기도 바쁘다면 형님이나 형수 눈총 받을 텐데?”

“내 이래 봬도 국수 뽑는 기술자였에요. 형님이 오랬동안 물국수 공장을 했었거든요. 형님댁에서 내가 쓸모 없는 인간은 아니었에요. 눈총 받을 일 없었에요.”

“그러나 지금은 결혼할 준비도 안 되었다는 게 문제지요. 공장을 했으면 형님이 장씨 월급도 챙겨 놓았어야 할 것 아니오?”

“월급을 따로 챙길 만한 공장이 아니었에요. 여러 식구 굶지 않고 먹고 사는 것으로 족했에요.”

“그러니까 형님 가족들을 위해 일했다? 좋아요, 장형이 배추이파리를 돈으로 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답게 살았다고 합시다. 그러나 지금 가정을 꾸릴 만 한 준비가 안되었으니, 진옥 씨 문제를 이야기할 처지는 아닌 것 같아요. 결혼할 준비만 되어 있다면 장형이 진옥 씨에게 직접 의중을 떠봐도 전혀 이상할 리 없죠. 그러나 지금 장형이 할 일은 청혼이 아닌 것 같네요. 하 사장 몇 년 착실히 따라다니면서 돈을 모으는 일 갖네요.”

장씨는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더이상 진옥 씨를 화제로 올리지 않고 술만 마셨다.

덕암사는 조금씩 형체를 갖추어 갔다. 양씨는 여전히 힘이 부쳐 보이되 견디어 나갔다. 장씨는 특별히 요령을 피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 등산화가 항상 그를 방해했다. 하 사장은 장비를 쓰지 않고 순전히 사람 힘으로 절 구조를 짜 맞추어 나갔다. 대웅전 중심에 크고 긴 촉대를 세우고 도르래를 매달아 대들보와 서까래 등속을 끌어올려 지붕을 짜맞추는 식이다. 양씨는 하 사장이 없을라치면 항상 한마디 한다.

“크레인 불러 (대들보) 들어올리면 얼마나 편해? 몇 푼 아끼려고 사람을 이리 잡누? 에이, 이번 일 끝나면 나는 집으루 갈란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양씨를 비롯해 누구 하나 하 사장 앞에서는 불만을 말하지 않았다. 덕암사 일을 마치면 북악사 종각을 짓기로 되어 있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종각은 대웅전 짓는 것보다는 사람이 덜 필요하다. 목이 잘리지 않고 하 사장과 함께 일하려면 열심히, 말없이 일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 알고 있었다.

덕암사 일을 마무리하면서 하 사장과 세화 김씨 둘만 소근거리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북악사에 가서 종각 지을 일을 계획하는 것이다. 누구누구를 데리고 갈 것인가를 의논할 것이다. 그들 둘은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일일이 확인하고는 이야기를 시작한다. 세화 김씨가 이야기했다.

“북악사 옹벽 거푸집 짤 때에도 이씨 혼자는 어려울 거라. 그러니까 장씨도 한몫 쓸 만할 거라요.”

하 사장이 나를 돌아다보며 말한다.

“이씨, 옹벽 거푸집쯤이야 혼자 할 수 있죠? 안영사 기단 거푸집도 이씨 혼자 잤는데, 뭘.”

내가 혼자 못 한다고 해서 장씨를 데리고 갈 하 사장이 아니다. 나는 그저 머리를 주억거릴 뿐이다. 그러자 하 사장은 김씨를 돌아보며 말한다.

“장씨를 데리고 간다 해도 옹벽 거푸집 짤 때만 필요할 뿐이잖소. 그러니까 장씨는 뺍시다.”

결국 장씨가 북악사 일에서 제외되었다. 장씨는 대단히 실망하는 눈치였다. 그래서였을까, 장씨는 하나터면 사고날 뻔 했다. 밤새 서리가 내린 아침이었다. 장씨와 나는 대웅전 지붕에 올라갔다. 지붕 상판을 덮던 어제 작업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장씨가 상판을 덮고 남은 재료를 밟고 미끄러졌다. 장씨는 미끄러지면서 허둥대다가 연목 끝에 박아놓은 발비를 잡고 나서야 간신히 미끄러지기를 멈추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다가가 장씨를 끌어 올렸다. 장씨는 간신히 지붕 위로 올라왔다. 장씨가 손이 거북스러운 듯한 몸짓을 했다. 나는 장씨의 장갑을 벗겨보았다. 장씨의 한 손가락 손톱이 벗겨져 있었다. 나는 그 손톱을 바로 펴고는 헝겊으로 싸매었다. 장씨는 내게 말했다.

“누구에게도 이 일을 말하지 맙시다. 말 나면 하사장 귀에 들어가고, 안전사고로 하 사장을 걱정시키면 들볶이는 것은 일꾼들이니.”

상량식날 밤에도 장씨는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그것은 사건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덕암사 세면장은 작았다. 두 사람 간신히 씻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일을 마치고 얼굴과 손 발을 씻을라 치면 북새통이었다. 나는 혼잡을 피해서 저녁을 먹고 나서 세면장에 씻으러 가곤 했다. 그날도 느긋하게 혼자 씻고 있었다. 세면장에 들어와 작업복을 벗던 장씨의 주머니에서 무엇인가가 바닥에 굴러 떨어졌다. 장씨가 갑자기 허둥대며 그것을 주어들고 안절 부절 못했다. 그것이 무엇인가를 내가 안 것은 잠깐 후의 일이었다. 금반지였다!

상량식 하는 날 신도들은 대개 불전과 함께 몸에 지니고 있던 패물들을 단 앞에 꺼내 놓곤 했다. 패물들은 따로 추려서 대들보 한 쪽 홈에 넣어 봉해졌다. 나는 장씨를 뜨아 하게 바라보았다. 잠시 후 장씨가 말했다.

“이형, 죄송합니다. 모른 척 해 주세요.”

이윽고 덕암사 일을 마치는 날 일하던 사람 모두 시내에서 회식을 했다. 절로 돌아오기 전에 나는 장씨를 술집으로 이끌었다. 생맥주를 마시면서 장씨는 하 사장에 대한 불만을 자제했으나 쓸쓸함을 숨기지 않았다.

“덕암사에 같이 왔던 토목공사 패거리를 따라가지 않았던 것은 물론 공사 뒷마무리 작업과 요사채 일 때문이기도 했에요. 그러나 내 의중은 토목공사를 배우는 것보다는 절 일을 배우는 것이 좀더 품격이 있어 보였에요. 그런데 북악사 공사에는 데리고 가지 않겠다니 조금 챙피하네요.”

나는 할말이 없었다. 양씨는 세화 김씨와 처남 매부지간이다. 따라서 사람이 많다 해도 양씨를 집으로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또 목수들은 대개 하 사장과 오래 일한 사이이다. 따라서 장씨가 밀려나지 않았다면 내가 밀려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밀려나는 것이 일할 곳이 없다거나 돈 때문에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목수라고 간판 걸고 다니다가 일터에서 쫓겨난다면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다. 연장가방을 메고 다니는 것을 은근히 자랑스럽게 생각해 온 터에 일 못해서 집으로 돌아간다면 체면이 말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만약 하 사장이 나를 자른다면 나는 가만히 잘리고만 있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데리고 간다 해도 당신 손해 안 끼친다. 내 품값 내가 벌어먹을 수 있다. 사람 하나가 더 있으면 다른 사람들 일도 줄어들고 공사 기간도 그만큼 빨라질 것이 아니냐. 그러니 나도 데리고 가라.’ 그러나 내 코가 석자인 터에 장씨를 돌보아 줄 만한 여력이 내게는 없었다.

나는 장씨에게 앞으로의 거취를 물었다.

“스님이나 진옥 씨 모두 (내가)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면 절에 머물러도 된다고 하세요. 절 살림도 크니까 일할 사람 하나쯤은 필요하다고. 그러나 머, 내가 절에 있을 사람은 아니고……”

“여기 덕암사에서 겨울을 나는 것도 좋겠네요. 봄이 되면 어디 가서든 일 할 수 있을 테니까.”

나는 웃으면서 장씨에게 말했다.

“그동안 진옥 씨하고 잘해 보세요.”

장씨는 헤벌쭉 웃으며 술을 들이켰다. 지금의 장씨 상황에서 진옥 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장씨에게는 희망이요 기쁜 일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북악사 공사 현장은 자동찻길에서 한참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자동찻길에서부터 지게로 일일이 연장이며 나무를 현장까지 져 날랐다. 그리고 기둥과 대들보 등은 목도를 해 날랐다. 좀처럼 불평을 하지 않는 세화 김씨가 지게를 지고 가다가 쉬면서 한마디 한다.

“장씨를 데리고 왔으면 얼마나 좋누? 이렇게 힘쓸 일이 많은데 꼭 필요한 사람만 데리고 와서는 사람 들볶는다니까. 저만 퇴직금 없나? 저만 빌딩 가져야 하나? 사람을 좀더 써서 우리 일을 덜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어, 김씨에게 물었다.

“덕암사 상량할 때 주지가 돈 좀 안 놓았어요?”

“놓았겠지요.”

“누가 보관하고 있나요?”

“하 사장이 가졌겠지요.”

“그 돈 언제 나눠줄까?”

양씨가 내달아 말 했다.

“하 사장은 돈 안 나눠줘. 상량해 보아야 여태 맥주 한 잔 없었어.”

“상량 돈은 대개 나누 갖잖아요? 기와쟁이들 몫까지 나눠주는 법인데?”

김씨가 거들었다.

“내가 하는 이야기가 그거라요. 도대체 자기 뱃속만 생각하니, 이거 해 먹겠느냐고.”

북악사 일이 한창일 무렵 장씨 소식을 들었다. 북악사 주지가 모임을 갔다 와서 장씨 이야기를 했다. 덕암사 주지에게 들은 이야기라고 했다. 절 공사 후 뒷일이 많기도 하고 마땅히 갈 곳도 없어 보여 장씨를 덕암사에 있으라 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는지 며칠을 술에 취해 들어왔다. 그러더니 며칠 전 새벽녘에 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취해 쓰러져 장독처럼 몸이 굳어 있는 장씨를 발견해 병원으로 옮겼으니 와 보라.

의사에 의하면, 온 몸에 동상을 입어 조금만 늦게 발견했더라면 목숨이 위태로울 지경이었다는 것이다. 장씨를 병원에 옮긴 경찰이 덧붙이기를, 죽으려고 작정했는지 누워 있던 자리에 소주병이 여러 개 있었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한마디씩 했다.

“얹혀 살던 주제에 사고 쳤으니 절에서도 쫓겨나겠네. 이제 어디로 가누?”

“배추이파리만 찾더니 배추이파리도 필요 없는 나라에 갈 뻔했군.”

그러나 나를 비롯해서 우리 중 누구 하나 장씨를 문병 갈 만한 사람은 없었다. 공사판에서 만난 사람은 현장 일이 끝나면 인간 관계도 동시에 끝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덕암사 사진을 볼 때마다 장씨에게서 들은 배추이파리 이야기는 생각해 볼수록 항상 새로운 느낌을 준다. 나는 만 원 짜리 한 장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뇌어 보았다.

“이것이 배추 이파리로 만들어졌다 하자…”

