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고상한 ‘존재’와 ‘무’가 아니고 흔해빠진 ‘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왜 고상한?‘존재’와?‘무’가 아니고 흔해빠진?‘있다’, ‘없다’인가?[철학을다시 쓴다]-28-4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질료와 형상 이론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낱말이 있다면 그것은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라는 끔찍한 낱말로 번역된?‘뒤나미스(dynamis)’와?‘에네르게이아(energeia)’입니다.?죄송합니다.?갑자기 생전 듣도 보도 못한 도깨비 같은 낱말들이 마구 튀어나오기 시작하는데 이 낱말 설명을 먼저 합시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하는?‘질료(質料)’라는 말은 그리스어로?‘힐레(hyle)’인데 이것은 본디 집 짓는 데도 쓰이고 배를 만드는 데도 쓰이는 나무,?곧 여러 용도로 쓰이는 목재라는 말에서 나왔습니다.?그리고?‘형상(形相)’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에이도스(eidos)’인데 이 말은?‘눈으로 본다’는 그리스 동사?‘에이도(eido)’에서 나온 것으로?‘본 것’, ‘모습’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그리고?‘가능태’라고 서툴기 짝이 없게 번역된?‘뒤나미스’는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또는 무엇이 될 수 있는?‘힘’이라고 보면 됩니다.?다만 그것으로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에서 크게 보아 무규정적인 것[apeiron]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또?‘현실태’라고 번역된 말(이런 말을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쓰나요?), ‘에네르게이아’는 그리스 동사?‘에네르게오(energeo)’에서 나온 말로 무엇을?‘한다’는 동사의 뜻을 그대로 이어받아 무엇을?‘함’,?또는?‘작용’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저라면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아리스토텔레스의?‘뒤나미스’를?‘됨’으로,?또?‘에네르게이아’를‘함’으로 번역하고 싶습니다만 주제넘은 것 같아서 이 이야기는 길게 하지 않겠습니다.)?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形而上學?:?형이상학??이건 또 무슨 개뼈다귀 같은 번역입니까??아리스토텔레스가 쓴?‘메타피지카(metaphysica)’라는 글은 본래 제목이 붙어 있지 않았는데 뒤에 로도스의 안드로니코스라는 사람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글들을 정리하다가?‘피지카(physica)’,?곧?‘자연학’이라는 글 뒤에 이 글의 원고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그냥?‘자연학의 뒤에 있는 것’이라고 분류한 것이 그만 책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 보통 하는 이야기입니다만 박홍규 선생님은 이 책 제목까지도 허투루 받아들이지 않고, ‘우리에게 이른바 형이상학(메타피지카)은 자연학(피지카)을 모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따라서 형이상학을 공부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먼저 자연학을 공부하라는 뜻에서 자연학 뒤에 이 글이 붙어 있는 것이다.’라고 힘주어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을 저는 그냥 메타피지카라고 부르겠습니다.?이 메타피지카에 나오는 중심되는 낱말로?‘뒤나미스’와‘에네르게이아’를 든 까닭은 다른 데 있지 않고,?이 낱말들,?이 개념들을 통해서 플라톤의 형이상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사이에 가로놓인 거리를 재 보자는 뜻에서입니다.?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있는 것과 없는 것과 무규정적인 것이 이 철학계의 사부님들 머릿속에서 무엇으로 둔갑하는지를 아는 데도 큰 도움이 됩니다.”

이제 고백하지만,?이 강의들은 한두 시간에 한 것이 아니라 여러 날을 두고 한 것입니다.?학생들의 골을 빠개지 않고,?저도 숨가빠 헐떡거리지 않기 위해 쉬엄쉬엄 하는 것이 필요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 되겠지요.?옛 그리스 철학자들의 생각과 박홍규 선생님의 생각과 제 어쭙잖은 생각이 제 작은 머리통 속에 뒤범벅이 되어 있어서 이것을 풀어내는 데도 적잖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아무튼 저는 학생들에게 플라톤 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고,?피타고라스학파의 입에서 나온?‘끝(한계?: peras)’과?‘끝없는 것(무규정적인 것?: apeiron)’이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어떻게 다르게 받아들여졌으며,?아리스토텔레스가 자기 철학 안에 노동(작업,?함?: energeia)을 받아들여 이것,?저것을 어떻게 쪼개고(분석하고),?울타리를 두르고(범주화하고),?빚어냈는지,?그리고 이 사부님들의 노력이 베르그송이라는 프랑스 형이상학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제가 알고 있다고 믿는 대로 이야기하고자 했습니다.?이런 생각이 얼마나 황당한 것이었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입니다.?그러나 저에게도 할 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박홍규 선생님 밑에서 정신 없이 휘둘리는 동안 마치 메피스토펠레스 손에 놀아난 파우스트처럼(비유가 너무 거창했나요?)?제 간덩이가 저도 모르게 한껏 부어올랐으니 말입니다.?존재론이라는 걸 이야기한다면서 이런 시덥지 않은 객담을 사이사이 시시콜콜 늘어놓는 걸 보면 저도 누구를 닮아 가는 모양입니다.

