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본성, 네거티브와 포지티브 [맹자와의 대화 6]

전호근 / 김시천 대담

 

맹자의 성(性), 당근과 채찍을 거부하다!

 

김시천: 자, 이 지점에서 다시 성선설(性善說)과 성악설(性惡說)의 문제를 살펴보는 것이 순서일 듯합니다. 먼저 <맹자>에서 인간 본성의 문제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이 점은 맹자가 고자(告子)와 한 논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까? 당시에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매우 다양했었나요?

 

전호근: <맹자>에 보면 당시의 인간 본성에 관한 다양한 주장이 모두 다 실려 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저는, <맹자>가 고자라는 사람을 통해 인간 본성에 대한 논의를 모두 말하게 하고, 이를 비판하기 위해서 가공으로 만든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고자의 주장이 계속 바뀐단 말이죠.

 

김시천: 어떤 학자들은 맹자와 인간 본성을 둘러싸고 벌인 논쟁에서 고자가 도가(道家)에 속하는 인물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어떤 학자들은 고자가 인간을 생물학적 본성에 바탕하여 이해하고 있다면, 맹자는 이념적이고 당위적으로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보는 경우가 많지요. 전 이 점이 오해하고 생각합니다.

특히 일부 학자들은 서구적 개념인 존재와 당위, 사실과 가치의 구도를 들이대면서, 영국의 철학자 무어(G. E. Moore)가 말하는 ‘자연주의의 오류’를 범한 논변의 대표가 바로 맹자의 성선설이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맹자>에서 고자가 대변하는 인간 본성에 관한 이해는 어떤 것인가요?

 

전호근: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지요. ‘고자’ 상편에서 고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소용돌이치는 물과 같다. 물이 동쪽으로 터주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터주면 서쪽으로 흐르니, 인간의 본성에 선(善)과 불선(不善)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자 맹자가 그것은 틀렸다고 하면서, “물은 참으로 동서(東西)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上下)의 구분도 없는가?” 라고 되묻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맹자가 반박하는 논리가 타당하지 않다고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맹자의 반박이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모든 물이 아래로 흐르는 것처럼 모든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라고 말할 수도 있으니까요. 똑같은 얘기거든요.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논리적으로 완전한 것이냐 아니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이야기에서 고자가 물을 비유로 들었기 때문에 맹자가 같은 비유로 받아친 것이라는 점이 더 중요합니다.

 

김시천: 중요한 지적이십니다. 사실 그 부분에서 맹자는 이렇게 받아치지요. “지금 손으로 물을 탁하고 쳐서 튀게 하면 그렇게 튄 물이 우리 이마에까지 오르게 할 수 있고, 또 흐르는 물을 역행시키면 산으로 오르게 할 수도 있지만 이것이 어찌 물의 본성이겠는가?” 하고 묻습니다. 그리고 <맹자>는 여기서 ‘세’(勢)를 말합니다. 이 ‘세’는 오늘날의 말로 하면 ‘타자의 강제’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맹자>가 구분하고 싶었던 것은 인간 본성의 선악이라기보다 사실은 그 성(性)을 대하는 인간의 태도를 말한 것이 아닐까 합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당근과 채찍으로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는 것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의도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이 똑같이 헌혈을 한다고 할 때,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헌혈을 하는 것을 맹자는 ‘본성’이라고 보았다면, 배고픔을 면하기 위해 헌혈을 하는 행동을 구분하고자 했던 것이 맹자의 본지(本旨)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가 ‘측은지심’(惻隱之心)을 말하는 것이지요.

바로 이 지점을 파고 든 것이 법가(法家)의 생각 아닌가요? 인간은 당근으로 유인할 수 있고 또 채찍으로 강제할 수 있다는 것! 바로 그것이 ‘형벌’(刑罰)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맹자>는 바로 그러한 힘에 의존하는 권력의 부당성을 말하고자 했던 것이, 그의 인간 본성에 관한 논의의 핵심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에 그가 그렇게 강조하는 왕도정치는 곧 측은지심의 발현에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이겠죠!

