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나를 찾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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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마쓰시타를 만나다

요시코가 17세 때 마쓰시타를 만났다. 주말이면 학교가 있는 부산에서 집이 있는 울산으로 갔다. 일제 강점기임에도 울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기차 안은 사각모를 쓴 동래중학교(현 동래고등학교 전신) 남학생들이 많았다. 명랑하고 활발한 요시코였지만, 교복을 입은 여학생이 많지 않던 때이기도 하고 남학생들의 모습이 눈이 부시게 보여서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고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에 앉아 있던 오바상, 일본어로 아주머니를 오바상이라고 불렀거든. 오바상이 나를 툭툭 치대.” 옆자리의 아주머니가 눈짓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다가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고개를 드니까 나를 보고 있는 기라. 그래 좀 있다 내가 보나 안 보나 한 번 더 보니까 아직까지 보고 있는 기라.” 마쓰시타는 읽고 있던 책을 아예 무릎 위에 내려놓고 요시코만 보고 있었다.

할머니의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졌다. 그 순간 64년이라는 시간은 멈추었다. 마치 어제 있었던 일을 친구에게서 듣는 것 같은 가벼운 흥분마저 느껴졌다. 마쓰시타는 할머니의 작은 방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튀어나온 것처럼 시간의 강을 건너 할머니 앞에 앉아 있었다. 뭉툭한 손으로 뒤틀린 얼굴을 살짝 가리며 웃는 모습은 17살 소녀, 요시코였다.

부산이 가까워 오자 마쓰시타는 요시코가 앉아 있는 자리를 스쳐 지나가며 메모지를 교복 치마 위로 툭 던졌다. 그녀는 어찌 해야 할지 몰라 메모지를 치마 위에 그대로 두었다. 부산에 도착할 때쯤 치마 위에는 메모지가 수북했다. 차마 그것을 버릴 수가 없어서 반찬을 싼 보자기 안으로 밀어 넣고 기차에서 내렸다.

마쓰시타는 요시코를 쫓아와서 반찬 보따리를 뺏다시피 가져가서 들었다. 요시코는 마지막 전차를 타야만 하숙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빠르게 걷는 그녀 옆에서 마쓰시타도 함께 걸었다. “대신동 갈라면 어떻게 가느냐 이라데” 할머니의 말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마쓰시타는 대신동이 아닌 기라. 그 학교는 대신동하고 반대편에 있는 학교라.”

많은 경험들 중에서 우리의 삶을 지탱해 주는 경험은 시간의 질서를 따르지 않는다. 시간은 우리들의 과거를 뒤죽박죽 섞어 놓기도 하고, 낯익은 얼굴들을 기억 속에서 지우기도 하고, 어느 날 낯익은 얼굴이 낯설어 보이게도 한다. 생기를 띠며 소녀 같은 미소를 짓는 할머니의 얼굴은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었다.

 

사랑을 맹세하다

마쓰시타는 말이 없는 요시코를 따라 전차를 타고 대신동까지 가서 그녀가 내리자 따라서 내렸다. “자꾸 묻더라. 이름이 뭐꼬? 주소가 어찌 되노? 어디서 사노? 주말마다 울산 가나? 울산 집은 어데고?” 처음 듣는 할머니의 웃음 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지만, 이른 새벽 풀잎 끝을 또르르 구르며 떨어지는 이슬방울 소리를 냈다.

마쓰시타는 자기가 사는 집 주소를 요시코의 손에 쥐어 주면서, 역 앞이니 울산에 오면 꼭 들려주기를 당부하며 돌아갔다. 마쓰시타가 사는 집은 경찰서와 거의 붙어 있었고, 그녀의 집은 경찰서 뒤로 조금만 가면 되는 거리에 있었지만, 애써 피해 다녔다. 마쓰시타가 순사 부장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방학 때 어머니의 심부름으로 우체국에 가는 길이었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마쓰시타는 자전거를 타고 쫓아오며 어떻게 알았는지 “요시코 요시코”라며 그녀를 불렀다. 우체국 안에까지 막무가내로 따라 들어와 그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뛰다시피 집으로 오는 내내 요시코의 가슴은 콩당콩당 뛰고 있었고, 마쓰시타는 “여전히 자전거를 타고/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이름을 부르(<첫사랑 1>부분>)”며 그녀를 따라왔다.

그날 저녁에 잡지 책 안에

편지 한 통이

담으로 던져 마당에 있더라.

주워보니 그 얄미운

마쓰시타더라.

그리고 이것이

일 년 동안 지속되었다.

옛날 속담과 같이

열 번 찍어서

안 넘어 가는 나무 없다더니

이것이 나를 두고 하는 소리더라.

결코 만나자기에

일 년 후에 둘이가 만났더라.

<첫사랑 1>의 부분

둘의 사랑 앞에서 그가 일본인 순사 부장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장애가 될 수 없었다. 17세의 요시코와 마쓰시타는 “둘은 손을 꼭 잡고/동백섬에 들어가서 동백꽃을 꺾어/내 머리에 꽂아주고/내 역시 동백꽃을 꺾어서/그대의 윗 포켓에 꼽아 주며” “변치 말자고/손을 굳게 잡고 다짐하며/(< 첫사랑 1>의 부분) 맹세”했다.

그리고 이후 요시코의 삶은 두 손을 꼭 맞잡고 한 맹세에 갇혀 있었다. 자신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결혼을 한 다른 남자가 곁에 있었지만, 그녀의 영혼은 64년 전의 맹세에 묶여 있었다. 할머니는 시 <눈 내리는 날>에서 마쓰시타와 함께 한 시간들을 “팔십 평생을 살아도/눈 나리는 이 날이/잊혀 지지 않고/옛 추억이 그립더라.(<눈 내리는 날>부분)”고 말한다.

사랑에 대한 맹세의 기억이 없었다면, 어쩌면 할머니의 삶은 좀더 자유롭지 않았을까? ‘사람 목숨이 먼저이니 일단 살고 보자’고 그녀를 설득했던 청년 김철수와 결혼하여 59년을 함께 살았지만, 요시코의 영혼은 굳은 사랑을 맹세했던 마쓰시타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사별한 남편에 대한 미안함과 죄스런 마음을 이야기 내내 표현하면서도 마쓰시타라는 이름 앞에서 17세의 소녀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소설 <이 여자, 이숙의>의 주인공인 이숙의 역시 결혼 생활 6개월 만에 월북한 남편을 잊지 못하고 53년 동안 홀로 지낸다. 불같은 사랑을 했지만 남편은 임신한 아내를 남쪽에 두고 월북하였다. 6?25가 발발하자 남하하여 빨치산을 조직하고 남부군으로 활동하다 잡혀 사형되고, 이숙의는 홀로 딸을 낳아 기르며 남편을 그리워했다. 이숙의도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남기고자 글을 썼지만, 책이 출판되기 전에 생을 마쳤다.

영화 <타이타닉>에서 로즈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잭과 함께 했던 기억들을 떠올리며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몸을 바다에 담근 채 “넌 꼭 살아야 해. 네가 원하는 삶을 행복하게 살아야 해”하며 바다 밑으로 가라앉던 잭을 죽는 순간까지 마음에 간직한 채 삶을 이어갔다. 다른 남자를 만나 아내로 어머니로 살면서도 잭을 떠나보내지 못했던 것이다.

요시코, 이숙의 그리고 로즈는 우연히 만나 사랑했고, 그 사랑은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어지고 있다. 죽음도 이길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회상이 아닐까. 살아가면서 문득 문득 떠오르는 사랑의 기억은 그녀들의 삶을 때로는 기쁨으로도, 때로는 슬픔으로도 채우면서 출렁거렸던 것은 아닐까.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다

17세에 만나 채 3년이 되지 않는 시간의 기억들이 한 사람의 삶을 64년 동안 지배한다는 현실 앞에서 망각의 힘은 무력했다. 할머니가 마쓰시타의 생사를 알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와 함께 한 기억들이 의식의 흐름을 통해 지속되고 있었기에 현재까지 설레임과 그리움을 간직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할머니와 이숙의, 그리고 로즈에게 공통적인 것은 사랑의 기억이 삶에 의미를 부여했다는 점이다. 요시코와 마쓰시타의 이별은 개인이 저항할 수 없는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한 인간의 힘으로 역사의 흐름에 어떻게 맞설 수 있을까.

할머니가 했던 저항은 부조리한 현실을 부정하고 시간의 흐름을 거부하며 사는 것이었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무사히 삶의 저편에 닿는 것이 아니라 시간의 한 가운데에서 추억을 되살림으로써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마쓰시타와의 재회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알면서도 이루어질 것으로 믿으면서 할머니는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고 있었으리라.

17세의 그녀는 마쓰시타와의 우연한 만남이 자신의 운명을 어떻게 끌고 갈 것인지 알 수 없었다. 1년 동안 이어지는 마쓰시타의 구애를 받아들일 때 역사의 수레바퀴가 어디로 굴러갈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온 마음과 몸을 다해 사랑하고 사랑받았으며, 사랑만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문학작품이나 영화 등을 통해서 우리는 본다. 사랑은 한 사람의 삶의 축을 가로지르며 척박한 현실을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교사였던 이숙의는 초등학교만 졸업한 사회주의자를 사랑했지만, 남편이 남긴 딸과 함께 역사와 이념의 장벽을 넘었다. 로즈는 자기를 위한 삶을 사는 것이 잭의 마지막 부탁이었기 때문에 잭을 가슴에 품고 또 다른 삶을 찾았다.

그러나 할머니의 사랑은 그들과 달랐다. 마쓰시타를 다시 만난다 해도 한센 병 때문에 그 앞에 나설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자신의 손으로 남의 집에 양자로 보낸 아들의 얼굴은 한 살 젖먹이 얼굴 그대로 가슴 속에 남아 있을 따름이다. 날마다 조금씩 변해 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할머니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죽음마저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없을 때 할머니는 스스로 자신을 가두었던 것이다.

