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의 가능성과 세계공화국[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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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라타니 고진 – 마르크스의 가능성과 세계공화국[마르크스주의 사상사]-⑭

 

강사 : 이정은 연세대학교 외래교수
후기 : 조배준(한국철학사상연구회 회원)

 

자본주의? 국가(State)=네이션(Nation)=자본(Capital)의 트라이앵글

한국철학사상연구회와 프레시안의 공동기획으로 진행되는 마르크스주의 사상사 강좌 열 네 번째 시간에는 일본의 문예비평가이자 사상가인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 1941~)을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의 소개로 만나보았다. 고진은 이른바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1960년대 초에 ‘일미안전보장조약 개정’에 반대하는 운동을 벌이면서 ‘국가(state)’와 ‘네이션(nation)’의 결합과 괴리를 고민했었다. 그는 그렇게 젊은 시절에 관심을 가졌던 국가 권력과 국가-자본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끊임없이 탐구하면서,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는 자본=네이션=국가라는 결합체”로 존재한다고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을 견지해 왔다. 또한 고진은 특히 마르크스를 윤리적으로, 그리고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진행해왔는데, 그가 생각하는 참다운 문학비평은 소설이나 시에 대해 논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마르크스를 읽는 것, 그것도 <자본론>을 읽는 것 … 그것이 문학비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정은 연세대 외래교수/ 사진: 조배준 한철연 회원

 

그 출발점은 바로 그의 생각에 보편타당한 텍스트인 마르크스의을 일본의 안보투쟁 세대로서 견지했던 문제의식을 갖고 읽는 것이었다. 그래서 고진은을 윤리(학)적으로 독해하려는 구상이 ‘새로운 보편적 인식’이라고 생각했으며, 이 구상의 돌파구를 서로 이질적인 것으로 보이는 “마르크스와 칸트를 연결하는 방향에서” 찾으려했다. 고진의 말처럼 “칸트도 코스모폴리턴으로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보편적 인식 또는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마르크스를 칸트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일견 “자연스러워 보인다.”

이와 더불어 고진이 ‘보편적 인식’의 다른 측면으로 제시하는 것은 ‘역사의 반복’이다. 역사가 주기적으로 반복하고 세계사적으로도 그러하다는 시각은 앞서 말한 ‘보편적 인식’과 ‘보편타당성’을 정당화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 반복되는 것은 사건이나 ‘내용’이 아니라, 그 반복되는 구조나 ‘형식’이다. 이러한 고진에게 있어서 ‘보편적 인식’과 ‘역사의 반복’이 “하나로 녹아 있음을 보여주는 텍스트가 마르크스의 책들”이다. 고진은 두 책, 《자본론》과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반복적으로 이루어지는 역사의 강박을 설명한다. 즉, 앞의 책은 “‘경제’를 ‘표상(representation) 문제’로 삼아서 근대 경제학을 ‘비판’한 것이고, 뒤의 책은 ‘정치’를 ‘표상 문제’로 삼아서 근대 정치학을 ‘비판’”했다는 것이다.

즉, 고진이 《자본론》을 읽고 얻은 통찰은 경제의 호황과 불황이라는 경기순환(불황-호황-공황-불황), 그 역사의 강박을 통해 “자본의 축적운동과 자기증식은 계속된다”는 것이다. 또한 그는《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을 읽고서는 정치의 영역에서 대의제가 지닌 불완전함 때문에 의회제도가 침체되고, 절대권력이 붕괴되고 다시 절대권력이 회귀하는 반복적 강박이 일어난다는 것을 확인했다. 고진은 여기서 경제적인 면에서 반복강박을 일으키는 ‘구멍’으로 ‘화폐’를 들면서, “《자본론》에서 마르크스가 해명한 것은 ‘경제적 하부구조’라기 보다는 화폐에 의해 조직되어 있는 환상 시스템 혹은 경제적 하부구조를 조직하고 은폐하는 상부구조, 바꿔 말해 표상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이정은 교수는 “물론 그 시스템을 발견하는 과정이 자본주의 비판으로 들어가는 길”이라고 설명했다. 이것과 유사하게 정치에서 “표상=대표 시스템이 가진 ‘구멍’은 대표 시스템이 죽이고 추방했던 ‘왕’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의회제를 표방하면서 동시에 죽이고 추방했던 ‘왕’을 의회제를 표방하는 사람들이 다시 ‘황제’로 되살려낸다”는 것이다.

