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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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기-세계체제론[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⑫

 

강사 : 김성우(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시각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살펴보자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강좌열두번 째 시간에는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의 안내로 근대 자본주의 체제를 새로운 시각에서 분석하는 ‘세계체제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김성우 연구소장은 우리가 시사 문제들을 소비하는 방식을 지적하고, 월러스틴의 관점을 통해 무엇을 새롭게 볼 수 있을지 자문하며 강의를 시작했다. 한국사회에서는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킬 적당히 자극적인 ‘사건’이 터지면 모든 매체의 관심사가 한 쪽으로 쏠리고 사람들은 그 사건의 추이에만 관심을 가지는 일회적이고 단편적인 경향과, 그 사건의 의미를 다각도로 고려하기 보다는 그 사건이 끼칠 국가적 영향에만 주로 관심을 쏟는 내향성이 있다는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그런 단선적인 상황 분석과 아집에서 벗어나기 위해 세계사적 시각이 요구된다고 말했다. “이러한 에피소드들을 나열하는 역사가 아니라, 장기적이고 대규모의 관점에서 사건들의 의미를 탐색하자”는 것이 오늘 살펴볼 이매뉴얼 월러스틴(Immanuel Maurice Wallerstein, 1930~)의 제안이라는 것이다. 이른바 ‘사태의 소비’가 아니라 ‘사태의 통찰’이 가능하기 위한 총체적인 시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그 분석의 ‘틀’을 어떻게 설정해야 할까. 미국의 비판적인 사회학자이자 정치경제학자인 월러스틴이 주창한 독창적인 이론인 ‘세계체제론’에서는 “세계에서 벌어지는 현상들을 정치학, 경제학, 사회 구조, 문화라는 상자들로 나누어 분석”하거나, “국가들의 외적인 관계인 국제적인 틀로 이해하지 않고 장기간과 대규모의 시각에서” 세계를 분석하려고 한다.

 

사회과학의 기존 틀에서 벗어나자

월러스틴에 따르면 세계를 분석하려는 다양한 분과학문들이 다루는 체계성은 “실재가 아니라 상상적인 산물에 불과하다.” “현상들을 전문화하여 분석하는 것은 철학과 단절”되어 발전한 19세기 사회과학의 특징적인 한계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각각의 학문들이 연구하는 대상 세계의 현실은 복잡하게 얽혀 있으며 각 부문들이 어우러져 총체적으로 작동하는 거대한 시스템이다. “그래서 다학문적인 방식이 아니라 일학문적인(unidisciplinary) 접근이 필요”하며, 여기에 적합한 것이 “역사적 사회과학으로서의 세계체제 분석”이라는 것이다.

▲ 김성우 兀人고전학당연구소장 ⓒ프레시안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이 크게 세 영역에서 연구를 진행해왔다고 소개했다. 그것은 ‘근대 세계체제의 역사적 발달’,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현대적인 위기’, ‘근대 학문체계 분석을 중심으로 한 지식의 구조’가 그것이다. 그러한 작업들에는 “초역사적인 불변의 구조와 법칙을 탐구하고 정립”하려는 ‘형식주의적 사회과학’과 “사건 중심의 에피소드를 기술하는” ‘실증주의적 역사학’의 이분법에서 벗어나서, “일직선적인 발전 또는 진보 개념을 비판”하는 월러스틴의 일관된 문제의식이 깔려 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그의 세계체제론이 “구조를 역사로부터 파악하고 특히 자본주의적 세계경제의 역사적인 생성과 팽창 그리고 위기와 소멸을 추적”하는 역사적 사회과학이라는 설명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월러스틴은 큰 안목으로 역사를 바라보려는 이러한 의도를 어떻게 갖게 되었을까? 월러스틴은 애초에 미국 정치의 특수성을 밝히는 것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는 머지않아 미국 정치에서 ‘인종’이란 변수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인종 문제에 대한 관심은 그를 아프리카 지역연구에 매진하게 만들었고 곧 현재의 아프리카가 처한 조건은 유럽이 주도한 근대 세계경제 체제의 결과물이라는 생각을 갖게 된다. 그런 과정을 통해 월러스틴은 ‘세계체제(World system)’라는 분석틀을 선보이게 되었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체제’란 분석을 위한 관점이자 동시에 분석의 대상이기도 하다. 물론 그의 문제의식은 근대세계를 구성한 가장 근본적인 존재양식인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출현과 확장 그리고 사멸에 대한 탐구에 집중되어 있다.

