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클라우&무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선언[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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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클라우& 무페 –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선언[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⑬

 

강사 : 박영욱(숙명여대 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마르크스주의에서 정치적 기획의 부재와 헤게모니 전략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열 세 번째 시간은 숙명여대 박영욱 교수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대표작인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Hegemony and Socialist Strategy)》의 내용을 주로 소개하는 형식으로 강의를 진행했다. 이 책은 국내에서 1990년에 《사회변혁과 헤게모니》라는 제목으로 초역된 이후 20여년만에 최근 다시 번역되어 출간된 현대의 고전이자 문제작이다.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는 교조화되고 경직된 마르크스주의의 주류 흐름을 비판하고 좌파의 새로운 정치이론과 사회이론을 모색한 1980년대 이후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새로운 경향을 일컫는다. 이 책에서 라클라우와 무페는 ‘계급성’과 ‘경제결정론’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를 환원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안토니오 그람시의 ‘헤게모니’ 개념을 재해석하여 다원화된 정치적 실천의 중요성을 제시했다.

그런데 알튀세르의 사상을 다루었던 강좌에서처럼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논의를 이해할 때도 우리는 과연 무엇이 맑스주의에서 핵심적인 요소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자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기존의 마르크스주의가 정통성을 강조하며 본질주의적 환원주의적 결정주의적 경향으로 흐르던 것을 해체하려는 이들의 시도는, ‘토대와 상부’라는 사회구조에 관한 고정된 인식과 노동자 정체성을 중심으로 변혁적 주체를 설정하려는 관점을 비판한다. 이러한 시도는 이론적 정합성을 높이려는 의도일 뿐만 아니라 소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표방한 체제 혹은 진영 내부에서 기득권을 유지하고 있는 세력의 권위와 독점에 대한 도전이기도 했다. 그래서 라클라우와 무페의 이 책은 현실 사회주의 체제가 사라진 후에도 좌파 진영으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았지만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새로운 실천이론을 모색하던 당시에 다양한 논의를 이끌어내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라클라우와 무페/ 출처: www.nomadist.org

그람시의《옥중수고》를 연구했던 무페는 이데올로기 담론 분석연구를 진행했던 라클라우와의 협동 연구로, 우선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쟁점화된 정치적 기획의 실패 사례들을 분석하면서 그람시를 분기점으로 삼아 마르크스주의적 해방에서 결여되어 있는 정치적 전략을 만들어가려 했다. 그들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의 위기’는 마르크스주의 자체에 이미 내장되어 있었던 것으로, 본질주의 담론에서 비롯된 헤게모니 지형의 틈새를 메우기 위해 룩셈부르크, 카우츠기, 베른슈타인, 혁명적 생디칼리즘 등은 이 위기에 대한 대응 전략을 세웠지만 그들의 노력은 역부족이었다. 특히 파시즘의 승리로 끝나 버린 1930년대 서유럽에서의 가장 결정적인 실패는 참혹한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그람시는 “레닌주의의 계급동맹 개념을 극복하는 헤게모니적 결합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하나의 분기점이 되었다. 라클라우와 무페는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을 재해석하여 부르주아가 만들어 놓은 기존의 지배 질서에 적대적인 새로운 대항 헤게모니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혁명적 주체가 고정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혁명이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며, 자본주의의 역사적 운명이 다한 다음에 필연적으로 사회주의적 단계가 도래한다고 확신할 수도 없다면, 그리고 사회주의 사회에서 과연 지배와 부자유가 사라질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면, “언제나 중요한 것은 중심부 권력을 탈취하는 것 자체가 아니라 다양한 세력들을 ‘헤게모니적 접합’을 통해 아우를 수 있는 정치적 역량”이라는 것이다.

 

