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철학을다시 쓴다]-31-1

있는 것이 아니면 없는 것이라고? 천만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도 있어 [철학을다시 쓴다]-31-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 미루고 미루고 또 미루어 왔던 ‘운동’의 문제라는 ‘벼랑 끝에서 허공으로 한 번 내딛기’의 시간이 온 것 같습니다. 오랫동안 이 문제를 다룰 길을 찾아왔지만 여전히 저는 사막 한가운데서 제자리를 맴도는 여행자의 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먼저 제 변화된 환경에 대해서 몇 말씀 여쭈어야 하겠습니다. 저는 그 동안 몸담아 왔던 지방 대학을 떠나 한 해 말미로 이 땅에서는 가장 머리 좋은 학생들이 모여 있다는 중앙 도시의 국립 대학 대학원 철학과 석사 과정 학생들에게 ‘존재론’을 강의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제 계획은 거창했습니다. 이 기회에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존재론 전통의 맥을 짚어 가면서 ‘존재’와 ‘운동’의 문제를 중심에서부터 파고들자는 욕심을 부렸으니까요. 이 무리한 욕심이 저를 파멸로 몰아넣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앞섰습니다. 저는 제가 빠져들 수밖에 없는 ‘운동’의 깊은 늪에 뛰어드는 시기는 되도록이면 뒤로 미루자고 마음먹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은 그 동안 제가 조금씩 쌓아올렸던 존재론의 비축 양식을 야금야금 갉아먹는 것으로 버텼습니다. 잘 하면 이미 쌓아 놓은 양식으로 한 학기를 더 버틸 수도 있겠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문득 머리에 떠올랐지만 저는 머리를 흔들었습니다. 어차피 이번 한 학기가 제가 대학에 머무는 마지막 날들이었습니다. 다음 해부터는 시골에 들어가 농사를 지을 작정을 하고 있었으니까요. 저는 이 좋은 기회를 적당히 뭉개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 동안 망설이고 망설이면서 뜸만 들이고 있던 솥뚜껑을 열어 보자고 다짐했습니다. 더 이상 ‘모순’을 회피하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이제 모순 속에 빠져들어 모순을 극복할 길을 찾아야 했습니다.

저는 원탁 강의실에 둘러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여기에 두 점이 있다고 칩시다. 점〔point〕은 물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모든 하나로 있는 것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다른 말로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그것은 모든 끝(한계, peras)이 그렇듯이 크기가 없습니다. 따라서 그 두 점은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습니다. 우리의 감각에 들어오지 않는 이 두 점이 서로 관계를 맺는다고 칩시다. 당구공 두 개가 서로 맞닿아 있는 당구대를 연상해도 됩니다. 이 때 서로 맞닿아 있는 이 두 점 사이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아무 대답도 없었습니다. 제 물음이 무슨 뜻을 지녔는지 모르는 눈치가 역력했습니다. 저는 달리 물어야 하겠다고 느꼈습니다.

“두 개의 점이 나란히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점 사이에 크기(또는 길이)로 드러나는 공간이 생긴다고 보아야 하겠습니까?”

제 질문에 어떤 학생이 이렇게 반문했습니다.

“선생님, 점은 본디 크기가 없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나란히 놓여 있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긴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크기가 없는 두 점이 맞닿아 있다는 말은 무엇을 뜻하지요? 만일에 두 개의 점이 맞닿아 있는데 그 사이에 크기가 없다면, 다시 말해서 두 점이 서로 따로따로 차지하는 자리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그 두 점은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이 되고, 두 점이 한 자리에 있다는 말은 두 점이 겹쳐서 하나가 된다, 곧 합동(合同)이 된다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끝, 곧 한계〔peras〕가 하나인 것만이 크기를 갖지 않으니까요. 그런데 두 개의 점이 있다는 말은 끝이 두 개 있다는 말과 같은 말이지요? 끝이 둘인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부르지요?”

“선〔line〕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옛 피타고라스학파의 전통에 따르면 끝이 두 개인 것은 선분이라고 정의됩니다.”

“그렇지요? 그리고 선〔line〕에서 두 끝 사이에는 끝이 없는 것〔apeiron〕이 들어 있지요? 따라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점이 두 개 있고, 그 두 개의 점이 관계를 맺으면 그 두 점 사이에는 끝이 아닌 것, 곧 끝이 없는 그 무엇, 다시 말해 크기가 생겨나고, 길이로 나타나는 끝이 아닌 그 무엇과 두 개의 끝을 서로 연관시켜 우리는 그것을 선분으로 정의한다고 말입니다.”

“글쎄요. 이야기를 듣고 보니 그럴싸하기는 한데, 그래도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요. 어떻게 크기가 없는 점 두 개가 맞닿는다고 해서 그 사이에서 크기가 생겨난다, 공간적인 거리가 생겨난다고 할 수 있지요?”

“그것이 바로 둘이 가지고 있는 신비한 특성이자 하나와 다른 점이지요. 모든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공간의 규정을 벗어납니다.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형상〔idea〕의 세계에는 모든 형상이 하나하나 다 고립되어 관계를 맺지 않기 때문에 공간이 없습니다. 플라톤의 형상들은 하나, 둘…… 하고 셀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찌어찌해서 어떤 하나가 다른 하나와 관계를 맺어 둘을 이루면, 다시 말해 둘이 나타나면 이 둘 사이에는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이 나타나는데, 점의 형상에서 우리가 유추할 수 있듯이 두 개의 하나가 저마다 크기가 없는 것, 끝, 한계이므로 이 하나도 저 하나도 아닌 것은 크기가 없는 것이 아닌 것, 끝이 아닌 것, 한계가 없는 것입니다. 둘이 없으면 크기도 없고 공간도 없습니다. 둘은 이 하나와 저 하나의 만남의 다른 이름이고, ‘실체’의 이름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입니다. 여럿에는 실체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둘(여럿의 최소 단위)은 있는 것이 아니고 있다고 여겨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있는 것은 하나이지 둘은 아니니까요.”

“아니, 선생님! 그런 터무니없는 말이 어디 있습니까? 선생님께서는 분명히 ‘이 하나, 저 하나’‘점 두 개’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또 ‘여러 하나’라든지 ‘모든 하나’라는 말씀도 하셨고요. 그런데 금방 말을 바꾸어 하나, 둘, 셋……으로 셀 수 있는 하나가 두 개가 모여서 둘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둘이나 여럿이 ‘만남의 이름’이고 ‘관계의 이름’이라니, 그런 엉터리없는 논리의 모순이 어디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인정하지요. 저는 지금 분명히 모순되게 여겨지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지요. 왜냐하면 제가 하는 말은 모두 사유의 공간 속에서 이루어지는 추론을 반영하는데, 알다시피 추론에는 공간, 다시 말해서 이 하나도 아니고 저 하나도 아닌 것, 규정할 수 없는 것이 끼어들어, 하나가 아닌 것을 하나로 보이게도 하고, 관계를 실체로 여기도록 만들기도 하니까요. 미리 앞당겨서 성급히 이야기하자면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들어가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도 없고, 추론을 이끌어 낼 수도 없는데, 없는 것을 생각하고 없는 것을 바탕으로 추론이 전개된다는 한계 때문에 내가 하는 말이 이렇게 왔다갔다한다고 보면 되겠지요. 아무튼 이제까지 내가 한 말 가운데서 이 말만 귀담아들어 두면 됩니다. ‘공간은 두 하나의 만남에서 생겨나는데, 하나는 하나이지 둘이 될 수 없으므로, 두 하나라는 말은 관계 맺음의 다른 이름이다.’”

학생들은 의아한 눈빛으로 저를 쳐다보았지만 저는 짐짓 모르는 척했습니다. 제가 이제부터 씨름해야 할 문제는 공간의 생성 배경이 아니라 ‘운동’의 생성 배경이라고 보았고, 어차피 ‘운동’과 ‘공간’은 한배에서 태어난 쌍둥이이므로 ‘운동’의 문제를 다루는 과정에서 공간 탄생의 내력도 저절로 드러나리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두 점이 만날 때 드러나는 또 하나의 이상한 사건을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줄 필요가 있음을 느꼈습니다.

“자, 다시 두 점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크기가 없는 점이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릿속에 그리기 힘들다면 당구공 두 개가 맞닿아 있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려도 좋겠지요. 당구공 두 개는 한 점에서 맞닿아 있겠지요? 우리는 이 점을 ‘접점’이라고 부릅니다. 이 접점은 당구공 두 개 가운데 어느 것에 속하겠습니까?”

제가 이렇게 묻자 한 학생이 무뚝뚝하게 대답했습니다.

“그 접점이 어느 당구공 하나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힘들겠는데요.”

“그러면 그 접점은 당구공 두 개에 모두 속한다, 그러니까 당구공 두 개가 접점을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나요?”

“그렇다고 보아야겠지요.”

“그렇다면 ‘어느 한 점을 공유하고 있는 두 개의 당구공은 붙어 있다.(이어져 있다.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둘이 아니다.’라는 반론이 나온다면 여기에 대해서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요?”

“글쎄요. 참 대답하기 곤란한데요. 그러니까 그 접점은 어느 순간에는 이 공에, 또 다음 순간에는 저 공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이 공, 저 공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두 공이 맞닿아 있게 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고 보아야 할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두 개의 공이 맞닿아 있을 때 이 ‘두 개의 공은 붙어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다.’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지요?”

“소박하게 표현하면 붙었다 떨어졌다 한다고 할 수도 있고…… 다시 말해서 접점이 끊임없이 운동한다고 할 수도 있고…….”

“더 엄밀하게 정의한다면 어떻게 표현할 수 있나요?”

“입체인 구(球)를 단순화해서 두 개의 원(圓)이 맞닿아 있는 상황을 머릿속에 그려 보기로 합시다. 이 때 두 개의 원은 한 점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래서 접점이라는 말이 생겨났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위에서 우리는 ‘점은 끝(한계, peras)이 하나인 어떤 것을 말한다, 그리고 끝에는 크기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또 ‘하나는 어떤 하나이든 크기가 없고 따라서 운동하지 않는다(정지해 있다)’는 말도 했지요?”

“예, 파르메니데스가 증명하고자 했던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 두 원 가운데 어느 하나를 다른 원 위로 굴려서 처음에 두 원이 맞닿아 있던 점까지 한 바퀴 돌린다고 가정해 봅시다. 이 때 한 원의 모든 끝은 다른 원의 모든 끝과 하나도 빠짐없이 다 맞닿는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잘 생각하고 대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사유의 실험에서 우리는 아주 기묘한 결과를 얻게 되니까요.”

“무엇이 기묘하지요?”

“먼저 원 둘레의 모든 점은 한정된 것〔peperasmenon〕이므로 이 한정된 것의 집합도 역시 한정된 어떤 것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러나 원주율을 측정하려는 현대 수학은 아직까지도 한정된 측정치를 내놓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심지어 반복되는 수의 계열조차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원주율에는 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 있다고 보는 것 같습니다. 되풀이되지 않는 수의 계열이 무한히 연속된다는 것은 원을 이루는 곡선 안에 무한〔apeiron〕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요. 우리의 추론과 실제 측정치 사이의 이런 불일치가 기묘하게 여겨지지 않습니까?”

“그거 참! 그건 그렇다 치고 다음으로 기묘한 결과는 어떤 것을 가리키지요?”

“점은 끝이고 크기가 없는 것이라는 정의가 맞다면, 크기가 없는 점을 무한히 더해 보아야 크기가 있는 어떤 것이 나올 수 없는데, 알다시피 선분〔line〕의 한 끝을 한 자리에 고정시켜 놓고, 다른 끝을 고정된 한 끝과 같은 거리로 움직여서 드러나는 자취를 그린 원은 크기를 갖게 되거든요. 크기는 없지만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을 가지고 실험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크기가 없는 것에서 크기가 나온다는 것이 기묘하지 않습니까?”

“이거야 뭐. 야바위 노름 같은 느낌이 드는데, 선생님 말씀을 드러내 놓고 야바위 노름으로 몰아붙이기도 그렇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당장 뭐라고 하기 힘든데요.”

“그러면 다시 한 번 접점의 성격을 살펴봅시다. 접점은 서로 맞닿아 있는 두 개의 점이지요?”

“그렇습니다. 아 참! 그렇고 보니 끝이 두 개 있으면 그 사이에 끝이 없는 것, 크기로 드러나는 것이 끼어들어 선분〔line〕으로 규정된다는 이야기를 앞에서 하셨지요?”

“기억을 해냈군요. 그러나 그것만이 아닙니다. 접점의 성격 가운데는 더 까다로운 무엇인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뭐지요?”

“앞에서도 잠깐 비쳤지만 그걸 이른바 둘이 가지는 모순, 둘에서 생기는 원시 우연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우선 모순의 측면을 적극적인 것으로 원시 우연의 측면을 소극적인 것으로 나누어 놓고 생각해 봅시다. 먼저 두 점이 만나면 그 사이에서는 원초적인 공간 규정인 크기도 생겨나지만, 원초적인 시간 규정인 운동도 생겨난다고 귀띔했던 것을 기억해 주기 바랍니다. 접점에서 만나는 두 점은 이어져 있는 것도 아니고 떨어져 있는 것도 아니라는 이야기는 조금 앞서 했습니다. 그런데 만남, 관계의 성격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이 세상에 하나만 있다면 만남도, 관계도 없지요. 만남은 늘 둘 이상의 무엇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그런데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바로 하나라는 특성 때문에 사유의 공간에서도 벗어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을 사유로는 파악할 수 없습니다. 없는 것 바로 그것도 사유의 대상이 아님은 거듭해서 밝혔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다, 없다고 하는 것,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일컫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서 하나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예 없는 것도 아닌 그 무엇들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선생님, 잠깐만요. 그러니까 우리가 있다, 없다, 있는 것,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모두 관계 속에 있는 것, 다시 말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는 것이라고 해도 되나요?”

“그렇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물을 볼 때 그것이 무엇임이 드러나는 측면을 보고 있는 것이라 하고 무엇임이 드러나지 않는 측면을 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일이 많습니다. 이를테면 컴퓨터는 1과 0으로 드러나는 이진법(二進法) 체계를 써서 정보를 처리하는데 1과 0은 그 자체로서는 어떤 기능도 할 수 없습니다. 컴퓨터의 전원(電源)을 꺼 버리면 컴퓨터 안에서 1과 0은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에 따라 컴퓨터 화면에 떠올랐던 모든 정보는 눈 앞에서 사라집니다. 우리가 앞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이야기했듯이 1(하나)을 있는 것으로 보고 0을 없는 것으로 보면 모든 정보의 체계는 바로 이 1과 0을 관계 맺어 주는 ‘운동’(이 말을 1과 0의 만남에서 생겨나는 운동이라고 불러도 됩니다.)에서 세워진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렇게 바꾸어 말할 수도 있겠지요. 우리는 어떤 사물의 끝(겉이라고 불러도 좋고 갓이라고 불러도 좋습니다. 이 세 낱말─끝과 겉과 갓은 같은 말에서 나왔으니까요.)을 보고 그것이 무엇임을 알고, 그 무엇인 것을 있는 것이라고 부르고, 그 사물의 안(끝도 갓도 겉도 없는 측면)은 보이지 않으므로 무엇인지 알 수 없으니까 무엇임이 드러나지 않는 이 측면을 가리켜 없는 것이라고 흔히 부른다고 말입니다. 이렇게 겉과 속, 안과 밖, 끊어진 데와 이어진 데가 있는 모든 것은 관계 맺음이 드러나는 한 방식이며, 이 방식을 어떤 측면에서 보느냐에 따라 크기와 운동이 드러납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관계에서 공간 규정과 시간 규정이 나타난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니까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흔히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엇인 것, 다시 말해 규정할 수 있는 어떤 것이고,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 다시 말해 어떤 방식으로도 규정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는 이야기이지요?”

“그렇지요.”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늘 이 세상에는 진짜로 있는 것도 없고 진짜로 없는 것도 없다고 주장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이야기하시지요?”