 

생장하여 열매 맺는 뿌리가 바로 ‘성’이다

김시천: 그 외에 다른 구분도 있었지요? 사람을 구분하는 논의도?

 

전호근: 그렇죠! 고자는 또, “어떤 사람의 본성은 악하고, 어떤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맹자가 “모든” 사람의 본성은 선하다고 못 박아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악하고 어떤 사람은 선하다면 악한 사람은 배제하고 선한 사람하고만 살아야 되겠지요. ‘악의 축’이 따로 있다는 말과 통하는 것이죠. 또 고자는 이렇게도 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선도 없고 악도 없다” 고자가 말합니다. 그러자 맹자가 또 비판합니다. 인간의 본성은 그냥 선하다, 악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선설’을 주장하면 인간의 ‘악행’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없잖아요? 그것이 문제인데 인간이 악행을 저지르는 것은 인간의 ‘재질’(才質)의 죄가 아니라고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재’라는 글자를 눈여겨 볼 필요가 있어요. ‘재才’는 땅 속에 숨어서 싹을 틔우지 못하고 잠재된 것을 뜻합니다. 이것이 맹자가 말하는 ‘성’인 것입니다.

 

김시천: 바로 그런 점으로 인해 아이린 블룸이라는 미국의 학자는 <맹자>의 ‘성’ 개념이 식물적이라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맹자>의 인간 본성에 대한 개념도 생물학적이라는 말이지요. 더 나아가 사라 알란이라는 영국의 갑골문학자는 고대 중국에 식물과 물(水)의 은유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는 사고방식을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특히 그는 이를 두고 ‘뿌리 은유’라고 부르기도 했지요.

시게히사 쿠리야마라는 학자는 이런 점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 출현한 한의학의 독특성이 이로부터 비롯된다고 보기도 했습니다. 마치 인간을 살아서 움직이는 나무와 같이 보았다는 것이지요. 이런 시각에서 보면 환자를 치유하는 의사는 정원사나 농부에 비유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렇게 보면 유가의 최고 덕목인 인(仁)에 씨앗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것은 재밌는 일 같습니다. 그것은 생장하여 열매를 맺는 그 무엇인 모양입니다.

그런데 본성과 재질을 논하게 되면, 그 이후 다양한 논의로 이어지지 않았나요?

 

전호근: 그렇죠. 맹자의 본성론을 ‘재질’ 그 자체로만 보아서 비판을 하게 되면 굉장히 복잡해집니다. 후에 송(宋) 나라 시대에 인간의 본성을 ‘기질지성’(氣質之性)과 ‘본연지성’(本然之性)으로 나누어 본 것이 이에 해당하죠. 물론 우리는 맹자가 ‘기질지성’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를 비판할 수 없다는 것을 당연하게 알고 있죠. 왜냐하면 철학사를 공부했기 때문에 그 시대에 형성되지 않은 개념으로 맹자를 욕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송대의 학자들은 그런 오류들을 간혹 저지릅니다. 인간이 악행을 저질렀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본성’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악행은 기질의 잘못이지 본성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송대 학자들이 이끌어 낸 결론이었죠!

 

김시천: 그래도 송대 학자들은 ‘성선설’을 지키고자 했던 것 아니겠습니까?

 

전호근: 어쨌든 이런 식으로 <맹자>는 인간 본성에 관한 여덟 가지 입장을 고자나 그의 제자의 입을 통해 나열하며, 하나 하나 맹자가 비판을 합니다. 물론 인간의 본성이 선하다고 한 맹자의 ‘성선설’이 논리적으로 입증이 된 것인가 하는 관점에서 <맹자>를 따라가다 보면 대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사회진화론, 우생학 그리고 <순자>의 성악설

전호근: 오히려 저는 수많은 악이 도처에서 일어나는 전쟁의 시대에 맹자가 왜 그처럼 끝까지 ‘성선설’을 놓치지 않았는가 하는 부분에 주목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맹자는 그런 점에서는 좌절하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개인이 처한 시대에 대해서도 좌절하지 않고 인간이 선하다는 자기의 주장을 끝까지 견지했다는 점에서 평가되어야 합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죠.

