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 [철학을다시 쓴다]-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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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과 1?[철학을다시 쓴다]-30-2

 

 

윤구병(도서출판 보리 대표)

 

*이 글은 보리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임을 알립니다.

이제부터 제 이야기할게요.

1을 우리의 의식 안에서 형상화할 수 있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있는 것’, ‘하나로 있는 것’(기독교에서는 ‘有-神’이라고 부르죠.)을 1로 표기합시다.

0도 우리 생각 속에 들어오는 측면에서만 받아들입시다. ‘없는 것’이라고 합시다. 그리고 ‘없는 것’도 있다고 칩시다.

‘있는 것’ 하나, ‘없는 것’ 하나(없는 것을 하나로 놓는 건 무리가 있지만 어쨌던 극한치에서 볼 때는 하나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러면 1+0=2가 돼요. 이때 ‘+’(더하기, 보태기)는 1과 0을 맺어 주는 구실을 하지요.

그런데 +는 실체가 없어요. 기능이에요. 운동이지요. 맺어 주는 그 무엇이지요. 제3의 것이에요. 1과 0을 떼어놓으면서 이어주는 것. 그러면서 1도 0도 아닌 것, 이게 바로 ‘아페이론’ 이지요. ‘아페이론’의 성격 아주 복잡해요. 복합적이에요. 이게 바로 ‘운동’의 근거인데, 따지고 보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것이란 말이에요.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이에 들어 이 우주를 움직이고, 생성과 소멸의 근거가 돼요. 이렇게 볼 수도 있어요. 결국 없는 것은 그 자체의 규정상 없는 것이니까 아무런 힘도 없다. 있는 것만이 두 순간 이상 지속되어 공간 표상인 모습을 드러낼 수 있고 두 번 이상 반복되어 공간화될 수 있는 것 아니냐. 있는 것만이 공간을 차지할 수 있고, 운동할 수 있다. 공간과 시간의 근거는 있는 것에 있다. 여기까지가 상식의 영역이에요. 누구나 이렇게 말할 수 있어요. 그러나 형이상학은 바로 그래서 욕을 바가지로 먹지만 몰상식에서 출발해요. 눈 믿지 마라, 귀도, 코도, 입도, 혓바닥도, 니 살갗을 자극하는 그 어떤 감각도 믿지 마라, 이거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이에요. 데모크리토스도 같은 말을 해요. 기독교에서도, 불교에서도, 이슬람교에서도 같은 말을 해요. 덧붙이는 말만 달라요. ‘믿어라’, ‘끝까지 왜냐고 물어라.’

철학은, 그 가운데서도 형이상학은 ‘아이티올로기’(aitiology), ‘원인학’이라고 부르잖아요. ‘끝까지 왜냐고 따지고 물어라’고 하잖아요. 죽을 때까지? 그건 모르겠어요. 그런 삶 행복할 것 같지 않아.

또 곁길로 들어서는데, 다시 ‘제3자’의 문제로, ‘아페이론’으로 돌아갑시다.

1+(+)+0=3

우리는 1과 0, ‘있는 것’과 ‘없는 것’에서 2를 끌어냈어요. ‘여럿’의 최소단위가 끌려나온 거예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갈라놓아야 한다. 무언가 사이에 들어 이것들이 이어지지 않게 끊어놓아야 한다. 그러려면 그놈은 한편으로는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어서 둘을 갈라놓고 또 한편으로는 이 둘이 관계를 맺을 수 있게 ‘있는 것’에도 끼어들고, ‘없는 것’에도 끼어드는 뚜쟁이 구실을 맡아야 한다. 이 역할을 ‘아페이론’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어요.

새끼를 꼬는 것, 초끈을 만드는 것, 시간과 공간을 가르고 운동과 정지를 주관하는 것, 다 이 3에게, 아페이론에게 떠넘겨요. 그런데 도무지 그 구실을 맡을 필연성이 아페이론에게는 없어요. ‘있는 것’과 ‘없는 것’이 관계 맺을 필연성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예요. ‘상승운동’만 있다면, ‘하나님’이 ‘무’에서 이 세상을 창조한 것으로만 본다면, 문제가 간단하죠.