“이를테면 나 윤구병은 윤구병으로서는 있는 것이지만 나 밖의 다른 모든 사람으로서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 윤구병은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그물코에 얽혀 있는 관계의 산물이라는 뜻이지요. 다른 모든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공간적으로 여기 있는 것은 저기 없는 것이고, 저기 있는 것은 여기 없는 것입니다. 시간적으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는 것이고 미래는 아직 없는 것인데 지금 있는 것인 현재와 관계를 맺음으로써 과거―현재―미래라는 시간의 흐름을 형성합니다. 내가 시간과 공간을 비롯해서 여럿과 운동으로 드러나는 삼라만상 모두가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의 이름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여기에 있지요.”

“선생님은 없는 것이 있다고 하셨지요?”

“그렇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이 시공간에는 없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과 같다고도 하셨지요.”

“그렇지요.”

“그렇다면 없는 것은 빠진 것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없는 것이 갖는 특성 가운데 두드러진 것 하나가 바로 빠진 것, 결핍이지요.”

“그런데 빠진 것은 과거에 있었던 것이 지금 없는 것을 가리키거나 어느 자리에 있는 것이 다른 자리에는 없는 것을 가리키지 않습니까?”

“그것뿐만이 아니지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있을 것이 없다 함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있을 것은 반드시 과거에 있었던 것만을 가리키거나 지금 있는 것만을 가리키지는 않습니다. 과거에도 없었고, 현재에도 없지만 머지않아 있게 될 것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또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아무 데에서도 눈에 띄지 않지만 거시 세계나 미시 세계의 어딘가에 있으리라고 짐작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하고요.”

“아무튼 빠진 것은 무엇인가가 없음을 가리키는데 그 무엇은 있는 것을 가리킬 터이므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꼭 없음, 곧 허무의 실재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요?”

“좋은 질문입니다. 자, 우리 여기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썼던 낱말들을 다시 한 번 달리 규정하고 들어갑시다. 그 동안 나는 일부러 있음이나 없음 같은 낱말을 쓰지 않으려고 애써 왔습니다. 우리 말에서 있음이나 없음을 하나의 개념어로서 쓸 경우에 자연스러운 우리말 질서를 깨뜨리는 흠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 사이에 존재나 무(이런 말 내가 무척 싫어하는 까닭은 이미 밝혔지요?)의 여러 층위에 관해서 혼동이 있는 것 같으니, 앞에서 우리가 있는 것 바로 그것이라고 했던 것을 있음으로 고쳐 부르고, 아예 없는 것이라고 불렀던 것을 없음이라고 바꾸기로 하지요. 앞에서 여러 차례 밝혔듯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의 사유 공간 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있음이나 없음을 규정할 수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있음이나 없음을 두고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입 밖에 내어 말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우리의 생각 속에 들어 있는 것인데, 생각은 사유의 공간에서 성립하는 것이므로, 이 공간을 벗어나는 것은 도무지 입 밖에 나올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주장대로라면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있음이나 아예 없는 것이나 없음 같은 말도 존재나 무의 실상을 드러내는 말이라고 할 수 없겠네요. 그렇다면 굳이 우리가 생각할 수도 없고 입 밖에 낼 수도 없는 것을 근거삼아 이런 논의를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도 맞는 말이에요. 그렇지만 생각해 보세요.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을 빼 놓고는 여럿과 운동으로 이루어져 있는 현상계를 의식에 제대로 반영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뿐만이 아니에요. 있다, 없다는 말은 모든 인류의 사유에 바탕이 되는 기본 언어예요. 에이나이(einai)가 없는 그리스 말, 에세(esse)가 없는 라틴어, 에트르(etre), 비(be), 자인(sein)이 없는 불어, 영어, 독일어를 상상해 보십시오. 그리고 언어학자들에게 우리말 있다, 없다에 해당하는 말을 일상 언어에서 빼놓고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언어 공동체가 어디 하나라도 있는지 확인해 보십시오. 내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존재론이 인식론이나 가치론 같은 철학 분야의 기초가 되는 까닭은 바로 있다, 없다는 말, 그리고 그 말이 반영하는 사유 체계의 주춧돌 위에 철학, 과학, 상식…… 이 모든 것의 기둥과 벽과 지붕과 창틀이 세워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 의식이 어떤 경로를 밟아서 추상의 최고 단계에서 나타나는 가장 보편적인 이 개념을 아주 어린 나이 때부터 자연스럽게 받아들여 가장 자주 쓰는 낱말로 삼았느냐를 밝힐 수 있느냐인데, 나로서는 아직 이 수수께끼를 풀 능력이 없어요.

다만 있다, 없다는 말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기에 앞서 어린 시절부터 우리에게 주어진 말이고, 이 주어진 말의 통로를 따라 우리의 생각이 흘러가기 때문에 우리의 의식은 이 말 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만 밝히기로 하지요.

어쨌건 있음이나 없음은 우리 생각 속에 들어와 우리 사유의 가장 넓은 테두리를 이룹니다. 우리의 모든 생각은 이 울타리 안에서 움직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런데 우리의 의식 공간에서 있음과 없음이 관계를 맺으면 아주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있음은 여러 하나인 있는 것들로 분산되고 없음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는 하되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이는 어떤 것으로 바뀌어 나름으로 있게 되고 있는 것으로서 어떤 힘을 지니게 됩니다.”

“선생님이 우리의 사유 속에 있는 것이든 현실 세계에 있는 것이든 있는 것, 또는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모든 것은 실재하는 것도 실재를 부정하는 것도 아닌 관계의 이름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려는 의도는 이해하겠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있는 것, 없는 것으로 규정되는 여러 하나와 운동의 세계가 있음(하나)과 없음의 관계 맺음에서 비롯한다는 것도 받아들인다고 칩시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여럿과 운동 속에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상대적 규정일 뿐이고, 있는 것이 없는 것과 다르지 않으며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다를 바도 없으며, 있는 것이 없는 것이요 없는 것이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는 극단의 가능성까지도 인정할 수 있겠지요. 불교 경전의 하나인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異空 空不異色 色則是空 空則是色)’이라는 말도 그런 뜻을 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불교식으로 이야기하자면 모든 것이 모든 것과 관계를 맺어 순간순간 바뀌는 이 연기(緣起)의 세계에서 ‘늘 머무는 것〔常住〕’은 하나도 없고 모든 것이 덧없이〔無常〕 생겨났다가 없어졌다〔生滅〕 하겠지요.

그런데 관계라는 이 끝없는 흐름의 어느 측면을 어떤 방식으로 고정시켜서 우리는 있는 것이라 일컫고, 또 어떤 측면을 일컬어 없는 것이라고 부르지요?”

“좋습니다. 아주 좋아요. 어쩌면 우리는 이 논의를 통해서 의식이 저지르는 잘못 가운데 가장 큰 잘못인 실체화의 오류(이 끔찍한 말을 용서하기를!)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에서 나는 살아 있는 화석(化石) 언어라고 할 수 있는 한어(漢語)를 예로 들어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갈까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한어에는 명사가 따로 있고 동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글자가 놓이는 자리가 어디냐에 따라 명사가 되기도 하고 동사가 되기도 하는 일이 아주 많습니다. 다시 말해서 한 글자가 전체 문장의 어디에 자리잡느냐에 따라서 고정된 실체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운동을 나타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섣부르다는 욕을 먹을 셈치고 물리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한 낱말의 위상을 관계 고리의 어느 측면에서 관찰하느냐에 따라 낱말의 입자성과 파동성이 그때 그때 달리 드러나는데, 이것은 관찰자의 위치에 탓이 있는 게 아니라 낱말과 그 낱말이 반영하는 객관 세계의 여러 있는 것 안에 그것들을 고정시키는 공간과 그것들을 움직이게 하는 운동이 공존한다는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공간도 시간도 관계의 이름입니다. 공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 질〔quality〕은 저마다 따로 떨어져서 고정된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있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공간 관계 안에서 흩어진 모습으로 드러나는 질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시간이라는 관계의 그물 속에서는 질들이 서로 엉켜 있습니다. 이를테면 앞에서도 예를 들었듯이 하나의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한데 엉켜서 이어진 음의 계열을 이루는데, 30센티미터의 기타 줄 안에 엉킨 채로 들어 있는 저마다 다른 이 소리들의 무한한 계열을 어떤 무모한 사람이 하나하나 따로 떼어 내어 공간 속에 늘어놓으려고 든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현악기의 줄을 건반 악기의 건반으로 바꾸려고 들 텐데, 이 경우에 30센티미터의 현악기 줄에 담긴 소리를 하나도 빼지 않고 다 담는 건반 악기의 건반 수는 무한할 수밖에 없고, 만일에 이 우주 공간이 유한하다면 그 건반 악기는 우주 공간을 다 채우고도 우주 밖에서 무한히 늘어놓이는 건반들을 주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대체 이렇게 모순되면서도 불가사의해 보이는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겠습니까? 현상 세계의 모든 현상들을 공간 속에 좌표화할 수 있다는 사고는 이런 단순한 좌표화의 실험조차도 견딜 수 없는 무지몽매한 단순함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로써 밝혀졌을 줄 믿습니다.”

“그렇다면 선생님은 이 우주가 원자(편의에 따라 이렇게 부릅니다만 물질의 최소 기본 단위라고 불러도 상관이 없겠습니다.)와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고대 원자론자들로부터 현대 물리학자들에 이르기까지 공유하고 있는 전제를 틀렸다고 보십니까?”

“그렇습니다. 자를 만들고, 그 자로 질과 양을 나누고 재는 일, 공간 축과 시간 축이라는 좌표를 만들어 차원을 설정하고 그 단순화된 차원 속에 삼라만상을 배치하는 일은 삶의 필요에 따라 사람의 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이 우주에 텅 빈 공간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진공’이라고 부르는 것도 모든 질이 다 빠진 텅 빈 순수 공간은 아닙니다. 따지고 보면 시간의 흐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향하는 이른바 ‘비가역적’이라는 말도 바르지 않습니다.

어쩔 수 없이 이미 개념화한 말을 빌어 표현하자면 이 우주는 서로 엉켜 있는 질〔quality〕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말을 더 단순화하면 이 우주(이 말도 개념입니다. 여기에 대응하는 실체는 없습니다.)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이 우주는 일관된 사유의 법칙으로 정리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런데 진화의 방향을 두뇌 용량을 늘리고 두뇌 회로의 길이를 연장하여 의식이 성장하는 쪽으로 돌려 삶의 길을 찾은 인간의 경우에 떼를 이루어 살아야 한다는 사정도 겹쳐, 말하자면 흐르는 물을 하나하나의 물방울로 고정시키려는 소망이 싹텄습니다. 그 소망의 가장 명료한 표현은 옛 그리스인들의 의식 속에 못박힌 뒤로 지금까지 이 우주를 재는 바뀌지 않는 잣대 노릇을 해 온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는 것으로, 또 없는 것이 있는 것으로 바뀌지 않는 세계에는 참된 변화와 운동은 없습니다. 우주 안에 있는 이러저러한 것들은 바뀔 수 있으나 우주는 바뀌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란 이러한 세계관의 반영입니다. 우주는 있는 것을 대표하는 하나, 곧 영원불변한 하나의 단위로 설정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의 큰 단위가 설정되면 그 다음 일은 쉬워집니다. 그 큰 단위를 이루는 하부 단위들을 일정한 체계에 따라 설정하면 되니까요. 그리스 학문의 전통은 이것을 주춧돌로 삼아 세워졌고, 그 전통은 현대 과학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이 의심할 여지없는 전제 위에 서구 과학도 종교도 서 있습니다. 이 우주는 하나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그러나 그 우주는 그 사람들의 우주고 당신들의 우주입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습니다. 거꾸로 말해도 상관없습니다. 내 우주에는 있는 것도 있고, 없는 것도 있습니다. 표현은 다르지만 마찬가지 말입니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3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0과 1>에 덧붙임

0과 1의 논의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빠뜨린 사람이 있어요. Spinoza와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 Marx의 이론입니다. 저, 학사학위 논문을 스피노자의 Ethica, 석사학위 논문을 Epicuros 이론을 주제로 삼아 썼어요. Ethica는 다시 정독하고 싶고, 막스의 자본론은 나름으로 제법 꼼꼼히 정독했는데, 막스가 고대원자론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스 이론에 끼친 스피노자의 이론은 제가 알기론 우리 나라에서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 철학계의 동향은 잘 모르겠어요.

막스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세계 인식에 닿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길잡이 구실은 스피노자가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피노자가 말한 ‘natura naturans’와 ‘natura naturata’ 기억하시죠? 제 기억에 ‘能産的 自然’, ‘所産的 自然’으로 번역된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사람들 번역이 아닐까 싶어요. ‘Philosophia’를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이지요.

이 말, natura naturans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연’으로, 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으로 옮겨도 될 것 같아요. 이때 ‘자연스럽게 하는 것’(naturans)은 힘이에요. 이 힘은 동시에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힘이기도 하지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줄을 꼬는 힘을 가리킨다고 봐요. 이 운동의 저 밑바닥, ‘없는 것이 없을 것’과 하나가 되는, ‘없음’에 닿는 그 ‘한계점’(tangent)에서 이 운동의 저 꼭지점 ‘있는 것이 있을 것’과 둘이 아닌 ‘있음’에 닿는 그 ‘한계점’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2중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 ‘확산’하고, ‘응축’하는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마디’에서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 아닌가 해요. 이 ‘마디’는 저마다 ‘페라스’를 나타내지요. 겉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페라스’이기도 하고, ‘기억’(m′emoir)으로 드러났다 ‘망각’(oblibium-이 철자 맞나요?)으로 사라지는 한계점에서 형성되는 ‘페라스’이기도 해요. 크게 보면 모두 힘으로 ‘있는 것’ 1과, 힘으로 ‘없는 것’ 0의 접합점(tangent)에서 나타나는 ‘동요하는 평형’(equilbrium)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당구를 쳐 본 사람은 두 당구공이 한 점에서 맞닿아 있을 때, ‘떡’이다, 아니 ‘스위치’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거예요. ‘페라스’로 얼핏 드러나는 이 ‘점’은 ‘페라스’가 아니에요. 이 ‘점’은 빨간 공에도 안 속하고 하얀 공에도 안 속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무엇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아페이론’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것과도 잇닿아 있고, 저것과도 잇닿아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 붙는가 하면 저기에도 붙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힘, 생성과 소멸의 측면에서 보면 naturans인데,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naturata인 것, 1에서 0에 이르는, 또는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무한한 단계와 과정에서 꼬이고 마디를 이루는 ‘평형’을 드러내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꼬기, 여기에서 1을 원동자로 보느냐, 0을 원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형이상학’과 ‘세계관’이 달라지는데,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리자면 ‘기독교’는 1에 붙고, 불교는 0에 붙어요. 그렇게 보여요.

막스는 베르그송이나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의 힘을 더 크게 보아요. 막스를 ‘유물론자’로 보는데, 크게 보면, ‘물질의 규정성이 의식의 규정성에 앞선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치는 거예요. 밑에서 올라오는 힘을 더 크게 보았는데, 그 힘의 근원이 1에 있다기보다 0에 있다는 것, 아주 비속하게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없는 놈’의 숨은 힘이, ‘있는 놈’의 드러난 힘보다 더 쎄다는 것을,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인간적인 ‘결핍’과 ‘과잉’, ‘있을 것’(아직 ‘없는 것’), ‘없을 것’(군더더기로 ‘있는 것’)의 관계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 만들자.’ 그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평형’이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이 지향점은 ‘오래된 미래’를 꿈꾸었던 노자의 ‘과민소국’, 아주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예요. 그 세상 오면 ‘먹물’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요. ㅎㅎ

 

*다시 0과 1에 덧붙임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 1이 되는 지점에 ‘한계’(peras)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했나요? 이렇게 뭉뚱그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가 되는 지점은 무얼 가리킬까요? 여기에서는 ‘있는 것’, ‘하나’, 1이 앞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스스로는 안 움직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정지’이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 ‘순수형상’, ‘일자’(―者), 신, ‘하나님’이 앞서지요. 그러나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있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청이고, 당위이고,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이자, 우주의 한계인 이 ‘있음’ 밖에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있음’이 허공에 감싸여 있다면, 또 하나의 ‘페라스’인 ‘없음’은 ‘있는 것’에 감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빠지고 또 빠져서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텅 빈 그 무엇, 0집합, 무한한 것, ‘무규정적인 것’, ‘아페이론’의 극한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편에서 이 ‘없음’이라는 한계를 우주의 중심에 놓습니다. ‘있음’이, 1이 확장의 한계선이라면, 모든 ‘생성’이 그 한계선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라면, ‘없음’은, 0은 ‘소멸’이 그 한 점에서 멈추는 응축의 한계점입니다.