빈 집[노동이야기]-①

빈 집[노동이야기]-①

이재원(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예전에 살던 집, 팔려고 내어 놓았으나 팔리지 않는 집이다. 엘리베이터 없는 구식 6층 아파트이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쩐지 편안하다. 씽크대와 가스렌지, 그리고 컴퓨터 책상을 빼고는 휑하게 비어있다. 배낭을 내려 집을 꺼내고, 거실에 텐트를 쳤다. 가을이 깊었다. 실내에는 냉기가 감돌았다. 침구가 없다. 배낭에서 옷을 있는대로 꺼내 입었다.
들어오면서 사온 맥주를 마셨다. 제과점에서 산 호떡을 안주 삼았다.
추석 전에도 여기 와서 머무르면서 목수 일을 했다. 신도시가 들어서고, 대공장이 들어서는 이곳은 일감이 많다. 빈 집에 온 이유도 일 다니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고 일어나 봐야만 이 집에서 머무르며 계속 일할 수 있을지 알 것 같다.
해미와 고북 일대에는 공장이 없었다. 몇 년 전 홍성군에서는 경사라도 난 듯이 대기업인 Y전기 공장을 이곳에 유치하기로 했다는 계획을 홍보했다. 지역 신문에 대문짝만 하게 실리고 군수와 회사 간부가 계약서에 서명하는 사진이 실렸다.
Y전기에 일하러 다닐 때 어떤 목수가 말했다.
“공장이 들어오면 그 동네는 끝난거야.”
그는 환경오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Y전기에 일하러 갔던 날들을 잊을 수 없다. 아파트형 기숙사를 짓는 공사는 지하층을 마무리한 다음, 1층을 건설하고 있었다.
첫날은 하스라 통(기둥 거푸집)을 짰다. 오랫만에 하는 목수 일이었다.
기둥 폭은 80×80cm이었다. 비교적 간단한 작업이다.
ⅰ) 기둥 위치를 표시해 놓은 먹 선에 미리 반장이 맞추어 놓은 수평 표시까지 네모도(수평표시 높이까지 바닥에 나무 각재를 높여주는 작업)를 깔아준 다음,
ⅱ) 측면 표시 먹선에 맞춰, 120×60cm 크기의 폼(철재 테두리에 합판을 댄 형틀재)을 을 세워 준다.
ⅲ) 세운 폼 양 옆에 아웃 코너(120×꺾어진 20cm의 철판 형틀)를 핀으로 고정시킨다.
ⅳ) 폼을 네 면에 세우면 우선 기초 형틀이 완성된다. 기둥 높이가 400cm이므로 높이에 맞춰 폼을 세워 올라간다.
이 때
ⅴ) 기둥 중간에 타이(중력에 의해 거푸집 변형이 일어나지 않도록 고정해주는 철로 된 띠)로 폼과 폼을 연결시켜준다.
부분적인 작업이긴 하지만, 유능한 목수의 머릿속에는 부분과 부분을 합쳐, 건물이 완성되는, 이른바 구상력이 있다. 구상력이야말로 정교하게 집을 짓는 꿀벌보다 목수가 우월하다는 증거이다.
남쪽에서는 폭풍이 올라온다는 기상청의 보도가 있었다. 바람이 몹시 강했다. 나와 두 사람은 하스라통(기둥 거푸집)을 짜고, 몇몇은 야기리(벽체를 세우기 위한 형틀의 한쪽 면)를 크레인으로 떠서 세우는데 소란하기 짝이 없었다. 바람이 이토록 강한데 크레인을 쓰다니, 일하는 사람이나 시키는 사람이나 조심성도 없다는 생각을 했다. 한 켠 무섭기도 했다. 하나 짜 놓은 하스라통도 바람에 날려 넘어갈까 무서웠다. 나는 하스라 통 네 귀퉁이에 2미터 강관파이프로 지주대를 세웠다. 내가 짠 것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이전에 짜 놓은 것도 모두 지주대를 세우는데, 반장이, “그거 하지 말고 하스라통 짜” 라고 이르고는 부리나케 걸어갔다.
기둥 하나를 완성하고 두 번째 하스라통 짜기는 쉽지 않았다. 철근을 근 8미터 높이로 세워 놓았다. 이것이 기울어져, 수직이 안 맞으니 하스라 통 안에 넣을 타이(콘크리트 타설시 중력에 의해 형틀에 변형을 방지하기 위해 양 옆 기둥 형틀을 고정시키는 쇠로 된 띠장)를 밀어내는 바람에 도통 핀을 끼울 수 없었다. 철근을 바로잡고 간신히 끼우려는데 이번에는 외부 폼 코너가 맞지 않았다. 다른켠에서 하스라 통을 짜는 최씨에게, 이런 경우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다. 현장에서 선임자의 경험은 중요하다. 잘 모르는 것은 무조건 물어봐야 한다. 최씨는 내가 짜던 하스라통에 올라갔다. 그가 잘 맞지 않는 타이와 씨름하는 사이, 나는 다른 기둥을 짜는 작업 준비를 했다. 빨리 일하는 요령은 미리 준비해 놓고 일을 시작하는 것이다. 한참 후 최씨가 하스라 통에서 내려왔다. 내가 그에게 다가가니, “외부 코너가 잘 안 맞는다. 긴 코너를 잘라서 다시 짜야한다”고 했다. 재료 새 것을 잘라 쓴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하청회사 사장이 볼라치면 크게 봉변당할 수도 있다. 형틀 재료값이 무척 비싸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점심 먹으러 식당 쪽으로 갔다. 못주머니를 벗어놓고 그들 뒤를 따라 갔다.
일 할 걱정에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했다. 이빨까지 아팠다. 남들은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하거나 드러누웠다. 나는 하스라 통 앞에 앉아,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지 걱정했다.
한 시가 되면 일 시작한다. 나는 아웃코너 온 장(2미터 40센티)을 전동 커터를 사용하여 반으로 잘랐다. 하단 네 개는 잘 맞는 것으로 짜 올렸고, 2단 두 개는 잘 맞지만 다른 두 개가 맞지 않았다. 다른 것에 비해 조금(약 1cm) 컸다. 따라서 잘 맞는 사이즈의 코너를 두 개 준비하면 된다.
일하기 전, 기둥을 완성할 재료들을 모두 준비해 놓았다. 아웃코너와 폼, 타이, 핀 등속을 준비했다. 그러나 누군가가 내가 작업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집어갔다. 그 누군가는 작업 재료는 풍족하지 않고, 빨리 일은 맞춰야 하는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짐작은 가지만, 뭐라고 말 할 수는 없다. 그는 늙었고, 일을 잘 못하는 조공이다. 함께 일하는 목수가 빨리 재료를 구해 오지 못하면 그에게 핀잔 할 것이다.
자른 재료는 잘 맞았다. 참 다행이었다. 짜고 있는데, 반장이 지나가며 한마디 했다.
“빨리빨리 좀 짜. 이거 짜고, 저기 저것도 마무리 해. 목수 맞어?”
괜히 주눅 들었다. 오랜만에 하는 통에 일하는 것을 잊어버린 것도 많다. 처음 보는 재료도 있었다. 바싹 꼬리를 내리고 다른 사람들이 짜다 만 하스라 통을 노바시(하스라 통 도면 높이까지 올리는 일)했다.
목수 일은 시간이 잘 간다. 일이 잘되면 잘 되는대로, 일이 잘 안되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고민하는 통에 하루가 금새 지나간다. 일이 끝날 때면 나도 모르게 들국화의 〈사랑한 후에〉를 흥얼거린다. “긴 하루 지나고 언덕 저편에…”, 하루가 갔다는 뜻이다. 시몬느 베이유, 젊은 나이에 요절한, 김나지움 교수를 하다가 르노 자동차에서 일한 그이는 작업대에서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다르다고 말했다. 일하는 하루 지나간 것이 그토록 고맙고 즐겁다. 사실 따지자면 귀중한 하루인데, 그 날이 지나간 것을 이토록 반가워하다니 역설이다.
용역회사로 가는 승합차를 타고 돌아오는데, 우리를 태워준 목수가 시속 150킬로미터로 달렸다. 무심코 앞에 올라탔던 나는 혼비백산했다.
이씨가 돌아가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내 고향 근처 창리에서 왔다. 인사를 나누면서 함께 저녁식사를 하기로 했다.
이씨는 용역회사에 왔을 때 반짝반짝 빛나는 군화(워커)를 신고 있었다. 나중에, 자기의 전직이 밤무대 연예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승용차 기름값이나 운행 거리를 비교해 보고는 아예 창리 집으로 가지 않고 찜질방에서 머물고 있었다.
이씨가 찾아낸 식당이 〈밴댕이집〉이었다. 여주인은 경상도 사투리를 썼다. 그러나 손님들 이야기를 종합해 보자면 그녀는 고향이 이곳이었다. 여성의 나이를 짐작할 수 없으되 50대 초반으로 보였다. 고향의 언어를 잊어버리고 타향의 사투리를 쓴다는 것은 그녀의 인생 역정을 알 수 있게 한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것을 짐작한 듯, 일당을 물어보던 그녀는 무척 놀래는 듯한 표정을 했다. 식당이 일당만큼 벌리지 않는다는 뜻이리라. 그러나 그녀는 한 가지 오해를 했을 것이다. 우리의 일당을 한 달 30일 곱하기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나가는 목수도 일 년에 200일밖에 일할 수 없다. 하물며 늙은 노동자인 내가 일하는 날이라야 1년 60일이 고작일 것이다.
이씨는 여주인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는 소주를, 나는 막걸리와 맥주를 먹었는데, 여주인에게 와서 맥주 마시기를 청했다.
몇 일간 Y전기에서 일했다. 일을 다니는 와중에 반장이 노인 김씨와 손을 맞춰 일하라고 지시했다. 그 날은 속고(철근 콘크리트 보를 올릴 밑받침틀) 세 개를 자고, 벽체 눈썹(벽체와 천정 사이를 콘크리트로 보강하기 위한 작업)을 빼라고 했다.
김노인은 성미가 급했다. 하리 길이를 재는데, 마구 설쳐 댔다. 내가 하는 일이 어설퍼 보였는지, 데모도(조공) 대하듯이 이것저것 시켰다. 군말없이 그가 요구하는대로 기계톱 다이로 가서 합판을 45 센티로 잘라오고, 하리 받침목을 준비했다. 김노인은 걷는 것을 불편해 했다. 멀리 있는 기계톱 다이까지 갔다 오는 것은 그에게 힘든 일이다.
속고 세 개를 짠 후에는 눈썹을 뽑기 위해 벽체의 미진한 곳을 마무리했다. 마구리통(벽체 형틀 양 측면을 고정해주기 위한 판넬)을 붙이고는 형틀이 벌어지지 않도록 타이로 이어, 핀으로 고정시켰다. 그 때 뚱뚱한 목수(울산이 집이라 했다)가 와서 잠시 자기를 도와달라 했다. 무심코 따라가, 그와 함께 야기리에 타이와 핀을 설치하는데, 김씨가 나에게 와서 아주 강력한 어조로 말했다.
“이씨, 이리로 와요. 우리 둘이 반장이 시킨 것을 해야 한단 말이오.”
나는 울산 목수를 바라보았다. 그가 생글생글 웃으며 김씨에게 사정한다.
“조금만 도와주면 돼요. 좀 봐주세요.”
김씨는 굽히지 않았다.
“안돼요. 반장이 우리 두 사람에게 이것을 하라 했단 말이요. 이씨, 이리 오소. 일 못했다고 쫓겨갈 참이요?” 라고 했다. 뚱뚱한 이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는 원래 자리로 돌아와 일했다. 잠시 후 뚱뚱한 이가 다시 왔다. ‘반장에게 나를 데려다 쓰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를 도와 벽체 타이 핀을 꽂았다. 뚱뚱한 이도 두 명이 한 조가 되어 일하고 있었다. 근데도 기어코 나를 데려왔는가, 궁금해서 물으니 “저 사람은 빨리 벽체 폼 짜야 돼요”라고 했다.
김씨의 말이 사실인가 보다. ‘일 못해서 쫓겨간다’는 말이 능률을 못 올리면 쫒겨간다는 뜻인가 보다.
몇 일 후 김씨는 용역 소장으로부터 14만원에서 12만원으로 일당 조정한다는 통보를 들었다. Y전기 건설 현장 소장이 목수 몇 명을 찍어 일당을 조정하겠다고 알려왔다.
김씨는 속상해 했다. 나는 위로 같지도 않은 위로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아저씨. 그냥 다니세요. 12만원 받으면 적어도 일에 대해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되잖아요. 편히 일할 수 있잖아요. 걍 다니세요.”
나는 김씨가 왜 일당을 깎였는지 생각해 보았다. 몇 일 전 여러 명이 크레인으로 속고를 들어 올린 후, 도면 먹선에 맞춰 올리는 일을 했다. 김씨와 내가 한 조가 되어 김씨는 나에게 아시바 대(철재 지지대)를 주면, 나는 그것을 받아 우마(1mm 높이의 발판) 위에서 속고 아래에 밭치는 일을 했다. 김씨는 힘들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속고를 올린 후, 김씨와 나는 속고 위에 폼을 받는 작업을 했다. 대개는 지상에서 속고를 콘크리트 보 원형대로 짜서 크레인으로 올린다. 그러나 이번의 작업은 지상에서 완성하기 곤란할 정도로 높이를 맞추기 여려운 면이 있었다. 폼을 눕히면 높이가 부족하고, 폼을 세우면 속고 바닥까지 약 30cm가 뜨게 된다. 이래저래 난감한 반장은 속고만 올린 후 그 위에 사람이 올라가서 보의 양 측면에 폼을 대고 못을 박아 완성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폼을 사람 손으로 들어올리기 어려우니, 한 열 장씩 포개 싼 후 크레인으로 들어 올려 속고 위에 올려놓는 작업이 폼 받기이다.
4m 높이의 40cm 넓이의 공중에서 크레인으로 집어올린 폼을 받아 내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남, 나 할 것 없이 자세가 어정쩡할 수밖에 없다.
그 다음에는 앞에서 이야기한 대로, 속고 양 옆에 도면 높이대로 폼을 못으로 밖아 고정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 역시 무거운 폼을 가누어 못 박기 쉽지 않다.
현장소장이 어디선가 작업을 지켜보았던 모양이다. 그리고 몇 명을 찍어내, 일당을 깎았다.

빈 집에서 자는 것이 쉽지 않았다. 온통 옷을 끼워 입고 가디건을 덮고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니 몸이 찌뿌둥했다. 일하러 가기 싫었다. 그러나 빈 집은 마음이 편안했다. 배낭에는 등산장비와 반찬이 들어있었다. 꺼내어 찌개랑 밥을 해 먹었다. 주인 몰래 다락방에서 살던 〈나가사끼〉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기억났다.
“누구든 자기가 살던 집에 들어가 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텐트를 접고 짐을 꾸리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오늘 경상도로 내려가세요. 팀장의 전화번호를 메세지로 보내겠습니다. 내려가서 (팀장에게) 전화하세요.”

또 다시 찾아 온 이별[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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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딸을 보내다

세월은 빨리 가라고 재촉하지 않아도 잰 걸음으로 가고 있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고 봄이 다시 오기를 몇 번 되풀이하자 험하고 삭막하기만 하던 산이 사람들을 품어 주었다. 그들이 사는 산속 마을에도 햇살이 찾아와 주었고 바람도 놀러 와 주었다. 다람쥐들은 도토리를 나누어 주었고, 새들은 음악을 들려주었다.

폭풍 같은 시간들이 지나고 생활이 안정되자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사람이 사는 곳에 문제가 없을 리 없겠지만, 할머니에게 다가온 문제는 깊이 묻어 두었던 상처를 꺼내는 것이기도 했다. 죽음의 길을 가는 엄마를 끝없는 울음소리로 돌려 세웠던 그 딸을 이제는 할머니 스스로 떠나보내야 했다.

살리기 위해 아들을 떠나보냈는데, 이제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딸을 보내야 했다. 딸이 자라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걱정은 시작되었다. 딸은 소위 말하는 ‘미감아’였다. 예쁘고 영리했지만 아이를 따라다니는 꼬리표는 절대로 떨어지지 않을 것임을 할머니는 알고 있었다. 자라면서 말이 없어지고 침울해지는 아이를 보면서 할머니는 다시 이를 악물었다.