빠방, 이게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이고, ‘부동의 원동자’이고, 기독교의 ‘하나님’. ‘유일신’이죠.(이런 측면에서 베르그송은 대안이 아니에요. 2원자론자이거든요. 하나밖에 없는 세상 인정 않거든요.)

어떻게 해서든 ‘없는 것’도 힘이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아페이론의 힘이 ‘있는 것’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라 ‘없는 것’에서도 나온다고 가정해야 해요. ‘생성’의 힘 못지않게 ‘소멸’의 힘도 받아들여야 해요. 그러면 이런 질문이 나오겠죠? ‘도대체 당신이 이야기하는 ‘없는 것’의 정체가 뭐야?’

묻고 캐고 할 것 없어요. 있다는 거예요. 한마디로 ‘없는 것’이 ‘있다’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다고요? 그러면 다 있게 돼요. 다라는 말은 ‘여럿’ ‘모두’라는 말이에요.

여럿 모두에는 ‘없는 것’도 들어가요. (유식하게 말하면 0집합도 집합이라는 말이에요. 칸토르가 이야기하는 ‘무한집합’도 ‘집합’이에요.)

있는 것과 없는 것에 대한 분석은 ‘있을 것’과 ‘없을 것’이라는, 그 안에 ‘운동’, ‘미래’, ‘당위’까지 들어가 있는 모순되는 개념의 분석만 빼고, 제가 얼마쯤은 제 미완의 반쪽 이론 <있음과 없음>에 지겹도록 해 놓았어요. 관심 있는 분은 참고하세요.

‘없는 것이 있다’? 이게 무슨 말이에요? ‘빠진 것이 있다’는 말이에요. 빈 것, 빠진 것, 이게 ‘이것’과 ‘저것’을 갈라놓아요. ‘이제’와 ‘저제’를 나누어요. ‘여기’와 ‘저기’를 다른 곳으로 바꾸어요. 여기 있는 것이 저기에 없다, 이제 있는 것이 저제 없었다.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은 이것에 빠진 것이 저것에 있고, 저것에 빠진 것이 이것에 있다……. 이렇게 돼요. 빠진 것이 하나도 없으면 모두 같은 것이 되고, 같은 것은 하나가 돼요. 수학에서 말하는 ‘합동’이죠. ‘하나’밖에 안 남아요.

‘있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없는 것’으로 ‘하나’가 되든, 하나가 되는데, 이걸 헤겔은 ‘순수 유’(reine Sein), ‘순수 무’(reine Nichts)로 보아 ‘개념의 운동’에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으로, ‘똥친 막대기’로 그게 그거다 하고 개무시해 버리죠. 입도 뻥긋할 수 없는 거 뭐에다 쓰느냐는 거죠.

‘아페이론’은 ‘없는 것이 있다’는 전제가 없으면 있을 필요가 없어요. 존재가치가 없어요. ‘없는 것이 얼마나 있느냐’? ‘빠진 것이 얼마나 되느냐’? 여기에서 양적인 규정이 나와요. 수치화될 수 있어요. 헤겔은 빠진 것의 양이 질을 규정한다고 봐요. 이른바 ‘양질전화의 법칙’이죠. 현대 물리학자들도 다 그렇게 봐요. 그래야 잴 수 있고, 수치화할 수 있고, 증명이 가능하니까요.

‘왜 없지’? ‘왜 빠졌지’? ‘뭐가 빠졌지’? 가끔 묻죠. 정지가 빠졌어? 운동이 빠졌어? 이런 질문 안 해요. 그냥 정지하지 않았어?? 그럼 운동하고 있구먼, 운동하고 있지 않아? 그럼 제자리에 머물러 있구먼, 이렇게 여겨요. 그게 ‘관성의 법칙’으로 둔갑해요.

