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맹자는 호랑이 선생님? [맹자와의 대화 7]

Spread the love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부드러운 공자, 성깔 있는 맹자?

김시천: 지금까지는 <맹자>와 관련된 역사와 주변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다루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는 <맹자>의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합니다.

우선 눈에 띄는 점은, <논어>에서는 당시의 유력한 정치가들 즉 제후(諸侯)들이 등장하더라도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거의 공자의 독무대이거나 공자의 제자들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태반을 이룹니다. 이러한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 지금도 쓰이는 말로, ‘공자 문하의 뛰어난 현인 10인’(孔門十哲)이나 ‘공자 문하의 뛰어난 제자 72인’(72제자) 혹은 그의 제자가 엄청나게 많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로 ‘삼 천 여 명의 제자’(三千弟子)와 같은 표현들이 이를 증명합니다.

그런데 <맹자>에서는 이와는 사정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맹자>의 첫 편은 ‘양혜왕’입니다. 그는 당시 제(齊) 나라의 위왕(威王), 선왕(宣王)과 같이 천하의 이름을 떨친 중흥 군주였습니다. <맹자>는 이런 당시의 쟁쟁한 인물들과 만나 대화합니다. 오늘날로 치면 미국과 중국, 러시아, 영국, 프랑스 등등의 대통령과 두루 만나 대화한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게다가 만날 때마다 그들에게 가르침을 늘어놓지요. 간 큰 사람이라 아니할 수 없어요. <논어>에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에서 그런 점은 아주 특징적입니다. 공자의 경우는 직접적인 논쟁이 없었죠. 다만 대화를 하려고 했는데 상대가 피한 경우는 종종 있어요. 어쩌면 <논어>에서는 공자와 상대가 될 만한 논객이 없었다고 봐야 하겠죠. <장자>에서는 그런 논쟁이 대단히 많이 나오죠. 특히 <장자>에는 그의 친구이자 논쟁의 상대였던 혜시(惠施)라는 인물도 있었죠.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김시천: 오죽했으면 맹자의 제자 공손추가 왜 그렇게 논쟁을 좋아하느냐고 따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맹자는 ‘부득이’(不得已) 해서 그렇다고 바로 부인하기는 했지만요. 바로 그 점이 또 <논어>와 다른 점인 듯합니다. <맹자>에서는 ‘만장’이나 ‘공손추’와 같이 제자들의 이름이 편명으로 등장합니다. 물론 <논어>의 경우도 그렇기는 하지만, <논어>는 첫 구절을 따서 이름을 지었기에 거기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보이지는 않습니다. <논어>와 <맹자>에 등장하는 제자들의 이야기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전호근: <논어>에는 제자들끼리 토론한 편이 따로 있어요. ‘자장’ 편이 바로 그것이죠. 또 ‘자하 왈’ 이라거나 ‘자유 왈’처럼 공자의 제자가 혼자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것이 있고, 또 제자들끼리 논쟁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그에 비하면 제자들이 공자와 논쟁하는 부분은 극히 드물다고 할 수 있어요. 그에 비하면 맹자는 여러 사람과 논쟁을 합니다. 심지어 제자들과도 논쟁이 있었어요. 이 점은 공자와 아주 다른 점이죠.

<논어>에도 예외적인 경우가 있기는 합니다. 바로 그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았던 자로(子路)가 그렇습니다. 그런데 자로의 경우에도 그가 공자와 대등한 대화자로서 논쟁한다기보다는 공자에게 무턱대고 대들다가 심하게 욕을 먹는 장면들이죠.

 

호랑이 선생님 공자, 논쟁의 달인 맹자

김시천: 자로가 심하게 당한 이야기 하나 들려주시지요! 도대체 어떤 식으로 욕을 먹었나요?

 

전호근: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로’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자로가 “위(衛) 나라 임금이 선생님을 초빙하고자 한다면, 가셔서 무엇부터 하시렵니까?” 하고 묻자, 공자가 “반드시 명분부터 바로 잡겠다”고 답합니다. 그때 자로가 “참 답답한 선생님! 꼭 이렇다니까!” 하며 대꾸를 합니다. 그러자 공자는 “야비하구나, 자로야!” 라고 나무랍니다. 아마도 공자가 직접 저술했다면 더욱 리얼한 표현을 했을 텐데, <논어>가 공자의 제자의 제자가 저술한 것이어서 전반적으로 온유한 표현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공자도 상당히 성격이 있는 인물이었다고 봅니다.

 

김시천: 매우 온화한 스승의 상으로만 알려진 공자의 모습과는 조금 다르군요! 정말 공자가 한 성격 하는 사람이었나요?

 

전호근: 미생고라는 사람이 매우 정직한 사람으로 소문이 났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식초를 빌리러 오자 이웃에게 가서 꾸어서 빌려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공자가 이를 일러 “부정직하다”고 비난합니다. 자기에게 없으면 그만이지 이웃에게 꾸어서 빌려주는 것은 은혜를 훔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죠. ‘월권’과 같은 것에 굉장히 예민했던 공자였던 것이죠.