어머니이기 때문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밤이 오면 마당을 나와 밤이 새도록 서성거렸다. 달빛에 마음이 아리고 가슴 깊은 곳에서 까닭모를 설움이 올라왔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나면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기도 했다. 그때마다 살아가는 유일한 희망이지만, 그 희망을 모질게 끊어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울산에 있는 저거 큰 아부지한테 보내기로 했다. 큰 엄마도 보내라 카대. 데리고 있으모 안 된다고…” 딸아이는 큰 아버지 집으로 간다는 말에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어린 마음에도 알았던 게지. 지가 여기 있으모 어떤 소리를 듣는지.” 단순하게 거주지를 옮기고 학교를 옮긴다고 ‘미감아’라는 꼬리표를 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몇날 며칠을 서로 말없이 얼굴을 외면했다.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해 서로 눈치만 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알고 있었다. 아이를 영원히 보내야 한다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넘어가고 있었다. 아이는 곧 4학년이 될 것이다.

2. 그림자로 남은 엄마의 자리

“4학년 올라가기 직전에 갔다.” 할머니는 창밖을 바라보며 마치 지나가는 사람을 향해 툭 내던지듯이 말했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큰 아버지 손을 잡고 갔다. “호적도 파 줬다.” 딸은 그날 이후 법적으로는 할머니의 딸이 아니라 조카가 되었다. 아이를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덧나는 상처를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한센병이 찾아 온 이후로 할머니는 할 수 있는 일보다 할 수 없는 일이 더 많았지만, 자식을 보내야 하는 것만큼 힘든 일은 없었다. 이제는 만나도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승팔이에 대한 그리움과 먹고 살 수 있는데도 보내야 하는 딸에 대한 애잔함이 할머니를 깊은 절망의 늪으로 끌고 갔다.

분명히 나의 일인데 내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어떻게 살아나가야 할지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 할머니는 그냥 가만히 있었다. “우짤기고. 내가 뭐를 할 수 있겄노. 그냥 숨만 쉬었제.” 그런 할머니를 할아버지는 위로하고 따뜻하게 품어 주었다. 가까이 있으니 만날 수 있다고, 여기서 사는 것보다 훨씬 잘 되었다고, 그렇게 도닥거려 주었다.

할머니도 이제는 죽음을 생각하지 않았다. 악착같이 살아야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 깊이 묻어 둔 그리움은 차마 입 밖으로 낼 수가 없었다. 그립다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겠지만, 그 말도 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골목길을 뛰어 나올 때 등 뒤에 들리던 승팔이의 울음소리만 귓가를 떠나지 않았다.

그 울음소리를 떨쳐내기 위해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을 했다. 닭모이를 주고 똥을 널어 말리고, 계란을 모았다. 돼지우리를 밤낮 없이 치우고 또 치웠다. 잠시 허리를 펴고 하늘을 보면 새파랗게 날이 선 서러움이 밀려와 눈물이 흘렀다. 그 옛날처럼 말도 못하고 우는 게 아니라 아이가 보고 싶어 운다고 말할 수 있어서 울고 또 울었다.

딸은 방학이 되면 엄마를 찾아와 주었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뜸해졌지만, 엄마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끈을 놓은 적은 없었다.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할 때, 이제는 딸이 울었다. 딸의 부모는 더 이상 할아버지 할머니가 아니었다. 딸이 엄마의 품을 떠나던 초등학교 4학년부터 지금까지 할머니는 그림자가 된 엄마였다.

딸이 떠난 빈자리를 채워준 것은 작은 딸이었다. 우연히 마을에 들어온 작은 여자 아이가 갈 곳이 없다는 사실을 알고 할머니는 작은 딸로 받아들였다. 작은 딸은 할머니 곁에서 성장하고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사위와 함께 수시로 찾아와 할머니를 돌보아 드린다. 가슴으로 낳은 딸이기에 때로는 더 측은하고 애틋하다.

작은 딸과 달리 마음대로 올 수 없는 딸은 전화로 자주 안부를 묻는다. “거의 매일 전화가 온다. 엄마 밥은 묵었나, 몸은 어떻노. 맨날 묻는다.” 딸은 오더라도 머물지 못하고 오전에 왔다가 오후에 돌아가지만, 6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홀로 계신 할머니를 틈틈이 돌보고 있었다. “우리 큰 사위는 나 모른다. 알모 안 되제.” 손자와 손녀가 장성하자 딸은 자신의 어머니를 알렸다. 성인이 되어 비로소 알게 된 외할머니를 손자 손녀는 방학 때마다 찾아와 주었다. 그리고 옆에서 자고 가기도 한다.

3. 가을을 앞에 두고

아무리 깊은 상처라도, 크고 무거운 삶의 고통일지라도 시간 앞에서는 힘을 잃는다. 할머니 곁에서 손을 잡아주던 할아버지도 떠나고 없다. 나란히 붙어서 문으로 연결되는 작은 방 두 개와 부엌, 그리고 옆으로 연결해 만든 목욕탕이 할머니의 공간이다. 마당 끝에 서 있는 간이용 화장실을 볼 때마다 할머니의 외로움은 끝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이 없는 집의 마당 끝에는 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마당에 서면 많은 차들이 고속도로 위를 끝없이 달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풀이 무성하게 자란 그 어디쯤에서 할머니는 닭과 돼지를 길렀다. “저 고속도로가 난다고 팔아라 하는데, 팔아야지. 그때 다 보상을 잘 받았다.” 땅을 보상받고 국가에 내어준 뒤 처음으로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

할머니와 함께 한 시간들이 여름을 지나고 가을을 지나 겨울로 다가가고 있었다. 무성한 풀들은 쌀쌀한 날씨에도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있었다. 할머니는 처음 쓴 시에 “풀에 벌레들”의 울음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픔을 토로했었다. 방문을 열어 놓으니 제법 차가운 바람이 들어왔지만, 할머니와 나는 이불 밑에 몸을 반쯤 숨기고 저 멀리에서 달리는 차를 바라보았다.

“차가 많제?” “네, 참 많이 다니네요. 밤에 안 시끄러우세요?” “왜~~~, 아이고 큰 차가 지나가모 멀리서도 시끄럽제. 차가 저리 마이 다닐 끼라고 누가 알았겄노.” “하늘이 맑제? 파랗나?” “네, 진짜 가을이네요. 나가보실래요?” 백내장으로 흐릿한 눈동자를 반짝이며, 할머니는 처음으로 어린 시절 살던 동네에 대해 말해 주었다.
소록도의 풍경/ 사진 출처 http://blog.naver.com/threagi74가을 하늘은 푸르고 맑기만 하더라.

산천초목에는 붉은 물 든 단풍들이

장관이더라.

한 고개 내려와 보니

은행나무 잎에는

노리고도 노란 색깔 위에

황금빛을 나타내며,

흐르는 잎마다 주워서 책 속에 넣던

옛 추억이 떠오르네.

뒤돌아보니 금수화꽃은

우리 한반도 지도처럼

차분하게도 피어 있더라.

온 들에서는 코스모스가 피었고

길에도 피어 색색가지로

자기를 나타내며

뽐을 내고 웃고 있는 그 모습이

교만해 보이더라.

뒷동산에 올라가서 보니

고목나무에서는 주먹만한 밤송이가

이 구석에서 쿵 저 구석에서 쿵

떨어지는 알밤이

우리 맘의 욕심을 나타내더라.

시골길을 내려오니

돌담 사이사이마다

감나무 나란히 서서 가을 햇빛에

무르익은 붉은 색을 나타내고

감홍시 주렁주렁 매달려

보는 이로 하여금

탐스럽기도 하고 먹음직하기도 하고

우리의 맘을 끌고 있네.

고적지 담장 위로 돌아오니

벌써 시간은 황혼이었고

해는 서산으로 기울이며

오동나무에서는 오동잎이 한 잎 두 잎

떨어져서 뒹굴 때마다

내 마음이 슬퍼지고 외로워져

옛 추억이 떠오르네.

눈에 고인 눈물이 볼 위에

주렁주렁 흐르면

이것이 가을의 계절인가

으악새도 슬피 울고 있네.

-전문-

4. 고통의 강을 건너

기억 속의 가을은 풍성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다. 고향은 어디를 가도 꽃이 피어 있었고, 가을이 되면 밤송이가 툭툭 떨어지고 감이 붉게 익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곳이었다. 마쓰시타를 만나고 한센병이 찾아와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던 곳도 고향이었다. 승팔이를 낳아 떠나보내고 돌아왔던 곳도, 어머니를 한스럽게 묻었던 곳도 고향이었다.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고 있으면, 그 많은 시간의 강을 건너 어김없이 찾아오는 것도 고향에 대한 기억들이다. 그러나 이제 그 고향은 더 이상 가슴 아프고 참담하던 곳이 아니다. 시을 한 행 한 행 들려주는 할머니의 얼굴은 평화롭고 따뜻했다. 생각에 잠긴 채 엷은 미소를 띠고 천천히 들려주었다.

“니도 감꽃 갖고 목걸이 만든 적 있나?” “그럼요. 제가 그 목걸이를 얼마나 좋아했는데요. 하얗고 향기도 좋고, 혼자 만들어서 목에 걸고 다녔죠.” “나도 그랬다. 바늘에 실 꿰갖고 꽃잎을 연결한다. 그렇제? 하고 나모 손끝에서 감꽃 향기가 안 없어진다. 니도 그렇더나?” 할머니와 나는 시공을 뛰어 넘어 어린 시절의 공통된 기억을 찾아냈다.

그것은 감꽃 목걸이다. 여름을 앞둔 어느 날, 할머니와 나는 커다란 감나무 밑에 떨어져 있는 감꽃을 줍거나, 장독대 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감꽃을 한 손 가득 쥐고 와서 그늘에 앉아 감꽃 목걸이를 만들었다. 생각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 사이엔가 할머니의 기억은 고통의 강을 건너 유년의 행복으로 흐르고 있었다.

고향이 없는 사람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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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고난 속의 작은 행복

 

미군들의 도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그들의 도움으로 주거 공간과 배고픔은 나아졌고, 무엇보다 건강 상태가 좋아졌다. 그러나 또 다른 위기가 다가오고 있었다. 미군들이 자주 왔다가고 집단적인 거주지가 형성되자 인근의 주민들이 한센인들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이다. 그들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몰려와 위협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을 밤에 그 곳에 내려놓고 간 공무원들은 나타나지 않았다.

할머니는 상기된 표정으로 말했다. “그 사람들은 우리를 보고 입을 딱 벌리대. 누구 허락받고 예서 사느냐고 난리였다.” 지금까지 애써 억제해 오던 할머니의 감정에 작은 파문이 생기고 있었다. 여태껏 볼 수 없었던 결연한 표정은 다가갈 수 없을 정도로 위엄을 뿜고 있었다. 그 위엄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나온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라 여겨졌다.

수십 년 전, 더 이상 갈 곳이 없었던 사람들, 세상으로부터 버림당했던 사람들의 분노가 할머니를 휘감고 있는 듯 했다. 숨을 들이쉬고 내 쉴 때마다 가슴은 눈에 띠게 오르락내리락 했고, 꼭 쥔 손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순간 두 번의 백내장 수술로 흐려진 눈동자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채를 보았다. 그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60여 년 전에는 죽음만을 생각했지만, 이제 할머니에게 남은 것은 삶에 대한 의지였다. “입이 있어도 말 못한다. 그 고통을 어찌 다 말로 하노. 사는 기 지옥인데.” 지옥과 다를 바 없는 삶은 연약한 한 여인을 강인한 여성으로 변모시키고, 끝없이 이어져 오는 고통은 오히려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게 했다.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지만, 한센인들은 순간 순간 온 정성을 다해 숨을 쉬었다. 새벽이면 일어나 하루 종일 온 몸으로 거친 땅을 일구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할머니에 대한 할아버지의 사랑은 지극했다. “나는 일을 별로 안 했다. 못하게 하대. 아를 업고 가모 집에 가 있으라고 난리도 아닌 기라.” 자신은 새벽부터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해도 아내는 힘든 일을 하면 안 된다는 마음, 그것은 남편의 사랑이었다.
항상 불안하고 고된 날들이 이어졌지만, 행복도 있었다. 아이는 천진하게 잘 자라 주었다. 가진 것이 없어 잘 입히고 잘 먹이지 못했지만, 아이는 엄마를 따랐다. 비록 다정한 말 한 마디 없는 아내였지만,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귀하게 여기고 아껴 주는 남편이 있었다. 언젠가는 만날 수 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가슴에 품고 사는 아들, 승팔이도 있었다.

 

 

2. 한 뼘의 땅

 

이웃 주민들의 반대는 인근 지역을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그들은 미군들이 오지 않는 날이나, 떠나고 난 후에 집단으로 나타났다. 마치 인근에 숨어 있다가 나타나는 것 같았다. 한센인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해야 했다. “어두워지모 겁나제. 갑자기 덮치모 어짤끼고.” 깊이 잠들지 못하는 밤들이 늘어났다.

시간이 지날수록 불안감은 커졌다. 미군들의 지원이 뜸해지던 때부터 마을 주변을 서성대는 사람들의 수는 눈에 띠게 불어났다. 인근의 주민들뿐만 아니라 멀리에 있는 지역에서도 사람들은 몰려왔다. 심지어 부산의 구포 지역에서 오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요구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들이 사는 지역 부근에는 얼씬도 하지 말고 멀리 떠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센인들도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산에 버려져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 나무 뿌리를 뽑고 돌을 치우고 만든 그들의 집이었기에, 한센인들은 한 걸음도 움직일 수 없었다. 비록 나무에 군용천막과 비닐을 덮은 집이었지만, 그 곳은 한센인들의 삶의 터전이었다. 온 손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지켜낸 보금자리였다.