할머니의 추억은 그러나 죽음과 같은 현실의 삶에 때때로 생기를 주었다. 마쓰시타와 함께 했던 해운대 모래사장과 동백섬은 척박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는 회상의 공간이었으며, 눈 내리던 날에 함께 만들었던 눈사람은 잊혀지지 않는 순수의 지점이었다. 현실의 고통을 과거의 기억에 의해 버틸 수 있었던 것, 이것이 할머니의 삶에서 추억이 지닌 가치였다.

 

나를 찾아서 길을 떠나다

할머니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은 잃어버린 존재의 의미를 찾고, 그 의미에 가치를 부여하기 위한 것이었다. 부단히 흘러가는 속성을 지닌 자연적인 시간은 추억에 의해서 할머니만의 시간이 되었던 것이다. 할머니가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무르는 것은 단순한 현실부정이 아니라 과거 속에서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현실을 부정하는 그녀만의 심리적 시간은 할머니의 의식이 의지적이든 무의지적이든 한센 병이 발병하기 이전의 시간 속에 자신을 두고 싶어 하는 욕구에서 잘 나타난다. 이러한 욕구는 할머니의 사진이 한 장도 없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할머니가 보여 준 앨범 속에는 젊은 시절의 청년 김철수에서 영정 속에서 웃고 있는 모습 등 모두 사별한 할아버지의 모습만 있었다. 한센 병 발병 이전의 할머니는 그녀의 기억 속에 요시코의 모습으로만 남아 있었다.

할머니는 과거의 기억 속에 머물며 삶의 의미를 찾고자 했지만, 오히려 과거에 갇혀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 것은 아닐까? 할머니가 나를 만나고 싶어 했던 이유는 이숙의가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자 했던 것과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짧았던 사랑의 기억만으로 살아왔지만, 그 기억 속에 자신을 가두고 싶지 않는 것은 자신의 삶의 실존성을 회복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삶의 온전함을 회복하는 길, 이숙의에게는 자전적 소설이었지만, 할머니에게는 시를 통해 자신의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시를 쓰고 자신의 시를 읽으며 스스로 치유하고, 치유를 통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의미를 찾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찾는 데에 마쓰시타는 할머니가 건너야 할 또 다른 장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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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3)[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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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장애의 벽을 허물다

일주일이 지나도 할머니의 두통은 지속되고 있었다. 대화 중간에 말을 끊고 침묵하는 시간도 길어졌다. 침묵하는 동안의 할머니는 마치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통의 실체를 직접 대면한다는 사실을 할머니는 두려워하는 듯했다. 60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만 머물렀던 고통의 실체는 크고 단단한 옹이가 되어 깊숙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 옹이를 할머니는 ‘몸 안에 묵어 있던 이거’라고 표현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 밖으로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몸 밖으로 꺼내는 것에 의미를 찾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오랜 시간을 혼자 고통을 되새기며 보내는 동안 몸과 마음은 경계를 상실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있어서 몸의 고통을 느끼고 그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를 원하지만, 몸이 마음의 장애가 되어 자신을 속박하는 현실 앞에서 우리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그 장애를 없애기 위해 많은 노력들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거대한 힘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운명이라고 한다. 나의 운명을 어찌할 수 없을 때 고통은 시작된다.

오랫동안 자신의 삶을 속박했던 장애의 벽을 허물고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과 이러한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지 못하는 마음 사이의 갈등은 할머니의 내면을 분열시키고 있었다. 갈등에 의해 할머니는 마음을 한 군데에 두지 못하고 계속 어딘가를 헤매고 있었다. 자신의 삶의 행적을 차마 말로 옮기지 못하고 망설일 때에 시는 공감의 통로를 만들어 줄 수 있다.

“내 죽으모 그거는 인자 남가 놓고” 갈 수 있겠다고 했다. 할머니는 내면의 고통을 드러낸 시를 죽은 뒤에 남길 수 있는 자기의 흔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할머니에게 삶은 그 자체가 고통이었다. 이제 그 고통을 남겨 놓겠다는 말은 자기를 외면하고 소외시켰던 세계에 자기의 존재를 알리겠다는 하나의 징후이다.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은 자기 회복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 취하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행위이다. 할머니의 삶을 지배하던 고통의 근원은 몸의 질병과 그 질병으로 인한 삶의 장애에서 비롯된 것이다. 따라서 고통의 실체를 시를 통해 드러내는 것은 삶의 장애로부터 벗어나겠다는 의지의 징후이지만, 그 징후는 망설임과 갈등도 동반하고 있음을 첫 번째 시에서 알 수 있었다.

고요한 이 밤

풀에 벌레들

아름다운 멜로디로

내 심장을 울리네.

 

현해탄의 사랑이여

옛 추억의 첫사랑

– 내 전부를 바친 임이여

그리워 그리워서

하염없는 눈물에

내 옷깃이 젖었네.

 

소리쳐 통곡할 때

초승달도 울고 있네.

 

이 밤도 뒹구르며

몸부림칠 때

눈물이 강이 되어

잠을 이루지 못하네.

<여름 밤> 전문

이 시에는 고통의 근원인 한센병에 대한 표현은 없고, 할머니의 고통이 단순하게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첫사랑 때문인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실연의 슬픔은 여름밤 풀벌레 울음소리와 초승달과 같은 자연으로부터 전이되어 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심리표현은 할머니의 내면세계가 슬픔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투사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전이와 투사는 시를 쓰긴 했지만, 처음부터 내면의 고통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고 싶은 마음이 강하게 작용한 결과이다. 내면의 갈등은 가라앉지 않는 두통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그럼에도 같은 한센병을 앓았던 한하운 시인의 시를 읽고 그의 삶을 궁금해 하는 것은 시가 할머니에게 단절되었던 과거의 세계로 다가가는 소통의 길이기 때문이다.

 

죽음으로 다가가다

할머니는 두 번째 시 <어머니>에서 60년의 세월 동안 결코 멈추지 않았던 사모의 마음을 표현했다. 한센병을 치료하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어머니는 아이를 낳은 이듬해 큰병을 앓지도 않았고 시름시름 앓지도 않았지만 자리에 누운 지 며칠 만에 돌아가셨다. 아이는 더 이상 키울 수 없어 입양시킨 후였다. 할머니는 “하늘과 땅 사이에 나만 남았지”라며 허탈하게 웃었다.

할머니는 다섯 번째 시 <내 인생길>에서 처음으로 자살을 시도했노라고 했다.

어느 8월 15일

유난히도 밝은 달이었다

내 발걸음은 태화강을 걸어 가

강변에 우둑히 선

반구돌에 우뚝 서서

강물에 몸을 던져 자살을 기도했다.

이것마저도 내 운명이 아니었는가

뱃놀이 나오는 사람들의

구제의 손길에 다시 살아났다.

<내 인생길> 부분

자신이 동네 사람들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당한 채 물조차 마실 수 없는 비인간적인 상황에 놓이자 태화강으로 몸을 던졌다. 자살은 세상과 단절되어 절대적인 밀폐의 상황에 놓인 인간이 할 수 있는 극단적인 자기표현이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절망감과 한센병 발병이라는 현실에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끼고, 이 불안이 극대화되자 스스로 삶을 포기하게 된 것이다.

개인은 관계를 통하여 전체를 구성한다. 관계가 지속되지 못하고 전체의 구성원이 되지 못한다면 ‘자기’라고 할 수 없다. 키에르 케고르는 인간은 하나의 종합이므로 관계가 없는 인간은 ‘자기’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라는 정체성은 혼자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타인과 있을 때 형성되는 것이다.

할머니가 누군가에게 말을 할 수 있었다면, 또 누군가가 할머니에게 말을 걸어 주고 들어 주었더라면 자신을 스스로 버리는 극단적인 행동은 없었을 것이다. 자살은 할머니가 세상을 향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반항이었다. 하지만, 우연히 뱃놀이 나온 사람들에 의해 구조됨으로써 할머니는 또 다른 삶을 만나게 된다.

자살을 시도했다는 것은 할머니에게 자기에 대한 의식이 강하게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멸시와 천대를 받아가며(<어머니>)” 살아야 하는 “손톱만한 벌레만도 못한(<내 인생길>)” 인간이기에 “차라리 벼가 되었으면(<내 인생길>)”하는 자기 부정은 분노를 불러 온다. 그러나 분노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자신을 볼 수 있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의식 있는 자는 고뇌하며, 고뇌하는 자는 분노할 수 있으며, 분노는 절망과 달리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자신을 스스로 세우게 한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지워지고 싶지 않으며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욕망에 의해 분노가 생기기 때문이다. 이 분노에 의해 자기를 죽음으로 이끌었던 마음의 병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스스로 죽고자 하는 것이 자기의 운명이 아님을 알게 된 것이다.

 

새로운 삶을 만나다

혼자 지내고 있던 어느 날, 낯선 남자가 움막으로 찾아 왔다. 조금씩 이상 증후를 띠는 몸 때문에 할머니는 그 남자가 움막에 드나드는 게 싫었다. 하지만 그 남자는 며칠을 계속 찾아와서 할머니로서는 구하기 힘든 ‘대풍유’같은 한센병 치료제를 건네주었다. 자신을 약장수라고 소개하면서 중매도 한다고 했다.

“이 동네 저 동네 소문이 난 기라. 한센병 걸린 젊은 처자가 혼자 산다고 옆 동네에서 들었다 카더라.” 끈질긴 청을 거절하기 힘들었지만, 혼자 움막에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은 더 컸다. 그 남자는 일본에서 한센병 전문의사가 와서 무료로 치료해주는 진료소를 차렸는데, 그 곳까지 함께 가주겠다는 제의도 했다.

할머니가 움막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머니도 아이도 떠났고, 할머니의 마음은 배고픔과 외로움과 불안감으로 지쳐갔다. 어쩌면 일본인 의사의 도움과 좋은 약을 먹으면 병이 나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과 지금이라도 병이 나으면 마쓰시타와 아이를 찾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그 남자를 따라 길을 떠났다.

