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사 :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젝과 정신분석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본 사상가는 지난 6월말에 한국을 다녀갔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이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강좌 수료식으로 인해 더욱 짧아진 강의시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옷을 입은 지젝이 어떻게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명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라캉, 헤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 시대가 앓고 있는 ‘환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종횡무진 들추어내고 분쇄하는 지젝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다시 레닌을 호명한다. 그는 의식과 가치관마저 규격화된 이 세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다르게 사유하고 행동하자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점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들을 자격이 있는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병창 교수는 먼저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강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자아’를 강조하거나 ‘치료’를 중시하는 병리적 관점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삼아 개인의 활동성을 확장하는데 정신분석의 주안점을 둔다. 또한 라캉은 욕망이란 사실 나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그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론을 개진했다. 또한 고통과 쾌락이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는 ‘욕망의 이중성’을 강조한 것도 라캉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이 라캉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신경증 환자가 자유연상을 통해 늘 도착하게 되는 어떤 지점, 바로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매듭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환자는 그것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며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그것에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바로 그곳이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곳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의 한계선과 어떤 틈, 균열, 갈등을 드러낸다. 또한 그 지점은 이 세계가 어떤 상징적 가치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보여주는 곳이자 자아가 욕망으로 드나드는 출입구이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즉,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 그곳이라면, 언어가 분리되거나 신체가 마비되거나 노이로제에 걸리는 환자의 모든 증상은 이런 욕망의 분출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라캉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환자는 이런 ‘증상’을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지점은 환자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 분열된 틈을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을 겪어 내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삶의 성취를 쌓아온 것은 아닐까요?”

 

‘환상’과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러한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에 적용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론은 법철학을 비판(마르크스)하고, 물신론(루카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그람시), 호명이론(알튀세르)을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연적인 기호(바르트)로서 이데올로기를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앞서 설명한 ‘틈과 균열’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매끄럽게 만드는 허위의식과 ‘환상’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부르며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비판했다. 곧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 가족 내부에서 사랑과 계약의 대립 같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정신병적인 환상이자 그 틈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메우는 장치”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나치가 스스로 증폭시켰던 유대인에 관한 음모론과 피해의식,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생산한 알카에다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결국 내부의 균열을 외부의 침입으로 해소시키고 이것을 적대적인 공격성으로 전도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체제가 가진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 이 틈을 메우기 위한 전도현상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지젝은 파시즘 또한 “자본주의에 내재된 증상”으로서 이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것의 복귀로 드러나며 그 진리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한 사회의 균열된 지점을 “은폐하기 위해 이 환상은 주로 외부 적의 침입이나 음모론을 퍼뜨리는 양상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결국 지젝이 시도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그 사회에서 “억압된 과잉을 드러내는 것이며, (체제) 전체에 그 허위성을 고발하는 보충물을 덧붙이는 것”이 된다.

 

레닌주의의 계승

지젝은 오늘날의 세계상이 ‘사회적 꿈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실질적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다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상상하려는 모든 시도를 미리 배제하고 있는 사회는 생각을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세상은 모든 가치들과 정보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모든 실험이 가능한 것 같은 자비로운 세계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현실은 “새로운 굴라크(강제수용소)”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레닌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연구나 레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3가지 개념에 주목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진리의 권리’, ‘당파적인 진리(경험적 유물론의 진리)’, ‘해방적 폭력’으로 요약했다. 먼저 진리로 나아갈 권리로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젝은 레닌을 통해 “결과적으로 ……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이다. …… 우리는 진리 주장 자체를 감추어진 권력 구조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원주의,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인데, 지젝은 이러한 경향들이 일견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신(新)보수 세력의 폭력적인 근본주의와 짝을 이루어 작동되는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상대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다시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우리는 미국 부시 정권의 근본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을 통해 이미 경험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또한 이병창 교수는 오늘날 각광 받는 ‘가상현실’이란 것도 비활성적인 것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박탈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뿐이며,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관용’이란 것도 타자가 근본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짜 타자, 향락의 실체 있는 무게를 지닌 타자에게는 절대 불관용”적인 것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작업들도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진짜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 뿐이며, “계속 무엇인가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국 현존하는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젝은 성과 인종의 차별, 제3세계의 착취 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열정’을 통해 ‘급진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들도 그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만)을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레닌주의는 사회를 가르는 분열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는 진리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탈근대 다문화주의적인 서사의 권리에 대한 레닌주의의 응답은 부끄러움 없이 진리로 나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는 정치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든가 사회 조직에 분열을 가져온다는 상투적인 말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실제적인 보편성은 정치적 보편성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진리 과정의 보편성은 오직 사회조직의 한 가운데를 그렇게 가르는 모습, 근본적으로 나누어버리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진리와 폭력

이병창 교수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레닌의 ‘경험적 유물론’은 ‘의식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 외부의 의식’에 관한 강조라고 설명했다. 완전하게 구성된 세계가 비물질적인 의식을 예외로 하여 나타난다면, “세계 밖에서 모든 것을 포괄해서 인식하는 초월적 존재[神]”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의 유물론은 객관적 실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이미 내부에서 균열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보장하는 외적인 한계라면, “진정한 무신론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가 내적으로 균열되어 있음 즉, 세계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젝은 이렇게 ‘정신적 외상을 입히는 외적인 만남에서 진리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욕망의 근원인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적 유물론의 입장은 “내적인 균열을 통해 외부의 경험”을 만나는 것에 대한 ‘징후적 전치’라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이렇게 독해한 지젝에게 ‘진리’란 이미 당파적인 것이다. 진리는 당파적 욕망으로부터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균열 속에서 외적인 마주침으로부터 떠오른다.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조건이 된다면 당은 계급의식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상황의 보편적 진리는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에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정의상에서부터, 어느 한 편에 치우진 것이다.

또한 그 진리의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지젝은 형식은 내용에 대하여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구체화하는 원리 자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단적 주체로서의 ‘당’은 이 형식의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여기서 당은 진리의 내용이나 실증적 지식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에 의한 권위만을 가지고 있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에게 있어 이 형식은 일종의 “해방적 잠재력이 분출되는 ‘리듬’이며, 진리는 이 형식으로부터 풀어져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을 우리 안에 두겠다’는 동의 즉, ‘집단적 주체성’의 형식 자체에서 나온다. “레닌은 당을 역사적 개입의 정치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마르크스를 형식화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형식화하고, 라캉이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주목한 ‘해방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구타’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그것은 “팔을 뻗어 진짜 타자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타자의 고난과 고통에 눈을 가린 상태를 부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부수는 것이기에 폭력적이며, 내면에 있는 종속과 집착에 대한 거리두기이며 동시에 그것을 “두들겨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 기제에 대한 종속 자체가 잉여 향유를 만들어낸다면, 종속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바로 우리가 거기에서 끌어내는 외설적인 과잉 쾌락을” 인식하는 것이다. 상징적 법의 세계 너머에 있는 외설적인 아버지처럼 국가나 민족, 자본이 포함하고 있는 과잉 쾌락은 해방적 잠재력을 풀어놓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에 의해 폭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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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끝으로 16회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모든 강의가 끝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피곤한 저녁시간에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주시던 시민 수강생님들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로 묶일 수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번뇌와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던 강사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그 명강의를 제대로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이 강좌 후기를 읽어주시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골방에서 홀로 타오르다 금방 꺼지고 말 등불의 철학이 아니라, 막막한 이 시대를 멀리 밝힐 들불 같은 생각의 나눔을 지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 강좌에 많은 참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안토니오 네그리 – ‘제국’ 그리고 ‘다중’ [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⑮

안토니오 네그리 – ‘제국’ 그리고 ‘다중’ [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⑮

 

강사 : 박영균(건국대학교 HK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비물질노동’과 ‘삶-정치적 노동’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 열다섯 번째 시간에는 이탈리아 출신의 정치철학자이자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자인 안토니오 네그리(Antonio Negri, 1933~)를 박영균 건국대학교 HK교수의 소개로 만나보았다. 박 교수는 네그리의 주요 3부작인 <제국>, <다중>, <공통체>를 중심으로 그의 요동치는 삶 속에서 이러한 대표작들이 어떻게 형성되었으며,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의 문제의식은 어떤 것인지 수강생들에게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그에 따르면 네그리는 젊은 시절부터 현실 변화에 예민하게 반응하며 대단히 열정적인 삶을 살았던 실천적인 좌파 활동가였다. 또한 그는 스피노자의 철학과 들뢰즈와 가타리 같은 프랑스 좌파 철학자들로부터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마르크스주의를 정립한 독창적인 이론가이기도 했다. 여기서는 그가 제시한 주요 개념들을 중심으로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과의 차별점을 살펴보려고 한다.

네그리는 우선 현 단계 자본주의 양식이 ‘산업사회’에서 ‘네트워크사회’로, 노동의 성격도 ‘산업노동’에서 ‘비물질노동’으로, 그리고 변혁의 주체도 ‘노동자계급’에서 ‘다중(multitude)’으로 그 중심이 변화했다고 파악했다. 이것은 기술적 양식의 변화가 사회적 구성의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인데, 네그리는 지배적인 생산부문을 중심으로 경제 패러다임이 이동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농업과 원료 채취가 중심이던 첫 번째 패러다임에서 제조산업과 내구재 제조가 중심인 두 번째 패러다임으로, 다시 공장을 벗어난 서비스와 생산의 정보화가 그 특징인 최근의 경향으로 이행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핵심이 되는 개념,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하는 ‘비(非)물질노동(immaterial labor)’에 대해 네그리는 <제국>에서 다음의 세 가지 측면으로 설명했다. ‘컴퓨터 기술의 발달이 사회와 노동의 모든 실행 및 관계를 다시 규정하는 경향’, ‘문제를 해결하고 명시하며 전략적으로 중개하는 활동’ 즉, 상징적이고 분석적인 서비스, ‘신체적이고 정서적으로 인간과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더라도 만질 수 없는 노동의 결과물들-안심, 행복, 만족, 흥분, 정열 등-을 산출한다는 의미에서 비물질적인 정동노동(affective labor)’ 등이 점차 확산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2004년에 출간된 <다중>에서는 네그리는 위의 세 가지 중에서 첫 번째 측면이 약화되고 나머지 측면이 보다 강조된 비물질노동 개념을 제시했다. 그것의 “또 다른 주요 형태를 (감정과 정서가 중심인) ‘정동적 노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편안한 느낌, 웰빙, 만족, 흥분 또는 열정과 같은 정동들을 생산하거나 처리하는 노동이다.”

네그리는 이렇게 “20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동안에 산업노동이 자신의 헤게모니를 상실”하고, “아이디어, 이미지, 지식, 정보, 소통, 관계, 정동적 반응 등과 같은 비물질적 생산물들을 창출하는” 새로운 노동이 질적으로 우위에 선 사회에선 ‘다중’이라는 새로운 주체성이 생산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산업과 노동의 변화에 따라 그 사회 또한 보다 정보화되고 지적이며, 소통적이며, 정동적인 공간으로, 또한 “분산된 네트워크들의 무수한 불확정적인 관계”로 변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박영균 교수에 따르면 이러한 비물질노동 헤게모니의 강화는 “곧 비물질노동 그 자체가 삶 자체를 생산하는 노동의 전면화, 즉 ‘삶-정치적 노동(biopolitic labor)’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삶-정치’란 경제적인 것, 정치적인 것,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들의 경계가 무너지고 “생산의 다양하고 특이한 형태들 사이에 충분한 공통적인 토대, 상호작용 그리고 소통”의 가능성이 제공되는 새로운 지평을 말한다. 기존의 물질적 생산이 사회적 삶의 수단을 창출했다면, 비물질적 생산은 사회적 삶 자체와 정치적 활동의 가능성을 생산하기 때문에 삶-정치적이라는 것이다.

 

노동의 공통되기 – ‘사적 소유’, ‘노동가치론’, ‘착취’ 개념의 와해

네그리는 현대자본주의가 탈근대적인 생산양식 속에서 근대적인 경제-정치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방향으로 전환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우선 들 수 있는 것은 ‘사적 소유’ 개념이 점차 해체되고 있는 것인데, 소비자와 생산자가 분리되어 소비자가 단지 생산된 상품을 화폐를 통해 구입하고 소비하는 기존의 방식에 머물지 않고, 이미 생산세계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이다. 생산은 이제 공동체가 함께 하고 있으며 생산하는 동안 그 공동체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재규정되고 있다. 박영균 교수는 페이스북의 시장 가치는 마크 주커버그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의 네트워크 그 자체에서 나오는 것이며, 최신 컴퓨터 게임은 수많은 유저들이 먼저 사용해보고 버그를 발견해내고, 개선사항을 건의하는 등 온갖 시행착오가 이루어진 뒤에야 비로소 완제품으로 시판된다고 설명했다. 네그리는 “상품을 사용하거나 점유하여 얻을 수 있는 모든 부를 처분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로서의 사적 소유 개념은 점점 무의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네그리는 마르크스주의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노동가치론’도 해체될 것이라고 전망한다. 그는 <다중>에서 삶-정치적 생산은 시간의 고정된 단위로 양화될 수 없기 때문에 측정불가능한 것이며, 자본이 결코 우리들의 삶 전체를 포획할 수 없기 때문에 “자본이 노동으로부터 추출할 수 있는 가치를 언제나 초과한다”고 말했다. 이런 점에서 “자본주의적 생산에서 노동과 가치 사이의 관계에 대한 마르크스의 견해를 수정해야”한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네그리는 잉여가치론과 토대-상부구조라는 기존의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이 되어왔던 틀에서도 모순을 발견하고 이제는 그것을 해체하여 재구성할 것을 주문한다.

네그리는 마찬가지로 ‘착취’라는 개념 또한 자본과 개별 노동 사이에 종속된 전통적인 의미에서 벗어나서 “공통된 것의 강탈(약탈)로 간주해야”한다고 말한다. 가치의 생산을 공통된 것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하듯이, 노동시간이 정확히 시간으로 측정될 수 없는 사회에서 “공통된 것이 잉여가치의 장소”가 되었다면 착취 역시 공통의 생산물을 강탈하는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새로운 언어, 아이디어, 지식, 이미지의 생산은 공통적으로 생산된 것이 사적 소유로 변환된 것이다.