어린 아이들은 매일 반복되는 위협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 밤이 되면 남자들은 조를 짜서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지켰다. 넒은 하늘 밑 그 어디에도 한센인들이 맘 편하게 살 수 있는 곳은 없었다. 그 곳을 떠나는 순간 그들은 거지가 되어 돌팔매질을 당하며 동냥질을 하든가 어느 후미진 곳에서 이름도 없이 죽어가든가 하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 날, 맨날 불안했지만, 아이고 참 힘든 날들이제. 누가 막 부르는 기라. 한센인들 중에도 여기를 소문 듣고 나중에 온 사람도 있었는 기라. 그 사람들 중에 누가 외지에 사는 친척이 있었거든. 그 친척이 하얗게 질려 갖고 안 왔나” 외지에 사는 친척이 다녀간 후 마을은 정적에 쌓였다.

“여게 상동 인근이랑 부산 사람까지 우리 모두 쥑인다고 모인다고 안 하나. 그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어찌 감당하겄노. 우리는 인자 꼼짝 없이 여게서 죽는 갑다 했제.” 인근 주민들의 요구대로 옮겨간다고 해도 갈 곳이 없을뿐더러 어디를 가도 도망 다니는 건 마찬가지였다. “누가 그러대. 여기서 죽자고.”

할머니의 얼굴 근육이 떨리고 있었다. 나지막한 코끝에 앉은 안경도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한센인과는 이웃해서 살 수 없다는 그들의 논리에는 어떤 타협의 여지도 없었고, 그들에게 타인의 존재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한센인들이 떠나가더라도 비탈진 그 곳은 성한 이들의 땅이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한 이들은 자신들이 병들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한센인들의 터전을 빼앗으려고 했다.
ⓒ에이블뉴스한센인들의 죄명은 “문둥이”이다. 시인 한하운은 자신의 시에서 “죄명은 문둥이…../이건 참 어처구니 없는 벌이올시다.(”라고 노래한 바 있다. 한센병은 어처구니없는 죄명이며 이해할 수 없는 벌이기에 변호할 길이 없음을 한탄했다. 어처구니없는 죄명을 인정하고, 그냥 그 산속에서 살게 해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돌아오는 건 살기뿐이었다.

“이리 죽으나 저리 죽으나 죽는 길 밖에 없으께 싸우자고 누가 그러대.” 누군가의 말에 사람들은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웅성거림은 시간이 지날수록 함성으로 변해갔다. 사람들은 모두 집으로 가서 낫이나 호미를 들고 나왔다. 누가 어떻게 하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고, 합의를 한 것도 아니었건만 들 수 있는 무기는 모두 들고 모였다.

“밤이라 캤다. 그날 밤, 그 사람들이 몰려 오모 우리는 꼼짝없이 죽는 기라. 문둥이 죽는 거 한두 번 봤나. 누가 울어주기라도 하나. 문둥이 시체는 제대로 거다(거두어) 주지도 않는다.” 죽어서도 서러운 사람들, 주검마저 대우받지 못하는 사람들, 아무도 슬퍼하지 않는 그들만의 죽음을 지나온 사람들이 벼랑 끝으로 몰리고 있었다.

어두워지기 전에 가야 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그들이 몰려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가야한다고 했다. 어린 아이가 딸린 아녀자만 빼고 남녀노소 모두 손에 낫과 호미를 들고 산속에서 나왔다. 누더기를 걸치고 손과 발에는 진물이 배인 천을 감고 성치 못한 발로 그들은 걸었다. 자신들의 삶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이겼다. 방심하고 있다가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혼비백산했다. 한센인들이 죽기를 각오하고 다가가면 그들은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했다. 그러다가 잠시 틈을 주면 공격해 왔다. “그냥 휘둘렀다. 죽는 거 밖에 더 있나. 우리는 죽을라꼬 덤비고 그 사람들은 살라꼬 덤빘제.” 죽기를 각오한 사람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3. 새로운 고향

 

그렇게 그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담보로 지금의 터전을 지켰다. 그렇게 서로 치열하게 싸웠지만, 시간이 지나자 이웃이 되었다. “모내기 철이 되모 서로 일손이 부족한 기라. 우리 중에서 병이 덜한 사람들이 가서 마이 도왔다. 처음에는 싫어해도 나중에는 와서 도와 달라고 하는 기라.” 때로는 이웃 마을의 사람이 와서 성하지 않은 손으로는 하기 힘든 일을 돕기도 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주로 닭과 돼지를 키웠다. “닭은 알도 팔고 똥도 팔았다.” 닭똥을 모아서 밭 여기저기에 널어서 말린 뒤, 자루에 넣어 보관했다가 외부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팔았다. 이익금은 일한 만큼 나누어 받았다. 일은 중노동이었다. 성한 사람보다 몇 시간은 먼저 일어나야 했고, 몇 시간 후에 자야 했다. 그렇게 해도 살아가기에는 힘든 나날들이었다.

성한 사람들이 서너 시간이면 끝날 일을 그들은 하루 종일 했다. “아이고 말도 못한다. 아침에 자고 나면 닭 밥 주고, 또 한 이틀마다 똥 치운다. 똥 치우는 날이 그 중 고되다.” 일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또 언제든지 쫓겨 날 수 있다는 불안감이었다. 그들은 백방으로 다니며 자신들의 처지를 하소연했다.

험한 산을 일구어 밭으로 만들고, 밭도 만들 수 없는 곳에서는 돼지와 닭을 키우며 살고 있는 그 땅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임을 알아달라고 관청을 셀 수 없이 드나들었다. 관계기관에 갈 때마다 차를 탈 수 없어 걷고 또 걸어서 갔다. 간간이 다니는 버스는 텅 빈 채 가도 그들을 태워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수레도 얻어 탈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가야했다. 가서 그들의 절박한 사정을 알리고, 아이들을 키우고 삶을 이어가야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그들의 하소연을 귀담아 들어주지 않았다. 와서는 안 될 사람들이 왔다는 내색을 노골적으로 했다. 돌아서기도 전에 소금을 먼저 가져와서 그들의 뒤에 뿌렸다. 성한 사람들에게 한센인들은 소금을 뿌려야 하는 액(厄)이었다.

그 어느 누구도 한센병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치료약도 없이 온 몸이 종기로 뒤덮이고, 얼굴이 변하는 병이었지만, 병에 걸린 것이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마치 죄인마냥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했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불현듯 잊고 있었던 사람이 생각났다.

그 사람은 이름이 없었다. 언제나 검은 색 옷을 입고 얼굴을 반쯤 가린 채 저녁 무렵에 나타났다. 말없이 우리 집으로 들어와 마당을 가로질러 뒤뜰에서 장작을 패 주었다. 키가 크고 마른 몸이었는데, 그 아저씨는 손에 때 묻은 흰색 천을 감고 있었다. 장작을 다 패고 나면 할머니나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상을 받아 마당 한쪽 구석에 앉아 먹었다. 그리고는 기운 자국이 있는 바가지에 밥과 반찬을 담아 갔다. 그러다 어느 날 보이지 않았지만, 아무도 찾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6?25가 끝난 후, 홀연히 우리 동네에 들어와 산 밑 움막에서 혼자 기거하는 아저씨였다. 가족이 있었지만 헤어졌고, 한센병에 걸려 동네에 들어와 살 수 없었다는 것이 내가 아는 사실의 전부였다. 어렸을 적, 막연하게 그 아저씨는 참 좋은 사람이라는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아저씨는 절대로 공짜 밥을 먹지 않는다고,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장작을 패거나 하다못해 마당이라도 쓸어 주고 간다고 어머니는 혀를 차셨다.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어린 시절의 그 아저씨가 생각난 이유는 무엇일까? 낯선 섬에까지 와서 10여년을 넘게 살면서도 자신의 땅 한 뼘 가지지 못하고, 자신의 삶의 내력을 밝히지 않으며, 얻어먹고 살지언정 자존감을 잃지 않았던 그 아저씨의 모습이 새삼스럽게 아픔이 되는 건 무슨 연유일까? 이름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아무도 알려고 하지 않았던 게 아니었을까?

고향을 떠나 가족과 함께 살지 못하고 버려진 사람들에게 목숨을 걸고 일구는 땅은 고향 이상이었다.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이 그토록 자신들의 이름으로 된 땅을 가지고 싶은 이유가 살고 있는 그 곳이 바로 고향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한센병을 천형(天刑)이라고 한다. 하늘도 버린 사람들이라는 인식은 오히려 한센인들이 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하늘마저 버렸기에 그들은 스스로 사랑하고 스스로 살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더 이상 부평초처럼 떠돌지 않도록 두 발을 붙이고 있을 고향이 필요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살이에 돌고 도니

부평 같은 신세가 되어

어언간 60여년이 되었구나.

세월은 빨라 유수와 같으니

내 청춘은 흘러흘러

머리에는 벌써 백발이 휘날리네.

 

중에서

 

할머니의 머리칼은 백발이 되어 있었다. 뽀글뽀글 파머를 한 사이사이로 백발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소금을 바가지 채로 뒤집어쓰며, 산길을 걷고 또 걸어 탄원을 했지만, 자신들의 땅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기적이 왔다. 마치 소리 없이 나무그림자가 땡볕을 막아주듯이 그렇게 기적이 왔다.

“대통령이 특별조치법을 내린 기라. 박정희 대통령이 그랬제. 그때 우리 한센인들이 사는 땅을 우리 거로 해주라는 특별 명령이 있었는 기라. 윤두관 원장 힘이 컸대이. 윤원장이 있어서 육여사가 소록도에도 가고, 우리 손도 잡아주고, 그라께 대통령도 우리를 알고 특별조치법에 우리를 넣었다 아이가.” 그래서 할머니와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가지게 되었다. 그 고향에서 나는 할머니를 만나고 있다.

핏자죽이 어린 길 [치유시학]

?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 속에 내던져지다

 

아, 내 인생길이

왜 이다지도 가시밭길인가.

찌를 때마다 피 흘러

걸을 때마다 핏자죽이었네.

걸을 때마다 잡초에 휘말려서

엎어지며 넘어지며

또 한 자국 걸을 때마다 자갈밭

또 한 걸음 걸을 때마다

진흙이 떡반죽 된 길

하나도 평탄한 길이 없더라

이것이 내 인생길인가.

– <내 인생길> 중에서-

 

할머니는 한스러운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자신의 인생을 가시밭길이자 자갈밭, 그리고 핏자죽이 어린 길이라고 노래했다. 태풍을 피해 을숙도에서 나왔지만, 한센인들은 마을로 들어가지 못했다. 잠시 머무르던 긴급대피 장소인 학교에서도 더 이상 지낼 수 없었던 그들은 캄캄함 밤에 쓰레기를 싣고 다니는 차에 실려 지금의 땅에 내던져졌다. “비가 억수로 왔다. 그냥 말없이 타라 하데. 우리도 이대로 있다가는 죽겄다 싶어서 그냥 탔제. 한참을 가더니 내리라 하는 기라.”

그냥 내린 곳이 지금의 마을이었다. 아니, 그때는 산이었다.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두운 밤에 그들은 산 속에 버려진 것이다. “벌레가 따로 없제. 그냥 발 잘못 디뎌 굴러떨어지면 죽는 기라. 안 죽을 거라고 꿈틀꿈틀 기어 다녔제. 그래도 살아볼 기라고 미끄러지고 또 미끄러지면서도 비를 피할 데를 찾았다. 있는 것이라고는 옷 보따리 뿐인데. 그리 울던 아도 안 울더라. 지도 무서운 기라. 본능적으로 무서웠던 거라.”

사람들은 조그마한 바위틈만 있어도 기어 들어갔다. 달빛도 없는 어둠 속에서 비를 맞으며 그들은 온몸으로 기어 다니며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혹시나 굴러 떨어져 산 어딘가에 머리를 박고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까봐 손을 잡고 기어 다녔다. 큰 돌에 부딪치는 줄도 몰랐고,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히는 줄도 몰랐다.

그러는 사이 다시는 올 것 같지 않던 아침이 왔다. 비로소 서로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서 자신의 얼굴을 보았다. 흙을 뒤집어쓰고 비에 젖어 산발이 된 모습은 누가 누구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참혹했다. “모두 흙투성이라. 아침이 되고 사방을 살펴보니 산이라. 산 위에 길이 있는데, 간간이 트럭 소리만 나더라. 차 소리만 나면 모두 숨었다. 나무 뒤로 흙더미 뒤로…”

“왜 숨으셨어요? 임자가 있는 산이었나요?” “아이다. 사람들에게 들킬까봐. 잡혀가면 이제 죽는 것 밖에 더 있겄나.” 그들은 사람들을 피해 산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길을 사이에 두고 두 개의 산이 있었는데, 그 중 아래쪽에 있는 산에 그들은 버려졌던 것이다. 흙투성이의 몸으로 그들은 먹을 수 있는 뿌리와 나물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산에 버려졌거나 빗물에 쓸려 내려온 비료 자루나 거적을 찾으면 그것으로 움막을 만들었다.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오목한 곳이나 바위틈, 그리고 흙이 쓸려 내려가 드러난 큰 나무의 밑둥이 있으면, 그 곳을 손으로 파서 사람이 들어앉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그 앞을 비료 자루로 막아 거처할 곳을 만들었다. 어쩌다 자연적으로 움푹 패인 언덕바지라도 발견하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비가 와서 미끄러지고 온 몸이 흙투성이는 되었지만, 나뭇잎이 쌓여 흙이 된 곳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부드러운 흙이라도 파낼 수 있는 도구가 없었기 때문에 병든 그들의 손은 흙 반 진물 반으로 반죽이 되었다. 다행히 비는 그쳤다. 낮 동안은 햇빛이 있어 견딜만 했지만, 해가 지면 산속의 기온은 사정없이 내려갔다.

“더 무서운 거는 산짐승이라. 괭이가 있나 호미가 있나. 짐승이 덮치모 방도가 없는 기라. 어린 아를 가운데 두고 어른들이 삥 둘러 잤다. 잠도 깊이 못 잔다. 춥고 배고프고 살아갈 길이 막막하고…” 삶이라고 할 수 없는 정경이었다. “지금하고 마이 다른 기라. 그때는 그래도 산에서 굶어 죽지는 않겄더라. 그런데 봐라, 김선생. 겨울이 되면 뭐 먹고 살기고? 겨울이 오기도 전에 얼어 죽고 굶어 죽을 판이라.”