아무리 많은 세월이 흘러도 그 길을 잊을 수 없노라고 했다. “옷 보따리 하나 가슴에 안고 떠났제. 기차를 타고 반나절을 걷고 허름한 시골집 헛간에서 자고 또 걸었제.” 가도 가도 진료소는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면 그 남자가 무서웠지만, 한편으로는 그때만큼 자신이 한센병에 걸린 게 고마웠다. 겨울의 추위는 낡은 옷과 신발을 뚫고 할머니의 몸을 사정없이 파고들었다.

할머니는 사흘째 되던 날, 문득 눈 속에 반쯤 묻힌 자신의 발가락이 더 이상 시리지 않다는 걸 알았다. “내가 발가락이 동상에 걸렸다고 막 울었다. 그 놈은 삐죽이 웃더라.” 정체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공포가 밀려왔다. 더 이상 안 가겠다고 말은 했지만,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몸은 마음과 달리 그 남자를 따라갔다.

초가지붕이 서로 어깨를 맞댈 정도로 작은 마을에 들어서자, 그 중 가장 큰 초가지붕을 가리키며 들어가라고 했다. 의사라고 소개하는 남자를 보는 순간 할머니는 눈이 쌓인 마당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의사의 엄지 발가락이 꺾어져 발이 몽탕했다. “속았제. 속은 기라. 그 놈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엉터리 약도 팔고, 나처럼 병이 얕은 처자나 없는 집 처자들을 속여서 집단촌에 넘기는 기라.”

의사라고 소개받은 사람은 자기는 의사가 아니라고 했다. 일본에서 학교 다니던 중 징집을 받았으며, 군 생활 중 잦은 구타 끝에 한센병을 얻었다고 했다. “김철수라카대. 핸섬하대. 친절하고, 예의도 바르고, 마이 배워서 이해심도 깊고….” 허허로운 웃음과 함께 할머니는 말끝을 흐렸다. 고개를 흔들며 오래 전의 상황 자체를 부정하고자 했다.

할머니에게는 병을 고쳐 찾아가야 할 사람이 있었다. 납덩이처럼 가슴을 누르는 아이와 하루도 잊은 적이 없는 마쓰시타를 찾아가야 했다. 그러나 현실은 할머니에게 그런 희망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마을 전체가 한센병 환자들이 모여 있는 집단촌이었다. 남자와 여자들은 각각 떨어져 다른 집에서 거처했다.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한센병을 앓는 사람들은 아이를 낳으면 안 되었다. 그게 정부의 시책이었으며, 그 마을이 존재하기 위해선 모두가 말없이 지켜야 하는 규칙이었다. 그 마을마저 없어지면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또 다시 산과 들을 헤매며 살아야 했다. 부부들은 낮에 일할 때만 서로 얼굴을 대하고 안부를 묻고 해가 지면 서로 다른 집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 곳에서 할머니는 몇 번에 걸쳐 탈출을 시도했다.

그때마다 번번이 잡혀 곤욕을 치루었다. 때로는 독방에 가두어 놓고 며칠씩 굶기기도 했다. 때로는 사는 게 싫어서 스스로 굶기도 했다. 마지막 탈출 시도 후, 갇혀 있는 방으로 김철수라고 자신을 소개한 사람이 찾아왔다. “혼인하자카더라. 안 하면 인자 죽는 길 밖에 없다고. 사람부터 살리고 보자 하대. 거기서 사람 목숨 하나 사라지는 거는 장난이라.” 나라의 법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었다. 그 곳에는 그 곳의 법이 있었다.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할머니는 혼인했다. 혼인하고 나니 남편은 더 살갑게 대해주었다. 그럴수록 할머니의 외로움은 깊어갔다. 병든 사람들과 마주 대하고 있으면 자신이 금방 무너질 것만 같았다. 눈 속에서 시린 줄 몰랐던 발가락이 하나씩 없어지고 있었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캄캄한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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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회현동 계단>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2)[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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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산속 움막으로 쫓겨 가다.

몸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는 어머니가 끓여주던 미역국이 먹고 싶다. 싱싱한 생선과 생미역을 넣고 끓인 뜨거운 국을 먹으면 몸이 따뜻해지면서 힘이 솟았다. 어머니는 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 주면서 안쓰러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미역국에서는 언제나 어머니의 냄새가 났다.

행복한 일상보다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우리에게 먼저 떠오르는 사람은 어머니이다. 할머니는 이야기 중간 중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시냐는 질문을 자주 했다. 그 질문 뒤에는 “김선생도 아(아이)가 있제?”라는 또 다른 질문이 꼭 이어 나왔다. 할머니에게 어머니는 얼굴도 알 수 없는 아들과 함께 수많은 마음 속 옹이 중의 하나였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은 마을 전체로 퍼져 나갔고, 가끔씩 호기심으로 소문의 진위를 탐색하기 위해 오던 이웃들의 발길도 끊겼다. 할머니와 어머니 둘이서 살던 집은 세상 속의 섬이었다. 두 사람은 말을 잃어갔고, 하루 종일 사람 소리가 들리지 않는 날이 많아졌다.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음이 기정사실화 되자 할머니와 어머니는 살고 있던 집을 강제로 빼앗기다시피 팔고, 동네 뒷산 기슭에 있는 허물어져가는 움막 같은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 곳은 밤이 되면 더 무섭고 추웠다. 짐승의 울음소리도 무서웠지만, 누군가 와서 해치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에 깊이 잠들 수도 없었다.

19살의 할머니와 어머니는 초여름이었지만 부둥켜 안고 잠을 잤다. 산속 움막은 계절과 관계없이 밤만 되면 서늘한 바람이 여기저기서 들어왔고, 혹시 잠이 깊이 들었을 때, 누군가 와서 딸을 해칠까봐 어머니는 깊은 잠을 자지 않았다.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과 태어날 아이에 대한 불안감에서 할머니는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보냈다.

움막 주위 어디에도 물이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왔지만, 한센병에 걸린 할머니가 물가에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씻을 물도 마실 물도 움막 가까이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할머니가 산속에 흐르는 물줄기 가까이에 갈까봐 멀리서 끊임없이 감시하고 있었다.

어머니는 사람이 많은 시간을 피해서 새벽이나 저녁 무렵에만 우물로 갔다. 하지만 마을 사람들은 용케 알고 쫓아와 두레박을 뺏고 물통을 발로 차며 우물가에 접근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옷고름이 찢어진 채로 빈 물통을 들고 와 통곡하는 날이 많았다.

 

이래도 부모는 병든 자식이

그렇게도 좋을까

우물에 물을 뜨러 가시면

많은 사람들에게 두레박을 빼앗기며

양철통을 발로 차이고

온갖 학대와 멸시와 천대를 받고

돌아오면 모녀간에 부둥켜안고 울어

눈도 붓고 얼굴도 부었네.

<내 인생길> 부분.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다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숨결이 빨라졌다 느려지기를 반복했다. “벌레도 풀의 이슬을 먹고 사는데, 나는 사람이다 하고 소리 질렀다. 나는 벌레도 아인기라.”라고 말하는 할머니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할머니의 눈가에 맺힌 눈물은 떨어져 내리더니 코끝에 걸쳐 있는 안경알에 고였다.

할머니는 스스로를 사람도 아니고 벌레도 아닌, 아무 것도 아닌 그 무엇이라고 했다. 사람이지만 사람으로 살 수 없는 한센인은 “하늘과 땅과 그 사이에 잘못 돋아난 버섯(한하운, <나>)”과 같은 존재였다. “다만, 억겁을 두고 나누고 또 나누어도 많이 남을 벌(<나>)”받은 존재인 것이다. 오로지 남아 있는 것은 “욕이다 벌이다 문둥이(한하운, <삶>)”라는 처절한 싶은 현실뿐이었다.

한센병에 걸린 자신으로 인하여 어머니가 겪는 고통은 할머니에게 자신의 병보다 더 견딜 수 없는 벌이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들판으로(<내 인생길>)” 내달려도 마음의 고통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오히려 돌에 채이고 나뭇가지에 긁힌 상처는 한센병의 진행을 도왔다. 병은 몸을 조금씩 잠식해왔지만, 뱃속의 아이 때문에 시중에 떠도는 약은 아무 거나 먹을 수 없었다. 한센병에 좋다고 인정된 약은 너무 비싸 사 먹을 수 없었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절망이라는 마음의 병을 가지고 왔다. “차라리 이 땅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내 인생길>)” 자신으로 인해 곤궁한 삶을 사는 어머니를 보면서 할머니의 마음은 병들어 갔다. “배는 불러오제, 끼니거리도 구하기 힘들제, 우리 어무이는 온 산을 헤매고 다니며 산나물이고 열매고 갖고 와서 나 먹이기 바쁜기라.” 할머니의 숨결이 다시 가빠졌다. 눈시울은 붉게 물들고 맞잡은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분명히 살아 있는데, 죽은 사람처럼 먹지도 마시지도 씻지도 못하고, 사람 가까이에 갈 수도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 삶은 사는 것일까? 죽는 것일까?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하는 딸을 옆에서 지켜보아야 했던 어머니의 심정을 말과 글로 표현할 수 있을까? 할머니는 현재 살아 있지만, 살았다고 말할 수 없는 지난날을 말로 다 하지 못하고 깊은 한숨과 눈물과 떨림으로 나타내고 있었다.

60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할머니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과 연관되어 나타나고 있었다. 차라리 자기가 없었더라면, 어머니는 가족이 함께 살던 큰 집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며 편안한 여생을 보냈을 것이라는 생각을 떨치기 힘들었다. 임신만 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 곁을 떠났을 것이고, 그러면 어머니가 좀더 편안하게 살았을 것이라는 회한도 컸다.

 

느삼태 찾아 이산 저산 헤매던 어머니

무더운 8월 여름에 아이를 낳았다. 아들이었다. 조금씩 나오던 젖도 나오지 않는 날이 많았다. 아이는 언제나 배를 곯았다. 어쩌다 살갑게 지냈던 사람들이 아이 낳은 것을 알고 살짝 갖다 놓고 가는 양식이 유일한 끼니거리가 되는 날이 이어졌다. 산 아래 사람이 사는 세상은 해방이 되었다고 기쁨이 넘쳤지만, 산기슭 움막에는 적막만 있었다.