‘있음’이 ‘파이’(π)라면 ‘무산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 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소수’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수’가 어느 날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업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수학자들의 꿈은 수의 영역을 0과 1이 거꾸로 뒤집힌 10진법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 야바위 놀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모든 ‘형상’(idea)을 수로 환원시킬 때, 그리스 수학에는 0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을 3으로 나눈다는 터무니없는 셈법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한점으로 수렴되는 극한입니다. 이 극한과 맞닿아 있는, 어떤 것도 두 번 되풀이되지 않고, 어떤 순간도 두 번 지속되지 않는 이 한계점 바로 위에서 ‘여럿’은 숨은 채로 드러납니다. ‘있음’에서는 ‘있을 것’(없는 것)이, ‘결핍’이, ‘빠진 것’이 드러날 듯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지점에서는 ‘없을 것’(있는 것)이, ‘군더더기’들이, ‘과잉’이 ‘생성’의 이름으로 ‘평형’을 깨면서 이루는, ‘에셔’(Mauris Cornelis Escher)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모순의 통일’을 드러내는 그림에서 보여 주는 ‘혼돈’(chaos)이 싹틉니다.

‘드러날 듯이 숨어 있는 모순’과 ‘숨은 채로 드러나는 모순’이 ‘있는 것’을 ‘없음’의 극한까지 끌어내리는 ‘하강운동’을 일으키고, ‘없는 것’을 ‘있음’의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상승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한히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뒤틀리는 매듭, 마디마다 무한히 겹쳐 쌓이는 ‘흔들리는 평형’(equilbrium)의 연속 계단을, 크고 작은, 많고 적은 단계를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드러냅니다. 이 ‘매디’는 ‘마야의 베일’에 싸인 채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사유’의 파편으로 드러나지요. 감각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때로는 ‘흉내’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견해’로, ‘판단’으로, ‘말’로, ‘거짓’으로, ‘속임수’로, ‘믿음’으로 드러나면서 숨고, 숨으면서 드러납니다.

어쩌면 철학은 사람이라는 별난 생성과 소멸의 모순된 응결체가 생명의 탈을 쓰고 벌이는 가장 그럴싸한 거짓과 속임수의 말놀음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종교라는 아편을 키우고 있는 ‘믿음을 통한 세상 편가르기’의 빌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의 뒤통수를 목침으로 내려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여러분의 직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미처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와야겠지요.

‘아파, 이 씨팔놈아! 너 죽고 싶어?’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2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할게요.

1을 우리의 의식 안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있는 것’, ‘하나로 있는 것’(기독교에서는 ‘有-神’이라고 부르죠.)을 1로 표기합시다.

0도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없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없는 것’도 있다고 칩시다.

‘있는 것’ 하나, ‘없는 것’ 하나(없는 것을 하나로 놓는 건 무리가 있지만 어쨌던 극한치에서 볼 때는 하나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0=2가 돼요. 이때 ‘+’(더하기, 보태기)는 1과 0을 맺어 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는 실체가 없어요. 기능이에요. 운동이지요. 맺어 주는 그 무엇이지요. 제3의 것이에요. 1과 0을 떼어놓으면서 이어주는 것. 그러면서 1도 0도 아닌 것, 이게 바로 ‘아페이론’ 이지요. ‘아페이론’의 성격 아주 복잡해요. 복합적이에요. 이게 바로 ‘운동’의 근거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에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이에 들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생성과 소멸의 근거가 돼요.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결국 없는 것은 그 자체의 규정상 없는 것이니까 아무런 힘도 없다. 있는 것만이 두 순간 이상 지속되어 공간 표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두 번 이상 반복되어 공간화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있는 것만이 공간을 차지할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근거는 있는 것에 있다. 여기까지가 상식의 영역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은 바로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지만 몰상식에서 출발해요. 눈 믿지 마라, 귀도, 코도, 입도, 혓바닥도, 니 살갗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도 믿지 마라, 이거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에요. 데모크리토스도 같은 말을 해요.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말을 해요. 덧붙이는 말만 달라요. ‘믿어라’, ‘끝까지 왜냐고 물어라.’

철학은, 그 가운데서도 형이상학은 ‘아이티올로기’(aitiology), ‘원인학’이라고 부르잖아요. ‘끝까지 왜냐고 따지고 물어라’고 하잖아요. 죽을 때까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 삶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또 곁길로 들어서는데, 다시 ‘제3자’의 문제로, ‘아페이론’으로 돌아갑시다.

1+(+)+0=3

우리는 1과 0,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 2를 끌어냈어요. ‘여럿’의 최소단위가 끌려나온 거예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갈라놓아야 한다. 무언가 사이에 들어 이것들이 이어지지 않게 끊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놈은 한편으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있는 것’에도 끼어들고, ‘없는 것’에도 끼어드는 뚜쟁이 구실을 맡아야 한다. 이 역할을 ‘아페이론’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새끼를 꼬는 것, 초끈을 만드는 것,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운동과 정지를 주관하는 것, 다 이 3에게, 아페이론에게 떠넘겨요. 그런데 도무지 그 구실을 맡을 필연성이 아페이론에게는 없어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관계 맺을 필연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상승운동’만 있다면, ‘하나님’이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만 본다면, 문제가 간단하죠.

빠방,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고, ‘부동의 원동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 ‘유일신’이죠.(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은 대안이 아니에요. 2원자론자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세상 인정 않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없는 것’도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아페이론의 힘이 ‘있는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없는 것’에서도 나온다고 가정해야 해요. ‘생성’의 힘 못지않게 ‘소멸’의 힘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하는 ‘없는 것’의 정체가 뭐야?’

묻고 캐고 할 것 없어요.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없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다고요? 그러면 다 있게 돼요. 다라는 말은 ‘여럿’ ‘모두’라는 말이에요.

여럿 모두에는 ‘없는 것’도 들어가요. (유식하게 말하면 0집합도 집합이라는 말이에요. 칸토르가 이야기하는 ‘무한집합’도 ‘집합’이에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은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그 안에 ‘운동’, ‘미래’, ‘당위’까지 들어가 있는 모순되는 개념의 분석만 빼고, 제가 얼마쯤은 제 미완의 반쪽 이론 <있음과 없음>에 지겹도록 해 놓았어요.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없는 것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빈 것, 빠진 것, 이게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아요. ‘이제’와 ‘저제’를 나누어요. ‘여기’와 ‘저기’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요. 여기 있는 것이 저기에 없다, 이제 있는 것이 저제 없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은 이것에 빠진 것이 저것에 있고, 저것에 빠진 것이 이것에 있다……. 이렇게 돼요. 빠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모두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은 하나가 돼요. 수학에서 말하는 ‘합동’이죠. ‘하나’밖에 안 남아요.

‘있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없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하나가 되는데, 이걸 헤겔은 ‘순수 유’(reine Sein), ‘순수 무’(reine Nichts)로 보아 ‘개념의 운동’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똥친 막대기’로 그게 그거다 하고 개무시해 버리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거 뭐에다 쓰느냐는 거죠.

‘아페이론’은 ‘없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치가 없어요. ‘없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 ‘빠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 여기에서 양적인 규정이 나와요. 수치화될 수 있어요. 헤겔은 빠진 것의 양이 질을 규정한다고 봐요. 이른바 ‘양질전화의 법칙’이죠. 현대 물리학자들도 다 그렇게 봐요. 그래야 잴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고, 증명이 가능하니까요.

‘왜 없지’? ‘왜 빠졌지’? ‘뭐가 빠졌지’? 가끔 묻죠. 정지가 빠졌어? 운동이 빠졌어? 이런 질문 안 해요. 그냥 정지하지 않았어?? 그럼 운동하고 있구먼, 운동하고 있지 않아? 그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구먼, 이렇게 여겨요. 그게 ‘관성의 법칙’으로 둔갑해요.

자, 이제 1과 0의 극한치인 ‘정지’, ‘한계’(peras)의 최고 영역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로 뭉친 지점입니다. ‘있을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바로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운동이 사라집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하나인 지점이지요. 역시 여기서도 운동이 사라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크기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시간도 공간도 여기서는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과 현상계에서 겪는 온갖 변화와, 상승운동(없음→있음)과 하강운동(있음→없음)의 ‘평형’(equilibrium)상태에서 나타나는 공간지각은 모두 있음과 없음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인간세상을 우리는 ‘이상향’이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지요. 어디에도 없으니까 outopia입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이 ‘평형’상태에서는 현상계는 모두 사라집니다. 생명계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목숨’도 없고, 몸을 이루는 모든 것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의식도 마비됩니다.

이 ‘평형’이라는 말 ‘이퀼리브리움’(equilibrium)이라는 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상승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하강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평형’이라는 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형’이 없으면 공간지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먼저 ‘빠진 것’(privatio)부터 살펴봅시다. ‘군더더기’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빠진 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도 드러낼 수 있고, ‘있을 것이 없다’는 말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아페이론’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있을 것’은 현상적으로 보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없는 것’은 운동이 배제된 개념이지만 ‘있을 것’으로 ‘없는 것’은 운동을 전제합니다. 있음으로 가는 ‘상향운동’이 이 말 밑에 깔려 있습니다. ‘있을 것’을 ‘있는 것’으로 현실화시키는 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원동자’인 ‘순수형상’ Eidos, 1者, 神에게서 나옵니다. ‘무로부터 창조하는’ creatio ex nihilo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nihil’이 아예 없는 것이냐, 순수질료로서 있는 것이냐 입니다. 순수질료로서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은 것, 그러나 ‘없음’ 그 자체는 아니고 chaos 형태로 있는 것, 두 순간 지속되지 않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2원론을 밑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군더더기’로 ‘있는 것’을 잠깐 살피지요.

이 ‘군더더기’는 ‘없을 것이 있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없을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더더기’이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것, 없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신의 창조물이다 라는 관점에 서면 ‘군더더기’, ‘없을 것’은 없습니다. 그 나름으로 평형상태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도 빼면, 없애면, 곧 ‘빠진 것’(privatio)이 생기고, 이것은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강운동’을 뜻합니다. 현상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됩니다. 어떤 것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꾸는 것은 결핍을, ‘빠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강운동’의 관점에 서면, 빠질 것이 있어야 합니다. ‘빠질 것’, ‘없을 것’은 ‘군더더기’로,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과잉’으로 드러납니다. ‘없을 것’을 없애는 힘,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꾸는 힘, ‘형상’(eidos)을 ‘질료’(hyle)로 변화시키는 운동은 신인 ‘하나’, 1者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저 밑바닥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 ‘없음’ 그 자체에는 그 힘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무’의 ‘존재성’(유식한 말이어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요?^^)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0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힘으로 나타납니다. 변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근본원인, ‘하강운동’을 이끄는 중력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페라스’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고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렇지만 운동의 원인이 ‘모순’에 있다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과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이 말이 神을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이 말은 얼핏 들으면 단순한 privatio를 뜻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아페이론’은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을 엮어서 하나의 가닥으로 꼬는 ‘2중나사’입니다. ‘초끈’으로 보아도 좋고, ‘새끼줄’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꼬인 자리마다 순간적인 때로는 ‘지속’되고, ‘반복’되는 ‘평형’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속’ 속에서 시간성이 드러나고, ‘반복’ 속에서 공간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3자인, 1과 0사이에 있는 아페이론의 성격입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각 단계에서 무수히 드러나는 이 꼬임을 반영합니다. 이 꼬인 자리, 꼬임의 순간에 ‘비약’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삶’으로의 비약, 생성의 비약일 수도 있고 ‘죽음’으로의 비약, 소멸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e′lan d′amour’는 동시에 그 안에 ‘e′lan de mort’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형’으로, ‘페라스’로, 겉, 끝, 갓으로 드러나는(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현상계, 생명계와 물질계의 다양한 모습 뒤에는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페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로, ‘공’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페이론’이 일시적으로 ‘평형’상태를 이룰 때,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형평을 이룰 때,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페라스’의 형태로 현상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평형’을 이루는지, 또 이룰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느닷없는 순간, 느닷없는 곳에서 그 ‘평형’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Lucretius가 말하는 ‘원자의 경사운동’이고, 쟈끄모노가 이야기한 ‘우연’이고, 우리가 가슴 내밀고 뽐내는 ‘자유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여러분들 귀한 시간 빼앗고, 귀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이따가 술이나 풉시다.

 

 

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1

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오늘 내가 할 이야기는 apeiron이 중심입니다.

이 강의는 이 땅에서 여기 앉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몇 안 되는 사람만 귀를 기울일, 그 가운데서도 귀가 둘이니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될, 사는 데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추상의 단계가 너무나 높아서 공기가 희박해 호흡곤란을 느낄지도 모를 그런 이야깁니다.

이 세상에는 끊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 이어진 것, 또는 그렇다고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끊어진 것, 또는 끊어내는 것,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는 것, 겉이, 갓이, 끝이 있는 것을 ‘peras’라고 부릅니다. 이 ‘페라스’가 없으면 이것저것을 가를 수 없고, 죄다 이어져 있으면, 아무것도 ‘이것’, 또는 ‘저것’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냥 혼돈이죠. 가르지 않으면 살길이 없는 게 목숨 지닌 것에 주어진 숙명이라고 해야겠지요. 갈라야죠. 금 긋고 나누어야죠. 바이러스, 박테리아 수준에서도 살아남으려면 가려야죠. 나누어야죠.

살길과 죽을 길, 갈림길, 그게 모두 사람 비슷한 것들이 맞닥뜨린 ‘한계’죠. 너도나도 ‘한계’는 아는 척해요. 잣대를 대고, 금을 그으면 되니까요. 그런데 ‘아페이론’은, 그어도 그어도 속에 남는 이건 무어죠?

이게 오늘 내 강의 주제예요.

졸라 힘들고, 뭐가 뭔지 모를 말들이 횡설수설 겹칠 텐데, 그래도 듣고 싶나요?

먼저 ‘페라스’ 문제를 인간의 수준에서 어떻게 해결했는지 잠깐 살펴봅시다. 하나로 수렴하죠. 1의 문제, ‘-者’라고도 하고 ‘하나님’이라고도 하는 이 문제를 아주 깔끔하게 처리한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라고 하지요. 기독교의 ‘하나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이에요. 플라톤은 정지와 운동의 원인을 나누었어요.(Parmenides의 수준에서는 엉켜 있었어요.) 플라톤은 idea의 세계와 Demiurgos의 역할을 나누어 보아요. Demiurgos는 우주를 창조하지만, idea의 세계는 우주 밖에 독립된 실체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 안에 idea들을 끌어들입니다. ‘순수형상’이라는 Eidos는 1입니다. 1은 스스로는 정지해 있으면서 운동의 원인으로 작용하지요.(kinoun akineton).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신입니다. ‘하나’님입니다. 교부철학은 Plotinus를 거쳐서 변형된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신학의 근거로 삼아요. 1에서 0에 이르는 과정은 두 가닥의 끈으로 꼬여 있어요. 요즘 사람들은 이것을 ‘2중나사’라고 하나요? 아리스토텔레스는 끌어올리는 과정만 보아요. 0은 ‘순수질료’라고 규정하지요. 0은 1에 끌려 상향운동을 해요. 물론 0도 1과 마찬가지로 ‘부동의 동자’(kinoun akineton)이에요. 나중에 헤겔이 reine Sein과 reine Nichts는 같은 거다. 그걸로 운동 설명 못 한다. 사유의 틀에서 벗어난다. Sein을 ‘있음’으로, Nichts를 ‘없음’으로 보지 말고, Sein을 ‘임’이고 Nichts를 ‘아님’의 측면에서 보자. 그러면 ‘긍정’, ‘부정’, ‘부정의 부정’이라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운동을 설명해 낼 수 있다. 이렇게 주장해요. 이게 헤겔 <대논리학>의 핵심이에요. 현상계의 운동을 사유의 전개과정에 맞추려고 해요. 개념(Begiff)의 자기 전개라고 하면서요. Marx는 이거 아니라고, 물질이 의식을 결정한다고 헤겔의 철학을 뒤집지만, ‘형이상학’ 때려치우라고 하지만 헤겔 아류이고, 속류 헤겔론자로 볼 수 있어요. 0과 1의 문제에 관심 없어요. 막스에게는 ‘형이상학’보다 훨씬 더 중요한 현실 문제가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서양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지만, 막스도 ‘인간’의 울타리에서 벗어나지 못해요. 플로티누스가 중요한 건 ‘질료’에서 ‘형상’으로, 그리하여 마침내는 ‘순수질료’에서 ‘순수형상’으로 향하는 ‘상승운동’의 가닥만 본 아리스토텔레스의 그 위로 치켜 뜬 눈길을 아래로 돌리게 한 거예요.

