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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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보예 지젝- 지젝이 만난 레닌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사 : 이병창(동아대학교 명예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지젝과 정신분석학?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이 공동기획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서 마지막으로 만나본 사상가는 지난 6월말에 한국을 다녀갔던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 1949~)이었다. 이날 강사로 나선 이병창 동아대 철학과 명예교수는 강좌 수료식으로 인해 더욱 짧아진 강의시간에도 불구하고, 정신분석학이라는 옷을 입은 지젝이 어떻게 레닌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간명하게 설명하려고 했다. 라캉, 헤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사상적 기반으로 하여 이 시대가 앓고 있는 ‘환상’과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를 종횡무진 들추어내고 분쇄하는 지젝은, 껍데기 밖에 남지 않은 이 자유민주주의 시대에 ‘잃어버린 대의를 옹호하며’ 다시 레닌을 호명한다. 그는 의식과 가치관마저 규격화된 이 세계에서 회복할 수 없는 ‘파국’을 피하기 위해, 과감하게 다르게 사유하고 행동하자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점에서 ‘현존하는 가장 위험한 철학자’라는 수식어를 들을 자격이 있는가.

이병창 동아대 명예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이병창 교수는 먼저 지젝이 즐겨 사용하는 정신분석학의 기초적인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라캉과 프로이트의 차이를 강조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자아’를 강조하거나 ‘치료’를 중시하는 병리적 관점보다는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자기이해를 목적으로 삼아 개인의 활동성을 확장하는데 정신분석의 주안점을 둔다. 또한 라캉은 욕망이란 사실 나 자신으로부터 연유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대타자의 욕망’을 욕망하는 것이며, 그 결핍으로서의 욕망이 자연적이거나 생물학적인 원인을 갖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이론을 개진했다. 또한 고통과 쾌락이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는 ‘욕망의 이중성’을 강조한 것도 라캉의 강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젝이 라캉에게서 주목하는 것은 상징계에서 욕망을 충족하는 신경증 환자가 자유연상을 통해 늘 도착하게 되는 어떤 지점, 바로 의식과 무의식을 매개하는 ‘매듭점’이다.

이 지점에 이르면, 환자는 그것을 마주하기를 두려워하며 고통을 느끼고 심지어 그것에서부터 도피하려고 한다. 바로 그곳이 그 사람의 내적 질서가 무너지는 곳이며, 동시에 그것은 이 세계의 한계선과 어떤 틈, 균열, 갈등을 드러낸다. 또한 그 지점은 이 세계가 어떤 상징적 가치들로 이루어진 곳인지 보여주는 곳이자 자아가 욕망으로 드나드는 출입구이며,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넘어가는 ‘구멍’이기도 하다. 즉, 무의식적으로 억압된 욕망이 분출되는 곳이 그곳이라면, 언어가 분리되거나 신체가 마비되거나 노이로제에 걸리는 환자의 모든 증상은 이런 욕망의 분출을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라캉은 보았던 것이다. 한편 환자는 이런 ‘증상’을 즐기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이 지점은 환자의 모든 현실적인 삶을 구성하는 근본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질문했다. “그 분열된 틈을 봉합하기 위해, 우리는 이 현실을 겪어 내고 일상을 영위하고 있으며 삶의 성취를 쌓아온 것은 아닐까요?”

 

‘환상’과 이데올로기 비판

지젝은 이러한 라캉의 이론을 이데올로기 비판에 적용했다. 기존의 이데올로기론은 법철학을 비판(마르크스)하고, 물신론(루카치), 시민사회의 헤게모니(그람시), 호명이론(알튀세르)을 분석하는 것이거나, 자연적인 기호(바르트)로서 이데올로기를 간주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젝은 앞서 설명한 ‘틈과 균열’을 사회적 관계 속에서 매끄럽게 만드는 허위의식과 ‘환상’을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으로 부르며 그것이 작동되는 방식을 비판했다. 곧 현대사회의 이데올로기는 자본주의 내부에서 자본과 노동의 대립, 가족 내부에서 사랑과 계약의 대립 같은 갈등을 봉합하기 위한 “정신병적인 환상이자 그 틈이 도드라지지 않도록 메우는 장치”라는 것이다.