“한 번도 제대로 된 옷을 못 입혔제. 지도 산 목숨이라고 팔다리를 버둥거리는데, 젖이 안 나오는 기라.” 할머니는 이야기를 멈추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에미는 나병에 걸렸는데, 아는 괜찮더라. 참 우습제.” 많은 사람들이 전염될까봐 외면했는데, 정작 한몸으로 있었던 아이는 건강했다. 눈으로 보면서도 건강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아이를 낳았지만, 아이의 아버지는 찾아오지 않았다. 해방이 되자 신변의 위험을 느끼고 일본으로 급히 돌아갔다는 사실도 어렵게 찾아 온 친구를 통해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일본으로 가기 전에 할머니를 찾았노라고 친구는 전해주었다.

어쩌면 아이를 낳은 사실도 영원히 모를 것이라고 할머니는 짐작했다. 실제로 마쓰시타가 아이의 존재를 알았는지 몰랐는지 그런 것과는 관계없이 할머니는 자신과 아이가 마쓰시타로부터 외면당하지 않았다는 믿음을 갖고 싶었는지 모른다. 아이는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도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아이를 낳고 얼마 지나지 않자 병은 무서운 기세로 할머니를 덮쳤다. 절망에 빠져 자포자기한 산모와 제대로 울지도 않는 갓난 아기를 두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산을 헤매고 다녔다. 한센병에 좋다는 느삼태를 구하기 위해 산꼭대기까지 오르내렸다. “허리에는 노끈을 드리우고 약초 망태기는 어깨에 메고,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산 저산으로 헤매며(<어머니>)” 다녔다.

어머니는 오로지 느삼태를 구하기 위하여 어떤 날은 “엎어지고 넘어져” “머리 깨어 피투성이가 되”기도 하고, “까치 밭길에 천 갈래 만 갈래 찢긴 옷”을 “바람에 휘날리”며 돌아오기도 했다. 느삼태를 구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날이면 “내 한이야 내 한이야”하며 통곡했다. 어머니의 통곡 소리는 지금도 할머니의 귓가를 맴돌고 있다.

 

사모곡과 할머니의 두통

어머니가 당했던 고통의 근원이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할머니는 “머리털 하나하나 뽑아서 어머니 신틀메를 삼아도, 뼈를 깎아 어머니 공덕탑을 세워도” 불효를 벗어날 수 없다고 여겼다. 어머니에 대한 사랑은 60여 년이 지났지만, 지금까지 할머니의 가슴에 흐르고 있다가 한 편의 시로 재현되었다.

이 불효 여식

벌레만도 못한 인생

이것 무엇 보시고

당신께서는 그 높은 사랑

사랑으로 아낌없이

쏟아 부어 주십니까.

 

팔십 평생 살며

어머니 앞에

딸자식 자랑거리가 못되어

많은 사람에게

멸시와 천대받아가며

어머니 앞에 황송할 뿐인

이것이 내 인생길입니다.

 

어머니

끝끝내 당신은

나를 두고 눈물로

황승길 가셨나요.

아,

어머니.

<어머니> 부분.

시 <어머니>를 읊고 나자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이마에 열기가 있었다. 놀라서 화장대 서랍을 열고 약을 찾았다. 서랍 안은 몇 권의 공책과 전화번호부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수많은 약봉지 속에서 두통약과 해열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 약을 찾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말을 이어 갔다. 나는 돌아앉은 채로 대꾸할 말을 찾지 못한 채 할머니의 말을 듣기만 했다.

“내가 오늘날까지 이거, 묵어 있던 거 몸 밖에 꺼내어 뭐할 낀고 싶다.”

“우리 어무이는 참 고왔다. 아버지가 좀 일찍 돌아가시고 해도, 남긴 것도 있고 논도 있고 먹고 사는 데에 넉넉했다.”

“봐라, 김선생. 약 안 먹어도 된다. 옛날 생각해서 머리 아프다.”

“어제 밤에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까 눈물이 나더라. 마이(많이) 나서 마이 울었다. 그래 머리 아프다.”

할머니 옆에 가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가만히 웃는 것뿐이었다. 할머니를 만나면 시를 읊기 전까지는 내가 많은 말을 하지만, 할머니가 시를 들려주고 그것을 받아쓰기 시작하면 해야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가슴이 먹먹해지고, 마치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쓰는 내 자신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할머니의 두통은 계속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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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전호근 작 <벽>(2007)입니다.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나는 누구일까? 내 인생길 (1)[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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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거울

인간에게는 부끄러움이 있고, 이 부끄러움 때문에 사실을 감추려고 한다. 영원히 감추어 두어야 하는 대상이 자기 자신이라면 삶은 어둠 속에 갇히게 된다. 자신의 실상이 자신에 의해 가려져 스스로 소외될 때 우리는 기억 속에서 위안을 받고자 한다.

그러나 그 기억이 쓰라린 경험과 함께 떠오를 때 위안은 문을 닫거나 눈을 감는다. 이러한 의지와 관계없이 고통스러운 기억은 모습을 달리하여 우리의 삶을 떠나지 않고 머무르며, 마음 속 옹이를 단단하고 크게 키운다. 비록 그 옹이가 나의 고통이고 나의 삶을 잠식하는 것일지라도 그 상처를 잡고 있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잡고 있어야 나의 삶을 이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일상을 유지시켜주는 옹이는 작은 방 곳곳에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초여름인데도 두꺼운 커튼이 작은 창문을 반쯤 가리고 있었고, 방안 그 어디에도 사진이 없었다. 사진이 없는 작은 방, 과거와 단절된 채 현재의 시간만 있는 그 방이 할머니의 옹이를 말해주고 있었다.

화장품과 약병이 놓인 화장대의 거울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 큰 거울 앞에서 할머니는 아마도 비켜가는 시선으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거울 앞에서 할머니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며, 스스로를 비켜갔던 것일까. 그런 사이 옹이는 죽음처럼 단단하게 여물었을 것이다.

한하운 시인은 시 <자화상(自畵像)>에서 “한 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한 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고 말했다. 자신의 얼굴은 “웃음도 울음도 아닌 슬픔/그러한 슬픔에 굳어버린” 모습이다. “지나는 거리마다 쇼윈도 유리창마다/얼른얼른 내가 나를 알아볼 수 없는 나의 얼굴”이기에 그의 자화상은 옹이처럼 굳어 버렸던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의 일상에 언뜻 언뜻 비치는 모습은 한센병 이전의 처녀 적 고운 모습 그대로였다. 이야기를 하면서도 할머니의 손은 머리카락을 뒤로 단정하게 쓸어 넘기고 있었다. 방안에 앉아 있으면서 치맛자락을 가지런하게 펼치기를 반복하고, 81세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허리를 펴고 있었다.

“피부가 참 고우셔요.”라는 나의 말에 할머니는 턱짓으로 화장대를 가리켰다. “저거 좀 비싸게 주고 샀다. 저번에 화장품 아지메가 와서 새로 나온 건데 좋다 카더라.” 화장대 위에는 요즘 드라마 전?후의 광고에 나오는 화장품 병이 세 개 놓여 있었다. 수줍게 웃을 때나 나의 이야기에 크게 웃을 때도 할머니의 모습은 너무 고와서 슬펐다.

 

눈물

할머니가 19살 때 한센병은 찾아왔다. 할머니는 명랑하고 친구와 노는 걸 무척 좋아했기 때문에 학교수업 중에서도 체육시간이 가장 좋았다. 여름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문득 다리의 피부가 부옇게 보였다. 처음에는 때가 끼었나 싶어 문질러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고 날이 갈수록 다른 사람의 눈에도 띌 만큼 부옇게 변하며 건조해져 갔다.

“땀이 안 나더라. 다른 사람들은 덥다고 땀을 닦는데 나는 땀이 안 나. 그때는 몰랐지. 한참 지나서 땀이 안 난다는 걸 알았제.” 혹시나 했지만 단순한 피부병일 거라고, 곧 괜찮아질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초여름인데도 계속 다리가 건조해서 어머니의 동백기름을 살짝 바르기도 해 보았지만, 나아지지 않고 얼굴까지 부옇게 느껴졌다.

그렇게도 좋아하던 체육 시간에 할머니는 혼자 그늘을 찾아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학교 가기가 싫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 날을 즐거워하며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짧은 체육복을 입고 운동장을 뛰며

즐거워하고 있다.

 

나는 왜 이렇게 고통이 많고

내 앞에는 여러 가지 시련이 닥치나

절망에 싸였다.

<내 인생길> 부분.

할머니는 자작시 <내 인생길>을 천천히 읊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중간 중간 쉬어가며, 한숨을 크게 쉬며 나지막하게 들려주었다. 한센 병 이전의 할머니는 유일하게 종아리를 드러내고 마음껏 뛸 수 있는 체육시간을 매우 좋아하고 기다렸다. 종아리를 스치는 바람의 느낌도 좋았다. 하지만 남의 눈에 쉽게 띄는 종아리는 이제 감추어야 했다.

다리의 피부색이 변하기 전부터 얼굴과 몸이 붓고 손발에 힘이 없었다. 사랑에 빠졌던 할머니는 임신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병원에 갈 수 없었다. 누워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어머니는 한의원에 가기를 권했지만 임신 사실이 드러날까 두려워 갈 수 없었다. 할머니의 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은 감추는 것뿐이었다.

고녀 시절에 할머니는 남자를 만났고, 그리고 고녀 졸업반일 때 임신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일본 순사 부장의 아들이었기에 드러내놓고 말할 처지도 못되었지만, 처녀가 임신을 했다는 사실은 너무 부끄러워 감추어야 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안고 지내는 위태로운 시간들이었지만 학교에 가는 것은 즐거웠다.

시간이 지나면서 손발의 감각이 무뎌지고 눈썹이 눈에 띠게 빠졌다. 세수를 하고 얼굴의 물기를 닦은 후 수건에 묻어있는 눈썹을 떼어내면 손이 후들후들 떨렸다. 졸업이 다가오자 모두 사진을 찍는다고 들떠 있었지만, 할머니는 불러오는 배로 인하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고 방안에만 있었다.