‘유출설’이라고 하나요? <Eneades>에서 플로티누스는 “자, 봐라. 저기 눈부신 햇살로 빛나는 1이라는 해가 있다. 광명이 있다. 그런데 그 햇살을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는 0이라는 어둠이 저 밑에 도사리고 있다. 1이 위로 위로 끌어올리면서 ‘페라스’를 증가시킨다면 0은 아래로 아래로 끌어내리면서 그 ‘페라스’들을 뭉개서 ‘아페이론’을 증가시킨다. 1에서 nous로, nous에서 psyche로, psyche에서 또 무엇으로 내려가는 과정은 어둠에 이르는 길이다. 그야말로 ‘태양은 빛을 잃어’ 빛이 없는, 나중에 1의, ‘하나님’의 권능이 깡그리 사라져 버리고 마는 ‘흑암’이 저 맨 밑바닥에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말해요. 이렇게 되면 운동은 ‘이중나선’, ‘새끼꼬기’, (그걸 요즘 물리학자들은 ‘초끈’(string)이라고 하나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라는 두 가닥 끈이 상호작용해서 각 단위, 1에서 0에 이르는, 또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단계에서 1과 0의 작용이 어떻게 ‘평형’을 이루는지, 그리고, 그 ‘평형’ 상태를 ‘공간’화하는지, ‘정지’로 보는지, ‘운동의 이중성’이라고 볼 수 있는 ‘국면’들이 드러나요. Bergson이 아리스토텔레스의 공간이론을 비판하는 데는 까닭이 있어요. 흐르는 물을 물방울로 해체시킨다고 해서 어느 순간 그 물이 멈추는 것으로 착각하지 마라. ‘지속’(dure′e)과 ‘계기’(succession)는 다르다. ‘계기’는 시계 문자판에 고정시킨 시간이고, 공간화된 시간이고, 사람의 의식이 인위적으로 금을 그어놓은 ‘페라스’일 뿐이다. ‘지속’은 순간순간 ‘아페 이론’을 그 안에 안고 있는 ‘페라스’를 뛰어넘는 ‘도약’이다. Zenon이 아무리 ‘날으는 화살은 날지 않는다.’, ‘한 시간은 반시간이고, 두 시간’이다, 바보 같은 짓 걷어치우고 Parmenides로 돌아가자고 해도, 그렇게 해서는 ‘현상계’를 구제할 수 없다고 해서 플라톤이 나섰는데, 플라톤이, idea와 Demiurgos의 역할을 갈라놓았는데, 그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는 Demiurgos를 1로 놓고, 모든 운동을 그 정지 모델로 공간화했다, 그거 문제 있다. 나 베르그송은 그거 뛰어넘겠다. ‘생명’이라는 게 운동인데, 그 운동 멈추면 죽는데, 우주 전체가 살아남으려면 끊임없이 운동해야 하는데, 살아남으려는 이 몸부림을 ‘뛰어넘기’로 보자. 그게 ‘삶의 도약’(e′lan vital)이고, 그게 궁극으로는 ‘사랑의 도약’(e′lan d′amour)다. 뭐 이딴 이야기해요. ‘엘랑 비딸’까지는 그럴싸해요. 그러나 ‘엘랑 다무르’라니. 이거 다 ‘생명’이신 ‘하나님’, 1로 가자는 거예요. 물론 베르그송은 2원론자이기 때문에 ‘질료’의 측면, 아리스토텔레스의 휠레(hyle)를 무시하지 않아요. 늘 두 개를 나란히 놓아요. <물질과 기억>, <생각과 움직임>, 이처럼 1과 0을 나란히 놓아요. 0의 해체 기능 잘 알고 있어요. 아마 베르그송 철학의 밑바닥에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상상력이 깔려 있을지 몰라요. 근현대 물리학자들의 의식의 밑바닥에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와, 루크레티우스의 <자연의 본성에 대해서>에서 종합되는 데모크리토스의 원자와 공간, 단일한 우주의 이론이 눌러 붙어 있는 것처럼이요.

그러나 베르그송은 ‘생기론자’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처럼 희망과 낙관을 버리지 않아요.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만큼 낙관적이지는 않기 때문에 두려움이 밑바닥에 깔려 있기는 해요. 그러나 공통점이 있어요. ‘페라스’와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에서 1과 0의 문제를 파고드는 데에서 아리스토텔레스나 베르그송이나 모두 ‘인간의 의식’을 벗어나지 못해요. ‘사람만이 희망이다’라는 생각이 이 사람들 머리에서 떠나지 않아요.

그래서, 박홍규 선생님한테서 들은 말인데, 한때 교황청에서 베르그송 철학으로 신학이론을 바꿔치기하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바탕으로 한 신학이론은 근대 물리학의 성과를 받아들일 수도 없고, 진화론을 기독교 신학체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도 없다고 고심했던 적도 있다고 해요. 그래서 테이야르 샤르뎅 같은 신부도 <인간현상>이라는 책에서 베르그송 이론으로 신학을 재구성하려고 들지 않았나요?

참, 군소리가 길어졌네요. 그런데 이거 다 박홍규 선생님의 ‘형이상학 강의’에서 나왔던 말들이에요. ‘아페이론’ 이론을 다루는 데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 하나는 ‘우연’과 ‘필연’, 거기에서 파생되는 ‘자유의지’ 문제예요. 현상계를 운동 중심으로 파악하려면, 그리고 그 운동의 원인이 우주 밖에, 정지된 그 무엇에 있지 않고, 우주 안에 있다고 하려면, ‘우연’의 문제 회피할 수 없어요. 루크레티우스가 궁여지책으로 무한공간과 무한수의 원자를 놓고 ‘수직하강운동’(이거 아리스토텔레스 식으로 뒤집으면 ‘수직상승운동’으로 보아도 돼요.)으로만은 해결할 수 없는 원자들의 결합을 설명하기 위해서 끌어들인 게 원자의 ‘경사운동’(klinamen)인데, 이거 ‘느닷없는 때’ ‘느닷없는 곳’에서 ‘우연히’ 일어난다고 하는 거예요.

정말 느닷없는 이야기예요. 이 ‘우연’과 ‘필연’의 문제는 베르그송도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고 해요. ‘도약’, 이거 우연이에요. ‘자유의지’라는 말로 분칠되어 있지만 ‘살아남기 위해서’라는 이유밖에 다른 근거가 없어요. 물론 베르그송도 ‘자유의지’의 측면에서 우연과 필연 논쟁에 끼어들기는 해요. 그런데 그게 큰 설득력이 없어요. 감성으로는 받아들일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적’ 근거는 부실해요. 박홍규 선생님의 고민도 거기에서 출발했다고 봐요. 끙끙대고 있는데 자끄모노(Jaque Mono) 책이 박 선생님 눈에 띄어요. <우연과 필연>이라는 책이지요. 저는 안 읽었어요. 모노 이론 잘 몰라요. 그렇지만 그 책 안에서 박 선생님은 형이상학에서 골머리를 앓던 문제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내셨을지 몰라요.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이제 다시 제가 앞서 그렸던 그림으로 돌아갑시다. 이야기가 너무 곁가지를 많이 쳐서 그 그림이 어떤 것이었는지 잊어버렸다고요? 그렇다면 다시 그리지요. 힘든 일은 아니니까요.

 

윤구병29-2

 

제 고조부모인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에 따르면 이 그림에서 ①만 있고 ②부터 ⑥까지는 없습니다. 할아버지 플라톤 옹에 따르면 ①과 ②의 속살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저 세상〔이데아(idea)의 세계와 직관의 세계〕에 있고 ②의 겉껍데기와 ⑤까지만 현상계에 있습니다. 제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는 ①은 없다고 본 듯합니다. 제 아버지가 신으로 모셨던 분은 ①이 아니라 ②라고 저는 믿는데 그 까닭은 이렇습니다. 제 아버지는 신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그러면서도 다른 한쪽으로는 신은 ‘생각의 생각〔noesis noeseos〕’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좀 묘하지요? 제 생각으로는 생각〔noesis〕은 움직임입니다. 생각이 멈추면 그걸 어떻게 생각이라고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생각이 다른 쪽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생각은 멈추게 되고, 그건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제 아버지가 하나이신 ‘하나님(신)’을 생각과 같은 것이라고 여긴 것은 잘못이라고 봅니다. 생각이 하나를 찾는 것은 생각이 하나에서 나왔기 때문이고, 또 생각과 하나는 마침내 하나가 될 수 있지만, 동시에 생각 속에는 생각함과 생각됨이 더불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생각은 하나이자 여럿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에 이르기까지 이어져 내려온 존재론의 전통을 저 나름으로 졸가리를 찾으면 아마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이신 있는 것이 생각을 낳고, 생각이 삶을 낳고, 삶이 자연을 낳고, 자연이 질료를 낳았습니다. 파르메니데스 옹 말씀 그대로 하나이신 있는 것은 가득 차서 빠진 것이 하나도 없는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생각은 하나에서 나왔고, 그 때문에 늘 하나를 지향하지만, 생각 속에는 빠진 것이 있습니다. 제 아버지가 신을 ‘생각의 생각’이라고 규정하셨을 때 앞생각〔noesis〕과 뒷생각〔noeseos〕은 같은 것이겠습니까, 다른 것이겠습니까? 저더러 말하라 하면 저는 다른 것이라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러면 앞생각과 뒷생각 사이에는 틈이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대체 이 틈은 어디에서 생겨난 것입니까? 틈은 빈 데를 뜻합니다. 무엇인가 빠져 있을 때 빈틈이 생깁니다. 틈이 있으면 하나로 있던 것이 둘로 갈라집니다. 하나를 둘로 가르는 이 틈은 무엇 때문에 생겨날까요? 무엇이 빠져서 둘 사이가 갈라질까요? 빠진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도 아무튼 ‘빠진 것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아요? 그런데 누구한테 들었더니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고 하데요.(누구한테 듣기는 누구한테 들어? 윤모가 《있음과 없음》이라는 글에서 자기네 조상들이 쓰던 말이 그렇다고 했지!) 자, 앞생각과 뒷생각이 갈라지자 어느 틈에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까? 없는 것이 모습을 드러내는 자리는 있는 것이 모습을 감추는 자리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가 빠지는 자리이지요. 생각이 하나로부터 갈라서는 자리 말입니다. 그러나 생각이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길을 잃지요. 감각을 징검다리로 삼는 보통 사람의 생각에서부터 고도로 추상화한 사유에 이르기까지, 언어학자가 찾는 음소〔phoneme〕나 형태소〔morpheme〕에서 생물학자가 찾는 생명의 단위에 이르기까지, 모든 생각이 하나를 찾기에 그처럼이나 애를 쓰는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를 찾지 못하면 생각은 생각이기를 그치지요. 하나를 잃은 생각은 의식 불명 상태에 빠지니까요. 무엇이 무엇인지를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의 상태를 가리켜 우리는 의식 불명이라 이르지 않던가요? 하나를 찾아 빠진 것을 메워야 생각이 제 구실을 합니다. 제가 생각을 ‘하나이자 여럿인 것’이라고 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은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지만 있는 것 바로 그것은 아닙니다. 생각에는 빠진 것, 다시 말해서 없는 것이 섞여 있다는 말이지요. ‘없는 것이 없게’ 만들려는 플라톤 할아버지의 노력이 있는 것들의 모두인 여러 하나들의 세계, 곧 이데아의 세계를 만들어 냈지만, 이데아 세계의 여러 하나들이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파르메니데스의 오직 하나, 곧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깨끗한 생각도, 이것과 저것을 먼저 놓고 그것을 같거나 다른 것으로 파악하는 추론의 공간 속에서 움직이는 생각은 하나를 알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과 저것이 함께 있는 세상, 곧 둘이 있는 곳에는 공간이 있게 마련이고, 공간이 있는 곳에는, 비록 그 공간이 순수한 사유 공간이라 할지라도 하나가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하나는 직관의 대상이지 추론하는 사유의 대상이 아닙니다. 제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이데아의 세계는 직관의 대상이라고 한 까닭은 바로 여기에 있지요. 그러니까 생각에는 직관도 있고 추론도 있습니다. 직관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이고 추론은 여럿과 관계를 맺는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하나 밖에 다른 어떤 것이 있다는 말인데, 하나는 곧 있는 것이니 있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이란 없는 것밖에 더 있겠어요? 저는 없는 것을 그렇게나 꺼리고 두려워했던 우리 고조할아버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에까지 이어져 내려온 이른바 ‘그리스 사유의 전통’을 깨지 않으면 존재론의 일관된 체계를 세우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있는 것과 생각은 하나다.’라고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우기는 고조할아버지의 고집을 저는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야 물론 우리의 생각은 늘 하나를 지향하지요. 일관된 생각이란 하나를 지향하는 생각을 가리킨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생각이 둘로 흩어지면 종잡을 수 없다는 것도 사실이고요.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생각은 움직이는 것이지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이 있는 것과 하나가 되려고 해도 하나 쪽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겠지요. 당신은 아예 없는 것, 다시 말해 허무를 생각할 수 있고 말로 표현할 수 있느냐? 그럴 수 없으면 아예 없는 것은 말 그대로 없는 것이 아니냐? 우리가 없는 것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예 없는 것이 아니라 플라톤이 이야기하는 ‘규정할 수 없는 것〔apeiron〕’이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염두에 두고 있는 ‘순수 질료’ 같은 것이 아니겠느냐? 그 반문에 대해서 대답하지요. 그렇습니다. 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습니다. 그 순수 질료니, 무규정적인 것이니 하는 것의 뿌리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철학은 뿌리를 찾는 학문이고, 까닭을 캐는 학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성격을 지닌 철학이 제대로 서려면 존재론의 바탕이 단단히 다져져야 합니다. 우리가 나날의 삶에서, 또 그 삶을 반영하는 감각이나 사유 속에서 없는 것을 몰아내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없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삶과 생각의 빈틈을 비집고 들어옵니다. 배가 고픈데 먹을 것이 없습니다. 추운데 난로에 온기가 없습니다. 있는 것 하나밖에 없으면 생각도 없습니다. 구체적인 생활에서나 감각에서나 생각에서나 어디에서나 드러나는 이 없음의 근원은 무엇입니까? 비어 있음이라고요? 결핍이라고요? 이미 있었던 것의 사라짐이라고요? 늘 있는 것과 연관되어 나타나는 것이지 홀로는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고요?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 해도 이 세상에는 감각의 세계와 사유의 세계로부터 이 없음을 몰아 낼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차라리 얼버무리지 말고 솔직히 인정합시다.