할머니의 얼굴은 열기를 띠고 붉어졌다. 숨소리도 가빠지고 있었다. 불편한 두 손으로 옷자락을 꽉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겨우 일군 삶의 터전을 떠나서 산짐승 소리가 지척에서 들리는 산속에 내던져졌을 때가 마치 어제의 일처럼 생생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할머니의 깊은 한숨 소리가 나의 심장 한 가운데를 관통하는 고통을 느꼈다.

할머니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나의 심장은 터질 것만 같았다. 당신의 삶을 치유하겠으니 지나온 이야기를 해보라는 나의 요구가 과연 정당한 것인가? 나에게 그럴 자격이 있는가? 고통에 가득 찬 저 삶을 누가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 것인가? 당혹감과 함께 낭패감을 느꼈다. 내가 과연 저 ‘핏자죽만’ 남아 있는 삶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나의 몸도 뜨거워지고 있었다. 부끄러움으로.

 

집이 생기다

 

어느 날, 여러 대의 트럭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황급히 숨기에 바빴다. 트럭이 지나갔다 싶던 순간에 다시 차 소리가 들렸다. 몇 대의 트럭이 후진하여 돌아오고 있었다. 모두들 이제는 죽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트럭에서 내린 사람들은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하야리아 부대 미군들이더라. 지나가다 누가 우연히 우리를 본 모양이라.” 미군은 잔뜩 긴장하여 총을 손에 들고 그들에게 다가왔다.

“영어로 큰 소리로 뭐라 하는 기라. 몇 명이 내려왔는데 저거끼리 부르는 소리에 마이도 내려오더라. 또 두 명은 계속 큰 소리로 떠들면서 다시 올라가데.” 미군들은 한센인들을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미군들과 한센인들은 마주 서서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 처음 보는 사람의 형상에 놀라기도 하고 긴장도 했다. “대장인갑더라. 옆에 있는 미군한테 뭐라 하더라.” 그 미군은 차에 가서 건빵 박스를 들고 왔다.

미군들은 한센인들에게 건빵을 몇 박스 주었다. 한센인들은 미친 듯이 건빵을 먹었다. 젖배를 곯던 아이에게는 씹어서 입에 넣어주었다. 그들이 건빵을 먹는 동안 미군들은 산을 살피고 다녔다. 비료 포대나 거적을 걷어보는 그들의 얼굴은 하나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귀신같은 몰골의 한센인들을 말없이 지켜보다 미군들은 떠나갔다.

“야~~~, 도깨비한테 홀린 것 같더라. 키는 멀대 같이 크제. 코는 왜 그리 뾰족하노. 얼굴은 꼭 밀가루 덮어 쓴 것 모양으로 허옇제.” 건빵으로 허기를 채운 그들은 미군들의 정체에 대하여 설전을 벌였다. 그날은 그렇게 답을 얻지 못하고 지나갔다. 그들을 한밤에 산속으로 내던지면서 식량을 가져다주겠다던 공무원은 그날도 오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에 해가 채 안 떴제. 그냥 날이 밝아오는 시간이라.” 트럭 소리가 길 위에서 멈추더니, 소란한 소리가 들렸다. 움막에서 나온 한센인들의 눈 앞에는 전날의 미군들이 와 있었다. 그들은 수십 명이었다. 미군들은 나무를 옮겨오고, 약상자를 들고 오고, 밀가루 포대를 어깨에 메고 산으로 내려왔다. 아무 말도 없이 미군들은 삽을 들고 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무들을 땅에 고정시켰다.

나무틀 위에 천막을 덮었다. 훌륭했다. 그랬다. 너무나 좋은 집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미군들이 간이 천막을 짓고 있는 동안 한센인들은 상처를 소독하고 치료를 받고 붕대를 몇 개씩 받았다. 어제와 달리 같이 온 한국군이 치료를 받는 동안 통역을 해줬다. 처음으로 치료하고 광목이 아닌 붕대를 감은 손이 남의 손처럼 보였다. 상처를 싸매고 있던 광목은 빨아서 계속 썼기 때문에 넝마가 되어 있었다. 미군들은 구덩이를 파고 그 넝마 조각들을 모아 태웠다.

미군들은 오기 전에 역할을 분담한 듯이 각자 다른 일들을 했다. 천막집을 만드는 팀, 치료를 하는 팀, 주변 나무의 잔가지를 치는 팀, 주변을 소독하고 다니는 팀 등. 한 팀이 땅을 고르면 다른 팀이 그곳에 나무를 이용해 집틀을 만들고 다른 팀은 천막을 씌우고, 그러면 또 다른 팀은 천막집 주변의 나뭇가지를 정리했다. “척척 하더라. 그 통역관 말이 전날 우리 꼴을 보고 가서 충격을 받았단다. 미군들이 도와야 한다고 부대장한테 말해서 몇 시간 동안 회의를 했단다. 그리고 팀으로 나누어서 일을 맡았다더라.”

산에 흐르던 물줄기를 어떻게 막았는지 공동의 웅덩이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호스가 연결되고 커다란 고무 물통에 그 호스 끝을 연결하여 식수통을 완성했다.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공동 공간도 만들어졌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갈 때쯤 일은 마무리 되었다. 천막 안에는 땅의 한기가 올라오지 못하게 베니어판이 깔려 있고, 그 밑에는 방수 깔개가 깔려 있었다.

일을 마친 미군들은 한센인들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그들의 옷은 땀으로 젖어 있었지만, 얼굴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한센인들은 아무 말도 못하고 그들의 얼굴을 정면으로 대하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기만 했다. 하루 동안 눈앞에서 벌어진 일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른 저의가 있는 건 아닌지 내심 불안했다.

미군들은 한센인들에게 악수를 청했다. 하지만 그 손을 잡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미군들은 개의치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그들이 손을 흔들며 트럭을 타고 떠나가자 비로소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때는 누가 우리를 돕는다는 거는 상상도 못했다. 저것들이 이렇게 천막 쳐 놓고 내일 와서 우리를 쫓아내면 우짤기고.” 아무도 믿을 수 없던 시절이었다.

미군들이 가져다 준 밀가루로 수제비를 만들어 배부르게 먹고 잠을 청했던 그날 밤, 한센인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들이 그들에게 발생했기 때문이었다. 하루 사이에 물이 질척거리는 맨땅이 아니라 보송보송한 베니어 판 위에 몸을 누인 것이 꿈만 같았다. 딱딱한 베니어판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금침과 다를 바 없었다.

그 다음날에도 미군들은 다시 왔다. 그들은 건빵과 설탕과 밀가루를 또 들고 왔다. 모포도 들고 와 집집마다 넉넉하게 나누어 주었다. 전날 보지 못했던 미군이 두 명 새로 왔다. 통역군인은 그들이 의사라고 했다. 두 명의 미군은 한센인들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약이 주어졌다. 그 약은 예전 집단촌에서 먹던 약보다 양이 적었다. “나병약이라 하더라. 그 약은 속이 안 아프더라. 다른 영양제도 주더라.” 을숙도에서 나온 이후 약을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병세는 악화되어 있었다.

미군들이 준 약은 위의 통증이 없었다. 몸에서 힘이 빠지고 어지럽던 증세도 없었다. 그날 이후 미군들은 정기적으로 찾아와 주변을 소독하고 밀가루와 통조림을 공급해 주었다. 때때로 건빵도 가져다주었다. 미군들의 도움은 장기적으로 지속되었다. “좋은 약 먹고 소독하니까 금방 좋아지대.” 미군들이 지어 주었던 천막집도 시간이 지나면서 집의 형상을 갖추어 나갔다. 그 집들은 이후 정부에서 특별조치법이 시행되었을 때 그들의 집으로 허가가 났다.

 

기억 속의 하야리아

 

할머니는 도움을 주지 않았던 대한민국을 원망하거나 비방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좋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군에 대해서 말을 할 때에는 얼굴에 화기가 돌며 엷은 미소까지 지었다. 많은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기억 속에서 사라질 만도 하건만 할머니는 마치 어제의 일을 말하는 것 마냥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는 지금 이 땅에서 벌어지고 반미 감정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나타나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던 50여 년 전의 미군들만 기억되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한미 FTA는 무조건 좋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미국과 하는 계약이니까. “갸들이 우리한테 손해나게는 안 한다. 우리끼리 싸우는 거제.”

할머니에게 기억 속의 미국은 지금의 미국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미군들이 지나쳐도 될 것을 다시 돌아와 한센인들을 발견하고 오랫동안 도움을 주었던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본 것만큼 알고 아는 것만큼 믿는다. 죽음의 문턱에서 잡았던 도움의 손길은 따뜻하고 믿음직하다. 나는 할머니에게 50여 년 전의 하야리아 부대의 미군들 외의 미군들에 대해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군에 대한 그 기억 한 자락은 ‘진흙이 떡 반죽 된 가시밭길’ 같은 삶의 여정에서 따뜻한 등불이 되어 있었다. 그 누구도 미군을 이야기하며 얼굴에 홍조를 띠고 잠시라도 행복해하는 할머니를 욕할 수 없으리라. 지금의 우리는 그 당시 미군들과 달리 한센인들을 거부했던 사람들과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지나 간 일이라고, 그때는 우리도 먹고 살기 힘들었다고, 지금은 그때와 다르다’고 말할 수 없었다.

실제로 사라호 태풍 당시의 신문을 찾아보면 산속에 고립된 한센인들에게 식량을 보급하지 못해 애를 태우고 있다는 기사가 있다. 동네 사람들이 한센인들에게 가는 산의 입구를 가로막고 식량보급을 차단하여 한센인들이 아사 지경에 이르고 있지만, 대책이 없다는 내용이다. 동네 사람들은 한센인들이 그들의 주거지 부근에 삶의 터전을 마련할까봐 비상식량마저 보급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신문에 기사화된 곳과 할머니가 강제 이주된 곳이 다르지만, 행정 소속이 같은 부산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할머니와 그 동료들에게 식량을 보급하지 못하여 애를 태운 공무원이 있었을 거라고 믿는다. 그러나 미군들이 한센인들을 도와줄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 정부도 할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았을까 싶다. 모두가 견디기 어려운 시절이었다고 애써 변명해보지만, 안타까움은 내내 사라지지 않았다.

 

 

꽃처럼 붉은 울음 [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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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1.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이사는 수 없이 다녔다. 아니 이사라고 할 것도 없었다. 살다가 떠나가라면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남편을 만나 결혼 생활을 시작했던 울
▲ 에비슨이 촬영한 나병 환자(1900년대 초). ⓒ동은의학박물관산의 집단촌은 초가집이었지만 방이 있었고, 비도 피할 수 있었다. 거친 식량이었지만, 관청에서 나오는 배급품도 있었기에 굶주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웃 동네 사람들의 원성에 못 견뎌 한센인들은 흩어져 다른 지방으로 옮겨졌다.

할머니는 여기저기 옮겨 다녔던 지명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 순서는 정확하지 않은 듯했다. 같은 지명을 다시 말하고, 서로 다른 지역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마이 옮겼다. 60년, 50년 전에 다니던 데는 가물가물한다. 험하대이. 세상이 참말로 험하다.” 한 곳에 정착할 수 없었던 서러움을 세상이 험하다는 말로 표현했다.

할머니는 울산 집단촌을 나와 부산으로 온 것은 기억하지만, 부산의 첫 지명은 기억하지 못했다. 입안에서 계속 맴도는 듯 말을 할듯할듯 하다가 결국 기억하지 못했다. 부산에 와서 처음 살게 된 곳은 그리 큰 공동체가 아니었다. 그러나 한센인들이 모여 산다는 말이 돌자 여기저기서 한두 명씩 때로는 가족이 들어와 함께 살면서 마을의 규모는 커져 갔다. 울산에서도 그러했지만, 마을이 커지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 주변 사람들의 핍박은 거세진다.

구걸도 힘들었고, 마치 한센병이 공기를 타고 전파되는 것처럼 같은 하늘 아래 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비한센인들의 이기적인 행동은 한센인들의 삶을 더욱 더 힘들게 했다. 그들은 주거 공간이 다르고, 주거지가 많은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어도 같은 지명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비한센인들에게 한센인들은 없어도 되는 존재를 넘어 없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거기서 용호동으로 갔제. 그래도 거(용호동)가 괜찮았다. 좀 살았던 것 같네.” ‘좀 살았던 것 같네’라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몰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얼마나 사셨어요?” “아매 2~3년 살았제. 하모. 그때는 마이 살았던 거제.” 용호동에서는 양계를 하여 생계를 유지했다. 밤낮없이 일만 했다. 바닷가 바람이 아무리 거세다 해도 한센인들의 삶의 의지를 꺾지 못했다.

 

2. 세상이 그런 기라

 

2004년도에 우연히 용호동 한센인 집단촌에 간 적이 있다. 그곳은 자연의 모습 그대로 45도에 가까운 경사로에 집들이 들어서 있었다. 산을 뒤에 두고 바다를 바라보며 서 있던 그 판잣집들은 철거 중이었다. 지금은 부산 용호동을 대표하는 최고급 아파트가 들어서기 위하여 한센인들의 집이 무너지고 있는 광경을 그날 나는 보았다.

창문 대신 비닐이 쳐져 있는 집들의 대부분이 반쯤 무너지고 부서진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오륙도가 보이는 그 곳 바닷가에서 노인 대여섯 명이 무표정하게 우리 일행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산과 집단촌 사이에 나 있던 도로에 차를 세우고 천천히 걸어 내려갔다. 미처 챙겨가지 못한 옷가지들이 바람에 펄럭이고, 방문들이 부서져 널브러져 있는 광경은 참으로 처참했다.