이런 공자의 한 성격이 자로와의 대화에서 상당 부분 드러납니다. 공자가 온유하며 적재적소에 필요한 가르침을 베풀었다고는 하지만 자공이 잘난 체를 하자 “안회와 너 둘 중에 누가 더 낫다고 생각하느냐”며 비교하는 아주 좋지 않은 교육방법도 취했습니다.

 

김시천: 자로가 상당히 당황했겠네요. 실제로 <논어>에는 자로가 면박을 당하는 장면이 자주 나옵니다. 하지만 선생님 말씀대로 <논어>는 그래도 <맹자>나 다른 문헌들에 비해 논쟁을 찾아보기 어렵죠. 왜 그런 것일까요?

 

전호근: 기록의 차이가 크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공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기 때문에 공자에게 직접 배운 제자들의 말씀도 굉장히 중요하게 취급된 것이었죠. 유자나 증자의 경우에도 <논어>의 기록자 입장에서 보면 선생님이었던 것이죠. 그래서 결국 공자의 제자들 위상까지 같이 높이게 된 것이죠. 만약 <맹자>도 맹자의 제자의 제자들이 기록했다면 만장이나 공손추가 같이 높아지는 텍스트로 <맹자>가 기록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어쨌든 제 생각에 <맹자>는 맹자가 직접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런데 제가였던 공손추가 은근히 논쟁을 좋아하는 맹자를 비꼬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맹자의 말은 참으로 대범하지 않습니까?

 

전호근: <맹자>의 공저자라고도 볼 수 있는 제자 공손추가 “밖에서 선생님을 변론과 논쟁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보고 있습니다”라고 전합니다. 유가에서는 본래 논쟁하는 것을 높이 평가하지 않습니다. 공손추의 말에 맹자가 “내가 어찌 변론을 좋아하겠느냐” 라고 말하면서 바로 요임금, 순임금을 들어가며 변론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하게 말을 이어갑니다.

 

<맹자> 속의 자로, 악정자

전호근: 그래서 <맹자>의 대화는 대체로 승부가 있는 방식으로 전개됩니다. 임금들과의 대화에서도 여지없이 바로 말을 잘라버리는 것이 맹자입니다. 나라의 이익을 구하기 위해 제나라 환공, 위나라 문공과 같은 패자를 닮고 싶다고 한 왕에게 맹자는 그것을 수치로 여긴다고 잘라버립니다.

<맹자>는 논쟁에서 승부가 갈리는 방식으로 대화가 전개되기에, 상대적으로 <논어>에 비해 제자들이 부각되기는 힘든 문체를 지니고 있습니다.

 

김시천: 그렇군요. 제자와의 대화를 통해 자연스럽게 스승의 상을 부각시키는 면모가 강한 <논어>와 달리, <맹자>는 논쟁의 승패를 염두에 둔 구성이기에 제자가 부각되기 어려웠다는 것은 쉽게 납득이 갑니다.

공자의 제가 가운데는 벼슬을 한 사람이 꽤 있었습니다. 맹자의 제자들은 어떤가요?

 

전호근: 맹자의 제자 중에는 악정자(樂正子) 정도가 벼슬을 한 것으로 알려졌고, 그 외는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김시천: 아하! 그 악정자 말씀이로군요. 공자에게 늘 면박당했던 자로처럼 맹자에게 면박을 당했던 그가 벼슬을 했었군요.

맹자가 제 나라에 있을 때 악정자가 자오(子敖)와 함께 제 나라게 갔다가 맹자에게 인사를 가죠. 그런데 맹자는 악정자를 보자마자 “그대로 나를 찾아왔나?” 하고 퉁명스럽게 말을 건넵니다. 왜 그러시냐고 악정자가 되묻자 맹자는 언제 왔느냐고 묻고 악정자는 어제 왔다고 대답을 하지요. 그러자 맹자는 어제 왔다고 하니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하고 따집니다. 그제야 악정자는 묵을 곳을 정하지 못해 그렇다고 변명을 합니다. 그랬더니 맹자가 한 성깔하며 이렇게 말하지요. “그대는 그렇게 배웠는가? 묵을 곳을 정한 다음에 어른을 찾아뵌다고 배웠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런 기록을 보면 맹자는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을 진솔하게 드러내는 사람이었던 듯 싶습니다. 그런데 맹자의 제자 가운데는 벼슬에 나아간 사람이 별로 없군요. 이는 공자의 제자들과는 사뭇 다른 듯하군요.

 

전호근: 공자의 제자 중에는 여러 나라에서 재상까지 했던 자공이 유명하죠. <사기열전>의 ‘중니열전’에는 자공의 활약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는 공자학당의 든든한 후원자기이도 했었죠. 그런 경제적 배경이 있었기에 공자학당은 오랫동안 존재할 수 있었죠. 맹자에 이어지기까지 공자학당이 존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공자의 제자들이 더 알려졌다고 봅니다.

—————————————————

사진 : 영화 <공자>(2009)의 한 장면 / 자로상

(계속 이어집니다)

 

0 replies

Leave a Reply

Want to join the discussion?
Feel free to contribute!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