‘태초에 있는 것 밖에 없는 것도 있었다.’ ‘없는 것은 하나인 있는 것을 둘러싸고 있었다.’ ‘하나의 힘이 넘쳐흘러 없는 것을 밀어 내고 둘레에 생각의 고리를 만들었는데 이 생각의 고리는 하나와 맞닿아 있어서 늘 하나를 지향한다. 이 하나이자 여럿인 생각의 고리에서 최초로 운동 가능성이 나타났다.’ ‘생각의 고리 둘레를 생명의 고리가 둘러쌌는데 생명의 세계에서 처음으로 둘이 뚜렷이 갈라졌다. 하나의 힘이 지배하는 우주 생명은 생각의 고리에 닿아 있어 하나로 남았으나, 밖에 있는 자연의 고리에 잇대어 있는 생명은 없는 것이 사이에 들어 여럿으로 나누어졌다.’ ‘생명의 고리 바깥에 자연의 고리가 둘렸는데, 이 고리에서 하나인 있는 것과 하나가 아닌 없는 것이 팽팽하게 힘으로 맞섰다. 여기에서 비로소 동물과 식물과 땅같이 감각으로 지각되는 크기를 가진 몸뚱이를 지닌 것들이 나타났다. 이 자연도 생명의 고리에 가까운 ‘만드는 자연’과 밖에 있는 질료의 고리에 가까운 ‘만들어진 자연’으로 갈라졌다. 하나인 있는 것의 힘이 미치는 테두리는 여기까지다.’ ‘자연의 고리 밖에는 있는 것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질료의 영역이 있는데 이것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 없는 것이 없으면 낱낱으로 구별되는 여러 하나도 생겨나지 못한다. 고유 명사로 부르는 낱낱의 저마다 다른 것은 이 없는 것의 힘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까지도 받아들이자고 한 생각의 큰 테두리는 이런 것입니다.”

제가 이렇듯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간단히 줄이고 플로티노스의 이론을 저 나름으로 해석하여 장황하게 늘어놓는 까닭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닙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모자 속에 감추어 놓고 끝까지 보여 주려 들지 않았던 것의 실체가 플로티노스의 이론에서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당사자들은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르지만 제 생각에 플로티노스는 서양 중세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모든 위대한 신학자와 철학자들에게 숨은 영감의 원천이었습니다. 플로티노스의 제자인 포르피리오스뿐만 아니라 아우구스티누스도 토마스 아퀴나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스피노자도 헤겔도 베르그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파르메니데스와 제논이 부정했고,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감추려고 애썼던 없는 것이 플로티노스에 의해서 있는 것으로 드러났으니, 이제부터 그 동안 우리가 뒤로 미루어 놓았던 과제, 곧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가장 기본 되는 판단 형식이 될 수 있는지 따져 봅시다. 보통 모순율을 대표하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A is not non-A).’로 표현됩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 ㄱ이라면 있는 것은 없는 것이 아닌 것이라는 점에서 ㄱ 아닌 것이고, 따라서 ‘없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은 ‘ㄱ은 ㄱ 아닌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 형식에 일치합니다. 모순율을 뒷받침하는 존재론 차원의 문장으로 왜 ‘있는 것이(은) 없는 것이 아니다.’를 들지 않고 하필이면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를 들었느냐고 묻는 분에게는 있는 것은 하나이고, 하나로 있는 것은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사유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따라서 추론의 공간 속에 자리잡을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하겠습니다. 다시 모순율로 되돌아가서, 만일에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판단 형식이 어떤 경우에도 참임이 증명될 수 있다면 모순율은 자명한 논리학의 공리로서 자리를 굳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경위야 어떻든 없는 것은 분명히 우리의 생각 속에 있는 것이고, 이 생각 속에 있는 것이 없는 것이라는 말로(글자로) 지금 우리 눈앞에 드러나 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없는 것이라는 말을 버젓이 들으면서(글자를 눈앞에 보고 있으면서) 그것을 있지 않다고 우길 수 있겠습니까? 어떤 판단 형식이 공리 행세를 하려면 그 판단 형식에 실오라기만 한 의심의 여지도 없어야 합니다.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문장이 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없는 것이(은) 있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나란히 놓고 판단할 때 한층 더 강화됩니다. 만일에 이 두 문장을 놓고 볼 때 그 가운데 어느 하나는 분명히 참인데 다른 하나는 거짓임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내리기 힘들다면 사태는 더 심각해집니다. 모순율이 깨지면서 동시에 배중률도 공리의 구실을 할 수 없기 때문이지요. 이 사태는 다만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설 자리를 잃는 것으로 마무리되지 않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식 논리학이 무너지면 파르메니데스가 주춧돌을 놓고 플라톤이 그 위에 기둥을 세운 그리스 존재론의 전통이 한꺼번에 와르르 주저앉을 위험이 있다는 사실이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용렬한 후손의 조상 망신시키기가 어물전 망신을 꼴뚜기가 시키는 꼴보다 더 심하더라는 욕을 먹을 셈치고 어디 한번 제가 비몽사몽 중에 본 있음의 살붙이와 없음의 살붙이들을 그림으로 그려 볼까요?

 

윤구병 그림18

 

이 그림을 보면 가운데 있는 점①을 중심으로 네 개의 동심원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맨 바깥에 있는 동심원 밖에는 텅 빈 바탕⑥이 있습니다. 자, 이제 번호 ①에서 ⑥까지 저마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한번 살펴볼까요?

①­하나(있음, 있는 것, hen)

②­생각(정신, nus)

③­생명(영혼, psyche)

④­자연(생성, physis)

⑤­질료(없는 것=비존재, hyle)

⑥­아예 없음(허무, ouk)

이 그림을 눈여겨보신 분은 아마 조금 의아할 거예요. 그리고 이렇게 묻겠지요.

“너 플라톤 손자 맞냐?” “예. 맞아요.” “신플라톤학파에 속한단 말이지?” “글쎄요. 다들 그렇게 부르고 있으니까 제가 뭐라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게 말해도 무리는 없을 거예요.” “그렇다면, 지금 네가 그려 놓은 그림 그게 뭐냐?” “왜요? 뭐 잘못된 게 있나요?” “어허, 그 그림 네 할아버지가 그린 우주를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놓은 것 아니냐?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에서 설명하신 우주를 그림으로 그리면 아마 이런 모습일 게야.”

 

윤구병 그림19

 

“자, 봐라. 네 할아버지는 우주 밖에 있는 것만 두고 ‘있는 것과 같은 것〔tauton〕’으로 우주의 바깥 테두리를 둘러 이 우주를 하나로 만들었다는 것을 너도 인정하겠지? 그러니까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그것이 정신〔nus〕이 되었건, 생명〔psyche〕이 되었건, 물질〔soma〕이 되었건, 물질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hypodoke〕이 되었건, 시쳇말로 운동이 되었건, 공간이 되었건, 하나도 빠짐없이 이 우주 안으로 밀어넣지 않았더냐? 같은 것의 고리가 우주를 감싸서 이 우주가 영원불변한 하나의 닫힌 우주로 될 수 있었던 까닭은 이 우주가 하나인 있는 것과 맞닿아서 그 영향을 받기 때문이 아니겠느냐? 네 할아버지의 우주를 함께 꼼꼼히 들여다보자꾸나. 네 할아버지의 생각에 따르면 이 우주는 전체로 보아 빈틈없이 질서 지워진 완벽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어. 그러나 같은 것〔tauton〕으로 도배된 우주 표면 안쪽은 다른 것〔heteron〕으로 도배되어 있는데, 다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형상〔idea〕과 다른 것이 아니겠느냐? 있는 것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언뜻 상식으로 생각하면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러나 네 할아버지는 네 고조할아버지를 닮아서 아예 없는 것〔虛無〕은 생각할 수도 없고, 말로 드러낼 수도 없는 것이라고 여겨 아예 없다고 여겼어. 그 점에서는 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나 네 할아버지나 모두 그리스 정신의 소유자라고 볼 수 있겠지.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생각하는 그 오랜 그리스 정신의 전통이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머릿속에도 꽉 박혀 있었던 거야. 없는 것을 있다고 인정하면 합리적 사고의 바탕이 아예 무너져 버린다고 여긴 거지. 그래서 네 할아버지가 고심 끝에 이끌어 낸 결론은 ‘있는 것과 다른 것은 없는 것이 아니요, 있는 것과도 다르고, 없는 것과도 다른 어떤 것, 다시 말해서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방황하고 있는 것〔planomene aitia〕이다.’였지. 자, 그렇다면 이렇게 규정할 수 있겠구나. ‘있는 것과 다른 것〔heteron〕’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말이야. 그렇다면 다음으로 하나와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그것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여럿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여럿이란 무엇이냐?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둘이 나타나면 그 둘이 따로 있을 자리가 필요하게 되어 당장에 공간이 나타나고, 그 둘이 따로 떨어져서 관계를 맺지 않으면 둘이라고 할 수 없으므로 둘은 서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데, 둘이 관계를 맺자마자 둘 사이에 서로 저됨〔identity〕이 사라지는 변화가 일어나 운동이 시작되는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 ‘하나와 다른 것〔heteron〕’은 여럿이요, 공간 규정이요, 시간 규정이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그런데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다른 것〔heteron〕의 성격 하나는 ‘있는 것과 다른 것’으로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apeiron〕’이라고 볼 수 있겠지? 그렇게 따지면 둘은 다시 말해 ‘있는 것이 아닌 것임과 동시에 없는 것이 아닌 것’이겠구나. 적어도 네 할아버지의 논리에 따르면 그런 것이겠지? 마지막으로 형상〔idea〕과 다른 것은 무엇이겠느냐? 하나하나의 형상은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서 저마다 하나로 있는 것이고, 그런 뜻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이고, 관계를 맺지 않으므로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그런데 정지의 반대는 무엇이지? 운동이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운동이 무엇인지를 알아보기 전에 어떤 운동이 있는지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겠구나. 크게 보아 운동 가운데는 질서 있는 운동도 있고 무질서한 운동도 있지? 무엇을 질서 지워서 형성하는 운동도 있고, 질서를 흩뜨려서 허물어뜨리는 운동도 있지 않느냐? 네 할아버지가 〈티마이오스〉에서 말한 일정한 수치와 척도에 따라서 우주를 만들어 낸 데미우르고스(Demiourgos)의 운동은 바로 질서 있는 운동이라고 할 수 있고, 이 데미우르고스의 운동이 우주 안에 반영되면 정신〔nous〕의 운동이 되고, 생명〔psyche〕의 운동이 되겠구나. 너도 네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티마이오스〉(Timaios)에서 한 말을 기억하고 있겠지? 데미우르고스가 한편으로는 설득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제해서 생성〔gignomenon〕을 버물려 우주의 몸〔soma〕을 만들고, 그 몸 속에 생명〔psyche〕을 집어넣고, 그 다음에 정신〔nus〕을 집어넣어 이 우주를 살아 있는 것, 이성적인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 말이야. 그러니까 네 할아버지 말에 따르면 이 우주 속에 있는 생명과 정신 작용의 근원은 데미우르고스가 아니겠느냐? 그렇다면, 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이 있고, 그 근원이 어디라는 사실은 밝혀졌다고 치고, 거꾸로 무질서를 지향하는 운동은 어디에 원인이 있다고 보아야 하겠느냐? 우주 밖에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이나 다른 것은 없다고 네 할아버지가 우기고 있으니까, 그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우주 밖에 있는 것은 형상과 데미우르고스뿐이겠구나. 그러면 무질서한 운동의 원인은 우주 안에 있어야 하는데 그 원인이 무엇이겠느냐? 형상과도 다르고, 데미우르고스의 운동과도 다른 것은 우주 안에 있는 어떤 것임이 분명한데,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가 아닌 것, 형상과 다른 것, 질서 있는 운동의 원인과 다른 것, 그래서 질서에 따르도록 타이르면 그 타이름을 따르기도 하지만 어떤 때는 엇나가기도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그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 여럿인 것, 움직이는 것, 움직이되 내버려 두면 번번이 무질서와 혼돈 쪽으로 몸을 맡기려고 하는 것, 네 할아버지가 흔적〔ikne〕이라고도 부르고, 방황하는 원인〔planomene aitia〕이라고도 부르고, 생성〔gignomenon〕이라고도 부른 바로 그것이 아니더냐? 이야기가 너무 장황하게 늘어져서 곁길로 새어 나간 느낌이 없지 않다마는, 네 할아버지가 그려 놓았을 것으로 보이는 우주의 모습으로 다시 돌아가자꾸나. 너도 이 그림이 네 할아버지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느냐?” “그림이 삭막하기는 하지만 얼추 비슷하네요.” “삭막하기는 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우주의 모습도 오십 보 백 보야. 어디 네 우주와 네 할아버지의 우주 그림을 나란히 그려 놓고 견주어 보랴?

 

윤구병 그림20

 

보다시피 네 우주의 모습과 플라톤 옹이 생각한 우주의 모습은 정반대가 아니냐? 먼저 플라톤은 우주의 밖에 있는 것(①)을 두고, 있는 것의 세계와 맞닿아 있는 같은 것의 고리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우주의 중심에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것을 두었는데, 너는 거꾸로 우주의 중심에 하나(있는 것)를 두고 우주의 맨 바깥쪽에 없는 것을 두고 있지?” “네, 그렇습니다.” “다음으로 너는 마치 해에서 햇살이 흘러나와 사방으로 흩어질 적에 빛의 중심인 해에 가까이 있을수록 빛다발이 더 많이 뭉쳐 있고, 해에서 멀리 떨어질수록 빛다발이 성글어지면서 햇살이 힘을 잃는 것처럼 하나에 가장 가까운 누스(nous)에서 프시케(psyche)를 거쳐 힐레(hyle)에 이르는 동안 있는 것이 조금씩 잇달아 빠져나가 마침내 있는 것이 없는 완전한 결핍 단계에 이르는 것으로 보아, 우주의 중심에 있는 하나(있는 것)에서 멀어질수록 없는 것이 지배하는 어둠의 영역으로 확산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는데, 플라톤은 반대로 중심에 있는 것으로 여겨지는 ‘없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을 소마(soma)가 감싸 안고, 소마를 프시케(psyche)가 또 감싸 안아 흩어지지 못하게 하고, 개별화하는 경향을 지닌 프쉬케를 그보다 더 강한 끈을 지닌 누스(nous)가 감싸서 우주가 전체로서 질서 있는 하나의 틀을 유지하도록 하고, 마지막으로는 맨 바깥에 있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인 같음(또는 같은 것=tauton)의 끈이 우주를 칭칭 동여서 하나로 수렴하는 우주를 그리고 있지 않느냐?”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로 뭉치는 네 할아버지의 우주와 여럿으로 흩어지는 너의 우주는 전혀 거꾸로가 아니냐?” “바로 보셨습니다. 그러나 아시다시피 무엇인가 빠져 있는 것, 비어 있는 것은 빠진 무엇이 채워지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이 아쉬움이 그리움을 낳고, 이 그리움이 절실하면 할수록 빠져 있는 그 무엇, 다시 말해서 하나를 찾으려는 열망이 그만큼 강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제 할아버지의 우주는 이미 하나로 완성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충만한 우주에는 크게 보아 빠진 것,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이 우주 밖에는 텅 빈 것이 어디에도 없습니다.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완전한 결핍과 비슷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의 중심에 점의 형태로나 있겠지요. 그리고 할아버지의 우주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구일 터이므로 현상만 살피면 이 지구에는 온갖 혼란이 일상화되어 있고 우리의 의식도 그 영향을 받아 혼란 투성이가 됩니다. 그러나 이 우주 내부의 모순은 비록 근본적으로는 해결될 길이 없다 할지라도 사람의 경우에는 영혼의 정화를 통해서 ‘하나와 같은 것〔tauton〕’의 경지에 이를 수 있으므로 사람에게는 구원의 길이 열려 있다고 볼 수 있겠지요. 그러나 보시다시피 제가 그리는 우주는 허무에 둘러싸여서 어찌 보면 훨씬 더 상황이 비극적이라고 여겨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우주에는 ‘아예 없는 것(허무)’을 빼면 아무리 희미하게나마 하나인 있는 것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닿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어둠을 헤치고 이 빛살을 따라가면 우주의 모든 것이 다 하나와 하나가 되어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네 우주 모형에 따르면 여러 우주, 무한한 우주가 있다고 할 수밖에 없는데, 네 할아버지의 우주 모형에 따르면 하나의 우주밖에 있을 수 없거든. 그런데도 사람들은 어찌하여 너를 신플라톤주의자라고 부르고, 심지어는 신플라톤주의의 창시자라는 딱지까지 붙이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구나.” “그거야 제 잘못이 아니지요. 제가 그리는 우주가 플라톤 할아버지의 우주와는 달리 닫힌 우주가 아니고 열린 우주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제가 이런 우주를 생각하게 되기까지는 고조할아버지인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에 이르기까지 이루어 놓으신 형이상학의 유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힘을 입었습니다. 특히 할아버지 플라톤 옹의 영향은 더없이 컸지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하나로 있는 것만 인정한 결과로 후손들을 어떤 궁지에 빠뜨렸는지 잘 알고 있었고, 이 궁지에서 벗어나려고 할아버지 플라톤 옹이 여러 하나인 형상의 세계를 가정한 결과로 어떤 문제는 해결했지만, 그에 못지 않은 골치 아픈 문제를 새로 불러일으켰다는 것도 분명히 이해했습니다. 또 아버지인 아리스토텔레스 옹이 형상의 세계를 거부하고 형상의 세계와 경험 세계라는 두 세계 사이에 있는 틈을 메워 보려고 애를 썼지만 어느 점에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는지도 눈치챘지요. 따라서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은 이 모든 작업의 성과를 한데 모아서 모순 없는 체계를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비록 제 조상들의 뜻에 어긋나는 쪽으로 드러났더라도 너그러이 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1

있을 것은 없고 없을 것만 있는 개 같은 세상 [철학을다시 쓴다]-29-1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기로 하지요. 저는 존재론의 차원에서 동일률을 뒷받침하는 기본 문장이 ‘있는 것이 있는 것이다.’가 아니고 ‘없는 것이 없는 것이다.’라고 논증했지만, 이런 결론은 저를 조금도 행복하게 만들어 주지 못했습니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모든 학문적 인식은 있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에서 출발합니다.

