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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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3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0과 1>에 덧붙임

0과 1의 논의에서 빠뜨려서는 안 되는데, 빠뜨린 사람이 있어요. Spinoza와 형이상학의 측면에서 본 Marx의 이론입니다. 저, 학사학위 논문을 스피노자의 Ethica, 석사학위 논문을 Epicuros 이론을 주제로 삼아 썼어요. Ethica는 다시 정독하고 싶고, 막스의 자본론은 나름으로 제법 꼼꼼히 정독했는데, 막스가 고대원자론자, 특히 에피쿠로스의 사상을 바탕으로 유물론을 완성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지만, 막스 이론에 끼친 스피노자의 이론은 제가 알기론 우리 나라에서 크게 주목하는 사람이 없는 것 같아요. 서양 철학계의 동향은 잘 모르겠어요.

막스의 ‘물질이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 ‘상부구조’와 ‘하부구조’에 대한 언급은, 거슬러 올라가면, 고대원자론자들의 세계 인식에 닿아 있지만, 제가 보기에 길잡이 구실은 스피노자가 하지 않았나 싶어요. 스피노자가 말한 ‘natura naturans’와 ‘natura naturata’ 기억하시죠? 제 기억에 ‘能産的 自然’, ‘所産的 自然’으로 번역된 것 같은데, 아마 일본 사람들 번역이 아닐까 싶어요. ‘Philosophia’를 ‘철학’으로 옮겨 놓은 것도 그 사람들이지요.

이 말, natura naturans를 ‘자연스럽게 하는 자연’으로, natura naturata를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으로 옮겨도 될 것 같아요. 이때 ‘자연스럽게 하는 것’(naturans)은 힘이에요. 이 힘은 동시에 ‘생성’하는 힘이기도 하고 ‘소멸’하는 힘이기도 하지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줄을 꼬는 힘을 가리킨다고 봐요. 이 운동의 저 밑바닥, ‘없는 것이 없을 것’과 하나가 되는, ‘없음’에 닿는 그 ‘한계점’(tangent)에서 이 운동의 저 꼭지점 ‘있는 것이 있을 것’과 둘이 아닌 ‘있음’에 닿는 그 ‘한계점’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생성과 소멸을 관장하는 2중의 힘이 작용하는데, 이 ‘확산’하고, ‘응축’하는 두 힘이 ‘평형’을 이루는 ‘마디’에서 우리의 감각과 의식에 주어지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자연’이 아닌가 해요. 이 ‘마디’는 저마다 ‘페라스’를 나타내지요. 겉으로, 밖으로 드러나는 ‘페라스’이기도 하고, ‘기억’(m′emoir)으로 드러났다 ‘망각’(oblibium-이 철자 맞나요?)으로 사라지는 한계점에서 형성되는 ‘페라스’이기도 해요. 크게 보면 모두 힘으로 ‘있는 것’ 1과, 힘으로 ‘없는 것’ 0의 접합점(tangent)에서 나타나는 ‘동요하는 평형’(equilbrium)이라고 볼 수 있어요.

당구를 쳐 본 사람은 두 당구공이 한 점에서 맞닿아 있을 때, ‘떡’이다, 아니 ‘스위치’다 하고 서로 옥신각신하는 모습을 많이 보았을 거예요. ‘페라스’로 얼핏 드러나는 이 ‘점’은 ‘페라스’가 아니에요. 이 ‘점’은 빨간 공에도 안 속하고 하얀 공에도 안 속해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제3의 무엇이에요. 이것을 우리는 ‘아페이론’이라고 해요. 아무것도 아니면서 이것과도 잇닿아 있고, 저것과도 잇닿아 있는, 그러면서 여기에 붙는가 하면 저기에도 붙는, ‘시간’의식과 ‘공간’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원초적인 힘, 생성과 소멸의 측면에서 보면 naturans인데, 드러난 현상으로 보면 naturata인 것, 1에서 0에 이르는, 또는 0에서 1에 이르는 각각의 무한한 단계와 과정에서 꼬이고 마디를 이루는 ‘평형’을 드러내는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의 새끼꼬기, 여기에서 1을 원동자로 보느냐, 0을 원동자로 보느냐에 따라 ‘형이상학’과 ‘세계관’이 달라지는데, 제가 섣불리 입을 놀리자면 ‘기독교’는 1에 붙고, 불교는 0에 붙어요. 그렇게 보여요.

막스는 베르그송이나 마찬가지로 2원론자예요. 그런 점에서 베르그송보다 앞서요. ‘의식’과 ‘물질’ 다 인정해요. 다만 ‘물질’의 힘을 더 크게 보아요. 막스를 ‘유물론자’로 보는데, 크게 보면, ‘물질의 규정성이 의식의 규정성에 앞선다’는 뜻에서 그렇게 비치는 거예요. 밑에서 올라오는 힘을 더 크게 보았는데, 그 힘의 근원이 1에 있다기보다 0에 있다는 것, 아주 비속하게 ‘인간학적’ 관점에서 보자면 ‘없는 놈’의 숨은 힘이, ‘있는 놈’의 드러난 힘보다 더 쎄다는 것을, ‘없는 것’이 ‘있는 것’을 이긴다는 것을, 인간적인 ‘결핍’과 ‘과잉’, ‘있을 것’(아직 ‘없는 것’), ‘없을 것’(군더더기로 ‘있는 것’)의 관계에서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세상 만들자.’ 그게 인간이 바랄 수 있는 최상의 ‘평형’이라고 외치는 것뿐이에요. 이 지향점은 ‘오래된 미래’를 꿈꾸었던 노자의 ‘과민소국’, 아주 조그마한 마을 공동체예요. 그 세상 오면 ‘먹물’들 아무짝에도 쓸모없어져요. ㅎㅎ