결국 그 ‘화폐’와 ‘왕’이라는 구멍들은 보이지 않는 것이면서도 아주 강력하게 실재하면서, “억압된 것의 회귀로서 반복”되며, 자본주의와 대의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존재의 무(無)”로 기능한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고진이 말하려는 것은 마르크스의 생각을 이어 받은 그의 말처럼 “‘대표하는 것’과 ‘대표되는 것’에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을 수 없다”는 통찰이다. 또한 마르크스가 강조했던 것도 “정당이나 그들의 담론은 실제 (그들이 대변한다고 말하는) 계급들로부터 독립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대표하는 자’와 ‘대표된 자’의 관계가 본래적으로 자의적이라고 새삼스럽게 강조하면, 화폐와 대의제에 숨어 있는 그 물신성(物神性)의 실체를 인식하게 되면, 자본으로 인해 숨이 조여 오는 오늘날의 정치와 공동체는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 ‘생산자협동조합’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본주의 사회와 함께 시작된 근대의 국민국가는 국가와 민족의 조합을 통해 실현되었는데, 고진은 “자본, 국가, 네이션은 독자적 영역이며 동시에 상생하는 관계” 속에 있다고 생각했다. 즉, 일반적 인식과 달리 자본을 추동하는 것은 늘 국가였으며, 국가가 자본보다 더 선행적이고 더 독자적이라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고진은 자본주의 체제가 인간의 부자유와 불평등을 가속화시키는 문제를 ‘자본=네이션=국가’의 ‘바깥’을 보는 상상력을 가진 새로운 정치공동체의 구상으로 극복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제안하는 것은 ‘어소시에이션(Association)’이라는 리버테리언 사회주의적 모델이다.

고진이 말하는 어소시에이션이즘(associationism)은 “상품교환 원리가 존재하는 도시적 공간에서 국가나 공동체의 구속을 거부함과 동시에 공동체에 있던 ‘호수성’을 고차원적으로 회복하려는 운동”이다. 여기서 호수성(互酬性)이란 호혜성(互惠性)으로 번역될 수도 있는데, “개인이나 집단 사이에서 증여를 받은 쪽이 준 쪽에 뭔가를 갚음[酬]으로써, 상호관계가 갱신, 지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가족관계에서의 부모와 자식, 형제 사이에 나타나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청중들이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해 어리둥절할 때쯤, 이정은 교수는 이것의 그 구체적 형태로 아나키즘적 공동체, 평의회 코뮤니즘, ‘파리꼬뮌’에서의 꼬뮌, 봉건제 말기에 형성된 상업 중심의 자유도시, 한나 아렌트가 강조했던 정치적 행위자들의 연대체인 평의회 등에서도 비슷한 맥락이 발견된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진이 말했던 어소시에이션은 “그 어느 것들보다도 칸트의 생산자협동조합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결국 고진은 이 어소시에이션에 대한 구상을 통해 정체와 경제가 분리되지 않는 소규모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으며, 경제적 결사체에서 출발하여 탈자본주의적 협동조합, 나아가 코뮌(commune)의 형태가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던 것이다.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의 가능성을 설명하기 위해 다시 자본, 네이션, 국가라는 세 항의 역할과 이들의 관계를 부각시킨다. 여기에서 그가 독창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교환양식’을 통한 새로운 사회의 구성인데, 이것은 “호수(증여와 답례), 재분배(약탈과 분배), 상품교환(화폐와 상품)으로 나눌 수 있다.”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는 청년기에는 ‘교통’이라는 개념을 통해 ‘교환양식’의 밑그림을 드러냈지만, 차후에 그는 새로운 사회구성체의 원동력을 교환양식이 아닌 생산력과 생산관계가 결합한 생산양식’으로 축소했다는 것이다. 이정은 교수는 이 교환양식이 인류 역사에서 지속적으로 나타나지만 자본주의 시기에 전면화된 것은 그것의 한 형태인 상품교환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이것을 원활하게 작동시키기 위해 도입된 것이 자본주의적 사회구성체의 독특한 산물인 자본=네이션=국가의 매듭이라는 것이다. 물론 국가도 고대부터 있었던 것이지만, 민족과 국가, 네이션과 스테이트가 하나로 합쳐진 차원의 근대의 국민국가와, 자본 활동과 연동하는 국가는 자본주의 시기에야 가능해진 것이다.