학문 가운데 가장 엄밀한 학문이라는 수학을 예로 들어 봅시다. 수학에서 1이라는 숫자는 절대입니다. 우리는 1과 0, 이 둘만 가지고도 수학에서 연산을 할 수 있지만 1이 빠지면 수학 체계는 무너지고 맙니다. 어찌 수학뿐이겠습니까? 물리학도 마찬가지고 화학도, 생물학도, 그 밖의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리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미립자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물리적 우주까지를 대상으로 삼습니다. 화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원소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유기 화합물을 대상으로 삼고, 생물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단세포 생물 또는 단위세포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생명계 전체를 대상으로 삼고, 문학은 가장 작은 하나로 여겨지는 개별 작품에서 가장 큰 하나로 여겨지는 문학의 일반 이론까지 대상으로 삼고…… 이런 식이지요.

그런데 저마다 다른 이런 하나들의 존재론적 특성이 무엇이냐 하는 것이 늘 문제입니다. 자, 살펴봅시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계는 감각을 기준으로 삼을 때 ‘고유 명사의 세계’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다는 말은 바꾸어 말하면 하나와 같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뜻입니다.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세계에는 하나가 없습니다. 이런 세계에서 무엇을 기준으로 하나를 정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수학에서 1을 기본 수로 정할 수 있는 것은 모든 1이 같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어느 하나〔1〕도 서로 같지 않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1〕를 기준으로 수학의 체계를 세울 수 있겠습니까? 감각과 연관된 세계에는 엄밀한 뜻에서 서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으므로 어느 하나도 기본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그 동안 우리는 여러 차례에 걸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하나로 있는 것은 크기를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했습니다. 크기를 가진 것은 아무리 크기가 작더라도 늘 둘로 나누어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리고 어떤 것이 둘로 나누어질 수 있다는 것은 그것이 겉으로는 하나로 보이지만 실상은 여럿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뜻하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감각으로 파악하는 세계는 모두가 크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물질세계에서 어떤 물질 공간을 차지하지 않고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물질치고 크기 없는 물질은 없습니다. 그러니 물질세계에 어떻게 하나가 있다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현상계에서는 공간의 기본 단위도, 시간의 기본 단위도 찾을 수 없다는 제논의 말은 백 번 맞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보면 현상 세계에서 하나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헛수고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질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물리학자의 노력, 화학 원소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화학자의 노력, 생명을 지닌 것 가운데 가장 작은 하나를 찾으려는 생물학자의 노력, 그 밖에 감각과 연관된 모든 학문 분야에서 가장 작은 단위를 찾으려는 모든 노력은 모두 실패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예로부터 동양에서는 가장 크기가 작은 물질을 ‘티끌〔微塵〕’로 보았던 듯합니다. 그런데 부처님 말씀 가운데 ‘티끌 하나 속에 우주가 들어 있다〔一微塵中含十方〕.’는 구절이 있습니다. 손톱만 한 크기의 운모에 책 몇백만 권 분량의 정보가 들어가는 기억 소자〔memory chip〕가 곧 상품으로 나올 것이라 하니, 그런 뜻으로 이 말씀을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저는 이 구절 속에 더 깊은 뜻이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안팎으로 무한한 이 우주에 있는 모든 것들이 어느 하나도 홀로 떨어져 있지 않고 서로 모든 방면으로 이어져 끝없이 소용돌이치며 출렁거리고 있는 모습이 이 구절을 읽는 순간 제 마음의 눈앞에 홀연히 떠오르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그러니까 이 우주 안에 하나로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인데, 그러면 있는 것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나로 있는 있는 것과 연관해서는 어디나 언제라는 말을 쓸 수 없습니다.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해서 말하지만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없는 것’은 현상 세계에 없고, 따라서 현상 세계의 일부인 우리의 머릿속에도 없습니다. 제가 앞에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그린 그림에서 두 끝으로 나타나는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어디까지나 설명을 쉽게 하려고 그렇게 표현한 것이고, 사실 이 양 극단, 모든 운동이 거기에 맞닿으면 그치게 되는 운동의 한계이자 모든 크기가 거기에 들어서면 없어지는 공간의 한계이기도 한 이 절대 지점에 연관해서 우리는 있다, 없다는 말도 쓸 수 없습니다. ‘입만 벙긋해도 틀린다〔開口則錯〕.’는 말은 바로 이런 경우에 쓰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하나인 있는 것과 아예 없는 것은 크기를 가진 여럿과 운동의 두 끝을 이루면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는 현상 세계를 초월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들과 연관해서 비유를 써서 하나〔一者〕, 또는 하나님〔有一神〕이라든가, 스스로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는 것〔kinoun akineton〕이라든가, 큰 끝〔太極〕이라든가, 검고 또 검은 것〔玄之又玄〕이라든가, 검은 어둠〔黑暗〕이라든가, 끝도 없음〔無極〕이라든가 하는 여러 가지 말로 나타내려고 애쓰지만 그 둘 가운데 어느 것도 우리 의식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수밖에 없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우리가 흔히 있는 것이라고 일상생활에서 자연스럽게 말하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이것들이 어떤 자격을 가지고 있기에 있는 것이라고 우리는 스스럼없이 말할까요? 우리 눈에 보이기 때문이라고요? 우리 귀에 들리기 때문이라고요? 우리가 만지고, 냄새 맡고, 혀로 맛볼 수 있기 때문이라고요?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는 모든 것, 시간의 규정을 받아 끊임없이 바뀌고, 공간의 규정을 받아 여럿으로, 이런저런 크기를 지닌 것으로 나타나는 모든 것은 그 안에 있음과 없음의 두 상반된 측면을 함께 지닌 것이라고 앞에서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현상 세계는 한편으로 보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보면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 다시 말해서 종잡을 수 없는 모순덩어리라고 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현상 세계의 이런 특성은 우리의 감각 대상과 감각 기관 모두를 믿을 수 없는 증인으로 만듭니다. 고유 명사의 세계에서 도대체 우리가 무슨 법칙을 이끌어 낼 수 있겠습니까? 감각에 주어진 것을 기초 자료로 삼을 수밖에 없는 모든 일반화는 추상의 모든 단계에서 우리의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우리가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현상 세계만을 두고 말한다면 ‘모든 사람이 모든 것의 잣대’라고 한 프로타고라스의 말은 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감각 기관 가운데 가장 발달했다는 시각을 기준으로 삼는다 치더라도 가까이 볼 때 다르고, 멀리 볼 때 다르고, 여기서 볼 때 다르고, 저기서 볼 때 다르고, 아침에 볼 때 다르고, 저녁에 볼 때 다르고, 어제 볼 때 다르고, 오늘 볼 때 다른데, 같은 것을 보더라도 어쩔 수 없이 나와는 다른 자리에서 볼 수밖에 없는 남들이 보는 것이 내가 보는 것과 다른 것은 너무나 뻔하지 않습니까? 누구의 눈을 더 믿음직하다고 하고, 누구의 눈을 덜 미덥다고 하겠습니까?

이렇게 모두가 저마다 다른 눈금이 새겨진 잣대를 가지고 무엇이 얼마나 큰지 잰다면, 그래서 저마다 다른 치수를 댄다면, 누구의 말이 옳고 누구의 말이 그른지, 누가 참말을 하고 누가 거짓말을 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모두가 옳고 모두가 그르고, 모든 말이 참말이자 동시에 거짓말이 될 테니, 이런 세상에서는 저절로 말길이 끊길 것입니다. 의식이 모순에 빠지면 하는 말마다 횡설수설일 뿐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날마다 하는 말 가운데 횡설수설 아닌 것이 몇 마디나 되겠습니까? 제가 여기서 이렇게 하는 말도 거의가 횡설수설이라고 보면 됩니다. 침묵이 금이라는 말이 달리 나왔겠습니까?

하나도 같은 것이 없는 현상 세계에서 같은 것을 찾아 다른 것과 나눌 수 있는 길이 없겠느냐, 만일에 같은 것이 없다면 먼저 닮은 것, 비슷한 것부터 찾아볼 수 없겠느냐를 놓고 고민하던 플라톤이 결국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형상〔idea〕의 세계에서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하나의 근거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합니다.

앞에서 저는 ‘ㄱ은 ㄴ과 다르다.’라는 일상 언어에는 ‘ㄱ에 있는 (어떤) 것이 ㄴ에는 없고, ㄱ에 없는 (어떤) 것이 ㄴ에 있다.’는 뜻이 담겨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ㄱ에 없는 것이 ㄴ에 있는 것이고, ㄱ에 있는 것이 ㄴ에 없는 것이지요. 만일에 ‘ㄱ에 있는 것이 ㄴ에도 다 있고, ㄱ에 없는 것이 ㄴ에도 다 없다.’면 ㄱ과 ㄴ은 같은 것이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 수학에서 이야기하는 합동(合同)의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의 근거는 있는 것입니다. 같은 것의 근거도 있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럿의 근거는 없는 것이고 다른 것의 근거도 없는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현상계에 있는, 우리의 감각에 주어지는 모든 것이 저마다 다 다른 고유 명사의 세계를 이루는 것은 그것들의 기본 특성이 모두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없는 것에서는 참된 인식이 나오지 않습니다. 우리의 의식이 파악하는 없는 것은 모순된 것이고, 모순된 것은 여럿과 크기와 바뀜이 있는 현상 세계의 반영물로서 우리의 의식을 모순에 빠뜨립니다.

“자, 파르메니데스가 이야기한 하나로 있는 것은 우리의 사고로 파악할 수 없다는 점에서 헤겔이 《논리학》에서 이야기한 그대로 아예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저것, 우리가 오관으로 파악하는 삼라만상을 미망의 세계로, 백일몽으로 돌려 버리지 않으려면, 이것들을 있는 것과 닮은 것, 있는 것과 비슷한 것으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하는데, 보다시피 현상 세계에서는 하나를 찾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는 여럿의 세계에서 독립해 있는 것, 어떤 다른 것과도 관계를 맺지 않는 것, 아예 없는 것으로 둘러싸인 것, 유식하게 말하자면 모든 관계가 끊어지고 허무에 둘러싸여 절대 고립의 상태에 멈추어 있는 것인데, 현상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이어져 있고, 관계 맺음 속에서 저됨을 지니지 못하고 끊임없이 바뀌고 있기 때문이다.

쉽게 설명하기 위해서 기하학 도형인 삼각형을 보기로 들자면, 유클리드 평면 공간이라는 추상 공간에서 정의〔definition〕로 잡아 낸 삼각형은 ‘세 직선이 서로 만나서 이룬 안각의 합이 180도인 평면 도형’이다. 이 정의된 삼각형은 어떤 특정한 크기도 각도도 가지고 있지 않다. 정의된 이 삼각형은 하나라는 점에서 삼각형 바로 그것과 맞닿아 있는데 하나로서 크기가 없는 삼각형 바로 그것은 크기가 없고 바뀌지 않는다는 점에서 시간과 공간의 규정을 받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있는 것 바로 그것과 같은 것, 있는 것 바로 그것에 맞닿아 있는 것이 된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로 있는 삼각형이나 원을 찾아 낼 수 있다면, 이것을 실마리로 삼아 현상 세계에 있는 이것저것 모두에 저마다 하나를 찾아 줄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삼각형 하나, 소나무 하나, 사람 하나, 좋은 것 하나들이 형상의 세계에 자리잡으면 이 하나를 바탕으로 현상 세계에서도 삼각형 하나, 소나무 하나와 같거나 비슷한 것, 좋은 것 하나와 닮거나 같은 것 따위를 찾아 낼 수 있다. 그러니까 저마다 고유 명사로 우리의 감각 대상이 되는 시간과 공간 속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시간과 공간을 벗어나 형상의 세계에 하나로 있는 삼각형 바로 그것, 소나무 바로 그것과 같거나 닮았다는 뜻에서 삼각형, 소나무라는 일반 명사로 추상될 수 있고 이렇게 해서 최초의 하나가 나타나면 이 삼각형, 저 삼각형, 이 소나무, 저 소나무는 특정한 크기와 자리와 변화된 모습에 아랑곳없이 감각적인 특질을 벗어나 하나씩 헤아릴 수 있는 것, 곧 여럿 속의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현상 세계를 구제하려는 플라톤의 전략을 저 나름으로 엉성하게나마 재구성해 본 것입니다.

현상 세계를 구제하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전략은 스승인 플라톤의 전략과 조금 달랐지요. 아리스토텔레스라면 아마 이렇게 말했을 겁니다.

“하나로 있는 ‘있는 것’ 바로 그것이나 아예 없는 것이 현상 세계에 없다는 것은 나도 인정한다. 설명을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로 있으면서 바뀌지 않는 신(神)적인 것을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으면서 남을 움직이게 하는 것으로 놓고, 아예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 없는 것을 순수한 질료라고 부르자. 이 둘을 빼면 나머지는 모두 현상 세계의 식구들이다. 현상 세계의 식구들은 모두 있는 것과 없는 것, 하나와 여럿, 형상과 질료, 현실태와 가능태의 복합체다. 여기에서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는 같은 울타리에서 사는 같은 식구고,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는 다른 울타리에서 사는 다른 식구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울타리에 사는 식구들이 저마다 짝을 지어서 있는 것과 없는 것이 한 몸, 하나와 여럿이 한 몸, 형상과 질료가 한 몸, 현실태와 가능태가 한 몸 되어 사는데 이 여러 한 몸들은 겉으로 보기에만 다르지, 본질에서는 같다. 다시 말해서 다른 여러 한 몸들은 ‘있는 것과 없는 것 한 몸’의 여러 현상 형태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현상 세계에 몸담고 있는 온갖 것들은 있는 것이자 없는 것이요, 하나이자 여럿이요, 형상이자 질료요, 현실태이자 가능태인 것이다.