각설하고,?저는 학생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이제 꽤 어려운 길에 접어들었습니다.?제가 샛길로 빠지거나 길을 잃거나 발을 헛디디지 않도록 여러분들이 믿는 분에게 두 손을 모으기 바랍니다.?단군 할아버지,?예수님,?부처님,?마호메트님,?조왕신,?호구마마 아무라도 좋습니다.

먼저 플라톤에게 덤벼 보기로 하지요.?제가 지금부터 하려는 이야기와 관련된 정보가 가장 많이 들어 있는 플라톤의 글은?〈티마이오스〉(Timaios :흔히?‘우주론’으로 번역됩니다.)입니다.?플라톤이 남긴 글은 대체로 몇 사람이 이야기를 주고받는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주인공은 소크라테스로 되어 있는데,?이 글만은 거의 티마이오스라는 사람의 독백으로 이루어져 있고,소크라테스는 입도 벙긋하지 못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아마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이 소크라테스가 평소에 입에 올리던 화제와는 너무도 달라서 짐짓 플라톤이 사부님은 한쪽으로 제쳐놓고 자기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어쨌거나 이 글을 보면 데미우르고스(Demiourgos :이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demo[짓는다]를 의인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라는?‘일하는 하나님’(?)이 나옵니다.?이 우주 밖에 사는 우주마왕은 머리를 짜내서 우리가 사는 이 우주를 만들어 내는데,?대충 스치면서 훑어보자면 이렇게 만들어 냅니다.?먼저 건축 자재가 있어야 하겠지요.?이 건축 재료가 무엇인지 압니까??놀라지 마십시오. ‘같은 것[tauton]’과?‘다른 것[heteron]’입니다.?왜 엠페도클레스처럼 우주를 이루는 네 개의 원소[原素?:?이 말도 사실 그리스어로는?‘맨 처음 것’이라는 뜻을 지닌?‘아르케(arche)’나?‘뿌리’, ‘근원적인 것’의 뜻을 지닌?‘리조마타(rhizomata)’를 멋대가리 없이 번역해 놓은 것입니다.]인 물,?불,?공기,?흙 같은 것으로 만들지 않고 추상적이기 짝이 없는?‘같은 것’, ‘다른 것’?따위로 만들겠다고 설쳤느냐고요??잠깐!?여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습니다.?그리고 네 개의 원소 이야기는 나중에 또 나옵니다.?앞에서 우리는?‘같다’, ‘다르다’는 말이 논리적으로 참과 거짓을 가리는 문장에서는?‘이다’, ‘아니다’와 같은 뜻으로 쓰이며, ‘이다’, ‘아니다’를 뒷받침하는 근거는 바로?‘있다’, ‘없다’에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이 말을 실마리 삼아 플라톤이?‘같은 것’과?‘다른 것’이라는 말로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제 나름대로 한번 미루어 짐작해 보기로 하지요.”

윤구병 그림 1-7

“자,?이제 그림?7을 다시 한 번 보기로 할까요??있는 것과 없는 것이 서로 맞닿자마자 그 사이에 줄을 서기 시작한 그 한없이 많은 괴물들 말입니다.?이 괴물들은 모두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무규정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겉모습은 같아 보입니다만 꼼꼼히 얼굴을 뜯어보면 하나도 같은 것이 없습니다.?마치 하나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숨어 있다.’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을지라도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저마다 다른 소리로 떠오르는 것과도 같습니다.?그러나 기타 줄에 숨어 있는 소리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나,?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차례차례 짚어 가면서 튀겨 내면 높은 소리에서 낮은 소리에 이르기까지 질서 있게 배열되어 있듯이,?무규정적인 것도 그것이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의 어느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 ‘그 다음 놈’, ‘그 다음 놈’,?……?‘있는 것’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고‘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렇게 순서에 따라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다시 말해서 무규정적인 것의 무규정성에는 단계가 있다는 뜻입니다.?있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 같은 것이고 없는 것에 맞닿아 있는 놈이 자기와 가장?‘다른 것’이고,?거꾸로 없는 것 쪽에서 보면 자기와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같은 것’,?있는 것과 맞닿아 있는 놈이 가장 자기와?‘다른 것’입니다.?그러니까 무규정적인 것에는 있으나 다름없는 것에서부터 없으나 다름없는 것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놈이 다 있는데 있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음으로 거의 꽉 차 있는 놈’, ‘있음이 조금 빠져 있는 놈’, ‘조금 더 빠져 있는 놈’?……?‘있음이 거의 다 빠져 나간 놈’으로 짚어 나갈 수 있고,?없는 것을 기준으로 삼으면?‘있으나마나 한 놈’, ‘있음이 조금 들어간 놈’, ‘있음이 조금 더 들어간 놈’?……?‘거의 있음으로 가득 차 있는 놈’으로 이름 붙일 수 있습니다.?여러분,?우리가 첫머리에서?‘없는 것이 있다.’는 말이?‘빠진 것이 있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고 이야기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또 어떤 신혼부부가 살림살이를 장만하는데 남편이 이것저것 사들이다가 아내를 돌아다보면서?‘여보,?이제 없는 것이 뭐지?’?하고 물었을 때 아내가?‘어제까지만 해도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제 빠진 것이 거의 없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다면 이 말에도 같은 뜻이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