 

김시천: 사실이 문제가 아니라는 점에는 저도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중요한 것은 같은 논의를 하더라도 어디에 초점을 맞추는가에 따라 다른 것 같습니다. 전 오늘날 유행하는 진화론 담론도 이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오늘날 신진화론의 선두 주자인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같은 학자들이, 약육강식의 논리로 이해된 사회진화론과 같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에드워드 윌슨이나 리차드 도킨스 자신은 그렇지 않다 해도, 그들의 발언이 어디에서 어떻게 이용될지 모르는 것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말은 ‘네거티브’입니다. 분명 바꾸거나 극복해야 할 어떤 실체처럼 여겨진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맹자>에게는 그런 방식의 위험성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 포지티브라는 점, 그것이 맹자의 수사학이 갖고 있는 위대함이라고 봅니다. 절대로 적이 내 논의를 써먹을 수 없도록 한다는 점이 맹자의 장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선설’이라는 담론이고, 제자백가 중에서 공자를 살린 위대한 학자가 맹자라고 봅니다.

 

전호근: 진화론이나 사회진화론을 주장하는 학자들의 이야기가 결국은 ‘짝짓기’로 귀결되는데, 인간이 자기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애쓰는 것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본성이라고 얘기되는 것이죠.

제가 읽었던 어떤 프랑스 소설에서는 한 남자가 결혼해서 여섯 자녀를 두었지만 단 한 명도 자기의 친자식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이 바보 같은 남자는 자식들을 극진히 보살피고, 가르치고, 사랑으로 돌보면서 죽을 때에도 전 재산을 다 물려주고 갑니다. 윌슨과 같은 진화론이나 짝짓기 논리에서 본다면 이 사람의 이야기는 말도 안 되는 것이죠.

맹자가 ‘성선설’을 주장한 것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한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제나라의 전화(田和)는 자기의 집에 180명의 후궁과 부하들에게서 낳은 자식까지 두었답니다. 그래도 모두 자기의 친자식처럼 거두어 살고 나주에 나라까지 다 말아먹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이것은 자식이고 아니고 간에 모조리 권력욕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김시천: 다시 <순자>로 돌아가 보면, 순자가 성선설을 비판하며 성악설로 간 것을 저는 매우 아쉽게 생각합니다. 이를 근대 서구의 토마스 홉스와 비교해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홉스는 인간의 본성은 사악하다는 이론을 강력하게 주장하면서 <리바이어던>을 통해 전제군주를 옹호합니다. 마찬가지로 순자도 공자나 맹자와는 달리 강력한 군주의 역할을 강화하는 논리를 폈습니다. 이런 논의의 중심에는 똑같이 ‘성악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전 여기서 성선과 성악 가운데 어느 이론이 맞느냐 혹은 과학적으로 증명될 수 있느냐 하는 것만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순자>가 성악설을 편 이후 한 나라 때에는 희한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불길한 날에 태어난 어린아이를 죽이는 것입니다. 물론 영아 살해는 세계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적으로 강화될 때 그런 행위는 더욱 자주 일어날 것입니다.

마치 미국에서 우생학이 유행하며 수많은 가난한 남성들에게 강제로 자식을 낳지 못하도록 수술을 했던 일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역사적 규모는 다르지만 사건의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전 그래서 철학자의 수사에서도 네거티브와 포지티브의 전략이 중요한 차이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선거에서만 그런 게 아니라!

[사진자료] 순자 / 리바이어던

(계속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