이 현상 세계를 보는 관점은 둘이다. 없는 것, 여럿, 질료, 가능태 쪽으로 시선을 집중하면 감각과 연관된 고유 명사의 세계가 펼쳐지고, 있는 것, 하나, 형상, 현실태 쪽으로 시선을 돌리면 이성과 연관된 일반 명사의 세계가 열린다. 이 일반 명사 세계의 확실성을 보장하는 것은 우리가 신(神)이라 불러 마땅한 있는 것 바로 그것의 다른 이름인 움직이지 않으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현상 세계를 벗어나 있으면서 현상 세계를 움직여 자기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고유 명사의 세계에서 방황하지 말고, 일반 명사의 세계를 지향해야 한다. 현상 세계의 하나는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이 보장하고, 현상 세계에 있는 것은 가장 큰 하나이면서 크기가 없는 현상 세계 밖의 하나이신 있는 것, 곧 신이 보장한다.”

말이 나온 김에 신플라톤주의자로 알려진 플로티노스의 현상 세계 구제 방법론을 한번 들어 보는 것도 해롭지 않은 일인 듯합니다.

“사람들은 우리 집 족보를 들출 때 플라톤이라는 할아버지만 자꾸 들먹이는데, 그건 우리 가문의 내력을 잘 모르는 탓입니다. 저희 고조부 파르메니데스 옹은 금실 좋은 고조모 제논이라는 분과 함께 아테네로 이민 온 이탈리아 마피아 출신입니다. 이분들이 소크라테스라는 박수 무당 증조부를 낳고, 소크라테스 옹이 저희 할아버지 플라톤을 낳으셨는데, 저희 할아버지의 꿈은 마피아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었지요. 그런데 그분의 꿈이 워낙 커서 우주 안에는 그 왕국을 세울 땅이 없었어요. 이분이 저희 부친 아리스토텔레스를 낳고, 아리스토텔레스 슬하에서 제가 태어났습니다.

저는 고조부 파르메니데스 옹으로부터 하나님〔一者〕이 있다는 것을 배웠고, 박수무당인 소크라테스 옹으로부터 이 거룩한 존재를 찾아가는 길을 배웠고, 할아버지인 플라톤 옹으로부터 이 하나님이 좋은 분이자 빈틈이 하나도 없는 꽉 찬 분으로서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신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 옹으로부터는 이분이 이 세상 울타리 밖에 계시지만 이 세상이 좋은 세상이 되도록 끊임없이 이 세상을 위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이 여러 말씀들을 하나로 엮어서 하나님의 세계와 우리 현상 세계를 묶는 노끈을 만드는 작업이었다고 할까요. 파르메니데스 옹과 제논 마님께서는 늘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없다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면서 없는 것을 있다고 하면 거짓말이라고,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셨는데, 자라면서 보니까 거짓말하는 사람들이 수두룩하더라고요.

저는 세상에는 거짓말도 있고 속임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 곰곰이 따져 보았지요. 있는 것만 있고 없는 것은 아예 없다면 거짓말도 없을 것 아니냐, 없는 것이 있으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 생겨난 것 아니겠느냐, 그러니까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생판 거짓말이라고 보기는 힘들지 않겠느냐, 없는 것이 있다는 거짓말보다 더 큰 거짓말은 있는 것이 없다는 말일 텐데, 이 세상에는 없는 것도 있고, 있는 것도 없는 일이 비일비재하더라, 그렇다면 고조부모님 말씀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 힘들지 않겠느냐, 이렇게 생각했지요. 그 뒤로 증조부님과 조부님의 언행을 기록한 책들을 읽어 보니, 딱히 없는 것이 있다고 드러내 놓고 말씀하신 적은 없지만 같은 것, 다른 것, 닮은 것, 안 닮은 것, 인 것, 아닌 것, 하는 것, 되는 것, 형상, 생성…… 뭐 이런 말이 자꾸 나와요. 가득 찬 것, 빠진 것 같은 말도 나오고요.

저는 파르메니데스 옹이, 있는 것은 하나이고, 빠진 데 없이 가득 차서 둥근 모습을 하고 있고…… 이런 말씀을 하신 것은 이해할 수 있더라고요. 그런데 빠진 것〔steresis〕이라는 말이 무슨 뜻을 지닌 말인지는 도통 모르겠더라고요. 나중에 사람들이 일상용어에서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을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 바꾸어 쓰는 버릇이 있다는 걸 상기해 내고, 아하, 그렇구나, 없는 것이 있구나, 그건 빠진 것이로구나, 가득 찬 물통에서 물을 조금씩 빼내면 물은 그만큼 빠져 나가서 물통은 조금씩 비게 되는구나 하는 데 생각이 미쳤지요. 그 뒤로 저는 있는 것만이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6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자, 여러분, 이제 그림 하나를 더 보고 넘어가기로 할까요?” 이렇게 말하면서 저는 그림을 하나 그렸습니다.

그림8

“보다시피 이것이 가장 단순한 모습으로 드러난 플라톤의 우주입니다. 이 우주 밖에는 무엇이 있느냐고요? 그것은 이데아(idea)라는 두드러기들이 잔뜩 나 있는 있는 것, 곧 하나의 세계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보듯이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입니다. 이 있는 것(있음)은 파르메니데스의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달라붙어〔syneches〕 하나〔monoeides〕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는 하나임으로 말미암아 영원불변하며, 시간과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고 저됨(자체성, 自體性)을 지킬 수 있게 됩니다. 하나의 바로 이런 특성으로 말미암아 하나, 곧 있는 것에 맞닿아 있는 것도 하나와 같은 것, 하나로 있는 것에 동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플라톤의 우주는 하나와 맞닿아 있다는 점에서 하나의 우주,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시간과 공간의 파괴적인 영향을 받지 않고 저임(자기 동일성, 自己同一性)을 잃지 않고 영원히 변하지 않고 있는 것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조금 더 덧붙여서 설명한다면, 플라톤의 우주 맨 바깥을 두르고 있는 같은 것(같음)의 고리는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바로 이 때문에 플라톤의 우주는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일 수밖에 없으며, 생성도 소멸도 되지 않고 정지해 있는 것입니다. 이 우주 안의 모든 변화와 차별상, 곧 운동과 여럿의 세계는 시간과 공간까지 포함해서 다른 것〔heteron〕에서 나옵니다. 플라톤의 우주 안쪽을 여러 겹으로 감싸는 이 다른 것(다름)의 고리는 있는 것과 다른 것, 하나와 다른 것, 따라서 없는 것이요, 여럿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제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지요? 다른 것이 있는 것과 다른 것이어서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동시에 하나와 다른 것이어서 여럿이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런 설명에는 논리의 비약이 있다고 여기지 않습니까? 없는 것과 여럿이 같은 것이라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요? 우리 잠깐 생각을 다시 가다듬어 봅시다. 저는 앞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을 빌려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했고, 왜 그런지 증명까지 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있는 것만 있고, 그것이 하나이며 없는 것은 없다면, 파르메니데스 주장대로 시간도 공간도 없고, 그에 따라 우주도 삼라만상도, 생성과 소멸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감각과 이성으로 파악하는 모든 것들은 죄다 마야의 휘장 너머에 펼쳐진 환상의 세계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런 결론은 이 땅에 발붙이고 사는 정상적인 모든 사람의 상식에 벗어납니다.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주장을 하려면 하나뿐만 아니라 여럿이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인 있는 것뿐만 아니라 없는 것도 있다고 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없는 것이 있다니? 그런 엉터리없는 말이 어디 있어? 없는 것은 그 말 그대로 없는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는 것이라는 말을 파르메니데스가 쓴 뜻 그대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니까 없는 것이라는 말을 아예 없는 것, 없음 바로 그것이라는 뜻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생각을 바꾸어 우리가 흔히 쓰는 뜻으로 이 말을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앞에서 우리는 여럿의 가장 작은 수, 곧 여럿의 최소 단위는 둘인데, 있는 것은 하나이므로 여럿이 있다고 하려면, 없는 것도 있다고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럿을 살리기 위해서 없는 것을 있음과 같은 자리에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몸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는 것이 우연이고 모순이라는 말도 했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럿을 요청하는 순간 우연과 모순으로 가득 찬 세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없는 것이 있는 것과 나란히 서자마자 파르메니데스의 없음 바로 그것은 없어지고, 어려운 말로 ‘존재화(存在化)한 무(無)’ 다시 말해서 없다는 규정 아닌 규정을 받아들인 어떤 것, 곧 빠진 것이 없는 것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타납니다. 이렇게 해서 여럿으로 이루어진 이 세계는 구제되고 플라톤의 우주에서 다른 것은 있는 것과는 다른 것, 없는 것, 그러나 없음 바로 그것은 아닌 것으로 재해석되어 있는 것과 관계를 맺게 됩니다. 그러나 아까 이야기했듯이 이 관계는 우발적인 것, 우연이고 모순입니다. 그리고 이 우연과 모순은 우리의 의식 속에 최초의 우연, 원초적 모순으로 드러나고, 이 때문에 운동과 변화의 가능성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운동은 모순에서 생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운동의 문제는 여기에서 함께 다루기는 벅차니까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합시다.”

저는 여기에서 여럿의 문제를 조금 더 자세히 학생들에게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혔습니다. 모든 것의 최소 단위〔unit〕인 하나를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이야기해 준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세히 설명은 못 했지만 이 하나, 곧 있는 것을 찾아내야만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가 생긴다는 말도 해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다시 말해서 있는 것이 없으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이나 빠진 것에 대해서는 아무 이름도 붙일 수 없고 따라서 무엇이라고 부를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아예 없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으니 제쳐놓고 말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제 말투에 익숙한 어떤 학생이 이렇게 묻더군요. “선생님, 오늘 수업에는 이고운 양이 빠졌는데요. 이렇게 우리는 빠진 것에도 이고운이라고 이름을 붙일 수 있지 않습니까?” “뭐? 이고운 양이 빠졌어? 입덧이 심한가?” “에이, 선생님도. 처녀가 입덧은 무슨 입덧이에요. 괜히 딴전 피우시지 말고 대답해 주세요.” 사실 제가 하는 이야기에는 어려운 낱말이 하나도 없어서 말이야 쉽지만 이 쉬운 말들의 실꾸리를 따라가다 보면 곧잘 미로에서 헤매기 일쑤여서 가끔 엉뚱한 이야기를 꺼내 긴장을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꽁무니를 뺄 수는 없는 노릇! “어쩌다 이고운 양이 여기에 없어서 졸지에 빠진 것이 되어 버렸는데, 그렇다고 해서 이고운 양이 처음부터 빠진 것, 처음부터 없는 것은 아니었지요? 그리고 지금도 여기에서는 빠졌지만 다른 자리를 채우고 있을 것입니다. 대답이 되었나요?” 잠시 동안 긴장이 풀린 사이에 저는 여럿에 대해서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하나가 없으면 여럿이 있다는 말도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럿이라는 말로 저마다 다른 하나하나를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이 강의실에 여러 학생들이 있지요? 그런데 하나하나 저마다 다르지요? 이를테면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은 각각 한 사람이면서 서로 다릅니다. 그런데 우리는 변강세 군과 이옥녀 양이 다르다는 걸 어떻게 해서 안다고 했지요?” 이 시간이 존재론 시간이라는 것을 잘 기억하고 있는 한 학생이 자신 있게 대답했습니다. “그건 첫 시간에 가르쳐 주셨듯이, 변강세 군에게 있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없고, 변강세 군에게 없는 어떤 것이 이옥녀 양에게는 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갑자기 폭소가 터져 강의실은 온통 웃음바다가 되었습니다. 이름이 비슷했기 때문에 학생들은 판소리 가루지기타령에 나오는 변강쇠와 옹녀를 연상하고, 뛰어난 정력을 지닌 이 두 남녀를 머리에 떠올리다 보니 생각이 엉뚱한 데로 비약한 모양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 학생의 대답이 옳았기 때문에 저는, “맞습니다. 바로 그렇습니다.” 하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러자 학생들은 다시 책상을 두들기면서 배를 잡고 웃어 대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학생들의 웃음이 그치기를 기다리고 나서 설명을 계속했습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까닭은 아까 저 학생이 말했듯이 이것에 있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없고, 이것에 없는 (어떤) 것이 저것에는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여럿의 테두리 안에 있는 하나하나의 것은 저마다 있는 것(있음)과 없는 것(없음)의 요소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어떤 것에 있는 것이 다른 것에는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에만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해서 사람, 개, 소, 말, …… 빨강, 파랑, 노랑, …… 동그라미, 세모, 네모 …… 이렇게 다른 이름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이야기했듯이 있는 것은 하나입니다. 따라서 이 세상을 이루는 삼라만상의 하나하나는 있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모두 하나에 참여할 수 있고, 바로 이 때문에 어떤 것으로 규정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다른 것이 어떤 것인지를 알기 위해서 그림 8을 다시 한 번 살펴볼까요? 이 그림을 보면 다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것〔tauton〕의 고리는 있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형식적으로 보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고, 있는 것과 같은 것도 있을 수 있지만 플라톤이 같은 것의 고리로 하여금 우주의 맨 바깥을 감싸고 있도록 한 것으로 보아 같은 것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점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문제는 ‘다른 것(다름 바로 그것)’을 둘러싸고 이루어진 해석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저도 잘 모르니 여기서 덮어두고 다른 것이 지니고 있는 이중의 성질에 대해서만 살펴보기로 하지요. 다른 것은 이 두 마디로 요약해 말할 수 있습니다.

1. 다른 것은 있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있는 것이 아니다.

2. 다른 것은 없는 것과 다르다는 점에서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뭉뚱그려 말하자면 다른 것〔heteron〕은 동시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것이 무엇인지는 이미 앞에서 말씀드렸지요? 그렇습니다. 바로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 들어서 이 둘을 맺어 주면서 동시에 떼어 놓는 무규정적인 것 바로 그것입니다.”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5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여기에서 이야기가 더 얽히기 전에 저는 파르메니데스가 한 유명한 말로 되돌아가야만 했습니다. ‘없는 것은 아예 없으므로 없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할 수도 없고 따라서 말도 할 수 없다.’는 말 말입니다. 파르메니데스는 분명히 ‘없는 것은 없다.’고 말했는데, 우리는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을 할 뿐만 아니라 그 말의 뜻이 ‘빠진 것이 있다.’임을 확인했습니다. 일이 이쯤 되면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렸거나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쓰는 말이 틀렸거나, 그도 저도 아니면 파르메니데스가 쓴 ‘없는 것’이라는 말과 우리가 쓰는 ‘없는 것’이라는 말이 다르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도대체 이 세 경우 가운데 어느 것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 문제를 따지는 데는 앞에서 우리가 한 말도 염두에 두어야 하겠지요. 없는 것이나 없다는 말이 없으면 우리는 이것과 저것이 다르다거나 이것은 저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쓸 수 없고, 따라서 이것과 저것을 갈라 보는 분석뿐만 아니라, 거기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사고와 그 사고의 표현인 언어생활조차 불가능해진다는 이야기 말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 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파르메니데스가 없는 것은 없다고 했을 때 쓴 ‘없는 것’이라는 말은 말하자면 ‘허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없음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리고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생각할 수도 없고 말할 수도 없다는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없는 것이라고 할 때 우리는 없음 바로 그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빠진 것을 가리킵니다. 그림 7을 다시 보아 주십시오. 여기에 최초의 무규정적인 것 ㄱ의 왼쪽과 오른쪽으로 한없이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이 줄을 서 있지 않습니까? 당분간 있음 바로 그것인 맨 왼쪽의 있는 것과 없음 바로 그것인 맨 오른쪽의 없는 것을 보지 말고 그 사이에 있는 것들에만 주의를 기울이기로 합시다. 그리고 ㄱ의 왼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있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있는 것들이라고 하고 ㄱ의 오른쪽으로 줄지어 있는 것들을 없음에 참여하는 것으로 보아 없는 것으로 봅시다. 여기에서 우리는 있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충만(있는 것은 하나로 있고 없는 것이 그 안에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가득 찬 것이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고, 없는 것 쪽으로 향하는 무규정적인 것들의 움직임이 결핍(아예 하나도 있는 것이 없고 비어 있는 허무로 향하기 때문에)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설명 안에 들어 있는 더 깊은 뜻은 나중에 파헤쳐 보기로 하고 우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없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예 없는 없음 바로 그것이 아니라 무규정적인 것 ㄱ에서 없는 것에 이르는 사이에 들어 있는 무한히 많은 저마다 다른 정도의 빠짐을 지닌 빠진 것들이라고 합시다. 왜 이런 제안을 하느냐 하면 철학의 역사에서 ‘없는 것’을 ‘없음 바로 그것’으로 놓고 벌여 왔던 많은 논쟁이 소모적일 뿐 아무런 생산적인 결론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여기에서 성급하게 한 마디 끼워 넣자면, 없음 바로 그것이나 있음 바로 그것은 학문의 대상이 아니고, 따라서 논쟁거리가 못 됩니다. 학문의 대상은 있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있는 것과 같은 것에서 없는 것과 맞닿아 있어서 없는 것과 같은 것 사이의 무한히 많은 무규정적인 것들입니다. 말하자면 학문은 규정하는 것[definition : 이것을 정의(定義)라고 합니다. 끝, 한계(peras)를 드러내는 작업이라는 뜻이지요.]인데, 우리가 감각을 통해서나 이성을 통해서 파악하는 것이 이미 다 규정되어 있다면 우리는 따로 머리를 싸매고 이것이 무엇이냐? 이것과 저것은 어떻게 다르냐? 따위의 질문을 할 필요도 없고, 따라서 학문의 탐구는 부질없는 노릇이 되고 맙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니, 이야기가 너무 거창해져서 잘못하면 학생들이 허공에 한눈을 팔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저는 다시 그 기타 줄을 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나로 이어져서 50센티미터의 길이를 가지고 있는 강철선 말입니다. 저는 그 기타 줄을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차례로 짚어 튀겨 가면서 말을 이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이 기타 줄에는 무한히 많은 소리들이 숨어 있습니다. 밖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 소리들은 규정되지 않았고, 따라서 겉으로 보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이 기타 줄 안에 소리가 아예 하나도 없을까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여러분은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기타 줄을 차례로 짚어서 튀기면 숨어 있던 소리가 밖으로 나옵니다. 다시 말하면 없던 소리가 생겨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없던 소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요? 줄을 짚어서 튀겼기 때문이 아니냐고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줄을 짚어서 튀긴다는 행위는 무엇을 뜻할까요?”