 

자본주의와 자유주의는 몰락의 분기점에 근접하고 있다

월러스틴은 1989년 현실 공산주의 체제의 몰락에 대한 해석의 문제에서 기존의 일반적인 시각과는 전혀 다른 견해를 내놓았다. “1980년대말 베를린 장벽의 붕괴와 연이은 구소련의 해체는 자유주의의 궁극적인 승리”가 아니라, “오히려 이 사건들은 (미국이 헤게모니를 가진) 자유주의가 붕괴되고 ‘자유주의 이후’의 세계로 확실히 들어섰다는 사실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월러스틴에 따르면 근대 세계를 추동해 온 거대한 이데올로기들 중 하나인 ‘발전주의’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이며, “맑스주의가 아니라 레닌주의적 발전주의의 몰락”일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는 더 거슬러 올라가 68혁명도 근대적 세계체제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중도 자유주의와 복지 개념의 몰락을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1945년에서 1968년 사이에 진보적인 세력이 집권한 많은 국가들의 실패에서 보듯이, 68혁명을 ‘자유주의적 지구 문화에 대한 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든 옳은 사람들이 권력을 잡기만 하면 세상이 나아질 것이라는 믿음, 그들이 체제를 의미심장할 정도로 개혁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 의심받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유주의 이후’를 염두에 두고 새로운 세계경제 체제에 대한 전망을 시도하는 월러스틴은 “사실 경제는 정치적 결정의 산물”이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자유주의라는 이념은 인권의 정당성이나 민족의 자결권 같은 보편적 권리를 주장하지만, 현실에서 그것이 작동될 때는 사실 자유주의는 이 “권리들의 완전한 실행”을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정치체제는 자본주의 체제의 영속적인 지속을 위해 긴밀히 결합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권과 민족의 권리가 모두에게 동등하게 적용된다면, 항상 그래 왔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그러할 이 불평등한 자본주의 세계경제는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유주의의 맹점이 드러나면 이 체제 속에서 지속적인 이익을 얻을 수 없는 대다수 계급들에게 이 시스템의 유지가 정당성을 갖지 못하게 될 것은 자명하다.

또한 월러스틴에 따르면 “자유시장은 역사적으로 존재한 적이 없다.” 디지털 문명의 발전과 함께 폭발적으로 성장했던 기업들에서 보듯이 늘 자본주의에서 막대한 이윤을 가능케 하는, 자본축적의 핵심은 ‘독점’이라는 것이다. 또한 경쟁이 치열할수록 이윤은 떨어지기 때문에 독점자본은 그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기 마련이고, 그 독점체제의 유지를 위해 ‘국가’라는 이름의 법적 체제와 의회권력은 앞장서서 자본가들을 비호하기도 한다. 결국 국가나 시민사회와 분리된 ‘자유시장’이라는 개념은 오늘날 더욱 공허해짐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의 신봉자들은 아직도 ‘대기업이 망하면 나라도 망한다.’, ‘규제를 더 풀어야 하고 아직은 나눠줄 때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런데 김성우 소장은 “어쩌면 1980년대말의 세계변동은 1970년대말 ‘신자유주의 프로그램’의 태동으로 인해 10여년 지연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설명했다. 즉, 신자유주의를 자본주의의 주기적인 팽창과 수축 과정 속에서 자유주의 이념의 돌연변이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윤율 감소를 막기 위해 인건비, 생산원가, 세금, 관세는 낮추고 자본의 권리는 무제한적으로 확장하며, 치명적인 위기가 발생해도 대기업은 공적자금을 통해 손실을 보장 받을 수 있는 신자유주의라는 이 ‘유연한 괴물’은 30년 동안 우리의 ‘상식’을 바꾸어 놓았다.

결국 신자유주의라는 체제도 1970년대 이후 세계경제의 침체 속에서 헤게모니를 점차 잃어가고 있던 미국의 보수주의적 자본가들이 “현실 사회주의 몰락과 정보기술 혁명을 빌미로 기존의 세계경제 헤게모니에 도전적인 국민국가들의 보호주의를 타파하여 인건비와 관세를 낮추려는 일시적인 몸부림에 불과”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오늘날의 자유무역협정(FTA)도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들’ 중 하나로서 자본주의 세계경제 자체에 내재한 오래된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할 것이다.

김성우 소장은 월러스틴의 말을 빌어 “결국 이러한 반동적인 세계화 전략으로는 이 구조적 위기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없기 때문에 이제 근대 세계체제는 조만간 분기점에 도달할 것”이라고 말했다. 물론 그 다가올 분기점에 대비하기 위해 우리가 모색해야 할 것은 “모든 모순이 해결된 몰역사적인 유토피아”가 아니라, “역사적인 대안체제로서 불평등의 해소라는 현실적으로 가능한 유토피아”라는 것이다. 그래서 월러스틴은 이렇게 말한다. “핵심의 자유노동과 주변의 강제노동 간의 조화는 자본주의의 본질이며 …… 노동이 모든 곳에서 자유로울 때, 사회주의가 될 것입니다.” 물론 그 도래하는 사회주의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종말과 함께 새롭게 구성되어야 할 새로운 체제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월러스틴은 “진정한 맑스주의, 정통 맑스주의를 찾는 것은 신화”를 현실 속에서 찾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김 소장의 말처럼, 이념이 아니라 역사의 맥락적 분석에서 출발하는 “월러스틴은 어느 편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말을 하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 ‘인기 없는’ 학자일지도 모른다.”