지젝이 보기에 나치가 스스로 증폭시켰던 유대인에 관한 음모론과 피해의식, 9.11 테러 이후 미국이 생산한 알카에다나 대량살상무기에 관한 음모론은 결국 내부의 균열을 외부의 침입으로 해소시키고 이것을 적대적인 공격성으로 전도시키기 위한 대표적인 이데올로기이다. 이렇게 체제가 가진 모순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에서 이 틈을 메우기 위한 전도현상은 역사 속에서 반복적으로 출현했던 것이다. 지젝은 파시즘 또한 “자본주의에 내재된 증상”으로서 이는 “우연한 일탈이 아니라 억압된 것의 복귀로 드러나며 그 진리로 들어가는 열쇠”라고 말한다. 이병창 교수는 이렇게 한 사회의 균열된 지점을 “은폐하기 위해 이 환상은 주로 외부 적의 침입이나 음모론을 퍼뜨리는 양상을 취한다”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결국 지젝이 시도하는 이데올로기 비판이란, 그 사회에서 “억압된 과잉을 드러내는 것이며, (체제) 전체에 그 허위성을 고발하는 보충물을 덧붙이는 것”이 된다.

 

레닌주의의 계승

지젝은 오늘날의 세계상이 ‘사회적 꿈의 종말’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 실질적 사상의 자유는 현재 지배적인 자유민주주의적이고 탈이데올로기적인 합의에 의문을 제기할 자유를 의미하며, 그것이 아니라면 아무런 의미도 없다.”다른 사회정치적 질서를 상상하려는 모든 시도를 미리 배제하고 있는 사회는 생각을 금지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세상은 모든 가치들과 정보가 드러나고 있는 것 같지만, 또한 모든 실험이 가능한 것 같은 자비로운 세계처럼 보이지만, 작금의 현실은 “새로운 굴라크(강제수용소)”를 향해 가고 있다. 그래서 레닌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연구나 레닌주의에 대한 이데올로기적 판단은 새로운 세계에 대해 꿈꿀 수 있는 권리를 박탈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3가지 개념에 주목했다고 말하며, 그것을 ‘진리의 권리’, ‘당파적인 진리(경험적 유물론의 진리)’, ‘해방적 폭력’으로 요약했다. 먼저 진리로 나아갈 권리로 부를 수 있는 첫 번째 입장에 대해 살펴보자. 지젝은 레닌을 통해 “결과적으로 …… 레닌의 유산은 진리의 정치이다. …… 우리는 진리 주장 자체를 감추어진 권력 구조의 표현으로 치부하는 포스트모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의 이데올로기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은 다원주의, 탈식민주의, 다문화주의인데, 지젝은 이러한 경향들이 일견 다양성이라는 가치를 존중하는 것 같지만 사실 신(新)보수 세력의 폭력적인 근본주의와 짝을 이루어 작동되는 것들이라고 비판한다. 상대주의가 극단에 이르면 다시 근본주의로 회귀하는 것을 우리는 미국 부시 정권의 근본주의가 포스트모더니즘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것을 통해 이미 경험하지 않았냐는 것이다.

또한 이병창 교수는 오늘날 각광 받는 ‘가상현실’이란 것도 비활성적인 것을 통해 물질적 실체를 박탈당한 현실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 뿐이며, 자유주의자들이 말하는 ‘관용’이란 것도 타자가 근본주의적이지 않을 때에만 베풀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진짜 타자, 향락의 실체 있는 무게를 지닌 타자에게는 절대 불관용”적인 것이 오늘날의 포스트모던적 경향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화연구’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작업들도 “뭔가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 진짜로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일을 하는 것”일 뿐이며, “계속 무엇인가가 변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어서”, 결국 현존하는 세계를 그대로 유지하는 데 기여할 뿐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지젝은 성과 인종의 차별, 제3세계의 착취 등 ‘정치적으로 올바른 열정’을 통해 ‘급진주의’의 이름으로 일어나는 일련의 소수자 운동들도 그 “급진적 변화의 필요성(만)을 가능한 한 많이 이야기하여 실제로는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도록” 하는데 기여한다고 비판한다.

이렇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진리’를 거부하는 것에서 출발하지만, 레닌주의는 사회를 가르는 분열과 모순을 정확히 이해하는 진리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이다. “탈근대 다문화주의적인 서사의 권리에 대한 레닌주의의 응답은 부끄러움 없이 진리로 나아갈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어야 한다. …… 우리는 정치가 사람들을 갈라놓는다든가 사회 조직에 분열을 가져온다는 상투적인 말에 대항하여 유일하게 실제적인 보편성은 정치적 보편성일 뿐이라고 주장해야 한다.” “진리 과정의 보편성은 오직 사회조직의 한 가운데를 그렇게 가르는 모습, 근본적으로 나누어버리는 모습으로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다.”