박영균 교수는 병의 치료 과정에서 자신의 몸에서 발견된 유전적 정보를 통해 추출된 새로운 물질이 막대한 부를 얻는다는 것을 뒤늦게 알더라도, 그 개인은 결코 그것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는 최근의 특허권, 저작권, 지적재산권의 아이러니에 대해 다양한 예시를 들어 설명했다. “주민공동체에서 생산된 전통적인 지식이 혹은 과학공동체에서 생산된 지식”이 하루아침에 사유재산으로 둔갑하는 이 시대의 상황에 대해 네그리는 이렇게 말한다. “어떤 점에서 우리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전통적인 특징이 사라져가는 상황에서도 자본이 여전히 통제력을 행사하여 부를 뽑아내는 모호한 논리를 화폐와 경제의 금융화가 요약해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 금융자본의 이윤들은 공통된 것을 강탈하는 가장 순수한 형태일 것이다.”

한편 (유럽중심적 관점이긴 하지만) 생산양식뿐만 아니라 그것을 제도적으로 안정화시키던 국가나 시민사회의 구조와 제도들도 30년간 계속된 신자유주의의 물결 속에서 점차 붕괴되고 있다. 또한 경제나 정치의 분리가 모호해지고 경제가 정치를 흡수하여 더 이상 제도적 장치나 정치가들을 통해 국가가 세계경제 변동을 예측하고 관리하고 통제할 수도 없게 되었다. 곳곳에서 정치와 경제가 부조응하고 그 괴리가 심화되고 전면화되지만, ‘국가에 의한 소유권의 보장 시스템’은 법적 권위를 통해 더욱 강고해지기도 한다. 더불어 시민사회가 약화되고 훈육사회가 쇠퇴하는 등 이 모든 것들은 “근대의 사회적 공간들에 놓여 있던 홈 패임을 매끄럽게 하는 것을 포함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 계급은 세계적 이주와 탈출을 선택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이제 통제사회의 네트워크들이 생겨난다.”

 

‘제국’에서 ‘다중’으로

▲ 박영균(건국대HK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네그리는 1991년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와 ‘국가주권에서 제국주권으로’ 세계질서를 재편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목도하면서, 제1차 이라크 전쟁을 전 지구적 주권을 주장하는 제국에 의한 내전으로 파악하고 마이클 하트와 함께 집필을 시작하여 8년 뒤에 <제국(Empire)>을 출간했다. 여기서 그는 전 지구적 지배양식의 변화를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라는 말로 요약했다. 제국주의가 국민국가 사이의 지배관계를 뜻했다면, 제국은 국민국가의 한계와위기의 공백 속에서 출현하여 국민국가가 갖고 있던 공적 기능과 치안을 국제적 관계 속에서 대신 담당하려는 것을 뜻한다. 기존의 국민국가들이 경제적 교환의 전지구화와 자유로운 이동에 의해 점차 자국 내에서 그 주권적 권위가 쇠퇴하고 역할이 축소되었기 때문에 “민족국가와 국제기구들을 자신의 마디로 포섭한 초국적인 네트워크 주권인 ‘제국’이 출현”했다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 제국을 여러 주권들의 합성체이면서 “탈중심화되고 탈영토화한 지배장치이면서 사법적 구성체”로 파악한다. 그래서 네그리가 보기에 미국의 이라크전은 제국주의적 이익을 위한 ‘제국주의 전쟁’이 아니라, 초국적인 자본의 네트워크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벌이는 ‘제국 전쟁’라는 것이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 ‘제국’의 출현이 다름 아닌 ‘다중의 활력이 작동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말한다. 여기서 잠깐 그가 말하는 ‘다중’의 개념을 살펴보면, 먼저 영원성의 관점에서 보는 ‘존재론적 차원’과, 현실적으로 실존하는 ‘역사적 차원’의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존재론적 차원의 다중은 “역사적 힘들의 복합적 상호작용에서 이성과 열정을 통해 스피노자가 절대적이라고 부르는 자유를 창조하는” 늘 있어 왔던 존재이다. 이러한 다중 없이는 사회적 존재를 생각할 수 없으며 이들이 가진 활력이 운동을 생산한다. 그런데 네그리는 이 활력을 현행적인 것(the actual)으로 바꾸는 것을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이 권력이란 것은 늘 다중을 모두 포섭하지 못하지만 말이다.

다중 개념의 두 번째 차원인 ‘역사적 다중’은 “아직 아닌 다중(the not-yet multitude)”으로 아직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다중이다. 이 다중은 “정치적이며, 이들을 제국의 출현 조건들을 토대로 해서 발생시키기 위해서는 하나의 정치적 기획이 필요”한 존재들이다. 이러한 다중의 출현을 고민할 때, 이제 중요한 것은 삶-정치적 조건들의 발생과 국민국가의 위기 속에서 출현한 제국 이후가 된다. ‘제국적 네트워크’에 반대하는 ‘대항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것이 그것이다.

“제한된 국지적 자율성을 겨냥하는 기획으로는 제국에 저항할 수 없다. …… 들뢰즈와 가타리는 우리가 자본의 전지구화에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과정을 가속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전지구화는 틀림없이 대항적 전지구화와 만날 것이며, 제국은 틀림없이 대항제국과 만날 것이다.” 그렇다면 자연의 생명력이나 인간의 정서와 느낌마저도 자본의 탐욕 아래 놓인 이 상황에서 자본의 외부를 어떻게 바라보고 나아갈 수 있을까? 박영균 교수는 “다중은 자본에 포획되지 않는 외부에서 삶 자체를 생산하는 삶-정치적 노동을 통해 노동의 공통되기를 만들어낸다”고 말했다. 그것이 바로 “다중 속에 융합되는 형상들-산업노동자들, 비물질적 노동자들, 농업노동자들, 실업자들, 이주자들 등-이 구체적인 장소에서 삶의 독특한 형식들을 대표하는 삶-정치적 형상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다중의 반란은 “부를 기초로 해서만, 즉 지성, 경험, 지식, 욕망 등의 잉여를 기초로 해서만 나타나며, 각 투쟁의 강렬함을 높이고 (전염병처럼) 다른 투쟁들로 확산되는 방식-투쟁들의 국제적 순환-으로 가동된다.” 박영균 교수는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례들로 19세기 중반 카리브해 전역으로 퍼져나갔던 노예 반란,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유럽과 북미 전역 산업노동자들의 반란, 20세기 중반 아시아-아프리카-라틴 아메리카를 가로질러 만개했던 게릴라 투쟁과 반식민지 투쟁, 1968년 노동자들과 학생들, 그리고 반제국주의 게릴라 운동들의 전지구적 투쟁, 1990년대 후반 지구화 문제를 둘러싸고 출현했던 1999년 시애틀 투쟁 등을 들었다. 그리고 잊을 수 없는 2008년 봄과 여름의 촛불집회와 광장에서의 기억도 다중의 향연으로서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삶-정치와 삶-권력의 투쟁

앞서 말했듯이 노동가치-잉여가치에 의해서만 작동할 수 없는 세계에서, 자본의 가치증식을 유지하게 하는 가장 큰 경제외적 강제는 ‘정치권력’이다. 오늘날 현대자본주의를 작동시키는 것은 정치와 경제의 분리에 의한 힘이 아니라, 경제 외적인 권력인 ‘정치’의 힘이라는 것이다. 또한 비자본주의적 요소처럼 보이는 ‘지대화된 이윤’과 ‘강탈로서의 축적’ 같은 독점 체제를 유지하고 비호하는 것은 국가인데, 국가는 여기서 “하나의 기업으로, 다중들의 생산활동을 포획하는 정치적 다이어그램의 하나로 기능한다.”

네그리는 이런 점에서 현대사회는 더 이상 푸코와 들뢰즈의 ‘훈육사회’-노동자로 호명되는 주체의 훈육-이 아니라 ‘통제사회’로 전환되었음을 발견한다. “여기서 착취의 대상이 되는 노동은 더 이상 ‘노동력으로서의 노동’만이 아니라 ‘생명활동’이며, ‘삶-정치’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통제’라는 시스템을 요청하게 된다. 오늘날의 권력은 이런 통제, 일상적이고 미시적이며 기술적인 감시들과 결합되어 있는 ‘통제사회’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이 통제사회를 강화하는 것은 “고용과 소득의 불안이라는 이중의 불안정성”이다. 박영균 교수는 “오늘날의 도시는 불안이 총체적으로 지배하는 공간이며, 현대 자본주의 사회는 어떠한 안정된 기반도 없는 예측가능성이 상실된 곳”이라고 말했다.

박영균 교수는 이런 불안의 총체화 속에서 대안과 출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 그는 조정환의 <인지자본주의>의 내용을 빌려와 ‘삶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노동의 힘’을 통해 ‘거대한 전환의 내적 경향’을 드러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인지란, “인식 주체 바깥에 있는 어떤 저 세계의 표상이 아니라 삶의 과정 속에서 어느 한 세계를 끊임없이 산출하는 일”이며, 새로운 세계를 산출하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힘이다. 그런 점에서 ‘삶-정치’와 ‘삶-권력’은 “생산적인 것의 비물질화와 인지화”가 낳는 다중의 역능을 두고 벌이는 전쟁터의 두 세력이며, 그런 점에서 오늘날 “삶-정치와 삶-권력의 투쟁”이 전면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삶-정치’적 관점은 한편으로는 경제결정론을 거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의 자율성론도 거부하는 것이다. 그런데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적 관계, 즉 상품관계와 자본관계 그 자체 때문에 공통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사람들이 수동성과 예속, 슬픔의 정서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의 상황이라면, 그 전복적 역량은 어떻게 회복될 수 있을까. 박영균 교수는 “따라서 문제는 다중이 ‘인지자본주의에서 그 정점에 이른 이 사회적 인지능력을 어떻게 자본관계의 지배로부터 벗겨내어 공통된 삶의 에너지로 전화시킬 것인가’”라고 말했다.

 

다중의 반란

물론 이 ‘다중’이라는 주체에 대한 동시대 좌파 학자들의 비판은 다양하다. 다중은 “양가적이고 어디로 갈지 알 수 없으며, 그들의 특이성은 통일적인 행동을 요구하는 정치적 행동과 상충되며, 헤게모니적인 힘이 없으면 정치적으로 무기력하다.” 또한 다중은 “현대자본주의의 향락에 근거하고 있는 존재”일 뿐이며, 자신들의 욕망의 권리만을 주장하면서 “결단과 선택을 회피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네그리가 바라보는 다중은 본성상 혁명적인 존재가 아니라 정치적 조직화 프로젝트를 통해 생성되는 주체들이다. 박영균 교수는 다중에 대한 비판과 불신의 일부는 ‘정치적인 것’을 여전히 헤게모니적으로 보는 관점에서 나온 것들이라고 말했다. 이에 반해 네그리의 다중은 ‘지휘자 없는 오케스트라’와 같이 “통일성이나 지도자 없이 공동 행동을 할 때 만들어”지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다중이 혁명적으로 출현할 수 있는 장은 정치학과 윤리학, 봉기와 제도, 레닌의 기동전과 그람시의 진지전이 구분될 수 없는 탈근대적인 지점에서이다.

근대적 세계에서의 저항이 직접적인 또는 변증법적인 힘의 대립을 의미했다면, 탈근대적인 저항은 애매하거나 삐딱한 자세에서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제국에 대항하는 전투는 삭제와 태만을 통해서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도주는 어떤 장소를 갖지 않는다. 그것은 권력의 장소를 철거하는(비우는) 것이다.” 네그리는 이러한 새로운 정치 공간은 “노동, 생산, 금융, 그리고 부의 재분배를 다수의 사람들이 참가해서 함께 관리해가는 체제를 만들어가는” 절대민주주의로 나아갈 때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대의제와 3권 분립 등 기존의 민주주의 체제가 부패한 것은 부정부패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이 더 이상 기능할 수 없는 사회로 변화했기 때문이다. 기존의 정치제도와 국가권력이 집행되는 방식에 대한 전면적인 재조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새로운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은 이미 시작되었다. 뉴욕의 월가에서, 유럽 각지에서, 북아프리카와 아랍에서 말이다. 설계나 통제가 아닌, 중앙의 지도나 맹목적인 신뢰가 없는, 새로운 투쟁의 경험이 축적되면서 군중은 비로소 “독자성을 가진 자율적인 개인의 집합”인 다중이 된다. 그 때 그들은 단순한 대중이나 군중이 아니라 불안정하지만 독자적이고 자율적이며 유연한 개인-공동체이다.

무릇, 자책을 관두고 분노의 능력을 회복하면, 그리고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깨닫기 시작하면, 억눌린 생각과 의사를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다중의 역량이 스스로 발현된다. 박영균 교수의 말처럼 다른 무엇보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정치”가 아닐까? 조금 더 받기 위해, 조금 더 편하기 위해 어색하게 머리띠를 두르고 구호를 외치며 데모하는 것이 아니라, “캠프를 차리고 생활 방식을 포함한 모든 것을 공동토의하고 있는” 그 현장에, 나와 공동체의 관계가 최대한 좁혀지기 위해 협력하는 바로 그곳에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이 움트지 않을까? 그 새로운 정치는 어쩌면 아주 단순한 가치나 원리로 작동할 것이다. 통치나 지배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누고 누리기 위해 조직되는 정치가 그것이다. 네그리가 말한 다중의 능력도 바로 이러한 가치를 생산하는 힘이 우리 자신에게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자본은 보기보다 약하고, 다중은 생각보다 강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자본은 다중에 의존하고 있고, 자본의 명령과 권위에 저항하는 다중의 의해 끊임없이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의 가능성과 세계공화국[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⑭

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의 가능성과 세계공화국[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⑭

 

강사 :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자본주의? 국가(State)=네이션(Nation)=자본(Capital)의 트라이앵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 열 네 번째 시간에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을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의 소개로 만나보았다. 고진은 이른바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1960년대 초에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국가(state)’와 ‘네이션(nation)’의 결합과 괴리를 고민했었다. 그는 그렇게 젊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국가 권력과 국가-자본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결합체”로 존재한다고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견지해 왔다. 또한 고진은 특히 마르크스를 윤리적으로, 그리고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그가 생각하는 참다운 문학비평은 소설이나 시에 대해 논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론>을 읽는 것 …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 출발점은 바로 그의 생각에 보편타당한 텍스트인 마르크스의을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견지했던 문제의식을 갖고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진은을 윤리(학)적으로 독해하려는 구상이 ‘새로운 보편적 인식’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구상의 돌파구를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칸트를 연결하는 방향에서” 찾으려했다. 고진의 말처럼 “칸트도 코스모폴리턴으로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 또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와 더불어 고진이 ‘보편적 인식’의 다른 측면으로 제시하는 것은 ‘역사의 반복’이다. 역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세계사적으로도 그러하다는 시각은 앞서 말한 ‘보편적 인식’과 ‘보편타당성’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복되는 것은 사건이나 ‘내용’이 아니라, 그 반복되는 구조나 ‘형식’이다. 이러한 고진에게 있어서 ‘보편적 인식’과 ‘역사의 반복’이 “하나로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마르크스의 책들”이다. 고진은 두 책, 《자본론》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강박을 설명한다. 즉, 앞의 책은 “‘경제’를 ‘표상(representation) 문제’로 삼아서 근대 경제학을 ‘비판’한 것이고, 뒤의 책은 ‘정치’를 ‘표상 문제’로 삼아서 근대 정치학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즉, 고진이 《자본론》을 읽고 얻은 통찰은 경제의 호황과 불황이라는 경기순환(불황-호황-공황-불황), 그 역사의 강박을 통해 “자본의 축적운동과 자기증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고서는 정치의 영역에서 대의제가 지닌 불완전함 때문에 의회제도가 침체되고, 절대권력이 붕괴되고 다시 절대권력이 회귀하는 반복적 강박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진은 여기서 경제적인 면에서 반복강박을 일으키는 ‘구멍’으로 ‘화폐’를 들면서,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해명한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기 보다는 화폐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환상 시스템 혹은 경제적 하부구조를 조직하고 은폐하는 상부구조, 바꿔 말해 표상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정은 교수는 “물론 그 시스템을 발견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비판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것과 유사하게 정치에서 “표상=대표 시스템이 가진 ‘구멍’은 대표 시스템이 죽이고 추방했던 ‘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제를 표방하면서 동시에 죽이고 추방했던 ‘왕’을 의회제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다시 ‘황제’로 되살려낸다”는 것이다.