 

세계공화국 – ‘국가 바깥에서’ ‘국가를 지양하는 방법’을 생각하기

이정은 교수는 이러한 “어소시에이션을 실현하는 ‘부단한 과정’과 그것들의 네트워크 자체가 우리의 미래가 된다”고 말하며, 고진이 강조한 것은 자본이 국가를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네이션은 독립적으로 작동하는 방식이 있고, 자본주의는 소멸할 수 있지만 국가는 소멸하지 않는다는 관점이라고 설명했다. 또한 오늘날 “국가 간 경계를 해체하면서까지 확장되는 자본의 위력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이의 대립은 여전히 잔존하며, 국가문제는 국내의 노력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인식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사실이다. 그래서 고진은 새로운 공동체를 실험하고 안정되게 실현하려는 노력도 국내적인 차원을 넘어서서 “국가 대 국가의 대립으로 진행되는 국가 외적 방법이 사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국가를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으며, 자본과 국가가 그동안 형성해온 교환양식을 활용하여 국가적 차원의 대안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제시했는데, 그것이 바로 ‘세계공화국’이라는 이념이다.

이 개념은 고진이 칸트의 ‘세계시민사회’ 개념을 빌려와서 ‘세계공화국’이라는 용어로 변형하고, 그곳에서 “국가에 의한 통제나 부의 재분배”가 이루어지며 자본주의 문제를 해소해 나갈 수 있다고 보았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고진이 ‘세계공화국’의 개념으로 나아간 것은 국가 권력이 인민을 제대로 대표하고 대변하지 못하는 문제를, 자본과 지구화의 문제와 연결하여 해결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마르크스와 칸트의 조합’은 이론의 원리적인 면에서 이루어진다. ‘세계공화국’은 완성된 기획 형태의 ‘구성적 이념’이 아니라 실천적 지향으로서의 ‘규제적 이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이정은 교수는 말했다.

한편 칸트가 《실천이성 비판》에서 궁극적인 준거점으로 제시했던 “타자를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목적으로 대우하라”라는 언명도 “자본주의에서는 실현 불가능”한 것이다. 경제적 기반이 없는 빈곤 상태에 처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목적성과 인격성을 유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르크스를 통과한 칸트는 자본주의에서 발생하는 ‘계급 격차’를 해소하자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앞서 설명했듯이 경제적인 차원의 노력만으로는 어렵고 정치적 차원인 국가의 개입과 통제를 문제시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정은 교수는 “칸트가 구상했던 세계시민사회, 세계국가가 ‘정치적 차원과 경제적 차원’의 동시 작용이라고 해석할만한 여지를 남긴” 것이라면, 고진이 칸트에게서 특화시킨 것은 “경제와 맞물려 있는 정치”라고 말했다.