 

진리와 폭력

이병창 교수는 일반적인 오해와 달리 레닌의 ‘경험적 유물론’은 ‘의식 외부의 실재’가 아니라, ‘실재 외부의 의식’에 관한 강조라고 설명했다. 완전하게 구성된 세계가 비물질적인 의식을 예외로 하여 나타난다면, “세계 밖에서 모든 것을 포괄해서 인식하는 초월적 존재[神]”가 바로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레닌의 유물론은 객관적 실재를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사유가 이미 내부에서 균열되어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다. 신의 존재가 세계의 존재론적 일관성을 보장하는 외적인 한계라면, “진정한 무신론은 신의 부재가 아니라 세계가 내적으로 균열되어 있음 즉, 세계의 부재”를 인식하는 것이 된다. 지젝은 이렇게 ‘정신적 외상을 입히는 외적인 만남에서 진리가 출현한다’고 말한다. 욕망의 근원인 대타자가 존재하지 않음을 경험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경험적 유물론의 입장은 “내적인 균열을 통해 외부의 경험”을 만나는 것에 대한 ‘징후적 전치’라는 것이다.

레닌주의를 이렇게 독해한 지젝에게 ‘진리’란 이미 당파적인 것이다. 진리는 당파적 욕망으로부터 만날 수 있으며, 그것은 균열 속에서 외적인 마주침으로부터 떠오른다. 보편적 진리와 당파성이 상호배타적이지 않고 서로의 조건이 된다면 당은 계급의식의 대변자가 될 수 있다. “구체적 상황의 보편적 진리는 오직 철저하게 당파적인 입장에서만 표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는 그 정의상에서부터, 어느 한 편에 치우진 것이다.

또한 그 진리의 인식에서 중요한 것은 내용이 아니라 ‘형식’이다. 지젝은 형식은 내용에 대하여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를 구체화하는 원리 자체라고 말한다. 그래서 집단적 주체로서의 ‘당’은 이 형식의 한 예가 될 수 있으며, 여기서 당은 진리의 내용이나 실증적 지식의 권위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식에 의한 권위만을 가지고 있다. 이병창 교수는 지젝에게 있어 이 형식은 일종의 “해방적 잠재력이 분출되는 ‘리듬’이며, 진리는 이 형식으로부터 풀어져 나온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당’이 진리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은 ‘나 자신을 우리 안에 두겠다’는 동의 즉, ‘집단적 주체성’의 형식 자체에서 나온다. “레닌은 당을 역사적 개입의 정치적 형식으로 규정하고 마르크스를 형식화했다. 사도 바울이 그리스도를 형식화하고, 라캉이 프로이트를 형식화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끝으로 이병창 교수는 지젝이 레닌에게서 주목한 ‘해방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자기 구타’라는 개념을 가져왔다. 그것은 “팔을 뻗어 진짜 타자와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며, 다른 사람을 배제하는 “타자의 고난과 고통에 눈을 가린 상태를 부수”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우리의 정체성을 부수는 것이기에 폭력적이며, 내면에 있는 종속과 집착에 대한 거리두기이며 동시에 그것을 “두들겨 드러내는 것”이다. “권력 기제에 대한 종속 자체가 잉여 향유를 만들어낸다면, 종속에 대한 진정한 자각은 바로 우리가 거기에서 끌어내는 외설적인 과잉 쾌락을” 인식하는 것이다. 상징적 법의 세계 너머에 있는 외설적인 아버지처럼 국가나 민족, 자본이 포함하고 있는 과잉 쾌락은 해방적 잠재력을 풀어놓는 일련의 정치적 행위들에 의해 폭로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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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젝을 끝으로 16회에 걸친 마르크스주의 사상사의 모든 강의가 끝이 났습니다. 무엇보다 피곤한 저녁시간에 진지한 태도로 경청하고 날카로운 질문을 던져주시던 시민 수강생님들께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로 묶일 수 있는 많은 사상가들의 번뇌와 이론을 쉽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셨던 강사 선생님들의 노고에도 감사드립니다. 끝으로 그 명강의를 제대로 담아내기엔 턱없이 부족했던 이 강좌 후기를 읽어주시는 프레시안 독자 여러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골방에서 홀로 타오르다 금방 꺼지고 말 등불의 철학이 아니라, 막막한 이 시대를 멀리 밝힐 들불 같은 생각의 나눔을 지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 강좌에 많은 참가와 성원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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