결국 그 ‘화폐’와 ‘왕’이라는 구멍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실재하면서,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반복”되며,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무(無)”로 기능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고진이 말하려는 것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이어 받은 그의 말처럼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통찰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것도 “정당이나 그들의 담론은 실제 (그들이 대변한다고 말하는) 계급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표하는 자’와 ‘대표된 자’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자의적이라고 새삼스럽게 강조하면, 화폐와 대의제에 숨어 있는 그 물신성(物神性)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면, 자본으로 인해 숨이 조여 오는 오늘날의 정치와 공동체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생산자협동조합’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본주의 사회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국민국가는 국가와 민족의 조합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고진은 “자본, 국가, 네이션은 독자적 영역이며 동시에 상생하는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본을 추동하는 것은 늘 국가였으며, 국가가 자본보다 더 선행적이고 더 독자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고진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문제를 ‘자본=네이션=국가’의 ‘바깥’을 보는 상상력을 가진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구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적 모델이다.

고진이 말하는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은 “상품교환 원리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에서 국가나 공동체의 구속을 거부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있던 ‘호수성’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여기서 호수성(互酬性)이란 호혜성(互惠性)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증여를 받은 쪽이 준 쪽에 뭔가를 갚음[酬]으로써, 상호관계가 갱신,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가족관계에서의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나타나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들이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해 어리둥절할 때쯤, 이정은 교수는 이것의 그 구체적 형태로 아나키즘적 공동체, 평의회 코뮤니즘, ‘파리꼬뮌’에서의 꼬뮌, 봉건제 말기에 형성된 상업 중심의 자유도시,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던 정치적 행위자들의 연대체인 평의회 등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진이 말했던 어소시에이션은 “그 어느 것들보다도 칸트의 생산자협동조합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결국 고진은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구상을 통해 정체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경제적 결사체에서 출발하여 탈자본주의적 협동조합, 나아가 코뮌(commune)의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자본, 네이션, 국가라는 세 항의 역할과 이들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그가 독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교환양식’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구성인데, 이것은 “호수(증여와 답례), 재분배(약탈과 분배), 상품교환(화폐와 상품)으로 나눌 수 있다.”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는 청년기에는 ‘교통’이라는 개념을 통해 ‘교환양식’의 밑그림을 드러냈지만, 차후에 그는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원동력을 교환양식이 아닌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결합한 생산양식’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교수는 이 교환양식이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자본주의 시기에 전면화된 것은 그것의 한 형태인 상품교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독특한 산물인 자본=네이션=국가의 매듭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민족과 국가, 네이션과 스테이트가 하나로 합쳐진 차원의 근대의 국민국가와, 자본 활동과 연동하는 국가는 자본주의 시기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세계공화국 –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이정은 교수는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을 실현하는 ‘부단한 과정’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된다”고 말하며, 고진이 강조한 것은 자본이 국가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네이션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있고, 자본주의는 소멸할 수 있지만 국가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늘날 “국가 간 경계를 해체하면서까지 확장되는 자본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잔존하며, 국가문제는 국내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진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고 안정되게 실현하려는 노력도 국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 대 국가의 대립으로 진행되는 국가 외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국가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으며, 자본과 국가가 그동안 형성해온 교환양식을 활용하여 국가적 차원의 대안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이다.

이 개념은 고진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 개념을 빌려와서 ‘세계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변형하고, 그곳에서 “국가에 의한 통제나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자본주의 문제를 해소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고진이 ‘세계공화국’의 개념으로 나아간 것은 국가 권력이 인민을 제대로 대표하고 대변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본과 지구화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마르크스와 칸트의 조합’은 이론의 원리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공화국’은 완성된 기획 형태의 ‘구성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지향으로서의 ‘규제적 이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정은 교수는 말했다.

한편 칸트가 《실천이성 비판》에서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제시했던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언명도 “자본주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빈곤 상태에 처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목적성과 인격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통과한 칸트는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계급 격차’를 해소하자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경제적인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정치적 차원인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문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은 교수는 “칸트가 구상했던 세계시민사회, 세계국가가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의 동시 작용이라고 해석할만한 여지를 남긴” 것이라면, 고진이 칸트에게서 특화시킨 것은 “경제와 맞물려 있는 정치”라고 말했다.

고진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소시에이션 모델을 구상했지만 경제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가’의 자립성을 무시하고 국가를 독립된 개념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소멸을 위해 과도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국가의 작동방식을 바꾸자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면,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사회주의나 소련식 전체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적 성향에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던 좌파들이 “항상 민족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파시즘에 굴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소 내셔널리즘을 칭송하게” 된 것도 이 ‘경제 중심적 아나키즘’적 요소가 작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지난 세월 좌파들은 보다 철저하게 국가를 검토하지 못했던 것일까? 혁명가들은 혁명 이후에 국가가 자본을 어떻게 추동하고 통제하고 비호해야지 혁명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필자는 강의를 들으면서도 계속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칸트적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읽고 헤겔적 대안을 제시하다

이정은 교수의 평가를 요약하자면, 고진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정식화된 ‘헤겔의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사유하는 칸트적인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새롭게 독해하여 반자본 운동의 세계사적인 전망을 새롭고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고진이 “칸트에 빗대어서 제시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헤겔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고진은 일본의 현대사라는 ‘특수성’ 위에서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갖게 된 학자이면서도, 독일관념론의 변주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국가와 자본이 어떻게 결탁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사유한, ‘보편성’을 지향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다.

필자 또한 고진을 통해서, 마르크스를 통해 볼 수 있는 현실변혁의 ‘가능성’과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제한된 ‘한계’를 동시에 추적하여 비판과 저항의 알레고리를 부단하게 사유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볼 수 있었다. 이정은 교수가 말했듯이,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을 실제로 실현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같은 것으로 보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 그 바깥을 보는 이념 또는 상상력”이 쇠퇴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진이 더 우려스러워 하는 것은 그 쇠퇴의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추종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간주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2012년, 이제는 더 암울하지 않을까. “머지않아 경제위기나 공황이 찾아 올 수 있고 자본주의가 쇠락을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하더라도,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기보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무감각하고 무기력하게 반응할 뿐이다. 자본이 요구한 욕망이 아니라 내면에서 억압된 자연스러운 생명의 욕망을 긍정해보는 것, 국가와 민족이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민주적인 공동체’를 발칙하게 상상해보는 것, 참 어렵지만 ‘인류’의 역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정은 교수가 소개하는 가라타니 고진 사상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인류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였다. ‘전쟁’, ‘환경 파괴’, ‘경제적 격차’가 그것인데, 고진은 선정 이유를 이 문제들에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는데, 결국 이것들은 현실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파국의 길을 걷고 말 것입니다. 이것들은 일국 단위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 글로벌한 비국가조직이나 네트워크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제 국가의 방해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위로부터’ 봉합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라클라우&무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선언[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⑬

라클라우& 무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선언[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⑬

 

강사 :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치적 기획의 부재와 헤게모니 전략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열 세 번째 시간은 숙명여대 박영욱 교수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표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의 내용을 주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 책은 국내에서 1990년에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라는 제목으로 초역된 이후 20여년만에 최근 다시 번역되어 출간된 현대의 고전이자 문제작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교조화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흐름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을 모색한 1980년대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계급성’과 ‘경제결정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재해석하여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사상을 다루었던 강좌에서처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이해할 때도 우리는 과연 무엇이 맑스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정통성을 강조하며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결정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던 것을 해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토대와 상부’라는 사회구조에 관한 고정된 인식과 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변혁적 주체를 설정하려는 관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 정합성을 높이려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체제 혹은 진영 내부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권위와 독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실천이론을 모색하던 당시에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라클라우와 무페/ 출처: www.nomadist.org

그람시의《옥중수고》를 연구했던 무페는 이데올로기 담론 분석연구를 진행했던 라클라우와의 협동 연구로, 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쟁점화된 정치적 기획의 실패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그람시를 분기점으로 삼아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에서 결여되어 있는 정치적 전략을 만들어가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질주의 담론에서 비롯된 헤게모니 지형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룩셈부르크, 카우츠기, 베른슈타인, 혁명적 생디칼리즘 등은 이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세웠지만 그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특히 파시즘의 승리로 끝나 버린 1930년대 서유럽에서의 가장 결정적인 실패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람시는 “레닌주의의 계급동맹 개념을 극복하는 헤게모니적 결합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해석하여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지배 질서에 적대적인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혁명적 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혁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이 다한 다음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단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과연 지배와 부자유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 전략과 오늘날의 세계

라클라우와 무페가 개진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문제제기는 ‘급진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결핍된 전략적인 방안들을 구상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좌파들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기보다는 이것을 더욱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기획으로 재생산하여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전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박영욱 교수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상한 “민주주의적 관계는 차별이 아닌,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정체성 이외에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관념적인 태도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단일한 연대체를 이루어 혁명적인 상황까지 전진한다는 생각 또한 이제 환상일 뿐이다. 또한 “‘노동자’라는 단일한 카테고리가 선험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부분에서만 등가적인 일시적 연대만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물음은 대항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디를 지향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된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총체성’은 대중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연대 전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늘 유동적이고 현실에 밀착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 전략과 급진 민주주의의 정치실천에서 좌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갈등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는 적대적 관점의 실천성이다. ‘적대’ 개념에 근거한 갈등과 차별의 요소가 다원적 민주주의와 헤게모니 정치전략을 추동시키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지난 시기 동안 좌파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현존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시도를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동반했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의 지적이다.

1970년대말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양극화로 황폐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약삭빠른 기득권층은 이해관계에 따라 여전히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금융자본은 먹잇감을 찾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적(敵)’이 사라진 시대, ‘전선(戰線)’이 애매해진 시대에서 구태의연한 진보 진영의 한 쪽은 무능하게 자멸하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대응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한편 이번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쇄신 혹은 해체를 주창하며 내놓은 좌파의 새로운 이론적 경향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소개 시간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사변적이고 난해하기로 소문난 이 책(특히 3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여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진보담론에 주었던 충격과 신선함이 어떤 것이었으며, 세상에 나온지 27년이 지난 이 책의 자극이 오늘날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총 16강으로 기획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는 이제 가라타니 고진,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세 번의 ‘만남’이 남아 있다. 그들이 품고 있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간략하게나마 곱씹어보며, 우리는 역사의 향배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고 진보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전망과 대결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그 숱한 이론적 경향과 철학적 담론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좌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추동해 온 이 근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해온 거대한 이론적?실천적 투쟁의 물결들을 살펴보며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될 지점이 있다. 제1강에서 서유석 교수가 강조했듯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어떤 ‘이론’으로의 편향이나, 단순한 논리로 고난의 상황을 돌파하려는 맹목적 ‘실천’ 자체가 아니라, 적대와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이론적 실천, 지속가능한 이론을 모색해나가는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 일련의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여 섣부른 기대나 실망을 품지 않고 우리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것, 늘 출발점은 거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강사 : 김성우(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두번 째 시간에는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의 안내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김성우 연구소장은 우리가 시사 문제들을 소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월러스틴의 관점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을지 자문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적당히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면 모든 매체의 관심사가 한 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경향과, 그 사건의 의미를 다각도로 고려하기 보다는 그 사건이 끼칠 국가적 영향에만 주로 관심을 쏟는 내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그런 단선적인 상황 분석과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사적 시각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역사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관점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탐색하자”는 것이 오늘 살펴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의 제안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태의 소비’가 아니라 ‘사태의 통찰’이 가능하기 위한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분석의 ‘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미국의 비판적인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월러스틴이 주창한 독창적인 이론인 ‘세계체제론’에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거나,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를 분석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자

월러스틴에 따르면 세계를 분석하려는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체계성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되어 발전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각각의 학문들이 연구하는 대상 세계의 현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 부문들이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며, 여기에 적합한 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 분석”이라는 것이다.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프레시안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이 크게 세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근대 학문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에는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고 정립”하려는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는 월러스틴의 일관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체제론이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큰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월러스틴은 애초에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밝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를 아프리카 지역연구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곧 현재의 아프리카가 처한 조건은 유럽이 주도한 근대 세계경제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월러스틴은 ‘세계체제(World system)’라는 분석틀을 선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체제’란 분석을 위한 관점이자 동시에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문제의식은 근대세계를 구성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과 확장 그리고 사멸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몰락의 분기점에 근접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1989년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1980년대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들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가진)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를 추동해 온 거대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인 ‘발전주의’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이며, “맑스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적 발전주의의 몰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 68혁명도 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중도 자유주의와 복지 개념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진보적인 세력이 집권한 많은 국가들의 실패에서 보듯이, 68혁명을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이후’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경제 체제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는 월러스틴은 “사실 경제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인권의 정당성이나 민족의 자결권 같은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작동될 때는 사실 자유주의는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적인 지속을 위해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주의의 맹점이 드러나면 이 체제 속에서 지속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는 대다수 계급들에게 이 시스템의 유지가 정당성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또한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디지털 문명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기업들에서 보듯이 늘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이윤을 가능케 하는, 자본축적의 핵심은 ‘독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윤은 떨어지기 때문에 독점자본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그 독점체제의 유지를 위해 ‘국가’라는 이름의 법적 체제와 의회권력은 앞장서서 자본가들을 비호하기도 한다. 결국 국가나 시민사회와 분리된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더욱 공허해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아직도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규제를 더 풀어야 하고 아직은 나눠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성우 소장은 “어쩌면 1980년대말의 세계변동은 1970년대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태동으로 인해 10여년 지연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즉,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팽창과 수축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 이념의 돌연변이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율 감소를 막기 위해 인건비, 생산원가, 세금, 관세는 낮추고 자본의 권리는 무제한적으로 확장하며,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해도 대기업은 공적자금을 통해 손실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 ‘유연한 괴물’은 30년 동안 우리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도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헤게모니를 점차 잃어가고 있던 미국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 혁명을 빌미로 기존의 세계경제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들’ 중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에 내재한 오래된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의 말을 빌어 “결국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다가올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모색해야 할 것은 “모든 모순이 해결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안체제로서 불평등의 해소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도래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종말과 함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체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월러스틴은 “진정한 맑스주의, 정통 맑스주의를 찾는 것은 신화”를 현실 속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소장의 말처럼, 이념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월러스틴은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없는’ 학자일지도 모른다.”