자, 이제 1과 0의 극한치인 ‘정지’, ‘한계’(peras)의 최고 영역을 다시 살펴보기로 하지요. ‘있음’은? ‘있는 것’과 ‘있을 것’이 하나로 뭉친 지점입니다. ‘있을 것’이 ‘있는 것’이고, ‘있는 것’이 바로 ‘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운동이 사라집니다. 변화가 없습니다. ‘없음’은 ‘없는 것’과 ‘없을 것’이 하나인 지점이지요. 역시 여기서도 운동이 사라집니다. 양쪽 모두에서 크기도 사라집니다. 따라서 시간도 공간도 여기서는 자리 잡을 곳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식과 현상계에서 겪는 온갖 변화와, 상승운동(없음→있음)과 하강운동(있음→없음)의 ‘평형’(equilibrium)상태에서 나타나는 공간지각은 모두 있음과 없음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인간세상을 우리는 ‘이상향’이라고 부릅니다. ‘유토피아’지요. 어디에도 없으니까 outopia입니다. 있을 것만 있고 없을 것은 없는 이 ‘평형’상태에서는 현상계는 모두 사라집니다. 생명계는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들숨과 날숨으로 이루어진 ‘목숨’도 없고, 몸을 이루는 모든 것 움직일 길이 없습니다. 의식도 마비됩니다.

이 ‘평형’이라는 말 ‘이퀼리브리움’(equilibrium)이라는 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상승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하강운동’만 있는 곳에서도 ‘평형’이라는 말 자리 잡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평형’이 없으면 공간지각이 생겨날 수 없습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아주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됩니다.

먼저 ‘빠진 것’(privatio)부터 살펴봅시다. ‘군더더기’는 뒤에 이야기하기로 하지요. ‘빠진 것’은 ‘없는 것이 있다’는 말로도 드러낼 수 있고, ‘있을 것이 없다’는 말로도 드러날 수 있습니다. ‘아페이론’의 두 가지 측면입니다. ‘있을 것’은 현상적으로 보면 ‘없는 것’입니다. 아직 없는 것이지요. 그런데 단순히 ‘없는 것’은 운동이 배제된 개념이지만 ‘있을 것’으로 ‘없는 것’은 운동을 전제합니다. 있음으로 가는 ‘상향운동’이 이 말 밑에 깔려 있습니다. ‘있을 것’을 ‘있는 것’으로 현실화시키는 힘은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원동자’인 ‘순수형상’ Eidos, 1者, 神에게서 나옵니다. ‘무로부터 창조하는’ creatio ex nihilo가 작동하는 것이지요. 문제는 이 ‘nihil’이 아예 없는 것이냐, 순수질료로서 있는 것이냐 입니다. 순수질료로서 어떤 형상도 지니지 않은 것, 그러나 ‘없음’ 그 자체는 아니고 chaos 형태로 있는 것, 두 순간 지속되지 않고, 두 번 반복되지 않는 어떤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아리스토텔레스도 베르그송과 마찬가지로 2원론을 밑에 깔고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논의를 더 진행하기 전에 ‘군더더기’로 ‘있는 것’을 잠깐 살피지요.