결국 월러스틴을 따라 자본주의적 세계경제를 이해하자면, 오늘날의 세계경제란 기나긴 16세기(1450년~1640년)에 유럽에서 태동된 자본주의가 19세기 말 그 경계와 지배력을 전지구적 차원으로 확장시킨 결과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그 체제의 탄생 이후에도 1789년 프랑스대혁명, 1968년 세계 혁명이라는 큰 역사적 전환점을 거치며 끊임없이 자신의 작동방식을 변화시켜 왔다. 그보다 작은 지점들인 1968년 세계혁명, 1973년 오일쇼크, 그리고 2008년 가을부터 시작된 미국발 금융 위기 등도 세계경제의 역사적 변동을 설명하는 하나의 ‘국면’으로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여기에 더해 우리나라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1876년 강화도조약과 개항과 이후의 식민지화, 1945년 광복 이후 민족분단과 전쟁, 1960년 4.19민주혁명, 1961년 5.16군사쿠데타, 1987년 민주화운동, 1997년 외환위기와 IMF체제로의 편입 등도 모두 우리의 ‘지금-여기’ 현재를 끊임없이 재구성할 때 참고해야 할 변곡점들이 된다.

 

세계체제론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는가

김성우 소장도 지적했듯이 우리가 ‘세계화’라고 부르던 것은 곧 신자유주의 체제로의 편입이었고, ‘글로벌화’라고 부르던 것이 작동하는 방식은 기실 영어만능주의에 길들여지고 미국에 더욱 종속되어왔던 과정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여전히 우리는 미국 시각, 중국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다”는 김 소장의 말은 섬뜩하게 들리기까지 했다. ‘앞으로 나의 재산가치는 줄어들까’, ‘향후 우리나라의 경제 발전을 가로 막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근시안적 시각을 벗어던지고, “조금 더 넓게, 깊이 있게, 다르게 보고 느끼”려는 노력을 통해 결국 우리의 시각을 확장하는 길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닐까.

물론 자신의 조건을 망각하고 주류와 핵심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아니라 월러스틴의 말처럼 “더 주변부적인 생산과정 참여자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이 우선이리라. 예를 들면, 개별 노동자, 그것도 대기업 정규직 남성 노동자 중심이 아니라, 여성, 문화, 민족, 종교, 세대, 성정체성 등 다층적으로 구성된 ‘계급’ 관점을 통해 세계와 사람들을 바라보는 방식이 그것이다. 그 새로운 창을 통해 보면, 소수자와 약자가 겪고 있는 불평등과 부자유는 얼마나 더 섬세하게 인식될까? 결국 세계체제라는 거시적 관점을 통해 궁극적으로 우리가 포착해야 할 것은 ‘저기 사람이 저렇게 살고 있고 저것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하자’라는 미시적 관점이 아닐까?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보자면, 우리가 갖고 있는 신념체계와 경험에 대한 신뢰에서 나오는 편견과 아집은 얼마나 뿌리 깊은가. 김 소장은 “자신이 떠올리고 있는 생각과 하고 있는 일에 은폐된 ‘전제’를 검토하지 않는 것이 바로 교조주의이자 근본주의”라고 말했다. 그런 면에서 “민족이라는 신앙과 계급이라는 신앙의 대립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진보’의 미래에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요즘”에, 그리고 “신자유주의의 폐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1대 99(또는 20대 80의 사회)의 사회에서” 김성우 소장은 역사의 반복과 아이러니가 변증법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성찰해보자고 제안했다. 물론 그 역사의 반복은 맑스의 말처럼 “처음에는 비극으로, 나중에는 희극으로” 전개되기 일쑤이지만 말이다. 더불어 그는 강의 말미에 수강생들이 월러스틴의 책을 직접 읽고 보다 넓은 시야로 세상의 문제들을 구조적으로 인식해보자고 주문했다. 한편 프레시안에서도 정식으로 원고료를 지불한 월러스틴의 따끈따근한 칼럼들이 번역?게재되고 있으니 독자 여러분들도 쉽게 국제 문제에 대한 그의 깊이 있는 시각을 접해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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