결국 월러스틴을 따라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이해하자면, 오늘날의 세계경제란 기나긴 16세기(1450년~1640년)에 유럽에서 태동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지배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결과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탄생 이후에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68년 세계 혁명이라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거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작동방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보다 작은 지점들인 1968년 세계혁명, 1973년 오일쇼크, 그리고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 등도 세계경제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국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과 이후의 식민지화, 1945년 광복 이후 민족분단과 전쟁, 1960년 4.19민주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IMF체제로의 편입 등도 모두 우리의 ‘지금-여기’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성할 때 참고해야 할 변곡점들이 된다.

 

세계체제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김성우 소장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던 것은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편입이었고, ‘글로벌화’라고 부르던 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실 영어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미국에 더욱 종속되어왔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미국 시각, 중국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김 소장의 말은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나의 재산가치는 줄어들까’, ‘향후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시안적 시각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넓게, 깊이 있게, 다르게 보고 느끼”려는 노력을 통해 결국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는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고 주류와 핵심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월러스틴의 말처럼 “더 주변부적인 생산과정 참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리라. 예를 들면, 개별 노동자, 그것도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이 아니라, 여성, 문화, 민족, 종교, 세대, 성정체성 등 다층적으로 구성된 ‘계급’ 관점을 통해 세계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새로운 창을 통해 보면, 소수자와 약자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부자유는 얼마나 더 섬세하게 인식될까? 결국 세계체제라는 거시적 관점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포착해야 할 것은 ‘저기 사람이 저렇게 살고 있고 저것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하자’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닐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체계와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편견과 아집은 얼마나 뿌리 깊은가. 김 소장은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과 하고 있는 일에 은폐된 ‘전제’를 검토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조주의이자 근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민족이라는 신앙과 계급이라는 신앙의 대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의 미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요즘”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대 99(또는 20대 80의 사회)의 사회에서” 김성우 소장은 역사의 반복과 아이러니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성찰해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역사의 반복은 맑스의 말처럼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전개되기 일쑤이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는 강의 말미에 수강생들이 월러스틴의 책을 직접 읽고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의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인식해보자고 주문했다. 한편 프레시안에서도 정식으로 원고료를 지불한 월러스틴의 따끈따근한 칼럼들이 번역?게재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쉽게 국제 문제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접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나긴 혁명은 계속된다: 영국문화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⑪

기나긴 혁명은 계속된다: 영국문화주의[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⑪

 

강사 : 현남숙(가톨릭대 초빙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왜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정당을 지지하는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한번 째 시간의 주제는 ‘영국문화주의’였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살펴봤던 것은 프랑스에서 1960년대 이후 맑스주의의 갱신을 주창한 알튀세르에게 영향 받은 일군의 제자들이 사유한 ‘새로운 정치의 가능성’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와 달리 영국에서 2차대전 후 영국에서 개진된 맑스주의의 한 흐름 속에서 사회변혁을 고민하던 일군의 학자들은 자신들이 처한 당대를 어떻게 분석하고 사유했을까. 현남숙 카톨릭대 교수가 소개한 영국문화주의는 맑스주의적 관점을 통해 사회구조의 분석 틀을 선취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알튀세르의 고민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영국문화주의는 1950년대 후반 미국을 필두로 한 독점자본주의의 세계지배력 강화와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파시즘적 변환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전망을 기획하던 시기에 등장했다. 그것은 정치, 경제, 문화를 분리하여 “문화를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분법적인 사고야말로” 문화와 경제가 결합된 새로운 시대에 사회의 진정한 변혁을 이끌어내기 위해선 적합하지 않다고 비판한 것이다. 즉, 영국문화주의 연구자들은 경제적 토대와 그 위의 다른 상부구조에 대한 새로운 이해, 지배방식에서 헤게모니의 역할, “제도와 문화의 물질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보수정당을 지지하는 노동계층의 모순을 설명할 수도, 바로잡을 수도 없다”고 보았다.

경제 정책이 분배적 관점으로 조금 변화한다고 해서, 복지제도가 진보적으로 개선된다고 해서, 기득권 유지밖에 모르는 권력층이 잠시 의회권력을 잃는다고 해서 세상이 나아질 것이란 믿음은 이젠 순진한 착각이 되어버렸다. 그런 면에서 영국문화주의의 시야는 보다 넓고 그들의 인내심은 충분하다.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정치경제적 혁신으로만 완수될 혁명이 아니라, 우리가 이루어야 할 진정한 혁명은 장구한 역사 속에서 계속되어야 할 인간과 사회에 대해 지속적으로 반성하고 개선해나가는 기나긴 혁명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을 포괄하는 ‘제3의 혁명’으로서 “인간과 제도에 관한 문화혁명의 형태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영국문화주의(British Culturalism)라는 사상적 조류는 영국 사회주의 역사에서 신좌파(New Left)로 불리는 정치적 전통 위에서 발현되었으며, 영국문화이론, 문화유물론, 신(新)그람시주의, 버밍엄학파, CCCS(현대문화연구센터)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영국문화주의의 연구자들은 무엇보다 ‘문화’라는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데올로기 투쟁과 그 고유한 실천양식에 관심을 가지고, ‘문화혁명’이란 ‘사회적 존재와 의식’을 동시에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간주했다. 즉, 불평하고 부자유한 사회를 근본적으로 혁신하기 위해서는 경제적?정치적 실천 못지않게 노동계급과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의 의식을 고취시키는 문화적 실천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에선 영국의 문화주의가 극적으로 변한 만남과 이별의 몇 장면들 즉, 문화 연구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과 만났을 때, 그리고 세월이 흘러 그것이 문화유물론의 중핵과 결별했을 때를 중심으로 이 지적 흐름의 단면을 살펴보자.

 

‘문화’가 ‘헤게모니’를 만났을 때

산업혁명, 부르주아 의회혁명, 사회주의 혁명, 민주화 혁명 등이 이룩한 성과와 한계 위에서, 제국주의와 전체주의의 악몽을 딛고서, 현대 역사는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가. 왜 평범한 사람들의 삶은 더 행복해지지 않는가? 국가의 생산량은 늘어나고 대기업의 생산력은 계속 커지지만 왜 실질적 평등은 더욱 요원해지는가? 왜 피지배 계급의 하위문화는 자생성과 저항성을 잃고 지배 계급의 문화에 종속되기 쉬우며, 어떻게 문화적 지배에 의해 정치적 지배가 더욱 고착화되는가? “노동계급은 과거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취약하고” 이데올로기에 보다 철저하게 비판적이지 못하면서, 왜 지배계급이 만든 논리에 빠져 자신의 정체성과 가치를 규정하는가?

이러한 의문들을 품었던 영국문화주의자들은 다양한 세대와 넓은 스펙트럼의 지향점을 가진 연구자들을 아울러 부르는 이름이지만, 그들에겐 이론적 배경에 있어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에 입각하여 이데올로기적으로 이루어지는 지배에 대처하기 위해 (정치와 경제에서) 문화로 관심을 돌렸다는 점이다.” 바로 “역사유물론의 실천에서 문화의 중요성을 간파한 사람”인 그람시의 개념들이, 지배양식을 “직접 드러내지 않고 위임된 헤게모니 체계로” 밝혀내는 방식 즉, 문화영역에서 “이데올로기적 측면이 강한 영국적 상황을 분석하는 이론적 자원으로 수용”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문화주의는 역사적으로는 영국 맑시즘의 전통 안에서, 또 현대적 의미로는 문화연구라는 영역 안에서 문화를 통해 지배구조를 분석하고 이에 저항하고자 하는 공통의 에토스를 갖는다”고 설명했다.

여기서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은 “사회적 동의를 얻기 위한 지적?도덕적 주도권”으로서, 군대나 경찰이 하는 방식처럼 억압적인 물리력이나 강제가 아니라, “대중의 동의를 이끌어내는 방식으로 갖추어진 지배력”을 의미한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는 “국가나 사회의 지배를 무력이나 강제”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인 동의에 의한 지배체계로 바라본다. 일상성 속에서 문화적 지배의 면면을 살펴보며, “국가와 시장의 대중지배, 힘이나 무력이 아닌 미디어를 통해 이루어지는 동의의 구조를 파악”하려는 것은 영국문화주의가 가진 독특한 시각인 것이다.

 

윌리엄즈와 홀이 그람시를 만났을 때

일찍이 그람시가에서 강조했던 것도 헤게모니를 활용한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 분석 자체가 아니라, 그 지배양식의 인식 속에서 대중이 주체로 자립하여 그들이 문화혁명에서 대항문화를 생산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그의 생각을 이어 받은 문화주의에서도 사회에서 배제된 자들인 하위 주체들과 그들이 만들어내는 문화적 실천을 중시한다. 그것은 영국문화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만든 레이먼드 윌리엄즈(Raymond Williams, 1921-1988)가 그의 책에서 말하고 있는, “미완의 혁명을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의 장구한 문화혁명”으로서 ‘문화유물론(cultural materialism)’이 지향하는 바인 것이다. 그는 문화유물론을 역사유물론과 관련지어 “사회적이며 물질적인 생산적 과정으로서의 문화이론, 생산의 물질적 수단의 사회적 사용으로서의 특수한 실천이론”으로 규정했다.

레이먼드 윌리엄즈(1921~1988)/ 출처: suite101.com

 

그 자신이 노동계급의 아들인 윌리엄즈는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보다 정교화하여 ‘지배 헤게모니(dominant hegemony)’와 ‘대항 헤게모니(counter hegemony)’ 혹은 ‘대안적 헤게모니(alternative hegemony)’로 구분하고, “헤게모니는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늘 사회적 관계의 ‘사이’에 존재하며, 끊임없이 전복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노동계급의 문화를 분석하면서 지배문화에 의해 규정되고 구성된 그 문화 내부에 지배 이데올로기의 의도를 간파하고 그것에 저항의 역량을 기를 수 있는 대항문화(counter culture)가 역동적으로 구성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이미 “노동계급의 정서적 구조에 새로운 의미 체계, 가치관, 관행, 그리고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창조적인 것(the emergent)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가 소개한 또 한명의 문화유물론자는 스튜어트 홀(Stuart Hall, 1937-)인데, 그는 자메이카 출신으로 옥스퍼드대에서 수학했으며 윌리엄즈를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접했다. 윌리엄즈가 영국문화주의를 “역사유물론의 새로운 변형으로 이론화”했다면, 그는 “그 토대를 딛고 헤게모니가 작동하는 문화의 영역과 사회적 갈등의 영역을 계급을 넘어 인종, 세대, 종족성, 식민적 경험 등의 다른 배제된 영역으로” 확장시켰다. 홀은 사회적 삶에서 개인들은 다양한 정체성을 복합적으로 형성하게 되고 진보적 문화의 확장 역시 다양한 집단적 정체성의 블록을 통해 이루어져야 된다고 생각했다.

특히 홀은 대처리즘 시기의 이데올로기 분석으로 유명한데, 그는 “대처리즘을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으로” 규정하고 대처가 ‘시장에서의 자유주의와 일상에서의 보수주의’를 기치로 대중을 지배하는 방식을 관찰했다. 당시 한편으로는 복지정책 축소와 공기업의 민영화를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족의 가치, 전통적 여성상, 근면한 노동자상”을 강조하던 지배 이데올로기는 미디어를 통해 전파되었고 대중은 이러한 문화적 지배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대중들의 동의를 자발적으로 얻어 합법적이고 도덕적으로 “주도권을 얻어가는 대처리즘에 속수무책이었다.” 그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변혁의 대안을 내놓지 못하고, 여전히 교조적 맑스주의의” 미래만을 되뇌었던 것이다.

여기서 홀은 문화적 주체가 복수의 정체성을 획득할 수 있고, 중층적으로 결합된 주체의 구조를 설정하기 위해 ‘접합(articula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트레일러를 트럭의 운전실과 떼었다 붙였다할 수 있는 것처럼 사회적 관계 속의 주체들은 어떤 조건 아래에서 서로 서로 ‘탈접합’되거나 ‘재접합’되는 연결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현남숙 교수는 홀이 “필연적으로 결정되거나 절대적이거나 필수적인 것이 아닌, 다양하고 서로 구분되는 요소의 결합”이라는 관점을 통해 문화연구의 지평을 넓혔다고 설명했다. 예를 들면, 계급+세대, 계급+인종, 계급+여성+식민경험 등과 같이 문화연구에서 집단 내의 세부적인 차이까지 고려하며 다양한 주제와 요소의 접합이 가능해진 것이다.

 

‘문화’가 ‘계급적 관점’과 헤어졌을 때

만약 그렇게 ‘계급’과 ‘여성’이 중첩된 여성의 현실에 관한 영화가 있고, 그 영화에 대한 비평에서 연구자가 “생산관계에서의 억압과 저항”을 고려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단지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와 여성의 문제만 다룬 비평이 되고 만다. 윌리엄즈와 홀이 주장했던 문화비평은 단지 문화 자체에 관한 연구가 아니라,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더불어 노동계급의 의식변화를 유도하는 것에 그 주안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영국문화주의는 제도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그 정치적 실천성을 잃어버렸고, 문화를 소비적 행위로 용해시키는 단순한 문화연구로 전락하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구조주의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의 이론들이 문화연구의 방법론을 풍부하게 해주더라도, “헤게모니가 동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그 너머의 진정한 현실에 대해서는 무관심해졌기 때문이다.”