이 ‘군더더기’는 ‘없을 것이 있다’는 말로 표현됩니다. ‘없을 것’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더더기’이기 때문에 없애야 하는 것, 없는 것으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없는 것이 없다’→‘다 있다’, 그리고 이것은 모두 신의 창조물이다 라는 관점에 서면 ‘군더더기’, ‘없을 것’은 없습니다. 그 나름으로 평형상태를 이룹니다. 여기에서 하나라도 빼면, 없애면, 곧 ‘빠진 것’(privatio)이 생기고, 이것은 ‘결핍’으로 나타납니다. 운동과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것은 ‘하강운동’을 뜻합니다. 현상유지가 필요하다는 것은 신의 의지가 됩니다. 어떤 것도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바꾸는 것은 결핍을, ‘빠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강운동’의 관점에 서면, 빠질 것이 있어야 합니다. ‘빠질 것’, ‘없을 것’은 ‘군더더기’로, 삶에 장애가 되는 것으로, ‘과잉’으로 드러납니다. ‘없을 것’을 없애는 힘, ‘있는 것’을 ‘없는 것’으로 바꾸는 힘, ‘형상’(eidos)을 ‘질료’(hyle)로 변화시키는 운동은 신인 ‘하나’, 1者에서 나올 수 없습니다. 저 밑바닥에서 끌어당기는 힘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아예 없는 것’, ‘없음’ 그 자체에는 그 힘도 없습니다. ‘없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이른바 ‘무’의 ‘존재성’(유식한 말이어서 철학하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해야 더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겠지요?^^)이 인정되어야 합니다. 0은 그냥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는 것’으로 ‘있는 것’입니다. 그게 힘으로 나타납니다. 변화와 운동을 불러일으키는 또 하나의 근본원인, ‘하강운동’을 이끄는 중력 구실을 합니다.

그러나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그 안에 모순을 안고 있기 때문에, ‘페라스’에 익숙해 있는 우리 사고는 이 말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렇지만 운동의 원인이 ‘모순’에 있다는 말은 낯설지 않을 겁니다. ‘있는 것이 없다’는 말과 ‘없는 것이 있다’는 말은 우리가 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있는 것이 없다’→‘하나도 없다’, (이 말이 神을 부정하는 말로 들릴 수도 있겠습니다.), ‘없는 것이 있다’→‘빠진 것이 있다’(이 말은 얼핏 들으면 단순한 privatio를 뜻하지만,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도 담겨 있습니다.)

‘아페이론’은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을 엮어서 하나의 가닥으로 꼬는 ‘2중나사’입니다. ‘초끈’으로 보아도 좋고, ‘새끼줄’로 보아도 상관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꼬인 자리마다 순간적인 때로는 ‘지속’되고, ‘반복’되는 ‘평형’상태가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지속’ 속에서 시간성이 드러나고, ‘반복’ 속에서 공간성이 확보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3자인, 1과 0사이에 있는 아페이론의 성격입니다.

베르그송의 ‘물질’과 ‘기억’은 각 단계에서 무수히 드러나는 이 꼬임을 반영합니다. 이 꼬인 자리, 꼬임의 순간에 ‘비약’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삶’으로의 비약, 생성의 비약일 수도 있고 ‘죽음’으로의 비약, 소멸의 비약일 수도 있습니다. ‘e′lan d′amour’는 동시에 그 안에 ‘e′lan de mort’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평형’으로, ‘페라스’로, 겉, 끝, 갓으로 드러나는(모두 같은 어원을 가진 말입니다.), 현상계, 생명계와 물질계의 다양한 모습 뒤에는 그렇게 드러나게 하는 힘이 작용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아페이론’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에서는 그것을 ‘무’로, ‘공’으로 보기도 합니다. ‘아페이론’이 일시적으로 ‘평형’상태를 이룰 때, ‘상승운동’과 ‘하강운동’이 형평을 이룰 때, 우리의 의식과 감각에 ‘페라스’의 형태로 현상계가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어디서 ‘평형’을 이루는지, 또 이룰지 우리는 예측할 수 없습니다. 느닷없는 순간, 느닷없는 곳에서 그 ‘평형’은 제 모습을 드러냅니다. 이것이 Lucretius가 말하는 ‘원자의 경사운동’이고, 쟈끄모노가 이야기한 ‘우연’이고, 우리가 가슴 내밀고 뽐내는 ‘자유의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마나한 소리로 여러분들 귀한 시간 빼앗고, 귀 어지럽혀 미안합니다. 이따가 술이나 풉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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