잠시 숨을 고르던 할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심한 백내장과 오랜 기간의 한센병 투병으로 동공의 색깔은 검은 색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눈물은 맑고 투명했다.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쓸어내리던 손, 오랜 시간을 홀로 눈물 닦았을 그 손은 뭉툭했다.

무너질 가슴이 남아 있었던가. 할머니는 안으로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손을 빼내어 치마 밑으로 감추었다. 할머니의 마음속 뜰은 텅 비어 있었다. 출입문 유리 너머로 보이는 마당에는 여름 햇살만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잡아주고자 하는 손마저 거부한 채 할머니의 눈물은 또 한 방울 떨어져 내렸다.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할머니의 감정이 살아있었음을 말한다. 60여 년 동안 누구에게도 열어서 보여주지 않았던 자기만의 뜰을 보여주는 것은 쉽지 않으리라. 할머니의 외로움은 많은 사람들이 얽히고 설켜서 살아가는 곳이 세상인데, 그 곳에서 홀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불안에서 온 것이다.

우리는 ‘홀로 선 사람끼리 만나 둘(서정윤, <홀로서기>)’이 되고자 한다. 그러나 가슴을 치며 울 수조차 없었던 할머니가 기대어 살아 갈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할머니는 임신을 하고, 또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자기도 모르게 한센병에 걸렸던 것이다.

 

슬픔

외롭다는 것은 자신과 세상을 연결할 수 있는 공간이 비어있음을 말한다. 김소월은 <산유화>에서 청산에 홀로 피어 있는 꽃의 외로움을 노래했다. 청산과 꽃 사이에는 저만치 거리가 있듯이 사람이 있는 세상과 할머니 사이에는 텅 빈 공간이 놓여 있어서 건너갈 수가 없었다.

몸의 이상과 불러오는 배를 누군가 알아볼까봐 방안에 숨어 지낼 때, 할머니에게 친구들은 가장 큰 위안이었다. 친구들은 거의 매일 찾아와 그날의 일들을 말해 주었고, 할머니와 마쓰시타 사이의 전령 역할을 해 주었다. 그때쯤 동네에는 할머니가 한센병에 걸렸다는 소문이 나돌았지만, 친구들은 그 소문에 개의치 않았고, 할머니도 애써 부정했다.

소문은 점점 더 거세져서 언제나 학교를 마치면 할머니에게 와서 한 이불 밑에 같이 발을 넣고 어깨를 맞대며 웃고 장난치던 친구들이 하나 둘 찾아오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온 친구는 방으로 들어오지 않고 문밖에서 다시는 올 수 없다고 했다. 여기 온 걸 알면 부모님으로부터 크게 혼날 거라고 했다.

할머니는 자기를 떠나갔던 친구들에 대하여 담담하게 말했다. “온 동네에 소문이 파다했제. 그래도 친구들은 살짝 나와서 나하고 이불 밑에서 다리를 포개기도 하고, 아들이가 딸이가 농담도 했다.” 할머니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보고 니는 연애도 하고 좋겄다고 부러워했제. 갸들도 어쩔 수 없었는 기라.”

하지만 그 당시의 할머니는 친구나 동네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눈앞의 현실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는 자신의 예감대로 한센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슬픔이 끝없이 밀려 왔다. 그 슬픔의 눈물은 6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결코 멈추지 않았다.

하나님, 이렇게 땅 위에는

모래알같이 많은 인간이 살고 있지만

내게는 나병이라는 걸 내립니까.

하나님도 원망하고 싶고

내 자신도 미워

차라리 이 땅 위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내 인생길> 부분.

할머니는 자신을 ‘모래알 같이 많은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니며, 차라리 태어나지 않은 게 더 좋을 뻔’한 존재로 생각한다. 이러한 자기 존재의 부정은 자기의 삶에서 의미와 가치를 상실하게 한다. 뜻밖에 찾아 온 나병은 할머니의 삶을 죽음과 같은 어둠 속에 놓이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 있었기 때문에 새가 지저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꽃이 피고 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육체적인 질병에 의해 마음은 병들어도 삶은 지속된다.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은 절망에 빠지게도 하지만, 또 한편 자신의 가치를 회복하고자 하는 희망도 품게 한다. 이 때문에 눈물 속에서도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할머니는 나를 만났을 때, 자신이 살아 있음을 세상을 향해 말하고 싶지 않았을까.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을 때, 세상의 온갖 재앙과 슬픔이 쏟아져 나왔고, 마지막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 희망이다. 인간은 불행 가운데서도 희망을 가지게 된 것이다. 희망 때문에 더 절망하는 경우도 있지만, 희망이 있어서 고통을 견디기도 한다. 할머니에게 임신과 한센병은 더 할 수 없는 불행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을 포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 속 깊은 곳에서 자기만의 옹이를 진주로 키워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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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60년의 닫힌 문을 열다[치유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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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리 (인제대학교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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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의 집

집시들의 춤은 한 줄기 바람처럼 가볍고 노래는 오월의 햇살처럼 경쾌하다. 그들의 삶은 자유롭다. 할머니를 만나기 위해 마을에 들어서면서 먼저 마주친 것은 숨듯이 창 너머로 나를 훔쳐보는 눈길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몸을 숙이는 여인의 모습에서 집시가 떠 오른 것은 어떤 연유일까.

차에서 내려 기억을 더듬어 마을 입구일 것이라고 생각한 지점에서 한참을 머뭇거렸다. 마을은 보이지 않고 교회 십자가만 나무 가지 끝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애기똥풀 꽃이 가득한 길가를 돌아서 걸어 들어가자 비로소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고, 내리막길을 따라 집들이 보였다.

할머니의 집은 마을의 끝이다. 경사진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다 길이 끝나는 지점에서 왼쪽으로 다시 비스듬히 들어가면 유난히 키가 큰 노란 누드베키아 꽃들이 대문을 대신하여 서 있다. 담도 없고, 시골집에는 으레 있는 개 한 마리도 없는 작은 마당에 적막만이 감돈다. 문을 두드리자 두꺼운 안경 너머로 반가움이 먼저 나온다.

방안으로 들어서자 내 발걸음 수만큼 할머니는 뒤로 물러난다. 내가 가까이 다가앉자 역시 내가 다가간 만큼 뒤로 물러나 앉는다. 물 한 그릇을 청하자 “오늘은 별로 안 덥다.”라는 말로 물을 대신한다. 커다란 거울이 달린 화장대가 방 가운데에 놓여 있고, 화장대 위에는 몇 개의 약병과 함께 화장품들이 놓여 있다.

“어머니, 제 이름은 김성리예요. 부모님께서 여자는 영리해야 한다고 바탕 성에 영리할 리를 이름으로 주셨죠. 모두들 리야라고 불러요.” “거 좋은 이름이네. 뭐하는 사람이라고 했노?” “시를 공부합니다.” “시 공부하는 사람이 나는 뭐할라꼬 찾노.” 순간 침묵이 흘렀다. “어머니하고 이야기 하려고 왔죠.” “어무이가 있나?” “네, 고향에서 큰 오빠 내외와 계세요.” “나도 딸이 하나 있다. 아니다. 둘이다.”

 

여성의 삶에서 어머니의 자리는 특별하다. 세상의 어머니는 모성이라는 그들만의 언어로 대화를 나눈다. 할머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싶어 했다. 나이, 아이들, 남편,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등을 묻고 또 물었다. 7월의 날씨는 더웠고, 나의 몸은 땀으로 끈적거렸다. 할머니는 엉덩이로 몸을 움직여 손바닥으로 그릇을 받쳐 물을 가져다주었다. 물을 마시고 말없이 부엌으로 나가서 그 그릇에 다시 물을 부어 할머니께 드렸다.

 

침묵의 대화

말은 입을 통하여 나오고 귀로 듣는다. 때로는 묻지 않아도 알고 대답하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마음으로 하는 말은 마음으로 듣기 때문이다. 나는 할머니께 한하운 시인의 시 <전라도길 – 소록도 가는 길>을 들려주었다.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도

수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절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 길

할머니는 세 번을 반복해서 들으며 뭉툭한 손으로 방바닥만 문질렀다. “누고?” 나는 한하운 시인의 삶을 이야기처럼 전해주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관심을 가진다면 그 사람과 나는 함께 존재의 가치를 지닌다. 할머니는 한하운 시인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노라고 했다. 시를 한 번 읽어보고 싶었노라고 했다. 그리고 덧 붙였다. “살았나? 죽었제?”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방안을 가득 채우는 사이, 할머니와 한하운 시인의 시는 침묵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눈은 끝을 알 수 없는 시간 저 너머의 어딘가를 보고 있고, 나는 기다렸다. “이 사람은 왜 시를 썼을꼬?” 할머니의 말은 짧고 명료했으며, 간간이 이어졌다. “이 사람도 할 말이 많았겄제?” “처음에는 참 이상한기라.” “꼭 내 끼 아인 것 같고 넘 것 같다가도 내 낀가 싶고”

할머니는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어졌다’라는 한하운 시인의 말에 “한참 일하다 보몬 칭칭 감고 있는 광목에 흙은 묻고, 집에 와서 풀어 보몬, 참 그런 기라”라며 응답했다. “내가 좀 그랬제. 우리 영감은 안 그랬다.” 소금을 먹어보기 전에는 소금의 짠 맛과 바다의 짠 맛을 구별할 수 없다. 담담하게 하는 할머니의 말을 옆에서 담담하게 들었다.

 

동무가 된다는 것

백 가지를 안다고 해도 한 가지를 모를 때가 있다. 그 한 가지가 사람의 마음이라면 그 마음을 알 수 있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다. 경상도 지역에서 흔히 하는 말이지만, 결코 해서는 안 되는 말 중의 하나가 ‘문디’이다. 서정주는 자신의 시에서 이 ‘문디’는 밝은 낮에는 나올 수 없어 ‘달 뜨면 꽃처럼 붉은 울음을 밤새 우는 해와 하늘 빛이 서러운’ 존재로 묘사했다.