또한 현재의 영미 문화주의는 문화유물론적 관점이라는 문제의식을 거의 상실하고 “국적불명의 학제간 연구”를 표명하거나 시민운동의 한 경향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물론 이러한 비판은 일상문화 연구가 사회분석에서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가 아니라, 문화가 “토대와 분리되는 순간, 인간의 사회적 존재조건에는 무심한 것이 되어버린다”는 뜻에서 유의미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현남숙 교수는 영국문화이론이 “맑스주의와 가깝든 멀든, 문화연구라는 하나의 ‘의제’를 형성했다”고 그 의의를 인정하면서도, “맑스주의의 역사 속에서 바라본다면, 영국문화 이론은 처음에는 문화‘유물론’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유물론이 되어버린 것 같다.”라고 평가했다.

그래서 영국문화주의가 그 유물론적 문제의식을 잃지 않기 위해서는 “‘비평의 정치’를 넘어 그러한 의미를 만들어내는 ‘문화의 물질적 구성’에 관한 분석으로 나아가야 할 것이다.” 그러한 저항적 이론을 통해 학문적 관점과 성과 속에서 대중의 대항문화가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고, 99%의 사람들이 역동적으로 구성해내는 문화혁명의 과정은 1% 지배문화의 허위성을 제 스스로 폭로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정치혁명도 산업혁명도 인간을 더 나은 상태로 만들어주지 못했”다면, ‘그럭저럭 먹고살만하기에 타인의 고통에 둔감하고 이 세계가 그냥저냥 만족스러운’ 사람들의 무심함이 우리 곁에 넘쳐난다면, “기나긴 문화혁명”의 시간은 계속 진행될 것이다. 아니, 계속 진행되어야 한다.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정치’의 가능성에 대해 다르게 사유하는 3가지 방법: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⑩

 

강사 : 박기순(충북대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알튀세르가 남긴 것들

지난 시간에 살펴봤듯이 루이 알튀세르의 작업은 맑스주의 내부에서 맑스주의 이론을 개조하고 쇄신하려는 시도들 중 “사실상 최후의 것”이었다. 그는 “맑스주의의 전화(轉化)라는 정치적 문제의식 속에서 사유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우리시대의 사상가였고, 그 이후의 세대에게 많은 철학적 논제들과” 비판의 무기가 될 개념들을 지적 유산으로 남겼다. 그런데 현실을 정치하게 분석해 낼 수 있는 ‘맑스주의의 과학성과 비(非)교조성’을 강조했던 그의 작업은 어쩌면 그 이론 자체보다 그것으로 인한 알튀세르적인 효과와 영향이라는 면에서 오늘날 더욱 논쟁적이다. 그런 면에서 그의 치열했던 이론적 투쟁은 완수되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고, “그가 남긴 유산은 그의 후세대에 의해 비판적으로 전유(傳諭)되고 계승되고 있다.”

또한 알튀세르가 추구하던 비결정론적이며 비환원론적인 이론적 경향과 이단적이고 개방적인 지적 태도로 인해 그의 사상은 “비판적 대결을 거치지 않고서는 이해되거나 수용될 수 없는 사상, 새롭게 변용되고 굴절됨으로써만 계승되고 재개될 수 있는 사상”으로 이해된다.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으로 기획한 강좌의 열 번 째 강의에서는 충북대학교 철학과 박기순 교수의 안내로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서의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를 만나 보았다. 이번 강의의 고갱이는 그들이 ‘포스트 알튀세르주의자들’로 묶일 수 있다면, 그들은 어떤 관점에서 또한 어떤 거리에서 알튀세르를 ‘계승’하거나 ‘극복’하려했는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알튀세르에게서 사유하는 법을 배운 직간접적인 제자들이면서도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며 각각 고유한 방식으로 그를 극복하려고 하는, 생존하는 프랑스 현대철학자들 중 가장 각광 받는 세 명의 철학자들을 알튀세르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 박기순 충북대교수 ⓒ프레시안

그런데 ‘알튀세르와 함께’ 우리 시대의 문제, 특히 정치적 문제, 아니 정치 자체에 관해 사유하고 있는 그들이 우선적으로 갖고 있는 문제의식은 “맑스주의로 대표되었던 정치적 운동과 해방의 이념이 가졌던 난점과 실패”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즉, 맑스주의 내부에 만연한 경제 환원론적인 입장에 대한 알튀세르의 비판적 작업을 이어 받은 그들에게 주어진 보다 분명해진 사유 과제는, 사회 각 부문이나 경제적인 영역과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정치의 고유성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치를 독자적인 작동 원리를 가진 하나의 고유한 영역으로서 대상화하고 개념화할 때 드러나는 난점은 분명한 것이었다. 고유한 영역으로서 ‘정치 자체’로의 회귀는 “현실에서는 정치의 소멸”, 즉 정치를 단순히 행정 기능과 국가 관리의 역할로 축소시키고 사회적?경제적 갈등의 조정으로만 바라보게 만든 것이다. 물론 그 정치 개념의 협소화는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듯이 자본의 침식과 그로 인해 공동체가 가진 정치적인 역량의 침체와 쇠퇴를 동반한다. 그렇다면 정치의 고착화된 사유방식이 아니라 ‘정치적인 것’이 가진 무한한 잠재성과 급진성을 보존하며, 그것을 어떻게 양화시키거나 희석시키지 않고 정치의 고유성과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을까? 그런 점에서 발리바르, 바디우, 랑시에르가 가진 주요한 문제 틀은 “정치의 개조, 혹은 고유한 의미의 정치의 가능성”을 ‘정치적 주체성’이 가진 의미와 한계 속에서 재정립하는 것이었다.

발리바르와 인권의 정치

정치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색하는 발리바르(Etienne Balibar, 1942~)에게 맑스 혹은 맑스주의는 “우회할 수 없는 지점으로서 그에게 근본적인 사유의 지평을 제공”했다. 그는 맑스주의가 자신의 역사 속에서 드러낸 한계들을 인정하면서도, 그 한계의 극복을 여전히 맑스주의의 지평 속에서 사유하고자 했다는 측면에서 스승인 알튀세르의 작업을 가장 충실히 계승하고 있다. 그래서 발리바르는 알튀세르가 도달한 지점, 즉 ‘정치적 주체화의 가능성’에 대한 문제가 가진 난점에서부터 그의 독자적인 사유를 개진한다. 그것은 구체적으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의 물질성’과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이라는 테제가 가진 난점에 대한 답변이다. 즉, 알튀세르가 취하고 있는 이데올로기론은 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기본적으로 경제적 생산관계의 지속적인 재생산을 위한 장치이자 물질적 도구라는 측면에서, 이데올로기는 구조를 작동시키는 요소로서 개인들을 주체로 호명하고 그 재생산의 메커니즘은 설명하지만, 그 전화는 설명할 수 없는 기능주의적인 이론이라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과학’에 대립되는 이러한 부르주아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과, 그가 강조한 혁명적인 프롤레타리아 이데올로기의 양립가능성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는데, 발리바르는 이 난점을 ‘초개인성(transindividuality)’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해결하고자 했다.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말하는 주체화가 집단적인 과정임을 강조하면서, 알튀세르가 말한 이데올로기에 의한 주체의 호명은 어떤 관계들과 공동체성의 효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개인의 개체성은 이미 주어져 있는 어떤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형성되거나 변형”된다는 것이다.

또한 발리바르는 맑스와 알튀세르가 공유하고 있는 지배 이데올로기에 대한 이해를 수정하여,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지배자들의 체험된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오히려 기존의 세계에 대한 인정 또는 승인과 저항 또는 반역을 동시에 함축하는 피지배자들의 체험된 경험”이라고 설명했다. 박 교수는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이데올로기가 “정의, 자유와 평등, 노동, 행복 같은 근대적인 이념들에서 보이는 보편성의 형식을 드러내며, 피지배자들의 이 가상적 보편성의 경험은, 단순한 가상이 되지 않고, 오히려 그 보편성의 이념 때문에, 기존의 질서에 대한 저항의 물질적 토대가 될 수 있”는 점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박기순 교수는 발리바르가 “‘보편성의 정치’, ‘인권의 정치’라는 개념을 주권 개념에 근거한 근대정치의 전화로 설정”했다고 설명했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인권은 인간의 어떤 자연적인 고유한 설질로부터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획득되고, 상실되고, 재규정되는 어떤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권은 어떤 특정한 역사적 상태에 국한되지 않는 초역사적인 것이기도 하다. 이처럼 ‘인권’ 개념이 끊임없는 시험을 통해 재정식화를 요구하는 유동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시민권’ 개념과 구별된다는 것이다. “인권은 어떤 실체적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재해석에 대한 끊임없는 요구 그 자체이다.” 이처럼 인권은 그 내용상 미결정적인 개념이기 때문에 정치공동체에서 법적 합의를 통해 시민권의 형태로 규정될 수밖에 없지만, 그 본성상 늘 시민권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하는 ‘권리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 인권 개념의 난점은 그것이 시민권과 전면적으로 결합할 수도 결별할 수도 없다는 것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박 교수는 발리바르의 이러한 인권 개념은 데리다가 정의(justice)에 관해 말한 것 처럼 어떤 ‘무한성’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인권은 민주주의와 동의어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이 인권 개념 속에서 “민주주의에 특징적인 본질적 무한성”이 표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인권이 무한성으로서 이해되는 한, 그것에 기초해 있는 민주주의 또한 무한성으로 정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발리바르는 민주주의 원리이자 정치의 원리로서의 이 인권을 ‘평등한 자유’ 또는 새로운 조어로서 ‘평등-자유(?galibert?)’라는 개념을 통해 표현했다. 박 교수는 이 개념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첫째, 평등과 자유는 서로 배타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함축하여 서로의 요구를 제한하지 않는 요구의 절대성을 표현한다. 둘째, 평등-자유는 보편성을 함축하여 모든 인간에게로 확장되는 인권, 즉 권리의 보편화를 함축한다. 셋째, 평등-자유는 정치에 대한 모든 사람들의 권리, 정치적 주체가 될 수 있는 모든 권리를 의미한다.”

결국 발리바르에 있어 “인권, 민주주의, 정치는 모두 동의어”가 된다. 그에게 인권은 근대 사회계약론 모델에서 초역사적이며 초월적인 개념으로만 설명되던 ‘전(前)-정치적’ 단계의 자연상태에서 인간이 갖는 권리가 아니라, “시민상태에 내재하고 있는 ‘정치적 계기’로서, 즉 ‘정치의 장소’로서 재규정”되는 권리이다.

 

바디우와 진리의 정치

알랭 바디우(Alain Badiou, 1937~)는 발리바르에 비해 1960년대에 알튀세르가 개진했던 이론적 편향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1980년대 이후에는 알튀세르의 유산을 자신의 철학적 체계 속으로 전유하여 새로운 의미를 가진 철학적 개념들을 생산한다. 박기순 교수에 따르면, “이 전유와 계승이 무엇보다도 잘 드러나는 지점이 바로 주체(sujet) 혹은 주체성의 문제이다.” 즉, 알튀세르는 정치를 “어떤 특정한 원리나 조건에 의해 자동적으로 부여되는 귀결이 아니라”, 주체를 인정하지 않는 구조주의적 관점에도 불구하고 ‘진영 선택’을 통해 이루어지는 어떤 “주체성의 표현”으로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박 교수는 바디우가 알튀세르의 ‘과잉결정’ 개념으로 설명되는 이러한 입장에서 영향을 받아 자신의 ‘존재와 사건’이라는 독자적인 개념을 형성했다고 설명했다.

바디우에게 있어 존재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하나의 대상’으로 존립하는 것이 아니라 통일적인 전체를 거부하는 ‘다양체(le multiple)’로 있는 것이다. 또한 그에게 ‘주체’는 어떤 원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이름을 붙이면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하는 어떤 정치적 ‘사건’의 효과와 귀결을 탐색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정치’에 관한 문제에 있어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주체를 상정하지 않으면서도 ‘주체적인 것’의 사유 가능성을 정초하는 것이었다.

특정하게 주어진 어떤 체계의 원리로서는 설명할 수 없는 정치적 ‘사건’이 발생한다면, 이 사건은 어떤 해석의 대상도 아니며 오직 명명의 대상일 뿐이다. 바디우에게 ‘정치’란 이렇게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승인으로서 이름을 부여하는 명명 행위로부터 시작되어, 이 명명된 사건의 귀결들에 대한 탐색으로 구성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명명의 귀결들과 효과들로서 사후에 구성되어지는 것이 바로 정치적 행위를 통해 생산될 수 있는 것 즉, ‘진리(v?rit?)’이며, 바디우는 이 과정을 ‘진리절차’라고 부른다. 또한 그는 이 사건에 의존해 있는 요소들을 구별하여 사건의 의미를 구성하는 이 모든 절차를 ‘충실성(fid?lit?)’이라고 개념화하며, 이 진리절차를 구성하는 국지적 지점들을 ‘주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바디우에게 정치를 통해 구현되는 “진리는 이렇게 전투적 주체들에 의해서 구성되는 것이다.” 물론 프랑스혁명에서 보듯이 그 사건이 경과되면 정치적 급진성의 의미가 축소되고 왜곡되며 그것의 영향력도 안정화에 접어들지만 말이다.

현대철학에서 거의 폐기된 ‘진리’ 개념을 새롭게 비틀어서 바디우가 의도하는 것은 무엇일까. ‘사건’을 통해서만 생산되어 잠시 드러나는 그 ‘진리’는 지식을 통하여 사후에 표상될 뿐이다. 그리고 진리를 생산해 내는 과정 속에서 각각의 절차는 스스로의 작업이 진리인지 말할 수 없으며, 그저 진리에 무관심하게 고유한 활동에 전념하여 그 사건을 통해 진리의 명명 작업을 수행하는 것이 바로 철학적 작업이 된다. 그런 면에서 바디우에게 ‘철학’이란 정치를 사유하는 장소나 정치이론이 아니라, “정치적 사건들의 조건 속에 존재하는 자기발생적 사유 활동, 행위” 그 자체가 된다.