할머니의 얼굴을 보며 그때 용호동 바닷가에서 보았던 노인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갈 곳이 없어 떠나지 못하고 있던 그 노인들은 전기도 수도도 끊어진 그 곳에서 바다만 보고 있었다. 노인들 곁에 남아 있는 것은 햇살뿐이었다. 할머니의 젊은 날이 그러했으리라. 바다를 바라보며 ‘지금’을 벗어나고 싶었으리라. 바다 바람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비켜서지 않고 바다를 보고 지은 집들에는 한센인들의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에는 사람이 살 수 없던 척박한 환경이어서 한센인들은 집단으로 강제 이주를 당하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 밑에 천막을 치기 시작했고, 한센인들이 늘어나면서 천막을 하나씩 지어 내려 간 것이 바닷가에까지 닿았을 게다. 세상이 바뀌어 그 곳이 천혜의 자연을 지닌 산책로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한센인들은 오래 전에 강제로 쫓겨 와 살기 위해 구걸하고 한편으로는 닭을 키우고 비탈을 개간하여 천막을 판자로, 다시 판자의 일부가 스레트로 바뀌었지만, 자연을 훼손시키지 않았다. 그 덕분에 자연은 그대로 보존되었고, 그 곳은 이제 부자들이 도시의 오염을 벗어나 쾌적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최적지로 변모하였다. 그리고 자연을 보존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았던 한센인들은 그 곳을 떠나 다시 어딘가에서 숨을 죽이고 살아야 했던 것이다.

“용호동은 왜 떠나셨어요?” “휴우, 거기는 살기가 괜찮았다. 바람이 마이 불고 추워도, 산나물 있제, 계란 팔제. 계란은 파는데 남는 기 너무 없는 기라. 그래 사람들 사이에 말이 많았제. 그기 그렇다. 처음에는 그렇다가 좀 있으모 꼭 말썽이 생기는 기라.” “처음부터 있었던 사람, 나중에 들어 온 사람, 일 안 하고 잘 묵는 사람, 세상이 그런 기라.”

 

3. 아픈 줄 모른께 그리 살았제

 

할머니는 최초의 정착인이 아니었다. 이미 한센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곳에 할머니가 들어갔으므로 내부의 갈등으로 떠나야 할 사람도 할머니와 함께 들어갔던 사람들이었다. 닭을 키워 계란을 팔았으나, 직접 시장에 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자연히 외부에서 계란을 가지러 오는 사람이 필요했고, 마을 내부에서 그 중개인을 상대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 과정에서 오해와 의혹에 의한 갈등이 자주 발생했다.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좀더 많은 이익을 취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은 누군가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불러왔다. 이러한 갈등 끝에 시시비비가 붙었고, 일의 잘잘못을 떠나 공동체는 분열되었다. 할머니는 자신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용호동을 떠나야 하는 쪽이었다. 같은 한센인이지만 그 갈등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가 살고 있는 이 마을과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은 용호동에서 서로 반목하던 사람들끼리 나뉘어져 정착한 곳으로 현재도 실제 거리보다 심리적인 거리가 더 멀어 보였다. 할머니를 만나기 이전에 먼저 길 건너에 있는 마을을 방문했었다. 그 곳에서는 개인적인 접촉이 불가능했다. 나와의 만남을 가져보겠다는 사람도 마을 대표의 한 마디에 연락처도 없이 뒤돌아섰고, 나는 마을 안으로 아예 들어서지 못했었다.

할머니가 기억하는 부산의 또 다른 지명은 신암이었다. 신암이라는 지명은 기억하지만, 그 곳에서의 생활에 대한 구체적인 기억은 없었다. 단지 많이 힘들었다는 것만 기억하고 있었다. 신암에서 강제로 이주 당해 간 곳이 을숙도였다. 할머니는 을숙도에서의 생활을 비교적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을숙도에서의 생활은 몸은 고단했지만 그런대로 평화로웠다. 한센인들이 이주하기 전부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별다른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주민들과 한센인들은 서로의 생활 영역을 존중하며 생업에 열중했기 때문에 마주 칠 일이 거의 없었다. 섬이었지만 누군가의 핍박을 받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주었다.

한센인들은 어떤 일이든 했다. 원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집중한 반면, 한센인들은 섬에 지천으로 널린 갈대와 싸리나무로 빗자루를 만들었다. 갈대와 싸리나무는 젊은 남자들도 맨 손으로 꺾어 다듬기 어려운 식물이다. 그럼에도 한센인들은 불편한 손으로 갈대와 싸리나무를 꺾어서 구부리고 다듬어 빗자루로 엮었다.

그 빗자루는 뭍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사 갔다. 함께 사는 것은 거부했지만, 한센인들이 만드는 빗자루는 다른 빗자루보다 견고하고 성능이 좋았기 때문이다. 빗자루도 한센인들이 뭍으로 직접 나가서 팔 수는 없었다. 작은 나룻배에 싣고 강 가운데로 가면 뭍에서 나룻배를 타고 온 사람에게 넘겼다. 그 길만이 당시 을숙도에 살고 있던 한센인들의 생계수단이었다.

“김선생, 말도 마라. 온 손은 상처투성이고 피도 마이 났다. 피 나는 줄도 모르고 했다. 한참 하다 보면 그것들(갈대와 싸리나무) 군데 군데 피가 묻어 있는 기라. 그래 보모 온 손에 피라. 아픈 줄 모른께 그리 했제. 아팠으면 그리 했겄나” 한센인들이 돈을 벌어 삶의 희망을 가져볼 수 있는 것이 빗자루를 만드는 것이기에 그들은 그 일에 최선을 다 했다.

 

4.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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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의 나환자촌. ⓒ동은의학박물관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만으로 그 어디에서도 정착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쓸쓸한 얼굴을 보며, 낙동강을 배경으로 한 김정한의 소설 <모래톱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모래톱 이야기>는 중학교 교사인 화자가 낙동강 하구 명지의 조마이섬에 사는 건우네 집을 가정방문하여 알게 된 조마이섬의 내력과 그 섬을 지키려다 감옥으로 가는 건우 할아버지인 갈밭새 영감에 대한 이야기이다.

‘조마이섬은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이 지배했고, 지금은 유력 인사가 사유지로 하려는 곳이다. 갈밭새 영감은 정부에 의해 이주해 온 한센인들을 몽둥이, 쇠스랑 등으로 쫓아내다가 팔을 다쳐 흉터도 지니고 있다. 오래 전부터 살았으나 아무도 자기 땅을 가지지 못한 몇 안 되는 조마이섬 사람들을 대신하여 갈밭새 영감이 유력 인사와 싸웠으나 결국은 감옥으로 가고, 건우는 학교에 다시는 오지 않았다.’

내가 들려주는 소설을 집중하며 듣던 할머니는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무릎을 탁 치며 “그긴 갑다”라는 말을 반복했다.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의 무대인 조마이 마을은 처음 듣지만, 유사한 사건이 있었다고 반색을 하며 오래된 이야기를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자신의 이야기를 떠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사건과 유사한 내용의 소설을 들은 할머니의 얼굴에는 강한 호기심이 빛을 내고 있었다.

“그긴 갑다. 내가 알고 있는 그 이야기가. 요쯤(여기쯤)은 바다고 또 한 쪽은 땅인디, 한센 환자들이 거기 살려고 했제. 그런데 주민들이 우리가 살아야 하는데 너거가 왜 오노 하고 막았다. 살라고 하는 한센 환자들하고 못 들어오게 하는 사람들 하고 크게 싸웠제.” 할머니가 사는 을숙도에서 벌어진 사건은 아니었지만, 그 사건은 한센인들 사이에 회자되었기에 할머니는 <모래톱 이야기>를 그 사건과 연관하여 생각하는 듯 했다.

할머니가 회상하는 그 강변에서 한센인들과 주민들과의 투쟁은 처절했다. “환자들이 거서로 천막을 쳐놓고 살았던 모양이라. 천막을 쳐 놓고 집에 대창을 해가지고 싸우다가 안 되가 저거가(원주민이)…….그래가 술로 받아가지고……. (한센인들에게)술로 얼마나 먹여 놨던가, 한센 환자들이 술 먹고 그 마 잤삤어. 자는 여개(사이에) 그 사람들(원주민)이 와가지고 (천막에)불로 붙였어. (한센인들을)다 죽여 삘라고 불로 붙였는데 그서 튀나오는 사람 창 갖고 찔러 죽이고, 온 가족들하고 그 식구들하고 저쪽에 있고, 요쯤을 점령하면 (한센인)가족들도 욜로 올 수 있는 기라.”

할머니는 그 사건을 설명할 때, 두 팔을 벌려 한쪽팔로는 “요쯤은 바다고”, 다른 팔로는 “한쪽은 땅이고”라는 몸짓으로 그 강변의 지형이 길쭉했음을 온 몸으로 나타냈다. “그래 갖고 젊은 청년들 마이 죽었다. 그때 그래 많이 죽고 그래 갖고 요새 겉으면 한센 환자들 얼마나 많은 줄 아나 그냥 안 있다. 데모를 하든가 무슨 수를 내도 몇 만 명 되는데 그때만 해도 옛날이 되논께네……말도 못하고, 그리 되니까네 군수도 말로 못 하겠다 쿠고.”

할머니의 말을 들으면서 대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언어도단의 절벽 끝에 서 있는 느낌이었다. 온 몸을 파고드는 한기를 느끼며 바라본 할머니의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표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할머니는 “한센 환자들 그가 그리 역사가 깊다.”하면서 긴 한숨을 쉬고 말없이 생각에 잠겼다. 많은 한센인들이 죽었고 다쳤지만, 어떤 보상도 없었다.

요산 김정한은 <모래톱 이야기>의 조마이섬이 가상의 공간이라고 말했지만, 할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바다와 인접한 실제 낙동강변일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산은 곳곳을 직접 다니며 알게 된 사실들을 사회 비판적인 안목으로 소설화한 작가이다. 어쩌면 낙동강 주변을 탐색하다 한센인들과 지역 주민들 사이에 있었던 참혹한 사건을 듣고 <모래톱 이야기>을 집필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강하게 들었다.

<모래톱 이야기>가 발표된 1960년대의 사회적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실제 사건을 그대로 소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에 조마이섬에서의 한센인들과 원주민들과의 갈등을 소설적 장치로 남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할머니는 그 강변의 정확한 지명을 묻는 나에게 “생각이 날락말락 한다. 하도 오래된 이야기고. 하기사 나도 쫓기는 건 매 한가진데”라며 기억을 애써 더듬었지만, 그 당시의 사건만 정확하게 되풀이 했다.

 

5. 해와 하늘빛이 서러워

 

젊은 한센인들이 살기 위하여 투쟁하다 목숨을 잃었지만, 그 사건은 그대로 시간 속으로 묻혀 갔다. 할머니는 끝내 그 곳이 낙동강 어디쯤인지 아니면 부근 다른 지역인지를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으나, 사건의 정황은 기억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었던 사실이 많은 시간이 지나 다시 현실로 되살아나고 있었다.

 

 

해와 하늘 빛이

문둥이는 서러워

 

보리밭에 달 뜨면

애기 하나 먹고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울었다.

서정주 <문둥이>

 

시인 서정주는 오래 전 항간에 떠도는 말들을 그대로 시에 옮겨 놓아 세간의 오해와 편견으로 인한 한센인들의 고통과 설움을 묘사했다. 비한센인들은 그들의 관념에 사로잡혀 한센인들을 배척했다. 두 눈으로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알아야 할 진실을 알지 못하는 세인의 어리석음은 ‘오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와 다른 것은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구분지어 나누어 버린다. ‘나’아니면 ‘너’가 되는 것이다. ‘우리’라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면서도 ‘나’와 ‘너’가 만나 ‘우리’가 됨을 애써 모른 척 한다. ‘나’와 ‘너’ 사이에 절대로 넘어 설 수 없는 선을 그어 관용과 이해가 끼어들 틈을 주지 않는다.

나는 오만과 편견에 가득 찬 세상 속에서 병든 몸으로 시간을 헤쳐 나온 생명의 강인함을 마주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상념에 잠긴 옆모습에서 이름도 없이 살다 간 수 많은 한센인들의 슬픔을 만나고 있었다. 누가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밝은 햇빛 아래에서 살고 싶다는 그들의 작은 소망을 욕심이라고 할 수 있을까. 달빛 아래에서 ‘꽃처럼 붉은 울음’을 울었던 그들이 할머니의 기억 속에서 소생하고 있었다.

 

 

추운 계절의 끝에서 [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치유될 수 없는 과거

‘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힘들고 아픈 상처일지라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수 있다는 뜻이다. 이 말은 사람의 힘으로는 치유될 수 없는 상처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할머니에게 아들과의 이별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은 상처가 되었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는 가슴 깊이 커다란 웅덩이를 파고 들어 앉았다.

속아서 결혼했다는 생각으로 남편에 대한 원망과 야속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6살이 많았던 남편은 어린 아내를 지극히 사랑했지만, 20살의 아내는 남편의 정성마저도 싫었다. “진짜 정 안 주어지더라. 내 때문에 저거 아버지도 참말로 죽고 싶다했다. 내내 울고, 달래도 울고, 아침 저녁으로 내내 울었다.” 먹지도 않고 제대로 지자도 않으면서 울기만 하는 아내를 달랠 방법이 없었다.

“내 간다 이러면, 보따리 싸가 간다, 그리 하면” “아이고 가보지 어디가 몇 발 못가가 붙잡히지. 이 안에 법이 없는 줄 아냐, 당신 마음대로 하냐, 가 봐라.”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가겠다는 아내의 말에 아랑 곳 없이 그 곁을 지키는 것뿐이었다. 남편이 하루 종일 옆을 지키면서 달래고 또 달래도 스스로에 대한 서러움과 속았다는 분노는 다스려지지 않았다.

할머니가 머물러야 할 곳은 울산 바닷가였다. 울산에서 태어나 자랐지만,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떻게 나갈 수 있는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바닷가 넓은 바위 위에 앉아서 매일 죽음을 생각했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과 분노 속에서 할머니는 집단촌에서 주는 약을 거부했다. 약을 먹지 않는 상태에서 끼니마저 거르자 병의 속도는 빨라졌다.