끝없는 황톳길에서 낯선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문둥이라면 친구가 된다. 그런데, 만약 마음을 털어놓고자 하는 상대가 문둥이가 아니라면 어찌할까. 나는 ‘문디’가 아니므로, 할머니 자체가 될 수 없으므로, 내가 아무리 많은 지식을 지니고 있다 하더라도 나는 할머니의 삶을 보여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할머니의 삶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야 한다.

“나도 쓸 수 있겄나?” “김선생은 많이 배웠제?” 할머니는 일제 말기에 여고를 다녔다. 주말이 되면 부산진역에서 기차를 타고 울산 집에 가는데, 어머니가 대문 앞까지 나와 있었다. 다시 학교가 있는 부산으로 떠날 올 때에는 보따리 가득 밑반찬이 들어 있었고, 어머니는 그 보따리를 들고 기차 안까지 들어와 자리를 잡아 주었다.

누군가의 말을 들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마치 강물이 산등성이에서 바다까지 갈 때 햇빛이 함께 가는 것(박재삼, <울음이 타는 가을 강>)’처럼 그 사람과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함께 하며 기억을 공유하는 것이다. 나는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한 자리 못 앉아 있는’ 할머니의 마음을 보았다.

“산다는 것은 이렇게 혼자 속으로 조용히 우는 것(<갈대>)”이라는 신경림 시인의 말처럼 할머니는 60여 년 동안 혼자 말하고 혼자 들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었고, 아무도 들어 줄 수 없었던 이야기는 오랜 시간 동안 할머니의 내면에 상처를 주고, 그 상처는 더 큰 상처를 주며 할머니의 삶을 기억 저 너머에 가두고 있었던 것이다.

할머니는 TV 프로그램 중 이산가족을 찾는 것은 언제나 본다고 했다. 오빠와 언니가 있었지만, 할머니의 한센병 발병 사실을 알지 못한 채 헤어졌기 때문에 다시 만난 것은 불과 10여 년 전이다. 몸으로 살아가야 하는 현실에서 남과 다른 몸은 타인의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 타인의 시선은 무차별적으로 그들만의 방법으로 나의 몸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일본에 살던 오빠가 오랫동안 수소문하여 할머니를 찾았을 때 오빠는 분노했다. 동생이 한센인이었기 때문에 국가도 사회도 심지어 고향의 지인들까지 동생을 버렸다는 사실에 망연자실했다. 할머니의 현실에 오빠는 절망하며 이 땅을 떠나자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떠날 수 없었다. 떠나기에는 상처가 너무 컸다.

어디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 한센인 집단촌에서 쫓겨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며 전전하다가 낙동강 하구둑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 곳에서도 쫓겨나 용호동에 정착했다. 그것도 잠시 다시 신암을 거쳐 배를 타고 을숙도로 갔다. 을숙도로 가는 동안에도 인근 주민들은 삽과 곡괭이를 들고 나와 감시했다. 을숙도는 세상과 단절된 섬과 같았지만 차라리 그 곳의 생활이 편하고 행복했다.

사라호 태풍이 오자 한센인들은 집채처럼 덮쳐 오는 물기둥을 피해서 죽을 힘을 다 해 을숙도에서 탈출했다. 그들은 동네로 들어오지 못하고 인근 초등학교에 강제 수용됐지만, 그 난리 속에서도 주민들의 위협은 살벌하고 집요했다. 비가 억수같이 내리던 밤에 그들은 청소차에 실려 지금의 마을에 내던져졌다.

 

소통의 언어

내가 누군가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소외된다는 사실에서 비롯된 고통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것으로 수용되지 않는다. 할머니의 삶을 떠나지 않고 있는 고통 중의 하나는 소외감과 절망이었다. 한센인들과는 같은 공간에서 숨조차 쉴 수 없다는 사람들의 이기적인 집착은 나와 다른 타인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혼자 잘 살겠다는 아집은 나에게 고통을 주지만, 너와 함께 살 수 없다는 아집은 타인을 고통 속으로 밀어 넣는다.

표현은 소통의 방법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소통을 가로 막는 장애가 되기도 한다. 몸이 병들어 일그러지는 것은 육체가 무너지는 것일 뿐 한 사람이 일그러져 내려앉는 것은 아니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 다른 개개인의 감정들이 교차하는 과정에서 형성된다. 그러나 겉만 볼 뿐 속은 보지 않는 마음에서는 감정들이 교차될 수 없다.

이름을 바꾼다는 것은 이러한 소통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할머니는 화장대 위에 놓인 공과금 고지서와는 다른 이름을 말해주었다. 자신을 조금씩 갉아먹는 “매독 같은(<공간의 시 6>)” 현실의 벽 앞에서 느끼는 상실감을 시인 엄국현은 “이름을 바꾸었으면 한다. 나는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공간의 시 6>)”라는 말로 대신했다. 이름을 바꿈으로써 자유로운 바람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시인의 희망처럼 할머니도 이름을 바꿈으로써 영혼을 구속하는 몸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했는지 모를 일이다.

마을 입구에서 마주쳤던 여인의 흔들리던 눈빛이 먼 옛날의 할머니 눈빛은 아니었을까. 그 여인의 눈길에서 자유로운 영혼을 갈망하는 바람 같은 집시 여인의 희망을 보았던 게다. 희망은 현실을 추상화처럼 변형시키지만, 그 현실이 자신을 소진시키지는 않는다. 희망이 있으면 언제나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81세의 할머니가 이름을 바꾸는 행위는 또 다른 세상과 소통하고자 하는 할머니만의 언어이며 희망일 것이다.

스스로 믿고 희망하는 행위 자체는 하나의 체험일 수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조각상 토르소를 보며 “너를 바라보지 않는 곳이란 한 군데도 없으니까. 너는 네 삶을 바꿔야 한다.<아폴로 고대 토르소>)”라며 토르소의 삶에 희망을 불어 넣는다. 집시들이 바람처럼 자유로운 삶을 추구하듯이 할머니는 60년 간 닫혀 있던 문을 조금씩 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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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에 게재된 사진은 순서대로 전호근 作 (2004년) 작품으로 작가의 허가를 받아 올린 것임을 밝힙니다.[편집자]

# 히게이아(Hygeia)는 고대 그리스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이는 흔히 의약과 치유의 신으로 알려진 아스클레피오스(Asclepious)와는 또 다른 치유의 신입니다. 아스클레피오스가 의술이나 약으로 환자의 병을 적극적으로 치료하는 신이라면, 히게이아는 환자 자신의 자연치유력을 돌봐주고 길러주는 치유의 신입니다. 그래서 아스클레피오스가 치료의학의 수호신이라면, 히게이아는 간호학과 위생학의 수호천사로 불립니다. [히게이아의 시학]은, <e시대와 철학>과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의 공동기획으로서 바로 치유의 여신 히게이아의 정신을 계승하여, 문학 특히 시를 통해 환자의 삶과 소통하고 환자의 자기 치유를 유도하는 하나의 치유인문학이자 인문의학의 성격과 내용을 널리 알리고자 기획된 것입니다.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을 바랍니다. [편집자의 말]

 

 

시(詩), 삶을 치유하다[치유시학]

김성리 (인제대 인문의학연구소 연구교수)

 

시를 만나다

 

봄바람이라고 하지만 올 봄은 유난히 바람이 많다. 봄바람 속에서 나는 연일 기침을 하고 있다. 쉰 살, 천명을 아는 나이다. 윤동주는 ‘시를 쓰는 것은 슬픈 천명’이라고 노래했다. 나의 천명은 무엇인가? 천명을 알지 못하기에 나는 언제나 희망한다. 지금 내가 희망을 가지고 몰입하고 있는 분야는 시 치유이다.

문학치유에 관심을 가진 것은 오래 전이다. 간호대학을 졸업하고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할 때 의술로도 해결되지 않는 마음의 상처를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이 떠올랐다. 가족과 떨어져 병원에서 매일 울고만 있을 때 외국인 간호사가 가져다 준 책이 <백설공주>였다. 글을 읽을 줄 몰라 내용은 알 수 없었으나 그림만으로도 위안이 되었다.

지속되는 입원 생활에 지쳐 생기를 잃고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아이들과 갑자기 닥친 몸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환자들을 보면서 기술적인 치료 외의 다른 무언가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실제로 그들을 위해 아무 것도 하지 못했다.

시 치유를 하나의 학문으로 받아들이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불과 6년 전이다. 석사 과정에서 비평을 공부하고 박사 과정에서 시를 전공하게 되면서 시에는 마음 치유의 힘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시를 읽으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고요함속에서 나를 마주 보면 나 자신이 가여워져서 스스로를 어루만지는 체험을 통해 마음속의 슬픔들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되살아나 마음 한 쪽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시를 통해 누군가와 고통의 경험들을 나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한 것처럼 그 누군가도 시를 읽거나 쓰면서 고통의 기억들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다면, 고통을 나누는 그 길에 내가 동행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고 생각했다.

시 공부는 험난했다. 시치유의 뜻을 밝혔을 때, 나의 지도교수는 시는커녕 문학에 대해 아는 게 없는 사람이 무슨 시치유냐 하며 시를 먼저 공부하든지 정녕 시치유를 공부하고 싶으면 다른 선생을 찾아가라고 했다. 그 날 이후 6년 동안 거의 매일 아침에 출근해서 아무도 없는 어두운 교정을 걸어 내려오는 일상이 이어지고 있다.

어두운 교정에서 나무를 보며 묻는다. ‘너는 아니?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이 맞는 걸까?’ 아직까지 나무의 대답을 듣지 못했다. 밤보다 더 어두운 불확실성만 나를 속박해오지만,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 시를 공부한 지 이제 겨우 6년째다. 시가 무엇인지 아직 알 수 없지만, 공부를 하며 확실하게 느낀 것은 인문학은 삶과 관련된 학문이라는 것이다. 인문학은 사람의 삶 속으로 들어와 녹아들 때 생명력을 지닌다. 시가 마음을 치유할 수 있다는 확신은 여기서 나왔다.