 

*다시 0과 1에 덧붙임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 1이 되는 지점에 ‘한계’(peras)로, 허공 속에 매달려 있다는 이야기했나요? 이렇게 뭉뚱그려 말한 적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가 되는 지점은 무얼 가리킬까요? 여기에서는 ‘있는 것’, ‘하나’, 1이 앞섭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이야기했던 ‘스스로는 안 움직이면서 움직이게 하는 것’, ‘정지’이면서 ‘운동’의 원인이 되는 것, ‘순수형상’, ‘일자’(―者), 신, ‘하나님’이 앞서지요. 그러나 거기에 달라붙어 있는 ‘있을 것’은 ‘없는 것’입니다. 있어야 마땅하지만 아직은 없는 것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요청이고, 당위이고,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유의 한계이자, 우주의 한계인 이 ‘있음’ 밖에 또 하나의 한계가 있습니다. ‘있음’이 허공에 감싸여 있다면, 또 하나의 ‘페라스’인 ‘없음’은 ‘있는 것’에 감싸여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빠지고 또 빠져서 더 이상 ‘빠진 것’이 없는 텅 빈 그 무엇, 0집합, 무한한 것, ‘무규정적인 것’, ‘아페이론’의 극한에 자리 잡고 있다고 했습니다.

플라톤은 ‘티마이오스’(Timaeus) 편에서 이 ‘없음’이라는 한계를 우주의 중심에 놓습니다. ‘있음’이, 1이 확장의 한계선이라면, 모든 ‘생성’이 그 한계선에서 이루어지고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는 울타리라면, ‘없음’은, 0은 ‘소멸’이 그 한 점에서 멈추는 응축의 한계점입니다.

‘있음’이 ‘파이’(π)라면 ‘무산소수’의 바깥 테두리라면, ‘없음’은 보이지 않는 점입니다. (‘소수’(prime number)는 1과 0 사이에, 무한히 흩어져 있습니다. 이 ‘소수’가, 그 가운데서도 가장 큰 ‘소수’가 어느 날 슈퍼컴퓨터의 연산 작업으로 발견될지 모른다는 수학자들의 꿈은 수의 영역을 0과 1이 거꾸로 뒤집힌 10진법을 자연의 질서로 받아들인 야바위 놀음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피타고라스가 모든 ‘형상’(idea)을 수로 환원시킬 때, 그리스 수학에는 0이 도입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10을 3으로 나눈다는 터무니없는 셈법은 자리를 잡을 수 없었습니다.)

‘없음’은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한점으로 수렴되는 극한입니다. 이 극한과 맞닿아 있는, 어떤 것도 두 번 되풀이되지 않고, 어떤 순간도 두 번 지속되지 않는 이 한계점 바로 위에서 ‘여럿’은 숨은 채로 드러납니다. ‘있음’에서는 ‘있을 것’(없는 것)이, ‘결핍’이, ‘빠진 것’이 드러날 듯 숨어 있는 것과 달리, 이 지점에서는 ‘없을 것’(있는 것)이, ‘군더더기’들이, ‘과잉’이 ‘생성’의 이름으로 ‘평형’을 깨면서 이루는, ‘에셔’(Mauris Cornelis Escher)가 ‘올라가면서 동시에 내려가고, 내려가는 길이 올라가는 길’을 그린 그림에서, ‘뫼비우스의 띠’와 ‘클라인씨의 병’이 안과 밖의 경계를 허무는 ‘모순의 통일’을 드러내는 그림에서 보여 주는 ‘혼돈’(chaos)이 싹틉니다.

‘드러날 듯이 숨어 있는 모순’과 ‘숨은 채로 드러나는 모순’이 ‘있는 것’을 ‘없음’의 극한까지 끌어내리는 ‘하강운동’을 일으키고, ‘없는 것’을 ‘있음’의 극한까지 끌어올리는 ‘상승운동’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무한히 올라가고 내려가면서 뒤틀리는 매듭, 마디마다 무한히 겹쳐 쌓이는 ‘흔들리는 평형’(equilbrium)의 연속 계단을, 크고 작은, 많고 적은 단계를 우리의 감각과 사고에 드러냅니다. 이 ‘매디’는 ‘마야의 베일’에 싸인 채로 우리에게 ‘현상’으로, ‘사유’의 파편으로 드러나지요. 감각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고, 의식에 직접 주어지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마야의 베일’은 때로는 ‘흉내’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견해’로, ‘판단’으로, ‘말’로, ‘거짓’으로, ‘속임수’로, ‘믿음’으로 드러나면서 숨고, 숨으면서 드러납니다.

어쩌면 철학은 사람이라는 별난 생성과 소멸의 모순된 응결체가 생명의 탈을 쓰고 벌이는 가장 그럴싸한 거짓과 속임수의 말놀음일지도 모르고, 그 안에서 종교라는 아편을 키우고 있는 ‘믿음을 통한 세상 편가르기’의 빌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로 이 순간에 이 자리에서 내가 여러분의 뒤통수를 목침으로 내려치고 있다면, 이에 대한 여러분의 직각적인 반응은 어떻게 나타날까요? 여러분이 미처 통증을 느끼기도 전에 까무라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입에서 이런 말이 튀어나와야겠지요.

‘아파, 이 씨팔놈아! 너 죽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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