따라서 바디우의 ‘주체 없는 주체성’ 개념을 맑스주의와의 연관 속에서 설명하자면, 그것은 주어진 상황인 사건들의 연관 속에서 선택과 결정을 내리고 프롤레타리아트적인 입장을 취하기를 요구하는 것이라고 박 교수는 설명했다. 곧 입장의 정당화를 위한 방식이 아니라 해당 사건의 의미를 밝히는 ‘선언’과 그에 뒤따르는 ‘행위’들로 대변되는 ‘전사적인 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바디우는 “맑스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과감하게 선언했다. 그에게 있어 맑스주의는 “비정합적인 전체에 붙여진 하나의 비어 있는 이름이며,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이름들은 독특한 정치적 사유들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하자면, 맑스주의자들 사이에는 어떤 단절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정합적 이론 체계를 가진 맑스주의의 한 경우로서 그들을 볼 것이 아니라, 알튀세르의 지적 투쟁 또한 “정치에 대한 하나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유로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랑시에르와 비분리의 정치

자크 랑시에르(Jacques Ranci?re, 1940~)는 오늘 다루는 세 명의 철학자들 중 알튀세르에 대해 가장 비판적이며, 그 스스로 고백하듯이 알튀세르의 입장에 대한 거부에서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전개해나갔다. 랑시에르에게 있어 알튀세르 입장의 문제점은 정치적 행위자들이 실천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은 사유하거나 사유할 수 없”는 진리라는 측면에서 그것은 ‘엘리트주의’라는 것이었다. 정치적 행위자들로서 대중들의 능력을 불신하고 그들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 수 없다는 입장은 ‘사유하는 지식인 집단’과 ‘사유하지 못하고 생산하는 대중 집단’의 선 긋기라는 것이다. 부르주아적인 것과 프롤레타리아적인 것의 구분, 말할 자격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격리, 교육 받는 자와 가르치는 자의 분리에 대한 저항에서 랑시에르는 ‘출발’한 것이다.

결국 이러한 ‘분할의 논리’와 부르주아 기득권 세력이 늘 사용하는 ‘지배를 위한 언어’에 대한 비판을 통해 랑시에르가 가진 문제의식의 핵심은 ‘대중은 스스로 사유하고 행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랑시에르는 정치적 계몽주의, 정치적 주체에 의한 정치적 해방이라는 인식을 애초부터 거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가 말하는 ‘근원적 평등’은 정치적 목표의 도달점이 아니라, 정치적 행위를 가능케 하는 출발점이다. 그런 점에서 ‘정치적인 것’이 출현할 수 있는 조건으로서 정치적 분할에 관한 조건을 제거하는 것은 가장 근본적이며 가장 정치적인 입장인 것이다.

박 교수는 알튀세르와의 결별 이후 랑시에르가 오랜 시간 동안의 은둔 작업 끝에 내어 놓은이라는 저작을 통해 19세기 중반의 노동자들은 자본이 규정한 그들의 생활양식을 스스로 부정하고 가장 정치적인 행위를 보장하는 자율성을 획득했음을 주장했다고 설명했다. 낮-노동과 밤-휴식의 반복이라는 ‘시간’의 분할을 통해 노동자의 삶을 통제하고 존재양식을 규정하려 했던 자본의 규율에 저항하여, 그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토론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주어진 삶의 조건들을 생산적으로 변화시키는 과정, 자기 자신과 싸우는 과정 속에서 비로소 자신의 힘과 가치에 대해 자각했다. 이러한 정치적 주체화와 그 역량에 관한 질문과 답변에서 박 교수는, “정치적 무대에 오르기 전에 각성과 훈련을 통해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무대 위에서의 행위를 통해 자신의 힘을 재발견하게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랑시에르에 따르면 “한 시대의 획을 그었던 맑스주의의 전통은 (현실 맑스주의 체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과 더불어 가속화되었다는 의미에서) 이제 실패로서 체험되고 기억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맑스주의의 실패는 한 사상적 조류의 패배를 넘어서 “역사의 진보와 혁명에 대한 믿음의 붕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그런데 랑시에르는 “이 붕괴로부터 상반되는 두 가지 현상, 그러나 실제로는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결과가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것은 먼저 “정치에로의 회귀”이며 다른 하나는 “정치의 종말”이다.

즉, 경제적인 힘(생산력)과 사회적인 힘(계급 실천)과 그것의 결합에 의한 혁명이라는 맑스주의의 정식화된 “믿음의 붕괴는 자연스럽게 고유하게 정치적인 것, 사회 및 경제적 차원으로 환원될 수 없는 정치의 고유성으로의 회귀를 추동”했지만, 실상 이러한 흐름은 현실 속에서 정치의 고유한 공간을 “공장이나 거리가 아니라 의회, 정부기관, 사법기관”으로 한정해버렸다는 것이다. 즉, “정치는 사회를 구성하는 상이한 이익집단들 사이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관리하는 전문가들의 업무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대사회의 탈정치화에 맞서 랑시에르는 정치를 재사유하려고 한다. 물론 앞서 말했듯이 그 재사유의 출발점은 젊은 시절의 지독한 스승이었던 알튀세르에 대한 비판지점이었다.

 

다르게 사유하기의 어려움

강의와 질의응답은 세 시간이나 이어졌지만, 이 시간 동안 대표적인 포스트 알튀세리안들로 불리는 걸출한 현대 철학자들의 저마다 다른 생각들을 (축약으로 인한 오해의 덫을 감수하며) 일반인 수강생들에게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수강생들은 프랑스 철학자들을 통해 방금 익힌 새로운 개념과 입장들을 곧바로 현실과 역사 문제에 적용하여 질문들을 쏟아냈다. 그런데 개념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을 근거로 그 개념의 적합성을 따지는 것은 손쉬운 일이지만, ‘다르게 사유하는 방식’을 이해하고 그것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보는 과정은 더 오랜 시간과 열정을 요구한다.

초코파이로 저녁의 허기를 달래가며 강사 선생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는 이 강좌의 모든 수강생들과 더불어 필자도 생각의 지도를 넓혀 나갈 수 있기를 희망해본다. 오늘날 ‘진보 정치’를 표방하는 정당이 지향하고 있던 소중하고 아름다운 가치들이 어떻게 편협한 파벌주의나 전체주의적 문화와 한 몸이 될 수 있는지를 목도하면서, 나의 언어로 그것을 분석하고, 이해하여, 되풀이하지 않는 것은 중요한 사유 과제이기 때문이다. 자기성찰에 대한 불감증과 자신의 믿음에 대한 의심의 부족, 곧 소크라테스가 죽어가며 질타했던 ‘반성하지 못하는 삶’은 저 숱한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민중의 고난을 낳고 파렴치한 악덕을 쌓아 왔던가.

모든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루이 알튀세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⑨

모든 교조주의에 반대한다 -루이 알튀세르[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⑨

 

강사 : 문성원(부산대교수)
후기 :?조배준(한철연회원)

 

강좌의 제2막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총 16강으로 함께 기획한 강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가 이제 절반 넘게 진행되었다. 지난 8강까지의 강의들인 “제1부 맑스에서 프랑크푸르트학파까지”가 근대성의 핵심인 주체 중심적 사유에 근거한 이론들에 대한 일별이자 성찰이었다면, “제2부 알튀세르에서 지젝까지”는 보다 탈주체적인 관점에서 범맑스주의 사상 진영 안에서 현재 진행중인 논쟁들을 점검하고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될 것이다. 그래서 보편적 주체를 중심으로 개진되는 이전의 맑스주의와 20세기 사회주의 체제의 실패와 이론적 혼종성을 통해 맑스주의 내의 탈주체적 사유라는, 제1부와 제2부의 구별 지점을 이해하는 것이 우선 중요하다. 2차 대전 이후 전체주의적인 근대성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 속에서, 맑스주의의 끊임없는 갱신도 모더니티의 새로운 기획 혹은 포스트 모더니티의 구상과 함께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한 현대 사상의 분기점을 살펴보기 위해 제9강에서는 문성원 부산대 교수의 소개로 알제리 출신의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1918-1990)를 만나 보았다. 예민하면서도 자유롭게, 치열하면서도 고통스럽게 살았던 이 문제적 인간은 기존의 맑스주의에 대한 해석을 비판하며 구조주의적 시각에서 맑스를 새롭게 이해하고 맑스주의의 ‘과학성’에 대해 역설했다. 강의 중간에도 그 ‘과학적’이라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어졌는데, 알튀세르가 맑스주의에 차용한 관점들을 이해하는 것은 현대 프랑스 철학 전반과 이번 강의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겠다. 또한 1960년대 맑스주의와 구조주의가 만났을 때 일어났던 화학적 변화와 그것이 가져온 맑스주의의 새로운 전기와 그 한계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도 다음 시간까지 함께 고민해봐야 될 지점일 것이다.

반(反)목적론의 맑스주의

문 교수는 알튀세르의 입장을 설명하며 그가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역사주의, 경제주의, 환원주의, 주의주의(主意主義), 인간주의에 반대하여 자신의 사상을 전개했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한 모든 사상적 대척점을 문 교수는 “반(反)목적론의 맑스주의”로 요약하며, 어느 하나로 규정될 수 있는 목적을 상정할 수 없는 투쟁의 역사라는 관점 속에서 알튀세르는 기존의 맑스주의가 갖고 있던 위기를 돌파하려 했다고 말했다. 역사를 바라보며 어떤 ‘목적’을 배제하면 그 목적을 상정하는 ‘주체’와 그 주체가 가진 ‘의지’를 탈각하게 되고, 보다 넓은 객관적 시야에서 사회 각 영역들의 구조와 각각의 자율성에 대해 주목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알튀세르는 “아직 스탈린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한 소련 중심의 ‘정통 맑스-레닌주의’를 비판하는 한편, 여기에 대한 반발로 서구에서 일어난 이른바 ‘인간주의적 맑스주의’ 또한 거부하였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조주의’에 반대하는 동시에 교조주의에 대한 ‘우익적 비판’에도 반대”한다는 것이다. 문 교수는 알튀세르가 복잡하고 다양한 사회의 모든 문제를 ‘토대’인 경제로 환원해서 설명하려는 ‘경제주의’와, 인간의 자유 의지나 의도 따위를 강조함으로써 그 경제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인간주의’를 “맑스주의 내에 존재하는 상호보완적인 한 쌍의 잘못된 경향“으로 보고, 이 두 가지 모두를 극복하려 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2차 대전 이후 이러한 맑스주의의 사상적 혼란은 이론의 자율성을 훼손시키고 맑스주의 이론을 왜곡하고 빈곤하게 만든 스탈린주의에서 기인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에게 중요했던 것은 맑스주의가 스스로 스탈린 시대의 오류를 해명하고 당시의 상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며 위기의 시대를 벗어나는 것이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 시대의 문제점을 스탈린 개인의 잘못이나 개인 숭배 탓으로 돌리는 것”이나, ‘인간과 소외와 해방’에 관한 들뜬 철학적 담론들은 맑스주의 이론과 관계 없는 비과학적인 비판이었고, 정세에 대한 정밀한 분석을 할 수 없는 서구 맑스주의의 무기력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잉여가치론을 통해 노동가치설과 자본증식을 함께 설명할 수 있었던 맑스의 작업처럼, “맑스의 저작을 제대로 해석하여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확립하고 뒷받침”하는 일이었다.

그 작업에 착수한 알튀세르는 청년기 맑스의 저작에 대해서 “‘주체가 스스로 무엇을 만들어 내고 거기에서 생겨나는 부정적인 면을 역시 그 주체의 힘으로 극복해 나간다’는 근대의 전형적인 주체 중심적 사고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그런 점에서 헤겔의 소외론을 변형시킨 청년 맑스의 소박한 휴머니즘적 입장으로만 맑스주의를 설명하는 기존의 입장은 알튀세르에게 모두 부정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이러한 청년 맑스는 진정한 맑스의 얼굴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포이에르바하와 “헤겔의 영향을 완전히 벗어난 맑스, 반(反)목적론적 역사 과학을 정초한 맑스, 그러나 이 과학을 철학적으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한 맑스를 상정”했다. 그래서 알튀세르는 헤겔주의가 가진 목적론적ㆍ전체론적 사유를 집요하게 비판하며 “맑스의 사상과 헤겔 철학이 사실상 무관하다는 점을 자신의 스승인 (프랑스 철학자)바슐라르의 ‘인식론적 단절’이란 개념을 빌려와 밝히”려 했고, “헤겔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맑스의 과학(변증법적 유물론)과 철학(맑스가 독자적으로 전개한 역사 유물론)이 어떠한 것인가를 보여주”려 했다.

맑스주의의 과학성을 재건하려는 이러한 알튀세르의 분투 과정은 서구 진보 진영에 큰 영향을 끼치며 맑스주의의 다양한 논쟁 지점들을 생산했지만, 때로는 맑스와 맑스주의에 대한 부정확하고 왜곡된 주장을 포함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문 교수는 알튀세르는 이론적 완결성을 지속하지 못하고 말년에 이르러 스스로 맑스의 과학성에 대한 입장을 수정했으며, 그의 이러한 시도는 결국 실패했다고 평가했다. 그의 사상에 대한 다른 평가들도 그가 서구 진보 진영에 준 영향처럼 논쟁적이고 다양한데 “흔히 따라붙는 ‘구조주의적 맑스주의’라는 딱지 말고도, ‘과학주의’, ‘반(反)경험주의’, ‘엘리트주의’, ‘마오(모택동)주의’,” 심지어 “‘신(新)스탈린주의’와 ‘반(反)스탈린주의’의 같이 서로 반대되는” 입장을 낳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투쟁은 맑스주의를 보다 생산적이고 현대사회에 적합한 것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고 사회와 역사를 좀 더 세련되게 분석하는데 참고할 지점들을 제공했는데, 여기서는 강의에서 강조되었던 몇 가지 개념들만 짚어보도록 하자.

‘생산’과 ‘이론적 실천’

알튀세르는 한 사회가 일정한 도달점을 향해 나아간다는 목적론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주의 같은 환원론을 벗어나기 위해 “서로 자립성을 갖는 여러 영역들의 복합체”로서 사회를 조망하려고 했다. 기계상품을 제조하듯이 사회와 역사를 하나의 메커니즘 속에서 ‘생산하고 만들어내려는’ 시도가 결국 파국으로 치달았기 때문에, 그는 하나의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짜맞춰진 이 기계와 같은 구도를 분쇄하려고 했다.

알튀세르/ 출처: http://blog.aladin.co.kr/sinthome/4021316

그래서 알튀세르는 그 ‘생산’이라는 지극히 근대적인 개념을 반(反)목적론적인 것으로 변형하여 사회의 각 영역에 도입하여, 각 부문이 상대적인 자립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했다. 여기서 말하는 ‘생산’은 어떤 주체에 의해 추진되거나 지배되는 근대적인 의미의 생산이 아니라, 주어진 생산 수단이 중요한 역할을 하는 보다 객관적인 생산 형식을 말한다. 문성원 교수는 “이런 점에서 알튀세르의 철학을 모던포스트모던의 경계에 선 역사철학으로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 교수는 알튀세르가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과학, 이데올로기 영역 등도 생산의 구조를 가진다는 점과, “경제 영역이 다른 영역을 일방적으로 규정하거나 ‘결정’하거나, 모든 것을 경제 문제로 ‘환원’할 수 없음”을 강조했다.