 

몸은 마음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고통을 동반한다. 삶 속에서 욕망은 서로 충돌하며 갈등하는데, 여기에는 고통이 뒤따른다. 우리는 영원히 살고 싶어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죽음이 예정되어 있으며, 건강하게 살고 싶어 하지만 병듦을 피할 수 없고, 영원토록 젊고 아름다움을 유지하고 싶지만 늙어가는 것은 자연의 순리이다. 아도르노는 이러한 인간의 고통을 보편사적인 관점에서 보고 인간의 의식과 심리가 훼손되었을 때, 즉 살아 있는 경험이 상실되었을 때 고통이 인간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몸은 곧 마음이며 신체의 건강이 마음의 건강인 것이다.

몸에도 감정이 있다는 것은 스트레스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인 이상 증상을 보면 알 수 있다. 또 의료사의 관점에서 보면, 16, 17세기의 서구에서는 정신 질환을 신체나 외부의 어떤 힘에 의한 독소가 원인이라고 생각했다. 중국에서는 심리적인 기능과 생리적인 기능을 구별하지 않고 과도한 감정이 질병을 유발한다고 보았다. 붓다는 집착과 욕망을 버릴 때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룬다고 설파했다. 붓다는 마음이 지닌 치유의 힘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몸의 질병을 주술사의 주문에 의지해 극복하고자 했다. 한국 고대 사회의 제의를 살펴보면, 시와 노래를 통하여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했다. ‘제주도 영감놀이’나 ‘처용가’에서 놀이를 통하여 희극적으로 병을 치유하고자 한 고대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시가 마음과 몸의 고통을 치유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의학은 병을 치료한다. 의학에서 고통은 하나의 증상으로 인식된다. 그러나 치료가 끝났다고 고통이 끝나는 것은 아니며, 의학이 모든 고통을 치료하지도 못한다. 치료과정에서 불가항력적으로 발생하는 몸의 변형이나 치료의 흔적은 한 사람의 삶을 고통 속으로 끌고 간다.

따라서 이때의 고통은 치료보다 치유적인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치료는 진단하고 의학의 기술로 병을 낫게 하는 것이지만, 치유는 돌보는 것, 안아주는 것에 가까운 개념이다. 즉 의학은 기술로 병을 낫게 하지만 문학은 상처받은 내면을 돌보고 안아줌으로써 상실감과 절망감에서 벗어나게 한다.

고통의 경험은 분명히 개인적이며 다른 어떤 경험으로 대체하여 설명할 수 없으며 타자와 공유할 수 없다. 그래서 같은 고통의 경험일지라도 개인에 따라 느끼는 정도가 다르다. 고통은 스스로 해결할 수 없으므로 즐거움과 달리 사람을 수동적으로 만들며 세계에 대하여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준다.

고통도 느끼고 아는 것이므로 의식에 주어진 것이지만 고통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지는 않다. 우리는 고통에 의해 성찰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자신이 처한 상황이 일반적이거나 정상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때 마음을 드러낼 수 있는 언어가 필요하다.

 

시는 치유 의례이다

 

시의 언어는 관념을 내포하고 있으며 사유가 압축되어 있기 때문에 시를 읽으면 감정의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감정의 변화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성찰하고 그 과정에서 자연적으로 기억이 작용하여 자신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체험을 떠 올리게 된다. 이 체험에 의해 자신의 모습을 바로 봄으로써 현실의 고통을 수용하게 되고, 조화로운 자아를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쓴다는 것은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생성해 내고, 일상적인 삶에는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축적된 기억과 경험을 쓰기라는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드러내는 것이므로 시는 주관성과 내면성의 표현인 것이다. 시를 쓰면서 자신의 기억을 재구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을 획득할 수 있다. 시를 읽거나 쓰는 행위에서 현재 나의 모습에서는 보이지 않는 그 무엇인가를 찾아낸다면, 그것은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길을 비추는 빛이라고 할 수 있겠다. 시를 읽고 쓰는 행위가 자기만의 치유 의례가 되는 것이다.

예술은 고통받는 개인의 모습을 어릿광대로 나타낸다. 루오는 삶의 고통을 어릿광대로 묘사했고, 시인 김춘수는 “내가 비칠할 때 여러분은 날 붙잡아야 해요. 비칠하는 건 언제나 여러분이니까요” “너무 우스워서 한 가지도 우습지가 않아요” 라는 어릿광대의 말을 통해 세계의 모순과 부조리함에서 오는 고통을 노래했다.

여기에서 어릿광대는 고통 받는 개인의 은유이다. 시는 은유를 통하여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이미지는 개인의 체험에 의해 다양한 감정 변화를 일으키게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예술은 억압된 감정은 고통이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해온 것이다.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용기와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는 세계 안에서 개별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어떤 사람이 혼자 감당할 수 없는 고통에 의해 세계와 단절되고 고립되어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를 향해 손을 내밀어야 한다. 인간은 언제나 전체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이쪽의 ‘나’와 저쪽의 ‘그’가 ‘있다’라는 것이다. ‘나’와 ‘그’ 사이에는 어떤 거리가 있겠지만, 좀더 용기 있는 사람이 먼저 다가가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 손의 역할을 시가 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닫힌 마음이 세상을 향해 열릴 때 시는 창이 될 것이다.

시치유에 대한 확신을 얻기까지 많은 시간과 용기, 그리고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다. 한센인들의 집단촌을 찾아갈 때, ‘지금 나는 무엇 때문에 이 분들을 찾아가고 있는가’라는 데에 생각이 멈추자 고요한 침묵이 나를 엄습했다. 그때 나에게 용기를 준 것이 나의 기억과 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그림으로만 보았던 백설공주는 나에게 무한한 상상력을 가져다주었고, 상상력은 내가 삶의 어려움을 헤쳐 나올 때 어둠을 밝히는 빛과 같았다. 어른이 되어 만난 시는 내 안에 잠재해 있던 슬픔의 모습들을 비추어주며 홀로 설 수 있게 해 주었다.

희망을 찾아서

 

정기 검진을 나온 보건소와 병원의 관계자들과 함께 마을 회관에 들어섰을 때 그 어느 누구도 나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나는 철저하게 외부인일 뿐이었다. 거의 한 나절을 기다려 진료가 끝났을 때 어렵게 그들 앞에 섰다. 그리고 나의 체면, 자존심 심지어 부끄러움까지 다 버렸다. 모두 무심했다. 잔뜩 경계하고 의심하는 분위기뿐이었다.

‘이미 다른 마을에서 한 번 실패했지 않았는가. 이 마을에서도 나의 진심이 통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그들의 눈을 마주 보았다. 얼굴은 보이지 않고 오로지 눈만 보였다.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건만 아무도 적지 않았다. 그들은 손으로 적는 대신 기억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전화를 받았다. 발걸음을 돌려 할머니를 만났다. 지금부터 7개월 동안 있었던 할머니와의 만남을 이야기할 것이다. 우리는 매주 2시간씩 얼굴을 맞대거나, 한 이불 밑에 앉아서 할머니는 60년 동안의 삶을 이야기 하고 나는 들었다. 한 사람은 이야기로 다 하지 못하는 마음의 고통을 시로 구술했고, 한 사람은 옆에서 받아 적었다.

또 다른 한 사람이 있다. 이 분은 무척 절박했지만, 내가 큰 힘이 되어주지 못했다. 실패한 이 만남도 이야기 할 것이다. 실패를 통하여 시가 모든 사람들, 모든 고통을 다 나누어 가질 수 없음을 배웠다. 실패의 경험은 시치유 외의 다른 인문학적 치유가 필요함을 알게 해 주었다. 누군가의 마음을 열고 그 마음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이다. 나는 시로써 누군가의 마음을 보듬어 주고 어루만져 줄 수 있기를 희망한다.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한다. 꽃잎은 자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바람에 실려 간다. 내일 나에게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렇다면 천명을 알아서 천명에 순응하겠다는 나의 희망 자체가 나에게 괴로움을 주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태어나고 죽는 삶의 과정 자체가 불완전한 것이고, 내가 경험한 것들을 쌓아 두는 마음과 몸이 고통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몸과 마음이 있어 희망이 있고 희망에 의해 삶은 변화할 수 있는데, 그 모든 것이 고통이고 불완전하다면 어찌 해야 할까. 그럼에도 우리는 끊임없이 내적인 성찰을 통해 희망의 씨앗을 품어야 한다. 사람은 시간과 공간을 넘어 항상 의미를 추구하는 지향을 지니는데, 희망의 씨앗은 무엇을 지향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별빛과 같기 때문이다.

 

 

청소와 인문학

먹빛 실루엣 아래 칠흑으로 잠긴 산으로 들어가면 낮과는 다른 세상이 있다. 어느 생의 그릇으로 영겁을 쌓아온 시간의 벽이 사라지고 스스로 살아나 바람의 결로 유유할 때, 세상은 크게 열리고 나는 태고의 원시포자를 느낀다. 가보지 않은 사람들은 알 수 없는 환함 속에서 숲도 길도 더없이 아름답고 아늑해진다. 절망이나 포기란 사실 게으름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곧 놀라운 세상이 펼쳐진다고 해도 산 입구에 드리워지는 무겁고 짙은 어둠의 커텐은 친절하지 않다.

사춘기에 마주친 가난이라는 어둠의 입구에서 돌린 발길은 지천명의 목전에서 기초 생활수급자가 되는 데도 일조를 하였을 것이다. 어린 시절, 쌀이나 연탄 정도를 가끔 지원받으시던 동네 영세민 할머니는 단 하루도 쉴 날 없이 일하는 내 부모님보다도 더 불쌍해 보였는데, 그런 영세민이 된 것이다. 낯설고 쉽지 않은 일이기도 하지만, 안으로 싸우다 돌아보면 나름대로 약간의 체념상태에서 이해가 되기도 한다. 학창시절, 친구들의 부러움과 질시를 받던 모범생, 부모님의 끔찍한 애정은 세상을 만만하게 만들기도 했고, 그런 오만함은 또 댓가를 치르게 했다.