고진에 따르면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어소시에이션 모델을 구상했지만 경제 분석에 초점을 맞추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국가’의 자립성을 무시하고 국가를 독립된 개념으로 다루지 않게 되었다. 국가의 소멸을 위해 과도기적으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국가권력을 쟁취하여 국가의 작동방식을 바꾸자는 것이 마르크스의 생각이었다면, “고진이 보기에 마르크스의 결함은 국가사회주의나 소련식 전체주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국가의 자립성을 보지 않은 아나키즘”적 성향에 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마르크스주의의 역사에서 권력을 잡고 사회주의 혁명에 성공했던 좌파들이 “항상 민족 문제에 걸려 넘어지고 파시즘에 굴복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몸소 내셔널리즘을 칭송하게” 된 것도 이 ‘경제 중심적 아나키즘’적 요소가 작동한 결과라는 것이다. 과연 지난 세월 좌파들은 보다 철저하게 국가를 검토하지 못했던 것일까? 혁명가들은 혁명 이후에 국가가 자본을 어떻게 추동하고 통제하고 비호해야지 혁명의 정신을 훼손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보지 못한 것일까? 정말 그런 것일까? 필자는 강의를 들으면서도 계속 자문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칸트적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읽고 헤겔적 대안을 제시하다

이정은 교수의 평가를 요약하자면, 고진의 사상은 마르크스주의 역사에서 정식화된 ‘헤겔의 관념론을 거꾸로 뒤집은 마르크스’가 아니라, ‘보편타당성’을 사유하는 칸트적인 착상으로 마르크스를 새롭게 독해하여 반자본 운동의 세계사적인 전망을 새롭고 보편적으로 제시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실 고진이 “칸트에 빗대어서 제시하는 내용들을 살펴보면 상당히 헤겔적”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고진은 일본의 현대사라는 ‘특수성’ 위에서 자신만의 문제의식을 갖게 된 학자이면서도, 독일관념론의 변주를 통해 자본주의 사회구성체에서 국가와 자본이 어떻게 결탁했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할지를 사유한, ‘보편성’을 지향했던 마르크스주의 사상가이다.

필자 또한 고진을 통해서, 마르크스를 통해 볼 수 있는 현실변혁의 ‘가능성’과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제한된 ‘한계’를 동시에 추적하여 비판과 저항의 알레고리를 부단하게 사유하는 것도 마르크스주의자가 나아가야 할 길임을 볼 수 있었다. 이정은 교수가 말했듯이, “고진은 어소시에이션을 실제로 실현가능한 것이라기보다는 칸트의 ‘규제적 이념’과” 같은 것으로 보며,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본=네이션=국가를 넘어서 그 바깥을 보는 이념 또는 상상력”이 쇠퇴한 것에 대한 안타까움을 갖고 있다. 그런데 고진이 더 우려스러워 하는 것은 그 쇠퇴의 경향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추종으로 나아갔고 그것이 자본주의의 승리로 간주되기도 했다는 점이다. 2012년, 이제는 더 암울하지 않을까. “머지않아 경제위기나 공황이 찾아 올 수 있고 자본주의가 쇠락을 길을 걷게 될 것입니다”라고 경고하더라도, 사람들은 공포를 느끼기보다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무감각하고 무기력하게 반응할 뿐이다. 자본이 요구한 욕망이 아니라 내면에서 억압된 자연스러운 생명의 욕망을 긍정해보는 것, 국가와 민족이 부여한 역사적 사명을 벗어나 ‘자유로운 인간들의 민주적인 공동체’를 발칙하게 상상해보는 것, 참 어렵지만 ‘인류’의 역사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이정은 교수가 소개하는 가라타니 고진 사상의 마지막 부분은 그 ‘인류가 긴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 세 가지였다. ‘전쟁’, ‘환경 파괴’, ‘경제적 격차’가 그것인데, 고진은 선정 이유를 이 문제들에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 인간과 인간의 관계가 집약되어 있는데, 결국 이것들은 현실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문제로 귀착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국가와 자본을 통제하지 않으면, 우리는 이대로 파국의 길을 걷고 말 것입니다. 이것들은 일국 단위로 생각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 글로벌한 비국가조직이나 네트워크가 많이 만들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유효하게 기능하지 않는 것은 결국 제 국가의 방해와 만나기 때문입니다. … 각국에서 일어나는 ‘아래로부터’의 운동은 ‘위로부터’ 봉합함으로써만 단절을 면합니다. ‘아래로부터’와 ‘위로부터’의 운동의 연계에 의해 새로운 교환양식에 기초한 글로벌 커뮤니티(어소시에이션)가 서서히 실현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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