급진 민주주의 전략과 오늘날의 세계

라클라우와 무페가 개진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의 두 번째 문제제기는 ‘급진 민주주의’의 실천을 통해 그람시의 헤게모니 이론에 결핍된 전략적인 방안들을 구상하려 했다는 점에 있다. 좌파들이 자유민주주의적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기보다는 이것을 더욱 급진적이고 실천적인 기획으로 재생산하여 민주주의와 다원주의를 심화시키고 확장하는 전략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박영욱 교수는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구상한 “민주주의적 관계는 차별이 아닌, 차이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노동자 정체성 이외에 개인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을 배제하는 것이야말로 관념적인 태도이고 이데올로기적”이라는 것이다. 뜻을 함께 하는 동지들이 단일한 연대체를 이루어 혁명적인 상황까지 전진한다는 생각 또한 이제 환상일 뿐이다. 또한 “‘노동자’라는 단일한 카테고리가 선험적으로 홀로 존재하는 것도 아닌데 그것만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의 부분에서만 등가적인 일시적 연대만을 이룰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물음은 대항 헤게모니 확보를 위한 정치적 실천의 주체가 누구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급진 민주주의에 대한 상상과 실천은 무엇을 어떻게 극복하고 어디를 지향해야 하느냐는 물음이 된다. 라클라우와 무페가 말한 ‘총체성’은 대중들의 서로 다른 ‘차이’를 제거하지 않는 연대 전선을 통해 형성되는 것이며, 늘 유동적이고 현실에 밀착한 형태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헤게모니 전략과 급진 민주주의의 정치실천에서 좌파들이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자본주의 체제에서 가장 근본적인 갈등 조건으로 전제되어 있는 적대적 관점의 실천성이다. ‘적대’ 개념에 근거한 갈등과 차별의 요소가 다원적 민주주의와 헤게모니 정치전략을 추동시키는 원리라는 것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가 득세하던 지난 시기 동안 좌파는 다원주의와 민주주의적 절차의 중요성을 수용하게 되었지만, “그것이 현존 헤게모니 질서를 전환하려는 시도를 포기함을 의미한다는 잘못된 신념을 동반했다”는 것이 라클라우와 무페의 지적이다.

1970년대말 이후 신자유주의가 만들어 놓은 양극화로 황폐해져가는 이 세계에서 약삭빠른 기득권층은 이해관계에 따라 여전히 이합집산을 반복하고 금융자본은 먹잇감을 찾아 전 세계를 휘젓고 다닌다. 그리고 ‘적(敵)’이 사라진 시대, ‘전선(戰線)’이 애매해진 시대에서 구태의연한 진보 진영의 한 쪽은 무능하게 자멸하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우리 시대에 여전히 유효한 의미를 가질 수 있는가는 이러한 우리 시대의 문제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토론하고 대응전략을 실천할 수 있는 우리의 역량에 달려 있다.

한편 이번 강의가 수강생들에게 마르크스주의의 쇄신 혹은 해체를 주창하며 내놓은 좌파의 새로운 이론적 경향에 대한 밑그림을 그릴 수 있을 만큼 적절한 소개 시간이 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사변적이고 난해하기로 소문난 이 책(특히 3장)과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여 ‘포스트 마르크스주의’ 논의가 진보담론에 주었던 충격과 신선함이 어떤 것이었으며, 세상에 나온지 27년이 지난 이 책의 자극이 오늘날 어떤 의미로 다가올 수 있는지 친절하게 풀어서 설명해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든다.

총 16강으로 기획되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에는 이제 가라타니 고진, 안토니오 네그리, 슬라보예 지젝이라는 세 번의 ‘만남’이 남아 있다. 그들이 품고 있는 새로운 문제의식을 간략하게나마 곱씹어보며, 우리는 역사의 향배에 대한 회의를 떨쳐내고 진보의 미래에 대해 어떠한 전망과 대결의지를 가질 수 있을까. 그런데 과연 그 숱한 이론적 경향과 철학적 담론들이 세상을 바꾸는 데 얼마나 기여했을지에 대해 의문을 품을 때 쯤, “비판의 무기는 무기의 비판을 대신할 수 없다. 물질적 힘은 물질적 힘에 의해 전복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론 또한 대중을 사로잡자마자 물질적 힘으로 된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그런 점에서 이번 강좌를 통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이 추동해 온 이 근대세계를 분석하고 비판해온 거대한 이론적?실천적 투쟁의 물결들을 살펴보며 마지막까지 기억해야 될 지점이 있다. 제1강에서 서유석 교수가 강조했듯이 마르크스주의에서 중요한 것은 정교하게 다듬어진 어떤 ‘이론’으로의 편향이나, 단순한 논리로 고난의 상황을 돌파하려는 맹목적 ‘실천’ 자체가 아니라, 적대와 차별이 만연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여 이론적 실천, 지속가능한 이론을 모색해나가는 과학적인 태도가 아닐까? 일련의 사태를 냉철하게 분석하고 의미를 도출하여 섣부른 기대나 실망을 품지 않고 우리의 다음 행동을 결정하는 것, 늘 출발점은 거기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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