“한 번은 저 바닷물에 빠져 죽을라 했다. 그것도 그만 들켜서 안 됐제. 근데 헤엄을 치몬 도망 갈 수 있겠는 기라. 그리 생각하니까 사람들이 쫓아 올낀데 가다 잡혀서 두들겨 맞으모 우야노, 몽디 갖꼬 두들겨 맞으면 우야노, 겁이 나 얼마나 벌벌 떨어댄 줄 아나.” 그래도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할머니는 허허로운 웃음소리를 내며 말을 이었다. “그 당시 공부도 좀 했다 쿠고, 공부 많이 한 처자가 저기 있다 소문이 어디까지 나가지고, 영감한테까지 오게 된 기라. 영감도 공부는 좀 했더라꼬.” 남편은 일본에서 공부를 하던 중 한센병에 걸린 것을 알고 고향으로 돌아 온 것이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난 고향에는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일본에서 배운 학식으로 한센인 집단촌의 행정적인 일들을 도와주고 있었다. 할머니 기억 속의 젊은 남편은 미남이었다. “얼굴도 뽀얗고 모리고 보면 진짜 의사 같앴다. 인상도 참 괜찮았다. 마음도 좋았제. 얼매나 착한 사람이었다고.”

그러나 20살 할머니의 눈에 그런 남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죽는 게 낫다는 절망감뿐이었다. 그 절망감은 20살의 할머니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한번은 약 묵고 죽을라꼬 치료약을 한 서른 개 묵었다. 서른 개 먹으니 죽지는 안 하고 토하기만 토하고 얼굴이 새파래지고 굿이 났지. 그거 묵고 나니 잠이 안 오데. 밤낮으로 잠이 안 오데. 그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게 놔두라 하고, 간 크게 어디 약을 그리 지 마음대로 먹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약병을 단디 안 놔놓고 뭐했노 하는 사람도 있고, 아이고 동네 굿이 안 났더나.”

 

새로운 탄생

몇 날 며칠을 밤낮없이 뜬 눈으로 보내고 난 후, 할머니는 운명에 순응했다. 삶은 팍팍했다. 일자리를 얻을 수가 없었으므로 동냥을 다녔다. 운이 좋으면 쌀도 얻고 이삼일 지낼 수 있는 반찬거리도 얻었지만, 쫓겨 다니기도 수 없이 했다. 지금 생각하면 남편이 있었기에 그 어려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으리라 싶지만, 그 당시에는 아무 생각 없이 해 뜨면 일어나고 어두워지면 잤다.

“이 사람이 현재 내캉 이렇게 사는 사람이라고 맘속으로 자꾸 다짐했제. 안 그래야 될 낀데 자꾸 지난 기 생각나는 기라.” 그래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때 되면 밥 먹고 양식이 떨어지면 동냥을 다녔다. 그러다 집단촌에 배급이 시작되었다. “땡보리가 나오더라고. 쌀은 없었어.” 그 중에서도 좋은 것은 위에서 가로채 갔다. 나머지 힘 없는 사람들은 맷돌로 갈아서 보리 수제비를 해먹었다. 거친 보리 수제비지만 동냥을 다니지 않아도 굶지 않는다는 사실이 고마웠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러갔다. 그 동안 몇 번의 강제 이주가 있었다. 어느 날 사람들이 와서 떠나라고 난리를 치면 입은 옷 그대로 보따리만 들고 떠나야 했다. 집단촌은 울산을 떠나 부산으로 옮겨졌다. 세월의 무심함이 사람을 변하게 하는 건지 아니면 사람이 변해서 세월이 무심해 보이는 건지 알 수 없는 나날들이었다.

결혼하고 만 3년이 지나 24살 때 딸을 낳았다. 30살에 아이를 본 남편은 좋아서 어쩔 줄 몰랐지만, 할머니의 슬픔은 방긋거리는 딸을 볼 때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커져 갔다. 어디를 가든지 정부에서 나오는 배급품은 한센인들에게 제대로 보급되지 않았다. 좋은 것은 전부 힘 있는 관리나 하다못해 집단촌 이장까지 팔아서 이익을 챙겼기 때문이다. 생활은 항상 궁핍했지만, 딸은 젖을 먹여 키울 수 있었다.

할머니와 마주 앉은 방안은 서늘했다. 낡은 집의 창틈으로 찬 바람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다. “이리 추워서, 겨울이 되니까 영감에 대한 시를 하나 지어 볼라꼬 아무리 생각해도 시가 생각이 안 나.” “추운데 왜 할아버지 생각이 나세요?” “내가 겨울에 영감을 만났거든. 참 마이 추웠다. 눈도 마이 오고……. 하아얗게 쌓여 있었다.”

할머니의 감기 기운은 낫는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미열도 더 이상 내리지 않고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몇 년 전부터 감기가 자꾸 걸리는 기라.” 할머니는 혀를 찼다. 깊은 산 속에서 서서히 시들어 가는 고목의 모습이 눈앞을 스쳐갔다. 할머니에게서는 하나 둘 나뭇잎을 떨어뜨리는 고목의 무상함이 느껴졌다.

 

텅 빈 삶

딸아이가 젖을 뗄 무렵, 삶의 고통을 이기지 못한 할머니는 다시 약을 먹었다. 이번에는 예전보다 더 많은 양의 약을 먹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에서 들려오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딸의 울음인지 승팔이의 울음인지 알 수 없었다. 단지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으면서 ‘이제 됐다. 이제는 됐다.’라는 안도의 물결만이 밀려왔다.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남편의 분노에 찬 목소리가 들려 왔다. “참말로 징하다. 어찌 그리 독하노. 니 같은 독종은 살다 살다 처음 본다.” 세상의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린 듯한 목소리에는 분노와 허무함이 묻어났다. 아내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에 대한 자괴감에 남편은 한 동안 말문을 닫았다.

“밥 먹자 하면 먹고, 일하러 가자 하면 가고, 이거 하자 하면 이거 하고, 저거 하자 하면 저거 하고, 별 그거 없고 그래 지내는 사람인데 내 영감은… 이거는 만나 놓으면 어렵거든. 법적으로 이래 이렇게 그거는 없고” 할머니는 띄엄띄엄 간격을 두며 먼저 가신 남편에 대한 미안함을 드러냈다.

남편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텅 빈 듯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어린 딸은 어떻게 하라고 그러셨어요?” 나의 바보 같은 질문에 할머니는 담담하게 말을 이어 갔다. “죄를 짓는 것 같아서, 다, 딸도 승팔이도, 영감도, 아무 죄 없는 기라. 죄는 나한테 있는 기라. 그러니 죽을 수밖에.”

사는 것이 죄를 짓는 일이고 죽는 것이 속죄하는 일이라면 삶과 죽음의 차이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는 왜 태어나야 하는 것일까? 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는 동안 내가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태어나서 병들어 사는 것이 죄라면 진실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나는 혼란스러웠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죄’라는 단어에서 헤어날 수 없었다. 한 사람의 삶이 저렇게 고독하고 고통스러운데, 그 삶이 죄가 된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 나의 죄는 무엇일까. 할아버지와 딸에 대한 시를 짓고 싶지만, 도저히 떠오르지 않는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한 편의 시가 떠 올랐다.

 

나무들이 요란히 흔들리는 가운데 겨운 햇빛은 떨어지며 너를 불러들인다. 얼은 들판을 바라보고 앉아 있는 나에게로. 잘 왔다. 친구여, 내 알려줄 것이 있다. 저 캄캄해오는 들판을 바라보라. 들판을 바라보는 그대로 너를 나에게 오게 하는 법을 배웠느니라.

이제 무엇을 말하겠는가. 혹은 다시 보겠는가. 네 허전히 보낸 나날의 표정 있는 얼굴을. 네 그처럼 처음을 사랑했던 꿈들을.

보여라, 살고 싶은 얼굴을. 보아라, 어지러운 꿈의 마지막을. 내려서라, 들판으로, 저 바람 받는 지평으로.

황동규 < 이것은 괴로움인가 기쁨인가> 부분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온전하게 받아들이는 방법은 죽음이었다. 찬 바람 부는 언 들판 같은 삶을 살아가야 할 이에게 괴로움과 기쁨은 명확하게 구분되는 대상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 바라보는 삶은 어둠이 내려앉은 캄캄한 들판과 다를 바 없었을 게다. 그런 사람에게 ‘왜 죽음을 선택하는가’라는 질문만큼 어리석은 것은 없으리라.

 

계절의 끝에서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큰 기쁨으로 모두에게 외치는 한 생명의 탄생이 어떤 이에게는 살아보기 위해 애써 누르며 외면하고자 했던 상처를 수면 위로 들어 올리는 사건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기쁨이라고 해야 할까 고통이라고 해야 할까. 할머니에게 딸의 탄생은 새로운 고통의 시작이었다.

남편은 “당신 속에 무엇이 들어 앉아 있는가? 내가 알면 안 되는 것인가?”라며 아내의 마음을 열고자 노력했다. “가까이 오면 저리 가라고, 오지 마라고 폴을 휘둘렀지.” 털어 놓을 수 없는 비밀은 아내의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았고, 그런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의 마음은 까맣게 타 들어갔다.

“영감은 나한테 온갖 이야기 다 했다. 지 연애 했던 이야기, 첫사랑 이야기, 어릴 때 이야기, 나는 아무 말도 안 했다.” “만약 말씀하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요?”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영감은 참 좋은 사람이다. 예수를 믿고 나서는 더 좋아졌제. 무엇이든 나누었다.” 할머니는 나의 질문에 대한 답 대신 남편의 좋은 점을 열거했다.

좋은 사람이었으며, 50년이 넘는 시간을 함께 했지만, 사랑은 싹 트지 않았다. 딸을 바라보면서 떠나보낸 아이를 생각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은 다짐일 뿐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은 그리움과 연민은 불쑥불쑥 튀어 나와 가슴을 텅 비워 놓았다. 그때마다 어미는 어린 딸의 얼굴을 외면하고, 아이는 본능적으로 어미에게 더 매달렸다.

‘이렇게 병들어도 아이를 키울 수 있는데, 아이가 이렇게 아무 일 없이 잘 자라는데’라는 생각이 들 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들판에 홀로 서서 칼바람을 온 몸과 온 마음으로 맞았다. 그래도 추운 줄 몰랐다. 할머니의 마음을 꽁꽁 얼게 만드는 것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죽음의 문턱에서 돌아 온 이후 할머니의 삶은 언제나 죄책감이 함께 했다. 하지만 달라진 것은 죽음에 대한 유혹을 더 이상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죽는 것도 내 기 아이라. 내 거는 아무 것도 없는 기라.” 내가 가질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면, 괴로움도 기쁨도 고통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내 것이 없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묵묵히 살아가는 것뿐이리라. 할머니의 가슴은 언제나 찬 바람이 불어도, 그 찬 바람은 더 이상 할머니의 삶을 흔들지 못했다. 할머니에게는 이제 지켜야 하는 딸이 있고, 할머니를 지켜주는 남편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사랑은 아닐지라도 함께 갈 수 있다는 믿음이 할머니에게 싹트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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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사진 : 상단 나무 / 하단 작가

맹자와 장자가 만난다면? [맹자와의 대화 8]

전호근 / 김시천 대담

제선왕과 양혜왕, 맹자에게 러브콜하다

김시천: 맹자는 양나라 혜왕(惠王)을 비롯하여 제나라 선왕(宣王)과도 대화를 합니다. 맹자 당시에 혜왕이나 선왕은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 중국의 원자바오 총리 등에 견줄 수 있는 강국의 왕들이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일개 사상가에 지나지 않는데, 맹자는 도대체 어떻게 이런 제왕들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전호근: <맹자>에도 나오듯이 맹자는 제나라 선왕에 대해 기대가 엄청나게 컸습니다. 그래서 제나라에 가서 출사(出仕)를 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직접 벼슬을 못하고 ‘객경’(客卿)이 됩니다. ‘경’이라면 오늘로 치면 국무총리에 해당합니다. 그런데 그런 ‘경’이지만 임시로, 정규직이 아닌 비정규직으로 임명된 것이죠. 제나라 선왕이 맹자를 통해 지방관에 대한 보고를 받기까지 합니다. 왕이 맹자를 상당히 신임했던 것이고, 맹자도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맹자 또한 굉장히 뻣뻣하게 굴고 말대꾸도 하고 했지만 제나라 선왕이 굉장히 착한 군왕으로 왕도정치의 가능성을 지녔다고 보고 있었습니다. 결국 연나라를 침략한 문제로 인해 갈라서게 되지만 맹자가 떠나면서 매우 아쉬워했습니다. 왜냐하면 제나라 선왕이 소 한 마리 끌려가는 것을 보면서 눈물 흘릴 줄 아는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잘 계발하면 백성들을 사랑하게 하는 것은 쉽다고 본 것입니다.

김시천: 아마도 <맹자>의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두 가지 이야기를 고르라면 바로 그 이야기일 것입니다. 하나는 우물에 빠지려는 아이를 구하는 사람이야기로 바로 거기에서 맹자는 ‘측은지심’에 관한 논의를 꺼내지요. 다른 한 가지가 바로 제사에 쓰일 소를 잡으러 가는데 소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고서는, 소를 양으로 바꾸라고 하는 내용이지요. 맹자는 이것을 보고 그 때 느꼈던 측은지심을 백성에게 정치로 펼치는 것이 왕도정치라고 권하는 이야기죠.

그런데 선왕이 맹자를 대하는 태도는 어땠나요? 초강대국의 왕이니만큼 둘 사이의 대화가 편안했을까요?

전호근: <맹자>를 보면 선왕이 솔직하게 자신은 여자를 밝히고, 재물을 탐한다고 허심탄회하게 맹자에게 고백할 정도였습니다. 다른 왕들과는 분명 다른 면모가 있었기에 비록 맹자가 선왕을 떠나기는 했지만, 떠나면서까지 맹자는 선왕을 상당히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리고 끝까지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라기도 했습니다.