“그만큼 줄을 끊어 냈다는 것 아닙니까? 잘라 버렸다는 뜻은 아니고요.”

한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저는 뛸 듯이 기뻤습니다. 저는 얼른 맞장구를 쳤습니다.

“그렇죠! 이어진 줄을 어느 부분에서 잘라 낸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이어진 것을 잘라 내면 어떤 일이 생길까요?”

“이어진 것, 연속된 것은 한계가 없다는 점에서 무규정적인 것 아니에요? 그것을 끊어 냈으니 그만큼 한정시켰다는 뜻이겠지요.”

다른 학생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그 학생이 몹시 귀여운 나머지 입이라도 맞추어 주고 싶었습니다. 예쁜 여학생이어서 더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르지요.

“한정시켰다? 좋은 말입니다. 그 결과 무엇이 드러났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이제까지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소리요.”

어느 학생이 곧 대답했지만 그 대답은 제가 바란 대답은 아니었습니다.

“기타 줄이라는 것에 너무 매달리지 말고, 이어져 있는 모든 것, 다시 말해서 길이까지 포함해서 크기를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머리에 떠올려 보세요. 그것들을 끊어 내면 무엇이 나타나지요?”

그제야 학생들은 내가 듣기를 바라는 대답이 무엇인지를 알아챈 듯했습니다.

“아아, 알았습니다. 새로운 끝, 한계, 페라스(peras)요. 맞지요?”

“그렇습니다. 기타 줄을 끊어 내는 순간 이어져 있던 것이 끊어져 숨어 있던 끝이, 한계가 밖으로 드러난 것입니다. 일정한 진폭과 진동수와 음색을 지닌 소리와 함께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어떤 것의 끝이, 한계가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 알면 소리가 되었든 모습이 되었든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이제 문제를 조금 더 단순화시켜서 일차원의 세계에 있는 줄〔line〕을 머릿속에 그려 봅시다. 이 줄을 끊어 내면 거기에서 새로운 끝이 나타나는데, 일차원의 줄이므로 이렇게 해서 얻어 낸 끝〔peras〕은 하나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양쪽에 하나씩 새로운 끝이 생겨났다고 해야 하겠지요. 여기에서 중요한 낱말은 하나라는 낱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앞에서 있는 것은 하나로 있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있는 것이 왜 하나로 있는지 증명해 보이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하나의 끝이 나타나자마자 이것은 규정된 것(끝, 한계가 보인 것)이고 있는 것과 같은 것이 된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자 학생들은,

“어려운데요. 조금만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지요.”

하고 요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학생들의 감각에 호소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제 앞에 있는 교탁을 번쩍 들었다가 제자리에 놓으면서 이렇게 물었습니다.

“여러분, 제가 방금 들어 보인 이 교탁은 한 개지요?”

학생들은 다시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너무나 뻔한 질문을 너무나 진지하게 하는 제 모습이 그렇게 우스웠나 봅니다.

“당연히 하나지요.”

학생들이 대답했습니다.

“정말 하나인 것이 그렇게 당연한가요? 왜 그렇게 당연하지요?”

제가 물었습니다. 학생들은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감각적으로 너무나 분명한 사실에 대해서 되물으니 할 말이 없는 모양이었습니다.

“아까 들어 보였던 것처럼 이 교탁은 삼차원 공간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이어져 있지 않지요? 이 교탁이 놓여 있는 교실 바닥과도 떨어져 있고,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공기와도 떨어져 있지요? 다시 말해서 이 교탁은 이 교탁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과 끊어져 있지요? 그래서 우리는 앞 뒤, 아래 위에서 이 교탁의 끝을, 한계를 눈으로 볼 수 있지요? 이렇게 삼차원에서 다른 어떤 것과도 끊어져 독립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교탁을 하나의 교탁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교탁은 하나로 있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저는 ‘이것은 교탁이다.’ ‘저것은 책이다.’ ‘그것은 연필이다.’와 같이 어떤 것을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것의 끝을 보고, 그 끝에서 다른 모든 것과 떨어져 있어서 하나로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고 설명했습니다. 하나하나가 서로 떨어져 있지 않으면 여럿이라는 말은 쓸 수 없습니다. 하나가 없으면 여럿도 없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초의 하나는 있는 것뿐입니다. 따라서 어떤 것을 하나라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있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셈입니다. 알다시피 하나는 단위입니다. 단위(單位)라는 한자말은 영어로는 유니트(unit)인데, 이 유니트라는 말은 라틴어의 ‘우누스(unus)’, 곧 하나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 우리가 물질의 단위, 생명의 단위, 공간의 단위, 시간의 단위, 운동의 단위, 입자의 단위…… 이렇게 모든 것의 최소 단위를 찾아 헤매는 것은 모든 복합체들이 이 단위, 곧 하나로 되어 있어서, 하나만 찾으면 그 하나로부터 전체를 알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곁다리 이야기는 애초에 플라톤이 데미우르고스를 시켜서 만든, 우주를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늘어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플라톤의 우주로 돌아가기로 하지요. 제가 학생들에게 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앞에서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되는 것’[gignomenon, genesis : 이 말을 흔히 생성(生成)이라고 번역하는데, 독일 말로는 베르덴(werden), 영어로는 비커밍(becoming)으로 흔히 번역하는 것으로 보아 되는 것 또는 됨으로 번역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을 이리저리 버무려 ‘같은 것[tauton〕’과 ‘다른 것[heteron〕’의 띠를 만들고 같은 것의 띠는 밖에 두르고 다른 것의 띠는 같은 것의 띠와 엇갈리게 해서 안쪽으로 둘러 이 우주를 질서 있는 것으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다가 같은 것과 다른 것이라는 말에 걸려 곁길로 새고 말았는데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금 더 하기로 하지요. 플라톤의 우주론에 관해서는 저보다 훨씬 더 지적인 능력이 뛰어난 많은 학자들, 특히 그 가운데서도 영국의 콘포드나 테일러, 또 프랑스의 브리송 같은 사람이 미주알고주알 자세히 해설해 놓은 터라, 제가 거기에 대해서 중언부언한다면, 그것은 마치 잘 그려 놓은 뱀의 몸뚱이에다가 다리를 그려 넣겠다고 부산을 떠는 꼴이 되기 십상일 겁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말하려는 것은 플라톤의 우주론이 지닌 존재론적인 의미(이렇게 쓰다 보니 정말 뭐 같아 보이는데, 겁먹지 않아도 됩니다.)에 연관된 토막 이야기라는 것을 미리 말씀드려 둡니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가 같은 것(또는 같음)의 띠로 둘러싼 이 우주의 밖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시간과 공간을 벗어난, 따라서 운동(또는 변화)도 여럿〔多〕도 없는 초월적인 이데아(idea)의 세계입니다. 플라톤의 ‘이데아’라는 이 괴물은 천의 얼굴을 지닌 데다가 종잡을 수 없는 구석이 하도 많아서 플라톤 자신도 제대로 그 모습을 그려 내지 못하고, 이 괴물을 연구하는 학자들도 오십 보 백 보인지라, 이제까지 이 괴물을 둘러싸고 수십 권(어쩌면 수백 권이 될지도 모릅니다.)의 책, 수천 편의 논문이 나왔지만 아직까지 이 괴물의 정체를 제대로 알았다거나 이 괴물을 사로잡았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습니다. 떠도는 풍문에 따르면 이 이데아라는 괴물들의 왕은 ‘좋음’의 이데아라는데, 그 밑에 무수한 괴물들이 이 왕을 떠받들고 있다고 합니다. 어떤 놈들은 ‘사람’, ‘개’, ‘소’, ‘말’, ‘지렁이’, ‘바퀴벌레’, ‘쇠똥구리’…… 같이 천하기 짝이 없는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어떤 놈들은 ‘아름다움’, ‘참됨’, ‘용기’, ‘중용’, ‘거룩함’…… 따위의 제법 그럴싸한 이름을 지니고 있고, 또 다른 놈들은 ‘큼’, ‘작음’, ‘많음’, ‘적음’, ‘삼각형’, ‘동그라미’…… 같은 시답잖은 이름을 지니고 있다는데, 그 수가 이 우주의 삼라만상에 붙인 이름보다 더 많아서 이 괴물들을 제대로 먹여 살리자면 ‘좋음’이라는 이데아계의 임금이 아무리 마음씨가 곱다 한들 어디쯤까지 좋은 임금님으로 남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와글거리는 이데아라는 괴물들을 하나하나 붙들고 씨름하려 드는 건 마치 산더미처럼 쌓아 놓은 콩더미에서 콩알을 하나하나 골라 내 도끼로 뽀개는 짓과 진배없는지라 그런 일은 다른 할 일이 없는 한가한 분들께 맡겨 두기로 하고, 얼렁뚱땅 ‘이데아라는 놈들은 있는 것(또는 있음)이라는 하나의 괴물 몸에 생긴 두드러기들이다.’ 이렇게 말하고 넘어가기로 합시다. 아무튼 데미우르고스가 이 우주를 만들 때 이 괴물들을 보고, 그놈들을 본떠서 만들었다는데, 이 엉터리없는 이야기 속에 담긴 숨은 뜻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관심을 끄는 문제라는 것만 알고 넘어갑시다.”

세상에!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그것도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신줏단지처럼 모시고 다니면서 그것으로 밥을 벌어먹는 서양 고대 철학 선생이라는 자가 이렇게 제 쪽박 깨는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으니, 앞으로 하는 이야기가 씨알이 안 먹히면 그야말로 욕을 바가지로 얻어먹어 마땅한 노릇이겠지요.

 

 

 

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뒤나미스(dynamis)’와?‘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죄송합니다.?갑자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깨비 같은 낱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낱말 설명을 먼저 합시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힐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 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그리고?‘형상(形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에이도(eido)’에서 나온 것으로?‘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힘’이라고 보면 됩니다.?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에네르게오(energeo)’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함’,?또는?‘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저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뒤나미스’를?‘됨’으로,?또?‘에네르게이아’를‘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상학??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번역입니까??아리스토텔레스가 쓴?‘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글은 본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뒤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다가?‘피지카(physica)’,?곧?‘자연학’이라는 글 뒤에 이 글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냥?‘자연학의 뒤에 있는 것’이라고 분류한 것이 그만 책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 제목까지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른바 형이상학(메타피지카)은 자연학(피지카)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형이상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연학을 공부하라는 뜻에서 자연학 뒤에 이 글이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을 저는 그냥 메타피지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메타피지카에 나오는 중심되는 낱말로?‘뒤나미스’와‘에네르게이아’를 든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고,?이 낱말들,?이 개념들을 통해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재 보자는 뜻에서입니다.?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규정적인 것이 이 철학계의 사부님들 머릿속에서 무엇으로 둔갑하는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고백하지만,?이 강의들은 한두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두고 한 것입니다.?학생들의 골을 빠개지 않고,?저도 숨가빠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 쉬엄쉬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과 제 어쭙잖은 생각이 제 작은 머리통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풀어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피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끝(한계?: peras)’과?‘끝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빚어냈는지,?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이런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입니다.?그러나 저에게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 없이 휘둘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존재론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면서 이런 시덥지 않은 객담을 사이사이 시시콜콜 늘어놓는 걸 보면 저도 누구를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제 꽤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제가 샛길로 빠지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믿는 분에게 두 손을 모으기 바랍니다.?단군 할아버지,?예수님,?부처님,?마호메트님,?조왕신,?호구마마 아무라도 좋습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덤벼 보기로 하지요.?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플라톤의 글은?〈티마이오스〉(Timaios :흔히?‘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입니다.?플라톤이 남긴 글은 대체로 몇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주인공은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는데,?이 글만은 거의 티마이오스라는 사람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소크라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아마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입에 올리던 화제와는 너무도 달라서 짐짓 플라톤이 사부님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어쨌거나 이 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emo[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대충 스치면서 훑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먼저 건축 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이 건축 재료가 무엇인지 압니까??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auton]’과?‘다른 것[heteron]’입니다.?왜 엠페도클레스처럼 우주를 이루는 네 개의 원소[原素?:?이 말도 사실 그리스어로는?‘맨 처음 것’이라는 뜻을 지닌?‘아르케(arche)’나?‘뿌리’, ‘근원적인 것’의 뜻을 지닌?‘리조마타(rhizomata)’를 멋대가리 없이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인 물,?불,?공기,?흙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같은 것’, ‘다른 것’?따위로 만들겠다고 설쳤느냐고요??잠깐!?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그리고 네 개의 원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옵니다.?앞에서 우리는?‘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말을 실마리 삼아 플라톤이?‘같은 것’과?‘다른 것’이라는 말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제 나름대로 한번 미루어 짐작해 보기로 하지요.”

윤구병 그림 1-7

“자,?이제 그림?7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할까요??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자마자 그 사이에 줄을 서기 시작한 그 한없이 많은 괴물들 말입니다.?이 괴물들은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겉모습은 같아 보입니다만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마치 하나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숨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그러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나,?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듯이,?무규정적인 것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 ‘그 다음 놈’, ‘그 다음 놈’,?……?‘있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렇게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의 무규정성에는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있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 같은 것이고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 자기와 가장?‘다른 것’이고,?거꾸로 없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같은 것’,?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다른 것’입니다.?그러니까 무규정적인 것에는 있으나 다름없는 것에서부터 없으나 다름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놈이 다 있는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음으로 거의 꽉 차 있는 놈’, ‘있음이 조금 빠져 있는 놈’, ‘조금 더 빠져 있는 놈’?……?‘있음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놈’으로 짚어 나갈 수 있고,?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으나마나 한 놈’, ‘있음이 조금 들어간 놈’, ‘있음이 조금 더 들어간 놈’?……?‘거의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놈’으로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여러분,?우리가 첫머리에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빠진 것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또 어떤 신혼부부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남편이 이것저것 사들이다가 아내를 돌아다보면서?‘여보,?이제 없는 것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아내가?‘어제까지만 해도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빠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말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