물론 알튀세르에게 있어 때로는 정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할 때, 한 사회 속에서 다양한 실천 영역을 심급이라고 부르더라도 전체의 방향을 규정하는 것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의 결정’이다. 알튀세르는 이러한 구조 내의 인과성을 ‘중층결정’이라는 말로 설명하려 했다. 결국 그는 사회를 자립적인 영역들이 ‘구조적 인과성’ 속에 얽혀 있는 거대한 ‘복합적 전체’로 파악하는 것이다.

또한 알튀세르는 학문 영역의 과학이나 이론적 활동도 하나의 ‘생산’ 활동으로, 곧 ‘이론적 실천’으로 취급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정치나 문화의 영역도 경제 영역과 마찬가지로 ‘생산’이나 ‘실천’이라는 구조를 지니는 것으로 간주하면, 일방적인 환원론이 들어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튀세르에게 있어 ‘과학’은 “어떤 외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기준은 과학 자체 내에 있는 것이며, 과학의 특성은 그 차원에서 새로운 지식을 ‘생산’해 내는 데 있다.” 이것을 알튀세르의 ‘반(反)경험주의 과학관‘이라고 부를 때, “과학이 생산한 지식이 실재의 대상에 대한 경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참된 지식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는가?”

그는 이러한 “지식과 실재 대상 사이의 관계를 ‘전유(專有;appropriation)’라는 말로 설명한다.” 지식이 실재 세계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뜻이다. 일반적으로 실재의 대상은 지식 생산과정에 대하여 ‘절대적인 준거점’으로 남아서 지식 생산의 영역은 실재 대상 영역에 대한 지식을 산출해 낸다. 그래서 우리가 실재의 대상에 대해 가질 수 있는 지식은 이렇게 생산된 지식뿐이다. “이 지식을 넘어서서 실재 대상과 이 지식 사이의 실제적인 관계를 조망하려는 것은 헛된 욕심이다.” 결국 ‘전유’라는 것은 지식이 경험이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식임을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는 표현인 것이다.

계급은 계급투쟁에 의해 구성된다.

‘구조주의에서 말하는 구조와 인간의 관계’에 관한 질문이 나오자 문 교수는 이렇게 답변했다. “알튀세르는 ‘주체’로서의 인간을 거부하고, 역사는 주체의 의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 그치지 않고, 아예 주체 개념 자체를 거부한다. 그런 점에서 그에게 있어서는 특정한 ‘계급’도 변혁의 주체가 아니라, 주어진 구조와 상황 속에서 ‘생산’되는 것입니다. 물론 그도 역사는 계급투쟁에 의해 발전한다는 생각을 버리진 않지만, 그 과정은 어떤 각성된 주체가 아닌 계급투쟁을 통해 구성되는 계급에 의한 것이지요.” 알튀세르에게 역사란 “주체도 목적도 없는 과정”으로서 “승리가 보장되지 않는 투쟁”이라는 것이다.

한편 알튀세르는 맑스주의 내에서 이데올로기 개념을 재해석하여 근대 세계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를 가능케 했다. 고전적 맑스주의에서 허위의식으로서의 이데올로기는 공산주의 사회에서 사라지는 것이었지만, 알튀세르는 목적론에 대한 거부 속에서 이데올로기는 실재 존재양식에 대한 개인들의 상상적 관계를 표현하는 것으로서 그 어떤 사회에서나 존재하는 것으로 보았다. ‘무의식은 영원하다’는 프로이트의 말처럼 그에게 있어서 이데올로기는 역사가 아닌 물질적 존재를 통해 실현된다.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로 불리는 학교, 교회, 공장, 가족 등에서 이데올로기는 ‘부름’과 그에 대한 ‘응답’의 과정으로 개인을 주체로서 호명한다. 즉, 이데올로기는 주체를 생산해낸다.

결론적으로 문성원 교수는 알튀세르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그는 맑스주의 안에 있는 목적론적이고 결정론적인 경향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비록 자신은 구조주의자가 아니라고 말했지만) 구조주의적 문제틀을 도입함으로써 ‘과학적’ 맑스주의를 새롭게 확립해 보려 한 철학자이다. 하지만 이러한 기도는 애당초 이질적인 것을 결합하려는 무리를 안고 있었다.”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이 알튀세르의 말처럼 목적론적인 색채를 가진 것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 모순의 설정을 떠나서 맑스주의가 맑스주의로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의 시도는 맑스주의의 “한계와 맞닿은 극한적이었던 것”이며 그의 작업은 19세기 사람인 맑스를 20세기의 탈근대적 공간에 치열하게 투영시키려 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소련과 동구권이 몰락하고 90년대에 한국사회에 본격적으로 소개되어 ‘인기 있었던’ 알튀세르가 오늘날에는 왜 자주 회자되지 않는 것일까?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던 당시 시대상황도 한 몫 했겠고, 우루루 달려들었다가 ‘유통기한’이 다 되면 가차 없이 창고에 넣어 버리는 한국지성계의 고질적 관행도 한 원인일 것이다. 그런데 알튀세르를 읽다 보면 결국 궁극적인 물음으로 되돌아 올 수밖에 없다. ‘결국, 무엇이 맑스주의인가?’ ‘결국 중요한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면, 맑스주의는 무엇이어야만 하는가?’ 한 때 ‘다시 맑스로 돌아가자!’라고 소위 맑스주의자들은 외쳤었지만, 문 교수는 강의 말미에 “맑스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제 강좌 후반부로 갈수록 다시 질문을 벼릴 필요가 있겠다. 맑스를 버리면 맑스가 달리 보일까? 다음 시간에는 알튀세르의 성과와 한계 위에서 그의 제자들과 후학들이 어떤 사유를 종횡무진 펼치고 있는지 살펴볼 것이다.

 

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야만과 불통을 넘어서 -프랑크푸르트학파[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⑧

 

강사 : 이현재(서울시립대 HK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서유럽의 혁명이 좌절된 후 서유럽에 남겨진 좌파들은 난감한 문제에 직면했다. 자본주의는 생각보다 견고했고 무너지기는커녕 수시로 모습까지 바꿔가며 저항에 적응해갔다. 그러는 한편 자본의 지배는 노동자의 처우와 임금문제를 넘어 생활세계 깊숙이 들어와 그 손을 뻗히기 시작했다. 일상에 대한 자본주의의 지배와 그 지배법칙은 이들에게 자본주의와 사회에 대한 다른 접근방식을 고민하게 하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을 매개로 나타난 대표적인 학파가 프랑크푸르트학파다.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자본주의의 현대적 지배양식에 대해 연구를 하였다. 그들은 서구 유럽에서 체계보다 일상에 더욱 주목함으로써 수정주의라 비판받기도 했지만 그들이 진행한 비판이론은 자본주의가 펼치는 지배법칙을 다각도로 고민하는데 여전히 좋은 실마리를 안겨주고 있다.의 1부 마지막 시간인 8강에서는 이현재 서울시립대 HK교수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의 계보를 추적하며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자유를 원한 계몽, 양화의 노예로

2차 대전의 참상을 겪은 호르크하이머(1895~ 1973)와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전쟁과 테러의 참화 속에서 ‘인류는 왜 야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가?’라는 질문은 던진다. 소크라테스 이래 끊임없이 발전했다 자부하는 인간의 이성과 도덕이 어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렀을까? 이 교수에 따르면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계몽의 변증법』에서 소위 신화를 극복했다고 간주되었던 계몽이 실제로는 신화론적 계기들에 여전히 얽매 있어 이같은 결과가 발생했다는 진단을 내린다고 한다. 즉 야만의 상태인 신화를 극복하고 이성의 상태인 계몽이 나타났지만 그들이 보기에는 그 계몽 역시 여전히 신화의 상태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그들에게 신화의 상태는 ‘황금의 시기’가 아닌 야만의 상태로 폐쇄적이며 적나라한 지배법칙을 가지는 부정적 상태라 설명한다. 따라서 계몽의 시기인 근대 역시 폐쇄성과 적나라한 지배법칙의 시기라는 것이다.

 

이 교수에 따르면 근대 계몽주의는 주체와 객체, 문화와 자연을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전자에 의해 후자가 지배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는 주체가 객체에 비해 더 큰 권한을 가지며 객체를 지배한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바로 이러한 것이 지배법칙으로, 한편으론 야만으로 작용한다고 보는데 이 교수는 『계몽의 변증법』저자들이 인간이 인간 밖에 있는 자연과 사물에 대한 지배, 더 나아가 자신의 육체와 타자에 대한 지배를 계몽이 만들어 내는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고 말한다.
계몽의 기획 속에서 인간은 자연을 사물과 동일화시킨 후 이를 인과율의 법칙에 따라 파악하고 이용하려한다. 이 교수는 바로 여기서 계몽의 문제가 발생한다고 보는데 사실성과 유용성, 계산 가능성과 교환가능성이 없는 자연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감금되고 배제된다는 것이다. 인간은 대상의 효용성을 극대화하기위해서만 자연을 이용하기 때문에 대상으로서 자연은 주체를 위한 순수한 도구로 전락한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말하는 이성의 도구화이다. 이 교수는 이것이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자본주의비판으로 이어진다고 말하는데 자본주의의 가장 큰 미덕인 효율성 추구의 근간에 바로 계몽과 이성이 자리한다고 프랑크푸르트학파는 보고 있다는 것이다. 즉 계몽은 자연에 의한 인간 지배를 인간에 의한 자연 지배로 역전시킴으로써 인간을 자연의 노예에서 주인으로 만들었지만 이는 곧 인간에 의한 인간의 지배로 귀결되었다. 이런 계몽의 기획은 살아있는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까지도 죽은 자연 사물 혹은 객체로 취급하는 과학과 시장 지상주의로 빠져 지배법칙으로 타락했다.

만약 이성이 도구화됨에 따라 비판의식이 상실되었다면 우리는 갇힌 이성을 어떻게 구할 것인가? 이 교수는 이에 아도르노는 이성 자체의 폐기가 아닌 더 합리적인 이성을 꿈꾼다고 말한다. 즉 계몽의 폐기가 아닌 미완의 계몽을 완성하자는 것이 아도르노와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주장인 것이다.

 

내 안의 파시즘, 주체와 객체의 변증법을 넘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아도르노는 당시 미국에서 유행한 실증주의적 사유가 사실을 입증하고 현실을 긍정하는 것으로만 작동있음을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또 다른 대표적 저서 『부정의 변증법』은 이러한 실증주의에 맞서기 위해 그가 변증법을 선택하고 그만의 이론을 진행한 것이라 설명한다.

아도르노는 헤겔의 변증법과 당시 소련의 유물론적 변증법을 모두 비판하며 자신만의 부정변증법을 발전시킨다. 그는 헤겔의 변증법을 주관의 선차성을 주장하며 객체를 이미 주체를 통해 개념화된 것으로 본다고 비판한다. 이는 주관 밖에 있는 비동일성의 이성을 만들지 못하고 주관 안에서 동일성을 유지할 뿐이라고 한다. 즉 주체 밖에 있는 객체를 모두 주관화하여 타자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가 『계몽의 변증법』에서 비판한 계몽의 지배법칙과 유사하다.
그리고 객체의 독립성과 주체의 무용(無用)을 말한 소련의 변증법은 어떤 것을 통해서도 매개되지 않은 대상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의식과 사상을 사물의 반영과 모상으로 환원시킬 위험을 가지고 있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이는 주체의 자발성을 부인하는 결과를 낳고 객관적임을 자칭하는 공산당이 파시즘적 독재 세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고 한다.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

이 교수는 아도르노의 변증법을 비동일성의 변증법이라 소개하며 그가 헤겔과 달리 객체의 우선성을 인정하지만 주체의 권좌를 객체가 대신한다는 것은 아니라 설명한다. 즉 아도르노가 말하는 “객체는 순수한 사실성(Faktizitaet) 이상의 것”이기 때문에 그에게 객체는 주체를 통해 매개되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그는 주체의 동일성 체계에 동화되지 않는 비동일적 객체를 인정한다. 객체는 주체의 안과 밖에서 다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이로써 아도르노가 모든 것을 자신의 안에서 구성하고 이해하려는 주체의 횡포를 주체에게 포섭되지 않는 비동일성에 대한 인정으로 극복하고 한다고 한다. 즉 타자, 이방 등으로서 대표되는 비동일성에 집중함으로써 계몽의 야만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생활세계의 식민화와 토의 민주주의

주체와 대상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이성의 문제를 진단했던 1세대와는 달리 위르겐 하버마스(1929~ )는 의사소통적 이성 즉 주체가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갖는 이성에 주목한다. 하버마스는 사회를 물질적 차원인 체계와 상징적 차원의 재생산인 생활세계로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적, 정치적인 구조로서 체계와는 달리 문화, 사회, 인격 등을 구성요소로 하는 생활세계를 사회학적 차원으로 확대하고 체계와 생활 세계는 다른 영역이므로 구분해야하며 자본주의에서는 체계가 생활세계를 침범하여 손상시켰다고 보았다. 따라서 하버마스는 생활 세계의 질서가 파괴된 것이(을) 작금의 가장 큰 문제로 인식하고 생활세계의 규칙을 왕성하게 복구하여 생활세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시민사회, 공론의 장, 토의민주주의를 발전시킴으로써 “생활세계의 식민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버마스는 이러한 토의민주주의의 핵심원리를 의사소통적 행위라 한다. 이 행위는 인지-도구적 행위, 도덕-실천적 행위, 미적-표현적 행위 등의 측면을 가지는데 바로 이 세 가지를 통해 상호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즉 이는 도구적 이성과 구분되는 포괄적 이성으로서 타자를 토론의 멤버를 인정하고 비판과논거를 통한 토론 및 정당화를 가능함으로써 합리적 논의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이러한 합리적 의사소통 이론에는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재분배와 체계 자체에 대한 외면은 대표적으로 좌파진영에서 제기되는 문제이다. 이뿐만 아니라 생활세계의 침식만을 병리현상으로 보면 동성애, 이민자, 소수집단 등 다양한 사회영역에서 발생하는 고유한 갈등구조를 무시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 점을 이 교수는 하버마스의 한계 중 하나로 지적한다. 이어 이 교수는 하버마스가 생활세계는 합리적으로 흘러갈 수 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을 던지며 생활세계를 이상화시킴으로서 생활세계 내에 발생하는 문제에 대한 우려를 표했다.