선왕도 맹자를 붙잡으면서 만종의 봉록을 줄테니 맹자아카데미를 만들자고 제안하니까 맹자가 이를 거절하죠. 옛날에는 십만 종을 준다고 해도 거절했는데 이제 와서 만종을 받으라는 거냐며 떠났는데, 정당한 방법으로 자기를 붙잡아 주기를 바란 것이었죠. 맹자 당시에는 진나라보다 제나라가 훨씬 강대국이었고, 선왕은 왕도정치를 실현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김시천: 대단히 높게 평가를 했군요. 마치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되자 전세계 사람들이 상당히 많은 것을 기대했었죠. 맹자도 마찬가지였나 봅니다. 그래도 선왕이 좀 다르긴 달랐나 보네요. 그럼 양혜왕의 경우는 어땠나요? <맹자>의 첫 부분에서 보듯, 처음 만난 양혜왕에게 맹자는 “하필이면 왜 이익을 말하느냐?” 하며 다짜고짜 따지지 않았습니까?

전호근: 그렇죠. 제 선왕과는 달리 양나라 혜왕에 대해서는 도덕적 평가가 높지 않습니다. 맹자는 양 혜왕에 대해 ‘불인한 군왕’이라고 했는데, 전쟁을 너무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양 혜왕이 “동쪽으로는 제나라와 싸웠는데 패해서 태자가 죽었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와 전쟁을 해서 7백 리를 잃었고, 남쪽으로는 초나라에 욕을 당했다. 죽은 자들을 위해 한 번 설욕해볼까 하는데 어찌하면 좋겠소?” 라고 하자, 맹자가 “사방 백 리만 갖고도 왕 노릇 할 수 있습니다.” 라고 답합니다.

김시천: 대단히 까칠했군요. 하지만 그렇게까지 말했는데도 맹자를 죽이지 않은 것을 보면 양혜왕도 상당한 사람이었던 듯싶네요. 요즘 같은 민주주의 사회인 우리나라에서도 그랬다간 쉽지 않았을텐데 말입니다.

전호근: 더한 것은 그 아들에 대해서입니다. 양 혜왕이 죽은 뒤에 즉위한 양왕에 대해서는 최악의 평가를 합니다.

김시천: 도대체 뭐라 말했기에 최악이라고 하시나요?

전호근: 이렇게 말합니다. 멀리서 보니 임금 같지도 않고, 가까이서 보니 왕다운 위엄도 없는데 그런 자가 만나자마자 졸지에 허튼 소리부터 하는구나 하며 최악의 평가를 내립니다. 양왕은 아마도 맹자 한 번 박대한 죄로 이만큼 심한 대접을 받는 것은 억울하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맹자>에 그렇게 기록된 죄로 2,000년이 훨씬 넘도록 푸대접을 받고 있는 것이죠. 그에 비하면 맹자가 제나라 선왕을 평가한 것은 맹자로서는 최대의 평가였습니다.

 

맹자와 장자가 만났다면?

김시천: 그렇군요. 헌데 <맹자>를 보면 한 가지 이상한 생각이 자주 듭니다. 철학사에서는 유가와 도가가 늘 논쟁했고 서로 각축한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사실 거의 동시대를 살았고 살던 곳도 서로 멀지 않은 곳이었는데도 <장자>와 <맹자>에는 서로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전 이것이 참으로 철학사의 수수께끼라는 생각이 듭니다.

전호근: 맹자는 생몰연대가 분명합니다. 또한 장자는 <사기열전>의 ‘노장열전’에 보면 제나라 선왕과 양나라 혜왕과 같은 시대에 살았다고 하니까 두 사람이 동시대에 살았던 것은 분명하다고 봅니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장자> ‘천하’ 편과 같은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논란이 되고 있는데 저는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 봅니다.

김시천: 하하하! 역시 선생님다운 논법이에요. 같은 시대를 살았고 바로 이웃 지방에 살았는데 서로에 대해 언급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상하다!’ 라고 말해야 할 텐데,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동시대인이 분명하다’고요? 참으로 맹자식의 언변입니다. 자, 그 이유를 들어야겠네요!

전호근: 맹자의 세상은 ‘천하’(天下)이고, 장자의 세상은 ‘강호’(江湖)라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노는 물이 다른 거죠. 맹자가 천하를 다스린다고 하는 것은 천하를 다스리는 자를 다스려서 천하를 바로잡으려고 한 것이죠. 이때 ‘천하’는 질서를 통해서 구현하려고 하는 당시 중국의 공간이고, 장자는 그런 질서에서 벗어나 있는 장자 식의 표현대로 ‘방외지사’(方外之士)인 것이죠. 그런 식으로 노는 물이 다르니까 서로에 대해서 직접적으로 평가할 기회가 없었지 않겠느냐는 것이죠. 또 당시에는 장자가 <장자>라는 책을 쓰고, 맹자가 <맹자>라는 책을 써서 서로 바꿔볼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죠.

김시천: 그것 참 그럴 듯하네요.

전호근: <논어>는 오랫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만 있었던 책이었죠. 말씀으로 기억되어 있다가 기록된 책이었죠. <장자>나 <맹자>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같이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 아니라면 서로 만날 수가 없는 것이죠. 그 당시 텍스트가 어떤 식으로 존재했는가를 이해하면 이렇게 서로 비판하고, 이야기하고, 논쟁하기 좋아하는 맹자와 장자가 왜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는가를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습니다. 물론 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초절정의 고수, ‘공자’같은 사람도 물론 있었습니다. ‘방내’(方內)와 ‘방외’를 두루 섭렵하면서 말이죠.

김시천: 공자가 방내와 방외를 두루 섭력했다는 것은 선문답이네요! 물론 저도 그 점은 동의합니다. 적어도 한 제국 이후의 지식인들에게 공자는 그렇게 생각되는 인물이었죠. 그러나 맹자와 장자의 이야기는 조금 다르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 선생님 말씀처럼 텍스트의 형태로 이야기한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호근: 물론 그것은 가능한 한 가지 추정의 방식이긴 하죠.

김시천: 전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의구심을 갖고 있어요. 무엇보다 우리가 ‘철학사’라는 것을 통해 고대 중국의 철학자들을 배우기에 공자, 노자, 맹자, 장자는 거의 대등한 위상과 의미를 갖는 것처럼 착각을 심어줄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장자열전’에 나오는 이야기도 그렇지만 장자라는 인물은 매우 불우한 인생을 살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생존 당시에는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던 듯합니다. 오히려 그가 이름을 남긴 것은 재상까지 지낸 그의 친구 혜시(惠施) 덕분이 아닌가 싶어요.

물론 이것은 그의 책 <장자>와는 별 개의 이야기입니다. 어찌 보면 맹자는 생존 당시 천하의 강대국들의 제후들에게 유세하며 살았던 풍운아였다면, 장자는 한적한 시골에서 그다지 이름은 알려지지 않은 채로 여생을 보냈던 것이 아닌가 싶어요. 가끔 재상 친구 혜시와 벗하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맹자의 가슴 속에 천하를 호령하는 기개가 담겨 있었듯이 장자의 가슴 속에도 우주를 꿰뚫는 도(道)가 숨겨져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합니다. 결국 그 도는 문자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이겠죠.

전호근: 그 또한 충분히 그럴듯한 얘기로군요!

(계속 이어집니다)

 

 

공자와 맹자는 호랑이 선생님? [맹자와의 대화 7]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부드러운 공자, 성깔 있는 맹자?

김시천: 지금까지는 <맹자>와 관련된 역사와 주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맹자>의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논어>에서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들 즉 제후(諸侯)들이 등장하더라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공자의 독무대이거나 공자의 제자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태반을 이룹니다.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 지금도 쓰이는 말로, ‘공자 문하의 뛰어난 현인 10인’(孔門十哲)이나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72인’(72제자) 혹은 그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삼 천 여 명의 제자’(三千弟子)와 같은 표현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맹자>의 첫 편은 ‘양혜왕’입니다. 그는 당시 제(齊) 나라의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같이 천하의 이름을 떨친 중흥 군주였습니다. <맹자>는 이런 당시의 쟁쟁한 인물들과 만나 대화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등의 대통령과 두루 만나 대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늘어놓지요. 간 큰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논어>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에서 그런 점은 아주 특징적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직접적인 논쟁이 없었죠. 다만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피한 경우는 종종 있어요. 어쩌면 <논어>에서는 공자와 상대가 될 만한 논객이 없었다고 봐야 하겠죠. <장자>에서는 그런 논쟁이 대단히 많이 나오죠. 특히 <장자>에는 그의 친구이자 논쟁의 상대였던 혜시(惠施)라는 인물도 있었죠.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김시천: 오죽했으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왜 그렇게 논쟁을 좋아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맹자는 ‘부득이’(不得已) 해서 그렇다고 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요. 바로 그 점이 또 <논어>와 다른 점인 듯합니다. <맹자>에서는 ‘만장’이나 ‘공손추’와 같이 제자들의 이름이 편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논어>의 경우도 그렇기는 하지만, <논어>는 첫 구절을 따서 이름을 지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논어>와 <맹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호근: <논어>에는 제자들끼리 토론한 편이 따로 있어요. ‘자장’ 편이 바로 그것이죠. 또 ‘자하 왈’ 이라거나 ‘자유 왈’처럼 공자의 제자가 혼자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제자들끼리 논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자들이 공자와 논쟁하는 부분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어요. 그에 비하면 맹자는 여러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과도 논쟁이 있었어요. 이 점은 공자와 아주 다른 점이죠.

<논어>에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로(子路)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로의 경우에도 그가 공자와 대등한 대화자로서 논쟁한다기보다는 공자에게 무턱대고 대들다가 심하게 욕을 먹는 장면들이죠.

 

호랑이 선생님 공자, 논쟁의 달인 맹자

김시천: 자로가 심하게 당한 이야기 하나 들려주시지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욕을 먹었나요?

 

전호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로가 “위(衛) 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초빙하고자 한다면, 가셔서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 잡겠다”고 답합니다. 그때 자로가 “참 답답한 선생님! 꼭 이렇다니까!” 하며 대꾸를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야비하구나, 자로야!” 라고 나무랍니다. 아마도 공자가 직접 저술했다면 더욱 리얼한 표현을 했을 텐데, <논어>가 공자의 제자의 제자가 저술한 것이어서 전반적으로 온유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도 상당히 성격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김시천: 매우 온화한 스승의 상으로만 알려진 공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군요! 정말 공자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나요?

 

전호근: 미생고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빌리러 오자 이웃에게 가서 꾸어서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를 일러 “부정직하다”고 비난합니다. 자기에게 없으면 그만이지 이웃에게 꾸어서 빌려주는 것은 은혜를 훔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죠. ‘월권’과 같은 것에 굉장히 예민했던 공자였던 것이죠.

이런 공자의 한 성격이 자로와의 대화에서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공자가 온유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자공이 잘난 체를 하자 “안회와 너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며 비교하는 아주 좋지 않은 교육방법도 취했습니다.

 

김시천: 자로가 상당히 당황했겠네요. 실제로 <논어>에는 자로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논어>는 그래도 <맹자>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죠. 왜 그런 것일까요?

 

전호근: 기록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었죠. 유자나 증자의 경우에도 <논어>의 기록자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공자의 제자들 위상까지 같이 높이게 된 것이죠. 만약 <맹자>도 맹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다면 만장이나 공손추가 같이 높아지는 텍스트로 <맹자>가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맹자>는 맹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런데 제가였던 공손추가 은근히 논쟁을 좋아하는 맹자를 비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맹자의 말은 참으로 대범하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의 공저자라고도 볼 수 있는 제자 공손추가 “밖에서 선생님을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유가에서는 본래 논쟁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공손추의 말에 맹자가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바로 요임금, 순임금을 들어가며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맹자> 속의 자로, 악정자

전호근: 그래서 <맹자>의 대화는 대체로 승부가 있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임금들과의 대화에서도 여지없이 바로 말을 잘라버리는 것이 맹자입니다. 나라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제나라 환공, 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를 닮고 싶다고 한 왕에게 맹자는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잘라버립니다.

<맹자>는 논쟁에서 승부가 갈리는 방식으로 대화가 전개되기에, 상대적으로 <논어>에 비해 제자들이 부각되기는 힘든 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스승의 상을 부각시키는 면모가 강한 <논어>와 달리, <맹자>는 논쟁의 승패를 염두에 둔 구성이기에 제자가 부각되기 어려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공자의 제가 가운데는 벼슬을 한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맹자의 제자들은 어떤가요?

 

전호근: 맹자의 제자 중에는 악정자(樂正子) 정도가 벼슬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는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김시천: 아하! 그 악정자 말씀이로군요. 공자에게 늘 면박당했던 자로처럼 맹자에게 면박을 당했던 그가 벼슬을 했었군요.

맹자가 제 나라에 있을 때 악정자가 자오(子敖)와 함께 제 나라게 갔다가 맹자에게 인사를 가죠. 그런데 맹자는 악정자를 보자마자 “그대로 나를 찾아왔나?” 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왜 그러시냐고 악정자가 되묻자 맹자는 언제 왔느냐고 묻고 악정자는 어제 왔다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자 맹자는 어제 왔다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따집니다. 그제야 악정자는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 그렇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한 성깔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그대는 그렇게 배웠는가? 묵을 곳을 정한 다음에 어른을 찾아뵌다고 배웠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맹자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맹자의 제자 가운데는 벼슬에 나아간 사람이 별로 없군요. 이는 공자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군요.

 

전호근: 공자의 제자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재상까지 했던 자공이 유명하죠. <사기열전>의 ‘중니열전’에는 자공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자학당의 든든한 후원자기이도 했었죠. 그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공자학당은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죠. 맹자에 이어지기까지 공자학당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이 더 알려졌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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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 / 자로상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