2007년 8월, 몹시 지친 마음으로 자활기관의 문을 두드렸을 때 청소 팀이 있었다. 면담을 하던 팀장이 비위는 좋은지.. 등등을 물었을 때, 약간은 부어 있는 마음으로 상관없다고 담담하게 말했지만, 고등학생이 된 아이들이 어머니가 하는 일에 대해서 뭐라고 하지 않겠냐고 하는 순간, 무너지고 말았다. 약해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한번 터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내렸다. 싫다 마다 할 수 없는 처지이니 한 달만 하고 말거라고, 일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 일을 계속할 수 없는 이유를 만들면서 돌아왔다. 일은 가끔 진이 빠지도록 해야 할 때도 있지만, 다른 일보다 비교적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옛 말에 길을 가다보면 소도 보고 뭐도 본다던가. 청소하는 사람이라고 날 때부터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니 누가 한들 대수며 사람이 하는 일, 못 할 일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평소의 인식이라는 것이 문제다. 청소를 직업으로 가지게 되면서 한동안의 우울함은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특히 먼 훗날 어른이 되어 이 시절의 엄마를 생각하는 아이들에게 연민의 상처는 깊을 것이다.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몸 생각 좀 하라고 말릴 정도로 열심히 일 하면서, 무슨 일을 하는가 보다 어떻게 하느냐를 따진다면 부끄러울 게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운 이들에게도 내가 하는 일을 말할 수 없었고 스스로에게도 끊임없이 변명해야 했다. 바닥의 먼지를 닦는 것이 아니라 전생이거나 현생에서 나도 모르게 쌓아 놓은 자잘한 업들을 쓸고 닦는 거라고… 엉뚱한 곳을 헤매며 태만하게 살아온 많은 시간들을 메워야 하지 않겠냐고… 남은 생의 지름길을 선택한 것이라고…

시간적으로 유리한 점이 있긴 했지만 온갖 변명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우울한 자괴감을 떨칠 수 없었는데 그런 중에 기관 홈페이지에서 자활 인문학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미 강의는 진행 중이었고 일 년을 참고 견딜 수 있을까 싶으면서도 마음 속에 밝은 등대 하나가 켜지는 것이다. 일을 하는 내내도 강좌를 잊어버리지 않았고 혹시 놓칠세라 수시로 전화를 걸어 확인하곤 했다. 2008년 7월 드디어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사람을 만나는 것보다 책을 더 좋아한다. 이런 저런 핑계로 많이 읽지는 못하지만 책을 가까이하는 편이고, 혼자 시를 읽고 음악을 듣고 유치한 그림을 그리고 수다 떨듯이 글을 쓴다. 인문학 수업으로 오랜만에 다시 써보는 글과 읽게 되는 시로 특별한 감회를 느낀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난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인문학 수업 이후에 책을 덜 읽게 되었고 글도 잘 쓰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행복했다. 수업을 받게 되면서, 그렇게 무겁던 생은 날개를 단 듯 가벼워졌다. 인문학 수업을 마치고, 문학 교수님의 소개로에 “자활(自活)인문학”이라는 글을 올린 적이 있다.

…돌아보면, 배우는 것이 좋고 인문학이라 더 좋았지만, 밥 한 그릇과 맞바꾸어지는 내 일상의 대부분의 시간들과 달리 밥과 바꿀 수 없는 시간들…그래서 행복했고 소중했다. 모든 순간순간들이 소중한 만큼 스스로 정성스러워졌다. 수업이 있는 날은 게으른 얼굴에 분도 좀 바르고 변변치 않은 것들 중에서나마 조금 더 깨끗한 옷을 골라서 입으려 했다. 수업을 듣기 위해 타는 1호선 전철은 금정역을 출발하는 순간, 순간이동을 했다. 세상의 빛과 공기가 달라졌고, 현실은 까맣게 잊혀졌다. 길가 풍경들 위에선 축제를 알리는 무수한 마음의 깃발이 펄럭였고, 나는 늘 봉실봉실한 구름을 타고 다녔다. 행복했다. 좋아 하는 것들을 좋아할 수 있는 사람들과 함께 누릴 수 있는 시간들은 분진 가득한 현장을 벗어나서 찾아 들어간 향기롭고 신선한 천국의 숲이었다. 그 속에서 우리는 때묻은 작업복을 벗고 깨끗하고 순한 옷을 입은 채, 새처럼 떠들고 꽃처럼 웃었다. 우리가 함께 보고, 듣고, 말하고, 먹고, 마신 모든 시간들은 순결한 행복으로 채워졌다. 항아리 위로 넘치는 물처럼 마음 속을 채우고 넘쳐 오른 행복감은 감사함으로, 사랑으로 흘러 우리는 끝없이 서로 감사하면서 사랑한다고…이전엔 결코 쓰지 않던 말들을 하고 또 했다.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비슷한 교육들을 받기도 할 것이지만, 어느 곳에서의 교육도 지금과 같은 의미는 두 번 다시 찾기 어려우리라. 스스로 아무런 가림막도 갖지 않았지만, 부모님 슬하에 있던 어린 시절처럼 안온한 시간들이었다. 다시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보면, 아름다운 숲의 향기가 온몸과 마음을 적셔, 종내 나도 한그루 향기로운 나무가 되었던 느낌이다. 내 일상은 서늘하고 푸른 기운으로 가득 차 있어 지루함이나 피로를 알지 못했다. 딛는 발자국마다 에너지가 넘쳐 흘렀고, 마음 속에선 꽃이 피고 또 피었다…

어떤 표현을 쓴다고 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마음 둘 데 없는 이들과 마음으로 만났고 우리의 외로움에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주시는 교수님들을 만났다. 수업이 끝날 일을 생각하면 서운함은 매운 칼바람처럼 미리부터 가슴을 에이었고 불 꺼진 무대처럼 그 황량함을 어찌 견딜까 싶어지곤 했었다. 아쉬움 속에서 졸업을 하고 동문들끼리 한 번씩 만나 추억을 되새기며 마음을 이어가고 있을 때 심화과정이 개설되었다. 졸업 후, 확실히 우리는 더욱 돈독하고 따뜻해졌다. 많은 것들이 기능적 일회성 또는 일회용 소모품으로 전락하게 되는 세상이지만, 학교에선 이런 저런 행사와 함께 졸업생들을 각별하게 챙겼다. 심부름 센터에서 잠시 빌린 친척처럼 어색하기만 하던 학교가 이제는 낯설지 않게 되었다.

(전략) 여전한 무기력을 이불처럼 덮고 누워서 생각 한다 맑은 물이 가득 찬 항아리가 필요해… 쉬고 싶어… 그 물속 깊숙이 웅크리고 있으면 눈을 뜨지 않아도 돼 숨을 쉬지 않아도 돼 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돼 (후략) …

인문학 수업을 듣기 직전에 지친 마음으로 썼던 짧은 글이다. 제목을 「양수」라고 붙였는데, 반전 같은 걸 꿈꾸고 싶지 않을 만큼의 피곤이 느껴지던 그 즈음이 지금도 생생하다. 입학식 날의 기대와 설레임 속에서, 쓸 때와는 전혀 달리 출발선의 푸르고 힘찬 느낌으로 이 글이 새삼 떠올랐다. 지금도 인문학 수업은 그런 느낌과 함께 한다. 심화 과정을 들으면서, 어떻게 하면 좀더 다양하고 풍성한 경험을 할 수 있게 할까 고민하시는 교수님들의 마음과 이전보다 훨씬 여유 있고 한층 성숙해진 동료들을 느낀다. 정리해 보면 인문학 수업은 내 안에 있던 외로움이라는 두터운 스모그를 걷어내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건 없이 마음 써 주는 분들이 있다는 커다란 믿음과 위안의 언덕을 가지게 하였다. 발등만 보면서 급하게 걷던 생활에서 고개 들어 이웃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가깝고 진지하게 들을 수 있게 되었으며, 가난은 여전하지만 조금 더 멀리 볼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된 것이다

남춘자(경기광역자활지원센터) /

너의 도시

비탈진 계단을 내려오며
오늘의 소망도
함께 길을 나섭니다.

수박 향기 같은
비온 뒤의 아침이
살짝 코 끝을 시큰하게 합니다.

하늘 한 번 볼 일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언제부터 인지
먼 하늘을 바라 보게 합니다.

버스를 오르며
창 밖의 먼 하늘 끝에
어제처럼
간절한 소망 하나 걸어 놉니다.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출근길

비탈진 계단을 내려오며
오늘의 소망도
함께 길을 나섭니다.

수박 향기 같은
비온 뒤의 아침이
살짝 코 끝을 시큰하게 합니다.

하늘 한 번 볼 일 없이
살았던 날들이
언제부터 인지
먼 하늘을 바라 보게 합니다.

버스를 오르며
창 밖의 먼 하늘 끝에
어제처럼
간절한 소망 하나 걸어 놉니다.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나의 사치

어제 이사 일을 거들고 돈이 좀 생겼다. 구멍 난 신발을 신고 다닌 지 좀 된 터라 동네 시장을 찾았다. 북적거리는 틈을 돌아다니며 가죽신발과 티셔츠를 샀는데, 티셔츠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레이온, 실크, 스판덱스가 소재였다.

대중화장실에서 티셔츠를 입고 지하철을 타고 오는데, 가방 맨 어깨 쪽이 자꾸 신경이 쓰인다. 혹시나 가방끈 때문에 보풀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 들어 이렇게 어떤 것 때문에 신경 쓰인 때도 없었다. 나는 요즘 전화도 없고, 그냥 속옷과 잡다한 물건이 든 가방 하나가 지금 가진 전재산이랄까. 가방을 잃어버린다고 해서 많이 속상할 일도 없다. 걱정이라면 오늘 산 실크가 조금 들어간 티셔츠가 당분간 내 걱정거리가 될 것 같다. 없어서 불편한 것보다 있어서 신경 쓰이는 게 좋은 걸까 하는 우스운 생각에 잠시 글을 남긴다.
– 서울역 근처 희망무지개 어린이놀이터에서

*이 글은 시민 인문학 강좌 수강생이 쓴 것입니다.

윤준오(인정복지관 만나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