 

생활 속 투쟁, 인정투쟁

악셀 호네트(1949 ~ )는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식민화뿐만 아니라 규범적 혹은 사회 세계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정체성 무시까지도 포괄하는 이론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 교수는 3세대 프랑크푸르트학파인 호네트를 소개하면서 그에게 있어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는 사회적 인정을 통해 성공적인 자아실현이 이루어질 수 있는 사회라 설명한다. 따라서 그에게 도덕 발전을 이루기 위해 필수적인 것은 인정투쟁이라고 전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인정투쟁은 무시에서 비롯된다고 하는데 무시는 자신감, 자기존중, 자기존경에 대한 훼손이라고 한다. 자신감은 자신이 충분히 배려 받을 가치가 있다고 보는 등 물리적 욕구등을 포함한다. 또 참정권과 같은 자율성에 관련한 것이 자기존중이며,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는 명예와 같이 특수한 수행에 대한 인정욕구가 바로 자기존경이다. 호네트는 이러한 3가지 욕구에 대한 무시가 사회적 병리를 낳고 이를 극복하고자 인정투쟁이 발생한다고 한다. 이 교수는 이러한 점이 하버마스가 설명하지 못한 생활세계 속의 차별, 예를 들면 이민자들에 대한 생활세계 속의 문제를 호네트가 설명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평가한다.

악셀 호네트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이전 마르크스주의자들과 확연한 차이들 보인다. 그들이 자본주의체계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하고 있음은 분명하지만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에 적극적이지 않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수정주의로 폄하하기에는 그들이 던지는 메시지의 긍정성이 아쉽다.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인간해방은 단순히 물질적 문제의 해결이 아닌 자기관계를 해방하는 것으로 본다. 그들은 체계에 대한 공격과 재분배를 통한 해방담론이 고려하지 못한 미시적 해방 즉 생활공간에 발생하는 소외와 문제들을 인간해방의 주요테마로 가져오며 ‘해방’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다시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이 교수는 재분배에 대한 담론이 혹시 물리적 계산, 즉 도구적 양화적 이성에 기울지는 않았는지, 또 재분배 투쟁도 인정투쟁의 문제의식과 무관해 질 수 없다는 호네트의 말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이 교수는 낸시 플레이져가 여전히 재분배의 유효성은 주장하며 호네트와 논쟁을 벌이듯 재분배와 생활세계에 대한 문제는 소위 ‘해방’을 말하는 담론에서 깊은 고민 속에 다루어져야 한다고 말하며 이날 강의를 마쳤다.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고통의 기억과 유물론적 구원의 유토피아 ? 벤야민[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⑦

 

강사 : 연효숙(중앙대 외래교수)
후기 : 이원혁(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포기되지 않는 구원, 그러나 다른

마르크스주의는 인간의 구원을 꿈꾼다. 그리고 그 구원을 위해 기존의 정치, 경제체제와의 투쟁은 물론 학문과 신학에 대해서도 맹렬한 투쟁을 진행해 왔다.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적 유물론은 내세나 관념의 혁명이 아닌 현실의 혁명을 꿈꾼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대부분 마이키아벨리식의 노선을 꿈꿔왔다. 마키아벨리는 인민의 집합적 의지를 모아내는 것이 정치라 하며 그를 위한 현실적 힘에 대해 그의 관심을 집중했다. 레닌의 전위정당과 로자의 자발성은 이러한 맥락을 함께한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인간의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있다. 때문에 그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하는 것에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다.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7번째 시간의 주인공인 발터 벤야민(1892~1940)이 바로 그이다. 그는 인간의 구원을 꿈꾸지만 마키아벨리적이지 않으면서도 관념적이지 않은 유물론적 구원을 꿈꾸는 마르크시스트이다. 지금까지 ‘마르크스주의사상사’에서 다룬 사상가들과 확연히 다른 그는 혁명을 혁명하고자 한 혁명가가 아닌 듯싶다. 이번 강연은 연효숙 중앙대 외래교수가 발터 벤야민과 우리를 이어주며 그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다.

발터 벤야민은 1892년 부유한 독일계 유대인 집안에 태어나 1940년 나치를 피해 탈출하다 스페인 국경에서 피할 수 없는 나치의 추격이 다가오자 다량의 아편을 복용하여 이른 나이에 사망한 불운의 지성인이다. 그는 베른대학에서 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프랑크푸르트대학에서 교수자격시험논문으로 제출한 이 탈락하자 학계에 머물기를 포기하고 문화평론가로서 지적 작업을 지속하였다. 이후 그는 잘 알려진 과 ,,등을 저술했다.

연 교수는 그의 글쓰기와 사유방식의 독특함을 설명하며 그러한 파격이 당시 근대적 논증방식에 익숙한 학계에서 받아들여지기 쉽지 않았고 그것이 교수자격시험논문의 큰 탈락사유였을 것이라 말한다. 그의 자유롭고 파편적인 글쓰기 외에도 연 교수는 그의 또 다른 파격으로 사유의 독특함을 뽑았다. 그는 전통과 전통의 문법을 어기는 것 둘을 종합하여 사용했는데 겉으로는 충돌되는 것을 절묘하게 결합시켜서 생산적인 결과물을 내놓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이러한 이종적 종합의 대표적인 것으로 심미성과 사회성, 예술과 정치, 예술과 종교, 신화와 계몽 등을 뽑으며 그의 양면성의 사유를 설명했다. 벤야민의 이러한 사유의 독특함이 벤야민으로 하여금 마르크스와 그의 혁명을 도식적인 프레임이 아닌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게 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나 싶었다.

진보로서 역사? 파국으로서의 역사!

연 교수는 벤야민의 사회철학적 사상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의 마지막 글인 를 중심으로 강연을 이어갔다. 이 저작은 18개의 짧은 테제로 구성되어있으며 벤야민의 사후에 출간된 글이다.

그는 이 저작에서 종교와 정치의 결합을 시도하는데 연 교수는 이를 유대인인 벤야민이 유대교의 시오니즘과 메시아니즘을 버리지 않는 한편 역사적 유물론과 마르크스주의를 거기에 결합시키려는 시도였다고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억압된 계급, 집단적 주체, 노동자 계급을 강조하며 현재 상태를 혁명적으로 전복하려는 정치적 의식을 유지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 맥락을 잇지만 종교를 인민의 아편으로 여긴 마르크스와 달리 유대교적인 메시아니즘을 벤야민이 결코 포기하지는 않는다고 말한다.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벤야민이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지점을 연 교수는 역사와 시간에 대한 관점을 뽑았다. 벤야민은 역사주의와 헤겔과 같은 목적론을 강하게 거부하며 역사적 연속성과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론을 비판했다. 그는 역사의 진보를 믿은 낙관주의적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는 역사주의를 비판했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이 이러한 진보에 경도되어 있음을 비판했다. 벤야민은 진보주의가 오히려 현재의 고통에 대해 눈을 감는다고 보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가 나타난 그 당시는 도무지 역사의 진보를 신뢰할 수 없는 시기였다. 이에 벤야민은 오히려 파국(Katastrope)을 주장한다. 이는 니힐리즘적 역사관으로 흐를 소지가 있으나 연 교수는 벤야민이 과거와 지금시간(Jetztzeit)의 인식 가능성이 결합함으로써 시간이 정지하는 구원의 유토피아를 이야기하는 것이라 설명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세계의 연속성을 부정하며 단절적인 역사관을 내세움으로써 지금의 고통을 비로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은 인과적이며 직선적인 객관적 논증이 아니라 주관적 심미로서 나의 고통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마르크스주의 가장 중요한 관심인 현실의 고통을 벤야민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자들과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고자 했던 것이다.

다음 그림은 1780년 볼프강 폰 켐펠렌이라는 사람이 고안한 자동 장기기계이다. 이 기계는 명령자가 지정하는 쪽이 이기게 되는 신기한 자동으로 장기가 둬지는 기계이다. 하지만 오른쪽 그림과 같이 사실은 장기명수 난쟁이가 숨어 승부를 조작하는 것에 불과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이 여기에 아이디어를 얻어 정통 역사유물론을 비판하다고 하는데 벤야민은 진보를 믿는 역사유물론이 항상 승리하는 것은 난쟁이를 고용한 장기의 명령자와 같이 신학이라는 난장이를 고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는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신학이 가지고 있는 구원의 신화와 다를 바 없다고 여기며 진행한 비판으로 보인다.


(오른쪽이 난쟁이가 숨어있는 자동기계장치이다)

파국과 새로운 천사

연 교수는 파울 클레의 에 대한 벤야민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기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와 시간과는 다른 그만의 인식에 대해 소개했다. 벤야민은 의 9번째 테제에서 “천국으로부터 폭풍이 불어오고 있고, 그 폭풍은 그의 날개를 꼼짝달싹 못하게 할 정도로 세차게 불어오기 때문에 천사는 그의 날개를 더 이상 접을 수도 없다.”라고 말했다. 연 교수는 여기서 천사의 눈은 휘둥그레지고 날갯짓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마치 자기가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금방이라도 멀어지려하는 듯한데 벤야민이 말하는 천사를 두렵게 하는 것은 ‘천국’으로부터 불어오는 ‘폭풍’이라고 한다. 여기서 천국이 의미하는 것은 미래이며 폭풍은 진보를 말한다. 그리고 천사는 역사적 유물론자를 말한다. 보통 천국은 인간 뒤에 있으며 인간은 미래에 천국으로 다시 돌아간다. 즉 전통적으로는 과거-현재-미래의 직선적 시간 속에 항상 미래를 향하는 인간이 고려되지만 벤야민과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이 그림의 천사는 현재를 구원하기 위해 미래의 공간(천국)으로부터 다가오는 진보를 부정하고 오로지 파국으로서의 현재 자체를 중시한다. 벤야민의 천사는 미래에 살지 않고 현재에 살고 있는 현재에만 역사적 유물론자로서 존재한다. 이 역사적 유물론자는 통상적인 유물론자처럼 역사를 진보의 아름다운 가상, 발전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어두운 파국으로 보며 진보에 맞서고, 진보의 폭풍우에 맞서는 자이다. 연 교수는 이러한 해석은 역사를 파국으로 보고자 한 벤야민의 독특한 시선을 설명해 주며 그가 강조하는 것은 미래가 아닌 지금의 고통과 현재의 파국이라고 말했다.

▲ 파울 클레의 ‘새로운천사’

 

기억과 찰나적 시간으로서 역사

벤야민은 진보의 역사주의는 과거-현재-미래라는 뉴턴식의 직선적 시간개념에 갇혀있다고 보았다. 직선적이고 연속적인 시간 개념과 달리 벤야민은 프루스트의 에서 보여진 무의지적 기억으로서의 시간 개념에 근접하여, 갑작스럽게 과거가 현재에 무의도적으로 기억되는 새로운 현재의 시간을 발굴하고자 했다고 연 교수는 분석했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과거의 사건은 과거라는 기억의 박물관에 저장되어 있는 불변의 고정된 원인으로 존재하는 것 아니라고 연 교수는 이야기한다.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기억은 현재의 순간과 함께 숨 쉬는 것이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따라서 벤야민에게 시간은 연속적이지 않으며 순간이며 찰나이다. 그래서 기억 역시 지금 매 순간 순간에 떠올려진 장면이며 그것이 현재에서 포착된 지금진리이다.

이어 연 교수는 벤야민을 계속 인용하는데 벤야민은 “억압된 자들의 역사는 불연속성이다. 역사의 연속성은 억압하는 자들의 연속성이다.”라고 한다. 이는 벤야민이 거대 시간에 의해 구조화될 수 없는 순간을 상상적이고도 현실적인 차원에서 역사를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연 교수는 그렇다고 벤야민이 객관적인 시간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다만 객관적인 역사적 사건이 순간적으로 나에게 어떤 식으로 사건이 이미지화되어 나에게 다가와 의미가 되고 파국에 이르렀는가를 벤야민이 중시한다는 것이다.

 
혁명의 시간에서 시간의 혁명으로

유물론과 유토피아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유물론은 현실성을 이야기하는 반면 유토피아는 어원상 ‘여기에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야민은 유토피아를 지금여기에 가능하게 하고자 한다. 벤야민은 “역사는 구성의 대상이며, 그 구성의 장소는 동질적이고 공허한 시간이 아니라 지금시간으로서의 충만한 시간”이라고 말한다. 즉 메시아적 시간은 연속성의 모델로서 알 수 없는 미래가 아니라 지금시간(Jetztzeit)이라는 것이다. 벤야민에게 메시아적 시간은 마르크스의 계급 없는 사회와 동일시된다. 연 교수는 이러한 사유를 통해 비로소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 사유가 중지된다고 보았다. 연 교수는 벤야민의 지금시간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비동시적인 시간이 함께 존재하는 역사적 시간이며 유일한 시간으로 보았다. 따라서 연 교수는 벤야민에게 직선으로서의 시간은 허구적이며, 비현실적이고, 운명적인 시간으로 비판받을 수밖에 없음을 설명한다. 이러한 벤야민의 시간관은 매순간 메시아가 역사 속으로 들어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는다. 즉 벤야민에게 메시아는 역사적 결론으로서 미래에 강림하는 것이 아니라 파국으로서 매순간 지금시간에만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연 교수는 마르크스가 ‘혁명의 시간’을 말했다면 벤야민은 ‘시간의 혁명’을 이야기한다고 한다. 벤야민은 이러한 시간이 주관적 시간이고 리얼리티가 쇠퇴하는 것으로 보여도 개의치 않는다. 그러나 연 교수의 말을 이해하자면 과거와 현재, 객체와 주체간의 유물 변증법적인 사고를 지향한 마르크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리얼리티인데, 이를 벤야민은 마르크스의 다른 계승자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지금시간이라는 가장 현실적인 것을 잡으면서 리얼리티를 완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이 순간과 파국 그리고 구원이 주는 의미가 많이 있겠지만 강의를 들으면서 그 동안 한국에 팽배했던 발전주의들을 되돌아보게 했다. 장밋빛 미래를 위해 당연시되어 왔던 현재의 희생과 고통이 벤야민의 생각들과 오버랩 된다. 장밋빛 미래는 언젠가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는 한 줌 거리에 있으면서 항상 과거와 현재를 연료로써 태우기를 바랐다. 이러한 도식에서 과감히 벗어나고자한 벤야민은 여전히 많은 공감을 준다. 그래서일까 요절한 모든 선지자들이 그렇듯 벤야민이 좀 더 많은 이야기와 목소리를 우리에게 전했으면 어땠을까 라는 공상을 해본다. 오늘도 4대강은 미래를 향해 공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